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노화학 - 10억 분의 1미터에서 찾은 현대 과학의 신세계
장홍제 지음 / 휴머니스트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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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어린 시절에 반복하다시피 읽은 책이 교양 과학 만화책 시리즈. 그 시리즈 첫 번째 책의 주제가 인체였다. 그런데 책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다. ‘인체의 신비였던가? 출판사 이름은 기억난다. 삼성당이다. 무자비하게 흘러간 시간이 책 제목을 지웠다. 그 책에 임시로 제목을 붙인다면 인체 탐험이다. 그렇게 제목을 정한 이유는 SF에 나올 법한 줄거리 때문이다. <인체 탐험>의 등장인물은 흰 수염의 의학 박사와 그를 따르는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다. 의학 박사는 발명에도 남다른 재주가 있다. 비행기와 흡사한 잠수함을 만들었는데, 놀랍게도 버튼 하나 누르면 잠수함 크기를 줄일 수 있다. 박사와 아이들은 확 줄어든 잠수함을 타고 어떤 남자의 몸속으로 들어간다! 


세 사람이 탄 잠수함은 남자 몸속 구석구석 누빈다. 남자는 자신의 몸속에 아주 작은 잠수함이 들어갔는지 모른 채 살아있는 교본이 된다. 박사는 몸속에 거주하는 세포와 세균이 하는 일과 몸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생리 현상의 원인을 아이들에게 설명해준다. 잠수함이 남자의 몸 밖으로 빠져나오는 장면이 가관인데, 남자가 재채기하는 순간 콧구멍을 통해 탈출한다. 만화가는 이 황당한 장면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는지 콧구멍으로 빠져나온 잠수함을 콧물과 코딱지가 잔뜩 묻혀 있는 상태로 묘사했다.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했지만, 박사와 아이들은 모험심과 앎에 대한 욕구가 강했다. 그들은 다시 잠수함을 타고 그 남자의 몸속으로 들어가 과학 수업을 재개한다. 

 

지금까지 내가 요약한 <인체 탐험> 줄거리는 100% 정확하지 않다. <인체 탐험> 줄거리는 나의 뇌가 조그마한 기억 조각들을 열심히 주워 모아 제멋대로 편집하고 각색한 것이다. 사람이 잠수함을 타고 몸 내부 곳곳을 여행하는 설정은 현실에서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이 이상한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작아져 버린 잠수함을 나노 기술로 만들 수 있다나노(nano)’는 소인(小人)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단어다. 만화에 묘사된 소인들이 탄 잠수함은 인간의 몸에 들어가 병균을 퇴치하는 초미세 의료용 나노로봇으로 실현되었다


나노는 말 그대로 아주 작다는 뜻이다. 따라서 나노 세계는 아주 작은 세계를 의미하게 된다. 아주 작은 세계를 이해하려면 제일 먼저 원자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나노 기술은 최소 1mm부터 최대 1,000nm(나노미터) 크기의 원자를 인위적으로 조작해서 일어난 화학 반응을 응용하는 기술이다화학 관련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저자가 쓴 나노 화학나노 기술의 현주소와 미래를 과학 지식과 곁들어서 풀어 쓴 책이다책 제목에 화학이 들어가 있지만, 나노 기술의 학문적 배경에 물리학도 포함된다원자나 분자 같은 미시 물질을 다루는 나노 기술에 양자역학이 적용된다원자는 모든 물질의 기본단위다. 물리학과 화학 모두 눈에 보이지 않는 원자의 실체를 밝혀내고, 이해하는 데 필요한 학문이다.


우리는 나노 세계를 눈으로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실생활에서 체감할 수 없다. 그래서 아주 작은 세계를 이해하는 일이 우리 삶에 얼마나 이로운지 알지 못한다나노 세계의 물질, 즉 나노입자는 작을수록 좋다. 왜냐하면 나노입자 크기가 작아지면 물질의 특성 자체가 달라지고, 같은 나노입자들끼리 충돌하면서 발생하는 화학 반응 속도가 빨라진다나노 물질들끼리 조합하면서 일어나는 화학 반응을 응용한 나노 기술은 실생활에 유용한 생성물을 효율적으로 만들어낸다. 


