어떤 글이 살아남는가 - 우치다 다쓰루의 혼을 담는 글쓰기 강의
우치다 다쓰루 지음, 김경원 옮김 / 원더박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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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란 인간의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는 기회다. 무엇을 위해 쓰는가? 나는 왜 이 글을 써야 하는가? 그러한 일련의 문맥을 눈으로 추적하다 보면 인간이 이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그의 세계관, 가치관은 무엇인지 드러나게 되어있다. “나는 글을 쓴다. 고로 존재한다.” 인간은 글을 써서 ‘나’의 존재를 확인한다. 그렇게 글쓰기는 그런 의미에서 자기 성찰의 과정인 동시에 자기표현의 산물이다. 타인의 자기표현을 읽는 행위는 자기 성찰을 위해 생각을 수렴하는 것이라면 타인에게 제 생각을 글로 전하는 행위는 자기 정체성을 타인에게 알리고 싶어 하는 본능적인 욕구다. 거기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며 글쓴이와 독자는 더 성숙하고 생각이 깊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저런 ‘글을 잘 쓰기 위한 고민’을 하면서도 독자를 배려하지 않는, 단지 ‘날(=글), 보러 와요’라고 강요하는 그런 모습이 있다. 아무리 문장이 좋고, 논리적으로 잘 써도 강파르게 주장을 내세운다면 그 글을 읽는 독자는 소외되기 십상이다. 자기 정체성과 생각을 화려하게 보여주는 데 급급한 자화자찬 글쓰기는 볼거리가 많지만, 독자를 존중하지 않는다. 자화자찬 글쓰기를 위해 사용된 언어는 결국 ‘보여주는 언어’가 된다.

 

‘보여주는 언어’로 글을 써왔던 사람들이 우치다 다쓰루의 글쓰기 강의를 듣게 된다면 부끄러움을 참지 못해 강연장을 나오고 싶은 충동을 느낄 것이다. 우치다 다쓰루는 자화자찬 글쓰기를 선호하는 ‘잘난 놈’의 특권의식을 까발리기 때문이다. 《어떤 글이 살아남는가》(원더박스, 2018)총 14강으로 진행된 ‘창조적 글쓰기’ 강의를 정리한 책이다. 가벼운 호기심에 이 책을 읽다 보면 심기가 여간 불편해지는 게 아니다. 그렇지만 이 책은 글쓴이가 가져야 할 책임성을 되묻게 하기도 한다.

 

 

 ‘독자를 깔보는’ 시선으로 글을 쓰는 능력 따위를 아무리 익히고 배운들 살아가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진심으로 힘주어 말합니다만, 그런 능력은 아/무/런/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27쪽)

 

 

‘보여주는 언어’로 채워진 글의 주인공은 바로 “나야, 나”, 바로 글쓴이 자신이다. 우치다 다쓰루는 책의 첫머리에 간곡히 당부했다. “제발 제1강까지는 읽어주기 바랍니다. 제1강을 읽었는데도 흥미가 당기지 않는다면 책꽂이에 다시 꽂으셔도 좋습니다.” 저자는 1강에서 ‘독자를 깔보고 사랑하지 않는 글’을 혹평한다. 단지 ‘글을 정확하게 쓰는 비결’을 알고 싶거나 자화자찬 글쓰기를 고집하고 싶은 분이라면 이 책을 덮어도 좋다.

 

