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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또예프스끼 평전
에드워드 H. 카 지음, 김병익.권영빈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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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 도박꾼 ' 도스또예프스끼   

<죄와 벌><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책 제목만 들어도 금방 떠올리게 되는 세계적인 작가, '도스또예프스끼' .  톨스또이와 함께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문호로 칭송된다.

그는 독자적인 방법으로 인간의 내면을 추구하여 근대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고 평가된다.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에 고민하는 자신의 모습을 작품세계에 투영한 그의 작품들은 현대에 와서도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고전으로 추앙받고 있다.   

하지만 ' 세계적인 대문호 ' 라는 위대한 칭호의 수식어와는 반대로 항상 따라오는 또 다른 수식어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 도박꾼 ' 이라는 것이다.  그는 틈만 나면 러시안 룰렛이 있는 도박장으로 찾아가 헤어나지 못할 정도로 병적인 도박꾼으로 알려져 있다.   

도스또예프스끼는 도박에서 손을 떼겠다고 아내에게 수없이 다짐했지만 그 약속은 한 번도 지켜지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또다시 집 안의 돈을 싹 쓸어 담고 도박판으로 달려갔을 정도이다.  도박자금 마련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는데 결혼반지, 아내 귀걸이, 옷, 신발은 물론 낡은 모자까지 전당포에 맡기는 일은 도스또예프스끼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이렇다보니 도박으로 전 재산을 날리고 빚쟁이를 피해 4년 동안 해외 도피 생활을 하기도 했다.   

   

 

이런 자신의 도박벽과 관련된 경험을 바탕으로 <노름꾼>(Igrok)이라는 소설이 탄생될 수 있었다.   그래서 도스또예프스끼라고 하면 쉽게 도박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도스또예프스끼 복권    

 

 


중후하고 엄격한 이미지의 도스또예프스끼가  

복권 속에 그려져 있는 것이 이채롭다.  

자신의 얼굴이 들어간 복권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 러시아 땅을 

하늘 위에서 바라 본 도스또예프스끼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 죽은 자는 말이 없다 ' 라는 말이 있듯이 도스또예프스끼가 후세에도 자신의 도박벽이 회자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알 길은 없지만 반대로 그와 관련된 살아있는 자들은 말을 한다. 특히 ' 도박꾼 ' 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 때문에 한순간에 천덕꾸러기 조상을 두게 된 도스또예프스끼의 후손들에게는 말이다. 

몇 년 전에 러시아에서는 도스또예프스끼의 초상화가 들어간 복권이 발행되자 도스또예프스끼의 후손들이 복권 발행에 대해서 강력한 반발을 일으켰던 해프닝이 있었다.  도스또예프스끼의 후손들은 자신들의 위대한 조상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복권 발행을 중지할 것임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복권을 발행하는 재단 측에서는 후손의 소송에도 눈 하나 까딱도 하지 않았다.  러시아에서는 도스도예프스끼뿐만 아니라 유명한 황제나 역사적 인물들의 초상화가 들어간 복권을 발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손들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자신의 조상의 얼굴이 복권을 장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탐탁치 않게 여겨질 수 밖에 없다.  아무리 복권이 국가가 공인한 ' 사행성 오락 ' 이라고 하지만 한꺼풀 벗겨보면 복권 역시 ' 도박 ' 그 자체인 것이다.  게다가 복권의 홍보 수단 때문에 ' 대문호 ' 가 아닌 ' 도박꾼 ' 이라는 이미지가 다시 한 번 부각될 우려가 있다.  

하긴, 생물 발생의 기원을 밝혀냈고 백신의 발견 등으로 과학사에서는 위대한 미생물학자로 알려진 파스퇴르와 유산균의 정체를 증명하였고 노벨상을 수상한 이력도 있는 메치니코프가 우리나라에서는 유유, 요구르트 제품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상황만 봐도 후손들의 심정은 이해가 간다.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아이들이 어른들의 손에 항상 쥐어져 있는 복권 속의 도스또예프스끼를 보게 된다면 복권을 장식하고 있는 그저 그런 수염 난 아저씨로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다.  러시아의 위대한 대문호에서 한순간에 ' 복권 아저씨 ' 로 전락되는 것이다.  

 

 

  ' 도박꾼 ' vs ' 대문호 ' : 도스또예프스끼에 대한 양면적인 평가 

그러나 후손들이 아무리 복권 회사에 소송을 걸어 승소를 한다하더라도 도박으로 인해 퇴색해버린 대문호로서의 명예를 다시 회복하기에는 불가능한 일로 보인다.  ' 대문호 ' 라는 명예는 계속 유지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해서 러시아 자국 내의 소송 승소 하나만으로 대중들의 머리 속에 인식된 ' 도박꾼 ' 이라는 불명예를 완전히 지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국내에 한 때 인기 연예인의 도박 사건 때문에 수많은 여론들이 도박의 심각성에 대해 거론되었을 때에도 항상 먼저 회자되는 인물이 바로 도스또예프스끼다.  도박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병적 심리 상태를 가진 도박 중독자를 빗대어 표현할 때도 제일 먼저 도스또예프스끼가 등장한다. 그만큼 도스또예프스끼는 ' 도박 중독의 심각성 ' 의 대명사가 되었다는 것이다.       

만약에 도스또예프스끼가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소설가로 알려지면서 지금까지도 살고 있었더라면 그의 도박 스캔들은 여론과 대중의 눈을 쉽사리 피해 갈 수 있었을까?   그 역시 ' 소설가 ' 라는 사회적 공인으로서 대중들의 지탄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며 추악한 스캔들은 소설 판매 부수량에 악영향을 주게 된다.  어쩌면 실제보다 더 궁핍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 글은 무척 잘 쓰는데 인간성은 글러먹었고 도박에 미쳤대. ' 라고 대중들은 그를 손가락질하며 수군거렸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도스또예프스끼는 이미 수 백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라서 오늘날에는 ' 도박꾼 ' 혹은 ' 도박 중독자 ' 라고만 하는 것도 다행인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 러시아 도박꾼 ' 의 소설을 읽고 있으며 그가 쓴 소설들을 불후의 고전으로 추앙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사회적으로 매장당할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한 도박 중독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전세계의 독자들의 심장을 파고드게 만드는 그의 장엄한 문학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단어와 문장을 통해 하나의 예술 작품을 만들어내는 소설가의 본질과 그가 탄생시킨 문학은 이토록 다른 것일까?   어떤 이들은 ' 도박꾼 ' 이 쓴 소설 - 특히 <노름꾼> - 을 굳이 ' 고전 ' 이라고 부르면서 읽을 필요가 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 도박 중독자 ' 도스또예프스끼를 위한 E.H. 카의 실증적 변명    

 

 


E.H. 카 (1892~1982)
 

 

그러나 영국의 역사학자 E.H. 카는 자칫 속물적으로 비춰질 수도 있는 도스또예프스끼의 도박 중독을 자신의 처녀작인 <도스또예프스끼 평전>을 통해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고 있다.   E.H. 카는 도스또예프스끼가 쓴 소설뿐만 아니라 그가 쓴 편지들, 일기 그리고 그의 아내 안나 그리고리예브나가 쓴 회상록 등 다양한 문헌 자료를 통해서 작가의 도박 증세를 보다 입체적이면서도 실증적으로 분석하였다. 

E.H. 카는 도스또예프스끼가 이토록 도박의 늪에서 벗어날 수 없었떤 이유를 단순히 도박을 통해서 얻게 되는 경제적 이익만은 아니라고 보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비롯된 순간적으로 나오게 되는 비정상적인 흥분 그리고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게 자기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강렬한 열정의 기질이 자기 자신을 극단적인 룰렛 중독으로 몰아넣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내 신경은 산란하고 한자리에 계속 앉아 있었지만 피곤하다오.  그러나 동시에 원기는 왕성하오.  나는 초조하고 흥분한 상태요.  그리고 내 성질에 이것은 때대로 필요하다오.  

- 아내에게 보낸 편지 중 일부, E.H. 카 <도스또예프스끼 평전> p 197 재인용 -

  

도스또예프스끼는 자신만의 방법을 통해서 언젠가는 룰렛에서 이길 수 있다는 자기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하루하루 돈을 허무하게 잃어감에도 불구하고 그는 패배의 절망 속에서도 승리라는 선물을 선사해 줄 승리의 여신이 자신에게 손짓할 것이라고 생각, 아니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표도르가 자신의 방법에 따르면 룰렛에서 이길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 것은 완벽하게 정확한 것이었고 완전한 승리를 얻어 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냉혈적인 영국인이나 독일인이 그렇게 한다는 조건에서이지 나의 남편처럼 신경질적이고 쉽게 포기하며 모든 것을 극단으로 밀고 가는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이다.  

-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회상록> 중에서, E.H. 카 <도스또예프스끼 평전> p 195 재인용 - 

 

아내의 표현대로 순전히 ' 운 ' 으로 승패가 결정되는 게임의 진리를 충동적인 성격이 다분히 강한 도스또예프스끼에게는 룰렛은 사실상 적성이 맞지 않았다.   그가 룰렛에 집착한 원인을 오늘날 심리적인 측면에서 보게 된다면 ' 도박자의 오류 ' 에 빠진 것과 유사하다.  ' 도박자의 오류 ' 란  실패를 거듭할수록 드디어 성공할 때가 왔다고 확신하는 도박 중독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게 되는 이상심리를 뜻한다. 슬롯머신을 계속 당기면서 이번에야말로 잭팟이 터질 때라고 지나친 기대심리를 갖는 것이다.   

