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작동시키는 '행위자'는 '아는 것이 없다.'

 

 

니체에 따르면 “행위자”는 “아는 것이 없다”는 의미에서 “양심이 없다”. 이 말은 행위자가 작동하는 순간 항상 자신의 지식과 기억의 한 단면만을 이용한다는 뜻이다. 행위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인간은 결코 자신이 가진 기억의 전체를 마음대로 사용하지 못한다. 기억의 토대는 항상 단편적으로 이용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기억은 인간의 근본적 한계를 말해 주기도 하지만, 또한 인간이 변화될 수 있다는 것과 학습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주기도 한다. 다시 니체를 언급하면, “행위자는 하나를 행하기 위해 대부분의 것을 망각하며, 그는 자신의 배후에 있는 것에 대해 불의를 행한다. 그가 아는 유일한 권리는 이제 생겨나야 할 것의 권리다.” 이러한 부당한 망각에 대항하기 위하여 도덕이 양심을 만들었지만, 그것 또한 그렇게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pp 85)

 

 

우리는 살아가면서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기억'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러한 기억들의 파편을 통해서 지나간 시간 속으로 잊혀진 일들을 재현한다. 하지만 니체의 말대로라면 '기억'을 작동시키는 '행위자'는 '아는 것이 없다.'  과거의 일들을 부분적으로나마 기억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전체 중에 일부분에 불과하다. 이것이 인간의 근본적인 한계다.

 

예전에 본 드라마나 영화는 얼마든지 재방송을 통해서 다시 볼 수 있다. 방영될 때 고려해야하는 편성 시간상 문제 그리고 방송 심의로 인해 불가피하게 의도적으로 장면이 삭제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우리는 과거에 봤던 영화나 드라마의 원본을 일 년이 지나도, 십 년이 지나도 그 때 본 이미지와 장면들은 그대로 볼 수 있다. 만약에 우리 인간의 기억력도 영화, 드라마를 보고 싶을 때마다 재방송을 보듯이 완벽하게, 그것도 전체적인 것들을 완벽하게 기억할 수 있다면 인간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어찌 보면 정말 신에 가까운 초인적인 능력으로 보여질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러한 왼벽한 기억력을 가지게 된다면 오히려 살아가는 데 불편해질뿐더러 인생이 불행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항상 좋은 일들만 경험하는 것은 아니다. 두 번 다시 기억하기도 싫은 불행한 일들도 우리의 삶을 때때로 실의에 빠뜨리거나 심하면 평생 지을 수 없는 기억의 상흔이 되기도 한다. 영화, 드라마를 마음대로 다시 보기 기능이 있는 IPTV처럼 보고 싶은 장면만 골라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인간의 기억력은 좋은 일들은 항상 기억해두려고 하고, 반대로 안 좋은 일들은 애써 잊어버릴 수 있다. 비록 전체적인 것을 완벽히 기억할 수 없지만 그 대신에 자신이 원하는 것만 스스로 기억하고 불필요한 것들을 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기억력의 한계에 대한 니체의 말은 완벽함을 갖추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강조하려는 것은 아니다. 자기 스스로 망각을 함으로써 불필요하고 좋지 않았던 감정과 기억들을 비워내버리고 거기에 새로운 경험에 대한 감정을 담아낸다. 이러한 과정이 있기에 인간은 항상 경험을 통해 학습하고 스스로 변화를 추구하려고 한다.

 

 

 

 

 기억과 회상

 

   

17세기와 18세기 고대 기억술의 특권이 몰락하면서 회상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중략) 예를 들어 셰익스피어는 저장기억을 태곳적 선상의 비상식량과 비교하였다. 가령 정신이 메마를수록 기억의 수용량은 점점 더 불확실해진다는 것이다.  (pp 119)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빠르게 변화되어만 가는 삶의 흐름 속에서 인간의 정신은 욕망, 피로 등 온갖 부정적인 마음 요소로 인해 황무지처럼 메말라간다. 이제는 생물들이 살 수 없는, 허허벌판 모래만 남아 있는 사막은 원래는 황무지가 아니었다. 옛날에는 사막도 인간과 동물들이 살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이었다. 늘 푸른 식물들이 자라났고 목을 축일 수 있는 물도 흘러 지나갔던 녹색지대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곳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기 시작한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오랫동안 푸르름을 유지했던 녹색지대는 점차 줄어들게 된다. 인간들은 농사를 짓기 위해서 나무를 베어내기 시작했고 삼림지는 목축지로 변해만 갔다. 가축으로 기르게 된 소들은 목축지에 자라난 풀들을 뜯어 먹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동안 인간과 소에 의해 녹색지대는 점차적으로 파괴되어갔고 이제는 식물들이 자라날 수 없는 황폐한 땅으로 전락하고 만다. 식물들이 자라나지 못하자 그 곳에 정착 생활을 한 인간, 동물들도 설 자리도 줄어들었다. 그래서 동식물이 살 수 없는 불모지의 사막으로 남게 된 것이다. 이제는 그 누구도 사막이 원래 녹색지대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없다.

 

인간의 끝없는 욕망으로 인해 원래 모습을 재생하기가 불가능 할 정도로 불모지가 되었듯이 인간의 기억력도 정신이 메마를수록 불확실해질 수밖에 없다. 지나간 일들을 잠깐이나마 되돌아 볼 수 있는 여유마저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바쁜 일상에 파묻히게 되다보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기억의 수용량이 줄어들게 된다. 특히나 매일 새롭게 쏟아져 나오는 정보기술의 등장은 인간의 기억력을 대신해주는 역할을 한다. 수많은 정보들은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로 저장될 수 있다. 굳이 정보를 머릿 속으로 기억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기억

 

                                          윌리엄 워즈워스

 


 기록할 펜 그리고 
 잠긴 서랍을 열어 줄 열쇠는
 시인들이 의미 있게 기억을

 비유한 목록이다.

 

 또한 기억의 손에

 붓을 쥐어 줄 수 있다.

 그러면 여기저기에 부드러운 윤곽을 그려

 마음의 소원을 채워 주리라.

 

 지나간 고난을 풀어 주고 찌푸린

 분노의 주름을 펴 주고

 오래전에 사라진 행복을 살려 와

 반짝이는 광채로 채색하리라.


 그 붓은 환상의 도구처럼

 외롭게 감추어져 있는

 양심을 일깨우는

 저 유령들을 크게 만드나니.

 

 오!  빨리도 사라지는 우리의 인생이

 그런 순수함에서 만들어졌다면

 과거의 어떤 기억도

 이 붓 자국을 두려워하지는 않을 텐데.

 

 인생의 황혼에서 평온한 마음으로 매 순간

 저 고요한 풍경을 바라볼 수 있으련만.

 그리고 연륜도 만족스럽고 밝게

 그 붓끝이 가리키는 안식처로 떠날 수 있으련만.

 

 얼어붙은 달빛 비치는

 그요한 호수같이,

 그것도 아니면 절벽과 심연을 굽이 도는,

 멀리서 그 물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있는

 계곡 같은 마음으로.

 

 (pp 123~124)

 

 

 

 

 

 

‘기억’과 ‘회상’. 살아가는 데 많이 사용되고 있는 익숙한 두 단어의 의미가 서로 비슷해 보일 수도 있지만 알고 보면 미묘한 차이가 있다. 국어사전에 기록된 의미를 소개하자면 ‘기억’은 이전의 인상이나 경험을 의식 속에 간직하거나 도로 생각해내는 행위라고 보고 있으며 ‘회상’ 역시 ‘기억’의 의미와 유사하지만 ‘기억’의 의미와 확연하게 구별된다. ‘회상’은 한 번 경험해고 접했던 사물이나 일상을 재생한다는 의미가 있다. 어찌 보면 우리가 행하고 있었던 기억이라는 기능이 '회상'의 의미에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실제를 재생하는 회상, 현실인가 상상인가

 

 

저장기억의 기록술과 저장 기술의 자리에 회상력이 오게 되었는데 그 회상은 매우 자유롭게 현재 기록된 자료를 작업한다. 그 기억력의 과제들은 워즈워스의 작품들에서는 포괄적인 의미로 보면 다듬고 치료하는 것이다. 환원하면 그의 작품에서 희미하게 퇴색된 것은 새로이 채색되고, 잃어버린 것은 복원되며, 고통스러운 것은 경감된다. 이러한 상흔들은 회상을 통해서 사실 완전하게 치유될 수는 없지만 경감되기는 한다.  (pp 125)

 

워즈워스는 회상'을 지나간 시간 속에 잃어버린 것들을 복원할 수 있고 부정적인 기억의 상흔들은 조금이나마 치유할 수 있는 기능으로 보고 있다. 이는 단순히 '저장'의 용도로만 사용되었던 '기억'을 대신하게 되는 좀 더 개방적이면서도 포괄적인 기능으로 재조명한 것이다.

