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의보감, 몸과 우주 그리고 삶의 비전을 찾아서 리라이팅 클래식 15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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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우리는 '동의보감'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 

 한국인치고 '동의보감'을 모르는 이는 없을 거다. 무수한 건강보조식품 광고와 수많은 한의학적 처방에는 꼭 '동의보감에 의하면...'이라는 식으로 단서가 붙여져 있다. 그만큼 <동의보감>은 건강한 삶을 위한 비결이 담겨져 있는 책으로 인식되어져 있다. 
 그런데 정작 동의보감이 다루고 있는 게 무엇인지 혹은 그 책을 단 한 번이라도 읽어본 적이 있냐고 물으면 답변이 궁색해진다. 가장 대중적인 의학서이면서도 우리나라가 자랑할 수 있는 문화유산으로도 자리잡은 동의보감이 한국인의 일상과 동떨어진 의학서로 전락한 셈이다. 이는 곧 귀에 쏙 들어오도록 동의보감을 쉽게 풀어 쓴 책이 없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국민들 대다수는 <동의보감>에 나온 치료법이라는 말에 쉽게 믿어버린다. 
 필자의 어머니는 건강을 위한 식이요법, 식생활, 약초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편이다. 요즘은 일 하시느라 많이 덜해졌는데 작년처럼 가사 생활을 하셨을 때만 해도 건강 관련 책 두 세 권을 구입해서 읽고 그 내용을 따로 메모하곤 했다. 이렇게 독학으로 공부를 하다보니 어머니는 책에서 언급되는 '동의보감'에 대해서 지적 호기심(?)을 가지셨나 보다. 
 한 번은 필자에게 시중에 구할 수 있는 <동의보감>을 책을 구입하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알라딘 서지검색으로 '동의보감'을 검색해봤다. 생각보다 '동의보감'이라는 제목이 들어간 의학 관련 책이 꽤 많았다. 그런 책들 대부분은 실제 '동의보감' 속 내용과는 관련이 없는 것도 있었지만 그래도 '동의보감' 속 내용을 국역한 책들도 눈에 띄었다.
 하지만 책을 구입하기에는 조금은 망설였다. <동의보감>의 구성은 내과에 관한 내경편, 외과에 관한 외경편, 각종 질병을 소개하는 잡병편 등으로 세부적으로 분류되어 있는데 우리나라에 국역한 내경편만 해도 페이지 수가 1000페이지를 넘기 때문이다. (가격은 6만 원 정도인 걸로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방대한 분량 속에서 과연 생활하는 데 있어서 적합한 건강을 위한 지식을 얻을 수 있을런지 실효성에 대해서 의문을 품기도 했다. 결국 필자의 설득 끝에 어머니는 그 책을 구입하지 않았다. 
 사실 이 때까지만 해도 <동의보감>에는 어떤 내용이 있었는지 몰랐고 <동의보감>의 진정한 가치를 알지 못했기에 고전평론가 고미숙이 '리라이팅'한 <동의보감>에 눈길이 갔다. 우리 어머니 아니었으면 이런 책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필자는 <동의보감>에는 과연 어떤 내용이 있었는지 너무나 궁금해서 읽기 시작했지만 필자의 어머니처럼 건강하기 위한 비결을 알기 위해서 이 책을 골랐다면 시중에 판매되고 있는 6만원 상당의 <동의보감> 내경편을 구입할 것을 권한다. 저자의 이력을 알고 있다면 이 책에 대해서 적잖이 실망하지 않으며 오해하지 않을테지만 단순히 <동의보감>에 등장하는 건강 비결 방법의 핵심을 정리한 것은 아니다. 저자는 <동의보감> 텍스트를 통해서 신체뿐만 아니라 정신까지도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사유의 방식을 찾고자 한다.  

 

 


 사람의 몸이 곧 '자연'이다 

 

 

 

 

 

 

<동의보감> 첫 장 '내경편'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신형장부도] (pp 15)

 

 

천지에서 존재하는 것 가운데 사람이 가장 귀중하다. 둥근 머리는 한르을 닮았고 네모난 발은 땅을 닮았다. 하늘에 사시(四時)가 있듯이 사람에게는 사지(四肢)가 있고, 하늘에 오행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오장이 있다. (중략) 하늘엑 이십사기(二十四氣)가 있듯이 사람에게는 24개의 수혈이 있고, 하늘에 365도가 있듯이 사람에게는 365개의 골절이 있다. (중략) 땅에 샘물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혈맥이 있다. 땅에서 풀과 나무가 자라나듯 사람에게는 모발이 생겨나고, 땅속에 금석이 묻혀 있듯이 사람에게는 차이가 있다. 이 모든 것은 사대(四大)와 오상(五常)을 바탕으로 잠시 형(形)을 빚어 놓은 것이다.

('내경편' pp 10, 고미숙 pp 20 재인용)


 <동의보감>에서는 사람의 몸에 대해 설명하면서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도록 그림을 넣었다. 그림의 제목은 ‘신형장부도’이다. 신형에 오장육부를 함께 그려 넣은 것이다. 먼저 보이는 것은 사람의 옆모습이다. 옆으로 그려야 오장육부가 잘 보이기도 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머리에서 꼬리뼈 쪽으로 이어진 구조물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몸 안을 들여다보면 횡격막을 중심으로 오장육부가 배치되어 있다. 물론 각 장기의 모양이나 위치는 근대 서양의학에서 볼 수 있는 해부도와 다르다. 이는 실제의 장기 모습에서 볼 수 있는 정교함을 그리려고 한 것이 아니라 각 장기가 행하는 기능과 역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려 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배 부분이다. 배는 마치 물결이 출렁이는 것처럼 그려졌다. 이는 호흡하며 움직이는 모습을 상징한 것이다. 또한 배꼽도 실제보다 과장되게 크게 그렸다. 이는 배꼽이 우리 몸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크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배꼽은 단전이 위치하는 곳이어서 호흡에 중요한 부위가 된다.
 허준은 사람의 머리가 둥근 것은 하늘을 본받은 것이고 발이 모난 것은 땅을 본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팔다리와 장부 등 모든 몸의 모습도 자연의 그것을 본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신체를 단지 질병과 치료를 위한 대상이 아니라 몸 안과 밖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생명활동으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이는 사람과 자연의 통일성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연의 일부일 뿐만 아니라 생김새도 자연을 본받은 것이기 때문에 자연의 질서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몸과 삶의 참주인이 되라


편작이 병에는 6가지 치료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했다. 교만하고 방자하여 이치에 따르지 않는 것이 첫번째 경우다. 몸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재물을 중시하는 것이 두번째 경우다. 먹고 입는 것을 챙기지 않는 것이 치료할 수 없는 세번째 경우이며, 음양과 장기(藏氣)가 다 인정되지 않는 것이 네번재 경우다. 몸이 마르고 약을 먹을 수 없는 것이 다섯번째로 치료할 수 없는 것이며, 무당을 믿고 의사를 믿지 않는 것이 여섯번째로 치료할 수 없는 것이다, 고 하였다.

