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전 토요일(617)서울국제도서전을 참관했다. 작년에 비해 개인적으로 관심 있는 출판사들이 참가했던 터라 책을 많이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도서전보다 제일 중요한 곳에 가야 해서 ‘꼭 사야 할 책 두 권만 샀다.

















* 김정희 책방지기 생활 수집》 (탐프레스, 2023)




두 권 중 한 권은 대구 독립서점 <서재를 탐하다>와 출판사 <탐프레스(tampress)> 운영자 김정희책방지기 생활 수집이다














전국 각지에서 온 애서가들로 바글거리는 코엑스를 얼른 벗어나고 싶었다나 같은 간서치(看書癡)가 좋아할 만한 곳으로 향했다그곳은 바로 세운상가 근처에 있는 <소요서가>라는 철학 전문 서점이다
















* [절판] 데이비드 C. 린드버그 서양 과학의 기원들(나남출판, 2009)




처음에 서점을 찾기 힘들어서 상당히 애먹었다서점 건물이 지상에 있는 줄 알고 한동안 헤맸다대부분 사람은 유명 서점에 가기 전에 사전 조사로 그 위치를 확인할 것이다그런데 난 그렇지 않다서점에서 어떤 책이 판매되고 있는지 먼저 본다사실 <소요서가>에 가고 싶은 딱 한 가지 이유는 절판된 서양 과학의 기원들이 책을 사기 위해서였다.








 









* 윌리엄 뉴먼 프로메테우스의 야망(도서출판 길, 2023)


* 바이얼릿 몰러 지식의 지도: 일곱 개 도시로 보는 중세 천 년의 과학과 지식 지형도(마농지, 2023)




30여 분 돌아다닌 끝에 <소요서가>를 찾았다서점 진열창에 배치된 책들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그중에 이미 내가 산 책 두 권이 있었다프로메테우스의 야망과 지식의 지도이 책들은 서양 중세의 과학이 처음에 어떻게 형성되었고유럽 전역으로 전파되었는지를 보여준다이 두 권의 책을 읽기 시작했던 터라 여기에 짝이 될만한 서양 과학의 기원들을 구매하고 싶었다하지만 서양 과학의 기원들은 이미 다른 손님이 예약 구매된 상태였다비록 목표 달성은 실패했지만, <소요서가>에 사고 싶은 책들이 엄청 많았다.


그날 <소요서가>에서 고른 책은 총 여섯 권이다그중 세 권은 예전에 이미 읽었고서평을 남겼다읽은 책 세 권만 간략히 언급하겠다.

















테레사 포르카데스 이 빌라 여성주의 신학의 선구자들》 (분도출판사, 2018)




여성도 지식인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던 교회가 어떻게 남성 중심적인 교권 제도를 고집하는 교회로 변했는가그렇다면 페미니즘 관점을 적용하여 교회에서 여성의 역할을 재배치하는 제도는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여성주의 신학의 선구자들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느끼고진정한 의미의 여성과 신학이 무엇인지 접근한다책은 여성 신학 대신에 여성주의 신학이라는 용어를 내세워 그것의 의미와 역사를 다룬다그리고 남성 중심 사회 속에서 주도적인 생각으로 주체적인 삶을 살아간 위대한 여성 신학자들을 소개한다






 










* [절판] 샤를 보들레르 현대의 삶을 그리는 화가》 (은행나무, 2014)




보들레르가 강조하는 현대는 간단히 말하면 현시대의 유행과 풍속이다결국 현대의 삶을 그리는 화가는 자신이 본 것시대의 풍경을 세밀하게 관찰하며 응시하는 예술가. ‘현대 예술가는 벌거벗은 여신이나 신화 속 영웅의 모습을 그리던 고전주의 화풍을 거부한다그래서 전통에 반기를 든 보들레르는 이 책을 통해 현대성이 충실히 반영된 예술가를 옹호한다국내에 출간된 보들레르가 쓴 책과 보들레르 관련 서적을 모으는 중인데, <소요서가>에 오기 전까지는 절판된 현대의 삶을 그리는 화가를 구하지 못한 상태였다. 드디어 이 책을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
















