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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무엇인가 - 예일대 17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 삶을 위한 인문학 시리즈 1
셸리 케이건 지음, 박세연 옮김 / 엘도라도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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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죽음을 믿지 않는다. 또는 이렇게 표현해도 좋다.

 우리 모두는 무의식 속에서 자신의 불멸을 확신하고 있다.

 

- 지그문트 프로이트 -

 

 

 

 

 Memento mori, 네가 죽을 것을 기억하라

 

 

 

장 프랑수아 밀레  『죽음과 나무꾼』 1856년

 

 

커다란 막대기 다발을 갖고 노인이 먼 거리를 여행하고 있었다. 자신이 몹시 지쳐 있음을 깨닫고, 그 막대기 다발을 내려놓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노인은 죽음의 신에게, 자기를 불행한 생활로부터 제발 해방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노인의 부탁에 죽음의 신은 바로 찾아와서, 노인에게 무엇을 바라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노인이 말했다. "제발, 제가 짐을 다시 들어 올릴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이솝 우화' 중에서)

 

사람은 종종 죽음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다. 남들 다 죽는데 나도 그때 죽으면 되는 것이지, 인연 따라왔다가 인연 따라가는 거지. 그러나 죽음에 대한 이런 태도는 죽기 전까지만 통용될 뿐이다. 죽음이 임박하면 그런 생각들은 대부분 사라지고 만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세상이다.

 

누구나 편안히 잠드는 것처럼 죽기를 원할 것이다. 하지만 저마다 외모가 다르듯 죽어가는 모습 역시 다르다. 천차만별의 죽음을 보며 '잘 살아야 잘 죽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많은 죽음을 보며 이제는 '어떻게 하면 잘 죽을까'가 아닌 '어떻게 사는 것이 잘사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고 하루의 삶을 챙기게 된다. '오늘 하루 아쉬움이나 후회는 없는가'를 살피며 살게 된다. 진정으로 오늘 하루를 잘 사는 것이야말로 아름답고 평화로운 죽음의 근원이 됨을 알았기 때문이다.

 

 

 

 '죽음'의 정의, 생각해 보셨습니까?

 

'죽음'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죽음의 존재에 대해서 두려워했지 죽음 단어 자체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다. 무엇이라고 형용할 수 없는 미지의 존재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으면서 살아 왔다. 종교와 철학 그리고 모든 문명의 시발점에 이 문제는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과학적 지식이 극대화되고 분초를 다투어 정보가 쏟아지는 오늘날에 와서도 이 문제는 분명하고도 확실한 결말을 짓지 못하고 있다.

 

1995년부터 지금까지 미국 예일대에서 '죽음'을 주제로 교양철학 강좌를 진행한 셸리 케이건 교수는 죽음의 정의를 두 가지로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 물리주의자 시선으로 바라보는 죽음(물리적 죽음)과 육체의 관점으로 보는 죽음(육체적 죽음). 물리주의자는 육체가 P 기능(Person function, 인지 기능)을 유지하면 그 사람은 살아있는 것이고, 기능이 멈추면 죽은 것이다. 육체적 죽음은 말 그대로 B 기능(Body function, 신체 기능)이 멈추면 죽은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셸리 케이건 교수는 신체와 인격(마음, 정신 등 포함) 두 가지 요소로 죽음을 간단명료하게 정의하고 있지만 세부적인 내용으로 들어가면 죽음의 시점을 정의하는 것이 그리 쉽지만 않다. 예를 들어서 교통사고로 인해 식물인간이 된 환자에게 '사망선고'를 내릴 수 있는가. 식물인간은 대뇌의 손상으로 의식과 운동 기능이 상실되었으나 호흡과 소화, 흡수 따위의 기능은 유지하고 있다. 식물인간은 P 기능이 상실되었고 B 기능만 남아 있다. P 기능이 상실되었다고 해서 죽은 것이라고 볼 수 없다. 그리고 P 기능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고 다시 기능을 재개할 수 있다면 이 또한 죽은 게 아니다. 죽음의 정의를 생각한다는 건 무척 골치 아픈 일이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죽어 있는 '상태'가 어떤건지 알려고 하는 과정이다.  

 

 

 

 죽음의 '사'가지를 피하는 방법

 

인간이 죽으면 '나'라는 존재를 형성하고 있는 P 기능과 B 기능만 멈추는 것이 아니다. 맛있는 음식을 맛 보거나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생의 시간도 멈춰버린다. 살아있다면 누릴 수 있는 삶의 좋은 것들을 박탈해버린다. 이를 통해 우리는 죽음을 나쁘게 보는 근본적인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 죽음은 박탈의 성격만 가지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죽는다는 '필연성', 얼마나 살지 모른다는 '가변성',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예측 불가능성',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는 '편재성'이다. '죽음'의 이미지에 걸맞게 '사'(死, 숫자 四)가지다.

 

그러나 케이건 교수는 죽음의 네 가지 부정적인 특성을 근거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날 수 있는 관점을 역설한다. 스피노자는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그것들로부터 감정적 거리감을 유지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죽음이란 무엇인가』p 377) 죽음은 피할 수 없다. 피할 수 없다면 덜 부정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내가 죽는다는 사실을 썩 기쁘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 있지만, 생의 한정성에 얽매어 여생을 살아간다는 건 무척 불행한 일이다. 그리고 내가 몇 살까지 살지 모른다고해서 언제 올지 모르는 죽음에 지레 겁먹을 필요 없다. 쓸데없는 '기우'일 뿐이다.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 죽음의 신의 손길은 우리 두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두렵기만 하다. 그러나 역으로 생각해보자. 만약에 사람마다 태어나면서 자신에게 부여받은 죽는 날을 알면서 살아간다면 일상의 모습은 어떻게 변할까? 죽는 날까지 주어진 시간동안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에 초점을 맞추며넛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정말 원하는 일에 완벽하게 집중할 것이라 장담할 수 없다. 루게릭병으로 시한부 선고 받은 이후부터 연구에 매진했다는 영국의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처럼 살아간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아름다운 인생을 위해 Memento mori

 

