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통역사는 영국의 작가 코난 도일(Conan Doyle)이 쓴 단편소설이며 셜록 홈즈의 회상록(The memoirs of Sherlock Holmes)에 수록되어 있다. 이 작품에 셜록 홈즈의 형 마이크로프트 홈즈(Mycroft Holmes)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 셜록 홈즈의 회상록(엘릭시르, 2016)

* 셜록 홈즈의 회고록(코너스톤, 2016)

* 주석 달린 셜록 홈즈 2(현대문학, 2013)

* 셜록 홈즈의 회상록(문예춘추사, 2012)

* 셜록 홈즈의 회상(시간과공간사, 2002)

* 셜록 홈즈의 회상록(황금가지, 2002)

    

 

 

마이크로프트는 홈즈보다 일곱 살 많고, 홈즈 본인이 자신보다 추리력과 관찰력이 뛰어나다고 말할 정도로 비범한 인물이다. 홈즈는 왓슨(Watson)에게 친형이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면서, 형을 기괴한 사람 또는 특이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디오게네스 클럽은 런던에서 가장 기괴한 클럽이고, 형은 가장 기괴한 사람 축에 들지.”

 

(주석 달린 셜록 홈즈 2중에서, 311~312)

 

 

 디오게네스 클럽은 런던에서 가장 특이한 클럽이고 마이크로프트 형 또한 아주 특이한 사람이지.”

 

(셜록 홈즈의 회상중에서, 정태원 번역, 279~280)

 

 

이 문장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The Diogenes Club is the queerest club in London, and Mycroft one of the queerest man.”

    

 

‘queerest’‘queer’의 구어이다. ‘기괴한’, ‘특이한이라는 뜻을 가진 형용사이지만, 남성 동성애자를 가리키는 속어이기도 하다. 홈즈 시리즈의 화자는 왓슨이다. 작품 속에서 왓슨은 홈즈가 해결한 사건들을 기록하여 책을 펴내는 작가이다. 그러므로 홈즈가 대화중에 꺼낸 ‘queerest’는 왓슨이 글을 쓰면서 표현한 단어일 수 있다. 그렇다면 홈즈 또는 왓슨은 ‘queerest’동성애자와 무관한 의미로 썼을까?

 

 

주석판(주석 달린 셜록 홈즈 2》)‘queerest’에 대한 학자의 견해를 인용한다. 그레이엄 로브라는 학자는 1894년에 이미 ‘queerest’는 속어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리스인 통역사18939<스트랜드 매거진(The Strand Magazine)>에 발표되었다. 1895년에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는 동성애 혐의로 기소되어 체포되었고, 2년 강제노역형을 선고받았다.

 

와일드는 1891년에 스무 살의 옥스퍼드 대학생 앨프레드 더글러스(Alfred Bruce Douglas)를 만나 사귀었다. 더글러스의 아버지인 퀸즈베리 후작(Marquess of Queensbury)은 아들의 비행에 못마땅했으며 두 사람의 관계를 눈치챘다. 결국 후작은 ‘snob queer(속물 동성애자)’라는 표현을 써가면서 그를 공개적으로 비난했고, 명예훼손죄로 고소했다. 이로 인해 와일드는 명성뿐만 아니라 가족과 전 재산까지 잃어버렸다.

 

    

 

 

 

 

 

 

* [절판] 페터 풍케 오스카 와일드(한길사, 1999)

    

 

 

주석판은 그레이엄 로브의 견해를 인용하면서 퀸즈베리 후작이 1894년에 와일드를 비난했다고 언급한다. 그러나 와일드가 퀸즈베리 후작의 비난으로 인해 동성애 혐의를 받은 연도는 1894년이 아니라 1895년이다. 와일드의 생애 전반을 소개한 오스카 와일드(한길사)에는 퀸즈베리 후작이 와일드를 ‘sodomit’의 오자인 ‘sondomit’라고 부르면서 비난했다는 내용이 있다. ‘sodomit’남색가를 뜻하는 독일어 단어이다. 오스카 와일드를 쓴 저자가 독일인이라서 영국인 후작이 ‘sondomit’를 사용했다는 내용을 그대로 믿기 어렵다. 영국 출신 후작이 ‘sodomy(남색가를 뜻하는 영단어)를 놔두고, 왜 틀린 철자의 독일어 ‘sondomit’를 써야만 했을까? 그 점이 궁금하다.

 

다시 홈즈 이야기로 돌아가서, ‘queerest’로 인해 홈즈 연구가들은 홈즈 형제의 성 정체성에 대해 여러 가지 가설을 제기했다. 홈즈를 여성으로 보는 사람이 있고, 홈즈가 동성애자라서 여성을 싫어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1971년에 <셜록 홈즈의 성적 모험>이라는 제목의 소설이 나왔는데, 여기에 나오는 홈즈 형제와 왓슨 모두 동성애자이다.

    

 

 

 

 

국내에 오스카 와일드의 평전이라고 할 만한 책이 없다. 한길로로로 시리즈오스카 와일드는 평전 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그럼에도 무언가 허전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와일드의 삶과 문학 세계를 반 정도 축약해놓은 듯한 느낌이 든다.

