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을 말하다 - 이덕일 역사평설 조선 왕을 말하다 1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 위즈덤하우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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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시장과 같다. 권력자 주변은 시장 바닥처럼 항상 사람들로
들끓기 마련이다. 사람 장막에 갇힌 권력자는 이들이 보여주는
환상에 도취된다. 권력이 사라지는 날 이들이 새 권력에 붙어
자신을 비판할 때에야 진실을 보게 되지만 이미 때는 늦다.
이것이 영훤히 반복되는 권력의 속성이자 인간의 속성이다.-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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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을 말하다 - 이덕일 역사평설 조선 왕을 말하다 1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 위즈덤하우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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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보자들의 리더십 평가 테스트 
 

6.2 지방선거 투표 전에 서울시, 경기도와 인천·대전 등 6개 광역단체장 후보들을 대상으로
리더십센터가 자체 개발한 한국공공리더십지수(KPLI)를 실시하였다.
후보자들은 테스트 문항과 순발력을 평가하기 위한 사전 준비용  

무(無) 질문 인터뷰를 실시했다.
테스트 결과는 ‘의사소통 능력 발달, 희생, 봉사 정신 부족’ 으로 나타났다.
창조성, 협상력, 의사소통 능력 점수는 높은 반면에,
정치인의 기본 자질일 수도 있는 희생, 봉사 정신 점수가 낮았다.
공직에 출마하는 후보로서는 무시하기 어려운 테스트 결과이다.
테스트에 참여한 후보들은 본인의 리더십 유형을 파악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이었다.
6.2 선거에 당선된 광역단체장들에게는 이전의 테스트 결과의 부족한 부분만
보완한다면 조금 더 향상된 리더십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보다 나은 리더십을 보여줄지 우리는 당선된 광역단체장들의 활약을 지켜봐야 알 것이다. 
 

 

 

 조선 왕들의 리더십 평가

앞에서 소개된 리더십센터의 리더십 평가의 의의는 후보자가 직접 테스트에
참가하여 자신의 능력에 대하여 쉽게 알 수 있다는 점이며
나중에 후보자가 당선이 되면 부족한 능력을 보완하여  

앞으로의 공직 생활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
이전의 리더십 평가는 평가 대상인 정치인이 현 직책에 활동 중에 하는
실시간 조사이거나. 직책에서 물러난 뒤에 실시하는 후기(後期)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평가 참여자들은 평가 대상 본인이 아닌 연구 기관 소속의 연구원이라든가,
시민들이 평가를 내리고, 그 평가를 총괄하는 단체는 연구 기관이나 여론이다.
그래서 평가 결과는 대부분 리더십 부족 등 나오게 되는데,
평가 대상의 정치인이 임기 중이면 자신의 정계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는다.
그리고 정치는 좌파와 우파로 나누어지듯이, 평가 총괄 단체가 어느 파에 따라서
결과도 다르게 나올 수 있다. 그만큼, 이전 리더십 평가는 객관성이 결여되었다는 점이다.

이번에 출간된 이덕일 교수의 신작에서는 수많은 조선왕조실록을 포함한  

각종 수많은 사료들을 분석하여 역대 조선 왕들의 리더십을 평가한다. 
수백 년이 지난 집권자들을 평가한다는 게 어떻게 보면 무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역사는 거울이라는 말이 있듯이, 역사를 되돌아보면 현재를 알 수 있다.
역대 조선 왕들의 정치 행적들은 지금 정치인들이나 별 다른 차이가 없다.
나라를 휘어잡을 권력은 있었으나, 정작 현실 파악 능력이 없어서 자신뿐만 아니라
후세의 왕들에게도 부작용을 남긴 세조,
나름 현실을 파악하고 국정과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정치적 개혁을 시도했으나,
당파의 사대부들과 소통의 실패로 결국 서인의 쿠데타로 인해 폐위된 광해군.
이들의 정치 행적들의 평가를 통해  

미래의 정치인들이 되려는 이들에게는  

이 책을 읽게 되면 이상적인 리더십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가 있다. 
 

