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의 역사 에코 앤솔로지 시리즈 2
움베르토 에코 지음, 오숙은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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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 의 다양한 의미

 

모 검색 사이트의 한자사전에 ‘추(醜)' 라고 검색을 하였다.
‘추’(醜)는 ‘닭 유’(酉) 자와 ‘귀신 귀’(鬼) 자가 결합되어 있다.
그런데 내가 검색한 사이트의 내용에는
머리에 장식한 무녀가 신전에 술을 따르는 장면을 나타내는 글자로
(사실 ‘술’ 의 뜻을 가진 한자는 ‘닭 유’ 자와 비슷한 이다)
신을 섬기는 사람, 나중에 신을 섬기는 사람을 싫어한다는 뜻으로 바뀌면서
‘싫어하다’ 라는 의미가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검색 내용이 조금은 수긍이 안 갔지만 ‘싫어하다’ 이외에 뜻이 많이 있다.

‘못생기다, 나쁘다, 못되다, 더럽다, 미워하다, 부끄러워하다, 익살꾼.....’
여기에 제시된 문장과 단어는 서로 다르지만 뜻이 일맥상통하다.
결국은 다 우리가 부정적으로 보이는 말들이다.

나는 ‘추’ 라는 단어를 검색하기 전에는
‘추’ 라는 단어는 그냥 얼굴이 못 생김을 뜻하는 줄만 알았다.
그래서 ‘추하다’ 라고 말할 수 있는 대상은 확대된다.
입에 담지 못할 온갖 육두문자를 서슴없이 내뱉는 사람들은 ‘추하다’,

남들과 다른 독특한 사고 방식, 카메라 앞에서의 돌발 행동,  

평소 사람들도 입기 힘든 옷을 입고 출연하여
'돌+아이' 라고 듣는 그 유명한 연예인도 ‘추하다’,
그리고 사랑의 힘으로 예전의 젊은 왕자의 모습으로 되찾은 야수와  

힘만 세지 녹색의 피부에 뚱뚱하고 못생긴, 사람과 같지 않고 비호감만 들 것 같은
괴물 슈렉도 ‘추하다’  

 

 

 추에 대한 이중적인 관점 

 

여기서 태클 걸기, 야수와 슈렉에게 ‘추하다’ 라고 말할 수 있으면서도
우리는 왜 그들에게 ‘추하다’ 라고 느껴지지 않는 것일까?

물론 그들의 외모는 대놓고 말하자면 못생겨서 ‘추하다’ 라고 생각하겠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이 두 만화 캐릭터를 싫어하지는 않는다.
만화영화 ‘미녀와 야수’에서는 못생긴 야수와 벨과 결혼하고 싶은  

가스통이라는 인물이 나온다.
물론 가스통이라는 인물도 ‘추하다’
마을 사람들은 선동하여 야수를 죽일 음모를 꾸미며,
심지어 벨이 정성껏 모셔왔던 아버지를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시켜  

벨과 결혼하려고 한다.
그리고 야수가 자신을 살려줬음에도 불구하고 방심한 틈을 타 야수를 죽일려고 하는
만화에서는 야수와 반대로 ‘악’의 캐릭터로 설정되어 있다.  

그리고 만화를 보는 사람들은
그런 가스통의 행동에 나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야수의 괴물스러운 용모에 대해서는 뭐라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야수를 동정하고, 벨과의 사랑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녹색 괴물 슈렉도 마찬가지다. 슈렉은 비록 괴물이고 못생겼어도

전 세계 어린이들을 사로잡는 친근한 만화 캐릭터로 자리잡았다. 
 

이것말고도 우리로서는 이해가 안 가면서도 한편으로는 재미있는 현상이 있다.
영화 ‘스크림’ 의 ‘고스트 페이스’, ‘나이트메어’ 의 ‘프레디’.
이들은 무자비한 살인을 일삼는 공포 영화 시리즈의 대표적인 살인마 캐릭터이다.  

죄 없는 사람들을 눈 뜨고 볼 수 없도록 잔인하게 살해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살인 행위는 인간으로서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들의 행위에 두려워하고 나쁜다는 것도 알면서도

관람객은 살인마가 주인공인 영화를 보게 되면   

살인 현장을 보고도 그냥 지나치는 것처럼  

무의식적으로 살인마의 행위를 방관하거나 그를 좋아하는 열혈 매니아들도 있다.
그리고 그들의 살인은 1편으로만 족하지 않는다. 2편, 3편 연속으로 등장한다. 

죽다가도 다시 살아나 어지간히 사람들을 죽이는 걸로 봐서는
두 살인마는 영화광들을 매혹시키기 특별한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우리는 ‘추’ 에 대한 이중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에 대하여 기호학의 대가 움베르토 에코가 고대부터 현재까지
‘추’ 에 관한 모든 문헌과 그림들을 통해 추에 대한 이중적 시각을 추적하였다. 
 

 

 좋은 그림, 나쁜 그림, 이상한 그림

 

움베르토 에코 이 사람,  책 한 권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나온 것을 읽게 되면
그의 박학다식에 놀랍기만 하다.  하나의 책에 나오는 수백개의 자료와 주석들은
어디서 구하는지 대단하기만 하다.
이 책도 전작인 <미의 역사>(열린책들, 2005) 만큼 많은 그림 자료들이  

독자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미의 역사> 에서는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좋은’ 그림들로 가득 찼다면,
후에 출간된 <추의 역사> 에서는 어둡고 우울하고,
보다 못해 두 눈으로 쳐다 보기 힘들 정도로  

사람의 감정을 불편하게 만드는 ‘이상한’ 그림과
정말 19세 딱지를 붙여주고 싶을 만큼 ‘나쁜’ 그림들로 구성되어 있다.
목이 잘린 사람, 흑사병에 걸린 사람, 죽음에 사로잡혀 해골이나 다름없는 사람,

반인 반수, 기형아, 그로테스크한 얼굴의 사람.....