하지만 나노 기술의 실현 전망이 그렇게 밝은 것만은 아니다. 현실적인 과제들이 산적하다. 나노 물질의 잠재적인 독성을 검증해야 한다. 그래핀(graphene)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나노 물질이다. ‘꿈의 신소재라는 수식어가 붙여질 정도로 디스플레이 · 반도체 · 태양전지 · 자동차 등 여러 분야에서 사용된다. 그러나 언론의 장밋빛 전망과 달리 그래핀이 완전한 상용화가 이루어지려면 다소 시간이 걸린다.


과학 커뮤니케이터는 생소하고 어려운 과학 용어나 이론을 과학 비전공자들을 위해 좀 더 쉽게 설명하는 전문가다. 나노 화학의 저자는 화학 전문 커뮤니케이터다. 저자는 자신의 본업을 살려 자신만의 방식으로 과학 상식을 쉽게 설명하려고 한다. 특히 화학 반응의 경로와 촉매를 등산으로 비유해서 설명한 대목(280~282)은 압권이다.


과학 커뮤니케이터가 갖추어야 할 기본 자질은 과학을 쉽게 설명하는 능력이지만, (내가 생각하는) 반드시 있어야 할 자질은 정확한 사실을 전달하는 것이다. 책에 부연 설명이 필요해 보이는 내용들이 있다. 책 내용에 주석으로 단 내 의견 역시 사실과 다르거나 틀릴 수 있다.



* 24~25

 

 오늘날 모든 전자기기를 움직이는 데 필요한 전기(electricity)는 전자의 흐름으로 설명된다. 지금은 화석연료나 태양광, 지열, 조력 등 온갖 원천에서 전기를 얻으려고 발전이 이루어지지만, 전기의 확인과 관찰은 폭풍우 속에서 하늘에 연을 띄워 벼락에서 전기를 포집했다는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에 의해 처음 이뤄진다. [1]

 


[1] 프랭클린보다 훨씬 먼저 전기의 성질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과학자는 윌리엄 길버트(William Gilbert, 1544~1603). 그는 자석을 이용한 실험을 진행하면서 지구가 하나의 거대한 자석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1600년에 발표된 길버트의 저서 자석에 관하여에서 호박(琥珀)으로 마찰을 일으켜서 생기는 정전기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길버트는 정전기가 호박에서 나온 힘이라 생각했고, 호박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된 ‘electricity’로 명명했다. 자석에 관하여자석 이야기(서해문집, 1995년)’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으나 절판되었다.




* 163


 현재 통용되는 원자의 모형을 만들어내고 양자역학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던 에르빈 슈뢰딩거[2][생략]

 


[2] 양자역학을 언급할 때 반드시 언급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사실 닐스 보어(Niels Bohr)코펜하겐 해석에서 드러난 양자역학의 허점을 비판하기 위해 슈뢰딩거가 고안한 사고실험이다. 하지만 그의 의도와 다르게 죽어 있고 동시에 살아 있는 슈뢰딩거의 고양이양자역학에서만 가능한 중첩 상태를 설명하기 위한 사고실험으로 알려지게 된다고양이 한 마리가 유명해지는 바람에 생전에 양자역학을 받아들이지 않은 슈뢰딩거는 오늘날 양자역학 발전에 기여한 과학자로도 평가받는다. 슈뢰딩거 본인은 달갑지 않은 반응을 보이겠지만.




* 181

 

 1962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에 대해 약간의 논란이 남아 있으나[3]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밝혀냈던 프랜시스 크릭은 사실 이보다 더 거대한 발견을 이룩했다.

