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년을 향한 '반쪽' 요정의 무모한 욕정

 

 

 

 

 

 

 

 

 

 

 

 

 

 

 

 

 

 

누군가는 말한다. 인생이란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을 찾기 위한 여정이라고. 플라톤은 <향연>에서 “인간은 본래 양성을 지녔는데, 신이 반쪽으로 분리한 후부터 잃어버린 반쪽을 찾으려고 헤맸다.”라고 썼다. 곧 사랑은 우리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에 대한 욕망이다. 사랑과 욕망은 불가분의 관계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순수한 감정보다 집착의 욕망이 더 앞선다면 잃어버린 반쪽을 찾기는커녕 더 멀어지게 만들 뿐이다.

 

 

 

바르톨로메오 슈프랑거  『살마키스와 헤르마프로디토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수록된 ‘살마키스와 헤르마프로디토스’의 이야기는 욕망이 앞선 사랑이 부른 슬픈 운명을 보여주고 있다. 헤르마프로디토스는 전령의 신 헤르메스와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어느 날 헤르마프로디토스는 인적이 드문 아름다운 호수에 오게 되었는데, 그 호수에는 살마키스라는 님프(Nymph, 요정)가 살고 있었다. 그녀는 멋진 외모의 헤르마프로디토스에게 한눈에 반하여 구혼하였다. 그러나 헤르마프로디토스는 아직 어린 소년이었다. 그는 사랑을 몰랐다. 요정의 구애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헤르마프로디토스에게 한 번 퇴짜 맞은 살마키스의 심장에는 미소년을 향한 사랑의 불꽃이 꺼지지 않았다. 헤르마프로디토스의 거절은 욕망으로 지펴진 사랑의 불꽃을 더욱더 피어오르게 하였다.

 

어느 날, 살마키스는 혼자 호수에서 물놀이하고 있었는데 그를 지켜보던 살마키스는 이때를 틈 타서 알몸의 미소년을 와락 끌어안았다. 헤르마프로디토스는 자신을 부둥켜안은 살마키스를 떼어놓으려고 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이에 살마키스는 자신과 헤르마프로디토스가 한몸이 되어 영원히 떨어지지 않게 해 달라고 신에게 빌었다. 이 기도가 이루어져 둘의 몸의 하나가 되었고 헤르마프로디토스는 남녀의 성을 함께 지니게 되었다. 영어에서 ‘암수한몸’, ‘자웅동체’를 뜻하는 ‘Hermaphrodite'는 헤르마프로디토스에서 유래한 말이다.

 

만약에 살마키스가 헤르마프로디토스로부터 퇴짜를 맞은 이후에 적극적으로 구애 공세를 펼쳤다면 두 사람은 사랑의 결실을 볼 수 있었을까. 헤르마프로디토스 당사자가 살마키스를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끝났을 것이다. 다만 상대방에 대해서 잘 모르면서 섣부른 사랑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욕망의 몸으로 그를 껴안은 살마키스의 행동이 아쉽다.

 

16세기 플랑드르 화가 바르톨로메오 슈프랑거가 묘사한 살마키스를 보라. 강한 욕망을 상징하는 붉은 옷을 벗어 던지며 소년을 안으려는 교태 가득한 몸짓을 하고 있다. 그녀의 몸짓을 보니 살마키스의 사랑을 운명이라 말할 수 있는지 의문이 생긴다. 살마키스에게는 헤르마프로디토스와의 짧은 만남이 달콤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헤르마프로디토스에게 그날 사건은 한낮의 봉변이었을 것이며, 살마키스는 욕정에 사로잡힌 여인 이상의 의미를 주지 못했을 것이다.

 

 

 

 나의 반쪽을 찾는데도 '사랑의 기술'이 필요한가요?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 서문 첫 장부터 우리에게 심오한 질문을 던진다. “사랑은 기술인가?”(p 13) 대부분의 사람은 사랑을 즐거운 감정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사랑을 배워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원인으로 사랑 할 줄 아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는 문제, 대상의 문제, 사랑에 머물러 있는 상태의 혼돈 이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사랑의 실패를 극복하기 위한 대책으로 이론을 습득 후 실천을 통해서 기술을 습득해야 하는데, 우리는 사랑 이외의 거의 모든 일, 성공, 위신, 돈, 권력 등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사랑을 배우려 하지 않는다.

 

프롬은 우리가 쉽게 범하는 사랑의 오류를 지적한다. 사랑을 능력에 의해서가 아닌 대상에 의해 성립된다는 점을 믿고, 오직 사랑을 받는 대상 한 명만을 사랑하는 것이 사랑의 강렬함을 입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까닭은 사람들이 사랑이 활동이며 영혼의 힘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며 오직 올바른 대상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믿고 나머지는 무시하기 때문에 오류를 일으킨다고 말하고 있다. 헤르마프로디토스를 향한 살마키스의 사랑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사랑에 빠지는 폭발적인 경험과 성애(性愛)를 혼동하는 오류를 범한다. 성적 욕망은 대부분 사람의 마음속에서 사랑이라는 관념과 짝을 이루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원할 때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기 쉽다. 그러나 성애에 진짜 '사랑'이 결여된 상태라면 분리 후에 심한 격리감을 느끼게 된다. 만약에 살마키스와 헤르마프로디토스의 자웅동체 신화를 프롬이 봤다면 공서적(共棲的) 합일이 만들어낸 비극적 사랑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프롬은 ‘공서적 합일’을 사랑의 미숙한 형태로 보고 있다. (<사랑의 기술> p 36)

 

 

 

 공서적 합일의 수동적 형태 - 마조히즘

 

 

 

 

 

 

 

 

 

 

 

 

 

 

 

 

 

프롬은 공서적 합일의 수동적 형태가 피학대 음란증, 즉 마조히즘(Masochism)이라고 말한다. 피학대 음란증적 인간은 자신을 지휘하고 보호하는 사람에게 복종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에게 학대를 가하면서도 복종을 강요하는 사람의 일부에 귀속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무조건 복종, 의존함으로써 고립감에 빠지지 않지만, 독립성이 부족하다.