 

 

 

 

 

 

 

 

 

 

 

 

 

 

 

 

 

 

* [품절] 플로랑스 타마뉴 동성애의 역사(이마고, 2007)

* [품절] 도미니크 페르낭데즈 가니데메스 유괴(수수꽃다리, 2004)

 

 

 

와일드의 동성애를 비중 있게 분석한 책도 많지 않다. 동성애의 역사(이마고)가니데메스 유괴(수수꽃다리)는 서양 문학과 예술에 나타난 동성애 코드를 시대별로 정리한 책이다. 동성애의 역사에 따르면 와일드가 동성애 혐의를 받기 전에 그가 동성애자라고 믿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사람들은 그가 (남성이 표현하는) 여성화된 미학이 무엇인지 행동으로 보여주기 위해 동성애자인 척 연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니데메스 유괴를 쓴 프랑스의 작가 도미니크 페르낭데즈(Dominique Fernandez, 우리나라에선 생소한 이름이지만, 콩쿠르 상을 받은 중견 작가이다)는 와일드의 동성애 성향을 기성 사회에 저항하는 최선의 방법이었다고 해석한다. 우리나라에선 오스카 와일드는 동화 작가로 많이 알려져 있다. 이러한 인식 때문인지 그가 냉소적인 문장으로 삶을 통찰했던 촌철살인의 면모가 크게 주목받지 못한 듯하다. 또 우리나라에 성소수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남아 있어서 그런지 동성애자 작가 오스카 와일드보다는 동화작가 오스카 와일드를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동성애 코드를 완전히 떼어내면서 와일드의 문학 세계를 본다는 건, '문호'로서, 또 한 '인간'으로서 그를 존중하지 않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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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십 걸(Gossip Girl)>은 맨해튼의 사립 고등학교에 다니는 재벌 2세들의 사랑과 삶의 방식을 보여주는 미국 드라마다. 2003년에 출간된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며, 2007년부터 2017년까지 총 6개의 시즌으로 방영되었다.

 

 

 

 

 

 

 

 

 

 

 

 

 

 

 

 

 

 

 

 

 

 

 

 

 

 

 

 

 

 

 

* 세실리 본 지게사 《가십 걸》 (황매, 2005, 2008)

* 캐서린 하킴 《매력 자본》(민음사, 2013)

* 앤디 자이슬러 《페미니즘을 팝니다》(세종서적, 2018)

 

 

 

‘가십 걸’은 극 중 재벌 2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연재되는 익명의 인터넷 홈페이지 운영자이다. <가십 걸>의 주인공은 좋은 학교에 가고, 명품을 사 모으고, 멋진 남자들과 연애 끝에 결혼에 이르는 젊고 진취적인 여성이다. <가십 걸>은 이야기가 탄탄한 드라마는 아니다. 이 드라마는 형식 자체가 연예인들의 온갖 사생활을 전달하는 할리우드 연예 뉴스와 같다. 이야기 이외에 ‘소비 욕구’를 불러일으키며 시청자들의 관심을 이어가고 있다. 극 중 여배우들의 옷이나 장신구는 PPL(Product Placement, 간접 광고)이다. 이야기를 떠나 드라마 속 인물들의 패션 자체는 화젯거리가 된다. 10대, 20대 여성층들은 <가십 걸>의 주 시청자이면서 가장 충성스러운 소비자이다. 소비를 통해 자아실현을 추구하는 여성의 생활방식을 그린 <가십 걸>은 화려한 상류층 여성의 이미지만 보여주고, 여성들이 직면하는 현실적인 문제를 가린다.

 

페미니즘은 종종 여성을 위한 자기계발의 한 양상으로 오해받곤 한다. <가십 걸>에 열광한 젊은 여성들은 기존 페미니즘이 비판했던 외모 가꾸기 등을 스펙의 한 부분으로 여기고 ‘매력 자본(Honey Money)을 늘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한다. 영국의 사회학자 캐서린 하킴(Catherin Hakim)은 아름다운 용모, 건강미와 활력 등을 ‘매력 자본’이라고 규정했다. 사회, 문화, 경제적 자본처럼 외모도 하나의 자본으로 작용해 개인의 부를 늘리는 데 작용한다는 것이다. 매력 자본은 단지 잘생긴 외모나 멋진 옷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유머, 예의범절, 미소, 건강한 활력, 춤 실력 등이 포함된다. 하킴은 매력 자본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지능처럼 노력하고 발전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고소득자, 상류층은 외모와 여가문화 등의 자본을 더 늘릴 수 있는 여건이 되고 이는 다시 더 많은 부를 창출할 가능성이 높다. 결국 외모에 투자하는 여성들 사이에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벌어지게 된다. 결혼과 사회생활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여성들은 매력 자본을 전략적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페미니즘을 팝니다》(세종서적)는 이러한 현상을 ‘시장 페미니즘’이라 이름 붙임으로써 페미니즘이 상업적으로 어떻게 포장되며, 대중문화를 통해 페미니즘 본래의 의미가 어떻게 변질하는지 보여준다.

