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교양 수업 - 내 힘으로 터득하는 진짜 인문학 (리버럴아츠)
세기 히로시 지음, 박성민 옮김 / 시공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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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또 인문학 타령인가?”

 

출판사가 보내준 신작 도서의 제목을 보자마자 탄식이 저절로 나왔다. 책 제목은 이렇다. 《나를 위한 교양 수업》. 우리나라는 정말 인문학을 사랑하는가 보다. 독자들의 환심을 사려고 아예 ‘스티브 잡스의 인문학’이라는 문구를 달았다. 책 뒤표지에 리버럴 아츠(Liberal Arts)와 기술의 교차를 강조하는 잡스의 말까지 책의 추천사처럼 나와 있다. 잡스로부터 시작된 인문학 열풍이 지난 지가 언젠데 잡스의 터틀넥 티셔츠 옷자락을 붙잡고 인문학 ‘장사’를 한다. 인문학을 논할 때 잡스를 추켜세우는 일은 곤란하다. 그가 죽어서도 생전에 남긴 아이디어 유전자는 세상을 움직이고 있다. 아이팟, 아이폰 등이 꾸준히 팔려나가고 있다. 잡스의 위대한 유산을 깎아내리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잡스의 이름에 기대는 인문학은 사람들에게 편견을 심어준다. 잡스처럼 ‘성공한 장사꾼’이 되려면 인문학을 알아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 삶을 성숙하게 해주는 인문학의 의미는 사라지고, 부를 거머쥐게 하는 인문학이 강조된다. 성공 지상주의 사회에서 인문학은 성공과 명예를 끌어모으는 마법의 자석이 된다.

 

잡스의 성공 신화가 너무나도 유명해져서 그런지 ‘스티브 잡스의 인문학’이라는 단어가 불편하게 느껴진다. 성공을 위한 인문학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리버럴 아츠를 소개하는 책의 앞표지에 ‘스티브 잡스의 인문학’을 전면으로 내세우는 저자 혹은 출판사의 의중이 심히 의심스럽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이 책을 끝까지 읽어보면 스티브 잡스의 이름이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혹시 이 책에 스티브 잡스가 나오는 문장을 발견한 분이 있다면 댓글로 쪽수를 알려주시라. 확인되면 잘못된 내용을 삭제하고 바로 잡겠다) 리버럴 아츠는 원래 고대 그리스 귀족들이 배우는 기초 교양 과목을 의미했다. 오늘날에는 인간의 정신을 자유롭게 갈고 닦는 데 도움이 되는 폭넓은 교양을 의미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자연과학, 철학, 문학, 음악 등 경계를 두지 않는 전방위로 분야를 이해하는 것이다.

 

책을 쓴 사람은 법관을 지낸 적이 있는 세기 히로시다. 현재 메이지대학 법과대학원 전임교수로 활동하고 있는데,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많다. 그는 칠순을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오프스프링(The Offspring)의 펑크 록을 즐겨 듣는다. 그래서 책에 드러내는 저자의 생각에 꼰대 느낌이 나지 않는다. 저자는 교양을 어렵게 생각하는 젊은이들의 마음을 너그러이 이해해주기도 한다. 교양을 난해한 용어를 써가면서 가르치는 학자와 미디어를 비판하면서 교양이 남에게 과시하는 수단을 전락해버린 상황을 안타깝게 여긴다. 이런 현상이 젊은이들이 교양을 기피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저자는 권위에 속박되지 않으려면 무경계의 분야를 다루는 리버럴 아츠를 몸에 익혀 구사해야 한다고 말한다. 카를 만하임의 ‘지식과 사상의 존재 피구속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면서 틀에 박힌 사상이나 사고방식에 갇힌 협소한 시야가 아닌 자유롭게 수정과 보완을 실행하는 전체적인 시야를 가진 지식인의 역할을 강조한다.

 

책의 2부는 자연과학(생물학, 뇌신경과학, 정신의학), 3부는 철학, 인문사회, 논픽션, 4부는 예술(문학, SF, 영화, 음악) 등으로 구성되어 살아가면서 알아두면 좋은 리버럴 아츠 분야를 소개하고 있다. 각 분야의 기초적인 성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며 각각의 장이 끝나면 저자가 추천하는 도서목록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저자의 관심사가 많이 반영되어 있다는 점이다. 3부에서 저자가 추천하는 역사학자는 필립 아리에스뿐이었고, 정신의학을 설명하는 장에 칼 융을 소개하는 비중이 프로이트와 아들러보다 너무 적다. 저자의 소개만으로 지적 갈증이 채워지지 않는다면, 우리 독자 스스로 해갈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책 제목이 ‘나를 위한 교양 수업’이다. 독자가 직접 교양(culture)이라는 이름의 밭을 경작할 줄 알아야 한다.

 

책 구성면에서 부족한 점이 역력하지만(스티브 잡스를 끌어들이는 홍보 문구가 아니었으면 심심한 책인데도 더 좋게 봐줄 수 있었다), 리버럴 아츠를 배우면서 얻게 되는 진짜 가치를 아는 저자의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리버럴 아츠를 통해서 자신만의 사고방식을 관철해 나아가는 힘, 그리고 살아가면서 생각하면서 느끼는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성공에 초점을 맞춘 인문학 풍조가 팽배한 우리 사회에 충고하는 말처럼 들려진다. 리버럴 아츠를 배우려는 방법은 간단하다.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면 된다. 고전 한 권을 독파해서 베껴 쓰는 방법만 인문학을 깊이 이해하는 방법이 아니다. 자기 생각이 옳다고 고집부리는 인문학 장사꾼들이야말로 세기 히로시가 경계하는 ‘지식과 사상의 존재 피구속성’의 함정에 빠진 자들이다. 이들은 인문학을 자신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한 선전으로 활용한다. 리버럴아츠는 특출한 재능을 가진 천재들만 배우는 교양이 아니다. 오히려 저자는 우리가 생각하는 천재들도 생전에 악평을 받았으며 보통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고 말한다. 천재들이 만든 고전을 권위 있는 글로 이해하는 순간, 그걸 비판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너무 어렵게 생각한다. 천재들의 특별 공부법을 그대로 따라 할 것을 요구하고, 자신이 진짜 ‘생각하는 인문학’이라고 강조하는 이 모 작가와 무척 비교된다. 인문학을 왜 배워야 하는지 잘 모르는 사람에게 이 모 작가의 책이 아닌 세기 히로시의 책을 소개하고 싶다.

