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 없이 쓴 글은 대게 감흥 없이 읽힌다.

 

- 새뮤얼 존슨 -  

 

 

 

올해가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사람들에게 감흥을 주는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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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경제학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지음, 김영욱 외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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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의 세계화, 우리는 얼마나 행복하게 할까?

 

세계화란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국가 간 교류가 증대하여 개인과 사회집단이 갈수록 하나의 세계 안에서 삶을 영위해 가는 과정을 말한다. 국제화가 국민국가 간의 교류가 양적으로 증대되는 현상을 말한다면, 세계화는 양적 교류의 확대를 넘어서 현대 사회생활이 새롭게 재구성됨으로써 세계사회가 독자적인 차원을 획득하는 과정을 뜻한다.

 

『오래된 미래』『행복의 경제학』의 저자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세계화의 역사를 3단계로 보고 있다. 초기 단계는 제국주의적 식민지화 시기에서 시작해서 두 번째 단계는 식민지 독립 이후 서구화된 신흥 국가의 등장이다. 마지막 세 번째 단계에서 세계화는 경제, 정치, 문화 세 수준에서 동시적으로 그리고 상호연관을 이루면서 진행됐다. 경제적 수준에서 세계화는 교역·투자·통신 등이 확대되어 국가 간 상호의존이 증대하고 지구적으로 다자간의 협의·조정·협력 등이 강화되는 현상을 뜻한다. 경제의 세계화는 오늘날 세계화를 추동하는 기본 동력이라 할 수 있다. 이 경제의 세계화 경향은 최근 더욱 두드러졌는데, 세계무역의 완전자유화를 주장하는 세계무역기구(WTO)의 출범과 초국적 기업의 활동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여기서 전후 세계화를 주도한 주체로서 초국적 기업의 활동은 생산부문을 지구적으로 재배치하는 신국제분업을 통해 기존 국경의 의미를 축소시켜 왔다.

 

근대 경제학에서 전제해온 호모 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는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태생적으로 이기적인 개인이다. 국제시장에서 한 국가의 국부(國富)를 평가할 때도 경제성장률과 GDP는 핵심도구로 사용됐다. 통상적인 경제학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행복 계산법은 단순하다. 소득이 높고 부를 많이 축적할수록 그 사람은 많은 이익을 얻고 더 행복해진다는 논리다. 소득이 높으면 직장과 사회에서 더 나은 지위와 위치를 차지할 기회가 많아져 삶에 대한 만족도가 더 높아진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통신기술의 발달은 경제활동의 범위를 지역에서 세계로 확장시켰다. 자립적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은 초국가적인 거대 기업과의 경쟁에서 밀려나 도시 빈민노동자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강대국들은 세계화를 빌미로 자유무역협정(FTA)을 강요하며 규제 완화를 요구한다.

 

세계화가 가져온 또 다른 폐해는 천연자원의 고갈과 환경오염이다. 수입과 수출, 생산과 소비의 과정에서 오염물질과 쓰레기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에서 환경 파괴는 가속도가 붙는다. 오염은 기후 변화를 가져오고 생태계를 파괴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세계화라는 명목으로 파괴의 속도전을 벌이는 기업과 정부가 있다.

 

이처럼 그동안의 경제의 세계화는 행복의 개념과 이익의 개념을 맞바꾸면서 경제와 행복이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됐지만 2008년 미국발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세계화의 한계에 대한 논의가 국제적으로 매우 활발해지고 있다. 특히 세계화의 빠른 물결은 갈수록 심해질수록 빈부격차는 곳곳에서 사회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나의 행복을 위한 지역화 중심의 경제학

 

한 걸음 물러서 볼 때, 세계화는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모두 가진 양면적인 과정이다. 세계화는 전지구적 불평등을 강화시키는 위기인 동시에 경제·문화적 삶을 향상할 새로운 기회다. 중요한 것은 세계화가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갈수록 증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는 경쟁적으로 세계화를 외치며 정부는 개인이 당장 불행하고 힘들어도 국가의 경제성장을 위해 생산성 향상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논리를 당연하게 이해시켜 왔다. 하지만 바로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과연 성장 중심의 세계화의 개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의 문제다. 따라서 세계화에 대한 더욱 포괄적이고 깊이 있는 이해가 요청되며, 경제의 세계화가 낳은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더욱 적극적이고 다각적인 대응 전략 또한 모색되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세계화' 외에는 다른 경제성장의 길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그렇지 않다고 반박한다. 경제성장의 대안은 분명히 존재하며, 그것은 바로 '지역화'이다.