죽음은 시간을 조금 늦출 수 있을지 몰라도 피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나간 삶이 아닌 내 인생의 남은 삶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더 중요하다. 부질없이 허망한 일들로 자신의 삶을 채우지는 않을 것이다. 죽음은 생방송이다. 사람들은 텅 빈 자신의 삶 앞에 죽음의 폭풍우가 휘몰아치면 그제야 후회와 아쉬움에 절망한다. 이렇게 가슴 치는 일보다 죽음이 찾아오기 전에 자신의 삶 속에서 늘 죽음을 생각하는 삶을 살아가다 보면 의미 있는 삶으로 자신의 시간을 채워가게 될 것이다.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라 생의 아름다운 졸업이다. 인간으로서 존엄하게 죽음을 맞이하기를 원한다면 죽음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 생각하고 배워야 한다. 죽음에 대한 막연한 불안함을 덜어내고 죽음을 자연의 한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는 곧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의 미래인 죽음에 대해 성찰하기는 꺼린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죽음을 미래의 사건으로 여기고 현재 살아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사람들을 "죽음 앞에서의 부단한 도피"를 하는 자들이라고 꼬집었다. 우리는 죽음을 진정으로 잘 알고 있는가. 오늘 밤 죽음이 우리에게 찾아온다면 기쁨으로 반길 준비가 돼 있는가. 이제는 아름다운 인생을 위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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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닦고 스피노자 - 마음을 위로하는 에티카 새로 읽기
신승철 지음 / 동녘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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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힐링하니까 청춘이다?

 

비정규직으로 일하던 한 청년이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며 ‘앞으로 연애와 결혼도 포기하기로 했다’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자기도 비정규직인데 여자 친구도 백수라서 만나면 만날수록 서로 불안한 상황이 더 증폭되기만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젊은이들이 이 같은 가슴 아픈 고민을 안고 있는데 이들을 ‘삼포(三抛)세대’라고 한다. 세 가지를 포기한 세대들이란 의미인데 대체적인 의미는 연애, 결혼, 출산을 지칭한다. 제대로 된 취업을 할 수 없고 취업을 한다고 해도 대부분이 비정규직이니 버거운 생활비용 때문에 연애, 결혼, 출산도 포기 하거나 기약 없이 미루는 세대들이란 말이다. 몇 년 전 고용 불안으로 인해 ‘88만원 세대’란 말이 나오더니 이제는 청년 세대들로부터 가족 구성에 필요한 통상적 세 단계를 포기한다는 ‘삼포세대’란 말이 나오니 우울하고 또 우려된다. 불안과 스트레스, 우울증 등 정신적인 이유로 자살을 생각해본 20대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힐링(healing)이라는 단어가 우리 생활에 흔하게 등장하고 있다. 최근에 국립중앙도서관에서 2012년 한 해 가장 많이 이용된 도서 80권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지난해 국립중앙도서관에서 가장 많이 빌려본 책이 혜민 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었다. 2011년에 1위를 지킨 김난도의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2위에 머물렀다. 이와 같은 결과를 통해 2012년의 화두가 ‘힐링’과 ‘청춘’이었음을 알 수 있다.

 

 

 

 스피노자가 들려주는 힐링법

 

치유의 바람은 새로운 흐름의 전주곡이다. 힐링이 인문학 연구 전반으로 확산되었다. 작년 한국연구재단 주최 ‘2012년 인문주간’의 주제가 ‘치유의 인문학’이다. ‘치유의 인문학’, ‘인문 치료’, ‘철학상담치료’ 등 이름은 조금씩 달라도 지향하는 바는 같다. 인간성 상실과 내면의 상처로 인한 ‘마음의 병’ 혹은 ‘문화적 질병’의 치유가 목표다. 인간 연구가 본령인 인문학의 사회적 역할을 넓히는 일이다. 실용적 가치가 적다는 이유로 후순위로 밀렸던 인문 정신이 삶의 위기를 계기로 하여 삶의 가치를 회복해 줄 근원적 자원으로 활용되는 셈이다.

 

'청춘', '힐링', '인문학'. 이 세 가지 화두를 적절하게 버무린 책이 있다면 바로 <눈물닦고 스피노자>이다. 이 책은 형식이 독특하다. 미래에 대한 불안함에 괴로워하는 20대 청년, 철수가 우연히 고시원 화장실에서 네덜란드의 철학자 스피노자를 만나 매일 밤 철학 상담을 한다. 진짜 철학자가 매일 밤에 '철학 상담치료'를 해주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자신이 저술한 책 <에티카>의 일부 내용을 소개하여 현대사회가 만들어낸 다양한 마음의 병을 치유하기 위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요즘 제가 쓰고 있는 《에티카》 내용 중 <2부. 정신의 본성과 기원에 대하여>에서 정리 19를 보면 ‘인간 정신은 오직 신체가 받는 변용의 관념에 의해서만 인간 신체 자체를 인식하며 또 그것이 존재하는 것을 안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의미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p 29~30)

 

젊은 세대들은 사회가 규정한 현실에 얽매이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안정적인 근로의 직장에만 들어가면 여생을 편안하게 지낼 수 있고 돈만 있다면 잘 살 수 있다는 물질만능주의 성향이 강하다. 자신의 능력에 맞지 않게 높은 연봉을 받을 수 있는 대기업, 공기업이나 공무원과 같은 안정직 취업을 선호하고 많은 시간에 취업 준비에 투자한다. 그러나 구직자들이 선호하는 대기업과 공기업 등 괜찮은 일자리는 '낙타가 바늘구멍 뚫기'식 경쟁의 장이 된지 오래다. 젊은 세대는 승자독식이 굳어진 살벌한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통을 감수한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젊은 세대의 마음은 점점 지쳐가고 자조적으로 변하게 된다.

 

스피노자는 타인에 대한 사랑과 신체 변용을 통해서 낯선 환경 속에서 자신만의 욕망의 흐름에 맡긴다면 불안을 종식시킬 수 있다고 봤다. 변용이란 신체가 외부의 물체를 만나 딱딱하거나 부드러워지는 것을 뜻한다. 쉽게 말하자면 타인의 입장을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그동안 인정하기 못했던 자신에 대한 존재의 불안함을 떨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체 변용을 통해서 나 자신의 욕망에 맡겨 능동적인 삶을 살아가라고 스피노자는 말한다.

 

현대사회의 새로운 불치병으로 등장하고 있는 우울증에 대해서 스피노자는 단순히 마음에서 비롯된 개인적인 문제로만 보지 않는다. 거대한 사회 구조를 형성하는 억압된 인간 관계망에서 우울증의 원인을 찾는다. 외부와의 관계에 예속되면 자신의 욕망을 제대로 발현할 수 없다. 자신이 원하는 욕망을 표출하지지 못한다면 슬픔의 감정을 갖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우울증인 것이다. 욕망은 곧 자신이 사랑하는 감정을 표상하여 실행으로 발현되어야 한다. 그러기 우리 스스로 나를 둘러싸고 있는 관계망을 재배치해야 한다. 자신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관계망으로.