* [구판절판] 린 헌트 엮음 포르노그라피의 발명》 (책세상, 1996)

* [개정판] 포르노그래피의 발명》 (알마, 2016)



<소요서가>에서 구매한 린 헌트의 책은 책세상에서 나온 구판이다프랑스 혁명 이전의 금서목록에 포르노그래피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아이러니하게도 금서로 지정된 포르노그래피는 대중이 즐겨 보는 베스트셀러였고봉건적 구체제를 뒤흔들만한 선동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프랑스 혁명 이전까지 포르노그래피는 성적 표현을 동원해 종교적 · 정치적 권위를 비판하는 언어적 무기였다포르노그래피의 발명은 프랑스 혁명과 민주주의를 촉발한 포르노그래피의 영향력을 조명한 책이다.

















* [개정 4]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현실문화, 2022)




그날 <소요서가주인장은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를 읽고 있었다.

 

현대미술은 정말 어렵고보면 볼수록 머리 아프게 만든다사실 미술이라는 단어조차도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어렵다이것은 미술이 아니다는 미술과 그것을 어려워하는 사람들 사이의 틈을 메꿔주는 책이다미술을 이해하고해석하는 관점과 방식은 고정적이지 않다시대적 상황에 따라 미술을 보는 눈이 결정되고시대가 달라지면 변하기 마련이다그래서 미술을 한 마디로 규정하고정의 내리기가 참 쉽지 않다저자는 현대미술이 소수의 지식인만 이해하는 문화로 전락하는 바람에 실패했다고 지적한다저자의 지적은 현대미술의 한계에 정곡을 찌른 분석이다







지난주 금요일에 <소요서가> 인스타그램 운영자가 내게 메신저(DM)를 보냈다. 서양 과학의 기원이 서점에 입고되었으니(!) 필요하다면 예약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절판된 책이라서 영영 못 구할 줄 알았는데 <소요서가>가 정말 감사하게도 귀한 책을 찾아줬다. 절판된 책 가격은 정가보다 비싸게 매겨지는 편이다. 하지만 나는 그 책 가격이 얼만지 생각하지 않고, 바로 그 책을 구매하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타이밍이 참 좋았는데 바로 다음 날인 토요일에 <달의 궁전> 독서 모임이 있는 날이라서 서울에 갈 예정이었다. 모임 시작 전에 <소요서가>에 방문해서 서양 과학의 기원을 구매했다. <소요서가> 주인장이 말하기를 <소요서가> 대표가 서양 과학의 기원을 매우 탐냈다고 한다. <소요서가> 대표는 직접 뵌 적은 없지만, 이분 역시 내공이 깊은 간서치일 것 같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lanca 2023-06-28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제도서전 가셨군요. 저는 가고 싶었는데 못 갔어요. 소요서가라는 곳이 있었군요. 귀한 책을 구하셔서 잘 됐습니다.

cyrus 2023-07-01 21:31   좋아요 0 | URL
사실 저도 몰랐던 서점이었어요. <일글책> 책방지기가 <소요서가>를 소개해서 알게 됐어요. ^^

stella.K 2023-06-28 09: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서울에 사는 나도 잘 모르겠는데 대단하다. 역시 너는 진정한 애서가다.
조만간 해외로도 발을 넓혀볼 생각은 없나? 가까운 일본부터라도. 애서가에겐 언어의 장벽도 문제가 이니잖나? ㅋ 암튼 다행이다. 힘들게 서울까지 와서 원하는 책을 샀으니.^^

cyrus 2023-07-01 21:33   좋아요 1 | URL
외국어 공부하면 책을 못 읽어요. 가끔 우리말로 번역된 외국 도서를 읽다가 아리송한 문장을 만나면 외국어 공부를 하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래도 영어 공부하고 싶지 않아요. ㅎㅎㅎ

레삭매냐 2023-06-28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내 글쓰기만을 고집하지만,
제가 권유한 대로 너튜브의
세계를 추천하는 바입니다.

