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야 하는 이유 - 불안과 좌절을 넘어서는 생각의 힘
강상중 지음, 송태욱 옮김 / 사계절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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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 나태주 「풀꽃」-

 

 

 

 

사토리 세대를 아십니까?

 

 

 

 

 

 

3포 세대란 말이 유행한 지 제법 됐다. 대학 졸업해도 취업을 못하니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포기한 2030 세대를 일컫는다. 근래엔 4포, 5포 세대까지 생겨났다. 스펙 쌓기와 취업 경쟁에 내몰려 인간관계를 포기했다 해서 4포, 여기에 내 집 마련까지 포기하니 5포다. 이 쯤 되면 포기는 배추 셀 때 쓰는 말이라면서 쉽게 포기하는 젊은이들에게 핀잔이 섞인 우스갯소리가 나올 법하다. 하지만 요즘 현실을 생각한다면 썰렁 유머에 쓴웃음만 나올 뿐이다.

 

재미있게도 이웃나라 젊은 세대들이 처한 현실이 우리와 비슷하다. 사토리(さとり, 득도) 세대. 깨달음을 얻은 세대라는 뜻으로, 물질적 욕심이 그다지 없다는 게 이들의 특징이다. 수도권 명문대학에 진학하는 꿈도 일찌감치 접고, 여행도 가지 않는다고 한다. 자동차나 명품 옷에도 별 관심이 없고, 술도 안 마신다.

 

사토리 세대는 흔히 사회문화적 현상으로 간주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잃어버린 20년’이라고 불리는 장기불황의 시대적 산물이다. 제대로 직업을 갖지 못한 젊은이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나름의 적응방식인 것이다. 저성장 혹은 제로성장 시대에 자라면서 고도성장이 뭔지조차 경험해본 적이 없는 세대가 형성한 집단정체성이기도 하다. 일본의 사토리 세대와 한국의 3포 세대를 같은 맥락에서 보는 건 무리가 있다. 하지만 경제 환경이 젊은 세대의 정신세계와 가치관을 경향적으로 지배한다는 점에선 다르지 않다.

 

한국과 일본은 수십년 전과 비교해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뤘지만,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최고의 자살률을 기록하고 있고 일본은 지난 15년간 매년 3만명이 자살했다. 금융파탄, 고용 불안 등 세계화로 사회 체계가 불안정해지며 우울증 환자가 100만 명이 넘고 연간 수만 명 이상이 자살하는 시대. 이렇게 불안한 사회에서 이제껏 살아왔던 삶의 방식과 행복의 의미는 무엇인가?

 

 

 

  행복의 합격 기준에 맞추면서 사는 삶

 

우리에게 중요한 삶의 보람이나 살아가는 의미, 그리고 행복감은 무엇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생의 의미는 막연하게나마 행복감과 거의 같은 것으로 연결돼 있다. 특히 돈이 얼마만큼 소유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우리 삶의 행복에 대한 가치의 지향점이 달라진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월수입이 수억 원까지는 아니더라도 일단 먹고사는 데 곤란을 느끼지 않을 정도의 수입이 있기를 바란다. 이 정도면 우리의 삶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행복의 합격 기준이다.

 

그러나 숭고함이나 위대함이라는 높은 선과 비교하면 평범하고 진부하다. 근대 사회의 가치가 개인의 생명과 안정을 중시하고 일상생활을 소중히 하는 데 있다면, 최근 수십 년 사이에 국민 대다수가 그런 가치를 공통적으로 향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익부 빈익빈 현상은 여전하며 80%의 국민은 자신들의 삶이 행복하지 않다고 절망한다.

 

재일 한국인 강상중 교수는 행복에 합격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행복은 원래 정의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는 좋은 상태와 나쁜 상태의 차이가 없어지고 주변에서 비교 대상을 찾기 어려워지면 어떤 의미에서는 행복이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것인지 불확실해지기도 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행복이 어떤 내용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주관적인 기준을 공유하고 그것을 행복이라고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행복'이라는 이름만 붙여진 인생의 정형화된 틀에 맞추면서 삶을 살게 된다.

 

또 하나의 불행은 행복의 합격 기준이 굉장히 높다는 것이다. 저성장이 지속되는 사회에서 부의 수준이 어느 정도 충족되고 인생을 보낸다는 것은 평범하지 않다. 중산층의 계단에서 탈락된 사람들에게는 이 정도 인생은 상당히 높은 수준의 삶이다. 기본적일 수도 있는 행복에도 매달리지 못하고 탈락하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백만 명 이상의 우울증 환자들이다. 들은 인생의 계단에서 스스로 탈락시키고 마는 자살자로 전락한다.

 

 

 

 잃어버린 행복의 의미를 되살리는 방법

 

강 교수는 어두운 현실 속에서도 진정한 의미가 상실된 행복이란 단어를 다시 한 번 재생시키려고 시도한다. 그의 어둡고 불행한 삶을 생각해본다면 진정한 의미의 행복을 탐색하려는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 역시 개인적으로 큰 아픔을 겪었다.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 일본 대지진의 참혹한 현장도 경험했다.

 

불행하게도 젊은 시절, 강 교수가 체험한 뇌의 증상은 아들에게도 되물림되었다. 아들은 자신의 출생을 저주했다. 자신의 파멸과 세계의 파멸을 함께 바랐다. “왜 태어난 것인가? 왜 살아야만 하는가? 인생의 의미는 있는가?”라는 질문에 사로잡혔고, 아버지에게도 수차례 같은 질문을 던졌다. 가까스로 세계, 그리고 자신과 화해하는 모습을 보이던 아들은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리고 얼마 뒤 동일본 대지진에 의해 2만명 가까운 생명이 사라졌고, 원전사고까지 이어졌다. 이토록 “납을 삼키는 듯한 고통과 슬픔”을 겪으면서도 강 교수는 왜 우리에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강조하는 것일까?