 

 

 연산군이 희대의 폭군이 된 이유

그러나 역대 조선 왕들에 대한 평가가 기록된 조선왕조실록이나  

사대부들의 개인 기록들은
자신이 속한 정치적 당파의 사상과 개인적인 평가로 이루어져 있어  

객관성이 떨어진다. 그래서 왕에 대한 기록들은 대부분 왜곡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대부의 왜곡된 기록들이  

훗날 지금의 조선 왕의 평가와 이미지를 확고히 만들었으며,  

지금도 그렇게 전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연산군은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켜 궁정의 피바람을 불게 만들었으며,
궁정에 들어온 비구니에게 간(姦)을 하고, 자신이 궁정에 불러 모은 여인들과
황음(荒淫)에 빠졌다.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연산군이다.
그리고 당시 연산군이 살았던 당대의 사료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져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다양한 각도로 연산군의 행적을 분석한다.
연산군이 단순히 생모인 폐비 윤씨의 억울한 죽음 때문에 폭군이 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폭군이라는 오명을 가지게 된 이유는 연산군의 능력이 일차적인 원인이다.
연산군은 왕으로써 꼭 배워야 하는 문무(文武)에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즉, 공부를 싫어한 왕이었던 것이다. 결국 자기계발을 하지 않은 결과로
점점 그의 지적 능력이 떨어지게 되어 국정을 다스리는 데에도 수월하지가 않았다.
그래서 기득권 사대부들은 연산군에 대한 기록을
부족한 정치적 능력에다가 무오사화에 보여주었던 살상(殺傷) 행동을 덧붙여
오히려 연산군의 잔인한 살상 행동을 크게 부각시켰다.
이 기록으로 인해 그는 폭군이라는 별명을 얻는 동시에
역대 왕 중 가장 최악인 왕이 되어버렸다.

저자는 기득권 사대부뿐만 아니라 비(非) 기득권 사대부에서 왕들 자신이 남긴 기록까지,
보다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려고 하였다.
학계에서 정립되어 있거나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왕들의 편향(偏向)된 평가들을
뒤엎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의 마키아벨리, 태종

이 책에는 총 8명의 왕이 소개되었는데 딱 1명을 제외한
나머지 왕들은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우리가 역대 조선 왕들 중에 성군(聖君)이라면 세종, 성종, 영조를 생각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성종과 영조는 그나마 ‘절반만 성공한 임금’ 으로 평가하고 있다.
의외로 태종이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태종은 고려 말, 아버지 태조 이성계 몰래
정몽주를 살해하여 그 이후부터 아버지와의 관계가 어긋났으며,
후에 자신이 세자로 책봉이 되지 않아서 그 불만으로
조선 개국 공신 정도전과 다른 세자들을 귀양 또는 죽임으로써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권력을 위해서라면 물불 안 가리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자신이 권력을 누리기 위해서 왕이 된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새로운 나라의 왕으로 만들기 위해서,
아버지뿐만 아니라 주위의 비난을 무릅쓰고 정몽주를 살해했다.
그리고 그가 집권하고 난 후에는 세종이 될 충녕대군을 위해서
‘호랑이 새끼 키우듯’ 왕권을 위한 교육을 시켰다.
결국, 자신의 뒤를 이은 세종의 앞날뿐만 아니라,
앞으로 미래의 조선 번영을 위해서였던 것이다.

결국 태종은 책봉 이전부터 아버지마저도 좋은 이미지도 얻지 못하였으며,
왕이 되어서도 자신의 권력을 위해 핏줄인 세자를 제거했다는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악역을 스스로 자처하여 자신을 희생하였으며
차기의 왕권을 위해 봉사를 한 것이다.
이번에 당선된 광역단체장들. 태종의 리더십을 눈여겨봐라.
그리고 자신의 임기동안 생긴 정치적 문제들을
자신의 뒤를 이을 권력 이양자에게 떠넘기는 우리 정치인들 보면 무척 비교된다.