물론 들으시진 않겠지만 ㅋㅋ
지난 주말 역시나 즐거웠습니다.

cyrus 2023-07-01 21:34   좋아요 1 | URL
글 쓰는 삶이 제게 부와 명성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해도, 저는 죽을 때까지 책 읽고 글 쓰면서 살아가고 싶어요. ^^

페넬로페 2023-06-28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 작년에도 서울국제도서전 오셨죠? 벌써 1년이 지났네요.
매냐님께서 달궁이라 표현하셨는데
‘달의 궁전‘이군요.
음, 달의 궁전이라, 좋네요~~
대구에서 서울까지 오는 열정, 역시 진정한 책쟁이십니다^^

cyrus 2023-07-01 21:36   좋아요 1 | URL
작년에 제가 도서전에 간 것을 기억하시네요. ㅎㅎㅎ <달의 궁전>이 폴 오스터가 쓴 소설 제목이기도 해요. 달궁 멤버 대부분이 폴 오스터의 소설을 좋아해서 독서 모임 이름이 ‘달궁’이 되었답니다. 그렇지만 저는 폴 오스터의 소설을 즐겨 읽지 않았어요.. ^^;;

시나브로 2023-08-09 0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번에 소요서가에서 <서양과학의 기원들> 재고가 있어 우연히 구매할 수 있었는데, 쓰신 글 보니까 괜히 반갑네요 ㅎㅎ
 



서한용 씨는 서울에 사는 친한 애서가다. 작년 인스타그램에서 알게 된 분이다. 그분은 본인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구매한 책들을 찍은 사진과 간단한 책 소개 글, 서평을 올린다. 웬만하면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을 팔로우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책과 관련한 서 씨의 글 몇 편 읽고 난 후 이분의 독서 편력에 몹시 흥미를 느꼈고 서 씨의 팔로우 신청을 수락했다. 나는 한 주에 많아야 책을 10권을 사는데, 서 씨의 책 구매량이 나랑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서 씨의 구매한 책 중에 내가 산 책이 한두 권 포함되어 있었다.

 

서 씨의 책 사랑이 얼마나 심각한지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다. 그리하여 서울국제도서전이 열린 6월 4일 토요일에 만나자고 내가 먼저 제안했다. 솔직히 서 씨를 만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첫 만남에 대한 불안감이나 두려움도 나지 않았다. 우리는 국제도서전이 열리는 코엑스 근처에 만났다. 만나자마자 책과 관련된 대화가 시작되었다. 전혀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내 본명은 최해성이다나는 재미 삼아 서 씨에게 서울의 최해성(서해성)’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반대로 내 별명은 대구의 서한용(대한용)’이 되었다. 서해성, 대한용. 별명 한번 참 찰지구먼. 서해성과 대한용이 장거리 연애, 아니 장거리 우정이 맺어진 지 딱 1년이 지났다. 마침 서해성의 생일이 61일이었다. 그래서 그분의 생일을 축하할 겸 1주년 우정을 기념하고 싶어서 알라딘 기프티콘으로 책 선물을 보냈다. 선물할 책을 고르기 전에 우선 내 책을 먼저 주문했다. 내가 읽고 싶은 책은 소중하니까.

 

예전에 책 좋아하는 분들한테 책 한 권을 선물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서해성을 위한 책 선물은 특별하다. 해성이 해성한테 책 선물을 주는 건데 대충 막 고르면 안 되지. 나는 서해성 한 사람을 위한 북 큐레이션을 하는 마음으로 세 권의 책을 골랐다.
















* 이레네 바예호, 이경민 옮김 갈대 속의 영원: 저항하고 꿈꾸고 연결하는 발명품, 책의 모험(반니, 2023)




서해성이 구매한 수많은 책 중에 내가 샀거나 읽은 책은 기억하고 있다. 그분은 갈대 속의 영원을 구매했는데, 올해 내가 사서 읽은 책 중에서 최고의 책이다. 그래서 갈대 속의 영원과 비슷한 느낌이 날법한 책을 고르기로 했다. 그리고 나온 지 얼마 안 된 신간 도서는 고르지 않았다. 완독하고 서평으로 주요 내용을 요약한 책을 골랐다. 그래서 책 선물로 고른 책은 다음과 같다.

















