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호프(Chekhov)의 단편소설을 알아보려고 검색하다가 재미있는 책을 발견했다. 그 책은 전자책이며 제목은 안톤 체호프 단편선이다. 이 책의 앞표지가 재미있다. 표지에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 [e-Book] 체호프 안톤 체호프 단편선(안북, 2012)

 

 

러시아 객관주의 문학의 거장이 말한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전자책의 정가는 3,000원이다. 번역자가 누군지 나와 있지 않다. 이 책에 무슨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지도 알 수 없다. 네이버에 이 책을 검색하면 수록작을 알 수 있다. 수록작은 총 여덟 편이다. 작품명은 다락방이 있는 집, 어느 화가의 이야기, 상자 속의 사나이, 골짜기,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입맞춤, 위험한 손님, 약혼녀이다. 체호프의 대표작이 수록되어 있지만, 이런 책은 사지 않는 것이 좋다. 내가 보기에 이 책의 번역자는 체호프의 문학을 잘못 소개했다.

    

 

 

 

 

 

 

 

 

 

 

 

 

 

 

 

 

*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 무엇을 할 것인가(열린책들, 2009)

* 블라디미르 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 운동의 절박한 문제들(박종철출판사, 2014)

 

 

내가 방금 재미있다고 언급한 부분은 바로 앞표지에 있는 문구를 말한 것이다. 문제가 되는 문구는 체호프의 작품에 어울리지 않는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는 러시아의 소설가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Nikolai Chernyshevsky)의 소설 제목이자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의 논문 제목인 ‘무엇을 할 것인가?’를 떠올리게 한다. 전자의 책이 먼저 나왔다. 체르니셰프스키는 19세기 중반 러시아를 대표하는 사회주의 혁명가였다. 그는 사회주의가 농민 공동체를 통하여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자신의 사회주의 이론을 민중 해방을 위한 무기로 삼았다. 그의 글들이 사회 개혁을 반대하는 세력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체르니셰프스키는 인생의 반을 감옥에서 보냈다. 수감 생활 중에 쓴 유명한 소설이 바로 무엇을 할 것인가?(Chto delat’?)이다. 이 소설에 사회계급 평등, 여성해방 등 새로운 사회상을 제시하는 등 급진주의적 생각들이 반영되어 있어서 구세대에 지친 젊은 독자들은 이 책을 탐독했다. 레닌도 이 책을 열심히 읽은 독자 중의 한 사람이다. 체르니셰프스키의 소설이 나온 지 40년 뒤에 레닌은 똑같은 제목의 논문을 썼다. 이 논문은 레닌의 혁명 노선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 체호프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문학동네, 2016)

    

 

 

체호프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체르니셰프스키와 같은 급진주의자의 모습과 거리가 멀다. 또 세상을 갈아 엎어버리겠다는 그런 의지를 보여주지도 않는다. 체호프의 대표작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을 번역한 로쟈이현우의 작품 해설은 체호프 문학의 특징을 간략하게 잘 설명하고 있다.

 

 

 러시아 문학의 대단한 주인공들이 시대와 세상을 향해 던진 당당한 물음이 있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진보적 비평가 체르니솁스키의 소설 제목이었고, 레닌도 자신의 정치 팸플릿에 같은 제목을 붙었다. 하지만 체호프의 작품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의 반향을 읽어내기가 어렵다. 그의 주인공들은 어떻게, 어떻게?”를 중얼거릴 따름이다 (이현우,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옮긴이의 말, 69)

 

 

체호프의 단편소설들을 자주 읽어보면 그 속에 있는 인물들의 성격이 어떤지 짐작할 수 있다. 아마도 전자책의 번역자는 체호프의 소설을 많이 읽지 않은 듯하다. 이 번역자가 아무리 번역을 잘해도 그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면 문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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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0-02-05 0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양 사람들도 체호프를 대단하게
평가하던데...