 

 

기호 자체는 마음대로 처리 가능하고, 책장을 펼쳐 다시 읽을 수 있으며, 어떤 장소 또한 다시 방문할 수 있지만, 그런 것들과 관련된 느낌은 자동적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회상기억은 원래 기억의 빛바랜 여운에 불과한 것이다. 어떠한 길도 그런 원래의 기억으로 우리를 데려갈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낭만주의적 회상기억은 재생이 아니라 기억의 대체물이다. 그것은 틈 사이의 소용돌이, 즉 시적 상상의 증보판이다. 기억이 신뢰할 만한 과거의 재생이라는 환상을 워즈워스는 갖지 않았다.   (pp 136)

 

 

워즈워스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회상’의 기능이 기억술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까? 회상력을 통해서 희미한 기억들을 다시 복원하고, 고통스러운 것들을 제거함으로써 기억의 상흔을 치유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비록 완전한 치유는 불가능하지만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회상’이라는 정신적인 행위도 중요하다. 더 나아가면 ‘회상’이 심리치료에 있어서 새롭게 적용될 수 있을 거라고 본다.

 

하지만 워즈워스는 '회상'을 완전한 재생이 가능한 기능으로 보지 않았다. 인간의 기억 능력은 인간이라면 당연히 겪어야 할 불변의 한계이기 때문에 회상 역시 완벽하게 재생할 수 없다. 워즈워스도 '인간'이기에 회상의 한계적 기능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대신에 낭만주의자답게 워즈워스는 실제적인 재생을 의미하는 회상의 기능이 작동될 수 있도록  '상상력'을 첨가했다. 인간의 정신 속에서 발현되는 공상, 환상의 감정들을 통해 재생불가능한 회상의 한 단면을 채우고자 했던 것이다. 결국 워즈워스의 '회상'은 '비현실적인 실제 세계'라는 역설성을 지닌 정신적 행위다. 실제 있었던 일을 재생되는 기억을 '현실'이라고 볼 수 없고, 그리고 그것을 '상상'이라고도 할 수 없는 모순적인 의미가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낭만주의가 팽배했던 17~18세기는 이러한 회상의 기능을 용인할 수 있었다. 감성의 해방, 환상적인 세상에 대한 동경을 추구했던 낭만주의 문학가들이었기에 가능했다.

 

 

 

안정되지 않음, 상실과 후발성은 워즈워스에게 인간 조건의 특징들이다. 자연은 신성하고 영구적인 데 반해, 문화는 근본적으로 멸망과 보상할 수 없는 손실에 의해 위협받는다. <서곡> 제5권 서막에서 워즈워스는 자연은 재해를 입은 후 기적의 손이라도 있는 것처럼 복구되지만, 인간에게는 이와 비교할 수 있는 자동 회복을 기대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중략) 워즈워스는 문화와 기억을 잃고 난 후 스스로 살아남아야 할 천형을 받은 인간의 우울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pp 141~142)

 

 

 

   인간은 

   이 대지의 아들인 한에는 거의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가짐을 탄식'하게 된 것이리라.

   또한 설마 자멸하는 일은 없어도, 살아남아서

   무참히, 영락하여, 버려진 채, 쓸쓸하게 될 것이리라. 

 

   (워즈워스 <서곡> 제5권, 24~28행)


 

 

그러나 '상상력'만으로 회상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었다. 오히려 절대로 찾아낼 수 없는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기 위해서 끝없는 재생을 추구하게 되는 부조리한 인간의 존재와 한계를 인식하게 된 것이다. 결국에는 실제에 있었던 과거의 일 그리고 그 과거의 일을 회상함으로써 복원된 또 다른 과거는 서로 불일치 할 수밖에 없고 서로 구별할 수 없게 된다. 실제 과거와 재생을 통해서 복원된 과거에서 비롯된 괴리감 그리고 과거를 완벽하게 재생할 수 없다는 한계에서 느껴지는 상실감과 허무함을 낭만주의자 워즈워스는 거기에 ‘상상’, ‘꿈’이라는 비현실적인 정신을 채우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남는 것은 우울하고도 절망적인 환상만 있을 뿐이다.

 

 

 

 

 회상을 위한 기억의 습작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극단적인 허무함에 빠질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워즈워스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우리 스스로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뿐 과거에 대한 회상을 위해서 때때로 상상력을 동원하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영화다.  요즘 개봉된 <건축학개론>이 수많은 관객들의 감성을 자극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영화라는 허구의 세계를 통해서 잊혀진 과거를 회상하고자 하고 그것을 재생, 복원하려고 한다. 과거 첫사랑에 대한 아련한 추억을 영화 그리고 스크린 속에 흘러나오는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의 애잔한 멜로디와 함께 음미하는 것이다.

 

비록 영화를 통해서도 과거를 완벽하게 '기억'할 수도 없고, '회상'할 수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가면서 '기억'과 '회상'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완전한 채색을 할 수는 없지만 과거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 남아 있다면 회상에 대한 기억의 습작은 필요하다. 단면적인 기억의 일부분이 가능한 정신적인 습작을 하지 못하게 된다면 삶은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정신적인 여유와 감성을 누릴 수 있는 여유가 사라져갈 정도로 점점 황폐화되어 사막이 되어가고 있는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이상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이에자이트 2012-03-28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지, 한가인 좋아하세요? 저는 좋아한답니다.

cyrus 2012-03-28 20:31   좋아요 0 | URL
네, 둘 다 좋아합니다. 좋아하는 여자 연예인이 출연해서
보고 싶은 것도 있지만 내용이 첫사랑과 관련된 것이라서 이 영화,
한 번 보고 싶네요. 여자친구가 있다면 꼭 같이 보고 싶은 영화이기도
합니다. 과거 첫사랑에 대해서 여자친구 입장에서는 좋게 보지 않겠지만요.. ^^;;
 

 

 

 카카오스토리를 시작하다

 

 

 

 

이거, 완전 대박이다!  어제부터 카카오스토리를 하기 시작했다. 언론에서는 벌써부터 기존에 있는 카카오톡의 인기를 넘어설거라는 반응이 있는데 충분히 그럴만한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사실 그 전에는 카카오톡을 제외하면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SNS를 하지 않았다. SNS의 등장이라는 획기적인 정보사회의 흐름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채 아날로그 생활을 고집하려고만 하는, 숨길려고 해도 숨길 수 없는 보수적인(?) 심성 탓이다. 그리고 나의 개인적인 일상을 남들한테 공개한다는 것도 꺼림칙한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내가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내가 오늘은 무엇을 하겠다'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사진이나 짧은 글을 올린다고해서 과연 몇 명의 사람들이 나의 일상을 관심을 가져줄지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러다가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일절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가 어제 친한 친구로부터 카카오스토리 친구 신청 메시지를 받게 되었다. 그 친구와 카카오스토리 친구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나도 카카오스토리 계정을 따로 만들어 그 앱을 스마트폰에 설치해야만 했다. 그 문자를 확인하는 순간, 처음에는 카카오스토리를 만들지 않으려고 했다. 새로운 변화에 둔감해지는 이 못된 심성이 발동된 것이다. 하지만 친구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카카오스토리를 하자고 친구 신청 메시지를 보내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친구 두 세 명이 동시에 똑같은 친구 신청 문자를 보내니깐 하는 수 없이 나도 카카오스토리를 하게 되었다.

 

 

 

사진출처: 헤럴드경제

 

 

시작해보니 기능이 생소해서 낯설었지만 막상 해보니 쉬웠다. 새로운 정보 서비스에 방황하지 않은 걸로 봐서는 나는 아직 젋은거 같다. 알고 보면 카카오톡의 기능이랑 비슷했다. 이전의 카카오톡이 메지시 중심으로 여러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자신의 일상을 공개했다면 카카오시리즈는 사진 중심으로 여러 사람들에게 동시에 대화를 나누고 일상을 담은 사진을 공개하는 것이다.

 

카카오스토리에 대해서 궁금하던 차에 이와 관련된 정보를 찾아봤는데 카카오톡에 페이스북의 기능을 결합시킨 새로운 SNS이라고 한다. 실시간으로 글과 사진을 올릴 수 있다는데 어찌 보면 싸이월드 홈페이지 만드는 것과도 비슷하다. 그리고 이번에 나온 카카오시리즈가 페이스북의 기능과 차별화하면서도 유능한 장점이 바로 자신의 정보를 특정 친구들에게만 공개할 수 있는 설정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카카오톡에 저장된 친구들이 전부 자동으로 카카오스토리의 친구가 되지는 않는다.'친구공개'로 설정하고 싶다면 '친구'를 일일이 설정해야 한다. '카카오스토리'의 '친구' 메뉴로 들어가면 카카오톡 친구들이 뜨고, 이들에 대해 각각 '친구신청'을 누르면 자동으로 그들에게 카카오톡 메시지가 전송돼 친구수락 여부를 묻는다. 이것이 어제 내 친구가 나에게 보낸 카카오스토리 친구 신청 메시지로 뜨게 된다.