‘국민들에게 사랑을 받는 것보다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 군주에게는 더 안전하다’ 라는
마키아벨리의 말이 있듯이,
태종은 호랑이의 등에 스스로 올라타서 정몽주 제거와 세자의 난을 통해
권력의 위엄함을 과시하였다. 인간이 호랑이를 두려워하듯이
그도 간신배 사대부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시장의 우상 부셔버리기

책 내용 중에는 권력은 시장과 같다고 말하고 있다. (p 75 참고)
거대한 시장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떠들듯이,
권력도 기득권층들이 서로 모여 떠들면 권력의 환상에 눈이 멀어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문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질 수 없고,
편협된 사고가 지배하게 된다.
결국, 프랜시스 베이컨이 주장한 ‘시장의 우상(偶像)’ 이 형성된다.
시장의 우상이 자리 잡게 되면
동일한 대상이 서로 다른 사람들끼리 전해지다가 의미가 변하게 된다.
즉, 왕의 자질이 부족한 연산군이 사대부들의 평가들로 인해서
폭군 연산군으로 의미가 변절되듯이 말이다.
역사 속에서의 나타나는 시장의 우상은 미래의 후손들에게 악영향을 주게 된다.
겉만 보면 내용은 객관적이지만 실속은 주관적이며 허투루 기록된 엉터리 사료라면
후손들에까지도 폭군 연산군이라는 오명이 계속 이어질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부실한 사료들 때문에 역사를 엉터리로 배울 수 있다는 점이다.

시장의 우상은 역사학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 사회에도 버젓이 서 있다.
정치인들은 국회가 열리는 국회의사당에 모여
사회 안건 하나 가지고 자신들의 의견이 맞다고 서로 입싸움이 펼쳐진다.
그리고 나름 합당한 근거를 가지고 자신들의 주장을 펼친다.
매스컴에 비춰진 정치인들의 이런 여러가지 모습들을 보게 되면
국민들은 그 사회 안건에 대해 다양한 생각을 가지게 된다.
물론 하나의 사회 현상에 대해 다양한 시각을 바라본다는 점은 좋지만,
자칫 사회 현상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다.
우리가 사회 현상을 잘못 이해하고 있으면
아무리 그것에 대해 옳다 아니다라고 주장을 한다 해도
그것은 근거는 허울뿐인 공중누각(空中樓閣)일 뿐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조선 왕들의 평가를 통해 우리가 세우고 있었던
시장의 우상을 부셔버릴 때가 되었다.
이 책은 권력 때문에 시장의 우상을 세우고 있었던 정치인들이나
잘못된 선입견 때문에 시장의 우상을 세우고 있던 우리들에게
경각심을 주는 책이다.
특히, 리더십에 관한 것이라면 때려야 땔 수 없는 정치인들!
이 책을 강력 추천하고 싶다.


인용 관련기사 출처 및 링크 

 

[오세훈 다양성·혁신, 한명숙 소통·협상 …‘색’다른 리더십] 중알일보 5월 24일자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4191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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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의 집 행복한책읽기 SF 총서 17
윌리엄 호프 호지슨 지음, 김상훈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9년 8월
평점 :
품절


 

 

 

 

 

 

[1001-236] 경계지의 집

 

 

 


 The House on the Borderland  

 





 

 

 

 

우리나라에 번역된 윌리엄 호프 호지슨의 <이계(異界)의 집>의 원어 제목이다.
Borderland를 영어 사전에 찾아보면
뜻이 ‘국경지, 두 가지 지질 또는 생각의 중간 상태, 영역’ 이라고 나와 있다.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 1001권>에는 ‘경계지의 집’ 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사실 ‘경계지’ 라는 해석이 사전적으로 정확하나,
‘경계지의 집’ 이라는 책 제목으로 출간되었으면 독자들은  

이 책에 눈길도 주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이계’ 라는 제목으로
책 표지에 장식하고 있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의 기성(奇城)과 어울려진
지금의 모습이 훨씬 나아보이며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것이다.
나는 <죽기 전 책 1001>에서 소개된 책을 꼭 읽을 것이라는 명분도 있었지만,
그 책에서 소개된 <이계의 집>의 간략 내용이 흥미로워서 읽게 되었다.
소설 속의 두 남자가 외딴 마을의 바닷가에서 폐허가 된 집을 발견하고
(책 표지에 나오는 기성을 연상하게 한다)
거기서 폐허가 된 집의 전 주인인 노인의 낡은 수기가 발견된다.
노인이 자신의 집에서 생긴 불가사의한 현상들을 겪는 것을
수기에 기록하는데, 중요한 결말이 소개되지 않았다.
결말이 더욱 더 궁금할뿐더러
처음 접한 작가의 작품, 거기에다가 내가 좋아하는 미스터리 소설이라서 읽고 싶었다.  