 

그리고 이 모 작가에게 세기 히로시의 인문학을 권한다.

 

 

 

 

 

P.s 1) 88쪽에 올리버 색스의 사망 연도를 표기하지 않았다. 2쇄를 만들 때 반영했으면 좋겠다.

 

 

P.s 2) 출판사가 제공하는 서평 도서가 새로 만들어진 출판법(도서정가제와 관련되어 있음)으로 인해 사라진다는 비보를 접했다. 아마도 이 책이 마지막 출판사 서평 도서가 될 것 같다. 출판사가 서평 도서를 무료로 준다고 해서 그에 대한 답례로 무조건 칭찬 일색으로 쓰는 건 옳지 못하다. 책을 읽다가 잘못된 점이 있으면 서평으로 알려줄 필요가 있다. 출판사 서평 도서 제공이 금지된 원인을 무조건 도서정가제로만 돌릴 수 없다. 출판사가 선호하는 홍보용 독자 서평이 쓰는 우리 독자들에게도 작지 않은 책임이 있다. 서평은 이 책을 읽으려는 독자들을 위해 쓰는 것이지 책 만드는 사람들의 기분을 맞추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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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5-11-05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아니, 어제 <코파기의 즐거움>보다 별점이 낮습니다. 그럼 이 책은 대체...^^
2. 이 모 작가가 누군지 급 궁금해집니다. 비밀댓글로 부탁드려요. ^^
3. 출판사 제공 서평 도서 제도가 사라진다는 비보에 저도 많이 아쉽습니다.
4. 오늘도 독자를 위한 서평...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

2015-11-08 16: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금행복하자 2015-11-05 1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자를 위한 서평. 감사합니다~
인문학을 이야기하는데.. 누가 저 혼자만을 위한 인문학이라고 하더군요~ 제가 이기적으로 보이나봐요 ㅎㅎ
그런걸보면 인문학의 남발이 좋은것만은 아니지 싶습니다~

cyrus 2015-11-08 16:33   좋아요 0 | URL
인문학이 좋다고만 열심히 말한 뿐, 현실은 시궁창에요. 대학교에서 인문학을 푸대접하는 열악한 현실이 달라지지 않는 이상, 요즘 인문학은 그냥 개인의 감정을 달래고, 맞추기 위한 사탕에 불과합니다.

지금행복하자 2015-11-08 16:43   좋아요 1 | URL
달래고 위안하기 위한 그런것을 인문학이라고 할수는 없죠~ 인문학의 가면을 쓰고 있을뿐.. 인문학의 쓴 맛을 제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 책 많이 읽는다고 인문학을 한다고 할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이상하게 요즘은 책 많이 읽으면 인문학한다고 하더군요~
다독은 그저 다독일뿐..

cyrus 2015-11-08 16:50   좋아요 0 | URL
저랑 생각이 비슷합니다. 인문학을 강조한답시고 독서를 권하는 상황이 불편해요. 인문학 열풍에 기댄다고 해서 평소에 책을 멀리 하던 사람들이 책을 읽을까요? 읽는다고 해도 유명 저자의 책만 찾아 읽을 겁니다. 우리 사회는 베스트셀러 몇 권 읽어주면 나름 책 좀 읽는 사람으로 둔갑하기 쉬워요.

2015-11-05 1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08 16: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yureka01 2015-11-05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잡스가 에플폰을 인문학에서 도출했다고 하니....돈벌이를 위한 인문학이 불같이 일어 났던..동기가 참 씁슬한 인문학바람이 못내 아쉽습니다.
그렇거나 말거나 지금 인문학이 진짜 인..사람을 위한 건지..속내는 돈을 위한 사람학문인지..분간하기도 어렵더군요,,

cyrus 2015-11-08 16:38   좋아요 0 | URL
정확하게 지적했습니다. 돈을 위한 인문학이라면 곧 기업, 혹은 기업에 소속된 사람들을 위한 학문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어요. 기업을 위한 인문학과, 또 다른 한쪽에 노동자를 위한 인문학(얼 쇼리스 식 인문학)이 따로 갈라져 있는 현실도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지극히 현실성이 떨어질 수 있는 제 개인적 생각이지만, 인문학에도 계급 갈등으로 나눠지면 볼만 하겠습니다. 그러면 기득권자(대졸)들은 노동자를 위한 인문학을 ‘종북’ 딱지를 붙이려고 할 겁니다.

인디언밥 2015-11-05 20: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래서 첫인상이 중요하군요. 흐~

그나저나 이xx님이 누군지 궁금해지네요. ㅋㅋ 저도 이씨인데 뜨끔.. ㅎ_ㅎ

정성듬뿍서평 잘 읽고 갑니당

cyrus 2015-11-08 16:39   좋아요 0 | URL
많이 궁금하셨을 텐데, 답글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XX
X지X
XX성

fledgling 2015-11-05 2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결혼했죠~ 그분이 맞는듯..ㅎ

cyrus 2015-11-08 16:39   좋아요 0 | URL
잘 아시네요. ^^

stella.K 2015-11-06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당구 선수와 결혼했다는...!ㅋ
그런데 이 책 그 사람한테 권할 정도라면 평점이 높아야하는 것 아냐?
별 두 개 가지고 그 사람이 읽을까...?

cyrus 2015-11-08 16:46   좋아요 0 | URL
“이 모 작가에게 세기 히로시의 인문학을 권한다.”

이 멘트는 이지성 작가의 드립을 패러디한 겁니다. 개드립인거죠. 이지성 작가의 글 제목이 <지 드래곤에게 인문학을 권한다>(링크: https://storyfunding.daum.net/episode/935#)거든요. 이지성 작가 비판론자들이 이 글을 페이스북에 공유하면서 깐 적 있었어요. 제가 링크한 글의 댓글 한 번 보십시오. 댓글이 더 재미있을 겁니다.