 

'친구신청'을 일일이 해야 하는 과정이 좀 번거로울 수도 있지만, 누군지도 잘 모르는, 그리고 연락이 뜸하거나 연락하기가 애매모호한 여러 명의 카카오톡 친구를 정리하는 데 개인적으로는 나름 유용했다. 이번 기회에 카카오스토리를 이용하면서 카카오톡에 설정된 인간관계를 보다 압축적으로 줄일 수 있었다.

 

 

이번에 카카오스토리를 하면서 친한 친구, 선배들뿐만 아니라 학교 교수님과 '친구'(?) 관계를 맺기도 했다. 내가 평소에 존경하는 B 교수님이 카카오스토리를 시작했다는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바로 정중하게 친구 신청을 하고 싶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카카오스토리 시작하신거 보고 친구(?) 추천했습니다."

 

교수님 카카오스토리에 이런 댓글을 남기자마자 1분도 안 되어 바로 교수님의 답글이 달렸다.

 

 "연습 중, 우리 좋은 친구 되자"

 

교수님도 연세가 좀 있어서 그런지 새로운 정보 서비스를 사용하는 데 나름 헷갈리는 점이 있는가 보다. 그래도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많으신지 어제부터 지금까지 매일 새로운 사진들과 글을 올리시는 거 보니 어느 정도 카카오스토리에 적응하신 거 같았다.

 

 

 

 

 내가 아날로그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어제 처음으로 SNS라는 것을 하게 되었는데 정말 중독성이 있다는 건 사실임을 몸소 체험했다. 수시로 친구들의 댓글에다가 실시간으로 사진을 올리는 것을 스마트폰이 보일 때마다 꼭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기 때문이다. 항상 손에 스마트폰에 쥐어져 있는 이상 카카오스토리의 유혹을 쉽게 떨쳐내니가 어려울거 같다. 

 

그래도 중, 고등학생 때부터 온라인 게임을 전혀 손 대지 않은, 이미 몸과 정신이 아날로그로 무장된 나로써는 정보기술의 중독에 쉽게 빠지지 않을 수 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면서 딱 한 번 친구들의 권유로 온라인 게임을 해본 적이 있었는데 1개월 정도까지는 재미 보다가 그 뒤로는 하지 않았다. 그래서 왠만한 남자들이라면 다 하는 스타크래프트나 리니지, 스페셜 포스 등과 같은 PC방에서 할 수 있는 게임을 못한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내 친구들도 게임을 하지 않는 나의 한결같은(?) 모습에 감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사실 또래 친구들이 하는 게임을 하지 않아서 학창 시절에 친구 사귀기가 적잖이 힘들었다. 중, 고등학생 남자들의 대화 주제는 대부분 게임이나 여자(?) 이야기다. 특히 게임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그래서 그들 입장에서는 나 같이 게임을 안 하는 녀석이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고 그런 나를 어떻게 대해야할 지 난감했을 것이다. 그래서 특이한 정신 때문에 SNS 같은 것도 크게 관심을 가지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아날로그인으로 남게 되었을 것이고...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이러한 아날로그 습성이 나만 그러는 줄 알았는데 의외로 내 주위에도 그러한 경향의 사람들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어제 카카오톡에 저장된 총 51명에게 카카오스토리 친구신청 메시지를 보냈는데 오늘까지만 해도 신청을 수락한 사람은 고작 19명 뿐이었다. 그 중에 4명은 친구신청을 하지 않았다. 두 명은 완전 친하다고 할 수 없는, 애매모호한 관계이고 나머지 두 명은 학교 정교수님이다. 이상하게도 두 분의 교수님은 아직 카카오스토리를 시작하지 않았다. 감히 내가 먼저 문자메시지로 친구신청했다가는 괜히 욕 보일 수 있을까봐 일단 신청 은 보류하였다.

 

그러면 나머지 사람들은? 

 

여전히 '수락중인 친구' 상태이다. 대부분 카카오스토리 계정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웃긴 것은 정작 내가 오프라인에서 정말 친하다고 생각했던 녀석들이 카카오스토리를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별 것도 아닌 일인데 살짝 배신감이 밀려 오기도 했다.

 

 

 

 

 SNS를 통해 좋은 친구를 만들 수 있을까?

 

하필 며칠 전에 페이스북과 관련된 흥미로운 기사를 본 적이 있었다. 미국에 조사된 연구 결과에 의하면 페이스북에 친구가 많거나 페이스북에서 자주 자신의 상태를 업데이트할 경우 나르시스트, 즉 자아도취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연구 결과에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만약에 페이스북에 관계를 맺고 있는 '온라인' 친구들이 100명이 넘는다고 한다면 그 모든 100명이 나를 실시간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다고 착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페이스북을 수시로 확인하게 되는 일종의 중독성이 있는 습관을 가지게 된다. 여기서 내가 페이스북을 애용하는 사람들을 자아도취의 중독에 지나치게 빠져버린 나르시스트라고 폄하하려는 건 아니다. 페이스북뿐만 아니라 트위터를 포함한 SNS들은 오래 사용하면 할수록 자주 확인하려는 습관을 가지게 된다. 이에 대한 페이스북과 중독성 습관에 대한 관계는 그 이전에도 연구 결과를 통해 밝혀졌는데 술, 담배에 의한 중독성보다 강한 것으로 나타났다.

 

페이스북을 이용하는 수만 명의 사람들 모두 다 나르시스트라고 볼 수 없다. 하지만 자기중심적인 자아도취에 빠지게 된다면 수십 명이든 수백 명이든 간에 자신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정상이라고 볼 수 없다. 이러한 사람들은 상대방이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관심을 가지기 보다는 정작 상대방이 자신에 대해 어떠한 관심을 가져주는지에 대해서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오직 '나'라는 자신의 모습을 상대방의 관심을 통해서만 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나'라는 존재에 너무 치우쳐버린 대인 관계는 결국에는 좋은 친구들을 만나기 위한 교류의 과정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만 집중 받기를 원하고 그것을 뽐내고 싶어하는 잘못된 자아도취에만 그치고 만다. 물에 비친 자신의 멋진 외모에 매혹되버린 나머지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게 만든 나르시스처럼 잘못된 대인 관계로 인해 상대방이 자신을 기피하고 멀리하게끔 만들 수도 있다.

 

교수님이 나에게 보낸 메시지처럼 이번에 새로이 하게 된 SNS를 통해 관계를 맺게 된 사람들과 정말로 '좋은 친구'로 지내고 싶고 나 역시 그들로부터 그러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그런데 말로만 쉽지 서로 얼굴을 볼 수 없는 온라인 공간에서 진정으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정(情)을 가진 '좋은 친구'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 하물며 오프라인에서 자주 만나는 친구들마저도 평생 같이 할 수 있는 '좋은 친구'로 남는 것도 어러운 세상이다.

 

그래도 이번에 시작하게 된 카카오시리즈 덕분에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 간의 유대감을 한층 더 높여준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그동안 같이 군 부대에 복무했던 군 동기들과의 연락이 뜸해졌는데 카카오스토리 덕분에 오랜만에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리고 평소에 다가 오기가 쉽지 않은 교수님과 친구 먹게 된 것도 기분이 좋다. 사람들 간의 친밀한 유대감만큼은 오랫동안 이어졌으면 좋겠다.

 

 

 

P.S> 카카오스토리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초보라서 그런가...  자꾸 글 쓸 때마다

        '카카오시리즈'라고 적게 된다. ^^;;  

 

 


댓글(7)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stella.K 2012-03-25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마트폰 하루만 사용 안 해도 업무 능력이 향상 된다잖아.
나도 나이가 들어 그런지 기계만지는 건 영...
예전에 카셋트테입 복사는 해 봤는데
아직도 CD굽는 건 못 해봤다. 좀 심하지?
그런 내가 카카오톡은...깊은 좌절이다.
난 아날로그가 좋아. 디지털은 왠지 영혼을 팔아 먹는 기분이야.ㅠ

cyrus 2012-03-25 23:20   좋아요 0 | URL
맞아요, 사실 스마트폰을 다루는 시간들을 되돌아보면
쓸데없이 확인만 하는 게 다잖아요.
그런데 저도 CD 굽는 거, 몰라요 ㅎㅎㅎㅎ
왜 저는 젋은 나이인데도 정보 기술 사용에 둔감할 것일까요? ^^;;


stella.K 2012-03-26 15:49   좋아요 0 | URL
그래? 오히려 반갑다야.난 나만 그런 줄 알았거든.ㅋㅋ

마녀고양이 2012-03-25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관심있는 분야의 페이퍼군요....
요즘 지하철을 타면, 절반은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지요. 온라인의 좁은 세상에 몰두라느라 이 세상이 아주 넓다는 것을 잊어버리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요... 친구를 쉽게 만나는 카카오톡/카카오스토리 또는 다른 SNS는 너무나 짧은 문장으로 표현하고, 효과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단어를 쓰기 때문에 사람 관계를 피상적으로 만드는 문제가 있는 듯 해요. 온라인 세상의 관계적 심리는 제가 아주 관심있는 분야예요, 정리는 되지 않았지만 말이죠.

