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애니멀 - 인간은 왜 그토록 이야기에 빠져드는가
조너선 갓셜 지음, 노승영 옮김 / 민음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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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이야기를 좋아하는 동물

 

우리는 ‘이야기’에 묻혀 산다. 그래서 가끔 현실이 소설보다 더 기이하게 보일 때가 있다. 그럴 수 있다. 소설 같은 일이 현실에서 벌어지는 세상이다. 그래도 소설은 거의 예외 없이 현실보다 더 기이하고 재미있다. 현실이 소설의 근본인 상상력을 뛰어넘기는 지극히 어렵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이야기를 좋아했다. 이야기를 즐겨 듣고 만드는 능력 덕분에 문학이 발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즘에는 소설 같은 이야기 때문에 진실을 외면하거나 의혹과 불신을 낳기도 한다.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킨 사건의 원인이 명확하지 못할 때 배후에 거대한 권력조직이나 비밀스런 단체가 있다고 해석하는 것을 음모론이다. 이번 선거전도 별의별 네거티브 선전, 루머, 음모론이 다 등장했다. 특정 정당의 후보가 특정 종교와 연관됐다느니, 선거후보의 아내에 트집을 잡기도 하는 등 하루가 멀게 근거 없는 음모론이 SNS와 인터넷에 쏟아졌다. 이러한 음모론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하지만, 한편으론 그리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더 나아가 일부 소수의 사람들은 아예 사실로 믿고 있다.

 

이런 사례만 들어도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도,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즐긴다. 조너선 갓셜의 표현처럼 인간은 ‘호모 픽투스(Homo fictus)', ’스토리텔링 애니멀(Storytelling animal)', 즉 이야기를 좋아하는 동물이다.

 

인간이 왜 이야기하는 동물인지 증명해주는 재미있는 실험이 책의 서문에 소개된다. 밀폐된 방에 원숭이와 컴퓨터, 단 둘이 있게 했다. 원숭이는 컴퓨터 자판기를 두드린다. 화면에 나오는 글자는 별 의미 없는 단어만 나열된 것이다. 단 한 페이지도 문장을 쓰지 못하고 철자 ‘S’만 수없이 쳤을 뿐이다. 어찌 보면 쓸모없는 실험으로 보일 수 있지만, 결국 이야기를 가장 좋아하고, 쓸 줄 아는 동물이 인간이 유일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Scene #2  인간의 감정을 지배하는 이야기의 힘

 

우리는 이미 어렸을 때부터 이야기를 좋아했다. '옛날 옛적에~'라고 시작되는 전래동화가 시작되면 두 귀를 쫑긋 기울이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동화를 통해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친다. 아이들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조금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하나를 주면 둘을 달라고 하고, 한 번 이야기해주면 또 다시 해달라고 조른다. 이렇듯 어린이 교육의 매체로서 이야기만큼 좋은 소재는 없다. 어린이 정서 발달에 동화가 끼친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보고 듣는 이야기가 오랜 기간 자아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야기는 우리 마음뿐만 아니라 역사를 뒤바꿀 정도로 그 영향력은 엄청나다. 스토 부인의 『엉클 톰스 캐빈』은 출간된 당시에 베스트셀러가 되어 노예제 폐지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과장되게 받아들이면 역효과가 나온다. 히틀러가 바그너의 오페라 공연을 보지 않았더라면 그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무명 혹은 위대한 화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젊은 시절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 신화를 주제로 한 바그너의 오페라 '리엔치'를 보고나서 정치가의 길을 걷기로 결정했다.

 

히틀러의 사례를 통해 우리가 이야기에 단순히 공감하는 것만이 아니라 감정을 지배당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이야기가 우리의 감정에 미치는 효과를 언급했다. 그것이 바로 '카타르시스(katharsis)'다. 카타르시스는 ‘정화’라는 종교적 의미로 사용되는 한편, 몸 안의 불순물을 배설한다는 의학적 용어로도 쓰인다. 요컨대 관객이 비극의 주인공과 자신이 비슷하거나 같다고 생각하는 동일화가 먼저 이루어진다. 마치 비극의 주인공이 처한 상황이 자신이 실제로 경험한 것처럼 느낀다. 자신도 모르게 주인공의 감정에 동화된다. 비극이 그리는 주인공의 비참한 운명에 의해서 관객의 마음에 ‘두려움’과 ‘연민’의 감정이 격렬하게 유발된다. 그 과정에서 이들 인간적 정념이 어떠한 형태로 순화되는 일종의 정신적 승화작용이다.

 

이야기는 정서적 정화 또는 쾌감을 맛보는데 있어서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다. 실제로 배설 욕구를 참으며 견디다가 볼 일을 보고나면 차마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의 시원함을 느끼듯이 인간은 참아왔던 눈물을 흘리는 순간에도 그와 비슷한 시원함을 느끼게 된다. 답답하고 우울하고 슬플 때 억지로 웃으려는 노력보다 시원하게 한 번 울고 나면 개운해지는 그런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순간의 감정이나 정서, 혹은 그러한 현상을 간접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이야기는 가상현실(시뮬레이션)과 같은 작용을 한다.