 

 

 

 이 작품의 정체가 뭐야?

사실 읽기 전부터 이 책에 대한 평가가 궁금하여
리뷰를 참고하려고 했었는데, 딱 한 편이 있다.
그러나, 책의 평가가 그리 좋지 못하다.
그럴 만도 하겠다.
책이 출간된 연도가 1908년이며, 장르가 코스믹 호러(Cosmic Horror)이다.
즉, 직역하면 ‘우주 공포 소설’ 이다.
그리고 처음 작품의 사건 발단은 좋다. 
하지만 내용이 전개될수록
장광설을 펼치는 수기의 내용에 독자들은 꽤나 머리 아플 것이다.
반전을 기대하면서 인내심 가지고 읽은 독자들은 
시원치 않은 결말에 대해 당혹스러울 것이다.
아니,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
뒷표지에는 호러 소설의 선구자 러브크래프트가 작품에 대한 칭찬을 보고,
이 작품도 러브크래프트式 호러 소설이라는 기대감 속에서 읽었을 것이다.
결국, 표지의 광고 한 구절 때문에 독자들은 낚였다고 해야 하나.

이 책인 코스믹 호러인만큼
노인의 눈 앞에서 펼쳐지는 세계는 시간과 공간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우주이다.
광대한 우주의 현상들이 시시각각 변하고, 태양계의 행성들은 하나씩 사라진다.
그리고 녹색의 구체(球體)가 등장하여 노인을 공포로 몰아넣는다.
노인은 자신이 눈 앞에서 펼쳐지는 기괴한 현상들을 수기에 기록하는데
이 책의 내용 대부분이 불가사의한 우주 현상들로 구성되어 있다.
시작부터 노인은 자신 집 지하에 발견된 균열을 발견하는데
균열 내부는 나락(奈落)의 세계이다. 
억누를 수 없는 호기심으로 균열 속으로 내려가는 장면부터는 흥미진진하다.
앞을 내다볼 수 없고 어두컴컴한 광대한 나락의 세계에서
돼지 인간들의 등장으로 미지의 세계에 대해 더욱 궁금해진다.
여기서부터 노인과 돼지 인간의 피 튀기는 혈전이 그려질 것이라고 예상하겠지만,
작가는 독자들의 기대를 뒤엎는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나락의 세계는  

불가사의한 우주 현상이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늘이 보라색으로 변하다던가, 낮과 밤의 길이는 고작 1분도 안된다. 

수기는 이상한 자연 현상들을 설명하다가 중간 내용이 누락되어 끊기기도 한다. 

그러다가 노인은 자신의 방에서  시간이 수만년이나 흘러가는 것을 느끼게된다.  

옆에서 자고 있던 애완견 개는 썩어서 먼지가 되어버리고, 

방 주위에도 시간의 세월을 못이겨 회색 먼지로 뒤덮여있다. 

그래도 노인은 황당 시츄에이션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담담히 자신이 보고 경험한 것을 수기로 기록한다.


이 책을 읽고 리뷰를 남긴 ‘가넷’ 님뿐만 아니라
악령이나 악마가 등장하는 오컬트 문학 매니아들도 실망하신다면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
이 작품은 호러 분야 중에서 드문 ‘코스믹 호러’ 라서
책의 내용을 차지하는 불가사의한 우주 현상의 장면 기록은 지루한 감이 있다.
분명 순차적인 구성임에도 불구하고
읽으면서 내용 구성이 어긋난 것 같은 느낌도 가질 수도 있다.  

그래서 읽는 것이 수월하지가 않다.
그리고 전개부터 등장하는 돼지 인간은 가면 갈수록 출연 비중이 적어진다.
읽어나갈수록 이들의 정확한 정체는 밝히지 않은 채 끝이 난다.

결론적으로 이 책에 대한 평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뒤죽박죽 세계에 대한 뒤죽박죽 표현한 거 같은 소설이었다. 
 

