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의 추방
한병철 지음, 이재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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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이나 집단이 생각과 느낌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본이다. 개인이나 집단에 따라 관심사, 의견, 표현 방식이 다르다. 대화도 ‘차이’에서 출발한다. 진정한 의사소통은 ‘타자’와의 만남에서 이루어진다. 성숙한 의사소통에 임하는 사람들은 타자와의 ‘충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충돌은 어떤 생각을 표현하기 위한 감정의 원천이다. 선입견과 아집은 그냥 물러서지 않는다. 새로운 의견과의 충돌을 일으켜야 그 모습을 감춘다.

 

소통에 관계된 자들 사이의 차이는 대화의 전제이자 본질적 계기이다. 이 전제가 없으면 대화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왜냐하면, 서로 같은 것 사이의 대화란 본래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의사소통이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다. 타자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여 나의 뜻대로 따르게 하는 것, 즉 타자를 동화 혹은 동일화할수록 그 사회는 안정된다. 그곳에는 다른 의견을 가지고 사회구성원끼리 서로 싸울 일이 없다. 그러나 유일 진리와 절대 합의를 상정함으로써 타자의 존재나 대화의 가능성을 지워버리면 결국은 파국을 초래한다.

 

한병철은 ‘성과사회’의 폐해를 날카롭게 분석한 《피로사회》(문학과지성사, 2012)에서 한국 사회가 자아와 타자 사이의 부정성이 제거되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고 진단했다. 《피로사회》가 타자의 부정성 대신 긍정성이 강조되는 신자유주의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상징적 시도라면, 《타자의 추방》(문학과지성사, 2017)은 과잉 긍정성만 내세우는 ‘피로사회’, ‘성과사회’에서 벗어나기 위한 생산적인 문제 해결을 제시한다. 한병철은 《타자의 추방》에서 매우 중요한 두 가지 화두를 던진다.

 

첫째, 진정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제기한다. 다툼과 오해가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봐라”는 말을 자주 한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가 입장 바꾸어 생각해 보는 일이다.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져 갈등 양상이 지속될수록 누구나 ‘소통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진짜 소통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대화 참여에 소극적인 사람은 자기 생각과 다른 타자의 목소리에 귀를 닫으며 그들에게 사회를 교란하는 ‘불순세력’ 딱지를 붙인다. 타자의 부정성을 거부하는 신자유주의는 기존 사회 체제에 비판적인 사람들을 확인하고, 배제한다. 한병철은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의 ‘판옵티콘(panopticon)’이 현대 사회에서 ‘반옵티콘(banopticon)’으로 변화한다고 했다. 이것이 바로 ‘신자유주의의 통치술’(《심리정치》, 문학과지성사, 2015)이다.

 

누구나 SNS로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며 ‘좋아요’를 눌러 개인적 선호를 밝힌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자아를 노출할수록 ‘같은 것의 창궐’(《타자의 추방》 9쪽)이 일어난다.

 

오늘날 우리는 이방인의 부정성이 제거된 안락함의 지대에서 산다. 좋아요가 이곳의 구호다. 디지털 화면은 점점 더 우리를 낯선 것, 섬뜩한 것의 부정성으로부터 차단한다. (61쪽)

 

페이스북, 그리고 북플은 ‘좋아요’의 공동체이다. ‘좋아요’의 긍정성은 아무 구별도 없이 모든 것을 환영한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늘 바라왔던 민주적이고 자유로우며 평화스러운 풍경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표피적 양상으로만 사회를 이해하는 것은 갈등에 대한 이해를 봉쇄하는 전략이 된다. 차이와 갈등을 사회구성원 모두를 고통스럽게 하는 상황으로 인식한다. 담론이 불가능한 사회가 훨씬 더 불안하다.

 

둘째, 자아와 타자의 관계를 ‘경청’이라는 자세로 소통할 것을 요청한다. 소통의 시작은 경청이다. 경청이 이루어지려면 우선 나와 의견이 다른 상대를 인정하고, 두 팔 벌려 환영해야 한다. 여기서 한병철이 말하는 ‘경청’은 상대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태도를 의미하지 않는다. 한병철의 ‘경청’은 귀로 타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뿐만 아니라 그 목소리를 자유롭게 낼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한병철은 ‘타인들과 이야기하고, 타인들을 경청하는 공간’이야말로 진정한 ‘정치적 차원의 공간’이라고 말한다.

 

《심리정치》에서 한병철은 ‘반옵티콘’에 탈출하기 위해서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한 ‘바보’가 되라고 주문했다.

 

바보는 ‘소통하지’ 않는다. 바보는 소통 불가능한 것으로 소통한다. 그는 침묵의 장막 속으로 들어간다. 바보짓을 통해 침묵과 고요, 고독이 있는 자유로운 공간, 정말 말해질 가치가 있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진다. (《심리정치》 114쪽)

 

침묵이 능사는 아니다. 개인이 침묵을 선택해도 그 자체로 자신의 의사를 드러내고 있다. ‘소통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다. 불의의 상황을 침묵하는 것은 결국 그 불의를 방조하는 공범자가 된다. 다른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정치적 입장과 가치관을 견지한다. 그래서 우린 끊임없이 논쟁하고 싸운다. 사실 우리가 서로의 입장을 진정 이해하기는 어렵다. 우리 모두는 타자들의 입장을 전부 알 수 없다. 그래서 타자들의 입장에 귀 기울여야 하고 그들 각자 나름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너와 나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구나!’라는 태도를 통해서만 우리는 서로를 진정 이해할 수 있다. 나는 바틀비(Bartelby)처럼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I prefer not to)’[1]라고 말하는 바보가 되기보다는 반대로 ‘소통하는 편’을 택하는 경청자로 살고 싶다.

 

 

 

[1] 허먼 멜빌 《필경사 바틀비》 (문학동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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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7-04-20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몇 분의 자칭 페미니스트들과 소통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최소한 침묵은 아닌 것 같고 ...