 

이와 관련해서 저자는 이야기를 즐겨 읽는 사람이 논픽션을 즐겨 읽는 사람보다 사회성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실험 사례를 소개한다. 이야기를 읽음으로써 공감 능력이 향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실험 하나만으로도 이야기의 긍정적 효과를 뒷받침하기에는 부족하다. 허구적인 요소가 가미된 픽션만 읽는다고 해서 공감 능력이 키 크듯이 쑥쑥 향상되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려는 반응의 자세가 중요하다. 19세기 미국인들이 스토 부인의 소설을 읽고 비참한 노예제도의 참상을 알게 되어 노예제를 반대하는 것은 이야기를 통한 좋은 공감의 사례이지만, 반면 히틀러 같은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 나쁜 공감도 있기 마련이다.


 
 Scene #3  이야기의 홍수에서 살아남기

 

상상력이 넘치는 이야기는 종종 돈키호테나 히틀러 같은 망상에 사로잡히는 인간으로 만들기도 한다. 그만큼 우리의 뇌는 이야기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매력을 느끼는 것이다. 사실이 불명확한 내용의 이야기라도 우리가 그것을 믿게 만들 정도로 이야기의 효과는 단순하면서도 쉽게 무시할 수 없다.

 

이야기는 가끔 우리를 생각의 함정으로 유도해서 그 곳으로 빠뜨리게 한다. 우리가 음모론에 쉽게 유혹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음모론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사실로 믿고 싶어 한다. 불확실하고 애매모호한 내용에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해서 그럴듯한 진짜 이야기로 만든다. 그것이 하나의 가설에 불과하고, 사실로 증명되지 않았는데도 가짜 이야기를 진짜 이야기라고 단정을 짓는 것이다. 스토리텔링 애니멀 인간은 음모론이나 루머에게는 아주 좋은 먹잇감이 되기 쉽다.

 

이것을 '셜록 홈즈 증후군'이라고 한다. 코난 도일이 창조한 명탐정 셜록 홈즈는 범죄 수사의 천재이다. 그는 여러 가지 단서들을 통해 수많은 해석을 생각해낸다. 그 중에 한 두 개의 단서는 홈즈가 의문을 품고 있는 사건의 과정에 딱 들어맞게 된다. 여기서 홈즈는 그 해석만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낸다. 이러한 홈즈의 추리력은 지금도 많은 독자들을 감탄하게 만드는 실력이지만, '문학적 허구'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또 홈즈는 사건의 인과 관계에 적중되도록 초점을 맞추다보니 단서에 대해 자의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셜록 홈즈 시리즈를 읽어 보면 홈즈가 완벽한 인물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가끔 자의적인 해석의 추리 방식 때문에 사건과 전혀 관계없는 인물을 범인으로 판단할 때도 있고, 잘못된 판단의 오류로 의해서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사건이 전개되기도 한다)

 

이야기가 만든 생각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가 이야기에 쉽게 반응하고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스토리텔링 애니멀'이다. 그렇다고 이야기를 쓰는 능력을 가진 유일한 동물이라고 자만에 빠져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런 특성을 경계해야 한다. 이야기가 우리의 감정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며 그 힘의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흘러넘치는 이야기의 홍수 속에서 헤쳐 나올 줄 알아야 한다. 그 중에 절반은 사실을 왜곡하는 영양가 없는 추측과 오류  투성이에 가깝다. 이야기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은 의식주만으로 살 수 없다. 이야기가 필요하다. 아니 필수적이라 해도 좋다. 실제로 이야기 없는 삶을 상상해 보라. 소설이든 영화든 드라마든 컴퓨터 게임이든. 거칠게 말하면 이제 허구의 이야기는 인간의 삶을 지배한다.

 

스토리텔링은 최근에 화두가 됐다지만 실은 어린 시절 잠자리에서 어머니가 들려주던 동화책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굳이 거창한 미사여구 없이도 나의 이웃이나 동료와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소소한 이야기와 행복, 그런 것이 바로 우리의 삶을 따뜻하게 만드는 스토리텔링의 힘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제는 그런 착한 이야기를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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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집에 하루종일 혼자 있어도 전혀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들을 것, 볼 것, 읽을 것이 너무 많다.

2. 휴대폰을 꺼놓는 게 속 편하다.

3. 혼자 쇼핑하는 게 더 좋다.

4. 사람들과 오래 있었으면, 혼자서 ‘재충전’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5. 혼자 장시간 드라이빙하는 걸 즐긴다.

 


당신은 이 다섯 가지 유형 모두 다 평소 자신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내성적인 사람에 가까울 수도 있다. 우연히 SNS에 보게 된 ‘내성적인 사람의 20가지 증거’라는 글에 5개만 추려봤다. (나머지 15가지 증거의 내용이 궁금한 분은 링크로 확인하면 된다. http://m.wikitree.co.kr/main/news_view.php?id=153096)

 

여기 소개한 5개의 유형만 보면 전형적인 내성적인 사람의 특징이다.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것을 좋아한다. ‘내성적’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조용하고, 소심하고, 겉으로 표현을 잘 하지 않는 특징일 것이다. 그런데 혼자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무조건 ‘내성적인 인간’의 증거라고 볼 수 있을까. 특히 4번 유형의 문항에서 혼자 ‘재충전’하는 시간이 내성적인 성격과 무관하다고 본다. 외성적인 사람도 가끔은 조용한 곳에서 혼자 재충전하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외성적인 사람이 되도록 강요받고 살아왔다. 외성적인 성격은 사람들과 잘 어울릴 줄 알고, 사회생활에 적응하는 속도가 빠른 편이다. 그래서 부모들은 내성적인 자녀의 행동에 대해 걱정한다. 말수가 적은 내성적인 사람들은 학교에서, 조직에서, 사회에서 자칫 능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기가 일쑤였다. 내성적인 사람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일이 적기 때문에 이와 같은 생각은 사회 깊숙하게 뿌리내렸다. 혼자 지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고독한 이미지가 강했다.