 

프롬이 보는 마조히즘의 모습은 오스트리아 작가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의 <모피를 입은 비너스>에서 볼 수 있다. 소설은 지배와 피지배 관계에 빗대어 욕망에 점철된 사랑을 은유한다. 마조히즘이라는 단어가 바로 이 작가의 이름에서 유래했을 만큼 사도-마조히즘의 '원조'격인 작품이다. 현대 포르노그래피의 효시 격인 소설로 알려져 있지만, 자극적이고 노골적인 성애 묘사보다는 인물의 심리 묘사가 탁월하다. 작가의 자전적 소설로, 자신과 젊은 미망인 파니 폰 피스토르와의 주종 관계를 모델로 쓴 것이다. 실제로 이들의 주종 관계를 증명해주는 두 장의 계약서도 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위해 작성해서 보낸 계약서 내용만 봐도 소설의 줄거리와 프롬이 정의한 마조히즘을 짐작할 수 있다.

 

 

파니 폰 피스토르와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 사이의 계약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는 폰 피스토르 여사의 노예가 되어 그녀의 모든 지시나 명령을 여섯 달 동안 무조건 따를 것임을 맹세한다. (중략) 그녀의 종인 그레고르(=자허마조흐)는 노예로서 여주인을 공손하게 받들어야 하며 그녀가 내리는 어떤 호의도 기쁜 선물이라 여기며 받아야 한다. 또한 그녀에게 사랑을 요구하거나 애인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려 해서는 안 된다. 반면에 파니 폰 피스토르는 되도록 자주 모피를 입을 것을 약속한다. 특히 잔인한 행동을 할 때 그렇게 한다.

 

(자허마조흐가 폰 피스토르에게 보낸 계약서, <모피를 입은 비너스> p 230~231)

 

 

 

나의 노예 앞!

내가 귀하를 노예로 받아들여 내 곁에 둠에 있어 조건은 다음과 같다.

어떤 상황을 막론하고 자신을 무조건 버린다.

귀하는 내 의지 외에는 어떤 의지도 갖지 못한다.

귀하는 내 손아귀에 든 눈먼 도구로서 어떤 거역도 없이 내 명령을 모두 이행해야 한다. 귀하가 나의 노예임을 망각하고 어떠한 일에 있어서든지 무조건 복종을 하지 않을 경우 나는 귀하를 완전히 내 임의로 처벌하고 징계할 권리를 갖는다. 이때 귀하는 어떤 불평불만도 해서는 안 된다. (하략)

 

(폰 피스토르가 자허마조프에게 보낸 계약서, 같은 책, p 232)

 

 

 

 공서적 합일의 능동적 형태 - 사디즘

 

 

 

 

 

 

 

 

 

 

 

 

 

 

 

 

 

 

 

 

 

 

 

 

 

 

 

 

 

 

 

 

 

 

공서적 합일의 능동적 형태는 가학성 음란증인 사디즘(Sadism)이다. 앞에서 언급한 ‘피학성 음란증-마조히즘’과 대응되며 마조히스트와 반대로 다른 사람을 자신의 일부로 귀속해서 명령, 복종하려고 한다. 자신을 숭배하고 복종하는 피학성 음란증적 인간에게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며 가학성 음란증적 인간 역시 이러한 관계를 통해 고독감을 피하려고 한다. 사디즘은 악명 높은 소설가 마르키드 데 사드 후작에서 유래된 명칭으로 유명하다. 마조히스트의 원형은 자허마조흐의 소설에서 찾을 수 있지만 사실 사드의 소설 속 등장하는 비이성적인 인물들은 피학성 음란증적 인간과 가학성 음란증적 인간이다.

 

<사랑의 범죄>에 수록된 사드의 단편소설 ‘팍스랑즈, 혹은 야망이 낳은 과오’는 불운한 만남으로 이루어진 사랑의 끔찍한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부유한 집안의 딸인 팍스랑즈는 자신을 짝사랑하는 기병대 장교 고에가 있음에도 엄청난 부를 소유하고 빼어난 외모를 지닌 프랑로 남작과 결혼한다. 두 사람은 결혼의 축복을 받으며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사실은 프랑로 남작이 치밀하게 꾸민 간계의 함정이었다. 프랑로 남작은 잔인하게 인질을 살해하는 도적 떼의 우두머리였던 것이다. 도적의 소굴에 갇혀버린 팍스랑즈는 그곳에서 끔찍한 경험과 수모를 겪는다. 프랑로가 부재일 경우 그녀가 대신 인질을 살해해야 한다. 프랑로는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자신의 임무를 팍스랑즈에게 강요한다.