제 판단에 맞지 않는 것을 받아들이기보다 바보로 남게 되는 것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것 같군요.

cyrus 2017-04-20 17:09   좋아요 0 | URL
입장이 다른 상대방과 대화를 할 때 그 사람이 내 의견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척이라도 해주면 넘어갈 수 있어요. 그런데 상대방의 의견이 틀렸다고 규정하면서 일말의 가치가 없다는 식으로 대응하는 사람을 만나면 당혹스러워요.

마립간 2017-04-21 03:56   좋아요 0 | URL
저도 사람인지라 나는 경청을 했지만
상대가 이해하는 척이라도 하지 않고, 내 의견이 틀렸다고 규정했고 일말의 가치가 없다는 식으로 대응했다 ;고다고 말하고 싶지만,
제가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제가 미숙한 것이겠죠.^^

소통의 기술에 대해서는 항상 고민중 입니다.

캐모마일 2017-04-20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옵티콘은 배제를 뜻하는 ‘ban‘과 판옵티콘의 합성어로, 적대적인 사람은 제외시키고 순응하고 받아들이는 사람만을 포섭하는 감시장치라는데 사실 정확히는 이해가 잘 안가네요. ˝타자의 부정성을 거부하는 신자유주의는 기존 사회 체제에 비판적인 사람들을 확인하고, 배제한다.˝ 이 부분에서 감이 잡히긴 합니다. 현대 사회는 갈수록 근대처럼 하드파워 중심의 눈에 보이는 감시와 처벌보다 교묘한 소프트 파워로 포장된 감시와 처벌, 배제가 이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도 생각할 거리가 많은 책을 소개받았네요.

cyrus 2017-04-20 17:23   좋아요 1 | URL
‘반옵티콘’의 의미에 대한 제 설명이 미흡했어요. 부연 설명을 하자면, 판옵티콘의 사회에서 권력이 ‘판옵티콘’이 되어 ‘반대’의 의견을 지지하는 대중을 감시합니다. 판옵티콘의 사회에서는 ‘반대’ 세력을 감시하는 권력의 통치 대신에 권력에 순응하는 사회 구성원이 자발적으로 감시합니다. 그래서 한병철은 <심리정치>에서 신자유주의 시대의 디지털 기술(SNS)이 투명한 감시 도구라고 말했습니다. SNS 이용자들은 자신에 관한 모든 것을 공개합니다. 그런데 한병철은 디지털 네트워크 관계 속 사회구성원이 서로 감시하게 만들어 기존 사회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확인하여 배제한다고 주장합니다.

한병철의 글은 기존의 책들에 있는 내용을 가지고 와서 반복합니다. <타자의 추방>도 그렇습니다. <심리정치>를 먼저 읽고 난 뒤에 <타자의 추방>을 읽으면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qualia 2017-04-20 22: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통에 관계된 자들 사이의 차이는 대화의 전제이자 본질적 계기이다. 이 전제가 없으면 대화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왜냐하면, 서로 다른 것 사이의 대화란 본래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의사소통이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며, 자아와 타자의 정체성을 더 고차적인 통일성이나 목적에 의해서 혹은 그와 같은 것을 위해서 포기하지 않는, 즉 차이를 유지하는 관계이다.

→ 제가 잘못 읽은 것일까요? 아무리 위 인용문을 거듭거듭 읽어봐도 셋째 문장 《왜냐하면, 서로 다른 것 사이의 대화란 본래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 까닭은 앞뒤 문장들과 호응이 되지 않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혹시 《왜냐하면, 서로 같은 것 사이의 대화란 본래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라고 쓰려고 했던 것은 아닌가요?

제가 터무니없는 오독을 하는 때가 종종 있기 때문에 이번에도 cyrus 님의 위 문장들을 오독한 것이 아닌가 두렵기도 합니다.

여러 가지 다른 일들이 있어서 시간을 내지 못해, cyrus 님의 윗글을 오늘 밤에야 읽게 되었습니다. 제가 관심을 두고 있는 논제들과 겹치는 부분이 많아서 반가운 글이었습니다. 제 생각과 무척 흡사한 부분이 많아요. 한병철 저자한테도 관심이 가는군요. 기회가 되면 함 읽어봐야겠습니다.

cyrus 2017-04-20 23:08   좋아요 1 | URL
제가 잘못 적었군요. qualia님이 잘못 본 게 아닙니다. ‘같은 것’, ‘비슷한 것’으로 고쳐 써야 합니다. 짧지 않은 글을 컴퓨터 모니터나 스마트폰 화면으로 읽는 것이 불편하실 텐데, 비문을 잘 보셨습니다. ^^

qualia 2017-04-22 12:13   좋아요 0 | URL
오호, 그렇군요. 저도 좀 긴가민가했는데요. 제가 제안한 것으로 수정해주신 cyrus 님 문장을 보니까 정말 감사하다는 마음입니다. 근데 제가 위 cyrus 님 글을 스마트폰으로 읽었던 것 같은데, 그걸 어떻게 아셨는지(?) 정말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 나만의 질문을 찾는 책 읽기의 혁명
김대식 지음 / 민음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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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내 책에 대해 물을 수 있을까

그걸 정말 내가 썼는지? [1]

 

- 파블로 네루다 -

 

 

 

인터넷의 바다에 떠도는 정보는 내 것이 되기 힘들지만, 내가 읽은 책에 있는 정보는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2]가 된다. 꽁꽁 얼어버린 생각의 바다 한가운데 서서 책을 읽으며 도끼질을 해야 한다. 그 얼음을 깨고 나온 펄떡이는 글은 우리에게 삶의 자양분을 선사한다. 그런데 뚜렷한 목표 없이 섣부르게 도끼질을 해대면 허송세월할 수 있다.