그나마 알라딘 블러그가 그런 면에서 가장 덜한 편이니, 여기 열심히 몸 담지만, 중독이란, 특히 sns 중독이란 나르시스트를 반영한다는 연구 결과를 저도 읽었을 때 많은 공감을 했던 기억이 나네요.... ^^

cyrus 2012-03-25 23:23   좋아요 0 | URL
저도 지금은 하고 있는 카카오스토리가 재밌긴한데
과연 이런 흥미가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모르겠어요.
사실 저도 서로 얼굴 보고 만날 수 있는 오프라인이
더 좋거든요 ^^

온라인 세상의 관계에 대해서 멋진 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심리학을 공부하신 마고님의 분석과 생각이 궁금해요 ㅎㅎ


saint236 2012-03-25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저도 한번 해보려고 준비중이지만...너무 여기저기 들어가면 정신이 없을 듯합니다. 전 요즘 카톡도 잘 안쓰게 되어서. 트위터도 안쓰고. 요즘은 그냥 페북에 글을 올릴 뿐입니다. 그러고보니 꾸준히 하는 것은 알라딘 서재뿐이네요.

cyrus 2012-03-25 23:24   좋아요 0 | URL
저는 원래 트위터랑 페북을 하지 않아서 이용에 대한 혼란함을
느끼지 못했어요, 사실 세인트님처럼 페북을 이용한 분들은
이번에 나온 카카오시리즈 사이에서 많이 갈등을 하시더라고요 ^^;;
아무래도 둘 다 기능이 비슷해서 사용자들 사이에서 혼란을 겪고
있는거 같아요.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이다. 학교 수업이 거의 아침 10시에 시작하기 때문에 새벽 일찍 일어나야 한다.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난다. 일어나자 마자 씻고, 아침 식사를 하고, 옷 입는 시간 등을 고려하면 새벽 5시에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이렇게 일찍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어머니가 아침에 출근하시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나보다 한 시간 늦게 일어나신다. 그리고 아침 식사를 하고 난 뒤에 세면을 하시는데 우리 집에서 가족이 공용으로 사용하고 있는 화장실이 단 한 개 뿐이라서 두 사람이 같이 세면을 할 수가 없다. 내가 새벽 6시에 일어나고 세면을 하게 되면 어머니는 세면을 늦게 하게 되고 출근하는 데 늦어질 수가 있다. 반대로 어머니가 먼저 세면을 하게 되면 내가 불리해진다. 왜냐하면 8시에 출발하는 스쿨버스가 있는데 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최소한 7시 30분까지는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야 한다. 스쿨버스를 타는 학생들이 상당히 많기 때문에 그 이상 늦어지게 되면 버스에 타지 못하게 된다.

 

어쨌든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기 않기 위해서 지금까지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목요일을 제외하고는 거의 새벽 5시에 일어나는 것도 조금은 피곤하다. 나름 일찍 일어나기 위해서 잠 자는 시간을 줄였음에도 불구하고 새벽 5시 기상이 힘들다. 군 복무했을 때 기상 시간이 6시인 것을 생각하면 인생이 아이러니하다. 사회인이 군인보다 한 시간 일찍 일어나야 하다니...

 

아침에 일어난다는 것은 하루를 시작하는 것과 같다.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인만큼 누구나 사람들은 상쾌한 아침을 맞이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정신이 개운하면서도 상쾌한 아침을 맞이하는 게 쉽지 않다. 바쁘게 돌아가기만 하는 일상에 스트레스와 민성 피로를 달고 산다면 아침을 맞이하는 것이 두려우면서도 한편으론 짜증이 날 때가 있다. 특히 아침부터 별 것도 아닌 일에 짜증이 나게 되면 하루를 시작하면서부터 스트레스가 쌓이게 된다.

 

오늘 같은 날이 그랬다. 날씨의 분위기가 인간의 심리에 큰 영향을 미친다. 하필 새벽부터 비가 내리고 있어서 그런지 일어나기도 무척 싫었다. 게다가 오늘은 주간에 있는 수업 한 과목만 듣는 날이다. 고작 한 과목 수업을 듣기 위해서 버스 타는데만 집에서 1시간 20분이나 걸리는 학교에 가야하는 것이다. 오늘 같이 비가 오는 날에는 정말로 학교 가기 싫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여차하면 늦어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잠이 덜 깬 몸을 이끌고 세면을 먼저 하고 아침 식사를 했다.

 

집을 나서기 전에 어머니에게 용돈 좀 달라고 부탁을 했다. 수업 부교재를 구입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지갑에 있는 현금은 달랑 2만원에 천 원짜리 지폐 서너 장 정도 있었다. 수업 부교재 가격이 3만 5천원이었다. 어머니에게 2만원만 달라고 했다. 원래는 개인적인 용도(?)를 위해서 거짓말로 4만 원 달라고 할 수 있었지만, 오늘은 꾹 참고 정직하게 3만원만 달라고 부탁했다. 나머지 5천원은 지갑에 있는 천원짜리 지폐로 충당하려고 했다.

 

내가 책이나 교재를 산다고 하면 어머니는 거리낌없이 용돈을 주신다. 내가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평소에 공부하는 나를 잘 알고 계셨기에 어머니는 나에 대해서 한 치의 의심도 안 하신다. 아니, 어쩌면 나의 얄팍한 꼼수를 알면서도 나를 위해서 어머니는 돈을 넉넉하게 주신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평소답지 않게 어머니가 용돈을 달라는 나의 말에 표정에 망설임이 역력했다. 항상 어머니로부터 용돈을 받아왔던 나는 어머니의 표정과 말투만 봐도 그 날의 심리상태를 파악한다. 내가 원하는 비용의 용돈을 주지 못할 때, 어머니는 망설이는 듯한 표정을 짓곤 한다.

 

 

 " 오늘은 안 되겠는데...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게 내일 모레 내야 할 세금뿐인데...

  내가 너에게 줄 수 없는 현금이 없는데, 그냥 오늘은 네가 받은 문화상품권으로

  구입하면 안 되겠니? "

 

 

어머니는 내일 모레에 내야 할 세금이 정해져 있어서 지금은 3만 원을 줄 수가 없다고 했다. 대신에 아직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문화상품권을 써라고 말씀하셨다. 작년 초에 동네 도서관 다독왕으로 문화상품권 7만 원을 부상으로 받았는데 아직 한 장도 사용하지 않았다. 작년에 받은 상품권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책 사는데 사용하려고 안 쓴 것뿐이었다. 웃긴 건 알라딘에서는 마일리지로 책 주름신을 잘 부르면서 정작 오프라인에서는 나름 상품권은 아껴 써야 한다는 이상한 생각 때문에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가 문화상품권으로 수업 부교재를 구입하라고 했을 때 기분이 언짢았다. 고작 2만 5천원의 대학교재를 문화상품권으로 구입한다는 게 너무나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문화상품권이란 오직 책을 구입하기 위해서 현금 대신에 사용하는 일종의 마일리지였다.

 

 

 " 아... 됐어요.  그냥 문화상품권으로 교재 살께요. 아침부터 짜증 나려고 하네... "

 

 

새벽부터 내가 원하는 상황이 일어나지 않게 되자 별 것도 아닌 일에 짜증을 내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어머니는 당신의 지갑 안에 있는 2만 원짜리 지폐를 꺼냈지만 나는 냉담하게 거절했다. 나는 뾰로통한 얼굴로 어머니를 뒤로 한 채 집을 나서고 말았다. 나의 무례한 행동을 보고 어머니가 뒤도 안 돌아보고 가는 나를 향해서 강경하게 한 마디 말씀하셨다.

 

 " 이 돈 안 받으면, 다음부턴 용돈 달라고 해도 안 준다. "   

 

그러자 나도 이에 맞서서 반항 어린 어조로 대응했다. 아니, 화가 난 상태에서 해서는 안 될 말을 내뱉고 말았다.

 

 " 그까짓 돈, 다음부턴 안 받으면 될꺼 아니에요! "

 

 

 

    

학교로 향하는 스쿨버스 안에서, 수업을 하는 강의실 안에서, 그리고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을 때에도 아침에 일어난 일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무 것도 아닌 일에 내가 먼저 화를 냈고 어머니에게 무례한 행동을 범했기 때문이다.

