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의 구원
한병철 지음, 이재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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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자본주의는 어떤 관계일까. 시장경제는 과연 음악과 문학 그리고 미술의 성장을 장려하는가, 아니면 위축시키는가. 수요와 공급이라는 경제원칙은 창조성의 추구에 도움이 되는가, 혹은 폐해가 되는가. 예술은 자고로 가난과 삶의 고투 속에서 꽃핀다는 생각은 이미 옛말이 된 지 오래다. 자본주의에 편입된 미술계 안에서 모든 미술품은 시장원리에 따라 거래되고, 미술품의 가격이 가치의 척도로서 작용하기도 한다. 자본주의 상업화 논리를 이용하여 적극적으로 작품 마케팅에 나서는 아티스트들도 적지 않다.

 

 

 

 

 

뉴욕에 혜성처럼 나타난 앤디 워홀은 대중문화의 힘과 이미지, 대중 스타들의 막대한 영향력을 간파했다. 캠벨 수프 통조림과 코카콜라 병과 같은 대량 생산물을 그려 주목받고 엘비스 프레슬리, 메릴린 먼로 등의 이미지를 소재로 삼았다. 워홀을 자신의 히어로로 동경하는 제프 쿤스는 워홀의 뒤를 잇는 대중미술의 대표적인 주자다. 그가 설치한 대형 조각품인 주황색 풍선 개(Ballon Dog)는 생존 작가 작품 경매가격 1위를 차지한 바 있다.

 

거대한 풍선 오브제. 거울같이 매끄러운 풍선 개의 주황색 표면에 전시장과 관람객이 비친다. 그리고 관객 움직임에 따라 매끄러운 표면 속 이미지는 기묘하게 일그러지며 요술을 부린다. 한병철은 풍선 개의 매끄러운 표면, 스마트폰의 매끄러운 화면, 브라질리언 왁싱을 하나의 현상으로 바라본다. 그는 이 매끄러운 대상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추구하는 ‘아름다움’의 징표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피부가 까끌까끌한 거친 표면에 접촉하는 것을 불쾌하게 여긴다. 매끄러운 표면을 만져야 기분이 좋아진다. 노출의 계절 여름을 맞아 매끄러운 피부를 갖기 위해 제모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잔털 없는 매끄러운 피부는 청결하고, 보송보송한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매끄러운 아름다움이 유지되려면 부정성을 제거해야 한다. 매끄럽게 다듬어진 대상은 ‘긍정적인 즐거움’을 제공한다. 우리는 부정성의 존재를 잊은 채 매끄러운 대상의 아름다움을 긍정한다. 이로써 부정성을 제거하고,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긍정사회’가 된다. 모든 것들은 소비와 향유의 공식에 맞춰 매끄럽게 변한다. 즉각적인 만족을 누리는 대중은 주체적인 미의 경험이 마비되었다. 진짜 아름다움의 의미를 찾지 않는다. 오로지 부정성이 없는 매끄러운 대상에 환호하고, ‘좋아요’ 중독에 빠져나오지 못한다. 한병철의 눈에는 매끄러움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긍정사회가 아름다움이 철폐되어가는 위기의 시대로 본다.

 

한병철이 아름답게 생각하는 대상은 부정성을 간직하고 있다. 노골적으로 아름다움을 표출하면 보잘것없는 포르노그래피다. 반면 비밀과 은밀한 은유로 점칠 된 대상은 깊은 여운을 주는 매력이 있다. 한병철이 선호하는 아름다움은 ‘건강하지 않은’ 상태다. 건강한 상태라고 생각하는 매끄러운 아름다움은 생명력이 없다. 이런 아름다움만을 먹고 살았던 우리는 ‘좀비(das Untote)’가 된다.

 

 

건강함은 매끄러움의 표현형식이다. 건강함은 역설적으로 병든 것, 생명이 없는 것을 발산한다. 죽음의 부정성이 없다면 삶은 굳어져 죽은 것이 된다. 그리고 매끄럽게 다듬어져 좀비가 된다. 부정성은 생명을 활성화시키는 힘이다. 그것은 또한 미의 정수이기도 하다. 미에는 허약함이, 연약함이, 부서짐이 내재한다. 미가 매력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은 바로 이 부정성 덕분이다. 이에 반해 건강한 것은 매력이 없다. 그것에는 어떤 포르노그래피적인 성질이 있다. (69쪽)

 

 

한병철이 긍정적으로 보는 미는 허약하고,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속성이 있다. 이러한 유한성 때문에 한병철의 미는 베일에 싸여 있어야 하고, 은신처에 숨어 있다. 한병철의 미는 낭만주의자들의 특색을 조금 닮았다. 종종 낭만주의자들은 신비화 대상으로서의 자연에서 미를 찾으려고 했다. 그리고 병약하고 퇴폐적인 취향에 골몰했다. 허약하고, 불쾌감을 주는 부정성을 포괄하는 한병철의 미가 얼마나 아름답고, 건강한지 실질적으로 와 닿지 않는다. 한병철의 미학은 다소 현실의 미를 외면하는 관념론적인 성향이 느껴진다. 한병철은 예술과 ‘소비와 투기에 종속시키는 자본주의’의 결별을 시도한다. 상업주의로 인해 미가 타락하고 몰락해 가고 있다는 비관론적인 입장을 취한다.