솔직히 고백하면, 나는 이 책을 덮을 뻔했다. 그동안 나는 ‘보여주는 언어’로 글을 써왔고, 독자를 배려하지 못한 채 ‘재미없는 글’을 양산했다. 책 뒤표지에 ‘독자를 사랑하지 않는 글쓰기는 백전백패!’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나의 글쓰기는 백전백패가 아니라 ‘천전천패(千戰千敗)’이다. 저자의 글쓰기론에 동의하지 않아서 책을 덮으려고 했던 건 아니다. 책에 나온 ‘내 이야기’, 즉 ‘독자를 사랑하지 않는 글쓰기’가 부끄러워서 책을 끝까지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독자를 사랑하는 글’이란 무엇일까. 이것이 저자가 강조하고 싶은 ‘메타 메시지’다. ‘메타 메시지’는 진정으로 독자에게 전달하고 싶은 중요한 내용을 의미한다. 저자는 ‘메타 메시지’를 ‘사활이 걸린 중요한 정보’라고 말한다. 독자가 읽기 쉬운 글은 글쓴이의 메타 메시지가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왜냐하면, 글쓴이는 경의(敬意)의 자세로 독자에게 글을 썼기 때문이다. 글쓴이가 말하는 경의의 자세는 이렇다. “부탁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꼭 들어주세요.” 독자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글쓴이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쉽게 쓴다. 앞서 나는 자화자찬 글쓰기에서 드러나는 ‘보여주는 언어’의 특징을 언급했다. 저자는 마지막 강의(제14강)에서 발언자, 즉 글쓴이의 절박함이 묻어있는 ‘바깥을 향하는 언어’야말로 ‘메타 메시지’이며 수신자(독자)에게 ‘전해지는 언어’라고 말한다. ‘바깥을 향하는 언어/전해지는 언어’의 반대말이 ‘내향적 언어/전해지지 않는 언어’이고, 내가 설명한 ‘보여주는 언어’와 비슷하다. 따라서 ‘내향적 언어/전해지지 않는 언어/보여주는 언어’는 독자에 대한 사랑이 느껴지지 않으며 글쓴이 자신을 ‘주인공’으로 돋보이게 하는 독단적인 글이다. 이런 재미없는 글은 독자들이 외면하는 ‘죽은 글’이다. 이 글에는 글쓴이의 진정한 혼이 실려 있지 않다.

 

글 자체로는 완성도가 떨어져도 글에서 독자에게 나누고자 하는 느낌이 잘 살아있다면 그거야말로 ‘독자에게 사랑받는 좋은 글’이다. 제아무리 열심히 다작(多作)해도 단 한 명의 독자도 알아보지 못하는 글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독자가 외면한 글은 글쓴이와 독자를 이어주는 다리가 되지 못한다. 글쓴이와 독자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다리가 부실하거나 부재(不在)한 글은 읽을 만할 가치가 없다. 앞으로도 독자를 존경하는 글로써 ‘살아있는’ 글을 쓰고 싶다. ‘좋은 글(나)을 쓰기 위한 고민’이 아닌 ‘독자를 사랑하는 글을 쓰기 위한 고민’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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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4 13: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5-14 16:45   좋아요 0 | URL
요즘 손이 가는대로 책을 읽다보니 시집을 읽을 기회가 없었어요. 번역서를 많이 읽고 있는 중인데요, 수식어가 긴 문장을 읽는 일이 고역입니다.. ㅎㅎㅎ

2018-05-14 14: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5-14 16:51   좋아요 0 | URL
책의 제1강과 제14강만 보면 저자의 글쓴기론을 파악할 수 있어요. 나머지는 롤랑 바르트의 에크리튀르 개념, 부르디외의 ‘구별 짓기’ 개념 같은 서구 사상을 설명하는 내용이에요.

글에 ‘좋아요’ 수가 많다고 해서 그 글이 잘 쓴 것이라고 말할 수 없고, ‘독자가 사랑하는 글’이라고 판단하기 어려워요. 글의 내용보다는 글쓴이의 성품이 마음에 들어서 그 사람이 쓴 글에만 ‘좋아요’를 누를 수 있잖아요. ^^

레삭매냐 2018-05-14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가 끊임 없이 독자에게 사랑 받기 위해서는
정말 대단한 노력을 해야 할 것 같네요...

그런데 한 번 저자에게 빠지면 쉬이 헤어나기도
쉽지 않을 듯 하네요.

물론 한 저자에게 몰입하는 것도 쉽지 않겠지만요.

cyrus 2018-05-14 16:52   좋아요 0 | URL
작가 한 사람만 지나치게 사랑하면 그 사람의 단점이 보이지 않게 돼요. 그래서 여러 작가들을 사랑하면서 책을 읽으려고 해요.. ^^;;

2018-05-14 16: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5-14 16:54   좋아요 1 | URL
우주지감 독서모임 도서 중에 ‘사진 책’이 있으면 그 날 모임에 초청하고 싶어요. ^^

2018-05-14 17: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신이 되려는 기술 - 위기의 휴머니티
게르트 레온하르트 지음, 전병근 옮김 / 틔움출판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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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악함 대부분은 악한 의도 때문이라기보다

생각하지 않는 것에서 비롯한다.