전체 역사를 통틀어서 이런 ‘나쁜’ 그림과 ‘이상한’ 그림들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을텐데.....
대충 그림 자료를 보고 넘기기에는  

저자에 대한 수고로움이 생각나서 지나치기가 쉽지 않았다.
(물론 번역자도 이 책을 번역하느라 고생이 많으셨다) 

그림뿐만 아니라 그림에 대한 사람들이 기록한 증언과
시대순으로 문학가와 예술가들이 ‘추’ 에 대해 느꼈던 것들을 기록한 문헌들이
적절히 배치되어 두꺼운 분량에도 불구하고 내용 이해가 수월하였다.

전작 <미의 역사>에서처럼 ‘추’ 도 시대가 변할수록 개념과 의미가 변화되었음을 
저자는 말하고 있다. 그러나 더욱더 놀라운 사실은
고대, 중세, 근대 사람들의 ‘추’ 에 대한 생각이

지금과 같이 관용적이었다는 점이다.
그만큼, ‘추’ 는 ‘미’ 라는 정반대인 미적 개념에 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대에서는 ‘추’ 를 단순히 못 생기고 악하다는 좁은 의미로 사용되어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고,
중세에는 스콜라 철학의 영향으로 ‘추’ 도 세상을 이루는  

조화의 법칙에 이바지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마니에리스모, 르네상스로 가면 갈수록
‘추’ 를 인간의 어긋난 행동과 속물적인 면을 유추 적용하여
보기 흉한 그림들을 통하여 관람자들을 ‘조롱’ 하고
그들에게 '경고’ 를 주는 동시에 스스로 ‘경각심’ 을 일깨워주도록 하였다.
현대에 가서는 우리가 보기에도 이해할 수 없도록 그림의 인물이 분해되어 있다거나,
비정상적이고 아름다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그림들을
우리는 ‘명작’ 이라고 말한다.
파블로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을 봐라.  

  



 

 

 

 

 

 

 

제목에서는 ‘처녀’ 라고 하는데 그림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쁜 처녀가 없다.
그림 속 앉아있는 처녀의 얼굴은 이목구비가 뒤죽박죽되어 있고,
다섯 명의 처녀의 벌거벗은 몸은 우리가 보는 일반적인 몸의 형상과 다르며

형체를 대충 그린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지금은 이 그림을 입체파의 선구적인 그림으로 평가받는다.
현대 미술은 ‘추’ 를 이용하여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던
‘미’ 의 고정적이면서도 실재적인 아름다움을 가차 없이 깨뜨렸다.

물론 우리가 단순히 공포 영화를 보면서 짜릿한 공포감을 즐기는 것처럼
몇 몇 예술가들은 자신도 ‘나쁜’ 그림을 그려 스스로 ‘추’의 쾌락을 맛보거나
관람자들에게 ‘추’ 의 독특한 아우라를 느끼게 해주려는 작품도 있다.
옛날에는 공포 영화라는 것이 없었기에
사람들은 불을 인간에게 전해줬다는 죄로 인해  

독수리들에게 간을 파먹히는 프로메테우스나
살로메에 의해 목이 잘린 세례자 요한을 보면서
나름 짜릿한 시각적 즐거움을 느꼈을 것이다.
이처럼 예술사에서 ‘추’ 와 ‘미’ 는 알게 모르게 서로 조화되고 있었다. 
   

 

 

 ‘추’ 의 중요성 

 

극작가 프리드리히 실러는 인간의 ‘추’ 에 대한 열광을 이렇게 정리하였다.

 끔찍하고 무서운 것들은 우리에게 거부할 수 없는 유혹으로 다가온다는 것은
 우리 본성의 일반적 현상이다. 우리는 고통스럽고 공포스러운 광경에 혐오를
 느끼면서도 동시에 매혹된다.

결국, 실러의 말이 고대부터 지금까지의 ‘추’ 의 역사를 정확히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평상시에는 못 생긴 얼굴을 가진 사람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 않으며
신체의 일부가 이상이 있거나 혹은 상실되어 있는 사람을 보면 꺼려한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 속에는 레테의 강이 흐르고 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보는 관점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평상시에 잘 생겼다고 들어본 적 없었으며 영화배우치곤 외모에는 거리가 멀었던(?)  

유해진이 우리나라 미의 대명사인 김혜수와 사귀고 있다는 소식에 대해
사람들이 갑자기 유해진의 존재를 다시 알게 되고
유해진은 그 소식 이후로 평범한 외모의 영화배우에서
급호감 훈남(?) 영화배우로 이미지가 역전되었다.
그리고 신체 일부가 잘려나가고 피가 튀기는
스플래터 영화에 나오는 살인 장면을 보고 우리는 거리낌없이 본다.

그렇다고 해서 ‘추’ 에 대한 이중적인 시각에 대해서 무조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인류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시각이 인류 예술에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미술은 ‘아름다움’ 과 ‘추함’ 이라는 서로 다른 감정을 담아내어
표현의 다양성을 보여주었다.
만약 ‘추함’ 이라는 개념은 없고 우리의 본성에 ‘아름다움’만 있었다면 어떻게 될까?
남성은 무조건 이쁘고 아름다운 여성을 차지하기 위해 다툼을 벌였을 것이고,
장애인, 기형아들은 인간 대접 받지 못할 것이고
예전 독일 나치가 저지른 우생학적 살육 정책이 재연될 것이다.
그리고 ‘미녀와 야수’, ‘슈렉’ 과 같은 만화 캐릭터는 당연히 없을 것이다.
상상만해도 끔찍하고 생각하기가 싫다.

두꺼운 움베르토 에코의 책을 완독(이라고 부르기에는 그렇고 사실은
책에 나오는 그림 자료들은 빠짐없이 눈으로 확인했다)하면서
옛날에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추에 대한 관심이 변한 것이 없음을 보면서
우리가 지금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에 대해
‘아름답다’ 다거나 ‘추하다’ 라고 말하는 것이 어쩌면 무의미할 수도 있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인물이 있다.
얼굴은 못생겼어도 마음씨는 착한 사람들도 있고,
얼굴은 온화하고 잘 생겼어도 시커먼 본심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세상이 이런데 과연 ‘미’가 무조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으며
‘추’가 무조건 나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아니면 ‘미’ 와 ‘추’ 는 결국 같은 것이 아닐까.
우리가 야누스의 얼굴을 가지고 있듯이 말이다.  