 

마음이 꿀꿀했다. 더욱이 점심시간이 지난 오후까지에도 하늘은 흐렸고 비는 계속해서 내리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난 일 탓인지 봄비를 좋아하는 나로써 오늘 같이 내리는 비가 무척 싫었다. 어차피 집에 가서도 기분이 편치 않을거 같았다. 그래서 울적한 기분을 추스리고자 집에 바로 향하는 대신에 번화가에 위치한 대형서점인 K 문고를 들렸다. 원래 대학 부교재를 구입하기 위해서 서점에 갔지만 오늘 같은 울적한 기분을 그냥 책 구입으로 풀고 싶었다. 지갑 안에는 7만 원의 문화상품권이 있기에 내 마음대로 구입할 수 있었다.

 

 

 

 

 

 

 

 

 

 

 

 

 

 

 

 

 

 

 

 

 

 

 

 

 

 

 

 

 

 

K 문고 안에는 절판, 품절되거나 유통되지 못한 채 재고로 남아 있던 책들을 매우 싼 값에 구입할 수 있는 매장이 따로 있다. 항상 K 문고를 들리게 되면 꼭 먼저 가는 매장이 이 곳이다. 일단 싼 가격의 책부터 구입하고자 하는 일종의 구입 전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곳에서 구입한 것이 홍익출판사에 나온 동양고전 시리즈 세 권이었다.『명심보감』,『소학』.『법구경』이었다. 이외에도 홍익출판사에서 낸『논어』『시경』도 있었지만 일단 이 세 권만 골랐다.『논어』는 최근에 김원중 교수가 번역한 신간으로 골랐다. 그리고 내가 사기로 한 대학 부교재도 같이 구입했는데...  3만 5천원이라는 가격이 너무 컸다. 문화상품권 7만 원으로 살 수 있는 책이 5권 뿐이었다. 5권도 나름 많이 구입한 편이지만 가격 할인 도서를 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예상했던 구입 권수에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3만 5천원짜리 대학 부교재만 아니었으면 책 두 세 권을 더 살 수 있었을텐데.

 

 

 

 

 

 

 

 

 

 

 

 

 

 

 

 

그래도 이 정도 책을 살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그동안 쓰지 않았던 문화상품권 7만 원을 한꺼번에 다 써버리니 속이 후련했다. 사실 이것만 없었다면 오늘 아침에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집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구입했던 책들을 잠깐 훑어봤는데 이번에 구입한 김원중 교수의 『논어』가 특히 만족스러웠다. 작년에 성백효 번역의『현토완역 논어집주』를 구입했는데 시중에 나온 수많은『논어』번역본 중에서 전문가들 사이에서 높이 평가하고 있어서 고심 끝에 선택하게 되었다. 이 책 안에는 한문으로 된 문장이 많은데 한문을 공부한다는 목적으로 구입한 것도 있었다. 동양고전은 원문으로 읽어야 제 맛이라고 하지 않은가.

 

하지만 막상 구입하고 보니, 원문의 맛은커녕 시작하자마자 쓴 맛을 봐야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책의 판형이 큰 것은 넘어갈 수 있었지만 정말로 한문으로 이루어진 문장이 많았다. 몇 년전부터 한문을 공부했었기에 논어 읽기가 수월할 줄 알았는데 혼자서 읽어보니 쉽지가 않았다. 게다가 한문 공부한 지 세월이 좀 지나서 그런지 헷갈리는 한문도 더러 있었다. 이렇다보니 논어 읽기가 진전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 나온 김원중 교수의 번역본이 무척 반가웠다. 판형도 손에 들고 다니기 쉬울 정도로 휴대성이 좋고 원문과 해석문이 같이 수록되어 있어서 가독성도 좋았다. 그리고 『논어』와 관련된 연구성과 그리고 학자들마다 양분된 다양한 해석의 입장까지도 주석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 이번에 나온 『논어』번역본의 가장 큰 장점이기도 하다.

 

 

 

 

 

    

 

 

 

 

 

 

 

 

 

구입한 책들 한 권 한 권씩 훑어보다가 『명심보감』속에 아주 기가 막힌 내용을 읽게 되었다. 제목은 '팔반가팔수'(八反歌八首), 즉 '반성을 위한 여덞 곡의 노래' 라는 뜻이다. 혹여나 이 부족한 잡문을 읽게 된다면, 다른 내용은 다 필요 없으니 내가 인용한 문장만큼은 꼭 읽으시라. 내용이 길더라도 천천히 읽어보시라. 이런 좋은 문장은 모든 사람이 읽고 많은 공감을 느꼈으면 좋겠다. 

 

  

 

 1

 어린 자식 어쩌다 내게 대들면

 내 마음에 기쁘이 느껴지지만

 부모님이 나에게 화를 내시면

 내 마음 도리어 언짢아지네

 한쪽은 기쁘고 한쪽은 언짢으니

 자식과 부모님 대하는 마음이 어찌 이리 다를까

 그대여 오늘부터 부모님이 화내시면

 부모님을 자식으로 바꾸어 보시오.

 

 

 

 2

 자식들이 천 마디나 말을 하여도

 그대는 언제나 듣기 좋아하지만

 부모님이 어쩌다가 입을 여시면

 쓸데없이 참견한다 쏘아붙이네

 참견이 아니라 걱정되어 그러신 게지

 흰머리 되도록 아는 것 많으시다네

 그대여 노인 말씀 공경하여 받들고

 젖내 나는 입으로 길고 짧은 다투지 마시오.

 

 

 

 3

 어린 자식 더러운 똥오줌도

 그대 마음 하나도 거리낌없는데

 늙으신 부모님 눈물과 침 떨어지면

 그대는 도리어 미워하고 싫어하네

 그대의 몸뚱어리 어디에서 나왔는가

 아버님의 정기와 어머니의 피라네

 그대여 늙어가는 부모님을 공경하오.

 젊으실 때 그대 위해 살과 뼈가 닳으셨소.

 

 

 

 4

 그대가 새벽에 시장 들어가

 밀가루떡 쌀떡을 사는 것을 보았네

 부모님께 드린다는 말 들리지 않고

 자식들에게 준다고 많이 말하네

 부모님 드시기 전 자식 먼저 배부르니

 자식만 생각하지 부모님 생각 하나 없네

 그대여 떡 살 돈 많이 내어

 사실 날 얼마 없는 늙은 부모님 공양하오.

 

 

 

 5

 시장 길목 약 파는 가게에

 자식을 살 찌울 약은 있는데

 부모님 튼튼하실 약은 없다네

 무슨 까닭에 두 가지로 보이나

 자식이 병들고 부모님도 병든 경우

 자식 병 고치는 정성 부모님에 비할소냐

 다릿살 베어 내도 도리어 부모님의 살이니

 그대여 두 분 부모님 빨리 보전하오.

 

 

 

 6

 부귀하면 부모님 모시기는 쉽지만

 부모님은 언제나 마음 편치 않으시네.

 빈천하면 자식을 기르기가 어렵지만

 자식을 굶기거나 떨게 하지는 않네.

 마음은 한 갈랜데 두 갈래 길 나 있네.

 자식을 위하는 맘 부모님에 비할소냐.

 그대여 부모님 봉양하길 아이 기르듯하여

 가난해서 못한다고 핑계를 대지 마오.

 

 

 7

 부모님 봉양은 다만 두 분 뿐인데도

 언제나 안 모신다 형제끼리 다툼하네.

 자식을 기를 땐 열명이 되더라도

 그대 홀로 그 자식들 모두 떠맡네.

 자식이 배부른지 따듯한지 물어보지만

 부모님이 주리신지 추우신지 마음이 없네.

 그대여 부모님을 봉양함에 힘을 다하오.

 그대를 기르느라 옷과 밥을 빼았겼소.

 

 

 

 8

 부모님의 사랑은 한가득이건만

 그대는 그 은혜 생각지 않네.

 자식이 조금만 효도를 하면

 그대는 나이가 그 이름을 자랑하네.

 부모님 대할 때는 어두우면서 자식을 대할 때는 밝으니

 그 누가 알리오 자식 기르는 부모님 마음

 그대여 자식들의 효도를 부질없이 믿지 마오.

 자식들의 본보기가 그대 몸에 있다네.

 

 

 

 (홍익출판사, pp 136~140)

 

 

 

버스 안에서 이 문장을 읽으면서 순간 뜨끔했다. 오늘 아침에 있었던 무례한 행동에 대해서 내가 어머니에게 크게 잘못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리고 그 8절의 노래 속에는 그동안 내가 부모님 앞에서 예의 없이 굴었던 모든 행동들이 소개하고 있었다. 돌이켜보니 내가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나에 대한 어머니의 지대한 관심을 너무나도 몰라보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부모님에 대한 죄송함과 반성에 사무친 나머지 눈물이 나올려고 했는 걸 억지로 참았다. '젊으실 때 그대 위해 살과 뼈가 닳으셨소.' , '그대를 기르느라 옷과 밥을 빼았겼소.' 이 문장을 보는 순간, 못난 아들만 바라보고 뒷바라지하신 우리 부모님이 생각났다. 그리고 이 문장을 계속, 반복해서 읽었다. 어느 한 가지의 글귀도 틀린 점이 없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는 이미 퇴근하고 집에 먼저 와 있었다. 나는 어머니를 보자마자, 오늘 저점에 산 책 꾸러미들을 보여줬다. 문화상품권으로 책을 샀다고 얘기했다. 그동안 모아 두었던 상품권을 한꺼번에 쓰고나니 기분이 속 시원하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가면서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진심으로 전하고 싶었던 이 말 한 마디를 꺼냈다.

