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박에 빠진 뇌 - 신경학적 불균형이 만들어낸 멈출 수 없는 불안
제프리 슈워츠 지음, 이은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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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기벽(奇癖): 남달리 기이한 버릇


기벽(嗜癖): 한쪽에 치우쳐서 즐기는 버릇


기벽(氣癖): 자부심이 많아서 남에게 지거나 굽히지 않으려는 성질





킁킁. 새 책을 사면 제일 먼저 종이 냄새를 맡는다. 책의 띠지를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 양장본 커버가 없으면 허전하다. 책을 읽다가 특정 단어에 확 꽂히면 생각이 많아진다. 특정 단어를 골똘히 분석하기 시작하면 다음 장으로 넘기지 못한다. 일단 읽고 있던 책을 덮는다. 특정 단어를 알기 위해 도움이 되는 다른 책을 찾아본다. 오역으로 생각되는 문장을 발견하면 책 읽기를 멈추고, 그 문장의 원문을 찾는다. 책의 귀퉁이가 접혀 있으면 바로 편다. 책이 냄비 받침대로 쓰이는 것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다.


이런 괴팍스러운 성미를 모두 가진 사람이 있다? 그래, 바로 나다. 책 앞에서 예민해지고, 책 읽을 때 강박행동을 보이는 내 모습들이다. 이 모든 행동은 책 좋아하는 사람들조차도 이해하기 힘든 기이한 버릇(奇癖)이다. 과거에는 이런 행동을 병적인 행동이나 병증으로 취급했다. 이상한 기벽(, 버릇 벽)’(병들어 기댈 녁)’(물리칠 벽)’이 합쳐진 한자다. ‘의 또 다른 뜻은 적취(積聚)’. 적취란 몸 안에 쌓인 기가 너무 많이 쌓여 덩어리가 생겨서 아픈 병을 의미한다. 좀처럼 고치기 힘든 기벽은 몸과 정신을 집어삼키는 괴물이다. 기벽이 있는 사람은 쓸모없는 행동을 반복적으로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답답해하고 불안감을 느낀다. 이때 보이지 않는 괴물이 옆에서 속삭인다. 이렇게 안 하면 넌 살 수 없어. 당장 해!”


책만 보면 내게 간섭하고 조종하는 괴물과 함께 산 지 어언 13년이 되었다독서와 글 쓰는 일에만 매달리는 기벽(嗜癖)도 함께 살고 있다. 나쁜 기벽의 입김이 너무 세서 드라마와 영화를 즐겨 보지 않는다나는 이 괴물들의 정체를 확실히 알고 싶어서 강박에 빠진 뇌: 신경학적 불균형이 만들어낸 멈출 수 없는 불안 만났다. 제일 먼저 책 뒤편에 있는 <강박사고 및 강박행동 점검표>를 펼쳤다점검표는 총 27개의 문항으로 되어 있다. 예상대로 임상적으로 의미 있는 강박사고가/강박행동이 있을 수 있다라는 결과가 나왔다강박사고는 원치 않는데도 계속 떠올라 괴로움을 주는 생각이다. 강박사고가 불러일으키는 두려움과 불안을 제거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하는 것을 강박행동이라 한다. 예를 들어 자신 주변에 세균이 너무 많아서 질병에 걸릴 거라고 지나치게 많이 생각하면 강박사고에 해당한다. 비현실적인 두려움을 떨쳐내려고 손 씻는 일에 집착하면 강박행동이다. 강박사고와 강박행동이 강박 병증 환자와 그 주변 사람들의 삶을 괴롭히고 무참히 파괴하는 수준에 이르면 강박장애가 된다.


강박에 빠진 뇌의 저자 제프리 슈워츠(Jeffrey Schwartz)는 강박장애를 아주 탐욕스러워서 만족할 줄 모르는 괴물로 비유한다. 강박장애 환자는 이 괴물의 정체를 모른다자해하는 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괴물에 뜯어먹힌 채 생활한 지 오래될수록 자존감은 낮아진다. 자존감이 너무 낮아지면 삶은 텅텅 비어 있고 야위어진다. 가벼워진 삶은 자기 비하의 늪에 한 번 빠지면 쉽게 빠져나오지 못한다. 살려는 의지가 남아 있지 않다.


보이지 않는 괴물의 진짜 정체를 알고 나면 확실히 가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가 아니라 가 문제다. 뇌는 때때로 우리에게 잘못된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 메시지를 전달받은 여러 신체 기관은 뇌의 잘못된 명령만 믿고 작동한다. 착시 현상에 속는 우리의 반응은 뇌의 속임수를 금방 알아차릴 수 있는 가벼운 오작동에 속한다. 하지만 강박장애는 너무 자주 일어나고, 너무 오래 방치하면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위험한 오작동이다.