 

삶의 해답을 구하기 위해 강 교수는 전작 <고민하는 삶>과 같이 다시 한번 일본의 ‘국민작가’ 나쓰메 소세키(1867~1916)를 경유한다. 일본이 조선을 강제 병합하고 본격적으로 제국주의의 야욕을 드러낸 1905년, 나쓰메는 “일본은 멸망한다”고 말했다. 구미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시작했다는 자신감에 들뜬 당시 일본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비관적 발언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40년 뒤, 일본은 실제로 한 차례 망했다. 강 교수가 나쓰메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정직한 비관론’이다.

 

 

“‘자기를 찾아라’라고 외치며 우리를 부추기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자본주의입니다. 이 빈틈없는 시스템은 ‘상품이 되는 것’을 찾아내 이용하는 데 뛰어납니다. 특히 ‘불안’의 냄새가 나는 것을 이용하는 데 무척 뛰어납니다.” (p106)

 

 

자의식의 과잉은 고뇌를 낳기 때문에 ‘자기 찾기’가 아니라 ‘자기 잊기’를 통해 인생의 답을 구하라고 조언한다. 소세키는 “자기를 잊는 것보다 마음 편한 것이 없고 무아지경보다 기쁜 것이 없다”면서 ‘자기 찾기’와 거리를 뒀다. 행복의 파랑새를 쫓으려는 ‘자기 찾기’를 넘어 ‘자기 거리’를 둠으로써 자신의 삶을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다. 강 교수는 여기서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의 ‘거듭나기(Twice Born)’를 강조한다. ‘건전한 마음’으로 고통의 일생을 끝내는 ‘한 번 태어나는 형(Once Born)’보다 병든 영혼으로 두 번째 삶을 다시 사는 ‘거듭나기’의 인생이 더 중요하다. ‘자기 찾기’에 몰입한 사람들은 그동안 내내 반성 없이 ‘한 번 태어나는 형’으로 만족하면서 살아왔다. 그런 삶은 배후에 있는 문제의 뿌리가 깊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되고 마음의 병에 시달리게 된다.

 

 

 

 ♣ 행복의 '파랑새'는 없다

 

행복은 애초에 구할 수도 없고 구한다고 손에 넣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메테를링크의 동화 속에서 주인공 치르치르와 미치르가 찾으려고 하는 행복의 ‘파랑새’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인생은 바로 그 인생에서 나오는 물음에 하나하나 응답해가는 것이고, 행복이라는 것은 그것에 다 답했을 때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즉 행복을 손에 넣기 위해 뭔가 한다는 생각 자체가 처음부터 성립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강 교수의 행복론이 애초부터 노력해도 행복한 삶을 살기가 어렵다는 허무주의적 입장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행복을 위해 좋은 미래를 추구하기보다 좋은 과거를 축적해가는 마음으로 살아가라고 말한다.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가치는 인생을 대하는 ‘태도’에 있다.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기가 죽을 필요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괜찮다는 삶의 태도가 필요하다.

 

우리 삶이 특별해야 할 이유가 없다. 지금 이대로 숨 쉬며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삶이다. 자세히 성찰해야 행복하다. 오래 보아야 우리의 삶이 사랑스럽다는 걸 느낄 수 있다. 당신도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살아야 하는 궁극적인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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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책 - 행복할 경우 읽지 말 것!
아르튀르 드레퓌스 지음, 이효숙 옮김 / 시공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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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실의 속에 빠진 친구가 있으면 자기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위로 한 마디를 전한다. “힘내. 시간이 지나면 좋은 일이 오게 될 거야.” 그런데 프랑스 출신의 아르튀르 드레퓌스라는 사람은 별나다. 스무 살 친구가 삶이 지루해서 은퇴가 빨리 오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자 아르튀르가 하는 말. “너 자살은 생각해봤니?”

 

평소 대화에서는 ‘자살’이라는 단어는 잘 쓰지 않는다. 금기어나 마찬가지다. 그러면서도 아르튀르는 고민이 가득한 친구에게 위로하거나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고 생뚱맞게 자살을 생각해 본 적이 있냐고 질문한다. 여기까지만 읽은 채 아르튀르가 친구에게 자살을 권유하는 자살 방조자로 오해하지 마시길. 살아가면서 행복의 즐거움을 발견하지 못한 친구에게 충격요법 방식으로 살벌한(?) 위로를 한 것이다. 이어서 아르튀르는 말한다. 인생의 향후 45년을 ‘은퇴’를 향한 지겨운 과도기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당장 오늘 인생을 끝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아르튀르를 상대한 친구의 반응이 흥미롭다. 지루한 삶의 연속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결책으로 조기 은퇴를 원하면서도 자살 행위를 끔찍하게 보는 이 반응. 웃기지 않은가. 은퇴를 원하기 위해서는 지긋지긋한 인생을 현재 나이의 2배를 더 살아야 한다. 논리적인 의미로 따져 본다면 인생 살아가기 귀찮을 때 가장 간단하게 해결하는 방법은 자살이다. 굳이 은퇴를 기다리기 위해 괴로움 가득한 1년 365일 감당하면서 살 이유가 없다.

 

그렇다고 자살 행위를 정당하거나 옹호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자살을 권유한 아르튀르의 살벌한(농담에 가까운) 질문을 듣는 순간 조기 은퇴를 원하는 친구처럼 삶의 진정한 가치와 진짜 행복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무지함이 드러나게 된다. 친구의 모습은 이솝 우화에 나오는 늙은 노인과 비슷하다. 만사가 귀찮고 힘들다고 해서 ‘죽음의 신’이 얼른 자신의 명(命)을 데려가기를 원했다가 막상 신이 자신의 곁에 다가오자 겁에 질려버리는 이중적인 태도 말이다. 우리가 자신의 무지함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면 조기 은퇴를 원한다는 궤변의 푸념을 늘어놓지 않게 것이다.