그가 주장하는 '지역화'란 자연과 사회를 파괴하고 있는 경제적 논리들을 반대방향으로 되돌리는 것으로, 경제활동을 인간적, 생태학적 요구에 적응시키는 것이다.

 

거대 기업에서 운영하는 대형 마트에서 소비하지 말고 지역의 소규모 시장에서 지역 상인에게 물건을 소비하면 상품의 이동으로 인해 발생하게 될 배기가스 같은 오염도 줄일 수 있다. 상품 변질을 막기 위해 사용되는 농약이나 방부제 사용도 피할 수 있어 소비자는 건강한 먹을거리를 더 싸게 얻고, 지역 생산자는 이익을 지역 발전에 환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태양열과 풍력을 이용한 에너지를 쓰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일에 정부는 개발비를 더 많이 투자하고 다양한 형태로 지원해야 한다. 즉 한정된 자원을 써버리고 없애는 경제논리가 아니라 지속가능한 형태로 재생산되는 소비활동을 하자는 것이다.

 

지역화 중심의 경제학은 '파괴의 소비'를 멈추고 지역이 주체가 되는 경제활동이다. 각각의 문화에서 다양성을 찾고 그 고유한 문화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면 '나'로 살아가는 게 행복해지는 것이 바로 '행복의 경제학'의 핵심이다. 다시 말하자면 ‘행복의 경제학’은 자연과 사람, 지역과 사람, 사람과 사람, 그리고 그 자신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시작된다. 경제활동의 목적은 행복한 삶을 실현하는 것이며 목적을 상실한 채 성장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국제적인 협력보다는 지역화 활성이 우선이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세계화 위기의 시대를 탈출할 수 있는 전략으로 WTO를 뛰어넘어 WEO(세계환경기구, World Environment Organization)을 창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제안한 WEO의 주요 원칙은 다음과 같다.

 

  ◉ 환경보호를 위한 법률을 만든다.

  ◉ 환경비용을 ‘내부화’ 한다.

  ◉ 사회적 외부성을 처리한다.

  ◉ 무역 문제에서 최종 결정권을 갖는 것은 기업이 아니라 주권 국가들이다.

  ◉ 다국적 기업이 지역에 기반을 두거나 지역화하도록 규제한다.

  ◉ 국제법을 만들어 작동시킨다.

  ◉ 갈등 해결 과정을 향상시킨다.

  ◉ 자본 흐름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p 262)

 

 