 


[3] 노벨상 수상과 관련한 약간의 논란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하다. 아마도 논란이 로잘린드 프랭클린(Rosalind Franklin)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로잘린드 프랭클린은 X선을 이용해 DNA 이중나선 구조를 밝히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녀의 연구 자료를 참고한 왓슨과 크릭이 이중나선 구조 연구 결과를 정리한 논문을 먼저 발표하는 바람에 그녀의 업적이 묻혀버렸다. 브렌다 매독스의 로잘린드 프랭클린과 DNA(양문, 2004, 절판) 하워드 마르켈의 생명의 비밀: 차별과 욕망에 파묻힌 진실(늘봄, 2023)은 로잘린드 프랭클린의 생애와 잘 알려지지 않은 과학자로서의 업적을 소개한 책이다.




* 190

 

 영화 속 장면처럼 뜨거운 열을 폭발시켜 모든 것을 태우는 광열 치료나 피라냐 떼 같은 라디칼을 풀어 주위의 모든 걸 먹어버리도록 만드는[4] 광역학 치료가 탄생했다.



[4] 공포영화에 묘사된 피라냐는 자신 주변에 있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을 공격하고, 날카로운 이빨로 뜯어먹는 난폭한 물고기다. 하지만 피라냐의 공격성과 먹성이 사실과 다르게 과장되어 있다. 피라냐는 죽은 물고기의 살도 먹는다. 피라냐 떼에 갑자기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다면 그들이 먼저 공격하는 일은 없다. (참고문헌: 매트 브라운, 개가 보는 세상이 흑백이라고?: 동물 상식 바로잡기, 동녘, 2023, 피라냐가 사람을 물어뜯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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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소설 1984텔레스크린이라는 영상 장치가 나온다. 오세아니아의 지배자 빅 브라더(Big Brother)는 텔레스크린으로 국민을 감시한다. 그뿐만 아니라 텔레스크린은 국민에게 영상과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보여주는 선동 도구이기도 하다. 소설 초반부에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Winston Smith)는 고문당하는 여성이 나오는 텔레스크린 화면을 상상한다.


















* 조지 오웰, 한기찬 옮김 1984(소담출판사, 2021)



 그는 그녀를 고무 봉으로 죽도록 매질할 것이다. 그녀를 발가벗겨 기둥에 묶어 놓고 성 세바스찬[비밀리에 기독교를 믿다가 화살을 맞고 순교한 로마의 장교-역주]을 처형할 때처럼 화살을 있는 대로 쏠 것이다


(1984중에서, 26~27)



1984역자는 성 세바스찬(St. Sebastian, 라틴어: 세바스티아누스, 이탈리아어: 세바스티아노)화살을 맞고 순교했다는 내용의 주석을 달았다세바스찬이 화살을 맞은 건 사실이지만, 순교하지는 않았다.


세바스찬은 갈리아 출신의 로마 군인이었다.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황제의 친위 대원이 되었다. 황제는 이교도 금지 정책으로 기독교 박해를 단행했다. 하지만 기독교로 개종한 세바스찬은 황제 몰래 감옥에 갇힌 기독교인들을 풀어주었다. 이 사실이 발각되면서 황제는 기독교인 세바스찬에게 활로 쏘아 죽이는 사형을 명했다. 세바스찬은 기둥에 묶인 채 군인들이 쏜 수십 발의 화살을 맞았다. 화살들이 그의 몸을 관통했지만, 세바스찬은 죽지 않았다. 이레네(Irene)라는 과부가 치명상을 입은 채 버려진 세바스찬을 치료해주었다. 회복된 세바스찬은 황제를 직접 만나 기독교 박해 정책을 비판한다. 결국 세바스찬은 군인들이 휘두른 몽둥이(곤봉)에 맞아 순교했다.
















