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 지능 - 공감의 시대를 위한 다윈의 지혜
최재천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피카츄는 '진화'할 것인가, 말 것인가?

 

 

 

 

 

 

 

88년 또는 9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이라면 '포켓몬 신드롬'을 일으켰던 일본 애니메이션 '포켓몬스터'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어느 생태계에도 속하지 않는 이 수수께끼 특수생명체들이 등장하는 일본의 만화는 전국 모든 어린이들을 열광케했다. '뽀로로'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어린이들이 가장 사랑했던 캐릭터가 피카츄가 아닐까 싶다. 귀엽고 앙증맞은 외모에다가 만화 주인공과 함께 등장했었기에 100여 종이 넘는 수많은 포켓몬스터들 중에서 단언 인기가 많았고 '포켓몬스터'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피카츄였다.

 

만화 '포켓몬스터'가 일본에 처음으로 소개되었을 때만 해도 우리나라의 열풍 못지 않게 큰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은 100여 개가 넘는 포켓몬 캐릭터(오리지널 포켓몬스터 1기 방영 당시 포켓몬의 수는 151종이었다. 지금도 포켓몬의 수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것은 포켓몬 빵에 포함되어 있는 스티커를 모았기 때문이다. 현재도 다양한 버전의 시리즈가 나오고 있는데 아마도 지금까지 나온 만화를 포함하면 포켓몬스터의 수는 수천여 종이 넘을 것이다)가 매 한 편의 에피소드마다 등장함으로써 흥미를 유발했을 뿐만 아니라 몬스터들 간의 대결 구도 그리고 그러한 대결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좀 더 강한 몬스터로 업그레이트하여 '진화'를 해야한다는 구도가 만화를 시청하는 어린이들에게 '경쟁심'과 '소유욕'을 유발하도록 만드는 은근한 자극제가 되었을 것이다.

 

 

 

 

 

 

 

 

전국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일으킨 포켓몬스터 스티커 열풍은 단지 캐릭터 이미지의 대중적인 호감도만은 아니라 스티커를 모음으로써 자신도 만화 속 주인공 지우처럼 몬스터를 잡으려고 하는 소유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가상의 소유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스티커에 집착하게 된 것이다. 그러한 아이들의 심리에는 '소유욕', '경쟁심'이라는 코드가 있는 만화의 스토리텔링의 영향이 컸다.  

 

 

 

포켓몬스터와 관련해서 사람들마다 재미있는 추억 하나가 있기 마련인데 그 중 하나가 포켓몬스터 빵 안에 들어 있는 스티커를 모으는 것이다. 151종의 포켓몬스터 스티커를 다 모으기 위해 하루에 수십번 문방구에 드나들며 빵을 구입한 사람이 많았다. 오로지 빵을 먹기 보다는 조그마한 스티커를 모으기 위해서다. 얼마나 스티커에 집착했냐면 어떤 아이들은 스티커만 가져간 채 한 입 베어 물지 못한 빵을 쓰레기통에 버렸을 정도였다. 이러한 포켓몬스터 캐릭터 빵과 스티커의 성공은 타 제빵회사의 마케팅에 그 영향을 미쳤다. 그 후로 캐릭터가 그려진 스티커가 들어있는 빵들이 등장했지만 포켓몬스터 스티커의 열풍만큼 미치지 못했다. 캐릭터 이미지가 들어간 제품이 망할 수 있었던 것은 포켓몬스터 빵의 인기를 받쳐 준 만화의 영향력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아이들이 포켓몬스터 스티커를 모은 이유는 단지 그 캐릭터 이미지가 호감이 가서 그런 것은 아니다.

 

사람은 가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진짜 세상에서 실제로 구현하고 싶어하려는 마음이 있다. 실제로 되지 않더라도 그것과 관련되거나 유사한 대상을 통해서 욕구를 충족시키려 한다. 만화 에피소드에 빈번이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몬스터 사냥 그리고 자신이 잡은 몬스터를 키우고, 다른 몬스터 간의 대립 설정 등 만화 속에서만 가능하는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 한 실제 세계에 살고 있ㄴ는 어린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포켓몬스터 스티커를 모으는 것 밖에 없다. 결국 만화 속 이야기에 설정된 전개 구도, 즉 스토리텔링의 힘이 아이들을 조그만한 스티커에 열광하도록 만든 것이다. 어린이들에게 만화 '포켓몬스터'는 단순히 재미있는 만화를 넘어서 만화 속에 등장하는 몬스터를 갖고 싶은 소유욕을 불러일으킨다는 점, 그리고 진화를 거듭하며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몬스터들은 어린이들에게 또 다른 힘의 상징이 되었던 것이다.

 

 

 

 

 

 

 

앞서서, 만화 포켓몬스터의 에피소드 속에는 어린이들의 감정을 자극할 정도로 '경쟁'과 '소유욕'이라는 코드를 은근슬쩍 심어 놓았다고 설명했는데 그러한 의도를 구체적으로 볼 수 있는 에피소드가 바로 1기 초창기 때 '피카츄와 라이츄'의 대결구도가 등장했던 편이다.

 

지우와 피카츄는 전국에 위치한 체육관을 전전하면서 그 곳에서 체육관장들의 포켓몬들과 대결을 펼친다. 그리고 그런 대결에서 승리를 하면 일명 '포켓몬 배지'를 획들할 수 있다. 지우 일행은 여행을 하면서 포켓몬과의 대결에서 연전연승하는 라이츄를 훈련하고 있는 포켓몬 체육관장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여느 에피소드와 다름없이 패기가 넘쳤던 지우와 피카츄는 체육관장의 라이츄를 상대하게 되지만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지 못한 채 지고 만다. 자신만만했던 대결에서 대패를 하게 되자 크게 좌절을 하게 된 지우는 한 때 포켓몬 체육관장으로 활동했던 동료들, 이슬이와 웅이 그리고 자신에게 크나큰 패배를 안겨준 체육관장로부터 똑같은 내용의 조언을 듣게 된다.  

 

"피카츄가 라이츄를 이기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피카츄를 진화시킬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지우는 한동안 고민을 하게 된다. 여행길에서 동고동락하면서 정이 들었던 피카츄를 라이츄로 진화시킨다는 게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이다. 피카츄가 라이츄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번개의 돌' 이 있어야 한다. 피카츄는 다른 포켓몬과 달리 아무리 능력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켜도 라이츄로 진화할 수 없는 종이다. 단지 '번개의 돌'을 통해서만 라이츄로 진화할 수 있다. 하지만 라이츄로 진화하면 그토록 좋아했던 노란 피카츄의 모습을 이제는 볼 수 없으며 한 번 진화되면 원래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또 번개의 돌을 통해 진화할 수 있는 기회도 피카츄 그리고 그의 동료이자 트레이너인 지우의 입장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다. 하지만 라이츄를 이기기 위해서는 피카츄는 좀 더 강한 라이츄로 진화시켜야 한다. 

 

과연 지우는 포켓몬 배지를 획득하기 위해서 피카츄를 진화시킬 것인가? 아니면 사랑하는 피카츄를 위해서 진화의 작용을 포기하고 말 것인가?

 

 

 

 

 

 강하고 완벽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 진화를 해야한다고?

 

'진화'와 관련해서 글의 초반부터 포켓몬스터 옛 에피소드까지 들먹이는 이유는 만화 속에 자주 등장하는 '진화'라는 개념이 잘못 되었거니와 만화 시청을 통해 왜곡된 의미를 받아들이게 되는 문제점을 쉽게 압축해서 설명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진화'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적자생존', '약육강식'이다. '적자생존'은 간단히 말하자면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하는 생물이나 집단이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와 비슷한 것이 약한 생물이 강한 생물에게 잡아먹힌다는 뜻의 '약육강식'이다. 이러한 의미 때문에 '진화'는 환경에 적응할 수 있도록 강하게 변화할 수 있는 과정이며 진화의 과정을 거치지 못한 종족 또는 생물들 앞에는 '미개'라는 단어를 붙여 '열성적 존재'로 바라보는 인식을 낳게 되었다.

 

결국 잘못된 대중들의 인식은 진화론을 주창한 다윈으로 엉뚱하게 불똥이 튀게 된다.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모르는 대중들은 그의 이론을 경쟁을 유도하며 경쟁 속에서 살아남는 강한 존재의 힘을 부각시켜 준다는,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지기 마련이다. 잘못된 선입견의 전파는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확산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다윈의 진화론을 인간사에 적용시킴으로써 '사회적 진보'를 내세웠고 그의 사촌인 프랜시스 골턴은 과학사에 있어서 최악의 학문이라고 평가받는 우생학을 만들 수 있었다. 다윈의 이론을 '적자생존'의 의미로 받아들인 골턴은 우수한 소질을 가진 인구의 증가가 많아야 하고 대신에 열악한 우성적 소질의 인구의 증가를 방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골턴의 우생학은 유태인 학실이라는 독일 나치스의 비인륜적 행동을 만드는 데 크게 일조했다.

 

진화론에 대한 대중의 왜곡된 이해는 비단 세계사적 착오의 사례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 비해 다윈의 사상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도 존재한다.『다윈 지능』을 쓴 최재천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나라는 제대로 된 다윈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후진국이다. 

 

최 교수는『다윈 지능』을 통해 학자와 대중들에 의해 입혀진 잘못된 옷에 가려진 다윈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잘못 알려진 다윈 관련 용어들도 바로잡을 권하고 있다. 사실 다윈은 단지 '경쟁의 원리'를 강조하기 위해서 진화론을 설정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환경에 따라 생물의 모습들에서 드러나는 차이점에 대해서 호기심을 품었으며 그러한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 진화의 원리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진화'라는 단어의 사용에 대해서 나름 고심한 역력이 있었다. 다윈에게 있어서는 진화는 고등한 존재가 살아남는 데 유리한 경쟁 체제의 과정으로 보려고 하지 않았다.

