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불멸주의자 - 인류 문명을 움직여온 죽음의 사회심리학
셸던 솔로몬.제프 그린버그.톰 피진스키 지음, 이은경 옮김 / 흐름출판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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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짐을 지고 가던 한 노인이 지칠 대로 지쳐 짐을 땅에 내려놓고 죽음의 신을 소리쳐 불렀다. 노인의 부탁을 듣고 나타난 죽음의 신은 노인에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어봤다. 그러자 노인이 힘든 기색을 얼른 감추면서 말했다. “제가 짐을 다시 들 수 있게 도와주세요.” 
 
이솝(Aesop)의 입에서 구전된 것으로 알려진 이 우화는 죽음을 목전에 둔 노인의 심경 변화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인간에게 죽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성찰을 하게 만든다. 인간의 삶은 모래시계에 비유된다. 모래시계 위에 있는 모래가 밑으로 떨어지듯이 내게 주어진 삶의 시간은 줄어든다. 이처럼 인간에게 시간은 흘러가기보다는 없어진다. 어렸을 때는 세월이 너무 천천히 간다고 불평하지만 내게 주어진 시간이 점점 적어진다는 걸 느끼는 순간부터 세월의 빠름을 한탄한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 인과(因果)를 벗어날 길이 없다. 이 세상에 목숨을 받고 태어난 자는 반드시 죽고야 만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 죽을지는 ‘창살 없는 사형수’이다. 영생불멸의 욕구, 인간만이 버리지 못하는 지독한 욕심이다. 
 
《슬픈 불멸주의자》를 집필한 세 명의 저자 모두 심리학자다. 그들은 인간만이 죽음을 인식하는 존재임을 강조하기 위해 ‘공포 관리 이론’을 제시한다. 공포 관리 이론은 삶 속에 항상 죽음이 있음을, 그리고 죽음과 삶은 분리될 수 없음을 밝혀주는 학설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공포의 힘은 대단하다. 두려움은 인간에게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생각을 하게 만들고, 인간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세차게 몰아넣는다. 그 힘이 셀수록 인간은 쉽게 절망하고 실패하게 된다. 그렇지만 문화적 세계관과 자존감이라는 두 개의 심리적 자원 때문에 인간은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위해 절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문화적 세계관은 인간이 세상을 가치 있게 살 수 있도록 직접적인 동기를 부여한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살아가기 위해 지녀야 할 신념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자기 자신의 의미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자존감까지 더한다면, 인간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잊으며 창조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살아갈 수 있다.
 
이렇듯 죽음과 삶은 밀접한 상관관계를 지니고 있기에, 죽음을 제대로 죽지 못하게 되면 삶도 제대로 살고 있지 못하게 됨은 당연하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형편은 어떠한가? 죽음을 망각하면서 지낸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인류발전의 동인(動因)이다. 어떤 사람은 종교로, 어떤 사람은 쾌락에 탐닉하여 죽음의 공포에서 도피한다. 또한, 과학 기술로 수명을 더 연장하는 법을 개발하여 죽음의 공포를 해결하고 싶어 한다. 수명이 길어진 만큼 인간은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필요한 건 오래 살기 위한 지식이 아니라 죽음을 받아들이는 지혜다. 인간은 죽음의 고통을 느끼지 않으려고 자신보다 미약한 존재(동물, 사회적 약자 등)의 죽음을 외면하거나 심지어 그들이 겪은 고통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사고의 희생자를 조롱하고, 모욕하는 일까지 생긴다. 삶의 한복판에서 죽음을 생각하는 기회가 줄어들고, 죽음의 한복판에서 삶을 생각하는 인간다운 자세마저 사라지고 있다. 스멀스멀 엄습해오는 죽음이라는 보이지 않는 두려움이 남 이야기처럼 느낀다.
 
죽음에 대한 무관심과 회피는 삶에 대한 불안을 더욱 짙게 만든다. 그러나 그럴수록 사람들은 그 불안을 감추기 위해 죽음을 보이지 않게 하려고 애쓴다. 삶은 죽음 위에 군림하는 척하지만, 이런 집착은 삶의 황폐화를 가져온다. 세네카 같은 스토아학파는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항상 죽음을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죽음의 공포에 해탈하면서 자연스럽게 몸을 맡기는 건 쉽지 않다. 한평생 인간이 이 두려움의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는가. 인생의 순리를 받아들이는 것, 이게 왜 이리 어려울까?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철학은 죽음의 연습’이라며 언제 죽음이 오더라도 태연히 죽을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나보다. 나는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죽음을 생각하자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남아 있는 날들의 가치를 소중하게 지키기 위해, 또 삶의 원동력이 되어주는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죽음 앞에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자’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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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6 2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12-07 12:54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김기춘은 기억이 안 난다는 식으로 일관하고, 심장에 문제 있어서 건강 상태가 안 좋다고 말하지 않나, 더 가관인 건 최순실입니다. 박근혜 덕분에 세계 여행 잘 하고 다녔으면서 ‘공항 장애‘ 때문에 청문회 출석 못한다고 우기더군요.