* 보라기네의 야코부스 황금 전설(크리스천 다이제스트, 2007)

 

* [품절] 로사 조르지 성인 이야기, 명화를 만나다(예경, 2006)




세바스찬의 처형 장면은 르네상스 화가들이 선호하는 주제 중 하나였다. 성 세바스찬의 일대기를 언급한 황금 전설에 따르면, 화살로 뒤덮은 세바스찬의 모습을 고슴도치로 비유한다. 화가들은 남성 신체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온몸에 화살을 맞은 세바스찬을 반나체 모습으로 그렸다. 이러한 그림들이 많아서 세바스찬이 화살에 맞아 순교한 것으로 오인하기 쉽다.


황금 전설은 유럽 중세에 전해 내려온 가톨릭 성인들의 전설을 집대성한 문헌이다. 이 책의 유일한 번역본은 크리스천 다이제스트라는 출판사가 펴냈다. 크리스천 다이제스트는 현대지성출판사의 전신이며 현재 ‘CH북스로 이름이 변경되었다‘CH 북스는 현재 현대지성 출판사의 독립 브랜드(임프린트)로 운영 중이다CH북스는 기독교(개신교) 서적을 펴내는 출판사인데, 가톨릭 교리가 반영된 황금 전설을 펴낸 점이 이채롭다. 종교 개혁 이후 기독교인들은 구교가 된 가톨릭교 성인들의 기적을 미신으로 여겨 비판했다. 황금 전설의 기독교인 역자는 황금 전설에 나온 모든 내용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명시한다. 그렇지만 중세 미술과 신학자들에게 큰 영감을 준 황금 전설의 영향력을 높이 평가한다.

 

황금 전설번역본에는 세바스찬이 곤장에 맞아 순교했다고 나와 있다(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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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06-06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청 두껍네. 읽을 것 같지않다.ㅠ

cyrus 2023-06-07 06:18   좋아요 0 | URL
네, 벽돌 책이에요.. ㅋㅋㅋㅋ

ozzy2012 2023-06-06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미디어가 텔레스크린이네요...

cyrus 2023-06-07 06:20   좋아요 0 | URL
맞아요. 사회 비판적인 의식을 가지고 진실을 말하려는 훌륭한 언론인도 있지만, 대부분 언론인은 사명감 없이 일하고 있어요.
 




절판된 책이 다시 나왔다. 책 제목은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 ‘그로테스크(Grotesque)의 정의는 다양하다. 우리말로 쉽게 표현하면 괴상한’, ‘끔찍한’, ‘불쾌한’, ‘기묘한’, ‘으스스한 등이 있다. 흔히 그로테스크라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정의는 괴상한이다. 그렇지만 시대와 당대에 유행한 문화 양식에 따라 그로테스크의 정의가 조금씩 달라졌고, 여기에 새로운 의미들이 부여되었다. 미술 및 문학 작품 속에 반영된 그로테스크의 풍부한 정의를 분석한 책이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
















* 볼프강 카이저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아모르문디, 2023)

 



이 책의 저자인 독일의 문학비평가 볼프강 카이저(Wolfgang Kayser)는 그로테스크의 핵심을 생경해진 세계라고 주장한다. 생경하다, 일상에서 잘 쓰이지 않는 표현이라서 생소하다. 국어사전에 기재된 생경하다의 뜻은 다음과 같다. ‘글의 표현이 세련되지 못하고 어설프다’, ‘익숙하지 않아 어색하다.’ 즉 카이저가 말한 생경해진 세계익숙하지 않아서 어색한 세계. 불합리하고, 비일상적이고,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세계.


















*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열린책들, 2009)

 

* 움베르토 에코 추의 역사(열린책들, 2008)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장편소설 장미의 이름의 작중 화자인 아드소는 그로테스크에 매료된 인물이다. 그는 젊은 수련사 시절에 성서를 처음 읽고 난 후 환상을 보기 시작한다. 그래서인지 아드소는 <요한 묵시록> 119(‘지금 본 것을 기록하여라.’)을 떠올리면서 교회의 벽과 기둥에 있는 장식을 아주 상세하게 묘사한다. 아드소는 무엇을 보았을까? 지옥에 나타날 법한 기이한 형상의 괴물과 악마를 묘사한 장식인데, 여기에 탄복한 아드소는 장식된 그로테스크한 존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열거한다(장미의 이름상권, 16시과). 



