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시골의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
프란츠 카프카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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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레 이야기 
 

  그레고리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잠자리 속에서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했다. 
  

                                                                                       - <변신> p 9 -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시작하는 첫 구절이다.
카프카는 첫 구절부터 그레고르 잠자라는 인물을 언급하는 동시에
이 인물이 벌레로 변해있음을 알려주면서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벌레 그레고리에 관한 묘사는
서술자가 환상적인 사건을 지켜보고 있듯이 자세히 표현하고 있어서
독자들은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한 현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첫 구절의 당황함을 가라앉히고 앞으로 일어나게 될 그레고리 가족들의 소동을 보게 된다.
그레고르는 자신의 변한 모습으로 인해 가족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봐  

두려움에 떨게 된다.
평상시대로라면 아침에 일어나 출근을 준비하고 있어야하지만,
그는 방에서 나올 자신감은 상실되었다.  

출근 시간이 지나서도 그레고르가 나오지 않게 되자,
결국에는 그레고르가 일하는 회사의 지배인과 그에 대한 걱정을 느낀 가족들이
그의 방으로 모인다. 그레고르는 방문을 잠그고, 밖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지만, 가족들과 지배인은  

무언가 낌새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잠근 문을 열쇠로 열리는 순간, 몇 시간 전에 자신을 걱정했던 가족들은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를 보자 태도가 돌변한다. 소름 끼치는 벌레 보듯이
가족들은 그를 피하게 되며 이 집에서 쫓아내버리려고 한다.
가족들의 사랑을 받을 수 없게 된 그레고르는 가족들에 대한 애정을 유지하려 하지만,
가족들은 벌레로 변한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족을 위한 자기의 희생이 헛된 것임을 알게 되고,
열등감, 고통에 시달리다가 아버지가 던진 사과에 맞아 상처를 입은 채
자신의 방에서 쓸쓸히 죽고 만다. 그의 죽음 이후 가족들은 슬퍼하기는커녕
오히려 평온을 되찾았다고 생각하여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교외로 산책을 나간다. 
 

 

 

 방어기제의 환(環)

<변신>의 상징적 의미는 현대인의 소외 현상과 삶의 부조리이다.
그레고르가 변신하기 전과 변신한 후에 가족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는 확연히 다르다.
변신 전에는 그를 따뜻하게 대하지만, 변신 후에는 그레고르를 구박하고 소외시킨다.
비록 소설은 짧고 우화적이지만 한 인간이 벌레라는 이유로 가족들에게 소외되고
죽음을 맞이하는 그레고르의 삶은 현재 우리 삶에도 그레고르가 존재하고 있기에
작품이 무시무시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 작품보다 더 무서운 것은 지금 우리 삶이다.
물론 그레고르의 삶이 우리 현대인들의 삶과 일치하는 것도 있지만,
현대 사회에서의 소외는 그레고르의 경우와 다른 특수적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옆집에 살던 이웃이나 친구, 그리고 한 집에 살던 가족이  

겉모습이 벌레로 변한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신들이 벌레로 변하여 자신의 주관적이며 잘못된 감정에  

사로잡혀 자신들 스스로 상대방을 소외시키기 때문이다.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서 서민으로 상징되는 세탁소의 딸인 금잔디가
부잣집 자식들만 모인다는 명문고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자 부잣집의 학생들은 집단적으로
금잔디를 왕따 시키며 날달걀과 밀가루를 쏟아 붓는다.
명문고 학생들은 명문고라는 사회 집단 속에서 자신들과 비슷한 수준의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고 자라왔다. 그런 사회 속에서 부자와 정 반대인 서민 학생이  

명문고에 들어왔다고 생각해봐라.  

자신과 다른 이질적인 존재가 자신이 속한 조직에 들어옴으로써
금잔디는 자연스럽게 개밥의 도토리 신세가 된다.
그러나 금잔디가 세탁소의 딸로 태어나고 싶은 것도 아니며  

서민으로 자라고 싶은 것도 아니다.
금잔디가 명문고 왕따로 만들어버린 큰 원인은 명문고 학생들 자체에 있다. 
 