 

아르튀로는 우리의 삶이란 하나의 거대한 ‘직업’이라고 말한다. 이탈리아의 소설가 체사레 파베세가 쓴 <삶이라는 직업>에서 착안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파베세는 42살의 젊은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우리는 직업을 갖기를 원하며 한 번 갖게 된 직업으로 기운 팔팔할 때까지 일하고 싶어 한다. 우리나라는 이제 막 성인이 된 20대부터 정년을 앞두는 60세까지 남녀노소 직업을 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연봉에 따라 자신이 취직하기를 원하는 직업은 천차만별이지만 스스로 무직자로 살아가지 않는 이상 한 가지 직업을 가지게 된다. 직업의 노동을 통해 노동의 가치만큼 임금을 받는다. 일해야 돈을 벌 수 있고, 번 돈으로 의식주를 해결하여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이처럼 인생은 평생 짊어지고 가야 할 ‘직업’인 것이다. 하지만 직업 환경 및 조건이 불만스러우면 간혹 파업에 돌입할 수 있다.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삶에 불만투성이에다가 전혀 행복하지 않다는 좌절감을 표출하는 ‘행복의 파업자들’이 있다. 파업한다는 것은 곧 일을 중지한다는 의미다. 우울감에 빠져 만사가 귀찮게 느껴지고 모든 일에 손 놓고 싶은 심정과 같다. 장기간으로 인생의 ‘파업’이 지속한다면 앞으로 해야 할 일에 진전이 없다. 지속가능한 삶을 살아가기가 어렵다.

 

 

 

♣ 아르튀르는 자신의 짓궂은 질문에 실망한 친구를 위해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책>을 썼다. 단순하게 짝이 없는 제목답게 그가 친구에게 전하고 싶은 행복의 의미도 단순하다.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한 삶’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것을 갖지 못한다고 해서 좌절하는 것은 멍청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경험하고 느끼는 불행의 원인은 섣부른 해석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물이 반쯤 담겨 있는 컵을 바라보는 태도에 관한 이야기를 아실 것이다. 그걸 보고 한쪽은 ‘물이 반밖에 남지 않았군.’이라고 말하고 다른 쪽은 ‘아직 물이 반이나 남았다.’고 말했다. 친숙한 이야기를 좀 더 심화, 확장해서 생각해보자. 오아시스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광활한 사막 한가운데에 두 사람이 걷고 있다. 그들에게 가지고 있는 것은 반 정도 물이 담긴 물통이 있다. 물통 속에 든 물을 보고 두 사람은 방금과 같은 대조적인 반응을 보일 것이다. 그렇다면 사막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바로 ‘아직 물이 반이나 남았다.’고 말한 사람이 더 오래 살 가능성이 높다. 부정적인 사고는 사기를 저하한다. 긍정적 사고는 불가능을 가능케 할 정도로 올바른 마음으로 움직일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부정적인 사고만 가득한 회의주의자는 모든 것을 부정적, 회의적으로 해석한다. ‘내가 못생겨서’, ‘내가 별 볼 일 없어서’, ‘내가 최악의 운세를 타고 나서’ 등이라는 이유로 불행한 삶을 정당화한다. 어떤 현상의 반대편 입장을 생각하지 않은 채 회의적인 사고의 틀에 갇힌다면 고독만 남을 뿐이다. 폐쇄와 단절이 빚은 고독이 자살을 선택하게 한다.

 

 

 

현실 도피적으로 과거의 행복에 아쉬워하고 집착하는 것 또한 불행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현재 자기가 소유하고 느끼고 있는 행복을 있는 그대로 충실하게 느껴야 한다. 사소한 행동, 물건 그리고 익숙하게만 느껴진 장소 등이 또 다른 느낌의 행복을 선사해줄 수 있다. 아르튀르는 공항을 좋아한단다. 왜냐하면, 식기세척기 내부보다 깨끗해서. 행복의 원인이라고 느꼈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새롭게 보이면서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행복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실행해보는 것도 좋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좋은 것은 신중하게 아껴 쓴다거나 후일을 위해 참는 습성이 있다. 여러 가지 반찬 중에 맛있는 소시지가 있다면 소시지를 맨 나중에 먹는다거나 물건을 구입하려는데 단위가 큰 지폐를 깨고 싶어 하지 않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와타나베의 여자친구 미도리가 하는 대사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인생은 비스킷통이다.’ 비스킷통 안에는 자기가 좋아하는 비스킷과 그렇지 않은 비스킷으로 가득 차 있다. 먼저 좋아하는 비스킷을 먹게 되면 좋아하지 않는 것만 남게 된다. 그래서 괴로운 일이 생기면 먼저 겪어 두면 나중에 편해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르튀르였다면 일본 처녀의 인생철학을 반대할 것이다. 아마도 비스킷 상자 안에 있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 골라 먹었을 것이다. 아르튀르는 마카롱의 교훈을 들려주면서 행복할 기회를 손쉽게 놓쳐버리는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유명한 파티시에로부터 받은 맛있는 마카롱을 특별한 기회에 먹으려고 바로 먹지 않고 따로 보관했다. 일주일 후 배가 고파서 어쩔 수 없이 마카롱을 먹으려고 했다. 그런데 봉지는 개봉한 순간 마카롱이 곰팡이가 필 정도로 먹을 수 없게 되었다. 아르튀르는 단 한 개의 마카롱을 맛을 보지 못했다.

 

비스킷이나 마카롱이나 어차피 입에 들어가는 것들이다. 마카롱을 받자마자 개봉해서 몇 개라도 먹었더라면 먹지 못해서 느낀 아쉬운 감정의 정도가 다를 것이다. 맛있는 비스킷을 먹으면 기분이 좋다. 그런데 단위가 큰 지폐를 지불하고 싶지 않아서 비스킷 먹는 것을 포기한다면 나중에 후회 안 할 자신이 있는가. 소소한 일상을 통해 행복할 수 있는 시간을 누리지 못하고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괴로운 일을 먼저 선택하고 참는다면 괴로움이 우리 삶에 전달하는 고통이 더 가중될 수 있다.