 

나는 당신을 매우 사랑합니다. 부인, 그러나 우리와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감정이라는 것은 의무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아마 그 점에 있어서 우리의 직업이 다른 어떤 직업보다 우월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으로 인하여 스스로를 망각하지 않는 직업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정반대입니다. 이 지상의 어떤 여인도 우리의 직분을 소홀히 하도록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직분을 수행하는 방법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죄악> ‘팍스랑즈, 혹은 야망이 낳은 과오’ 중에서)

 

 

 

 

 나의 한쪽을 찾기 위해서 잊지 말아야 할 것

 

 

 

 

 

 

 

 

 

 

 

 

 

 

 

 

 

 

무조건 완벽한 사랑을 찾으려고 하는 우리의 모습은 쉘 실버스타인의 동화 <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쪽은>에서 나오는 이 빠진 동그라미와 같다. 빠진 동그라미는 자신의 반쪽을 찾아 여행을 다닌다. 동그라미는 이가 빠졌기 때문에 떼굴떼굴 빨리 구를 수 없어서 벌레를 만나면 잠시 멈춰 이야기하고 꽃을 만나면 향기를 맡기도 하고 둥실둥실 바다도 건너며 꿈같이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그러다 결국 자기에게 꼭 맞는 조각을 찾게 되지만 완벽한 원이 된 동그라미는 너무 빨리 구르게 돼서 노래를 부르며 여행을 할 수도, 뜻대로 멈추고 싶을 때 멈출 수도 없게 되어 결국 조각을 살며시 내려놓고 다시 노래를 부르며 다른 조각을 찾아 나서게 된다.

 

완전한 형태의 원과 같은 사랑이 무조건 좋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완전한 사랑이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제대로 찾지 못했을 뿐이다. 즉, 쉽게 말하면 성숙한 사랑을 몰랐기 때문에 경험하고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프롬은 공서적 합일의 사랑과 대조되는 것을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의 사랑이라고 했다. 프롬이 말하는 긍정적 상태의 ‘완전한 사랑’은 바로 남녀 각자의 특성을 허용하고 자신의 통합성을 유지하면서도 고립감을 느끼지 않는다.

 

'사랑에 관하여 - 성 역할, 섹슈얼리티, 정체성'이라는 제목으로 하버드 대학교에서 강의를 진행하고 있는 마리 루티는 동등한 남녀 관계 성립을 강조하는 아주 흥미로운 반응을 소개한다. 그녀는 자신의 이성 친구들을 대상으로 간단한 설문조사를 했다. 여자친구나 아내가 전구 가는 모습을 본다면 매력이 떨어질 것 같으냐는 질문을 이메일로 보냈다. 이성 친구의 답장은 의외였다. 마리의 이성 친구들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에게 매력이 있다고 밝혔다. 오히려 여성의 사회적 진출을 따가운 시선으로 보며 그들을 무능력자로 여기길 좋아하는 보수주의적 남자에 대해서는 부정했다. (마리 루티 <하버드 사랑학 수업> p 50~53)

 

‘더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라는 말이 있다. 사랑을 논하는 데 강자는 뭐고 약자는 뭐냐 싶겠으나, 실제로 어떤 이들은 연인 관계에서 약자의 위치를 자처하곤 한다. 스스로의 열등감, 낮은 자존감이 관계에 투영되기 때문이다. 관계는 상대적인 것이라, 한쪽이 기울면 균형은 깨진다. 그리하여 그 숭고하다는 사랑에도 권력 구도는 형성되고, 감정의 문제는 욕망의 해소로 무게 중심을 옮겨간다. 그리고 연인 관계의 본질은 왜곡된다.

  

부부간의 사랑을 비유하는 말에 '비익연리(比翼連理)'라는 말이 있다. 비익조(比翼鳥)라는 새와 연리지(連理枝)라는 나무를 합친 말이다. 이 말은 당나라 때 시인 백낙천이 지은 <장한가>(長恨歌)에 나온다.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읊어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영원히 헤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소망이 담겨 있다.

 

한밤중 아무도 없을 때 서로 속삭이며                          夜半無人私語時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고                                         在天願作比翼鳥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자고 했었네                               在地願爲連理枝

영원한 하늘과 땅도 언제가 없어질 때가 있겠지만          天長地久有時盡

이 한은 끊임없어 끊어질 때가 없으리라                       比恨緜緜無絶期

 

              (<당시선 下> '장한가' 중에서, p 271)

 

 

두 개의 나뭇가지가 하나로 연결된 연리지를 보면 한쪽 나무가 말라 죽은 상태를 본 적이 있는가. 신기하게도 하나의 나무줄기로 합쳐져도 두 개의 나무의 상태는 멀쩡하다. 백낙천과 프롬이 말한 완전한 사랑은 나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이 만들어낸 사랑이리라. 제대로 된 나의 한쪽을 찾기 위해서는 '연리지 사랑'을 주목하자.

 

아름다운 길을 찾아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란 남녀가 만나 연애를 하고 결혼했다. 그리고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결혼에 대한 오해, 배우자에 대한 기대, 자기중심적 대화 등으로 소리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지 모른다. 서로 다른 환경, 성격이더라도 한 몸을 이루어 사랑으로 서로 부족한 점은 채워주고 나누고 베푸는 감정의 공명이 필요하다. 상대의 이야기에 서로 무반응이나 독백하지 말고 상대가 듣고 싶은 답변으로 반응하는 공감만 있으면 된다. 이것이 제대로 된 나의 한쪽을 찾는 아주 간단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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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민음사입니다.

3월 중순이 지나가는데 아직 아침저녁으로 쌀쌀하네요. 독자 분들 환절기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세요.

이번에 새로 나올 민음사 신간 도서『침대』서평단을 모집하고자 합니다.

이 책은 《가디언》, 《선데이타임스》, 《인디펜던트》, 《에스콰이어》등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던 데이비드 화이트하우스(David Whitehouse) 신간입니다.

이 책은 ‘이십 년 동안 침대에서 나오지 않는 남자’, ‘세상에서 가장 뚱뚱한 남자’라는 독특하고 흥미로운 소재로 ‘어른이 되는 것=특별함을 포기하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에 대한 거부, 자식의 인생을 망가뜨릴 수도 있는 부모의 헌신, 젊은 세대의 사회적 무기력을 은유하는 맬컴의 삶, 특별함에 대한 동경과 형제 사이의 애증, 자족적인 사랑 등 다양한 주제를 풀어 가고 있습니다.