 

 

 

 

 

오늘날 젊은 예술가들이 미의 가치를 잊은 채 상업적 조류에만 휩싸이는 풍토는 분명 문제가 있다. 하지만 현대예술은 자본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예술적인 미와 상업성의 이항대립에서 미는 선이고 상업성은 독이라는 위계적 이분법은 현실과 무척 동떨어진 발상이다. 예술의 상업화는 다양한 예술적 시각이 공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아이러니하게도 돈은 예술가의 창작욕을 북돋워주고, 그 속에서 예술가는 자본주의에 향한 비판의식을 드러낸다. 올해 5월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 등장한 저 매끄러운 황금 변기를 보시라. 미국 민주당 대선 경선에 패배한 직후 버니 샌더스는 “가난한 사람들이 더 가난해지고 있을 때 부자는 황금 변기에 앉아 볼일을 본다”라는 뼈 있는 말을 남겼다. 이탈리아 출신 설치미술가 마우리치오 카텔란은 샌더스의 발언에 영감을 얻어 모든 관람객이 이용할 수 있는 황금 변기를 공개했다. 그는 매끄럽게 빛나는 황금 변기를 설치하여 소수 특권주의로 변질한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를 조롱했다.

 

아름다움에 위기와 찾아왔다고 주장하는 한병철의 진단은 절반은 틀렸다. 카텔란의 황금 변기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그러니까 매끄러운 아름다움 속에도 사회를 바꾸어야 한다고 경고하는 부정성이 내포될 수 있다. 이 부정성은 비판의식과 윤리적 성찰을 활성화하는 ‘건강한’ 아름다움이다. 아직 미의 위기는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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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07-04 2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로사회, 심리정치, 시간의 향기, 투명사회..이 4권이 저서가 한병철 철학가죠...
이책 찜하겠습니다..

cyrus 2016-07-05 10:24   좋아요 1 | URL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전작보다 내용이 이해하기 쉬웠습니다. 미학에 관심 있다면 `부정성`이라는 키워드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

북다이제스터 2016-07-04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별철과 애증의 관계 있으시죠? ㅎㅎ

cyrus 2016-07-05 10:26   좋아요 0 | URL
그렇게 보셨나요? ㅎㅎㅎ 이번에 나온 책, 많이 기대했습니다. 결론에 드러난 한병철의 생각을 동의하지 않지만, 읽어볼만한 책이었습니다. 수준이 평이했습니다. ^^
 
혐오와 수치심 -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들
마사 너스바움 지음, 조계원 옮김 / 민음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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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91. 일본 관동 지방 남부에 대지진이 엄습했다. 사람들은 미처 불도 끄지 못한 채 거리로 뛰쳐나왔고 도시는 곧 불길에 휩싸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흔들리는 땅, 타오르는 화염보다 유언비어에 더 큰 공포를 느꼈다. 일본 정부는 극도의 사회적 혼란 속에서 고의로 유언비어를 퍼뜨려 분노한 민심의 희생양을 만들어냈다. ‘혼란을 틈타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일본인들을 살해했다.’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 그 결과 무고한 재일 한국인들이 무참하게 학살당했다. 일본 정부는 유언비어를 퍼뜨린 것으로도 모자라 그것을 스스로 사실로 단정하고 군경을 동원해 직접 조선인 사냥에 나섰다. 일본인들은 죽창이나 몽둥이, 총칼 등으로 닥치는 대로 조선인들을 학살했다. 조선인들을 나는 조선인입니다라는 팻말 옆에 묶어놓기도 했다. 그들의 학살 방법은 잔인함과 광기의 극치였다.

 

 

 

 

 

 

관동 대학살은 극한의 현실에 대한 인간의 막연한 두려움과 좌절을 힘이 약한 상대에 대한 분노로 전이시켜 배설하도록 만든 전형적 정치 선동이다. 아놀드 토인비가 말했듯 역사는 반복된다. 불행히도 잘못된 역사 또한 그렇다. 일본에 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 모임(재특회)’이란 극우 단체가 있다. 이들은 반한(反韓) 나아가 혐한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데 거침이 없다. 한국인에 대해 혐오 발언을 쏟아낸다. ‘조선인은 기생충’ ‘바퀴벌레 구더기 조선인들등 부당하게 한국인을 모욕하는 피켓과 구호가 난무한다. 재특회의 구성원은 젊은 층으로 이뤄져 있다. 저임금의 시간제 근로자 또는 최근 갑자기 늘어난 계약직 근로자들이 다수를 점하고 있다. 자신들의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한 두려움을 잊기 위해 좌절감을 분출하는 것이 이들 단체의 목적이다.

 

인간은 늘 두려워하면서 살아간다. 선택의 부재, 대안 없는 시간에 대한 두려움. 이것이 심하면 죽음의 공포와 맞먹는다. 우리는 그것을 아예 모든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든가, 아니면 자신에게 두려움을 주는 대상을 거부해야만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두려움에 유도되어 행동한다. 그럴수록 찐득한 혐오의 그림자가 우리 몸에 달라붙는다. 마사 누스바움은 혐오는 오염에 대한 두려움에서 출발한다고 말했다. 심리학에서는 이미 동성애자에 대한 극도의 거부감과 비합리적인 혐오와 공포를 호모포비아(Homophobia)라고 명명했다. 동성애란 말만 들어도 왠지 소름이 끼치고 역겹다는 생각이 들면서 동성애자가 자신의 곁에 있는 것조차 싫어하는 감정이나 그러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세균이 분열하면서 번식하는 것처럼 호모포비아 분위기가 확산하면 혐오범죄로 이어진다. 단지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상대를 괴롭히고 때리거나 심지어 죽인다. 동성애뿐만 아니라 여성과 외국인, 특정인을 비하할 때 등장하는 냄새나 분비물에 관한 표현은 대표적인 혐오 발언 사례다.

 

 

 

이 책의 두 번째 글 <주체화, 호러, 재마법화>(임옥희 편) 27~28쪽에 마사 누스바움의 혐오와 수치심핵심 내용이 잘 정리되어 소개되었다. 혐오와 수치심의 두꺼운 분량을 감당하기 어려운 독자는 여성 혐오가 어쨌다구?27~28쪽을 읽으면 된다.