 악마의 우화집에 등장하는 모든 짐승들이 추기경 회의를 위해 모인 듯, 옥좌를 향해 영광의 노래(자신들에게는 패배를 뜻하는)를 부르며 옥좌를 보호하고 있다. 판 무리, 양성 동물들, 손가락이 여섯인 축생들, 세이네레스 무리, 켄타우로스 무리, 고르곤 세 자매, 하르피아이, 인쿠부스, 용어(龍漁) 무리, 미노타우로스, 스라소니, 표범, 키마이라, 콧구멍으로 불을 뿜는 카이노팔레스, 악어, 꼬리가 여럿이고 몸에 털이 난 도마뱀 무리, 도롱뇽, 뿔 달린 살모사, 거북이, 구렁이, 등에 이빨이 나 있는 양두수(兩頭數), 하이에나, 수달, 까마귀, 톱니 뿔이 달린 물 파리, 개구리, 그리폰, 원숭이, 루크로타, 만티코라, 독수리, 파란드로스, 족제비, , 후투티, 올빼미, 바실리스크, 최면충(催眠蟲), 긴귀곰, 지네, 전갈, 도마뱀, 고래, 두더지, 올빼미도마뱀, 쌍동(雙胴) 오징어, 디프사스, 녹색 도마뱀, 방어, 문어, 곰치, 바다거북. 이 모든 동물의 무리가 한 동아리가 되어 득실거리고 있었다.



장미의 이름이 나온 지 20여 년이 지난 뒤에 에코는 그로테스크 백과사전이라 불릴만한 책을 썼다. 그 책이 바로 추의 역사. 에코는 이 책에서 아드소의 정신을 마비시킨 그로테스크 미학의 특징을 시대별로 분류했다. 그리고 과거부터 현재까지 그로테스크 미학에 부합되는 문학 작품과 예술 작품들을 모조리 소개하는 등 애서가다운 면모까지 보여준다. 도판이 많이 실려 있지 않은 미술과 문학에 나타난 그로테스크를 먼저 읽은 다음에 추의 역사를 읽기를 권한다. , 고어 장르를 좋아하지 않거나 잔인하거나 징그러운 것을 한 번 보면 시각적 여운을 쉽게 지우지 못하는 독자는 추의 역사를 펼치지 마시라. 깜놀 주의!

 




















* 이미상 외 2023 14회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문학동네, 2023)




2023 14회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을 읽은 독자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고, 대상작보다 더 많이 거론한 소설이라면 아마도 현호정<연필 샌드위치>일 것이다. <연필 샌드위치> 초반부에 묘사된 연필로 샌드위치를 만드는꿈속 장면은 그로테스크하기 때문이다. 꿈속 세계는 생경하다. 왜 꿈에서 연필로 샌드위치를 만들려고 하는지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자. 여기에 의미를 찾으려고 하거나 억지로 꿈의 상징을 해석하려는 순간 그로테스크한 매력이 사라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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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6-05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코의 <추의 역사>는
오래 전에 사두기만 하고
역시 쓰담쓰담만 하네요.