강박장애는 보이지 않는 정체불명 괴물이 아니다. 뇌가 잘못 보낸 괴물이다. 저자가 제안하는 자기 주도 행동 치료 4단계 중 첫 번째 단계는 재명명이다. 이 괴물의 정체를 확실히 알면 이름을 붙여줘야 한다. 너는 또 날 괴롭히려고 찾아온 강박장애야!’ 나를 괴롭히는 녀석을 알았으면 왜 나타났는지 원인을 파악해야 한다. 자기 주도 행동 치료 두 번째 단계는 재귀인이다.뇌가 또 장난치려고 하는구나.’ 이 단계까지 오는 과정이 익숙해지면 강박장애 괴물이 불쑥 찾아와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면 강박사고가 떠올리거나 강박행동이 나타나는 횟수가 줄어든다. 강박장애 괴물을 제압하려면 공정한 관찰자를 활용해야 한다. 공정한 관찰자는 자신의 진짜 내면을 잘 아는 존재다. ‘공정한 관찰자가 내민 손을 잡으면 강박장애 괴물과 격렬하게 싸울 때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다. 남들이 이해할 수 없고, 나를 괴롭혔던 강박장애가 뇌에 생긴 화학적 문제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강박사고와 강박행동의 실체를 확인했으면 진짜 나의 모습, 내가 진정 원하는 감정과 욕구가 무엇인지 파악한다. 여기서부터 내 몸과 정신을 건강하게 만드는 행동을 하도록 유도하는 재 초점 단계에 시작된다. 마지막 단계인 재평가에 도달하면 강박사고와 강박행동이 내 삶에 불필요한 것임을 인식한다.


강박장애가 만든 기벽(奇癖)’기벽(氣癖)’으로 맞서 싸워야 한다. 강박장애 환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기벽(氣癖)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꼭 있어야 할 기벽자부심이 많아서 남에게 지거나 굽히지 않으려는 성질이다. 좋은 기벽이 있으면 삶의 의지와 의욕이 강해진다. ‘공정한 관찰자는 나 자신을 잘 알아야 하고, 나 자신을 사랑할 줄 안다. 또한 자부심을 느끼게 해준다. 강박장애 괴물과의 싸움은 죽을 때까지 해야 한다. 그 녀석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 강박장애를 포함한 모든 질병을 완전히 치유할 수 있다는 헛된 믿음이 비대해지면 강박사고로 변할 수 있다. 죽일 수 없어도 절대 질 수 없다는 의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의지가 없으면 강박장애 괴물에 먹히고, 진짜 내 모습은 사라진다. 기벽이 충만하면 뇌의 악랄한 장난질을 멈출 수 있다. 내 삶의 가치를 높여주는 건설적인 행동을 하면 뇌를 고칠 수 있다. 뇌를 바꾸면 진짜 나로 바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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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아 2023-07-10 15: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의 물성을 먼저 어루만지고 정좌하여 읽는 제 습관이 보여 미소를 띠게 됩니다. 재밌게 읽고 갑니다~

cyrus 2023-07-11 23:32   좋아요 0 | URL
제 글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책과 관련된 제 기벽을 스스로 부정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고, 오히려 즐기는 편입니다. ^^
 
콜레트와 함께하는 여름 함께하는 여름
앙투안 콩파뇽 지음, 김병욱 옮김 / 뮤진트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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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협찬받고 쓴 서평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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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콜레트(Colette)는 팔방미인이다. 그녀는 자신보다 몇십 살 많은 남자와 한참 어린 젊은 남자들을 만나 사귀었다. 여자들도 콜레트의 발랄하면서 풍성한 매력에 푹 빠졌다. 이 정도로 콜레트는 아름다웠다. 콜레트는 다재다능한 사람이었다. 소설, 극작가, 신문 기자, 음악 및 영화 평론가, 무언극 배우, 뮤직홀 댄서였다. 부업으로 자신의 이름을 내건 화장품 회사의 코디네이터로 일했다. 그녀의 메이크업 기술을 배울 수 있는 미용학원도 생겼다


2019년에 키이라 나이틀리(Keira Knightley)가 콜레트로 분한 영화가 개봉되었다. 영화는 남성 중심 세상 한가운데에 당당하게 돌진하면서 살아온 콜레트의 삶을 보여준다. 하지만 국내에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프랑수아즈 사강(Francoise Sagan)보다 늦게 당도한 콜레트는 여전히 미지의 작가로 알려져 있다. 영화가 만든 작가 콜레트는 빼빼 말라서 생기가 없다주변 사람들과 온 세상을 뒤흔든 그녀의 팔팔한 팔방미인 면모를 빛나게 해주지 못한다. 콜레트와 함께하는 여름발랄하고 풍성한 매력을 가진 콜레트를 만날 수 있는 책이다


