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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5년 8월
평점 :
대한민국 대표작가 중 한 명인 조정래 작가는 '태백산맥'을 비롯한 대작 소설들로 명성이 자자한
소설가지만 기본 10권인 이들 작품들은 쉽게 손을 댈 수 없어서 그의 작품은 '황토', '유형의 땅'과
근래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정글만리'를 읽어봤었는데 비록 그를 대가로 불리게 한 대작들은
아니었지만 그가 왜 국민작가라는 칭송을 받는지는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책의 화두는 우리 사회의 가장 큰 화두 중 하나인 경제민주화였다.
정치민주화는 나름 이뤄냈다고 자평할 수 있지만 경제민주화는 아직 요원한 일이다.
돈이 모든 가치의 척도이자 세상을 지배하는 힘인 자본주의 세상에서
서양의 선진국들이 수 백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이뤄냈던 경제성장을 단기간에 압축해서 해내다 보니
대기업 위주의 성장정책을 쓸 수밖에 없었지만 어느 정도 경제가 궤도에 오른 지금
그 폐해를 시정하기가 쉽지 않은 실정이다.
기업의 투명 경영과 사회적 책임, 이윤의 사회 환원 등을 요구하는 국민적인 열망은 강렬하지만
기업은 물론 이들을 감독, 감시해야 할 정부나 언론 등은
늘 기업 편에 서서 이들의 편법을 눈 감아주기에 급급하다.
왜 이런 일들이 계속 반복될 수밖에 없을까 하는 의문들을 갖기 쉬운데
작가는 이 책에서 그 적나라한 부패의 고리를 잘 보여준다.
국내 유수의 재벌 일광그룹은 라이벌인 태봉그룹이 비자금 사건으로 무죄를 받은 반면
자신들은 회장이 실형을 살고 나오자 태봉에 못지 않은 영향력 확보를 위해
회장 직속의 문화개척센터를 발족한다.
회장의 오른팔인 윤성훈을 필두로 태봉에서 스카웃한 박재우, 실무책임자인 강기준의 삼두마차로
정관계, 언론 등 전방위로 로비스트 역할을 할 사람들을 끌어모은다.
그리고 건설사를 이용해 조성한 1조대 비자금을 바탕으로 설, 추석 등 명절과
가족들 생일까지 챙기며 자신들의 우군들을 만들어놓는다.
군사작전을 방불케하는 이들의 치밀한 전략은 비자금 사건이 다시 터졌을 때 바로 효과를 발휘한다.
검찰수사는 유야무야 되고 언론은 거의 사건을 다루지 않는다.
평상시부터 뇌물로 관리하는 정관계인사들이나 광고로 생명줄을 쥐고 있는 언론사가
재벌에게 불리한 행동을 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수사방침에 반기를 든 검사는 제주도로 좌천되어 옷을 벗고
비난조의 칼럼을 실은 신문사는 광고가 당장 끊기고, 칼럼을 쓴 교수는 대학 재임용에서 탈락한다.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을 누리는 재벌은 불법상속과 경영권 승계로 그들만의 제국을 영구히 이어가려
하지만 시민단체 등이 이에 대한 제동을 건다. 물론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 할 수 있어
계란으로 바위치기나 다름 없지만 이들의 문제제기는 그나마 재벌의 행동을 감시하는
소중한 역할을 하는데 그나마도 이를 무력화하기 위한 재벌의 비열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다.
이 책을 보면 우리의 재벌이 어떤 식으로 그들의 지위를 계속 유지해나가고 있는지를 여실히 알 수 있다.
불법 비자금을 바탕으로 속칭 힘 쓸 수 있는 사람들을 돈으로 구워삶아 약을 미리 쳐놓고
문제가 생기면 이들을 총동원해서 철저히 봉쇄하고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자들은
어떤 나쁜 짓을 해서라도 짓밟아 다시는 대들지 못하게 만든다.
아무리 돈이 좋다지만 돈에 영혼도 파는 모습들이 씁쓸하기만 했는데
문제는 이런 작태에 분노하면서도 잠시뿐이라는 점이다.
각종 사건이 터지면 그 순간만 난리들을 치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잊어버리는 국민들의 무관심은 이 책의 표현대로 자발적 복종을 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이 책에서는 재벌들을 직접 다루기보단 그들 밑에서 각종 궂은 일을 하는
자칭 골든패밀리들의 얘기를 흥미진진하게 보여줬는데 서민들은 생각도 하지 못할 수십 억
스톡옵션을 챙기고도 불만을 터트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이런 인간들은 완전히다른 세상에서 사는 인간들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지금 돌아가고 있는 세상을 보면 여전히 경제민주화란 요원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긴 하는데
그래도 이런 책들을 통해 대중들이 늘 깨어있다면 재벌들의 만행이
조금이나마 줄어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져본다.
책의 서두에 여러 대문호들의 글이 실려 있다. '진정한 작가이길 원하거든 민중보다 반 발만 앞서 가라.
한 발은 민중 속에 딛고'라는 톨스토이의 말, '진실과 정의 그리고 아름다움을 지키는 것이
문학의 길이다'라는 타고르의 말, '작가는 모든 비인간적인 것에 저항해야 한다'라는 빅토르 위고의 말,
'불의를 비판하지 않으면 지식인일 수 없고, 불의에 저항하지 않으면 작가일 수 없다'라는 노신의 말,
'나랏일을 걱정하지 않으면 글(시)이 아니요, 어지러운 시국을 가슴 아파하지 않으면 글이 아니요,
옳은 것을 찬양하고 악한 것을 미워하지 않으면 글이 아니다'란 정약용의 말까지
문학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말들인데 조정래 작가는 그간의 작품들은 물론
이 작품을 통해서도 우리 사회의 치부를 드러내면서
어떻게 세상이 변화되어야 하는지를 몸소 잘 보여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