그러나 E.H. 카는 도스또예프스끼의 도박 중독을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냉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소설 <노름꾼>에는 돈을 잃든 말든 도박 자체를 즐기는 사람을 경멸하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소설을 읽는 독자들 - 특히 도스또예프스끼가 지나치게 도박 중독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 에게는 작가 자신의 도박벽 증세를 스스로 자기비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카는 단순히 도스또예프스끼를 바라보는 단편적인 진실에 불과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도스또예프스끼의 도박 중독은 단순히 돈을 얼마 많이 따느냐에 따른 일반적인 도박 중독자의 증세라고는 볼 수 없다. E.H. 카의 표현대로 도스또예프스끼에게 룰렛은 ' 깊은 도덕적 타락에 빠지고 싶은 욕망의 추구 ' 였던 것이다.  

 

 

 

  여전히 ' 도스또예프스끼 ' 가 지독한 도박 중독자라고 생각하는 당신에게 ,,, 

객관적이고 치밀한 자료 분석으로 일가견이 있는 E.H. 카가 대문호의 일대기를 균형 있게 조명했음에도 도스또예프스끼의 도박 증세에 대한 카의 온화한 관점에 대해서 불편함을 느낀 독자도 있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80년 전, (<도스또예프스끼 평전>은 1931년에 정식으로 출판되었다) 대문호의 도박벽을 바라본 카의 시선은 도박의 늪에 헤어나지 못하는 도박 중독자를 사회악으로 규정되는 일탈의 문제로 바라보는 오늘날의 시선과 불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E.H. 카는 자신의 조국에서 태어난 사람도 아닌, 그것도 러시아의 소설가인 도스또예프스끼라는 한 사람의 일생을 조명하기 위해서 최대한 객관적으로 설명하려고 하였다.  오늘날에는 '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 ' 라는 문장이 자주 인용되는 <역사란 무엇인가>가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지만 무엇보다도 카가 객관적이면서도 균형적인 냉철한 시각으로 역사를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을 본격적으로 습득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자신의 처녀작인 <도스또예프스끼 평전>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그의 도스또예프스끼 연구는 훗날 러시아 혁명과 소련의 소비에트 사회를 객관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엄정성과 객관성이 강조되는 그의 역사학에도 단점은 있다. 역사의 진보가 있다고 판단되면 지도자의 악행이나 인권 유린을 눈감아주는 맹점이 있다는 것이다. 도스또예프스끼의 도박 증세를 평범하지 않는 성격에서 기인한 자신만의 욕망 추구라는 결론을 내린 카의 분석은 옳다 나쁘다는 식의 도덕적 판단의 배제에 따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카가 도박 중독자인 대문호를 절대적으로 옹호하기 위해서 평전을 쓴 것이 아니며 또 우리는 이미 수백 년에 살다가 죽은 대문호를 단순히 도박 중독자라고 해서 굳이 그의 명성을 흠을 낼 필요도 없다.   도스또예프스끼 이외에도 문학가, 미술가라고 가리키는 수많은 예술가들도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많은 일탈행위들이 있었다.   

이탈리아의 화가 카라바조는 빛과 그림자의 대비를 이용한 아름다운 그림과는 반대로 성격은 그야말로 통제불능이었다. 그는 항상 시비 걸기를 좋아했으며 결국에는 싸움 끝에 화를 이기지 못해 상대방을 살해한 적이 있는 전과자이기도 하다.   예술가의 행동에 대해서 선과 악의 구별이라는 기준을 내릴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해서 예술가가 만들어낸 예술을 가지고 옳다 나쁘다고 구별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 도박꾼 ' 도스또예프스끼를 용서해야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우여곡절 끝에 도박 중독에서 스스로 벗어났다는 것이다. 그 후로 본격적으로 위대한 작품의 창작을 위한 불꽃을 피울 수 있었다.  오늘날에는 도박 중독을 치료하는데 전문의가 필요하는 마당에 도스또예프스끼는 아내의 내조 덕분에 도박의 늪에서 빠져나왔다.  그야말로 인간 승리라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도스또예프스끼는 도박 중독에서 벗어난 것 그 이상으로 인간 승리를 맛보게 되었다. 그것은 세상을 떠난지 1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세계적인 대문호로 그의 이름이 여전히 빛나고 있다는 것이다.   생전에 문단으로부터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했지만 도스또예프스끼는 언젠가는 뿌쉬낀과 맞먹을 대작가가 될 것이라는 자부심은 끝까지 버리지 않았으며 기나긴 시베리아 유형 생활과 지독한 룰렛 중독으로 인해 몸과 정신이 피폐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창작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수백번이 넘는 도박장 인에서의 룰렛 게임을 수차례 패배한 인생의 낙오자였지만 소설 창작이라는 자신의 인생 전체를 올인(all-in)한 인생의 룰렛 게임에서는 끝끝내 승리할 수 있었다.   

  

 

* 사진 출처 및 인용 관련기사   

[‘ 도스토예프스키 로또복권 ’…후손들 발끈] 동아일보, 2005년 2월 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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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1-03-27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 서재에 오면 뭔가 늘 새로운 사실을 하나씩 알게 되네요. (제가 워낙 무식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cyrus님이 그만큼 남들과 다른 무엇으로 글을 쓰시려고 신경쓰신다는 뜻도 되겠지요? 감사드려요. ^ ^)

도스또예프스끼, 궁극적으로는 글쟁이네요. 도박에 빠진 도스또예프스끼는 안보이고(저는 그의 아내가 아니니까요.) '노름꾼'이라는 소설을 써낸 작가만 보입니다. '위대한' 이라는 수식어는 도스또예프스끼의 아내에게 붙이고 싶네요. ^ ^

cyrus 2011-03-28 08:02   좋아요 0 | URL
아니에요. 저도 포핀스님 서재에 가면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는데요.
특히 실용 분야에 대한 책의 서평이나 글은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그러고보니 천덕꾸러기 남편을 죽을 때까지 내조한 안나라는 아내도
참으로 대단한거 같아요, 요즘 같으면 그냥 이혼도장 쾅 찍을텐데 말이죠 ^^;;

반딧불이 2011-03-28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박에 주목해서 읽으셨군요. 도스토예프스키 복권이 있다는걸 처음 알았어요. 새로운 정보 고맙습니다.

cyrus 2011-03-28 08:03   좋아요 0 | URL
평전을 읽기 전에는 도스또예프스끼라고 하면 항상 도박이 떠올려서
도박 중독에 대한 내용에 대해서 흥미롭게 읽었어요.

마녀고양이 2011-03-28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굉장히 흥미롭네요.
도스또예프스키가 도박벽이 있었다니, 아하......
하기사 그런 글을 써내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예민했겠어요. 그리고
풍족함에서 천재성이 나오기는 힘들겠죠. 도박이란 중독이고, 중독이란 결핍이고.

화가든, 작가든, 다른 무엇이든 천재는 참 힘들었겠어요.
아니.... 인간은 다 힘든걸까요?

사이러스님, 요즘 학교에서 무지하게 바쁘시담서요? 건강 챙기시고~ ^^

cyrus 2011-03-29 00:44   좋아요 0 | URL
ㅎㅎ ' 무지하게 ' 정도는 아니구요,, 중간고사도 이제 한 달 남짓
남아서 거의 공부하는데 시간을 쓰는거 같아요,, 물론 중간에
책도 읽게 되지만요. 마고님도 건강 조심하시구요,, 열심히 하시는만큼
학업에도 좋은 결과 있으시길 바라요 ^^

비로그인 2011-03-28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 [거장처럼 써라] 에서 도스토예프스키를 다시 보게 되었는데, 이렇게 또 다른 방식으로 그를 보게 되네요.

ㅎㅎ.. 여전히 좀 시간이 들 것 같은, 이런 페이퍼를 쓰시는 걸 보면 아직 연애는 안하고 있으신 것 같네요.

cyrus 2011-03-29 00:47   좋아요 0 | URL
<거장처럼 써라>에서 바라보는 도스또예프스끼가 어떤 내용일지
궁금한데요,, 요새 갑자기 도스또예프스끼와 관련된 책이 나오는거 같아요.

요즘은 학업에 집중하고 있어요,, 연애는 아직,, 아무래도 연애는
저의 적성과는 맞지 않는거 같아요,,^^;;

굿바이 2011-03-29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자신의 얼굴이 나오는 복권도 있고 도스또예프스끼는 참으로 복이 많은 분이십니다. 평전을 읽으면서도 느낀 점이지만, 도스또예프스키가 강조한 인간의 자유의지만큼은 높이 평가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도박장에서 부인에게 돈을 보내달라고 편지를 쓰는 작가의 모습은 뭐랄까 자유의지를 스스로 반납한 것 같지만 말입니다 :)

cyrus 2011-03-29 14:16   좋아요 0 | URL
맞아요. 도박 중독에서 벗어나서 작품 창작에 몰입한다는건 정말
대단한거 같습니다. ^^

꽃도둑 2011-03-29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커스를 확실히 맞추고 쓰신 좋은 글입니다. 카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도박중독에 대해 좀 유연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건 사실인 거 같아요. 저는 카가 그 도박증에 대해 일견 연민을 갖고 있지 않나 할 생각이 들 정도인데요....생활고를 탈피하고자 시작한 도박이었잖아요. 처음엔 그랬지요...하지만 중독성이 강한 도박에서 그는 헤어날 줄을 몰랐지요...
어쨌든 그의 인생은 비난과 찬탄과 연민을 한 몸에 받는 작가임에는 틀림없어 보입니다.