 

 

다윈 자신은 원래 '미리 예정되어 있는 것을 펼쳐 보인다'는 의미를 지닌 그리스어 'evolvere'에서 파생되어 나온 'evolution'이란 용어의 사용을 꺼려했다. 그 대신 그는 '세대 간 돌연변이' 또는 '수정된 상속'이라는 표현을 주로 썼다. 『종의 기원』이 판을 거듭하며 다윈은 결국 너무나 굳어 버린 용어인 'evolution'을 받아들이지만, 그의 일기에는 이 세상의 온갖 생명체들을 논할 때 "나는 결코 어느 것이 하등하거나 고등하다고 쓰지 않겠다."고 다짐하기도 한다.

 

 

 - 최채천 『다윈 지능』중에서, pp 68 -

 

 

  

 

다윈의 진화론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용어가 바로 '자연 선택론' 이다. 다윈은 부모가 가지고 있는 형질이 후대로 전해져 내려올 때 자연선택을 통해서 주위 환경에 보다 잘 적응하는 형질이 선택되어 살아남아 내려옴으로써 진화가 일어난다고 주장하였다. 생물 개체는 같은 종이라도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변이가 나타내게 되는데, 이 변이 중에서 자신의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변이가 있어서 선택이 일어나서, 결국 후대로 전해져 내려간다는 것이다. 이 때 주위 환경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생물은 같은 종이나 다른 종의 개체와 경쟁을 해서 살아남아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생존경쟁이다. 즉 '자연선택론'은 강한 생물이 약한 생물보다 환경적응에 유리한 입장이라고 설파하고 있는 예정적이면서도 절대적인 관점의 이론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리뷰에서는 '자연선택론'이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생물학 교과서에는 '자연선택설'로 소개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최 교수는 이미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이 증명되었기에 가설의 의미가 담긴 '자연선택설' 대신에 '자연선택론'을 쓸 것을 제안한다.

 

 

다윈의 진화론을 아직도 '자연 선택설'이라고 부는 사람들이 있지만 앞으로는 그런 실례를 범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다윈의 자연 선택에 관한 설명은 더 이상 가설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게 아니다. 지난 150년 동안 혹독한 검증 과정을 거쳐 당당히 이론의 지위를 획득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반드시 '자연 선택론' 또는 '자연 선택의 원리'라고 부를 것을 주문한다.

 

 - 최채천 『다윈 지능』중에서, pp 31~32 -

 

 

 

이미 전세계적으로 다윈의 이론들이 검증되는 결과들이 많이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만 여전히 '자연선택설'로 쓰고 있다는 것은 우리나라가 얼마나 다윈에 대해서 너무 무지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진화론에 관련해서 또 다른 왜곡의 논리는 자연 선택이 생물을 '완벽하게' 만들어 주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사실 자연선택설의 원리를 이해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생물은 오랜 세월동안 선택의 과정 끝에 결국 완벽한 존재로 가까워지는 것처럼 느껴지게 된다. 다윈의 진화론에 대해 크게 반발했던 당시 영국의 종교계와 학계가 훗날 그의 이론에 대한 비난을 멈출 수 있었던 것은 진화론은 수긍했다라기보다는 오히려 다윈의 이론을 원숭이에서 '완벽한' 인간이 탄생되는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근거로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앞에서도 자연 선택론에 대해서 설명했듯이 인간 그리고 생물은 환경의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 유리한 번식의 과정을 선택하게 되는데 여기서 말하고 있는 '환경'은 고정불변하지 않다. 그리고 제아무리 인간이 정보와 사회현상을 예측할 수 있는 원리와 특정 도구가 있다하더라도 환경의 변화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환경의 변화'는 생물을 완벽한 존재로 만들게끔하는 조건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예측할 수 없는 환경의 변화에 인간과 생물은 정확하게 '맞춤식'으로 적응할 수도 없다.  

 

 

 

 

 

 '완벽함'을 위한 인위적인 변이의 위험성

 

앞서 이야기 하다 만 포켓몬스터 에피소드의 결론을 소개하자면 지우는 피카츄를 진화시키지 않은 채 그대로 '피카츄'의 모습으로 라이츄와 재대결하게 된다. 결국에는 만화 주인공 피카츄가 승리하고 만다. 그런데 첫 대결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피카츄가 자신보다 강한 라이츄와의 재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사실 피카츄와 싸웠던 라이츄는 단순히 포켓몬들과 맞서 싸워 이길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진화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라이츄는 진화하기 이전 피카츄만이 사용할 수 있는 공격 및 방어 기술을 제대로 습득하지 못했으며 그러한 경험의 기회를 놓친 채 바로 라이츄로 진화해버렸던 것이다. 자신의 눈에는 생소하기 짝이 없는 피카츄의 공격 기술에 라이츄는 이렇다 할 방어도 하지 못한 채 패배한다. 지우와 피카츄는 이러한 라이츄의 치명적인 약점을 간파하여 역으로 승리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었다.

 

포켓몬 간의 대결에서 승리를 목적으로 '맞춤형'으로 진화해버린 라이츄의 사례는 '진화'에 대한 관점에서 본다면 눈 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피카츄에게 당한 라이츄의 사례를 통해 우리는 '진화'는 완벽한 존재로 만들어질 수 있는 과정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강하고 우수한 품성을 만들기 위한 의도적인 진화 또는 변이는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다.

 

우리나라에 키우고 있는 닭들이 조류 인플루엔자에 감염되어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도 진화와 변이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인식과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양계장의 닭은 모두 달걀을 많이 낳기 위해서 '자연 선택'이 아닌 '인위적인 선택'을 통해 개량된 품종이다. 달걀을 많이 낳을 수 있는 우수한 품종의 닭만 키우다보니 달걀을 많이 낳지 못한 닭들 간의 경쟁이 사라지게 되고 종(種)의 유전적 다양성도 희박해진다. 이렇다보니 자연적인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개량 품종된 닭들은 조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견딜 수 있는 면역력조차 없으며 양계장 안에 바이러스가 감염되는 순간 모든 닭들이 죽게 된다.

 

완벽함을 추구하는 인위적인 진화를 추구하고자 하는 열망은 양계업에서만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유전자의 구성을 인위적으로 조작해서 질병의 위험을 미리 제거할 수 있다는 '맞춤 유전자'. '맞춤 아기' 도 치명적인 모순의 결함을 지니고 있다. 서울에 사는 모든 인구가 병에 걸리지 않는 정말 완벽한 유전자를 가졌다면 과연 이들중에 제 아무리 강력한 항생제에 살아남을 수 있는 무시무시한 바이러스 앞에서 살아남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지금 우리 사회는 '다윈 지능'이 필요해야 할 시점

 

진화는 철저하게 종족 번식을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자연현상의 원리에 대해서 우리 인간이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다윈은 벌과 개미와 같은 서로 돕고 사는 사회성 곤충의 존재에 대해서 의문을 가졌으며 그 후 다윈의 후계자들은 이기주의적 개체들이 구성되는 생태계에서도 이타주의적 개체들도 살아남는 이유에 대해서 연구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이타주의적 관점의 진화론을 소개하기에는 내용상 길어질 수 있고 자세한 내용은 책에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기에 생략하겠다.

 

다만 자연 선택 이론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이타주의적 현상이 만들어 낸 진화의 산물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쯤은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현상은 진화는 번식 보존을 위한 경쟁 체제의 과정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책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최 교수는 이제 우리 사회에는 '다윈 지능'(Darwinian inteligence)가 필요하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 책에서 저자가 강조하고 있는 '다윈 지능'은 머리말에서만 언급될 뿐, 본문에서는 '다윈 지능'이 들어가는 문장을 찾아볼 수 없다. 문장 하나하나 마침표까지 읽어야 하는 독서 습관이 아니라서 놓칠 수도 있겠지만 확실한 건 본문에서는 다윈의 진화론과 오늘날의 연구 성과들을 설명하고 있을뿐 '다윈 지능'의 정확한 정의 또는 그것을 설명하고 있는 구체적인 설명조차 없다.

 

하지만 핵심 내용을 소개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 책을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본문에서 소개된 다양한 진화 이론들을 통해서 독자는 옳고 그름을 따져가며 다윈의 진면목을 제대로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다윈 지능이 어떤 방식으로 구현할 수 있을지 스스로 모색해봐야 한다.