 

 

 

이 책은 아르튀르가 자신의 친구를 위해 쓴 것이다. 제목에 혹해서 이 책을 손에 집었다면 읽지 않기를 권한다. 특히 지금 당신의 삶이 행복하다면 읽지 않는 것이 좋다. 행복한 사람이 이 책을 읽으면 도통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수 없는 겉멋 든 ‘개똥철학’으로 보일 수 있다. 아르튀르도 행복한 사람이 자신의 책을 읽는 것을 반갑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심오한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던 그 친구가 이 책을 읽기를 바랄 뿐이다. 아르튀르의 책은 자신 주변을 둘러싼 사소한 일상을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적은 단상의 연속체다. 거대한 삶 속에서 지극히 사소한 삶의 과정까지 되돌아보면서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증명하고 있다. 의식의 흐름 기법처럼 마음속 상태를 있는 그대로 나열한 그의 글이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결론은 단 하나다. “삶이 의미 없다 해도, 행복이 삶의 방향이다.”(46쪽)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행복의 의미를 알게 되고, 그것을 목표의 지향점으로 삼아 삶의 방향이 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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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을 위한 철학 - 세상에 단 하나뿐인
브랑코 미트로비치 지음, 이충호 옮김 / 컬처그라퍼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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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치를 파괴의 도구가 아니라 창조의 도구로 활용한 사람이 있다. 바로 철학자 니체다. 니체를 ‘망치를 든 철학자’라고 한다. 기존의 철학을 부수고 그 위에 새로운 철학의 집을 지었던 철학자였기 때문이다. 니체를 망치 철학자라고 하는 이유는 근대를 마감하면서 플라톤 이후 2500년간 서구인들이 신봉해왔던 전통적 가치관을 가차 없이 깨부수었기 때문이다. 그는 낡은 가치관을 전복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기 위한 도구로서 망치를 활용한 철학자다. 미래를 창조하려면 과거를 파괴하고 그 위에 살고 싶은 새로운 미래를 건설해야 한다. 우상 파괴자, 사유의 망치를 들고 사정없이 부숴버린 니체가 망치를 들고 부수는 행위는 새로운 창조를 전제로 하는 창조적 파괴다.

 

철학자 니체는 망치를 직접 들어 새로운 세상의 등장을 몸소 증명하려고 했다. 그렇다면 진짜 손에 망치를 든 건축가는 새로운 건물의 건립을 위해 ‘철학’이 필요하다면 이것 또한 창조적 파괴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건축’은 글자 그대로 건물을 세운다는 뜻이다.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공간을 창조하는 작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에 대해 논할 때 은유적으로 건축과 건축가를 들었다. 건축을 통해 자신의 철학을 증명한 셈이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지만, 옛 건축가에게 철학은 벽돌을 쌓아올리기 위한 토대와도 같았다. 이는 건축물에 대한 일종의 ‘존재의 증명’이기도 했다. 역으로 이야기 해보면, 건축가가 자신의 철학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면 그의 건축은 그저 벽돌로 쌓은 건물에 불과하다. 물론, 그 건축가의 철학 역시 허공에 지은 관념에 불과할 것이다.

 

철학을 논하기 위해 건축가에게 기본을 물어보자. 좋은 집이란 과연 무엇이냐고. 전망이 좋은 곳에 지은 아름답고 멋진 집인가, 아니면 화려고 웅장한 집인가. 그렇다면 그의 건축은 단순한 거주의 공간이자 건축주의 욕망을 위한 표현 수단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는 건축을 하나의 삶의 방식으로 이끌어가고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의 질서로서 판단하고 그 가운데 어떠한 의미들이 건축적 논의 밖으로 확장되도록 한다. 사실상 우리 사회가 바라는 관계의 위상을 이해하고 추구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건축의 본질과 내용을 결정한다. 건축은 근본적인 존재적인 문제, 사회적인 문제, 문화의 문제를 담고 있으며 그 문제들을 해결하고 제시하고자 하는 시대의 의지를 표현한다.

 

고대 로마의 건축이론가 비트루비우스는 인체와 건축의 관계를 분석하고 건축미를 기하학적으로 정의했다. 비트루비우스를 계승한 르네상스 시대의 알베르티는 건축미를 이루는 방, 벽, 기둥, 창의 비례체계를 집대성했다. 이들이 추구했던 아름다움은 인간의 오감으로 느끼기 이전에 존재하는 절대적인 원리였다. 건축을 위한 자신만의 철학을 가지고 있는 대표적인 건축가가 바로 르네상스 시대 때 활동했던 안드레아 팔라디오다. 그는 건축물은 완벽한 비율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자신의 건축 철학을 하나의 이론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현상학적 사고와 시야는 철학으로부터 얻어진 결과다. 건축에 대한 신체적이고 무의식적인 연결은 현상학으로 인하여 일부 이론가들의 연구대상이 되었는데 그러한 토대는 후설에 의하여 개진되었다. 그리고 하이데거의 작업에 의하여 건축의 현상학적 고려는 형태중심적 사고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오늘날의 미적 토대를 마련했다. 이러한 현상학적 결과들을 노르웨이의 건축 이론가 노르베르트 슐츠는 존재 철학적인 토대에서 장소론으로 발전시켜 건축술에 적용하고자 했다.

 

기존의 형이상학은 중심의 현존을 주장하기 위해 이분법적 대립항을 만들어 완전한 것을 첫째로 하여 특권을 부여하고, 오염된 것은 둘째로 보아 억압했다. 하지만 데리다가 주장한 해체이론의 출발은 전통적으로 확립된 모든 이분법적 대립이 붕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기 미국현대건축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혼란기를 거칠 때 새롭게 등장한 것이 해체주의 건축이다. 피터 아이젠만 같은 건축가들은 진부한 기존의 모더니즘을 파괴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추구했다. 해체주의 건축의 외형적 특성은 비대칭적, 불확실성의 추구이다. 또한 기능주의적 전제는 무시되기도 한다.

