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으로 읽는 그리스 신화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아폴로도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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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는 서양인들의 인생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신화에 담겨 있는 온갖 유형의 이야기는 서양 예술의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해 왔다. 아폴로도로스의 《Bibliotheke(비블리오테케)》는 신화의 내용과 신화 속의 영웅들이 벌인 행동 및 사건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된 문헌이다. 특히 각기 다른 출전에 따른 이설들을 꼼꼼히 구별하여 주석으로 정리했고, 신과 영웅들의 계보를 수록하여 신화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아폴로도로스는 기원전 2세기에 활동한 아테네 출신의 문법학자로 알려졌다. 그가 남긴 문헌 제목이 ‘비블리오테케’, 우리말로 풀이하면 ‘도서관’이다. 소크라테스는 ‘문자는 진리가 아니라 사이비 진리일 뿐’이라며 생각의 문자화를 경계했다. 그러나 생각은 끊임없이 문자로 기록됐고 도서관은 진리의 보관소라는 신성한 장소가 되었다. 지금은 파괴되어 사라져버렸지만 ‘세상의 모든 책’을 정리한 곳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었다면, ‘세상의 모든 그리스 신화’를 정리한 책은 《비블리오테케》이다. 아폴로도로스가 인용한 고대 문헌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와 고대 그리스의 시인 헤시오도스의 《일과 날》 등이 있다.

 

그리스 신화가 다양한 형태로 우리나라에 소개됐지만,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위해 단편적인 이야기 묶음으로 편집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다 보니 원전의 묘사가 삭제되거나 윤색되어 흥미 위주의 신화 편집이 주류를 이루게 됐다. 그동안 우리는 《비블리오테케》와 같은 원전을 1차 문헌으로 삼아 후대에 편집된 2차 문헌으로 신화를 접했다. 이는 신화 체계를 이해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 대부분 사람은 신화를 ‘허위로 가득한 재미있는 이야기’, ‘상상력의 보고’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화 모음집을 만든 아폴로도로스와 고대 그리스인들은 신화 자체를 허구 아닌 진실이자 역사로 이해했다. 그래서 그리스 신화의 원전을 읽을 땐 신화를 고대 그리스의 세계관이자 사상체계로 봐야 한다. 신화를 재미로 보는 건 문제없으나 흥밋거리로 신화를 이해하는 태도와 고대 그리스인의 관점에서 신화를 이해하는 태도는 확실히 차이가 있다.

 

《비블리오테케》는 순수한 그리스 신화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문헌이다. 호메로스의 작품과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비하면 이야기가 몰입력 있게 전개되지 않는다. 아폴로도로스는 기존의 그리스 신화들을 두루 간추려 모아 정리했다. 그래서 《비블리오테케》에는 독자의 흥미를 이끄는 서사적 갈등 구조가 눈에 띄지 않는다.

 

가령, 아폴로도로스는 아르테미스(Artemis, 사냥의 여신)의 분노로 사슴으로 변한 사냥꾼 악타이온(Actaeon) 이야기를 무미건조하면서도 아주 간략하게 설명한다.

 

 

 

 

 

아쿠실라오스에 따르면 그렇게 죽은 것은 그가 세멜레에게 구혼하는 바람에 제우스가 노했기 때문이라고 하나 대부분의 작가에 따르면 그가 아르테미스가 목욕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여신이 당장 그를 사슴으로 바꿔버리고 쉰 마리나 되는 그의 개떼를 미치게 하자 주인인 줄도 모르고 그를 잡아먹었다는 것이다. (201쪽)

 

 

악타이온 이야기를 인상 깊게 본 독자라면 아폴로도로스의 문장을 보고 허전하게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설명에는 극적인 긴장감 자체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변신 이야기(Metamorphoses)》를 쓴 오비디우스는 길을 헤매던 악타이온이 불행하게도 아르테미스가 목욕하는 광경을 보게 되는 일촉즉발의 상황을 생동감 있게 묘사했다. 《변신 이야기》에서는 아르테미스가 저주를 담아 악타이온의 얼굴에 물방울을 뿌리는 장면이 나오지만, 《비블리오테케》는 그 결정적인 장면이 없다. 오비디우스는 신화 속 등장인물에게 질투나 선망 등 인간의 다양한 감정들을 부여하여 역동성을 강조했다면, 아폴로도로스는 그동안 알려져 있던 그리스 신화들을 모아 ‘지식’이라는 일관된 형태로 엮어냈다.

 

《비블리오테케》를 읽는 일은 독자가 신화를 저 높은 곳에 위치해 있을 뿐인 ‘신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삼라만상의 진리를 아우르고자 했던 인류의 야심이 묻어나는 지식의 보고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 이 책으로 서양문화의 기저를 흐르고 있는 신화의 정수를 뽑아낼 수 있다. 방대한 신들의 계보를 이해하는 일이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조급해하지 않고 깊이 생각하며 천천히 읽어 나간다면, 신화를 보는 시각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긴다. 신화는 ‘과거를 알기 위한 지식’이지만, ‘오늘날 알아야 할 상식’이 아니다. 신화는 하나의 시원에서 출발해 가지를 뻗음으로써 다양한 양식으로 발전했다. 가장 나중에 자란 가지 하나에 '상식’이라는 이름을 붙여졌고, 우리는 그것만 가지고 ‘신화’를 제대로 이해했다고 착각했다. ‘신화’라는 나무 전체를 보지 못한 채 나뭇가지 하나만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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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7-02-20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있었네요ㅎ
싸이러스님의 실천이 부럽습니다.
읽어야지~읽어야지 했는 책들이
기억속으로 까마득히..특히 어렵고 두꺼운 책들은 더더욱 미루게 되더라구요ㅎ
우선에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부터
읽어봐야겠네요^^
그리스로마신화는 진짜 오랫동안
공들여 읽을 가치가 있는 듯.
예전에 읽은 한호림의 <뉴욕에헤르메스가산다>에서보면
유럽의 길거리, 간판, 음악, 예술 등에
신들의 상징물이 있더라구요.
신화를 모르고서 유럽문화를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을까요^^;

cyrus 2017-02-20 18:42   좋아요 1 | URL
이윤기 씨가 번역한 <변신 이야기>와 어렸을 때 읽은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 시리즈만 보고, 신화를 어느 정도 이해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제가 무슨 계기가 있어서 원전 신화를 읽었는데요, 제가 큰 착각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신화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는 내용이 많았어요.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하는 것처럼 신화의 세계에 진입했는데, 열심히 읽어나가야겠어요. 북프리쿠키님이 댓글로 언급하신 신화 책도 참고하겠습니다. ^^