* 마리엘라 구쪼니, 김한영 옮김 빈센트가 사랑한 책(이유출판, 2020)

 



애서가 지인에게 책 선물을 줄 때 반드시 고르는 책이 바로 빈센트가 사랑한 책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가 반 고흐(그다음으로 좋아하는 화가는 르네 마그리트). 사실 반 고흐가 생전에 책을 진심으로 좋아했고, 독서 욕구가 얼마나 컸던 사람인지 아는 이가 드물다. 책과 독서에 대한 열정은 동생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내게는 책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열정이 있다. 끊임없이 깨우치고, 배우고 싶은 욕구가 있지. 마치 하루하루 빵을 먹어야만 하는 것과 같아.’ (6)

 


반 고흐가 생각하는 진정한 예술가의 역할은 진실하고 정직하게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진실하고 정직하게 서평을 쓰는 것이 내가 책을 읽으면서 살아가는 이유. 빈센트가 사랑한 책해성이 사랑한 책이다.

















* 제이미 캄플린, 마리아 라나우로 공저, 이연식 옮김 예술가는 왜 책을 사랑하는가?: 예술에서 일상으로, 그리고 위안이 된 책들(시공아트, 2019)

 



빈센트가 사랑한 책과 같이 읽으면 좋은 책이다. 반 고흐와 같이 책을 엄청나게 좋아했던 예술가들은 책 사랑을 숨기지 않았고, 예술 작품으로 표현했다. 서해성이 구매한 책 사진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그분이 어떤 주제에 관심이 있는지 파악할 수 있다. 내가 보기엔 예술 관련 책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글보다는 도판이 많이 실려 있는 예술 분야의 책 두 권을 선택했다.

















* 마틴 푸크너, 최파일 옮김 글이 만든 세계: 세계사적 텍스트들의 위대한 이야기(까치, 2019)



 

말하기와 쓰기가 하나가 되면 한 편의 텍스트(), 또는 한 권의 책으로 완성된다. 더 나아가 책이 읽히는 순간 인간과 세계가 만들어진다. 글이 만든 세계16편의 유명한 텍스트가 만들어지고 보급되는 과정을 추적하고, 그 텍스트들이 어떻게 세계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준다. 이 책이 갈대 속의 영원과 잘 어울려서 골랐는데, 서해성이 이미 산 책이었다. 역시 서해성답다. 두 사람의 독서 편력이 거의 비슷하면 이런 상황이 발생한다. 이럴 줄 알고 앞에 언급한 책 두 권을 골랐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4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23-06-08 09: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그러니까 서한용 씨가 너한테 먼저 팔로우 하자고 했단 말이지? 대단한데? 그러니 나는 얼마나 대단하냐 이렇게 대단하신 분과 팔로우를 하고 있으니. ㅋㅋㅋ
앞으로 잘 알아 모시겠슴다. 서해성 씨!^^
서해성 씨와 대한용 씨의 우정도 더욱 짙어지길!

cyrus 2023-06-12 06:40   좋아요 1 | URL
독서 취향과 관심사가 거의 비슷한 분 만나기가 쉽지 않거든요. 그런데 한용 씨가 저보다 대단한 점은 매일 아침 운동하는 루틴을 지키고요, 독서뿐만 아니라 취미가 많은 분이에요. 저는 여전히 내향적 성격이라서 책 읽는 일상이 편하고 익숙해요. ^^;;

새파랑 2023-06-09 05: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cyrus님이 극찬하는 책이라니 꼭 읽어봐야겠습니다~!!
서울과 대구의 책쟁이의 만남이라니 멋지십니다~!!

cyrus 2023-06-12 06:41   좋아요 1 | URL
제가 소개한 책들이 ‘책에 관한 책’이라서 오히려 책 속에 언급된 책들까지도 읽고 싶어질 수 있어요. 조심하세요. 책임 못집니다! ^^;;

꼬마요정 2023-06-09 1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멋지세요!! 두 분 우정도, 책을 사랑하는 마음도, 모두 다요^^ 두 분 우정 늘 책과 함께 깊어지길 바랍니다. 전 옆에서 이렇게 cyrus 님이 추천하는 책 읽을게요. 아, 다는 못 읽을 거 같아요. 어려워요 ㅎㅎㅎ

cyrus 2023-06-12 06:42   좋아요 1 | URL
제가 추천한 책보다는 꼬마요정님이 읽고 싶은 책을 읽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