 

 

 

 

 

 

생각의 바다를 깨기 전에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책 속에 나열된 얼어붙은 단어들을 살아 있는 모습 그대로 만들어야 한다. 무조건 읽는다고 해서 종이에 얼어붙은 단어들이 깨지지는 않을 것이다. 거기서 흘러나온 냉기는 우리의 생각마저 얼어붙게 한다. 냉기의 근원을 꿰뚫어 보는 독자의 ‘입김’이 더욱 세져야 한다. 우리는 입김을 뿜으면서 ‘질문’을 해야 한다. 잘 정리된 현자의 생각보다 단순한 질문이 진리에 한층 더 가까울 때가 있다.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원론적이면서도 도발적인 질문이다. 이에 대해 김대식은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를 통해 자신만의 답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입김을 불어대면서 읽었던 책들을 소개한다. 저자의 입김에 사르르 녹아내린 종이 속 단어들은 더욱 유용하고 의미 있는 해박한 통찰력이 되어 살아 숨 쉰다. 그는 책 읽기의 방향을 제시한다. 이를 위해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질문’을 강조한다. 저자가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은 중요한 말은 그가 읽은 배철현의 책 속에 있다.

 

‘질문’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문지방이며, 미지의 세계로 진입하게 해 주는 안내자다. 질문은 지금껏 매달려 온 신념이나 편견을 넘어 낯선 시간과 장소에서 마주하는 진실한 자신을 찾기 위해 통과해야만 하는 문이다. (배철현, 《신의 위대한 질문》에서, 38쪽)

 

질문으로 진실한 자신을 발견하는 일. 이것이 독서의 근본적인 목적이다. 질문은 한 걸음 멈추어 서서 나를 바라보게 한다. 딱딱하게 얼어붙은 종이만 보며 뛰었던 삶의 열기를 차분히 가라앉히고, 종이로 만든 공간에서 얽히고설킨 생각을 가다듬는다. 계속 행진해야 할 과제는 무엇이며, 잘라내야 할 낡은 지식은 어떤 것인지 간추리는 시간을 갖는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어쩌면 그만큼 버거운 짐도 없다. 태어나고, 공부하고, 그리고 취업하고,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언젠가는 죽음에 이르는 그 순간까지 나 자신이라는 존재와의 전쟁은 계속된 질문으로 이루어진다. 살아가는 것, 존재하는 것, 호흡하는 일상적인 반복적 삶의 모습에서 나를 또다시 발견하는 질문은 우리 머리와 가슴 속으로 파고 들어간다. 인간이 무엇이냐는 건 뇌과학자에게도 만만치 않은 질문이다. 인간의 문제는 수많은 문제와 얽히는 복잡하고 미묘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이 책의 구성에서도 알 수 있다. 저자는 다양한 분야의 책에서 인용한 내용에 자기 생각을 덧붙여 해답을 찾기보다는 본질적인 질문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를 종합해서 인생의 질문에 대한 결론을 내리는 건 불가능한가? 나는 불가능하다고 보지 않는다.

 

질문하는 행위는 미래로 향하면서 통과해야 하는 분기점을 발견한 사람에게 중대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한다. 미래란 늘 장밋빛이거나 잿빛이다. 턱없는 낙관주의가 유토피아(Utopia)의 환상을 부풀린다면, 근거 없는 비관주의가 디스토피아(dystopia)의 절망을 퍼뜨린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우리 후손들의 ‘현재’가 될 ‘미래’는 낙관과 비관 사이,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리란 사실이다. 그 지점이 어디쯤 될 것인지를 질문으로 조망할 수 있다. 그러면 일방적인 낙관도, 편협한 비관을 뛰어넘는 균형 감각이 유지된다.

 

유발 하라리(Yuval Harari)는 인간과 신의 결합을 뜻하는 《호모 데우스(Homo Deus)》라는 책에서 인류의 미래를 제시한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간은 생물학적 한계를 극복하는 신적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가 바로 생각의 분기점이다! 이 지점에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는 김대식은 갈 길 바쁜 독자들의 손을 잡으면서 질문하고 있다. 우리 인간은 왜 살아야 하고,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 나보다 먼저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를 읽은 당신이 정말 중요한 질문을 지나치고 책을 덮었다면 321쪽을 다시 펼쳐보길 바란다. 당신이 무심코 읽은 321쪽의 단어들은 아직 깨지지 않은 검은 얼음이다. 그 얼음을 깨뜨려야 아직 오지 않은, 낯선 미래의 시간을 마주할 수 있다.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를 읽고, 거기에 인생의 지침을 찾는다는 건 낭패 보는 일이다. 남들이 다 발견한 것들을 눈으로 보기만 하는 독서는 ‘설거지’ 독서[3]이다. 책을 많이 읽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꽤 많은 책들을 독파한 저자의 능력을 부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그가 읽었던 책들이 생소하다고 해서 불평할 이유도 없다. 그가 읽었던 책들을 따라 읽으려고 한다면, ‘설거지’ 독서를 할 가능성이 있다. 누가 읽든 간에 우리 손에 쥐어진 책은 차가운 냉동 상태다. 평범한 독자들이 ‘설거지’ 독서를 피하기 위해서는 앞서 말한 대로 얼려진 책이 녹을 수 있도록 ‘입김’으로 불어야 한다. 책이 완전히 녹으면 매끄럽고 날이 선 도끼로 변신한다. 그것은 우리의 의식을 한 방 때려줄 수 있는 서늘한 사유가 된다. 그것이야말로 제대로 읽고, 제대로 질문하는 일이다. 매번 다 읽고 나서 책을 덮기만 하던 나는 이제 정색을 하고 스스로 묻는다. ‘내가 읽은 책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그걸 정말 내가 제대로 읽었는지?’ 새로운 유행의 새로운 책을 찾아 두리번거릴 것이 아니라 변함없는 책 속에서 새로운 인식을 끌어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이 세상을 마감하는 날이 있다. 그때 어떤 모습으로 신 앞에 설 것인가를 생각한다면 책 읽는 시간을 무의미하게 허비할 순 없다. 인간에게 가장 두려워하는 신의 질문이 무엇인지 아는가. “세상에 있을 때 넌 뭘 했느냐?”이다.