정작 체호프를 읽어본 기억은 나지
않네요.

cyrus 2020-02-07 13:05   좋아요 0 | URL
아마도 체호프는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공연 작품이 많은 극작가일 거예요. ^^
 

 

 

근면과 성실을 강요하는 자본주의 사회. 이런 세상에서 게으름뱅이는 비난받는 존재이다. 하지만 노동에 지친 사람들에게 게으름이 주는 쾌락은 조금이나마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부지런함과 성실함을 미덕으로 강요하는 현대 사회에서 게으름에 대한 찬양게으름 예찬은 무척 도발적인 책이다. 그러나 일은 적게 하면서 인생을 한가롭게 살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책들이다.

    

 

 

 

 

 

 

 

 

 

 

 

 

 

 

* 버트런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사회평론, 2005)

 

 

게으름에 대한 찬양의 저자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철학 · 수학 ·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70여 권의 저서와 수백 편의 논문을 썼다. 평화 운동에도 앞장섰던 러셀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아인슈타인(Einstein) 등 명사들과 함께 핵무기 감축과 전쟁 방지를 위해 노력했다. 그는 아흔여덟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정력적으로 활동했다.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손에서 일을 놓지 않았을 것 같은 그가 게으름을 찬양하는 글을 썼다는 점이 이채롭다.

 

러셀은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서 노동이 인생의 목표가 아니라고 말한다. 예전 기득권층은 노동자들의 잉여생산을 독촉하기 위해 근로의 미덕을 앞세웠다. 기득권층이 만들어낸 고정관념 때문에 노동자들은 열심히 일하는 것이 인간의 본분이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우리는 노동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며 자아실현의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 벤저민 프랭클린 벤저민 프랭클린, 가난한 리처드의 달력(휴먼하우스, 2018)

* 새뮤얼 스마일스 자조론(비즈니스북스, 2006)

    

 

 

여기서 잠깐! 노동 숭배의 역사를 간단하게 살펴보자. 예로부터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 말라고 회자하던 노동 숭배는 러셀 못지않게 부지런히 활동한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시간은 돈이다란 명제를 만나면서 정점에 이른다. 19세기 영국의 사회개혁가로 활동한 새뮤얼 스마일스(Samuel Smiles)자조론이라는 책을 그 유명한 경구로 시작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스마일스의 자조 정신을 함축한 이 경구는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로 알려져 있다. 스마일스는 이 책에서 노동자, 기술자, 과학자, 발명가, 군인, 정치가, 예술가 등 가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개인적인 성공과 함께 인류문명의 발전을 성취한 사람들의 생생한 삶을 소개한다. 스마일스는 성공한 위인의 자리에 열심히 땀 흘려 일하는 개인의 근면성과 열정을 대치시키고 있다. 그는 성공에 이르는 기본적인 비결을 개인의 노동과 근면에서 찾는다. 하지만 신분 제약이나 재산 유무와 관계없이 누구나 노력하고 근면하면 부와 성공을 달성할 수 있다는 스마일스의 입장은 노동의 미덕을 지나치게 숭배하는 고정관념에 가깝다.

    

 

 

 

 

 

 

 

 

 

 

 

 

 

 

* 강준만 바벨탑 공화국(인물과사상사, 2019)

 

    

 

산업화 초기만 해도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통용되던 사회였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런 희망을 말하지 않는다. ‘개천에서 용 난다라는 말은 계층 이동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하지만 고성장 시대가 끝나면서 달라졌다. 부와 행복을 동시에 잡기 위해 노력하려면 누군가와 경쟁해야 하고, 그들의 희생이 전제되어야 한다. 결국 개인은 더 높은 서열을 차지하기 위해 각자도생의 길을 선택한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오직 나의 성공과 행복만 생각하면서 일하는 사람들이 서로 경쟁하게 만드는 한국식 서열 사회를 바벨탑에 빗댄다.