감은빛 2023-06-09 13: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별명이 무척 인상적이네요. 서로의 본명이 별명 되다니. 이렇게 마음이 맞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요. 두 분의 우정을 응원합니다.

cyrus 2023-06-12 06:45   좋아요 0 | URL
한용 님 성격이 쾌활하고 낙천적이라서 같이 있으면 제가 좋은 기운을 많이 얻고 갑니다. 이런 분들을 자주 만나면 내항적 성격인 저도 알게 모르게 외향적으로 행동하게 되더라고요. ^^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소설 1984텔레스크린이라는 영상 장치가 나온다. 오세아니아의 지배자 빅 브라더(Big Brother)는 텔레스크린으로 국민을 감시한다. 그뿐만 아니라 텔레스크린은 국민에게 영상과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선동 도구이기도 하다. 소설 초반부에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Winston Smith)는 고문당하는 여성이 나오는 텔레스크린 화면을 상상한다.


















* 조지 오웰, 한기찬 옮김 1984(소담출판사, 2021)



 그는 그녀를 고무 봉으로 죽도록 매질할 것이다. 그녀를 발가벗겨 기둥에 묶어 놓고 성 세바스찬[비밀리에 기독교를 믿다가 화살을 맞고 순교한 로마의 장교-역주]을 처형할 때처럼 화살을 있는 대로 쏠 것이다


(1984중에서, 26~27)



1984역자는 성 세바스찬(St. Sebastian, 라틴어: 세바스티아누스, 이탈리아어: 세바스티아노)화살을 맞고 순교했다는 내용의 주석을 달았다세바스찬이 화살을 맞은 건 사실이지만, 순교하지는 않았다.


세바스찬은 갈리아 출신의 로마 군인이었다.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황제의 친위 대원이 되었다. 황제는 이교도 금지 정책으로 기독교 박해를 단행했다. 하지만 기독교로 개종한 세바스찬은 황제 몰래 감옥에 갇힌 기독교인들을 풀어주었다. 이 사실이 발각되면서 황제는 기독교인 세바스찬에게 활로 쏘아 죽이는 사형을 명했다. 세바스찬은 기둥에 묶인 채 군인들이 쏜 수십 발의 화살을 맞았다. 화살들이 그의 몸을 관통했지만, 세바스찬은 죽지 않았다. 이레네(Irene)라는 과부가 치명상을 입은 채 버려진 세바스찬을 치료해주었다. 회복된 세바스찬은 황제를 직접 만나 기독교 박해 정책을 비판한다. 결국 세바스찬은 군인들이 휘두른 몽둥이(곤봉)에 맞아 순교했다.
















* 보라기네의 야코부스 황금 전설(크리스천 다이제스트, 2007)

 

* [품절] 로사 조르지 성인 이야기, 명화를 만나다(예경, 2006)




세바스찬의 처형 장면은 르네상스 화가들이 선호하는 주제 중 하나였다. 성 세바스찬의 일대기를 언급한 황금 전설에 따르면, 화살로 뒤덮은 세바스찬의 모습을 고슴도치로 비유한다. 화가들은 남성 신체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온몸에 화살을 맞은 세바스찬을 반나체 모습으로 그렸다. 이러한 그림들이 많아서 세바스찬이 화살에 맞아 순교한 것으로 오인하기 쉽다.


황금 전설은 유럽 중세에 전해 내려온 가톨릭 성인들의 전설을 집대성한 문헌이다. 이 책의 유일한 번역본은 크리스천 다이제스트라는 출판사가 펴냈다. 크리스천 다이제스트는 현대지성출판사의 전신이며 현재 ‘CH북스로 이름이 변경되었다‘CH 북스는 현재 현대지성 출판사의 독립 브랜드(임프린트)로 운영 중이다CH북스는 기독교(개신교) 서적을 펴내는 출판사인데, 가톨릭 교리가 반영된 황금 전설을 펴낸 점이 이채롭다. 종교 개혁 이후 기독교인들은 구교가 된 가톨릭교 성인들의 기적을 미신으로 여겨 비판했다. 황금 전설의 기독교인 역자는 황금 전설에 나온 모든 내용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명시한다. 그렇지만 중세 미술과 신학자들에게 큰 영감을 준 황금 전설의 영향력을 높이 평가한다.