낭만인생 2016-12-07 1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죽음 앞에 바로 서지 못하면 결코 제대로 된 삶을 살수가 없을 겁니다. 비겁해 지니까요... 우리가 가장 먼저 해결할 문제는 삶이 아니라 죽음이 아닐까 싶네요..

cyrus 2016-12-07 12:59   좋아요 0 | URL
올해 들어서 죽음을 주제로 한 책을 많이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도 나이가 들어서 임종 순간이 다가오기 시작하면 비겁해질 것 같습니다. 그 순간에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쉽지 않으니까요.
 
THE PATH 더 패스 : 세상을 바라보는 혁신적 생각 - 하버드의 미래 지성을 사로잡은 동양철학의 위대한 가르침
마이클 푸엣.크리스틴 그로스 로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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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흐름에 빠지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변화이다. 그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만물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우리는 시간의 흐름 속에 변화를 인식하지 못한 채 시대의 요구에 맞춰 변해가며 살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변화 자체가 아니다. 변화에 대처하는 우리의 모습이다. 변화의 방향에 따라서 긍정과 부정적인 결과를 낳기 때문에 변화의 시도도 좋지만, 변화의 첫발을 어느 쪽을 향해 내딛는가도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쉽게 변화하기를 두려워한다. 그것은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 안온함을 빼앗기기 때문이다. 사람의 본성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해서 타성에 젖게 되고, 관습이 되고 습관이 되어 타성에 빠진다. 새로움의 세계로 전혀 나아가지 못하고 정체된 생활을 하게 된다. 현재에 안주하고 싶은 그 순간이 변화 추진력이 하나씩 하나씩 사라져가는 것이다.

 

언제나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 뇌는 자극에 대한 반응성이 약해진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사라지고 흥미가 없어질 때, 언제나 똑같은 시각으로 바라보며 변화를 주지 않을 때, 현재에 안주하고 싶을 뿐만 아니라 위기로 확산되는 조짐을 미처 알아내지 못한다. 하버드대 중국사 교수 마이클 푸엣은 현실 안주의 시대를 슬기롭게 살 수 있는 대안으로 중국 철학에 주목한다. 다양한 제자백가의 사상 중에서도 유가와 도가 철학은 호랑이의 얼굴 속의 두 눈이다. 중국철학하면 공자와 노자가 떠오를 정도다. 푸엣이 소개한 것은 공자, 맹자, 노자, 장자, 순자의 사상, 그리고 내업(內業)이라는 오래된 문헌에 기록된 ()’에 관한 내용이다.

 

우리는 공자와 아주 관련이 깊은 유가 사상의 이념이 보수적이며 절대적이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리고 막상 공자 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인()은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지, 오래된 중국 철학이 민감한 현실 문제를 건드릴 수 있을 정도로 배울 가치가 있는지 등등 아주 간단한 문제들조차 분명하지 않은 점이 많다. 마이클 푸엣의 하버드대 강의는 중국철학의 잃어버린 위상을 회복할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것은 중국철학을 알고 싶은 독자에게는 커다란 복이다. 한편 중국철학은 우리의 생각을 거울처럼 정확히 비춰주는 도구가 되어 의 존재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준다.

 

요즘 사회는 많은 것들이 쉽게 변화하고 빨리 바뀌고 있다. 잭 웰치는 변화를 강요당하기 전에 스스로 변화해야 한다하여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웰치의 말처럼 우리 스스로 변화하려면 나는 이런 유형의 사람이다라는 정형화된 자아 개념을 받아들여선 안 된다. 고대 중국 사상가들은 인간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복잡한 존재로 인식했다. 즉 우리는 스스로 능동적으로 변화를 시도할 수 있는 존재이며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맹자는 우리를 둘러싼 세상은 끊임없이 변한다고 생각했다. 영원히 안정된 세상은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좋은 대학, 안정된 직업. 세상이 정해놓은 틀에 맞춰 살아가는 것을 선호한다. 내부, 즉 나 자신만의 기준으로 세상을 받아들이고 주변 일을 해석하면 위기가 위기인 줄 모르거나 위기 앞에 쉽게 좌절한다. 내업은 맹자의 생각과 반대로 외적인 일에 휘둘려서 마음의 평정을 찾지 못하는 삶을 경계한다. 외부 환경의 위협적이고 불길한 기를 반사하기 위해서는 정신을 온전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자신을 수양해야 한다.

 

사실 나는 이 책의 내업편에 공감하지 못했다. 오히려 ()’()’을 언급하는 내용이 너무 관념적으로 느껴져서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요즘 혼이 비정상인 여자가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활력을 빼앗고, 우리를 지치게 하고 있다. 저자는 이런 외적인 상황에 휘둘리지 말고, 수양하라고 권한다. 나에게 독서는 내면의 안정을 유지하게 해주는 수양의 한 방식이다. 그런데 책을 읽어도 마음의 활력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다. 내가 마음을 다스리는 능력이 부족한 걸까 아니면 혼이 비정상인 여자의 기가 독할 정도로 센 것일까.

 

푸엣은 내업기원전 4세기 중국에서 출간된 작자 미상의 자기 신격화 운문 모음집’(184)이라고 소개했는데, 이는 잘못된 내용이다. 내업은 춘추시대 제나라 재상 관중이 지은 것으로 알려진 관자49편의 제목이다. 관자에 수록된 일부의 글이 후대의 식자들이 쓴 것으로 추측되고 있지만, 그렇다고 내업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무명씨의 글로 단정 지을 수 있는 명확한 근거가 없다. 푸엣이 인용한 내업의 문장은 관자49편의 시작을 알리는 첫 문장이다.