 

 

 

인터넷에 서식하는 수많은 남성이 여성이라는 단어만 보면 부모님의 원수를 만난 듯이 발광한다. 여성의 성기와 벼슬아치를 합친 보슬아치란 비하 표현을 모르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보지 달린 게 무슨 벼슬이냐라는 의미다. 한국 여성을 비하하는 표현인 김치녀는 그나마 점잖은 수준이다. 여성을 노골적으로 폄하해 인격체가 아닌 성적 대상으로 한정시키는 단어가 적지 않다.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지역감정에 휘둘렸다. 특정 지역이나 출신들을 맹목적으로 비하하며 편을 가르고 감정싸움을 벌여왔다. 인터넷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역감정은 전쟁 양상이다. 호남 사람들을 홍어로 비하한다. 이런 지역적인 특성을 이용해 삭힌 홍어가 풍기는 냄새를 호남 사람들의 인격과 동일시해서 비하하는 데 쓴다. 광주 민주항쟁 당시 시민군 전사자의 시신 썩는 냄새를 진압군이 홍어 삭힌 냄새에 비유한 데서 유래했다는 말도 있다. 대구 지하철 화재 사건 희생자들을 빗댄 통구이등도 경상도를 비하하는 말로 사용된다.

 

 

 

 

 

 

혐오는 수치심을 유발한다. 부정적 수치심은 자기 파괴적 힘을 가진다. 오랫동안 혐오 발언에 시달렸던 재일 조선인들은 극우 세력의 무차별 폭력 및 혐한 시위에 소극적으로 대응한다. 현재까지도 지워지지 않은 낙인은 재일 조선인들의 활동을 제약한다. 차별과 강압의 부당성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려면 일본인들의 보복을 감당해야 한다. 재일 조선인들은 언제 또 다시 공격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 시달린다. 그래서 일본인들의 무차별 폭력이나 혐한 시위에 소극적으로 대응한다. 부정적 수치심에 사로잡히면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를 적극적으로 개선하려는 의지가 상실된다. 반면 재특회의 혐한 시위에 반대하는 오토코구미의 행동대장 다카하시는 혐한 시위를 보고 있으면 수치스럽고 부끄럽다고 말했다. 다카하시는 한때 반한 감정을 가진 우익이었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편견을 고집하면서 재일 조선인을 차별하는 재특회의 무지함에 부끄러움을 느껴 오코토구미에 들어가게 됐다. 이처럼 혐한 시위를 반대하는 일본인들은 혐오의 감정이 사회적 약자에게만 광적으로 표출하는 잘못된 일본 사회에 수치심을 느낀다. 이는 수치심도 긍정적으로, 건설적 방향으로 드러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독특한 사례다.

 

자유주의라는 이름을 내세워서 자신들 기준대로 종북타령하는 사람들은 국가보안법 폐지를 반대하고, 테러방지법 시행을 찬성한다. 이미 반국가활동을 규제하는 국가보안법이 있는데, 이와 유사한 테러방지법을 도입하자고? 그들은 국가보안법으로 대통령을 음해하는 종북 세력을 처벌하고, 테러방지법으로 간첩 활동을 하는 종북 세력의 군사적 행동을 막을 수 있다고 말한다. 과거에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죄명으로 무고한 진보 세력을 간첩으로 만들어버린 사례가 있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실체 없는 말이 유행하던 시절에 사람들 머릿속에 공산당은 빨갱이 괴물로 자리 잡았다. 예나 지금이나 우파 세력은 좌파 세력을 극도로 혐오해서 법적으로 통제하려 든다. 심지어 표현의 자유마저 침해한다. 일베의 혐오 발언의 심각성을 지적하면 표현의 자유운운하면서 일베를 옹호하고, 정부를 비판하는 의견을 종북으로 몰아세우는 우파의 이중성. 우파인 나도 그들 보기가 부끄럽다. 그들은 자신들이 완벽하고 이성적인 자유주의자라고 착각한다. 자신들의 단점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문제점을 은폐하기 위해서 '정신승리'에 가까운 변명만 늘어놓는다.  

 

일부 자유주의 학자들은 수치심을 주는 처벌이 있어야 공동체의 도덕의식이 형성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누스바움은 혐오와 수치심,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이 하위 집단에 대한 지배 집단의 통제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을 반대한다. 집단적 혐오는 파괴적이다. 역사적으로 지배 집단은 혐오라는 감정을 이용해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반대 세력을 억압했다. 관동 대학살, 나치의 유대인 학살 등 극단적인 사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두려움을 떨쳐버리기 위하여 혐오 감정을 위악적으로 배설해서 생긴 비극은 생각보다 잔인하고 심각하다. 사회는 다양성과 자유의 목을 졸라 여기저기에 족쇄를 채운다. 그리고 차이차별로 키우고 모든 걸 정상비정상으로 나누어 힘의 서열을 매긴다. 부당한 차별은 사회 내의 정의와 평등에 어긋난다. 편견에서 비롯된 혐오가 전염된 사회는 자유주의를 병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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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6-06-09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일련 소개 글 보면
혐오, 증오에 관심 많으신 거 같습니다. ^^

cyrus 2016-06-10 13:12   좋아요 0 | URL
내용, 주제가 겹치는 책을 같이 읽고 있습니다. 진짜 독서의 목적은 이벤트 응모입니다. ㅎㅎㅎ

2016-06-09 2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6-10 13:14   좋아요 1 | URL
우리나라에도 비겁한 사람들이 많아요. 자신보다 약한 사람 앞에서 갑질하거나 분노를 표출합니다.