 

 

 

 

[1] 《질문의 책》 49쪽 (정현종 역, 문학동네, 2013)

[2] “책은 우리들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이어야만 한다.” (프란츠 카프카)

[3] ‘설거지’ 연구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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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7-04-01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늘 궁금 했거든요 ㅋ 책을 읽어야하는 이유도 알겠고 다양한 지식을 정리하는 방법도 알겠는데 그 질문 하는 방법에 대한 ‘어떻게‘란 무엇인지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한 1인 입니다. 그러니까 이 책에 ‘어떻게‘ 란 부름에 명료한 확답이 페이지 321에 있단 말씀이시죠 ㅋㅂㅋ ~당장 달려가서 펴보고 싶네요 ㅋ

cyrus 2017-04-01 10:24   좋아요 0 | URL
이 책에 ‘명료한 확답’이 없어요. 제가 321쪽을 다시 보라는 이유는 저자가 간접적으로 제제시한 ‘질문’을 확인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결론은 우리 독자가 찾아내야 합니다. ^^

stella.K 2017-04-01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도 읽었구나. 이 책 좀 평점 주기가 애매했어.
별 넷 주기엔 많은 것 같고, 3주기엔 적고.
반 개짜리 있으면 3개 반이 적당할 듯도 한데...
이 책 여백이 너무 많다고 까는 사람도 많던데
나도 좀 그점은 아쉽더군.

cyrus 2017-04-01 21:27   좋아요 1 | URL
사실 내용도 딱히 특별한 것이 없었어요. 처음 이 책을 직접 봤었을 때 분량이 생각보다 많지 않아서 조금 당황했어요.
 

 

 

 

 

 

 

 

 

 

 

 

 

 

 

 

 

 

 

 

 

 

* 책표지 사진이 없는 책 : 《명상록 · 행복론》 아우렐리우스 · 세네카 (범우사, 1994년)

* 《명상록》아우렐리우스 (도서출판 숲, 2005년)

 

 

 

2013년 올재 클래식스 6번째 시리즈로 발간된 《명상록》은 황문수 씨가 번역했다. 이 번역자의 약력을 찾기가 쉽지 않다. 인터넷 서점의 ‘작가 소개’에 따르면 황문수 씨는 경희대학교 철학과 교수를 지냈다고 한다. 70~80년대에 나온 철학 서적들, 특히 버트런드 러셀, 플라톤, 칼 야스퍼스, 윌 듀란트 등의 저서를 번역했다. 《명상록》도 마찬가지다. 사실 황문수 씨 번역의 《명상록》은 1974년 범우사에서 펴낸 책이다. 이때 나온 책의 부제는 ‘자성록(自省錄)’이다. 1987년에 세네카의 글과 함께 수록한 번역본이 같은 출판사에서 나왔는데, 제목이 《명상록 · 행복론》이다. 《행복론》의 번역은 최현 씨가 했다. 현재 판매되고 있는 범우사판 《명상록》은 최현 씨가 번역한 것이다. 거의 절판된 거나 다름없는 황 씨 번역의 《명상록》을 사단법인 올재가 재출간한 것으로 보인다.

 

오래된 서양 고전 번역본들은 거의 일역본을 중역한 것이다. 황 씨 번역의 《명상록》도 일역본을 중역했을 가능성이 있다. 황 씨의 문장에 지금은 잘 쓰지 않는 한자어가 많은 편이다. 한자에 생소한 젊은 독자들은 《명상록》의 진미를 느끼는 데 어려울 수 있다. 천병희 교수의 《명상록》은 그리스어 원전을 옮긴 번역본인데, 여기도 문장 속에 생소한 한자어가 몇 개 있다. 그래도 번역자 입장에서는 우리말로 풀이하기 어려운 문장을 번역하기 위해 최대한 원문과 비슷한 의미의 한자어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 《철인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프랭크 맥린 (다른세상, 2011년)

 

 

《명상록》의 저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는 로마 전성기에 등장한 5현제 중의 한 사람이다. 마르쿠스가 통치한 시기는 태평성대를 구가했지만, 역시 나라의 정세가 흔들리는 크고 작은 위기가 여러 차례 있었다. 홍수와 지진 등의 자연재해가 발생해서 인명피해가 생겼고, 설상가상 전염병까지 퍼지기도 했다. 외세의 침략에도 시달렸다. 중동에 위치한 파르티아 제국과 훈 족의 위협으로 로마 제국의 국경 지역으로 이주한 게르만 족의 위협을 받았다. 아이러니하게도 황제는 독서와 사색을 즐기는 학구적인 성격이었다. 마르쿠스 통치 시절의 역사학자는 내성적인 황제가 감당해야 할 운명이 너무나도 어려운 과제였다고 기록했다. 19년 동안의 통치 기간은 황제 입장에서는 힘겨운 시기였다. 그래도 마르쿠스는 현실을 회피하지 않았고, 전쟁을 진두지휘해 모범을 보였다. 외세로부터 로마를 지켜내기 위해 노력한 그는 고전 문헌들로 가득한 서재가 아닌 전쟁 막사에서 숨을 거두었다.

 

마르쿠스는 하드리아누스(Hadrianus)의 아들이자 그의 후계자인 안토니누스 피우스(Antoninus Pius)의 양자로 들어왔다. 어린 마르쿠스를 유난히 아꼈던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그에게 ‘진실한 아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마르쿠스는 천성적으로 착한 사람이었다. 그가 얼마나 착했으면 로마 전역에 아내의 추문이 알려졌는데도 결코 아내를 꾸짖지 않았다. 마르쿠스는 《명상록》에 아내를 좋게 표현했다.