콜레트는 복잡하면서도 모순적인 인간이다. 그런 자신의 삶을 거대한 풍경 같은 인간의 얼굴(238쪽)이라 했다. 콜레트의 글에 거대한 삶의 흔적이 또렷하게 남아 있다. 콜레트와 함께하는 여름의 저자 앙투안 콩파뇽(Antoine Compagnon)은 콜레트가 쓴 소설, 수필, 자서전 등을 읽으면서 콜레트라는 거대한 인간의 얼굴을 복원한다


콜레트는 네 개의 얼굴을 가진 사람이다. 콜레트를 유명하게 만든 ‘<클로딘(Claudine)> 시리즈는 그녀의 첫 번째 남편 윌리(Willy)의 그늘 안에서 태어난 작품이다. 클로딘은 천진난만한 시골 소녀다. 클로딘은 숲을 자유롭게 누비면서 점잖은 사람들을 만나면 짓궂은 장난을 치는 목신 판(Pan)을 닮았다. 클로딘의 얼굴은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란 소녀 콜레트의 앳된 얼굴이다.


콜레트의 어머니 시도(Sido)는 윌리만큼이나 콜레트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애증의 존재다. 콜레트에게 어머니는 사랑스러운 방해자[주1]. 시도는 죽을 때까지 딸을 보호하려고 했다. 시도는 마구잡이식으로 연애하고, 출산을 거부하는 딸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콜레트는 자신을 모성’과 ‘요조숙녀라는 울타리에 가두려는 어머니를 미워했다. 하지만 식물을 애지중지하게 여기는 마음은 어머니를 닮았다콜레트의 소설에서 등장하는 작가의 분신은 자연을 사랑하고 존중한다. 훗날 콜레트는 어머니가 내 인생의 주요 등장인물이라고 말했다(39쪽). 젊은 콜레트는 글을 쓸 때마다 어머니의 존재를 지웠다. 그래서 그녀의 소설에 주인공의 어머니가 없다. 세월이 흘러 어머니의 빈자리를 느낀 콜레트는 자신의 삶이 시도의 일부였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리하여 완전히 잊힐 뻔한 콜레트의 사랑스러운 방해자시도라는 소설에서 다시 태어난다. 시도는 동식물을 좋아하는 콜레트의 얼굴이다


지지(Gigi)는 영화와 연극으로 만들 정도로 콜레트의 말기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하다. 지지는 콜레트의 다른 작품들에 묘사된 여성처럼 능동적인 삶을 살아가지만, 결국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한다. 콜레트는 결혼제도를 부정적으로 인식했지만, 세 번이나 결혼했다지지는 자유연애주의자와 아내라는 양면적 정체성을 동시에 가진 콜레트의 얼굴이다.


마지막 네 번째 얼굴은 이 세상을 온몸의 피부로 느끼면서 글 쓰는 콜레트의 진짜 모습이다. 콜레트는 소설을 쓰면서도 문학을 불신했다. 콜레트가 거부한 문학은 오로지 상상력을 동원해 허구로만 채워진 픽션(fiction)’이다. 콜레트의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는 () 문학작가 자신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팩션(autofiction: 자서전과 소설의 결합)’이다.


작가 콜레트는 편견과 가십으로 만들어진 신화이자, 대중이 오해하기 쉬운 픽션적인 존재다. 이 가공의 존재가 널리 알려질수록 대중은 콜레트가 자신의 명성을 높이려고 스캔들을 일으킨 논란의 작가로 인식한다. 그렇지만 콜레트와 함께하는 여름이 보여준 팔방미인 콜레트는 몸을 활발하게 움직이면서 자신이 살아있음을 스스로 확인하는 존재이다. 콜레트는 자신에게 향한 타인들의 시선과 주변 상황에 따라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이다. 그녀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인 <파란 등대>에서 내가 가만 내버려 두면, 우울한 순례 같은 것이 되어버릴 것이다라고 썼다(244쪽). 침울한 인간은 움직이지 않으려고 한다. 살아 있어도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허무주의에 잠식당한 우울한 순례자의 최후는 살아가기를 완전히 멈추는 결말을 스스로 선택하는 상황이다. 콜레트는 스스로 움직였다. 오직 살기 위해서 여러 분야에 뛰어든 삶은 우울한 순례를 멈출 수 있는 그녀만의 대처 방식이었다


콜레트는 활활 타오르는 불처럼 살았다온몸과 정신이 금방 식어버리지 못할 정도로 아주 뜨겁게. 삶이 완전히 식을 때까지 콜레트는 뜨겁게 사랑했고, 뜨겁게 무대 위에서 춤을 췄고, 뜨겁게 파란 종이 위에 글을 썼다파란색(blue)은 콜레트의 삶을 상징한. 파란색은 서늘하고 무기력하다. 그렇지만 콜레트의 파란색은 뜨겁다.