  

  

 

 

 뱀의 다리) Mi dispiace, Umberto Eco

먼저 움베르토 에코에게 정중히 사과를 하겠다.
세계적인 석학이 쓴 도서에 대해 나름 태클을 걸겠다.
움베르토 에코의 ‘추의 역사’ 는 모든 역사 속에서 ‘추’ 를 표현한 그림들을
소개하여 미술사 서적으로 읽어도 손색이 없다. 그리고 자료를 찾는데 심혈을 기울였을
그의 수고로움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동양의 그림들은 눈 뜨고 봐도 찾아볼 수 없었다는 점이다.  
내가 이 책을 완독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확실히 동양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고대 중국의 최고(最古)의 문헌인 <산해경>에는  

신화 속에 등장하는 괴이한 짐승이 소개되어 있다. 그 짐승들을 보면 

정말 입에서 '추하다' 라는 말이 튀어나올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도 빠질 수가 없다.
정말 우리나라에도 나름 ‘추’ 에 관련된 그림과 신화, 전설, 문헌들이 많이 있다. 
용 된 ‘추남’ 의 대명사 온달 왕자, 도깨비에게 혹을 팔아 넘긴 혹부리 영감 이야기,
우리나라 대표적인 귀신 구미호,

사람 얼굴이라고 하기엔 해학적인 모습의 탈들.....
대표적으로 열거한 것은 그리 많지 않지만 분명 더 있을 것이다.
어쨌든 움베르토 에코가 동양의 자료들도 소개해줬으면
분량은 더 늘어나도 지금의 책보다 내용면으로 훌륭하고 내용도 균형적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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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
윌리엄 세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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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셰익스피어 읽기’ 에 도전하다 

 

나는 문학 분야의 책을 읽으면 주로 세계문학을 읽는다.
가끔 한국문학도 읽지만 지금까지 도서관 대출 도서들을 기억해 본 결과
세계문학이 압도적으로 많이 빌리고 읽었던 거 같다.
그리고 집에 소장되어 있는 문학 도서를 살펴보면
세계문학은 초등학생 때 읽었던 아동용 문학전집과
중학생 때 샀던 에드거 앨런 포 단편선과 모파상 단편선,
(지금도 생각하면 이 책을 사서 읽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그리고 지금 모으고 있는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작품들과
파트리크 쥐스킨트, 움베르토 에코.....
소설 책 대부분 외국 작가 쪽이다.
유독 세계문학을 좋아하는 나에게도
한 번도 책표지에 손을 대본 적이 없는 작가가 있다.
그것은 바로 셰익스피어다.
셰익스피어는..... 예전부터 사실 읽고 싶지도 않았고 일부러 읽지 않으려고 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어려울 거 같아서.....
그리고 소설이 아니라 희극 형식이다. 연극 공연도 한 번도 보지 못했는데
과연 극 작품을 읽을 수 있을지 두려움이 컸다.

그러던 중에, 몇 달 전에 TV 홈쇼핑 광고를 통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00권을 구입했다.
어마어마한 양의 책들 속에서 무엇을 읽을까 고민하던 중
셰익스피어의 작품이 몇 권 있는 것을 보고 본격적으로 셰익스피어에 도전하기로 했다.
도전 첫 작품은 “햄릿”.
집에 소장한 책인만큼 일단은 부담 없이 천천히 읽어나갔다. 
  

 

 <햄릿> 속에는 ‘햄릿’ 만 있다?

 

극 중 인물들이 내뱉는 대사들과
자신의 생각들을 어필하게 하는 동작까지 하나 하나 빠짐없이 읽어나갔다.
생각보다 극 작품 읽기도 소설과 비슷하였다.
읽다보면 평소 들어봤던 유명한 구절도 있었다.
‘약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여자“ 라든가
햄릿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유명 대사 "To be or Not to be",
"죽느냐 사는냐, 그것이 문제로다“ 로만 알고 있었던
구절들이 보였다. (이 책에서는 ‘있느냐 없느냐’ 로 번역되어 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은 대부분 인물들 간의 갈등에 관련된 스토리라고 하던데
역시 이 작품 속에 나오는 주인공 햄릿부터 시작해서
햄릿의 삼촌이자 양 아버지인 클로디어스, 어머니 거트루트,
그리고 그를 사랑하는 오필리아 등 주요 인물들은 하나씩 갈등을 가지고 있다.
특히 햄릿이 겪고 있는 갈등은 그야말로 ‘최악’ 이다.
자신의 아버지는 삼촌한테 독사당하여 아버지의 죽음으로 괴로워하는 마당에
어머니는 삼촌과 결혼하게 된다.
그 와중에 친 아버지의 유령을 보게 된 이후로
왕권을 차지하기 위해 아버지를 죽이고  

심지어 어머니까지 빼앗아 가버리는 것에 대해서
클로디어스를 경멸하기도 한다. 심지어 자신까지 위험할 것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그리고 어머니를 좋아하면서도 삼촌과 결혼한 거르투트에 대해 반감을 가지기도 하고
오필리아와 대화하는 도중 화를 내다가 갑자기 기분이 풀어지는  

약간의 조울증도 보여진다.
햄릿, 이 친구.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우유부단한 사람을 햄릿형 인간이라고 부르지 않은가.

나는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왜 많은 사람들이 셰익스피어를 읽는지,
무엇보다도 정신이 불안정한 어느 덴마크 왕자의 비극적 이야기에  

독자들이 열광하는지 알 거 같았다.
하지만 햄릿이 처한 갈등을 중심으로 이 비극을 읽기에는 무언가가 부족하다. 
안 그래도 세계 문학사에서 가장 불행하고 비극적인 캐릭터로 자리잡은 그를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 = ‘햄릿’ 의 비극적 갈등과 최후로 치부하는 것은  

그를 두 번 죽이는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햄릿>의 구성 의도를  

주인공인 덴마크 왕자 중심으로 풀어나가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햄릿>에는 ‘햄릿’ 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햄릿만 고민하는 것은 아니다.  