 

황금 전설번역본에는 세바스찬이 곤장에 맞아 순교했다고 나와 있다(172).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23-06-06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청 두껍네. 읽을 것 같지않다.ㅠ

cyrus 2023-06-07 06:18   좋아요 0 | URL
네, 벽돌 책이에요.. ㅋㅋㅋㅋ

ozzy2012 2023-06-06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미디어가 텔레스크린이네요...

cyrus 2023-06-07 06:20   좋아요 0 | URL
맞아요. 사회 비판적인 의식을 가지고 진실을 말하려는 훌륭한 언론인도 있지만, 대부분 언론인은 사명감 없이 일하고 있어요.
 




절판된 책이 다시 나왔다. 책 제목은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 ‘그로테스크(Grotesque)의 정의는 다양하다. 우리말로 쉽게 표현하면 괴상한’, ‘끔찍한’, ‘불쾌한’, ‘기묘한’, ‘으스스한 등이 있다. 흔히 그로테스크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정의는 괴상한이다. 그렇지만 시대와 당대에 유행한 문화 양식에 따라 그로테스크의 정의가 조금씩 달라졌고, 여기에 새로운 의미들이 부여되었다. 미술 및 문학 작품 속에 반영된 그로테스크의 풍부한 정의를 분석한 책이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
















* 볼프강 카이저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아모르문디, 2023)

 



이 책의 저자인 독일의 문학비평가 볼프강 카이저(Wolfgang Kayser)는 그로테스크의 핵심을 생경해진 세계라고 주장한다. 생경하다, 일상에서 잘 쓰이지 않는 표현이라서 생소하다. 국어사전에 기재된 생경하다의 뜻은 다음과 같다. ‘글의 표현이 세련되지 못하고 어설프다’, ‘익숙하지 않아 어색하다.’ 즉 카이저가 말한 생경해진 세계익숙하지 않아서 어색한 세계. 불합리하고, 비일상적이고,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세계.


















*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열린책들, 2009)

 

* 움베르토 에코 추의 역사(열린책들, 2008)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장편소설 장미의 이름의 작중 화자인 아드소는 그로테스크에 매료된 인물이다. 그는 젊은 수련사 시절에 성서를 처음 읽고 난 후 환상을 보기 시작한다. 그래서인지 아드소는 <요한 묵시록> 119(‘지금 본 것을 기록하여라.’)을 떠올리면서 교회의 벽과 기둥에 있는 장식을 아주 상세하게 묘사한다. 아드소는 무엇을 보았을까? 지옥에 나타날 법한 기이한 형상의 괴물과 악마를 묘사한 장식인데, 여기에 탄복한 아드소는 장식된 그로테스크한 존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열거한다(장미의 이름상권, 16시과). 



 악마의 우화집에 등장하는 모든 짐승들이 추기경 회의를 위해 모인 듯, 옥좌를 향해 영광의 노래(자신들에게는 패배를 뜻하는)를 부르며 옥좌를 보호하고 있다. 판 무리, 양성 동물들, 손가락이 여섯인 축생들, 세이네레스 무리, 켄타우로스 무리, 고르곤 세 자매, 하르피아이, 인쿠부스, 용어(龍漁) 무리, 미노타우로스, 스라소니, 표범, 키마이라, 콧구멍으로 불을 뿜는 카이노팔레스, 악어, 꼬리가 여럿이고 몸에 털이 난 도마뱀 무리, 도롱뇽, 뿔 달린 살모사, 거북이, 구렁이, 등에 이빨이 나 있는 양두수(兩頭數), 하이에나, 수달, 까마귀, 톱니 뿔이 달린 물 파리, 개구리, 그리폰, 원숭이, 루크로타, 만티코라, 독수리, 파란드로스, 족제비, , 후투티, 올빼미, 바실리스크, 최면충(催眠蟲), 긴귀곰, 지네, 전갈, 도마뱀, 고래, 두더지, 올빼미도마뱀, 쌍동(雙胴) 오징어, 디프사스, 녹색 도마뱀, 방어, 문어, 곰치, 바다거북. 이 모든 동물의 무리가 한 동아리가 되어 득실거리고 있었다.