세계화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국제적인 협력이 필요하지만, 일부 선진국의 WTO 체제 유지와 개별 국가 간의 이해관계 등의 문제를 고려하면 실현성이 그리 높지 않다. 호지는 노르웨이, 아이슬란드, 군대 없는 코스타리카, 국민총행복 지수가 가장 높은 부탄, 생태마을운동을 지지하고 있는 세네갈 등을 WEO 가입 가능성 높은 국가로 꼽고 있다. 하지만 이들 국가가 힘을 모아 주도적으로 WEO를 창설한다 해도 이들 국가의 정치 지도력으로는 WTO 체제에 익숙해진 국가들을 WEO에 가입하게 하도록 유도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호지의 '행복의 경제학'이 이론적 대안으로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국제적인 협력보다는 지역경제 발전이 우선되어야 한다. 지구를 보지 말고, 지역을 봐야 하는 것이다. 경제성장 일변도이고 국가주도적인 발전행정의 폐해를 극복하면서 지역화를 활성하는 전략이 수립되어야 한다. 인간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 삶의 방식을 덜 소비하고 덜 파괴하는 방법으로 바꿔야 하며 이를 위해 올바른 교육이 지속해야 한다. 즉, 생산과 소비의 균형, 지방과 도시의 균형, 사람과 자연이 공존을 이루는 삶을 영위해야 한다. 지역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 지역 중심의 경제활동으로 하나라는 연결을 견고하게 하는 것이 행복한 경제를 만들고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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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은평.강지은 옮김 / 동녘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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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독을 모르는 천치들의 세대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 ‘아인슈타인의 예언’이라는 제목의 한 장의 사진이 누리꾼들에게 주목을 받았다. 사진 속에는 아인슈타인이 예언한 문구가 소개되어 있다. "I fear the day that technology will surpass our human interaction. The world will have a generation of idiots."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과학기술이 인간 사이의 소통을 뛰어넘을 그날이 두렵다. 세상은 천치들의 세대가 될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정말 이 말을 했는지 정확한 출처를 알 수 없다. 다만 아인슈타인이 살았던 시대보다 더 과학기술이 발달한 시대 속에서 24시간 스마트폰을 손에 쥔 채 살고 있는 인류는 천치들의 세대인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매킨토시 컴퓨터를 세상에 선보였던 1984년으로 되돌아가 보자.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공놀이하거나, 흙장난, 인형놀이를 하는 등 다 같이 어울리며 뛰어놀고 있다. 18년 뒤, 애플과 삼성이 스마트폰 기술을 둘러싸고 특허전쟁을 벌였던 작년 2012년 아이들의 모습을 보라. 벤치에 모여 앉아 스마트폰 및 IT 기기들을 만지며 각자 놀고 있다. 놀이터에는 아이들의 발길이 끊긴 지 오래다.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고 또래 친구들과 카카오톡으로 대화를 주고받는다. 아이들에게는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자체가 놀이이며 일상이다. 트위터에 짧은 문구를 남기고, 페이스북에 자신의 일상을 담은 사진을 올린다. 웬만한 남녀노소는 스마트폰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어린이들이 스마트폰을 잘못 다루면 치명적인 독이 될 수 있다. 2011년 행정안전부가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스마트폰 중독율이 성인 7.9%, 어린이(만 9세 이하) 11.3%로 나타났다. 어린이의 경우 대개 자제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초기 관리를 놓치면 쉽게 중독으로 악화될 수 있다. 과도하게 인터넷에 노출되면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로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는 전문가들의 보고가 있다. 자극적인 화면에 익숙해지면서 학습능력 저하는 물론 폭력 충동 등도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말대로 스마트폰에 중독된 아이들이 정말 정신 작용이 완전하지 못한 천치의 세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유동하는 근대 세계' 속에 살아가는 인류가 스마트폰, 트위터, 페이스북에 열중할수록 고독의 시간을 잃어버린다고 말한다. 스마트폰이 갑자기 사라졌다고 상상하라. 24시간 내 곁에 있었던 가족이나 정든 친구 한 명의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듯한 느낌이 들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외로움이 느껴지면 스마트폰을 먼저 찾게 된다.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 기다릴 때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고, 집으로 가기 위해 혼자 버스 탈 때도 눈은 스마트폰으로 향한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혼자 있는 시간도 외롭지 않고 지루하지 않다. 그러나 혼자만의 시간을 스마트폰으로 트위터와 페이스북을 확인하는 데 소비할수록 우리는 인간관계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고독을 모르는 천치가 되어가고 있다.

 

 

 

 자유를 얻었으나 고독을 느끼는 현대인들

 

 

 

살바도르 달리  『기억의 지속』 1931년 

 

 

지금 이 시대는 액체처럼 흐른다. 달리의 그림 『기억의 지속』에 흐물흐물 거리는 시계처럼 말이다. 바우만은 현대사회의 역동성을 '액체 근대'(Liquid Modernity)라는 말로 개념화했다. 그는 '변덕스러움', '불안정성', '불확정성'은 우리 시대 삶의 조건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사회적 형태들이 더 이상은 제 모습을 오래 유지할 수 없는 여건으로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근대적 사회는 제도, 규범이 작동되는 견고한 구조로 구성되었다. 근대 들어 인간은 국가와 사회가 옭아맸던 속박의 틀을 깨고 해방됐다. 그러나 자유를 얻음과 동시에 질서와 규범이 사라진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불안과 불확실성에 사로잡혔다. 사람들은 자신의 결정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알지 못하므로 선택과 결정을 할 때마다 고통을 겪게 된다. 이런 세상에서 인간은 쓰레기로 전락한다. 유연성이 곧 합리성으로 받아들여지는 세상에서 실패나 패배의 책임을 모두 떠안게 된 개인은 '영원히 폐기될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정보기술의 발전과 함께 등장한 스마트폰, 트위터, 페이스북은 '유동하는 공포'를 잊을 수 있는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다. 동료가 없는 빈자리에서 느껴지는 공허감을 스마트폰 안에 설치된 카카오톡으로 말 걸 수 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동료를 친구로 만들기 위해서는 '친구 추가' 버튼 하나 누르면 충분하다. 하루에 많으면 두세 명, 한 달 뒤에는 수십 명 넘는 '페북 친구'가 생기게 된다. 페이스북에서 만난 친구의 수가 백 명을 넘기도 한다. 트위터를 통해 수많은 사람과 언제든지 소통할 수 있다. 새해 인사를 수많은 친구들에게 직접 만나거나 전화 통화로 할 수고를 할 필요가 없다. 카카오톡과 트위터로 단시간만에 백 명이 넘는 친구에게 새해 인사를 전할 수 있다.  2013년 새해 첫날인 1월 1일 0시로 넘어가는 순간 아시아권 이용자들(한국, 일본)의 초당 신년 축하 트윗 건수가 미국과 영국을 앞지른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트위터는 인간관계에서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정도로 일상화되었다. 이 정도쯤이면 우리는 고독을 느낄 필요가 없는 축복 받은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다.