 

“관계 자체가 예속과 복종의 관계처럼 아예 사랑과 욕망의 힘을 좌절시키는 방향에서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그것이 언제까지고 슬픔의 관계에만 머물러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관계를 기쁨의 관계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아직까지 기억에 없고 전혀 해본 적이 없는 색다른 사랑의 실천에 나설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이란 미지의 것을 향한 욕망의 흐름과 같은 것입니다. 둘 사이에서 무엇인가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고, 새로운 상상이 떠오르고, 색다른 무엇에 도전하고 싶은 생각이 들도록 기쁨의 관계를 만들어보세요. 창발적인 관계망은 가능합니다. 그것은 두 사람의 욕망이 증대되고 촉발되는 관계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p 61~62)

 

작년에 청춘들이 ‘힐링’에 열광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안과 좌절의 그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힐링하는 방법을 명사나 책을 통해서만 찾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힐링을 남들이 하는 걸 따라 맞출 필요 없다. 우리 삶에 작은 변화를 주는 힐링을 스스로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새로운 분야, 새로운 사람을 만나 기쁨의 관계를 구축하는 삶의 과정도 힐링이 될 수 있다.

 

 

 

 긍정의 힘을 보여줘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명제를 예로 들면서 완벽한 인간의 이성적 사유와 주체성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명제는 최종 확인을 위해서는 수많은 '나'가 있어야 하고 그 수많은 '나' 중에 또 주체가 필요하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나'라는 주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를 작동시켜주는 관계가 중요하다고 한다. 정신적 상실을 망각으로 바꾸는 힐링만으로는 마음의 불치병을 완전히 치유하기가 어렵다. 상실을 자기 안에 수락하고 그 과정에서 어떤 자기를 변용해내는 방식을 택하며 자기 세계를 재배치해야 한다. 자기를 삶의 주인으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을 변화시키는 힘이 필요하다.

 

스피노자의 힐링 철학을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감정적 고통의 원인을 아는 것이며, 하나는 다른 감정으로 대치하는 것이다. 감정적 고통을 극복하는 것은 오로지 이보다 더 강력한 긍정적인 감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부정적인 감정은 끈질기게 커지며, 괴로움에 괴로움을 더할 뿐이다. 우리 스스로 긍정적인 경험을 간직하고 자신의 정서를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이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동안, 사실은 그것을 하기 싫다고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실행되지 않는 것이다.” 불행한 삶을 살다간 바루흐(Baruch, '축복받은 자'라는 뜻의 히브리어) 스피노자의 말을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긍정의 힘을 외면한 채 막연하게 먼 곳에서만 힐링을 찾으려고 하는 현대인들을 경고하는 듯하다. 나를 위한 셀프 힐링은 아깝지 않다. 감정적 고통을 벗어날 수 있는 축복은 우리 가까이에 있다. 그것이 바로 긍정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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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사랑학 수업 - 어떻게 시작할 것인가, 어떻게 떠나보낼 것인가
마리 루티 지음, 권상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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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N양. 잘 지내고 있나요?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조금은 힘들지만요. 어떻게 글을 써 내려가야 할지 모르겠네요. 물론 이렇게 인사해도 당신인 줄 모르겠지만 이렇게 용기를 내어 당신에게 써봅니다. 닿을 수는 없겠지만. 당신을 처음 봤던 날을 아직도 기억해요. 왜 우린 그렇게 만났을까. 아니, 왜 제가 N양을 좀 더 일찍 만나지 못했는지요. 처음 봤던 날 그날 화장기 없는 얼굴에 해맑은 미소를 보인 채 인사를 건넸던 기억이 나요. N양은 꾸미지 않아도 제 눈에는 빛나고 있었어요. “친구가 있으면 더 예쁘게 꾸미고 나올걸.” 이라는 당신의 말에 저는 무척 설레었어요. 꾸미면 얼마나 더 예뻐질지 상상했거든요. 그래서 그 만남 이후부터 당신과 가까워지려 노력하기 시작했어요. 연락처를 알아내고, 당신의 눈에 최대한 띌 수 있도록 말 걸어보고 했어요. 하지만 그때마다 저와 N양 사이엔 제 친구도 함께였어요. N양은 늘 어색하다는 핑계로 제 친구와 함께 등장했죠. 저는 솔직히 걱정되기 시작했어요. 설마 N양이 내 친구에게 관심이 있는 건 아닐까.

 

저는 다짐했어요. 이대로는 안 되겠다. N양에게 고백해야겠다. 제 마음, 제 사랑의 감정을 표현하려고요. 그런데 참 쉽지가 않군요. 하필 당신은 인턴 일을 하게 되어 당분간 서울로 지낸다고 하고 떠나버렸네요. 이번 겨울방학이 끝나면 다시 대구로 돌아오겠지만, 거리를 지나는 커플들을 보면 문득 N양의 얼굴이 생각나요. 그리워요.

 

N양이 너무 그리워서 마음이 울적할 때, 마침 <하버드 사랑학 수업>이랑

 

아! N양, 제가 읽고 있는 책이 시중에 나오고 있는 연애지침서로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제일 감명 깊게 읽었다는 ‘하버드 사랑학 수업’은 책 제목대로 실제로 하버드 대학에 '사랑학'이라는 수업이 있어요. 그리고 이 수업이 실제로 학생들 사이에서 큰 반응을 얻었다는군요. 그리고 기존의 연애지침서처럼 '연애를 위해 이성을 꾀는 방법' 같은 내용이 없어요. 이 책의 저자가 하버드 대학의 사랑학 수업을 맡은 교수인데요, 연애지침서를 통렬히 비난하고 있어요. 오히려 연애지침서식 사랑은 남녀 간의 애정을 방해하는 나쁜 책이라네요. 우리나라에도 이런 수업이 있으면 참 좋으련만. 만약에 이 수업을 들을 기회가 있다면 꼭 N양과 같이 듣고 싶어요. 아니면 이 책을 읽어 보기를 권합니다. 이 책을 읽어보고 N양도 사랑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봤으면 좋겠어요.

 

 

 

 

제가 N양을 위해서 책에서 본 내용을 간추려서 소개하려고 해요. 편지글이 길어도 이해해주세요. 먼저 여기 그림을 봐 주세요. N양에게 이 그림은 생소할거에요. 그래도 그림 속 남녀가 누구인지 짐작했으리라고 생각해요. 프랑스의 여류 화가 수잔 발라동이 그린 아담과 이브에요. 발라동은 르누아르, 로트레크, 드가 같은 유명한 화가들의 모델로 활동하면서도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어요. 그녀의 인생은 파란만장해요. 발라동의 아들도 위트릴로라는 유명한 화가인데요, 그녀는 20년 연하 아들의 친구와 사랑에 빠지게 돼요. 첫눈에 아들의 친구를 사랑하게 된 발라동은 제가 소개한 '아담과 이브' 그림을 완성하고 결혼했어요. 화가의 소개는 여기까지 하고 이제 그림에 대해서 설명할게요.