페크pek0501 2015-11-07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삶을 성숙하게 해주는 인문학의 의미는 사라지고, 부를 거머쥐게 하는 인문학이 강조된다. 성공 지상주의 사회에서 인문학은 성공과 명예를 끌어모으는 마법의 자석이 된다.˝
기억해 놓겠습니다. 좋은 글 읽고 갑니다. ^^

cyrus 2015-11-08 16:47   좋아요 0 | URL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

yamoo 2015-11-08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제목을 보니 막 짜증나려고 합니다...ㅋㅋ
계속 이런 책들이 나오는 게 참으로 아이러니 합니다. 인문학자들은 죽어나가는데 말이죠..

근데 이 모작가 보고 바로 이지성 떠올렸더랬습니다..ㅎ

cyrus 2015-11-16 21:17   좋아요 0 | URL
우리나라에 소위 본인 입으로 인문학을 한다는 사람으로 강 씨와 이 씨가 제일 유명하죠. 이 두 사람이 많이 알려지니까 시류에 편승해서 아류작들을 만드는 사람들도 생겨나고 있어요. 씁쓸합니다.
 
시의 힘 - 절망의 시대, 시는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는가
서경식 지음, 서은혜 옮김 / 현암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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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정치에 관해 얘기할 수 있고 잘못된 정책이라고 판단되면 신랄하게 꼬집을 수 있어야 한다.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유신체제의 폭압에 대해 어느 시점에 몸을 던져 저항할 것인가 하는 결단의 강박 아래 살아야 했다. 그렇지만, 가장 먼저 앞장서서 저항의 등불을 밝힌 청년들이 있었다. 대학 강의를 듣는 일보다 시위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들였고, 조국의 현실 앞에 눈물을 쏟아냈으며, 때로는 온몸을 불살라 절규도 했다. 그들이 공유하는 문학도 새로웠다. 저항시가 문학적 위세를 떨쳤다. 80년대에 노동자시 혹은 농민시라는 이름으로 시들이 시대의 아픔을 겪고 있는 많은 사람에게 공감을 심어 주었다. 시인들은 저항과 투쟁의 거리 한가운데를 달리며 의연한 싸움으로 ‘문학의 사회적 역할’을 지켜내려고 노력했다.

 

길거리에 최루가스 냄새가 사라진 이후 대학생들은 자유분방해졌다.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 사이에서 과거에 들끓던 민주화운동을 정리할 필요를 느낄 만한 시점이다. 그래서일까. ‘자유’와 ‘민주주의’를 부르짖던 젊은 작가들은 어느덧 세월이 흘러 문단을 주도하는 중견, 원로급 작가가 되었고, ‘역사의 시간’으로 남은 그 시절을 복원하려고 노력한다. 역사라 이름 지어진 순간들은 과연 시간의 저 너머 어딘가에 묻혀 발굴을 기다리는 유물 같은 것일까. 유신체제 시절을 그리워하는 자들은 역사를 거꾸로 돌아가려고 한다. 역사의 오욕과 역류가 벌어지는 오늘의 역사에 삶의 정당성을 위해 싸웠던 지식인들을 지금 무엇 하고 있는가. 그들의 모습에는 민주주의를 위해 달려오게 한 저항의 에너지가 보이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완성되지 않았다. 부정한 사회에 따끔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유도하는 에너지로 전환되기는커녕 과거 추억팔이에 한창이다.

 

시는 비틀거리고 있다. 자기 성찰 하나 없이 지고지순한 세상이 온다는 희망만 노래할 뿐, 진실한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진짜 큰 문제는 시인을 구속하는 현실이다. 시인의 희망을, 타인의 고통과 절망을 외면하지 못하는 여린 마음을 불법이라고 낙인찍는 나라다. 송경동 시인의 빈자리를 채워주는 문인들이 보이지 않는다. 내가 그들을 보지 못한 걸까, 아니면 그들이 과거의 학습효과 때문에 몸을 사리고 있는 것일까.

 

시가 휘청거릴 때 서경식 선생의 책이 구원의 손길처럼 다가온다. 만약에 서 선생이 시인이었다면 자신의 분신이라고 할 만한 사랑, 민주주의, 인권, 자유를 담았을 것이다. 선생은 독서와 시 창작에 매달리며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대우를 이겨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박일호라는 필명으로 개인 소장판 시집을 펴낸 적도 있다. 그는 고통스러운 삶 속에 ‘시’라는 작은 창을 발견했다. 이때부터 선생은 삶과 자유를 갈망하는 ‘실천자’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었다. 시는 그를 국가와 언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폭력을 고발하는 지식인으로 끌어들인 안내자가 됐다. 선생은 ‘시’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오늘날 시가 현실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찰하고 있는지 자문한다.

 

일제강점기 우리 문학에서 ‘저항시’라는 장르는 도드라진다. 시어는 감각적이고 함축적이어서 다른 장르에 비해 저항의 정치성을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는 빼앗긴 국토에 대한 상실감과 그것을 다시 회복시켜야 한다는 강한 의지력이 담겨 있다. 윤동주는 하늘, 바람, 별 같은 서정적인 시어를 골라 썼지만, 그것들이 속한 것은 ‘조국’이었다. 조국의 현실에 아파하던 시인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서시」)면서 삶의 괴로움을 외면하지 않고 이겨나갈 것을 다짐한다. 찌그러진 사회에 몸을 굽히지 않는 시인들의 의식은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시대에도 이어진다. 양성우가 ‘겨울공화국’이라고 칭했던 유신 때도 시인들의 저항은 멈추지 않았고, 박노해는 소외된 노동자들의 삶에 진지한 관심을 드러낸다.