[주1] 최근에 나온 책인 줄리 필립스의 나의 사랑스러운 방해자: 앨리스 닐, 도리스 레싱, 어슐러 르 귄, 오드리 로드, 앨리스 워커, 앤절라 카터돌보는 사람들의 창조성에 관하여(돌고래, 2023)의 제목을 그대로 따온 표현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사랑스러운 방해자어머니가 된 작가가 돌봐야 하는 자녀를 뜻한다.






※ cyrus의 주석




* 46

 




 키플링의 정글의 책[2]에 나오는 동물들이 그렇듯 사람처럼 말한다.

 

 

[2] 정글 북






* 54~55

 




 콜레트는 자신의 몸과 붓의 자유를 외쳤다. 그녀는 뇌일리에 있는 나탈리 바르네[3]의 집이라든가, 니스에 있는 르네 비비앙의 집 활인화에 출연했다.

 

 

* 58

 

 콜레트는 몇 차례 동성애를 경험하고 나서(클로딘의 부부생활에 레지로 등장하는 조지아나 나탈리 바르네[3]), 미시와 5년 동안 연인 관계로 지냈다.

 

 

[3] 35~36쪽에 콜레트의 여자친구 내털리 클리퍼드 바니(Natalie Clifford Barney)가 처음으로 언급된다. 나탈리 바르네내털리 바니의 동일 인물이다. 이름표기를 통일해야 한다.






* 55






폴리 베르베르 극장 → 폴리 베르제르(Folie Bergère) 극장






* 104

 

 콜레트는 저널리즘의 먹물이 피에 밴 사람이었다. 훗날 그녀가 죽었을 때 장 폴앙[4], 그녀는 소설 속으로 길을 잘못 든 대기자였다라고 음흉스레 말하게 되는 것도 그래서다.

 

 

[4] 장 폴랑(Jean Paulhan)’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 244

 





트루먼 카포트 트루먼 카포티(Truman Capote)





* 247

 




 그녀에게 글쓰기는 늘 지겨운 일이었고, 오직 생계를 꾸리기 위해 기쁨 없이 몰두한 활동이었던 같다.[5]

 

 

[5] 활동이었던 같다.






* 250

 




 1950년에는 <피가로>, 발자크는 내 청소년기의 종교였고, “[6] 초기 교육의 가이드였다고 털어놓는다.


 

[6] 발자크(Honore de Balzac)는 콜레트가 존경하는 작가다. ‘에 주격 조사 나 보격 조사 가 붙을 때 쓴다. 따라서 는 곧 를 뜻하므로 초기 교육의 가이드라는 표현이 어색하다 초기 교육의 가이드로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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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돈 작가의 소설집 인생 연구에 실린 베티 블루미스터리 소설 느낌이 물씬 풍기는 글이다. 화자는 어린 시절부터 알게 된 베티 아줌마라는 인물의 삶을 관찰하듯이 묘사한다
















[대구 서점 <일글책> 6월 독서 모임 선정 도서]

* 정지돈 인생 연구(창비, 2023)




소설 시작부터 독자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평범하지 않은 사건이 전개된다. 소설은 베티 아줌마가 병원에 입원한 장면에서 시작된다. 병원 관계자는 아줌마가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보호자인 화자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아줌마를 데려가라고 한다. 어머니는 화자인 와 함께 병원에 가서 아줌마를 데려온다. 그런데 아줌마가 생각보다 이상하다. 아줌마의 말에 따르면 자기 집의 벽이 말을 건다. 게다가 냄새까지 난다고 주장한다. 아줌마와 오랜 친분이 있는 어머니 역시 아줌마의 알 수 없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는 이렇게 판단할 것이다. 베티 아줌마는 참말로 이상한 사람이구나. 왜 저렇게 됐지? 아줌마와 어머니는 어떤 계기로 인연을 맺기 시작했을까. 독자는 한 인물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줄 수 있는 중요한 대목이 나오기를 기대하면서 소설을 읽어나간다.


하지만 베티 블루는 독자의 기대를 저버린다. 아줌마는 본인의 기억에 지우고 싶은 안 좋은 일을 겪은 시점부터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한 건 맞다. 그러나 다 읽었는데도 여전히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은 여운이 남는다. 아줌마는 자기가 일한 보험회사의 영업부 부장과 사랑에 빠지는데, 부장은 유부남이고 바람둥이다. 결국 둘의 관계는 부장의 아내에게 들통나버리고, 화자가 표현한 대로 작살이 났고 또 구급차 신세를 졌다.’ 부장의 아내에게 크게 혼쭐이 난 이후부터 아줌마는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인다. 병원에서 퇴원한 아줌마는 한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집에만 있다. 그리고 온 방에 불을 다 꺼놓고 은박 돗자리를 담요처럼 싸맨 채 지낸다. 아줌마는 단지 전자파가 몸에 안 좋다는 이유로 외부와 단절된 삶을 선택한다. 아무리 봐도 이상하지 않은가. 아줌마는 왜 갑자기 전자파를 두려워하게 된 것일까?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독자의 궁금증은 하나둘씩 늘어난다. 이러면 독자는 다시 한번 커다란 혼란에 빠진다. 도대체 작가는 베티 아줌마의 삶을 묘사하면서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 걸까?
















