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결핍이 두 남자에게 미치는 영향 (2disc) - 할인행사
김성훈 감독, 백윤식 외 출연 / 아인스엠앤엠(구 태원) / 2007년 2월
평점 :
품절


애정결핍인 두 부자 동철(백윤식), 동현(봉태규) 앞에

미미(이혜영)가 세들어 이사 온다.

미미를 차지하려는 두 남자의 끊임없는 대결

과연 누가 승리할 것인가?

 

클레이 애니메이션으로 산뜻하게 시작하여

카리스마 백윤식과 귀여운(?) 봉태규의 엽기적인(?) 대결이

시종일관 웃음을 준다.

새롭게 각광받을 수 있는 직업(?)을 소개하며

서로 누가 더 악동(?)인지 부자간에 계속 티격태격하는데

끝을 향해 갈수록 점점 식상한 내용으로 아쉬움을 주었다.

역시 애정결핍은 무서운 병(?)임을 확인시켜 준 영화. ㅋ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짝패 (2disc)
류승완 감독, 이범수 외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06년 9월
평점 :
품절


친한 친구 왕재의 부고를 접하고 고향 온성으로 내려 간 태수

하지만 이미 고향은 예전과 같지 않았다.

그리고 늘 함께 어울려 다녔던 5인방도 예전과 같지 않은데...

 

한국 느와르 영화의 독보적인(?) 존재가 된 류승완 감독의 영화

무술감독 출신인 정두홍과 본인까지 직접 출연해

액션이란 무엇인가를 몸소 보여주었다.

 

기본 스토리는 '친구'와 비슷하다.

어릴 적 늘 함께였던 죽마고우들이 세월이 지난 후

서로를 죽여야 되는 사이가 되는 비정한 현실

'친구'가 친구사이의 갈등에 좀 더 비중을 두었다면

짝패는 역시 액션에 더 비중을 두었다.

 

거리에서 무더기로 공격해 오는 패거리들과의 한 판 싸움이나

마지막 필호가 승리의(?) 연회를 베풀고 있던 운당정에서의 결투

특히 입구에서의 첫 관문을 무사히(?) 통과한 후

일본식 다다미 복도에서 태수와 석환이 등장하자

방문이 도미노처럼 차례로 열리는 장면은 정말 압권

진정한 액션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영화라 할 수 있다.

 

비열한 조폭 필호로 변신한 이범수의 연기도 좋았고

일당백이 아닌 이당백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태수와 석환은

좀 억지스런 면도 있지만 스턴트맨들이 아닌 본인들이 직접

연기를 한 점에서 높이 인정해 줄만하다.

류승완 감독의 액션에 대한 열정은 결코 식을 줄 모르는 듯. ㅋ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웰컴 투 동막골 (2 disc) - 5천 세트 특별 한정판
박광현 감독, 정재영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05년 12월
평점 :
품절


한국전쟁 한가운데서 국군과 북한군 그리고 연합군

병사들이 순수 그 자체인 동막골에서 마주 하게 된다.

그들이 수류탄과 총으로 대치하는 가운데서도

동막골 주민들은 전혀 개의치 않고 자신들의 볼 일을 보고 얘기들을 나누는데...

그 상황의 심각함은 어느새 사라지고...

동막골 주민들의 순수함에 마냥 웃음만 연발...^^

결국 수류탄을 실수로 터뜨려. 양식 창고를 홀라당 날려버리지만

감독은 수류탄이 터진 옥수수들이 팝콘이 되어

하늘에서 내리는 걸로 표현하는데 정말 기막힌 표현력이었다.

 

양식 창고를 날려버린 죄로 이를 메꾸기 위해 밭일 나가는 양쪽의 군인들

그들이 멧돼지의 습격을 받게 되어 멧돼지를 처치하는 장면 역시 이 영화의 압권

그 과장되면서도 코믹한 묘사는 마치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근데 최근에 본 '스윙 걸즈'에도 거의 흡사한 멧돼지 씬이 나와서

동막골이 이걸 보고 베낀 것은 아닐까 싶어 기분이 좀 그랬다.

 

이렇게 동막골에서 이념도 전쟁도 잊은채 마냥 행복하게 잘 지내던 그들도

동막골이 폭격 대상이 된 사실에 동막골을 구하기 위해 자신들을 희생하게 되는데...

폭격기들을 상대로 한 그들의 분투는 약간은 억지스럽긴 했지만...

