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창작 본능을 발산하고 싶은 분들은 여기 SNS 유일 대한민국 청춘들을 위한 창작 소셜 페이지 브라이터(B_Writer)를 주목해주세요!

여기서 브라이터란?

'Bright'(밝히다)와 'Writer'(작가, 저술가)를 결합한 신조어로써, 창작 능력을 마음껏 발산하여 따분하고 지루한 세상을 환하게 밝혀주는 크리에이티브(creative)한 사람을 뜻합니다. 창작을 사랑하는 각 분야의 청춘 아마추어들, 우리는 그들을 '브라이터'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무언가 쓰고 싶고,
무언가 그리고 싶고,
무언가 만들고 싶다면,
당신이 바로 브라이터입니다.

글, 그림, 사진, 동영상 등등. 다양한 분야의 창작물, 좋습니다. 누구나 오셔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업로드하고 공유하면서 서로 칭찬해요. 자신의 창작 능력을 자랑하고 싶은 분들, 환영합니다. ^_^

http://www.facebook.com/B2writer

 

 

P.s) 2013년에 같은 학교 다니는 지인과 같이 야침차게 개설한 페이스북 페이지입니다. 개설된지 얼마 안 되어서 많이 미흡하지만 대학생들의 무한한 창작 욕구를 마음껏 발산할 수 있는 문화적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 저의 목표입니다.

 

'20대 청춘' 알라디너 또는 이제 곧 대학 새내기가 될 예비 청춘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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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예술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1. 비트겐슈타인 평전 / 레이 몽크 (필로소픽)

 

나는 철학을 심도 있게 공부하거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철학을 만든 철학자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철학자의 삶을 들여다보면 사상의 원류를 발견한다면 철학이 어렵게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관심 있는 철학자의 평전이 출간되면 무척 반갑다. 그리고 철학을 공부하기 전에 가질법한 철학자에 대한 편견도 말끔히 씻어낼 수 있다.  

 

 

 

 

 

 

 

 

 

 

 

 

 

 

 

 

 

2. 사이언스 이즈 컬처 / 노암 촘스키, 스티븐 핑커, 에드워드 윌슨 외 (동아시아)

 

8기와 이번 12기 신간평가단 페이퍼를 작성하면서 겪는 애로사항은 눈에 띄는 과학도서 한 권을 고르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문과 계열이라서 좋은 과학 분야 도서를 고르는 안목이 부족한 것도 있지만 점점 어려워지는 국내 도서시장 속에서 과학 분야 도서가 대중의 많은 관심을 받는 경우는 하늘에 별 따기다. 학문 간의 경계는 서서히 허물어져 가고 융합의 시대로 가고 있는 지금, 과학이 우리의 문화와 일상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리걸음 수준의 과학의 대중화는 아이러니하다. 단지 과학만이 주도적으로 나서서 과학의 대중화를 부흥하기에는 이제는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인문학, 소셜 네트워크, 사회문화 등 다양한 분야와 함께 시대적 유행에 맞는 과학의 대중화 노력이 필요하다. 나는 이 책이야말로 시대적 흐름에 적합한 최적의 도서라고 생각한다.    

 

 

 

 

 

 

 

 

 

 

 

 

 

 

 

3. 멈춰라, 생각하라 / 슬라보예 지젝 (와이즈베리)

 

나는 국내에 번역된 지젝이 쓴 책이랑 그의 사상을 소개하거나 분석한 각종 책들을 단 한 권도 읽어보지 못했다. 지젝이 쓴 <삐딱하게 보기>가 집에 소장되어 있지만 읽어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지젝을 알려면 헤겔, 마르크스, 라캉 등에 대해서 기본적인 선학습이 되어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최근에 나온 지젝의 신작을 골랐다. 지젝의 신작은 금융위기로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는 한편 정치적 압제에서 벗어나려는 투쟁이 세계 곳곳에서 전개됐던 2011년의 희망과 절망, 기회와 위협을 다각도로 조명하고 있다. 그의 분석을 통해 지금의 현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면 내용이 어렵더라도 꼭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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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모노로그 2013-01-05 22:35   좋아요 0 | URL
우와 ~ 저랑 같은 책을 추천하셨네요 ㅎㅎ
추천 드가기 전에 ㅎㅎㅎ
다른 분들의 추천서를 보기로 하여 들렸는데 ㅎㅎㅎ
멈춰라는 제가 읽은 책이라 ~ 패쑤 하구요 ㅎㅎ비트겐슈타인 평전하고 사이언스 이즈 컬처는 추천하려고 합니다요 ~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cyrus 2013-01-05 23:00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드림모노로그님, 반갑습니다. 이번 신간평가단 활동하시는 분이시군요. 사실 저도 평전이랑 사이언스, 딱 두 권만 선정되는게 소원입니다.ㅎㅎ 드림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요, 서재 자주 들릴께요 ^_^
 

 

 

 

 

 

 

 

 

 

 

설야(雪夜)

                                               김광균


어느 먼-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나리면

먼-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衣裳)을 하고
흰 눈은 나려 나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우에 고이 서리다.