구름물고기 2017-02-20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니 아이디도 그리스와 관련있네요 어울리는 책인걸요 ㅎ

cyrus 2017-02-20 18:46   좋아요 0 | URL
제 닉네임의 발음 때문에 그리스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ㅎㅎㅎ 그리스를 좋아해서 cyrus라고 정한 건 아닙니다. ^^;;
 
다치바나 다카시의 서재
다치바나 다카시 지음, 박성관 옮김, 와이다 준이치 사진 / 문학동네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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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는 두 가지가 있다. 읽는 책과 소장하는 책이다. 책은 그 속에 담긴 내용이 중요하고 또 그것이 존재가치가 된다. 흔하지는 않지만, 책이라는 물체 자체가 소유주의 목적이 되는 경우도 있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일컫는 ‘애서가’와 구별해 이처럼 소장가치 높은 책을 모으는 사람을 ‘장서가’라고 한다. 책의 역사는 애서가와 장서가의 역사이기도 하다.

 

나는 책을 좋아하여 자주 서점에 들르는 편이지만 장서가는 못 된다. 장서가는 애서가와 달리 많은 장서와 함께 고서, 초판본, 저자 서명본 등 진귀한 책들을 갖고 있게 마련이니 말이다. 책을 좋아하다 보니 약간 무리를 해서라도 사들이는 버릇으로부터 지금도 자유롭지 못하다. 어렸을 때부터 멋진 서가를 가졌으면 하는 꿈을 꾸었다. 책이 좋아 책을 사다보니 자연스럽게 책이 쌓여가고 쌓여있는 책들을 바라보면서 그다음은 멋진 서가를 한 번쯤 그려보는 것이다. 사실 책이란 그 주인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면 한순간에 천덕꾸러기로 변해버리고 만다. 집에 책이 많다 보면 이사를 해야 할 때가 가장 고역이다. 그래도 책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책이 전해주는 말할 수 없는 큰 행복이 있기 때문이다.

 

웬만한 애서가라면 책꽂이에서 다치바나 다카시의 이름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터다. 일본의 저널리스트인 다치바나 다카시는 한마디로 책에 미친 사람이다. 하도 책을 많이 사는 바람에 아예 책만을 보관하는 ‘고양이 빌딩’을 따로 지었다. 부러운 이야기지만 모두가 다치바나처럼 살 수는 없다. 또한, 멋진 서가를 갖고 싶다고 해서 누구나 쉽게 서가를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서가란 단순히 책이 놓여 있는 곳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인의 모습이 투영된 책의 공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치바나는 서가를 들여다보면 서가 주인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보인다고 한다. 고대 로마의 문장가 키케로는 ‘책 없는 방 안은 영혼이 없는 육체와 같다’고 말했다. 다치바나는 키케로처럼 서재를 정리하고 나면, 자신의 집에 새로운 정신이 깃든 것처럼 느꼈을 것이다. 그의 영혼이 지식을 충만하지 못해 홀쭉했더라면 그의 서재는 살아 숨 쉬지 못했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서재》는 애서가와 장서가들을 매료시킬 만한 멋진 정보로 가득 찬, 책에 대한 책이다. 흔히 책에 관한 책은 좀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저자들은 바른 독서법을 알려주겠다며 속독법과 슬로 리딩, 초병렬 독서법 등 다양한 기술을 판매한다. 명문대 진입을 대비해 어려서부터 책을 읽어야 하며, 세상을 지배하는 0.1%의 비밀을 알기 위해 책을 읽어야 한다고 현혹하기도 한다. 이런 책에 관한 책을 쓰는 사람은 대체로 유명한 사람이자, 화려한 애서가들이다. 책을 다룬 책들은 대개 점잔을 부리는 경우가 많은데 《다치바나 다카시의 서재》는 전혀 그렇지 않다. 다치바나는 사소한 자기 고백에서 출발해 지금까지 몸으로 체득한 지적 자산들과 어디 가서 쉽게 접할 수 없는 책 뒷담화를 두루 섞어 냈다.

 

다치바나는 처음 문학에 관심을 두었으나 세계에 대한 철학적 인식을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독서의 방향이 바뀌었으며 그것이 결국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등 전방위적으로 넓어졌다고 말한다. 그는 문학을 거의 읽지 않는다. 국내에 다치바나의 존재감을 알리게 한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에 그 이유가 자세히 나온다. 잡지사 초년 시절 선배에 의해 문학만을 읽는 독서 행태를 지적받고 나서 논픽션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 이후로는 픽션의 세계가 논픽션에 비하면 얼마나 보잘것없는 지를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문학을 좋아하는 애서가 입장에서는 인간의 감정과 고뇌, 사랑을 다룬 문학을 외면하는(?) 그의 독서 편력을 잘 이해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다치바나 다카시의 서재》를 읽어보면 그의 지적 열망이 어린 시절의 문학 독서에서 내공이 쌓여 폭발하기 시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관심사가 다른 곳으로 이동해 간 것뿐이다. 그는 예전에 읽은 소설책도 고양이 빌딩 서재에 보관해두었다. 최신 보고서 속에 담긴 지식도 중요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되풀이하여 새롭게 읽는 책의 존재감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삶 자체가 ‘독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다치바나도 약간 허술하고,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호기심과 지적 욕구가 넘치는 그의 모습을 보면 고양이 빌딩 서재의 책 배열 방식이 체계적으로 되어 있을 거로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가끔 주제와 전혀 상관없는 엉뚱한 책이 서재에 꽂힌 경우가 있다. 다치바나는 그런 경우를 애서가의 결점이라고 보지 않는다. 분류가 잘못된 책이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그 책이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딘지를 언급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도 이해하지 못한 분야를 솔직하게 언급하기도 한다.