    

 

무릇 만물의 정기, 그것이 곧 생명이다.

그 아래로 오곡이 생기고, 그 위로 별이 생긴다.

그것이 천지 사이에 떠다니면 귀신이라고 부르고,

가슴에 갈무리되면 성인이라 부른다.

 

(The PATH191)

    

 

무릇 사물이 지니고 있는 정기가 합하면 만물이 생성한다.

땅에서는 오곡을 낳고, 하늘에서는 뭇 별이 된다.

천지 사이에 떠돌아다니는 것을 귀신이라 한다.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는 사람을 성인이라 한다.

 

(신창호 외 공역, 소나무출판사, 관자502)

 

 

특이하게도 205내업에서 인용한 문장은 한자 원문과 같이 소개되었다. 그런데 하나를 굳게 지킨 군자만이 이를 해낼 수 있다원문에 들어간 첫 번째 한자가 잘못 표기되었다. (성품 성)’이 아니라 (오직 유)’.

   

 

기를 수정하되 바꾸지 않고, 지혜를 변형하되 바꾸지 않는 것.

化不易氣 變不易智

 

하나를 굳게 지킨 군자만이 이를 해낼 수 있다.

執一之君子 能爲此乎

 

(The PATH205)

 

    

 

모든 사물을 변화시키되 자기의 기는 바뀌지 않고,

化不易氣

 

모든 일의 변화를 촉진하되 자기의 지혜는 바뀌지 않으니,

變不易智

 

오직 하나를 굳게 지닌 군자만이 이를 해닐 수 있도다!

執一之君子能爲此乎!

  

(신창호 외 공역, 소나무출판사, 관자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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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11-30 16: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변화의 시간 차....이걸 보면 정말 어느 것이든 변하지 않는 것이 없고..이 변화만이 영원할 듯하더군요...변화하지 못하면 변화를 당하야 하는 것도 세상이치인듯..ㅎㅎㅎ

cyrus 2016-11-30 17:11   좋아요 0 | URL
신기한 점이 변화의 미세한 조짐을 감지 못하더라도 그 변화의 흐름에 저절로 맞추면서 살아가는 경우입니다. ^^

:Dora 2016-11-30 21: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신 혼 마음 영혼에 어떻게 다른건지 궁금하기도 했어요 예~전에

cyrus 2016-11-30 21:50   좋아요 0 | URL
저도요. 철학적인 관점으로 정신, 혼, 마음, 영혼의 정의를 정리하면 꽤 머리 아플 겁니다. ㅎㅎㅎ
 
언플래트닝, 생각의 형태 - 만화, 가능성을 사유하다
닉 수재니스 지음, 배충효 옮김, 송요한 감수 / 책세상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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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일상은 드라마보다 재미가 없다. 영화처럼 누구와 눈이 마주쳐 운명 같은 사랑을 나누는 일도 드물고 사는 일이 드라마처럼 극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뉴스에 등장하는 세상의 현실은 흥미롭고 복잡하고 극적이다. 뉴스가 무미건조하고 재미없는 사건을 그럴듯하게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뉴스가 소설이라는 말은 아니다. 뉴스는 물론 사실의 전달이다. 하지만 단순히 있는 그대로가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기자나 편집자에 의해 선택되어 가공되고 배열된다. 기자나 편집자의 시각과 선호도, 편집의 방향에 따라 뉴스의 성격이나 색깔이 달라진다. 자의적 또는 타의적으로 ‘선택되어 가공되는 것’은 프레임(Frame)으로 만들어진다. 어떤 문제를 대하는 관점, 세상을 관조하는 사고방식, 세상에 대한 비유, 사람들에 대한 고정관념 등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프레임은 특정 방향으로 세상을 보도록 유도하지만, 보는 세상을 제한하는 검열관 노릇도 한다.

 

만화가 닉 수재니스는 철학적인 관점으로 ‘고정불변으로 굳게 닫힌 창문’을 열려고 시도한다. 이 마음의 창문이 열리지 못하게 만드는 원인은 보통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따르려는 관습의 힘, 즉 자기중심적 사고이다. 우리는 지도를 볼 때 관습적으로 북쪽을 위로 향해서 본다. 늘 그러한 것만 보인다. 아래에는 제주도가 있고, 위에는 백두산을 넘어 만주가 보인다. 하지만 지도를 남쪽이 위로 가게, 즉 거꾸로 보면 우리의 시선 위로 넓은 바다가 보인다. 프레임 창문이 활짝 열린 사고는 시간과 공간 속에 갇힌 사고가 아니다. 의식적으로 자신의 사고 과정을 점검하지 않으면 열린 사고를 할 수 없다. 관점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되는 일반적인 기준이 아니다. 관점은 말 그대로 사물을 보는 시선의 위치이다. 시선이 어디에 머무는가에 따라 사물(또는 현상)의 또 다른 면이 보인다. 더 나아가 숨겨진 면도 볼 수 있다.