 

 

 " 엄마,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 죄송해요. "

 

     

살면서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직접적으로 죄송한 마음을 표현했다. 그 전까지는 어버이날을 위한 구색 갖추기식의 편지에서 '죄송하다'는 표현을 글로 썼지만, 이렇게 직접 얼굴을 마주하면서 말로 표현한 것은 처음이다. 한 번도 표현하지 못한 말을 처음으로 입 밖으로 꺼내자니, 많이 쑥쓰럽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 이 말 한 마디 했다고 해서 예전에 부모님에 대해던 나의 불효의 행동들을 모두 다 책임을 진 것도 아니다. 그래도 어머니에 대한 나의 마음을 이렇게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어서 무척 좋았다. 다음부터는 부모님의 입장을 좀 더 헤아리면서 부모님의 몸과 피를 물려받은 '아들'로써 분별 있게 행동을 해야겠다.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6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2-03-24 0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24 2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24 0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24 22: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saint236 2012-03-24 0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살면서 가족들에게 미안하다는 말, 특히 부모님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잘 못하게 됩니다. 알량한 자존심인지, 아니면 가족끼리는 그런 것 당연히 이해할 것이라 생각하는지.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가족이기 때문에, 소중하기 때문에 더 미안하다는 말을 표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잘하셨습니다.

cyrus 2012-03-24 22:16   좋아요 0 | URL
저는 아직도 부모님에게 '사랑합니다'라고 제대로 표현하지도 못했는데요.
마음 표현을 자주, 많이 할 수 있도록 노력해봐야겠습니다. ^^

비로그인 2012-03-24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루스님, 정말 읽는 내내 공감했어요. 저도 학교까지 가는 데 오래걸려서 (자그마치 두 시간!) 새벽 일찍 일어나야 할 때가 많거든요. 아침에 비몽사몽 일어나서 분주하게 왔다갔다 하다보면, 아주 사소한 일 하나 때문에 기분이 팍 상하기 일쑤죠. 그래서 괜히 화도 내고, 못난 모습을 스스로 많이 보게 되네요. 이 글 읽으면서 저도 반성해야겠다는 생각이...

cyrus 2012-03-24 22:18   좋아요 0 | URL
어제는 제가 크게 잘못 행동해서 아침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역시 하루의 시작인 아침을 잘 맞이해야 그 날 하루의 컨디션이랑
일과가 제대로 돌아가는거 같습니다. ^^

stella.K 2012-03-24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아~~! 너에게도 이런 면이 있었네.
항상 점잖고 화도 안 낼 것 같은 엄친아라고 생각했는데.ㅋㅋㅋㅋ
난 너 맘 때 그렇게 안 해봤어. 그래봤자 나만 손해거덩.
대신 다른 거 속 썪여드렸지.ㅎㅎ
자식은 다 그래. 그래서 부모님이 항상 하는 말 있잖니.
너도 이 담에 너 같은 자식 낳라고. 이거 알고 보면 진짜 무서운 얘기지.ㅋㅋ
근데 참 어머니 좋으신 분 같다. 화도 안 내시고. 울엄마 같으면 진짜 난리난다.ㅋ
잘 해 드려.^^
근데 잠은 잘만큼 자야하는데...한 시간 더 자고 덜 자고가 얼마나 다른데.
낮잠이라도 잠깐 자 둬. 잠이 보약이다.^^

cyrus 2012-03-24 22:23   좋아요 0 | URL
엄친아는 아니에요. 제 스스로 성격을 평가하자면
무뚝뚝한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 스타일이에요.
그래도 나름 마음 표현을 자주 하거나 매 하루마다 많이 웃으려고
노력해요 ^^

이 다음에 너 같은 자식 낳으라.. 전혀 틀리지 않는 진리인데요.
오히려 이 짧은 말이 가슴에 더 와 닿네요 ^^

오늘 주말이라 나들이 하고 싶었는데 날씨가 너무 추워서
그냥 방콕했어요. 그리고 정말 낮잠도 잤고요.
지금 정신이 개운한데.. 낮에 너무 많이 자서 밤에 잠 들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


마녀고양이 2012-03-25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이러스님,, 맘이 많이 아프셨겠어요, 읽는 제 맘에도 생생하게 전해져오네요.
아무래도 요즘 사이러스님의 맘이 복잡하셨던게 아닐까, 심적 부담감이 있으신게 아닐까, 몸이 힘든게 아닐까, 스트레스를 받으셨던게 아닐까 염려됩니다... 많이 힘드시죠. 멀리 있는 학교를 다니는 것도 힘들고, 미래를 계획하시는 것도 힘들고, 어머니께 용돈 달라고 하시기도 미안하시고, 그러시겠네요.... 솔직하게 편지를 쓰시다니, 저보다 훨씬 용기가 있으시네요. 저는 아직도 그러지 못 하는데.

우리 힘냅시다!

cyrus 2012-03-25 23:29   좋아요 0 | URL
부모님한테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못해서 그렇지 여러 모로 정신적으로
부담감도 있고 힘든 점도 있긴 해요. 나이 한 살 먹어갈수록
미래는 불투명해져만 가고요 ^^;;
그래도 나름 긍정적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세상 살다보면
정말 재미있고 유쾌한 일들을 경험하게 되니까요.
이제 좋은 여자친구만 만나기만 하면 인생 대박이고요 ㅎㅎㅎ

어느새 주말이 다 지나갔네요, 또 내일부터 학교 다니느라
바빠질거 같네요. 우리 좀 고생하더라도 힘내요 ^^
 

 

 

 

 

 

 

 

 

 

 

 

 

 

 

 

 

 

요즘 친분이 있는 지인들과 함께 '인문학 공부'라는 공통적인 목적 하에 읽고 있는 것이 알라이다 아스만의 『기억의 공간』이다. '기억'이라는 주제로 문화를 전반적으로 분석한 연구서인데 이 책에는 수많은 외국 문학작품들의 텍스트들이 인용되고 있다. 하지만 내용의 난이도는 만만치가 않다. 기존에 나온 판을 새롭게 개정해서 나온 번역판임에도 전문서적을 보는 듯한 서술 때문에 읽히기가 쉽지 않다. 사실 처음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도 내용이 이해가 가지 않아서 적잖이 고생했다.

 

한 주에 정기적으로 두, 세 장씩 읽고 발제자가 쓴 발제문에 대해서 나름 감상과 개인적인 견해를 답글 형식으로 써내어가면서 각자가 쓴 글들을 서로 읽고 거기에 댓글을 다는 형식으로 일종의 '공부'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인문학 공부를 여러 명이 함께 한다고 해서 무조건 쉽다고는 볼 수 없지만 그래도 혼자서 하는 것도 내용을 이해하고, 공부를 하려는 의지의 정도를 비교하자면 그래도 공부는 함께 하는 것이 더 나은거 같다.

 

비록 관심 있는 내용을 골라 거기에 개인적인 감상과 견해를 덧붙이는 단상 형식의 수준이지만 그래도 이런 독서와 글짓기가 혼자 블로그에 글을 쓰는 것보다도 더 기억이 남고 거기서 얻은 것도 많았다. 학교 생활을 하다보니 공부할 게 많아졌지만 이미 여려 지인들 그리고 나 자신과 스스로 약속을 했으니 꾸준히 이어져 갔으면 좋겠다.