 

 

 

 

 

 

 

 

 

 

 

 

 

 

 

그러나 외성적인 사람을 선호하는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서도 정작 세상을 바꾸는 건 내성적인 사람이라고 수잔 케인은 역설한다. 세상을 깜짝 놀랄 변화를 일으킨 사람 중에는 의외로 내성적이고 조용한 사람이 많다. 애플의 공동 창업자 스티브 워즈니악, 화가 반 고흐, 간디는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이들은 깊은 통찰력과 창의성으로 세상을 변화시켰다. 그렇다고 내성적인 성격이 마냥 좋다고만은 할 수 없는 법이다. 내성적인 사람들이 자신의 성향을 이해하고 극복해야 한다. 인생을 풍족하게 발전하기 위한 창조력으로 전환할 줄 알아야 한다.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외톨이형 은둔이 아닌 이상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 평소에 자신이 하고 싶은 취미를 즐길 수 있는 유용한 시간이다. 이제는 혼자서 무엇을 한다는 것은 내성적인 사람의 특징이라고 볼 수 없다. 가끔은 고독한 시간도 필요하다.

 

 

 

 

 

 

 

 

 

 

 

 

 

 

 

 

그런데 요즘은 아무리 혼자 있어도 고독하지 않다.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충분하다. 스마트폰이 우리 삶에 있어서 절대로 없어는 안 될 정도로 도움을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스마트폰 사용이 늘어나면서 자신의 삶에 대해 그리고 사회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다. 스마트폰을 통해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 있는 듯이 착각하고, 소통하고 있다고 혼동하면서 혼자 고독할 기회를 가질 수가 없게 된다. 결국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산에는 꽃이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여,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김소월 ‘산유화’)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는 근원적으로 고독하다. 김소월의 시에 나오는 꽃은 피고 진다. 인간도 꽃과 마찬가지로 태어나서 죽는다. 결국 만물은 우주에 생겨났다가 사라지기 마련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모두 고독하게 나고 고독하게 살아가다가 고독하게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탄생과 소멸의 과정을 통해 흐름이 끊기지 않고 영원히 이어진다.

 

 

 

 

 

 

사실 혼자 사는 사람들만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세상 사람 누구나 자기 그림자를 이끌고 살아가고 있으며, 자기 그림자를 되돌아보면 다 외롭기 마련이다. 외로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무딘 사람이다. 물론 너무 외로움에 젖어 있어도 문제이지만 때로는 옆구리께를 스쳐가는 외로움 같은 것을 통해서 자기 정화, 자기 삶을 맑힐 수가 있다. 따라서 가끔은 시장기 같은 외로움을 느껴야 한다. (법정, 『산에는 꽃이 피네』‘홀로 있는 시간’ 중에서, 19쪽)

 

 

생전 법정 스님은 속세를 버리고 고독을 받아들임으로서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신 분이다.  산에 저만치 혼자서 피는 꽃처럼 사람의 발길을 찾아볼 수 없는 강원도 산골에 있는 오두막에서 홀로 생활했다.

 

인적이 드문 곳에서 홀로 산다는 것이 어떤 느낌일까. 컴퓨터나 스마트폰 같은 문명의 혜택이 없는 상황에서 느끼는 원초적인 고독을 우리는 견딜 수 있을까. 인생은 결국 혼자서 가는 길이라고는 하지만 외로운 상황 속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잡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스님처럼 완전한 홀로살이에 적응하지 않는 이상 마음을 짓누르는 고독감의 힘을 견디기 힘들다.

 

 

 

 

 

 

 

 

 

 

 

 

 

 

 

그러나 스님이 생각하는 고독한 삶 역시 사람들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은둔과 고립의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스님은 『홀로 사는 즐거움』에서 홀로 사는 사람은 고독할 수는 있어도 고립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고립은 출구가 없는 단절이기 때문이다.

 

 

홀로 사는 사람은 고독할 수는 있어도 고립되어서는 안 된다. 고독에는 관계가 따르지만, 고립에는 관계가 따르지 않는다. 모든 살아 있는 존재는 관계 속에서 거듭거듭 형성되어간다. 홀로 있을수록 함께 있으려면 먼저 ‘자기 관리’가 철저해야 한다. 자기 관리를 소홀히 하면 그 누구도 물을 것 없이 그 인생은 추해지게 마련이다. (법정, 『홀로 사는 즐거움』 중에서, 57쪽)

 

 