 

 

 읽어야 하는가, 읽지 말아야 하는가

그러면 듣도 보지 못한 작가의 난해한 내용의 작품이
죽기 전에 꼭 읽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

나는 충분히 있다고 본다.
<죽기 전 책 1001>에는 분명 우리가 꼭 읽어야 할 책이 소개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 책들 중에는 많은 세월 속에서도 여전히 읽혀지며
읽어도 그 가치가 지금도 유효하는 불후의 명작들이다.
이들 작품의 작가는 명망이 높으며 내용의 구성과 전개는 훌륭하다.
즉, 간단히 표현하자면 ‘정상적이며 모범적인’ 책들이다.
하지만 우리가 항상 살면서 모범적인 책들만 읽던가.
마법을 부리는 소년이 나오는 판타지 소설부터 시작해서
노골적인 성 묘사를 차치하는 성애 소설까지
전 세계의 독자들은 다양한 소재와 구성의 작품들을 읽는다.
이런 작품들은 인물과 내용이 일상적이지 않으며 특이하다.
하지만 그런 작품들 속에도 우리가 ‘고전’ 이라고 불리는 것도 많다.

윌리엄 호프 호지슨의 <이계의 집>은
‘코스믹 호러’ 라는 장르를 처음 시도했기에 문학사적으로는 희귀하다. 
장르의 시작과 희귀성이라는 가치가 있기에
<죽기 전 책 1001>이 명단에 드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으며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다.
그리고 사실상 호러 문학의 선구자는 러브크래프트 이전에
윌리엄 호프 호지슨이 있었다.
그러기에 러브크래프트에게 찬사를 받을만하다. 
 

 

 

 나락의 세계에서 종말 이후의 우주를 보다

우리나라에는 윌리엄 호프 호지슨의 번역된 작품은 단 두 작품뿐이다.
<이계의 집>과 작가를 유명하게 만든 ‘유령 사냥꾼 카낙키’ 시리즈 중의 하나인
<휘파람을 부는 방>이다. 아직 그의 작품이 제대로 소개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작가에 대한 번역가의 해설도 호지슨에 대해  

관심 있을 독자들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작가의 생애와 그가 끼친 문학적 영향만 소개되어 있을뿐
정작 작품에 대한 해설은 없다.

노인이 본 초자연적인 우주 현상과 돼지 짐승들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노인이 본 우주가 먼 훗날 핵무기로 인해 종말 되어버린 지구와 우주를  

보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지붕이 없는 집의 중앙부에서 피처럼 새빨간, 거대한 불길 기둥이 솟구쳤다.
 비틀린 작은 탐과 망루가 불타오르는 것이 보였지만.....
 <녹색 태양>의 광선이 집을 난타했고, 새빨간 불길과 뒤섞였다.
 마치 붉은 불과 녹색 불이 불타오르는 용광로처럼 보였다.....
 까마득하게 아래쪽에 지구가 보였고, 점점 거대화하는 불길에 휩싸인 집이 눈에
 들어왔다. 그 주위의 지면은 빛을 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지상 여기저기에서
 무거운 노란 연기가 소용돌이치며 올라오고 있었다. 마치 불길에 휩싸인 집을  

 중심으로 지구 전체가 발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핏빛을 띤 기괴한 구름이 고공까지 올랐다. 
  

                                                                             - <이계의 집> p 183~184 - 
 

 

<녹색 태양>이 집을 파괴하는 장면은 흡사 핵무기에 투하되는 장면과 비슷하다.
태양 광선의 색깔이 다를 뿐, 핵무기가 투하되면 주위는  

온통 오렌지 빛 광선으로 뒤덮이며
반경 지점에 있는 모든 것들이 타버리게 한다.
그리고 투하된 지점에는 거대한 버섯구름이 생성된다.

결말이 다다를수록 작품에는 녹색 구체가 손의 형상으로 변화하여

살아있는 것들을 타버리게 만든다.
고양이가 녹색 광채에게 당하는 장면은
핵폭탄에서 발생하는 방사능의 무시무시한 위력을 보여주고 있다.  

 느닷없이 고양이가 길고 날카로운 절규를 내질렀다.....
 무엇인가 형광을 발하는 어렴풋한 것이 고양이를 에워싸고 있었고,
 내가 보는 사이에도 점점 더 커지더니, 곧 빛을 발하는 투명한 손으로 변했다.
 녹색 광채가 그 주위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
 내 눈앞에서 고양이가 연기를 내며 불타올랐다. 
 