북깨비 2016-06-10 0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의로 유언비어를 퍼뜨려 분노한 민심의 희생양을 만들어내다 라는 대목을 읽으니 문득 미미여사의 외딴집이 생각납니다. 기나긴 인류 역사속에 얼마나 많은 희생양들이 있었을까요. 끔찍합니다.

cyrus 2016-06-10 13:18   좋아요 1 | URL
유언비어와 편견을 맹목적으로 믿는 대중심리가 정말 무섭습니다. 잘 알지 못하면서 무고한 사람을 마녀사냥합니다. 자신들의 믿음이 허위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언제 그랬냐는듯이 침묵합니다. 악성 루머를 만들고 퍼뜨리는 자는 따끔하게 법으로 잡아 족쳐야합니다.

페크pek0501 2016-06-10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성 혐오가 어쨌다구?》 27~28쪽을 읽으면 된다.˝
- 그래서 책을 들춰 봤어요. ㅋ

집단 망상이라는 것도 있으니 정신 바짝 차리고 살겠습니다.

cyrus 2016-06-11 11:05   좋아요 0 | URL
27~28쪽에 마사 너스바움이 정의한 혐오와 수치심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글쓴이가 700쪽 넘는 책 한 권의 주제를 간략하게 요약했습니다.

집단 망상의 힘이 위험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거기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나는 정상적으로 생각하고 있어. 잘못한 게 없다고’라고 착각합니다.

 

 

 

여성은 오랫동안 남성이 만들어 놓은 여러 허상 속에 갇혀 지내왔다. “여자는 사회적으로 열등할 수밖에 없다는 통념은 여성에게 억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여성의 사회활동을 제약하는 것은 여성의 신체구조보다 사회 제도적 문제와 사회제도를 정당화시키는 이데올로기다. 굳이 페미니즘의 논의를 빌리지 않아도, 고착화되고 이데올로기화 된 성의 정체성이 인간에게 하나의 억압이고 굴레라는 것은 이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상식이다.

 

 

 

 

 

 

 

 

 

 

 

 

 

 

 

 

 

 

읽고 쓸 줄 아는 남성들은 남성을 위한 이데올로기를 만든다. 남자들은 지식을 향유할 수 권리를 독점했다. 글쓰기의 역사는 남근중심주의와 함께해왔다. 여자가 독서를 하면서 글을 쓴다는 것은 권위주의(남성 우월주의)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었다. 책을 읽은 여자는 자의식을 스스로 가지게 된다. 그리고 똑똑해진다. 여자는 책을 만남으로써 남성의 울타리 밖으로 나와 자신의 것을 구축할 수 있게 된다.

    

 

 

 

 

 

 

 

 

 

 

 

 

 

 

 

    

 

동문선의 메두사의 웃음/출구에 수록된 출구는 원래 카트린 클레망 공저의 새로 태어난 여성에 있는 글이다.

    

 

 

엘렌 식수(Hélène Cixous)여성적 글쓰기를 이렇게 정의했다. “여성은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써야 한다.” 여성은 스스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야 하고 역사 속에 부각시켜야 한다. 이와 동시에 자신을, 자연 발생적으로 흘러넘치는 자신의 이야기를 텍스트로 표현해야 한다. 여성적 글쓰기가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곳은 프랑스다. 1968년 프랑스에서는 가부장제 담론을 해체하는 포스트페미니즘의 영향으로 에디시옹 데 팜(Édition des Femmes)’이라는 출판사가 설립되었다. 출판사 이름을 우리말로 옮기면 여성출판사. 에디시옹 데 팜은 여성 해방 운동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는 출판사로 프랑스 페미니즘의 중심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사실 1970년을 기점으로 프랑스 페미니즘은 두 개의 분파로 나뉘어 형성되었는데, 글의 주제와 벗어난 내용이라 이에 대한 설명은 생략한다. 소피아 포카의 포스트페미니즘을 참고하면 된다) 엘렌 식수는 에디시옹 데 팜의 설립을 환영했으나 자신은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거부했다. 왜냐하면, 가부장제 규범을 거부하여 자신의 사회적 위치의 정당성을 얻으려는 페미니스트들이 여성과 남성의 차이라는 이분법적 체계에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다고 봤기 때문이다.

 

식수가 말한 여성적 글쓰기는 남성을 적으로 간주하지도 않고, 평등권 쟁취를 위하여 투쟁해야 할 대상으로 삼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우선 여성 자신의 내적인 성찰을 통해 여성적 특성을 찾아내 종이 위에 표현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선 여성은 남성 중심의 엘리트주의, 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허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즉 여성 고유의 정신적·신체적 영역을 부각하는 것이다. 식수는 20세기 프랑스 작가 중에 여성적 글쓰기를 실천한 작가가 많지 않다고 봤다.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마르그리트 뒤라스, 그리고 장 주네, 이 세 사람만이 여성적 글쓰기를 실천한 프랑스 작가로 언급했다.

    

 

    

 

 

 

 

 

 

 

 

 

 

 

 

 

 

철학자의 서재에 수록된 <‘알파걸은 결코 모르는 여성의 비밀>을 쓴 연효숙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전문연구원은 남성적 글쓰기를 하지 않은 작가로 버지니아 울프, 제인 오스틴, 에밀리 브론테를 거론한다. 그런데 여기에 콜레트가 빠지면 여성적 글쓰기라는 단어를 처음 만든 식수는 불만을 표출했을 것이다. 국내 작가 또는 비평가들은 여성적 글쓰기 사례로 영미 작가들만 편중되어 소개하고 있다. 그것도 여성적 글쓰기가 프랑스에서 시작된 포스트페미니즘 운동의 한 방식이라는 사실을 쏙 뺀 채 말이다.