 

정치와 문학의 결합. 서 선생은 사회 앞에 침묵하지 않는 시를 나카노 시게하루의 표현을 빌려 “서정시 형태의 정치적 태도”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선생이 생각하는 시의 힘이요, 비정한 권력의 힘에 저항하게 하는 의지다. 선생은 여전히 저항시가 현실에 유효한지 의문부호를 단다. 그런데도 마땅한 좌표를 찾지 못하는 현실을 직시하는 저항시의 흐름이 이어지기를 원한다. 직설적 언어로 사회 개혁의 의지만을 천명하기보다는 거대한 대중들을 이끌어내도록 유도하는 실천의 언어가 절실히 필요하다.

 

문학의 비판 기능이 사라진다면 사회의 가치 체계는 전도되게 마련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우리의 적을 닮아버렸다. 정직하게 분노하는 방법을 잊고 만다. 부조리한 현실을 회의하고 생각하는 문학이 너무도 드물다. 시인이라는 직업은 불운하다. 직관과 영감으로 번뜩이는 아름다운 노래를 읊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한다. 그렇지만 좋은 것만 보고 싶은 마음으로 시를 만든다면 그 시는 정말 진실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까. 김수영, 송경동처럼 정의와 도덕이 무의미해지는 시대를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시인이 우리 사회에 존재해야 한다. 이들은 절대 침묵하지 않는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시를 쓰면서)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그러한 문학을 꿈꾼다. 고통을 회피하지 않는, 더 정확하게는 회피할 수 없도록 정해진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시의 힘》을 읽고 있을 때, 김수영이 '눈'에서 젊은 시인들에게 재채기하라고 했던 구절이 퍼뜩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정직한 분노를 묵살해버리는 백색으로 위장한 어두운 현실에 대고 ‘기침’을, 재채기하는 계절이 돌아왔다.

 

 

 

 

 

일본은 타이완과 조선을 식민지로 삼아 지배하고 ‘만주’의 패권을 러시아 다투고 있다. (102쪽) → '러시아와 다투고 있다'로 고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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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5-10-15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 지금 젊은이들이 그때보다 더 치열하게 사는 건지도 모르죠.
치열이 개인화 되어 버렸더군요..
포기된 시대에 각자도생만 나부낍니다.

cyrus 2015-10-15 21:20   좋아요 0 | URL
안정적인 삶을 위해서 치열하게 살다 보니 정작 정치에 대해 고민할 기회가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아요. 이렇다 보니 사람들이 정치에 `정` 자만 들어도 냉소적으로 생각해요.

csp 2015-10-15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우리의 적을 닮아간다˝는 서평 속 문장이 와닿는군요. 조만간 읽어봐야겠습니다.

cyrus 2015-10-15 21:22   좋아요 0 | URL
책 속에 좋은 글이 많습니다. 특히 세계문학과 한국문학의 정의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글이 좋습니다. 노벨 문학상 수상에 연연하는 우리 사회를 반성하게 되는 글입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 KBS 선정 도서
아툴 가완디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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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늙어 가야 하는지 아는 것이야말로

삶이라는 위대한 예술에서 가장 어려운 장이다.”

 

(앙리 프레데릭 아미엘)

 

 

 

흰머리는 천천히 피어난다. 드문드문 새치에서 시작해 희끗희끗 귀밑을 파고들다 슬금슬금 정수리로 올라가며 중원을 장악한다. 은빛 중년이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인정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한 탓일 게다. 인생 후반전에 들어서는 중년은 생일이 더 이상 반갑지 않다. 삶도 계절처럼 순환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든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는 생명체는 없다. 이런 사실을 누구 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불로초를 구하던 진시황의 고사부터 최근 눈부시게 발전해가고 있는 유전자 연구나 생명복제에 이르기까지 이 모두가 생명의 영속성을 갈구하는 데서 출발한 것이 아닐까.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노화현상이 두드러지게 되고 특히 갱년기에 들어서면 누구나 신체변화를 절감하게 된다.

 

노령인구의 부양을 경제·사회적 차원에서만 생각한다면 그것은 온전한 대응법이라고 할 수 없다. 노년에 닥친 개인이 인생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가 하는, 인생론적 차원의 접근법 또한 필요하다. 특히 ‘노인’은 있어도 ‘원로’는 찾아보기 힘든 사회가 된 지 오래인 우리 현실에서 잘 늙어가는 지혜를 터득하는 일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부키, 2015)는 이런 우리에게 적지 않은 도움을 주는 책이다.

 

가완디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늙음’과 ‘죽음’이다. 이렇게 둘로 요약할 수 있다. 그는 먼저 늙음에 대해 말한다. 노화에 성공한 사람은 편안하게 죽음을 맞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생에 대한 미련 때문에 불안과 공포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일단 노인 소리를 듣기 시작할 때는 자신이 노년기에 접어들었고 멀지 않아 죽음에 도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물론 여한 없는 일생을 살아왔다면 죽음을 준비하는 문제는 비교적 쉽게 풀리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노화는 항시 보편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생명체에게 있어서 다른 특별한 과정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숙명인 죽음이 죄가 아니듯, 늙어감 역시 잘못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노년의 위축되고 초라한 모습을 편안한 심정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죽음은 아무도 경험해보지 못한 절대 고독이므로 자연현상으로 받아들이기가 전혀 쉽지는 않다. 현대 의학이 발달한 덕택에 수명을 오래 연장할 수 있는 일말의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되었다. 현대 의학은 생명 연장의 꿈을 실현하는 데 거의 모든 역량을 집중시키고 있다. 그러나 가완디는 의학적 싸움에 고통스러워하는 환자와 가족들을 지켜보면서 ‘오래 사는 것이 축복이다’라는 희망적 기대에 의문을 가진다.