cyrus 2011-03-30 13:31   좋아요 0 | URL
재미있는 점은 카 역시 도스또예프쓰끼 못지 않게 인생이 순탄치 않았답니다.
카 역시 결혼과 이혼을 반복해서 결혼을 세 번이나 했다고 하네요.
어쩌면 카는 위인에 대해서 조사하면서 자신처럼 순탄치 못한 위인에게 인생의 연민을 느끼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맥거핀 2011-03-29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한편으로는 도스또예프스끼는 자신의 도박벽의 양상과 원인을 누구보다도 잘 분석하고 있었으니까요. 그것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묘사하는 자신과 그것으로 달려가는 자신으로 분열되어 있던 것일까요. 그래서 한편으로는 <노름꾼>과 같은 소설이 나왔을지도 모르지요.
자신이 왜 도박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많은 도박꾼보다 나은 것인가요, 아니면 더 불행한 것인가요. 자신의 치부(?)를 이야기하는 <노름꾼>과 같은 소설을 쓰는 그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리뷰를 읽고나니 여러 생각이 드네요.^^;

cyrus 2011-03-30 13:34   좋아요 0 | URL
평전을 읽을 때 <노름꾼>이랑 같이 읽어보면 도박 중독에 대해서
더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을거 같아요, 저는 아직 이 소설을
읽지 못했거든요,, ^^;;

제 생각이지만 자신이 왜 도박하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 빠져 도박에 집착하는 사람보다는 덜 불행한거 같아요.
빠져나가기 힘들다는 도박 중독에서 벗어났고 그 이후로 유명한 작품들이
탄생하는 걸 봐서는요,, 거기에다가 자신의 부끄러운 체험을
소설을 만들어서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것을 보면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는데
나름 성공적이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펭귄클래식 20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레지날드 J. 홀링데일 서문, 홍성광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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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울아, 거울아.   

 

 

 

어린이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는 그림 형제의 동화 <백설공주>에는 백설공주의 아름다운 미모를 시기하는 마녀가 마법 거울을 통해서 질문을 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동화를 읽는 어린이들뿐만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읽었던 어른들도 생생히 기억나는 <백설공주>에서 제일 유명한 장면이다.  

백설공주의 계모로 새 왕비가 된 마녀는 자신만의 방에 걸려 있는 마법 거울에게 질문을 하는데 거울은 마녀의 질문에 맞는 대답을 하게 된다.  이를테면 왕비가 " 거울아, 거울아. 이 나라에서 누가 가장 예쁘지? " 라고 물으면, 거울은 " 여왕님이십니다 "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거울의 대답에 마녀는 자신이 이 나라의 최고의 미인된마냥 자아도취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마녀의 만족감은 그리 오래가지 못한다.  백설공주가 어여쁜 여인으로 자라게 되면서 항상 마녀가 예쁘다던 거울은 마녀가 아닌 백설공부가 더 예쁘다고 대답을 하게 된다.   

자신보다 더 예쁜 백설공주의 미모를 향한 질투심에 불타오른 마녀는 수차례나 백설공주를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미지만 수포로 돌아간다.  결국 마녀는 사과를 파는 노파로 변신하여 백설공주에게 독사과를 건네주면서 백설공주가 죽어가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이웃나라 왕자와의 극적인 만남으로 백설공주는 다시 살아남게 되고 왕자를 사랑하게 되어 이웃나라의 새 왕비가 된다.

백설공주가 죽은 줄 아는 마녀는 다시 한 번 거울에게  " 누가 가장 예쁘냐? " 고 묻는다.  거울은 " 왕비님이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그러나 새로 왕비가 된 백설공주가 당신보다 천 배는 아름답습니다 " 라고 대답한다.   마녀는 거울의 대답을 듣는 순간 다시 한 번 온 몸을 부르르 떨면서 충격을 받는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백설공주를 죽였으며 분명히 두 눈으로 똑똑히 온 몸에 독이 퍼져 죽어가는 백설공주를 봤었는데,,,     백설공주가 아름답다는 거울의 대답을 듣고난 뒤 실성해버린 마녀는 거울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바닥에 부딪힌 거울은 한순간에 산산조각이 나버리고 말았다. 

어린 시절에 동화 <백설공주>를 읽었을 때는 마녀가 마법 거울을 깨뜨린 이유를 백설공주가 이쁘다고 말한 거울의 대답을 듣게 된 이후 생긴 단순한 분노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단순히 거울의 대답 때문에 마녀가 홧김에 거울을 깨뜨렸던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그동안 몰랐던 자신의 실체를 눈 앞에 확인하게 되면서 생긴 불신과 혐오로 인한 분노였을지도 모른다.   

마녀가 제 스스로 거울에 비춰진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을 때 이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기품이 있고 아름다운 왕비의 얼굴이 아니었을 것이다. 백설공주의 아름다움에 대한 질투가 만들어낸 분노와 광기에 사로잡힌 주름 투성이의 중년 여성의 얼굴이었을지도 모른다.  여태까지 자기 자신을 예쁘다고 치켜세운 거울의 대답을 듣고 자란 마녀가 실제로 거울에 비춰진 자신의 추한 모습을 보게 되면 큰 충격에 빠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 완벽함 ' 에 대한 인류의 환상

비록 자신의 모습이 예쁘든 못 생겼든 간에 마녀는 자기 자신을 예쁘다고 말하는 거울의 대답을 듣는 것만으로도 완벽한 미모를 갖춘 자신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대리만족을 느꼈을 것이다. 겨결국에는 마녀가 바라본 마법 거울은 완벽을 꿈꾸는 인간의 환상을 충족시켜주는 허상적인 도구인 셈이다.  

어느 누구도 견줄 수 없는, 완벽하고 영원불멸하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싶었던 마녀의 환상처럼 인간은 언제나 완전한 존재나 가치에 대해 동경해오고 있었다.  

  


 

피터르 브뢰겔 <바벨 탑> 1563년 

 

' 노아의 홍수 ' 이후로 살아남은 사람들이 건설했던 바벨 탑은 오늘날에는 인간의 허영과 오만이 만들어낸 상징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허영과 오만 뒤에는 불완전한 자신의 모습에 대한 혐오와 불신으로 가득한 현실을 도피할 수 있는 완벽한 존재가 되고 싶어하는 끝없는 환상의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이다.


  

 


조르주 루오 <늙은 왕> 1937년

 

헤라클레스와 같은 힘이 센 장사라도 죽음 앞에는 어쩔 수 없다.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에 이르는 알렉산더 대왕의 대제국은 그가 33세라는 짧은 나이에 죽음을 맞는 순간부터 거대한 제국은 한순간에 붕괴되었으며 고대 중국 진나라의 시황제는 영원히 죽지 않는 약인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서 20여 년 간 중국 대륙을 다녔지만 그 역시 죽음이라는 운명을 거를 수가 없었다.  아무리 거대한 땅덩어리에다가 수많은 휘하의 군사력을 보유하였으며 머리 위에는 화려한 왕관을 씌우고 있는 권력자라고 해도 늙어가는 세월의 흐름과 죽음 앞에서는 부질 없는 것들이다.  

이런 인류의 생로병사를 바라본 인간은 불완전하고 모순으로 가득한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회의감을 갖기 시작하였고 결국에는 영원불멸의 힘을 가진 완전한 존재를 만들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신(God)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관념의 발명품 신은 오랫동안 서양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니체의 사상에 대한 수많은 오해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신은 불완전한 존재에 대한 자기 혐오가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지금까지도 사상적 명언으로 남아 있는 ' 신은 죽었다 ' 라고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 신은 죽었다. '  

니체의 사상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독자들 특히 기독교 신자들에게는 니체의 말이 불편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무신론자이지만 니체의 사상을 몰랐었을 때는 신의 죽음을 선언한 니체의 말이 극단적인 무신론주의자의 말처럼 들리곤 하였다.  

니체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신의 죽음' 그리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등장하는 위버맨쉬(Übermensch, 초인) 사상이다.  그러나 이런 니체의 사상들은 대중중들 사이에서는 썩 좋지 않은 이미지로 많이 알려져 있으며 그로 인해 많이 왜곡된 사상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이해하기가 수월하지 않는 난해하기로 유명한 사상이기도 하다.  

니체의 사상은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관념적으로 치우친 서양 사상의 흐름을 거부하고 있다. 특히 신에 대한 믿음과 종교적 신앙을 강조해온 기독교 사상의 영향을 받고 있는 그 당시 유럽 사회에서 니체의 ' 신의 죽음 ' 선언은 그 당시로서는 파격적일 수 밖에 없었다.  특히 기독교 신자들은 니체의 책과 사상이 불온하고 위험한 악마의 사상이라고 여기기도 하였다.  

그리고 신의 관념적인 가치를 뛰어넘어 자기 자신을 초극해나가는 모든 가치의 창조자로서 상징되는 차라투스트라, 즉 위버맨쉬는 한 때 군국주의 시절에는 전쟁을 찬미하는 영웅으로 왜곡되기도 하였다.  오빠의 명성을 이용하여 독일의 히틀러의 총애를 받고 싶어하던 여동생 엘리자베스의 무자비한 왜곡 때문에 니체는 ' 전쟁 옹호론자 ' , ' 독일 군국주의의 화신 ' 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위험한 책일까? 