<장미의 이름>은 정말
읽을수록 진국이라는.

cyrus 2023-06-06 09:22   좋아요 1 | URL
요즘 <장미의 이름>을 읽기 시작한 이후로 가톨릭 성인과 신학자들에 관심이 생겼어요. 이들 중 몇 사람은 중세 철학과 관련되어 있거든요. <추의 역사>도 언젠가는 절판될 수 있으니 소장하고 있으세요. ^^

삽하나 2023-07-09 1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름 특집 도서로 딱이네요!! >ㅅ < 잘 읽었어요 :) 어서 장바구니에 주섬주섬...
 




cyrus의 주석이 달린 장미의 이름》 #3


아리마스포이





장미의 이름에 등장하는 수도사 호르헤는 고령인데도 학식이 뛰어나다. 젊은 수도사들은 책을 읽거나 공부하다가 어려운 구절을 만나면 그에게 찾아가 자문한다. 호르헤가 성자나 동물을 묘사하는 수도사들을 위해 조언할 때마다 항상 강조하는 것이 있다. 필요 이상으로 과장하면서 묘사하지 말 것. 그리고 독자를 웃게 만들지 말 것.

















* 움베르토 에코, 이윤기 옮김 《장미의 이름》 (열린책들, 2009)



 “성자나 동물을 어떤 모습으로 묘사해야 할지 묻기 위해 그를 찾았다. 질문을 받으면 그는, 있지도 않은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면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어느 책 어느 쪽을 읽고 있는 것처럼, 가짜 선지자는 차림새로 말하면 주교와 흡사하나 자세히 보면 입에서 예언 대신 개구리가 나온다거니, 신성한 예루살렘 성벽은 어떤 돌들로 꾸며져 있다느니, 아리마스포이가 사는 산은 사제왕(司祭王) 요한이 통치하던 땅 근방에 표시해야 한다느니, 그리고 그 괴물 같은 산을 그릴 때는 상징적으로 알아볼 만하게 그리면 그만이지 필요 이상으로 과장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유혹을 느끼게 하거나 웃게 만들면 안 될 것이라는 등의 조언을 들려주고는 했다.

 


(《장미의 이름: 디 에센셜 1, 양장 합본》 224~225)



장미의 이름》의 역자 이윤기 선생은 아리마스포이라는 생소한 명칭에 대해 아주 짤막하게 설명한 각주를 붙였다. 각주 내용을 그대로 옮겨 적으면 이렇다. 스키타이에 산다는 전설 속의 외눈 부족이것만으로는 무언가 부족하다.
















* [개정판] 헤로도토스, 천병희 옮김 역사(도서출판 숲, 2022)




아리마스포이가 최초로 언급된 문헌은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us)역사역사4권에 스키타이족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스키타이족은 러시아 남부에 해당하는 초원지대에서 살았던 유목민이다하지만 아리마스포이는 역사3권에 처음 언급된다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아리마스포이는 그륍스로부터 금을 빼앗는다(3116). 그륍스는 독수리 머리와 날개에 사자 몸을 가진 괴물인 그리핀(Griffin)의 헬라스어(그리스어) 이름이다. 신화 속 그륍스는 신들의 보물이나 금을 지키는 파수꾼으로 종종 묘사된다.


헤로도토스는 4권에서도 다시 한번 아리마스포이를 언급한다. 이번에는 출처 밝혔다. 프로콘네소스(Proconnesus) 출신의 음유시인 아리스테아스(Aristeas)가 쓴 서사시 <아리마스포이족 이야기>(Arimaspea)아리스테아스는 신(아폴론)에게 영감을 받아 아리마스포이가 사는 지역을 여행했고, 이를 소재로 서사시를 썼다고 한다(413, 27).
















* 류싱 세계 괴물 백과: 신화와 전설 속 110가지 괴물 이야기(현대지성, 2020)




헤로도토스는 외눈 부족 이름의 뜻을 풀이하는데, 스키타이족 말로 아리마하나라는 뜻이고, ‘스푸는 눈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세계 괴물 백과: 신화와 전설 속 110가지 괴물 이야기의 저자는 헤로도토스의 견해에 의문을 제기하는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아리마스포이는 좋아하다라는 뜻의 아리아마이라는 뜻의 아스파가 합쳐진 합성어다. 그러면 말을 좋아하는 민족’이라는 뜻이 된다. 아리마고독하다, ‘스포망보다를 뜻한다는 견해도 있다. 이 견해대로라면 아리마스포이는 고독한 파수꾼이라는 새로운 의미로 쓰이게 된다.
