장미의 이름이 나온 지 20여 년이 지난 뒤에 에코는 그로테스크 백과사전이라 불릴만한 책을 썼다. 그 책이 바로 추의 역사. 에코는 이 책에서 아드소의 정신을 마비시킨 그로테스크 미학의 특징을 시대별로 분류했다. 그리고 과거부터 현재까지 그로테스크 미학에 부합되는 문학 작품과 예술 작품들을 모조리 소개하는 등 애서가다운 면모까지 보여준다. 도판이 많이 실려 있지 않은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를 먼저 읽은 다음에 추의 역사를 읽기를 권한다. , 고어 장르를 좋아하지 않거나 잔인하거나 징그러운 것을 한 번 보면 시각적 여운을 쉽게 지우지 못하는 독자는 추의 역사를 펼치지 마시라. 깜놀 주의!

 




















* 이미상 외 2023 14회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문학동네, 2023)




2023 14회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을 읽은 독자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고, 대상작보다 더 많이 거론한 소설이라면 아마도 현호정<연필 샌드위치>일 것이다. <연필 샌드위치> 초반부에 묘사된 연필로 샌드위치를 만드는꿈속 장면은 그로테스크하기 때문이다. 꿈속 세계는 생경하다. 왜 꿈에서 연필로 샌드위치를 만들려고 하는지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자. 여기에 의미를 찾으려고 하거나 억지로 꿈의 상징을 해석하려는 순간 그로테스크한 매력이 사라지니까.

 



댓글(3)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삭매냐 2023-06-05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코의 <추의 역사>는
오래 전에 사두기만 하고
역시 쓰담쓰담만 하네요.

<장미의 이름>은 정말
읽을수록 진국이라는.

cyrus 2023-06-06 09:22   좋아요 1 | URL
요즘 <장미의 이름>을 읽기 시작한 이후로 가톨릭 성인과 신학자들에 관심이 생겼어요. 이들 중 몇 사람은 중세 철학과 관련되어 있거든요. <추의 역사>도 언젠가는 절판될 수 있으니 소장하고 있으세요. ^^

삽하나 2023-07-09 1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름 특집 도서로 딱이네요!! >ㅅ < 잘 읽었어요 :) 어서 장바구니에 주섬주섬...
 




그것이 삶이었는가? 좋다! 한 번 더!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중에서, 김인순 옮김, 208)





최근 들어 내가 읽고 있는 책들에 신기한 공통점이 있다. 이 책들 모두 예전 독서 모임에 활동하면서 한번 읽은 것들이다.

















[대구 장르문학 전문 서점 <환상 문학>-금요 독서 모임 5월의 책] 

* 올더스 헉슬리, 안정효 옮김 멋진 신세계(소담출판사, 2015)



[우주지감-나를 관통하는 책 읽기 20181월의 책]

올더스 헉슬리, 이덕형 옮김 멋진 신세계》 (문예출판, 2018)

올더스 헉슬리, 이덕형 옮김 멋진 신세계》 (문예출판, 1998)



















[대구 장르문학 전문 서점 <환상 문학>-금요 독서 모임 5월의 책] 

* 조지 오웰, 한기찬 옮김 1984(태일소담출판사, 2021)


* 조지 오웰, 정회성 옮김 1984(민음, 2003)




20181월에 나를 관통하는 책 읽기모임에 처음 참석했다. 선정 도서는 멋진 신세계였다. 내가 읽은 것은 문예출판사 판본이었다


당시 나를 관통하는 책 읽기 모임은 오전 반저녁 반으로 나누어서 진행되었다. 나는 저녁 반(2018125)’에 참석했고, 모임 장소는 <읽다 익다>였다. 책방 안에 중년 여성 한 분이 혼자 있었고, 그분은 클래식 음악을 듣고 있었다. 그분은 어색함을 깨뜨리려고 내게 먼저 말을 걸었다. 클래식 음악에 대해 한참 대화하다가 그분이 대화 주제를 바꾸더니 페미니즘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페미니즘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고, 우리는 페미니즘과 관련된 대화를 쭉 이어 나갔다. 그러더니 그분은 자기가 참석하고 있는 대구 페미니즘 독서 모임이 있다면서 소개했다. 그 모임명은 <레드스타킹>이다.