 

 

 

 

 

 

 

 

 

 

 

 

 

 

 

 

 

 

* [절판] 에드가 모랭 《스타》(문예출판사, 1992)

 

 

 

‘가십(gossip)’은 개인의 시시콜콜한 사생활에 대한 소문을 보도하는 기사를 뜻한다. 예나 지금이나 가십이 강력한 위세를 부리는 곳은 연예계다. 기존에는 신문 등 대중매체가 취재해 가십을 유통했다면 이제는 연예기획사나 연예인 스스로 가십의 생산자로 나서고 여기에 방송이 매개 역할을 하며 인터넷, SNS 등이 확대 재생산해 대량으로 유통하는 구조로 변화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드가 모랭(Edgar Morin)이 쓴 《스타》(문예출판사)는 출간된 지 꽤 오래된 책이지만, 연예인의 가십을 만드는 대중문화의 허상과 폐해를 지적한 저자의 분석은 지금도 유효하다. 모랭은 가십을 ‘스타 시스템을 키우는 플랑크톤’이라고 표현했다. ‘스타’가 된 연예인은 대중의 우상이 된다. 스타를 추종하는 팬들에게 스타가 사는 세계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과는 다른 별천지다. 그래서 연예인의 사생활은 대중의 호기심을 끌어낼 수 있는 시청률 보증수표와도 같다. 이들을 스타 또는 공인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대중의 사랑과 관심으로 부와 인기를 누리는 대신 일정 부분 자신의 사생활 노출을 감수해야 한다는 측면도 포함돼 있다. 스타는 ‘꿈의 빵’이라고 했던 모랭의 지적처럼 연예인들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팔리는 특수 상품이다. 따라서 가십이 유통되지 않으면 연예인은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돋보이지 않으며,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 조지프 엡스타인 《성난 초콜릿》(함께읽는책, 2013)

* 강준만 《교양 영어 사전 2》(인물과사상사, 2013)

* 메릴린 옐롬, 테리사 도너번 브라운 《여성의 우정에 관하여》(책과함께, 2016)

 

 

 

‘가십’과 마찬가지로 ‘가십 걸’도 영어사전에 있는 단어이다. 영어사전에 나오는 ‘가십 걸’의 뜻은 이렇다. 수다를 떠는 여자, 남 얘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여자, 뒷얘기를 좋아하는 여자. 그런데 ‘가십 보이’는 영어사전에 없다. 남자들도 은근히 남 얘기하는 것을 좋아하고, 동성끼리 모여서 뒷얘기를 하는 걸 좋아하는데 말이다. 가십은 원래 성별에 상관없이 사람들이 서로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뜻했다. 집안에 머무르면서 생활해야 했던 여성들은 외출하면서 이웃이나 친구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16세기에 가십은 ‘여성 친구’를 뜻하는 단어로 사용되었고, 여성들의 대화를 경멸하는 뉘앙스가 없었다. 과거의 가십은 사회 집단 내 일원들끼리 주고받는 유용한 정보였다. 그런데 사람들은 집단적 소속감을 느끼기 위해 가십에 쉽게 끌린다. 검증되지 않은 가십임에도 그것을 이야기하면서 열을 올린다. 진실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내용이 자극적일수록 사람들은 더 빠져들고, 또 다른 이에게 옮겨질 때는 강도가 더 커진다. 《성난 초콜릿》(함께읽는책)은 내 귀에 달콤하지만, 누군가에겐 자칫 치명적일 수 있는 가십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책이다. 인간이면 누구나 타인이 숨기고 싶은 내밀한 부분을 엿듣고 싶은 욕구가 있다. 치명적일수록 효과가 배가되고 알고자 하는 욕망을 부추긴다. 가십은 우리 눈과 귀를 유혹하는 달콤한 초콜릿과 같다.

 

누구든지 가십의 유혹에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오랫동안 가십은 여성들끼리 주고받는 대화를 부정적으로 가리킬 때 사용되어 왔다. ‘가십 걸’의 ‘걸’은 ‘연예계 가십에 관심이 많은 여성’, ‘가십의 유혹에 쉽게 빠져드는 (미숙한) 여성’이다. 그 단어 속에는 여성이 남성보다 지적으로 열등하다는 편견과 차별이 반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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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에 미국 정부는 스탠딩 록 수(Standing Rock Sioux) 부족 등 원주민들이 반대해온 다코타 액세스 송유관(Dakota Access Pipeline) 건설 사업을 중단하는 결정을 내렸다. 다코타 액세스 송유관 사업은 노스다코타, 사우스다코타, 아이오와, 일리노이 등 4개 주를 잇는 대형 송유관 건설 사업으로 총 38억 달러(약 4조 2000억 원)의 자금이 투입됐다. 그러나 이 사업은 각 주의 인디언 보호구역을 관통해야 했는데, 식수원과 주요 성지(聖地)를 잃게 되는 수족 등 원주민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2016년 3월부터 수족은 아예 공사장 안에 천막을 치고 농성을 벌였다. 100여 개의 원주민 부족들도 동참했다. 여러 환경운동가와 인권운동가들까지 시위에 가세해 점차 전국적 원주민 저항 운동으로까지 번졌다. 결국 미국 정부와 미 육군은 송유관 건설 사업 시공사인 에너지 트랜스퍼 파트너스(ETP)에 원주민 보호구역 주변에서의 공사를 중지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과거 에너지 트랜스퍼 파트너스에 투자했고, 해당 회사 CEO에게 기부금도 받은 트럼프는 송유관 건설을 허용하는 행정 명령에 서명했다. 이어 육군은 불과 2개월 만에 입장을 바꿨다. 송유관 건설을 다시 허가했다.

