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 책의 탄생

 

인간은 동물의 일원이지만 고도의 지능과 욕구를 가진 까닭에 다른 동물 세계와 비교해 수준 높은 사회와 문화를 이루며 이를 무대로 삶을 살아간다. 무엇을 얻을지, 무슨 일을 하기를 바라는 인간 욕구가 지적 활동을 이끌어 낸다. 이 결과로 얻은 지식·정보가 수단과 방법으로 작용한 때문이다. 인간 사회가 지식을 얻으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 사회는 시작과 더불어 욕구 실현은 물론 고도화된 사회와 문화를 이루는 수단이자 방법인 지식을 얻으려고 애써 왔다.

 

인간 사회는 무엇 때문에 책을 만들려고 노력했을까. 먼저 책을 보면 단순하게 종이를 여러 장 묶어 맨 물건이다. 하지만 책에 어떤 내용을 담고 어떤 작용을 하는지 알면 종이 여러 장이 묶인 물건이라고 쉽게 말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책은 인간과 주변 사물에 대해 배우거나 실천을 통해 알게 된 명확한 인식이 지식이라는 이름으로 담겨 있다. 또 관찰과 측정을 통해 수집한 자료를 실제 문제에 도움이 되도록 정리한 지식이 정보라는 이름으로 담겨 있다. 지식과 정보는 인간의 욕구를 이루는 수단과 방법으로 사회와 문화를 이루고 발전시켰다. 책을 읽고 독서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제대로’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문명사회에서 책 읽기를 권장하는 것은 아주 일반적인 일이다. 지식에의 목마름 때문이든지, 교양을 향한 딜레당트적 취향 때문이든지, 내면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함이든지, 우리를 책으로 이끈 동기가 무엇이든지 상관없이 책을 향해 뻗는 손길은 아름답다고 상찬된다. 목적을 따지지 않은 독서를 숭고하게 여기는 것은 책이 지식과 진실의 보고(寶庫)라고 여기는 무의식적인 인증 때문이다. 문명사회에서 책을 읽지 않는 일은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며, 타인들과의 대화에서 어떤 책들을 읽지 않았다는 고백은 마치 고해성사에 견줄 만한 무의식적 죄책감을 수반한다. 문명사회에서는 책을 읽지 않는 사람에게 불이익을 주고 모욕을 준다. 그러니 사람들이 불이익과 모욕을 피하려고 읽지 않은 책들에 대해 마치 읽은 것처럼 거짓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 이런 사람이 뜻밖에 많다. 아무리 책을 좋아하고 일생을 책 읽기에 바친다 해도 우리가 읽은 책보다 읽지 않은 책이 많다. 우리 사회에서 독서는 신성한 것이고, 어떤 책을 읽지 않거나 대충 읽는 것은 눈 밖에 나는 일이다. 그렇게 읽었다고 말하는 것도 눈총받기에 십상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저자나 작품은 자칫 잘못 엮이면 빈곤하고 천박한 당신의 ‘수준’을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에 짐짓 얼마나 선호하는지 숨기기도 한다. 독서에 대한 강박관념은 우리 대부분이 가지고 있다. 어떤 책은 반드시 읽어야 하고 그 내용을 잘 알아야 한다는 인식 말이다.

 

 

 

 ♣ ‘모든 것’을 무기로 만드는 비평가

 

사사키 아타루의 지적대로라면 오늘날 우리에게 책은 정보를 습득할 수 있는 지식의 창고가 아니다. 오히려 습득한 정보를 남들에게 과시용으로 비평하기 위한 총구가 있는 ‘무기’가 되었다. 상대방보다 더 많은 정보(혹은 지식)를 보유하고 있다면 그 ‘모든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을 가진다. 그러면 누구나 ‘비평가’가 될 수 있다. 특정 분야에 정통하고, 일가견이 있는 지식인 대접을 받게 된다.

 

 

 

 

카라바조  「나르키소스」 1594~1596년

 

지식이나 정보라는 게 이토록 사람들을 병들게 하고 쇠약하게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중략)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자아를 지향하며 '모든 것'의 환상 아래 살포되어 있는 정보를 악착스럽게 긁어 모으는 것. 그것이 뭐가 될 것인지, 저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21~22쪽)

 

 

사사키 아타루는 ‘비평가’란 ‘모든 것’에 대해 다 알고 있고, 내가 알고 있는 그 ‘모든 것’을 완전하게 말할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한다. 자크 라캉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비평가는 자신을 ‘똑똑한 만능인(지식인)’이 되는 ‘향락’에 빠지게 된다. 연못에 비친 자신의 완벽한 외모에 스스로 반해버린 나르키소스처럼 말이다. 결국, 똑똑한 나르시시즘에 빠진 비평가에게 책은 자신의 우월성을 보여주려는 무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일 뿐이다. 이러한 비평가는 잘못된 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마냥 우쭐대거나 악의에 찬 지적질을 할 것이다. ‘지식의 우월함’을 앞세워 자신보다 부족한 상대방의 기를 억눌리게 하고,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복종하게 한다.

 

우리 사회는 ‘자칭’ 비평가들이 넘쳐 난다. 우리 주변에 있을 뿐만 아니라 온라인 공간에서는 ‘익명’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 또는 강화하기 위한 소아적 분파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비평적 판단력이나 감식안에 문제가 있다는 것, 텍스트나 현실에 근거하지 않고 자신의 견해만을 앞세운 발언을 일삼는 등 여러 문제점에서 벗어날 수 없다.