 

흔히 이 세상이 개인들의 특성이 너무나도 다른 개성의 시대라고 생각한다. 개개인의 개성화가 강한 특징으로 나타나는 것이 현실이다. 좋고 나쁜 것에 대한 표현을 비롯한 자신의 의사 표현이 너무나도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 요즘의 실태이다. 지금은 분명 다양성이 추구되는 시대이다. 하지만 구태의연한 구시대적인 발상을 쉽게 버릴 수 없다. 자신의 연령층이나 시각에서 바라보는 관점을 떨쳐버리기가 매우 어렵다. 이게 오랫동안 사회 전체적인 분위기로 형성되면, 비판과 또 다른 가능성을 선택할 기회가 상실된다.

 

 

 

 

 

국정 역사교과서에 대한 국민의 의견을 수렴한다고 해놓고선 토론 댓글을 차단하는 정부의 수준을 보라. 고정관념을 좋아하는 기성세대의 권위주의는 소통과 대화를 방해하는 벽을 세우기에 급급하다. 경기 고양시의 한 고등학교는 시국선언을 한 학생들에게 징계를 언급했다. 지진이 났을 때도 부산의 고등학교는 학생들을 대피시키기는커녕 자습을 강행했다. 서로 다른 지역에 일어난 상황들, 가슴 아프지만 잊어선 안 된 ‘그날’과 닮았다. 세월호에서도 ‘가만히 있으라’고 했지.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은 변화와 다양성을 두려워한다. 고정관념 밖으로 나가면 자신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과 만나고, 이들과 부딪히게 된다. 그래서 다양성을 인정하는 논쟁을 손해 보는 전쟁으로 생각한다. 이들은 고정관념에 갇힌 걸 알면서도 더 넓은 갇힘을 향해 진군한다. 그야말로 ‘바보들의 행진’이다. 기성세대의 고정관념이 변화되지 않는 이상 현세대의 고정관념 또한 기성세대와 마찬가지로 그대로 유지될 확률이 높다. 고정관념에 길들인 다음 세대는 단조로운 생각 밖에 할 줄 모르는 무기력한 존재가 된다.

 

주사위를 바라볼 때 여러 가지 방향에서 숫자를 바라보듯, 새로운 눈, 참신한 생각, 깊이 있는 논쟁을 통해 우리의 고정관념을 벗어나 보면 열린 태도를 배울 수 있다. 닉 수재니스는 논쟁이 승자와 패자가 결정되는 전쟁이 아니라 역동적인 춤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다양한 생각들이 서로 맞부딪히고, 때론 부둥켜안을 수 있는 생각의 춤을 부담스럽게 생각한다. 누구나 참여 가능한 토론 무대를 마련해줘도 직접 나서서 생각의 춤을 추는 사람은 나오지 않는다. 부끄럼 많은 한국 사람들은 자기 생각을 온라인 무대에서 마음껏 드러낸다. 그들이 표현하는 것이 생각인지 감정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그냥 그동안 쌓여 있던 감정들을 한가득 담아 상대방의 생각을 공격하느라 바쁘다. 이 사람들이 세상에 불만을 품게 만드는 원인 중 하나가 단조롭고 폐쇄적인 한국의 사회적 분위기다. 타인과 똑같이 ‘바보들의 행진’에 동참하면 사고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러면 ‘얕은 지식의 수준’에 머무른다. 프레임의 창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니,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일상이 단조로워지고 짜증이 나는 것이다. 어제가 오늘이 아니고 내일 또한 오늘이 아님에도 우리는 그 것을 착각한다. 오늘이 어제 같고 내일 또한 오늘 같을 것이란 고정관념이 사람을 우울하게 만든다. 결국,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이나 사회적 약자에게 세상에 대한 불만을 극단적인 분노와 언어폭력으로 표출한다. 고정관념과 권위주의는 이런 상황을 더욱 고착시켜 끝없는 추락의 길로 밀어낸다.

 

《언플래트닝 : 생각의 형태》는 지혜롭게 사는 데 필요한 좋은 프레임을 제시하는 책이 아니다. 창의적 사고를 형성할 수 있게 도와주는 책도 아니다. 저자가 알려주는 생각의 도구들을 교육 목적으로 가르친다면, 미래의 세대들의 정신적 성장을 저해하는 ‘이중 프레임’이 겹겹이 형성하게 된다. 이 책에서 자주 강조되는 시각 및 관점의 전환이 중요한 게 아니다. 우리는 그보다 먼저 생각을 왜곡하는 원천을 찾아내야 한다. 그런 것을 하지 못하면 언어는 가시성의 조작자가 되고 이미지는 그 독창성과 순수성을 잃게 된다. 꽉 막힌 세상에서 벗어날 방법은 자신의 마음에 달려 있다. ‘가만히 있으라’라는 말에 기죽지 말고 원 없이 실행해야 한다. 단조로움을 느낄 겨를이 없다. 숨 가쁘게 벌어지는 변화에 푹 젖어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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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bomi 2016-11-12 00: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자주 듣는 말 중 하나는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굳이 말해서 다른 사람까지 불편하게 할 필요가 있나(분란을 만든다는 뉘앙스)˝에요. 생각을 말했을 뿐인데 공격, 지적, 시비걸기 등으로 받아들이나 봐요. 그래서 자꾸 자기검열(?)하게 되죠. 말해도 될까, 내가 이상한가, 어조가 공격적인가, 말투가 사나운 건가, 태도가 불손(?)한가 등등. 그러다가 ‘말해서 뭐하나‘ 체념해요.
˝가만히 있으라˝는 게 말하지 말라는 거랑 같은 느낌 들어요. 이상하고 부당하고 잘못된 건데 아무말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ㅎㅎㅎ

cyrus 2016-11-12 13:20   좋아요 1 | URL
제가 알라딘 서재 활동하기 시작했을 때 cobomi님처럼 비슷한 생각을 했었어요. 서재에 한바탕 논쟁이 벌어지면 소심하게 지켜보기만 했어요.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어요. 잘못된 상황을 모르는 척하는 제 모습이 답답해보였거든요. ^^;;