 

암 투병 중인 저자의 아버지는 고통스러운 방사선 치료를 받았지만, 고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생명유지만을 위한 치료를 멈추고 호스피스를 택한 그는 거의 마지막까지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의사들은 노화과정을 자연스러운 삶 일부로 보기보다 ‘질환’으로 취급해 치료하려고만 한다. 고작 한 달을 더 살기 위해 환자는 병실에서 죽음과 고통스러운 전쟁을 선택한다. 수술에 성공하더라도 남은 생만 비참해질 뿐이다. 의사는 환자를 살릴 방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생을 어떻게 보낼 것이며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과정을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의료인 입장에서는 죽음을 돕는 일보다 개인의 우선순위를 도출해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일이 더 어렵다. 의사인 가완디는 의학적 충동과 개입을 최소한으로 줄여야 하는 상황을 선택하기가 쉽지 않다고 고백한다. 환자의 고통과 죽는 순간을 가까이 보는 의사의 고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노년의 가장 큰 고통은 고독과 소외이다. 자식이 보험이 아닌 세상이 되어 이제는 생존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노인들이 많아졌다. 이러한 노인들은 세상과 시대를 원망하고 자학하며 후회와 절망 등 해로운 감정으로 노화를 가속하고 있다. 환자나 주변 사람들은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는 노화가 슬프고 믿어지지 않아 피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성장과 노화는 한 뿌리에서 시작된 것, 우리는 그것을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모르는 척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서 읽어낸 노년은 그래서 참 아프다. 그렇지만 우리는 자신의 두려움과 희망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를 선택해야 한다. 자신이 하는 일에서 자신의 가치와 믿음을 찾고, 연장된 생애를 보다 의미 있고 소중하게 인식하여 심리적 성숙 안정을 꾀할 수 있어야 한다. 부담을 주는 값비싼 수술로 생명을 조금 늘리기보다는 환자를 잘 보살피는 일이 중요하다. 생명을 연장하려는 인간의 욕심은 죽음을 유예하는 일일 뿐이다. 우리 모두 공평하게 한 살씩 나누어 가질 것이다. 주름은 더 깊어질 것이고, 몸은 더 약해질 것이다. 그 주름과 그 약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한다. 늙음을 인정하기로 한다. 이렇게 책 한 권에서 나는 배운다. 늙음과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지금을 잘 살아내기 위한 제일 나은 방법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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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행복하자 2015-08-22 00: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몇년전 아버지의 죽음을 격은 뒤로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암투병 8개월만에 가셨는데.. 가시고 남은 자리가 깨끗한걸 보고.. 아버지가 당신의 죽음을 예감하셨구나. 그래서 정리를 다 하셨구나~ 라는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자식된 입장에서는 서운하고 안타깝지만 생을 마감하는 당사자에게는 꼭 필요한 시간일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마지막 얼굴이 고통에 일그러져계시다는 느낌보다 이제 편안해지겠구나하는 안도의 표정이 아버지의 얼굴에서도 읽혔었어요. 저희는 생명연장안한다고 동의서에 사인해서
당신 가는 길을 중환자실이 아닌 일반병실에서 그래도 자연스럽게 맞이할수 있었던것도 다행이라 싶구요.
아직 젊을때 여유가 있을때 죽음을 충분히 생각하고 잘 죽고싶다는 생각해요. 아이들하고도 이렇게 죽고싶다고 이야기도 나누고요~~
잘 늙고 잘 죽어야할텐데 맘대로 되는 일이 아니라 더 공 들여야할것 같아요~~

cyrus 2015-08-22 21:25   좋아요 0 | URL
행복님의 선택 덕분에 아버지께서 아주 편안하게 좋은 곳을 가실 수 있게 되었군요. 죽음을 생각한다는 게 어찌 보면 어둡게 보일 수 있지만, 언제 다가올지 모를 일이기에 여생을 허투루 보내지 말아야겠습니다.
 
심리정치 - 신자유주의의 통치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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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님이 저에게 양말을 줬어요! 도비는 자유로운 집요정이에요"

 

(영화 <해리포터와 비밀의 방>에서 도비가 하는 말)

 

 

 

인터넷 서점 알라딘이 올해도 고객의 구매 기록을 수치화한 통계 내역을 공개하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알라딘 홈페이지 위에 ‘당신의 총 구매 금액은 얼마일까요? 라는 문구가 적힌 배너가 보인다. 알라딘 구매 고객이라면 그동안 구매한 책이 총 몇 권이며 월평균 구매 금액은 얼마인지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가장 많이 구매한 작가가 누구인지, 거주지에서는 몇 번째로 책을 많이 구매했는지 등 다양한 구매 관련 통계도 확인할 수 있다. 서비스 오픈 16주년 기념 이벤트 기간 중 이벤트 대상 도서를 포함해 5만 원 이상 구매하면 책 표지로 만든 북 스탠드를 받는다. 알라딘 측에서는 구매 고객을 위한 16주년 특별 선물이라고 하는데 이 선물을 받으려면 지갑을 과감히 여는 결단력이 필요하다. 구매 과정에서 선택한 증정품에 따라 구매 마일리지가 차감된다. 도서정가제의 최대 할인 폭인 ‘정가의 15%’를 넘지 않기 위해서다.

 

 

 

 

 

알라딘은 구매 고객의 눈에 속삭인다. 당신은 16년간 알라딘과 함께했다고. 그러면서 당신의 구매 기록을 보여준다. 램프의 요정 지니(genie)는 알라딘의 소원을 다 들어주는 신령이다. 알라딘은 디지털화로 탈바꿈한 거대한 지니다. 일명 ‘디지털 지니’다. 알라딘 홈페이지를 접속하는 구매 고객이 지니에게 명령하는 알라딘이다. 그래서 알라딘 블로그를 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알라디너’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기서부터는 구매 고객을 ‘알라디너’로 부르겠다) 디지털 지니는 알라디너가 가지고 싶은 것을 보여준다. 알라디너는 매달 디지털 지니가 선보이는 증정품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책을 주문한다. 디지털 지니는 책을 구매한 알라디너에게 선물을 준다. 5만 원 이상 책을 사지 않은 사람은 선물을 받을 수 없다. 디지털 지니는 16가지나 되는 알라니더의 기록들을 상세하게 기억한다. 그리고 알라디너에게 지금과 같은 독서 패턴을 쭉 유지하면, 80세까지 몇 권의 책을 더 읽을 수 있다고 알려준다. 자신의 구매 기록을 타인에게 공개하도록 권유까지 한다. 알라디너는 자신의 구매 기록에 흡족해하면서 수치화된 독서량을 블로그나 SNS에 공개한다. 16가지의 맞춤형 기록을 다 보여주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디지털 지니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알라딘과 함께해 주세요!”