 

책의 머리말에는 '다윈 지능'이 언급되기 전에 '집단 지능'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기도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집단 지능'이란 협력하거나 경쟁을 통하여 얻게 되는 집단적 지적 능력을 말한다.  '집단 지능'의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SNS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SNS을 통해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사회 현상에 대해서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거나 타인의 의견에 동의 또는 비판을 한다. 결국에는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소통'이라는 행위에 있기에 가능하다.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에게 소통을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행위 중의 하나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 사회에서의 '소통'의 능력은 부재중이다. 권력면에서 우위가 있는 기득권층은 자신의 입장에 좀 더 유리한 방향으로 만들기 위해서 상대방과의 소통을 무시한다거나 아예 자신의 입장에 반하는 의견들을 암묵적으로 또는 공공연하게 차단하기도 한다. 사회 내에서 강하다고 하는 자들의 논리에만 집중하게 되는 사회는 또 다른 문제점을 양산해낸다. 무조건 '강하고 나쁜 자'들이 살아남아야 하는 인식 하에 경쟁을 유도하게끔 분위기로 변하게 된다. 특히나 신자유주의의 영향이 드세져만 갈수록 우리 사회에서 문제점과 폐단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친한 동료보다 내가 앞서야 하며 '조작', '은폐'도 거리낌없이 할 정도로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러한 비도덕적인 아노미는 사람들 간의 신뢰마저 무너뜨리게 되며 소통은커녕 서로 반목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우리 사회가 소통하기 위해서는 '공감'이 필요하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공감'이란 상대방의 의견과 마음에 동의한다는 사전적 의미만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는 정말 다양한 의견과 생각이 공존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과 다른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할 줄 알며 그것을 검증하면서 개선해나갈 수 있는 적극적인 토론 및 대화의 장이 마련되어야 한다. 그리고 비슷한 형태의 획일적인 유전자만 있는 사회 또는 개체가 살아남을 수 없듯이 우리 사회에는 자신이 알고 있는 학문의 지식에만 내세울 줄 알고 다른 학문의 존재를 무시하려는 스페셜리스트보다는 모든 학문의 지식을 아울러 소통하고 협력할 수 있는 다양성을 지닌 제너럴리스트가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최 교수가 항상 강조했던 화두, 바로 통섭(統攝)이다. 통섭은 서로 다른 지식과의 만남이다. 다양한 분야가 만나 오래된 궁금증의 해답을 찾아내기도 하고 새로운 인류의 미래를 예고하기도 한다. 전혀 다르다고 생각되는 다양성의 조호와 어울림이야말로 좀 더 발전되는 미래의 사회로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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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2-02-28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예전에 교회에서 가르치던 아이들과의 대화를 위해서 진화 계보도를 외웠던 적이 있습니다. 사실 포켓몬이 재미있기도 하고요. 요즘 포켓몬은 왠지 짝퉁 냄새가 나서 과거만큼이지는 않지만 나름대로의 재미가 있습니다. 저도 피카츄 진화하지마를 외쳤던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cyrus 2012-02-28 22:52   좋아요 0 | URL
ㅎㅎ 맞아요, 만화 내용이 재미있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죠.
요즘에 나오는 시리즈는 보지 않지만 정말 초창기 시리즈가 무척 재미있게
봤어요. 그 때 동네 친구들과의 대화 주제에는 포켓몬이 빠질 수가 없었고요.
^^
 
르네 마그리트 시공아트 18
수지 개블릭 지음, 천수원 옮김 / 시공아트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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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치 나 이전에 그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생각한다.

 

 

- 르네 마그리트, 수지 개블릭『르네 마그리트』시공아트, pp 11 -

 

 

 

 

 

 

 

 내가 좋아하는 마그리트의 그림들

 

 

 

 

 

 

르네 마그리트  「모험 정신」 1960년

 

 

 

내가 제일 좋아하는 특별한 화가를 꼽으라면 르네 마그리트다. 블로그 메인사진이 마그리트의 그림이다. 그의 그림들은 아름답지도 않다. 그런데 블로그 메인사진으로 올릴 정도로 마그리트의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는 단지 그의 그림은 '어렵기' 때문이다.

 

 

 

 

 

르네 마그리트 「교장」 1955년

 

 

 

처음 알라딘 블로그 시작할 때 메인사진이 마그리트의「교장」이었다.  마그리트의 그림이라고 하면 여러가지 이미지들을 떠올릴 수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중산모를 쓴 남자의 뒷모습이다. 마그리트는 중산모를 쓴 남자의 뒷모습을 주제로 여러가지 작품들은 남겼는데「교장」과 「모험 정신」이 그러한 것들이다. 그림 속 중산모를 쓴 남자는 뒤돌아선 상태이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자신의 시선이 향하는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황무지다. 그의 머리 위에는 하현달이 떠올려져 있다.

 

이 그림을 블로그 메인사진을 올리게 된 이유는 특별히 마그리트를 좋아해서가 아니었다. 블로그라는 것을 처음으로 시작한 때가 2010년이었다. 살면서 처음으로 블로그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닉네임 설정 못지 않게 블로그 메인사진을 어떤 것을 쓸까 나름 고민을 많이 했었다. 결국 선택한 것이 마그리트의 그림이었는데 특별히 그의 그림을 좋아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단지 마그리트의 '중산모 사나이'가 온라인 공간의 익명성과 부합된다고 생각해서 정했다. 온라인 공간은 하루에 수십명 또는 많게는 수백명 사람들과 동시에 접속, 교류할 수 있다. 하지만 오프라인과는 다르게 서로 얼굴을 모른 채 만난다. 세이클럽, 트위터, 페이스북 등 멀리 떨어져 있어도 수많은 사람들과 손쉽게 대화할 수 있는 공간의 수단이 있지만 우리는 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음에도 그 행위를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다. 사람들마다 추구하는 성향이 각기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 자신이 어떤 행위를 하고 있는지 그리고 실명, 거주지 등 자신과 관련된 모든 정보들을 남들에게 드러나지 않으려고 한다. 이러한 일련의 사고 과정(?) 도출 끝에 마그리트의 그림을 메인사진으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전까지만해도 나는 마그리트를 좋아했음에도 불구하고 마그리트가 어떠한 의도로 저런 그림을 그렸으며 심지어 블로그 메인사진에 있는 그림의 제목조차 모르고 있었다. 알라딘 서재이웃의 덕분에 그림의 제목을 알게 되었지만 왜 뒤돌아 선 중절모 사나이가 그려진 그림의 제목이 왜 하필 '교장' 이며 또는 '모험 정신'이라고 했는지 무척 궁금했다. (현재 블로그 메인사진을 「모험 정신」으로 변경, 설정한 이유는 단지 '모험 정신'이라는 제목에 혹해서 분위기 전환할 겸 바꾼 것이다. 메인사진을 변경하지 않은 채 오랫동안 유지하면 지루하기 쉽상이다. 기분에 따라 가끔씩 바꿔줄 필요가 있다. 그래서 메인 사진이 언제 바뀔지 모른다)

 

 

 

 

 

 

르네 마그리트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1929년

 

 

 

내가 제일 좋아하는 화가에 대해서 너무 무기했기에 최근에 마그리트의 미술세계를 알 수 있는 수지 개블릭의『르네 마그리트』를 구입해서 읽게 되었다. 물론 마그리트의 미술을 이해하고 싶은 목적도 있었지만 사실은 이 책을 읽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마그리트의 또 다른 그림「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 대해서 분석한 미셸 푸코『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때문이다. 이 책이 작년에 나왔는데 나오자마자 바로 주문했다. 그리고는 읽지 않았다. 아니, '읽을 수가 없었다'라고 하는 표현이 적절하다. 마그리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자의 어리석은 행동이 푸코의 이 얇은 책을 가볍게 본 것이다.

 

사실 수지 개블릭의 책도 쉽지가 않다. 이 책은 마그리트의 미술 세계를 그가 표현했던 특정한 오브제들을 주제별로 분류해서 소개하고 있는데 특히 내가 제일 어려워한 내용이 바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장(제8장 '단어의 사용')이었다. 사실 그의 그림이 어려울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는 붓을 쥐고 있는 '화가'이면서도 동시에 생각하는 '철학자'였기 때문이다.

 

 

 

 

 '철학자'가 되고 싶었던 화가

 

마그리트의 그림은 사회적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뛰어난 상상이나 환상 등 인간의 무의식이 내포하고 있는 상상력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기발한 발상, 관습적 사고의 거부, 신비하고 환상적인 분위기, 시적인 조형성 등 고정관념을 깨는 소재와 구조로 작품을 제작하였다.

 

하지만 이런 개성 강한 화풍이 오히려 마그리트의 미술에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작용이 되기도 한다. 혹자들은 마그리트를 '초현실주의자'의 범주에 포함된다고 생각하는데 맞는 사실이다. 당대 초현실주의자들이 마그리트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는 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를 100% 초현실주의자라고 말할 수 없다. '초현실주의'에 마그리트의 미술을 포함할 수 있지만 반대로 마그리트를 '초현실주의'에 포함할 수 없는, 참으로 기묘한 관계다.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던 초창기 시절동안 마그리트는 그 당시 앙드레 브로통을 중심으로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었던 초현실주의자들과 교류를 맺은 적이 있다. 그러나 마그리트와 초현실주의자들 간의 관계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마그리트가 추구하는 미적 경향과 달랐으며 특히 초현실주의자들을 이끌고 있었던 앙드레 브로통과의 불화는 그가 초현실주의와 결별하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마그리트와 초현실주의자들. 이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목적, 즉 이성의 지배를 벗어난 비합리적인 세계를 지향하여 '보여주기'와 '정형화된 아름다움' 등과 같은 기존의 미적 가치에 대한 반발심은 같았지만 그것을 토대로 추구하고자 하는 '방향'이 달랐을 뿐이었다.  

 

 

 

 

 

 

 

르네 마그리트 「헤겔의 휴일」 1958년

 

 

 

초현실주의가 꿈과 무의식의 세계에 보다 비중을 두었던 것에 비해 마그리트의 작품은 환상적인 분위기가 나면서도 철저한 계산으로 만들어진 논리적이며 철학적인 근거를 가진다. 실제로 철학에 조예가 깊었고, 화가라는 이름 대신 '생각하는 사람'으로 불리길 원했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단지 '보여주기' 식의 이미지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림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 철학자처럼 끊임없이 존재와 세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그것을 그림을 통해 시각적으로 재현하고자 했다. 그래서 마그리트의 작품은 단순히 보는 그림이 아니라 생각하는 그림, 상식을 뒤엎는 창의적인 사고를 자극하며 우리가 속해있는 세계를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도록 하는 철학적인 그림인 것이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 낯설게 하기의 즐거움

 

 

 

 

 

르네 마그리트 「사나워질 듯한 날씨」 1928년

 

 

 

마그리트는 사과, 토르소, 튜바, 담배 파이프 등 우리에게 친숙한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되 모순되거나 대립하는 요소들을 같은 화폭에 결합하거나, 어떤 오브제를 전혀 엉뚱한 환경에 위치시켜 시각적 충격과 신비감을 불러일으키고자 했다. 이러한 기법을 '데페이즈망'(Depaysement)이라고 한다.