 

 

 

 ♣ 읽고, 고쳐 읽고, 쓰며

 

우리는 전지전능한 신이 아닌 이상 읽은 책을 완벽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사사키 아타루도 독자들에게 고백한다. ‘저는 거의 아무것도 모릅니다. 곧 모든 것을 잃어버립니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라는 가차 없는 제목을 단 사사키 아타루의 생각은 책이 얼마나 무서운 물건이었는지를 제목만큼 호기롭게 들려준다.

 

책은 비평가들을 위한 무시무시한 지식의 무기로 돌변하기도 하지만, 책을 읽는 수준을 비교하거나 측정하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무기를 많이 보유하는 나라가 강대국으로 인정받는 것처럼,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은 지식인으로 느껴진다. 최근에 우리 대학생들의 독서량이 다시 도마 위에 오른 바 있다. 통계조사 결과, 우리 대학생들이 한 해 평균 도서관에서 대출하는 도서가 아홉 권 남짓 된다는 것인데, 이 요령부득의 지표를 놓고 네티즌들의 의견이 분분했다.

 

다른 통계에서는 하버드대 학생들이 사는 책들이 이른바 고전이라고 할 만한 책들이지만, 서울대 학생들조차 베스트셀러 위주의 시간 죽이기에 가까운 성질의 독서를 하고 있음이 밝혀진 적도 있다. 이런 사실을 들어 사람들은 학생들이 좋은 책을 더 많이 읽어야 한다고 강조하곤 한다. 그렇지만 실제로 대학에서 바라보는 책의 미래는 암울하다. 대학생들이 거의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무조건 하버드대 학생들이 사는 책을 읽는다고 해서 대한민국 대학생들이 그들과 같이 지적 수준이 동등해질까? 무조건 읽기만 하면 다 된다는 일방적인 독서 인식이 문제다. 책을 제대로 읽는 사람도 없는데도 말이다. 그런 사회가 진정으로 대학생들에게 책 읽기를 권장하는가도 의문이다.

 

사사키 아타루는 읽는 것과 쓰는 것 자체가 혁명이라고 말한다. 읽고, 고쳐 읽고, 쓰는 것이 목숨을 거는 일이었음을 잊지 말라는 주문이다. 우리가 모두 읽는 일에 목숨까지 걸 필요는 없겠지만, 이 책은 ‘책은 읽어서 뭐하나’라는 냉소에 맞설 수 있게 해준다.

 

결국,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수동적인 독자로 머물지 말라는 것이다. 사실 텍스트를 외우거나 그 내용을 전부 알아야 한다는 속박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독서를 피하는가. 책을 읽으며 생각을 반추하고 성찰의 깊이를 더해가지 않는 사회에는 미래가 없다. 그 사회는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통찰력이 없는 ‘비평가’ 좀비들의 서식지로 전락한다. 오로지 책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알고,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는 환상이 결과적으로 얼마나 괴물답고 심지어 폭력적인가를 다시 한 번 진지하게 물을 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리엔탈리즘 - 개정증보판 현대사상신서 6
에드워드 W. 사이드 지음, 박홍규 옮김 / 교보문고(교재) / 2015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우월한 서양 vs 열등한 동양

 

꽃과 여자의 옷에서 봄이 피어난다고 한다. 요즘 지하철에서 내려 길을 오가면서 시선이 집중되는 것이 있다. 짧은 치마에 살결이 드러나는 옷을 입고 거리를 당당하게 걸어가는 여자들이다. 경기가 불황일수록 여성의 미니스커트는 짧아지고, 립스틱 색깔은 짙어진다고 한다. 그 이유는 경기가 어려우면 아무래도 여성들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액세서리를 구입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에 자신의 몸 자체를 드러내는 것으로 아름다움을 표현하려는 심리적 요구가 증대한다고 한다.

 

미니스커트를 입는 사람과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 모두는 우리의 사유나 관념이 자의적이고 주체적으로 형성된 것으로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 관념체계의 깊은 틀은 근대화의 급속한 발전과 자본주의의 서구중심적 사고방식으로 물들어진 문화의 산물이라는 것을 도외시하고 있다.

 

이런 사고방식을 에드워드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했다. 세계화라는 거대한 슬로건 앞에 점점 동양 문화는 어두운 터널 속으로 사라지고 점점 오리엔탈리즘에 사로잡히게 됐다. 즉 ‘우월한 서양’ 대 ‘열등한 동양’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각인되어버린 것이다.

 

우리들 관념체계 안에 당연한 지식으로 자리 잡은 서구중심적 사고방식으로서 오리엔탈리즘은 사회구조적으로 재생산되고 있다. 오리엔탈리즘의 사회구조적 재생산 과정을 단순히 폭로하는 것만으로는 기존의 왜곡되고 종속적인 문화 상황이 해체되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우리는 전통문화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경제 발전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경제 성장과 사회 발전에만 치중했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문화는 뒷전에 처져 있었던 것이다. 그 사이 서양 중심 사고가 중심 담론이 됐다.