* 수전 손택 해석에 반대한다(이후, 2002)




나는 원래 소설을 읽으면 소설 속에 나오는 인물들을 세세하게 분석하는 습관이 있다. 그렇지만 인생 연구만큼은 기존 방식대로 읽지 않았다. 최근에 수전 손택(Susan Sontag)해석에 반대한다를 다시 읽은 이후부터 소설 분석에 중점을 둔 읽기 방식을 잠시 멈추었다. 글을 읽으면서 생각하기를 멈춘 셈이다.


만약에 베티 블루해석하면서 읽는 텍스트가 아니라면, 이 작품은 맥거핀으로 시작해서, 맥거핀으로 이어져서, 맥거핀으로 끝나는 소설이다. 맥거핀(MacGuffin)앨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의 영화에서 유래한 용어이다. 영화에서 중요한 것처럼 나오거나 언급되는 소품 또는 인물의 대사가 실제로는 줄거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극적 장치를 뜻한다. 따라서 맥거핀은 영화나 소설이 끝날 때까지 구체적인 정체나 의미를 드러내지 않는다. 맥거핀의 역할은 이야기가 전개되도록 하는 결정적인 장면 또는 사건인 것처럼 보여줘서 독자의 관심을 집중하도록 유도한다. 맥거핀에 속은 독자는 그것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데 중요한 단서라고 믿으면서 소설을 읽는다. 하지만 결말에 이르고 나서야 특별한 의미가 없는 소품 또는 사건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결국은 독자는 소설에 대한 해석을 제대로 내놓지 못한다. 


베티 블루를 다 읽고 나서도, 또 여러 번 읽었는데도 베티 아줌마가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느끼는 독자가 있을 것이다. 어떤 독자는 베티 블루이외에 인생 연구에 실린 다른 작품들을 끝까지 다 읽고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에 자책감을 느낀다. 심지어 자신의 문해력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기도 한다본인의 읽는 방식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좋지 않다.


베티 블루가 정말로 맥거핀이 가득한 소설인지 단정할 수 없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쓴 것이라면 맥거핀으로 볼 수 있다. 정 작가가 그렇게 썼다고 인정해야지만 내 견해가 사실로 판명된다.[주] 베티 블루맥거핀 소설인지, 아닌지 따지는 건 시간 낭비다혹시나 해서 인생 연구를 이미 읽은 분들에게 사죄한다. 아마도 이분들은 내 글이 난해한 베티 아줌마를 이해하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될 거로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이 글 자체가 맥거핀이다.





[] 원래 이 글에 베티 블루에 맥거핀으로 추정하는각종 설정을 제시하려 했다. 하지만 의도치 않게 글이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서 자세한 설명을 생략했다. 사실은 맥거핀이라고 주장하는 데 힘을 실을 수 있는 나의 근거가 논리적으로 빈약하며 비약이 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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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23-07-02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베티블루
영화 장면 떠오르네요

cyrus 2023-07-03 06:55   좋아요 0 | URL
독서 모임에 참석한 분 중에 한 분이 <베티 블루> 영화를 봤대요. 베티 아줌마가 영화 속 여주인공과 비슷하다고 말씀하셨어요. ^^
 




2주 전 토요일(617)서울국제도서전을 참관했다. 작년에 비해 개인적으로 관심 있는 출판사들이 참가했던 터라 책을 많이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도서전보다 제일 중요한 곳에 가야 해서 ‘꼭 사야 할 책 두 권만 샀다.

















* 김정희 책방지기 생활 수집》 (탐프레스, 2023)




두 권 중 한 권은 대구 독립서점 <서재를 탐하다>와 출판사 <탐프레스(tampress)> 운영자 김정희책방지기 생활 수집이다














전국 각지에서 온 애서가들로 바글거리는 코엑스를 얼른 벗어나고 싶었다나 같은 간서치(看書癡)가 좋아할 만한 곳으로 향했다그곳은 바로 세운상가 근처에 있는 <소요서가>라는 철학 전문 서점이다
















* [절판] 데이비드 C. 린드버그 서양 과학의 기원들(나남출판, 2009)




처음에 서점을 찾기 힘들어서 상당히 애먹었다서점 건물이 지상에 있는 줄 알고 한동안 헤맸다대부분 사람은 유명 서점에 가기 전에 사전 조사로 그 위치를 확인할 것이다그런데 난 그렇지 않다서점에서 어떤 책이 판매되고 있는지 먼저 본다사실 <소요서가>에 가고 싶은 딱 한 가지 이유는 절판된 서양 과학의 기원들이 책을 사기 위해서였다.