 

 

 

 

 

 

"과연 지구상에 그런 천국이 존재할까?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마침내 그 꿈이 실현되고 있는 것일까? 모두가 인정하듯이 대화와 같이 인간들 간의 상호작용에서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양면적인 가치, 다시 말해 편안하면서도 아주 즐거운 특성과 그럼에도 동전의 양면처럼 아주 성가시기도 하고 온갖 위험으로 가득한 이중적인 특성이 마침내 해결된 것일까?" (p 30)

 

그러나 바우만은 오늘날 인류의 삶이 윤택해진 현대사회에 의문을 제기한다. 고독을 피하고 잊기 위해 온라인 세계로 향하는 '엑소더스' 행렬은 개인의 정신을 성숙하게 하는 사색과 인간관계 내에서의 소통을 형성하게 만드는 조건이 내포된 진짜 '고독'을 잊어버리게 된다.  

 

 

외로움으로부터 멀리 도망쳐나가는 바로 그 길 위에서 당신은 고독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린다. 놓친 그 고독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을 집중하게 해서' 신중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며 창조할 수 있게 하고 더 나아가 최종적으로는 인간끼리의 의사소통에 의미와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숭고한 조건이기도 하다.  (p 31)

 

 

 

자신이 외롭지 않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페이스북에 지인과 함께 외식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을 올리거나 틈만 나면 '카톡질'을 하는 엄지족의 모습은 늘 고독과 불안감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현대인들의 눈물겨운 투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는 오프라인 인맥 형성에는 인색하다. 오프라인에서 처음 만나는 타인과 소통을 시작하는 행위는 항상 호기심 섞인 불안감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저 사람과 친하기 위해서 어떤 말을 해야 할까?' 대화의 물꼬를 트기 전에는 어떤 말로 시작해야 할지 주저하고 고민한다. 온라인 인맥 형성은 오프라인에 비해 간편하고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쓸데없이 머뭇거릴 필요가 없다. 인관관계를 재정리할 때도 온라인이 편하다. 싫어하는 동료가 있으면 카카오톡이나 페이스북 친구 목록에 삭제해도 된다. 애정이 식어버린 연인에게 이별을 통보할 때 문자 하나면 만사 오케이다.

 

 

 

 고독하지만 자유롭게

 

 

 

 

 

오귀스트 로댕  『생각하는 사람』 1888년

 

 

바우만이 유동하는 근대 세계 속에 사는 현대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실존의 고독을 낭만적으로 미화하기 위해 쓴 것이 아니다. 불확실한 근대를 버리고 질서가 살아 있는 과거로 회귀하자고 주장하거나 어떤 획기적인 대안을 내놓는 것도 아니다. 고독의 기회를 잃어버린다고 해서 미래의 즐거움을 위해 과거의 유희적 움직임을 기억하자는 것도 아니다. 이미 지나가버리고 사라진 과거에만 집착한다는 건 고독을 더 키우는 부질 없는 고집일 뿐이다.

 

이제 사회는 '구조'보다 하나의 '네트워크'가 되어 간다. 유동하는 사회 앞에 인간은 어찌 해야 하는가. 국경과 공간을 초월하는 광범위한 인맥 네트워크가 형성되더라도 진정한 소통 능력과 공동체 의식을 자리 잡지 못한다. 이방인에게 직접 말을 걸지 못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현실적으로 가까이서 만날 수 있는 오프라인 세계에 관심을 잃고 '친구'라는 글자의 빈껍데기를 씌운 가상의 온라인 세계에 관심을 기울인다.

 