 

 

 

 ♣ 오리엔탈리즘이 만든 이분법적 사고

 

사이드가 말하는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적’인 것에 대해 사람들이 과학적, 합리적, 논리적, 이성적이란 긍정적 이미지와 물질적, 제국주의적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떠올리는 반면에 ‘동양적’인 것에 대해 이와 반대로 ‘비과학적, 비합리적, 비논리적, 비이성적’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나마 ‘명상적, 신비적’인 단어가 긍정적 이미지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이러한 서구식 담론의 편견과 왜곡된 동양 이미지가 바로 사이드가 말한 오리엔탈리즘이다.

 

서구의 문화적 헤게모니에 너무나 오랫동안 종속된 결과일 것이다. 오리엔탈리즘은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며 억압하기 위한 서양 스타일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알지 못하는 타 문명에 대해 가질 수 있는 보통 사람들의 문화적 편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서구의 동양 지배 프로젝트와 맞물려 치밀하고 체계적으로 만들어진 ‘표상체계’라는 것이다.

 

이러한 서구의 체계적인 ‘동양의 동양화’ 과정에 의해 동양의 이미지는 왜곡돼 왔기 때문에 사이드는 이제까지도 왜곡되지 않은 순수한 동양, 형용사가 붙지 않은 동양이 존재한 적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그것은 각종 주의와 주장으로 포장된 오리엔탈리즘이 동양 대신 동양을 말해왔기 때문이며, 그렇지 않은 동양은 마치 없는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를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스트들 스스로가 동양과 대치되는 위치에 자신의 위치를 선정하기 때문이며, 실제 생활과 정신생활 양면에서 사실상 동양 밖에 있는 ‘그들의 외면성’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듯 오리엔탈리즘에 길들여진 우리는 서구 문화를 우월하게 의식하고, 동양 문화를 비하하게 되는 것이다.

 

기업은 소비자의 필요성을 충족시키는 것보다는 욕구를 창출하는 데 역점을 두고 있다. 즉 자신들이 생산한 제품을 소비자의 필요성보다는 욕구를 자극해 많이 판매함으로써 최대 수익을 얻음을 그 목표로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비자들의 욕구를 부단히 창출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에 동원되는 수단이 광고이다.

 

광고는 소비자들이 날마다 받아들이는 메시지의 한 형태다. 소비자가 받아들인 총 메시지는 커뮤니케이션 환경을 통해 상품이나 서비스에 대한 의견, 호감, 불쾌감 등을 형성한다. 이런 상황을 기업들은 전통적인 콘셉트를 가지고 소비자들의 욕구를 발생시키기보다는 서양적인 무엇인가에 마케팅 전략을 찾고 있다.

 

서구 우월주의에 입각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동서양의 차별적 이분법을 광고 속에서 찾고 있다. 오리엔탈리즘의 재생산과 강화는 모든 영역에서 총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그 가운데 현대 소비 사회에서 이미지 형성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광고는 주목할 만하다.

 

우리는 광고 속에 불려 들어가 ‘표면상으로는 자율적으로 흐르는 회로’, 그러나 실제로는 광고에 의해서 ‘주의 깊게 준비된 회로(오리엔탈리즘)’를 통해 부재된 시의를 스스로가 채우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우리가 광고에 의미를 부여하고 광고가 우리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악순환은 계속된다.

 

 

 ♣ 내 안에 서양 있다?

 

오리엔탈리즘의 가장 큰 문제는 동양인들이 서구인들의 왜곡된 사고방식을 내면화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오랜 식민지 지배를 통해 동양인들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거나 혹은 서구 문화에 영향을 지나치게 크게 받은 나머지, 오리엔탈리즘을 자기의 것으로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여 언어, 행동, 사고방식으로 표출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언어로 사고하고, 자신이 사고하고 믿는 대로 행동한다는 점에서 이런 문제가 더욱 큰 문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인간 정신의 왜곡을 가져오게 되며, 왜곡된 사고방식으로 인한 잘못된 행동까지 초래하게 된다. 더 나아가 타인을 타인으로서 이해할 수 없게 되고, 타인을 타인으로서 이해할 수 없게 된다면 인간은 타인에 대해 폭력적이 될 수밖에 없다.

 

매년 유행하는 미니스커트가 거부감보다는 친근감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은 오리엔탈리즘의 한 단면은 아닐까. 한복을 입고 거리를 지나가는 여자를 보기는 어렵다. 결혼식이나 환갑 같은 행사장에서나 잠시 보는 것이 우리 전통의상의 현실인 것이다.

 

‘뚱뚱해도 다리가 예뻐서 짧은 치마가 어울리는 여자’를 희망하는 유행가 가사처럼 짧은 치마가 어울리는 여자를 희망하는 남자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당당함을 표현한다’, ‘날씬한 다리로 칭찬받고 싶어서다’, ‘더 예쁘게 보여주고 싶다’ 등은 여자들 의견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원인은 서구지향적인 의식이 무의식을 점령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우리 의식 속에 열등한 동양과 우월한 서양이라는 것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우월한 서양’, ‘열등한 동양’이라는 오리엔탈리즘의 이분법적 사고는 이제 바뀌어야 한다. 이제는 서구인 시각으로 우리를 볼 것이 아니라 우리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시각을 가져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간의 향기 - 머무름의 기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harder better faster stronger

 

높은 인사고과와 승진을 위해 바쁘다, 바빠!’를 외치며 분주히 움직이는 직장인들, 좋은 성적과 각종 스팩, 외국어와 컴퓨터 능력을 습득하기 위해 혈안이 된 학생들, 가사와 양육뿐만 아니라 집안 인테리어, 가족들 건강 챙기기, 자녀 학교 및 학원 데려다 주기 등 하루가 빠듯한 주부들.