 

내 아내가 그토록 고분고분하고 곰살궂고 검소한 것도, 내 자식들을 위하여 유능한 스승들을 구한 것도 신들 덕분이다. (천병희 역, 《명상록》 제1장 30쪽)

 

마르쿠스는 상대방의 결점을 비판하는 성격의 인물이 아니었다. 자신과 함께 아우렐리우스 가문의 양자로 들어왔고, 같은 해에 공동 황제로 임명된 루키우스 베우스(Lucius Verus)의 잘못을 따끔하게 지적하기보다는 그가 스스로 반성할 수 있도록 부드럽게 대했다고 한다. 루키우스 베우스가 먼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마르쿠스는 죽을 때까지 단독 황제의 자리를 유지했다.

 

 

 

 

 

 

 

 

 

 

 

 

 

 

 

 

 

* 《비판이란 무엇인가? / 자기 수양》미셸 푸코 (동녘, 2016년)

 

 

 

 

《명상록》을 보면 마르쿠스가 로마의 황제라는 의식과 신분을 떠나 한 인간으로서 자기성찰에 충실했던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미셸 푸코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삶에 가장 해로운 것들, 즉 권위에 대한 탐욕, 집착,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에 ‘통치받지 않으려고’ 했다.[1] ‘황제’, ‘대통령’ 등 권위와 관련된 이름을 누구나 가지는 순간, 그 권위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국민 위에 군림하려고 든다. 이럴 때 국민의 권리는 유린당하고, 국민과 유리된 권위가 통치하는 국가는 파멸에 직면한다. 자신에게 채찍질하는 마르쿠스의 비판적 글쓰기는 ‘자발적 불복종의 기술’[2]이다.

 

마르쿠스는 젊었을 때에 해야 할 일들 중 하나로 ‘대화편’을 써야 한다고 했다. (《명상록》 제1장) 이 ‘대화’는 나 자신을 사유하는 존재로서 스스로 묻고 답하는 행동이다. 그건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는 일이다.

 

지금 나 자신의 영혼은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어떤 경우에나 나는 나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야 하며, 지배적 원리라고 불리는 나의 이 부분을 나는 지금 어떤 일에 사용하고 있는가를 음미해야 한다. 지금 나의 영혼은 어떤 영혼인가? (황문수 역, 《명상록》 제5장 71쪽)

 

자기 수양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반성을 통해 자신의 감정 및 행동을 분명히 인지하고, 그것을 솔직하게 표현하면 된다. 푸코는 비판의 기능이 있는 자기 수양을 ‘배운 것을 버리는 것(de-disccere)’이라고 했다. 자기 수양은 상대방의 타당한 비판을 받아들일 줄 안다.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평생 몸에 배야 할 기본 덕목이다.

 

내가 올바르게 생각하지도 않으며 올바르게 행동하지도 못한다고 나에게 설득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즐거이 나의 태도를 바꾸겠다. 나는 진리를 추구하고 있으며, 진리로 말미암아 해를 입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류와 무지에 안주하는 사람은 해를 입는다. (황문수 역, 《명상록》 제6장 85쪽)

 

배운 것을 버리는 것. 내가 스스로 발견한 결점이든 상대방이 알려준 내 결점이든 이를 과감히 떼어내는 삶의 태도는 한 인간이 평생 살면서 치러야 할 투쟁이다. 혼자 투쟁하려면 이를 실천하려는 충분한 힘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데, 마르쿠스와 푸코는 자기 수양을 위한 훈련법으로 ‘글쓰기’를 강조한다. 이들의 제안은 비판적 목소리를 ‘비난’으로 매도하고, 잘못에 대한 반성을 선행하지 않는 세상을 되돌아보게 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비판을 감내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자신의 결점을 들춰낼 줄 아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건강하다. 이게 안 되는 사람은 제정신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 제정신이 아닌 사람들이 너무 많다. 박 씨, 최 씨, 그리고 그 두 사람을 보호하려고 매 주말마다 영혼 없이 태극기를 휙휙 휘날리는 사람들. 이들은 사회에서 배운 낡고 편협된 것들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못 버릴 듯하다. 과거의 쓰레기들을 후손들에게 물려주지 말고, 무덤에 갈 때 남김없이 들고 가길 바란다. 이건 그들에 향한 악의에 찬 저주가 아니다. 더 나은 세상으로 발전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간곡히 부탁하는 말이다.

 

 

 

 

[1] 미셸 푸코 《비판이란 무엇인가? / 자기 수양》 46쪽

[2] “비판은 자발적 불복종의 기술, 숙고된 불복종의 기술일 것입니다.” (같은 책, 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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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1 0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2-21 08:03   좋아요 1 | URL
이 책은 언제 읽어도 좋은 문장들을 많이 만납니다. 필사하기 참 좋은 책입니다. ^^

우마우마 2017-02-21 08: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감사합니다. 다시 읽어보고 싶어져요. 고등학교 때 왠지 멋있어 보여서 명상록을 샀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뭘 알고 읽었나 싶어요. ㅎㅎ 남기신 댓글처럼 필사를 해볼까 싶어집니다.

cyrus 2017-02-21 12:35   좋아요 0 | URL
<명상록>이 처음 읽을 땐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사회생활을 해보니까 곱씹을만한 글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제가 노인이 돼서 <명상록>을 다시 읽으면 책을 대한 생각이 달라질 겁니다. ^^
 
원전으로 읽는 그리스 신화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아폴로도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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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는 서양인들의 인생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신화에 담겨 있는 온갖 유형의 이야기는 서양 예술의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해 왔다. 아폴로도로스의 《Bibliotheke(비블리오테케)》는 신화의 내용과 신화 속의 영웅들이 벌인 행동 및 사건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된 문헌이다. 특히 각기 다른 출전에 따른 이설들을 꼼꼼히 구별하여 주석으로 정리했고, 신과 영웅들의 계보를 수록하여 신화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아폴로도로스는 기원전 2세기에 활동한 아테네 출신의 문법학자로 알려졌다. 그가 남긴 문헌 제목이 ‘비블리오테케’, 우리말로 풀이하면 ‘도서관’이다. 소크라테스는 ‘문자는 진리가 아니라 사이비 진리일 뿐’이라며 생각의 문자화를 경계했다. 그러나 생각은 끊임없이 문자로 기록됐고 도서관은 진리의 보관소라는 신성한 장소가 되었다. 지금은 파괴되어 사라져버렸지만 ‘세상의 모든 책’을 정리한 곳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었다면, ‘세상의 모든 그리스 신화’를 정리한 책은 《비블리오테케》이다. 아폴로도로스가 인용한 고대 문헌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와 고대 그리스의 시인 헤시오도스의 《일과 날》 등이 있다.