그들이 동막골을 지키겠다는 맘만은 충분히 느껴졌다.

 

동족끼리 총뿌리를 마주하게 했던 전쟁의 한가운데서도

때묻지 않은 동막골은 그 모든 걸 다 포용할 수 있는

인간 본연의 순수함이 살아숨쉬는 곳이었다.

 

구수한 사투리로 무장한 배우들의 연기도 뛰어났으며

감독의 연출력이 돋보이는 괜찮은 영화였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3세기 이탈리아의 시인. 예언자, 신앙인으로서, 이탈리아뿐 아니라 전인류에게 영원불멸의 거작 《신곡》을 남겼다. 중세의 정신을 종합하여 문예부흥의 선구자가 되어 인류문화가 지향할 목표를 제시하였다. 주요작품은《신생》,《농경시》,《향연》등이다.
국적 이탈리아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이탈리아 피렌체
주요작품 《신생》(1293?) 《신곡》 《농경시》 《향연》(1306~1308)
단테 알리기에리 / 이탈리아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피렌체 출생. 예언자 또는 신앙인으로서, 박해를 가한 조국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전인류에게 영원불멸의 거작 《신곡 Divina Commedia》(1307?∼1321)을 남겼고,

이것으로 중세의 정신을 종합하여 문예부흥선구자가 되어 인류문화가 지향할 목표를 제시하였다.

단테는 피렌체의 겔프당(:)의 귀족 가문의 출신으로,

부친은 알리기에로 디 베를린 치오네, 모친은 벨라라고 하였으나 그들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조부는 신성로마 황제를 섬겨 십자군에 참가하여 전몰한 피렌체의 기사 카치아귀다라고

《신곡》의 <천국편> 제15가()에서 밝혀 두고 있다.

그가 9세 때에 마치 천사처럼 청순한 베아트리체를 연모하였음이

시집 《신생 Vita Nuova》(1293?)에 나타나 있다.

그녀에 대한 사랑의 감정은 그의 시의 형성과정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단테는 수도원이 경영하는 라틴어학교를 다녔고,

이어서 피렌체의 석학 B.라티니에게 사사하여 문법 ·논리학 ·수사학을 배웠으며

볼로냐대학에서 수사학 ·철학 ·법률학 ·천문학 등을 연구하면서 특히 이탈리아어로 시를 지었다.

그 동안에 동급생인 G.카발칸티와 돈독한 우의를 맺어

고전작가로서는 V.베르길리우스를 탐독하는 한편, 그와 시작()을 경쟁하여 서로 격려하였다.

그는 시칠리아파()와 토스카나의 귀토네파의 서정시에서 받은 영향 아래

베아트리체를 향하여 싹튼 사랑을 읊기 시작하였고,

그 후에 청신체파() 시인으로서의 시작 경험을 쌓았다.

그러나 한 남성의 연정을 카발칸티가 주장하는 청신체(dolce stil nuovo)로써는

표현하기가 미흡하다고 생각하여 점차 독자적인 청신체의 시를 쓰게 되었다.

1290년 젊음과 아름다움의 절정기에 있던 베아트리체가 요절하자,

단테가 찬미하는 여성의 이상화가 급속도로 진전되었고,

《신생》의 권말에서 성녀 베아트리체를 위해 대작을 준비하겠다는 결의를 피력하였다.

《신생》은 운문과 산문을 섞은 소품이지만,

 그의 거작 《신곡》의 중추가 되는 종교적 ·시적 사상의 싹틈을 엿볼 수 있고,

현실의 여성을 ‘영원한 여성’으로 승화시킨 수법은 당시 유행하던 청신체였다.

 이 《신생》 직후 단테의 문학 및 철학에 대한 연구는 넓이와 깊이를 더해갔다.

즉, 문체의 탐구과정에서는 고대 로마의 베르길리우스, F.호라티우스, N.오비디우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고, M.T.키케로와 L.세네카에게서는 윤리학을 배웠다.

또한 산타크로체와 산타 마리아 노벨라 등의 두 수도원에 자주 드나들면서

성직자들과 의견을 나누며 베르투스 마그누스와 T.아퀴나스의 철학 및 신학사상을 배웠다.

그는 당시의 풍습에 따라 12세에 피렌체의 도나티가()의 딸 젬마와 약혼하여

1290년 이전에 결혼하였고, 세 아들을 두었다.