 

그림을 자세히 보세요. 이브가 웃는 얼굴로 금지된 열매를 따려는 순간, 아담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은 것이 이브를 말리려는 것인지, 사과 따는 것을 도와주려는 것인지 모호하게 그려져 있죠? 지금까지도 아담의 동작에 대해서 해석이 분분해요. 누군가는 자신을 끌어당기는 이브의 유혹에 굴복당하면서도 창조주에게 항변할 핑곗거리를 만들기 위해 아담이 고심에 빠졌다고 말해요. 이주향 교수는 <그림 너머 그대에게>라는 책에 아담과 이브를 '두려움 없는 여자, 두려움으로 비겁해진 남자'라고 표현했더군요. 네, 이주향 교수의 표현이 맞아요. 남자가 이 그림을 봤으면 절로 고개를 끄덕였을 거에요.

 

일반적으로 남자는 자신보다 능력이 있는 여자를 선호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있어요. 즉, 남자의 성격은 자신이 상대를 주도할 수 있는 권력 지향적이기 때문에 연약하고 보호본능을 불러일으키는 여자를 좋아한대요.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제 주변 친구 녀석들도 그렇고, 연애지침서에서도 남자의 성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어요. 남자는 여자를 일종의 먹잇감 또는 정복하고 싶은 대상으로 본다는 거죠. 그래서 여자는 남자의 성격을 맞춰 아무 힘도 없는 척 내숭 부리는 '여우'가 되라고 연애지침서를 그렇게 가르치고 있어요.

 

하지만 N양, 저는 N양이 좋아하는 남자가 있으면 '여우'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N양 본인의 모습을 그대로 당당하게 보여주세요. 제가 N양을 더 좋아하게 된 이유는 페이스북 타임라인에 글을 쓸 때였어요. 저는 페이스북에 남긴 N양의 짧은 글을 읽으면서 당신이 나이에 비해 정신적으로 성숙하고, 생각이 깊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남들이 그 모습에 너무 부담스럽게 느껴질지 몰라더 저는 N양의 지적인 면이 참 마음에 들었어요. 못 믿겠다고요?

 

<하버드 사랑학 수업>에 아주 흥미로운 사례가 소개되어 있는데요, 이 책의 저자인 마리 루티 교수가 제일 친한 이성 친구에게 간단한 설문조사를 했어요. (이 책의 저자는 여자입니다) 여자친구나 아내가 전구 가는 모습을 본다면 매력이 떨어질 것 같으냐고 질문을 했대요. 그러자 그들에게서 온 답변이 어떤지 아십니까? 오히려 전구를 스스로 갈 줄 아는 여자의 모습이 매력 있대요. 비록 저자의 설문조사 결과가 실증적이지 않은데다 모든 남자가 다 그런 건 아니에요. 하지만 저는 예쁜 외모의 여자와 N양 중에서 사귀고 싶은 사람을 고른다면 후자를 택할 겁니다. 저는 N양이 독서를 좋아하고 글 쓰는 모습이 정말 좋아요. 본인 그대로 모습을 나에게만 보여주세요. 제 말을 못 미더우실까봐 제가 책 속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인용해서 소개합니다.

 

누군가가 정해준 틀에 사랑을 끼워맞추려고 하지 마세요. 사랑은 색깔 맞추기 큐브가 아닙니다. 사랑의 수수께끼는 색색의 조각을 제자리에 끼워맞춰서 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봐야 손가락에 물집만 잡힐 뿐이죠. (p 248~249)

 

자신의 강인함에 대해 미안해하지 마십시오. 이 말은 주문처럼 외우고 다녀도 좋습니다. 내가 강인하고 독립적인 여자란 사실 때문에 괜히 미안해하지 마세요. 괜찮은 남자라면 억지로 꾸며낸 여성스러움이나 의존적 태도보다는 이런 자질을 더 원할 수 있습니다. 여성을 비하하는 것으로 자신의 남성성을 확인받는 남자만큼 한심한 인간도 없습니다. 누가 이런 남자를 필요로 하겠어요? (p 249~250)

 

그러니까 그저 여성을 소유하려는 '늑대'를 조심하세요. 그런 남자 잘못 만나서 N양의 마음에 큰 상처 남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심리학 용어에 '피그말리온 효과'라는 것이 있어요. 누군가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이나 기대가 그 대상에게 그대로 실현되는 경향이에요. 즉, 상대방이 나를 존중하고 나에게 무언가 기대하는 것이 있으면 나는 그 기대에 부응하는 행동을 하여 긍정적인 결과가 나오는 거죠. 다음에 소개하는 그림은 장 레옹 제롬이 그린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입니다.

 

고대 키프로스 출신의 조각가 피그말리온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자신의 사랑이 이뤄지도록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조각가가 자신의 손으로 만든 조각상을 좋아하게 된 거에요. 그렇게 소원을 빌고 집으로 돌아온 피그말리온은 대답 없는 사랑을 고통스러워하며 자신이 만든 여인의 조각상을 사랑하는 연인처럼 꼭 끌어안았어요. 그때 차디찬 조각상이 따뜻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잠시 후에는 심장 고동까지 그의 가슴에 느껴졌어요. 아프로디테가 그의 사랑에 감동하여 생명을 불어넣어 조각상을 피그말리온의 연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저 그림처럼요.

 

N양은 본인의 글쓰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네요. 페이스북에서 글 남기는 것이 평범한 일이라고 생각하나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저는 N양의 그런 모습을 볼수록 당신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어요. N양이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매력을 유지하고 N양만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본연 그대로 모습을 사랑할 줄 아는 남자를 만나세요. 아니, 용기있게 말하자면 N양의 그런 모습을 사랑해줄 수 있는 남자는 바로 접니다. 저는 책에서 이 구절을 보면서 N양에 대한 특별한 감정에 대해 더욱 더 확신을 가졌어요.