 

- 한나 아렌트 -

 

 

 

 

과학이 생활 곳곳으로 깊이 파고들수록 인공지능 기술은 점점 복잡하게 발전하고 대중과 멀어져간다. 어쩌면 사람들은 인공지능에 대해 알기를 포기함으로써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무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은 인류의 과학기술 진보가 2배 승수로 체증하는 법칙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18개월마다 칩의 집적도가 2배씩 높아진다는 무어의 법칙이 대표적이다. 그는 비단 반도체뿐 아니라 모든 과학기술이 일정 기간에 2배씩 발전해왔음을 증명해 보였다. 커즈와일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미래 인류가 특이점(singularity)에 도달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2050년에 인간의 두뇌를 능가하는 초인공지능이 가능해져 개개 인격의 한계를 초월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내다본다. 그리고 유전공학 기술을 통해 그 원리들을 자유자재로 조작할 수 있게 되면 이미 인간은 신(god)이나 다름없게 된다. 커즈와일의 전망이 가시화할 시점이 그리 멀지 않다. 기하급수적 기술 발전 법칙에 따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이른 시일 내에 특이점이 올 수 있다.

 

커즈와일을 비롯한 대부분 학자들은 ‘사람 같은 인공지능’이 불가능한 꿈이 아니며 그것도 머지않아 현실화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인간의 진화로 인해 탄생한 인공지능은 더 이상 인간과 다를 게 없다. 여기까지는 수긍이 간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특이점은 우리의 미래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사람 같은 인공지능은 과연 등장할 것인가. 스스로 배우는 인공지능이 인간성으로 통칭하는 특징을 두루 갖추고 있다면 이것과 인간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계속 허물어져 가는 상황 속에서 우리는 인간성이라고 부를 만한 인간 고유의 특징을 간직할 수 있을까. 기계와 소통하며 사는 데 점점 길들어가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한 마음을 지울 길 없다. 미래학자 게르트 레온하르트는 필요 때문에 만들어진 인공지능과 인간의 관계를 통해 인간성의 의미와 미래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던진다.

 

 

기하급수적으로 모든 것을 삼키는 기술 변화에 직면한 우리는 인간성의 우위를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까? (15쪽)

 

 

《신이 되려는 기술 : 위기의 휴머니티》 (틔움, 2018)은 이 같은 질문에 답하고자 했다. 이 책은 인공지능에 관한 내용이면서도 근본적으로는 우리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저자는 기술적 요소가 중심이 되면서 인간의 본질, 즉 안드로리즘(Andronism)이 감축되거나 폐기될 처지에 놓여있다고 주장한다. 안드로리즘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특성이며 저자는 창의성, 연민, 책임성, 공감 등이 우리가 지켜야 할 안드로리즘이라고 말한다. 기술 발전은 ‘조금씩 그러다 갑자기’ 등장하는 식으로 전개된다. 사실 기술의 발전은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을 속속 현실로 나타나게 하고 있다. 스마트폰이 세상을 지배하리라고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우리는 컴퓨터나 스마트폰이 보편화하지 않았을 때도 생활하는 데 큰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 이제는 그들의 포로 아닌 포로가 되어 그것들이 없으면 갑갑하고 생활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인간이 편해지고자 만들어 낸 문명의 이기 앞에 인간 스스로가 발목을 잡힌 것이 현실이다. 우리들의 도덕성이나 인간미는 갈수록 멀어져 가고 있다. 이는 기술 발전만을 추구했을 뿐 인간 고유의 가치를 도외시한 결과이다.