 

건축을 철학 한다는 것은 그 모든 상황을 이해하고 자신이 스스로 건축이라는 관계의 위상과 의미를 결정하는 것이다. 위대한 창조자, 매우 숙련된 기술자 그리고 뛰어난 예술가라고 할 수 있는 건축가들은 모두가 자신의 철학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철학의 핵심 이론을 먼저 설명하고 철학이 버무려진 건축 이론을 설명하고 있어서 건축학도가 아니라도 건축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곁에 두고 틈틈이 펼쳐볼 수 있다. 물론 정독이 요구된다. 다시 말해 책 내용이 그다지 어렵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술술 읽히는 책은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시대정신과 철학에 따라 진화하는 건축물을 함께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세상에 단 하나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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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3-04-29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축물을 면과 면의 결합 및 경제적, 공간적인 부분으로 볼 것인가, 이데아의 구현으로 볼 것인가가 이 책에서 말하는 건축에 대한 해석의 가장 주된 흐름이겠지요?

cyrus 2013-04-30 17:18   좋아요 0 | URL
이번 달에 중간고사 기간이 겹쳐서 늦게나마 책 읽고 급하게 서평을 썼어요... 한 두 번 정도 곱씹어 읽어보고 써야했는데 번갯불 콩 구워 먹듯이 읽고 쓰다보니 제가 책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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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전집 4 - 국가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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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플라톤이고, 플라톤은 철학”이라는 시인 에머슨의 말처럼 플라톤은 중요한 철학적 질문을 인류 역사에 던져놓았다. 플라톤은 30인 과두정치와 이후 다시 부활한 아테네 민주정치를 경험하고, 아테네 시민법정에 세워진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정치의 꿈을 접고 철학자의 길을 걷는다. 라파엘로의 유명한 그림 「아테네 학당」은 플라톤이 세운 아카데미아(academia)를 그린 그림이다. 그림 중앙에서 하늘을 가리키며 걸어오는 사람이 바로 플라톤이다. 진리는 이 세상이 아닌 저 하늘에 이데아(idea)로 존재한다. 이 불변하는 이데아를 감각적 사물에 정신이 팔린 인간은 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동굴에 묶여 벽만을 바라보고 있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고 벽면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참된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이다. 이상적 인간이란 이성에 의해 감각적 욕망을 잘 조절할 수 있는 인간이다. 이상적 인간이 바로 철학자이며 우매한 대중이 아닌 현명한 전문가가 통치하는 국가가 이상국가이다.<국가(Politeia)>는 플라톤의 정의관과 이상국가에 대한 구상이 담겨 있는 책이다. 총 10권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흔히 「국가」로 알려졌지만 당시 도시국가인 폴리스(polis)와는 다른 의미이며 정확한 번역은 ‘정체(政體)’이다.

 

이 책은 플라톤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와 지인들과 나눈 대화를 기록한 것이다. 자신의 철학 세계를 글로 남기지 않았던 소크라테스 대신 플라톤이 스승의 방대한 철학 사상을 옮기는 작업을 했다. <국가> 제1권은 아테네 근처 피레우스항에서 소크라테스와 케팔로스, 풀레마르코스, 트라시마쿠스, 아데이만토스 등 여러 사람들과 함께 '정의'란 무엇인지 의견을 내고 반박, 재반박하는 과정을 재미있게 서술하고 있다. 대화 형식이다 보니 성인이 읽어도 재미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3년 전 우리나라를 뜨겁게 달궜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이미 이 책의 1권에서 소크라테스에서 비롯된다. 여기서 트라시마쿠스는 ‘정의이란 강자의 이익'이라고 주장한다.

 

소크라테스와 그의 질의에 참여한 사람들은 각자 생각하는 ‘정의’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누군가 ‘정의는 정직한 것이며, 남에게 받는 것을 갚는 것이다’고 얘기하자, 소크라테스가 ‘무기의 비유’를 들어 더 나쁜 결과를 일으킬 수 있는데도 받은 대로 갚아주는 것이 맞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또다시 누군가 정의란 ‘더 강한 자의 이익’이라고 주장하며 강한 자로 분류되는 통치자나 전문가, 기술자는 약한 자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올바른 사람은 훌륭하고 지혜롭지만 올바르지 못한 사람은 무지하고 못된 것으로 판명되며, 올바르지 않은 사람이 무언가 도모하려 할 때 문제가 생긴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에 있어 올바른 것이란 언제나 지켜야 하는 절대적인 것이다. 진정한 올바름은 타인의 평가나 가변적 상황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트라시마쿠스는 올바른 것이 항상 좋은 것이 아니고, 올바르지 않게 행동하는 사람이 올바르게 행동하는 사람보다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음을 지적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기 자신의 이익을 중시하는 ‘이기심’이 오히려 사회 전체의 이익을 낳는다. 트라시마쿠스의 생각에 따른다면 소크라테스의 올바름은 인간의 욕망과 현실을 무시하는 지나치게 관념적인 생각일 뿐이라고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올바르지 못한 일이 더 큰 이익이 되는 사회를 용인한다면 처음에는 각자의 이익이 보장되겠지만 점차적으로 약육강식의 상황에서 소수의 사람들에게 이익이 집중될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생각처럼 올바름에 대한 절대적 기준이 있어야 잘못된 사회구조의 개선이 가능하고 사람들의 자의적 판단에 휩쓸려 사회 전체가 혼란에 빠지는 위험을 막을 수 있다.

 

플라톤은 참주정체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살펴보면서 대중의 부정적인 속성을 드러낸다. 참주(僭主)란 비합법적인 수단으로 독재적 지위에 오른 지배자를 일컫는다. 흔히 참주정체보다 민주정체가 훨씬 좋은 사회를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민주정체에서 참주정치가 나올 수 있다. 이는 대중의 속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대중은 정치 전문가가 아니므로 복잡한 정치적 상황을 정확히 분석할 능력이 없다. 또한 대중은 자신의 이익이나 군중심리에 의해 선동이나 정치적 술수에 능한 사람을 밀어주는 성향이 있다. 인기에 영합하는 선동가를 앞세우는 대중의 어리석음은 참주를 만들어낸다. 민주정치는 중우정치로 빠질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대중이 어리석다는 주장은 개인이 모여 집단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지적 창의력이나 통찰력이 사라지고 평준화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와 반대로 대중의 판단이 현명하다고 보는 입장에서는 오히려 다수의 개체가 모여 얻는 지적 능력이 개체의 지적 능력을 뛰어넘는 '집단지성'을 발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차이에 따라 민주정체를 수용하는 입장도 달라진다.