 

타인에게 일을 시키는 사람들, 즉 죽어라 일만 하는 사람들 위에 있는 기득권층이 노동의 가치를 찬양한다. 지금도 자본가들은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일해야 한다는 부르주아적 성실성을 지상 최고의 미덕으로 생각한다. 러셀은 이러한 고정관념 때문에 실업자가 된 노동자는 자신의 게으른 상태에 대해 스스로 죄책감을 느낀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게으름에 대해 느끼는 원초적인 죄책감을 용감하게 떨쳐버려야 사회와 개인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 로버트 디세이 게으름 예찬(다산초당, 2019)

    

 

 

호주의 작가가 쓴 게으름 예찬게으름에 대한 찬양의 주요 내용을 계승하여 현시대에 맞게 재해석한 책이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게으름 예찬의 선배 격이라 할 수 있다. 게으름 예찬도 게으름뱅이를 악덕으로 만드는 노동 숭배에 정면으로 대든다. 그런 다음 빈둥거리기를 위한 구체적인 방향을 조목조목 제시한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아무 것도 안 하기, 한가롭게 산책하기, 깃들이기(보금자리를 장만하여 그 내부와 외부를 꾸미는 일) 등이 있다. 이 책에서 제시한 실천 방안들이 그다지 새롭지 않다고 투덜거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런 사소한 일상이 주는 행복을 우리가 얼마나 많이 잊고 사는가를 일깨워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게으름 예찬에서 긍정하는 게으름은 각각 여유휴식에 가깝다. 게으름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선택에 관한 문제다. 빠르게 흘러가는 세상 속을 사는 동안 나 자신을 잊어버리지 않을 수 있는 능력과 나만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살아가겠다는 확고한 의지, 이것이 바로 게으름의 미덕이다. 게으름으로부터 우리 마음은 여유로워지고 자신의 내면을 좀 더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으며, 정신적 자유를 가질 수 있게 된다. 행복해지고 싶다면 게으름뱅이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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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gela 2019-11-04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유와 휴식을 위한 게으름은 필요한 것 같아요. 살럿 에이브러햄스 <오늘도 휘게>에세이도 휴식에 대해 언급한 것으로 알고있어요~

cyrus 2019-11-05 19:45   좋아요 0 | URL
주변 사람들 눈치 때문에 마음껏 쉬기 힘들어요. 저는 아무 것도 안 하고 눕는 것을 좋아하는데 어머니가 이런 저의 모습을 보면 잔소리를 해요. 맨날 누워만 있다고요.. ㅎㅎㅎㅎ

페크pek0501 2019-11-12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게으름에 대한 찬양은 오디오북으로 들어서 내용을 알게 되었어요.
요즘 읽고 있는 책 중 하나가 러셀 자서전이에요. 제목이 <인생은 뜨겁게>.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된다는 게 멋진 일이라는 걸 새삼 느끼게 해 줍니다.

cyrus 2019-11-18 21:58   좋아요 0 | URL
맞아요. 러셀 같이 다방면에 활약한 전문가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에요. ^^
 

 

 

우치다 타츠루(內田樹)대세를 따르지 않는 시민들의 생각법이라는 책에 요시모토 다카아키는 오직 혼자였다라는 글이 실려 있다. 요시모토 다카아키(吉本隆明)2012년에 세상을 떠난 일본의 사상가이다. 그의 이름은 우리에게 낯설지만, 그의 둘째 딸은 국내에 많이 알려진 소설가다. 그녀는 바로 요시모토 바나나(吉本ばなな).

    

 

 

 

 

 

 

 

 

 

 

 

 

 

 

* 우치다 타츠루 대세를 따르지 않는 시민들의 생각법(바다출판사, 2019)

 

    

 

타츠루는 고인이 된 다카아키를 추모하기 위해 요시모토 다카아키는 오직 혼자였다라는 글을 썼다. 다음에 나오는 문장은 타츠루의 글에서 인용했다. 생전에 전후 일본을 대표하는 사상가로 추앙받은 다카아키의 명성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요시모토 다카아키라는 사상가가 우리 세대에 미친 영향은 더할 나위 없이 심오하고 예리하고 압도적이었다. 우리는 요시모토 다카아키의 언어를 본받아 이야기했고, 요시모토 다카아키의 술어를 사용해 논의했고, “, 요시모토 다카아키 책을 읽지 않은 놈이군하고 선고를 두려워했다. 어떤 조직이나 당파에도 속하지 않고 요시모토 다카아키는 오로지 혼자 힘으로 한 시대를 온전히 휘어잡았다고 말할 수 있을 만한 지적 영향을 발휘했다.  (56)