 









* 윌리엄 뉴먼 프로메테우스의 야망(도서출판 길, 2023)


* 바이얼릿 몰러 지식의 지도: 일곱 개 도시로 보는 중세 천 년의 과학과 지식 지형도(마농지, 2023)




30여 분 돌아다닌 끝에 <소요서가>를 찾았다서점 진열창에 배치된 책들이 제일 먼저 눈에 띄었다그중에 이미 내가 산 책 두 권이 있었다프로메테우스의 야망과 지식의 지도이 책들은 서양 중세의 과학이 처음에 어떻게 형성되었고유럽 전역으로 전파되었는지를 보여준다이 두 권의 책을 읽기 시작했던 터라 여기에 짝이 될만한 서양 과학의 기원들을 구매하고 싶었다하지만 서양 과학의 기원들은 이미 다른 손님이 예약 구매된 상태였다비록 목표 달성은 실패했지만, <소요서가>에 사고 싶은 책들이 엄청 많았다.


그날 <소요서가>에서 고른 책은 총 여섯 권이다그중 세 권은 예전에 이미 읽었고서평을 남겼다읽은 책 세 권만 간략히 언급하겠다.

















테레사 포르카데스 이 빌라 여성주의 신학의 선구자들》 (분도출판사, 2018)




여성도 지식인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던 교회가 어떻게 남성 중심적인 교권 제도를 고집하는 교회로 변했는가그렇다면 페미니즘 관점을 적용하여 교회에서 여성의 역할을 재배치하는 제도는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여성주의 신학의 선구자들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느끼고진정한 의미의 여성과 신학이 무엇인지 접근한다책은 여성 신학 대신에 여성주의 신학이라는 용어를 내세워 그것의 의미와 역사를 다룬다그리고 남성 중심 사회 속에서 주도적인 생각으로 주체적인 삶을 살아간 위대한 여성 신학자들을 소개한다






 










* [절판] 샤를 보들레르 현대의 삶을 그리는 화가》 (은행나무, 2014)




보들레르가 강조하는 현대는 간단히 말하면 현시대의 유행과 풍속이다결국 현대의 삶을 그리는 화가는 자신이 본 것시대의 풍경을 세밀하게 관찰하며 응시하는 예술가. ‘현대 예술가는 벌거벗은 여신이나 신화 속 영웅의 모습을 그리던 고전주의 화풍을 거부한다그래서 전통에 반기를 든 보들레르는 이 책을 통해 현대성이 충실히 반영된 예술가를 옹호한다국내에 출간된 보들레르가 쓴 책과 보들레르 관련 서적을 모으는 중인데, <소요서가>에 오기 전까지는 절판된 현대의 삶을 그리는 화가를 구하지 못한 상태였다. 드디어 이 책을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
















* [구판절판] 린 헌트 엮음 포르노그라피의 발명》 (책세상, 1996)

* [개정판] 포르노그래피의 발명》 (알마, 2016)



<소요서가>에서 구매한 린 헌트의 책은 책세상에서 나온 구판이다프랑스 혁명 이전의 금서목록에 포르노그래피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아이러니하게도 금서로 지정된 포르노그래피는 대중이 즐겨 보는 베스트셀러였고봉건적 구체제를 뒤흔들만한 선동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프랑스 혁명 이전까지 포르노그래피는 성적 표현을 동원해 종교적 · 정치적 권위를 비판하는 언어적 무기였다포르노그래피의 발명은 프랑스 혁명과 민주주의를 촉발한 포르노그래피의 영향력을 조명한 책이다.

















* [개정 4]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현실문화, 2022)




그날 <소요서가주인장은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를 읽고 있었다.

 

현대미술은 정말 어렵고보면 볼수록 머리 아프게 만든다사실 미술이라는 단어조차도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어렵다이것은 미술이 아니다는 미술과 그것을 어려워하는 사람들 사이의 틈을 메꿔주는 책이다미술을 이해하고해석하는 관점과 방식은 고정적이지 않다시대적 상황에 따라 미술을 보는 눈이 결정되고시대가 달라지면 변하기 마련이다그래서 미술을 한 마디로 규정하고정의 내리기가 참 쉽지 않다저자는 현대미술이 소수의 지식인만 이해하는 문화로 전락하는 바람에 실패했다고 지적한다저자의 지적은 현대미술의 한계에 정곡을 찌른 분석이다