햄릿 주위의 인물들도 말 못하는 고민으로 괴로워한다.
작품을 읽어나가면서 햄릿뿐만 아니라
각자 처해진 갈등으로 인해 반응하는 다른 인물들의 심리적 상태들도 흥미로웠다. 
 

 

 <햄릿>의 등장 인물들의 심리 상태 :
 햄릿과 거트루트 중심으로 분석한 지극히 개인적인 해석

  

현실은 어떤 의미에서는 항상 위험한 곳이다.
그래서 현실 속에 존재하는 우리도 불안감에 시달린다.
프로이트는 불안을 ‘현실적 불안, 신경증적 불안, 도덕적 불안’ 으로 분류했다. 
 

가장 기본적인 현실적 불안자신을 위협하는 위험이   

실제로 존재하게 되면 경험하게 되는데,
클로디어스는 자신의 친형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를 차지하게 됨으로써
햄릿은 클로디어스의 등장으로 자신도 죽을 것이라는 현실적 불안감에 휩싸인다. 
 

나머지 두 가지 불안은 앞에서 언급했던 현실적 불안에서 파생된 것이다.
신경증적 불안어떤 욕망을 충족시키려 했을 때 올 수 있는 위험을
그러한 행동을 하기 전에 미리 경험하는 불안이다.
햄릿이 왕비 거트루트와의 대화 도중에 휘장 뒤에 숨어있는
폴로니어스를 삼촌인줄 알고 죽이게 되는데
자신이 사랑하는 오필리아의 아버지를 죽이고 만다.
결국 자신의 아버지를 잃은 오필리아는 햄릿 때문에 미쳐버리고 만다.
비록 작품 속에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햄릿은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미쳐버리는 장면을 보면서
과연 자신이 삼촌을 죽이면 괜히 죄 없는 어머니까지 미쳐버릴지 않을지
신경증적 불안감을 한 번쯤은 가졌을지 않았을까?

도덕적 불안자신의 욕구나 욕구 충족을 위한 행동이
자신의 도덕 기준에 맞지 않을 때 경험하는 불안이다.
쉽게 말하면, 양심이라는 도덕 기준에 의해 생기는 비난을 두려워하는 불안이다.
비록 삼촌이지만 어머니와 결혼이 성립됨으로써 아버지이며 한 나라의 왕이다.
자식이 아버지를 죽인다면 패륜아로 낙인 찍히게 될 것이고  

주위의 신하들의 반응도 그리 좋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어머니는 그런 행동을 이해하지 않을 것이다.
햄릿은 삼촌을 증오하지만 그와 결혼한 어머니가 존재하고 있어
도덕 기준 때문에 삼촌을 죽이고 싶은데 죽이지 못해서 안달이 나는
도덕적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불안은 어떤 종류이든 그 자체가 즐거운 것이 될 수 없으며
불안이 어느 수준을 넘어서면 현실을 파악하는 자아의 기능이 무너질 수가 있다.
그래서 인간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불안을 없애려 할 것이다.
햄릿의 무의식에 내재되어 있는  

여러가지 불안감은 햄릿의 자아 기능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다.
1막에서 아버지의 유령을 보면서 이성적으로 판단할 겨를 없이
삼촌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피해 망상적인 투사를 경험한다.
그리고 그의 행동은 극 후반부로 갈수록 판단력이 저하되면서
자신이 처한 현실에 확실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햄릿 이외에도 그의 어머니인 거르루트에도 흥미로운 심리 상태를 가지고 있다.
거트루트는 자신의 재혼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아들 햄릿에게
‘곱고 애정 어린 말’ (제1막 제2장 121행)을 언급하면서
과거에 선왕이 살아있을 때처럼 지내길 바라면서 햄릿을 설득한다.
하지만 거트루트의 설득은 구밀복검(口蜜腹劍)일뿐이다.
정신분석학적으로 자신이 가진 나쁜 감정을  

완전히 반대의 감정으로 표출하는 경우를  ‘반동 형성’ 이라고 한다.
거트루트가 친자식인 햄릿을 싫어한다고 말하기에는 억지스러운 면은 있지만
양 아버지가 싫다고 자기 자식이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린다면  

그것을 좋아하는 엄마가 있을까?
그런 자식에게 무조건 강압적으로 설득하면 무용지물이다.
아이를 잘 타이르려면 좋은 감정을 내세우면 긍정적으로 설득할 수 있다.
결국 그녀는 남편 동생과의 결혼이라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이유는 남편의 죽음으로 인해 ‘왕비’ 라는 자신의 권력도 상실하기 때문이다.
선왕이 죽으면 그 동생이 왕위에 오르게 되어 그녀는  

권력 유지를 위해 결혼을 했을 것이다.
결국 그녀가 햄릿에게 설득하기 위해 내세웠던 권유 뒤에는
권력을 유지하려는 야심가의 어두운 속내가 있었던 것이다. 
 

 

 햄릿 읽기의 첫 경험을 기억하면서

 

내가 감히 불멸의 고전에 대해 개인적이고 억지스러운 해석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디트리히 슈바니츠가 쓴  

<슈바니츠의 햄릿: 그리고 이 작품을 문화적 기념비로 만든 모든 것>
(들녘, 2008)을 읽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비록 얇은 분량이지만, 저자는 <햄릿>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들을 펼친다.
저자는 햄릿을 다시 읽으면서 느꼈던 새로운 경험들을
완전하지 않지만 자신의 학문적 일대기를 빛나게 해줄 수 있는 

‘문화적 기념비’로 남기고 싶어 했다.
나도 기념비 정도는 아니지만
내 인생에서 셰익스피어 도전 첫 관문으로 <햄릿>을 선택하였으며
햄릿 읽기의 첫 경험을 했기에, 나의 독서 일대기에 좋은 경험으로 남기는 차원으로
나만의 해석을 여기 이 리뷰에 기록을 한 것이다.