사실 니체가 지금까지 남긴 수많은 저서들은 아포리즘을 모아놓은 듯한 일종의 문학적인 글을 취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한 편의 시를 보는 거 같은 느낌도 들게 된다. 그러나 니체의 문장은 읽기가 쉽지 않으며 단 한 번만 읽어도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도 많다. 이렇다보니 니체의 책을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다양한 해석들이 나올 수 있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 1부 내용 중에는 ' 전쟁과 전사들에 대하여 ' 라는 소제목의 글이 있는데 제목만 봐도 전쟁을 옹호하는 듯한 뉘앙스가 느껴진다.  그리고 그런 왜곡된 인식 속에서 이 내용을 읽게 되면 언뜻 니체가 전쟁을 옹호하는 듯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그대들은 그대들의 적을 찾아내어 자신의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 그대들의 사상을 위해!  그대들의 사상이 패배할지라도 그대들의 솔직함은 아직 승리를 외쳐야 한다!    그대들은 새로운 전쟁에 대한 수단으로 평화를 사랑해야 한다. 오랜 평화보다 잠깐의 평화를 더 사랑해야 한다.  나는 그대들에게 일이 아니라 싸움을, 평화가 아니라 승리를 권한다.  그대들의 일이 싸움이고, 그대들의 평화가 승리이기를!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홍성광 역, 펭귄클래식코리아, p 105 -

 

엘리자베스는 니체가 역설하고 있는 차라투스트라의 위버맨쉬를 궁극적으로 승리만을 목표로 하는 영웅으로 과대포장하였고 히틀러와 같은 군국주의자들은 엘리바제스의 화려한 과대포장을 제대로 뜯겨 보지도 않은채 받아들었다. 니체의 문장을 문장 자체의 뜻대로 이해를 해버린 것이다.  

여기서 니체가 말하는 ' 전쟁 ' 은 군국주의자들이 좋아하는 살육의 전쟁 놀이는 아니다.  살아가는데 지금보다 보다 나은 삶의 가치를 만들어내기 위한 치열한 자신만의 싸움으로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 자신만의 싸움 ' 에 임하기 위해서는 불완전함으로 이루어진 자신의 운명과 자아에 대해서 스스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우선이며(Amor fati, 운명애) 그것을 극복하여 자신의 삶을 초연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줄 아는 능동적인 인간이 바로 위버맨쉬라는 것이다. 그런 자신만의 싸움을 이겨낸 위버맨쉬야말로 진정한 인생의 승리이며 평화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니체가 정말로 죽이고 싶어했던 것

그리고 니체가 신을 죽었다고 사형선고를 내림으로써 위버맨쉬야말로 신의 존재를 뛰어넘는 인간의 삶을 구원해줄 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니체는 위버맨쉬를 통해 기독교적 교리를 폄하하려는 것도 아니었고 단순히 인간을 초월하는 초감각적인 존재를 만들려고 한 것도 아니다.      

아무리 초감각적인 신 앞에서 치유할 수 없는 병을 낫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해봐도 인간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유럽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기독교 교리를 바라 본 니체는 신에게 구원하기를 바라는 인간의 모습이 본연한 삶의 의미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생각하였다.          

 


 

수많은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은 ' 빛나는 졸업장 ' 을 받게 되는 기쁨도 잠시  

치열한 취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한다
 

사람들은 현빈, 김태희처럼 외모가 출중한 미남, 미녀가 되기 위해서 적지 않은 비용을 성형 시술에 투자한다.  그리고 취업을 하기 원하는 젊은이들은 삼성과 같은 굴지의 대기업에 취직하기 위해서 끼니와 잠을 거르면서 도서관에서 TOEIC과 자격증 공부를 한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 완벽한 사람이 되려는 목표들은 모든 사람들이 다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목표를 이루지 못한 이들 중에서는 자신의 못생긴 외모에 대해서 불만을 가진다거나 4년제 대학보다도 못한 지방대에 다녔다는 이유만으로 장래의 취업 전선에 대해서 깊은 좌절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 인생의 낙오자 ' 혹은 ' 루저 ' 라고 규정함으로써 부족한 모습만 바라보고 자신 스스로 열등감과 욕구 불만에 가지게 된다.     

그런 열등감을 피하고 삶의 위안을 삼기 위해서 어떤 이들은 신을 광적으로 믿어야하는 극단적인 사이비 종교에 빠지게 된다.  사람들이 사이비 종교에 한 번 빠지면 영원히 헤어날 수가 없는 이유는 부족하기만한 자신이 처한 현실과 삶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으며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느끼게 될 허무함과 굴욕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결국 ' 신의 죽음 ' 이라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느끼게 되는 삶의 의미를 부정적으로 만드는 자기혐오, 불신이 만들어낸 회의적인 감정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이다.  여기서  신의 뜻을 기독교의 신, 예수, 유태교의 야훼쯤으로만 이해한다면 우리는 니체의 생각을 철저히 왜곡하는 것이다. 니체는 비록 고통스러운 삶이라도 그대로 똑바로 직시할 줄 알아야 하며 어떤 부정적인 감정에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힘에의 의지를 통해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개선하고 극복할 줄 아는 인간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니체가 꿈꾸는 그런 인간상이 바로 위버맨쉬인 것이다.  

 

 

  즐겁지 않고 삶을 어떻게 견디랴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안개바다 위의 방랑자> 1818년 

 

많은 것을 보려면 자기 자신을 단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산을 오르는 자에게는 모두 이런 혹독함이 필요하다.    

그런데 깨달음을 구하는 자로서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한다면 모든 사물의 눈에 보이는 근거 이상의 것을 볼 수 있겠는가!     

그런데 차라투스트라여, 그대는 모든 사물의 근거와 그 너머를 보고자 한다.  그러므로 그대는 그대 자신을 넘고 올라야 한다. 위로 저 위로, 그대가 바로 별 위에 오를 때까지!     

그렇다!  나 자신과 나의 별들을 내려다보는 것, 나는 그것을 정상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나에게 남겨진 최후의 정상이다!   

- 니체 <차라투스트라> 제3부 [방랑자] 중에서, p 251 -  

 

니체의 책을 읽게 되면 어느 한 줄 버릴 게 없는 감명 깊은 구절을 만나게 된다. 그런 구절을 반복해서 읽으면 읽을수록 전기가 통하는 찌릿함 같은 전율이 가슴 속에 느껴질 정도이다.   

나약한 모습에만 안주하지 말고 삶을 긍정함으로써 자신의 삶에도 실존적인 가치를 부여할 것을 주장하고 있는 니체의 아포리즘은 오늘날 각박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시원한 오아시스가 되어준다.

<차라투스트라>를 먼저 읽었거나 그 밖에 다른 니체의 저작을 먼저 읽게 되면 니체의 사상이 생각보다 어둡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니체의 생애는 정반대의 분위기였다.

조숙한 성격 탓에 그리 밝지 않는 유년 시절을 보냈으며 ' 살아 있는 종합병원 ' 이라고 불릴 정도로 두통과 위장 장애를 달고 살았다. 자신의 인생 중에서 첫 사랑이었던 루 살로메로부터 두 번이나 실연을 당한 아픔을 겪어야했고 그 후로부터 고독한 인생의 방랑자로서 살기 시작했다. 만년에는 정신 이상 증세까지 그를 덮쳐오면서 미친 사나이가 되어버린 채 쓸쓸히 삶을 마감했다. 그리고 그가 땅 속으로 들어간 이후에도 사람들은 니체라는 사람을 광기로 가득한 사상가로 인식하였다.    

사실 니체의 삶 속에서 그에게 그나마 즐거웠던 시간이라고 하면 아버지가 살아있었을 때 시절, 24세라는 젋은 나이에 교수가 되어 학생들 사이에서 멋쟁이로서 인기를 한 몸에 받았을 때 그리고 니체의 가슴을 한 때 불태우게 만들었던 바그너와 루 살로메와의 교제 기간이었을 것이다. 나머지 절반의 인생은 어렸을 때 생기게 된 온갖 병마와의 싸움 그리고 바그너와 루 살로메와의 결별 이후 겪은 고독의 시간들이다.    

 


 

앙리 마티스 <춤> 1910년

그러나 불행으로 점철된 삶과 다르게 니체의 사상은 삶의 의지를 불어넣어주는 생동감이 느껴진다. 오히려 자신의 사상에 영향을 준 쇼펜하우어와는 다르게 니체는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책에 등장하는 차라투스트라는 니체가 만들어낸 자신의 아바타라고 볼 수 있다. 차라투스트라도 마을을 떠나 산 속에서 혼자서 10년동안 지내게 되는데 니체가 교수직을 그만 둔 이후에 시작한 10년간의 방랑 생활이 연상된다.  방랑 생활 기간 중에서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서 집필 계획에 몰두하게 되었는데 그 책이 바로 <차라투스트라>이다.  책 속 주인공 차라투스트라가 10년 간의 은둔 생활 끝에 마을에 내려와서 ' 신의 죽음' 선언과 위버맨쉬 사상을 주장한 것처럼.   

니체에게 <차라투스트라>를 위한 집필 기간은 그동안 겪어왔던 삶의 풍파를 견대내고 잊어내기 위한 재충전의 시간일지도 모르겠다.  니체는 ' 차라투스트라 ' 라는 고대의 인물을 자신만의 아바타로 만들어 불우한 삶을 겸허이 받아들어 스스로 극복하려고 했을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사상을 몸소 실천한 셈이다.  비유와 알레고리로 이루어진 아포리즘으로 가득찬 그의 글이 오늘날의 독자들이 쉽게 읽혀지지 않는 것도 어쩌면 니체가 쓴 아포리즘들은 오직 자신만을 위한 글이 아닐까 조심스레 상상도 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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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1-03-15 0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만약 '니체' 역할을 맡은 배우라면, 캐릭터를 잡는데 결정적인 힌트를 얻을 수 있는 리뷰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읽고는 막연할지 몰라도, 이 리뷰를 읽으면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거예요. 멋진 리뷰 잘 읽고 갑니다. ^ ^

아, 예전에 나온 책은 대부분 '짜'라투스트란데, 요즘은 '차'라투스트라군요. '차'는 왠지 어색하지 않나요? '짜'가 훨씬 친근한 느낌.. 후훗.

cyrus 2011-03-16 00:44   좋아요 0 | URL
원래 우리말 정식 표기대로 하면 '자'라투스트라인데 요즘에는
'차'라투스트라가 많이 사용되서 그렇게 쓰고 있다고 하네요.
아마도 독일어 원어 발음대로 하면 '짜' 가 되지 않을까요. ^^

마녀고양이 2011-03-15 16: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좋은 리뷰예요... ^^

니체가 몸이 약했지요? 천재성이 번뜩이고?
사이러스님의 리뷰가 좋은 부분을 제대로 찌른거 같은데요.. 아마, 초인은
니체가 간절히 원하던 부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철학가든 심리학자든
자신에게 가장 모자란 부분, 절실한 부분을 체계로 세우는 면이 있대요.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요....)