지난주 금요일에 <소요서가> 인스타그램 운영자가 내게 메신저(DM)를 보냈다. 서양 과학의 기원이 서점에 입고되었으니(!) 필요하다면 예약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절판된 책이라서 영영 못 구할 줄 알았는데 <소요서가>가 정말 감사하게도 귀한 책을 찾아줬다. 절판된 책 가격은 정가보다 비싸게 매겨지는 편이다. 하지만 나는 그 책 가격이 얼만지 생각하지 않고, 바로 그 책을 구매하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타이밍이 참 좋았는데 바로 다음 날인 토요일에 <달의 궁전> 독서 모임이 있는 날이라서 서울에 갈 예정이었다. 모임 시작 전에 <소요서가>에 방문해서 서양 과학의 기원을 구매했다. <소요서가> 주인장이 말하기를 <소요서가> 대표가 서양 과학의 기원을 매우 탐냈다고 한다. <소요서가> 대표는 직접 뵌 적은 없지만, 이분 역시 내공이 깊은 간서치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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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3-06-28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제도서전 가셨군요. 저는 가고 싶었는데 못 갔어요. 소요서가라는 곳이 있었군요. 귀한 책을 구하셔서 잘 됐습니다.

cyrus 2023-07-01 21:31   좋아요 0 | URL
사실 저도 몰랐던 서점이었어요. <일글책> 책방지기가 <소요서가>를 소개해서 알게 됐어요. ^^

stella.K 2023-06-28 09: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서울에 사는 나도 잘 모르겠는데 대단하다. 역시 너는 진정한 애서가다.
조만간 해외로도 발을 넓혀볼 생각은 없나? 가까운 일본부터라도. 애서가에겐 언어의 장벽도 문제가 이니잖나? ㅋ 암튼 다행이다. 힘들게 서울까지 와서 원하는 책을 샀으니.^^

cyrus 2023-07-01 21:33   좋아요 1 | URL
외국어 공부하면 책을 못 읽어요. 가끔 우리말로 번역된 외국 도서를 읽다가 아리송한 문장을 만나면 외국어 공부를 하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래도 영어 공부하고 싶지 않아요. ㅎㅎㅎ

레삭매냐 2023-06-28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내 글쓰기만을 고집하지만,
제가 권유한 대로 너튜브의
세계를 추천하는 바입니다.

물론 들으시진 않겠지만 ㅋㅋ
지난 주말 역시나 즐거웠습니다.

cyrus 2023-07-01 21:34   좋아요 1 | URL
글 쓰는 삶이 제게 부와 명성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해도, 저는 죽을 때까지 책 읽고 글 쓰면서 살아가고 싶어요. ^^

페넬로페 2023-06-28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 작년에도 서울국제도서전 오셨죠? 벌써 1년이 지났네요.
매냐님께서 달궁이라 표현하셨는데
‘달의 궁전‘이군요.
음, 달의 궁전이라, 좋네요~~
대구에서 서울까지 오는 열정, 역시 진정한 책쟁이십니다^^

cyrus 2023-07-01 21:36   좋아요 1 | URL
작년에 제가 도서전에 간 것을 기억하시네요. ㅎㅎㅎ <달의 궁전>이 폴 오스터가 쓴 소설 제목이기도 해요. 달궁 멤버 대부분이 폴 오스터의 소설을 좋아해서 독서 모임 이름이 ‘달궁’이 되었답니다. 그렇지만 저는 폴 오스터의 소설을 즐겨 읽지 않았어요.. ^^;;

시나브로 2023-08-09 0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번에 소요서가에서 <서양과학의 기원들> 재고가 있어 우연히 구매할 수 있었는데, 쓰신 글 보니까 괜히 반갑네요 ㅎㅎ
 
지식의 지도 - 일곱 개 도시로 보는 중세 천 년의 과학과 지식 지형도
바이얼릿 몰러 지음, 김승진 옮김 / 마농지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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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보통 르네상스라고 하면 천 년 동안 잊힌 고대 그리스 문화가 다시 유행하기 시작한 시대 정도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시대순으로 단순 나열된 역사를 공부한 사람들은 이 천 년중세라고 생각한다. 또 중세를 고대 그리스 · 로마 시대와 르네상스 사이에 끼인 암흑기로 인식한다. 마녀사냥, 흑사병, 교황, 십자군 전쟁. 우리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중세와 관련된 것들이다. 앞서 언급된 단어들은 르네상스와 비교하면 어둡고, 답답하고, 부정적인 느낌이 든다. 천 년으로 뭉뚱그린 중세는 종교에 의해 과학의 발전이 발 묶인 시대, 즉 서양 지성사의 공백기로 취급받는다. 정말로 중세는 모든 것이 신과 교회가 중심이었고, 지식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지 않아서 꽉 막힌 어두운 시대였을까.