시장기 같은 외로움을 느낀다면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내가 무엇을 향해 행동할 것인지 성찰할 수 있는 ‘자기 관리’의 시간이라고 생각하자. 살아있는 한 나 자신에게 물어봐야 할 지속적인 삶의 모습이다. 고독을 두려워해서 스마트폰과 인터넷 등으로 시간을 때운다면 죽을 때까지 우리 곁에 따라오는 고독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신에 따라오는 그림자를 떼어내려면 햇빛이 없는 그늘에 가면 된다. 고독의 그늘에 적응한다면 고독의 그림자가 쫓아오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한 번뿐인 인생은 그렇게 허무하게 보낼 수 없다. 모자라고 비어 있는 인생의 여백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고독은 절망적인 의미가 아닌 인생이 완성되어 가는 새로운 자신의 모습을 재발견하는 계기가 되는 내적 조건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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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사랑하는현맘 2014-05-23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 글 보니 갑자기 위로가...ㅎㅎ
완벽히 내성적 사람인데 외양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교육 받아 왔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사회 생활을 하다보니 이중적인 면들이 생기더라구요. 그것도 역시 고민거리 중에 하나죠.
'고독의 그늘에 적응한다면 고독의 그림자가 쫓아오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참 좋은 말이네요. 요새 드는 생각들과 많은 부분 일치해서 공감 버튼 꾹 누르고 갑니다~^^

cyrus 2014-05-24 00:21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현맘님.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고계시죠? ^^
저도 군대 가기 전만 해도 내성적인 성격인데 그 이후로 주변 친구들 잘 만다는 덕분인지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는 모임에 적극적으로 나가는 편이에요, 그래도 역시 혼자서 나만의 시간을 가지는 게 정말 좋아요. 사람이 매일 여러 사람과 어울릴 수 없어요. 혼자서 밥 먹고, 혼자서 무엇을 해야 하는 일이 생깁니다. 그럴 때 안 외로우려면 고독을 피하지 말고 즐기는 것이 좋겠죠. 스마트폰 게임만 하고, 카톡한다고 해서 외로운 감정을 일시적으로 달랠 수 있을 뿐입니다.

풀스가든 2014-07-07 0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내성적 좀 심각하게 말하자면 폐쇄적인 성격인데요...
어두운것 보다는 밝은게 좋다라고 말하고 싶네요 각자 주어진 운명인가 싶기도 하고
선과악이 공존하는 것처럼 불가항력 아닐까요
 
우리의 관계를 지치게 하는 것들
라파엘 보넬리 지음, 송소민 옮김 / 시공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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몹시 굶주린 여우가 먹을 것을 찾아 숲을 이리저리 헤매고 다녔다. 그때 나무에 높이 달린 포도송이가 보였다. 여우는 포도송이를 따려고 몸을 세우고 앞발을 위로 뻗은 채 펄쩍 뛰어올랐다. 하지만 포도송이에 발이 닿지 않았다. 여우는 젖 먹던 힘까지 내어 위로 솟아올랐다. 닿을락 말락 하긴 했지만 역시 포도송이를 따진 못했다. “내가 솔직히 재주가 없어서 저 포도송이를 따지 못하는 건 아냐. 가만 생각해 보니 저 포도는 덜 익어서 먹지 못할 것 같아.” 여우는 혼자 이렇게 중얼거리며 그 자리를 떠났다.

 

우리는 이솝 우화의 여우처럼 현실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보다, 현실을 왜곡함으로써 심리적인 위로와 안정을 찾는다. 즉 인간은 ‘자기합리화’의 달인이며, 때로는 자신이 왜곡한 현실을 정말로 믿어버리는 ‘자기기만’의 능력까지 발휘한다.

 

짝사랑하던 사람을 떨구고 “성격이 안 맞는 것 같아”, 휴대전화를 잃고는 “어차피 바꾸려 했던 고물인데...” 등등 하며 쓰린 속을 애써 달랜 기억이 누구나 한번쯤은 있을 것이다. 이러한 행동을 두고 심리학에서는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자기합리화라는 방어기제가 발동했다고 분석한다. 일반적으로 스트레스는 바라는 욕구가 있으나 원만히 해결되지 않는 상황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자기합리화 및 자기기만은 일종의 심리적 진통제일 뿐, 실제적인 성장과 발전은 기대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근본적인 문제들이 해결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면 나쁜 행동을 저지르게 되면 그 죄를 마음속에서 밀어내느라 애쓴다. 사람은 심한 자책에 빠지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에 등을 돌린다. 타인을 탓하기도 하고, 사회를 비난하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의 죄책감은 조금씩 자취를 감춘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의 실수는 인정하지 않고 ‘공격이 최상의 방어’라는 모토 아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행위는 결국 인간관계의 파국을 부른다.

 

환경보호 강경론자인 어느 아버지. 그는 스포츠카를 산 뒤 자주 타는 일이 없을 테니 환경을 지킨다고 말하며 가족을 어이없게 만든다. 10대 청소년은 늦은 밤 골목에 있는 자동차의 사이드미러 20개를 발로 차서 깨놓은 뒤 "내 발이 다쳤다"며 고발하겠다고 우긴다. 어떤 남성은 여성 정신과 의사의 실력이 형편없어서 자신의 자살 시도를 막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라파엘 보넬리의 『우리의 관계를 지치게 하는 것들』은 잘못을 저질러놓고도 이를 부인하고 왜곡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책 속에 소개된 9명의 문학작품 주인공(파우스트, 스크루지, 미하엘 콜하스, 라스콜리니코프, 장발장 등)의 이야기와 45개의 실제 상담 사례는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마주하는 이야기다.