<햄릿>은 단순히 보면 400여 년 전에 쓰여진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햄릿은 아직 죽지 않았다.   

지금 어디선가 햄릿의 친구 호레이쇼가

‘험한 세상에서 고통 속에 숨을 쉬며’(제5막 제2장 356~357행)
전하는 햄릿의 사연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까지도 들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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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란 무엇인가.정신과 물질 궁리하는 과학 4
에르빈 슈뢰딩거 지음, 전대호 옮김 / 궁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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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 나 어디서 태어났어요?” 

 

만약 당신의 어린 자식이 이렇게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자식을 길러 본 부부에게는 이 질문이 아이들이 꼭 물어본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작 물어보면 대답하기가 쉽지 않아서 쩔쩔매는 그야말로 ‘블랙리스트’ 질문이다.
예전에는 우스갯소리로 아이에게 다리 밑에서 주웠다는 말을 하는 부모도 있었다.
부모님 말이 무조건 맞는 줄만 아는 순진한 아이들은 어린 나이에
벌써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혼란을 겪게 되는 웃지 못할 상상에 빠지기도 한다.
반면 아이들에게 충실히 답변해주고 싶은 부모들은
아빠와 엄마가 서로 사랑하여 생긴다고 말하기도 한다.
나도 어렸을 때에도 부모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그냥 곧이곧대로 믿었다.
그런데 부모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어린이가 지금도 있을까?
비록 내 생각이지만 물어보는 아이가 별로 없을 거 같다. 
요즘 어린이들은 인터넷의 영향으로 성에 눈뜨는 시기가 빨라졌다.
어린이들이 벌써부터 성인물을 보는 안 좋은 면도 있지만
긍정적인 활용에는 쉽고 빠르게 인터넷 정보 검색을 통해 알 수 있다.
시기가 빠르면 유치원 교육 과정 때 성 교육을 배울 수도 있고
초등학교 정규 수업에 성 교육을 재량활동으로 하는 학교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성 교육 관련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교육 단체도 많이 생겨났다.
우리나라의 어린이 성 교육이 예전보다 질적으로 우수하고
어느 정도 확립되어 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가정 외부의 교육들이 많아지게 되면
가정 내에서만 배울 수 있는 자연스러우면서도 아주 기본적인
부모와 자식 간의 대화법 교육은 사라지게 된다.
프랑스의 사상가 장 자크 루소는 <에밀>에서
어린이야말로 인간 중에서 가장 순수하게 자연성을 간직하고 있는 존재라고 하였다.
순수한 어린이들은 부모에게 직접 질문을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세상의 지식을 터득하게 되고
나이가 들면서도 자기 앞에 펼쳐진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유지하게 된다.
교육이라곤 고작 어머니한테만 배운 어린 에디슨이  

발명왕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순수하고 호기심을 가지고 어머니에게 질문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항상 호기심이 많고 질문을 하는 존재이다.
끊임없는 탐구욕을 통해 새로운 사실들을 발견함으로써 광범한 자연의 세계를 밝혀냈다.
하지만 많은 세월동안 자연 현상을 탐구하면서도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은 것도 있다.
지구 위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과 생물들을 숨 쉬고 활동하게 만드는 그것.
바로, ‘생명’ 이다.
지금까지 과학자들은 수많은 생명의 원리들을 밝혀냈지만
그 원리를 작동하게 만드는 메커니즘을 규명하지 못했다.
호기심 많은 어린이들이 부모에게 자신의 탄생에 대해서 물어보는 질문처럼
“생명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생물학자들에게는 대답하기 곤란한 것이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해
생물학과 전혀 관련 없는 물리학자가 과감히 질문에 대한 논증을 펼친다.
비록 이 책을 집필한 시기가 60여 년 전이라서
그 때 당시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어
지금 읽어 볼 때에는 진부한 면도 있다.
그리고 저자의 전공이 물리학인만큼 생물학 지식의 오류도 간간이 보인다.
인간의 염색체는 48개라든가, 유전자는 단백질일 것이라고 하는 내용들이 있다.
하지만 그는 물리학적 입장으로 생명의 원리를 설명하려고 한다.
서문의 말을 빗대어 표현하자면
‘생명’ 이라는 사실과 자신의 주 전공인 ‘양자 물리학’ 이론을 종합하는 시도를  

감행한다.
저자는 생명 현상은 통계적 법칙이 아닌 양자 물리학의 법칙에 의한다고 주장한다. 
 

 

 이 책이 고전이라고 불리게 된 이유

 

슈뢰딩거는 단순히 생물학 주장을 넘어서 책 제목 그대로
생명의 신비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데
내용이 어느새도 모르게 철학 서적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기본적인 과학 지식을 가지지 않았기에 1장을 읽기가 힘들었건만,
후반부로 갈수록 저자의 철학적 입장으로서의 내용들이 나오면서
책이 말하고자 하는 깊은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해서 저자는
인간이 발견하지 못한 어떤 새로운 메커니즘이 생명현상을 이루게 하고 있다고
예상하면서 논증을 마무리 짓는다.
그러면서 저자는 후대의 과학자들이 그런 현상을 밝혀나가기를 희망하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은 과학자가 되기를 꿈꾸는 과학도들이 꼭 읽어야 할 책이 되었다.
이 책이 출간한 50년 뒤에 물리학자에서부터 생물학자, 세포학자, 뇌 연구가 등등
다양한 학문의 석학들이 모여 슈뢰딩거의 논제가
지금까지도 유효한 지에 대한 논쟁을 펼치게 되는데 그것에 대한 결과물들은
‘생명이란 무엇인가, 그 후 50년’ (지호. 2003) 이라는 책으로 나오게 된다.