 

이들은 출세하고 성공하기 위해 나는 할 수 있다는 긍정과 자신감으로 무장하고 하루 24시간을 시, 분 단위로 쪼개서 나눠 쓰는 워커홀릭들로 현대인의 자화상의 일면이다. 워커홀릭은 원래 현대 산업사회에서 일중독자나 업무중독자를 가리키는 말로 여가시간을 즐기지 못하고 가정에 소홀한 직장인을 주로 지칭하나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직업과 계층과 연령과 성별에 상관없이 각자 맡은 바 기능과 역할에 충실하기 위하여 심리적·육체적으로 분주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경제적으로 효율적인 삶, 합리적으로 계획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규칙적이고 계획적인 삶이 건강과 성공을 보장해 줄 것이라는 믿음 아래 시간계획표를 작성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 과정에서 성취감을 맛보기도 하고 작심삼일로 실패하면 좌절감을 맛보기도 했다. 성공이든, 실패든 그것은 개인의 책임이며, 성공할 수 있다는 긍정, 희망고문을 통해 또다시 계획하고 활동한다.

 

나는 해낼 수 있다는 자기 긍정의 구호로 가득한 피로사회는 그 이름에서 느껴지는 노곤한 이미지와 달리 실제로는 분주하게 오가는 사람들의 외침 소리, 발걸음 소리, 옷깃 스치는 소리가 가득한 요란한 사회다. ‘활동적인 삶이 지배하는 사회다.

 

 

 

 ♣ 가속화된 시간은 '금'이 아니라 '병'이다

 

이런 사회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압도적인 느낌은 시간의 가속화. 허둥지둥하며 살다 문득 뒤돌아보니 해 놓은 것 없이 세월만 갔더라, 하는 게 시간의 가속화다. 슬로푸드, 느림의 미학 그리고 힐링. 이런 말들이 나오는 이유다.

 

이 모든 사회현상의 원인을 근대 이래 계속 강화돼온 활동적 삶을 절대화, 찬양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노동이나 활동적 삶의 절대화는 모든 시간을 일로 치환시키며 여가시간도 일을 준비하기 위한 보조적 의미로 인식시킨다. 인간다운 향기가 사라지는 시간이 되고 만다. 신자유주의와 성과주의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자본주의 속도 또한 빨라지고 있다.

 

저자는 <시간의 향기>보다 먼저 우리나라에 번역된 <피로사회>에서 현대사회를 성과사회라고 진단한다. 성과사회의 개인은 복종하고 순응하는 주체가 아니라 성과주체이다. ‘할 수 있다가 지배하는 사회다. 열심히 노력하면 성적도 올릴 수 있고 취업도, 승진도 할 수 있으며 아름다워질 수도 있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믿게 하는 세상이다.

 

'할 수 있다'라는 긍정성의 과잉상태는 끊임없이 노동하게 하고, 활동하게 한다. 투잡, 쓰리잡을 뛰는 직장인이 적지 않으며 생활에 큰 지장이 없어도 야근과 특근을 하여 더 많은 돈을 벌고, 주변인들로부터 인정받고자 한다. 얼짱과 몸짱 스타를 보며 나도 아름다워질 수 있으리라 긍정하며 열심히 몸 관리를 한다.


노동 및 활동의 과잉, 긍정성의 과잉을 특징으로 하는 성과사회로의 패러다임 전환은 생산을 최대화 하고자 하는 자본주의적 시스템의 열망이 있다. 능력의 긍정성은 금지나 당위의 부정성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과주체는 복종적 주체보다 더 빠르고 생산적이다. 성과주체는 이미 규율의 기술을 습득하고 당위의 명령을 내면화하여 스스로 생산성의 수준을 극대화한다.

 

이렇게 비판도 없이 따라가다 보니까 시스템의 압력이 굉장히 강해서 피로하게 된다. 그런 시스템, 사회가 문제인데 지금 한국은 개인이 문제라며 치유하라, 힐링하라고 외치고 있다. 그러나 끝없는 자기와의 싸움을 강제하는 성과사회의 부정성은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우울증의 증상은 자신이 부족하다든가 열등하다는 느낌, 실패에 대한 불안, 끝없는 자책과 자학이 포함되어 있다.

 

결국 성과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며 계속 새로운 강제를 만들어낸다. 주인 스스로 노동하는 노예가 되는 사회, 자기 자신을 착취함으로써 지배 없는 착취가 가능해지는 사회, 이런 사회에서 우울증, 경계성 성격장애, 소진증후군이 나타나며 이는 성과사회, 긍정의 과잉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시간의 향기>는 다음 문장으로 시작한다.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오늘의 시간은 리듬과 방향을 상실하고 원자화됨으로써 위기에 봉착해 있다. 오늘날 시간은 자연적 순환과 같은 리듬도 구원이나 종말, 진보라는 서사적 긴장감도 없다원자화된 시간은 현재의 시간을 날아가는 시간의 끝자락으로 겨우 인식하게 한다. 그저 끝없는 현재들의 사라짐뿐이다. 삶의 가속화는 삶의 양은 증가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충만한 삶으로 채워진 것과는 거리가 멀다.