사진 출처: <환상 문학>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p/CrKP2wDJqyh/




이번 달 <환상 문학> 금요 독서 모임 도서의 주제는 디스토피아. 멋진 신세계조지 오웰(George Orwell)1984는 가장 유명한 디스토피아 고전이다. 이 두 권을 이번 달에 읽어야 한다(!)512일은 멋진 신세계독서 모임이 있는 날이고, 526일에 1984독서 모임이 진행된다198420대 때 읽은 책이라서 올해 다시 읽는다.




















[대구 인문학 서점 <일글책>-온라인 독서 모임 5, 6월의 책]

* 움베르토 에코, 이윤기 옮김 장미의 이름: 디 에센셜 1(열린책들, 2022, 교보문고 한정판)


[우주지감-나를 관통하는 책 읽기 2018년 5월의 책]

움베르토 에코이윤기 옮김 《장미의 이름(열린책들, 2009, 2)



움베르토 에코이윤기 옮김 《장미의 이름 작가 노트》 (열린책들, 2009)




정확히 5년 만장미의 이름를 다시 읽는다. <일글책-온라인 독서 모임>하루 10분 책을 읽는 모습을 타임랩스(동영상)로 촬영해서 카톡 채팅방에 인증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크고 아름다운 벽돌 책 장미의 이름: 디 에센셜 1를 두 달에 걸쳐 완독하는 것이 <일글책-온라인 독서 모임>의 목표다.






사진 출처: <일글책>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p/CrnQGGHrfIt/




장미의 이름: 디 에센셜 1장미의 이름 작가 노트가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장미의 이름번역에 문제를 제기한 강유원이 번역한 <장미의 이름을 여는 열쇠>라는 글도 실려 있다. 이전에 나온 두 권짜리 번역본에 없는 글이다.


















[<카페 스몰토크> 니체 읽기 모임 도서]

* 프리드리히 니체, 박찬국 옮김 비극의 탄생(아카넷, 2007)


[<카페 스몰토크> 니체 읽기 모임 도서]

* 프리드리히 니체, 김인순 옮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열린책들, 2015)



2021년과 2022년은 읽고 서평을 쓰는 삶으로서 제대로 살아가지 못한 해였다. 그래도 2년 동안 <카페 스몰토크-니체 읽기 모임>을 한 것이 내 삶에서 가장 큰 수확이었다<카페 스몰토크><레드스타킹> 모임 장소이기도 하다니체 읽기 모임은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끝으로 작년 말에 마무리되었다.


비극의 탄생을 다시 읽고 싶어서 올해 1월부터 시작된 <일글책-시카고 플랜 인문 철학 고전 읽기 모임>을 신청했다. <일글책-고전 읽기 모임> 공지 게시글이 나오기 전인 연말에 나는 비극의 탄생을 다시 읽을 겸 고대 그리스 비극도 읽으려고 했다. 신기하게도 <일글책>이 내 독서 계획 실행에 일조한 셈이다. <일글책-고전 읽기 모임>이 없었으면 계획만 세우고 안 읽었을 것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니데이 2023-05-05 1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장미의 이름은 두 권으로 나온 책이었는데, 요즘엔 합본이 되어서 한 권으로 나왔을거예요.
저는 이윤기 번역본을 읽었는데, 지금은 작고하셔서, 시간 지나면 다른 번역자의 책도 나올 수 있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cyrus님, 편안한 휴일 보내세요.^^

cyrus 2023-05-07 11:39   좋아요 1 | URL
새로운 역자의 번역, 주석이 새로 추가된 <장미의 이름> 번역본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

새파랑 2023-05-06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묻고 더블로가‘ 인건가요?ㅎㅎ 독서모임하면 책도 잘 읽히고 더 재미있을거 같습니다~!!

cyrus 2023-05-07 11:40   좋아요 1 | URL
읽을 책이 너무 많아서 힘들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재미있어요. 일단 지금은 아주 좋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