 

여성의 토르소는 그걸 제작한 조각가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하는 용도가 있고, 튜바는 소리를 내기 위한 용도의 악기다. 그리고 의자는 우리가 앉기 위한 도구다. 우리가 보고, 사용하고 있는 모든 사물들에게는 고유의 용도가 있으며 그러한 용도에 의해 우리는 그 사물에게 정형화된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마그리트의 그림에서는 우리가 부여한 사물의 용도 및 의미는 불필요하다.  마그리트는 그러한 익숙한 감각에서 결별할 것은 주장하며 자신의 생각을 '철학 논문'으로 쓰는 대신에 그림으로 표현했다. 마그리트에게는 우리가 알고 있었던 사물의 의미들은 고정관념 또는 선입견에 불과한 것이다.

 

 

 

 

 

 

르네 마그리트 「피레네의 성」 1959년

 

 

 

하나하나의 사물은 극히 보통의 물체라도, 그것들이 일상적인 위치를 떠나서 만났을 때 사람들에게는 낯설면서도 강렬한 충동을 느낄 수 있다. 「피레네의 성」은 현실 세계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현상이다. 하늘 위에 있는 모든 것은 중력의 작용을 거스를 수 없다. 커다란 돌덩어리는 바다로 추락해야 정상이다. 그러나 여기서 마그리트는 중력의 작용을 의도적으로 배제한다. 이 그림을 보면서 '하늘의 돌덩어리가 바다 아래로 추락하지 않는 거지?  원래 중력에 의해서 떨어져야하잖아. 이런 말도 안 되는 그림이 어딨어?' 라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과학자 또는 마그리트의 그림을 이해하지 못하는 선입견이 강한 사림일 것이다. '중력의 원칙'을 모르면 학창 시절에 공부를 소홀히 했다고 생각할 수 있어도 마그리트의 그림을 볼 땐 중력의 원칙을 몰라도 된다. 오히려 이 그림을 보면서 낯설었다거나 신기하게 느껴졌다면 마그리트의 그림을 이해했다고 보면 된다. 그것이 마그리트가 진정 그림을 보는 사람에게 원하는 '그림을 보는 방식'이다.

 

마그리트는 '생각하는 자'답게 익숙한 대상의 의미를 배제시키면서도 지금까지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을 창조하여 낯설음과 혼란의 미학을 만들고자 했다. 마그리트의 그림에는 어떤 사물을 원래 있던 환경에서 떼어내 엉뚱한 곳에 갖다놓는 '고립’, 독수리를 돌의 재질과 같이 변형시키는 식으로 사물이 가진 성질 가운데 하나를 바꾸는 '변경', 성채와 나무 밑동을 결합하는 식의 '사물의 잡종화', 작은 사물을 엄청난 크기로 확대하는 식의 '크기의 변화', 평소에는 만날 수 없는 두 사물을 나란히 붙여놓는 '이상한 만남', 두 사물을 하나의 이미지로 응축하는 '이미지의 중첩',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사물이 한 그림 안에 존재하는 '패러독스' 등의 방법으로 다양하게 등장한다.

 

 

 

 

 

 마그리트를 좋아하세요

 


 

 

 

 

 

자신이 제작한 「야만인」옆에 포즈를 취하고 있는 마그리트 (1938년에 촬영,

 

수지 개블릭『르네 마그리트』시공아트, pp 56) 

 

  

 

현대미술 특히 '초현실주의'라고 하면 그림들이 어렵다고 생각한다. 맞다. 어려운 건 사실이다.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이상한 형체들이 난무하는 그림들을 보면 이런 그림을 그린 화가들의 머릿속이 궁금하게 된다. 마그리트 역시 그렇다. 『르네 마그리트』를 쓴 저자 수지 개블릭은 마그리트가 생전에 살아있을 당시 8개월동안 함께 지냈다. 그러한 경험이 있었기에 마그리트의 미술 세계를 상세하면서도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책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책 한 권만 가지고 마그리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마그리트의 미술은 익숙한 사고방식을 배제해야하며 그림을 보는 이들에게 끊임없이 물음을 요구한다. 특히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의 해석은 철학 배경 지식 없다면 그것을 이해하는 데 어려우며 많은 시간이 할애된다. 푸코와 같은 철학자들이 유독 마그리트의 그림을 좋아하고 분석하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그림을 어렵다고 해서 좌절하지 말 것. 우리는 어떤 화가의 그림을 보면 그 그림 속에 그려진 대상의 의미를 파악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해석함으로써 이 그림을 그린 화가의 의도를 알게 된다. 그러나 마그리트의 그림은 예외다. 중산모를 쓴 남자의 그림이 왜 하필 제목이「교장」인지, 하늘에 둥둥 떠 있는 바위의 성이 도대체 무엇을 설명하려고 하는지 머리 아프게 생각하지 마라. 마그리트는 그림을 보는 관객에게 생각을 요구하고 있지만 그러한 요구에 대해 머리 아프고 어렵다고 생각하면 회피하면 된다. 그것은 선택의 몫이다. 마그리트의 그림 앞에서 오랫동안 생각해야 하는 감상법은 철학자들에게 맡겨두자. 그 대신에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낯설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느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르네 마그리트 「빛의 제국」 1954년

 

 

 

 

 

 

우리가 믿어 왔던 상식이나 철학 등을 뒤흔들어 놓는 일대 변혁을 가져다준 '마그리트 미학'을 최근 기업들이 창의력 개발에 이용하려는 사례들이 늘고 있다. 또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디자인들이 세상에 나올 수 있는 영감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 그만큼 마그리트의 그림은 한 번 보고 나서도 머릿속에 절대로 잊혀지지 않을 정도로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화가들 대부분은 일반 사람들과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며 문제가 있을 정도로 성격적 결함이 있기 마련이다. 마그리트도 그러한 예술가적 천운을 피할 수 없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자살은 마그리트 평생 고통스러운 트라우마로 자리잡았다. 그러한 불행의 원인은 그를 우울증에 고통스러워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그림을 통해서 그러한 마음의 고통을 벗어나고자 했다. 비관주의자 쇼펜하우어가 삶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철학자의 길을 걷게 되었뜻이 마그리트는 그림을 그리되 거기에 철학을 덧붙였다.

 

그는 여느 화가들과 다르게 대중들에게 노출되는 것을 꺼렸으며 자신의 예술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튀는' 행동을 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한 마그리트의 익명성 덕분에 중산모를 쓴 남자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

 

 

 

 

 

 

 

르네 마그리트 「심금」 1960년

 

 

 

그러나 마그리트는 쇼펜하우어처럼 비관주의자이요 고독을 심취한 외톨이가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재미있는 유머를 구사할 줄 아는 장난끼 넘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을 잘못 이해했더라도 너그러이, 쿨하게 받아들일 줄 알았다. 자신의 그림을 해석했다는 사람들에게는 마그리트는 항상 '당신이 저보다 더 운이 좋으십니다'라고 대답할 뿐이었다. 겸손한 척 하면서도 자신의 그림을 해석하려는 선입견으로만 바라보는 자들을 은근히 조롱하는 마그리트다운 유머다.

 

마그리트의 그림들은 유쾌한 수수께끼다. 현실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공존이 불가능한 두 영역의 병치적 발상은 낯설게 느껴지면서도 「심금」속 유리잔 위에 담겨진 흰 구름 같이 의외로 신선하면서도 평화로운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이 바로 마그리트가 사람들에게 전달해주고 싶은 유쾌한 장난이면서도 낯설게 하기의 즐거움이다. 그래서 그의 어려운 그림을 좋아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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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2-27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피레네의 성>을 좋아한답니다. 거대한 돌섬이 떠있는 광경은,
이상하게 가슴을 뛰게 하거든요... 아마 제 동경이겠지요.

오랜만에 시루스님의 메인 타이틀 그림을 다시 보는군요. 첨에 봤을 때
저 매끈한 뒷모습이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그리고 달도. 저는 초생달을 아주 좋아하거든요. 제게 <교장>이라는 그림의 제목을 붙이라 한다면, 초월이라 붙이겠어요!

저는 온라인 세상, 오프라인 세상을 선긋는 분들이 있는데, 저는 그렇지 않아요. 인연이 된다면 충분히 온라인 세상의 사람들도 오프라인에서 교류하고 지낼 생각이 있답니다. 또한 온라인 세상의 사람에 대해 환상을 품는 경향이 상당한데, 그것은 깨버려야할 과업이라는 생각도 있구요... ㅋㅋ

cyrus 2012-02-27 20:32   좋아요 0 | URL
저도 제일 좋아해요. 사실 글에서 소개한 그림 말고도 정말 좋은 그림
많아요. 진짜 그의 그림이 한 번 보면 잊혀지지 않아서,, 그래서
좋아할 수 밖에 없는거 같아요.