 

그렇다면 어떤 국가가 가장 이상적인 국가인가? 플라톤이 생각하는 정치적 이상은 정의와 그로부터 오게 될 평화였다. 예컨대 빈부 격차가 너무 커지면, 끊임없이 싸우는 빈자와 부자로 국가가 두 조각 날 것을 염려했다. 그래서 권력은 능력이 탁월하고 정의감이 투철한 사람만이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것이 ‘철인통치’다. 플라톤은 완전한 지혜를 갖춘 철학자가 통치하고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자신의 덕(德)을 잘 발휘하여 조화를 이룬 국가를 이상국가라고 생각하였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평등하지 않다. 지혜로운 철학자가 통치하고 용기의 덕을 지닌 군인이 수호하고, 서민계급은 욕심을 절제한다. 플라톤에게 있어 정의란 지혜, 용기, 절제가 조화를 이루면서 각자에게 알맞은 직분을 행하는 것이다. 이상국가는 어떤 한 계급의 행복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행복을 목적으로 하며, 각 계급에 속한 사람들이 각자의 일을 잘 수행할 때 국가가 번영하고 행복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국가론은 제자이면서 자유를 더 강조하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당연히 비판을 받는다. 오늘날도 긴장관계에 서 있는 두 이상인 정의와 자유 사이의 갈등이다. 플라톤은 정의의 편에 서서 정치 전문가를 도입해 정의와 평등과 평화를 구현하려고 했던 것이다. 오늘날의 눈으로 보자면 자유를 심각하게 제한하려는 시도로 의심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아이디어는 타당하다. 정치란 단순히 파워 게임이 아니라 ‘국가가 무엇인가’ 더 나아가 ‘인간이 무엇인가’에 대한 제대로 된 통찰력이 구현되는 수단이어야만 한다. 어떠한 국가도 더 강력해지고 더 잘 살기만을 추구한다면 시민들이 신명나게 사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플라톤의 정의는 지배자를 합리화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 바로 이 때문에 플라톤이 말하는 이상국가는 사실상 전체주의 국가와 다를 바 없다고 영국의 철학자 칼 포퍼는 비판한다.

 

플라톤의 <국가>는 보통 철학책으로 분류되지만, 철학 이외에도 교육, 정치, 사회 등 다양한 주제들을 담고 있다. 플라톤은 이 속에서 아테네 현실의 여러 문제점들을 비판하고 이상적 사회를 꿈꾸고 있다. 교육 분야에서 그는 사교육이 국가를 망친다고 반대하고, 제대로 된 공교육을 역설했다. 사교육의 교사들인 소피스트들은 돈을 낼 사람들의 의도에 부응할 뿐이었다. 이렇게 해서는 좋은 시민도 좋은 정치가도 배출할 수 없다. 민주주의의 토대인 선거도 물론 제대로 될 리 없다. 그리스 교육의 목표는 덕(arete)이었다. 덕은 단지 도덕적으로 훌륭할 뿐 아니라, 탁월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플라톤이 생각하는 교육이란 직업교육이나 출세의 발판이 아니라 유능하고도 훌륭한 시민을 키워내는 것이다. 교육의 출발점은 ‘무지의 동굴’로부터 진리의 세계로 영혼을 돌이키는 일이다. 청소년이 교사의 도움을 받기는 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눈앞의 현상을 넘어서 사물의 진실인 이데아에 도달하는 과정이 교육이다.

 

플라톤의 <국가>는 읽는 사람의 관심에 따라 주제가 다르게 나타난다. 정치에 관한 책이면서 철학에 관한 책이며, 교육에 관한 책이자 종교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분량도 많고 주인공 소크라테스와 상대방 사이에 대화가 종횡무진 이어지므로 읽기 쉬운 책은 아니다. 쉽지 않다면 가치라도 있어야 할 텐데, 플라톤에 관해 널리 퍼져 있는 선입견 때문에 그것도 찾기가 쉽지 않다. 철인 왕이나 이데아 등 중등교육 과정에서 플라톤은 아주 단편적인 몇 단어로 요약돼 학생들에게 전해진다. 이런 선입견을 가지고 책을 읽으면, 간단한 이야기를 괜히 수백 쪽의 장광설로 늘어놓는다는 인상을 받기 쉽다. 그래서 더 이상 의미를 찾을 생각도 하지 않고 똑같은 요약이 세대를 통해 전승된다. 필자도 처음엔 무슨 새로운 것을 얻기 위해 이 책을 읽을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읽으면서도 선입견의 틀에 부합하는 말을 따라가는 식이었다. 새로운 읽기는 철인 왕과 이데아 이론을 문제 삼는 자세를 취한 다음에야 가능했다. 책임을 묻고자 증거를 찾아보니 오히려 내가 생각하고 있던 반론의 실마리들이 이미 책 안에서 논의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대화체의 특성상 상대의 반론을 무시하는 일방적 주장은 전개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독자로서도 동의할 수 없는 이야기를 만나면 반문하고 도전하는 자세를 가져야 그 대화에 참여할 수 있다. 플라톤은 올바른 삶, 정의 등의 본질을 알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탐구했다. '무엇이 올바른 삶인가'란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삶을 치유하는 자세를 가질 수 있는 좋은 독서로서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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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3-04-29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가>는 리뷰도 어렵네요. 아무것도 몰라서 그런가봐요. 이렇게 좋은, 그러니까 플라톤, 아니 천병희선생님 번역작을 신간평가단 책으로 받게 되다니, 이건 너무 불공평해요.(뭐가?)