 

이상화하는 '좋은' 방법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연인의 매력을 찾아 그 점을 부각시키는 것입니다. 남자의 팔 근육에만 집착하지만 말고 그가 가진 사랑스럽고 매력적인 장점에 진정으로 감탄하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겉으로 드러나는 그의 개성, 가령 성(性)이나 친절, 유머 등을 강조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 모르게 꽁꽁 숨겨온 그의 어떤 면을 강조할 수도 있습니다. 너무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억압되거나 간과되거나 개발되지 못한 장점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이죠. (p 158~159)

 

저는 N양이 지금보다 더 예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외모가 여성 연예인처럼 되기 바란다는 건 지나친 이상화입니다. 자신이 정한 이상형을 기준으로 이성을 찾는다면 실망감만 안겨주는 무척 피곤한 일입니다. 오히려 진정 사랑하는 사람을 못 찾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내 자신에 대해서 무척 부정적으로 생각했습니다. N양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외모가 그렇게 잘 생긴 편도 아니고, 건장한 체구도 아닙니다. 마른 체형입니다. 살면서 소개팅 한 번도 못했고 또래에 비해 집안은 그렇게 잘 사는 편도 아닙니다. '나'의 모습에 대해서 크게 위축감을 느꼈습니다. 그래요. 요즘 유행하는 말로 저를 간단하게 표현하면 '모태 솔로'라고 할 수 있죠.

 

마리 루티 교수는 내면을 지배하는 부정적인 생각을 '내 어깨 위의 원숭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저 어깨 위에는 오랫동안 그 녀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어깨 위의 원숭이를 내쫓으려고 합니다. 어깨 위의 나쁜 원숭이의 속삭임에만 빠진다면 저는 평생 나의 매력을 발견하지 못한 채 더 소극적인 성격으로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N양이 어떤 남성을 선호하는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내 본연의 모습 그래도 N양에게 숨김없이 보여주고 싶고, N양 그대로의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그것도 평생동안.

 

오늘 처음으로 이성에게 편지를 처음 써보네요. 어버이날이나 제가 군대 훈련병 시절에 어머니에게 편지 쓴 걸 제외하면요. 막 쓰다 보니 편지가 길어졌네요. 지루하더라도 제발 이 편지를 쓰레기통에 버리지 말고 끝까지 읽어주면 좋겠습니다. N양이 선호하는 남자가 제가 아니더라도 여기 편지에 소개한 책을 꼭 기억해주세요. 내가 싫다면 N양의 머릿속에 있는 나라는 존재 그리고 짧았지만, 우리 단 둘이 함께 했던 사소한 일상의 기억들, 잊어도 좋아요. 이 편지와 함께 제가 읽은 <하버드 사랑학 수업>을 전합니다. N양에게 전하고 싶은 저의 모든 감정, 이 편지로 표현하기에는 많이 부족할 겁니다. 하지만 저는 있는 그대로 모든 감정을 다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저에 대한 감정을 받아주신다면 답변 꼭 부탁드립니다. 저처럼 편지를 안 써도 좋으니 전화 한 통이라도 해주세요. 이제 긴 편지를 마무리하겠습니다. N양이 선택한 사람이 제가 아니더라도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고 본인이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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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3-01-12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사랑은 색깔맞추기 큐브가 아닙니다. ->큐브도 짱 어려운데.

근데 N양은 누구예요??? (진심)

cyrus 2013-01-13 22:35   좋아요 0 | URL
아이리시스님! 질문 비밀로 설정해주시지..ㅎㅎㅎ ^^;; 작년에 대외활동하다가 만난 여자애가 있는데.. 참.. 고백 한 번하는게 쉽지 않네요.. ^^;; 이 책에서 저자가 이렇게 말해요. 사랑은 완벽할 수가 없다. 그 점을 인정하고 사랑을 하라고요. ^^

아이리시스 2013-01-17 20:34   좋아요 0 | URL
응, 미안. 저는요, 가상 사랑이야기라고 생각하고 그랬어요^^; 이제 저는 뭘해야 하나요, 으샤으샤! 아니면 사랑고백 10단계 이런 거 플랜이 필요해요?

축하해요, 사랑은 역시 좋은 거야....( '')
ㅎㅎㅎ

2013-01-13 09: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13 2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은평.강지은 옮김 / 동녘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고독을 모르는 천치들의 세대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 ‘아인슈타인의 예언’이라는 제목의 한 장의 사진이 누리꾼들에게 주목을 받았다. 사진 속에는 아인슈타인이 예언한 문구가 소개되어 있다. "I fear the day that technology will surpass our human interaction. The world will have a generation of idiots."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과학기술이 인간 사이의 소통을 뛰어넘을 그날이 두렵다. 세상은 천치들의 세대가 될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정말 이 말을 했는지 정확한 출처를 알 수 없다. 다만 아인슈타인이 살았던 시대보다 더 과학기술이 발달한 시대 속에서 24시간 스마트폰을 손에 쥔 채 살고 있는 인류는 천치들의 세대인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매킨토시 컴퓨터를 세상에 선보였던 1984년으로 되돌아가 보자.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공놀이하거나, 흙장난, 인형놀이를 하는 등 다 같이 어울리며 뛰어놀고 있다. 18년 뒤, 애플과 삼성이 스마트폰 기술을 둘러싸고 특허전쟁을 벌였던 작년 2012년 아이들의 모습을 보라. 벤치에 모여 앉아 스마트폰 및 IT 기기들을 만지며 각자 놀고 있다. 놀이터에는 아이들의 발길이 끊긴 지 오래다.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고 또래 친구들과 카카오톡으로 대화를 주고받는다. 아이들에게는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자체가 놀이이며 일상이다. 트위터에 짧은 문구를 남기고, 페이스북에 자신의 일상을 담은 사진을 올린다. 웬만한 남녀노소는 스마트폰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어린이들이 스마트폰을 잘못 다루면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다. 2011년 행정안전부가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스마트폰 중독율이 성인 7.9%, 어린이(만 9세 이하) 11.3%로 나타났다. 어린이의 경우 대개 자제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초기 관리를 놓치면 쉽게 중독으로 악화될 수 있다. 과도하게 인터넷에 노출되면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는 전문가들의 보고가 있다. 자극적인 화면에 익숙해지면서 학습능력 저하는 물론 폭력 충동 등도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말대로 스마트폰에 중독된 아이들이 정말 정신 작용이 완전하지 못한 천치의 세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유동하는 근대 세계' 속에 살아가는 인류가 스마트폰, 트위터, 페이스북에 열중할수록 고독의 시간을 잃어버린다고 말한다. 스마트폰이 갑자기 사라졌다고 상상하라. 24시간 내 곁에 있었던 가족이나 정든 친구 한 명의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듯한 느낌이 들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외로움이 느껴지면 스마트폰을 먼저 찾게 된다.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 기다릴 때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고, 집으로 가기 위해 혼자 버스 탈 때도 눈은 스마트폰으로 향한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혼자 있는 시간도 외롭지 않고 지루하지 않다. 그러나 혼자만의 시간을 스마트폰으로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확인하는 데 소비할수록 우리는 인간관계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고독을 모르는 천치가 되어가고 있다.