ㅎㅎ 초월이라는 제목이 잘 어울리는데요. 단순히 달이라는 의미도 있고
나의 존재에 대해서 초월하겠다는(?) 의미도 있는건가요? ^^

온라인과 오프라인 세상을 구분하지 않는 마고님의 생각이
마그리트의 생각가 유사한데요, 마그리트도 틀에 박힌 이분법적 사고를
좋아하지 않았거든요 ^^

차트랑 2012-02-27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
들어서기만 하면 정신을 못차리게하는 마그리트...
초현실은 거의 독화를 불가능하게 합니다 ㅠ.ㅠ
진중권의 미학오디세이를 읽고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이면에 철학을 깔아 놓고는
그 구멍으로 기어들어오거나 말거나...
뭐 그런 도발 정신의 화신 ㅠ.ㅠ
그러나 사고의 틀을 완전하게 벗어나게 하는 자유로움을
그야말로 선물하는 사람 마그리트...
전 여전히 머리가 아프죠 ㅠ.ㅠ
그러나 글에 추천을 하지 않을 수는 없군요^^

cyrus 2012-02-27 20:34   좋아요 0 | URL
저도 처음에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 덕분에 마그리트라는 화가를
알게 되었어요, 그런데도 여러 번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해하기가
어려웠어요. 제가 읽은 마그리트 개론서만 해도 두 세번 정도 읽었을
정도니까요. ^^;;

꽃도둑 2012-02-27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일할 때 아예 책을 사버렸잖아요...
기억나세요? 아바타에 대해 물었더니 마그리트 그림이라고 해서...
검색을 하다보니 아,,특이한 거예요. 마침 얼마 있다가 세일을 하길래 그림책을 사버렸잖아요..암요, 좋아합니다...^^

cyrus 2012-02-27 20:34   좋아요 0 | URL
혹시 세일할 때 산 책이 마그리트 그림들 모아놓은 책 맞죠?
저도 구입했어요, 세일하고 있었을때요 ^^

꼬마요정 2012-02-27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판다님이 마그리트 그림이랑 사진이랑 자주 올려주셨어요.
그 때 보면서 친숙해졌는데... 오늘 여기서 마그리트를 만나네요~^^
옛날 생각나요...

cyrus 2012-02-27 20:36   좋아요 0 | URL
제 글이 요정님에게 알라딘의 추억을 불러일으켜줬네요.
기회가 된다면 마그리트 그림에 소개하는 글을 써봐야겠습니다. ^^
 
나의 삶은 서서히 진화해왔다 - 찰스다윈 자서전
찰스 다윈 지음, 이한중 옮김 / 갈라파고스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흔한 과학자의 자서전.txt

 

 

인간이 스스로를 평가하라고 한다면 얼마나 솔직할 수 있을까?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되돌아보고 인생의 파노라마를 담아 낸 자서전이라고 하는 책들은 대중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심지어 자신이 살아가면서 느낀 수많은 감정들까지도 서슴없이 밝혀낸다. 하지만 자서전이라고 해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100% 볼 수 있는 건 아니다. 인간의 삶은 좋은 일도 있고 궂은 일도 있는 법이다. 기억 속에 지우고 싶은 좋지 않은 일들도 기록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누구 감히 그런 것까지 세세히 밝혀내고 싶어 하겠는가. 자신의 명예로운 미지에 부합되지 않거나 도리어 손상될 우려가 있는 부정적인 일은 대중들에게 공개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보니 자서전이라고 하는 책들은 자화자찬으로 가득하다거나 자신의 업적을 좀 더 부각시키기 위해서 자신과 관계된 타자의 성격 또는 업적을 왜곡 또는 평가절하 하는 경우가 있다. '무한도전'에 나오는 노홍철처럼 자신의 입으로 '위인'이라고 말할 정도로 자신의 좋은 업적만 부각시키는 '변종 위인전'인 것이다.

 

 

 

 

 

 

 

 

몇 주 전에 제임스 왓슨의『이중 나선』을 읽었다. 워낙에 잘 알려진 대중 과학도서라고 하기에 집어 들었지만 DNA 모형을 발견해내는 왓슨과 크릭, 두 과학자의 탐구 과정보다는 왓슨과 그 주변 과학자들의 얽히고 설킨 관계가 더 눈이 갔다. 더군다나 아무리 DNA 모형을 발견한 위대한 업적을 이룬 과학자라고 하더라도 자신과 함께 한 동료 과학자들의 업적을 크게 부각되지 않은 그의 서술에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자신의 연구 활동에 중요한 아이디어를 제공한 거나 다름없는 비운의 여성 과학자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왓슨의 동료인 크릭, 윌킨스보다 평가가 박했다. 과학도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과학고전이라고 하기에는 내용 면에서는 실망스러웠다.

 

 

 

 

 

 겸손한 과학자, 다윈

 

그런 점에서 본다면 요즘 진화론 공부할 겸에서 읽게 된 찰스 다윈의 자서전은 과장없이 자신의 삶에 대한 솔직 담백한 고백을 담고 있다. 왓슨의 자서전도 자신의 동료인 크릭을 '말 많은 오지랖쟁이'라고 말할 정도로 자신의 시선으로 솔직하게 평가했지만 다윈은 생물학자의 길을 반대했던 가족들, 연구 활동을 하는 데 있어서 많은 도움을 준 지도교수, 동료 학자들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회상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업적을 부각시키면서도 동시에 겸손의 미덕을 놓지 않고 있다.

 

 

"제가 만일 20년을 더 살아서 일할 수 있다면『종의 기원』에 고쳐 쓸 부분이 많을 것입니다. 어쨌든 그것은 시작일 뿐이니 그 자체로 뭔가 의미가 있겠지요."

 

 - 찰스 다윈이 J.D. 후커에게 보낸 편지에서(1869년), 『나의 삶은 서서히...』서두 -

 

 

 

다윈의 자서전에 들어가기 앞서 책 앞에는 다윈이 동료 과학자인 후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발췌한 문구가 있다. 이 문구를 보자마자 찰스 다윈이라는 학자의 성품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자신 스스로 낮출 줄 알고 겸손할 줄 알았다.

 

사실 우리나라에 번역된 다윈의 자서전 분량은 자신이 쓴 『종의 기원』분량보다 더 적다. 이 책의 부록으로 실은 『비글 호 항해기』발췌문을 제외하면 책은 159페이지 정도에 불과하다. 이 짧은 자서전 속에 다윈은 진화의 원리를 발견하기까지의 과정을 기록하는 데 중점을 두면서도 생물학자가 되기까지의 삶의 과정들도 세밀하면서도 솔직하게 기록했다.

 

 

전 생애를 통틀어 나는 외국어 하나도 변변하게 익히지 못했다. 시를 지어보려고 각별한 노력을 해보기도 했으나 영 소질이 없었다. 친구는 많은 편이었으며, 오래된 시를 잔뜩 모아다가 다른 아이들의 도움을 받아가면 이어붙이기를 해서 어떤 주제든 공부할 수는 있었다. 

 

 (중략)

 

나는 나이에 비해 뛰어나지도 처지지도 않는 정도였다. 그리고 여러 선생님이나 아버지도 나를 아주 평범한, 지적인 면으로는 보통 수준보다 약간 모자라는 소년으로 여겼다고 생각한다.

 

 

 - 찰스 다윈 『나의 삶은 서서히 진화해왔다』pp 26~27 -

 

 

 

아인슈타인이나 에디슨이나 우리가 '천재'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영특하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찰스 다윈도 그러한 부류의 한 사람이었다. 기억력 좋은 아버지와는 다르게 어린 다윈은 유명한 시를 암기해도 48시간이 못 되어 잊어버리곤 했다. 하지만 다윈은 어린 시절 때부터 마주친 지적 한계에 대해서 크게 좌절감을 느껴본 적이 없는 듯하다. 자서전의 화자 다윈은 외국어 공부를 못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담담하게 고백하고 있을 뿐이다.

 

자신의 능력에 대한 다윈의 겸손함은 생물학자가 되어서도 여전했다. 세인의 입에 오르내릴 만큼 성공한 뒤에도 다윈은 자신의 진화론을 옹호한 헉슬리처럼 비상한 이해력이나 재치도 없었고, 비평가로서도 약점 투성이라고 스스로를 평가한다. 그리고 기억력은 너무나 빈약해서 날짜를 며칠 이상 기억해 본적이 없었노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이론들이 진화론을 주장한 만큼 그는 종교문제에 관해서도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다윈은 생물학자가 되기 전에는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성직자의 길을 걷고 싶어했던 신학을 공부한 이력이 있다. 특히 그가 페일리의『자연 신학』을 공부했으며 책 속의 논증에 대해 확신을 가지게 되는 장면은 진화론을 이해하고 있는 독자들에게는 다윈의 이런 면이 새롭고 이채로울 것이다. 수백 년 뒤에 자신의 '후계자'라고 자처하는 리처드 도킨스『눈 먼 시계공』을 통해 페일리의 이론을 반박했던 것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

 

그 밖에도 다윈은 생물학자의 길을 반대했던 아버지에서부터 훗날 진화론을 체계적으로 증명해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준 지도교수 헨슬로 그리고 자신의 부인 엠마까지 자신의 인생과 함께 해온 가족 및 동료들을 따뜻하면서도 긍정적인 시선으로 이들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연구를 위해 비글 호에 승선하면서 만난 피트로이 선장에 대한 그의 서술은 '대인배'다운 그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피트로인 선장은 '조증'에 가까울 정도로 다윈과 여러 차례 시비에 휘말렸으며 몇 번씩 불화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다윈은 그러한 선장의 성격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도 악의에 찬 평가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자서전에는 가족을 먼저 생각할 줄 아는 한 '가장'로서의 다윈의 모습은 행복한 가족생활을 한 그가 내심 부럽기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짠하게 다가온다. 다윈은 열 살이라는 나이에 먼저 세상을 떠난 딸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는 마음 여린 '딸바보' 아버지였다.

 

 

내 가정생활은 정말 행복했다. 여기서 또 밝힐 것은 내 아이들은 건강문제를 제외하고는 걱정을 끼친 적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다섯 아들의 아버지로서 진정으로 이런 자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으리라 본다.

 

 (중략)

 

딱 한 번 잇었던 슬픈 일은 1851년 4월 24일 열 살을 넘긴 큰딸 애니가 세상을 떠난 사건이었다. 그 아이는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워서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면 분명히 멋진 여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 아이의 품성에 대한 짧은 글을 사망 직후에 쓴 일이 있으니 여기서는 이야기하지 않기로 하겠다. 그 아이의 상냥한 모습을 생각하면 아직도 눈시울이 젖곤 한다.