저도 플라톤을 낱개로(으응?) 구입해서 하나씩 시작해봐야겠어요. 맨날 결심만 하는 미친 욕심을 어떻게해야될지 모르겠어요. 이 시간에 책이나 읽었으면 부자됐겠죠. 흐응.

cyrus 2013-04-30 17:20   좋아요 0 | URL
아이님도 다음 기수에 인문 분야 신간평가단 활동해보시기를 권합니다. ㅎㅎㅎ 이 책 받자마자 조금씩 꾸준히 읽었다면 좋았을텐데 여유 부리다가 하필 중간고사 기간 때문에 급하게 읽고 서평 썼어요. 사실은 1~3권까지만 두 번 정도 밖에 안 읽었어요.. ^^;; 그래도 박종철 교수 번역본보다는 글이 쉽게 읽혀져서 좋았어요 ^^
 
어떻게 살 것인가 - 힐링에서 스탠딩으로!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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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소매상'으로 돌아온 유시민, 환영합니다!

 

2년 전에 KBS 1라디오 프로그램인 ‘열린토론’은 방송 2000회를 맞아 전국 성인남녀 1천여 명을 대상으로 토론을 가장 잘할 것 같은 정치인이 누군지 전화설문을 한 적이 있었다. 1위는 바로 유시민 전 의원이었다. 응답자의 12.3%가 유 전 의원을 꼽았다. 유 전 의원은 ‘직업으로서의 정치’ 생활을 청산하고 예전의 ‘지식소매상’으로서 돌아왔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정치인’으로서의 이미지를 많이 기억하고 있다. 노무현 정부 개혁정책의 상징, 보건복지부 장관, 통진당 공동대표. 통진당 구당권파와 신당권파 간 힘겨루기에 치이고 만신창이가 된 그가 공동대표직을 내려놓고 탈당을 선언했을 때 대부분 사람은 정치생활의 근간으로서 추진해왔던 야권 진보연대의 꿈이 허무하게 물거품이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내분으로 꺾였던 연대의 날개가 다시 한 번 화려하게 펼칠 수 있을지 반신반의했다. 통진당에서 나온 신당권파와 함께 ‘진보정의당’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시작했을 때 이미 ‘진보’에 대한 국민의 반응은 너무나도 냉담했다. 그러나 자신의 트위터에 단 7줄의 글만 가지고 정계를 은퇴한다고 선언할 줄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정계 은퇴 선언한 지 1년 뒤, 유 전 의원은 정말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그동안 걸어왔던 인생길을 반추했다. 시위에 참여했던 대학생 시절부터 지식소매상으로서의 활동을 거쳐 ‘직업으로서의 정치’ 생활까지 예사롭지 않았던 삶의 이력을 책 한 권에 담담하게 풀어냈다. 그런데 글의 내용은 과거형인데 반해 책의 제목은 미래형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책은 단순히 사진 앨범을 들춰보는 것처럼 과거의 서사만 들려주는 것이 아니다. 지난날의 시간을 성찰하면서 이제 막 본격적으로 접어들기 시작한 삶의 후반기를 어떻게 살 것인지 자신만의 인생철학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유 전 의원이 전쟁터와 같은 정치판에서 나와 글쟁이로 돌아와준 것에 대해서 격하게 환영해주고 싶다. 정계 입문 전에 탄탄하고 논리적인 문장의 글쓰기로 이름을 날렸던 ‘지식소매상’ 글쟁이답게 필력은 여전하다. 하지만 글쓰기의 방식은 예전과는 사뭇 다르다. 전작 때 선보였던 글쓰기와는 다르게 유 전 의원은 산전수전 겪었던 인생사를 통해 자신의 개인적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다. 지식을 인용, 가공해서 유창하게 풀어냈던 이전의 글쓰기가 이 책의 전체 중에서 반을 차지한다고 보면 된다. 나머지는 자신의 이야기를 쓴 것이다. 사실 그는 책 머리말에서 오랫동안 고집했던 글쓰기에 약간의 변화를 주느라 적잖이 어려움을 겪었다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이번에 쓴 책이 지금까지 썼던 책 중에서 힘들었으며 글쓰기만큼은 정치적 자기 검열을 철저히 했다고 한다. 시작부터 독자와 좀 더 가까이 소통하려는 그의 ‘내려놓음’이 돋보인다.

 

 

 

 "저는 원래 사나운 사람이 아닙니다."

 

지금으로부터 2년 전 조국 서울대 교수는 ‘직업 정치인’ 유시민을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치고 나가는 감각이 좋습니다. 그 점에서 ‘엉덩이’가 무거운 민주당의 386 정치인보다 낫죠. 그리고 그는 권력의 속성, 정치라는 ‘게임’의 법칙을 냉정하게 파악하고 있어요. ‘마키아벨리’적인 재능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유시민에게는 품성에 대한 ‘낙인’이 있습니다. 이 ‘낙인’은 그가 자신과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을 예를 갖추지 않고 야멸치게 비판하면서 생긴 것이죠.

 

(조국, 『진보집권플랜』오마이북, 2010, 277쪽)

 

그렇다면 ‘지식소매상’ 유시민은 ‘직업 정치인’ 유시민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그는 자신의 냉철한 모습에 대해서 억울하다고 말한다. 감히 이렇게 표현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그의 변(辯)은 재미있다. 본인의 가십을 위트 넘치게 '개그'로 승화시켜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는 '내려놓음'을 보여준다.  

 

「개그콘서트」의 ‘희극 여배우’를 흉내내서 말해 본다. “저는 원래 사나운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사실 조용하고 수줍은 편입니다.” 미디어에서만 나를 본 사람들은 아마 비웃을 것이다. 당신이 사납지 않다고? 그렇다. 나는 사납지 않다. 그런데 어떤 상황에서는 나도 모르게 분노가 치민다. 그 분노를 감추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실패할 때가 많다. 분노를 억누르는 데 겨우 성공하는 경우에는 나도 모르게 냉소적으로 변한다. 내 안에 내가 아닌 누군가 있는 것만 같다. 이게 뭐지?