 

심리정치 시대에 사는 대중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자유로운 존재라고 착각한다. 신자유주의는 대중에게 자유를 허용한다고 약속을 하나, 현실은 자유를 얻으려면 자본이 필요하다. 즉, 자유를 누리기 위해 열심히 일해서 얻은 자본을 지불해야 한다. 자유를 얻기 위한 돈을 마련하려고 노동에 투입되다 보니 기본적으로 누려야 할 자유마저 희생하는 상황을 감수한다. ‘디지털 지니’ 알라딘이 운영되는 방식은 디지털 심리정치의 원리와 상당히 유사하다. ‘하고 싶다’라는 욕망을 창출하고 자발적으로 착취하게 하는 신자유주의 통치술이 심리정치라고 한다면, 알라딘의 디지털 심리정치는 알라디너에게 ‘책을 사고 싶다’라는 욕망을 부추기는 자본주의의 메피스토펠레스다. 독서를 권장하는 세련된 악마는 알라디너의 지갑과 구매 마일리지를 담보로 증정품을 준다. 알라디너는 매년 달라진 게 없는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알라디너는 알라딘에서 읽고 싶은 책을 산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읽고 싶은 책을 고를 수 있는 자유가 제한적이다.

 

‘알라딘 추천마법사’는 알라디너의 구매 내역, 클릭 내역, 블로그 활동 등을 기반으로 고객의 취향을 분석해 그에 맞는 최적의 도서를 추천해주는 서비스이다. 추천마법사는 사람과 사람 간의 상호 영향을 수집하는 빅테이터를 기반으로 한 추천 시스템이다. 알라디너의 구매 성향이나 관심사 등을 통계적으로 분석하여 알라디너에게 책을 추천한다. 최고의 책을 투표로 선정하는 ‘제6회 독자 선정 이 분야 최고의 책’ 이벤트에 알라디너는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의 최고의 책을 뽑을 수 있다. 추천마법사에 근거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빅데이터는 우리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행동패턴, 무의식적 욕망까지 읽어 낸다. 한병철은 인간의 행동을 정량화하는 빅데이터가 자유의지의 종언을 초래한다고 주장한다. 북플의 마니아 지수는 북플 내 모든 활동을 수치화한 것이다. 관심 있는 책에 별점을 주거나, 서평을 작성하면 누구나 특정 분야의 마니아가 된다. 결국, 지수를 높여서 어떤 분야의 첫 번째 마니아가 되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책을 구입하고, 읽고, 글을 쓰는 일에 시간과 비용을 투자한다. 알라딘의 스마트 권력은 소통이라는 이름을 내세워 무제한의 자유를 허락하고 있지만, 알라디너는 '자유'라고 착각한 채 글이나 사진을 블로그에 채움으로써 스스로 노출하고 전시한다. 자기 노출의 정보는 더 많은 구매욕을 생성한다. 북플은 마니아 지수가 높은 알라디너와의 소통을 유도하여 마니아가 소개한 책을 읽도록(구매하도록) 장려한다. 만인이 만인을 감시하는 ‘디지털 파놉티콘’ 안에 욕망을 창출하는 심리정치가 작동된다.

 

한병철은 신자유주의 통치술에 벗어나려면 내면을 비우는 백치 상태가 되라고 말한다. 지폐를 가지고 놀다가 찢어버린 그리스의 아이들처럼 자유를 착취하는 대상을 멀리하자는 의미인 셈인데 대안이 현실적인 면에서 떨어진다. 돈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는 시대 속에 자본의 속박을 벗어나서 해탈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이 글에서 나는 알라딘의 마케팅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지만, 심리정치의 손아귀에 벗어나지 못한다. "인간적으로 여유 있게 살아야지” 하고 큰소리를 치지만, 어느새 한 손에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 게 나다. 스마트폰과 컴퓨터를 멀리하여 디지털 문맹으로 살겠다는 현대판 러다이트 족이 되고 싶지 않다. 디지털 사회를 거부할 수 없지만, 냉정하게 손익계산을 해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너무나 정신없이 변하는 세상을 살아가는 데 정신을 차리려면 이런 중심 잡기는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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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5-07-12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적 사유룰 알라딘 데이타에 비유하셧군요 ...이주 적절한....

cyrus 2015-07-13 18:49   좋아요 0 | URL
이 글을 쓰느라고 억지로 끼워 맞췄습니다. 논리적으로 안 맞는 부분이 있을 겁니다.

지금행복하자 2015-07-12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 그 선물 받고싶지 않아요~~ 근데 자꾸 받아가래요~~

cyrus 2015-07-13 18:50   좋아요 0 | URL
신간도서보다는 선물의 유혹 때문에 많이 흔들립니다. ^^;;

:Dora 2015-07-12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지름신은 나에게 유일신

cyrus 2015-07-13 18:51   좋아요 0 | URL
저도 책지름신의 교리를 신봉하는 1인입니다.

조선인 2015-07-13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알라딘은 나빠요. 그래도 알라딘을 못 버리겠어요. 유혹에 진 어리석은 이의 고백이랍니다.

cyrus 2015-07-13 18:52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래요. 지금은 참고 있지만, 마음에 드는 증정품이 있으면 바로 구매하려고요. ㅎㅎㅎ