 

 - 찰스 다윈 『나의 삶은 서서히 진화해왔다』pp 140 -

 

 

 

 

그가 이러한 좋은 성격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영향이 강했다. 다윈은 자서전에서 아버지로부터 중요한 정신을 배우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관찰력'과 '동정심'이었다. 어린 시절, 그는 아버지의 관대하면서도 주변 사람들과 함께 기쁨을 함께 나눌 줄 아는 모습을 배우면서 자랐기에 유명한 생물학자가 되어서도 남들에게 관대할 줄 알며 겸손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Poco curante, 찰스 다윈

 

내용과 전혀 관련 없는 여자 관계를 서슴없이 밝혀내고 자기중심적인 이야기만 다루는 모 과학자의 자서전을 읽은 탓인지 다윈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마음이 정화되면서 훈훈함을 느낄 수 있었다.

과학자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마음 따뜻하게 느껴본 적은 처음이다. 대중들을 위한 과학을 위해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최재천 교수는 과학자들은 글을 잘 써야한다고 설파하는 '과학적 글쓰기론자'이다. 과학적 원리를 어려운 수식으로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이 쉽게 접근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글을 쓰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훌륭한 '과학적 글쓰기'가 되기 위해서는 '과학'이라는 학문도 아름다우며 따뜻한 휴머니즘도 필요하다는 것을 느껴질 수 있도록 대중들을 매혹시킬 줄 아는 감성 표현 능력도 중요하다고 본다.  

 

문장력을 좋고 나쁨을 떠나서 다윈의 자서전은 과학자의 글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감성적이다. 어린 시절부터 시를 즐겨 읽었을 정도로 문학을 좋아했으며 자신에게 쓴 부인 엠마의 편지 그리고 비글 호 항해를 반대했던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 외삼촌이 쓴 편지까지도 죽을 때까지 보관할 정도로 사람들 간의 감정을 연결하고 공유하려는 자세를 놓지 않았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라는 속담처럼 다윈의 삶은 서서히 '진화'했다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귀감이 될 정도로 성숙해져만 갔다. 그리고 그는 여느 훌륭한 과학자들처럼 자신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한 집착보다는 자연의 신비에 호기심을 가질 줄 알며 관찰과 실험을 좋아하는 '모태' 과학자였다.

 

적어도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내가 죽는 날은 관찰과 실험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바로 그날이 될 것이다. (pp 165~166)  

 

다윈은 학창 시절, 별명이 Poco curante(포코 큐란테)였다. '낙천가'라는 뜻의 라틴 어다. 다윈이 진화론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순수하면서도 낙천적인 성격 덕분이었다. 그러한 낙천적인 성격은 자신의 진화론이 학계와 종교인들로부터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받는 시련의 시간 속에서도 견뎌낼 수 있었다. 그리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죽는 날까지 관찰과 실험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했다.

 

다윈의 쓴 『종의 기원』의 내용이 너무나 어려워서 못 읽더라도 다윈의 자서전은 과학자가 되고 싶은 학생이나 과학도들이라면 꼭 읽어봐야 할 책이다.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은 '관찰력'과 '동정심' 그리고 실패와 비난에도 굴하지 않은 채 포기하지 않는 탐구 열정을 탄생시킬 수 있었던 '포코 큐란테' 정신은 훗날 과학자가 될 독자만 본받야되는 것이 아니다. 다윈의 삶의 원칙은 점점 정(情)의 의미가 퇴색해져만 가고 이해타산적인 관계 중심으로 돌아가는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훌륭한 처세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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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2-25 0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네요, 겸손한 과학자라니... 기분이 좋아집니다.
다윈은 기억력은 어떠하셨을지 모르나, 통찰력은 엄청나게 뛰어난 분이었을거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섬 내의 조금씩 다른 새들을 관찰한 내용에서 그렇게
뛰어난 발상이 나왔겠습니까! 참 멋지군요...

아, 그런데 대중을 매혹시킬 수 있는 글쓰기라.... 글만 둥둥 뜨지 않는다면
다윈과 같이 겸손함과 현명함과 핵심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지닌 사람이 그런 글쓰기를 한다면 정말 우리같은 후손의 복일테지만, 히틀러처럼 껍데기만 있는 사람이 그렇다면 현혹되기 딱 맞을테니 참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엉뚱한 한마디였네요~ ^^

cyrus 2012-02-26 22:47   좋아요 0 | URL
맞아요, 일명 천재라고 불리우는 사람들 중에는 정말 빈틈없을 정도로
머리가 좋은 사람이 있는 반면에 다윈처럼 한 가지는 꼭 부족한 점을
가지고 있기도 하죠. ^^

마고님 말씀대로 대중들을 이해시킬 수 있는 글쓰기가 많으면 좋은데
확실한 근거가 없으면서 맞지 않는 주장을 펼치는, 그저 대중들을 현혹하는
글쓰기는 조심해야죠. ^^

차트랑 2012-02-27 1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킨스의 눈먼 시계공은 정말 인내심을 요하던걸요 ㅠ.ㅠ
물론 매우 정렬적인 저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김용옥선생은 다윈을 자사선생의 환생이 아닐까
뭐 그런생각까지도 했다고도 합니다 ㅠ.ㅠ
(오타를 수정하고 갑니다 ㅠ.ㅠ)

cyrus 2012-02-26 22:48   좋아요 0 | URL
저는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사놓고도 아직까지
한 페이지를 넘겨본 적이 없답니다. ^^;;

자사선생은 처음 들어보네요. 검색해서 알아봐야겠습니다. ^^

휘오름 2012-02-26 2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저는 자서전은 별로 안좋아 하는 편인데요 리뷰 보다보니 이런책이면 한번쯤 읽어봐도 괜찮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리뷰 잘 보고 갑니다..^^

cyrus 2012-02-26 22:49   좋아요 0 | URL
저도 자서전을 완전히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 인물에 대한 삶의 과정과 주변 환경을 보면 인물의 생각을 좀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자서전도 좋은 옥석이 있는지
읽는 우리들이 잘 선택해야겠지만요 ^^;;
 
이중나선 - 생명에 대한 호기심으로 DNA를 발견한 이야기 궁리하는 과학 1
제임스 D. 왓슨 지음, 최돈찬 옮김 / 궁리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과학자를 꿈꾸는 여학생들이여, 왓슨의 책을 읽기 전에 마음 단단히 각오하길. 그리고 왓슨이 여성 과학자를 `매력 없다`라고 표현해도 이에 기 죽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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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2012-02-24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각오를 하고 읽었는데도 힘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

cyrus 2012-02-26 22:50   좋아요 0 | URL
사실 저도 DNA 모형 설명하는 부분에서 좌절했습니다. 그냥
과학자들의 일상만 재미있게 보고만 책이 되어버렸습니다. ^^;;

생각소녀 2015-02-20 17: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성과학자..왓슨이 매력없다하지만 저한텐 정말 매력있는걸요.
남들이 뭐라하건 자신이 과학에 열정이 있다면 여학생들, 그정도에 좌절하지 않아요!!
과학자들의 일상도 알게되어 저는 더더욱 과학자가 되고싶어졌답니다.

cyrus 2015-02-20 20:40   좋아요 1 | URL
생각소녀님, 닉네임에 걸맞게 마음자세가 좋습니다. 꼭 멋진 과학자가 되길 바랍니다! ^^
 

 

 

 

 건축가 루시우스의 황당한 시간여행

 

 

 

 

 

 

 

 

 

 

 

 

 

 

 

 

 

 

 

며칠 전에 IPTV를 통해 재미있는 내용의 만화를 봤다. 야마자키 마리『테르마이 로마이』라는 만화다. 고대 로마 목욕탕을 소재로 한 이 작품은 만화의 상상력과 소재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역사물이면서도 개그를 가미한 재미있는 만화다.

 

만화의 줄거리를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로마의 목욕탕 건축가 루시우스가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갑자기 일본의 현대 목욕탕으로 시공간 이동을 했다가 로마로 돌아온 뒤 일본의 목욕문화를 로마에 소개해 대성공을 거둔다는 이야기다.

 

 

 

 

  

 

 

 『테르마이 로마이』일본어판 3권 (알라딘 내 서지검색 불가능)

 

  표지에 등장하는 머리를 감고 있는 남자를 보면서 어디선가 본 듯 낯익더라 했었는데,,

  알고 보니 로마 시대에 제작된 '라오콘 상'일부분이었다.  

  커다란 뱀에 의해 고통스러워 죽어가는 라오콘을 만화 표지에서는 머리 감는 남자로

  만들다니..  만화가의 패러디에 절로 감탄할 수 밖에 없었다.   

   

 

 

 

 

 

 

 

 

 

 

 

 

 

『테르마이 로마이』일본어판 4권

   

 

 

내가 IPTV로 본 것은 일본 후지 TV에서 3부작으로 방영된 TV판 애니메이션이다. 원작의 각 한 권당 총 5편의 에피소드가 실려 있는데(일본에서는 4권까지 출간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 현재 2권까지 번역, 출간되었음) TV판은 3부작 총 6편의 에피스드로 구성되어 있는데 다 원작에 있는 내용들이다. 만화 원작을 읽어보지 못한 나로써는 TV판으로나마『테르마이 로마이』의 내용 일부만 볼 수 있어서 아쉬운 감이 들었다. (『테르마이 로마이』를 검색하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일본에서는 원작을 토대로 실사 영화로 작년부터 제작, 촬영 중이며 내년에 개봉 예정이라고 한다)

 

고대 로마와 일본은 모두 화산 국가이며 온천이 발달했고, 목욕 문화를 즐긴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연결고리에서 시작한 만화는 고대와 현대를 오가며 동서양 목욕 기구와 문화의 차이 등등을 더해 매회 유쾌한 개그 에피소드가 연출되었다. 하지만 픽션이라고 해서 이 만화를 그저 웃음을 유발하는 가벼운 만화로만 치부해서는 안 된다.