거울 이야기가 나와서, 생각난 김에 거울의 상징에 대한 책을 뒤졌는데
못 찾았어요.. 예전부터 거울 상징을 한번 알아보고 싶었는데... 엄청 다양하더라구요.

cyrus 2011-03-16 00:45   좋아요 0 | URL
마고님 댓글이 저의 생각을 제대로 간결하게 표현하셨네요.
사실 백설공주 이야기는 그냥 그전부터 개인적으로 생각했던거에요.
거울의 상징에 대한 이야기,, 너무 궁금하네요. 시간만 된다면
이와 관련된 글이라도,,,^^;;

양철나무꾼 2011-03-16 0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얘기하면 되게 웃기지만, 전 니체의 저 책을 중3 겨울방학때처음 읽었어요.
그 후에 몇번 더 읽었는데...완독의 경험이 있는지의 여부는 차치해두고라도, 뜻도 아직 제대로 이해 못했었는데...님의 리뷰를 읽으니 그나마 윤곽이 뚜렷해지는걸요.

참 좋아요, 백개쯤 추천을 날리고 싶어요~^^

cyrus 2011-03-17 11:01   좋아요 0 | URL
니체의 저작을 읽을 때는 꼭 개론서랑 같이 읽으면 좋아요.
원전 그대로 읽으면 좋긴 좋지만,, 니체의 생각을 왜곡되어 받아들일수
있거든요,, 니체의 글이 운문 형식이라서 시적인 문장이 많아서
여러번 읽으면 읽을수록 감명 깊은 구절이 많은거 같습니다.
 
<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주세요
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
아브람 노엄 촘스키.미셸 푸코 지음, 이종인 옮김 / 시대의창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작년에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한 권이 국내의 서점가를 강타하였다. ' 정의 ' 라는 단어를 필두로 하는 학자들의 다양한 관점을 담은 인문사회과학 도서들이 줄줄이 출간되었다. 그 영향을 힘입어 현존하는 시대의 진보적인 지성 노엄 촘스키와 68세대 철학자로 상징되는 미셸 푸코가 만나 인간의 본성, 정의, 정치 등에 대해서 열띤 대담을 정리한 책이 나오게 되었다.  

노엄 촘스키, 미셸 푸코.  서로가 지향하고 걷고 있는 학문의 길은 다르지만 시대를 대표하는 두 지성인의 만남은 지적 독자들에게는 흥분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1928년 출생인데 우리나라 나이로는 83세이다) 현재도 활발히 연구 활동을 펼치고 있는, 한 때 최고의 지성인으로 몇 년 전에 그의 저작들이 무수히 쏟아져나와 서점가를 주릅 잡았던 촘스키였는데 , , , 

상전벽해(桑田碧海) 라는 말이 떠올리는 순간이다.  

이 책, , ,  생각보다 많은 주목을 받지 못한거 같다.  국내에 자리잡은 마이클 샌델 신드롬이 강력한 것도 있었지만 대다수 독자들에게는 ' 미셸 푸코 ' 의  전체적인 사상 체계를 접하지 못하고 있는 점이 선뜻 이 책을 고르기가 어렵게 만드는 선입견으로 비췄을 것이다.  사실, 나도 미셸 푸코의 그 유명한 저작들 <광기의 역사><감시와 처벌> 과 같은 책들을 한번도 읽어보지 못했고, 푸코의 사상에 대해서 체계적으로 잡혀있지도 않은 백지 상태라서 처음에 읽기가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두 지성인의 대담은 베트남 내전으로 인한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극심했던 1971년에 이루어진, 오래된 대담이기도 하다. (만약에 촘스키 신드롬이 불었던 시기에 이 책이 일찍 소개되었다면 반응이 어떠했을까?) 무려 30년이 지난 것이다.  30년이 지난 두 지성인의 대화가 책으로 나온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뜬금없기도 하다.  

스타버스트(Starbust)라는 천문학적 용어가 있다. 2개의 은하가 충돌하면 가스가 압축 생성되어 새로운 별들이 탄생되는 과정을 일컫는다. 두 사람의 대화를 진행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폰스 엘더르스의 말처럼 인문학의 산맥을 반대 방향으로 오른 지성인의 만남이라고 표현하였다.  서로 다른 루트로 인문학 산맥을 등정하고 있는 촘스키와 푸코가 산맥 정상에서 만나 이루는 지적 충돌의 논쟁은 대담을 지켜보는 이들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과 관점들을 제공하는 흥미로운 지적 활동이라는 점에서 읽어볼 가치가 있다.   

첫 대담 주제인 ' 인간의 본성 ' 에서부터 촘스키와 푸코는 서로 다른 의견을 내세운다. 

촘스키는 어린아이의 언어 습득 능력을 들어 '인간의 본성' 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반면 푸코는 그건 역사적, 사회적 제약을 받는 인식론적 지표일 뿐 과학적 개념이 아니라고 말한다.  ' 본성 ' 에 대한 대화의 출발점이 시작하자마자 다른 만큼 정치, 권력, 진리에 대한 그들의 견해도 서로 다르다.    

그리고 ' 정의 ' 에 대해서는 촘스키는 인간성의 바탕에 깔려있는 것이야말로 ' 정의 ' 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대중이 이룩하려는 사회 혁명은 바로 정의를 달성하려는 것이고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를 실현하려는 것이며, 혁명이 단지 어떤 집단에 권력을 넘겨주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푸코는 정의라는 개념은 특정 정치경제 권력의 지배 수단으로서 혹은 그러한 권력에 대항하는 무기로서, 여러 다른 유형의 사회에서 발명, 유통된 개념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사실, 대중들을 위한 지성인의 대담이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촘스키와 푸코의 사상 체계의 틀이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이 책을 접했다간 낭패 볼 수 있다.  다행히도, 나 같은 무지한 독자들을 위해서 이들이 말하고 강조하고 있는 주요 특정 내용을 책 중간중간에 말머리로 표시되어 있다.  말머리 편집 덕분에 이들이 나눈 대화들을 간략히 정리할 수 있었다. (비록 인용한거나 다름 없지만)    

 

사족으로 부족한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이번 신간평가단 도서중에서 읽기 어려웠던 책인거 같다.   

읽었던 책을 소개하고 내용을 간략히 정리한 이 글 한 편 쓰기 위해서 이 책의 1장은 틈만 나면 여러번 읽었다. 김득신은 <사기열전>의 '백이편' 을 수만번 읽고나서야 그마나 내용을 이해했다던데 , , ,    

김득신 정도의 득도까지는 안 되었지만, 이 책을 통해 촘스키와 푸코라는 지성의 양대 산맥에서 헤맨 것은 보다 나은 성숙을 위한 정신의 성장통이라고 위안을 삼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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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1-23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촘스키나 푸코는 어렵긴 어렵죠?
그래도 이 책은 좀 쉬울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ㅠ

cyrus 2011-01-23 20:14   좋아요 0 | URL
촘스키나 푸코의 사상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해서 저에게는
읽는데 좀 어려웠어요. 그렇다고, 제 리뷰만으로
벌써부터 기 죽지 마세요^^;;

마녀고양이 2011-01-24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 그래도 이책 어렵지 않아요 하고 물어보려니까...
페이퍼 맨 뒤에 써놓으셨네요. 크크.