 

 

다카아키는 1960년대 일본 학생운동의 정신적 지주로 주목받았고, 사회적인 문제가 일어날 때마다 앞장서서 싸웠다. 요시모토 바나나는 국내의 어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아버지를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평생 싸웠고, 말과 행동에 차이가 없었던 존경스러운 분이라고 언급했다. 그녀가 사회적 약자들을 위로하는 소설을 쓰겠다고 생각한 된 데는 아버지의 영향이 크다.

 

다카아키는 마르크스(Marx)자본론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책이라고 극찬했으며 자신을 좌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정치적인 영향력을 확장하는 일에만 몰두하는 당파의 행보를 반대했고, 전체주의로 변질한 스탈린주의와 내부 비판에 소극적인 일본 좌파 세력을 비판했다. 1968년에 발표된 공동환상론은 다카아키의 대표작이다. 다카아키는 이 책에서 국가의 정의를 새롭게 정의한다.

 

17~18세기의 계몽주의자들은 국가를 사회계약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마르크스는 국가를 부르주아지 계급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억압하는 기관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다카아키는 이 두 가지의 입장을 거부한다. 그는 국가가 여러 사람(공동)이 모이면서 만들어진 환상이라고 주장한다. 국가에 대한 그의 입장은 일본이라는 동아시아 국가의 존재에 대한 문제 제기로 이어진다. 개인의 이익보다는 민족 또는 공동체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일본의 사회적 분위기를 고려하면, 국가를 민족이 모여서 세워진 거대한 실체가 아닌 환상으로 호명한 다카아키의 주장은 파격적이었다. 공동환상론은 전후 일본 청년 세대의 필독서가 되었으며 그 책을 가슴에 품고 다닌 일본 여학생과 남학생들이 많았다고 한다.

    

 

 

 

 

 

 

 

 

 

 

 

 

 

  

* 동아시아출판인회의 동아시아 책의 사상, 책의 힘(한길사, 2010)

 

    

 

공동환상론2009년에 한국과 일본, 중국, 홍콩, 대만 등 아시아 5개 지역 출판사들의 모임인 동아시아출판인회의가 공동으로 기획한 동아시아 100권의에 포함되었다. 20세기 후반 동아시아에서 출간된 인문 서적 가운데 학술 가치가 높은 책들이 동아시아 100권의 책에 선정되었다. 동아시아출판인회의는 동아시아 100권의 책을 아시아 5개 지역의 언어로 동시에 출간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로부터 십 년이 지났지만, 한국어로 된 공동환상론》 출간은 깜깜 무소식이다. 동아시아 100권의 책에 대한 해체를 담은 동아시아 책의 사상, 책의 힘을 참고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공동환상론을 간접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유일한 독서 방식이다.

    

 

 

 

 

 

 

 

 

 

 

 

 

 

 

 

 

* [절판] 요시모토 다카아키 요시모토 바나나의 아버지가 들려주는 내 안의 행복(호박넝쿨, 2003)

 

* 요시모토 다카아키 진짜와 가짜(서커스, 2019)

    

 

 