    

 

 

 

 

 

 

 

 

 

 

 

 

 

 

    

 

표지가 없는 책은 꼴레트-바가봉드(예전사, 1993),

'바가봉드'는 방랑하는 여인》의 원제.

    

  

 

콜레트의 방랑하는 여인은 여성적 글쓰기의 전범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소설 제목인 방랑하는 여인은 주인공 르네 네레를 의미한다. 르네의 직업은 경력 3년 차인 뮤지컬 겸 연극배우다. 특히 팬터마임 공연에 능숙한 솜씨가 있다. 사실 콜레트도 팬터마임, 무언극 배우로 활동했다. 콜레트는 자신의 삶을 종이 위에 그대로 옮겼다. 르네는 그야말로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방황하는 여인이다. 그녀는 전남편과 이혼하여 자유로운 독신 생활을 누리고 있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남성을 만나고 싶은 갈망이 자리 잡고 있다. 르네는 자신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하는 막스의 청혼을 거절한다. 르네는 예전과 같은 결혼 생활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면 르네는 남편의 권위에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야 한다. 그녀는 자유로운 삶의 행복과 가정의 행복 사이에서 갈등한다.

 

집에 홀로 남아있는 르네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진짜 정체성을 무엇인지 고뇌한다. 이 장면이 차지하는 분량은 그리 짧지 않다. 여기서 콜레트는 여성적 글쓰기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 “... 이 단어를 되뇌며 마음에도 없이 거울을 들여다본다. 그러나 거기, 검붉게 칠하고, 눈 주위에 번들번들한 푸른색 띠를 두르고 있는 것은 분명 나 자신이다. 눈가의 테가 녹기 시작한다... 얼굴 나머지 부분까지 녹아내리도록 두어 버릴까? 그러면 내 모습에는 긴 눈물자국 같은 꽁꽁 얼고 찐득찐득한 얼룩만이 남을까?” (5~6)

 

* “오늘 밤 난 이 긴 거울과 마주 대하고 그토록 열심히 피했다가 받아들이고 도망쳤다 다시 붙들리던 독백과 마주칠 수밖에 없는 운명인가 보다. 아무리 기분을 돌리려 해도 쓸데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느낀다.” (12)

 

* “난 신비스럽게 반사되는 방 안의 거울 속에서 길을 잘못 든 여류작가의 모습을 본다. 사람들은 내가 연기를 한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결코 배우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왜지? 그건 관객들이나 내 친구들이 내가 선택한 일에 대하여 등급을 부여하기를 예의상 거절하려는 미묘한 뉘앙스 때문이다. 그러나 이 생활은 바로 내가 선택한 것이다... 길을 잘못 든 여류작가 더 이상 글을 쓰지 않는 나, 글을 쓰는 사치, 쾌락을 스스로 거부하는 나... 그런데도 모두에게 그렇게만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이다...” (14~15)

 

 

 

집에서 쓸쓸히 거울을 바라보는 르네의 모습은 남성들을 위한 가장 무도회가 끝난 뒤 휴게실에서 홀로 남은 여장 배우의 쓸쓸한 상황과 비슷하다. 르네는 남자들의 분위기에 맞추면서 연기하는 삶에 점점 염증을 느낀다. 그러면서 진짜 여자를 발견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이미 자신을 향한 남성의 시선에 익숙해진 르네는 자신의 참 모습을 바라보는 일을 두려워한다. 르네는 자신의 독백을 쓸데없는 일로 치부해도 자기 자신을 글로 쓰는작가가 되고 싶다. 그렇지만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는 르네를 길을 잘못 든 여류작가로 본다. 르네가 잠시 글쓰기를 중단하고, 배우 일에 전념하게 된 이유가 여성적 글쓰기를 인정하지 않는 남성들의 따가운 시선에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콜레트는 <클로딘 시리즈>라는 작품을 발표하여 엄청난 인기를 얻었지만, 남성 비평가들은 그녀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작가였던 그녀의 전남편 앙리 고티에 빌라르는 자신의 필명으로 콜레트의 작품을 발표했다. 콜레트는 남편의 강요에 못 이겨 <클로딘 시리즈>를 연달아 써야만 했다. 빌라르의 아내였던 콜레트가 이 시절 썼던 작품들은 그녀가 원하는 진짜 글이 아니었다. 빌라르와의 이혼은 콜레트가 여성적 글쓰기를 실행하기 위한 결정적인 출구였다.

 

식수는 남성들이 진정 두려워하는 것은 여성의 자유로운 생명력이라고 말한다. 남성은 여성의 신체와 마음 모두 자신의 기준에 따라 검열했다. 오래된 억압 속에 살아간 여성은 자신 고유의 신체와 마음 심지어 언어까지 빼앗기고 말았다. 생명력이 상실된 여성은 목이 잘려나간 메두사다. 그녀의 눈을 보는 사람은 돌로 변한다. 남성들은 자신을 당당하게 바라보는 메두사를 두려워했다. 메두사는 원래 괴물이기 전에 아름다운 미인이었다. 그런데 남성 같은아테네 여신의 저주를 받아 흉측한 괴물로 변했다.