비록 슈뢰딩거는 자신이 제기한 질문에 대해서 확답을 하지는 못했지만
자신이 죽은 뒤에도 후세의 학자들에게  

서로 다른 학문의 관점들이 모여 탐구하려는
학문적 경계 넘기 시도를 바랬을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읽을 가치가 있으면서도 막상 읽기가 어려운 책.
하지만 읽을수록 깊이 있는 사유의 가치를 느낄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고전만의 특징이 아닌가. 
  

 

 과학자는 단순히 과학만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 

 

슈뢰딩거는 우리가 느끼면서도 제대로 알지 못했던 ‘생명’ 에 대해 탐구를 함으로써
생물학자들만의 구역의 경계를 무너뜨려 다양한 관점들로 바라 볼려고 했다.
저자의 서문을 읽다보면  

자신은 통일적이고 포괄적으로 알려고 하는 열망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론적 맥락은 조금은 다르겠지만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 이론을 보는 거 같다.
어쩌면 에드워드 윌슨보다 앞서 지식의 통합을 시도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그의 글을 읽다보면 과학을 이용하여
인간을 살상하는 것에 대해서 염려하는 내용도 있다.
그만큼 슈뢰딩거는 단순히 과학만 연구하는 과학자가 아니었다.
생명현상의 신비함에 대해서 경외심을 느끼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생명 존중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어떻게 보면 에르빈 슈뢰딩거는
에드워드 윌슨과 생명 존중을 강조하는 최재천 박사와 일맥상통하다.
공교롭게도 최재천 박사는 에드워드 윌슨에게서 생물학을 배웠으며
우리나라에 최초로 통섭 이론을 먼저 소개하였다. 
그리고 최재천 박사가 자신의 전공인 생물학으로  

사회 현상의 문제들을 접근하는 점도
전공 학문이 다를 뿐 슈뢰딩거의 의도와 비슷하다.

 

이 유명한 두 과학자가 슈뢰딩거의 책을 읽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과학자가 되고 싶은 사람이든 과학자가 되었든 간에
과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꼭 읽어야 할 책이기에 한 번이라도 읽었을 것이다. 
 

 

 “너는 어른이 되면 뭐될래?”

 

어려운 질문에 당황했던 부모가 이제 아이에게 반격하는 질문을 던진다.
자신의 장래 희망에 대해서 생각을 가지고 있던 아이에게는  

바로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겠지만,
한 번도 생각을 안 해봤다거나  (아직 어려서 장래희망이 무엇인지도 모른다거나)

혹은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확실하게 정해지지 않았더라면
어른들의 이런 질문에 아이들도 대답하기가 난감해진다.
분명 이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는 아이가 꼭 있을 것이다.

“나는 과학자가 되고 싶어요.”  

 

나도 어른들이 이런 질문을 하면 ‘과학자’는 꼭 빠지지 않았다.
그런데 과학자가 장래희망이라고 말하는 아이에게도 두 가지 부류가 있다.
하나는 과학자라는 직업이 멋있으며 돈 많이 벌 거 같아서 하고 싶다는 것과
또 하나는 과학에 관심이 많고 좋아서 하고 싶다는 것.  

솔직하게 내가 과학자가 되고 싶은 이유는 전자 쪽에 속한다.
하지만 모든 직업들도 쉬운 것도 없으며 무척 힘든 것도 있다.
그 중, 과학자는 ‘되는 것’ 도 힘들며 심지어 ‘하는 것’ 도 힘든 직업인거 같다.
물론 지금은 그렇지 않겠지만 과학자라고 하면
자신이 연구하는 하나의 주제에 몇 십년동안 몰두해야만 한다. 
그리고 연구의 성과가 자판기에 커피 뽑듯이 쉽게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런 직업의 특징으로 인해 연구 성과에 눈이 멀어
실험 이용 대상이나 생명체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고
실험을 조작한다든가 심지어 다른 과학자의 연구 성과를 가로채기도 하는
그릇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아인슈타인, 리처드 파인만, 라이너스 폴링.....  

 

유명한 과학자들의 공통점은 어렸을 때 과학에 흥미를 가졌으며
과학자가 되어서도 사회에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과학이 인간에게 올바른 이익이 되도록 노력하였다.
우리나라에는 이와 비슷한 대표적인 과학자에는
최재천 박사와 정재승 박사가 있다.

간혹 신문에서 외국에 나가 있는
우리나라 과학자가 새로운 이론을 발견하는 소식을 보게 되면
우리나라 과학자들도 어느 정도 세계에서도 인정 받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권위 있는 노벨 물리학, 화학, 생리의학 상을
한 번도 받지 못했다.
우리나라도 그런 과학자가 노벨 상을 받으면 뿌듯하고 좋은 일이다.
하지만 노벨 상을 받았다고 해서 그 과학자가 유명하고 권위 있다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만약, 미래에 신문 첫 일면지에 이런 기사가 게재되었다고 상상해보자.

“ 한국의 이 아무개, 탄소나노 튜브의 반도체 성질 연구로
   우리나라 첫 노벨 물리학상 수상! “

과연 이 신문 기사를 읽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할까?
우리나라 과학자의 첫 노벨 상 소식이기에 그 과학자의 연구 공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평소에 과학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이
‘탄소나노 튜브’ 에 얼마나 관심이 가지겠으며 그것에 대해 알려고 할 것인가?
우리나라 과학자 '이 아무개의 노벨 상 수상' 에만 관심에 집중되지 

굳이 '탄소나노 튜브 연구가 이 아무개' 라고 생각하겠는가?
아마도 ‘이 아무개=노벨 상 수상’ 이라는 이미지가 뇌리에 박힐 것이다.

 

내가 지은 가상의 일화를 통해서 말하고 싶은 것은
노벨 상을 받았다고 해서 훌륭한 과학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진짜 내가 생각하는 훌륭한 과학자는
과학이 대중들에게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고,
과학이 사회에 유익한 방면으로 이용되는 것을 원하고,
무엇보다도 과학적 성과보다는 생명 존중이 우선시하는   

올바른 윤리적 가치관이 정립된 과학자이다.