다카아키는 광범위한 주제에 관한 에세이를 많이 썼다. 제목이 너무 평범하게 느껴지는 내 안의 행복과 다카아키가 세상을 떠나기 일 년 전에 나온 진짜와 가짜(저자명이 요시모토 타카아키로 되어 있다)는 에세이집이다. 내 안의 행복번역본에 요시모토 바나나의 아버지라는 문구가 삽입되었다. 이 번역본이 나온 해가 2003년이었고, 이때가 요시모토 바나나의 책이 한창 인기를 끌고 있었다. 두 권의 책 모두 읽기에는 수월한 편이다. 한 번쯤 세상을 살아가면서 생각해봐야 할 내용을 다루고 있다. 다카아키의 글을 읽어 보면 우치다 타츠루의 글을 읽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두 사람이 쓴 에세이는 읽기 쉽다. 또 그들의 관심사도 거의 비슷하다. 우치다 타츠루도 가끔 자신의 글에 철학으로서의 마르크시즘을 긍정하는 입장을 드러냈는데, 아마도 이러한 생각은 다카아키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우치다 타츠루는 다카아키의 언어와 생각을 본받아 글을 쓰고 있다. 그는 요시모토 다카아키라는 거인의 어깨 위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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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9-11-12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우치다 타츠루의 책을 두 권 가지고 있어요. 철학에 조예가 깊은 저자로 느낍니다.
이 페이퍼를 읽으니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지어다.‘라는 성경? 문구가 생각납니다.
옳은 소수가 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실감합니다.

cyrus 2019-11-18 22:00   좋아요 0 | URL
다수 한가운데서 개인의 솔직한 생각과 의견을 드러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에요. 그 사람들 눈치를 봐야 하죠, 그리고 또 다수 중에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지지해주는 사람을 적어도 한 두 명 정도는 있어야 해요. 소수의 마이너리티가 되는 것은 정말 외로운 일입니다.
 

 

 

 

 

 

 

 

 

귀에 작은 구멍이 있습니다! 여러분, 귀에 작은 구멍이 있습니다!

저는 cyrus라고 하옵니다!

 

 

인간의 양쪽 귀에 구멍이 있다. 이것을 우리는 귓구멍이라고 한다. 그런데 내가 이 글에서 언급하려는 것은 귓구멍이 아니다. 아주 특별한 구멍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것은 귓바퀴 앞에 있는 작은 구멍이다. 내 귀에 4개의 구멍이 있다. 귓구멍과 구분하기 위해 여기서는 작은 구멍이라고 부르겠다.

 

 

 

 

 

    

 

작은 구멍은 말 그대로 작다. 너무 작아서 잘 보이지 않는다. 마치 바늘에 살짝 찔려서 생긴 흉터처럼 생겼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귓바퀴 앞에 아주 미세한 구멍이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래도 작은 구멍을 발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작은 구멍에 대한 호기심을 느낀 그들은 내게 묻는다. 저 구멍은 뭐에요? 정말 신기하네요.”

 

특별한 구멍에 호기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나는 그 작은 구멍에 향하는 시선들이 너무나도 불편하게 느꼈다. 사람들은 작은 구멍의 정체를 알려고 했다. 내가 그 구멍이 생긴 이유를 모른다고 말하면 사람들의 궁금증은 더욱 커져만 갔다. 어떤 사람은 작은 구멍에 대해 가벼운 농담을 했다. 귀에 구멍이 네 개나 있으니 남들보다 더 잘 들리겠네요.” 사람들은 작은 구멍을 뚫어지라 살펴본 다음에 소감을 밝혔다. 대부분 신기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사실 작은 구멍의 존재감을 드러내게 하는 또 다른 특별한 현상이 있다. 작은 구멍에서 누런 고름이 나온다. 이 고름이 갑자기 나오는 건 아니다. ‘작은 구멍이 있는 부위가 간지러울 때가 있는데, 그쪽을 손가락으로 누르거나 문지르면 구멍에 고름이 나온다. 고름은 아주 불쾌한 냄새를 풍긴다. 초등학생 시절에 나는 이 고름 때문에 놀림을 받았다. ‘작은 구멍에 고름이 나오는 걸 어찌 알았는지 나를 놀리는 아이들은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장난이 심한 어떤 녀석은 나한테 가까이 다가오는 척하다가 네 귀에 냄새나!”하고 큰 소리로 말하기도 했다. 그때 작은 구멍이 생긴 이유와 거기에서 고름이 생기는 원인을 알았더라면 그들에게 설명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 나는 작은 구멍이 왜 생기게 되었는지 몰랐다. 너무나도 답답해서 부모님에게도 여쭤봤지만, 부모님의 대답도 내 궁금증을 속 시원하게 풀지 못했다. 어머니는 태어날 때부터 작은 구멍이 있었다고 말할 뿐이었고, ‘작은 구멍에 고름이 나오니까 그 부위에 절대로 손으로 건드리지 말라고 당부했다.