 

 

 

 자유를 얻었으나 고독을 느끼는 현대인들

 

 

 

살바도르 달리  『기억의 지속』 1931년 

 

 

지금 이 시대는 액체처럼 흐른다. 달리의 그림 『기억의 지속』에 흐물흐물 거리는 시계처럼 말이다. 바우만은 현대사회의 역동성을 '액체 근대'(Liquid Modernity)라는 말로 개념화했다. 그는 '변덕스러움', '불안정성', '불확정성'은 우리 시대 삶의 조건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사회적 형태들이 더 이상은 제 모습을 오래 유지할 수 없는 여건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근대적 사회는 제도, 규범이 작동되는 견고한 구조로 구성되었다. 근대 들어 인간은 국가와 사회가 옭아맸던 속박의 틀을 깨고 해방됐다. 그러나 자유를 얻음과 동시에 질서와 규범이 사라진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불안과 불확실성에 사로잡혔다. 사람들은 자신의 결정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알지 못하므로 선택과 결정을 할 때마다 고통을 겪게 된다. 이런 세상에서 인간은 쓰레기로 전락한다. 유연성이 곧 합리성으로 받아들여지는 세상에서 실패나 패배의 책임을 모두 떠안게 된 개인은 '영원히 폐기될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정보기술의 발전과 함께 등장한 스마트폰, 트위터, 페이스북은 '유동하는 공포'를 잊을 수 있는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다. 동료가 없는 빈자리에서 느껴지는 공허감을 스마트폰 안에 설치된 카카오톡으로 말 걸 수 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동료를 친구로 만들기 위해서는 '친구 추가' 버튼 하나 누르면 충분하다. 하루에 많으면 두세 명, 한 달 뒤에는 수십 명 넘는 '페북 친구'가 생기게 된다. 페이스북에서 만난 친구의 수가 백 명을 넘기도 한다. 트위터를 통해 수많은 사람과 언제든지 소통할 수 있다. 새해 인사를 수많은 친구들에게 직접 만나거나 전화 통화로 할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 카카오톡과 트위터로 단시간만에 백 명이 넘는 친구에게 새해 인사를 전할 수 있다.  2013년 새해 첫날인 1월 1일 0시로 넘어가는 순간 아시아권 이용자들(한국, 일본)의 초당 신년 축하 트윗 건수가 미국과 영국을 앞지른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트위터는 인간관계에서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정도로 일상화되었다. 이 정도쯤이면 우리는 고독을 느낄 필요가 없는 축복 받은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다.

 

 

 

 

 

 

"과연 지구상에 그런 천국이 존재할까?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마침내 그 꿈이 실현되고 있는 것일까? 모두가 인정하듯이 대화와 같이 인간들 간의 상호작용에서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양면적인 가치, 다시 말해 편안하면서도 아주 즐거운 특성과 그럼에도 동전의 양면처럼 아주 성가시기도 하고 온갖 위험으로 가득한 이중적인 특성이 마침내 해결된 것일까?" (p 30)

 

그러나 바우만은 오늘날 인류의 삶이 윤택해진 현대사회에 의문을 제기한다. 고독을 피하고 잊기 위해 온라인 세계로 향하는 '엑소더스' 행렬은 개인의 정신을 성숙하게 하는 사색과 인간관계 내에서의 소통을 형성하게 만드는 조건이 내포된 진짜 '고독'을 잊어버리게 된다.  

 

 

외로움으로부터 멀리 도망쳐나가는 바로 그 길 위에서 당신은 고독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다. 놓친 그 고독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집중하게 해서' 신중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며 창조할 수 있게 하고 더 나아가 최종적으로는 인간끼리의 의사소통에 의미와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숭고한 조건이기도 하다.  (p 31)

 

 

 

자신이 외롭지 않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페이스북에 지인과 함께 외식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을 올리거나 틈만 나면 '카톡질'을 하는 엄지족의 모습은 늘 고독과 불안감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현대인들의 눈물겨운 투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는 오프라인 인맥 형성에는 인색하다. 오프라인에서 처음 만나는 타인과 소통을 시작하는 행위는 항상 호기심 섞인 불안감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저 사람과 친하기 위해서 어떤 말을 해야 할까?' 대화의 물꼬를 트기 전에는 어떤 말로 시작해야 할지 주저하고 고민한다. 온라인 인맥 형성은 오프라인에 비해 간편하고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쓸데없이 머뭇거릴 필요가 없다. 인관관계를 재정리할 때도 온라인이 편하다. 싫어하는 동료가 있으면 카카오톡이나 페이스북 친구 목록에 삭제해도 된다. 애정이 식어버린 연인에게 이별을 통보할 때 문자 하나면 만사 오케이다.

 

 

 

 고독하지만 자유롭게

 

 

 

 

 

오귀스트 로댕  『생각하는 사람』 1888년

 

 

바우만이 유동하는 근대 세계 속에 사는 현대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실존의 고독을 낭만적으로 미화하기 위해 쓴 것이 아니다. 불확실한 근대를 버리고 질서가 살아 있는 과거로 회귀하자고 주장하거나 어떤 획기적인 대안을 내놓는 것도 아니다. 고독의 기회를 잃어버린다고 해서 미래의 즐거움을 위해 과거의 유희적 움직임을 기억하자는 것도 아니다. 이미 지나가버리고 사라진 과거에만 집착한다는 건 고독을 더 키우는 부질 없는 고집일 뿐이다.

 

이제 사회는 '구조'보다 하나의 '네트워크'가 되어 간다. 유동하는 사회 앞에 인간은 어찌 해야 하는가. 국경과 공간을 초월하는 광범위한 인맥 네트워크가 형성되더라도 진정한 소통 능력과 공동체 의식을 자리 잡지 못한다. 이방인에게 직접 말을 걸지 못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현실적으로 가까이서 만날 수 있는 오프라인 세계에 관심을 잃고 '친구'라는 글자의 빈껍데기를 씌운 가상의 온라인 세계에 관심을 기울인다.