 

 

 

 

 

 

 

 

 

 

 

 

 

 

 

 

 

 

* 리베카 솔닛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 (창비, 2018)

 

 

 

리베카 솔닛(Rebecca Solnit)『스탠딩 록에서 온 빛』이라는 글에서 ‘스탠딩 록 집회’가 전 세계에 보여준 연대의 힘을 상기시키면서 분노와 저항을 근간으로 하는 축적의 시간이 더 나은 세상으로 바꿀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 글은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 (창비)에 수록되어 있다. 변화를 꿈꾸는 연대는 국경과 국민의 테두리를 비웃으며 넘나들고,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확신이며, 관료적 위계에 묶인 형식이 아닌 희망의 에너지가 생산되고 넘쳐나는 체험이다. 연대는 지금 무언가를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의 공통 언어이며 행동 양식이다.

 

『스탠딩 록에서 온 빛』에 이런 문장이 있다.

 

 

 우파와 백인 우월주의가 승리를 뽐내는 지금, 우리는 많은 증오범죄 이야기를 듣는다. 구타, 모욕, 스와스티카, 협박 등등.

 

 

(『스탠딩 록에서 온 빛』 중에서, 280쪽)

 

 

‘스와스티카(swasticka)가 뭔지 궁금해서 사전을 찾아봤다. 내가 참고한 사전은 《그림으로 보는 세계문화상징사전》 (까치)이다. 스와스티카는 불교의 상징인 ‘卍(만)’ 자를 부를 때 쓰는 이름이다. 산스크리트어에서 ‘행운’을 뜻하는 ‘스바스티카(svastika)’에서 유래했다. 스와스티카는 수천 년 전부터 사용됐으며 특히 힌두교 경전에서는 행운과 힌두교 최고의 신 브라마(Brahma), 또는 부활 등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스와스티카는 힌두교 구조물과 인도 수공예품 등에서 볼 수 있으며 모양은 조금 다르지만 불교와 자이나교, 아시아와 유럽, 미국 원주민 문화 등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그만큼 스와스티카는 고대 그리스 · 로마 · 중국 등 고대 문명이 찬란하였던 곳에서 흔히 발견된다. 스와스티카가 무엇을 상징하는가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학설이 있다. 태양이나 번개의 신, 불의 신을 상징 한다는 설도 있으며 회전하는 북두칠성의 형상이라는 주장도 있다.

 

 

 

 

 

 

 

 

 

 

 

 

 

 

 

 

 

 

* 진 쿠퍼 《그림으로 보는 세계문화상징사전》 (까치, 1994)

* 허균 《사찰 장식, 그 빛나는 상징의 세계》 (돌베개, 2000)

 

 

 

다양한 사찰 조형물과 장식 문양의 상징적 의미를 알기 쉽게 설명한 《사찰 장식, 그 빛나는 상징의 세계》 (돌베개)라는 책은 우리나라 미술에 나타난 스와스티카 문양을 소개한다. ‘卍’ 자를 좌우로 뒤집은 ‘卐’ 자도 스와스티카다. 우리나라 무속 신앙에서 스와스티카는 우주와 인간의 삶과 죽음, 환생을 주관하는 신의 영역이란 뜻으로, 불교에선 부처의 마음 또는 중생의 마음속에 잠재해 있는 불성을 뜻한다. 그런데 이 상서로운 상징이 어째서 ‘증오 범죄’의 상징이 되었을까?

 

좋은 뜻이 있는 스와스티카가 최악의 상징으로 돌변한 것은 독일의 히틀러(Hitler)가 자신의 소속 정당인 나치(Nazis)의 상징으로 채택하면서부터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뒤, 스와스티카는 ‘갈고리 십자가’를 뜻하는 하켄크로이츠(Hakenkreuz)로 알려지게 됐고, 수많은 홀로코스트(Holocaust)의 현장에서 나부꼈다. 히틀러는 독일인의 조상인 아리안(Aryan) 민족의 우수성을 세계에 과시하기 위해 스와스티카를 나치 문양으로 정했다. 요즘 네오 나치나 백인 우월주의 집단, 일본 극우 집단이 써먹고 있다. 전후 독일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대부분 국가에서 스와스티카의 사용을 법으로 금지한 것도 이 때문이다.

 

지금도 스와스티카를 보면 하켄크로이츠를 연상하는 유럽인이 많다고 한다. 히틀러가 스와스티카를 왜곡해서 사용한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불교나 힌두교의 스와스티카 사용을 금지할 필요가 없다. 히틀러가 반유대인주의를 선전하기 위해 문양을 오용했다는 점이 스와스티카의 평화적 사용까지 금지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에는 스와스티카의 의미를 알려주는 주석이 달려 있지 않다. 독자들이 ‘좋은 만(卍, 스와스티카)’ 자와 ‘나쁜 만(卍, 하켄크로이츠)’ 자를 혼동하지 않도록 상세한 주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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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8-12-03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저는 불교에서 쓰이는 卍(만)자와 나찌 독일의 문양인 卐(하켄크로이츠)가 서로 비슷해 보이지만 그 계통이 완전히 다른줄 알았는데 cyrus님 글을 읽은 덕분에 모두 브라만교(혹은 힌두교)에 근원을 둔 문양이란것을 알았네요.좋은글 감사합니다^^