 

나는 어머니의 충고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작은 구멍이 있는 부위가 간지러운 것을 참을 수 없었고, 간지러움을 느낄 때마다 손으로 그 부위에 갖다 댔다. 결국, 왼쪽 작은 구멍에 문제가 발생했다. 작은 구멍이 있는 부위에 염증이 생긴 것이다. 염증이 생긴 부위는 점점 부풀어 올랐다. 귓바퀴 앞에 작은 혹이 생기고 말았다. 그 안에 평소보다 더 많은 양의 고름이 생겼다. 그때 당시 혹을 제거하는 수술을 할 수 있었지만, 수술이 두려운 나는 병원에 가는 것을 한사코 거부했다. 부모님은 어쩔 수 없이 혹이 생긴 부위에 고약을 붙여주었다. 고약을 붙이니까 고름이 자연스럽게 빠져나왔고 혹의 크기도 줄어들었다. 그러나 고약을 붙이지 않으면 또 염증이 재발하면서 고름이 생겼다. 그러면서 혹도 다시 커졌다. 반년 동안 고약을 붙인 채 등교를 했다. 나를 만만하게 보던 아이들은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귀에 고약을 붙이고 다니는 나를 놀렸고, 부풀어 오른 귓바퀴를 신기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내 모습이 얼마나 특이했으면 초등학교 담임선생마저 농담할 정도였다. 나는 아직도 담임선생이 한 말을 기억하고 있다. 내가 귓바퀴에 고름이 생겨서 고약을 붙인다고 말하자 그는 회초리를 들면서 고약을 붙인 부위를 때리는 흉내를 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내가 (회초리로 거기) 때려도 돼? 그러면 덜 아플 텐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그는 선을 넘는 말을 하고 말았다. 어린 제자의 아픔을 이해하고 보듬어주지 못했고, 그것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귓바퀴에 혹이 생기니까 나를 곤란하게 만든 상황이 생겼다. 귓바퀴에 난 혹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바늘을 찌르는 듯한 통증은 수면을 방해했다. 혹에 물이 들어갈까 봐 조심스럽게 머리를 감았다. 미용실에서 이발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나는 미용실 직원에게 혹에 대해서 일일이 설명해야 했고, 직원은 최대한 혹을 건드리지 않은 채 구레나룻을 잘랐다. 사실 미용실에 가는 것이 너무나도 싫었다. 머리카락을 길게 길러서 혹을 가리고 싶다는 생각했다. 머리를 자르러 미용실에 가면 내 혹을 신기하게 쳐다보면서 한마디씩 말하는 아주머니들이 있었다. 혹이 왜 생겨났는지 물어보는 건 당연했고, 내가 혹이 생긴 원인을 설명하면 불쌍하다는 식으로 얘기했다. “너 정말 안 됐구나.” 나는 미용실에 갈 때마다 아주머니들의 구경거리가 되었고, 그녀들은 날 불쌍한 아이로 취급했다. 아주머니들은 자신들이 한 번도 만나지 못한 불쌍한 아이의 엄마가 누군지 알고 싶어 했다.

 

이제 작은 구멍의 정체를 밝힐 때가 되었다. 이십여 년 만에 작은 구멍의 정체를 알았다. 작은 구멍의 정식 명칭은 선천성 이루공(congenital auricular fistula)이다. ‘이루공(耳瘻孔)귀 주위에 생긴 구멍에 의해 일어난 부스럼 또는 혹을 말한다. 귀 안쪽에 주머니처럼 생긴 빈 공간이 있다. 그래서 작은 구멍을 통해 침투한 세균에 의해서 주머니 같은 공간에 고름이 생기고 염증이 일어난다. 염증이 반복되면 그 부위를 적출하고 구멍을 피부로 메꾸는 수술을 한다.