 

 

 

 

남들과 똑같은 어른이 되어 똑같이 생활에 치이면서 그저 그런 삶을 살다 가는 것이 두려웠던 맬컴의 삶을 먼저 엿보게 되실 분들을 찾습니다.

서평단 모집 상세내용

- 응모 방법 : 리뷰 페이지를 자신의 블로그에 스크랩 한 뒤 읽고 싶은 이유를

간단하고 성실하게 댓글로 작성하여 스크랩 링크와 함께 남겨주면 응모 완료.

- 응모 기간: 2013.03.15 - 2012.03.25(열흘 간)

- 추첨 인원: 20명

- 서평단 발표: 2013.03.26(화) 오후

- 서평 기간: 2013.03.27-2013.04.10

많은 응모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원래 생소한 작가의 소설을 쉽게 읽지 않을 정도로 독서 편력이 심합니다. 하지만 이번에 출간하게 될 데이비드 화이트하우스의 소설 줄거리를 보고 나서 주인공 맬컴에 대한 이야기에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겪는 정신적 변화의 과정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위한 헌신'이라는 이름 하에 과잉보호하는 부모 그리그 그런 부모 속에 자라면서 정신이 무기력해지고 어른으로서의 성장을 두려워하는 자식. 이러한 관계의 설정은 단지 허구 속에만 있는 건 아닙니다. 우리나라에도 볼 수 있습니다. 저널리스트가 젊은 세대를 어떻게 묘사했을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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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들 - 500년 미술사와 미술 시장의 은밀한 뒷이야기
피에르 코르네트 드 생 시르 외 지음, 김주경 옮김 / 시공아트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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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그림, 얼마에요?"

 

 

 

 

 

빈센트 반 고흐  『탕기 영감』1887년

 

 

두 달 전에 예술의 전당 미술관에서 하는 반 고흐의 그림 전시회를 둘러보던 중에 있었던 일이다. 도슨트가 반 고흐의 초상화 <탕기 영감>을 설명하고 있었다. 자신을 빙 둘러싼 채 그림 설명을 듣고 있는 관람객들을 향해 이런 질문을 했다. "여러분, 현재 이 그림의 가격이 얼마인지 아세요?" 그러자, 관람객 중 한 사람이 질문에 대한 침묵을 깨고 용감하게 대답을 했다. "1억이요!" 도슨트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1억 조금 넘습니다. 정확한 가격을 아시는 분 없나요?" 전시회는 갑자기 경매장처럼 변했다. 관람객 한 명 한 명씩 아무 가격을 불러댄다. 2억, 3억 심지어 가장 큰 액수인 5억도 나온다. 고흐의 그림 가격을 정확하게 맞춘 관람객은 없었다. 도슨트는 "고흐의 <탕기 영감>은 아직 경매에 나오지 않아서 정확한 가격을 책정할 수는 없지만,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대략 10억 정도를 추산하고 있습니다."

 

 "그림 좋다. 이 그림 돈 좀 되겠지?"

 

 

그림 전시회에 가면 그림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관람객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림을 보는 게 아니라 그림이 돈 되는지 보는 유형이다. 가끔 그림을 진지하게 설명하는 도슨트에게 질문을 한다. "이 그림, 얼마에요?" 엉뚱하거나 잘못된 질의는 아니다. 요즘 우리나라 미술 시장이 확대되고, 미술품 경매 회사들이 늘어나면서 일반인들도 전시회 속에서만 보던 미술품을 쉽게 접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미술품은 곧 돈'이라는 공식이 성립해 버렸다. 신문지상에서도 ‘OOO 작가의 창작활동을 돕기 위해 XX그룹 또는 사업가 XXX가 몇억 원을 지원했다.’라는 기사보다는 ‘45억 원의 박수근 작품이 비자금으로 세탁되어…. 유명 작가 작품을 이중 담보로 수십억 원 불법 대출’ 등의 기사들이 눈에 띈다. 예술이 속물로 전락하고 있다.

 

 

 

 값비싼 그림, 돈만 있으면 만사 OK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가장 멋진 그림일수록 그림의 가격은 비싸다고. 여기서 말하는 '가장 멋진 그림'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뛰어난 묘사로 독특한 아름다움을 뽐내며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작품을 말한다. 쉽게 예를 들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불가사의한 미소로 수많은 세계의 관람객을 얼어붙게 만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의 가격은 어마어마한 액수라고 한번쯤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미술 시장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많이 다르다. 잘 그렸고, 우리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유명한 화가의 그림만 값비싼 그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 사람들의 오랜 무관심과 창고의 먼지 속에 파묻힌 무명 화가의 그림 한 점이 수십억 원을 호가하는 경우가 있다. 잘 그리든 못 그리든지 간에 말이다. 그림 한 점을 런던 소더비,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값비싼 가격의 옷을 입히는 건 간단하다. 그림의 가격을 높이기 위해서는 그 그림의 예술적 가치로만 결정되는 게 아니라 부호들이 가지고 있는 '돈'으로도 가능하다. 돈으로 돈 되는 그림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찰스 윌슨 필  『프린스턴 전쟁 직후의 조지 워싱턴』 1779년

 

 

미국 화가 찰스 윌슨 필(1741~1827)이 그린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전신 초상화는 미국인 초상화로는 세계 최고가를 기록했다. 2129만 6천 달러, 우리나라 돈으로는 무려 241억 원이 넘는 액수다. 뉴욕의 크리스티 경매에 이 초상화가 애초 예상가 1000만 달러의 두 배가 넘는 비싼 값에 낙찰되었다. 필은 이와 비슷한 작품을 7점이나 더 그렸으며 이외에도 여러 점의 복사본도 제작되었는데 신생 독립국으로서의 미국과 나라를 이끌어가게 될 신흥 정치가로서의 조지 워싱턴을 유럽에 알리는 데 큰 일조를 했다. 이 그림은 총 8점의 워싱턴 초상화 중에서 유일하게 익명의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 미국인은 나라의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미국 독립의 핵심이자 미국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조지 워싱턴이 승리의 기쁨에 만취한 채 여유롭게 서 있는 포즈를 보라. 영국을 완파하고 미국 독립의 선포를 상징하고 있는 이 그림을 미국인, 특히 돈 있는 미국의 부호들이 눈독 안 들일 리가 없었다.