명문고 학생들 내면에 자리 잡은 ‘종족의 우상’ 이 그녀를 왕따 시킨 것이다. 
‘종족의 우상’ 은 인간 본성 속에 잠재하는 선입견이다.
서민의 이미지는 돈 없고 빈곤함이다. 부자의 이미자와 완전히 다르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금잔디=서민’ 이라는 감정으로 시작된
‘서민 ≠ 부자’ 라는 방어기제의 환(環)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결국, 그레고르의 소외도 ‘종족의 우상’ 의 희생양이다.
작품 속의 그레고르는 벌레 이전에 한 가족의 일원이었으며, 벌레가 된 이후에도
자신의 정신과 마음만은 그레고르라는 근본적인 주체성아 남아있어서
가족들에 대한 애정을 어필한다.
비록 모든 가족들이 그레고르를 외면하였지만, 누이동생은 소설 중반부에서야
그레고르를 곤충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누이동생만은 왜 다른 가족들보다 늦게 그레고르를 곤충이라고 인식하게 되었는가?
누이동생을 제외한 그레고리의 부모들은
벌레로 변한 아들을 보자마자 

뇌에서 벌레에 대한 본능적인 방어기제가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퀴벌레가 지나가는 것을 보게 되면 자연스럽게 바퀴벌레에 대한
불쾌감을 느끼게 되어 벌레를 기피하고 죽이려고 한다.
그레고르 부모의 심리에도 ‘벌레=무서움 & 불쾌감’
‘벌레가 된 그레고르 ≠ 자식’ 이라는 방어기제의 환이 작용하게 된 것이다.
단지, 누이동생은 방어기제의 환이 뒤늦게 작용되어 일시적이지만  

오빠 그레고르에 대한 애정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작품 속 사과의 의미

그레고르를 죽음을 이르게 하는 결정적인 원인은 아버지가 던진 사과에 맞는 것이다.
사과가 몸에 박힌 채 그래도 놔두다가 상처가 악화되어 죽게 된다.
왜 하필이면 그레고르는 사과에 맞아 죽게 되었을까?
그의 비극을 최대한 부각시키기 위해서는  

방에서 홀로 쓸쓸히 죽는 설정도 괜찮은데 말이다.

근본적으로 <변신>의 그레고르는 결국 작가 자신 프란츠 카프카이다.
그도 그레고리처럼 실제로 누이동생 3명과 어린 시절을 자라왔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카프카와 누이동생들과 나이 차가 많아
누이동생들과 별로 친하게 지내지 않았다. 그래서 몹시 어두운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레고르처럼 어린 시절부터 가족의 소외를 느끼고 있었다.
성장하면서 문학을 좋아했으나, 아버지는 아들이 법학을 공부하여 
좋은 직장에다가 결혼을 하는 성공적인 가장이 되기를 원했다.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법학을 공부하여 법학 시험에 합격을 하게 되지만,
문학의 열정은 식지 않았다.
글을 쓰느냐 아니면 아버지가 원하는 안정적인 삶을 사느냐.
그의 일기에는 삶에 대해 고민하는 흔적이 보인다. 

   조상도 없이, 결혼도 안하고, 자손도 없이.
  조상에 대한, 결혼에 대한, 자손에 대한 강렬한 욕망만을 지닌 채.
  조상, 결혼, 자손. 이 모든 것들이 나의 손을 잡는다.
  그러나 그들은 내게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 1921년 1월 21일 일기 내용 중에서 - 
 


결국은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고 문학가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일기에 알 수 있듯이 카프카는 자신의 인생에 놓인 두 길 중에
어느 길에 가야할 지 꽤나 고민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남긴 메모에는 자신이 작품을 쓰게 된 이유를
아버지와의 결별 과정, 즉 아버지의 말을 어기고  

문학가로 들어서는 것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문학을 반대하는 아버지를 원망하는 표현일 수도 있지만,
또 다른 시각에서 보면 카프카는 자신이 원하던 문학가가 되어서도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아버지의 기대감을 저버린 결과의 죄책감이 묻어난다.
카프카는 <변신>의 그레고르를 통해 죄책감에 대한 벌(罰)을 암시하고 있다.