 

 

메두사를 보기 위해서는 정면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메두사, 그녀는 치명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녀는 아름답다. 그리고 그녀는 웃고 있다. (엘렌 식수, 메두사의 웃음/출구메두사의 웃음’ 29) 

 

 

예나 지금이나 남성은 생명력 있는 여성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그런 여성을 아무 이유 없이 성격이 못난 벌레또는 괴물로 만들어서 질투하고 혐오한다. 그러므로 여성은 자기 자신을 글로 써야 한다. 반이성적으로 여성을 왜곡하고 비하하는 기이한 사회 속에서 여성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내기 위해 당당하게 글을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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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07 2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6-08 18:33   좋아요 0 | URL
좋은 말씀이다. 인생을 한 권의 책으로 비유하면 풍성한 경험과 사유의 기록들을 채워가면서 사는 것이 하나뿐인 인생 잘 사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

:Dora 2016-06-07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콜레트♥

cyrus 2016-06-08 18:34   좋아요 0 | URL
정말 콜레트는 멋진 언냐입니다. ㅎㅎㅎ

수이 2016-06-09 22: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퇴근 전인데 집에 가서 다시 읽어봐야지.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나와 세계 - 인류의 내일에 관한 중대한 질문
재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강주헌 옮김 / 김영사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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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한마디로 ‘통일은 대박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2014년 신년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박 대통령이 남긴 발언이다. 분단된 남북을 통일하는 데는 어마어마한 물적 인적 자원이 필요한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다. 통일에 따르는 경제적 과실은 실제로 대박일까? 통일에 따른 경제적 부담이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 수십조 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는 통일 비용을 결국 국민의 세금으로 충당해야 한다. 또 남북 주민 간의 문화적 이질감을 통합하는 데 있어서 사회적 비용 또한 무시 못 한다. 통일이 실제 이뤄지면 60년 넘게 분단된 이산가족들의 재결합 등 국가와 사회적 치유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

 

 

 

 

 

하지만 어마어마한 물적 재원이 소요되기 때문에 정책연구와 집행에 있어 경제적 득과 실을 따지지 않을 수 없는 것 또한 현실이다. 통일되면 남북의 인구 9천만 명이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되는 효과를 볼 수 있어 당장 내수 시장의 확대 효과가 발생한다. 북한의 지하자원 가치는 약 6,700조 원 이상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북한의 자원에 한국의 자본과 기술이 합쳐진다면 엄청난 시너지 효과가 발생한다. 영국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통일을 통해 남한이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적지 않다고 분석했다. 전자회로 등 핵심부품에 쓰이는 희토류 등 북한의 풍부한 지하자원을 확보하면 남한에는 ‘횡재(windfall)’의 기회다. 이코노미스트는 ‘통일은 횡재다’라고 예상했다. ‘조갑제닷컴’ 대표 조갑제는 자신의 칼럼에 대통령의 ‘통일대박론’을 ‘머리가 시원해지고 가슴이 뻥 뚫리는 명언’이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통일 한국이 되면 독일 수준의 강대국이 될 거라고 믿었다.

 

풍부한 천연자원을 확보한 나라는 정말 강대국이 될 수 있을까? 꼭 그렇지만 않다. 콩고, 앙골라, 시에라리온, 라이베리아. 아프리카의 가난한 국가들이라는 것 말고도 이들 나라엔 공통점이 있다. 내전에 시달린다는 점과 천혜의 자원이 풍부한 국가라는 점이다. 땅만 파면 석유, 천연가스, 다이아몬드가 쏟아지는 나라들이 왜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제 땅에서 서로 싸우는 걸까. 이에 대해 경제학자들이 내린 결론이 있다. 이름하여 ‘천연자원의 저주’다. 나라 경제를 천연자원에 의존하는 개발도상국일수록 가난하고 부패한 독재자를 갖기 쉬우며 내전에 휩쓸리기 쉽다. 돈으로 쉽게 환산할 수 있는 자원으로 백성들 배를 불리면 좋으련만 지도자는 부패와 손을 잡고 저 혼자 부자가 돼버린다. 자원보유국의 관심이 더 큰 파이를 만드는 것보다는 기존 파이의 더 큰 몫을 차지하는 데만 쏠려있다. 그러면 정권을 유지하는 데 주로 사용되고 경제성장을 위한 물적, 제도적 기반을 닦는 데는 소홀해진다. 이를 눈뜨고 봐줄 수 없는 반대파는 무기를 들고 일어서게 마련이다. 천연자원들은 손에 돈을 쥐여 줄지는 모르지만, 일자리를 만들지는 못한다. 천연자원 중심 산업에 너무 쏠리면 다른 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리기까지 한다.

 

‘통일대박론’은 지나치게 낙관적인 전망이다. 통일 한국이 아프리카 빈국처럼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우파 경제학자들은 ‘천연자원의 저주’ 사례를 들면서 자원을 국유화한 나라의 실정을 비판하는데 우리나라가 잘 사는 이유를 ‘자원이 없다는’ 점에서 찾고 있다. 그러면서 ‘자원 빈국’인 우리나라의 빠른 경제성장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런데 우익의 거두 조갑제는 우리나라가 통일되면 ‘무지무지한 지하자원을 얻는 대박’이라고 주장한다. 대기업 산하 경제연구소 소속 경제학자들도 통일 한국의 북한 땅에 매장된 지하자원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는다. 지하자원을 이용하여 이익을 창출하는 통일 한국의 청사진을 벌써 그려놓는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도 한국이 다이아몬드와 석유가 없어서 복 받은 나라라고 말한다. 통일 한국은 다행히 다이아몬드와 석유가 없다. 베네수엘라처럼 천연자원을 국유화하는 일은 절대로 없다. 하지만 부정부패와 비리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북한의 천연자원을 개발할 권리를 얻기 위해 기업들이 정부에게 로비를 펼칠 거고, 권력과 기업이 불건전하게 공생하는 정경유착의 그늘이 우리나라 경제에 드리워진다. 부국(富國)이 되려면 국민의 생산 의욕을 증진하는 ‘좋은 제도(good institution)’가 정착되어야 한다. ‘좋은 제도’가 이루어지는 조건 중 하나가 바로 부패가 없는 사회다. 대통령의 ‘통일대박론’, 이코노미스트의 ‘통일 횡재론’을 무조건 긍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통일 한국 이후에 일어날 수 있는 ‘천연자원의 저주’를 대비할 수 있도록 경제 기초체력(Fundamental)이 안정적으로 탄탄해야 한다.