... 겨울날의 하얀 추억, 그 결정(結晶) 위에 수정(水晶)처럼 고이 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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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크 슈미트의 『근대회화의 혁명』를 읽다가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저자는 근대미술의 선구자로 프랑스의 사실주의 화가이자 판화가인 오노레 도미에(1808~1879)를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도미에는 대상의 특정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 왜곡하거나 변형시키는 데포르마시옹(déformation) 기법을 통해 프랑스 사회의 어둡고도 진실된 면을 신랄하게 묘사했다. 슈미트는 도미에의 회화적 기법을 기존의 관습을 탈피하는 획기적인 시도로 평가하고 있다.

 

 

 

 

 

 

 

 

 

 

 

 

 

 

 

 

 

 

 

 

 

 

 

 

 

 

 

 

 

사실 지금까지도 근대회화의 선구자 또는 시조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미술사가들마다 의견이 다르다. 근대회화 또는 근대미술의 시점 역시 의견이 분분한데 일반적으로 프랑스 혁명 이후 시민사회가 성립된 19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하고 있다. 이 때 등장한 미술사조가 바로 인상주의다. 인상주의 미술을 지향하는 일명 인상파 화가들은 자연을 하나의 색채현상으로 보고, 빛과 함께 시시각각으로 움직이는 색채의 미묘한 변화 속에서 자연을 묘사하고자 했다.

 

 

 

 

클로드 모네  「인상 : 해돋이」 1872년

 

 

전통적인 회화기법과 사물의 고유색을 부정하고 색채ㆍ색조ㆍ질감 자체에 관심을 두는데, 특히 시간의 변화에 따른 색채의 변화와 자연에서 순식간적으로 일어나는 인상을 포착하려고 했다. 그래서 인상주의의 본질은 서양미술의 뿌리인 ‘대상 재현적 사실주의’의 전통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모방론의 원리인 원근법과 명암법을 파괴하는 것이다. 클로드 모네가  「인상 : 해돋이」를 1874년 제1회 인상파전에서 출품된 시점, 다시 말하자면 인상주의의 서막을 알리는 이 시기를 근대회화의 출발점과 동등하게 평가하기도 한다.

 

 

 

 

에두아르 마네  「팔레트를 든 자화상」 1879년

 

 

하지만 나는 근대회화의 진정한 선구자를 도미에, 모네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들보다 먼저 세상을 떠들석하게 만든 위대한 작품을 먼저 남긴 에두아르 마네(1832~1883)이다. 마네가 1863년에 살롱에 출품한 「풀밭 위의 점심 식사」는 프랑스 미술계를 떠들석하게 할 정도로 논란의 중심이 되었는데 이 때야말로 근대회화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마네는 도미에와 모네에 비해 제작 활동을 빨리 한 편이며 이들보다 먼저 유명세를 탔다. 모네가 1874년 인상파전에서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린 것에 비하면 마네는 이미 9년 전에 화가의 등용문이라 할 수 있는 살롱에서 보수적인 프랑스 미술계를 뒤흔들었다. 도미에는 1830년에 시사 주간지 『라 카리카튀르』(La Caricature)의 삽화가 활동으로 미술 활동을 시작했지만 판화, 유화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때는 1879년이다.

 

 

 

 

에두아르 마네  「풀밭 위의 점심 식사」 1863년

 

 

재미있게도 마네는 인상파전에는 단 한 번도 자신의 그림을 출품한 적이 없다. 모네와 일부 화가들과의 약간의 교류만 있을 뿐 마네는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주지 않는 살롱전 출품을 고집했다. 그러나  전형적인 기성회화를 압축하고 있는 살롱에서 그 당시 새로운 근대적 회화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한다.