고독은 사회와 집단에서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부정의 개념으로 널리 통한다. 그러나 고독은 단순히 인간관계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며 뿌리 깊은 욕구이다. 즉, 새로운 인간을 만나 소통하고 싶은 관계 형성의 욕구이다. 고독은 개개인의 행복과 창조 활동뿐만 아니라 사회의 발전과 안정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며 궁극적으로 사람은 혼자만의 고독한 시간을 통해 삶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 고독 속에서 자유롭게 사람을 만나는 관계를 추구하는 과정은 진정한 유대감을 획득하는 확실한 인생의 경로다. 진정한 인간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친구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바우만의 표현처럼 '생각을 집중하게' 할 수 있는 고독을 누릴 필요가 있다. 유동하는 세상에 잊고 있었던 고독을 다시 한 번 불러보자.  "응답하라, 고독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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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시창 - 대한민국은 청춘을 위로할 자격이 없다
임지선 지음, 이부록 그림 / 알마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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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은 시궁창`의 준말이다. 미국의 유명 래퍼 에미넴이 주연한 영화 <8마일>에 나온 '꿈은 높은데 현실은 시궁창이야'라는 대사에서 유래했다. 현시창’. 갈 곳 잃은 현대 젊은이의 좌절과 체념을 적절하게 표현해주고 있다. 꿈도 많고 이루고 싶은 것, 하고 싶은 일도 많지만 꿈을 이루기는 힘들고 앞에 놓인 현실은 보잘것없다는 대조와 격차가 느껴진다.

 

우리 부모 세대는 열악한 현실 속에서 꿈의 크기마저 제한되는 삶을 살면서도 사회가 급성장하면서 기대 이상으로 성장하는 사례가 많았다. 반면에 부모 세대의 자녀인 우리 청년 세대는 유례없는 풍요 속에 살지만 꿈을 이뤄가기엔 사회의 꽉 짜인 틀이 무겁게 느껴진다. 격심한 스펙 경쟁에서 살아남아도 크게 나아질 것이 있는지조차 의문이 든다.

 

누구나 계급 상승을 위해 악착같이 뛰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특히 '88만원 세대'라 불리는 우리 청년 세대들은 고액의 대학등록금, 좁은 취업의 문으로 인해 낭만적인 대학 생활 대신 아르바이트에, 외국어와 공모전 같은 스펙 쌓기로 내몰린다. 그것도 모자라 사회생활을 학자금 대출의 빚더미에서 시작하고, 취업준비생으로 몇 년을 보내기 일쑤다. 취업을 해도 언제 잘릴지 모르는 계약직이나 비정규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출판가에는 청춘 마케팅이 대세다. 청춘의 절반은 월 평균 88만원을 받는 비정규직이며 고용불안과 조기 퇴직 등 앞 세대가 겪었던 불행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이 불행이 능력이 없거나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사회 구조적인 문제 때문에 발생했다는 사실은 88만원 세대를 한 번 더 절망케 한다. 청춘 마케팅의 핵심은 위로 마케팅이다. 위로는 '희망 없음'이라는 88만원 세대의 불치병을 달래주는 진통제 역할을 한다. 그러나 구조적인 성찰 없는 위로가 근본적인 방향을 제시해주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프니까가 청춘이다'라고 그 현란한 수사로 위로하기에는 한국의 청춘들이 너무나 지쳐있고 좌절의 심연이 너무 깊다. 독일의 문학가 괴테는 눈물 섞인 빵 한 조각을 먹어보지 못한 자는 인생을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다. 임지선 한겨레 기자가 발견한 스물네 편의 사연 속에 등장하는 젊은 얼굴들은 고상한 청춘의 번뇌, 고민, 방황과는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아픈 청춘들이다.

 

대형 철강회사에서 근무하던 29세의 젊은 청년이, 5m 높이의 용광로 위에서 고철을 녹이는 작업을 하던 중 1600의 용광로에 추락하여 사망하는 너무나 안타깝고 슬픈 일이 있었다. 당시 인터넷 게시판에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한 누리꾼이 쓴 조시가 그 상황을 대변해주고 있다. 끝내 동상은 세워지지 않았지만, 수많은 사람의 가슴을 울리며 열악한 3D 작업환경 속에서 일하는 청년 노동자의 고달픈 삶을 생각하게 하는 시였다.

 

광온(狂溫)에 청년이 사그라졌다

그 쇳물은 쓰지 마라

자동차를 만들지도 말 것이며

철근도 만들지 말 것이며

가로등도 만들지 말 것이며

못을 만들지도 말 것이며

바늘도 만들지 마라

모두 한이고 눈물인데 어떻게 쓰나?