자신의 분신인 그레고르는 아버지의 사과를 맞아 죽게 한 것이다.
비록 작품 안이지만 카프카는 아버지가 던진 사과를 맞음으로써 벌을 받게 되고,
자신의 몸에 박힌 사과는
<주홍 글자>에 등장하는 헤스터가 간통죄로 A라는 글자를 달고 살듯이
아버지를 어긴 죄의 대가를 평생동안 짊어지겠다는 자조적인 반성이다. 
 

 

 

 고독한 까마귀

‘카프카’ 의 체코 어로 직역하면 ‘까마귀’ 라는 뜻이다.
그만큼 카프카라고 하면 대표작인 <변신>뿐만 아니라
고독, 불행이 꼬리표처럼 붙어 다닌다.
그는 죽기 직전 2개월간의 요양 기간과 짧은 국외 여행을 제외하고는 
평생을 자신이 태어난 프라하에서 지냈다.
그리고 이 곳에서 작품 활동을 하였다.
심하게 내면적이며 고독과 불행을 홀로 짊어진 그의 성격 탓도 있지만
카프카는 유대계 독일인이라는 특이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이중적인 정체성으로 인해 그는 천성부터 극단적인 내면성을 가지게 되었다.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타인과의 교류를 거부하여
평생 자신의 고향 프라하에서 지낸 프란츠 카프카.
그레고르가 흉측한 벌레로 변한 자신의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까하는
두려움 때문에 방문을 잠그듯이
카프카에게는 프라하라는 곳이 타인에 의한 두려움을 기피하기 위한 

‘자기만의 방’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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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
다닐 알렉산드로비치 그라닌 지음, 이상원.조금선 옮김 / 황소자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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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가계부 작성의 목적 
 

재테크의 기본은 돈을 부족함 없이 유지하면서도 잘 쓰고 잘 버는 것이다. 

재테크의 달인이 책을 펴내거나 아니면 방송에 출연하여 자신들의 노하우를 알리게 되면
재테크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나   

이전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들은 관심을 안 가질 수가 없다.
그런데 재테크의 달인의 노하우에는 항상 공통점이 있다. 가계부를 작성한다는 점이다.
달인들의 가계부를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우리가 기록하는 가계부와는 천지 차이다.
커피 자판기에서 뽑아 마시는 것부터 시작해서 현금 입출기 수수료, 
본의 아니게 돈을 쓰게 되었던 것들까지 상세히 기록하였다.
오늘 지출 용도와 비용 등을 꼼꼼히 기록하여
자신의 소비 습관을 파악하면 써서 안 될 소비를 가려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불필요한 지출을 막을 수 있게 된다.
무엇보다도 더 놀라운 것은 가계부를 매일 꾸준히 작성한다는 점이다.
가계부 두 세 줄 쓰는 것도 귀찮아하는 일반인과 비교하면
그들의 돈에 대한 남다른 경제적 관념을 알 수 있다.
가계부 기록하는 작은 일이 그들에게는 돈이 되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시(時)테크의 달인, 류비셰프 
 

가계부를 작성하면 불필요한 지출을 막게 되어 돈을 아껴 쓰는 습관이 확립된다.
그렇다면, 돈이 많으면 좋을수록 ‘이것’ 도 많으면 좋지만,
그 점을 알면서도 생각 없이 막 쓰는 ‘이것’ 도 가계부처럼 작성하면 아껴 쓸 수 있을까? 
 