저는 노엄 촘스키와 미셸 푸코의 글을 보면,
천재란 이런 것이야 하고 생각하게 되염. 너어어어무 어려워서,,, 흐흐.

cyrus 2011-01-24 14:28   좋아요 0 | URL
정말,,, 이 책 억지로 완독하고 난 뒤에도 할 말 없게
만드는 책이었습니다. ㅠ_ㅠ

비의딸 2011-01-24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한테는 정말 힘든 책이었어요. 서평을 올리기도 벅차서 저한테만 힘든 책인것 같아 많이 고민했어요. 득도... 무엇을 위해 득도까지 해야 하는 회의까지 들지 뭡니까.. ^^;

cyrus 2011-01-24 14:29   좋아요 0 | URL
ㅎㅎ 저두요. 그나마 정치에 대한 논쟁은 그나마 이해하고
공감이 갔었는데 처음에 본성에 대한 논쟁은 확 와닿지 않더라구요^^;;

꽃도둑 2011-01-24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읽기가 어려운 건 비단 사이러스님 만이 아닌가보네요...저조하게 달린 리뷰만 봐도 그렇고... 비의 딸님은 득도까지 생각하는 걸로 봐서는....ㅎㅎㅎ
아마도 지금 자기 목을 조르고 있는 분도 계실 것 같은데....ㅋㅋ
이제 얼마남지 않았는데 다들 완주하는 일만 남았네요.
다들 힘내자구요~~

cyrus 2011-01-24 14:30   좋아요 0 | URL
지난 달 <왜 도덕인가?>의 안 좋은 추억(?)이 떠올려서 급히 읽고
후다닥 썼어요..^^;;

아이리시스 2011-01-25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읽으셨잖아요, 그죠? 흡;
저야말로 촘스키는 손도 못대고 푸코는 사놓고 3년째 묵히는 중이고,ㅋㅋ

cyrus 2011-01-25 19:20   좋아요 0 | URL
저 그래서 마음 먹고 푸코의 <광기의 역사>를 구입하고
정독하려고 했는데,, 방대한 분량에다 이에 맞먹는 가격 때문에
좌절했어요 ^^;;
 
<바다>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바다 미슐레의 자연사 1
쥘 미슐레 지음, 정진국 옮김 / 새물결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아무도 그에게 수심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흰 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 김기림 <바다와 나비> -  

 


 
 

   

  바다와 인간 

김기림의 시에 등장하는 ' 흰 나비 ' 는 바다의 무서움을 모른채 바다에 다가가는 순진하고 연약한 존재이다. 자신이 꿈꾸던 ' 청 무우밭' 인줄 알고 다가가지만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젖은 채 그냥 돌아오고 만다.  미처 알지 못했던 거대한 바다의 깊은 수심을 경험하고 그 차가운 현실 앞에서 좌절된 꿈을 안고돌아온 지친 ' 나비 ' 의 슬픈 비행은 바다라는 거대한 세계에 맨 몸으로 뛰어든 인간의 모습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 바다 ' 는 광대한 미지의 영역이었다. 지구 한 바퀴를 돌아 항해를 한 마젤란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증명하기 전에는 유럽인들은 지구는 평평하다고 믿고 있었다. 배를 타고 바다를 항해하게 되면 언젠가는 지구의 끝으로 떨어져 죽을 것이라는 생각하였다. 그리고 바다 한가운데에는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이 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 등장하는 세이렌처럼 감미로운 목소리로 지나가는 배의 선원들을 유혹하여 잡아먹는 인어(人魚),  거대한 몸집과 수많은 긴 다리로 커다란 배를 습격하여 침몰시키는 크라켄의 전설은 인간이 가지고 있었던 바다에 대한 숙명적인 공포가 만들어낸 산물이었다. 바다에 대한 공포감에 지배를 당한 인간은 바다를 항해하는 사람들을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어리석은 행동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시기와 조롱 섞인 말 뒤에는 항해가들의 업적을 은근히 부러워하기도 하였다. 항해에 성공한 콜럼버스를 시기했던 당대 사람들처럼 말이다. 인간에게는 원초적으로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차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펭귄 한 마리가 바다에 뛰어들면 또 다른 펭귄 무리들도 역시 바다에 같이 뛰어드는 것처럼  바다의 세계를 경험한 모험가들이 하나씩 등장하면서 인간은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바다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던지고 직접 바다로 뛰어들기 시작하였다. 

황금과 보석을 가득한 대륙을 찾기 위해서는 바다라는 거대하고 위험한 다리를 건너가야만 하였다. 수많은 항해가들이 모험에 대한 로망을 품은 채 바다의 세계에 발을 내딛었지만, 깊은 수심에 빠지지 않은 채 살아 돌아온 이는 미지수였다. 바다 위에는 그들이 무서워하던 인어와 크라켄은 없었지만, 무시무시한 파도와 전염병은 많은 항해가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하지만, 목숨을 건 이 미지수의 항해가들이 남긴 바다의 흔적들은 서양문명을 한 단계 도약할 수 있었고 광대한 상업 시장을 형성할 수 있었다. 이제, 바다는 무시무시한 미지의 세계가 아니었다. 문명 근대화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 푸른 길' 이었다. 

    

 

  모네의 점묘법처럼 묘사한 미슐레의 바다  

마음만 먹으면 배를 타고 수만 km나 떨어진 곳으로 갈 수 있게 된 인류는 옛날부터 가지고 있었던 바다에 대한 공포와 경외심이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근대화로 진입할수록 유럽인들은 바다의 세계 역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이성과 고도의 지능으로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프랑스의 역사가 쥘 미슐레만은 달랐다. 그는 직접 바다를 거닐면서 바다에 대해서 깊은 통찰을 하기 시작하였고 그동안 알지 못했던 바다의 새로운 면모들을 발견하게 된다. 미슐레는 단순히 '바다' 를 전체적인 시선으로 보지는 않았다.  

바다에 대한 그의 관찰은 현미경을 살펴보듯이 세밀하며 집요하기까지 하다.  인상주의 화가 클로드 모네가 붓으로 캔버스에 하나씩하나씩 점을 찍어 하나의 형상을 그려내듯이, 미슐레가 바라보고 묘사하는 바다는 바다에서 가장 작은 생물인 해조류부터 제일 큰 고래에 대한 기록을 통해 ' 바다 ' 라는 세계를 그려내고 있다.  미슐레에게 바다는 해류(海流), 물고기, 조개, 해파리, 산호, 고래 라는 개성 있는 생물의 원소로 이루어진 거대한 자연의 집합체인 것이다.

  

 

  자연보호법의 표본을 제시하다 

이런 야만 상태를 대신할 문명 상태를 위해 여러 나라들의 합의가 필요하다. 인간이 심사숙고하여 자원을 더는 낭비하지 않도록,  그렇게 스스로를 해치지 않도록 말이다. 프랑스, 영국, 미국은 다른 나라들에게 ' 바다의 권리 ' 신장 운동에 동참하도록 권고해야 한다.  

  - <바다> 쥘 미슐레, p 297 -  

미슐레는 바다 덕분에 인류의 발전과 종족 보존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자연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바다가 인류에게 번영의 풍족감을 가져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바다를 천시적으로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을 비판하기도 한다.  바다를 천시하는 인간의 경향은 바다에 사는 생물들을 무분별하게 잡아들이는 채집 행위로 이어졌다.  미슐레가 살았던 그 당시 근대 유럽이나 지금이나 바다의 생물들을 인류의 생활에 필요한 '자원' 으로 잡아들이고 있다. 철갑상어의 알이 값비싼 요리재료로 사용하다보니 철갑상어가 멸종 위기를 처하게 되었으며 국제 단체에서 제재를 가하고 있지만 화장품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기름을 얻기 위해서 여전히 고래들를 포획하고 있다.      

미슐레는 그 당시, 채집꾼들 사이에서 불 붙기 시작하였던 바다 생물 포획을 '야만적인' 행동으로 규정하고 바다 환경을 보존하기 위한 '바다의 권리' 확립의 중요성을 주장하기도 한다.  

 

 

  서구적 근대성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미슐레의 '바다' 

하지만, 미슐레의 '바다 예찬'을 환경운동과 자연중심주의를 주창한 ' 해양계 ' 의 H.D. 소로우라는 명예로운 호칭을 붙여주지는 못할 거 같다.  미슐레의 ' 바다의 권리 ' 는 자연보호 목적보다는 인류 문명의 긍정적인 미래를 위한 일시적인 방편으로 주장하고 있다. 

   

야만적, 맹목적 어획을 하지 않아야 한다. 이미 더는 잡히지 않을 만큼 죽이고 있다. 어린놈까지 무익하게 살육하고 있다. 1년 뒤면 훌륭한 식량이 될 텐데, 그 한 마리의 죽음으로 수많은 놈을 죽이는 남획의 결과를 초래한다.  

  - p 297 -   

  

어떤 종도 번식의 과잉으로 위협받는 적은 없다. 종교적으로 그 순간을 존중해야 한다. 나중에 죽더라도 얼마나 좋은 순간인가!  그들을 잡아야 한다. 잡자! 하지만 우선은 살려두어야 한다.  

  - p 299 -

   

이 글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남성 중심주의적 입장이 살짝 비춰지기도 한다. 인류 문명의 발전에 대한 공을 남성들 덕분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사회사 저작 시리즈인 <여성의 역사>와 <여성의 삶>을 집필하기도 하였다)

남자는 그 자신이 예술품이요, 인간적 예술이다.  (중략)   세계를 위해 땀 흘리고 봉사하면서 끊임없이 자기 힘을 하느님의 거대한 수영장에서 다시 취하는, 발명가, 창작가, 제조가인 이 남자들을, 이 지상의 엘리트를 과연 보게 될까!  모든 인류가 그 혜택을 누린다.  인류는 남자들의 어마어마한 수고로 꽃을 피운다.  인류는 남자들에게 그 모든 기쁨과 아름다움과 이성을 빚지고 있다. 