 

- '그 쇳물 쓰지 마라' 중에서 (p 22~23) -

 

카이스트에서 일어난 학생 4명의 자살은 '경쟁'이라는 벼랑 끝에 내몰린 청년 세대의 현실을 보여주었다. 카이스트에 들어가는 건 쉽지 않다. 이곳에 들어오는 학생들은 이미 오랜 동안 경쟁을 해 왔다. 그렇다보니 이곳에서의 경쟁도 성공을 위한 밑거름이 될 수 있다고 여기는 학생들도 상당수일 것이다. 십수 년을 경쟁만 하고 살아 온 이들에게 경쟁은 어찌보면 인생에서 필수적인 항목일수 밖에 없다. 그러나 동기부여를 위해 경쟁이 필요하다고는 하지만 연이어 터진 심각한 사고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공짜는 없다"고 말하는 카이스트 전 총장의 강경한 입장은 무섭게 느껴진다. 한 마디로 현 사회에서 경쟁은 성공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라는 것. 설사 이로 인해 누군가가 불미스러운 일을 당해도 그건 어쩔 수 없는 일로 치부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더 무서운 사실은 전 카이스트 총장의 반응이 아니라 이 사건을 바라보는 대중의 반응이다. 카이스트 자살 사건으로 인해 한 때 경쟁중심주의 교육의 문제점을 이슈화했지만, 그것도 잠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미친듯이 경쟁을 부채질하는 '정상적인 삶'으로 돌와왔다.

 

『현시창』속 스물네 편의 사연은 절망적이면서도 우울하다. 노동, 돈, 경쟁의 프리즘으로  청춘의 어두운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희망적인 위로 한 마디도 없다. 저자는 위로 대신에 '현시창'을 "현실(現)을 직시(視)하고, 청년 세대에게 우울한 미래를 안겨다 주는 나쁜 사회와 싸우기 위해 창(槍)을 들 것'을 제안한다.

 

하지만 선동적인 문구만 가지고 '청춘이 절망하는 나쁜 사회'에 맞서기에는 역부족이다. 이제는 절판이 된 우석훈 교수의 『88만원 세대』을 꽤 인상 깊게 읽은 독자라면 이 문구를 기억할 것이다. '토플 책을 덮고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들라'. 우 교수는 『88만원 세대』절판을 선언하면서  "죽어도 바리케이트를 치지는 못하겠다는 20대만 더 많아졌다"고 말했다. 그리고 "청춘이여, 정신 좀 차려라"고 말하며 청년 세대를 향한 일갈도 덧붙였다. 청년 세대의 얌전한 모습에 적잖이 실망한 나머지 『88만원 세대』의 저자는 청년들이 짱돌을 들지 않는 현실에 좌절하고 절판까지 언급했다. 
 
나쁜 사회에 맞설 수 있는 창과 짱돌을 들기 전에 먼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88만원 세대가 청년 담론을 제기한 지도 5년이 지났다. 가야 할 길을 찾기 위해 길 주변을 확인해야하듯이 청년 세대가 팍팍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나아갈 길을 찾으려면 현실을 제대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내가 가는 길을 막는 '나쁜 사회'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면 창과 짱돌을 손에 쥐고 있어도 무슨 소용이랴. 

 

청년 세대가 착취를 당한다고 해서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따뜻한가. 결코 그렇지 않다. '오로지 돈을 목표로 안정만 추구하는 영악한 젊은이',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인간', '나약한 세대'. 지금의 30~40대, 소위 '386 세대'가 말하는 '88만원 세대'는 이렇다. 이러한 기성세대의 지적에 "현실을 모르는 소리"라고 반박할 수 있겠다. 하지만 청년 세대 중에서도 자신이 처한 암담한 현실을 모를뿐더러 정말 자신보다 '현실이 시궁창'인 청년들의 분노에 귀담아 듣고 공감하는 이가 아직은 드물다. 그저 자신과 관련 없는 남 이야기로 치부한다.  

청년 세대가 현실을 직시하기 위해서는 세상을 보는 차별의 창(窓)을 부수는 것이 중요하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자신이 속한 청년 세대에 대한 역지사지, 나아가 감정이입의 노력이 중요하다. 정말 고통 받는 청년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그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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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회화의 혁명 - 도미에에서 샤갈까지
게오르크 슈미트 지음, 김윤수 옮김 / 창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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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화과 학생들이 그리고 싶어 하는 그림

 

작년 2학기 때 수강했던 수업 중에 ‘서양미술사’라는 과목이 있다. 원래 전공은 행정학과인데 미술에 관심이 많아서 회화과 수업을 듣게 되었다. 본 전공과 전혀 다른 수업 분위기는 색다른 느낌을 받았고, 몇몇 회화과 학생들과 친분을 맺으면서 회화과 학생 특유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서양미술사’ 수업은 회화과 2학년 전공필수 과목이라서 수강생 중에는 11학번 2학년 학생들이 가장 많았다. 

 

교수가 수업 도중에 학생들을 훈계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매번 하는 질문이 딱 하나 있었다.