 

책에 나오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비슷한 기질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완벽주의다. 우리는 누구나 ‘완벽한 나’를 바란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도 안다. 완벽주의가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다. 성숙한 수준의 즐거움과 자신의 만족을 위한 완벽주의라면 오히려 그 사람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문제는 허점을 보이는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다. 이들은 자기가 살아 있다는 느낌,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위해 완벽함을 추구한다. 미숙한 나르시즘적 요소도 있다. 강박적인 완벽주의는 노이로제로 이어진다. 자기 자신에 대한 기준이 너무 높다. 따라서 그들은 모든 죄를 자신에게 가하는 위협으로 느껴 매우 사소한 허점에도 격렬한 거부반응을 보인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공감적 반응을 경험하지 못해 대인관계에 문제가 생기게 되고 자신의 정신 건강은 물론 신체적 건강까지 망칠 수 있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척 간단하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면 된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소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나코프의 고해처럼 말이다. 심리학자 융은 고해가 인간의 정상적인 욕구라고 말한다. 잘못을 타인에게 전가하는 것은 잠시 심리적 부담을 더는 일에 불과하며 관계 회복을 위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해야만 새로운 행동의 여지가 생긴다. 심리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은 죄를 고백할 수 있고, 고백을 통해 죄를 갚고자 하는 동경을 갖고 있다. 용서는 이미 일어난 일을 하찮은 일로 치부하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이 당한 부당함으로부터 해방되는 최적의 상태를 말한다. 용서할 줄 아는 사람만이 타인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완벽할 수 없듯이 다른 사람도 완벽할 수 없다.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서 완벽함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사람을 완전한 자로서가 아니라 불완전한 자로 인식할 때 이해와 용서가 가능하다. 용서의 밑바탕에는 서로에 대한 신뢰나 관계가 간절히 유지되기를 원하는 게 깔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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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앞에 서면 나는 왜 작아질까 - 당당한 나를 위한 관계의 심리학
크리스토프 앙드레 & 파트릭 레제롱 지음, 유정애 옮김 / 민음인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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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난 아무것도 아니야...”

 

공포증이란 특정 대상이나 상황에 국한돼 공포를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이 무서워하는 대상이나 상황을 최대한 피하려 하고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두려움이 유발되는 것이다. 공포증 원인은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특정 사물이나 상황에 공포를 느끼는 것은 과거의 경험에 기인한다. 신경학적으로는 불안을 매개하는 신경회로의 이상이 특정 공포증의 발병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학습 이론적으로는 부모나 타인으로부터 공포반응을 배워서 체득한 것이라고도 알려진다.

 

공포증의 종류 중에 ‘사회공포증’이라는 것이 있다. 많은 사람 앞에서 바보스러워 보인 사회 불안이나 창피를 경험한 후 상황을 회피하게 되는 것이다. 당했던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 커져 '사회공포증'이라는 증상이 나타난다. 많은 사람 앞에서의 발표나 갑작스러운 주위의 시선에 대해 얼굴이 붉어지는 경험 때문에 사람을 회피한다. 증상에 특징의 차이가 있지만 이와 유사한 불안의 형태가 ‘회피성 인격장애’가 있다.

 

사람의 됨됨이를 나타내는 인격은 일상생활 가운데 드러나는 개인의 정서적이고 행동적인 특징의 집합체를 이른다. 실제로 인격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그러니까 사회적 관계에서 더욱 도드라지게 드러난다. 문제는 인격이라는 것이 간혹 자신에게만 국한돼 변화하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나타난다는 점이다. 이를 정신의학계에서는 ‘인격 장애’로 규정하고 있다. 이들에 따르면 인격 장애는 청소년기 또는 초기 성인기에 시작돼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고 여러 상황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장애현상이라고 분석한다.

 

 

 

 

만화 <피너츠>에 나오는 찰리 브라운이 회피성 인격장애 증상에 가깝다. 그는 조용하고 부끄러움을 잘 타는 아이다. 어디서나 튀려하지 않고 자신보다는 상대방에 맞추려 하며 항상 친구들을 위한 모습을 보인다. 회피성 인격장애를 가진 사람은 부끄러움이 많고 자신감과 자존감이 없으며, 다른 사람이 자신을 싫어할까 봐 항상 눈치를 본다. 자칫하면 ‘저 사람이 나를 싫어하지 않을까’, ‘지금 내 욕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불안감에 휩싸이기도 한다.

 

솔직하게 고백하건데 나는 이성들 앞에 서면 작아진다. 바짓가랑이에 위치하고 있는 ‘그것’이 커지지 못해서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작아지고 위축된다. 이 책을 읽게 된 이유가 나 역시 특정 대상에 대한 공포증을 스스로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성 공포증’이라고 해야 되나. 부끄럽지만 지금까지 살면서 소개팅을 해본 적도, 아직 여자 한 명 제대로 사귀어 본 적이 없다. 이성 앞에만 서면 마음이 불안해지고, 초조해진다. 어떻게 대화를 시작해야할까, 내가 이런 옷을 입고 왔는데 마음에 들어 할까, 갑자기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하면 이상하게 쳐다보지 않을까 등등 쓸데없는 불안감에 앞서 이성 만나기가 불편했던 적이 있었다. 작년에 한 번 관심 있는 이성이 있어서 먼저 연락처를 알아내서 카톡 메시지를 주고받고, 단 둘이서 식사를 하는 등 이성 공포증에서 벗어나도록 나름 노력했지만 두려움이 재발하고 말았다.