1287년 볼로냐로 가서 1289년에 기병대의 일원으로 칸바르디노에서

아레초기벨린당(:)의 군대와 전투를 하기도 하여 청년시절에는 갖가지 경험을 쌓았다.

1293년의 사회개혁법에 의하여 귀족의 공직금지가 선포되어

조합()의 가입자만이 특례를 인정받게 되자 단테도 ‘의사 및 약종업조합’에 등록하여

1295년 11월부터 이듬해 4월 말까지 피렌체 도시국가에 특별참여,

1295년 12월 14일에는 통령()선거를 위한 자문기관의 위원,

1296년 5∼9월까지는 재정을 결정하는 100인위원회 위원,

1300년 5월에는 이웃나라 생 제미냐노의 특파대사를 거쳐,

마침내 통령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어 6월 15일부터 8월 15일까지 재임하였다.

당시 피렌체는 흑 ·백() 양당으로 갈라져, 단테는 백당에 소속하여 흑당의 힘을 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흑당은 로마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의 야심을 이용하였다.

흑당에 동의해서 카를로 바르와의 군대가 피렌체로 입성하여, 단테는 흑당에 의하여 추방되었다.

1302년 1월에는 독직죄로 고소당하여 무거운 벌금과 2년간의 유형()을 선고받았으며,

다시 2개월 후에는 영구유형을 선고받고,

시정부()에 체포될 경우 화형에 처한다는 통고를 받았다.

《신곡》의 첫머리에 있는 “어두운 숲을 헤맨다”는 표현은

단테가 35세 때인 1300년 유랑의 길을 떠나기 직전

그의 양심 ·예지 ·신앙이 심각하게 흔들리는 위기에 처해 있었음을 알려주는 표현이다.

그로서는 이 부당한 단죄에 대한 반항은 백당의 잔당에 가담하여 피렌체를 다시 탈환하는 일뿐이었다.

그러나 백당은 1303년과 그 이듬해에도 패배하였고

그러는 사이에 단테만이 일인일당()으로 남았으며,

유랑의 나그네길은 더욱 고난과 실의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낙담은 오래 계속되지는 않았고, 인류 구제의 길을 가르치려는 사람은 먼저 지옥에 가서

인간이 범한 죄의 실체와 이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을 보아야 한다고 스스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모든 고난과 시련을 당하면서 인간사회의 모습을 샅샅이 관찰하여

그 가운데서 멸망하는 것과 영생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백당의 최후의 일인으로 남은 단테는 1303년 유랑의 길에서

베로나스칼라가()의 외교사절이 되기도 하고, 1306년 마라스피나의 식객이 되기도 하면서

여러 곳을 떠돌아다녔다. 1306∼1308년 사이에 단테는 《향연 Convivio》을 썼다.

이것은 서장과 14장으로 되어 14개의 칸초네를 넣을 예정이었으나

실제는 3개의 칸초네만을 주석()하여 미완으로 그친 것은

그 무렵에 이미 《신곡》의 구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향연》의 내용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및 스콜라 철학이고, 주로 윤리문제를 다루고 있다.

시집 《리메》 또는 《칸초니에레》는 앞에서 든 두 작품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단테의 시를 모은 것으로 그 대부분이 청신체로써 베아트리체를 읊었다.

1304∼1307년에 단테는 《속어론():De Vuigari eloquentia》을 썼는데

이것은 라틴어의 논문으로 언어문제와 시작을 다루었으나,

 이 작품도 제2권 제14장으로 중단하여 미완으로 끝났다.

1310년 신성로마 황제가 되기 위하여 하인리히 7세가 이탈리아로 내려왔을 때

이 고행의 시인은 모든 악에서 이탈리아가 풀려날 것으로 믿고 열렬한 서한을 보냈다.

그러나 피렌체를 비롯한 이탈리아의 모든 겔프당()의 도시는 맹렬히 하인리히 7세에게 반항하였고,

 1313년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단테의 피렌체 귀환의 꿈은 여지없이 깨어지고 말았다.

그 동안에 그는 라틴어로 《제왕론()》(전 3권)을 썼다.

그는 제1권에서 정의와 평화의 확립을 주장하였고,

제2권에서 제국은 각 시민이 선출한 정부에 의하여 통치되어야 하고,

이는 신의 가호로써만 가능하다고 주장하였으며,

제3권에서는 교황과 제왕을 분리하여 교황은 정신계를, 제왕은 물질계를 다스려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1315년 《피렌체의 친구에게 보내는 서간》에서는 모욕적 대특사()를 거부하였다.