cyrus 2018-12-03 12:37   좋아요 0 | URL
생각보다 만 자 문양을 쓴 고대 문명이 많았어요. 고대 그리스인, 켈트인들도 만 자 문양을 썼어요. 의미는 다르지만, 동서양 공통 문양으로 보면 됩니다. ^^

transient-guest 2018-12-04 0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방향이 다르니까 조금만 양식이 있으면 혼동하지는 않겠죠? 어쨌든 트럼프와 함께 다시 분리/인종주의가 나온 건지, 이들이 다시 준동하는 것이 트럼프라는 괴물로 결과가 나온 거지 이론이 분분합니다만, 좋지 못한 시대로 들어선 것 같습니다. 이게 일종의 헤프닝으로 끝날지, 아니면 전후 대략 70년 이상 이어진 서방세계의 평화시기가 끝나고 다른 시대가 시작되는 건지 알 수가 없네요.

cyrus 2018-12-04 14:09   좋아요 0 | URL
내년은 어떤 일이 일어날지 기대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됩니다.. ^^;;

소요 2018-12-04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해 주셔서 책 사서 열심히 보겠습니다

cyrus 2018-12-04 14:13   좋아요 0 | URL
어떤 책을 사시는지 모르겠지만, 소요님이 만족하셨으면 좋겠네요. ^^

레삭매냐 2018-12-04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려서 스와스티카하고 만자를 헷갈려
했던 것 같습니다.

트럼프는 정말 답이 없네요. 어렵게 이뤄낸
공사 중지 명령을 무효화하고 깽판을 쳐대
니...

글 내용과 좀 거리가 있지만,
헤르메스님이 추천해 주신 리베카 솔닛의
<폐허>를 읽어 보고 싶은데 아무래도 올해
는 어렵지 않나 싶네요.

내년에 읽어 볼까 합니다 ~

cyrus 2018-12-04 15:52   좋아요 0 | URL
오바마 정부 말기에 송유권 건설 중지 결정이 내렸으니 시기적으로 좋지 않았어요. 민주당의 힐러리가 대통령이었으면 중지 결정이 번복되는 일은 없었을 거예요. 저는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을 읽어보고 싶어요. ^^
 

 

 

영국의 정령(spirit)의 나라다. 정령이 탄생한 배경이 된 고대 켈트인(Celts) 문화가 뿌리 깊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영국의 각 지방마다 특색을 갖춘 정령들에 대한 전설이나 민담이 전해진다. 기원전 6세기경 켈트인이 유럽에서 건너와 브리타니아(Britannia) 섬, 즉 현재의 영국에 정착했다.

 

 

 

 

 

 

 

 

 

 

 

 

 

 

 

 

 

 

* 박영배 《켈트인, 그 종족과 문화》 (지식산업사, 2018)

* 크리스티안 엘뤼에르 《켈트족》 (시공사, 1998)

 

 

 

카이사르(Caesar)가 기원전 55년에 브리타니아를 원정하고, 클라우디우스(Claudius) 황제가 다시 브리타니아를 정복한 후 400년 동안 로마의 지배를 받았다. 4세기 후반 게르만인(Germanen)의 대이동이 시작되어 로마군이 밀려났고, 이 기회를 틈타 게르만인의 일파인 앵글인(Angles)과 색슨인(Saxons)이 브리타니아를 침공했다. 그들은 섬에 사는 켈트인을 정복하고 거기에 왕국을 세우는데 그 나라가 지금의 영국, 즉 잉글랜드이다.

 

 

 

 

 

 

 

 

 

 

 

 

 

 

 

 

 

 

 

* 카이사르 《갈리아 전쟁기》 (사이, 2005)

* [절판] 리처드 루드글리 《바바리안 : 야만인 혹은 정복자》 (뜨인돌, 2004)

 

 

 

 

우리에게 가깝게 느껴지는 서양 신화는 어렸을 때부터 접해온 그리스 로마 신화다. 반면 로마인과 게르만인의 압박으로 밀려난 켈트족 신화는 낯설게 느껴진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저서 《갈리아 전쟁기》에서 켈트인들을 ‘수염도 제대로 깎지 않으며, 바지를 입은 야만인들’로 묘사했다. 그러나 켈트인들을 바라보는 카이사르의 시선에는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만들어진 서구 주류 역사의 편견이 반영되어 있다. 야만인, 즉 바바리안(barbarian)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의 ‘바르바로이(barbaroi)’에 있다. 이 말은 ‘그리스인들과는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라는 뜻을 담고 있었다. 그런데 이 중립적인 말이 그리스와 로마를 침략한 일군의 다른 민족들을 가리키게 되면서 야만 · 폭력 등의 부정적인 의미가 덧붙여졌다. 《바바리안 : 야만인 혹은 정복자》 (뜨인돌)《켈트인, 그 종족과 문화》 (지식산업사)는 켈트인이 로마 못지않은 훌륭한 문화를 가진 민족이었음을 보여주는 책이다. 켈트인의 문화적 수준은 로마보다 높았다. 켈트인 사회는 여성과 노약자를 존중할 정도로 권위적이지 않고 개방적인 사회였다. 따라서 바바리안은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시각에 의해 왜곡된 단어이다. 그리스 · 로마인들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야만’이라는 이름의 울타리에 가뒀다.