 

 

 

 Scene #2  관계에 대한 불안도 심하면 병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러한 불안 증세를 일시적인 증상으로 가볍게 여기기 쉽다. 혹은 자신이 심각한 불안 증세에 시달리는 것을 알면서도 정신치료를 부담스럽게 여겨서 피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면 심각한 우울증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나이가 들어 중년이 되면서 증상이 어느 정도 완화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일생동안 증상이 지속된다. 결국은 불안한 것이다. 불안하니 자꾸 그 상황을 회피하게 되고, 그러다보니 사회활동에까지 지장을 초래하는 것이다. 이른바 은둔형 외톨이가 되는 것이다. 불안은 또 스스로의 마음을 더욱 닫게 해서 우울증을 초래하거나 심하면 공황발작의 형태로 표출되기도 한다.

 

사실 이런 증상은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관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하루에도 수십 번씩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진짜 자신을 보여주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평범한 학생, 직장인부터 유명 연예인과 정치인에 이르기까지 범위는 광대하다.

 

사회 공포증의 원인은 다양하다. 대뇌의 편도에 문제가 있는 경우 도파민, 세로토닌 등 신경 전달 물질의 이상 등의 생물학적 원인이 있다. 어린 시절 부모의 과잉보호 등으로 사회 기술을 배울 기회가 부족했던 경우, 지나치게 내성적인 성격, 어린 시절 주변으로부터 받은 놀림이나 창피를 당한 경험이 큰 충격으로 남은 경우 등의 심리적 원인으로도 발생할 수 있다.

 

발표 차례가 다가올 때, 동료의 비난에 대응하고 싶을 때 말도 못하고 심장박동만 빨라지는 것은 모두에게 완벽하게 보여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관계 불안을 가진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명확한 근거 없이 자신에 대한 타인의 반응이 부정적이라고 생각한다. 자존감이 낮으며 자신을 과소평가로 단정 짓는다. 이렇게 내면적으로 위축된 심리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서 타인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이것은 관계 불안을 야기하는 자신의 단점을 타인에게 들키기 않으려고 혼자서 발버둥치는 꼴이다. 남을 의식하고, 남에게 자신을 완벽한 인간으로 잘 보이려고 한다. 불안한 상황을 일시적으로 극복할 수 있어도 지속적인 증상을 고칠 수는 없다. 단점을 최대한 가리면서 남들한테 성격의 결함이 없는 완벽한 존재로 보이려고 애쓴다면 계속 남을 의식할 수밖에 없고, 심리적으로 피곤함만 가중할 뿐이다.

 

관계 불안을 초래하는 원인을 알았다면 그것을 고치는 것이 중요하다. 내면에 자리 잡은 감정의 원인을 마주하는 것을 두렵거나 자꾸 숨기면 증상만 더 악화된다. 불안도 심하면 병이 되고, 정신 건강에 해롭다. 사회공포증이나 회피성 인격 장애는 전문가의 상담과 처방이 필요하다. 항우울제나 항불안제 등의 약물을 복용하는 약물치료와 대인공포증과 관련된 환자의 잘못된 생각과 행동들을 이해하고 교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시행하는 행동치료가 있다.

 

어려운 상황에서 나타날 수 있는 각종 자율 신경계 증상(얼굴 붉어짐, 떨림 등)을 숨기려 하지 말고 오히려 상대에게 보이고자 노력하는 치료인 노출 기법도 활용될 수 있다. 문제가 되는 상황의 불안감을 인식한 상태에서 그 상황을 직접 스스로 노출시킨다. 말 그대로 호랑이를 잡기 위해서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 나의 의식을 지배하는 불안의 원인을 잡기 위해서 내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 능력을 향상시키는 자기주장 기법도 있다. 직면해야 할 특정 상황에 자신의 주장을 표현할 수 있도록 훈련한다.

 

 

 

 Scene #3  치료도 남의 눈에 의식하면 절대로 고칠 수 없다   

 

예방하기 위해서는 대인 관계를 비롯한 사회적인 상황에서는 다소의 긴장이나 불안이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당연히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불안이나 가볍게 동반되는 수치심을 매우 치욕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공포증으로 발전하기 쉽다. 따라서 어려운 상황에서 느끼는 두려움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다소 힘들더라도 피하지 말고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지나친 걱정 등 잘못된 생각에 그 근본원인이 있는 경우가 많으므로 자신의 문제를 직면하고 스스로 개선해 나가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자신을 향한 타인에 대한 강박적인 두려움은 현실이 아닌 자신이 만든 왜곡된 인지 형태이다.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진다고 해서 붉어지지 않게 하는 게 아니라 부끄러우면 붉어지는 게 당연하다는 걸 자각시키는 것이다. 경직된 생각을 한 번에 제거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오랫동안 방치한다면 심각한 증상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내면의 두려움을 직시하고 두려운 상황에 자신을 반복적으로 노출하고 연습함으로써 두려움을 극복해야 한다. 마음의 병을 고치는 것도 남의 눈에 의식한다면 절대로 고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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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생각, 만들어진 행동 - 당신의 감정과 판단을 지배하는 뜻밖의 힘
애덤 알터 지음, 최호영 옮김 / 알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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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김연아가 금메달을 따지 못한 이유, 피겨 드레스 색깔로 알 수 있다?