 

 

 

 ♣ 잃어버린 시간의 향기를 찾아서  

 

천천히 가는 게 치유가 아니다. 시간의 위기는 가속도가 아니다. 병은 다른 데 있는 것이다. 천천히 하는 것보다 남에게 시간을 주는 게 해결책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시간을 창조해야 한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처럼 우리는 잃어버린 시간의 향기를 찾아야 한다. 마르셀이 부드럽게 적셔진 마들렌 조각을 한 숟갈의 차 속에 담아 입술에 가져갔을 때 온몸에 퍼진 행복한 감정을 느끼는 순간처럼 말이다.

 

우리는 끝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유속 한가운데 있다. 설상가상으로 깊은 주의를 할 수 없는 상황에도 처해 있다. 세상은 잠시도 IT기기를 벗어나서 생활 할 수 없는 지경이다. 학교에서도, 회사에서도, 지하철에서도, 가정에서도 자라목이 돼서 24시간 인스턴트 정크 푸드와도 같은 정크정보들에 온통 주의를 빼앗기고 있다. 더 많은 정보와 콘텐츠가 아니라 어쩌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멍한 무용지물의 시간이 생긴다.

 

새롭고 갑작스레 찾아온 문명의 사회구조로 인해 경제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면서 인간의 지각은 파편화되고 분산된다. 저자는 이것을 정보화 사회인간이 이룩한 문명의 진보라기 보다는 퇴화라고 여긴다. 수렵자유구역의 동물들이 생존을 위해 먹이를 구하고 새끼를 보호하고 짝짓기 중에도 경계를 하는, 다양한 다중업무에 주의를 분배하느라 깊은 사색을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에 힘입은 것이다. 문화는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하는데 지금은 다양한 과업, 정보소스와 그 처리과정에서 빠르게 초점을 이동하는 산만한 시대를 살게 되었다. 단순한 분주함은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하며 기존의 것을 재생하고 가속화할 뿐이다.

 

'여행은 일상처럼, 일상은 여행처럼하라'는 말이 있다. 일상생활을 여행하는 것처럼 하는 사람이 있다. 프랑스 작가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는 1780년 42일 동안 가택연금으로 자기 방을 여행하 <내방 여행>이란 책을 출간했다. ‘내 방 순례 같은 자발적 유배시간은 조용하지만 강한 혁명 같은 시간’이라고 말한다.

 

인간적인 향기를 머금고 사색이 가득한 시간은 사라진 게 아니라 잊혀진 시간이다. 우리 삶 고유의 시간인 것이다. 새로운 삶의 창조를 위해서는 정신적 이완이 가능한 사색적 삶의 원천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일상을 여행처럼 사색하는 자발적 시간으로 우리 삶 가까이 다가오게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웃사이더 범우사상신서 19
콜린 윌슨 지음 / 범우사 / 199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적극적 아웃사이더

 

초등학교 시절, 여름방학 때마다 동네 친구들 몇이서 공터에 비밀 본부를 만들곤 했다. 적절한 장소를 물색한 후 사람 인적 드문 장소만 있으면 된다. 그 곳에서 모이면 오늘 하루 무엇을 하고 놀지 정한다. 비좁은 공간이지만 그 곳엔 부모님의 잔소리가 없다. 우리들만을 위한 세상이다. 거기에 앉으면 온갖 즐겁고 기발한 생각들만 떠올랐다. 그 곳은 일탈이 주는 짜릿한 즐거움과 아웃사이더의 관조적 여유를 동시에 맛볼 수 있는 유토피아였다.

 

아웃사이더는 내부자를 의미하는 인사이더와 구별되는 인간형으로, 국외자 또는 이단자를 뜻한다. 타의에 의해 어떤 집단에 동화되지 못하거나 배척되는 경우는 소극적, 수동적 아웃사이더이고, 소속 집단의 규칙이나 질서에서 스스로 벗어난 경우는 적극적, 능동적 아웃사이더이다. 어린 나와 친구들이 비밀 본부를 만든 것은 적극적 아웃사이더가 되기 위함이었다.

 

콜린 윌슨은 이 작품에서 하찮고 존재가치 없는 사람에게서 가치를 찾으려 했다. 그들의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그 누구보다도 바르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인사이더는 제도권 내 사람이고, 아웃사이더는 제도권 밖의 사람이다. 인사이더는 힘이 있고, 아웃사이더는 힘이 없다. 그래서 인사이더는 이끌고, 아웃사이더는 따른다. 이것이 보통 사회인데, 윌슨은 다른 시각에서 아웃사이더를 바라보았다.

 

 

 

 인사이더 같은 아웃사이더

 

그는 앙리 바르뷔스의 <지옥>, 카뮈의 <이방인>,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등에 나오는 작중 인물들과 니체, 반 고흐 같은 실제 인물들을 아웃사이더라는 관점에서 분석하였다. 이 아웃사이더들은 지루하고 불만족스러운 일상의 세계를 본능적으로 거부했다. 그들은 일상이 따분하게 되풀이되는 것은 고역이며 노예들에게나 알맞다고 느꼈다. 모든 위대한 시인이나 사상가들은 이 감정을 문학과 철학적 사색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아웃사이더들은 체제 안의 순응자인 인사이더들이 보지 못하거나 애써 무시하려 하는 지배 질서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조롱했다. 능동적, 창조적 아웃사이더들은 인간성의 폭과 깊이를 넓혔고 인간이 지향해야 할 가치와 이상향을 창조했다.