 

 

 

 

 

 

 

 

『테르마이 로마이』TV판 에피소드 중 장면.  만화 주인공이자 로마의 건축가인 루시우스이다. 그가 쥐고 있는 갈개 모양의 물건은 스트리질이라는 목욕 도구이다. 고대 로마인들이 목욕탕에 들어가기 전에 몸에 묻은 먼지나 때를 벗겨내기 위해 사용한 일종의 '때밀이'다.

 

 

 

 

만화 곳곳에 등장하는 로마의 건축양식과 주변 인물들은 이탈리아에서 유학생활을 한 만화가의 경험과 철저한 자료 고증을 통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남편 역시 이탈리아 유학생활 중에 만난 이탈리아 출신이다.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의 소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은 황제의 손자이자 『명상록』을 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과거 지나간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면서 황제가 지켜야 할 덕목 등 다양한 이야기들을 고백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직 읽어보지 않은 터라 이 소설에서 하드리아누스가 자신의 동성애적 취향을 언급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테르마이 로마이』에피소드에는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76~138)가 등장하는데 루시우스가 최고의 목욕탕을 만들 것을 주문하는 의뢰인으로 등장하며 만화에서는 미소년을 좋아하는 동성애자로 나온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팍스 로마나를 이룩한 5현제 중의 한 사람으로 로마의 전성시대를 마련한 군주로 평가받고 있지만 실제로 동성애를 즐겼다고 한다. 그 당시 로마에는 동성애가가 보편적인 문화였기에 가능했다.

 

그는 자신보다 어린 미소년을 자신의 궁전에 불러들여 함께 생활을 했는데 그 중에 황제로부터 많은 총애를 받은 자가 안티노오스(안티누스, ?~130)였다. 그는 황제마저도 혹하게 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모를 지닌 청년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오랜 수명을 누리지 못한 채 이집트에서 사망하고 말았는데 어느 문헌에 의하면 황제의 제물이 되었다거나 본인 스스로 나일 강에 투신자살했다고 전해진다.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사랑했던 미소년 안티노오스의 흉상 모작

 

 

 

자신을 가장 아끼고 사랑스럽게 여기던 안티노오스가 죽자, 실의에 빠진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로마 전역 곳곳에 안티노오스의 조상을 여러 개 세움으로써 그의 행적과 생전의 아름다움을 추모했다. 오늘날까지도 안티노오스의 조상 또는 흉상 모작이 남아 있는데 로마인들이 극찬했던 전형적인 '꽃미남'의 표상이 되었다.

 

 

  

 

 

 

 목욕을 좋아했던 고대 그리스, 로마인들

 

 

 

 

 

 

 

 

 

 

 

 

 

 

 

 

 

 

 

『테르마이 로마이』만화를 보고나서 문득 로마의 목욕 문화에 대해서 알고 싶어져서 정보를 검색해 본 결과, 로마의 목욕 문화를 보다 쉽게 알 수 있는 책이 캐서린 애셴버그의 『목욕, 역사의 속살을 품다』 (예지, 2010)뿐이었다. 『테르마이 로마이』만화를 보면서 궁금했던 사실을 이 책을 통해서 해갈할 수 있었다.

 

로마에는 수많은 공중 목욕탕이 설치되었는데 '테르마이''발네움'으로 구분할 수 있다. '테르마이'는 다양한 기능을 갖추어 있으며 화려하면서도 거대한 '스파'라고 한다면 반대로 '발네움'은 평범하면서도 작은 크기의 일종의 '동네 목욕탕'이라고 보면 된다.

 

 

 

 

 

토마스 쿠튀르 「타락한 로마인들」 1847년

 

 

 

로마 문화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상이 '향락'과 '사치'다. 역사가들은 쾌락을 추구하는 로마인들의 사치스러운 생활이 로마 패망의 지름길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로마제국 쇠망사』를 쓴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 역시 로마의 사치스러운 목욕 문화가 로마의 멸망을 재촉했다고 봤다.

 

실제로 고대 로마의 테르마이는 이미 어느 정도는 현대식 목욕탕의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옷을 입고 벗을 수 있는 탈의실이 갖추어져 있으며 온탕, 냉탕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만화 에피소드처럼 음식과 음료가 제공되는 간이 식당이 마련되었다. 이 뿐만 아니라 목욕탕 내부 또는 근처에는 정원, 운동장, 도서관 등도 설치되었다. 현대식 목욕탕과 다른 점이 있다면 로마인들은 비누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비누를 사용 안 했다기보다는 일부러 사용하지 않았다고 보면 된다. 그 당시 비누는 오늘날의 비누만큼 제 구실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탈의실에는 입욕자들의 옷을 지키는 노예들이 있었다.  

 

로마인들의 목욕 방법은 일정한 순서로 정해져 있다. 목욕탕 근처에 마련된 운동장에서 운동을 하고 난 뒤에 바로 목욕탕을 향했는데 그들은 땀과 먼지가 묻은 채 탕으로 향하지 않았다. 스트리질로 때와 먼지를 벗겨낸 뒤에 온탕, 열탕, 냉탕 순으로 몸을 담갔다.

 

하지만 이러한 로마인들의 목욕 문화는 로마인들이 스스로 만든 독창적인 문화라고 볼 수 없다. 목욕 문화를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고대 그리스에서 비롯되었다. 로마보다 이미 그리스가 먼저 목욕 문화가 발달되었다.   

 

다만 로마의 목욕문화가 향략적이라고 한다면 그리스 인들에게 '목욕'은 살아가는 데 절대로 빠져서는 안 될 보편적이면서도 예의를 지키기 위한 신성스러운 행위였다. 신에게 기도할 때나 제물을 바치기 전에 먼저 몸을 씻었으며 낯선 사람이나 친구의 집에 도착했을 때도 집주인은 자신의 집을 방문한 손님이나 친구에게 먼저 몸을 씻을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는데 그것은 그리스 인들에게는 하나의 '예의'였다.

 

  

 

 

 

 유레카!  

 

 

 

 

 

 

 

 

 

 

 

 

 

 

 

 

 

 

『테르마이 로마이』TV판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루시우스는 '목욕의 힘은 위대하다'라고 말하면서 목욕의 즐거움을 찬미하고 있는데 사실 그저 몸을 씻는 '목욕'이라는 행위 속에는 세계를 뒤흔들고 지금까지도 기억되고 있는 역사적인 사건들이 많다. 그야말로 '목욕의 힘'이 또 하나의 새로운 역사적 장면을 연출할 수 잇었던 것이다.

 

 

만약에 아르키메데스가 목욕탕에 들어가는 대신에 산책을 했다면 왕관이 금으로 만들지 않았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을까?

 

아르키메데스는 시라쿠사 왕이 쓰고 있던 왕관에 금 대신 은이 섞여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던 중에 머리를 식힐 겸 목욕탕에 몸을 담그게 되는데 자신의 체중으로 인해 욕탕에 넘쳐 흐르는 물을 보면서 왕관을 훼손하지 않은 채 왕관의 성분을 알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게 된다. 오랜 고민 끝에 찾아 낸 발견이라 기쁨에 겨운 아르키메데스는 벌거벗은 채 거리로 뛰쳐나와 '유레카!'(발견했다!)라고 외쳤다는 이야기는 단골 과학사 에피소드로 너무나도 유명하다.

 

하지만 아르키메데스의 '유레카' 일화가 아르키메데스 사후 수백 년이 지난 뒤에야 등장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학자들 사이에서는 허구된 이야기라고 보고 있지만 사실이 아니더라도 아르키메데스의 일화는 물체의 부피, 질량, 밀도 사이에 성립하는 개념적 상관 관계에서 비롯된 부력의 원리를 설명하는 데 유용하다.

 

 

 

 

 

 증기탕에서 죽은 철학자 

 

 

 

 

 

 

 

 

 

 

 

 

 

 

 

 

 

『목욕, 역사의 속살을 품다』에는 목욕의 역사만 소개할 뿐만 아니라 목욕과 관련된 재미난 일화들도 소개하고 있다. 목욕을 너무 좋아해서 목욕탕에서 암살당해 그 곳에서 최후를 맞이하고 만 로마 황제들이 있는 반면에 자신의 죽음을 재촉하기 위해서 일부러 목욕을 한 철학자가 있었다.

 

『목욕, 역사의 속살을 품다』에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고대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의 죽음도 '목욕'과 관련해서 유명하다.

 

 

 

 

 

자크 루이 다비드 「세네카의 죽음」 1773년

 

 

 

세네카는 로마 황제 네로의 스승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세네카는 어린 시절부터 네로를 가르쳤으며 그가 황제가 되었을 때 직접 정치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네로의 폭정이 시작된 이후부터 세네카는 정치에 뜻이 없음을 스스로 밝혀 정계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그 역시 황제의 스승이라고해서 네로의 광기어린 피바람을 피할 수 없었다. 네로는 자신을 둘러싼 암살음모에 스승 세네카도 관련이 있다고 모함을 하기에 이른다. 결국 네로는 자신의 스승에게 스스로 자결할 것을 명하였다.

 

그 당시 로마의 전통에 따라 황제가 명하는 자살은 일본처럼 할복 자살하는 것이 아니라 발목이나 종아리의 혈관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칼로 그은 부분에서는 과다 출혈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세네카는 출혈을 위해서 물이 담긴 통에 칼로 그은 발목을 담갔다. 역시나 출혈이 심하게 일어나지 않자 이번에는 소크라테스처럼 독약을 마셨으나 이 방법마저도 실패하고 만다. 결국 세네카는 뜨거운 증기탕에 들어갔으며 그 곳에 질식사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급소에 정확히 칼로 찌른다면 단숨에 즉사할 수 있었을텐데 세네카는 죽음을 맞이할 장소를 따뜻한 온기가 가득찬 증기탕으로 선택했다. 목욕을 엄청나게 좋아하는 로마인의 성향을 엿볼 수 있는 동시에 자살을 예찬한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다운 극적인 죽음이다.