 

그리스 신화가 다양한 형태로 우리나라에 소개됐지만,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위해 단편적인 이야기 묶음으로 편집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다 보니 원전의 묘사가 삭제되거나 윤색되어 흥미 위주의 신화 편집이 주류를 이루게 됐다. 그동안 우리는 《비블리오테케》와 같은 원전을 1차 문헌으로 삼아 후대에 편집된 2차 문헌으로 신화를 접했다. 이는 신화 체계를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 대부분 사람은 신화를 ‘허위로 가득한 재미있는 이야기’, ‘상상력의 보고’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화 모음집을 만든 아폴로도로스와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화 자체를 허구 아닌 진실이자 역사로 이해했다. 그래서 그리스 신화의 원전을 읽을 땐 신화를 고대 그리스의 세계관이자 사상체계로 봐야 한다. 신화를 재미로 보는 건 문제없으나 흥밋거리로 신화를 이해하는 태도와 고대 그리스인의 관점에서 신화를 이해하는 태도는 확실히 차이가 있다.

 

《비블리오테케》는 순수한 그리스 신화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문헌이다. 호메로스의 작품과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비하면 이야기가 몰입력 있게 전개되지 않는다. 아폴로도로스는 기존의 그리스 신화들을 두루 간추려 모아 정리했다. 그래서 《비블리오테케》에는 독자의 흥미를 이끄는 서사적 갈등 구조가 눈에 띄지 않는다.

 

가령, 아폴로도로스는 아르테미스(Artemis, 사냥의 여신)의 분노로 사슴으로 변한 사냥꾼 악타이온(Actaeon) 이야기를 무미건조하면서도 아주 간략하게 설명한다.

 

 

 

 

 

아쿠실라오스에 따르면 그렇게 죽은 것은 그가 세멜레에게 구혼하는 바람에 제우스가 노했기 때문이라고 하나 대부분의 작가에 따르면 그가 아르테미스가 목욕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여신이 당장 그를 사슴으로 바꿔버리고 쉰 마리나 되는 그의 개떼를 미치게 하자 주인인 줄도 모르고 그를 잡아먹었다는 것이다. (201쪽)

 

 

악타이온 이야기를 인상 깊게 본 독자라면 아폴로도로스의 문장을 보고 허전하게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설명에는 극적인 긴장감 자체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변신 이야기(Metamorphoses)》를 쓴 오비디우스는 길을 헤매던 악타이온이 불행하게도 아르테미스가 목욕하는 광경을 보게 되는 일촉즉발의 상황을 생동감 있게 묘사했다. 《변신 이야기》에서는 아르테미스가 저주를 담아 악타이온의 얼굴에 물방울을 뿌리는 장면이 나오지만, 《비블리오테케》는 그 결정적인 장면이 없다. 오비디우스는 신화 속 등장인물에게 질투나 선망 등 인간의 다양한 감정들을 부여하여 역동성을 강조했다면, 아폴로도로스는 그동안 알려져 있던 그리스 신화들을 모아 ‘지식’이라는 일관된 형태로 엮어냈다.

 

《비블리오테케》를 읽는 일은 독자가 신화를 저 높은 곳에 위치해 있을 뿐인 ‘신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삼라만상의 진리를 아우르고자 했던 인류의 야심이 묻어나는 지식의 보고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 이 책으로 서양문화의 기저를 흐르고 있는 신화의 정수를 뽑아낼 수 있다. 방대한 신들의 계보를 이해하는 일이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조급해하지 않고 깊이 생각하며 천천히 읽어 나간다면, 신화를 보는 시각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긴다. 신화는 ‘과거를 알기 위한 지식’이지만, ‘오늘날 알아야 할 상식’이 아니다. 신화는 하나의 시원에서 출발해 가지를 뻗음으로써 다양한 양식으로 발전했다. 가장 나중에 자란 가지 하나에 '상식’이라는 이름을 붙여졌고, 우리는 그것만 가지고 ‘신화’를 제대로 이해했다고 착각했다. ‘신화’라는 나무 전체를 보지 못한 채 나뭇가지 하나만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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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7-02-20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있었네요ㅎ
싸이러스님의 실천이 부럽습니다.
읽어야지~읽어야지 했는 책들이
기억속으로 까마득히..특히 어렵고 두꺼운 책들은 더더욱 미루게 되더라구요ㅎ
우선에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부터
읽어봐야겠네요^^
그리스로마신화는 진짜 오랫동안
공들여 읽을 가치가 있는 듯.
예전에 읽은 한호림의 <뉴욕에헤르메스가산다>에서보면
유럽의 길거리, 간판, 음악, 예술 등에
신들의 상징물이 있더라구요.
신화를 모르고서 유럽문화를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을까요^^;

cyrus 2017-02-20 18:42   좋아요 1 | URL
이윤기 씨가 번역한 <변신 이야기>와 어렸을 때 읽은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시리즈만 보고, 신화를 어느 정도 이해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제가 무슨 계기가 있어서 원전 신화를 읽었는데요, 제가 큰 착각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신화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는 내용이 많았어요.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하는 것처럼 신화의 세계에 진입했는데, 열심히 읽어나가야겠어요. 북프리쿠키님이 댓글로 언급하신 신화 책도 참고하겠습니다. ^^

구름물고기 2017-02-20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니 아이디도 그리스와 관련있네요 어울리는 책인걸요 ㅎ

cyrus 2017-02-20 18:46   좋아요 0 | URL
제 닉네임의 발음 때문에 그리스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ㅎㅎㅎ 그리스를 좋아해서 cyrus라고 정한 건 아닙니다. ^^;;
 
다치바나 다카시의 서재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박성관 옮김, 와이다 준이치 사진 / 문학동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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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는 두 가지가 있다. 읽는 책과 소장하는 책이다. 책은 그 속에 담긴 내용이 중요하고 또 그것이 존재가치가 된다. 흔하지는 않지만, 책이라는 물체 자체가 소유주의 목적이 되는 경우도 있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일컫는 ‘애서가’와 구별해 이처럼 소장가치 높은 책을 모으는 사람을 ‘장서가’라고 한다. 책의 역사는 애서가와 장서가의 역사이기도 하다.