 

윌슨은 이 과정에서 문학, 철학, 역사, 신학을 아우르는 고전 작품 속에서 발굴해낸 주인공들을 살아있는 유기체로 대우한다. 상호간의 관계를 질문하고 그 답을 유도하는 방식을 통해 끊임없이 대치되는 두 가지 질문들, 예컨대 ‘존재와 무’, ‘현실과 비현실’ 등을 던지고 있다. 이러한 저자의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아웃사이더의 문제란 본질적으로 ‘실천의 문제’, ‘사고의 문제’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보통의 소시민들과 아웃사이더의 차이가 명확하게 대비되는데 아웃사이더란,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집요하게 또는 너무 깊게 그리고 너무 많이 보려 하는 종류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를 오늘 우리 사회에 적용시켜 풀어보자면, 자신의 이해와 상관없으면 ‘무임승차’ 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사회적 실천에 뛰어들어 문제해결에 동참하고 그 열매를 나누어 가지려 하기보다는 뒷짐 진 채 파리한 얼굴로 방관만 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늘의 불합리한 사회체제를 합리적으로 극복하고자 노력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간 발전된 사회를 꿈꾸고 실천하며 사는 사람이 아웃사이더라는 것이다.

 

윌슨의 눈은 인사이더와 아웃사이더의 역할이 역전되는 위치에 초점을 맞췄다. 인사이더가 스스로의 역할을 하지 못해 아웃사이더가 나설 때 그렇다. 이 상황이 오면 아웃사이더가 사회를 이끌고 인사이더는 기득권 지키기에 골몰한다. 어느 순간 아웃사이더는 윌슨이 활동했던 영국의 문인클럽, ‘분노의 젊은 사람들’(Angry Young Men)처럼 세상을 향해 진실을 토해내고, 부조리를 고발하며, 행동에 나선다.

 

그래서 그가 지칭하는 ‘아웃사이더’의 의미는 지금 우리가 흔히 문화적 정치적 소외자들을 일컫는 용어로 쓰는 '아웃사이더'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단순히 약자, 소수자란 의미보다는 그 파장이 깊고 넓은 것이다. 글의 모두에 인용한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에 대한 정의에 나타난 것처럼 어떻게 보면 니체의 ‘초인’과 같은 이미지로 다가오기도 할 정도다.

 

 

 

 아웃사이더가 이끄는 세상

 

공중파 방송의 저녁 아홉시 종합뉴스를 시청하고는 또 하루를 접는다. 그런데 매일매일 접하게 되는 뉴스이건만 이의 보도 내용들은 부정적인 유형을 이루어 한결같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을 우울하고도 서글프게 만든다. 매일 매일의 보도 내용을 간추리면 한결같이 부정적인 것으로 유형화된다.

 

하지만 그것들에 대한 이 시대 사람들의 반향은 거의 무감하다고나 할까. 사실 그것들은 우리 삶의 일부분이 되었고 또 그 존재를 이제 당연시하는 세태를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이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거의가 물질과 결부된 것이어서 우리들의 삶에서 물질의 위의를 새삼 깨닫게 되고 물질적 가치를 우선시하는 이 시대에 횡행하는 자본주의의 문화 풍토에 대해 절망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우리 사회 인사이더는 정치를 주름잡았고, 경제를 주물렀다. 엄청난 돈을 만지며 승자의 축배를 들었다. 정치적으로 인사이더는 리더였고, 아웃사이더는 추종자였다. 경제적으로 인사이더는 가진 자였고, 아웃사이더는 가지지 못한 자였다. 사회적으로 인사이더는 갑(甲), 위너(winner)였고, 아웃사이더는 을(乙), 루저(loser)였다. 그러나 인사이더는 힘을 이기적으로 썼을 뿐 사회를 위해 활용하지 못했다. 돈으로 그들만의 아성을 쌓았을 뿐 나누기에 인색했다. 위너였음에도 루저를 어루만져 주지 못했다.

 

부정과 부패가 만연한 문화의 현실적 풍토를 당연시하고 더 나아가서는 자신의 삶과 의식이 그런 것에 침윤되어 허덕거리더라도 이를 당연시하고 거부하는 몸짓조차 짓지 않는 세태 속에서 아웃사이더들은 어쩜 일탈행위자들로만 여겨질 지 모른다. 이러한 모습을 24세 청년 윌슨이 본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아무도 병에 걸린 것을 깨닫지 못하는 문명사회에서 자기가 환자임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인간이 아웃사이더라고 말이다.

 

 

환상을 보는 인간(visionary)은 반드시 아웃사이더다. 그것은 같은 공동체에 사는 다른 인간의 수에 비해 환상을 보는 인간이 소수이기 때문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쥐 잡는 일꾼이나 굴뚝 소제부도 아웃사이더여야 한다. ‘비저너리’는 보다 다른 이유에서, 즉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출발점에서 시작해 이내 일반이 이해할 수 없는 높은 곳으로 뛰어올라 버린다는 이유에서 ‘아웃사이더’다. (322쪽)

 

 

인구 통계적으로 소수라고 해서 사회적 담론을 창출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현재의 위치에서 우리의 소리를 더불어 함께 내는 것이 중요해진다. 진짜 아웃사이더는 일반인도 이해하지 못한 부정의 환상을 볼 줄 알며 창조적이다. 갑의 횡포로 시끌벅적했던 2013년, 곤혹을 치른 갑의 인사이더도 환자임을 자각하고 건강한 사회 만들기에 동참하는 행동을 보이면 참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 유쾌한 미학자 진중권의 7가지 상상력 프로젝트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섹시, 멸치, 오빠, 앙!