 

기본적으로 저는 소쉬르에 대해서는 그다지 소상히 알지 못합니다. 편의적으로 모아두었을 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건, 요컨대 서가는 그 소유자의 지적 편력의 단면이라는 점입니다. (416쪽)

 

사놓고도 한 번도 펼치지 못한 책들이 아주 많다. 그를 동경하면서 책을 사 모았던 독자 입장에서는 그의 말이 조금은 위안이 된다. 지적 욕구가 넘쳐도 어떤 주제건 아는 게 없어 뭘 읽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있다. 다치바나도 그런 상황을 한 번쯤은 겪었으리라. 그래서 그의 서재는 독서를 통해 자신의 관심사를 좁히고, 글을 쓰기 위해 고민한 흔적이 나타나 있다. 이 책들을 사기 위해 지불했던 돈은 땀의 결정체이기 때문에 그가 책을 접하면서 공부한 노력이 책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치바나의 서재에는 ‘의심스러운 책’들도 가득하다. 여기서 ‘의심스러운 책’이란 오컬트, 신비주의, 유사 과학 등 일반적으로 황당하면서도 거짓말 같은 내용을 소개한 것이다. 심지어 지하철 독가스 테러로 세계를 경악시킨 옴 진리교 관련 서적도 고양이 빌딩에 보관되어 있다. 그렇지만 다치바나는 ‘의심스러운 책’들을 그냥 재미로 읽을 뿐이다.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과도한 믿음에 빠지지 않는다. 비록 그 책들이 지적 영양분을 제공하기에 너무 부족한 것들이지만, 다치바나는 이런 책들도 거대하고도 복잡한 세상을 보여주는 일종의 지표로 여긴다. 종종 다치바나가 언급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서두처럼 ‘인간은 알고 싶어 한다.’ 그래서 다치바나는 이런 인간의 본능이 남아 있는 책의 세계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거로 장담한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다치바나 다카시의 서재》는 소수의 애서가와 장서가를 위한 책이다. 책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를 만나고자 하는, 책 욕심이 넘치는 특별한 사람들을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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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아의서재 2017-02-18 21:2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가끔 저에게 책을 잔뜩 넘기겠다고 하시는 지인들이 있는데..그럴때마다 전, 아파트 한 평을 늘여주신다면.. 기꺼이 받겠다고 말하곤 하죠. 책욕심은 늘 나지만, 이제 40을 넘기고나니 한편 소소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들긴 하고요. 그리고 암만 생각해도 서울이나 서울 근교를 떠날 용기도 나지않고 그렇다고 아파트 평수를 늘릴수도 없겠단 생각에 그저 도서관 옆 작은 평수의 아파트에서 사는 게 가장 좋을듯 합니다..ㅋ 제 한국집은 두개의 시립도서관을 옆 옆으로 끼고 있는 이유가 바로...여기에...ㅋㅋ

cyrus 2017-02-19 08:49   좋아요 1 | URL
이제 책 보관할 공간이 부족하니까 서평단 신청을 하지 못하겠더라고요. 저도 이사를 하게 되면 도서관과 거리가 가까운 곳으로 정하고 싶어요. ^^

꼬마요정 2017-02-18 23: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항상.. 책 놓을 공간과 책을 살 수 있는 능력이 갖고 싶었답니다... 책을 빨리 읽고 소화할 능력은 덤으로 갖고 싶구요. 이 생에서는 힘들 듯 합니다만. ㅜㅜ

cyrus 2017-02-19 08:50   좋아요 0 | URL
저도 요즘 책을 빨리 읽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걸 느끼고 있습니다. ^^;;

북프리쿠키 2017-02-18 23:2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책 욕심은 많지만
소장은 되도록이면 적게 추리고 싶네요
서재는 간소하고 단촐하게~
책 읽는 공간을 편의성이나 분위기를 중점적으로 제 색을 입히고 싶은 게 저의 소박한 바람입니다.
단 소장책은 그 누구보다 깊은 사유를 통해
수시로 집어들어 내 것으로 만들고 싶네요^^

cyrus 2017-02-19 08:52   좋아요 0 | URL
미래에 이런 책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책을 소박하게 보관하는 법을 소개하는 책이요. ^^

2017-02-19 09: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2-19 09:25   좋아요 1 | URL
이제 정신 차리고 치열하게 읽으려고요. 만약 제가 20대였을 때 《다치바나 다카시의 서재》를 읽었으면, 넓은 서재를 갖추고 싶은 부러운 마음이 들었을거예요. 그런데 저도 이제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동경보다는 남은 생에 책을 열심히 읽어야겠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

잠자냥 2017-02-19 11: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픽션의 세계가 논픽션의 세계에 비해 보잘것없다는 지은이의 의견에 저는 반대합니다! ㅎㅎㅎ

cyrus 2017-02-19 16:31   좋아요 3 | URL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치바나를 좋아해도 그 주장만큼은 반대합니다. 논픽션의 세계가 픽션의 세계보다 재미있고, 상상 초월하는 순간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아주 불쾌한 기억이지만, 최순실과 박근혜 게이트가 그런 경우죠. 그렇지만, 이것만 가지고 논픽션의 세계가 픽션의 세계보다 흥미롭다고 볼 수 없습니다. 픽션의 세계가 먼 훗날에 논픽션의 세계가 되곤 하는데, 전 두 가지 세계를 대립하는 관계로 보고 싶지 않습니다. 상호 연결하는 관계로 보고 싶어요. 아서 C. 클라크의 소설 속 내용이 현실에 나타나는 경우가 있듯이 픽션의 세계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픽션의 세계를 존중합니다. ^^