 

(유시민, 『어떻게 살 것인가』아포리아, 2013, 108~109쪽)

 

토론 진행 경험이 있어서 유 전 의원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는 친정이나 다름없던 TV 토론 방송 프로그램에 패널로 참가한 적이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향하는 시민논객의 반박 의사를 논리적으로 재반박함으로써 주장 의지를 꺾이게 하였는데 이 장면은 ‘토론 잘하는 정치인’으로서의 이미지를 대중에게 다시 한 번 부각시켜줬다. 상대방의 견해를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동시에 자신의 견해를 상대방으로 하여금 동의하게 하기 위해서는 냉철한 이성이 묻어 나 있는 화술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유 전 의원의 토론식 화술은 정치판에서 다른 의원을 설득하거나 그 의견을 반박했을 때 크게 먹혔을지 몰라도 정치 인맥 관계에는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했다. 김영준 민통당 전 최고위원은 유 전 의원을 가리켜 “저렇게 옳은 소리를 저토록 싸가지 없이 말하는 재주는 어디서 배웠을까.”라고 말할 정도이니 과거 유 전 의원은 정계에서는 ‘상남자’(?)로 통했다고 할 수 있다. 유시민 안에 있는 '누군가'는 바로 중요한 상황에 냉철하게 승부를 걸 줄 알고, 부조리한 상황 앞에서 분노할 줄 아는 '상남자' 유시민인 것이다.

 

 

 

 "어떻게 내려놓을 것인가". '내려놓음'의 진수를 보여주다

 

이 책을 읽어나갈수록 유 전 의원의 솔직담백한 고백은 흥미로울 수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거부감이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대학 시절 사회주의 사상을 공부했지만, 사회주의자가 아니라고 밝힌 내용과 유물론의 철학적 가치를 설명하는 대목이 눈에 띈다. “유시민도 피를 속일 수 없는 종북이었어.” ‘젊은 보수’를 자처하고 종북 진보를 비판하는 젊은 청년 독자라면 이 내용을 근거로 들면서 이 책을 자기 합리화의 변명을 모아 놓은 산물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요즘 ‘종북’이라는 오명 때문에 ‘진보’의 참된 의미가 씨알도 안 먹히는 세상인 만큼 자기 검열의 옷을 크게 벗은 유 전 의원의 글은 오독의 여지가 있다. 누군가는 또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번에 나온 책이 자신의 종북 이미지를 탈피하는 동시에 정계 복귀를 노리는 의도적인 글쓰기가 아니냐고.

 

‘종북’이라면 분노의 치를 떠는 내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오독의 유형이 실제로 있다면 그것은 난센스라고 여기고 싶다. 유 전 의원이 독일에서의 생활을 통해서 배운 '진보'와 요즘 우리나라에 자주 거론되는(특히 통진당) '진보'의 의미는 하늘과 땅 차이다. 표독스러우면서 싸가지 없는 진보적 정치인 유시민이 기억나는 독자는 이 책을 읽기 전에 반드시 자신의 감정부터 정치적 자기 검열을 거칠 것을 권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외향적으로 보이는 것에 의미를 부여할 뿐 상대방의 내면에 담겨 있는 가치와 행복에는 관심을 두려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언가의 실적에 집착하고, 자신의 성과를 포장하기에 바쁘기도 하다. 이러하다 보니 어느 순간엔가 우리는 ‘내려놓음’과 겸손의 여유를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 유 전 의원의 손아래 누이는 그를 ‘유쾌한 남자’라는 별명을 지어줬다고 한다. 지나치게 심각해지는일 없이 세상의 변화에 잘 적응하면서 사는 그의 성격에서 비롯된 별명이다. 알고 보면 그는 버들나무 이파리처럼 바람의 거친 세기에 유연하게 탈 줄 아는 '버들낭군' 유(柳, 버들 류)시민이었다.

 

완벽주의자가 들고 다니는 사전에는 ‘실패’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실패를 거부하므로 언제 실패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모든 것이 완벽해야 직성이 풀린다. 반면 최적주의자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현실 세계에는 어느 정도의 실패와 슬픔이 불가피하며 성공은 실제로 달성 가능한 기준에 따라서 평가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 결과 실패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불안감을 덜어내며 삶을 좀 더 즐기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현실의 한계와 제약을 인정하므로 실제로 달성 가능한 목표를 정하여, 그 결과 성공하고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다. 그러기에 완벽하지도 않고 완벽할 수도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국가도, 조직도 유한한 존재며 우리가 하고 있고 맡은 일과 자리도 유한하다. 그러기에 그 유한성을 인식하고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설정하여 최선을 다하면서 절제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언제든지 미련 없이 내려놓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비움으로 인해서 오히려 자유로워질 수 있는 내면의 자신감을 갖추는 것이 더욱 아름답고 가치 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유쾌한 남자’ 유시민은 후자의 인간상에 잘 어울린다.

 

나는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을 하고 싶다. 몰두할 수 있는 놀이에 빠져들고 싶다. 더 뜨겁게 사랑하고 더 깊게 사랑받고 싶다. 그렇게 일하고 놀고 사랑하면서, 지금 여기에서의 행복을 누리고 싶다. 그래야 인생의 마지막 날에도 내 삶에 대해 황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유시민, 『어떻게 살 것인가』아포리아, 2013, 62쪽)

 

진정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방법에는 정답은 없다. 그러나 자신만의 정답을 찾아내야 한다. 정답을 찾기 위해서는 경험의 실패와 시행착오를 겪어봐야 한다. 이러한 삶의 과정을 잘 견뎌내는 사람이 바로 최적주의자다.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것, 비울 수 있다는 것처럼 자신을 강하게 만드는 것도 드물다. 무언가를 이루어야 하고, 무언가를 지켜야 하고, 무언가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은 자신을 구속하고 집착하게 하고 여유가 없게 만든다. 오히려 내려놓음으로써 그리고 비움으로써 우리는 더 큰 행복과 진정한 세상의 승자가 될 수 있다. 누군가가 유시민을 사회적 약자들이 잘 먹고 잘 살면서 공정한 분배가 이루어지는 세상을 만드는 데 실패한 정치인이라고 말할지라도 그는 ‘내가 원하는 삶’을 찾아 살고 있는 진정한 세상의 승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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