 

 

 

 

tvN SNL 코리아 시즌 4 13회 '진중건의 토론배틀' & '위캔업뎃'

 (SNL 크루 출연: 진중권)

 

 

진중권은 8년 전에 쓴 책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머리말에 이런 말을 남겼다. 인간의 미래가 공산주의가 될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예언은 틀렸지만 노동이 유희가 될 것이다. 그 자신에게는 이 말이 맞았고 예언이 그대로 적중되었다. 저술행위를 생계로 삼는 진중권에게 글쓰기는 고뇌의 산물이 아니라 즐거운 유희니까. 최근 방송을 통해 연기 노동의 유희를 몸소 보여줬다. 남을 설득하고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전공을 마음껏 펼쳤던 백분 토론은 아니다. 19세 미만 관람 불가 등급이 붙을 정도로 성인 코미디를 지향하는 라이브 쇼 ‘SNL(Saturday Night Live) 코리아’에 크루(crew, 게스트)로 출연하여 숨겨두었던 연기 실력(?)을 펼쳤다.

 

 

 

 

 

 

진중권처럼 행사하는 '가짜 진중권' 진중건(김원해 역)은 “뽀로로와 크롱은 친구”라는 7살짜리 어린이(김슬기 분)의 말에 “악어와 펭귄은 먹이사슬에서 상하관계다. 어떻게 둘이 친구가 될 수 있느냐”며 논리적으로 따져 물었다. 그러자 여기서 진짜 진중권이 등장한다. 그는 ‘짝퉁’ 진중권에게 “누가 내 허락도 없이 내 흉내를 내고 다니냐”며 정색했다. 이어 그는 “지금 아이를 데리고 뭐하는 것이냐 이건 아이에게 지적 폭력이다. 아이에게는 눈높이를 맞춰서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짝퉁을 나무라면서 쫓아냈다. 그러나 진중권도 “뽀로로와 크롱은 친구가 될 수 없다”며 칸트와 데카르트를 인용해 7살 어린이를 울리고 만다. 또 다른 코너에서는 한 때 자신과 SNS에서 설전을 벌였던 낸시 랭 특유의 인사말(섹시, 큐티, 키티, 앙!)을 패러디해 능청스럽게 연기한다. ‘섹시, 멸치, 오빠, 앙!’

 

생방송이 나간 이후 진중권은 무대 오르기 전부터 화장실을 열 번 갔다 올 정도로 많이 긴장했다고 밝혔다. 이 날 같이 크루로 출연했던 홍석천은 자신의 트위터에 진중권의 연기가 좋다고 칭찬했으며 '장난기 많은 소년' 같다면서 진중권과 같이 찍은 인증샷을 올리기도 했다.

 

 

 

 ♣ 어린이의 마음으로 상상력 발휘하기

 

오래 전부터 상상력이 중요하다고 끊임없이 우리 사회는 강조했다. 현대 혹은 미래 사회의 핵심으로 여겨지는 발상의 전환, 새로운 아이디어 등이 모두 상상력과 연관된다. 영화, 소설, 인터넷 등을 판타지가 점령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상상력에서 비롯된 ‘생산품’들이 사회 곳곳으로 파고들고 있는 것이다.

 

상상력은 우리가 학교에서 지식을 배우는 것처럼 어떤 과정을 통해, 혹은 누구에게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중권은 “그것처럼 쉬운 것은 없다”고 잘라 말한다. 그가 제시한 쉬운 방법은 ‘어린아이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잠시 어린 아이였을 때로 돌아가 보자. 어린 아이였을 때 우리는 어땠는가. 아무런 구애 없이 온갖 상상을 할 수 있었다. 보는 것마다 호기심이 생겼고 호기심에서 파생된 상상력이 두뇌의 날개가 되어 전혀 구속받지 않고 훨훨 날았다. 상상력 없이는 놀이도 불가능했다. 나 자신은 지구인도 되었다가 외계인도 되면서 목소리를 바꿔가며 혼자서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야말로 다양한 상상력을 동원해 ‘혼자 놀기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틀에 박힌 교육을 받고 사유마저 일정한 방식에 길든 성인이 된 지금은 어린 시절의 활발했던 상상력을 단지 유치한 유희에 불과하다고 치부한다. 성인 입장에서 어린 시절로의 회귀는 ‘퇴행’이나 다름없다. 그러한 생각들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어린이 되기’는 퇴행이 아니라 순진무구하고 천진난만한 상상력으로의 복귀나 마찬가지이다.

 

상상력의 모습을 심각한 모습으로 형상화하지 않는다. 그저 우리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놀이와 작품에서 하나하나 찾아가면 된다. 특히 아이들의 유쾌하고 천진난만함이 녹아 있는 놀이들에서 특히 그와 같은 상상력의 뿌리를 더듬어 간다. 가령 주사위 놀이에서 혼돈과 우연의 상상력을, 숨바꼭질 놀이에서 불연속인 세상의 또 다른 모습을 창조해 낸다. 진중권은 '코디미 연기'라는 색다른 놀이에서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을 창조했다.