 

“기술은 윤리가 없다. 기술이 윤리를 가져서도 안 된다.”[1] 저자는 이렇게 단언한다. 기술의 발전으로 만들어진 것들을 조합한 것을 실존적 존재인 인간으로 인정하기 어렵다. 만약 ‘사람 같은 인공지능’의 인권을 인정한다면 인공지능에 따라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기계에도 인권을 인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된다면 진정한 인간의 윤리와 존엄성은 실종될 수밖에 없다. 기술자들은 기능을 구현하는 데만 집중할 뿐, 기술이 일으킬 법적 · 사회적 파장 같은 문제를 고려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저자는 인간의 영역을 침해하는 기술 발전을 경계하고 있으나 그것을 거부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는 미래는 저절로 우리 앞에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기술 발전으로 나날이 변화하는 미래에 대비하려면 우리가 가진 능력(어떤 현상에 대해 숙의하고 성찰하는 것)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인간의 정체성을 규정짓는 요소로써 인간성의 가치는 기술의 혜택과 불안이 동시에 융단폭격처럼 쏟아지는 시대에 새롭게 재고될 필요가 있다. 일찍이 원효대사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했다. 생각하기에 따라 해골에 고인 물이 맛 좋은 음료가 수도, 참을 수 없는 역겨움을 일으킬 수도 있다. 앞으로 기술이 가져다주는 혜택과 부작용을 모두 경험하면서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원효의 깨달음이 필요하다. 인공지능은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기계의 진화를 두려워하는 동안 인공지능의 성능은 더 빨리 향상되고 있다. 인간과 인공지능의 공존에 대해 정말 깊이 고뇌해야 할 때다.

 

 

 

 

[1] 《신이 되려는 기술 : 위기의 휴머니티》 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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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05-08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의 악함은 무지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고 알고 있어요. 그런데 지혜롭기란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자신도 모르게 짓는 인간의 죄라는 것도 있지요.

cyrus 2018-05-08 18:40   좋아요 0 | URL
요즘은 정말 몰라서 죄를 짓는 건지 아니면 모르는 척하면서 죄를 짓는지 분간하기 어려워요. ^^;;

2018-05-08 14: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5-08 18:41   좋아요 0 | URL
이 책에 페이스북의 ‘좋아요‘ 기능을 여러 번 비판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내용을 보면서 북플이 생각났습니다.
 
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을 다시 묻다 - 철학과 과학을 넘나드는 사고력 강의
김재인 지음 / 동아시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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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컴퓨터가 대화를 나눈다. 대화 상대편이 컴퓨터인지 진짜 인간인지 대화 당사자인 사람이 구분할 수 없다면 그 컴퓨터는 진정한 의미에서 ‘생각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인공지능을 판별하는 기준으로 알려진 튜링 테스트(Turing test)이다. 영국의 수학자 앨런 튜링“과연 기계는 생각할 수 있을까?”라는 철학적 질문을 통해 진짜 인간의 반응과 컴퓨터의 반응을 구분하려고 했다.

 

하지만 미국의 철학자 존 설 ‘중국어 방(chinese room)’ 논증을 제시하여 튜링 테스트의 한계를 지적한다. 중국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방 안에 있다. 방 안에는 중국어 문장을 만들 수 있는 컴퓨터 프로그램이 있다. 방 안에 있는 사람은 문틈으로 들어오는 중국어로 적힌 질문을 받으면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해 답변을 보낸다. 질문자는 중국어 방에 있는 사람이 중국어를 잘 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중국어 방에 있는 사람이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할 줄 안다고 해서 그가 중국어에 능숙하다고 말할 수 없다. 존 설은 ‘중국어 방’의 역설을 들면서 튜링 테스트를 통과한 컴퓨터가 생각하는 능력을 가진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어느 쪽이 옳은지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하물며 우리가 인간의 마음이나 의식을 100% 이해하는 건 아니다. 우리는 아직 스스로가 어떻게 자의식과 마음을 갖게 됐는지,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컴퓨터의 기능이 인간과 유사하다면 컴퓨터가 인간의 마음을 갖는다고 믿는다. 그리고 대부분 사람은 인간의 총체적 지적능력을 초월한 초인공지능이 어느 순간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라며 두려워한다.