- 동의보감 [잡병편], '변증' 중에서, 고미숙 pp 62 재인용 - 



 고대 중국의 유명한 명의(名醫)로 알려진 편작이 말한 불치의 이유는 질병에 대한 이중적인 잣대를 가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새겨들을만한 충언이다.
 지금도 의학 기술이 발달하고 병을 치유할 수 있는 신약이 탄생되고 있지만 여전히 치료하기가 수쉽지 않은 질병들은 약의 내성에 견딜 수 있도록 진화하고 있다. 의학기술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은 연장될 것이라는 미래의 전망도 있지만 지극히 낙관적으로만 볼 수 없다. 아무리 좋은 치료와 약이 많다고 해도 제 몸 제 스스로 몸을 돌보지 못하고 건강을 관리하지 못하게 된다면 신체와 정신을 위협하는 질병의 고통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질병을 마주함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식습관과 생활패턴이 건강을 위협하는 요인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당연히 살아가면서 온갖 병을 앓게 마련이다. 그런데 우리는 몸이 아프면 어느 병원 무슨 과에 가서 진찰받을 것인가만 생각한 뒤 이후의 과정은 전문가에게 맡겨 버린다. 자신의 병이 뭔지 알기 귀찮고, 무섭고, 짜증난다. 그저 후딱 처방받으면 고쳐지겠거니 생각하고 만다.
 이 책의 저자는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마주하는 질병을 두려워하지 말고 '내 안의 치유본능을 깨울 수 있는 자기 삶의 연구자'가 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저자는 책에서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신체에 대한 서양의 담폰을 짚어가며 동양의학 담론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을 부각시킨다. 저자에 따르면 동양의학에선 질병과 죽음을 통해 자신의 몸과 인생, 그리고 우주로 연결되는 가르침을 터득할 수 있는 데 반해 서양의학에선 삶에 필수적인 질병과 죽음을 '없어져야 하는 것'으로 간주해 성찰의 기회를 박탈한다는 것이다.
 <동의보감>이 의사들을 위한 어려운 의학서가 아니라 삶의 방식과 직결돼 있으며, 모두가 의학적 지식을 누리게 하자는 뜻이 담겨져 있는 우리나라 의서의 '종결자'라고 볼 수 있다. 선조는 허준에게 <동의보감> 편찬을 명하면서 우리나라 백성들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약재들의 명칭과 분류를 널리 보급할 것을 당부했다. 이것은 모든 백성들이 의술의 힘에 기댈 수 있기를 바라는 선조의 민본사상이 내포되어 있는 동시에 더 나아가서 스스로 자신의 몸을 돌볼 수 있는 능력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동의보감을 통해 자신의 몸을 보다 정확히 바라보고, 자신에게 잠재해 있는 치유본능을 일깨우며, 나아가 자기 삶의 주인공이자 연구자가 될 수 있다.
 그렇다고 동양의학의 우수함만을 고집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의사'와 같은 의술 전문가들에게 의학의 영역을 넘겨주어 자기 몸과 감정을 스스로 들여다 볼 수 있는 계기가 없는 것이 서양의 의학 담론이라면 동양의 의학 담론에서 추구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몸과 감정을 컨트롤하는 주체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자기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무지의 늪'과 질병이 만들어내는 정신적 공포에서 벗어난다면 '앎에 대한 열정'으로 불치병을 극복하고 건강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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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01-18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경편에 있는 이야기가 아주 흥미롭네요. 저도 이 책을 보관함에 넣어둡니다. 좋은 책 소개감사!

cyrus 2012-01-25 20:37   좋아요 0 | URL
책의 내용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고 재미있답니다. ^^

굿바이 2012-01-19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미숙씨가 공부를 하면서도 몸을 쓰는 일(요가)에 참 열심이다 싶었는데
이 책을 쓰셨군요. 정말 <동의보감>이야말로 저자의 삶의 방식(정신이든 육체든 스스로 장악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는)과 직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좋은 책 소개 잘 봤어요~!

cyrus 2012-01-25 20:42   좋아요 0 | URL
동의보감은 단순히 신체 건강을 위한 책이 아니라 정신 건강을 강조하는
책이라는 것을 고미숙 씨의 책 덕분에 새롭게 알게 되었어요. 이 책으로
동의보감의 진면목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렸으면 좋겠어요. ^^

saint236 2012-01-19 1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제가 잘못봤나요? 어제 밤에만 해도 동의고감이라고 적으셨던 것 같았는데. 그래서 심오한 뜻을 헤아리기 위해서 고민을...

cyrus 2012-01-25 20:43   좋아요 0 | URL
고민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목에 오타가 있길래 바로 스마트폰으로
고쳤답니다 ㅎㅎ

잘잘라 2012-01-19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료할 수 없는 병 여섯가지, 정말 고개를 끄덕이게 합니다.
마지막에 정리해주신 <동의보감>의 의의에 대해서도,
정말이지 추천 추천 백만번 추천합니다.

cyrus 2012-01-25 20:44   좋아요 0 | URL
건강에 관심이 많으신 포핀스님에게 강추하고 싶은 책이에요.
내용도 그렇게 어렵지 않고요, 신체뿐만 아니라 정신도 건강할 수 있는
방법이 소개된 책이라 좋아요 ^^

차트랑 2012-01-19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미숙님의 글발은 대책이 없을 정도로 좋더군요 ㅠ.ㅠ
동의보감에서는 또 그 어떤 언어의 마술을 보여줄런지...

우주의 이치와 인간의 몸을 따로 분리하지 않은 동양의 생각을
많이 이해하고 있을 수록 좋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건강검진의 결과에는 이상이 없는데
몸은 엉망으로 아픕니다.

저 말고도 아와 같은 경험을 하시고 계신분들 계실듯 합니다.
동의보감이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리뷰들을 정말 잘써주셔서 장바구니에 허리 휩니다요 ㅠ.ㅠ
좋은 리뷰 고맙습니다.

cyrus 2012-01-25 20:47   좋아요 0 | URL
고미숙 씨의 글은 어려운 고전의 내용을 재미있게 풀어낸다는 점에서
좋아요. 벌써부터 다음에 나올 책이 기대되네요 ^^

꽃도둑 2012-01-26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부산 인디고서원을 아시는지요?
전에 고미숙 샘께서 강의차 오셨는데 저는 그 분을 가까이게서 뵈었답니다.
유연하신 분이었어요. 정신적으로 건강하신 게 눈에 보였지요.
몸과 삶의 참주인이 되어라! 는 말은 아주 감각적으로 들리는데요?..^^
고미숙 샘께서는 아무래도...몸의 철학에 깊이 경도된 듯 하네요...ㅎㅎ(농담 반,진담 반)
서양의학은 부분부분을 면밀히 관찰하고 치료하는 반면, 동양의학은 전체를 유기적 관계로 본다는 관점에서 어떤 의도로 책을 쓰셨는지 알 것 같기도 하네요.
따로 떼어놓고 볼 수 없는! 사람의 몸이 곧 자연이다 라는 말에 수긍이 가네요.
좋은 하루 되세요~~^^

cyrus 2012-01-26 21:16   좋아요 0 | URL
부산 인디고 이름은 들어봤어요. 고미숙 씨의 강연을 직접 보셨다니
아주 유익한 경험을 하셨네요. 저는 그 분의 강연을 TV로나마 봤어요.
참으로 열정적으로 강연을 하시더라고요 ^^
 
죽음의 수용소에서 (양장) - 빅터 프랭클의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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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헤란에서의 죽음

 

 

 한 돈 많고 권력 있는 페르시아 사람이 어느 날 하인과 함께 자기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하인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면서 방금 죽음의 신을 보았다고 했다. 죽음의 신이 자기를 데려가겠다고 위협했다는 것이다. 하인은 주인에게 말 중에서 가장 빨리 달리는 말을 빌려달라고 애원했다. 그 말을 타고 오늘 밤 안으로 갈 수 있는 테헤란으로 도망을 치겠다는 것이었다. 주인은 승낙을 했다. 하인이 허겁지겁 말을 타고 떠났다. 주인이 발길을 돌려 자기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가 죽음의 신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러자 주인이 죽음의 신에게 물었다. 

 “왜 그대는 내 하인을 겁주고 위협했는가?” 그러자 죽음의 신이 대답했다. “위협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오늘밤 그를 테헤란에서 만나기로 계획을 세웠는데, 그가 아직 여기 있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표시했을 뿐이지요.” (pp 106)

 

 

 

 위의 우화는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중에서 ‘테헤란에서의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내용이다.

 인생은 덧없다. 발버둥 쳐봐야 우리는 모두 테헤란으로 도망간 하인처럼 죽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허무하게 막을 내릴 세상살이 또한 매정하기 그지없다. 계급 같이 굳어져 가는 빈부 격차. 뒤쳐진 사람들은 아득바득 살아봐야 별 뾰족한 수가 없을 것 같아 절망한다. 경쟁의 정상에 서 있는 사람들의 삶도 공허하기는 마찬가지다. 선진국일수록 우울증 환자가 많고 자살하는 사람도 많아지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자살 문제는 이제는 미국까지도 알아주는 심각한 사회적 문제가 되어버렸다. 세상을 떠난 사람의 자살 동기를 정확하게 알기는 어렵지만 그 원인으로는 경제적 형편, 애정, 과도한 스트레스 및 열등감에서 비롯된 우울증까지 실로 다양하다.