 

 

 

빈센트 반 고흐  『의사 가셰의 초상』 1890년

 

 

반 고흐의 그림은 화가 생전에 달랑 한 점만 팔렸을 뿐 크게 인정을 받지 못했다가 화가 사후에 가장 값비싼 가격으로 책정된 유형이다. 고흐의 작품성이 후대에 와서야 빛을 보게 되어 가장 비싼 그림으로 된 것도 있지만, 소유와 경매의 과정에서 '돈의 힘'은 무시할 수 없다. 고흐의 또 다른 초상화인 <의사 가셰>가 그랬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 출신의 평범한 의사의 얼굴이 그려진 그림은 백 년 동안 12명의 주인을 만나야 했다. 돈으로 사고파는 과정을 통해서 <의사 가셰의 초상>은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 그림은 고흐가 자살하기 수주일 전 그렸다. 가셰 박사는 고흐의 정신 치료를 맡았던 신경과 전문의였다. 환자였던 고흐는 의사인 가셰에게 자신과 닮은 병적인 징후를 보았고 가셰의 얼굴을 자화상 그리듯 그려냈다. 그림은 고흐의 누이동생 요한나가 소유하고 있다가 300프랑의 가격으로 그림 수집가에게 판매하면서부터 거래의 여정(?)은 시작된다. 네덜란드, 프랑스, 덴마크, 독일, 영국 그리고 다시 독일. 이때 그림은 '퇴폐 그림'으로 낙인찍히는 수모를 겪게 된다. 히틀러의 수하였던 헤르만 괴링은 박물관으로부터 초상화를 압류, 외국에 판매함으로써 전쟁비용을 충당하고자 했다. 다행히도 그림은 독일 출신 은행가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유대인 금융업자에게 또 다시 팔게 되면서 주인의 얼굴이 자주 바뀌었다. 나치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유대인 금융업자는 그림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팔게 됨으로써 가셰의 여정은 여기서 끝이 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미술관에 전시된 지 30년이 지난 1990년에 가셰의 얼굴은 새로운 주인을 만나게 되었다. 새로운 주인은 일본 제지회사의 회장인 료헤이 사이토. 가격은 8250만 달러(한화 93억 2만 9천백만 원). 15년 동안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사이토는 뇌물 공여 혐의로 재판을 받고 3년 후 세상을 떠났는데 죽기 전에 유언으로 자신이 수집한 그림들과 함께 묻히고 싶다고 말했다. '자신이 수집한 그림들' 중에 가셰의 얼굴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이토의 유언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소유자가 고인이 된 상태에 지금 가셰의 얼굴은 누가 소유하고 있을까?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이 그림의 소유자가 누군지 모른 상태이다. 과거 네덜란드의 튤립 투기 못지않게 고흐의 그림 또한 부호의 지갑을 열게 할 정도로 투기가 심했다.

 

 

 

 

파블로 피카소  『파이프를 든 소년』 1905년

 

 

고흐와 더불어 가장 비싼 그림의 화가는 바로 파블로 피카소(1881~1973)다. 단순히 파이프를 들고 있는 파란 옷의 소년을 그린 이 그림 한 점은 피카소의 작품 활동 초창기 시절인 청색 시대 때 제작되었다. 이 그림 역시 억만장자가 구입해서 소유하고 있다가 2004년에 경매에 내놓았는데 앞에 소개한 고흐의 <가셰 박사의 초상화>의 가격을 경신하고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이 되었다. 동시에 처음으로 1억 달러를 넘은 기록 또한 가지게 되었다. 우리의 입을 떡 벌어지게 하는 어마어마한 고가의 액수도 놀랍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세계적인 재벌 화상인 래리 가고시언을 이긴 익명의 구매자가 현재 이 그림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래리 가고시언이라면 지금도 세계 미술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화상이다. 그의 재력을 제치고 이 그림을 구입한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루시안 프로이트  『잠자고 있는 사회복지 감독관』 1995년

 

 

 

 

프랜시스 베이컨  『삼면화』 1976년

 

 

소파에 누워 잠을 자는 뚱뚱한 사회 감독관의 누드를 적나라하게 그린 그림,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그로테스크한 세 가지 형체가 그려진 그림.이 두 가지 그림을 처음 본 사람 대다수는 그림의 가격과 두 점의 그림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면 놀랄 것이다. 2005년 미국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선정, 현재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축구 리그인 영국 프리미어리그의 첼시 FC 구단주인 러시아의 '큰 손' 로만 아브라모비치다.

 

외국 축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첼시 구단주 로만의 명성(?)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로만은 유독 축구를 가장 좋아하는 부호로도 잘 알려져 있다. 첼시 FC가 프리미어 리그 우승은 물론이고 세계 클럽 대항전에서도 우승 트로피를 차지하기 위해서라면 1년 안에 감독을 여러 번 교체할 정도로 구단주로서 악명 높기로 유명하다. 그래서 인내심 없는 그의 칼 같은 감독 해고 러쉬에 대해 비아냥거리는 팬이 있을 정도이다. 로만은 루치아 프로이트의 <잠자고 있는 사회복지 감독관>을 우리나라 돈으로 약 38억 원의 가격으로 구입했고 바로 이튿날에 프랜시스 베이컨의 <삼면화>를 무려 약 980억 원에 구입했다.