 

 

 

 

 

 

 

 

 

 

 

 

 

 

 

 

 

 

 

 

 

 

 

 

 

 

 

 

 

 

1863년 살롱전에 출품된 「풀밭 위의 점심 식사」는  당시 미술계에 큰 파문을 일으키며 엄청난 비난에 휩싸였다. 정장 차림의 두 남자들 사이에 한 여인이 벌거벗고 앉아 정면을 응시하는 그 도발적인 모습은 비평가들은 물론 관람객들까지 몹시 불편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후 이 그림에 말할 수 없는 혹평이 쏟아졌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별 것 아닌지만, 아카데미 풍의 작품들을 선호하던 19세기 중반의 보수적인 시각으로 볼 때, 이 그림은 전통 양식에 대한 불손한 도전이자 보는 이들의 눈을 어지럽히는 외설에 지나지 않았다. 살롱에서 낙선한 이후 마네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림은 '목욕'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전시회에 선보여졌지만, 이번에는 대중들의 비웃음을 샀다.

 

이 그림에서 핵심은 나체 여인이다. 하지만 아카데미풍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여인의 몸매가 아니라, 균형감 없는 몸매로 투박하고 천한 느낌을 주는 누드라서 우선 불쾌감을 주었다. 고전적인 누드화처럼 서 있거나 누워있지도 않고 제멋대로 앉아 있는 자세도 왠지 선정적이어서 호감을 주지 못했다. 한마디로 이상적인 여체의 모습이 아닌 사실적인 여인의 나체가 불쾌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정장 차림의 신사들을 등장시킨, 당시만 해도 파격적인 구도로 말미암아 많은 이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풀밭 위의 점심 식사」는 음란하고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파문을 몰고 왔지만, 실은 부르주아의 도덕성에 대한 비판으로 읽히면서 비난은 더욱 증폭되었다. 일견 신사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매춘을 즐기는 부르주아의 가식과 이중성에 대한 마네의 고발이라는 해석이 바로 그것이다. 이 그림에서 중요한 것은 구도 보다 화가의 의도라는 비평이 주를 이루면서 마네는 부르주아를 자극해서 유명세를 타고 싶어한다는 의심을 사기도 했다. 따라서 당대에 이 그림은 매우 '부적절하고 위험한 욕구'를 지닌 그림으로 평가되었다.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1863년

 

 

마네가 근대회화의 선구자일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역사적인 이유가 있다. 바로「풀밭 위의 점심 식사」논란이 종식된 지 얼마 안 되어 마네는 자신이 그린 누드화 한 점으로 '이슈메이커'가 되었다. 이슈의 중심이 된 그 작품이 바로 「올랭피아」다.

 

마네의 「올랭피아」는 전통적으로 인식되어 왔던 여성 누드의 스타일을 새롭게 탈바꿈시켰다. 「풀밭 위의 점심 식사」를 출품한 지 2년 후, 「올랭피아」를 살롱에 출품했는데 2년 전 논란에 맞먹을 정도로 대형 스캔들이 일어났다. 마네는 「올랭피아」를 제작하기 위해 과거 고전주의 화가들의 누드화를 참고했는데 대표적인 그림으로는 티치아노(1488?~1576)의 「우르비노의 비너스」와 앵그르(1780~1867)의 「그랑 오달리스크」등이 있다. 그러나 마네는 선배 화가들의 도상학적 주제를 참고했지만, 이전과는 다른 누드화를 선보였다.

 

 

 

 

베첼리오 티치아노  「우르비노의 비너스」 1538년

 

 

마네 이전의 나체는 신화와 역사 속 인물인 비너스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는 현실의 나체이기보다는 인간이 이상으로 삼아야 할 추상적 존재의 나체상인 것이다. 마네는 이런 고정관념이 지배하는 경직된 사회에서 남성적 욕망의 대상으로서 동시대 여성의 누드화를 그린 것이다. 이상과 추상적 존재의 전통 누드화인 비너스와는 확연히 다른 세속적인 나체라는 점을 강조했다. 마네는 현실 속 여성, 즉 매춘부를 통하여 차갑고 세속적인 프랑스 사회의 리얼리티를 선사했다.

 