쉽싸리 2017-02-19 22: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빌려다 놨는데요, 고양이 빌딩 전면 모습이 없어서 대실망했어요...

cyrus 2017-02-19 23:46   좋아요 0 | URL
저도 컬러로 된 건물 전체 사진이 있을 줄 알았어요.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에 건물 전면 모습 사진 한 장이 있는데 흑백 사진입니다. 구글에 고양이 빌딩을 검색하면 사진이 나옵니다. ^^

꼼쥐 2017-03-02 16: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등 수상을 축하드려요~~^^

cyrus 2017-03-02 16:35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꼼쥐님은 교보문고에 리뷰를 작성하셔서 3등 수상하셨던데 축하드립니다. ^^
 
사유의 거래에 대하여 - 책과 서점에 대한 단상
장 뤽 낭시 지음, 이선희 옮김 / 길(도서출판)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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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다른 세계와 통하는 하나의 창이다. 색다른 경험을 간접적으로 다양하게 접할 수 있다. 현상을 타파하고 사유의 영역을 넓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독서이다. 읽는 행위가 단순히 보는 행위와는 다르다. 책은 우리 뇌리에 더욱 깊이 각인시켜 준다. 그래서 어떤 책을 읽고 크게 감명받았다면 그의 일생에 걸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게 되기도 한다. 사고하는 능력, 인생을 만드는 건 외부에서 주어지는 게 아니다. 스스로 자신만의 길을 선택해서 걸어가는 것이다. 책 속에 기록해 둔 진리의 흔적을 따라가서 읽어내는 것, 그것은 마치 우리가 잠시 여유를 갖고 길을 거닐며 사색하는 산책과 유사하다. 좀 깊이 생각하면 독서는 글을 매개체로 글쓴이의 ‘마음을 읽는 것’이고 자기 자신과 ‘대화를 하는 것’이다.
 
장-뤽 낭시는 독서를 통해 자기 자신과의 끝없는 대화를 나누고, 자기 생각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을 ‘거래(commerce, 교류)’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독서를 통한 ‘만남’은 우리 사유의 폭을 넓히고, 유연한 사고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타인(다른 독자)을 좀 더 포용할 수 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듯이 한 권의 책을 만나면서 자신의 미래가 바뀔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이 선호하는 책만 골라 읽는 편식성 독서의 문제점은 다른 책들이 독자에게 말 거는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결국, 이는 좁은 영역에 스스로 갇히는 우둔함을 자초한다. ‘자신만의 세계’에 도취해 본인은 불행하게도 전혀 이를 깨닫지 못한다. 사유의 거래를 거부하거나 피하는 인간은 자기만의 철옹성을 구축해 사유의 폭을 더 이상 넓히지 못하는 완고함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쯤에서 누구라도 ‘자신만의 세계’가 과연 무엇인지 진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기껏해야 자기가 속한 지리적 · 공간적 환경 속에서 보고 듣고 읽고 이를 토대로 느끼고 판단하고 상상하는 범주가 전부다. 지극히 제한적이다. ‘자신만의 세계’를 벗어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책과 독자들을 지속적으로 만나려면 서점에 가야 한다. 지식의 전파와 깊은 사유의 생성 모두 서점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서점에서는 여전히 책이 넘쳐나고 도서 전문 강좌나 자발적 독서 모임도 많아졌다. 이 현상만 가지고, 우리나라 독서 문화가 정착되었다고 볼 수 없다. 또 우리 사회가 지식이 부족해서 이렇게 된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공감하며 소통하면서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이끄는 무언가가 없기 때문이다. 암울하게도 독자들을 유혹하는 서점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다.
 
독자의 눈길을 받지 못한 책은 ‘닫힌 책’이다. 즉 읽히지 않은 책이다. 이것은 책이 아니다. 책은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독자가 ‘닫힌 책’을 열어야 한다. ‘열려라, 참깨!’ 당연히 안 열린다. 이 주문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되고, 너무 허술하기 짝이 없는 패스워드다. 책 자체가 펼쳐질 뿐이지 그 속에 담긴 내용이 독자를 향해 펼쳐지지 않는다. 우리가 암만 ‘독서는 넘나 좋은 것, 책을 읽읍시다!’라는 진부한 주문을 강요하듯이 외쳐 봐도 책 읽는 사람이 늘어나지 않는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책이 펼쳐지겠나. 알리바바는 동굴 속에 숨겨진 보물이 궁금해서 패스워드를 정확히 기억해내 동굴을 여는 데 성공했다. 알리바바처럼 호기심이 많고, 어떤 것이라도 궁금해 알아보려고 하는 독자가 많아야 한다. 그런 독자에게 책은 항상 펼쳐져 있다. ‘열린 책’은 시공을 초월해 자유롭게 다른 세계와의 만남을 연결해 준다. 알리바바형 독자는 자신에게 유익한 지식이라는 보물을 건져내기 위해 갖가지 세계와의 경험을 쌓으면서 사유의 거래를 시도한다. 사유의 거래를 끊임없이 갈구하는 독자들이 모여서 활발하게 거래를 시도하는 곳이 ‘알라딘 북플’이다. 이곳에 독자들이 매일 리뷰를 쓰며 자신과의 대화 또는 다른 독자들과 대화를 시도한다. 양파를 까듯 끝이 없는 즐거운 사유 거래의 연속이다. 이게 꽁꽁 언 채 있는 답답한 세상을 여는 하나의 방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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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소리에 대하여
해리 G. 프랭크퍼트 지음, 이윤 옮김 / 필로소픽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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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의도적으로 상대를 속이려는 게 아니라면 말과 글을 제대로 가리는 게 배운 사람의 도리다. 애써 말과 글을 깨우치는 목적이 그렇다. 어설픈 지식을 뽐내고자 함이 아니다. 사리를 제대로 분별하기 위함이다. 이제 학사 학위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을 만큼 배운 사람이 차고 넘친다. 그런데 말과 글의 오용이 차고 넘쳐 외려 사람을 짐승보다 못하게 만드는 세상이 되었다.