 

사족으로 로만의 현대미술 관심에 관해서 이야기하자면 그의 모델 출신 애인 또한 현대미술 컬렉터다. 최근에는 로만이 '러시아 현대미술의 기수' 일리아 키바코프의 회화 39점과 설치미술 19점, 드로잉 100여점을 사들였다고 한다.

 

 

 

 그림의 진정한 예술적 가치를 사지 않는 미술 거래  

 

사실 세상에 돈 되는 화가와 그림은 그렇게 많지는 않다. 아니 지금은 유명하고 비싼 가격으로 그림이 거래되어도 몇 년 지나면 유명세나 작품 값이 형편없이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 그 이유는 단 하나이다. 화가에 대한 꾸준한 지원과 투자는 하지 않고 화가가 유명해 지고 작품 값이 올라가기만 바라는 마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작품 한 점 사면서 몇 년간 그 작가를 후원하고 지원하는 방식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대중이 선호하는 화풍의 취향이 하나의 유행처럼 많은 변화가 있듯이 미술 시장 거래의 추세도 달라지기 마련이다.

 

미술품을 자주 보다 보면 귀가 열리고, 많이 듣다 보면 눈이 트인다. 작품에 대해서 많이 알려고 하면 미술품 혹은 작가의 과거 이력과 미래 전망이 고스란히 나만의 생각, 나만의 그림 보는 법으로 정리된다. 이런 자세야말로 진정한 '미술 애호가'의 모습이다. 그러나 요즘 '미술 애호가'의 모습은 그렇지가 않다. 미술 애호가라고 자처하는 모든 컬렉터들이 미술 지식에 무지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중 일부는 그림을 남들에게 '보여 주기'식 명품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자신이 큰 돈 들여 구입한 그림을 자신의 자택 한쪽 벽에 걸어둔다. 그리고 그 그림을 보는 사람들에게 그림의 가치를 알려주기보다는 자신의 재력을 마음껏 자랑할 것이다. '나, 이 그림 1억 원으로 사들인 거야. 어때? 1억 원 그림 한 점 살 수 있을 정도로 나는 잘먹고 잘살고 있어'

 

19세기 말, 20세기 초 프랑스 파리에서 활약했던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1867~1939)는 타고난 심미안을 가지고 시대를 앞서 간 화가들의 재능과 가치를 알아보고 그들에게 정신적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안목 덕분에 르누아르, 폴 세잔, 앙리 마티스 그리고 피카소 등의 화가들이 마음껏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그가 유럽미술을 키워냈다는 후대의 평가는 과언이 아니다. 요즘처럼 돈만 중요시하게 여기는 세상에 볼라르와 같은 '미술 애호가'는 다시 나올 수 없을까? 요즘 미술 시장을 보면 씁쓸한 속물근성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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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3-03-15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미술 작품도 재테크의 시장이 되기 때문이겠죠.많은 분들이 그림을 그림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돈벌이 수단으로 보는 것 같더군요.

cyrus 2013-03-16 23:26   좋아요 0 | URL
그림에 어느 정도 지식과 식견이 있는 상태에 미술 작품을 구입하는 건 좋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주식투자차럼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저 돈 벌기 위해서 그림을 구입하는 건 좀 씁쓸하네요.
 
자유 의지는 없다 -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는 자유 의지의 허구성
샘 해리스 지음, 배현 옮김 / 시공사 / 2013년 2월
평점 :
품절


 

 '자유 의지'(Free Will)의 차이?

 

작년에 네티즌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말 중에 ‘의지의 차이’라는 것이 있다. 작년에 모 아이돌 여성 그룹 가수의 왕따설에서 비롯된 말이다. 한 멤버가 다리 부상 때문에 무대에 오르지 못하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트위터에서 “때로는 의지만으로 무리일 때가 있다.”는 글을 남겼다. 그 당시 스무 살도 안 된 멤버는 쉴 틈이 없을 정도로 바쁜 각종 연예 활동 스케줄에 몸과 정신은 지친 상태였다. 그래서 트위터에 정신이 육체를 넘어서지 못하는 현실적 한계에 대한 안타까운 심경을 글로 남겼다. 하지만 다른 멤버들의 트위터는 부상으로 쉬고 있는 멤버를 향해서 어떠한 위로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각자의 트위터에 “의지의 차이^^ 우리 모두 의지를 갖고 파이팅!” 또는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처럼 의지가 사람을 만들 수도 있는 건데... 에휴 안타깝다” 등의 글을 남겼다. 부상으로 잠시 쉬고 있는 멤버를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의지 부족으로 보는 듯한 뉘앙스가 있었다. 네티즌들은 특정 멤버 한 사람을 겨냥한 왕따라고 의혹을 제기했다. 한순간에 ‘왕따설’ 논란이 일어나게 되자 트위터에 남긴 문제의 해당 글은 삭제되었다.