                                                                              - <이계의 집> p 215 -   

  

 

그리고 녹색 형체에 닿아버린 노인의 애완견이 커다란 녹색 반점의 상처를 입게 되며
녹색 반점은 점점 커질수록 개는 무기력한 증상이 보인다.
그리고 녹색 광채에 오염된 개가 노인의 손을 살짝 핥게 되는데
나중에 노인의 손에도 개처럼 녹색 반점이 생기게 된다.
노인의 손에 있는 녹색 반점도 커지게 되며 노인도 정신적인 공황과 무기력감에 빠진다.
방사능에 오염되어 지울 수 없는 상처와 정신적인 장애를 겪는 피폭자를  

보는 거 같다. 작품 속 돼지 인간은 방사능이 만들어낸 돌연변이다.  

 


 

 

 

 

 

 

 

 

 샌디 스코글런드 作 <방사선 고양이> 

 <이계의 집> p 215의 구절을 읽으면서 딱 떠올랐던 사진 작품. 

 사진 속 노부부와 방사선에 오염되어 녹색을 띈 고양이, 

 그리고 회색으로 이루어진 밀폐되어 보이는 방은  

 <이계의 집>에서 수기 속에서 등장하는 노인과 그의 누이, 

 녹색 형체에 휩싸인 고양이, 그리고 시간이 흘러 먼지로 뒤덮인 노인의 방이 연상된다.

  

 

작가가 핵폭탄의 존재를 예언한 것이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작가가 그린 나락의 세계가 핵전쟁 이후 모든 것들이 종말이 된

세계와 흡사한 점만큼은 부정할 수가 없다.

지금도 몇 몇 나라에는 나라 전체가 치명적인 피해를 입을 정도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불량 국가들은 핵무기를 만드는데 사용하는 재료들을 은밀히 거래되고 있으며

핵무기를 보유한다는 명분으로 자신들의 국가적인 힘을 과시한다.
그리고 괜히 핵무기를 쏠 것이라고 위협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은 핵무기로 인해 피해를 입는 것은 인간이다.
우리뿐만 아니라 지구는 죽음의 불모지가 되어버린다.
지구 전체를 뒤엎은 방사능은 우주 전체까지 퍼지게 되어
코스모스(Cosmos)가 파괴되어 버리고 다시 원시의 카오스(Chaos)로 되돌아간다.

앞으로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자칫 핵무기를 사용하게 된다면
어쩌면 우리 인간도 노인처럼 우리 눈 앞에서 있어서는   

안 될 세계가 펼쳐지게 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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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박찬기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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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45]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사춘기  
 

우리는 젊음을 질풍노도(疾風怒濤)의 시기라고 말한다.
쉽게 말하면 사춘기(思春期)이다.
말 그래도 성난 바람과 무섭게 몰아치는 파도처럼 
주체할 수 없는 청년의 감정 상태를 뜻한다.
이성에 사랑에 빠지게 되면 평소보다 더 열정적이게 되며
폭풍우가 그치듯이 사랑의 열정이 식어지면 깊은 절망감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와 여러 가지 상황들에 민감하여
오르락내리락하는 롤러코스터처럼 감정의 변화가 잦다.
사춘기가 찾아오면 청년은 쉽게 기뻐하며, 쉽게 절망한다.
사춘기는 정신적인 변화 이외에도 성인이 되는 육체적 변화도 포함되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사춘기는 정신적인 변화로만 보고 있다.
15~20세가 되면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춘기가 항상 이 나이에만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심신 발달은 계속 된다.
그러나 사람들마다 정신 발달 속도도 다르다.
사춘기는 소년에서 어른이 되는 과도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른 나이에 겪는 사람이 있으며
성인으로써의 신체적 발달은 이루었지만 조금 늦은 나이에
정신적인 사춘기를 겪는 사람도 있다.
나이는 먹더라도 정신만은 아직 젋고, 여전히 생기(生氣)가 넘치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
40년 동안 함께 결혼 생활하고 있는 부인이
여전히 사랑스러워서 젊었을 때의 그 두근거리는 마음을 느낀다는
어느 60대의 애처가의 말처럼
젊음만이 누릴 수 있는 사랑의 감정을 죽을 때까지 유지하고 지내는 것은
로맨시스트들의 소원일 것이다.