 

 

 

 

  1장 ‘기술’과 ‘활력’으로서의 기억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모든 길은 기억으로 통한다. 이 말은 신학, 철학, 의학, 심리학, 역사학, 사회학, 문학, 예술학, 매체학의 모든 길들이 바로 기억으로 통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문예학에서 기억으로 통하는 길은 한 번 더 나눌 수 있다. 그 중 한 길은 ‘기술’(ars)이란 길이고, 다른 길은 ‘활력'(vis)이라는 길이다. 기억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문학연구 논문들은 모두(冒頭)에 꼭 고대 로마의 기억술은 언급하고서 시작한다. 기억술이란 기억을 다루는 기예(기예)이며, 여기서 기예란 고대의 의미로 살펴보건대 기술이라는 뜻으로 보면 된다.  (pp 30)

 

 

 

고대 로마에서는 기억술을 하나의 ‘기술’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봤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기억'의 고대적 의미가 많이 퇴색되어 버린 것 같다. 학습하는 데 있어서 물론 '기억'이라는 기술(혹은 능력)도 중요하지만 요즘에는 '암송'이라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 같은 정보의 양이 많은 시대에는 컴퓨터와 스마트폰 같은 기기의 등장으로 굳이 정보를 기억해야 할 필요도 없게 되고, 심지어 기억하는 능력마저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퇴화될 수도 있다. 그래서 정작 중요한 정보는 직접 머리로 기억하려는 습관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루가 지날수록 컴퓨터와 스마트폰의 성능이 향상된다 하더라도 굳이 정보기기들의 능력까지는 따라가야 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기억은 단지 공부할 때만 필요한 정신적 행위도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좋고 행복한 일들을 죽을 때가지 평생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억술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 살면서 한 번은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한 살 한 살 나이가 먹으면 먹을수록 어린 시절 때 행복했던 기억들이 하나하나씩 잊혀 간다는 것을. 그러한 기억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 인간은 추억에 쉽게 빠져드는 감성적인 동물인거 같다.

 

 

 

 

 

나이가 들면서, 심지어 생물학적으로 꽤 젊다고 할 수 있을 때에도 우리는 짙은 향수에 잠겨 지나간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경우가 많다. 그런 향수는 박탈당한 삶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맛보았던 감정과 기쁨을 혹시라도 또다시 경험할 수 있을까 하여, 그런 순간들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헤럴드 블룸)

 

 

 

 

 

책의 주제인 '기억'과는 좀 연관성이 떨어지는 내용일 수도 있겠지만 다시 말하자면 사소하지만 행복한 일들을 기억할 줄 아는 능력이야말로 삶에 있어서 중요하고 절대로 잊어버려서는 안 될 기억술이라고 생각된다. 과거의 좋은 일들을 기억함으로써 메마른 생(生)에 큰 '활력'(vis)을 불어 넣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기억술도 언뜻 보면 좋은 것 같지만 단점도 있기 마련이다. 항상 행복하고 좋은 일들만 기억만 하고 산다면 좋겠지만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좋은 일들만 100% 기억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리고 기억하기도 싫은 안 좋은 일들도 겪기 마련이다. 종이 위에 연필로 글을 쓰고 나면 그것을 깨끗하게 지울 수 있는 지우개가 한 손에 꼭 쥐고 있어야하듯이 불필요한 기억들도 스스로 여과하여 지울 수 있는 망각의 능력도 필요하다.

 

 

 

 

 2장 추모의 세속화 : 기억, 명성, 역사

 

 

망자에 대한 기억은 종교적인 차원과 세속적인 차원으로 나누어지는데, 전자는 경건함으로, 후자는 송덕으로 각기 대변된다. 경건함은 후손의 의무, 즉 살아 있는 자들이 망자를 기리며 추모하려는 의식을 말한다. 경건함이란 다른 사람들, 즉 살아 있는 사람들의 망자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에 반해 송덕, 즉 칭송으로 명성을 얻는 일이란 어느 정도까지는 망자가 살아 있을 때 실행할 수 있는 것이다. 송덕이란 자기의 이름을 영구화하기 위한 세속적 형식으로, 당사자의 의지와 관련이 있다. 중세 기독교에서는 최후의 심판일에 구원을 얻기 위해서 애를 썼는데, 이것은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서 애쓴 것과 상당 부분 유사하다. (pp 39)

 

민족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영원화의 기약은 수많은 기념비에 나타나고 있다. 무명용사들의 기념비에서 국립묘지까지 이 기념비들은 민족적 기념 사업의 과정된 형식이기도 하지만 어색한 형식이기도 하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이 문제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현대 민족주의 문화에서 무명용사들이 위령탑과 빈 무덤만큼 인상적인 기호는 존재하지 않는다.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육체의 잔재나 불멸의 영혼과 관련하여 그들의 무덤이 비어 있으면 있을수록, 그들은 유령 같은 민족적 환상으로 가득해지게 될 것이다.” (pp 55)

 

 

 

 

제2장의 내용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민족적 차원에서 바라보는 망자에 대한 기억에 대한 내용이었다. 앞에서 저자는 제2장을 시작하는 부분에서 망자에 대한 기억을 종교적인 차원과 세속적인 차원, 이 두 가지로 구분했는데 민족적 차원도 추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속적 차원에서의 망자에 대한 기억이 민족주의적 요소와 결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책 pp 55의 각주에 보게 되면 민족주의와 망자 숭배의 관련성에 대해서 베네딕트 앤더슨의 간단명료한 말 한 마디가 핵심을 잘 포착하면서도 동의할 수밖에 없다.

 

 

 

 

 

 “무명의 맑스주의자나 무명의 자유주의자는 없다.”

 

 

 

 

 

앤더슨의 지적은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와도 연관 지어 볼 수도 있다. 일본의 각료들이 매번 참배를 하게 되는 그 곳은 과거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일어난 태평양 전쟁에서 전사한 200여 명의 넋을 달래기 위해서 세운 종교적인 건물일 뿐이다. 사실 제2차 세계대전의 희생자들이 안치되기 전에는 야스쿠니 신사는 막부 간의 싸움에서 희생된 자들을 기리기 위해서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20세기에 이르게 되면서 망자에 대한 기억의 장소가 전쟁 때마다 국민에게 천황숭배와 군국주의를 고무, 침투시키는 데 절대적인 구실을 하는 망자 숭배의 장소로 변질되어 버렸다. 또 전몰자들은 천황을 위해 죽음으로써 생전의 잘잘못은 상관없이 신(神)이 되어, 국민의 예배를 받았다. 야스쿠니 신사에 직접 가 보지는 않았지만 그곳에 전몰자들의 이름이 빼곡하게 적힌 기념비가 있다. 전쟁이 아니었으면 일개 평범한 삶을 마쳤을 무명의 일본 국민들이 수많은 사람들의 머리를 숙이게 만드는 이름뿐인 ‘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일본의 젊은이들은 전장에 나서기 전에 ‘야스쿠니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전쟁터로 떠났을 만큼 모든 가치의 기준을 천황에 대한 충성 여부에 두었고, 따라서 야스쿠니 신사의 존재는 일본 국민의 도덕관을 혼란시키는 동시에 한일 간의 관계를 어긋나게 만드는 장애물이 되기도 했다. 천황을 위한 죽음은 대부분 명분 없는 침략전쟁에서의 죽음이었기 때문에 일본 군국주의는 이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로 신화의식을 조작해 야스쿠니 신사를 탄생시킨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 연합군총사령부는 야스쿠니 신사의 호국적 성격을 알고 단순한 종교시설과 순수한 전몰자 추도시설 중 하나를 택하라고 일본에 강요, 일본은 종교시설을 택하였지만, 야스쿠니 신사의 특수한 기능인 전몰자 추도시설 기능을 완전히 박탈하지는 못했다. 야스쿠니 신사의 상징인 흰 비둘기가 평화를 의미하는 것과는 반대로, 전시물들은 전쟁과 전투의 의미를 부각시키고 있어 전쟁박물관인지 신사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이중성을 지닌 건물로 남게 되었다.

 

 

시대가 불안하면 불안할수록, 다양한 이해집단들이 자기 확실성이 강화될수록 기념비들은 더욱더 많아지고 더욱더 극적으로 변화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런 기념비들은 후세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저 동시대인들의 정치적 영향력의 수단으로 전락한다. 그것들은 현재를 영원한 역사로 만들고 역사적 과정을 부정하려는 도전과 여러 가지 면에서 일치한다. (pp 61)

 

 

망자 숭배 또는 추종에 가까운 기념비 설립의 현상은 비단 일본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도 기념비 설립이 정치적인 영향력의 수단으로 전략한 사례도 있고 또한 그것으로 인해 역사관의 가치를 둘러싸고 갈등을 낳기도 했다. 인천의 맥아더 미군 동상 그리고 남산에서의 이승만 대통령 동상 설립 문제 등이 그 대표적인 사례들입니다. 정치적으로 권력을 가진 이해집단들이 자신들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과거의 역사를 기념비를 통해 부각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러한 목적은 자신들의 사상 또는 사회적 영향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과거의 역사를 부정하면서까지 기념비 설립에 집착하는 것은 망자를 기억하는 의미의 추모 행위에서 벗어난 것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감은빛 2012-03-22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루스님의 글은 가끔 제게는 너무 어렵군요.
흠 친한 척 해보려고 해도, 뭔가 꺼리가 부족함을 느낍니다.
이게 다 저의 부족함이니 남 탓을 할 수도 없겠네요.
암튼 오랫만에 들러서 인사 남깁니다. ^^

cyrus 2012-03-23 20:31   좋아요 0 | URL
오랜만에 인사 댓글 남기셨는데 하필 부족한 글을 보게 되셨군요.
오히려 제가 송구스럽네요. ^^;; 공자 앞에서 문자 쓴다는 말이
있잖아요 ㅎㅎ 요즘 제가 글을 쓰면서 그런 경향이 있어 보여서
저 스스로 경계하려고 합니다.