해피북 2015-07-13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5만원 이상이라고 해도 이벤트 도서가 포함되지않으면 원하는 선물을 받을 수 없어요.그리구 알라딘 앱을 구동할 때 보여지는 추천 도서 책장 목록을 살펴보면 이미 구입한책과 전혀 관심이 없는 책들이 많아 그닥 활용성도 없는거 같더라궁노 그냥 컴퓨터 메인 화면 처럼 다양한 정보가 한눈에 들어오면 좋겠다는 푸념을 하게 되더라구요 ㅋㅂㅋ

cyrus 2015-07-13 18:55   좋아요 0 | URL
첫 번째 문단에 ‘이벤트 대상 도서를 포함해 5만 원 이상 구매하면’이라고 썼어요. 제 생각이지만, 추천마법사 서비스가 알라디너들에게는 환영받지 않는 서비스인 것 같아요. 나름대로 알라딘이 심혈을 기울여서 만들었을 서비스 같았는데, 저도 해피북님이 겪었던 것처럼 추천마법사에 소개되는 책들이 썩 만족스럽지 않았어요. 굳이 알라딘이 읽으라는 권하는 책은 읽고 싶지 않았어요. ㅎㅎㅎ

stella.K 2015-07-13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정말 너의 리뷰는 나날이 진화하는구나!
모르긴 해도 다음 달 이달의 당선작이 되지 않을까 싶네.ㅋ

솔직히 난 이 빅 데이터가 싫어.
지난 16년 동안의 기록 재미있을 수도 있지만 내가 이런 식으로
감시 당하고 있었구나 해서 썩 유쾌하지는 않았지.
물론 그렇다고 안 들춰 볼 수도 없고 해서 보긴 봤다만
무엇을 근거로한 수치일까 의문스럽기도 하더군.
솔직히 난 요즘 알라딘에서 책을 거의 사지 않거든.
개인 중고샵이나 예스24에서도 사는데 이것을 포함시킨 수치는 아닐 것 아냐?
그래놓고 80세까지 산다고 가정하면 앞으로 몇 권을 읽을 거다란 게
장난하나 싶더군.
뭐 이런 건 알라딘만 하는 짓은 아닐테니 뭐라고 할 수도 없고.
이렇게 사람을 수치화하고, 5만원에 현혹시키고 그럴 줄 알았으면
알라딘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을 거다.
예전에 알라딘은 참 인간적이었는데...ㅠ
언제 적 옛날 추억담이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그들도 알걸?
옛날과 지금이 어떻게 다른지... ㅉ
그런데 책 검색은 알라딘이 좋더군. 중고샵하고. 아직은...ㅋ

cyrus 2015-07-13 18:57   좋아요 0 | URL
몇 년 전부터 알라딘에서 활동 내역을 수치화하는 서비스가 많이 생겼어요. 어찌 보면 16주년 기록을 공개하는 서비스도 정말 잘 만든 건 사실이에요. 그런데 저도 결과를 완전하게 믿지는 않아요. 또 활동 내역을 공개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고요.

북다이제스터 2015-07-13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병철 책 다신 안 읽는다고 하셨으면서... 또 속으신거예요? ^^

cyrus 2015-07-13 18:59   좋아요 0 | URL
사실은 상반기 베스트 도서 서평을 작성하면 하반기 기대작 한 권을 선물로 준다기에, 일단 분량이 얇은 한병철 씨의 책을 선택해서 읽었어요. ㅎㅎㅎ

북다이제스터 2015-07-13 22:02   좋아요 0 | URL
어쩔수 없이 저처럼 이벤트에 약하시군요. 실망입니다. ㅠㅠ

cyrus 2015-07-14 21:22   좋아요 0 | URL
제가 서평 이벤트는 적극적으로 참여해요. ^^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 유시민의 30년 베스트셀러 영업기밀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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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의 첫 문장을 우문(愚問)으로 시작해본다. 좋은 글쓰기란 무엇일까. 머릿속에 흩어져 있는 사고를 모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다른 이에게 쉽게 전달하는 것. 내가 생각하는 좋은 글쓰기의 의미는 이렇다. 그런데 이런 대답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좋은 글쓰기를 어려워하는 사람은 많아도 좋은 글쓰기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학교와 가정 그리고 기업에서 새삼스럽게 글쓰기 공부가 강조되고 있다. 일부 전문 집단이 지식을 독점하는 시대에서 정보의 대중화 사회, 대중적 의사 표현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자기 생각을 세상에 주장하고 다른 이를 설득할 수 있다. 과묵함이 미덕인 시대는 지나갔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인 것처럼 다양한 지식도 글로 잘 표현해야 빛이 난다.

 

하지만 딱히 글쓰기 능력을 높이는 방법이 마땅치 않다. 서점에는 관련 서적들이 즐비하지만, 단시간에 효과를 보기는 어려운 게 사실이다. 글을 잘 쓰고 싶은 사람은 어떤 책을 참고하면 좋을지 고민한다. 오랜 고민 끝에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을 선택했다면, 머리말과 목차를 꼭 확인해볼 것을 권한다. 여유로운 시간이 있다면, 1(‘논증의 미학’)2(‘글쓰기의 철칙’)까지 읽어보고 나서 이 책을 참고할 것인지 결정해도 좋다. 책은 안 팔려는 시대라고 하지만 좋은 글쓰기를 표방한 책만 해마다 100권 이상씩 출간되고 있다. 특히 유명한 저자가 쓴 글쓰기 책이 큰 인기를 얻는다. 저자의 이름을 달고 나온 글쓰기 책은 독자의 눈에 띄기 쉽다. 이제 막 글쓰기에 관심을 가진 초보 독자는 저자의 이름만 보고 이런 책만 있으면 글 잘 쓰기 위한 특별한 방법이 있을 거로 생각한다. 하지만 저자의 명성만 믿고 책을 선택하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다. 저자가 다른 글쓰기 관련 책을 최소 5권 이상은 읽어보면 그 나물에 그 밥인 것을 알 수 있다. 문장 표현에 차이가 있을 뿐, 글 잘 쓰는 방법은 비슷하다. 책을 많이 읽어라, 지나치게 긴 문장은 단문으로 줄여서 고쳐 써라, 독자가 이해하기 쉬운 단어를 사용하라는 등 이런 내용은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는 평범한 중학교 국어 선생님도 알려준다. 우리가 유명 저자의 글쓰기 책을 읽으면서 , 이렇게 글을 써야 하는구나!’라고 무릎을 치게 만든 글 쓰는 방법들이 학창 시절 국어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알려주셨던 내용일 수 있다. 그래서 글을 잘 쓰고 싶은 마음이 앞서서 무작정 글쓰기 관련 책을 잔뜩 사서 읽는 것은 시간 낭비에 가깝다. 유명 저자가 알려주는 글쓰기 책이라고 해서 무조건 선호하는 경향도 긍정적으로 볼 수 없다.