* 헤시오도스, 천병희 옮김 신들의 계보(도서출판 숲, 2009)




저자는 또 아리마스포이가 헤시오도스의 서사시 신들의 계보 304행에 언급된 아리스모이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세계 괴물 백과》 202~203쪽). 그런데 아리스모이가 아니라 아리모이(Arimoi)’아리모이가 구체적으로 어느 곳인지 지금도 밝혀지지 않았다신들의 계보를 번역한 천병희 선생은 각주에서 아리모이가 지명인지 부족 이름인지 확실하지 않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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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의 주석이 달린 장미의 이름》 #2


중세인들의 목욕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장편소설 장미의 이름은 베네딕트회 수도사인 멜크의 아드소가 쓴 수기(手記)를 바탕으로 쓰였다. 에코는 당연히, 이것은 수기이다라는 제사(題詞)를 썼다. 서문에 등장한 화자(움베르토 에코)는 아드소가 실존 인물임을 확인한다. 하지만 아드소는 소설을 위해 에코가 만든 허구적인 인물이다. 아드소의 수기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문헌이다.

















* 움베르토 에코, 이윤기 옮김 《장미의 이름(열린책들, 2009)


 


아드소는 바스커빌의 윌리엄과 함께 장서관이 있는 수도원에서 7일 동안 머무른다. 그는 7일 동안 일어난 일들을 베네딕트 수도회의 전례 시간에 맞추어 썼다. 아드소가 기록한 23시과(오전 9시 전후)’ 편의 묘미웃음의 기능을 놓고 윌리엄과 호르헤가 설전하는 장면이다. 호르헤는 웃음을 허용하면 신의 절대적인 권위가 흔들리게 되고, 결국 신의 뜻을 부인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생길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신을 믿는 인간이라면 웃음과 우스갯소리를 경계해야 한다. 반면에 윌리엄은 웃음이 정신을 건강하게 만들어 준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그는 웃음을 목욕으로 비유하면서 웃음의 긍정적인 효과를 강조한다.

 


 “나는 웃음이라는 것은 좋은 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웃음은 목욕과 같은 것이지요. 웃음은 사람의 기분을 바꾸어 주고, 육체에 낀 안개를 걷어 줍니다.” 


(장미의 이름: 디 에센셜 1, 양장 합본》 227)

 


호르헤도 목욕의 순기능을 인정한다. 목욕은 흐트러진 기분을 올바르게 세워 준다. 그러면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가 비탄을 사라지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목욕을 권장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여전히 웃음을 부정적으로 보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다.

 

중세를 암흑시대라고 믿는 대다수 사람은 중세인들이 고대 로마인들의 목욕법을 잊어버린 채 살아왔다고 생각할 것이다. 즉 중세인들은 목욕하지 않았다고 단정한다.
















 

* 캐서린 애쉔버그 시시콜콜 목욕의 역사(써네스트, 2019)


* [절판] 캐서린 애셴버그 목욕, 역사의 속살을 품다(예지, 2010)

 



목욕의 역사를 정리한 책이 많지 않다. ‘목욕역사’, 이 두 개의 단어가 포함된 제목이 붙은 책이 단 두 권뿐이다. 시시콜콜 목욕의 역사목욕, 역사의 속살을 품다가 있는데, 이 두 권의 책을 쓴 저자는 같은 사람이다. 두 권의 책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끊임없이 변화해온 목욕과 청결의 정의를 보여준다. 그리고 시대별로 유행했던 다양하고 기상천외한 목욕법도 소개한다.