 요즘에는 정서적으로 심약한 청소년들이 왕따로 인한 집단폭력을 견디지 못해 자살을 하는 비보가 자주 들려오고 있다. 안 그래도 청소년들은 쉴 틈 없는 경쟁체제의 입시교육으로 인한 우울증으로 자살을 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는 마당에 이제는 학교 생활 내 왕따 역시 청소년들의 마음을 병들게 하고 있다.

 

 

 

 

 수용소 생활에서 발견한 삶의 의미

 

 빅터 프랭클은 현대문명의 고질병인 우울, 중독, 막연한 공격성향, 자살 등은 모두 똑같은 원인에서 나온다고 진단한다. 삶에서 별 기대할 게 없다는 절망감이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는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라는 니체의 말을 힘주어 강조한다. 그는 삶의 의미를 찾아줌으로써 건강함을 되돌리려는 ‘로고테라피(logotherapy)’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프랭클의 로고테라피는 자신이 아우슈비츠에서 보낸 3년간의 체험에서 비롯되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그 곳에서의 체험을 로고테라피의 관점에서 설명한 책이다.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순간, 죄수들의 인생은 깨끗이 사라져 버린다.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빼앗긴 채, 죄수번호 매겨진 살아있는 시체로서 살아갈 뿐이다. 미래도 과거도 없고 고통만 있는 생활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생활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이런 절망적인 생활 속에서 과연 희망을 찾을 수 있을지 의구심이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프랭클은 ‘그렇다.’라고 말한다. 혹독한 시련을 겪으며,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뺐길 수 없는 인류 최후의 자유를 깨닫는다. 그것은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자유’다. 닥친 고난을 자신을 강하게 하고 가치를 만드는 계기라고 확신한다면, 시련은 오히려 축복이 된다. 

 인간은 이상과 가치를 위해서 죽을 수도 혹은 살고자 하는 선택의 갈림길에 놓이게 된다. 프랭클은 삶의 의미 찾기를 포기한 사람은 며칠 못가서 죽음에 이르렀다고 증언한다. 자신에게 처한 불행한 환경에 감당하지 못한 인간은 본능적인 생의 의지를 잃고 죽음에의 의지로 달려가게 된다. 반면, 삶의 의미를 끊임없이 되묻는 사람들은 삶의 의욕을 잃지 않는다. 인생은 시련과 죽음 없이 완성되지 않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인생의 의미를 놓아버리는 순간, 내 모든 시련은 감내해야 할 그 어떤 이유도 찾을 수 없는 절대 고통으로 변해 버린다.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인 아우슈비츠에 수감된 이후 3년에 걸쳐 암흑 속에 생활하면서 지니고 있던 모든 것을 잃었다. 그는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마침내 동물의 위치로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았고, 동물 이하로까지 전락하는 인간의 벗겨진 실상과 대면했다. 그러나 그런 극한 상황의 절망 속에서도 인간의 삶이 결코 무의미한 것 일수는 없다는 신념을 잃지 않았다. 이런 통찰 속에서 프랭클은 고통 속에서도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의미요법의 뼈대를 형성한다. 즉, 인간에게는 그 재능이나 체험에 관계없이 인생에서 겪게 되는 어떤 고통 속에서도 의미를 발견할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공허한 '희망고문'이 아닌 어려운 현실을 바라볼 줄 아는 '현실고문'도 필요하다

 

 프로이트 심리학에서 고통은 좌절된 욕망에서 온다고 말한다. 그러나 프랭클에 따르면 긴장과 갈등 없는 상태는 최선이 아니다. 인간은 힘든 상황에서 처하게 되면 오직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희망만을 생각한 채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극복하려고 한다. 하지만 프랭클처럼 최악의 상황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실제로는 이런 사고방식이 자신의 삶을 위협하는 올가미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이가 많지 않다.

 짐 콜린스의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에서 소개된 '스톡데일 패러독스' 사례야말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채 지나친 낙관주의에 사로잡힌 사고방식의 위험성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의 스톡데일 장군은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65년부터 1973년까지 8년 동안 수용소에 갇혀 있으면서 20여 차례의 모진 고문을 당했고 언제 풀려날 수 있을지, 가족들을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든 것이 불안정한 수용소 생활을 견뎌내고 무사히 생존할 수 있다.

 반면, 낙관주의자들은 수용소 생활을 견디지 못한 채 그 곳에서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크리스마스 때까지는 나갈 거야’하고 희망을 가졌던 낙관주의자들이 크리스마스를 수용소에서 보내게 된다면 이번에는 ‘부활절까지는 나갈 거야’하고 말한다. 그리고 부활절이 오고 다음에는 또 크리스마스를 고대한다. 즐겁게 보내야 할 명절을 춥고 어두운 수용소에서 보낸 그들은 깊은 상심에 빠져 결국에는 수용소를 탈출하지 못한 채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던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사용하고 있는 용어로 표현하자면 낙관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낸 '희망고문'으로 인해서 원하지도 않게 수용소 안에서 불행하게도 죽음의 신을 마주해야 했다. 될 수 없는 일에 자꾸 되는 것처럼 희망을 주지만 결국 결과는 될 수 없는 것으로 끝남으로써 낙관적인 희망을 갖는 사람에겐 몸과 마음을 옥죄는 고문이 될 수밖에 없다.

 스톡데일 장군은 포로생활의 가장 큰 어려움인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대화가 단절된 독방생활 속에서 서로를 격려하고 신뢰를 유지하기 위해 의사소통의 방법을 만들어내고 고문에 견디는 방법도 개발한다. 또한 체력이 떨어지면 안 되기 때문에 체력단련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장군은 그 힘든 포로시기를 동료들과 함께 견뎌내었다.

 스톡데일 장군의 수용소 생활은 프랭클이 직접 행동으로 실천한 로고테라피의 본질적 의미와 일맥상통하다. 의미요법에서는 인간의 본질을 ‘책임감’으로 본다. 로고테라피의 행동강령은 보다 구체적인 지침을 일러준다. “인생을 두 번째로 살고 있는 듯이 살아라. 그리고 지금 당신이 하려는 바는 첫 번째 인생에서 망쳐놓았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

 즉, 패배감으로 과거를 곱씹지 말고 주어진 현재에 충실해라는 뜻이다. 이럴 때 실패는 미래를 위한 거름이 된다. 나아가 프랭클은 자신을 넘어설 것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자신에 대한 집착은 자신의 정신을 병들게 만든다. 그러나 자신의 비관적 처지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은 지금보다 더 힘든 상황에서도 견뎌낼 수 있는 자아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이다.

 프랭클 역시 스톡데일 장군처럼 비참한 수용소 생활 중에도 삶의 기쁨을 찾는다. 고된 노동에서 잠시 벗어나 다른 생각에 빠질 수 있는 시간이나 인간이 먹기엔 너무나 열악한 멀건 국물 속에서 고기 한 조각을 발견하는 즐거움, 나아가 인간이 좀 더 근본적으로 삶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극한적인 고통 속에서 발견한다. 그중 하나가 사랑이었고, 나머지는 삶의 의미였다.

 '사람들을 살게 하는 힘은 과연 무엇일까’, ‘물에 빠진 사람에게 던지는 동아줄처럼 삶에 닻을 내릴 수 있는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왜 그런 환경에서도 죽지 못 하는가’ 하고 프랭클은 역설적인 질문을 던진다. 대개는 ‘아이들 때문에’, ‘내가 지켜주어야 할 사람 때문에’, ‘나를 도와주는 사람 때문에’ 등 여러 가지 이유를 댄다. 바로 그것이 생의 의미를 잃은 사람을 삶의 광장으로 인도하는 작은 끈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는 살아가면서 배려하는 마음으로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삶의 광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끄는 노력이 필요하다. 작은 사랑을 구현하는 길 위에서 피어나는 의미만이 우리를 절망에서 구원하기 때문이다. 프랭클이 일러주는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자유’는 경쟁사회 속에 살아가는 우리의 숨을 틔워 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요즘 세상은 그야말로 먹고 살기가 힘들고 인간에 대한 정이 메말라버린 삭막하고 각박하기만 하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프랭클이 생활했던 아우슈비츠를 비교한다면 행복하게 살고 있는 축에 속한다. 아우슈비츠에서도 가능했던 프랭클의 인생 의미 찾기가 지금 우리 삶에서 불가능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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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1-12-31 0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과 더불어서 흑야와 이것이 인간인가는 아우슈비츠 형무소의 경험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드는 책이죠. 전 그 중에서 흑야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과거 선배들에게 갈굼당하면서 읽었던 책이었습니다. 그때는 억지로 읽었는제 지금은 찾아서 읽으니 많이 성장했다고 볼 수 있겠죠.^^새해 행복하시길...