 

‘철학의 위안’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두 권의 책이 있다(한 권은 고대 로마의 철학자 보이티우스가 쓴 것이고, 또 다른 한 권은 알랭 드 보통의 에세이집이다). 우리는 철학이라고 하면 어렵고 지루한 학문으로 생각한다. 과연 철학은 인공지능 시대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차분하게 해줄 수 있을까? 철학이 편안함과 정서적 위안을 주는 차(茶)가 될 수 있을까? 위안까지는 아니지만, 우리 마음속에 맴도는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과 걱정을 가라앉히는 데는 철학만 한 게 없다. 《인공지능의 시대, 인간을 다시 묻다(동아시아, 2017)인공지능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존재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시도한다. 김재인이 서울대에서 강의한 ‘컴퓨터와 마음’이라는 제목의 철학 강좌를 정리한 책이다. 저자는 질 들뢰즈 연구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책에 들뢰즈에 대한 언급(133, 174쪽)이 빠질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을 읽기 전에 지레 겁먹을 필요 없다. 이 책에서 들뢰즈는 저자의 논변을 ‘거들고 있는’ 엑스트라다. 사실 이 책에서 주연급으로 나오는 철학자는 플라톤데카르트다.

 

저자는 튜링의 오래된 질문, 즉 “과연 기계는 생각할 수 있을까?”에 대한 답변을 내놓기 위해 몸과 마음, 생각, 시간 등에 관한 주제들을 놓고 ‘사고 실험’을 시도한다. 인공지능 기술을 이해하는 것(과학적 접근법)과 철학적 성찰(인문학적 접근법)은 인공지능 시대를 바라보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창이 아니라 하나의 창구로 통하는 겹창이다. ‘마음’과 ‘의식’은 인간의 영원한 숙제요, 탐구대상이다. 고도의 과학기술을 자랑하는 시대지만 아직 마음과 의식의 헤아릴 수 없는 복잡성과 깊이에 대해 밝혀낸 것은 없다. 따라서 철학의 궁극적 목표는 결국 마음과 의식의 본질을 알고 그것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능력, 그 ‘내공’을 획득하기 위한 것인지 모른다. 저자는 이 ‘내공’이 실질적으로 우리가 배워야 할 것, 즉 ‘창조성’이라고 말한다. 문제를 제기하고, 어떤 일을 성취하기 위해 목표를 세우는 것 등의 창조적인 일에는 많은 시행착오가 따른다. 인공지능이 시행착오, 즉 ‘버그(Bug)’를 만나면 작동이 멈춘다. 창조적인 일은 인공지능이 해야 할 몫이 아니다. 따라서 창조성은 ‘인간다운 삶’을 위해 우리 스스로 지켜야 할 능력이다.

 

저자는 초인공지능의 등장을 두려워하는 일부 독자들을 안심시킨다. 그는 인공지능을 지나치게 ‘의인화’하는 분위기가 인공지능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고 지적한다. 튜링의 질문에 대한 저자의 답변은 이렇다. “기계는 (인간처럼) 생각할 수 없다.”

 

이 책은 저자가 소개하는 철학 용어와 철학자들의 입장들을 이해할 수 있으면 마치 실타래가 풀리듯 한 호흡에 끝까지 내달릴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철학과 과학을 넘나드는 사고력 강의’라는 부제를 감안하면 과학보다는 철학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느껴져서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너무나도 많은 철학적 내용을 다루다 보니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한 채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는 부분이 보인다. 170~175쪽에 저자가 새뮤얼 버틀러《에레혼》(김영사, 2018)의 ‘기계들의 책’을 인용한 내용이 나온다. 버틀러는 기계를 하나의 ‘유기체’로 이해했으며 기계도 인간처럼 진화하여 ‘재생산(생식)’ 체계를 가진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저자는 이러한 버틀러의 생각을 ‘기계(기술)의 진화’를 예언하는 입장인 것처럼 설명했는데, 실은 버틀러는 ‘기계의 진화’를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는 ‘기계의 진화’로 인해 인간이 기계에 종속되는 미래를 풍자하고 비판하기 위해 《에레혼》을 썼던 것이다. 따라서 《에레혼》의 ‘기계들의 책’은 기계의 진화적인 측면을 강조하기 위한 내용으로 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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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6 09: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4-26 11:40   좋아요 0 | URL
인공지능의 시대가 와도 불평등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 돈, 정보, 그리고 기술을 가진 자가 더 많은 이익을 가질 것이고, 이들을 중심으로 부가 편중될 것 같습니다. 인공지능 도입으로 일자리를 잃거나 그만 두어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빈부 격차는 더욱 커질 것입니다.
 