 

통일 한국이 ‘천연자원의 저주’에 걸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천만다행이다. ‘통일대박론’을 비관적으로 보는 내 입장의 근거가 부실하게 느껴진다면, 그에 대한 반박을 인정하겠다.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나와 세계》를 읽으면서 통일 한국의 미래상을 나름대로 예측해봤다. UN의 대북 제재 이후 북한 체제가 점점 흔들리고 있다. 어떤 이들은 저절로 북한이 붕괴하기를 원한다. 남한 정부와 남한 국민이 갑작스러운 변화에 철저하게 대비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지금 상황은 북한만의 위기가 아니라 언제가 닥쳐올 정세 변화를 맞아야 하는 남한의 위기일 수도 있다. 현실적이지 않은 ‘기우’에 불과한 것일까. 나는 통일 한국의 문제를 ‘건설적 편집증(constructive paranoia)’으로 조심스럽게 보고 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창안한 표현이다. 전통사회의 사람들은 현대인이 보기에 지나치게 조심성이 많다. 현대인은 전통사회의 구성원이 경험으로 습득하였던 것보다 위험을 잘못 평가할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다. 남북한이 통일되는 상황은 기쁜 일이지만,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정부가 통제할 수 없는 위험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성과는 화려해 보이지만, 문명사에 비추어 보면 그러한 발전이 이루어진 시기는 극히 짧은 순간일 뿐이다. 우리가 긍정적으로 보는 성과 역시 매우 취약한 토대 위에 서 있다. 우리나라뿐만 전 세계가 지구의 기후변화로 인한 식량 생산의 감소, 불평등 문제, 그리고 환경자원이 감소하는 위기에 직면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 우리나라는 통일이라는 특별한 내적 변수까지 고려해야 한다. 외적이든 내적이든 복잡한 요인들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국가의 흥망성쇠가 결정된다. 이를 간과한 채 국가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전망하면, 위기의 균열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지금 우리나라가 그러한 상황으로 가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나는 한마디로 ‘(정부가) 정신 못 차리면 통일은 쪽박이다’, 이렇게 생각한다. 

 

 

 


※ 딴죽걸기

 

 

 

 

* 2장에 국가의 ‘성쇠의 반전’을 설명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를 주장한 학자로 ‘다론 아제모을루(Daron Acemoglu)’와 ‘제임스 로빈슨’이 언급되었다. (70쪽) ‘다론 아제모을루’ 발음이 어려운데, 이 두 학자가 쓴 책이 2012년에 번역되어 나왔다. 원제는 ‘Why Nations Fail’, 번역본 제목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다. 이때 Daron Acemoglu을 ‘대런 애쓰모글루’로 표기되어 있다.

 

* ‘신적인 존재로 여기는 황제에 대한 충성심과 일본의 문화적 가치입니다’ (115쪽)
일황 호칭을 ‘천황’, ‘덴노(てんのう)’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호칭 표기에 대한 논란이 많으므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중국이 일황을 ‘황제’로 부른다.

 

 

* 책 부록으로 실린 질의응답 형식의 글 ‘재레드 다이아몬드에게 문명의 길을 묻다’를 보면서 약간 실망했다. 다이아몬드는 한국 교육을 미국 교육과 비교하면서 한국 교육의 장점을 칭찬했다. 212쪽에 있는 문장을 인용해본다.

 

“내가 알기로는 학교 교사의 위상이 미국보다 한국에서 더 높고, 학력 테스트에서도 한국 학생의 성적이 미국 학생보다 더 높습니다.”

 

한국 교사의 위상이 미국 교사보다 높다? 다이아몬드도 오바마 대통령처럼 한국 교육의 현실을 잘 모르는 '에듀켄탈리즘(educentalism, 교육 education과 오리엔탈리즘 orientalism를 합친 말)'의 환상에 빠졌다. 그것보다 다이아몬드는 우리나라가 출산율 저하 문제로 인해 교사 정원이 감소세로 들어서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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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재빠 2016-05-31 0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 놓은 지는 한 달이 다 되어가는데, 알라딘에서는 구매한 책에 대한 리뷰를 부탁하는데, 책을 읽는 것 보다 리뷰를 읽는 게 훨씬 좋은 것 같습니다.

cyrus 2016-05-31 17:52   좋아요 0 | URL
관심 있는 책의 서평을 읽을 때, 다른 분들이 쓰신 것도 같이 참고하셔도 좋습니다. 제 글은 책 내용과 전혀 관련 없는 사족이 많은데다가 줄거리 요약을 친절하게 하지 않습니다. ^^;;
 

 

 

 

 

 

 

 

 

 

 

 

 

 

 

 

 

 

20세기에 접어들면서 예술작품을 비평하는 방법이 갖가지가 쏟아졌다. 캐나다 출신의 문학평론가 노스럽 프라이(Herman Northrop Frye, 1912~1991)는 신화비평을 개척했다. 그는 세상에서 창작되는 모든 작품의 원형은 신화 속에 있다고 봤다. 신화비평가들은 우리가 흔히 고전이라고 부르는 위대한 작품들에서 신화의 원형을 찾으려고 한다. 《비평의 해부》(한길사)는 역사주의 비평과 미학적 비평의 한계를 극복하고, 신화비평의 골격을 제시한 프라이의 대표 저작이다. 