“너희는 어떤 그림을 그리길 원하는가?” 회화과 학생들이 처음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먼저 하는 것이 전공교수와 일대일 상담이다. 상담을 통해 학생들의 진로를 알아볼 수 있는데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전업화가나 미술 관련 분야의 직업을 선호하는 편이다. 그래서 교수는 상담에 응하는 학생들에게 무조건 이 질문을 한단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회화과 학생들의 답변은 비슷하다. ‘대상을 정확하고 똑같이 그리는 것’. 교수는 학생들의 천편일률적인 답변에 일침을 가한다. “그런 그림을 그리고 싶으면 여기 서양미술사 수업을 들을 필요가 없다. 그리고 지금 현대미술이 빠르게 발전되는 시점에서 대상을 무조건 정확하게 그리려고 한다는 것은 구시대적인 생각이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에서 시작된 근대미술

 

교수가 회화과 학생에게 던지는 이 간결한 질문은 정말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학생이 그리고 싶어 하는 그림이 어떤 건지 묻는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은 예술적 정체성이 무엇인지 묻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예술적 정체성 없이는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표현할 수 없다. 만약에 이 회화과 학생들이 유행에 따르듯이 다른 화가 지망생들과 비슷한 표현 방식으로 그림을 그린다거나 과거 화가들의 작품을 정확하게 모사하는데 그친다면 발전이 더디어질 것이고 전도유망한 화가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예술 창작이나 발상 면에서 독창성을 잃고 평범한 경향으로 흘러간다면 회화과 학생들은 방대한 분량의 서양미술사를 공부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표현수단의 고정성이 강하면 예술의 신선미와 생기를 잃게 된다. 이것은 곧 ‘발전’이 아니라 ‘퇴행’이다.

 

서양미술사를 살펴보면 여러 단계의 전환점을 기준으로 발전되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학자마다 발전의 기준을 보는 관점이 차이가 있지만 근대서양미술사의 권위자로 알려진 게오르크 슈미트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 회화 역사의 시작은 원근법, 명암, 신체적 비례 등의 정확성에 의한 묘사를 요구하지 않았던 중세 초기부터 보고 있다. 이때는 눈에 보이는 현실을 구체적으로 그리기보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 표현으로 발전했다. 두 번째, 중세미술은 바야흐로 조토 디 본도네의 등장과 함께 현실의 묘사를 추구하기 시작했고 드디어 공간적, 해부학적 정확성이 강조되었다. 세 번째의 발전 단계는 이전 시기처럼 눈에 보이는 현실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지만, 대상을 보는 인식이 상대적이며 주관적이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 단계는 바로 정확성을 강조한 고전적 화풍을 완전히 탈피하여 화가의 개성적 표현을 강조하는 근대미술로 도달하게 된다.

 

'근대미술'(Morden Art)의 정의 및 시기는 사람에 따라 그 견해가 다르게 구분되고 있지만 ‘예전’과 다른 ‘새로움’의 가치개념으로 보면 된다. 다시 말하자면 전통적 회화방식에서 강조하는 표현의 정확성을 과감하게 버리는 진취적인 발전을 이룩하는 시기이다. 화가가 대상을 정확하고 똑같이 표현한다는 것은 근대미술 등장 이전 화가들에게는 필연적인 과제였다. 고전적 회화에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통보함으로써 근대미술의 서막이 본격적으로 열리게 된 것이다.

 

 

 

 근대회화의 시작은 도미에로부터

 

 

 

오노레 도미에  『돈 키호테와 산초 판사』 1850년경

 

 

근대미술의 시작은 인상주의(impressionism)의 등장과 함게 소개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게오르크 슈미트의 소개는 다르다. 사실주의의 대표적인 화가인 오노레 도미에의 등장을 시작의 출발점으로 보고 있다.  

 

미술사조로서의 사실주의는 과거의 고전주의가 추구한 정형화된 이상이나 규범을 거부하고 오로지 눈으로 보고 경험한 세계를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객관적인 현실의 충실한 재현이란 과제를 수행하고자 한 사실주의는 그리스 고대 문화 모방을 강조한 신고전주의 미술과 비교해볼 때 전위적인 성격을 드러낸다. 그들은 그 시대에 적합한 것은 그 시대의 현실 속에서 취해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렇다고 도미에가 사실주의 화파라고 해서 대상의 정확성을 추구한 건 아니다. 명암을 기조로 한 유동감과 높은 정신성을 지닌 표현을 통해 대상을 솔직 예리하게 관찰했다. 특히 대상을 시각적 영상으로 충실히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그 대상을 고의로 왜곡시켜 그리는 데포르마시옹(déformation) 기법을 이용해 화가의 진실된 감정을 캔버스에 표출하고 있다. 사물의 자연형태에 보다 주관적인 왜곡을 가하는 도미에의 그림은 충실한 재현에서 벗어나 형체와 비례가 파괴당하고 있다.  여기에는 어떤 부자연스러움과 불쾌감을 느끼게 하는 부분이 있지만 동시에 그만큼 새로운 조형적 시도를 통한 창조성으로의 기대치를 높여주고 있다.