 

고독은 사회와 집단에서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부정의 개념으로 널리 통한다. 그러나 고독은 단순히 인간관계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며 뿌리 깊은 욕구이다. 즉, 새로운 인간을 만나 소통하고 싶은 관계 형성의 욕구이다. 고독은 개개인의 행복과 창조 활동뿐만 아니라 사회의 발전과 안정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며 궁극적으로 사람은 혼자만의 고독한 시간을 통해 삶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 고독 속에서 자유롭게 사람을 만나는 관계를 추구하는 과정은 진정한 유대감을 획득하는 확실한 인생의 경로다. 진정한 인간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친구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바우만의 표현처럼 '생각을 집중하게' 할 수 있는 고독을 누릴 필요가 있다. 유동하는 세상에 잊고 있었던 고독을 다시 한 번 불러보자.  "응답하라, 고독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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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인문학 - 우리 시대 청춘을 위한 진실한 대답
정지우 지음 / 이경 / 2012년 4월
평점 :
품절


 

 

 어린 여가수의 눈물

 

 

 

 

 

요즘 주말에 수많은 방송 프로그램 중에 '이야기 쇼 두드림'을 꼬박 챙겨 보고 있다. 대중들이 추앙하고 있는 멘토들이 출연하여 젊은 시청자에게 인생의 참된 화법을 전하는 '교양 반 버라이어티 반' 프로그램이다. 어제 '이야기 쇼 두드림'에서는 영화배우 배두나와 가수 포미닛의 현아, 소현이 게스트로 출연했다. 방송에 출연하는 게스트들은 자신이 그동안 살면서 경험하고 느꼈던 지난 날 삶의 이력들 그리고 수많은 인생의 고민들을 허심탄회하게 소개하기도 하는데 그 중에 가수 현아의 눈물 어린 고백이 아직까지도 머릿속에 잊혀지지 않는다.

 

현아는 젋은 팬들로부터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인기 아아돌 그룹에 소속된 가수이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내가 알기로는 20세도 채 되지 않은 걸로 알고 있다) 어른 못지 않게 성숙미가 우러나오는 춤 실력으로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얻었지만 본인에게는 대중들이 자신에게 향하는 인기와 끝없는 관심이 심적으로 부담스럽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 잘 살고 있는지 모르겠으며 앞으로의 미래가 걱정된다고 말했다. 15살 때부터 가수로 데뷔하여 지금까지 활동하면서 또래 친구들이 누리지 못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던 어린 소녀는 또래 친구에 비해 너무 이를 정도로 '어른의 사회'에 발을 내딛었고 치열하게 달리기만 했던 자신의 삶이 마주하게 될 불투명한 미래가 두려웠던 것이다.

 

 

 

 방황하는 대한민국 청춘들의 현주소

 

우석훈 박사의 『88만원 세대』이후 지금까지 우리나라 사회는 '청춘 담론'이 끊임없이 화두되고

청춘, 즉 불안정한 미래에 시달려아하는 사회적으로 불행한 '88만원 세대'들이 좀 더 나은 삶을 모색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대안들이 제시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 '이야기 쇼 두드림'과 같이 젊은 세대들의 아픔과 고민를 들어주고 이를 치유해주고 그에 대한 삶의 해답을 제공해주는 대중적인 '멘토'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그리고 청춘들의 불안과 아픔을 어루만져 주는 대중서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김난도 교수의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오랫동안 베스트셀러에 랭크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청춘들은 여전히 '방황 중'이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은 인생 선배를 붙잡고 이런 질문들을 쏟아낸다.
안철수, 김제동, 이외수, 박경철 등 우리 사회에는 젊은 세대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어만져 줄 수 있는'멘토'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으며 지금까지도 여러 가지 다양한 삶의 해답을 제공해주고 있다. 대중적 멘토들이 젊은 세대들이 겪고 있는 내적 고민을 감성적으로 공감해주고 두둔해주는 것까지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확실하게 올바른 삶으로 이끌어 나 갈 수 있는 실질적인 구제법을 제시하지 못했다. 현재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모든 젋은 세대들이 멘토들이 제시한 삶의 해답을 적용하기에는 현실과 동떨어진 점이 있다. 기성세대들이 젊은 세대들을 위해 도움을 주고자하는 삶의 해답들이 올바른 삶을 살아가기 위한 지표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젊은 세대들의 진로 설정에 커다란 혼란을 주게 된다. 삶의 여유마저 없는 젊은 세대들에게 혹자의 멘토는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지금의 삶을 즐겨라'고 말하는 반면에 또 다른 멘토는 '아무리 힘들어도 행복한 미래를 위해서 현실을 인내할 줄 알아야 한다'라고 말한다면 과연 젋은 세대들은 어느 멘토의 말을 따라야 하는가.

 

 

 

 

 

잉여는 단순히 아무것도 할 일 없는 팔자 좋은 백수를 뜻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속에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딜레마와 불안이 있다. 분명 남부럽지 않은 청춘을 보내고 싶은 열정이 한편으로 있지만, 무엇을 하든 간에 취직이나 현실적인 성공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모두 '쓸모없는 짓' 취급을 받는다.  (pp 19)

 

 

현실 속에 방황하는 청춘들(여기서부터는 우리나라 '젋은 88만원 세대'를 총칭하는 말로 사용하겠다)은 이러지도 못 하고, 저러지도 못 하는 진퇴양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청춘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싶어한다. 음악을 한다거나 세계 곳곳에 여행을 하는 등 다양한 문화로부터 누릴 수 있는 삶의 즐거움을 맛 보고 싶어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기성세대들은 자식들이 빨리 취직을 해서 성공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어느새 우리 사회는 성공하는 삶의 기준으로 대학교, 그것도 명문대라고 불리우는 4년제 대학을 졸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대학은 학생들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학문의 장소라기보다는 취업을 준비하기 위한 취업 양성 기관으로 되어버렸다. 대학에서 동아리 생활을 하기보다는 도서관에 눌러 앉아 토익 및 각종 자격증, 수험서를 보는 청춘들이 많아졌다. 어쩔 수 없다. 열심히 공부하는 길만이 성공하는 삶을 보장할 수 있기 때문에... 

 

'음악은 무슨... 공부나 해!' , '해외 여행은 네가 성공해서 돈 많이 벌고 난 뒤에 해도 늦지 않어'  

 

비단 어른들의 끊임없는 눈치만 그런 게 아니다. 너무 좋아하는 일에 매진하다가는 정작 취업이라는 성공적인 미래의 목표에 뒤늦게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청춘들 역시 스스로 알고 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무엇을 해야할 지 모르거나 머릿속에 하고 싶은 게 떠올려도 현실적 제약상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방황의 시간 속에서 청춘들은 아무 것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어디에 나가서도 쓸모 없는 '잉여 청춘'으로 전락하고 만다.