 

 

 

 '자기풍자'의 조커로 분한 논객

 

진중권은 변희재와의 '사망유희' 이후로 SNS 활동을 제외한 공개적 활동이 뜸할 정도로 그동안 '아웃사이더'로 지내왔다. 그러다가 마침 오랜만에 출연한 방송이 토론 프로그램이 아닌 코미디 버라이어티 쇼를 선택했다. 'SNL 코리아'가 자신을 개그 소재로 희화화했다는 이유로 프로그램 출연자와 방송 관계자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겠다고 선포한 변희재는 진중권의 출연이 자신 덕분이라고 트위터에 밝혔다. 그러자 진중권은 트위터로 변희재의 주장을 반박했다. SNL 출연은 이미 오래 전부터 오가던 얘기였으며 이번 SNL 출연이 유쾌했다고 소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유희를 즐길 줄 아는 경험자답게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  

 

"풍자는 마지막은 자기풍자죠. 그것이 풍자의 완성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비웃고 마지막에 자기 자신을 비웃는 여유…. 아무튼 오늘 기분 좋게 망가져 봤습니다"

 

오늘날 조커(joker)라고 하면 고담 시를 혼란에 빠뜨리는 영화 <배트맨>의 악당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조커의 유래를 되돌아보면 오늘날의 부정적 이미지와는 전혀 딴 판이다. 중세에 조커는 '광우'(狂愚), 즉 한 마디로 말하면 미친 바보였다. 지혜로움의 상징이기도 했다. 오히려 똑똑한 척 하는 현자보다 한 수 위 볼 줄 알며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진짜 어리석은 자들을 신랄하게 풍자한다. 고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는 말한다. '그대의 생각에 약간의 광기를 섞으라. 알맞게 헛소리를 함은 즐겁도다." (58쪽) 

 

 

 

 

 

앙투안 와토  「피에로 질」 1718~1719년

 

 

경외의 대상이었던 광우는 본격적으로 '이성'의 햇빛이 세상을 비추기 시작하는 합리주의의 근대에 들어서면서 '병원'이라는 이름의 감옥에 갇히게 된다. 이 때부터 광우는 진짜 '미친 바보'가 되어버린 것이다. 비록 사회의 '아웃사이더'로 전락했지만 그들은 '이성'의 눈부신 햇빛이 지배하는 현실을 떠나지 않았다. 연극 무대에 볼 수 있는 '광대', 즉 피에로가 되어 이성의 현실에 재등장한다. 그리고 그들은 예술가들로부터 다시 한 번 경외의 대상이 된다.

 

 

 

 

“피에로의 변신에서 시대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 고전주의 시대에 피에로는 비웃음의 대상이었다. 그 시대에 피에로는 아둔하고 천박하고 상스러운 존재였다. 낭만주의 시대에 상황은 돌변한다. 피에로가 예술적 영웅이 되는 것이다. 이성의 독재에 맞섰던 낭만주의 이후 예술은 광기와 연결되어 외려 창조성의 근원으로 간주된다. 게다가 피에로의 웃음 뒤에 감추어진 저 멜랑콜리. 우울증은 예부터 창조적 천재의 기질이 아니었던가. 고전주의가 무너지고 모더니즘이 탄생하던 시기에 발자크, 보들레르, 조르주 상드 등 내로라하는 작가들이 드뷔로의 팬터마임에 열광했다. (중략) 왜 그랬을까. 그들은 그 광대에게서 사회 속에서 사회 밖으로 추방된 현대 예술가의 존재를 보았던 것이다.” (62쪽)

 

 

 

뒤샹은 화장실 변기를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서 전시회에 출품했다. 백남준은 피아노를 부수고 요셉 보이스의 넥타이를 가위로 자르는 기행(奇行)을 하나의 예술 행위로 선보였다. 이처럼 ‘현대미술’이라고 지칭하는 오늘날의 예술가들은 ‘미친 바보’ 광대처럼 활동한다. 그리고 한 번씩 관객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전달하는 예술적 조커이기도 하다. 아도르노는 “아이들이 광대에게서 느끼는 공감은 예술에서 느끼는 공감이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어리석으면서도 문화적 충격을 선사하는 현대예술의 특징을 잘 표현하고 있다. 역설적으로 ‘어리석음’이 인정받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코미디 버라이어티 쇼에서 발연기를 한 진중권을 보라. 논리정연하고 날카로운 논객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을 정도다. 어리석을 정도로 연기를 썩 잘 한 것도 아니다. 게다가 그가 출연한 방송 프로그램에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숙적 논객과 그 밖의 안티 팬들은 연기를 한 진중권을 어리석다고 비난할 것이다. 그러나 진중권은 자신이 강조했던 놀이 그리고 상상력의 미학적 가치를 직접 행동으로 보여줬다. 그것도 ‘방송 연기’라는 색다른 노동을 함으로써. 심지어 자신의 논객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유발하게 만들어 자기풍자의 개그로 변용시켰다. 초라하고 우스꽝스러운 연기를 선보여서 관객 앞에서 자신을 망가뜨리는 광대 역할을 자처한 것이다. 논객으로서의 자신의 인지도를 단지 ‘개그 소재’로 희화, 변용된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누구와는 다른 모습이다. 그 사람이야말로 현명하고 똑똑한 척하는 진짜 어리석은 자가 아닐까.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고린도 전서> 3장 18절, 65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