그런데 정신적인 사춘기가 늦은 나이에 갑자기 찾아온다거나
또 한 번 느꼈던 사춘기가 또 다시 찾아온다면 좋은 것일까? 
 

  

 

 죽어도 못 보내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죽음을 선택한 비운의 남자,
‘베르테르’ 도 어떻게 보면 갑작스럽게 찾아온 사춘기의 희생자이다.
베르테르가 25세가 되던 해에 로테를 보고 한 눈에 반하게 된다.
그러나 로테는 이미 약혼자가 있었다.
사랑의 콩깍지가 씌인 베르테르는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달할 수 없어서
답답해서 죽을 것만 같다. 
그녀가 사랑하고 있는 약혼자의 존재 때문에
스스로 괴로워한다. 그런 괴로움을 주체할 수 없어서인지,
그는 빌헬름이라는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자신의 사연들을 애애절절하게 풀어나간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베르테르는 사랑의 폭풍우를 겪게 된다.
로테가 자신에게 조금이라고 호감 가는 말이나 태도를 보이면
베르테르는 집에 돌아와서 혼자서 그 기쁨을 누린다.
그러나 자신의 마음을 그녀에게 암묵적으로 추파를 던져보나
로테는 냉담한 반응을 보인다.
그러면 갑자기 불이 타오르듯 절망과 자괴감에 휩싸인다.
로테 곁에 약혼자가 있는 것을 목격하면 절망과 동시에 분노를 일으키기도 한다.

이렇듯, 베르테르의 롤러코스터식 심정 변화를 기록된 편지들을 보게 되면
마치 어느 정신병자의 수기를 보는 거 같다.
아니, 베르테르는 너무 지나친 ‘일루전 증후군(Illusion Syndrome)’ 의  

증상이 보이고 있다. 일루전 증후군의 특징은
사랑하는 사람이나 호감이 가는 사람이 조금만 잘해줘도
착각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정신적인 혼란 상태를 겪게 된다.
그리고 하루 내내 그 사람이 생각나 머리가 깨지듯이 아프며  

무언가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고 일루전 증후군은 정신병은 아니다.
일루전 증후군은 지극히 우리가 살면서 겪는 정상적인 심리적 현상이다.
그리고 이 증후군을 극복하는 방법은
증후군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을 자신의 의지로 기억에서 지우면 된다.
그러나 베르테르처럼 너무 지나치게 증상이 계속되면 문제가 있다.
오히려 베르테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로테에 대한 사랑을 지울 의지도 없다.
자신이 지금 하나의 여자 때문에 미쳐가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자신 스스로 사랑의 늪에 뛰어 들어가 고통에 시달린다.
그리고 결국 그 늪에 들어간 대가(代價)는 자살이라는 죽음을 맞게 된다. 
 

 

 

 젊은 88만원 세대들의 슬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발표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전 세계의 많은 젊은이들의 필독서로 자리 잡고 있다.
출간 이후 베르테르처럼 자살하는 젊은이가 많았다고 하며
나폴레옹도 이 책을 즐겨 읽었단다.

그런데 나는 읽는 내내 이 작품에 대한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자랑할 것은 아니지만 내가 지금까지 베르테르처럼
불같은 사랑을 해본 적이 없어서 감정 이입이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간혹 읽다가 사랑에 관한 의미심장한 구절도 있긴 있었지만,
베르테르가 자신의 심정을 이러쿵저러쿵 쓴 편지들을 읽어나갈수록
오히려 읽고 있는 내가 베르테르의 꼴이 답답해 미칠 노릇이었다.
어떻게 보면 편지를 읽는 대상자인 빌헬름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자신의 친구가 기껏 한 여자 때문에 어린애처럼 투정부리는데도
정신의사가 자신의 환자들의 사연을 귀담아 듣는 것처럼
담담하게 그 편지들을 읽어나간다. 그리고 베르테르가 죽고 나서도
많은 편지들을 모아서 기록하여 그의 안타까운 죽음을 추모한다.

그리고 내가 이 작품에 큰 공감을 느끼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작품 속 시대의 ‘사랑’과 현재 시대의 ‘사랑’ 사이의 괴리감(乖離感)이다.  