‘이것’ 이란 바로 시간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돈과 더불어 아껴 써야하는 것이 시간이다.
하지만 우리는 시간의 중요성을 알면서도 쓸데없는 일에 허비하게 되고,
나중에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후회하게 된다. 
 

그런데 이 사람은 시간에 패배하기 싶어서일까?  

러시아의 어느 학자는 돈 쓰는 것을 가계부에 기록하듯이
자신이 시간을 썼던 것들을 일일이 기록하고 통계를 냈다. 
 

그 사람은 바로 곤충학자인 류비셰프이다.
단순히 곤충학자이며 이름이 생소하다고 해서 그를 가볍게 봐서는 안 된다.
책 제목 그대로 그는 시간을 정복한 남자였다. 

 곤충분류학 연구 2시간 20분, 논문 집필 1시간 5분, 편지 3시간 20분,
 프라우다 지 15분, 이즈베스티야 지 10분, 문학신문 20분, 톨스토이 책 1시간 30분..... 
 

철저한 시간 관리를 실천했으며 하루를 마무리 지을 때 통계 내듯이 꼼꼼히 기록을 남겼다.
이러한 습관으로 인해 자신의 전공인 곤충학뿐만 아니라 곤충분류학, 동물학, 농학,
생물학, 역사, 문학 등 다양한 학문과 분야에 투자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지적 활동은 학문의 경계는 넘는 다양한 저작물을 남겨
지금까지도 그가 남긴 수많은 저작물들은 연구 가치가 높다. 
 

재테크의 달인이 꾸준히 가계부를 작성하여  

결국에 어마어마한 재산을 얻고 유지하는데 기여를 했듯이
류비셰프도 시간을 썼던 것들을 통계표로 작성하여 자신의 지적 능력 발달뿐만 아니라
자신만의 학문을 집대성하는데 기여하여  

후세에도 그의 지적 활동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시간의 지배자, 류비셰프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나오는 시간의 신 크로노스는 자신의 권력이 상실된다는 두려움에
자식들인 포세이돈, 하데스, 헤라 등을 차례대로 삼켜버린다.
크로노스가 자식을 삼키는 행위는 시간은 물처럼 흘러가버리고,
시간 앞에서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사라진다는 속성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크로노스의 자식들 중에서 유일하게도 살아남은 제우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뱃속에 있는 신들을 부활시켜 자신이 신들의 왕으로 군림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세밀하게 기록된 류비셰프의 시간 기록표를 보면,
그가 인간을 가장한 제우스처럼 느껴진다.
제우스가 시간의 신 크로노스를 죽이는 것이 시간의 영속성을 거부하는 행위로 보듯이
류비셰프도 시간들을 기록하여 자신의 삶이  

시간의 영속성에게 지배당하지 않으려고 하였다.
비록 그도 시간이 흐르면서 찾아오는 죽음만은 피할 수 없었지만,
제우스가 크로노스를 제거하여 신들의 지배가가 되었듯이
류비셰프는 시간을 정복한 지배자가 되었다. 
 

 

 

 인간, 류비셰프

평소에 가계부라곤 안 쓰던 우리가 재테크 달인의 방식대로 무작정 가계부를
쓰려고 하면 귀차니즘에 못 이겨 작심삼일로 그치고 만다.
그러는 마당에 류비셰프처럼 시간을 일일이 기록하면서 살아간다고 상상해봐라.
쉬운 일이 아니다. 그의 시간 기록들을 살펴보면
시간의 틀에 박혀 사는 병(病)적인 완벽주의자와 같은 느낌이 든다. 

버나드 쇼는 '학자란 연구를 하느라고 시간을 허비하는 게으름뱅이' 이라고 말했다. 

뉴턴이 식사를 거르면서까지 연구에 몰두하거나, 

에디슨이 뜬눈으로 밤을 새면서 전구 개발에 시도를 했듯이,

천재들은 자신이 추구하는 학문 연구 이외에는 뛰어난 집중력을 발휘하지만, 

가정 생활에나 인간 관계에는 무관심하는 게으름뱅이가 된다.  