이 해에 피렌체 정부는 단테 및 그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그러나 1318년 이후 라벤나의 영주 G.N.폴렌타는 유랑시인 단테에게 안식할 땅을 제공하여

세 아들은 성직자가 되고, 단테는 《신곡》을 완성하였다.

최대의 걸작 《신곡》은 단테의 문학적 ·종교적 사상의 결정()으로,

 <지옥편>은 1304∼1308년에, <연옥편>은 1308∼1313년에,

<천국편>은 그의 생애의 마지막 7년 동안에 완성하였다.

또한 그의 《농경시()》는 친구인 볼로냐대학 교수 G.데르 비르지리오에게 보낸 목가()이다.

1302년 초에는 베로나에 가서 《수륙론()》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신곡》 <천국편>의 제25장 첫머리에서 그는 피렌체 시민이 자신을 계관시인()으로

맞이해 줄 것을 희망하였으나, 1321년 9월 라벤나 영주 폴렌타의 외교사절로 베네치아에 다녀오는 길에

죽음으로써 그의 그러한 꿈마저 덧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폴렌타는 이 시인의 죽음에 대하여 최대의 애도를 표하고, 라벤나의 땅에 묻었다.

그 묘소의 건조는 내란으로 인하여 천연()되다가,

1482년 B.벰보가 조각가 P.롬바르도에게 명하여 완성시켰다.

출처-네이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금, 만나러 갑니다
도이 노부히로 감독, 나카무라 시도 외 출연 / 엔터원 / 2005년 6월
평점 :
품절


아내이자 엄마인 미오(다케우치 유코)가 세상을 떠난 뒤

남겨진 타쿠미와 유우지는 늘 쓸쓸히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미오가 유우지에게 남긴 동화책처럼

미오가 비의 계절에 다시 돌아오리라는 한가닥 기대를 가지는데

그러던 어느날 장마와 함께 홀연히 나타난 미오

그녀는 정말 다시 돌아온 것일까?

 

생각도 못한 반전(?)에 다시금 맘이 찡해진 영화

타쿠미와 유우지에게 미오가 떠나간 빈 자리는 너무나 컸다.

아내와 엄마를 잃었다는 것은 역시 엄청난 상실인 듯

그런 부자앞에 다시금 나타난 미오는 

전혀 그들을 알아 보지도 기억하지도 못한다.

미오에게 다시금 그들의 사랑의 역사를 들려 주는 타쿠미

그리고 다시 첨부터 시작하는 그들의 사랑

하지만 장마는 그리 길지 못하고 미오가 떠날 날이 다가오는데...

 

엄마가 오게 하려고 비를 간절히 기원하는 유우지의 모습과

돌아가야 하는 날이 다가오자 유우지에게 홀로서기를 시키는

미오의 모습은 정말 가슴아팠다.

엄마가 보고 싶은 유우지와 남편과 아들을 두고 떠나야 하는

미오의 안타까운 상황이 보는 이의 맘을 싸하게 만들었다.

특히 유우지의 생일 케Ÿ揚?유우지가 18살 될 때까지

미리 예약해 놓는 미오의 아들에 대한 사랑이 돋보였다.

 

한편 타쿠미와 미오의 고등학교때부터의 서로 고백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짝사랑을 지켜 보는 재미도 솔솔했다.

그리고 미오가 손이 시리다며 타쿠미 옷 주머니 속에 손 넣는 장면

그녀의 손을 주머니 속에서 꼭 잡는 모습이 넘 부럽고 보기 좋았다.

흐드러진 해바라기 속에서 둘의 키스씬도 물론 명장면

 

짧은 시간일지라도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미래를 선택하는

미오의 사랑과 용기도 부러웠다.

나도 "기다려주세요. 지금 만나러 갑니다"라고

내게 말해 줄 사람이 있다면 좋을텐데...ㅜ.ㅜ

 

영화 속 커플인 다케우치 유코와 나카무라 시도가

이 영화를 통해 실제로 결혼까지 골인하여

영화 속 그들의 연기가 더욱 실감났던 가슴 따뜻한 영화

(물론 지금은 이혼했지만 ㅋ)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arine 2007-03-24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이혼했나요? 안타깝군요... 하긴 여자가 좀 아깝긴 했지만...

sunny 2007-03-25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케우치 유코가 많이 아깝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