 

베르테르는 로테와의 사랑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형성하게 된다.
즉, 로테가 있기에 나도 살아 있다는 점이다.
해바라기가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항상 해를 쳐다보듯이
베르테르는 로테에 향한 사랑의 감정을 통해
사랑 앞에서 울고 웃는 청년으로 자리 잡게 된다.
한창 괴테가 살던 독일은 낭만주의가 꽃이 피기 시작했을 때이다.
사회 흐름의 분위기에 탄 젊은 낭만주의자들에게 사랑은
인간으로서 꼭 누려야 하는 정신적인 교감이었다.
괴테의 시대의 젊은이들은 그런 베르테르를 이상적(理想的)인  

젊음의 표상으로 추앙하였다.
요즘 시대와 비교하자면 ‘아이돌(Idol) 스타’ 인 셈이다.

그러나 지금 젊은 우리들은 사랑이라는 개념에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장정일의 시 구절처럼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켜는 라디오’ 와  

같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마음 내키는 대로 금방 사랑하고 금방 헤어진다.
그리고 지금 88만원 세대들에게는 사랑이라는 낭만을 누릴 여유가 없다.
20대가 되면 본격적으로 취업 전쟁에 뛰어들면 자기 먹고 살기가 급급하다.
그리고 자신의 풍족한 삶을 위해서 사랑보다는 돈으로 배우자를 선택하는 사회이다.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남녀가 서로 다른 부(副)의 차이가 나게 되면 평생 지속될 사랑은 누릴 수가 없게 된다.
사랑이란 그냥 돈 많은 사람을 만나야 잘 사는게 장땡인 것이다. 
 

  

 더욱 더 슬픈 베르테르

문학 작품들을 살펴보면 베르테르 이외에도  

사랑 앞에서 물불을 가리지 않는 정열의 사나이들이 있다.
자신의 가문과 라이벌 가문의 딸을 너무나 사랑해서
기어코 몰래 그녀를 찾아가 그녀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는 로미오,
남의 아내가 되어버린 애인을 되찾기 위해 주류 밀매로 부자가 되어
옛 애인에게 찾아가 접근을 하는 'The Great' 개츠비,
비록 운명은 베르테르처럼 비극적이지만 지금도 그들의 사랑에 대한 열정은
지금까지도 전 세계의 독자들을 사로잡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베르테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슬퍼하는 마당에
자신이 부정적인 인물로 그려져 있다는 점에서 더욱 더 슬퍼할 것이다.
우리가 ‘베르테르’ 라고 하면 먼저 생각나는 것이 ‘베르테르 효과’ 일 것이다.
베르테르처럼 소설을 읽고 자살하는 사람을 비유하여
한 사람의 자살로 인해 연쇄적으로 자살 사건이 일어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베르테르는 안타까운 사랑의 희생자라기보다는
자살을 불러일으키는 자살 유발자로 인식하게 된다.
아마도 그의 이름은 ‘자살 유발자’ 라는 오상(誤象)의 이미지가 지속될 것이다. 
 

 

 Don't Read this at home! 
 

감정이 메말라가는 우리 사회에도
베르테르의 연애담을 한 번쯤은 읽어볼만한 가치는 여전히 있다.
지금도 베르테르처럼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던 사람들도 있을 것이며
예전의 젊었을 때의 그 뜨거운 감정들을 다시 한 번 느끼고 싶은 중년층들도 있을 것이다.

단, 사랑으로 인한 열병 말기 환자들에게 절대로 이 작품을 읽지 말기를 경고한다.
베르테르의 회의적인 감정에 쉽게 몰입이 되어  

당신들의 증상은 오히려 더 악화될 것이다.
괜히 이 책 읽다가 베르테르처럼 자살하지는 말기를.
자살을 하면 베르테르가 당신을 원망할 뿐이다.
그리고 당신의 고귀하고 유일한 생명을 한 순간의 선택으로
마무리 짓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며
당신을 사랑하는 주위 사람들을 더욱 더 슬프게 만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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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미술관 - 비즈니스에 감성을 더하는 Morning Art 아침 미술관 시리즈 1
이명옥 지음 / 21세기북스 / 2009년 12월
평점 :
품절


아침에 명화 한 점. 아침에 우유를 마시듯 하루의 시작을 상쾌하게 열어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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