 

그러나  류비셰프는 학자라는 명함 때문에 학문에 매달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학문과 연구는 '직업' 을 위한 것이 아닌  

인간으로서 자연적으로 가지게되는 앎과 탐구욕을 그래도 충실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는 시간 기록을 무척 즐거워했다.
그는 시간에 얽매지도 않았으며, 자신이 생각 하에 시간에 쫓길 거 같은 일이 있으면 
망설임 없이 넘어갔다. 잠도 충분히 잤으며, 아침에 일어나 산책과 운동을 하고,
자신의 직업인 연구 활동을 하면서 웬만한 음악회나 연극 공연도 관람하고.....
사람이 하고 싶은 거 대부분을 못 하고 생을 마감하는 반면에  

류비셰프는 죽을 때까지 할 거 다 해본 셈이다.
그렇다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만 매달리는 이기주의자는 아니었다.
그의 하루 일과 중에는 편지와 일기 쓰기는 빠지지 않는다.
다른 곤충학자들에게 보낸 편지들을 살펴보면 자신의 연구 성과를 내세우기보다는
그들과의 교류를 통해 자신의 연구 내용의 의미를 더욱 확장시키려고 하였다.
그리고 일기에는 전쟁 중에 전사한 아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아버지로서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책의 앞 페이지에는 생전 류비셰프의 모습이 담긴 사진들을 볼 수 있다. 

그 중에 손자와 같이 찍은 흑백 사진이 있다.
사진 속의 류비셰프는 학자가 아닌 손자를 귀여워하는 푸근한 할아버지가 되어 있다.  
 

 

 

 가서 후회 없었다고 말하리라

류비셰프의 삶을 읽다 보면 천상병의 시 ‘귀천’ 마지막 구절이 생각난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류비셰프도 죽으면서 하늘로 가면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어린아이가 소풍을 좋아하고 즐기듯이 그는 이승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거 다 해보고

삶의 즐거움을 느꼈을 것이라고. 그리고 하늘에서 그 때의 세상이 아름다웠고
후회감은 전혀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저자가 류비셰프의 일대기를 펴낸 의도는 단순히 그의 독특한 시간 통계 기록과
박학다식을 알리고 싶은 것이 아니다.
류비세프의 삶을 통하여 시간에 쫓겨 수동적인 삶을 사는 우리들에게
스스로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고 있다.

‘시간이 돈이다’ 라는 말이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시간도 돈처럼 아껴 써야한다는 뜻이지만
시간과 돈은 큰 차이점이 있다.
돈은 쓰고 나면 어떻게 해든 다시 벌 수가 있다.
하지만 시간은 그렇지가 않다. 시간은 역설적이다.
‘시간은 많다’ 라면서 느끼게 되는 무한 자원이면서도
막상 시간을 쓰게 되면 ‘시간이 없다’ 라고 느끼게 되는 유한 자원이 되는 것이다.
즉, 시간은 한 번 쓰게 되면 다시 되돌아올 수 없다.

 

류비셰프처럼 완벽하게 시간을 기록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한 번쯤은 자신의 삶을 기록하고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게 되면 좋을 것이다.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잃어버리고 있었던 것을 되찾을 수 있게 되고,
거기서 자신이 즐거워했던 일들을 찾게 되면 좀 더 활기찬 삶의 원동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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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드™ 2013-08-19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의 시간관리에 대한 부분은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평을 하는데, 님은 류비셰프라는 인물에 대해 여러 측면에서 살펴보고 리뷰를 남겨 주었네요. 잘 보았습니다. ^^

cyrus 2013-08-19 21:39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이제 막 알라딘 블로그에 글 남기기 시작했을 때 썼던 건데, 제로드님 덕분에 정말 오랜만에 보게 되네요. 부족한 글인데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조선 왕을 말하다 - 이덕일 역사평설 조선 왕을 말하다 1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 위즈덤하우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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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국가가 불행히도 사론(士論)이 갈라져서 각기 명목(당파)을
만들어 서로 배척하고 싸우니 국가의 복이 아니다. 지금은 이당과
저당을 막론하고 오직 인재를 천거하고 오직 현자를 등용해
다함께 어려움을 구제해나가야 한다.