 

왕따 가해자로 의혹을 받은 가수는 살인적인 활동 스케줄에 지쳐서 힘든 상태를 트위터에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멤버들의 시선은 다르게 봤다. 나머지 멤버들은 첫 데뷔를 하면서 지금까지 쭉 아파도 참으면서까지 연예 활동에 매진했다. 그렇기에 막내 멤버의 심경은 ‘의지 부족에서 비롯된 태만’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표면으로 드러난 사건의 모습만 가지고 나머지 멤버들의 태도가 무조건 나쁘다고 볼 수 없다. 문제의 멤버가 나쁜 마음을 가진다고 상상해보자. 다리 부상을 핑계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싶은 ‘의지’를 느낄 수도 있다. 다른 멤버는 특정 멤버의 태도 문제를 근거로 들어 의지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는데 '자유 의지(Free Will)의 차이'가 있을까? 자유 의지란, 어떠한 행동이 자기 자신의 의지 명령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으로 본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 하나하나는 우리 자신의 의지에 따라 실행되기 때문에 비도덕적이거나 비이성적 행동에 관해서 도덕적 책임을 수반해야 한다. 예를 들면, 내가 사람을 죽였다고 가정해보자. 나는 그 사람에 대한 원한으로 의도적으로 살인을 저질렀다. 사람들은 나의 살인 행위를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의식적 의도를 이유로 비난한다. 왜냐하면, 사람을 죽이는 행위 그리고 그 행위 근저에 흐르는 사고 속에는 의식적 원천, 즉 '나는 그 사람을 싫으니까 죽이고 싶다'라는 자유 의지가 존재하고 있음을 인식할 것이라 생각한다.

 

 

 

 인간의 행위를 결정하는 것은 자유 의지가 아니다

 

자유 의지는 인간의 내면에서 비롯된 형태이기 때문에 행위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필연적인 존재로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자유 의지가 실제로 존재하는지 끊임없이 논란이 진행되고 있다. 미국의 신경 과학자인 샘 해리스는 자유 의지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대표적인 학자. 그는 자유 의지를 설명할 수 있는 대표적인 두 가지 가정을 반박한다. 자유 의지가 있는 이상 우리는 과거에 이미 했던 행동이 잘못되었다면 그것 대신에 다른 행동을 취하게 된다. 그러한 행동을 이끌어 내는 의식적 원천이 바로 우리 자신이다. 이 두 가지 가정만 따져 본다면 자유 의지를 비판하는 입장을 쉽게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자유 의지의 허구성을 입증해주는 흥미로운 실험 하나를 소개하겠다. 신경과학자 벤저민 리벳은 피실험자들이 손을 움직이는 동안 뇌에서 일어나는 활동을 측정하는 실험을 했다. 피실험자들에게 자신들의 자유로운 결정에 따라 갑자기 손이나 손가락을 움직이고 동시에 언제 그 결정을 내리는지 시계를 보고 측정하도록 했다. 상식적으로 볼 때 손을 움직이겠다는 의지가 발동한 후에 운동피질이 작동하리라고 예상할 것이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의외의 실혐 결과가 나왔다. 피실험자들의 운동피질이 먼저 활성화된 후에 운동하겠다는 결정이 내려진다는 것이 실험으로 확인되었다. 이 실험을 통해서 0.3초의 시간 간격을 두고 뇌는 이미 운동을 결정하고, 그 과정이 시작된 후에야 인간은 그것을 깨닫는 과정의 사실이 증명된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명령하는 자유 의지에 따라 행동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주관적인 사실에 의식한 착각일 뿐이다. 1분 뒤에 자신이 어떤 행위를 할 것이며 무슨 생각을 할 것인지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 모든 행위는 뇌에서 미리 결정된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에 일어나는 우발적인 행위는 자유 의지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자유 의지'라는 환상의 역설

 

샘 해리스는 자유 의지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유 의지'라는 환상 속에서 우리 자신의 경험을 오해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 자신이 자유 의지의 힘으로 사고와 행동을 지배하는 과정을 '외재적 요인에 구속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 의미와 함께 놓고 본다면 모순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샘 해리스는 자유 의지의 허구성을 입증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유 의지의 잣대로 보는 인식의 관점 또한 의문을 제기한다. 자유 의지라는 믿음이 있기에 타인에게 해를 입히는 행동은 가해자의 의식적 결정에서 비롯된다고 보게 된다는 것이다. 샘 해리스는 우리가 타인의 잘못된 행동을 비난하는 이유를 우리 자신이 생각하는 믿음, 가치관, 목표, 편견 등이 반영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앞으로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자유 의지가 있다면 잘못된 행동에 관해서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한다. 자유 의지의 존재를 부정하는 견해가 급부상함으로써 자유 의지를 둘러싼 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뇌가 행동을 결정하는 기관이라면 인간은 더 이상 도덕적인 책임을 질 필요가 없게 된다. 그렇다면 범죄 행위를 막거나 처벌하는 법적 규범을 다시 써야 하는 일이 생긴다. 자유 의지의 존립 여부에 대한 문제는 곰곰이 생각해볼 수 있는 주제로 적합하나 '도덕적 책임'을 동반한 자유 의지 문제는 한쪽 입장의 손만 들어주기가 어렵다. 우리 스스로 행동을 결정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에 관한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고 보는 논리는 위험천만한 주장이다. 내가 타인에게 해를 입힌 죄에 스스로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은 곧 자신의 행위를 부정하는 것과 동등하다. 그래서 도덕적 책임 자체를 불필요하다고 볼 수는 없다.