 

정말 자신이 과학이 좋아서 과학자가 되고 싶은 사람,
자기 자식이 훌륭한 과학자가 되는 것을 바라는 부모에게는
이 책을 읽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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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의 속도
스티븐 M. R. 코비 지음, 김경섭.정병창 옮김 / 김영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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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총리의 사임

 

며칠 전, 영국의 고든 브라운이 총리직과 노동당 당수직에서 사임의 뜻을 밝혔다.
사임 이유를 노동당과 자유민주당의 연립 정부 구성 협상을 위한 것이라는데.....
단지, 그 이유만으로 그가 갑자기 사퇴를 결정했을까? 
 

고든 브라운 총리의 유세 활동 때 일어난 일이다.  

총리 일행은 떨어지고 있는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 

총력전으로 국민들을 향한 총선을 위한 유세 활동을 하고 있었고
그 유세 장면을 전국 TV에 생방송으로 방영 중이었다.
그러자 국민들에게 악수를 나누고 있던 총리에게 한 여성이 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에게 총선과 총리의 당에 대한 여러 가지 정치적 내용에 관한 질문을 말했다.
이 두 사람의 대화 시간은 짧았지만 정치 토론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
총리는 정곡을 찌르는 여성의 질문에 충실히 대답하였지만, 얼굴은 당황함이 역력했다. 
그 여성에게 혼줄이 날 정도로 진땀을 뺏던 총리는  

자신의 차에 올라타면서 참모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엉망이었어. 그 여자를 왜 만난 거야…누구 아이디어야? 웃긴 여자 같으니라고'  
 

그런데 문제는 혼잣말로 한 험담이 전국 방송을 탔다는 사실이다.
이유는 총리의 양복 가슴에 소형 마이크가 달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매스컴에서는 총리에 대한 가쉽거리를 쏟아냈고,
총리는 그 여성에게 찾아가 사과를 하였다.
안 그래도 노동당과 자신의 지지율이 밑도 끝도 없이 떨어지고 있는 와중에
이미 그가 내뱉은 말은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되었다.

일명 ‘혼잣말’ 구설수가 일어난 후
몇 일 뒤에 고든 브라운 총리는 다우닝 가를 떠나게 되었다. 
 

 

 신뢰의 중요성 

 

사회 생활을 하면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 간에는 ‘신뢰’가 아주 중요하다
비록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개념이지만  

신뢰가 우리에게 주는 효과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신뢰성’ 이라는 좋은 이미지 하나만으로 말단 직원에서  

사장까지 수직 상승한 직원에서부터
한 순간의 행동으로 인해 신뢰를 주는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은 정치인 등
신뢰를 어떻게 여기느냐에 따라 그 한 사람에 대한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는 것이다.
영국 총리의 사임은 영국 정치의 특수적 상황에 맞물려 결정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총선 중에 생긴 구설수에도 그를 사임하게끔 만들 수 있는 요인이 될 수 있다.
항상 국민들 앞에서 청렴결백의 이미지를 보여줘야 할 정치인이
국민에게 잘못된 언행을 하거나 부정적인 정치 스캔들에 휘말리게 되면
그에 대한 신뢰감이 하락하게 되고 그것은 선거 영향에까지 미치게 된다.
이렇듯 신뢰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알고 지켜야 할 중요한 미덕인데도 불구하고
중요성을 깨닫지도 못하고 결국 손해를 보게 된다. 
  

 

 신뢰를 측정하다

 

저자가 이 책을 쓴 의도는 신뢰에 대한 잘못된 인식들을 고치고
좀 더 나아가 살아가면서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실천 방안들과
실천하면서 얻게 되는 신뢰의 효과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저자는 신뢰의 효과를 예로 들면서 신뢰는 실체적이며  

규정할 수 있기에 측정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신뢰 수준이 내려가면 작업 속도도 내려가고 비용은 올라가는 반면
신뢰 수준이 올라가면 작업 속도도 올라가고 비용은 내려간다는 것이다.
일상 생활을 비유하자면 우리가 내고 있는 세금들은  

사회 전반에 이루어진 낮은 신뢰가 만든 현상이다.
어느 대기업에 사장이 된다고 하자.  

그런데 그 기업 문화가 신뢰성이 낮다는 것은
결국 그 기업의 사장도 신뢰성이 낮다는 것이다.
그러면 새로운 사장은 영문도 모른 채 세금을 내게 된다.
반면 높은 신뢰로 형성된 기업은 임무 수행 속도가 빠르고 성과도 많다.
그리고 성과에 대한 경제적 수익도 많아지고 이에 따른 수입 배당도 상승시켜
전체에 미치는 파급 효과가 크다. 
 

 

 신뢰는 자기가 만드는 것

 

대부분 사람들은 한 번 잃은 신뢰는 평생 이미지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고  

회복하는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신뢰라는 것은 무조건 상대방에게 ‘받는 것’ 이라고 잘못된 인식을 하게 된다.
하지만 저자는 오해를 반박하면서
신뢰는 행동에 따라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선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를 함으로써  

거시적으로 대인관계, 조직, 시장, 사회로 확장된다.
대인관계나 조직이든 신뢰에 문제가 생기면  

일단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의 문제에 비롯될 수 있다.
이 책에서 신뢰를 높여주는 행동들이 13가지나 제시되어 있다. 
 

솔직하게 말하기, 상대방 존중하기, 책임 있게 행동하기, 경청하기, 약속 지키기..... 
 

신뢰에 대해 새로운 방안과 인식을 제시한 책이라고 해서
이를 위한 행동도 새로운 것이기를 바라면서 읽어서는 안 될 것이다.
책에 나오는 행동 원칙들은 많은 자기경영 도서에 나오는 단골 내용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책 한 번 다 읽고 커버를 덮고 나면
내용들은 머릿 속에 잊혀져버리게 되고 실천하지 않는 위선적인 독자들 아닌가.
저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를 높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말과 행동에 대해
약속을 지킬 줄 아고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미국의 문학가 에머슨이 말한 격언이 생각난다.