- 광해군 즉위 2년 2월 25일에 내린 비망기(備忘記) 중에서 -

* 비망기: 임금이 명령을 적어서 승지에게 전하던 문서-1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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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을 말하다 - 이덕일 역사평설 조선 왕을 말하다 1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 위즈덤하우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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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시장과 같다. 권력자 주변은 시장 바닥처럼 항상 사람들로
들끓기 마련이다. 사람 장막에 갇힌 권력자는 이들이 보여주는
환상에 도취된다. 권력이 사라지는 날 이들이 새 권력에 붙어
자신을 비판할 때에야 진실을 보게 되지만 이미 때는 늦다.
이것이 영훤히 반복되는 권력의 속성이자 인간의 속성이다.-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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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을 말하다 - 이덕일 역사평설 조선 왕을 말하다 1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 위즈덤하우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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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보자들의 리더십 평가 테스트 
 

6.2 지방선거 투표 전에 서울시, 경기도와 인천·대전 등 6개 광역단체장 후보들을 대상으로
리더십센터가 자체 개발한 한국공공리더십지수(KPLI)를 실시하였다.
후보자들은 테스트 문항과 순발력을 평가하기 위한 사전 준비용  

무(無) 질문 인터뷰를 실시했다.
테스트 결과는 ‘의사소통 능력 발달, 희생, 봉사 정신 부족’ 으로 나타났다.
창조성, 협상력, 의사소통 능력 점수는 높은 반면에,
정치인의 기본 자질일 수도 있는 희생, 봉사 정신 점수가 낮았다.
공직에 출마하는 후보로서는 무시하기 어려운 테스트 결과이다.
테스트에 참여한 후보들은 본인의 리더십 유형을 파악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이었다.
6.2 선거에 당선된 광역단체장들에게는 이전의 테스트 결과의 부족한 부분만
보완한다면 조금 더 향상된 리더십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보다 나은 리더십을 보여줄지 우리는 당선된 광역단체장들의 활약을 지켜봐야 알 것이다. 
 

 

 

 조선 왕들의 리더십 평가

앞에서 소개된 리더십센터의 리더십 평가의 의의는 후보자가 직접 테스트에
참가하여 자신의 능력에 대하여 쉽게 알 수 있다는 점이며
나중에 후보자가 당선이 되면 부족한 능력을 보완하여  

앞으로의 공직 생활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다.
이전의 리더십 평가는 평가 대상인 정치인이 현 직책에 활동 중에 하는
실시간 조사이거나. 직책에서 물러난 뒤에 실시하는 후기(後期)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평가 참여자들은 평가 대상 본인이 아닌 연구 기관 소속의 연구원이라든가,
시민들이 평가를 내리고, 그 평가를 총괄하는 단체는 연구 기관이나 여론이다.
그래서 평가 결과는 대부분 리더십 부족 등 나오게 되는데,
평가 대상의 정치인이 임기 중이면 자신의 정계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는다.
그리고 정치는 좌파와 우파로 나누어지듯이, 평가 총괄 단체가 어느 파에 따라서
결과도 다르게 나올 수 있다. 그만큼, 이전 리더십 평가는 객관성이 결여되었다는 점이다.