 

 

 

 

 

가장 저급하게 오용된 말과 글은 한마디로 ‘개소리(Bullshit)’라고 할 수 있겠다. 국어사전에서는 개소리를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조리 없고 당치 않은 말’을 저속하게 부르는 말로 정의하고 있다. 형태와 소리는 글이고 말이겠으나 그것은 개 짖는 소리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철학자 해리 G. 프랭크퍼트(Harry Gordon Frankfurt)는 개소리와 거짓말은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개소리가 얼마나 위험한 말인지 진지하게 분석한다. 그가 쓴 책 《개소리에 대하여》의 요점은 진리 또는 진실에 무관심한 사람일수록 헛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정규재 한국경제신문 주필이 운영하는 인터넷 팟캐스트 ‘정규재 TV’와 단독 인터뷰를 한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 사과에 대해서 이런 충고를 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그냥 사과를 하면 안 된다. 그냥 잘못해도 버텨야 한다.”[1]

 

 

대국민 담화를 통해 사과한 대통령에게 ‘잘못해도 버텨야 한다’라고 충고한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대통령은 순진하게 이 말 한마디를 믿고 있다. 그리고 검찰과 특검 수사로 밝혀진 명백한 증거가 있음에도 모든 범죄행위를 부정했다. 모든 탄핵사유를 인정 못 하는 것은 물론이고, 촛불 민심 자체도 부정하고 나섰다.

 

 

“국민들께서 응원을 해주시는 것에 대해서 제가 힘들지만 그 힘이 납니다.”

 

“오붓한 분위기에서 즐거운 명절 보내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2]

 

 

대통령이 자신을 응원해준다고 믿는 ‘국민’이란 누굴까? 설마 돈 받고 친박 집회에 모인 박사모?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 2016년 11월부터 대통령의 지지율은 한 자릿수로 떨어졌다. 아무리 무너져도 쉽게 무너지지 않은 유일한 희망인 ‘콘크리트 보수층’이 건재해도 대다수 국민의 뜻을 철저히 무시하는 대통령의 인식은 문제가 있다. 특히 명절 인사는 아예 가관이었다. 석 달 동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사회가 혼란스럽고 경제마저 팍팍해서 국민은 분노하는데 대통령은 천하 태평한 소리를 했다. 이 판국에 국민의 ‘분노’를 한가하게 ‘걱정’과 ‘루머’로 치부해 버리는 상황인식은 정말이지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정말 심각하게도 대통령은 현상을 분별해서 인지하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정규재 주필은 대통령이 ‘여전히 총기가 있는 분’이라고 아부성 발언을 했는데, 그의 말은 거짓말이라기보다는 대통령의 ‘개소리’를 대단하게 받아들이거나 쉽게 분간하지 못하고 있다. 거짓말은 의도적으로 진실을 왜곡한다. 정 주필은 크게 떨어질 대로 떨어진 대통령의 인지도를 다시 올리기 위해서 직무가 정지된 대통령이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을 직접 전달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이 거짓말이라고 해서 크게 문제 삼고 싶지 않다. 다만, 대통령의 직무유기 자체를 인정하지 못하는 정 주필의 태도가 훨씬 심각하다. 그는 대통령의 ‘개소리’를 너그럽게 받아들인다. 개소리하는 사람이나 개소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나 둘 다 공통으로 자기반성의 능력이 약하다.

 

프랭크퍼트는 사람들은 거짓말에 분노를 일으키거나 비판을 하는 반면에 개소리는 관대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저자는 사람들이 개소리를 거짓말보다 관대해지는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이것을 우리 독자들을 위한 연습문제로 남겨뒀다. 사실 나는 거짓말과 개소리를 구분하는 프랭크퍼트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실에 무관심하거나 진실 앞에서 미적거리는 반응이 거짓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똥이니 된장인지 구분하는 아이들도 개념과 상식을 집에 놔둔 채 내뱉는 공인의 개소리에 분노할 줄 안다. 그래서 우리는 어이없고, 주먹을 부르는 개소리를 ‘망언’이라고 한다. 이런 상황이 정치 분야에만 있겠는가. 양심을 저버리면서까지 불편한 진실 앞에 눈감은 언론인과 지식인들, 장병이 된 대한민국 청년들을 ‘나라의 아들’로 치켜세우면서 병들거나 다치면 온갖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회피하는 군대. 더 열거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1] [2] 다섯 가지로 추려본 박 대통령 인터뷰 ‘문제의 발언’ (JTBC, 2017년 1월 26일)

 

※ 글 제목의 유래 : “야! 개 짖는 소리 좀 안 나게 하라!” (링크 참고: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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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17-02-02 15: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발 다음엔 말과 글을 바로 쓸 수 있는 사람이 국가 원수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cyrus 2017-02-02 19:19   좋아요 0 | URL
말을 똑바로 하고, 글을 잘 쓰고, 이 언어들을 실천으로 잘 옮기는 국가 원수를 보고 싶습니다.