지금행복하자 2016-11-12 07: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의식적으로 가만히 좀 있지 라는 툭 튀어나올때 마다 이게 내 몸에 내 입에도 붙어있구나 싶어요.. 세뇌는 무서워요~ 질기구요~

cyrus 2016-11-12 13:22   좋아요 1 | URL
맞아요.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힘들어요. 그래서 방어적으로 ‘가만히 있으라‘라는 말이 나와요.

yureka01 2016-11-12 08: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불의에 대해 가만히 있으면 능멸당하죠....역사가 그랬습니다..절대 가만있지 않았으니까요.

cyrus 2016-11-12 13:23   좋아요 2 | URL
맞습니다. 오늘도 집에만 있지 않으려고 합니다. ^^
 
에로티즘 - 개정판 현대사상의 모험 24
조르주 바타유 지음, 조한경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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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바타유와 르네 마그리트. 그들의 삶에는 공통점이 있다. 한때 초현실주의 그룹에 가담했다. 초현실주의 그룹을 이끈 앙드레 브르통과의 불화가 원인이 되어 초현실주의자들과 결별했다. 두 사람에게 가슴 아픈 가정사가 있다. 마그리트의 어머니는 몸을 던져 자살했고, 바타유의 어머니는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자살을 기도했다.

 

 

 

 

 

 

바타유는 마그리트의 그림 「강간」을 볼 때마다 웃음을 참지 못했다고 한다. 마그리트는 여자의 신체 부위와 얼굴을 절묘하게 조합했다. 여자의 가슴은 눈, 배꼽은 코, 입은 여성의 성기로 에로틱하게 변형되었다. 이 그림 제목은 상대 여성의 얼굴을 쳐다보면서도 섹스를 떠올리는 남성의 은밀한 욕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성욕은 식욕, 수면욕과 함께 인간의 가장 본능적인 욕구 가운데 하나이다. 섹스의 본질적인 목적은 종족 번식이다. 그러나 바타유는 섹스를 진화의 산물로 보지 않는다. 그는 에로틱한 욕망이 죽음에 이르는 황홀한 극치감이라고 했다. 평범한 사람들은 마그리트의 「강간」이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마그리트가 여자의 신체를 노골적으로 표현한 의도가 무엇인지 잘 몰라 당혹해 한다. 반면 바타유는 그림을 보는 재미에 지루할 틈이 없다. 그는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자신이 정의한 에로티시즘을 발견했기 때문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에로티시즘은 인간의 가장 내밀한 곳까지 파고든다. 우리는 성행위 후 다시 옷을 입으면서 에로티시즘의 수치심을 가린다. 하지만 마그리트는 성욕을 금기하는 관습적인 사고를 배신했고, 금기시돼온 일탈을 「강간」을 통해서 과감하게 드러냈다. 종교가 에로티시즘을 부도덕한 감정의 일탈로 규정해도 성욕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굳이 잘 알려진 사례를 언급하지도 않아도 우리는 에로티시즘이 금기를 위반하게 만드는 욕망이라는 사실을 안다.

 

성욕은 오해받거나 거절되고 혹은 원천적으로 봉쇄되기도 하다. 때로는 ‘추하다’는 이유로 외면당하고, 때로는 동물에 가까운 수치스러운 본능으로 인식된다. 노동은 성적 일탈을 통제하는 수단이었다. 노동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인간의 다양한 활동 가운데 특권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인간은 노동력을 팔아 생활을 유지한다. 노동의 생산성을 지향할수록 성욕은 잊혀진다. 섹스는 종족 번식을 위해서만 허용돼야 한다는 통념이 형성된다. 여기에 금욕을 강조하는 종교적 금기까지 더해지면서 성을 은밀한 곳에 꼭꼭 숨겨놓고 억압해왔다. 현실적 제약과 결핍은 성욕을 반감시키기는커녕 배가시킨다. 그래서 인간은 성욕을 섹스로 풀지 못하고 다른 방법으로 치환한다. 카니발리즘(식인 풍습)은 매년 노동과 금기 속에 붙잡혀있던 인간들에게 허락되는 유일한 향락의 시간이다.