cyrus 2011-12-31 22:26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네요, 세인트님 ^^
저는 군 생활할 때 처음 읽었는데 언제나 읽어도 힘든 삶 살아갈 때 읽으면
힘이 샘솟는 좋은 책인거 같아요. 표지가 강렬한 빨간색에 수용소라는 제목
때문에 군 동기들 사이에서 이 책 읽는다고 눈치 좀 봤어요, 어떤 동기는
이 책에 북한 정권을 옹호하는 내용이 있다는 근거 없는 착각을 할 정도였어요^^;;

세인트님이 읽으신 흑야라는 제목의 책은 처음 들어보네요 어떤 책인지 검색해서 찾아봐야겠습니다. 세인트님도 새해 좋은 일들만 가득하길 바라요 ^^

마녀고양이 2011-12-31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랭클은 '실존적 한계'를 인정해야, 진정으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요.
삶이란게, 작고 소소하면서도 다채로운 즐거움을 잃어버린다면
결국 견딜 수 없는게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현대 사회는 너무 빠르고 강렬하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시루스님, 건강하고 즐거운 일 가득한 새해되셔요.
내년에도 우리, 열심히 공부합시다! 아자! ^^

cyrus 2011-12-31 22:27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저도 살아가면서 작고 소소한 즐거움이라도 느낄 수 있는
여유 있는 삶을 살아가려고요, 이런 기회와 시간마저 없다면
사는게 힘들겠죠? ^^;;

마고님도 새해에는 좋은 일들만 가득하시고 원하시는 일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차트랑 2012-01-01 0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늘 좋은 글을 읽어왔지만 번번히 댓글을 달지 못했습니다. 뻘쭘해서 인건 이해를 하시겠지요^^ 2011년 통계자료를 보고 너무나 무심했던 사람이구나 자성하면서 좋은 글에 댓글도 남기고 추천도 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저는 cyrus님의 글을 통해서 익숙하지만 그 반대는 익숙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너그러이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새해 더욱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cyrus 2012-01-02 22:11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차트랑공님 ^^
저도 처음에서 서재 활동을 시작했을 때 모르는 이웃분들에게
댓글 한 번 남기는 게 뻘줌했었답니다. 하지만 덕분에
정말 착하고 좋은 이웃분들을 많이 만나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차트랑공님도 새해에 좋은 일 가득하길 바라요 ^^

이진 2012-01-02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수용수가 뭘까 하고 항상 궁금해왔어요. 그러다가 어느샌가 그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것이 정말 죽음의 곳이라고 생각했지요. 그렇지만, 제목이 마음에 든다지만, 저는 아직 이런 책을 읽을만큼의 지적수준이 달리기 때문에 ㅋㅋ 장바구니는 아쉽게 패스해야겠어요... 흐

시루스님, 새해에는 복 많이 받으시고 공부도 파이팅!
저도 파이팅해야겠어요.

cyrus 2012-01-02 22:14   좋아요 0 | URL
이진님 나이라면 아직 수용소에 대해서 특별한 감정이 없을거예요,
저도 이진님 나이 때 그랬는걸요 ^^ 지금 읽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언젠가 제 나이 되면(?) 읽어보길 추천하고 싶어요.
삶을 살아가는 데 큰 자양분이 될 수 있는 책이거든요 ^^

소이진님도 좋은 일 가득하시고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적 받으세요 ^^
 
아이콘 - 진중권의 철학 매뉴얼
진중권 지음 / 씨네21북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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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범주 오류 (category mistake)   

 

70 평생 단 한 번도 우리나라 밖을 여행해보지 못한 A 노인은 드디어 세계여행으로 프랑스 파리의 땅을 밟아보게 되었다. 노인에게는 프랑스 파리의 명물 에펠 탑을 한 번 보고 죽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었다. 그는 관광 안내원과 함께 넓은 파리의 시내는 구경하기 시작했다. 에펠 탑을 보고 싶은 노인은 관광 안내원에게 부탁을 하였다.  

 " 어디를 가든지 꼭 에펠 탑이 보이는 장소로만 안내해 주시오. " 

그들은 베르사유 궁전을 출발하여 개선문을 돌아 다시 노트르담 사원을 거쳐 뤽상부르 공원까지 갔다. 파리에 들리면 꼭 한 번쯤 거쳐야 하는 명소를 볼 수 있었던 매우 즐거운 관광이었다. 여러 곳을 돌아보느라 피곤해진 노인은 차 안에서 깜빡 졸고 말았다. 졸다가 깨 보니 다음 관광지에 도착해 있었다.  

 " 아니, 에펠 탑이 안 보이잖아. 내가 잠깐 조는 사이에 이상한 곳으로 데려왔군.  안내원, 왜 내 말대로 하지 않는 거요?  " 

노인은 안내원에게 막 화를 냈다. 그러자 안내원은 웃으며 대답했다. 

 " 저는 손님의 말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습니다. 지금 이 곳이 바로 에펠 탑이 위치하고 있는 곳이거든요. "   

하지만 노인은 안내원의 대답에 어처구니가 없다는듯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 젋은 양반이 지금 이 노인네를 놀리려고 하는거요?  도대체 에펠 탑이 어디 있다는 거요? " 
 

 

A 노인은 왜 그토록 보고 싶어하던 에펠 탑이 눈 앞에 있으면서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것일까? 노안이라서 에펠 탑을 보지 못했던 것일까?  그것은 아니다. 시력이 저하되더라도 희미하게나마 에펠 탑의 형체를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안내원이 파리를 처음 와 본 노인을 속이는 것도 절대로 아니다. 분명히 노인은 에펠 탑이 있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파리의 속담에 '에펠 탑을 보기 싫으면 에펠 탑으로 가라'는 말이 있다. 파리는 시내 어디에서든 에펠 탑이 잘 보인다. 300m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높이를 자랑하는 세계 최고의 인공건축물이다. 이 말은 파리 시내 어디에서든 에펠 탑이 잘 보이니 만약 보기가 싫다면 오히려 그 밑으로 가라는 뜻이다. 즉 에펠 탑 바로 아래에 가거나 그 곳에 있게 되면 우리가 사진 속에서만 볼 수 있었던 에펠 탑의 전체적인 모습은 절대로 볼 수 없을 테니까.  

그래서 노인이 에펠 탑을 볼 수 없었던 것은 그가 에펠 탑 바로 아래에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에펠 탑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노인은 자신이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것이 얼마나 거대한지 예상하지 못했다. 노인에게는 그저 파리의 유명한 탑으로만 생각했었으리라.  

 

 

(좌) 실제의 에펠 탑 모습  

(우) 로베르 들로네  <에펠 탑>(붉은 탑)  1911년 

 

  

로베르 들로네  <에펠 탑>  1922년

 

하지만 노인의 일화를 논리학적인 면에서 보자면 명백한 범주 오류(category mistake)라고 말할 수 있다. 범주 오류란, 논리적으로 다른 범주에 속하는 말들을 같은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오류를 뜻한다.  

에펠 탑을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노인이나 오랫동안 에펠 탑의 전체적 모습을 사진 속으로만 봤던 사람이나 탑은 '거대하고 어마어마한 높이로 이루어진 건물'이라는 인식이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에펠 탑'이라는 하나의 대상을 평면적이면서도 일차원적인 이미지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에펠 탑이 꼭 높은 건물에서 바라보면 볼 수 있는 거대한 형태의 모습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에펠 탑 밑에서도 볼 수 있고, 에펠 탑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도 우리가 보지 못했던 탑의 꼭대기도 볼 수 있다. 프랑스의 입체파 화가로 활동했던 로베르 들로네(1885~1941)는 당시 물질문명과 근대화의 상징으로써 에펠 탑을 대상으로 여러 점의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그는 에펠 탑을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거대하면서도 온전한 형태의 철탑을 그렸던 것은 아니었다. 탑 아래로부터 거대한 조형물을 우러러 보는듯한 시점에서 그린 에펠 탑도 있고, 심지어 하늘 위에서 바라보고 있는 에펠 탑을 그린 것도 있다. 입체파에 심취한 적이 있었던 화가답게 대상을 여러가지 시점의 각도에서 보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하기 위해서 들로네는 다양한 형태의 에펠 탑을 그렸던 것이다. 그가 이런 실험적 창작이 가능했던 이유는 거대한 높이의 세모꼴 형태로 이루어진 전체적인 모습의 철탑으로만 보려는 시각적 범주 오류를 극복했기 때문이었다.  