 

 

 

 

 

 가장 극적인 욕실 살인

 

 

 

 

 

자크 루이 다비드 「마라의 죽음」 1793년

 

 

 

몇 몇의 로마 황제들은 욕탕에서 목욕을 즐기다가 비무장된 상태에서 암살자들로부터 불의의 최후를 맞았다고 했지만 수천 년이 지난 뒤에 프랑스에서 발생한 '욕실 살인'에 비하면 시시한 이야기에 불과하다.

 

프랑스 혁명에는 일세를 풍미했던 인물들이 등장했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장 폴 마라(1743~1793)이다. 그는 프랑스 국민들로 인기를 한 몸에 받을 정도로 혁명 과격파인 자코뱅당의 중심 인물로 부각되었다. 하지만 국민들을 선동하는 그의 과격한 정치적 행보에 반대하는 세력들, 즉 지롱드당은 그를 제거하기를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마라는 심각한 피부병 때문에 고생했는데 그 당시에는 피부병을 치유하기 위한 방법으로 욕조 속 찬 물에 몸을 담그는 것이 유행했다. 마라 역시 쉬는 날에는 하루 절반을 자신의 집에 설치된 욕탕에서만 지냈다. 마라는 욕조에 물을 담근 상태에서 종종 업무를 보거나 편지와 책을 읽곤 했다.

 

1793년 7월 13일, 마라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욕탕에 몸을 담근 채 글을 쓰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떤 여자가 자신을 만나고 싶어한다고 해서 찾아왔다. 그는 여자 손님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채 자신의 욕실로 들어오도록 했다. 이제 곧 자신의 목숨을 앗아 갈 '저승사자'를 스스로 불러들이고 말았다. 마라를 만나고 싶어하던 여자는 자신의 품 안에 숨긴 칼을 반나체 상태인 그의 흉부에 여러 차례 찔렀다. 국민들의 영웅이었던 혁명가는 이렇게 한순간에 욕실에서 최후를 맞게 되었다. 마라를 암살한 여자는 마라를 반대하던 지롱드 당원 소속의 샤를로테 코르데(1768~1793)라는 인물이었다. 마라의 암살 소식을 접한 프랑스 국민들은 혁명 영웅의 죽음을 추모했으며 자객 코르데는 민중의 분노 속에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마라의 절친한 친구이자 열렬한 혁명 과격파인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는 '친구'이자 '혁명의 영웅'이었던 마라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서 죽어가는 마라의 모습을 전통적 성화 속에서 볼 수 있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와 같은 자세로 그렸다. 그는 실제로 살인 현장에 한 번도 가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의 죽음을 '위대한 혁명 영웅'의 성스로운 죽음으로 연출시켰다.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을 실제보다 더 웅장하면서도 다소 과장되게 그려낼 줄 알았던 다비드 특유의 연출력이 만들어 낸 걸작이자 유명한 역사적인 장면으로 남게 되었다.

 

 

 

 

 

 목욕, 덜 깨끗하게 해도 된다

 

KBS 2TV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에는 정말 우리와는 좀 다른(?) 특이한 사람들이 '고민'이라고 내세우면서 등장한다. 그 중에는 2년 간 단 한 번도 몸에 물을 대지 않은 일명 '악취남'이 등장한 적이 있었다. 목욕을 안 했다는 그 문제의 악취남은 자취 생활하는 동안 너무나 바쁘게 살다보니 안 씻게 되었다고 말했다. 어찌 보면 좀 더럽게 느껴지지만 1960년대에 안 씻고 다니는 게 '자유해방'의 미학으로 여겼던 히피족을 생각하면 2년 동안 안 씻은 악취남은 새 발의 피다.

 

오늘날에는 안 씻고 다니는 사람을 불결하고 더러운 존재로 취급하지만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목욕을 기피하는 것을 생활의 미덕으로 자리잡은 시기가 있었다. 로마 문화의 영향이 남아 있었던 목욕은 교회의 힘이 강력했던 중세에 들어서부터 '사악한 쾌락'을 추구하는 불경스러운 행위로 변질되었다. 한 마디로 말자하면, 중세인들은 목욕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중세 사람들이 목욕을 하지 않았던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페스트였다. 페스트가 유행함으로써 사람들은 외부 출입을 금하게 되었고 흑사병으로 오염된 물로 몸을 씻으면 안 된다는 인식이 자리잡게 되었다. 페스트의 그림자가 완전히 지워지기 시작하는 18세기에 이를 때까지 유럽 문명에서 물로 몸을 씻는 '목욕'이라는 행위는 당분간 사라져야만 했다.

 

하지만 전염병의 유행이 사람들이 물을 멀리 하도록 만든 것은 아니었다. 산업혁명 이후 도시 빈민가 중심으로 콜레라가 유행하게 되자 정부 당국은 목욕을 권장하기 시작했다. 콜레라 유행을 일으키는 원인 대상이 위생상황이 열악한 곳에 살며 일생동안 목욕이라고는 해보지 않은 도시 빈민층들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목욕을 하느냐, 안 하느냐에 따라서 청결함의 기준이 생기게 되었으며 청결하지 못한 사람들은 빈곤층 계급이라는 생각이 자리잡게 되었다. 가난한 사람이 부유한 사람보다 더럽다고 생각했다. 이 시기 때부터 청결함을 기준으로 문화적으로 우월할 수 있느냐 또는 정상인이냐 비정상인으로 구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지금은 목욕을 해야 정상이라고 생각하지만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인간의 삶을 크게 변화시켜줄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면 목욕 행위가 또 사라질지도 모른다. 우리나라 국민 1인당 연간 물 소비량은 15만 리터에 달한다고 한다. 이 가운데 약 25%가 쓸데없이 낭비되어 사용되고 있다. 우리나라를 포함해서 몇 몇 국가에서는 '물 부족 국가'로 지정되어 있다. 비단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세계도 물 부족 현상에 대해서 고심해야 될 현실에 직면했다. 물 낭비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욕조에 물을 받아 놓지 말고 샤워기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 보통 욕조에는 136리터의 물이 들어가기 때문에 욕조에 물을 받아놓는 대신 샤워기만 사용하면 50% 이상의 물을 절약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소한 물 절약 방법을 생활 습관으로 만들지 못하면 어쩌면 먼 훗날 물 부족으로 인해서 깨끗한 물도 제대로 마실 수 없을뿐더러 목욕을 절대로 해선 안 되는 시기가 찾아올지도 모른다. 목욕을 금기시했던 중세처럼 청결함보다는 더러움을 흠모하는 일이 생긴다면...  상상하기도 싫다.

 

청결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온 몸에 물을 끼얹어 목욕을 해야하지만 거기에 소비하는 물 소비량은 상당하다. 그렇다고 물 절약한답시고 목욕을 안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안 씻은 채 더러운 세균과 불결한 악취를 온 몸에 달고 사는 삶은 더더욱 싫어할 것이다. 청결함을 유지하면서 물 절약도 할 수 있는 적당한 목욕 용수와 욕실에서의 목욕 시간. 참으로 애매하다. 애정남한테 물어봐야하나...?

 

청결을 유지해야하는 강박증에 안 걸린 이상 몸 구석구석 깨끗하게 씻되 물을 너무 오래 사용하지 않는 방법 밖에 없는 듯하다. 사실 인간의 몸은 '적당히' 깨끗해야하는 것이 정상이다. 지나치게 청결함을 유지하다보면 정작 우리 몸의 피부에 살아야 할 좋은 세균들마저도 씻겨 나가며 알레르기와 같은 각종 질환에 대응하는 면역력이 떨어질 수 있다고 한다.

 

『목욕, 역사의 속살을 품다』에서 저자는 목욕과 과한 약품 소독을 통해 '세균과의 전쟁'을 부르짖는 사고방식에 반대하는 어느 미생물학 교수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데 청결함을 이유로 지나치게 목욕에 집착하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 곱씹어봤으면 하다. "더 더러워져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덜 깨끗해도 된다는 말이다." (pp 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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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2-24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 사람도 목욕을 좋아한다는데 그래서 저런 만화를 탄생시켰을까?
나도 조금 보다 말았어. 역시 만화는 잘 안 보게 돼.
하긴 내가 보는 거라곤 잘 만든 드라마와 영화 밖엔 안 보니까.
근데 이 페이퍼 미끈하게 잘 빠졌다. 추천하고 싶을만큼.
민음사 저 책이 소설이었구나. 난 에세이쪽인 줄 알았다.ㅋㅋ

cyrus 2012-02-24 21:42   좋아요 0 | URL
일본에는 온천이 많아서 목욕을 좋아하죠. 누님도
이 만화를 보셨군요. 사실 TV판은 만화책 전체 에피소드를 다루지 않아서
책을 살까 말까 고민중이에요. ^^;;
그리고 저도 민음사 책 집에 가지고 있는데 아직 안 읽어봤어요.
이번 기회에 읽어보려고 해요. 그런데 장르는 픽션이 강한 소설인데
어떻게 보면 누님 생각처럼 에세이일 수 있다고 봐요 ^^

카스피 2012-02-24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일본 만화가의 상상력은 정말 대단하지요^^

cyrus 2012-02-26 22:52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정말 일본 애니는 무시할 수 없어요.
일본의 온천을 로마의 목욕탕과 연결시키다니,, 정말 대단한거 같아요. ^^

노이에자이트 2012-02-24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라 암살자가 젊은 여자라는 것을 알고 놀란 적이 있죠.

cyrus 2012-02-26 22:53   좋아요 0 | URL
저도 처음에 그랬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