 

자기 신뢰는 성공의 첫 번째 비결이자 영웅의 본질이다    

 

많은 사람들의 추앙받고 있는 유명 CEO들은  

대부분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 자라거나 젊은 시절에 온갖 고생과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있었다.
그들은 항상 ‘나는 할 수 있다’ 라는 자기 자신의 성공에 대한 믿음을 가졌다.
그리고 그들은 성공을 위해 모든 일에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하였기에
성실성으로 얻은 사람들의 신뢰를 바탕으로
그들은 성공한 ‘영웅’ 이 된 것이다.

걷기 힘든 진창길보다는 사람들이 많이 지나간 길을 가듯이
좀 더 편한 방법으로 택하여 짧은 시간 안에 성공하는 ‘로얄로더’ 가 되고 싶어 한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는 속담이 있듯이
무엇을 하든 성공만 하면 된다.
그리고 자기 인생에 성공이 일찍 찾아온다면 여생은 행복하기만 하다.
하지만 단기간에 이루어진 성공은 오래 갈까?
유명 경영인이나 CEO들은 단기간으로 성공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장기적으로 자신들만의 신뢰를 구축하면서  

지금까지도 성공의 길을 걷고 있는 중이다.  

 

지금 이 시간 어딘가에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있을 것이다. 

분명 성공을 하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 책을 끝까지 완독을 하든 나처럼 필요한 부분만 읽었던지간에 

책에 있는 원칙들을 실천했으면 좋겠다.  

신뢰를 바탕으로 모든 사람들의 성공할 뿐만 아니라 

서로 신뢰하고 믿을 수 있는 좋은 사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인용 관련시가 출처 및 링크 

 

['유권자 험담' 고든 브라운 또 구설수] MBN 4월 29일 입력 

http://mbn.mk.co.kr/news/newsRead.php?vodCode=502250&category=mbn00008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 사임] 연합뉴스 5월 12일 입력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327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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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와 창조성
모기 겐이치로 지음, 김혜숙 옮김 / 눈과마음(스쿨타운) / 2006년 10월
평점 :
품절


 창조성 권하는 사회 

 

대형 서점가의 자기계발류 코너를 살펴보면
사회인(주로 직장인)들을 겨냥하여 쓴 ‘창조성’에 관한 도서들이 다양하다.
왼손을 자주 써서 뇌를 자극하면 발달하는 ‘좌뇌형 인간’.
그리고 매스컴에 나오는 명사(名士)들의 창의적인 사고 방식들을 소개하는 책들까지.....
비단 자기계발류뿐만 아니라 창의력 있는 영재를 위한 유아 도서부터
일상생활 속에서도 창의력, 창조성을 강조하는 글쓰기 방법이나 처세술 도서,
심지어 창조성 향상을 위한 퍼즐 모음집도 나왔다.
이렇듯 남녀노소, 창조성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고 많이 읽게 될 것이다.
그러나 창조성에 관한 책들은 다 피차일반이다.
하나의 새로운 유행이 나타나면 그 인기의 편승해 비슷한 것들이 나오는 사회 아닌가.
제목만 바꿔져 있을 뿐 내용은 다 똑같다.
그리고 오른손잡이들을 억지로 왼손으로 글을 쓰는 습관을 길들어져야 하는가?
굳이 스티븐 잡스처럼 따라 하면 우리도 창조적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책에 나오는 방식대로 뇌에게 강제로 의식시켜주면  

장기적으로 실행하기에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진지하게 실행한다고 쳐도 여러 가지 요인들과 계획들이  

우리의 삶을 가만히 놔둘 것인가.
일이 늘어나게 되어 시간이 없어서, 몸이 피곤하다는 이유 등으로
결국 창조적인 인재 되기 프로젝트는 흐지부지되고 만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실용도서를 읽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살아가면서도
제대로 실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일상 생활 속의 창조성 

 

그러면 창조적인 인재는 특출한 두뇌를 가져야만 이루어지는 것일까?
일본의 뇌 연구가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창조성의 신화화’를 깨뜨린다.
창조성은 아인슈타인이나 스티븐 잡스와 같은 우리가 천재가 부르는
이들만의 특별한 능력이 아니다.
그들은 뇌 안에 잠재되어 있는 능력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화했기에
그만큼 이에 대한 결과물이 나오면서 우리가 그들을 천재라고 하는 것이다.
결국 저자는 창조성은 특별한 사람들의 능력이 아닌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자연적인 뇌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일상생활 속에서도 창조성이 배어난다고 말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나누는 일상 속의 대화는 창조적인 뇌 기능의 작용이다.
인간이 활동하는 사회 세계는 불확실의 세계이다.
그만큼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 되기 위해서는
학습되어 있는 행동을 토대로 뇌는 프로세서를 실행한다.
상대방과의 대화 이전에도 우리가 무의식한 상태에서
뇌에서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쏟아져 나온다.
어떻게 대화를 시작해야하며 무슨 대화를 나누어야하는지에 대해 준비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미쳐 느끼지 못하고 있던 불확실한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창조성이 키워지고 있던 셈인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 

 

두껍지 않은 이 책을 읽게 되면 실망감이 느끼게 될 지도 모른다.
자기계발류 도서와는 거리가 멀어 확실한 방법을 찾는 독자에게는
목차부터 훑어보게되면 읽을 구미가 당기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뇌 연구가가 쓴 책이라고 해서 뇌와 관련된 전문적인 것도 아니라서
뇌에 관심이 많고 전문적인 식견을 가진 독자에게는 교과서 수준으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도 창조성에 대해 재고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특히 창조성의 근원을 인간과의 커뮤니케이션 관계에서 찾는  

저자의 관점이 사뭇 독특하였다.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나’ 라는 존재를 알 수 있을뿐만 아니라
거시적으로 ‘나’ 와 상대방과의 ‘차이’의 감각을 통해서 

창조성을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2년 동안의 군 생활을 끝내고 사회 생활로의 재적응을 위해
걸음마를 시작하고 있는 나에게 아주 타인과의 관계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었다.
앞으로 예측 불가능하고 불확실한 카오스틱(Chaostic)한 삶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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