 

오랫동안 묻혀서 잘 지워지지 않은 중세의 어두운 덧칠을 쓱쓱 제거해보자. 편견과 오해가 뭉쳐져서 생긴 때를 벗긴 중세에 인간이 있었고, 사유하는 정신이 있었고, 여기에서 꽃 피운 과학이 있었다. 지식의 지도: 일곱 개 도시로 보는 중세 천 년의 과학과 지식 지형도는 중세에 관한 우리의 막연한 이해와 비뚤어진 편견을 지워버리는 책이다.

 

지식의 지도저자는 고대 세계에서 존재했던 과학(수학, 천문학, 의학) 문헌들이 중세에 어떻게 살아남아 르네상스까지 전해질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저자에 따르면 중세는 지적으로 대단히 활발한 시대였다. 광대한 이슬람 제국을 세운 아랍의 군주 할리파(칼리프)는 철학, 의학, 그 밖의 다른 과학 필사본들을 아랍어로 번역하는 사업을 적극 지원했다. 아랍 학자들은 완전히 잊힐 뻔한 고대의 지적 유산을 소화해 제 살로 만들어 단련한 뒤 유럽으로 전파했다. 이슬람 제국의 중심지 바그다드는 고대의 지적 전통과 르네상스의 지적 전통을 이어준 중세 학문의 중심지였다. 그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 기독교, 아랍 문화가 섞이고 충돌하는 지식의 용광로였다. 아랍 학자들의 공헌으로 더욱 풍부해진 고대의 지적 유산은 라틴어로 다시 번역되면서 유럽 수도원의 필사실과 학문 중심지로 새롭게 떠오른 이베리아반도의 도서관에 유입되었다. 이렇듯 중세에도 학문이 전파되고 발전되는 경로가 있었다. 저자는 중세 과학 및 학문을 대표하는 학자들, 유클리드(Euclid, 수학), 프톨레마이오스(Ptolemy, 천문학), 갈레노스(Galenos, 의학)의 저술이 번역되고 전파되는 경로를 추적하여 지식 지도에서 사라져버린 중세를 복원한다.

 

지식의 지도는 야만, 폭력, 억압과 같은 부정적인 말 빛깔로 덧칠된 중세를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해준다. ‘과학 대 종교’, ‘기독교 대 이슬람으로 양분하는 시선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도 과학을 억압하는 기독교라는 오래된 통념에 벗어나지 못했다.

 


 히파티아의 사연은 고대 세계를 통틀어 가장 비극적이고 가장 강렬한 이야기일 것이고 그래서 그는 이 시기의 가장 잘 알려진 여성 과학자이기도 하다. [중략] 이교 문화에 적대적인 기독교도의 표적이 되어 폭도들에게 살해당했다


(75쪽 각주)

 


히파티아(Hypatia)는 기독교가 학문의 자유를 탄압한 사례를 언급할 때면 자주 거론되는 인물이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히파티아의 죽음을 묘사한 일화를 인용하면서 고대 지적 유산의 가치를 무시한 기독교의 종교적 광신을 비판했다. 하지만 히파티아는 종교적 광신의 희생자가 아니다. 실제로 히파티아는 기독교인들을 호의적으로 대했으며 관직에 등용된 기독교인들에게 존경받는 학자였다. 불행하게도 그녀는 권력에 눈이 먼 기독교 세력 내의 정치적 갈등에 휘말리면서 희생당했다.[주1] 히파티아에 대한 저자의 각주는 과학 대 종교(기독교)’라는 이분법적 통념을 강화할 여지가 있다.





[1] 참고 문헌

 

* 로널드 L. 럼버스, 코스타스 캄푸러키스 엮음 통념과 상식을 거스르는 과학사: 뉴턴에서 멘델까지, 과학을 둘러싼 역사적 오해들(글항아리사이언스, 2019)

 

* [절판] 로널드 L. 럼버스 엮음 과학과 종교는 적인가 동지인가(뜨인돌, 2010)






※ cyrus의 주석



* 44






 살아남은 것은 아주 일부다. 아이스킬로스의 희곡 80여 편 중 전해지는 것은 7편뿐이고, 소포클레스의 작품 120편 중에서 7편만 현전하며, 에우리피데스(Euripides)의 작품 92편 중 살아남은 것은 18[주2]뿐이다.

 

[원문]


 Only a fraction has survived: seven of the eighty or so plays by Aeschylus, seven of the one hundred and twenty by Sophocles, eighteen out of ninety-two by Euripides.

 

[주2] 저자가 작품 수를 착각했다. 19이다.





* 331쪽 각주


중국에서는 13세기 초에 인쇄술이 발명되었다.[주3]



[3]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은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무구정광대다라니경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유네스코 세계유산기록에 등재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제작 연도가 불분명해서 세계 최초 목판 인쇄물이라는 기록이 외국에서는 공인받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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