이번에 출간된 이덕일 교수의 신작에서는 수많은 조선왕조실록을 포함한  

각종 수많은 사료들을 분석하여 역대 조선 왕들의 리더십을 평가한다. 
수백 년이 지난 집권자들을 평가한다는 게 어떻게 보면 무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역사는 거울이라는 말이 있듯이, 역사를 되돌아보면 현재를 알 수 있다.
역대 조선 왕들의 정치 행적들은 지금 정치인들이나 별 다른 차이가 없다.
나라를 휘어잡을 권력은 있었으나, 정작 현실 파악 능력이 없어서 자신뿐만 아니라
후세의 왕들에게도 부작용을 남긴 세조,
나름 현실을 파악하고 국정과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정치적 개혁을 시도했으나,
당파의 사대부들과 소통의 실패로 결국 서인의 쿠데타로 인해 폐위된 광해군.
이들의 정치 행적들의 평가를 통해  

미래의 정치인들이 되려는 이들에게는  

이 책을 읽게 되면 이상적인 리더십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가 있다. 
 

 

 

 연산군이 희대의 폭군이 된 이유

그러나 역대 조선 왕들에 대한 평가가 기록된 조선왕조실록이나  

사대부들의 개인 기록들은
자신이 속한 정치적 당파의 사상과 개인적인 평가로 이루어져 있어  

객관성이 떨어진다. 그래서 왕에 대한 기록들은 대부분 왜곡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대부의 왜곡된 기록들이  

훗날 지금의 조선 왕의 평가와 이미지를 확고히 만들었으며,  

지금도 그렇게 전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연산군은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켜 궁정의 피바람을 불게 만들었으며,
궁정에 들어온 비구니에게 간(姦)을 하고, 자신이 궁정에 불러 모은 여인들과
황음(荒淫)에 빠졌다.
이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연산군이다.
그리고 당시 연산군이 살았던 당대의 사료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져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다양한 각도로 연산군의 행적을 분석한다.
연산군이 단순히 생모인 폐비 윤씨의 억울한 죽음 때문에 폭군이 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가 폭군이라는 오명을 가지게 된 이유는 연산군의 능력이 일차적인 원인이다.
연산군은 왕으로써 꼭 배워야 하는 문무(文武)에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즉, 공부를 싫어한 왕이었던 것이다. 결국 자기계발을 하지 않은 결과로
점점 그의 지적 능력이 떨어지게 되어 국정을 다스리는 데에도 수월하지가 않았다.
그래서 기득권 사대부들은 연산군에 대한 기록을
부족한 정치적 능력에다가 무오사화에 보여주었던 살상(殺傷) 행동을 덧붙여
오히려 연산군의 잔인한 살상 행동을 크게 부각시켰다.
이 기록으로 인해 그는 폭군이라는 별명을 얻는 동시에
역대 왕 중 가장 최악인 왕이 되어버렸다.

저자는 기득권 사대부뿐만 아니라 비(非) 기득권 사대부에서 왕들 자신이 남긴 기록까지,
보다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려고 하였다.
학계에서 정립되어 있거나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왕들의 편향(偏向)된 평가들을
뒤엎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의 마키아벨리, 태종

이 책에는 총 8명의 왕이 소개되었는데 딱 1명을 제외한
나머지 왕들은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우리가 역대 조선 왕들 중에 성군(聖君)이라면 세종, 성종, 영조를 생각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성종과 영조는 그나마 ‘절반만 성공한 임금’ 으로 평가하고 있다.
의외로 태종이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태종은 고려 말, 아버지 태조 이성계 몰래
정몽주를 살해하여 그 이후부터 아버지와의 관계가 어긋났으며,
후에 자신이 세자로 책봉이 되지 않아서 그 불만으로
조선 개국 공신 정도전과 다른 세자들을 귀양 또는 죽임으로써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권력을 위해서라면 물불 안 가리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자신이 권력을 누리기 위해서 왕이 된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새로운 나라의 왕으로 만들기 위해서,
아버지뿐만 아니라 주위의 비난을 무릅쓰고 정몽주를 살해했다.
그리고 그가 집권하고 난 후에는 세종이 될 충녕대군을 위해서
‘호랑이 새끼 키우듯’ 왕권을 위한 교육을 시켰다.
결국, 자신의 뒤를 이은 세종의 앞날뿐만 아니라,
앞으로 미래의 조선 번영을 위해서였던 것이다.