중세의 아름다움 - 김율의 서양중세미학사강의 My Little Library 2
김율 지음 / 한길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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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4월 중순이 지났다. 지금부터 다음 달 독서모임 ‘우주지감’ 선정도서를 읽기 시작해야 한다. 왜냐하면, 다음 달 선정도서는 ‘두 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달 독서모임 선정도서를 아직 안 읽었다. 이 와중에 나는 엉뚱하게도 다른 책들에 눈길을 준다. 벌써 다음 달 독서모임 선정도서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생각하고 있다. 이렇게 망중한을 즐기다가는 망한다. 생각이 많아지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을 안 읽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책을 읽고 있다. 그중에 고른 책이 《중세의 아름다움》(한길사, 2017)이다. 책의 주제에 이끌려서 고른 게 아니다. 이 책을 고른 것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중세의 아름다움》은 다음 달 ‘우주지감’ 선정도서와 관련이 있다. 내가 이 책을 읽는 건 다음 달 독서의 추진력을 얻기 위한 것이다.

 

아름다움의 의미에 대한 통찰은 미학의 오랜 주제이다. 미학을 공부하면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정 상태나 경험을 스스로 살펴보게 된다. 이 과정은 미적 조화를 통해 완성된 예술작품들을 다시 삶 속으로 환류하게 하는 융통의 장을 열어준다. 따라서 미학은 엄연한 지성사의 일환이다. 중세철학을 전공한 김율 교수가 쓴 《중세의 아름다움》은 중세미학의 존재를 추적한 사유의 기록이다. 저자는 중세미학이 갖는 역사적 · 상징적 의미는 무엇인지, 중세를 대표하는 신학자들의 시선에 따라 중세의 아름다움이 어떻게 변모해왔는지를 살핀다.

 

중세미학은 비례와 조화를 강조했던 고대미학(고대 그리스, 로마)을 뿌리로 삼아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접근한다. 아름다움의 본질에 대한 탐구 방식은 고대미학이 물려준 자산이었다. 즉 중세에도 ‘아름다움’은 배척당하지 않았다. 중세에 스테인드글라스, 고딕 양식 등이 유행됐다는 사실은 아름다움이 중요하게 여겨졌음을 보여준다. 중세미학은 그리스도교 문화 자체의 성격에서 유래한다. 그리스도교는 신의 존재 자체를 통해 아름다움(‘신적 아름다움’)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리스도교가 지향하는 아름다움은 초월적 존재인 신을 시각적으로 재현할 수 있는 최상의 속성이다. 고대미학의 개념적 유산인 비례와 조화 같은 범주는 신의 속성에 포함된다. 따라서 그리스도교는 감각적 아름다움에 대한 지성적 아름다움의 우위를 유지하면서 신을 눈에 ‘보이는’ 존재로 격상시켰다. 중세 신학자들은 신 자체의 아름다움에 주목한다.

 

이 책에 소개된 아우구스티누스, 위(僞) 디오니시우스, 토마스 아퀴나스, 요한네스 둔스 스코투스는 신학자(또는 철학자)로 알려졌지만, 자신의 시대에 ‘미학’을 입힌 중세미학의 완성자라 할 수 있다. 물론, ‘중세의 아름다움’에 대한 네 사람의 인식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저자는 중세시대에 지속적으로 주장됐던 ‘아름다움’의 본질을 상세히 정리하고 이를 고대미학과 비교 고찰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름다움을 감각이 아닌 ‘이성’으로 파악한다. 이성적인 사랑, 즉 그리스도교가 강조하는 인격적 사랑은 최고의 아름다움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이 창조한 이 세상 전체가 아름답다고 생각했고 세상에 은밀하게 숨겨진 신의 섭리, 즉 아름다움을 읽어내려고 했다. 디오니시우스는 전설에 등장한 성자의 이름이다. 위 디오니시우스는 익명의 신학자이다. 지금도 그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는 ‘선(善)’과 빛, 그리고 아름다움을 조화시키려고 했다. 위 디오니시우스 미학에 따르면 아름다움은 선과 같다. 이 아름다움이 존재할 수 있는 원인은 신이다. 그리하여 아름다움은 신의 이름으로 드러내는 ‘사랑’이 된다. 아퀴나스는 아름다움을 ‘보이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말하는 ‘보인다’는 것은 시각적 행위를 의미하지 않는다. 시각과 지각을 포함한다. 아퀴나스는 아름다움의 의미를 눈으로 느끼는 감각적 상태가 아닌 정신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앎의 대상’으로 확장했다. 그리고 비례와 조화가 잘 이루어진 사물에서 볼 수 있는 ‘완전성’을 아름다움의 조건이라고 했다. 스코투스는 ‘색채’의 아름다움에 주목한다. 그에게 아름다움이란 ‘색채를 포함하는 조화’이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조화로 설명되는 아름다움에 주목했으나 색채를 아름다움(조화)을 구성하는 개별적인 요소로 봤다.