캐모마일 2017-02-02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제가 요즘 고민하는 문제였고 전에 한번 회원분의 서평을 읽고 넘어갔는데, 오늘은 가려운 등을 누가 긁어준 기분이 듭니다. 그만큼 제목과 서평에 공감이 가네요. 요즘 시국은 두말할 것도 없고 개인적인 주변에서 왜 이렇게 사람들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다 아는 것인양 두루뭉술하게 말하고, 진짜 자기가 그렇게 믿어서 말하는건지 임시변통으로 둘러대는건지 사람들과 대화할 때 답답한 적이 많아서

캐모마일 2017-02-02 1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이럴까 안타까웠습니다. 스스로도 많이 돌아보게 됐구요. 주제가 시국과 어울리고 개인적으로도 놀랐습니다. 좋은 서평 읽고 갑니다.

cyrus 2017-02-02 19:25   좋아요 2 | URL
캐모마일님의 심정을 이해합니다. 밖에 나가면 개소리를 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죠. 특히 정치나 페미니즘을 주제로 대화를 나눠 보면 답답한 사람들을 보게 되죠. 여기 온라인 공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역시 진리를 알고 있는 것처럼 글을 썼을지도 모릅니다. 누군가가 제가 잘못한 사실을 알린다면 그 잘못을 인정하여 바로 잡고 싶습니다. 온라인 공간에서는 이런 대화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해피북 2017-02-02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순실이 억울하다며 고성을 지르는거나 아직까지도 자신을 지지해주는 국민이 있다고 철썩 같이 믿고 있는 대통령이나 사람의 마음이란게 얼마나 단단하면 저렇게까지 버티고 할 수 있는지 참 대단하단 생각이 드는 요즘입니다. 요즘 어른들은 툭하면 최순실도 그렇게 뻔뻔하게 하고 사는데 너희는 왜 그렇게 못하니 좀 세상을 뻔뻔하게 살어 라는 말씀 자주하셔요. 그래서 우스겟소리로 모든 이야기는 순실이로 끝난다고 하죠. 무튼 저도 시원한 글 잘 읽고갑니다^~^

cyrus 2017-02-02 19:51   좋아요 0 | URL
더 웃긴 건 여자 배구 선수가 올스타전에서 최순실 패러디했다고 그녀를 ‘좌빨‘이라고 비난한 사람들입니다. 그 선수는 최순실 패러디를 자발적으로 준비한 것이 아니라 올스타전을 주관한 배구연맹이 선수에게 하라고 지시했을 뿐입니다. 그냥 웃고 넘기면 될 일을 이념의 색안경으로 보는 사람들이 정말 어이가 없습니다. 개소리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은 것 같아요. ^^;;

2017-02-02 19: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2-02 19:59   좋아요 0 | URL
둘 다 나쁘지만, 그래도 가장 나쁘고 위험한 부류가 후자입니다. 기회주의자들입니다.

꼬마요정 2017-02-02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철판입니다. 반성하고 자중하지 않아 다행입니다. 한 푼어치의 동정도 아깝습니다. 제가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인 줄도 몰랐습니다ㅠㅠ

cyrus 2017-02-03 12:33   좋아요 0 | URL
네. 죗값을 받아도 용서하고 싶지 않습니다.

레삭매냐 2017-02-03 16: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지부조화와 자기합리화를 원없이 보고 있다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나요.

비정상이 정상을 대신하는 현실이 초현실적입니다 정말로.

cyrus 2017-02-03 17:28   좋아요 0 | URL
비정상적인 생각과 언행을 하는 지도자를 여전히 믿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초현실적입니다. 가면 갈수록 세상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비판이란 무엇인가? 자기 수양 미셸 푸코 미공개 선집 1
미셸 푸코 지음, 오트르망 외 옮김 / 동녘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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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은 인간의 근본 문제를 탐구한다. 그러나 급격한 세태의 변화 속에서 인문학은 현실에 개입할 수 있는 학문적 힘을 잃어가고 있다. 프랑스는 모든 학문을 철학으로 대접한다. ·고교에서 철학 과목을 가르치고 대학입학을 위해선 종합적 사고력을 측정하는 바칼로레아(baccalauréat)’를 치러야 한다. 여기서 출제되는 철학 문제는 그 격조와 높은 수준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으며 그해 국민적 관심사가 된다. 우리나라의 교육은 이런 흐름과 여전히 동떨어져 있다. 아직도 암기 위주의 주입식 교육이 주류다. 자율적, 비판적 사고 훈련이 충분하게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인터넷 공간에 의견과 주장은 넘쳐나지만 음미할 만한 깊은 글은 보기 힘들다.

 

성역과 금기 없는 비판과 치열한 논쟁은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절대적인 요소들이다. 비판의식은 정확한 논점과 논리의 바탕 위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것에서 시작된다. 우리 사회가 최소한의 대화 가능성마저 잃어버린 채 극단으로만 치닫고 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전혀 들으려고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고 자기주장을 되풀이하면서 무기의 선명도만 높이고 있는 형국이다. 이렇게 크고 높은 목소리들만이 득세하게 된 데에는 지식인의 침묵이 주범이라고 하지만, 그 침묵을 만들어낸 풍토 또한 돌아볼 필요가 있다. 현실은 자꾸 대답을, 아니 양자택일을 강요한다.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전문지식을 활용해 사회발전에 기여할 방안을 모색한다. 그들이 사회의 각종 문제에 대처하고, 직접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집단화해서 움직인다는 점에서 이들은 지식권력으로 규정될 수 있다. 그러나 지식인들의 전문적 지식이 집권자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된 경우가 많았고, 집권자들을 등에 업고 형성된 일부 지식인 집단이 부당한 물리적 권력을 행사하는 주체가 되었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각 분야에서 전문지식을 가진 지식인들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진다. 이들이 사회의 여타 권력과 결탁하지 않고 긴장 관계를 이루며 공존할 때 사회는 이들의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합리적 논의를 거쳐 발전한다.