  - p 363~ 364 - 

 

자본주의적 근대화로 가고 있었던 유럽 사회에 살았던 미슐레 역시 인류의 진보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인류의 진보와 문명을 강조하는 근대적인 사회 속에서도 가려질뻔한 자연환경에 대한 가치의 중요성을 발견하였다.  근대성이라는 넓은 모래밭 속에서 미슐레는 '바다' 라는 아무도 찾지 못했던, 작고 고귀한 진주를 혼자서 발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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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12 0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2-13 1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이조부 2010-12-12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번역자의 이름이 저랑 똑같네요 ㅋ

다이조부 2010-12-13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인장은 근데 트위터 안해요? ㅎ

cyrus 2010-12-13 12:25   좋아요 0 | URL
그러고보니,, 꾸랑님 성함과 비슷하네요ㅎㅎ

처음에 군 제대하고나서 관심이 있었는데,,
스마트폰을 아직 구입하지 못했고, 관리하기가 여건상 안될꺼 같아서
안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스마트폰을 사게 된다면 트윗질 좀 해보려고요^^


다이조부 2010-12-13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입은 작년에 하고, 활동은 시작한지 얼마 안됬는데 저는 so so 에요~

보통 트위터에 관한 평이 극단적으로 호응과 야유로 갈리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딱히 의미부여하게 되지는 않게 되더라구요~ 그냥 심심풀이 땅콩으로 생각해요 ㅋ

꽃도둑 2010-12-22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겨우 읽기를 마쳤는데 아주 살짝 실망했어요...
기대를 너무 했어나봐요, 사이러스님 서평 읽으면서 드는 생각인데...
서평이 종합선물세트 같아요. 저는 그 책 내용에만 집중하는 편인데(종합적으로 폭 넓게 쓰려면 자료 조사에서부터 전에 읽었던 관련 도서 뒤지기 등등 해야 하는데 시간도 없고, 귀찮아서,,,^^ ) 정말 대단해요. 암튼 많은 도움이 되고 있어요~~^^ 잘 읽고 갑니다. 오랜만에 김기림의 <바다와 나비>도 반가웠구요...

cyrus 2010-12-22 18:34   좋아요 0 | URL
아,,, 저는 <왜 도덕인가?>가 진도가 안 나가서 애먹고 있습니다.
기한 내에게 글을 올릴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사실 저도 <바다>를
읽고나서 실망했었답니다. 바다에 대한 작가의 묘사나 초반에 수록된
바다 그림은 좋았는데,, 후반부에 바다 문명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부터
살짝 김이 빠지더라고요.^^;;
 
열일곱 살의 인생론 - 성장을 위한 철학 에세이
안광복 지음 / 사계절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영원히 풀 수가 없었던 시험문제

 

나는 어느 학교의 교실에 앉아 있었다. 

내 눈 앞에 펼쳐져  있는 칠판, 그리고 회색빛 교탁과 수많은 책상들. 

확실하지는 않지만 몇 년 전에 졸업한 고등학교 교실이었다. 

그런데, 나는 왜 고등학교 교실 한가운데에 앉아 있는걸까? 

갑자기 교실에 중년의 남자가 들어왔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의 한 손에는 하얀 종이 뭉치가 들려져 있었다.  

선생님은 하얀 종이 뭉치를 내려놓으면서 

아무 말 없이 하얀 분필을 잡아 칠판에 크게 ' 시험 ' 이라고 썼다. 

그러고는 맨 앞에 있는 학생에게 자신이 가져온 하얀 종이를 전달하였다.  

 

' 아 . . . 이것은 시험인가 보다. '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도 갑자기 이 곳에 있는 이유에 대한 궁금증은 잠시, 

아무런 예고 없이 시험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나니 두려움이 엄습 해왔다.  

하지만 어느새 내가 앉아 있는 책상 위에 시험지 한 장이 놓여져 있었다.  

그리고 내 손에는 샤프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고등학교 때 배운 내용에 대한 기억이 가물가물한 상황이면서도 

이상하게도 나는 어떻게든 책상 위에 놓인 시험지의 문제를 풀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 시험지에는 알아보기 힘든 문자와 기호들이 뒤죽박죽 나열되어 있었다.  

도저히 풀 수가 없는 문제들이었다.  

 

시험지가 잘못 인쇄된 줄 알고 나는 손을 번쩍 들었지만  

칠판 앞에 서 있는 선생님은 시험을 치고 있는 학생들을 멀뚱히 쳐다볼 뿐 어떠한 미동도 없었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선생님의 행동.  

나는 어떻게든 시험 문제를 풀어야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시험시간임에도 소리를 질렀다.  

 

" 이거 시험지가 잘못 나왔어요.  빨리 다른 시험지 주세요.  

지금 시험문제 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요! " 

 

소리라도 질러봤지만 여전히 선생님은 팔짱만 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까부터 시험문제를 풀고 있던 학생들 몇 몇이 

갑자기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내가 외친 소리가 그들의 귀에는 들렸는가보다. 

 

그런데, 나를 쳐다보는 학생들의 얼굴들이 무척 낯이 익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때 공부 잘 한다는 소리를 들었던 녀석들인 것이었다.  

고등학교 교실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 만나던 친구들이 한자리에 앉아 있다니 , , ,   

 

친숙한 얼굴들을 본 순간, 그들에게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  

시험감독인 선생님이고 뭐고, 자리에 벌떡 일어나 친구 한 명 곁으로 다가갔다.  

중학교 때 내신 상위권에 있을 정도로 공부를 잘했으며  

나와 같은 반이 되면서 친했던 친구였다.

나는 그 친구가 풀고 있는 시험지를 봤다. 

하지만, 그 친구가 풀고 있는 시험지 역시 오류투성이었다. 

무엇보다도 신기한 것은 내 눈에는 알 수 없는 문자와 기호로 나열된  

시험문제를 그 친구는 일말의 생각도 없이 풀어내고 있었다. 

친구는 내가 옆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시험문제 푸는데 여념이 없었다.

시험을 치고 있는 친구들이나 선생님이나  

교실 속에 있는 이들은 나의 말, 아니 나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딩동, 딩동, 딩동 

  갑자기 교실 안에서 스피커에서 나오는 종소리가 울러 퍼졌다. 

이는 분명 시험시간이 마감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종소리였다. 

선생님은 종소리가 나오자마자  

학생들이 풀고 있던 시험지를 재빠르게 거둬들이고 있었다.  

 

빈 자리의 책상 위에 놓여져 있는, 

아무것도 풀지 못한 시험지마저도 . . .  

나는 그런 모습을 서서 지켜만 보고 있어야 했었다.  

  

 

  갑자기 재발한 마음의 상처      

내년에 복학을 앞두고 있는, 요즘 잠을 자게 되면 가끔씩 꾸게 되는 꿈이다. 아르바이트 때문에 밤과 낮의 생활이 반대인 지금, 아침에 퇴근하여 집에 오게 되면 낮에는 잠만 자게 된다.  그런데 낮잠에도 기억이 또렷한 꿈을 꿀 수 있는가 보다.  잠을 깨고 난 뒤에도 꿈 속 장면들이 기억이 날 정도 꾼 것은 이례적이다. 그리고 더 신기한 것은 요즘에는 자주 예전에 다녔던 고등학교 교실에 앉아 시험을 보는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항상 시험문제들을 풀지 못한 채 꿈에서 깨고 만다. 자다가 꿈에서 깨고 나면 시험문제를 풀지 못하는 사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생기게 되지만 얼마 안 가 ' 아, 이것은 꿈이구나 ' 하고 뒤늦게 생각하게 된다.  고등학교도 졸업한 상태인데도 꿈 속 고등학교 시험문제에 얽매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나면 나 자신 스스로 우습기도 하다. 

하지만, 그냥 가볍게 웃음으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 있는 그런 꿈이 아니었다. 꿈은 살아가면서 겪어가는 경험들, 그리고 느끼게 되는 감정과 의식들을 상징, 형상화되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경험한 일이 꿈에 나타나는 현상을 심리학적 용어로 타게스레스트(Tagesrest)라고 한다. 프로이트는 경험과 감정, 의식에 대한 억압적 욕망이나 불안이 변형되어 나타난 것이 꿈이라고 정의하였다. 자의적으로 꿈을 풀이해본다면 스스로 감추고 억압했던 고등학생 시절의 불안정한 감정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4년이 지나서야 꿈 속에서나마 등장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중고등학생 때만 해도 앞을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위해서 죽어라 공부했었다. 특히 고등학교 3년은 오직 '수능' 이라는 목표를 내다보고 열심히 공부하였다. 10분이 주어지는 쉬는 시간에도 나는 책상에 앉아서 <수학의 정석>에 있는 문제들을 풀곤 하였다. 수학은 다른 과목보다 열심히 공부했지만 유독 성적이 썩 좋게 나오지 못했던 과목이였기 때문이다. 이렇다보니 몇 몇 주위 친구들의 시선에는 나의 이런 모습이 못마땅하였을 것이다. 지금도 그 때 친구들의 농담이 생각이 난다.  

  " <수학의 정석> 책만 보다가는 진짜 책에 구멍 나겠다. "  

  " 공부하는 자세랑 시간만큼은 정말 넌 전교 1등감이다. "

같은 고등학교에 다녔던 친구들과 만나 술잔을 기울이면 가끔 이렇게 말하곤 한다.  

  " 아, 나도 고등학생 때 너처럼 그렇게 책상에 앉아서 열심히 공부했었더라면  

   지금보다 더 좋은 대학 갈 수 있었을텐데, , , "   

성적은 공부의 양만큼 좋게 나오지 못했지만, 모든 학생들은 그런 공부하는 모습을 부러워하면서도 은근히 시기를 하기도 했었다. 좋은 의도인지 나쁜 의도인지 모르겠지만 나보다 공부 잘 하는 친구들은 나의 공부하는 모습을 칭찬 일색으로 치켜세우기도 했었다. 그러면서도 꼭 이런 말도 했었다.

  " 너무 열심히 하는거 아니야?  그러다가 쓰러지겠다. "   

그들이 친구로써 나를 위해 진심어린 말을 했었지만 듣는 나를 속으로는 무척 가슴이 쓰리듯이 언짢았다.  ' 너네들이 뭘 안다고,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야.'  

그들의 칭찬과 위로가 죽도록 공부해도 성적이 좋지 않았던 나를 은근히 비웃는거 같았다. 그들과 어울리면서 공부하다 모르는 문제가 있으면 살갑게 물어보곤 했었지만 마음 속에 조금씩 열등감이 쌓아져 갔다.  처음에는 성적 결과에 대한 열등감이 시간이 지날수록 나라는 존재에 대한 열등감으로 커져만 갔다.  공부도 잘 하고, 운동도 잘 하고, 이성 친구를 사귀는 '멀티 플레이어' 친구를 보면 무척 부럽기도 하였다. 