 

중세는 ‘암흑’으로 봉인된 구시대가 아니다. 근대 이후 이성을 중심으로 한 계몽주의의 독주가 지속하면서 중세는 ‘암흑의 시대’로 폄하된 채 학자들조차 거들떠보지 않았다. 고대 문화의 가치를 재발견한 신고전주의자들은 고대미학, 르네상스 미학에 주목했을 뿐 중세미학을 평가 절하했다. 그래서 중세미학에 대한 해명을 기본과제로 해 중세 지성사를 재조명한 《중세의 아름다움》은 큰 의미가 있다. 저자는 중세는 암흑의 시대가 아니라 ‘다채로운 빛의 시대’였다고 말한다. 묻혀버린 중세를 재발굴하는 것이 단순히 과거를 돌아보는 차원에 그치는 게 아니다. 주류 시각으로 기술된 미학 또는 미술사는 '아름다움'의 의미와 작품 해석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를 새롭게 재편하는 담론을 생각할 때 중세미학의 재발견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암흑의 시대’라고 가르치던 학교 속 역사 교과서의 유통기한은 끝난 지 오래다. 이제 ‘암흑’에 가려진 중세의 다채로운 면모를 찾으려는 연구에 주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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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증 - 사이코 북스 03
이반 워드 지음, 태보영 옮김 / 이제이북스 / 2002년 11월
평점 :
절판


 

 

 

공포는 진화에 핵심적인 생존의 필수 요소이다. 진화론적으로 볼 때 공포 자극에 대해 불안을 느끼지 않는 사람보다 여기에 과잉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의 생존 가능성이 높다. 대부분 사람은 뱀에 공포를 느낀다. 뱀에 대한 공포는 진화론적 접근 방식이 통용된다. 오랜 야생 생활을 한 원시 인류는 뱀을 위험 대상으로 인식했다. 따라서 뱀에 대한 공포는 원시 인류가 위협적인 존재에게 대항하며 야생에서 살아남기 위해 체득한 습성이라는 점에서 진화의 산물이라 볼 수 있다.

 

고소공포증이나 광장공포증처럼 실질적인 위험이 실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느끼는 공포를 ‘공포증(phobia)’이라 부른다. 공포증이 신체적 반응(경직된 몸, 식은땀, 두근거림 등)을 일으키는 원인에 대해선 아직 명확한 과학적 근거가 없다. 프로이트(Freud)의 제자인 어니스트 존스(Ernest Jones)는 공포증을 부조화, 모순의 요소들이 포함된 감정 상태라고 규정했다. 그리하여 정신분석학적 측면에서 공포증을 바라본다면, 공포증은 ‘비합리적인 두려움’[1]이다. 왜냐하면 앞서 언급한 진화론적 측면만으로 공포증이 발생하는 원인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공포증을 진화의 산물로 보는 관점이 ‘생물학적 이론’이라면, 정신적 외상(trauma)이라는 자극이 가해져서 공포증이 유발된다고 설명하는 것은 ‘외상 이론’이다. 앨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의 영화에는 정신적 외상에 시달려서 극심한 공포에 시달리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히치콕은 이런 인물들의 동기를 설명하거나 극적인 결말을 유도하기 위해 외상 이론이 반영된 장면을 연출했다. 이반 워드(Ivan Ward)《공포증》(이제이북스, 2002)은 히치콕의 영화 <새>에 반영된 외상이론과 영화에서 표현된 등장인물의 공포증을 분석한다.