범주 오류는 A  노인과 같은 일반인부터 시작해서 완벽한 논리적인 사고를 갖춘 철학자들마저도 흔히 빠지는 사고적 오류의 형태이다. 요즘 이와 같이 범주를 구분하지 못해 사회적으로 지탄을 받게 되는 경우가 생기는 데 그 대표적인 예가 최근에 일어난 바로 소설가 공지영의 트위터 사건이다.  

공지영이 자신 트위터에서 종합편성채널에 출연한 가수 인순이와 김연아 선수에게 쓴소리를 잇따라 쓰자 네티즌 사이에서 논란이 일었던 것이다. 인순이 씨는 종편 개국 공동 축하쇼에 출연해 축하무대를 꾸몄고 김연아 선수는 'TV 조선', '채널A' 등에 출연해 개국 축하 인터뷰를 진행한 점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읜 소견을 공 작가가 트위터에 남긴 것이 화근이 되었다. 이에 대해서 진중권은 자신의 트위터에서 "소신을 가지고 종편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개념'에 찬 행동일 수 있으나 그런 소신이 없거나 또는 그와는 다른 소신을 갖고 있다 해서 '개념'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개념'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말하지 않을 거다."라고 남김으로써 조용하게(?)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종편 개국 축하를 위해 출연하는 연예인들은 단지 '방송채널 축하'를 위해서 의례적인 출연을 했을 뿐이며 자신들의 직업인 방송 활동의 영역을 좀 더 넓히기 위해서, 그리고 대중들에 대한 자신의 인지도를 더 높이기 위해서는 이번에 새로 개국한 방송 채널의 진출에 욕심을 안 가질 수가 없다.  '방송 출연'이 직업인 연예인들 모두 보수적인 입장의 소신을 가졌다고 볼 수 없듯이 그런 소신을 가지지 않는 연예인들이 보수적인 색채가 짙은 언론이 만든 종편 개국을 축하하고 출연한 사실이 '개념 없는' 행동이라고 볼 수 없다. 연예에 종사하는 '예능인'들이 보수 언론의 기분을 맞춰주는 개념 없는 딴따라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공 작가보다는 범주 착오를 심하게 범하는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다. FTA 비준안 문제 앞에서 법의 범주와 정치의 범주를 헷갈린 지금 여당의 모습에서부터 시작해서 각종 비리를 저지른 정치인들을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덧붙이자면, 종편과 관련하여 공 작가보다 더 심한 개념 없는 행동이 있다. 자신의 독재정권 유지 일환으로 시행한 언론 통폐합에 대한 유감을 자신의 최측근이 대신하여 종편 개국 축사로 전달하는 전(前) 대통령 그리고 언론 권력의 최정점에 서온 이들이 마치 자신들을 '희생양'이고 '약자'인 양 스스로를 포장하여 스스로를 과거 부조리를 청산하는 것처럼 홍보하는 종편채널을 만든 문제의 언론 같은 경우에는 자기정당화된 범주 오류로 인해 스스로 '개념'을 상실하고 말았다. 


 

 

 Scene #2  차이 속의 연대 (syncretism) 

헬레니즘 문명은 고대 세계에서 그리스의 영향력이 절정에 달한 시대를 일컫는다.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하여 마케도니아 왕국은 중동 지역의 서남 아시아에서 고대 이집트에 이르는 대제국으로 발전했다. 그리스 문화와 언어가 그리스인 지배자들과 함께 새 제국 전역에 널리 퍼졌으며, 반대로 헬레니즘 왕국들은 각지 토착 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어 필요나 편의에 따라 지역 관습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파올로 베로네세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맞는 다리우스의 가족>  1565~1570년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3세와의 이수스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적장의 가족들을 해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의 지위와 명예를 존중해주었다고 한다. 이처럼 알렉산드로스는 정복지의 관습과 제도를 인정해 융화정책을 펼친 덕분에 그리스 문화가 각 지역의 문화와 융합해 헬레니즘 문화가 탄생할 수 있었다.  

(이주헌 <역사의 미술관> 중에서, pp 31)

 
   


그리하여 탄생된 헬레니즘 문명은 고대 그리스 세계와 중동, 서남 아시아의 문화가 융합된 산물이었다. 그리스와 아시아 문화의 혼성이 실제로 얼마 정도였느냐는 논쟁의 여지가 있으나, 대체로 사회 상류층의 실용적인 문화 수용으로 보고 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오리엔트적인 전제군주풍의 의례를 채용하고, 페르시아 왕녀와의 결혼, 페르시아 귀족을 친위대로 채용하는 등 이민족 통치의 수단으로서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의 결합을 시도하였다. 그래서 전대와는 다른 새로운 헬레니즘 문화가 탄생할 수 있었다. 이로써 그리스인이 이민족을 야만시한 관념이 희박해지고 세계시민주의가 역설되었다.

 

이렇게 서로 다른 특징을 가진 이질적인 종교나 문화, 학문이 하나로 합쳐지는 현상을 '싱크레티즘(syncretism)'이라고 부른다.

최근 새 역사교과서 개정을 둘러싼 논란이 뜨겁다. 집필기준 초안의 쟁점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표현과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의 문제, 이승만ㆍ박정희 전 대통령들의 '독재'를 인정하느냐의 여부였다. 보수 진영은 '자유민주주의'를 그대로 쓰고 '독재'표현은 넣지 않으며,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를 명기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그 논쟁의 핵심에 선 ‘자유민주주의’를 두고 진보와 보수 진영 학계 간의 대립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민주주의’라는 표현을 그대로 써야 한다는 진보 진영의 학계와 이를 ‘자유민주주의’로 바꿔야 한다는 보수 진영의 학계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지난 달에는 교육과학기술부가 논란 끝에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을 확정해 발표했지만 일부 학자와 역사관련 단체들의 반발은 여전하다. 뿐만 아니라 이번 집필기준에서는 지난 교과서 집필기준과 달리 5.18 관련 내용이 빠지자 광주지역 범시민사회단체에서 성명을 내고 교과부 장관을 만나 항의하는 등 반발여론이 확산되기도 했다.   

 

 

이처럼 역사교과서 공방이 사그라지지 않는 이유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치적인 시각에서 교육과정을 손대려고 하는 정부와 역사학자들의 근본적인 문제에 원인이 있다. 역사 교과서를 둘러싼 학자들 간의 씨름은 교육이 정치적 쟁점화된 데 있다. 현재 학교에서 사용하고 있는 역사교과서는 ‘2007 개정 교육과정’에 맞춰 집필되었다.  

이는 지난 2008~2009년에 집필되어 지난해 검정을 거쳐 올해부터 적용됐다. 그러나 새 교과서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올 2월부터 개정작업이 시작됐다. 8월에는 개정내용이 확정, 이후 3개월 만에 중학 교과서 집필기준이 정해졌다. ‘2009 개정 교육과정’에 따르면 중학교는 2013년부터, 고등학교는 2014년부터 새 역사교과서를 사용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출판사들이 6개월 만에 중학교 역사교과서를 만들어 제출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현 중학교 역사교과서가 집필기간을 4년 정도 거친 것에 비하면 이번 경우는 초고속으로 집필하게 되는 셈이다. 문제는 해당 교과서로 공부해야 하는 학생과 이를 가르치는 교사, 또 교과서를 만드는 출판사에게 그 피해가 고스란히 돌아간다는 사실이다. 검정을 통과해야 하는데 기준이 모호하면 정권 성향에 따라 좌. 우편향 논란을 가중화되기 쉽다는 것이다.