 

 

 

 

 

에로티시즘은 단순한 쾌락의 도구가 아니다. 인간의 생멸(生滅)을 확인하게 만드는 감정의 증거이다. 죽음을 의식하는 생명은 오직 인간뿐이다. 성적 환희의 순간이 지나간 이후에 인간은 죽음, 즉 ‘작은 공포’를 깨닫는다. 마그리트는 성욕과 죽음의 연결고리를 절망적으로 묘사했다. 천으로 얼굴을 뒤집어쓴 채 입을 맞추고 있는 남녀의 모습은 성욕의 불안과 공포를 전달한다. 마그리트는 이 그림으로 하얀 속옷의 천이 얼굴을 가린 어머니의 주검을 접한 기억을 끄집어낸다. 마그리트에게 천은 ‘작은 공포’를 떠올리게 하는 부정적인 대상이다. 수없이 두려워하던 긴 시간의 축적이 화가 기억의 심연에 있다. 이 기억의 심연을 들여다보면 ‘죽음까지 인정한 에로티시즘’(《에로티즘》 11쪽)이 있다. 우리는 날마다 아름답게 사랑하면서 살고 싶어 한다. 의미 있는 삶이 연속적으로 흘러갈 것만 같지만, 죽음이 언제 우릴 가로막을지 알 수 없다. 우리는 죽음의 공포를 넘어서지 못하는 ‘불연속적인 존재’이다. 죽음의 공포를 의식하지 않으려고 성적 쾌락에 탐닉해봤자 소용없다. 섹스는 ‘가장 진하면서도 의미 없는 발작’(《에로티즘》 117쪽)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에로티시즘은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절망감의 또 다른 표현이다.

 

종교의 힘이 희미해진 지금, 현대인은 음란함과 폭력성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류는 감금되고 폐기되어야 했던 성적 욕망을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풀어낸다. 사람들은 그것을 범죄로 규정한다. 오늘날의 에로티시즘은 ‘쾌락에 이르는 부정적 욕망’이다. 성범죄의 위험이 커질수록 에로티시즘의 본질은 왜곡되고 있다. 또다시 에로티시즘은 건강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경계해야 하는 '건강하지 않은' 금기가 된다. 바타유는 여자를 물건처럼 대하는 남자의 비뚤어진 성적 욕망과 폭력성이 사회의 안정성을 해치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바타유가 추구했던 정상적인 에로티시즘로 회복하는 일이 아직은 요원하게 느껴진다.

 

 

 

 

책머리 8쪽에 바타유는 지인들에게 감사의 말을 남겼다. 그가 언급한 지인 중에 자크 앙드레 부아사르라는 이름이 있다. 그런데 역자가 이름 표기를 잘못 적었다. 자크 앙드레 부아파르(Jacques-Andre Boiffard)’가 맞다. 부아파르는 브르통과 함께 초현실주의 그룹 초창기 멤버로 활동했으며 브르통의 소설 나자의 삽화를 그렸다. 하지만 부아파르도 브르통과의 관계가 소원해져서 초현실주의자들과 결별했다. 그는 바타유와 함께 브르통을 비판하는 팸플릿을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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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6-10-07 01: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삶과 죽음을 포함해 사랑은 떼어낼 수 없는 존재죠.
욕망의 건강한 분출을 응원합니다.

cyrus 2016-10-07 14:54   좋아요 0 | URL
요즘은 사랑보다 욕망 분출을 먼저 하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순간의 쾌락에 집착하면 건강뿐만 아니라 인생마저 파괴됩니다.
 
텍스트의 포도밭 - 읽기에 관한 대담하고 근원적인 통찰
이반 일리치 지음, 정영목 옮김 / 현암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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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에 방영된 드라마 '포도밭 그 사나이'는 미니시리즈와 농촌드라마를 결합한 색다른 드라마였다. 동명의 로맨스 소설을 원작으로 했다. 제목 그대로 포도밭을 배경으로 한 전원 로맨스다. 촌스러운 시골 총각 장택기(오만석 분)와 깍쟁이 도시 아가씨 이지현(윤은혜 분)이 농사를 지으며 사랑에 빠지는 과정이 흥미진진하다. 택기는 무뚝뚝하면서 까칠한 성격의 청년이다. 지현에게 항상 시비조다. 지현은 포도밭을 차지하겠다는 큰 꿈을 안고 택기와 함께 시골 생활을 하게 됐지만, 쉽지 않다. 지현은 인터넷 한 번 이용하는 것마저 택기의 눈치를 받을 만큼 사생활의 제약을 받는다. 게다가 편하게 샤워할 곳도 없을 만큼 생활시설이 열악하다. 그렇지만 택기는 고단한 농촌생활을 '힘들지만 가치 있는 삶'으로 생각한다.

 

《텍스트의 포도밭》에 가면 그 사나이가 있다. 그는 12세기부터 포도 덩굴 같은 텍스트를 가꾸면서 홀로 지키고 있다. 수도사 후고는 텍스트를 보고 느끼면서 얻은 진리의 양분을 축적하여 <디다스칼리콘>이라는 자신만의 포도밭을 농작했다. <디다스칼리콘>에는 후고가 포도밭을 정성스럽게 대하는 과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 과정이 바로 '텍스트를 대하는 방식'이다. 후고가 텍스트를 이해하는 과정, 즉 '렉티오 디바나(Lectio Divina)'는 오늘날의 읽기와 확연한 차이가 있다. 후고는 신과 일체감을 느끼기 위해 몸과 마음, 영혼을 다해 성서를 읽었다. 후고를 비롯한 중세의 수도사들은 한 구절이나 한 줄을 여러 시간이나 여러 날에 걸쳐 읽었다. 종이 위에 덩굴로 자란 텍스트 밭을 거닐면서 알알이 열린 포도알을 조심스럽게 따낸다. 그 속에 몸과 마음을 풍요롭게 해주는 양분이 숨어 있다. 그것은 수도사들이 "구해야 할 모든 것 가운데"(incipit, 인시피트) 첫째로 손꼽히는 지혜다. 수도사들은 이 양분을 얻기 위해서 숙고의 시간을 가진다.