 

프로이트는 공포증을 어떻게 봤을까? 그는 공포증을 ‘마음속에 있는 공포의 근원’으로 가정했다. 아이들이 등교를 거부하는 증상을 ‘학교 공포증’이라고 한다. 학교 공포증이 있는 아이는 자신을 괴롭히는 친구들을 만나기 두려워서 등교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프로이트는 아이의 등교 거부가 아이의 내면에 있는 ‘불안’과 관련되어 있다고 봤다. 학교 공포증이 있는 아이의 애착 대상은 엄마다. 아이가 엄마와 떨어져 있으면 불안해지고 안정감을 찾지 못한다. 따라서 프로이트는 ‘유년기의 병적 불안’이 공포증 형성의 전제 조건이라고 주장했다.

 

《공포증》은 문고본 형태로 만들어진 책이라서 깊이 있는 내용이 부족한 편이다. 이 책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의존하다시피 공포증을 설명하고 있어서 공포증에 대해 다층적으로 접근하지 못했다. 저자는 멜라니 클라인(Melani Klein)의 이론을 인용했지만, 그녀는 프로이트 이론을 비판적으로 계승한 정신분석학자이다.

 

불안에서 비롯된 공포증은 친숙하지 않은 환경(또는 대상)에 적응하고자 나타날 때 나타나는 인체의 가장 기본적인 반응이다. 그러므로 공포증은 꼭 병적인 상황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며 정상적인 사람들도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는 증상이다. 정상적인 사람들은 위험이나 고통이 예견될 때, 또는 예기치 않은 상황에 직면했을 때 공포증을 경험하게 된다. 공포증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필요하다. 공포증은 내 몸에 위험한 것이 아니라 나를 보호하기 위한 반응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포의 대상을 피하지 말고 맞서는 태도가 중요하다. 불확실한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 공포증은 가까워서도, 멀어서도 안 되는 어정쩡한 동반자다.

 

 

 

[1] 《공포증》 14쪽

 

 

 

 

 

 

※ Trivia

 

 

 

* 사자, 마녀, 의상(衣裳) : 가상의 위험들

* 그들은 말을 쏘았다, 그렇지 않은가? - 상징으로서의 공포

* 공포, 공포 : 에드거 앨런 포

 

 

 

이 책의 목차 제목이다. 밑줄이 친 목차 제목은 유명한 소설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자, 마녀, 의상’C.S. 루이스(Clive Staples Lewis)《나니아 연대기》(시공주니어, 2005)의 1부 제목(The Lion, the Witch and the Wardrobe)이다. 원제의 ‘Wardrobe’을 ‘옷장’, ‘옷(의상)’으로 번역할 수 있는데, 《공포증》의 역자는 루이스의 소설을 잘 몰라서 그런지 ‘옷’으로 번역했다.

 

 

 

 

 

 

‘그들은 말을 쏘았다, 그렇지 않은가?’호레이스 매코이(Horace McCoy)가 1935년에 발표한 소설의 제목(They Shoot Horses, Don’t They?)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 작품은 아미티지 트레일(Armitage Trail)의 소설 『스카페이스』와 함께 동명의 번역본에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의 역자는 러브크래프트(Lovecraft)의 작품을 번역한 정진영 씨로 ‘정탄’은 그의 필명이다. 아미티지 트레일과 맥코이의 소설 모두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 시기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고, 두 작품 모두 영화화되었다.

 

 

 

 

 

 

 

‘공포, 공포’는 에드거 앨런 포(E. A. Poe)의 소설에 나오는 명대사를 패러디한 것으로 추정된다. 포의 미완성 장편소설 《아서 고든 핌의 이야기》(창비, 2017)의 주인공은 정체불명의 생명체를 만나는 순간 두려움에 떨면서 ‘테켈리 리, 테켈리 리(Tekeli-li, Tekeli-li)’라고 외친다. 주인공이 엄청난 공포를 느끼면서 외치는 알 수 없는 말을 이반 워드가 ‘공포, 공포’로 패러디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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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9 12: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2-09 17:43   좋아요 0 | URL
이것저것 주워들은 정보를 취사선택해서 정리하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대단한 일이 아니고요, 책과 공부에 대한 애정이 많으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단, 이게 너무 과도하게 지식을 표출하면 잘난 척하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어요. 그런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글을 쓰면 내용 조절을 하는데 쉽지 않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