기나긴 고심 끝에 확정 집필기준은 이런 논란을 감안해 '자유민주주의' 용어의 경우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토대로 '자유민주주의'를 기본용어로 하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표현을 병기했다. 또 '장기집권에 따른 독재화'라는 표현을 써서 진보 진영의 시각을 수용했다. 반면 보수 진영 학계가 주장하고 있는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 부분은 분명한 사실로 판단해 그대로 쓰기로 했다. 교과부가 제시한 집필기준이 가급적 양측의 주장을 수용하려고 애쓴 흔적이 있었지만 양 쪽 진영의 학계에서는 이에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 

집필기준 확정과는 별개로 올바른 사관 정립을 위한 학계의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하지만 사관이 아무리 투철해도 교과서가 오류투성이거나, 교사가 사관에 진지하지 못하면 현장의 역사교육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사관이라는 게 본래 완전무결한 합의에 이를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젠 그나마 마련된 틀을 기초로 보다 훌륭한 교과서와 좋은 현장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힘을 모아야 한다.  

이런 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싱크레티즘' 즉, '차이 속의 연대' 라는 사고가 필요하다. 자신의 역사적 사관이 무조건 옳다고 옹호를 한다거나 자신과 다른 이질적인 사고를 지닌 상대방에게 강요를 한다는 것은 서로 간의 대립의 골만 깊어지는 상처만 남길 뿐이다. 진중권의 표현대로 싱크레티즘은 그저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행동을 일치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사관의 입장을 인정하되 잊혀질 만 하면 불거지는 왜곡되거나 오류로 이루어진 역사적 내용을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Epilogue : 철학이라는 확대경을 제대로 사용할 줄 알기

개인적으로 철학의 개념에 대해서 많이 부족한 상태라서 책의 첫 장을 펴기 전부터 칼럼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지 걱정이 들기도 했다. 몇 몇 개념을 소개한 내용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있었지만 특정한 사회현상을 예로 들어 철학에 이제 막 관심을 가진 독자들에게는 큰 부담이 없을 듯하다. 단, 저자가 머리말에서도 밝혔듯이 그가 1년 간 쓴 칼럼들은 철학적 개념을 사회현상을 바라보면서 인식하게 된 주관적 견해이고 단지 개념들이 사회현상에 적용할 수 있는 사용법을 보여주기 위해서 저자가 선택한 범례에 불과하다. 저자가 우려한 것처럼 그가 소개한 철학적 개념과 그 범례들이 남에게 자랑하기 위한 지식의 수집품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 진중권은 철학의 개념을 사회현상을 정교하게 들여다 볼 수 있게 해주는 확대경이라고 비유하고 있다.

오랜 옛날,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유리로 만들어진 렌즈라는 도구의 기능을 알게 된 사람이 많았다. 그들에게 렌즈는 먼 곳을 가까이에 볼 수 있는 그저 신기한 발명품으로만 인식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렌즈는 사물을 확대해 볼 수 있는 용도로만 사용되지 않았다. 이탈리아의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2개의 렌즈를 통에 끼워 망원경을 발명하였다. 오늘날 갈릴레이의 공적은 망원경을 만들었다는 사실보다는 처음으로 망원경을 천체관측에 사용하여 그때까지 눈으로는 관측되지 않던 천체와 우주의 세계를 망원경에 의하여 최초로 탐색하였다는 데 있다. 확대경의 렌즈를 무조건 깨끗이 닦는다고 해서 멀리 있는 곳을 뚜렷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다. 렌즈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멀리 떨어져 있는 곳뿐만 아니라 저 멀리 하늘에 떠 있는 달 표면까지 볼 수 있다.

대한민국은 실용적인 면들을 너무 중요시한 나머지 인문학을 너무 소홀히 여기지 않나 싶다. 교양을 가르쳐야 할 대학에서는 학생을 돈벌이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정부도 실업률을 줄이기 위해 어떻게 해서든지 취업이 잘 되는 것이라고 최고라는 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하지만 인문학이라는 순수학문의 발전이 없이는 결코 지속적인 발전이 이루어질 수 없다. 인문학의 위기는 결국 지속 가능한 성장의 위기로 직결될 수 있다. 철학적 개념이라는 렌즈의 기능을 이해하고 직접 자신을 둘러싼 현상을 바라본다면 여태까지 몰랐던 현상의 이면, 그리고 그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철학을 공부하게 된다면 머릿속에는 새로운 생각을 숙성시키는 ‘인식의 효모’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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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1-12-03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콘, 저도 빌려다놨는데 못읽고 일주일 다되서 도로 갖다 줘야된다는.. 으흐흐

cyrus 2011-12-04 21:36   좋아요 0 | URL
기회가 된다면 꼭 읽어보시길 권해요. 이 책 속에 실린 글이 씨네21의 연재
칼럼 모음집이라는 데 칼럼이라 그런지 내용이 쉽게 읽혀지는 편이에요. 몇 몇 글은 조금은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요 ^^;;

맥거핀 2011-12-04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편에 대해 하신 말씀에 대해 동감합니다. 진중권씨가 상당히 중요한 포인트를 지적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튼 뭐 그래도 종편을 거부한 연예인들이 조금 더 이뻐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네요.^^;

cyrus 2011-12-04 21:37   좋아요 0 | URL
정말로 종편의 실체(?)를 알고 나서 종편을 거부한 연예인들이 있다면
정말 대단한거 같아요 ^^
 
인간 불평등 기원론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27
장 자크 루소 지음, 주경복 옮김 / 책세상 / 200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 사이의 불평등의 기원은 무엇이며,불평등은 자연법에 의해 허용되는가? 

1750년, 디종 아카데미 현상 논문 공모전에서 무일푼으로 방랑 생활을 하고 있었던 장 자크 루소는 <학문과 예술에 관하여(일명 학예론)>라는 논문 한 편으로 인해 공모전 우승의 명예를 거머쥐는 동시에 '사회사상가' 라는 새로운 명함도 가지게 되었다.   

루소는 또다시 디종 아카데미 논문 공모전에 도전하게 되는데 아카데미가 제시한 주제는 '인간 불평등의 기원' 에 관한 것이었다.  어릴 적부터 가난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루소는 디종 아카데미가 질문을 던지기 이전에 '인간이 왜 불평등한가' 에 대한 나름의 고민을 했을 것이다. 가난 때문에 어려서부터 일을 해야만 했고,굶주려야 했던 루소가 자신의 가난과 사회적 불평등에 대해 민감한 감수성을 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루소는 이러한 불평등의 원인을 문명 그 자체로 보고 있다. 귀족과 같은 특정 계급을 지적한 것이 아니라 자연 상태에서 벗어난 인간의 문명 자체를 비판한다는 점에서 부르주아들과 계몽주의 사상가들 양쪽 모두에게서 비난을 받았다.  루소의 주장은 당시의 전통과 기득권을 부정하는 것이기에 매우 진보적이었지만 '과거' 로 표현되고 있는 자연 상태로의 복귀를 꾀한다는 의미에서 '보수적 사상' 이기도 했다.   

특히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를 전제로 하는 계몽주의 사상과도 배치되는 것이기 때문에 루소의 절친한 친구이자 백과전서파에 활동한 디드로 역시 그의 사상을 이해하지 못했다.  한때 친분적 교류를 맺었으나 학문적 입장 차이로 인해 철천지 원수(?)가 된 볼테르는 문명 사회가 만들어낸 인간들의 '소유' 행위가 사회적 불평등의 기원이라고 생각한 루소의 주장에 대해 조롱에 가까운 비판을 하였다.  

"이것은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에게 약탈당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거지의 철학이다."   (아르놀트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창작과 비평사, pp 102)

그리고 루소라는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려준 디종 아카데미는 칭찬 일색이었던 <학예론> 때의 반응과 다르게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야박한 평가를 내렸다.  결국 루소는 두 번째로 참가한 논문 공모전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인간 불평등의 원시적 기원  

 

얀 브뤼헐 & 피터 파울 루벤스  <아담과 이브가 있는 에덴 동산>  1615년경 

   
  미개인은 자연 상태에서 생활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본능 속에 갖고 있었으며, 사회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것은 훈련된 이성 속에 갖고 있었다.  우선 이런 상태에 있는 인간들은 서로간에 도덕적인 관계도, 분명한 의무도 갖고 있지 않아서 선인(善人)일 수도 악인일 수도 없었으며, 악덕도 미덕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pp 78)  
   

   

루소에 따르면 원초적 자연상태의 인간은 행복하게 자족하는 존재이자 선악 개념에서 자유로운 존재였다.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자기보존의 본능에 맡겨져 서로 고립되어 생활하고, 그 육체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전념하였다. 자연인은 미덕도 악덕도 모르고, 신체적 불평등을 제외하고는 거의 평등하였다.    루소의 입장은 자연 상태의 인간은 저마다 자유롭고 평등하여 생존을 위한 자연권을 추구하기 위해서 악하다고 보는 일명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이라는 홉스의 견해를 부정하고 있다.   