결국 태종은 책봉 이전부터 아버지마저도 좋은 이미지도 얻지 못하였으며,
왕이 되어서도 자신의 권력을 위해 핏줄인 세자를 제거했다는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악역을 스스로 자처하여 자신을 희생하였으며
차기의 왕권을 위해 봉사를 한 것이다.
이번에 당선된 광역단체장들. 태종의 리더십을 눈여겨봐라.
그리고 자신의 임기동안 생긴 정치적 문제들을
자신의 뒤를 이을 권력 이양자에게 떠넘기는 우리 정치인들 보면 무척 비교된다.

‘국민들에게 사랑을 받는 것보다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 군주에게는 더 안전하다’ 라는
마키아벨리의 말이 있듯이,
태종은 호랑이의 등에 스스로 올라타서 정몽주 제거와 세자의 난을 통해
권력의 위엄함을 과시하였다. 인간이 호랑이를 두려워하듯이
그도 간신배 사대부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시장의 우상 부셔버리기

책 내용 중에는 권력은 시장과 같다고 말하고 있다. (p 75 참고)
거대한 시장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떠들듯이,
권력도 기득권층들이 서로 모여 떠들면 권력의 환상에 눈이 멀어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문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질 수 없고,
편협된 사고가 지배하게 된다.
결국, 프랜시스 베이컨이 주장한 ‘시장의 우상(偶像)’ 이 형성된다.
시장의 우상이 자리 잡게 되면
동일한 대상이 서로 다른 사람들끼리 전해지다가 의미가 변하게 된다.
즉, 왕의 자질이 부족한 연산군이 사대부들의 평가들로 인해서
폭군 연산군으로 의미가 변절되듯이 말이다.
역사 속에서의 나타나는 시장의 우상은 미래의 후손들에게 악영향을 주게 된다.
겉만 보면 내용은 객관적이지만 실속은 주관적이며 허투루 기록된 엉터리 사료라면
후손들에까지도 폭군 연산군이라는 오명이 계속 이어질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부실한 사료들 때문에 역사를 엉터리로 배울 수 있다는 점이다.

시장의 우상은 역사학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 사회에도 버젓이 서 있다.
정치인들은 국회가 열리는 국회의사당에 모여
사회 안건 하나 가지고 자신들의 의견이 맞다고 서로 입싸움이 펼쳐진다.
그리고 나름 합당한 근거를 가지고 자신들의 주장을 펼친다.
매스컴에 비춰진 정치인들의 이런 여러가지 모습들을 보게 되면
국민들은 그 사회 안건에 대해 다양한 생각을 가지게 된다.
물론 하나의 사회 현상에 대해 다양한 시각을 바라본다는 점은 좋지만,
자칫 사회 현상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다.
우리가 사회 현상을 잘못 이해하고 있으면
아무리 그것에 대해 옳다 아니다라고 주장을 한다 해도
그것은 근거는 허울뿐인 공중누각(空中樓閣)일 뿐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조선 왕들의 평가를 통해 우리가 세우고 있었던
시장의 우상을 부셔버릴 때가 되었다.
이 책은 권력 때문에 시장의 우상을 세우고 있었던 정치인들이나
잘못된 선입견 때문에 시장의 우상을 세우고 있던 우리들에게
경각심을 주는 책이다.
특히, 리더십에 관한 것이라면 때려야 땔 수 없는 정치인들!
이 책을 강력 추천하고 싶다.


인용 관련기사 출처 및 링크 

 

[오세훈 다양성·혁신, 한명숙 소통·협상 …‘색’다른 리더십] 중알일보 5월 24일자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4191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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