 

먼저 자세와 호흡, 마음을 가다듬은 뒤 텍스트를 천천히 소리 내서 읽는다. 이후 다시 한 번 묵독하면서 마음에 와 닿는 구절이 있으면 필사했다. 수도사의 공부 방식(studium, 스투디움)은 기본적으로 읽기와 필사를 반복한다. 종이에 기록한 것들을 천천히 반복 암송한다. 그리고 그 구절들을 기억하거나 쪽지에 기록해 일상생활에서도 되새긴다. 후고는 읽기 행위에 절대로 빠져선 안 될 전제 조건으로 '기억력'을 강조한다. 기억력 훈련이 잘되면 텍스트에서 발견한 지혜의 보물들을 보관한 상자를 이용할 수 있다.

 

 

아이야. 지혜는 보물이며 네 마음은 보물을 담아두는 곳이다. 지혜를 배우면 귀중한 보물을 모으는 것이다. 지혜의 보물은 여럿이며, 네 마음에도 감출 곳이 여럿 있다. 여기에는 금, 저기에는 은. 너는 이 자리들을 구분하고, 어디가 어디인지 알아야 한다. 그래야 이런 것 저런 것을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할 수 있다.

 

(이반 일리히가 후고의 책에서 인용한 문장, 《텍스트의 포도밭》 56쪽)

 

 

사실 암기로 책을 읽는 시대는 한물갔다. 후고가 살았던 시대에서 '기억'이란 교양인의 삶을 한시도 떠나선 안 되며 부단히 단련시켜야 하는 능력이었다. 그러나 계몽주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양상이 달라졌다. 몽테뉴는 암기한 지식은 지식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단순 암기의 독서법을 비판했다. 기억은 이성적 사유를 방해한다. 그저 암기한 것을 그대로 종이 위에 뱉어낸 토사물들은 지혜로 손쉽게 포장된다. 그것은 '쓰레기 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암기의 시대를 경험하지 못한 우리는 후고의 독서법을 고리타분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후고의 기억력 훈련은 단시간 내에 지식을 획득하는 데 쓰이는 오늘날의 기억술과는 차원이 다르다. 수도사들의 기억력 훈련은 삶과의 끊임없는 친밀한 접촉이다. 수도사들은 텍스트의 지혜를 자신의 삶에 흡수하여 소화하기 위해서 독서를 했다. 그들의 독서는 일상적이다. 물이나 음식을 먹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해지듯이, 독서는 지속적인 읽기가 중요하다. 기억력 훈련은 독서의 일상적 지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기예(artes, 아르테스)였다.

 

독서법은 다양하다. 다만 무조건 단 하나의 독서법이 효과적인 것은 아니다. 책 읽는 과정은 지혜에 이르는 길이다. 결국, 다양한 독서법이 지혜에 목마른 우리 앞에 다양한 길을 제시하고 있다. 텍스트의 포도밭을 오랫동안 지킨 ‘중세인’ 후고와 그를 만난 ‘근대인’ 이반 일리히는 마음과 영혼을 살찌우는 독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인터넷 도시에 거주하는 ‘현대인’들에게 알려준다. 인터넷 도시에는 엄청난 양의 지식이 축재되어 있다. 현대인들은 남이 올려놓은 인터넷 정보를 통해 지식을 얻는다. 인터넷의 지식에 의존한 우리는 지식의 이해가 깊어진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읽는 행위를 잊어버린 현대인은 책 속의 문장과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를 다 소화하지 못한다. 인터넷은 우리의 지식습득 능력을 확대하지만, 사유와 성을 방해한다. 지식을 쉽게 습득한다고 해서 이해가 깊어지는 것은 아니란 얘기다. 후고의 책 속에는 인터넷 시대의 공부법에 대한 성찰적 기반이 되어주는 답이 묵직하게 담겨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우둔함을 모르지 않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낼 수 있는 모든 힘을 기울여 애써 지식을 쫓고, 쉬지 않고 자신이 추구하는 바를 따라간다. 이들은 노력의 결과로는 절대 가질 수 없는 것을 의지력의 결과로 얻을 자격이 있다.

 

(이반 일리히가 <디다스칼리콘> 서문에서 인용한 문장, 《텍스트의 포도밭》 117쪽)

 

 

속독이 요구되는 시대에도 음식물을 꼭꼭 씹어 먹듯이 글을 음미하며 읽는 것이 필요하다. 후고는 매일 텍스트의 포도밭 한가운데서 우직하게 공부했다. 비록 텍스트를 거치는 동안 수차례 실패를 겪게 되더라도 그렇게 힘들게 터득한 지혜는 정말 소중하다. 공부와 독서에는 왕도(王度)가 없다. 공부와 독서는 자랑거리를 위한 유희가 아니다. 책 속의 영양분을 골고루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공부는 '힘들지만 가치 있는 삶'의 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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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6-10-02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도밭 그 사나이가 원작이 있었구나. 근데 외국작품일 거라곤 정말 생각 못했네. 정말 책 한 권을 읽더라도 씹어 먹듯 읽어야 하는데 읽어야할 책은 많고 읽는 시간은 한정되 있고 그래서라도 속독을 배워보고 싶은데, 막상 낭비되는 시간이 더 많거든. 그거 모아다 읽어도 충분할 것 같긴해.