 

여러 가지 개념과 감정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정신과 마음이 훈련됨에 따라 인류는 점차 유순해지고 관계가 확립되고 유대가 강화되었다. 사람들은 오두막 앞이나 큰 나무 주위에 자주 모이게 되었다.  연애와 여가의 진정한 소산이라 할 수 있는 노래와 춤이 모여든 한가한 남녀들의 심심풀이라기보다는 매일의 일과가 되었다.  그리하여 저마다 남을 주목하고 자신도 남에게 주목받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남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하나의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노래를 가장 잘 부르고 춤을 가장 잘 추는 사람,얼굴이 잘 생기거나 힘이 센 사람,재주가 가장 뛰어나거나 언변이 가장 좋은 사람은 존경을 받았다. 이것이 불평등을 향한, 그리고 동시에 악덕을 향한 첫걸음이었다.   (pp 103) 

  

그러나 자연상태의 인간은 공동체 경험 속에서 파괴되고 만다. 비교의식과 우월성에 대한 욕구가 소유욕과 결합하면서 생산수단의 사유화가 인간을 소외시키기 시작했다.   분업과 가족, 사유재산의 도입을 포함하는 일련의 발전과정에 의해 자연상태에서의 능력과 자질의 자연적 불평등은 시민사회의 형성과 더불어 경제적 불평등으로 진화된다.   

 

나는 인류에게 두 가지 불평등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자연적 또는 신체적 불평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에 의해 정해지는 것으로, 나이, 건강, 체력의 차이와 정신이나 영혼의 자질 차이로 성립된다.   또 다른 불평등은 일종의 약속에 좌우되고, 사람들의 동의로 정해지거나 적어도 용납되는 것으로 도덕적 또는 정치적 불평등이라고 할 수 있다.  후자는 일부 몇몇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쳐 누리는 갖가지 특권들, 이를테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부유하다거나 더 존경을 받는다거나 더 권력을 가지고 있다거나 또는 타인을 복종하게 만든다거나 하는 특권들에 의해 성립된다.     (pp 45)

 

루소는 지배와 굴종, 폭력과 약탈이 '소유' 에서 비롯한다고 봤다.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물질을 소유하는 것과 동등하게 여겨짐으로써 평등은 깨지고, 무질서의 불평등이 초래되었다는 것이다.   사유제도의 등장과 함께 평등은 사라졌다. 사유제도는 합의에 의해 성립되었지만 정치적 불평등을 야기시켰다.  이윽고 부자의 횡령과 빈자의 약탈이 시작돼 무서운 전쟁 상태에 이른다. 부자는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해 계약에 의한 여러 가지 불평등, 부자와 빈자, 강자와 약자, 주인과 노예의 상태를 제도화한다.

  


  시대를 넘어 지속되는 불평등

결국 이러한 탐구의 과정 끝에 루소가 제시한 사회적 불평등의 해결책은 무엇일까?  루소는 이에 대한 직접적인 해결책을 끝까지 제시하지 않았다.

어쩌면 자연 상태에서 인간이 그토록 자유롭고 불평등에서 해방된 존재라면 자연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가능하지가 않다. 앞서 루소가 말한 '자연 상태' 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것이라고 지적했다. 가상의 자연 상태로 돌아가라는 것은 실현 가능성이 없는 구호에 불과할 수 있다.

루소는 <루소는 장 자크를 심판한다> 라는 일종의 대화록에서 "인간의 본성은 결코 후퇴하지 않으며 한번 잃어버린 순수성은 다시 회복되지 않는다" 고 밝힌 바 있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 해제, pp 158)    루소 자신도 역사의 움직임을 되돌리려는 노력은 성과가 없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는 Occupy Wall street(월 스트리트를 점령하라) 시위

 

그러나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갈수록 심해지는 우리 시대의 불평등 또한 문명 자체, 범위를 좁히면 잘못된 체제와 제도에 주된 원인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구조화한 불평등은 언젠가 폭발하기 마련이다.  최근 미국 경제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월 스트리트 거리에서는 일어나고 있는 Occupy Wall street(월 스트리트를 점령하라) 시위 현상이 그 예이다.  타락한 금융자본주의가 만들어낸 경제적 불평등에 항의하면서 시작된 미국 뉴욕 월스트리트 점거 시위가 심상치 않은 모습으로 전개되고 있다.  

지금으로서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불평등을 해결할 수 있는 실질적인 대안을 찾기가 쉽지는 않지만 '인류는 모두 불평등하다' 라고 말했듯이 사회 불평등은 시대를 넘어 어떠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라는 루소의 충언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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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1-10-05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읽을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cyrus의 글은 깊이가 있는것 같아요^^

cyrus 2011-10-07 17:26   좋아요 0 | URL
아니에요, 요즘에는 글을 쓸 때 간결하게 쓰려고 노력중이에요.
그렇게 쓰다보니 문맥상 안 맞는 부분도 많이 있고요.. ^^;;

빵가게재습격 2011-10-05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루소가 제기한 사회적 불평등의 해결책'은 <사회계약론>입니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 홉스에 반하는 느낌의 저작이라면, <사회계약론>은 홉스와 로크의 논의를 프랑스식으로 계승한 느낌의 저작이고요. 한 번 들춰보시길... 글 읽어보고 몇마디 첨언합니다.

cyrus 2011-10-07 17:27   좋아요 0 | URL
좋은 정보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안 그래도 <사회계약론>을 읽어보려고 했었어요. 요즘 수업 시간에
루소의 사상에 대해서 공부하는 것도 있고해서 기회를 삼아 요즘
루소의 저작을 읽고 있었답니다.

2011-10-05 18: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07 17: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 외 한길그레이트북스 92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중현 옮김 / 한길사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학문과 예술의 부흥은 풍속을 순화하는 데 기여했는가?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는 1750년 디종의 아카데미 논문 공모 대상을 수상한 장 자크 루소의 처녀작이다.   당시 아카데미는 '학문과 예술의 부흥은 풍속을 순화하는 데 기여했는가?' 라는 주제를 내걸게 되었는데 루소가 주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소논문 형식으로 쓴 것이다.  이 논문 한 편은 가난과 방랑 생활을 보낸 젋은 루소를 일약 지식인 사회에 떠오르는 스타로 만들어줬다.  

화려한 학력도 없이 그저 독학으로 숙지한 지식으로 무장한 무명의 젋은이가 단숨에 아카데미 논문 공모전에 대상을 받는 것도 이례적이었지만 당시 사회를 주름잡고 있었던 기존의 지식인들에게는 풋내기 사상가의 입장을 반박할 정도로 루소의 명성은 대단하였다.   심지어 자신의 논문에 대해서 반박하는 당대 지식인들의 편지들이 날아 올 정도였다.  이에 대해 루소는 편지 교류를 통해서 자신에게 향하는 반박의 의견을 논리적으로 재반박함으로써 정면에 맞섰다.   

루소는 학문과 예술의 발전이 오히려 인간의 풍속을 타락시켰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 당시 지식인 사회에서는 루소의 입장은 파격적이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이성' 을 중심으로 한 학문의 발달 덕택에 인간이 윤택한 삶을 살 수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루소가 살던 시대보다 더 윤택하면서도 안락한 삶을 누리고 있는 우리 현대인들 중에도 루소의 입장에 수긍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비록 논문은 짧은 분량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루소는 그동안 독서를 통해 쌓은 역사적 지식들을 총동원하여 학문의 발달과 관련된 문명에 대한 통설을 과감히 깨뜨리는 동시에 역사적 실례를 통해 충분히 논증하고 있다. 시대마다 명성을 떨친 여러 나라와 민족의 사례을 살펴보고 학문의 발전과 풍속의 타락, 패망 사이의 역학관계를 조망한다.    