 

 

 

 

 

 

 

 

 

 

 

 

 

 

 

 

 

 

 

 

 

 

 

 

 

 

 

 

 

 

 

* 이케가미 료타 《도해 켈트 신화》 (AK커뮤니케이션즈, 2014)

* 모리셰 료 《켈트 신화 사전》 (비즈앤비즈, 2014)

* 조지프 제이콥스 《켈트족 옛 이야기》 (현대지성사, 2003)

* 다케루베 노부아키 《켈트. 북구의 신들》 (들녘, 2000)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이 성공하면서 갈리아는 로마의 영토로 편입되었고 켈트인은 자치권을 잃었지만, 켈트의 문화적 영향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켈트 신화와 켈트 문화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곁으로 성큼 다가와 있다. 미국의 축제 기념일로 알려진 핼러윈(Halloween)은 고대 켈트인의 풍습에서 유래했다. 그리스 로마 신화가 20세기 이전 서구 문학의 대문호들에게 영감을 줬다면, 상대적으로 환상적이고 초자연적인 색채가 짙은 켈트 신화는 게르만 신화와 함께 20세기 판타지 문학에 상상력을 제공했다. 서구 판타지 문학에 기본적으로 등장하는 마법사들은 켈트족의 드루이드(Druid) 사제들의 모습에서 유래한 존재이다. 흔히 ‘서양의 요정’으로 많이 알려진 엘프(Elf), 난쟁이와 거인족도 켈트 신화에 기대고 있다. 켈트 신화에는 싸움에서 패한 대지의 여신 다누(Danu)의 일족이 도망가서 새로운 낙원을 만들고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종족’, 즉 요정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요정을 믿지 않는 어른들을 위한 요정 이야기》

(책읽는귀족, 2016)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켈트의 여명》 (펭귄클래식코리아, 2008)

 

 

 

켈트 신화는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에 살았던 ‘게일인’ 신화와 잉글랜드와 웨일스에 살았던 ‘브리튼인’ 신화 등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켈트 신화가 낯설어서 선뜻 읽기가 망설여진다면, 정령이나 요정이 등장하는 아일랜드의 구전 민담을 읽어보는 것이 좋다. 아일랜드의 시인 예이츠(Yeats)는 게일인 신화와 민담을 수집하여 고대 켈트인의 문화유산을 복원하는데 큰 노력을 기울였다.

 

정령과 요정은 단순히 상상 속의 존재가 아니다. 요즘은 요정 이야기나 신화를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치부되지만, 그 속에는 먼 과거에서 긴 시간을 거쳐 인간이 이룩한 문화와 풍습, 그리고 풍부한 상상력이 녹아들어 있다. 신화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한정되어 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만 너무 오래 붙들고 있을수록 서양 문화의 표준을 그리스 로마 신화에 두게 되고,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켈트인이 호전적인 민족이라서 켈트 신화에 그들의 잔인한 본성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묘사된 신들은 난폭하거나 잔인하며 교활하거나 방탕하다. 세대를 거듭하면서 축적된 인류의 신화를 ‘문명’과 ‘야만’으로 분류하고, 다른 민족의 신화와 그 속에 담긴 문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태도야말로 고대 그리스인들이 만든 이분법의 아류이다. 우리는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진 ‘오만한 문명’의 고약한 버릇을 따라 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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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8-11-06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제가 좋아하는 용정과 전설 민담이야기네요.님이 적었듯이 앵글인과 색슨인(합쳐서 앵글로색슨족-현재 잉글랜드의 주류)가 브리타니아를 침공하여 거거살던 켈트인들을 스코틀랜드로 쫒아냈지요.현재는 영국인이지만 중세시대까지만 해도 앵글로색슨족과 켙트족들은 현재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로 나위어 피터지게 싸웠는데 비록 잉글랜드과 스코틀랜드를 병합했어도 민족이 틀려선지 지금까지도 스코틀랜드는 독립을 추구하는것 같네요.
참고로 바바리아하면 저는 코난(아놀드 슈왈츠제니거가 나온 영화-원작소설도 있음)이 생각납니다.

cyrus 2018-11-07 12:12   좋아요 0 | URL
호전적인 야만인 이미지를 대중에게 부각시킨 결정적인 영화가 <코난 더 바바리안>이지요. ^^

syo 2018-11-06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루스 박사님이시다..... 모르는 게 없으시다지?!

cyrus 2018-11-07 12:15   좋아요 0 | URL
박사님은 무슨... ㅎㅎㅎ 몇 주 지나면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된 내용, 기록했던 내용들 다 잊어버립니다. 글에 썼던 내용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어서 독서모임을 자주 참석하려고 해요. 내가 알고 있던 내용을 말로 표현하지 않으면 잊어버려요. ^^;;

카알벨루치 2018-11-07 12:18   좋아요 1 | URL
맞아요 아는건 말로 표현해야 기억이 남는게 맞아요~ㅎㅎ

카알벨루치 2018-11-06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시루스 박사 존경삘!

cyrus 2018-11-07 12:16   좋아요 1 | URL
대단한 게 아닙니다. 그냥 책에 있는 내용을 요약, 정리했을 뿐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정리한 내용은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립니다. ^^;;

페크pek0501 2018-11-07 19: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cyrus 님을 응원합니다. 짝짝짝!!!

cyrus 2018-11-09 12:12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
 

 

 

지난주 토요일에 안과에 다녀왔다. 내 눈에 문제가 있어서 간 건 아니다. 어머니 대신에 갔다. 올여름에 부모님이 종합 검진을 받았는데, 어머니가 녹내장 진단을 받았다. 다행히 증상은 심각하지 않았고, 조기에 치료를 받으면 나을 수 있었다. 정밀 검진을 받은 이후로 어머니는 정오 12시, 자정마다 안약을 넣고 있다. 한 달 전에 받은 안약이 거의 다 떨어져서 안과에 가서 새 안약을 처방받아야 했다. 그런데 며칠 전에 어머니가 허리를 삐끗해 집에서 쉬어야 했고, 내가 대신 안과에 가게 됐다.