요즘 학교 교실에 있는 꿈을 꾸고나니 마음이 뒤숭숭하기도 했었다. 이미 지나간 과거의 일에도 불구하고 가슴 속에 묵혀왔던 열등감과 분노가 나의 심기를 툭툭 건드렸던 것이다. 사춘기 시절도 지났건만 별 이상한 내용의 꿈 하나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니 , , , 

  

 

  열일곱살이 된 철학교사 안광복

이런 불안의 나날을 겪고 있는 속에 때마침 철학교사 안광복 씨가 쓴 <열일곱 살의 인생론>이라는 얇은 책을 접하게 되었다. 책의 프롤로그를 읽는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자신이 꿨던 꿈을 이야기해주면서 자신의 학창시절동안 겪은 사춘기로서 형성하게 되는 열등감이나 그 때의 고민들을 거리낌없이 털어놓고 있었다. 학창시절에 자신보다 잘난 친구들을 보면 열등감이 생겼으며 그 때의 괴로움을 치유하지 못했다고 저자 스스스로 밝히고 있다.  마음 속에 생긴 감정의 상처들을 독자들 앞에서 고백하기기 쉽지 않았을텐데 어린 독자들을 위해서 서슴없이 고백하는 모습이 존경스럽기까지 하였다.

그래서 저자는 자신보다 어린 학생들의 말할 수 없는 속내들을 이해하고 보듬어줄 수 있었다.  사춘기 시절에 한번쯤 마주치게 되는  ' 돈, 열등감, 사랑, 인생, 가치관 ' 등에 관한 문제에 대해 인문학적인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다. 책의 부제를 ' 성장을 위한 철학 에세이' 라고 하는 것을 보면 무척 딱딱하고 어렵게 여기기 쉽상이다.  

하지만, 안광복 씨의 글은 어렵게 쓰지 않았으며 그렇게 '철학적' 이지가 않았다. 학창시절의 기억과 경험을 인용하여 저자 자신뿐만 아니라 이 책을 읽고 있는 학생들과 함께 사춘기의 고민거리와 각종 문제들을 함께 공유하고 성찰하고 있었다. 이 책에서 마흔 살의 안광복은 23년 전으로 돌아가 열일곱살의 안광복이 되어 있었다. 철학교사답게 철학자들의 지혜를 빌려 청소년 시절에 겪게 되는 고민과 생각의 문제들을 스스로 성찰하고 해결할 수 있도록 유도해주고 있다. 

 

 

  열등감을 열등감으로 극복하기  

열등감에 대한 그의 입장과 극복 방안은 독특하다. 열등감이라는 부정적인 감정의 독을 오히려 인생의 성장을 위한 약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열등감이 크면 클수록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말하고 있다. 처음에 그의 주장이 깊게 와닿지는 않았다.  고등학생 3년동안 줄곧 열심히 공부만 했는데도 이에 비례하는 성과가 나오지 않았음을 물론이고 오히려 열등감 때문에 자신의 감정이 짓눌려 스스로 괴롭게 된다.  

하지만 저자는 인간이 열등감을 느끼는 것이 곧 자신의 위치를 스스로 인식할 수 있는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평상시에 느끼는 열등감의 원인에는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다는 욕구와 남이 자신보다 잘하면 생기는 질투 때문이라고 말한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가 남들보다 뛰어나면 주위 시선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지 않는 것이다. 자신의 능력보다 못한 상대방 역시 나 자신에 대해 열등감을 가지게 되고 미워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가 살면서 생기는 열등감이라는 감정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순간적인 욕심에 의해 만들어진 나쁜 감정일지도 모르겠다.  이미 지난 과거의 열등감에 대해서도 분노를 느끼고 있는 것은 앞으로 나아가야할 현재의 삶에 발목을 잡고 있는 부정적인 요인이다.

 

  

  성숙된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학창시절에 생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채 살아온 나로써 2010년이 저물어가고 있는 끝자락에서야 이 책을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반갑고 무척 고마웠다. 이 책을 읽고 있는 동안 어느새 나도 열일곱살이 되어 있었다. 저자가 풀어내는 학창시절의 경험들이 나 역시 겪어본 일이었기 무척 공감이 갔었다.   

피부의 상처나 염증을 오래 방치하게 되면 피부조직이 썩어 누런 고름이 생기게 된다. 과거의 쓰라린 감정의 상처 역시 그래도 놔두게 되면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삶이 순탄하지 않을 것이다. 감정의 상처는 트라우마가 되어 평생 괴로움에 살아야하며 30대, 40대, 50대, 60대가 되어서 성숙되지 못한 채 정서의 성장은 저하될 것이다. 몸은 어른이며서도 마음은 청소년이나 다름 없는 것이다.    

저자는 어른 독자들에게 철학적인 물음을 통해서 스스로 10대와 '직면' 해 보라고 권하고 있다. 이게 저자가 권하고 있는 '직면' 의 방법인지 모르겠지만, 책을 다 읽고 난 뒤 그동안 마음 속에 굳어져 있었던 학창시절의 열등감 응어리를 감상문에서 낱낱이 밝혔다.  

글을 쓰고나니 책을 다 읽고 난 뒤보다 속이 후련하다. 이번 글쓰기는 내 마음 속에 숨어있던 못된 감정들의 기(氣)를 풀어 없애는 살풀이가 되었다.  영원히 풀 수 없는 시험지를 푸는 꿈을 꾸지 않게 된다면 이번 살풀이는 성공인 것이다.  과연 성찰적(?) 살풀이가 먹혔을지 앞으로 잠 잘 때 두고봐야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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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0-12-07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중에 기회되시면 <스무살의 철학>도 읽어 보세요.
문장도 좋고, 생각할 꺼리를 주기도 하죠.
17세. 전 그때 뭐했을까요?
학교 안 가고 독학으로 문리를 깨우치고 싶어했었다능...ㅋㅋ

cyrus 2010-12-08 15:00   좋아요 0 | URL
좋은 책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스텔라님이 소개하신 책 내용이
무척 궁금합니다^^

2010-12-08 01: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0-12-08 15:01   좋아요 0 | URL
일단 며칠 정도는 두고봐야할거 같습니다. 오늘은 평소보다
오래 잠을 자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나름 숙면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마녀고양이 2010-12-08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제가 읽어봐야할 책이군요.
열등감.. 참 심했어요, 저.

사이러스님 복학을 앞두고 계시는군요. 오늘 글 너무 이뻤어요.
사실... 요즘 사이러스님의 서재 글을 보면, 보석 하나 발견한 기분으로 즐겁습니다.

사이러스님 시험지의 문제 묘사를 보면서,
왜 이렇게 인생 살이와 비슷할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합니다.
정말이지 모를 문자들과 정리되지 않는 상념들, 체계들, 정답이 없는 그런 문제들.
차라리.. 답과 목표가 확실한 고교 학창시절이 더 행복한거 같다 싶으면서도
다시 가라면 가기 싫은. ^^.
역시 나의 선택이 보장된 어른 시절이 나은거 같기두 해요, 더 어려운 길이긴 하지만.

복학하시면, 이제 앞일에 대해 진정 고민하시겠네요.
우리...... 천천히 가요. 한번씩 뒤두 돌아보고 주위도 돌아보면서.
그리고 오늘처럼 눈오는 하늘도 즐기며. ^^

cyrus 2010-12-08 15:05   좋아요 0 | URL
복학을 앞두고 있어서 그런지 그런 꿈을 꾸고나니
내년 학업 관리뿐만 아니라 적성 준비까지 고민들이 많네요.
하지만 마고님의 댓글을 마음에 깊이 새겨 넣어야겠습니다.
오늘 마고님 댓글도 이뻤습니다. 감사합니다.^^

2010-12-08 14: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0-12-08 15:12   좋아요 0 | URL
오탈자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오탈자 지적하신 분들 덕분에
저는 우리말 공부를 할 수 있어서 좋은데요.^^
나름 올바르게 쓸려고 주의를 하게 되지만 막상 쓰게 되면 쉽지가 않네요.
사실 저도 가끔 예전에 썼던 글이나 다른 알라디너의 댓글을 보게 되면,
간혹 옥의 티가 있어서 혼자 속으로 부끄러워하곤 했었는데,
다음부터는 맞춤법에 유의해야겠습니다.^^

굿바이 2010-12-08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7살의 인생론,이라니.... 잠깐 10대의 저를 복기해보니 다리가 후들거립니다^^

열등감을 극복하는 일은 죽는 날까지 숙제일 것 같습니다. 어쩌면 영영 극복은 힘들 것 같고, 그저 잘 달래면서 살아가는 것이 쉬울 듯 싶어서 요즘은 살살 달래면서 살고 있습니다.
좋은 책 정보 잘 읽었습니다~

cyrus 2010-12-08 17:04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 읽고나니 감정을 추스르고 있답니다. 굿바이님 말씀대로
완전한 극복은 힘들거 같고, 나쁜 마음이 재발하면 다시 한 번 이런 책들을
읽어보고 좋은 문장들을 곱씹어봐야겠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12-08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소년의 순수한 마음은 없어지고 그 미성숙함만 남으니 나이는 먹어도 미성숙한 인간이란 정말 골치 아픈 존재입니다.내가 못한 것을 자식들에게 강요하는 심리가 그런 경우지요.

cyrus 2010-12-08 17:07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다. 미성숙한 인간이 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점을
자식들로부터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는 것도 안 된다고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