 

 

 

빈센트 반 고흐  『자장가 (룰랭 부인의 초상)』 1889년

 

 

도미에의 선구자적 회화 기법은 프랑스 파리로 홀로 건너가 독학으로 그림을 공부하는 젊은 반 고흐에게 영향을 미쳤다. 고흐가 습작 시절에 정확한 그림을 그리는 것을 목표로 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하지만 그도 오랜 모사와 독학 끝에 정확한 형태의 회화 묘사에 대해서 회의적인 입장을 하게 된다. 대샹을 정확하게 그린다고해서 진실적 가치를 제대로 담아낸다고 볼 수 없다고 고흐는 확신했다.

 

"모든 아카데믹한 형태는 오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도미에가 그런 형태를 그린다면, 그 비례는 아카데믹한 작가의 눈에는 제멋대로인 것처럼 보일테지. 하지만 그 형태야말로 살아있는 형태일 것이다. 나는 아카데믹한 의미에서 정확한 형태를 그리고 싶지 않다. 오히려 그러한 부정확함을, 그러한 뒤틀림을. 그러한 현실의 변형과 수정을 습득하는 것이 나의 최대의 열망이다. 그 결과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거짓이라고 말하겠지.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글자 그대로의 진실보다 더 진실하지 않은가."  (p 58~59)

 

 

 

 

폴 고갱  『시장』 1892년

 

 

해부학상의 정확성을 포기한다는 건 결국 실제처럼 공간감각을 구현하기 위한 원근법을 무시하는 것이다. 고갱의 『시장』이라는 그림에서도 보면 알 수 있듯이 캔버스 중앙에 있는 5명의 여인과 배경은 원근법에 의해 정확하게 그려진 것이 아니다. 장식 그림처럼 인물과 배경이 평면적이다.

 

 

 

 대상의 '표면'이 아니라 대상의 '이면'을 그려라

 

어느 문명,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과거에는 미술가에게 최고의 찬사를 보낼 때 ‘실물처럼 생생한’이라는 표현을 써 왔다. 신라시대의 화가 솔거에 대한 기록을 보면 황룡사 벽에 늙은 소나무를 그렸는데 각종 새들이 진짜로 알고 날아들다가 부딪쳐 떨어지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일견 상투적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동물이든 사람이든 간에 관객의 눈을 속일 만큼 사실적으로 재현해 내는 화가나 조각가의 놀라운 기술을 강조하는 이러한 일화들은 동, 서양 미술의 역사에서 자주 발견된다.

 

고대 그리스 화가 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의 경쟁 이야기는 서양 미술사에서 특히 유명하다. 제욱시스는 포도를 너무도 잘 그려서 새들이 쪼아 먹으려고 달려들 정도였다고 하는데, 이를 두고 너무나 자랑을 하자 파라시오스는 제욱시스를 불러다 자신의 그림을 보여주었다. 그림 위에 천이 드리워져 있어서 이를 걷으려던 제욱시스는 천 자체가 파라시오스의 그림인 것을 뒤늦게 알고 감탄하면서 새를 속인 자신보다 화가를 속인 파라시오스가 한 수 위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그림들 모두가 현재 우리들의 눈에도 실물로 착각될 정도로 세밀하고 정확하게 묘사되었던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미술 작품에는 이러한 기법 상의 관례나 사회 통념을 초월해서 관객을 끌어들이는 교감 작용이 있게 마련이다. 단지 사실적으로 정확하게 묘사되었기 때문에 생생하게 느껴지는 작품들이 아니라 보는 사람의 감정을 이입시킬 수 있는 힘, 그것이 바로 미술 작품을 살아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만약에 회회과 학생 중에 서양미술사 공부의 중요성을 못 느낀 이가 있다면 게오르크 슈미트가 쓴 책을 권하고 싶다. 대상을 정확하게 그리고 싶어하는 생각을 쫓는다면 자신만의 개성적인 표현을 찾을 수 없게 된다. 대상의 '표면'만 똑같이 묘사하는 빈 껍데기 그림보다는 대상의 '이면'에 숨겨진 실제적 특성을 정확하게 포착한 진실된 그림이야말로 미술의 진정한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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