stella.K 2016-10-02 18:20   좋아요 0 | URL
헉, 근데 확인해 본 결과 드라마와 책은 같은 게 아니었군.
나의 완벽한 오독인건가...?ㅠㅋㅋ

cyrus 2016-10-02 18:24   좋아요 0 | URL
원작소설이 한국 작가가 썼어요. 작가 이름은 `김랑`입니다. ^^

북프리쿠키 2016-10-02 18: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동감하는 내용입니다.
비슷한 류의 책은
욕심을 자제하고
바이블이 되는
한권의 책을 여러번 깊이
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1인입니다.

블라디미르 나브코프가
˝책은 읽을 수 없다.
다만 여러번 읽을 수 있을 뿐이다˝라고
재독의 중요성을 말했고,

히라노게이치로의 <책을 읽는 방법>에서도
슬로우 리딩의 가르침이 눈에 띄었답니다.

싸이러스님 연휴 잘 보내고 계시죠?^^/








cyrus 2016-10-02 18:29   좋아요 1 | URL
제가 기억력이 좋지 않아서 이미 읽었던 책의 내용을 몰라서 다시 읽거나 아니면 비슷한 주제의 책을 읽어요.

예를 들면 상대성이론을 정확하게 알고 있으면 괜찮은데, 이게 잊어버려서 상대성이론에 대한 책을 또 읽어요. 상대성이론을 쉽게 소개한 책 한 권만 제대로 읽으면 다시 읽을 필요가 없어요.

내일도 쉴 수 있어서 기분이 좋습니다. 북프리쿠키님도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 ^^

아무 2016-10-02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도 덩굴 같은 텍스트라는 말이 인상적이네요.. 사실 알고 싶은 게 많다보니 많이 읽고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소화하고 있는지도 항상 고민되는 부분이죠.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니까요.. 여러모로 생각할 부분이 많아지네요ㅠ 남은 휴일도 편안히 보내시길..^^

cyrus 2016-10-03 09:44   좋아요 0 | URL
텍스트를 포도밭에 비유한 사람이 이반 일리히입니다. 정말 멋진 표현입니다. 저도 이 책을 읽으면서 다독의 효과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봤습니다. 다독에 집중하는 바람에 재독할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었습니다.

아무님도 연휴 잘 보내세요. ^^

yureka01 2016-10-02 20: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식의 량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것만큼 지혜의 안목도 비례해서 늘어야 하는데 오히려 반비례되면 아주 곤란하거든요..포도 넝쿨같은 텍스트로 근사한 삶의 와인이 숙성되어 익어갔으면^^..

cyrus 2016-10-03 09:45   좋아요 0 | URL
삶의 와인, 탐나는 표현입니다. ^^

우마우마 2016-10-03 00: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도사의 독서법은 무척 따라해보고 싶네요! 아무래도 경전 공부에 특화된 거라는 생각은 들지만요 ㅎㅎ 음, 이건 다른 이야기지만, 웹에 흩어진 텍스트를 그렇게 많이 봐도 역시 책으로 묶인 것을 읽는 경험이 즐거운 것 같아요.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

cyrus 2016-10-03 09:49   좋아요 0 | URL
유행은 돌고 돈다는 말이 있듯이 필사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렇지만 공부 방법이라기 보다는 정신 치유 목적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인터넷의 정보 대부분은 출처가 불명확해서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꺼립니다. 아무래도 책에서 찾아보는 것이 더 믿을만하고, 오랫동안 기억하기 쉽습니다. ^^

파트라슈 2016-10-03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그사 정말 재미있게 본 드라마인데요. 윤은혜도 예쁘게 잘 나왔던 드라마인데 요즘 윤은혜 중국서 사고치고 다니는 것 같음.ㅎㅎ 오만석도 연기 좋았지요.

cyrus 2016-10-03 21:21   좋아요 0 | URL
이 드라마가 방영되기 시작했을 때 말이 많았었죠. 시작하기 전부터 미스캐스팅 소리까지 나올 정도였어요. 두 사람의 행보가 너무 달라졌어요. 윤은혜의 전성기 마지막은 커프1호인 것 같습니다. 국내에 복귀해도 궁, 커프 시절의 인기를 얻기 힘들 겁니다.

transient-guest 2016-10-04 08: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을꺼리가 많아진 시대와 그렇지 못했던 시대의 차이 (및 무수히 많은, 다른 삶의 방식과 자세까지)에서 오는 다른 독서방법의 차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경건하게 책을 대하고 천천히 읽고 암송하는 건 좋은 방법인데, 우리가 사는 시대의 다수에겐 조금 요원한 듯 합니다. 좀더 삶의 무게가 가벼워지는 시기가 오면 잘 정리된 서재에서 이런 독서도 해보고 싶네요.ㅎ

cyrus 2016-10-04 18:34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책이 팔리지 않는 세상에 책을 제대로 읽는 법을 기대하는 건 무리인 것 같습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