 

나는 책을 좋아하여 자주 서점에 들르는 편이지만 장서가는 못 된다. 장서가는 애서가와 달리 많은 장서와 함께 고서, 초판본, 저자 서명본 등 진귀한 책들을 갖고 있게 마련이니 말이다. 책을 좋아하다 보니 약간 무리를 해서라도 사들이는 버릇으로부터 지금도 자유롭지 못하다. 어렸을 때부터 멋진 서가를 가졌으면 하는 꿈을 꾸었다. 책이 좋아 책을 사다보니 자연스럽게 책이 쌓여가고 쌓여있는 책들을 바라보면서 그다음은 멋진 서가를 한 번쯤 그려보는 것이다. 사실 책이란 그 주인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면 한순간에 천덕꾸러기로 변해버리고 만다. 집에 책이 많다 보면 이사를 해야 할 때가 가장 고역이다. 그래도 책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책이 전해주는 말할 수 없는 큰 행복이 있기 때문이다.

 

웬만한 애서가라면 책꽂이에서 다치바나 다카시의 이름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터다. 일본의 저널리스트인 다치바나 다카시는 한마디로 책에 미친 사람이다. 하도 책을 많이 사는 바람에 아예 책만을 보관하는 ‘고양이 빌딩’을 따로 지었다. 부러운 이야기지만 모두가 다치바나처럼 살 수는 없다. 또한, 멋진 서가를 갖고 싶다고 해서 누구나 쉽게 서가를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서가란 단순히 책이 놓여 있는 곳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인의 모습이 투영된 책의 공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치바나는 서가를 들여다보면 서가 주인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보인다고 한다. 고대 로마의 문장가 키케로는 ‘책 없는 방 안은 영혼이 없는 육체와 같다’고 말했다. 다치바나는 키케로처럼 서재를 정리하고 나면, 자신의 집에 새로운 정신이 깃든 것처럼 느꼈을 것이다. 그의 영혼이 지식을 충만하지 못해 홀쭉했더라면 그의 서재는 살아 숨 쉬지 못했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서재》는 애서가와 장서가들을 매료시킬 만한 멋진 정보로 가득 찬, 책에 대한 책이다. 흔히 책에 관한 책은 좀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저자들은 바른 독서법을 알려주겠다며 속독법과 슬로 리딩, 초병렬 독서법 등 다양한 기술을 판매한다. 명문대 진입을 대비해 어려서부터 책을 읽어야 하며, 세상을 지배하는 0.1%의 비밀을 알기 위해 책을 읽어야 한다고 현혹하기도 한다. 이런 책에 관한 책을 쓰는 사람은 대체로 유명한 사람이자, 화려한 애서가들이다. 책을 다룬 책들은 대개 점잔을 부리는 경우가 많은데 《다치바나 다카시의 서재》는 전혀 그렇지 않다. 다치바나는 사소한 자기 고백에서 출발해 지금까지 몸으로 체득한 지적 자산들과 어디 가서 쉽게 접할 수 없는 책 뒷담화를 두루 섞어 냈다.

 

다치바나는 처음 문학에 관심을 두었으나 세계에 대한 철학적 인식을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독서의 방향이 바뀌었으며 그것이 결국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등 전방위적으로 넓어졌다고 말한다. 그는 문학을 거의 읽지 않는다. 국내에 다치바나의 존재감을 알리게 한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에 그 이유가 자세히 나온다. 잡지사 초년 시절 선배에 의해 문학만을 읽는 독서 행태를 지적받고 나서 논픽션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 이후로는 픽션의 세계가 논픽션에 비하면 얼마나 보잘것없는 지를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문학을 좋아하는 애서가 입장에서는 인간의 감정과 고뇌, 사랑을 다룬 문학을 외면하는(?) 그의 독서 편력을 잘 이해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다치바나 다카시의 서재》를 읽어보면 그의 지적 열망이 어린 시절의 문학 독서에서 내공이 쌓여 폭발하기 시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관심사가 다른 곳으로 이동해 간 것뿐이다. 그는 예전에 읽은 소설책도 고양이 빌딩 서재에 보관해두었다. 최신 보고서 속에 담긴 지식도 중요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되풀이하여 새롭게 읽는 책의 존재감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삶 자체가 ‘독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다치바나도 약간 허술하고,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호기심과 지적 욕구가 넘치는 그의 모습을 보면 고양이 빌딩 서재의 책 배열 방식이 체계적으로 되어 있을 거로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가끔 주제와 전혀 상관없는 엉뚱한 책이 서재에 꽂힌 경우가 있다. 다치바나는 그런 경우를 애서가의 결점이라고 보지 않는다. 분류가 잘못된 책이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그 책이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딘지를 언급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도 이해하지 못한 분야를 솔직하게 언급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저는 소쉬르에 대해서는 그다지 소상히 알지 못합니다. 편의적으로 모아두었을 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건, 요컨대 서가는 그 소유자의 지적 편력의 단면이라는 점입니다. (416쪽)

 