 

자기 뜻에 따라 타자의 행동을 통제하는 직간접적 힘을 권력이라고 할 때 지식이 직접 권력 주의라는 옷을 입게 된다. 권력 주의는 통치를 공고하기 위한 기술이다. 권력에 대하여 맹목적으로 복종하거나 권력을 휘둘러 남을 억누르려고 하는 사고방식이다. 미셸 푸코는 1978년에 진행된 강연(비판이란 무엇인가)에서 통치받지 않기 위한 기술’, 비판적 태도의 의미를 재정립하여 그 필요성을 강조한다. 푸코가 정의한 비판적 태도는 물리적 권력에 저항함으로써 대중들의 힘을 통해 반사적인 대항권력을 형성하는 방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푸코의 권력 개념은 국가 권력이나 특정한 무엇으로 환원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푸코는 현대인이 보이지 않는 권력에 의해 온통 결박되어 있어서 스스로 자신을 규율하기에 이른다고 봤다. 그러므로 현대인의 삶을 규정하는 일상적인 권력은 통치 체제에 순응하게 한다

 

우리는 표면적으로 자유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자유롭지 않다. 이를 깨닫기 위해서 미세한 권력의 영향력에 길들어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스스로 교정해야 한다. 이 말을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아테네의 델포이 신전 대리석 벽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는 글귀를 떠올리면 된다. 이 글귀는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알아서 자만에 빠지는 것을 피하도록 해주는 계몽의 도구로 자리 잡았다. 그렇지만 푸코는 이 글귀의 의미가 과대평가되는 바람에 정작 자기 배려(돌봄)’의 의미가 사라졌다고 지적한다. 자기 배려는 자신을 사유하는 존재로서 간주하여 자신뿐만 아니라 자산과 관계된 타인, 더 나아가 사회 전체를 분석하는 것이다. 플라톤이나 명상록의 저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의 고대 그리스 · 로마 철학자들은 자신의 실체를 인식하고, 성찰해 자신을 수양하는 실천적 자세를 추구했다.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려면 엄격한 자기 수양이 필요하다. 자기 수양은 비판의 기능, 투쟁의 기능이 있다. 내가 배운 지식이 잘못되었으면 인정하고, 폐기해야 한다. 또 우리를 위협하거나 억압하는 권력에 평생 맞서 싸울 수 있도록 투쟁의 힘을 길러야 한다.

 

푸코의 비판적 태도자기 수양개념은 진실 된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생각하는 힘이다. 푸코는 자기 수양을 적극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방식으로 글쓰기를 소개했다. 자기 수양을 위한 글쓰기는 자신을 혹독하게 다스릴 수 있는 성찰의 글쓰기다. 자기 수양이 결여된 글은 변명으로 변질한다. 민주주의는 부단한 자기비판과 수정을 거칠 때 살아남는다. 도덕도 필요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정직성진실 된 삶을 살아가는 태도이다. 정직성과 진실 된 삶은 자기 인생을 떳떳하게 사는 데 관련이 있다. 자신을 잘 알고, 자신의 문제점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만이 비판할 자격이 있다.

 

 

 

 

* 도대체 무슨 말일까??

 

눈이 자기 자신을 보기 위해서는 다른 눈 속에서 자신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 안에서 하지만 타자의 눈의 형태하에서 그런데 거기서 타자의 눈동자 내에서 그는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2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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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7-01-18 18: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국민들이 국가 권력을 바꿔 본 나라....네 철학의 힘이죠...
철학을 자신을 돌아보게 하죠...

박사모에서 철학이 발견되기 힘든 이유기도 하죠..

cyrus 2017-01-19 13:11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박사모는 생각 자체가 없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아무 2017-01-18 18: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심리정치>에서 푸코의 자기 수양을 언급한 부분이 있는 거 같아 찾아보니 여기서는 ˝자아 기술˝이라고 번역한 것 같아요. 출처가 같은 책인지는 모르겠지만..(미주가 영어가 아니라 전 해석할 수 없습니다ㅠ) 성역과 금기 없는 비판이라는 대목이 심상치 않게 보입니다..

cyrus 2017-01-19 13:13   좋아요 1 | URL
아직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푸코 강연집이 꽤 있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올해에도 미공개 선집 두 권이 나올 예정입니다. <심리정치>를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어요. ^^

시이소오 2017-01-18 19: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벌써 읽으시다니
사이러스님은 정말 꾸준히 읽고 쓰십니다. ^^

이 리뷰를 읽으니 선물해주신 책 빨리 읽고 싶어요 ^^

cyrus 2017-01-19 13:15   좋아요 0 | URL
1월 초에 이 책을 읽기 시작했어요. 분량이 얇아서 만만히 봤는데, 생각보다 읽는 데 오래 걸렸습니다. 천천히 읽고, 관심 있는 내용을 반복해서 읽으니까 대충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 있었어요. ^^

[그장소] 2017-01-18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표 ㅡ 눈부처 ㅡ라고 흔히 표현하는 상태
타인의 눈동자에 자신의 눈동자가 비치는 조건 ㅡ 마주보기 ㅡ그걸 말하는거 아닌가요?
일테면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보기 ...랄까? ㅎㅎ

cyrus 2017-01-19 13:18   좋아요 1 | URL
저도 그렇게 이해했어요. 사실 제가 이해가 되지 않은 문장이라고 말한 것이 ˝자기 자신 안에서 하지만 타자의 눈에 형태 하에서 그런데 거기서 타자의 눈동자 내에서 그는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다˝였어요. 문장 안에 ‘하지만‘과 ‘그런데‘가 같이 있어서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웠어요. ^^;;

[그장소] 2017-01-19 15:56   좋아요 0 | URL
하지만 ㅡ이 접속사 하지만이 아닌 , 하는 ㅡ행위의 동사 , 로 연결된게 아닐까 ..그렇게 읽으면 ? ㅎㅎㅎ

박람강기 2017-01-18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시권력을 극복하려는 푸코의 마지막 자구책이었죠..현대에서도 곱씹어볼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cyrus 2017-01-19 13:19   좋아요 0 | URL
요즘 돌아가는 세상을 생각하면 이 책이 나오길 정말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통치받지 않기 위한 기술’이라는 개념이 언급된 내용이 좋았습니다.