 

‘약물 복용은 금지하면서 레슬링, 태권도, 권투 종목에서 두 선수 중 한 명에게만 빨간색 유니폼을 입히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43쪽)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 출전해 무패 기록으로 금메달을 목에 건 레슬링의 정지현, 이스트반 머요로스, 아르투르 타이마조프, 권투의 알렉산데르 포벳킨, 오들라니에르 솔리스, 태권도의 문대성 선수는 모두 파란색이 아닌 빨간색 유니폼을 착용하도록 배정받았다. 당시 그레코로만형 레슬링, 자유형 레슬링, 태권도, 권투 종목의 모든 경기 결과를 분석한 결과, 사소한 요인으로도 승패의 추가 한쪽으로 기울 수 있는 경우에 빨간색 유니폼을 입은 선수가 전체 시합의 62%를 이겼다. 이쯤 되면 빨간색이 ‘심리적인’ 스테로이드 약물처럼 작용한다는 말에 어느 정도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빨간 옷을 입은 선수가 상대 선수보다 더 우월한 느낌을 받는 명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로 스포츠심리학에서는 선수들의 복장 색깔과 경기 판정과의 관계에 대해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연구 결과가 있다. 경기를 판정하는 심판도 선수들의 복장 색깔에 영향을 받아 편견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42명의 태권도 심판들을 대상으로 빨간색 보호장비와 파란색 보호장비를 각각 착용한 두 선수 갑과 을의 경기 비디오를 여러 번 보여준 뒤에 채점을 하는 실험을 했다. 여기서 21명의 심판은 원래 경기 비디오를 보면서 채점했고, 나머지 심판은 선수들의 보호장비 색깔이 반대가 되도록 디지털 기술로 조작한 경기 비디오를 보고 채점했다. 다시 말하자면 원래 빨간색 보호장비를 착용한 갑은 조작된 비디오에서는 파란색 장비를, 반대로 파란색 보호장비를 착용한 을은 빨간색 장비를 착용했다.

 

보호장비의 색깔에 영향을 받지 않고, 객관적인 채점 규정으로 판정을 내린다면 갑과 을은 똑같은 점수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실험 결과, 심판은 전혀 다른 판정을 내렸다. 원래 경기 비디오에서 갑이 을보다 1점 많은 8대 7로 승리했다. 반면 조작된 경기 비디오에서 빨간색 장비를 착용한 것으로 조작된 을(원래 비디오에서는 파란색 장비 착용)이 8점을 받아 승리했다. 결국 심판들은 똑같은 경기를 보면서 빨간색 복장의 선수에게 더 많은 점수를 준 것이다.

 

그래도 실험 결과를 믿을 수 없다고. 그렇다면 한동안 전 세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논란의 소치 동계 올림픽 이슈를 다시 언급할 수밖에. 지금도 러시아의 소트니코바의 금메달 수상에 대해서 전문가와 해외 언론들은 심판들이 개최국인 러시아 선수에게 과도하게 높은 점수를 줬다고 지적했다. 우리나라 국민도 그렇고, 전 세계 사람들(러시아를 제외한)은 소치 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종목의 금메달은 소트니코바가 아니라 김연아라고 주장한다. 개최국으로서의 홈 어드밴티지, 거기에다가 러시아 피겨 연맹 회장의 부인이 피겨스테이팅 여자 싱글 경기의 심판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올림픽이 끝난 지금도 편파판정 의혹이 싹 가시지 않고 있다.

 

심판진 구성의 문제도 있었지만, 여기서 선수들의 복장 색깔이 심판 판정에 영향을 주는 실험 결과를 김연아 대 소트니코바 경기에 대입해보면 판정의 부당함을 발견할 수 있다. 

 

 

 

 

 

 

 

 

위의 사진은 소치 올림픽 피겨스케이팅 쇼트 프로그램에 참가한 소트니코바와 김연아 선수이다. 이 두 선수가 입은 피겨 드레스 색깔은 주목하시라. 소트니코바는 빨간색, 김연아는 옅은 노란색이었다.

 

경기 후 소트니코바의 쇼프 프로그램 점수는 74.64점으로 전체 2위, 김연아는 74.92점으로 근소하게 앞선 점수를 받아 1위에 올랐다. 쇼트 프로그램 경기가 끝난 뒤에 해외 언론들은 소트니코바의 쇼트 점수가 거품이라고 주장했다. 소트니코바의 기술 기본점수는 김연아보다 1점 낮았지만 가산점이 9점대로 더 많았다. 경기 전까지 그리 주목받지 못한 선수였던 소트니코바는 소치 올림픽 전까지 자신의 쇼트프로그램 점수가 70.73점이었지만 이날 자신의 최고 점수 기록을 무려 4점 가까이 끌어올린 것이다.