 

선천성 이루공은 기형의 일종이다. 나처럼 태어날 때부터 귓바퀴에 작은 구멍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나라 사람 100명 중 두세 명만이 선천성 이루공이 있다. 선천성 이루공은 엄마 뱃속에서 태아의 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귓바퀴의 융합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서 작은 구멍이 만들어진다. 선천성 이루공은 유전이 된다. 내 외가 쪽 사촌 동생도 선천성 이루공이 있다. 어머니와 고모는 선천성 이루공이 없다. 아마도 외가 쪽 조상 중에 선천성 이루공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 있을 것이다. 기형을 유발하는 유전자는 바로 다음 대에 유전되기도 하지만 몇 대를 지나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을 격세유전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내 자식의 귀에 선천성 이루공이 생길 확률은 반반이다.

 

 

 

 

 

 

 

 

 

 

 

 

 

 

 

     

 

* 닐 슈빈 내 안의 물고기(김영사, 2009)

 

 

 

선천성 이루공이 왜 아주 적은 사람들에게만 생기는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런데 내 안의 물고기라는 책을 쓴 미국의 진화생물학자는 닐 슈빈(Neil Shubin)은 선천성 이루공을 인간 진화의 흔적이라는 흥미로운 가설을 주장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손, 머리 등 인간의 신체는 물고기의 지느러미, 오래전 멸종한 무악어류(턱이 없는 원시 어류)의 머리와 닮은 점이 많다. 실제로 인간의 해부 구조는 물고기와 매우 유사하다. 슈빈은 2004년에 틱타알릭(Tiktaalik)이라는 물고기 화석을 발견했다. 틱타일락의 해부 구조는 우리가 아는 물고기의 해부 구조와 다르다. 여느 물고기처럼 지느러미와 아가미가 있지만, 초기 육상동물의 팔과 손목에 해당하는 뼈와 관절도 있다. 틱타알릭은 물속에 살던 어류가 땅 위에 사는 양서류로 진화했다는 강력한 증거가 됐고, 슈빈은 인간의 몸은 물고기가 진화한 결과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선천성 이루공은 인간이 가지고 있던 물고기 아가미가 퇴화한 흔적으로 볼 수 있다.

    

 

 

 

 

 

 

 

 

 

 

 

 

 

 

    

 

* 로즈메리 갈런드 톰슨 보통이 아닌 몸(그린비, 2015)

 

    

기형의 몸은 흥미와 혐오를 동시에 유발하는 구경거리가 되기 쉽다. 로즈메리 갈런드 톰슨(Rosemarie Garland Thomson)보통이 아닌 몸(Extraordinary Bodies)에서 설명한 내용에 따르면 프릭 쇼(freak show)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기형 인간 쇼는 비정상이라고 규정된 장애 형상들을 보여 줌으로써, 구경꾼들의 호기심과 두려움을 충족시키는 동시에 자신들은 정상이라는 우월감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기능이 있다. 이제 나는 내 귀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두렵지 않다. 내 귀에 왜 작은 구멍이 있는지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은 구멍이 이상하고 비정상적인 신체 구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도 여전히 구멍이 있는 부위가 간지럽고 고름이 나오지만, 그것 외에는 불편함 없이 잘살고 있다. 나는 내 귀에 작은 구멍이 두 개나 있구나하고 덤덤하게 받아들인다. 앞으로 나를 만나게 되면 내 귀를 주의 깊게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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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10-15 2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게 있었군요. 너댓 번을 만나도 전혀 몰랐네요.

cyrus 2019-10-17 17:48   좋아요 0 | URL
구멍이 아주 작아서 잘 보이지 않아요. 오래 만난 친구들도 모르는데요.. ㅎㅎㅎ

강나루 2019-10-15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당하게 밝히시다니
독서를 통해 당당하게 우뚝서셨군요
님을 응원합니다

cyrus 2019-10-17 17:49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이제야 몸의 비밀을 알게 돼서 속이 시원합니다. ^^