2017-01-18 2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1-19 13:25   좋아요 0 | URL
오늘 아침에 접한 소식에 실망했습니다. 증거가 널려 있는데도 죄로 인정하지 않는 결과가 반복된다면 기업인의 도의적 책임을 제대로 물을 수가 없습니다.

우민(愚民)ngs01 2017-01-19 13:38   좋아요 0 | URL
사법부의 독립이 중요하지만 개혁이 우선이라는 사실을 판증하는 기각판결이었습니다. 제3자인 외국에서 바라보는
대한민국의 현실이
그동안 지적했던 기득권 엘리트들의 부패 카르텔을 없애지 않는한
대한민국의 부패는
반복될 것입니다.
지금 인터넷에서 조판사에 대한 인신공격과 박사모의 지지선언을 보니
같은 사실 상황으로 극단적인 이분적 논리에 빠져 버린 대한민국의 현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진실을 조작 호도하는 세력은 반드시 척결해야 할 대상입니다.

oren 2017-01-18 22: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스로 인용해 주신 대목의 핵심은, 제 판단으로는, 결국 ① ‘자기 자신 안에서‘ ② 하지만 ‘타자의 눈동자 내에서‘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이 대목을 보면서 저는 미셀 푸코의 주장이 아담 스미스가 말했던 ‘가슴 속의 동거인‘과도 얼핏 닮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 * *
가슴 속의 동거인(同居人), 내부 인간, 우리 행위의 재판관 및 조정자(調整者)

그것은 이성(理性), 천성(天性), 양심, 가슴 속의 동거인(同居人), 내부 인간, 우리 행위의 재판관 및 조정자(調整者)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행복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할 때마다 우리 내심의 가장 몰염치한 격정을 향하여 깜짝 놀랄 정도의 큰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소리치는 것은 바로 이 사람이다. 즉, 우리는 대중 속의 한 사람에 불과하고, 어떠한 점에 있어서도 그 속의 다른 어떠한 사람보다 나을 것이 없으며, 우리가 그처럼 수치(羞恥)를 모르고 맹목적으로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우선시킨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분개와 혐오와 저주의 정당한 대상이 될 것이라고, 우리가 우리 자신들에 관련된 모든 것이 실제로는 사소한 것이라는 사실을 배우는 것은 오직 이 중립적 방관자로부터이고, 이 중립적 방관자의 눈에 의해서만 자애(自愛)가 빠지기 쉬운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을 수 있다. 관용의 적정성과 부정(不正)의 추악성, 우리 자신의 큰 이익보다 다른 사람들의 더 큰 이익을 위하여 우리 자신의 그것을 양보하는 것의 적정성과, 우리 자신의 최대의 이익을 얻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가장 사소한 이익까지 침해하는 행위의 추악성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바로 이 공평무사한 중립적 방관자이다.(253쪽)
 - 아담 스미스, 『도덕감정론』中에서

cyrus 2017-01-19 13:28   좋아요 2 | URL
oren님이 푸코의 책을 읽어보시면 정말 마음에 드실 겁니다. 자기 수양 개념이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정신과 연관성이 있습니다. 이 책을 읽은 후에 <명상록>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qualia 2017-01-19 13: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 박스 안의 인용문은 비문인 듯합니다. 너무 원문에 얽매여 번역을 서툴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대략 그 뜻이 무엇인지 감은 옵니다만, 철학적 저작은 문구 하나하나, 글자 하나하나가 정밀한 의미를 담고 있기에, 해서 약간 어긋나게 독해하고 번역하면 원뜻에서 빗나갈 수 있기 때문에 조심스러워집니다. 저 번역문에 해당하는 원문을 아래에 옮겨놓겠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Et cette connaissance, cette connaissance ontologique de soi en tant qu‘âme, elle se fait, au moins dans certains textes et en particulier dans l‘Alcibiade, sous la forme de la contemplation, de la contemplation de l‘âme par elle-même, avec la fameuse métaphore de l‘œil : comment est-ce que l‘œil peut se voir lui-même ? La réponse est apparemment très simple et, en fait, elle est très compliquée, car l‘œil, pour se voir lui-même, Platon ne dit pas : il suffit qu‘il se regarde dans un miroir; il faut qu‘il regarde dans un autre œil, c‘est-à-dire dans lui-même, mais pourtant dans lui-même sous la forme de l‘œil de l‘autre, et là, dans la pupille de l‘œil de l‘autre, il va se voir lui-même, car la pupille sert de miroir. Et de la même façon l‘âme, se contemplant elle-même dans une autre âme ou dans l‘élément divin de l‘autre âme qui est comme sa pupille, se verra elle-même et se reconnaîtra comme élément divin 24.

cyrus 2017-01-19 13:30   좋아요 1 | URL
제가 밑줄 친 문장이 어설프게 느껴졌습니다. 원문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북프리쿠키 2017-01-20 11: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터넷 공간에 의견과 주장은 넘쳐나지만 음미할 만한 ‘깊은 글’은 보기 힘들다˝

무척 공감가는 부분입니다.
그저 센스있는 말장난이 대접을 받는 공간이죠.

싸이러스님이 읽는 책은 아직 제가 읽어보기엔 엄두가 안나네요..ㅠ
언젠가는 저도 내공이 쌓이면 따라가겠습니다 ㅎㅎ

cyrus 2017-01-20 11:59   좋아요 1 | URL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저처럼 각 잡고 너무 진지한 글은 재미없게 느껴지는 건 사실입니다. 제가 예전에 쓴 글을 다시 보고 싶지 않아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