 

기성세대들의 냉담한 반응은 청춘들의 말 못하는 고민과 고독을 심화시켜주었다. 이러한 고민과 고독에서 비롯된 심적 고통, 즉 청춘이라면 겪게 되는 삼중고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스마트폰과 SNS였다. 정보기술의 발달로 인해 네트워크적 관계망이 형성되어 이제는 가상 공간에서도 인맥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가상 공간에서 맺어지고 만나는 인간 관계를 통해 청춘들은 서로 간의 아품을 공유하고 치유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또한 일시적으로 고통을 잊게 해줄 뿐이다. 청춘들은 그 곳에서도 공허한 고독감을 채워보려고 해보지만 힘든 현실을 잠시나마 벗어나기 위한 회피의 행위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청춘들이 고독함을 벗어나기 위해서 가상 세계에서의 탐닉으로만 빠지는 것은 아니다. 상대 이성을 만나 '연애'를 경험함으로써 사랑의 감정으로 외로움을 채울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대한민국의 '연애'는 단순히 사랑하는 감정으로 엮어지는 참된 인적 관계가 아닌 그저 고독과 권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쾌락을 추구하는 피상적인 관계가 되어버렸다. 특히 연애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는 '모태솔로'는 더욱 사회적으로 고립감을 갖게 되는 열등한 존재로 취급받는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연애, 결혼, 출산을 스스로 포기한다는 '삼포 세대'들에게 우리 사회는 짝을 찾아 연해하도록 권하고 있다. 청춘들에게 현실 속에서의 연애 또한 결국 실현 불가능한 '환상'인 것이다.

 

 

 

 현대 사회 속에서 원자화된 청춘 그리고 자아적 분열감

 

앞에서 간략하게 언급된 방황하는 청춘들의 현주소는 현실감을 상실한 채 자신 스스로 '원자화'(Atomization)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쉽게 말하자면, 현대 사회의 청춘은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상호 소통할 수 있는 '사회적 존재'를 거부하는 대신에 그저 자신만의 꿈과 열정을 실현하기 위해서 자신만의 고유한 삶을 살아가려고 한다. 이러한 삶을 통해서 자기만족을 얻고자 한다. 남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 얼핏 들어보면 '개성적인 삶'을 추구할 줄 아는 청춘의 모습으로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원자화된 청춘'들이 믿고 있는 자기만의 고유한 삶의 방식, 열정, 욕망 그리고 자기만족에는 '타자'(The other)가 개입해서 만들어진 허구적인 인식에 불과하다. 여기서 문제는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삶에 '타자' 그리고 '타자'가 만들어 낸 주입된 욕망을 좇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이러한 구조의식이 남들과 다른 자신만의 삶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정말 소수만이 타자와 구별되는 개성이 뚜렷한 삶을 살아갈 뿐 청춘들 그 누구도 자신만의 삶을 선택하는 이가 많지 않다. 청춘들이 과감하게 '개성적인 삶'을 선택한다면 공무원 시험 경쟁률이 낮아지게 되며 길거리에 짧은 치마나 바지를 입은 여자들이 많지 않을 것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함 속에 살아가는 청춘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그리고 고유한 개인의 삶을 추구한다고 해도 결국에는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하고 있는 '획일화'된 삶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자의식의 착각은 자신을 사회 구성원으로부터 분리되는 '개별자'가 되어 스스로 소외감을 갖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타자'아 구별되는 삶을 추구하면서도 '타자'로부터의 시선과 의식을 받기를 내심 갈망하게 되는, 혼란스럽고도 분열된 자아를 형성하게 된다.

 

 

 

 '삶에 염두하는 인생'이 아닌 '삶을 우위하는 인생'을 살자

 

책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지우의 『청춘인문학』은 현대사회 속에 방황하는 청춘들을 위해 인문학적 사유를 통해서 문제점을 분석하고 이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인문학'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는 제목과는 다르게 생각보다 철학자들의 사상을 곁들여 인용해서 설명하지 않는다. 삶의 해답을 찾고자 하는 나 같은 청춘의 독자들에게는 '인문학'이라고 해서 읽기 전부터 지레 겁 먹을 필요는 없다. 다만, 청춘을 위한 인문서적보다는 청춘을 위한 자기계발서에 익숙한 젋은 독자들에게는 저자의 인문학적 통찰에서 비롯된 사유적 과정이 만들어 낸 문장들이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책만 가지고 더 나은 삶을 위한 올바른 정답을 찾을 수 있다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저자가 인도하는 사유적 과정을 꼼꼼하게 살펴보고 그러한 과정 끝에 도달하게 된 해답의 귀착점이 자신의 삶과 적합한 지 따져볼 줄 알아야 한다.

 

여기서 저자가 청춘의 독자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직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의 삶'에 염두하는 인생을 살기보다는 '삶을 우위하는 인생'을 살아갈 것을 권하고 있다. 지나치게 삶을 염두하는 인생은 사회가 만들어 낸 주입된 욕망을 고집할 뿐이며 오직 '성공의 목표'에 집착하는 수동적인 삶의 태도이다. '삶을 우위하는 인생'은 삶의 행위를 스스로 선택할 줄 알며 선택에 대한 삶의 결과에 온전히 책임을 질 수 있는 능동적인 삶의 태도이다. 이러한 삶의 태도를 통해 청춘은 외부로부터 침범한 욕망의 환상들이 만들어 낸 '삶의 거품'들을 구분할 수 있으며 이것 또흔 스스로 조절할 수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사는 세상이 대체 어떤 세상인가를 알고 있어야 하며 주체적으로 삶 자체를 탐구하고, 고민하고, 느껴보려는 자신만의 공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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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2-05-14 2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난도 씨보다 좀 더 어린,이제 40에 접어든 이들은 야! 우리도 괴롭다! 하고 소리를 빽 지르는 책을 내세우는군요.제목은 그래서 <아플 수도 없는 마흔이다>.확실히 40대 후반인 김난도 연배와는 좀 다르더라고요. 김난도 씨는 어찌되었든 젊은이를 위로하려고 하는데 이제 40이 된 이들은 청춘들과 서로 손가락질하며 싸우려 드니 이거야 원...

cyrus 2012-05-17 16:28   좋아요 0 | URL
최근에 책 검색하다가 노자님이 언급하신 책 봤어요.
요즘 사회는 젋은 세대뿐만 아니라 기성 세대들도 힘들고 슬프게(술푸게)
할 정도로 힘들어진 거 같아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젋은 세대들에게 무조건 가르칠려고 하거나 부정적인 시선으로 손가락질하는
이들을 제외하면 40을 맞게 된 기성세대들도 나름의 고충, 고민이
있을거라고 생각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