   

 

  '못 된' 지식인과 권력자들에게 향하는 '가난한 노숙자' 루소의 비판

루소는 시대가 변할수록 학문이 사회 발젼에 이바지하기는커녕 타락하게 만드는 원인을 그 당시 학문 구조 자체에만 문제를 삼은 것이 아니다.   그는 학문이 사회 진보에 도움이 되지 않는 원인을 자신들의 이익욕과 오만 그리고 위선으로 점칠된 지식인들의 학문 남용 탓으로 돌리고 있다.      '학자' 라는 이름 하에 오히려 사회 내 불신을 조장하고 대중들에게 왜곡된 학문을 제공하는 '못 된' 지식인이 인간의 풍속을 타락시켰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문예를 통한 교류의 주요한 이점, 다시 말해 칭찬받을 마한 작품을 써서 서로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욕망을 부추김으로써 자신들을 더 사교적이게 해주는 이점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 장 자크 루소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 pp 36 -

 

인간이 '지식' 이라는 정신적 도구를 습득하게 될수록 학문과 문예가 더욱 발달해지자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정신적인 욕망을 형성하기 시작했고 더 나아가 권력자들까지도 정신적 욕망이 만들어낸 예속의 힘이 뻗쳐나가게 되었다.    

루소와 볼테르 등과 같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등장하기 전 유럽은 강력한 왕권을 옹호하는 절대군주 시대였다.   권력자들은 학문과 문예를 존립한다는 명목 하에 지식에 무지한 국민들을 '개화한 국민' 으로 만듦과 동시에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다.   그리고 몇 몇 지식인들은 권력자 앞에 아부를 하며 학문을 통한 정의 구현과 사회적 문제 해결에 이바지하기보다는 자신의 이름과 명예를 상류사회 사교계에 널리 알리는데만 치중했다.    루소는 사교계에 들락날락거리는 지식인들의 행태를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만 남은 미덕' 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 pp 37)    실제로 오랫동안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던 볼테르가 점점 사교계 출입이 잦아들게 되자 그를 비난하기도 하였다.   

가난한 노숙자에 불과한 루소는 '아카데미' 라는 고상한 이름으로 불려지는 지식인 집단이 내건 주제를 가지고 '참된 인간' 을 만들기 위한 올바른 윤리과 미덕을 강조하기보다는 자신들의 명예을 드높이기 위한다거나 얄팍하게 그지 없는 영영가 없는 학문과 지식으로 치장한 '못 된 지식인' 들이 활동하던 당대의 현실을 용기있게 정면으로 비판하였다. 

 

 

  학문 연마는 오직 소수의 천재만이 할 수 있다   

루소가 기존 지식인 사회의 현실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된 지식인들은 듣도 보지도 못한 한 젊은이가 쓴 논문이 상당히 눈에 거슬렸을 것이다.  그런 점을 비추어 본다면 수많은 지식인들이 루소에게 논문 내용에 대한 반박성 편지를 보낸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지식인들이 용기있게 자신들의 얼굴에 정면으로 침을 뱉은 루소의 행동 때문에 괜히 비판을 한 것은 아니었다.      

루소는 학문이 풍속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소수의 천재들만이 학문을 연마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이 세상에 태아나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학문 연마를 통해 천재가 될 수 없다고 본다.  심지어 소수의 천재들로 이루어진 사회 구성원 1%을 제외한 나머지 평범한 사람들 99%는 은 애초에 학문에 염두를 두지 말자고 냉정하게 경고를 하고 있다.   

 

하늘이 별로 큰 재능을 부여해주지 않았을뿐더러 별로 큰 영광도 예정해놓지 않은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은 초야에 묻혀서 살 일이다.   (중략)    백성에게 의무를 가르치는 임무는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자.  우리는 그저 우리의 의무를 잘 이행하는 것으로 만족하자.  우리는 그 이상의 것을 알 필요가 없는 것이다.  

- pp 66 -

  

루소가 생각하는 '천재' 란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독립적으로 올바른 학문을 수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자를 가리킨다.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에서 루소는 자신 스스로 '평범한 사람들' 이라고 겸손하게 낮추고 있지만 실제로 루소는 이 논문을 집필할 수 있게끔한 방대한 지식을 평생 독서를 통해 습득한 머리가 좋은 사상가이다.    

루소의 '천재' 예찬은 지식인들의 눈에는 루소의 갑작스런 등장은 그저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려는 젋은 지식인의 오만으로만 보게 되었으며 그리고 당시 설립되어지던 교육기관들의 존재를 부정하는듯한 그의 입장을 수긍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루소가 생각하는 인성교육의 중요성

그러나 루소가 '학교' 와 같은 교육기관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니다.  그는 '참된 인간' 이 될 수 있는 '참된 지식' 을 가르치는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루소가 생각하는 올바르고 참된 지식의 교육이란 단순한 지식 습득이 아닌 건전한 정신을 함양할 수 있는 도덕적 교양에 초점을 맞춘 인성 교육이다.  

분별없는 교육이 우리 정신을 치장하여 판단을 그르치는 것은 아주 오랜 전부터의 일이다.  나는, 많은 돈을 들여 젋은이들에게 온갖 것을 가르치지만 그들의 의무는 가르치지 않는 엄청나게 큰 교육기관을 도처에서 본다.   당신의 아이들은 자기 나라 말도 제대로 모를 것이다.  그들은 아무 데서도 사용되지 않는 이상한 말을 하고, 자기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시를 쓸 것이다.  그들은 진리와 오류를 분별할 줄 모른 채 그럴듯한 주장을 폄으로써 남들이 진리와 오류를 분간하기 힘들게 만드는 기교를 습득하게 될 것이다.  아량과 공정, 절도, 인간성, 용기 같은 말들이 뜻하는 바를 그들은 전혀 모른다.  

- pp 58 -

  

루소가 이미 인성교육의 중요성을 일찍 주장한 것도 흥미롭지만 그가 이런 주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직접 몸소 교육의 현장에서 체험한 경험 덕분이다.  루소는 사상가로서 활약하기 전에는 가난을 해결하기 위해서 다양한 직업을 진전하기도 하였는데 게중에 귀족 자녀의 가정교사 로 근무한 적이 있었다.     

세상이 요구하는 당장의 쓰임새만을 생각한다면 인간과 사회에 대한 사려 깊은 통찰이란 한낱 부질없는 짓일지도 모른다.  역사학, 철학, 문학 등은 전공에서 아예 자취를 감췄다. 인문학은 당대의 사회공동체를 존립하기 위해 구성한다. 사회공동체의 미래 비전도 인문학적 상상력 없인 제대로 세울 수 없다. 그런데도 작금의 한국 사회에서 인문 사회과학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되고 있다.  우리 사회의 공동체적 규범과 가치가 날로 황폐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학문의 위기, 특히 인문학의 위기는 결국 한 사회공동체의 비판의식 마비와 학문의 실종, 그리고 윤리의 타락을 초래한다.    

설상가상으로 지식생산의 장소가 되어야 할 대학은 어려운 국면에 놓여 있다. 진리탐구를 위한 상아탑으로부터 취업을 위한 직업훈련장으로 바뀌고 있다.  대학은 차세대의 인재를 길러낼 뿐 아니라 교양있는 시민을 길러내는 곳이기도 하다. 한국처럼 주요 자원으로 인적자본 밖에 내세울 것이 없는 국가에서 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루소의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에밀> <사회계약론>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 비하면 인지도가 떨어지는 편이며 유명 저작에 비해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작은 논문에 담겨져 있는 루소가 주장하는 의견들 중에는 오늘날의 관점과 맞지 않는 것도 있다.  하지만 지식과 학문을 내세워 대중들에게 불량 지식을 제공하거나 권력에 기대는 아부하는 지식인들이 판을 치고 참된 교양과 인성을 함양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지식을 가르치지 않는 현실을 비판한 학문 사회에 대한 루소의 비판은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의 학문, 교육 현실을 비추어본다면 지금도 유효하면 곱씹어 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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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1-09-19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존 지식인들의 속을 팍팍 긁어놨으니 루소가 욕을 많이 얻어먹었겠죠.그런데 루소의 지명도에 비해 댓글이 너무 한산하네요.왜 그럴까...

cyrus 2011-09-19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이 저작물의 인지도가 낮아서 그런게 아닐까요? 짧은 니
내용이었지만 학문에 대한 루소의 비판의식과 교육론에 대해 공감이 많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