 

자유 의지 존재 논쟁을 통해서 우리가 분명히 명심해야 할 사실은 딱 하나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는 사고와 행동을 하도록 명령하고 제어할 수 있는 완벽하고도 합리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인간행위의 의사결정이 반드시 합리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 미국의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은 자신의 책『생각에 관한 생각』에서 이렇게 썼다. “과거를 이해한다는 착각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과신한다.”  이 말을 빗대어 보자면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자유 의지’가 만들어 낸 과거를 이해한다는 착각 속에서 사고와 행동을 위한 미래의 결정을 예측할 수 있다고 과신하면서 살았는지도 모른다. 결국 자유 의지만으로 완벽한 사람을 만들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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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큰 도시의 복판에 이렇듯 철저히 혼자 버려진들 무슨 상관이랴 /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간 고호란 사나이도 있었는데”

조용필의 노래 ‘킬리만자로의 표범’ 내레이션 속 내용입니다. 오늘날 네덜란드의 화가 빈센트 고흐(1853~1890)의 이름은 은 불행한 삶을 살다간 화가의 고유명사처럼 되어버렸습니다. 오늘날 고흐의 그림은 수억 원대 가격으로 매길 정도로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이 되었습니다. 고흐는 훗날 자신의 그림이 값비싼 가격으로 거래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가 살아있을 때는 단 한 점의 그림만 팔았기 때문이죠. 고흐는 자존심 세고 격정적인 성격 탓에 원만한 인간관계를 가지는데 어려움을 많이 겪었습니다. 같은 아틀리에에서 함게 작업했던 폴 고갱과의 다툼 이후 면도칼로 왼쪽 귀를 자르는 자해 소동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일화입니다. 그가 믿고 의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자신의 피붙이 같은 동생 테오였습니다. 친구가 많지 않은 고흐는 정신병 발작을 피해 고독의 그늘 구석으로 도피했습니다.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발작은 고흐의 정신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그가 생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최후의 방법은 잔인하면서도 불행했습니다. 37세의 젊은 나이에 격정으로 뭉친 왼쪽 심장을 향해 권총을 겨눈 것이죠.

 

고흐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말 우리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간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림의 예술적 가치보다는 고흐의 불행한 삶이 대중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알려졌고 많이 회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흐의 삶에 대한 후대의 평가와 대중의 시선은 다분히 주관적인 해석의 관점이 강합니다. 그래서 고흐에 대한 잘못된 편견과 오해가 많습니다.

고흐에 대한 오해 중 하나는 성격이 괴팍하고 암울한 인생을 산 그의 그림은 어두운 분위기의 색채가 많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고흐는 어둡고 칙칙한 색깔만 고집해서 그림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초창기에 어두운 검정과 갈색 위주로 그림을 그린 적은 있었습니다.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강렬하고도 밝은 색채의 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 실제로 고흐의 그림을 직접 보게 된다면 그 오해가 틀렸음을 알 수 있을 겁니다.

 

 

 

 

 

빈센트 반 고흐  「까마귀가 있는 밀밭」1890년

 

 

고흐는 밀밭을 배경으로 한 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 그 중에서 많이 알려진 것은 자살하기 직전에 그렸다는 <까마귀가 있는 밀밭>입니다. 후자의 그림에는 밀밭의 강렬한 노란색이 전경을 차지하고 있지만, 우울함이 감도는 하늘의 파란색과 그 한가운데 날아다니고 있는 까마귀는 불안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두 갈래로 갈라져 있는 길이 고흐의 불안정한 심리 상태를 반영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까마귀가 날아다니고 있는 길의 끝자락은 고흐 자신이 곧 가게 될 ‘망자(亡者)의 길’로 보기도 합니다.

 

 

 

 

 

빈센트 반 고흐 「자고새가 있는 밀밭」1887년

 

반면 <까마귀가 있는 밀밭>을 그리기 13년 전에 프랑스 파리에서 그려진 <자고새가 있는 밀밭>은 오히려 평안하게 느껴집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밀밭과 붉은 색의 양귀비 그리고 수확하는 밀밭의 농부에 의해 놀라 달아나는 듯한 자고새의 모습에서 활력 넘치는 생명의 약동이 느껴집니다. 이제 막 날갯짓을 하는 자고새는 이제 막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기 위해 열정을 가슴 속에 한가득 지닌 채 파리에 정착한 ‘영 더치 페인터’(Young dutch painter) 고흐를 연상시킵니다.

인간은 부정적인 단면만 보게 되면 전체 또한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게 됩니다. 고흐가 지금까지도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간 사나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심리에서 비롯된 오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고흐가 우리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간 것은 맞을지 몰라도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암울할 정도로 어두운 그림만 그린 것은 아닙니다. 백문이 불여일견(百聞而 不如一見). 고흐의 일생을 함축적으로 노래한 돈 맥클린의 명곡 ‘Vincent'를 백 번 듣는 것은 반 고흐의 그림을 미술관에서 한 번 보는 것만 못합니다. 살랑살랑 봄의 기운이 일렁이기 시작한 주말에 예술의 전당 ‘반 고흐 전’에 가보길 권합니다.



* <자고새가 있는 밑밭>은 현재 예술의 전당 ‘불멸의 화가 반 고흐 in 파리’(~2013년 3월 24일)에 전시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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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3-03-12 10: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고새가 있는 밀밭> 그림 참 좋네요. 너무 평화로워 보여요. 반고흐와 테오의 우애를 생각하면 참 감동적이에요. 열 살이 넘게 차이나는 형제가 세상에서 가장 친한 벗으로 죽을 때에도 옆에서 죽음을 지키고 테오가 없었다면 고흐고 없었을 것 같아요. 예술의 전당 전시회에 꼭 가보고 싶은데 거리가 꽤 있어서 엄두가 안 나지만 시도해 봐야겠습니다.cyrus님의 좋은 페이퍼 덕분이네요.

cyrus 2013-03-12 19:18   좋아요 1 | URL
저는 지난 달에 고흐전을 봤는데요, 책에서 봤던 그림을 실제로 보니 기분이 새로웠고 고흐의 진가를 직적 보게 되었습니다. 전시회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는데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전시회에 가볼려고요. 화창한 날 주말 나들이에 반고흐전 강추합니다. ^^

수이 2013-03-13 15: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누나 보러 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