 

이런 심리는 행동경제학에서 말하감정 휴리스틱으로 볼 수 있다. 자판기에서 커피를 빼 마시려면 버튼을 선택해야 한다. 고급 커피와 일반 커피라고 적혀 있는데, 간혹 두 커피의 값이 똑같다. 그런데 대부분 커피를 고르면 고급 커피 버튼을 누른다. 당연히 그게 더 고급일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두 커피의 품질 차이가 없는데도 감성적으로는 왠지 고급 커피가 더 맛있을 것 같고 더 좋은 원료를 썼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바로 이것이 감정 휴리스틱이다. 글쓰기 책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저자 이름이 크게 달려 있거나 특별한 비법’, ‘누구나 30일 만에 글 잘 쓰게 만드는 책’, ‘작가 지망생이 가장 많이 찾는 글쓰기 책과 같은 홍보문구가 박힌 글쓰기 책이 무조건 좋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목차와 주요 내용을 꼼꼼하게 확인해야 한다.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에 담긴 글 잘 쓰는 방법들도 기존에 나왔던 글쓰기 책에서 볼 수 있는 기본적인 내용이다. 유시민의 30년 베스트셀러 영업기밀!’이라는 책의 홍보문구가 민망하다. 출판사는 저자가 단 한 번도 공개하지 못한 특별한 글쓰기 비결을 알려줄 것처럼 책을 소개했다. 하지만 243쪽에 저자가 아직 말하지 않은 영업기밀이 하나 더 있다고 언급한 내용은 이 책을 끝까지 믿었던 독자의 마음을 한순간에 허무하게 만든다. 독자가 이해하기 쉽도록 글을 써야 하는 마음가짐은 당연하다. 난해한 문장을 예시하기 위해 진은영의 문학의 아토포스와 그 책의 독자 서평 일부를 인용하면서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는지 의아스럽다.

 

저자는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이 논리적 글쓰기를 잘하고 싶은 독자들을 위해 썼다고 분명하게 밝혔다. 시와 소설 같은 문학 글쓰기를 원하는 독자는 이 책을 정독할 필요가 없다. 아니, 여기에 내 개인적인 생각을 덧붙이자면 글쓰기 책을 여러 번 정독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 여러 번 글을 쓰고 난 뒤에 글 쓰는 능력을 점검하는 차원에서 글쓰기 책을 참고한다. 말 그대로 () 글쓰기, () 글쓰기 책 참고하는 방식이다. 일단 글을 써보는 것이 중요하다. 내 글이 잘 썼는지 못 썼는지 평가받을 수 있게 여러 사람 앞에서 완성된 글을 공개하면 좋다. 나름 잘 썼던 글이라 생각했는데 누군가로부터 지적을 받으면 얼굴이 화끈거리면서 자존심이 상한다. 하지만 첨삭을 위한 타인의 평가는 자신의 글쓰기 능력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된다. 혹평이 두려워서 직접 쓴 글을 혼자서 보물처럼 간직하면 절대로 자신의 글쓰기 실력을 확인할 수 없다. “인생은 실전이야!”라는 인터넷 유행어처럼, 글쓰기도 실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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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26 22: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6-27 14: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해피북 2015-06-27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 구구절절 와닿지 않은 이야기가 없어요 ㅋ 특히 `글쓰기 책은 여러권 사읽을 필요가 없다`던 말은 여러권 글쓰기 책을 읽어봤던 제 경험으로도 정확한 말 같아요.

결국 쓰기란 실천하는것 인데 이걸 안하고 자꾸 방법만 캐낼려고 하니 글쓰기에 변화가 없어지는건 당연했던거 같다는 생각

읽고 생각하고 쓰는 과정은 애벌래가 변태의 과정을거쳐 나비가 되는것처럼 혼자만의 시간과 싸움인거 같은데 그게 참 어려운거 같아요 ^^

그리고 앞으로는 `감정휴리스틱` 을 조심해야겠다는 ㅋㅂㅋ,,

cyrus 2015-06-27 14:48   좋아요 0 | URL
글 잘 써야 취업이 성공된다, 승진 반영에 좋다, 글쓰기를 무조건 ‘스펙’과 ‘성공’으로 연관 짓다보니 요즘 글쓰기 책이 많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좋은 글쓰기 책을 고르는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저자의 명성이나 출판사의 과장 광고를 믿고 책을 돈 주고 사는 독자가 많아집니다. 결국 출판사는 돈 먹는 배만 채우려고 하고, 양질의 책은 만들려고 하지 않습니다. 출판사의 상술에 휘둘리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습니다. ^^

AgalmA 2015-06-29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에서 행동경제학의 `감정 휴리스틱` 을 알게 됐을 때 이거 어디 적용해보고 싶다! 했는데, cyrus님이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에서 재밌게 적용하신 게 인상적이네요^^

cyrus 2015-06-29 17:55   좋아요 1 | URL
저도 ‘감정 휴리스틱’을 장하준 교수의 책을 통해서 알았어요! ^^

북다이제스터 2015-06-28 16: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업 비밀`을 알려준다고 하고선 결국 많이 읽고 많이 쓰라고 하니 독자는 뒷통수 맞은 격입니다(헌데 정답인듯 합니다). 제가 책 출간을 안 해봐서 모르겠지만, 유시민 정도면 출판사의 상술 제지 역량은 될텐데 그냥 책 좀 더 팔겠다고 묵과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구성에 새로운 것은 없지만 유시민 관점의 콘텐츠인 것은 인정합니다. 하다못해 추천서라도...

cyrus 2015-06-29 17:57   좋아요 1 | URL
유시민 씨의 책은 글을 여러 번 써본 독자에게는 ‘이미 아는 정답’으로 보였을 겁니다. 제가 별은 짜게 줬지만, 만약에 글을 쓰기 시작한 사람에게는 이 책을 추천하고 싶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