 

점심시간을 피하고 오후 2시경에 안과에 도착했는데, 역시나 진료 및 처방을 받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오후 3시까지 안과 의사가 수술하는 시간이라서 안약 처방을 받으려면 한 시간 정도는 기다려야 했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휴대폰 보조 배터리를 챙겨올걸.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면서 한 시간을 그냥 보내기가 너무 아까웠다. 다행히 기다림의 지루함을 달래줄 녀석이 있었다. 책이었다.

 

그런데 안과에 비치된 책들의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일단 어른이 읽을 만한 책이 많지 않았다. 문고의 절반은 아동용 책이었다. 아동용 책의 상태도 좋다고 할 수 없었다. 90년대에 나온 위인전, 동화책이 많았다.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한 번쯤은 스쳐서 만났을 법한 책들이 있었다. 더 놀라운 건, 1984년에 나온 여성 잡지의 부록도 꽂혀 있다는 사실이다. 헌책방에 있을 만한 책들이 안과에 있다니. 어머니가 다니는 안과는 의료서비스가 좋아서 환자들 사이에 입소문이 난 곳이라고 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이 안과는 환자나 손님의 문화 활동을 위한 서비스가 부족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의사의 진료 및 처방을 기다리면서 책을 읽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다 보니 안과의 책장은 안과를 찾는 손님이나 안과에서 일하는 의료인들의 눈길을 받지 못하는, 볼 품 없는 장식품으로 전락했다.

 

 

 

 

 

 

 

 

 

 

 

 

 

 

 

 

 

 

* 크리스티안 뒤셴, 카르멩 마루아 《시루스 박사 1》 (비룡소, 1998)

 

 

 

그래도 낡은 책장에 시간을 때우기 위해 읽을 수 있는 책은 있었다. 내가 어렸을 적에 읽은 《말하는 백과사전 시루스 박사》 1권이었다. 이 책은 어린이를 위한 백과사전이긴 한데, 여러 분야를 항목별로 담고 있는 기존의 백과사전과 다른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린이의 질문에 시루스 박사가 친절하게 대답해주는 대화체 형식의 백과사전이다. 책은 총 12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1권부터 12권까지 다 읽어본 적이 없다. 읽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주1]. 그래서 이 책의 부제는 ‘말하는 백과사전’이다. 시루스 박사는 백과사전적 인물이다.

 

1권의 뒤표지에 시루스 박사의 별명이 적혀 있다. 별명이 많다. ‘호기심 많은 어린이의 골키퍼’, ‘말문이 막힌 부모님들을 위한 구원 투수’, ‘지쳐 버린 보모를 위한 시간 도둑’,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기억력(을) 증진(하는) 책’, ‘선생님의 오른팔’ 등이 있다.

 

 

 

 

 

 

시루스 박사의 ‘비밀 무기’는 ‘펜티엄급 지식과 푸근한 마음’이다. ‘펜티엄’이라…‥. 90, 2000년대에 인텔(Intel)을 먹여 살린 CPU 상표명 아닌가.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어이다. 시루스 박사는 어린이들의 어떤 질문에도 성실하고 진지하며 정확하게 대답을 해준다. 그는 어머니 같은 푸근한 마음으로 어린이의 호기심을 소중히 여긴다. 그래서 박사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아이들의 질문에 절대로 ‘모른다’라고 대답하지 않는 삶의 원칙을 지키고 있다. 이 책의 머리말은 요슈타인 가아더(Jostein Gaarder)《소피의 세계》(현암사)에 나오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시작된다.

 

 

 

 

 

 

 

 

 

 

 

 

 

 

 

 

 

* 요슈타인 가아더 《소피의 세계》 (현암사, 2015)

 

 

 훌륭한 철학자가 되기 위해 필요한 단 한 가지 소질은 놀라움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자들과 어린 아이들은 이 소질을 공유하고 있다. 철학자들은 평생 아이처럼 섬세한 마음을 간직한 사람이라고까지 해도 좋을 것이다.

 

 

 

‘놀라움을 느끼는 것’이란 ‘세상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을 발견하는 일이다. 《소피의 세계》는 노르웨이의 한 작은 마을에 사는 소녀인 소피가 어느 날 발신인 없는 의문의 편지를 받는 것으로 시작된다. 정체불명의 발신인은 자신을 철학자라고 소개하면서 소피에게 철학을 가르쳐준다. 소설은 “너는 누구니?”, “세계는 어디서 생겨났을까?” 등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풀어나가는 식으로 전개되면서 문명의 근간이 되는 철학적 뿌리를 알려준다. ‘소설로 읽는 철학’이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소설은 철학의 장벽을 낮춰 우리의 삶에 가까이 끌어들인다. 《소피의 세계》는 노르웨이에서 1991년에 처음 출간되었다. 1994년 독일에서 번역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시루스 박사》는 1995년 캐나다에서 나온 책이다.