사놓고도 한 번도 펼치지 못한 책들이 아주 많다. 그를 동경하면서 책을 사 모았던 독자 입장에서는 그의 말이 조금은 위안이 된다. 지적 욕구가 넘쳐도 어떤 주제건 아는 게 없어 뭘 읽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있다. 다치바나도 그런 상황을 한 번쯤은 겪었으리라. 그래서 그의 서재는 독서를 통해 자신의 관심사를 좁히고, 글을 쓰기 위해 고민한 흔적이 나타나 있다. 이 책들을 사기 위해 지불했던 돈은 땀의 결정체이기 때문에 그가 책을 접하면서 공부한 노력이 책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치바나의 서재에는 ‘의심스러운 책’들도 가득하다. 여기서 ‘의심스러운 책’이란 오컬트, 신비주의, 유사 과학 등 일반적으로 황당하면서도 거짓말 같은 내용을 소개한 것이다. 심지어 지하철 독가스 테러로 세계를 경악시킨 옴 진리교 관련 서적도 고양이 빌딩에 보관되어 있다. 그렇지만 다치바나는 ‘의심스러운 책’들을 그냥 재미로 읽을 뿐이다.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과도한 믿음에 빠지지 않는다. 비록 그 책들이 지적 영양분을 제공하기에 너무 부족한 것들이지만, 다치바나는 이런 책들도 거대하고도 복잡한 세상을 보여주는 일종의 지표로 여긴다. 종종 다치바나가 언급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서두처럼 ‘인간은 알고 싶어 한다.’ 그래서 다치바나는 이런 인간의 본능이 남아 있는 책의 세계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거로 장담한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다치바나 다카시의 서재》는 소수의 애서가와 장서가를 위한 책이다. 책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를 만나고자 하는, 책 욕심이 넘치는 특별한 사람들을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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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걀부인 2017-02-18 21:2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가끔 저에게 책을 잔뜩 넘기겠다고 하시는 지인들이 있는데..그럴때마다 전, 아파트 한 평을 늘여주신다면.. 기꺼이 받겠다고 말하곤 하죠. 책욕심은 늘 나지만, 이제 40을 넘기고나니 한편 소소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들긴 하고요. 그리고 암만 생각해도 서울이나 서울 근교를 떠날 용기도 나지않고 그렇다고 아파트 평수를 늘릴수도 없겠단 생각에 그저 도서관 옆 작은 평수의 아파트에서 사는 게 가장 좋을듯 합니다..ㅋ 제 한국집은 두개의 시립도서관을 옆 옆으로 끼고 있는 이유가 바로...여기에...ㅋㅋ

cyrus 2017-02-19 08:49   좋아요 1 | URL
이제 책 보관할 공간이 부족하니까 서평단 신청을 하지 못하겠더라고요. 저도 이사를 하게 되면 도서관과 거리가 가까운 곳으로 정하고 싶어요. ^^

꼬마요정 2017-02-18 23: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항상.. 책 놓을 공간과 책을 살 수 있는 능력이 갖고 싶었답니다... 책을 빨리 읽고 소화할 능력은 덤으로 갖고 싶구요. 이 생에서는 힘들 듯 합니다만. ㅜㅜ

cyrus 2017-02-19 08:50   좋아요 0 | URL
저도 요즘 책을 빨리 읽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걸 느끼고 있습니다. ^^;;

북프리쿠키 2017-02-18 23:2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책 욕심은 많지만
소장은 되도록이면 적게 추리고 싶네요
서재는 간소하고 단촐하게~
책 읽는 공간을 편의성이나 분위기를 중점적으로 제 색을 입히고 싶은 게 저의 소박한 바람입니다.
단 소장책은 그 누구보다 깊은 사유를 통해
수시로 집어들어 내 것으로 만들고 싶네요^^

cyrus 2017-02-19 08:52   좋아요 0 | URL
미래에 이런 책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책을 소박하게 보관하는 법을 소개하는 책이요. ^^

2017-02-19 09: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2-19 09:25   좋아요 1 | URL
이제 정신 차리고 치열하게 읽으려고요. 만약 제가 20대였을 때 《다치바나 다카시의 서재》를 읽었으면, 넓은 서재를 갖추고 싶은 부러운 마음이 들었을거예요. 그런데 저도 이제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동경보다는 남은 생에 책을 열심히 읽어야겠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

잠자냥 2017-02-19 11: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픽션의 세계가 논픽션의 세계에 비해 보잘것없다는 지은이의 의견에 저는 반대합니다! ㅎㅎㅎ

cyrus 2017-02-19 16:31   좋아요 3 | URL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치바나를 좋아해도 그 주장만큼은 반대합니다. 논픽션의 세계가 픽션의 세계보다 재미있고, 상상 초월하는 순간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아주 불쾌한 기억이지만, 최순실과 박근혜 게이트가 그런 경우죠. 그렇지만, 이것만 가지고 논픽션의 세계가 픽션의 세계보다 흥미롭다고 볼 수 없습니다. 픽션의 세계가 먼 훗날에 논픽션의 세계가 되곤 하는데, 전 두 가지 세계를 대립하는 관계로 보고 싶지 않습니다. 상호 연결하는 관계로 보고 싶어요. 아서 C. 클라크의 소설 속 내용이 현실에 나타나는 경우가 있듯이 픽션의 세계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픽션의 세계를 존중합니다. ^^

쉽싸리 2017-02-19 22: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빌려다 놨는데요, 고양이 빌딩 전면 모습이 없어서 대실망했어요...

cyrus 2017-02-19 23:46   좋아요 0 | URL
저도 컬러로 된 건물 전체 사진이 있을 줄 알았어요.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에 건물 전면 모습 사진 한 장이 있는데 흑백 사진입니다. 구글에 고양이 빌딩을 검색하면 사진이 나옵니다. ^^

꼼쥐 2017-03-02 16: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등 수상을 축하드려요~~^^

cyrus 2017-03-02 16:35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꼼쥐님은 교보문고에 리뷰를 작성하셔서 3등 수상하셨던데 축하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