이 두 작품 때문에 미적 양식을 고양하고 아름다움에 심취하려던 사람들의 심리를 거스르고 되레 그들에게 모욕감을 안겨주었다는 이유로 당대에 마네는 퇴폐적이고 불경스런 화가로 낙인찍혔다. 하지만 전통의 굴레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회화 양식으로 인해 오늘날 그는 '최초의 근대 화가' 내지는 '현대 회화의 시조'로 평가받을 만한 자격이 충분하다. 고전적 구조를 벗어나 회화의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올랭피아」는 근대성을 상징하고 있으며, 야외 회화에 대한 마네의 선구자적 안목으로 인해「풀밭 위의 점심 식사」는 모네보다 먼저 인상주의 출현을 예고한 작품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무엇보다 마네는 신화나 관념의 세계에서 해방되어 일상의 가치를 환기시키며 회화 전통과도 결별을 고했다. 그의 업적은 '근대회화의 혁명을 알린 선구자'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부여해도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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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31 20: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01 00: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의자놀이 - 공지영의 첫 르포르타주, 쌍용자동차 이야기
공지영 지음 / 휴머니스트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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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 뺏기 놀이’라는 게임이 있다. 사회자가 신호를 보내면 즐겁게 춤추며 돌던 놀이의 참가자들은 개수가 하나 모자란 의자로 달려가 앉아야 한다. 의자는 하나씩 줄어들고, 결국 둘이서 하나의 의자를 차지해야 하는 순간이 오게 된다. 거기서 즐거운 춤추기는 끝난다. 어릴 적 즐거웠던 의자 뺏기 놀이가 어른이 되면서 '경쟁'으로 인식된다. 마지막 의자 하나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를 '경쟁의 상대'로 봐야하는 것을, 어린 시절엔 미처 알지 못했다. 지금으로부터 3년 전부터 시작된 쌍용자동차 노조의 ‘의자 뺏기 놀이’는 끝났다. 그러나 너무나도 길었던 의자놀이에 최후의 승자는 없다. 살아남은 자와 죽은 자 모두 잔인한 상처만 남았을 뿐이다.

 

지난 2009년 경기도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에서 벌어진 77일간의 옥쇄파업은 경찰의 강제 진압을 거쳐 노사가 해고자 일부를 무급휴직으로 돌리는 데 합의하면서 상황은 마무리됐다. 쌍용차 사태의 개요다. 시간이 3년 넘게 흐르면서 잊힌 기억을 되살린 건 ‘죽음 행렬’이다. 그 기간 쌍용차 관련자 중 22명이 사망했고, 그 중 12명은 자살했다. 파업의 후유증은 현재진행형이다.

 

정리해고란 경영이 악화한 기업이 생존을 위해 불가피하게 구조조정을 할 때 종업원을 해고할 수 있는 합법적인 제도다. 하지만 기업들이 아무 때나 정리해고를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생존을 위해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가 있을 때에만 정리해고를 단행할 수 있다. 정리해고하려면 사전에 근로자들에게 충분히 상황을 설명하고 공정한 기준에 따라 대상자를 선정해야 하며, 해고 50일 전에 해당자에게 알리고 고용노동부에도 신고해야 한다. 노동법은 근로자들에게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 등 노동 3권을 보장하는 대신 사측엔 정리해고나 직장폐쇄 등의 권리를 인정하고 있다. 정리해고에 대해 노동단체 등은 ‘해고는 일종의 살인’이라며 강하게 반대한다. 이에 대해 기업 측에선 정리해고해서라도 경쟁력을 높이지 않으면 결국은 회사가 망해 모두가 피해를 본다고 주장한다.

 

쌍용차 문제는 근로자들의 삶의 터전이고 대한민국 경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쌍용자동차 회사와 그 종업원, 그리고 이 회사에 투자한 주주, 채권자들의 시각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 지금이라도 쌍용차는 노사합의 사항을 이행하고, 적반하장격의 노조와해 시도를 멈춰야 한다. 노동자들에게 심각한 육체적 정신적 상처를 입힌 것에 대해서도 진심 어린 사과와 함께 적극적인 치유책을 마련해야 한다. 기업의 경쟁력은 경영진에만 달린 게 아니다. 노사가 신뢰와 타협의 토대 위에서 힘을 합쳐 피와 땀을 흘려야만 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희망을 잃지 말고 고통을 함께 나누자’는 따뜻한 연대의 손길을 노동자들에게 내미는 일이다.

 

그리고 쌍용자동차 공장에서 진행된 ‘의자놀이’를 대중과 언론은 더는 방관해서는 안 된다. 노동자의 처절한 목소리를 우리는 그냥 무심코 지나치고 있다. 쌍용차 노동자들은 ‘쌍용차 출신’이라는 낙인이 워낙 강해서 일자리를 가질 수 없도록 이미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일자리를 찾기란 매우 어렵다. 대기업에서 추락했다는 무기력증과 사회적으로 봉쇄됐다는 생각 등이 겹치면서 해고노동자들에게 이중고통을 안겨주고 있다. 현존 국가와 자본의 구조가 갖는 폭력성과 그 비인간성도 문제이지만, 정작 더 큰 문제는 이미 공감의 능력과 감수성을 잃어버린 우리 사회, 그리고 그 사회를 구성하는 우리다. 쌍용차 사태 이후에 벌어진 일련의 죽음에 대해 안타깝게만 여긴다고 해서 공감이라고 할 수 없다. 감성에 매몰된 대중과 정치의 관심은 눈물 언저리만 맴도는 공감을 가장한 방관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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