노이에자이트 2012-03-22 1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 몇 년 동안 기억에 대해서 역사학 및 사회과학자들의 좋은 저술이 나오고 있습니다.저는 매우 중요한 연구라고 봅니다.역사를 어떻게 기억하느냐 하는 것은 역사해석의 핵심이거든요.특히 무덤을 비롯한 과거 흔적을 놓고 일종의 기억 충돌이 일어나고 있으니 더욱 연구해 볼 만한 소재지요.박정희 기념관을 둘러싼 갈등도 좋은 연구사례입니다.

cyrus 2012-03-23 20:32   좋아요 0 | URL
사실 이 책을 5장 정도까지 읽었는데요,, 생각보다 어렵네요 ^^;;
제가 책 내용을 제대로 이해했는지도 잘 모르겠고요 ㅎㅎ
그래도 간만에 독서를 하면서 머리 아픈 것도 나쁘지가 않네요.
일종의 정신적 운동이라고 생각하고 싶어요 ^^
 

 

 

 

 

 

 

 

 

 

 

 

 

 

 

 

 

 

 

 

 

 

좋은 일들

 

               

내가 오늘 한 일 중 좋은 일 하나는

매미 한 마리가 땅바닥에 배를 뒤집은 채

느릐게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준 일

죽은 매미를 손에 쥐고 나무에 기대 맴맴 울며

잠깐 그것의 후생이 되어준 일

눈물을 흘리고 싶었지만 눈물이 흐르진 않았다

그것 또한 좋은 일 중의 하나

태양으로부터 드리워진 부드러운 빛의 붓질이

내 눈동자를 어루만질 때

외곽에 펼쳐진 해안의 윤곽이 또렷해진다

그때 나는 좋았던 일들만을 짐짓 기억하며

두터운 밤공기와 단단한 대지의 틈새로

해진 구두코를 슬쩍 들이미는 것이다

오늘의 좋은 일들에 비추어볼 때

어쩌면 나는 생각보다 조금 위대한 사람

나의 심장이 구석구석의 실정맥 속으로

갸륵한 용기들을 알알이 흘려보내는 것 같은 착한

그러나 이 지상에 명료한 그림자는 없으니

나는 이제 나를 고백하는 일에 보다 절제하련다

발아래서 퀼트처럼 알록달록 조각조각

교차하며 이어지는 상념의 나날들

언제나 인생은 설명할 수 없는 일들투성이

언젠가 운명이 흰수염고래처럼 흘러오겠지

 

 

- 심보선 『눈앞에 없는 사람』문학과 지성사, pp 24~25 -

 

 

 

요즘 매일 아침마다 읽고 있는 심보선 시인의 시집을 읽는다. 얇은 분량, 한 손에 들고 다닐 정도로 가벼운지라 등교 길 버스 안에서 읽고 있다. 항상 시 몇 편씩 읽을 때마다 느끼지만 남자의 손에서 이런 멋진 문장이 나올 수 있다니, 감탄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시인의 감성이 부럽기도 하다.

 

특히 시집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시가 '좋은 일들'이다. 제목부터 읽는 이의 마음을 기분 좋게 만든다. 그리고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에 생각날 때마다 읽어도 좋고 말이다. 이 시, 특히 마지막 구절은 그 날 하루 좋은 일들이 일어날 것만 같은 기대감과 설레감을 불러일으킨다.

 

 

 " 언제나 인생은 설명할 수 없는 일들투성이 /

   언젠가 운명이 흰수염고래처럼 흘러오겠지"

 

 

개강한 지 이제 2주째 정도 지났는데 어느 정도 학교 생활에 적응되었다. 사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과목의 수업을 혼자 들었을 때는 낯설기도 했다. 평소에 듣었던 주전공 과목을 혼자 듣는 걸 좋아하는 나로써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 많은 가운데서 혼자서 수업 듣게 되는, 이 분위기가 '강의실 속의 고독'이다. 게다가 수업 진행도 주전공 수업과 많이 달라서 어떻게 수업이 진행하게 될지 예측할 수 없다. 조금 있으면 모르는 사람들이랑 같은 조가 되어 몇 개의 과제를 해야 한다.

 

하지만 나름 긍정의 힘 덕분인지 점차 적응이 되어가고 있다. 새로운 시작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 움츠려들었던 마음을 다시 추스릴 수 있었다. 물론 그러한 일상의 변화를 유도해준 긍정의 힘의 근원에는 내가 좋아하고 있는 심보선 시인의 시 덕분이다.

 

시 마지막 구절처럼 인간의 생은 정말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펼쳐진다. 그야말로 미스터리다. 아무리 이성적이고 똑똑한 사람들도 생의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고 간혹 예기치 못한 하나의 운명으로 인해 사람의 전체적인 인생이 확 달라질 수도 있다. 그리고 확률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무심코 해 본 로또 복권에 수억대의 상금을 타게 되는 행운이 느닷없이 찾아올 때도 있다.

 

자신도 스스로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예기치 않는 행운이나 행복을 맞이하게 되면 절대로 잊혀지지 않을 최고의 기억으로 남게 되겠지만 뭐니뭐니해도 매일 반복해왔던 일상, 그 순간 속에서 그동안 모르고 있었던 새로운 것들을 발견한다거나 거기에서 오랫동안 찾고자 했던 행복을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좋은 일'이 아닐까 싶다. 살아가면서 그냥 지나쳤던 하늘 속 구름 위에 거대한 천사를 만난 것처럼 말이다.

 

 

 

 

 

사진출처: 아시아투데이

 

 

 

 

 

 

 

르네 마그리트  『대가족』 1963년

 

 

 

르네 마그리트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일반적으로 느끼는 것, '이성', '당연한 것', '예측할 수 있는 것', '확고한 진리' 등을 거부했고 그러한 자신의 삶의 태도를 예술로도 표현했다. 그는 예기치 못한 상황, 즉 우연의 일상을 좋아했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대상을 통해 새롭고도 낯선 분위기를 만들어 낼 줄 아는 화법을 구사했던 마그리트다운 발상이다.

 

전혀 체험해보지 않은, 나에게는 낯선 일상 속에서도 그동안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삶의 즐거움이나 능력을 발견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 환경 속에 놓여진 무(無)가 유(有)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가끔 행정학과 수업을 듣는 친구들이 나에게 농담삼아 하는 말이 있다. 경영학과 수업만 듣지 말고 이쁜 여자 한 명이라도 꼬셔 오라고...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내가 듣는 경영학과 과목 수업에는 여학생들이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다. 그래서 친구들은 팀별 과제가 많이 부여되는 수업 특정상 그것을 잘 이용하면(?) 여자친구를 만들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수업을 듣는 나를 부러워하는 녀석도 있다.

 

사실 친구들의 농담이 틀린 말은 아니다. 내 친구 중에서도 팀별 과제를 계기로 만 타 과 학생과 캠퍼스 커플이 된 경우도 있으니까.  친구의 농담대로 그렇게 되면 참 좋겠지만 아직 제대로 된 팀별 구성이 되지 않아서 일단 지켜봐야 할 상황이다. 만약에 친구의 농담처럼 그렇게 된다면 내 인생에 있어서 정말 예기치 못했던 최고의 '좋은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인생이라는 게 어떻게 될지 그 누구도, 그리고 '나'라는 주체적인 존재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인생이란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일들투성이니까.    

 

 

 

 

 


댓글(4)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을사랑하는현맘 2012-03-21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생은 당연히 알 수 없는 일들 투성이고, 설명할 수 조차 없는 사건들로 가득차 있죠. 이번 학기 cyrus님에게 그런 일들 중에서 긍정적이고 희망찬 일들만 생기길 바랄께요~
물론 연애 포함해서요~ㅎㅎ

cyrus 2012-03-21 19:25   좋아요 0 | URL
ㅎㅎ 현맘님의 희망처럼 그런 일이 찾아왔으면 좋겠네요, 현맘님도
즐겁고 행복한 일들이 흰수염고래처럼 찾아오기를 바라요 ^^

맥거핀 2012-03-21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얘기 읽다보니까 제 대학시절의 일이 하나 생각이 나는데요. 제가 부전공을 했는데, 부전공하는 과가 상당히 여학생 중심의 과라서, 조과제 수업 때 상당히 미모의 여학생들과 한 조과 되어 같이 도서관에서 밤도 새고, 자료조사(?)도 나가고 했었는데요...그 이후에 어떻게 되었냐면...(cyrus님께 희망을 드리는 차원에서 자세한 뒷얘기는 생략하기로..)

cyrus 2012-03-23 20:33   좋아요 0 | URL
저도 그런 날이 오겠죠..? ^^;; 그냥 운명에 맡기려고 합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