카스피 2019-10-15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아는 친척 형님도 cyrus님처럼 이루공이 있는데 주기적으로 고름을 짜내지 않으면 염증이 생겨서 아프다고 하시더군요.큰 병은 아니지만 생활에 불편함이 많으실것 같아요.

cyrus 2019-10-17 17:51   좋아요 0 | URL
저 같은 경우는 크게 한번 염증이 생긴 이후로는 재발하지 않았어요. 이루공을 건드리지 않고, 고름을 짜니까 염증이 생기지 않았어요. 고름 나오는 건 빼곤 불편한 점은 없어요. ^^;;

감은빛 2019-10-15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글을 읽고 처음 알았어요.
어려서부터 많이 불편하셨겠어요. 게다가 놀림까지 받았다니!

유전이라는 건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제 아이들이 정말 애들 엄마와 저를 적절하게 반반씩 닮았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을 때면,
그 생명의 신비에 정말 깜짝 놀라요.
내가 죽더라도 나를 닮은 내 자손이 이 세상을 살아갈 거라는 건 신기한 일인 것 같아요.

cyrus 2019-10-17 17:56   좋아요 0 | URL
유전 현상이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해요. 특히 격세유전이요. 부모와 친자식의 유전은 문제없는데, 그 친자식의 자식이나 후손에게 유전 이상이 생길 수 있어요. 부모 조상이 가지고 있던 유전 문제가 후손에게 나타난 것이죠. 사실 제 친자식이 이루공을 가지고 태어날까봐 걱정됩니다.

2019-10-16 1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10-17 17:57   좋아요 0 | URL
구멍이 두 개 더 있다고 해서 청력이 좋은 건 아니에요.. ㅎㅎㅎㅎ

붕붕툐툐 2019-10-16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구멍이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걸 익히 알고 있는 저는 관찰력이 뛰어난 사람일까요? ㅎㅎ
저도 며칠 전 귀를 뚫어서 혹이 났을 때의 불편함을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게 되었네요~~

cyrus 2019-10-17 17:59   좋아요 0 | URL
귀걸이를 하는 사람을 보면 대단해요. 바늘로 귀에 구멍을 뚫는 것만 봐도 아픔이 느껴지거든요. 그런데 주사바늘은 무섭지 않아요.. ㅎㅎㅎㅎ

AgalmA 2019-10-25 22: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간은 여전히 진화 중이잖아요. 기형이니 뭐니 떠드는 사람은 자신이 무슨 완전체인 줄 안단 말입니까(도리도리)... 인간의 자의식은 어떤 방식으로도 오만함을 폭로하기에 말하는 게 너무 무서워요😱

cyrus 2019-10-28 17:56   좋아요 1 | URL
맞아요. 미래에는 스마트폰의 영향 때문에 시력이 완전 좋은 사람을 보기 힘들 수 있어요. ^^;;

카렌 2019-12-02 23: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솜씨가 있으신 것 같아요. 재미있게 풀어나가시네요. 이 책을 꼭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cyrus 2019-12-03 20:57   좋아요 0 | URL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지난달에 쓴 로드 던세이니(Lord Dunsany)의 작품에 관한 글을 정정한다. 글 제목은 리라젤과 운디네.

    

 

 

 

 

 

 

 

 

 

 

 

 

 

 

  

* [e-Book] 엘프랜드의 공주(페가나북스, 2019)

    

 

 

던세이니의 작품을 전자책으로 출간한 페가나북스공식 홈페이지에 보면 엘프랜드의 공주(The King of Elfland’s Daughter)던세이니의 첫 번째 장편소설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나는 이 작품을 두 번째 장편소설이라고 주장하면서 홈페이지에 있는 작품 소개 내용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했다. 던세이니의 작품들을 번역한 엄진 씨의 반박 의견에 따르면 1922년에 던세이니가 발표한 초기 작품인 Don Rodriguez: Chronicles of Shadow Valley는 장편이 아니라 연작 단편집으로 분류된다. 그렇게 되면 1924년에 발표된 엘프랜드의 공주던세이니의 첫 번째 장편소설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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