 

윌리엄과 호르헤는 목욕을 좋게 보고 있지만, 실제로 성인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씻지 않았다. 성 히에로니무스(St. Jerome, 성 제롬)는 목욕하면 신에 관한 관심을 잃을 수 있다고 믿었다. 성인들의 가르침을 물려받은 기독교인들은 더러움을 성스러움의 징표로 여겼다. 아시시의 프란체스코(St. Francis of Assisi)는 때를 찬양했다고 한다. 우리는 피부에 묻은 더러운 때를 없애기 위해 씻고 있지만, 중세 성인들은 때를 소중하게 여겨서 일부러 씻지 않았다.

 














 

* 자크 르 고프, 니콜라스 트뤼옹 공저 중세 몸의 역사(이카루스미디어, 2009)

 

* [품절] 쥘 미슐레, 정진국 옮김 마녀: 마녀의 탄생, 마녀축제, 마녀재판과 화형의 역사 또는 슬픈 추방자들을 위한 자유의 이야기(봄아필, 2012)

 


 

이렇듯 중세가 경건한 기독교적 삶을 강조하는 시대이다 보니 중세를 오해하는 우리는 중세인들은 목욕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프랑스의 역사가 쥘 미슐레(Jules Michelet)마녀에서 중세 천 년 동안 목욕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썼다. 하지만 중세사 연구의 권위자인 자크 르 고프(Jacques Le Goff)는 미슐레의 주장에 반박한다. 중세인들은 목욕했다. 중세에도 공중목욕탕이 있었다. 십자군 전쟁이 끝난 뒤에 고국으로 돌아온 전사들은 튀르키예식 목욕을 전파하여 발전시켰다. 그래서 중세의 공중목욕탕에는 한증탕이 따로 설치되어 있다. 중세인들은 씻기 전에 먼저 몸에 증기를 쐬었고, 나무로 만든 욕조에 몸을 담갔다. 중세의 공중목욕탕은 혼탕이었는데 중세의 남자와 여자는 벌거벗은 몸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다. 혼욕을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당연히 공중목욕탕 안에서 매춘이 성행했다.


호르헤는 기독교적 교리에 부합하지 않은 것을 이교도적이라고 규정하면서 배격한다. 그런 보수적인 수도사가 목욕을 긍정적인 행위로 보고 있는 점은 의외다. 호르헤는 신의 권위를 어떻게든 지키고 싶어 한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면서 살았던 성인들의 말을 자주 인용한다. 그런데 호르헤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아퀴나스가 웃음을 권장했다는 사실을. 아퀴나스의 스승은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lbertus Magnus). 그 역시 웃음의 기능을 긍정적으로 인식한 신학자다. 장서관에 보관된 모든 책을 다 알고 있을 정도로 기억력이 좋은 호르헤가 이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만약에 윌리엄이 웃음에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한 마그누스와 아퀴나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호르헤를 논박했다면, 호르헤는 자신이 너무 늙어서 기억나지 않는다라고 말하면서 얼렁뚱땅 넘어갔을 것이다그는 자신의 종교적 신념이 무너질 수 있는 다른 견해를 의도적으로 회피하면서 무시한다. 이런 얍삽한 인간을 실제로 만나서 대화하면 답이 안 나온다






※ 미주(尾註)알 고주(考註)



시시콜콜 목욕의 역사》 중에서, 58


 사람들은 흑사병이 쥐를 통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들어왔고 쥐의 몸에 기생하는 벼룩 때문에 인간에게까지 전염된다고 믿었다. 그런데 최근에 일부 과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흑사병은 공기를 통해 전염된다고[주] 한다.



[] 흑사병, 즉 페스트의 가장 주된 감염 경로는 페스트균에 감염된 쥐에 기생한 벼룩이다. 이 벼룩에게 물린 사람은 패혈증성 페스트에 걸린다. 폐렴형 페스트페스트 환자가 배출한 침과 콧물이 호흡기에 전파될 때 발생한다따라서 좀 더 정확하게 써야 한다. 폐렴형 페스트는 페트스 환자의 몸에서 나온 비말(침방울과 콧물)이 공기를 통해 전염되면서 일어나는 질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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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log
    from blog 2024-02-03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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