 

 

 

 

 

《덤불동산》(The Bush Garden: Essays on the Canadian Imagination)은 많이 알려지지 않은 프라이의 문학비평서다. 프라이가 1940, 50년대에 발표한 10편의 비평 관련 에세이들을 모은 책으로 1971년에 출간했다. 번역본 초판은 1990년에 나왔다. 이 책의 부제는 ‘캐나다 문학비평’으로 되어 있다. 책의 주제에 맞게 설명하면, ‘캐나다 시문학 비평’에 가깝다. 프라이는 1950년대에 발표된 캐나다 시인들의 작품을 소개하면서, 미국 시문학과 차별화된 캐나다 시문학의 특성을 확립한다. 여기서도 신화비평에 대한 프라이의 입장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프라이는 신화가 ‘시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는 열쇠’로 본다.

 

 

 

 

 

 

 

 

 

 

 

 

 

 

 

 

 

 

 

‘덤불동산(The Bush Garden)’은 캐나다인의 문화적 정서를 함축하는 제목이다. 광활한 자연 속에 살아가면서 키워진 캐나다인의 상상력을 의미한다. 프라이는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집 《수잔나 무디의 일기》(The Journals of Susanna Moodie, 1970)에서 이 표현을 빌려 왔다. 애트우드는 현재 캐나다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소설가로 알려졌지만, 원래 시인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수잔나 무디(Susanna Moodie, 1803~1885)는 영국 식민지 시절 캐나다에 활동한 여성 시인이다. 애트우드는 여성 시인의 목소리를 통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캐나다인의 정서를 표현했다.

 

 

 

 

 

 

 

 

《덤불동산》에 소개된 캐나다 시인들 전부 생소하다. 캐나다 시를 접해보지 않아서 프라이의 비평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 책에 인명 색인이 없어서 캐나다 시인들에 대한 정보를 찾지 못했다. 그래도 이 책을 산 것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책을 대충 넘기다가 반가운 이름을 만났다. 싱어송라이터로 유명한 레너드 코헨(Leonard Cohen)이 시인으로 소개되었다. 코헨은 1956년에 《신화를 비교해봅시다》(Let Us Compare Mythologies)로 첫 시집을 발표했다.

 

 

 

 

 

 

 

 

 

 

 

 

 

 

 

 

그는 시와 소설을 발표하다가 1967년에 첫 음반을 발표하면서 가수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프라이는 시인으로서의 코헨을 호의적으로 보면서도 그의 기교를 비판한다. 지나친 감정 과잉이 독자들의 시적 경험을 방해한다고 지적했다. 그래도 프라이는 젊은 시인 코헨의 가능성을 내다봤다. 유대 신화, 기독교 신화, 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한 코헨의 시를 캐나다 시인 중 누구도 쓰지 못한 독창적인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재미있게도 프라이는 시집만 비평하지 않는다. 캐나다 고등학생들의 시와 산문을 모은 문집에 찬사를 표하기도 한다. 그는 시를 마음껏 쓰고, 공감할 수 있는 관대한 분위기 속에서 학생들이 시를 쓰게 되면 시에 대한 사랑을 키울 수 있다고 말한다.

 

 

시는 의지로 쓰이는 것이 아니며 사회 역시 의지로 시인을 배출할 수는 없다. 캐나다는 자국 내에서 좋은 시가 배출되길 강렬하게 열망하고 있다. 그렇지만 사회의 의지가 교육에 나타나 있듯이 시를 읽을 때 훌륭한 시를 인식할 수 있는 세련된 시 독자층을 형성하는 데만 주력하고 있다. 젊은이에게는 반드시 시를 쓰도록 격려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시를 잘 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발견하는 지점에 이르면 시 쓰는 것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시를 쓰도록 격려해야 하는 주 목적은 시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에 대한 사랑을 기르고자 함이다. (《덤불동산》 88~89쪽, 글쓴이가 임의로 편집해서 인용했음)

 

 

캐나다와 한국은 닮은꼴이 있다. 두 나라 다 식민지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자국의 문학이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지기를 원한다. 드디어 캐나다는 숙원을 이루어냈다. 2013년에 앨리스 먼로가 노벨상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마거릿 애트우드가 건강하게 오래 산다면, 노벨상을 받는 두 번째 캐나다 작가 소식을 기대해볼 만하다. 반면 우리나라는 연말만 되면 고통스럽다. 언론과 독자들은 매번 ‘희망 고문’에 시달린다. 이 사회는 ‘좋은 시인’이 아니라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나오기를 강렬하게 열망한다. 시는 독자들에게 푸대접받는다. 시집은 많이 나오는데 시를 읽는 사람이 많지 않다. 우리나라 교육은 시를 정형화된 방식에 따라 ‘해석’하고 ‘암기’하는 독자층을 만들어낸다. 시를 읽는 방법을 모르는 독자들은 동시대 시인의 시가 ‘해석 불가능’한 텍스트로 규정한다. 시가 난해하다고 불평한다. 독자가 시를 외면하는 상황은 단순히 시인들의 자질 문제만은 아니다. 우리는 시에 대한 사랑이 많이 모자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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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05-10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ㅗ 덤불동산이란 책이 있었군요. 금시초문이었슴돠..
프라이 신화 비평 재미있죠.. 이 사람 영향으로 저는 시빌워도 신화에서 빌려왔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늘 아래 새로운 것 없슴돠..

cyrus 2016-05-10 19:54   좋아요 0 | URL
《비평의 해부》는 아직 안 읽어봤어요. 분량이 두껍던데요. 인간은 신화를 엄청 좋아하죠. 그래야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기에 좋은 구실을 만들 수 있으니까요. 특히 박근혜, 이명박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신화’ 만드는 일을 좋아했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