 

 

 

 

 

 

 

 

 

 

 

 

 

 

 

 

 

 

* [아직 안 읽은 책] 크세노폰 《키루스의 교육》 (한길사, 2015)

* [아직 안 읽은 책] 크세노폰 《키로파에디아》 (주영사, 2012)

 

 

 

‘시루스’는 고대 페르시아 제국을 이끈 키루스(Cyrus)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고대 역사가인 크세노폰(Xenophon)은 자신의 책 《키로파에디아(Cyropaedia)에서 키루스를 인자하고 이상적인 군주로 묘사했다. 키루스는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후에 ‘키루스의 원통’으로 알려진 세계 최초의 인권선언문을 발표하면서 노예로 잡혀있던 유대인들을 해방했다. 《시루스 박사》의 저자 크리스티안 뒤셴(Christiane Duchesne)은 어려서부터 키루스라는 이름을 좋아해서 자신의 분신인 박사의 이름을 ‘시루스’라고 정했다고 한다. 키루스는 라틴어 발음이고, 영어식 발음은 ‘사이러스’이다. 그런데 프랑스에서도 ‘cyrus’를 ‘사이러스’라고 발음한다. 크리스티안 뒤셴은 영어와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쓰는 캐나다에서 태어났다. 정확한 원어 발음을 따른다면, ‘시루스 박사’가 아니라 ‘키루스 박사’ 또는 ‘사이러스 박사’라고 해야 한다. ‘시루스’는 독일식 발음이다[주2].

 

 

 

 

 

이미 눈치를 챈 독자들도 있겠지만, 내 닉네임은 《시루스 박사》에서 따온 것이다. 내가 2010~2011년에 알라딘 서재 블로그에 열심히 글을 남겼을 때, 닉네임의 의미를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았다. 그래서 닉네임의 유래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었다. 책에 나오는 시루스 박사처럼 다양한 분야에 호기심을 가지면서, 세상의 모든 지식을 알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필명을 ‘cyrus’로 정했다. 《시루스 박사》의 편집부의 말에 따르면 박사는 ‘우리가 필요할 때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환상적인 대머리 아저씨’라고 한다. 탈모를 겪는 ‘스피드왜건’인가. 그나저나 나도 탈모가 진행 중인데, 20년이 지나면 ‘환상적인 대머리 아저씨’가 되겠군. 흠좀무. 역시 이름이나 닉네임은 그 사람의 운명을 만드는 것 같다.

 

 

 

 

[주1] 로얼드 호프만 《같기도 하고 아니 같기도 하고》 (까치, 2018)

 

[주2] 참고: 네이버 독일어사전, ‘시뤄스’를 빠르게 발음하는 것처럼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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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8-11-05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너무 찰떡닉네임이다.....

cyrus 2018-11-05 17:00   좋아요 0 | URL
알라딘이 망하더라도 죽을 때까지 이 닉네임을 계속 사용할려고 합니다. ^^

stella.K 2018-11-05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득이나 눈이 안 좋은데 책까지 좋으면 눈이 더 나빠질 것 아니니? 그냥 그렇게 생각야지 뭐. 사이러스는 영어식 발음 아닌가? 난 시루스가 좋던데...ㅋ
그런데 탈모가 진행중이라고? 걱정되겠다. 관리 잘 해라.ㅠ

cyrus 2018-11-05 17:02   좋아요 0 | URL
아버지가 원형 탈모에요. 다행히 저는 원형 탈모는 아닌데, 이마 부위의 머리카락이 점점 많이 빠져요.. ㅠㅠ

카알벨루치 2018-11-05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이러스박사님 !!!! 시루스 박사님 ㅎㅎㅎ

cyrus 2018-11-05 17:04   좋아요 1 | URL
저는 ‘카알벨루치‘의 의미가 궁금합니다. ^^

카알벨루치 2018-11-05 18:41   좋아요 0 | URL
이야기 들어보면 웃으실껄요 ㅋㅋ

cyrus 2018-11-06 12:03   좋아요 0 | URL
뭔가 재미있는 의미가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정말 궁금하네요.. ^^

포스트잇 2018-11-05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루스보다는 시루스라고 불러야겠네요, 박사님ㅎㅎ

cyrus 2018-11-06 12:02   좋아요 0 | URL
시루스 박사님 말고 ‘시루스 아저씨’라고 불러주세요.. ㅎㅎㅎㅎ

페크pek0501 2018-11-07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은 젊은 분으로 알고 있는데 탈모라니요... 글자를 너무 봐서 그런 게 아닐까요? 책 읽을 때나 글 쓸 때.

이름이나 닉네임이 운명을 만든다면 저도 닉네임을 다르게 하고 싶군요. ㅋ

cyrus 2018-11-09 12:15   좋아요 1 | URL
탈모는 젊은 시절부터 진행된다고 합니다. 두피가 훤하게 보일 정도로 머리카락이 빠진 건 아니지만, 아무런 이유 없이 머리카락이 한 두 개씩 빠질 때마다 걱정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