 

선수 복장 색깔 실험 결과를 생각한다면 러시아 출신 심판들은 자국 출신에, 그것도 ‘빨간색’ 피겨 드레스를 입었고, 30명의 선수들 중에서 29번째로 출전한 소트니코바에 후한 가산점을 준 셈이다. 다만 소트니코바처럼 빨간색 계열의 피겨 드레스를 입고 출전한 선수들도 있을 것이다. 쇼트 프로그램 전 경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만약에 소트니코바가 나오기 전에 몇 명의 선수들이 빨간색 계열의 피겨 드레스를 입었다면 복장 색깔과 판정의 연관성을 설명하기에는 타당성이 떨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스포츠심리학계에서도 빨간색 복장이 불공정한 판정으로 유도하는 결과에 대체로 인정하는 편이다.

 

 

 

 Scene #2  난폭한 주정뱅이를 온순하게 만든 색깔은?

 

다음과 같은 스포츠 종목 사례 이외에도 인간의 행동, 감정, 판단이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외부의 힘에 의해서 좌지우지된다. 붉은색 복장 선수가 유리한 판정을 받는 것처럼 사소하게 보는 색깔이 우리의 판단에 영향을 준다. 이와 비슷한 재미있는 사례를 하나 더 소개하자면 ‘분홍색 주정뱅이 유치장(Drunk Tank Pink)’이라는 것이 있다. 분홍색이 미국의 소도시 구치소에서 난폭한 술주정뱅이를 가두는 유치장 벽면에 칠해지면서 나온 말이다. 분홍색 유치장에 주정뱅이들을 가두자 놀랍게도 온순해졌다고 한다. 분홍색이 사람의 감정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색만 우리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미칠까. 색깔뿐만 아니라 시선, 공간, 온도, 편견, 문화,·상징, 이름, 명칭도 우리의 감정을 지배한다. 더운 날씨에 우리가 불쾌지수가 올라가고 짜증나는 이유도 온도의 영향을 증명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 9.11 테러 이후 이슬람 국가에 대한 일종의 공포증과 반감을 가진 미국인들은 터번을 두른 사람만 보면 잠재적인 위험인물로 인식했는데 이것은 편견에 의해 만들어진 잘못된 생각이다.

 

이런 주장의 밑바탕에는 브라질에서 나비 한 마리가 날개를 펄럭이면 미국 텍사스에서 토네이도가 발생한다는 내용의 ‘나비효과’ 이론이 있다. 사소한 힘들이 복잡한 연쇄반응을 거쳐 우리의 마음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소해 보이는 요소들과 그 영향을 인지하면 좀 더 유리한 위치에서 자신의 능력을 통제할 수 있다.

 

 

 

 Scene #3 사소한 것이 당신의 운명을 지배할 수 있다

 

의외의 조건들이 인간에게 미치는 과정의 사실을 다양한 심리 실험과 자료 조사를 풍부하게 인용하고 있어서 재미있게 읽혀진다. 그러나 책에서 소개된 모든 실험과 사례들이 다 설득력이 높더라도 일부는 실생활에 적용하면 실험 결과대로 그대로 재현될지 의문이 든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심리학적 원리로 설명할 수 없는 사례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러한 사례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자명하다. 가볍게 지나칠 수 있는 아주 작은 사소한 외부적인 조건에 의해서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지배받는다는 것. 몇 년 전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미국의 심리상담 치료사 리처드 칼슨의 『우리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건다』처럼 우리는 사소한 것에 심각하게 받아들이면서 살아가기도 한다. 그러나 근심에 가까울 정도로 목숨까지 걸 수준이 아니라면 이제는 사소한 것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보는 것도 좋다.

 

인간이 지구상에서 이성의 힘을 빌리는 합리적인 동물에 가까울 수는 있어도, 절대로 신에 가까운 완벽한 합리적인 존재라고 말할 수 없다. 외부적인 조건은 간혹 냉철한 이성을 조종하여 우리 삶에 조용하게 다가와서 장난칠 때도 있으니까. 이런 갑작스럽고 짓궂은 장난에 당황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를 둘러싼 외부적인 힘을 세밀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러면 조금이나마 외부적인 힘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올바른 판단과 행동으로 이끌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신문 속 ‘오늘의 운세’에 나오는 내용만으로 우리 삶을 결정할 수 없다. 운세 내용대로 100% 똑같이 이루어진다는 법은 없으니까. 그래도 내 운명을 바꾸고 싶다면 우리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외부적인 조건을 살펴보자. ‘오늘의 운세’ 대신 오늘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의 사소한 주변을 둘러보자. 혹시 아나? 오늘 외출할 때 당신이 입고 있는 옷의 색깔, 밖의 날씨 상태 심지어 당신의 이름까지도 당신의 하루 운세를 결정짓게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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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4-03-06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네요.
확실히 스포츠 선수들은 유니폼의 색깔에 따라 눈에 잘 띄기도 하고,
잘 안 띄기도 하는 것 같아요.
심판들이 빨간색 유니폼의 선수에게 더 눈이 가는 것이
남성들이 빨간 립스틱, 드레스, 구두 등에 끌리는 것과 비슷한 이유가 아닐까 싶네요.

cyrus 2014-03-06 22:33   좋아요 0 | URL
맞아요. 사실 이 책, 일상 속 심리학 사례를 설명한 책이긴한데 일부 내용은 우리가 이미 당연하게 생각한 것들이 많아요. 남성이 빨간 립스틱, 옷에 끌리는 것처럼요. 이 책에서도 은빛님이 언급하신 내용이 유사하게 소개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