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달 <일글책> 고전 읽기 모임 선정 도서는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의 희극이다. 지난주 토요일 오전 모임을 위해 기사()을 읽었다. 두 편의 희극을 읽은 분들은 이구동성으로 두 편이 재미없다는 소감을 밝혔다.





























* 아리스토파네스, 천병희 옮김 아리스토파네스 희극 전집 1(도서 출판 숲, 2013)


* 에우리피데스, 천병희 옮김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 1(도서 출판 숲, 2020)

 

* 에우리피데스, 천병희 옮김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 2(도서 출판 숲, 2021)


* 아이스킬로스, 천병희 옮김 아이스퀼로스 비극 전집(도서 출판 숲, 2008)

 

* 소포클레스, 천병희 옮김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도서 출판 숲, 2008)

 




희극보다 비극이 더 재미있었다고 말한 분도 있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그날 저녁 대명공연거리에 있는 <한울림 소극장>에 펼쳐진 극단 수작의 연극 햄릿, 나는 죽이지 않았다(예병대 작박세향 연출)를 보면서 그 말이 우연이 만든 공연 감상의 복선이라는 걸 알았다. <일글책>에서 나온 낮말이 <한울림 소극장>까지 들렸던 것일까. <한울림 소극장><일글책> 바로 건너편에 있다.






























* 윌리엄 셰익스피어, 김종환 옮김 햄릿》 (지만지드라마, 2019)


* 윌리엄 셰익스피어, 설준규 옮김 햄릿》 (창비, 2016)


* 윌리엄 셰익스피어, 이경식 옮김 햄릿》 (문학동네, 2016)


* 윌리엄 셰익스피어, 박우수 옮김 햄릿》 (열린책들, 2010)


* 윌리엄 셰익스피어, 노승희 옮김 햄릿》 (펭귄클래식코리아, 2010)


* 윌리엄 셰익스피어, 최종철 옮김 햄릿(민음사, 1998)





햄릿, 나는 죽이지 않았다는 셰익스피어(Shakespeare)의 희곡 햄릿을 재해석한 공연작이다. 덴마크 왕자 햄릿은 고민하는 인간의 대명사다. 햄릿은 선왕을 암살하고 자신의 어머니 거트루드와 결혼하여 왕관을 차지한 숙부 클로어디스를 복수하고 싶지만, 상황이 여의찮다. 왕자는 혼자서 괴롭게 고민한다. 고민 끝에 미친 척하면서 은밀하게 복수를 준비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햄릿은 자신이 사랑하는 오필리아의 아버지 폴로니어스를 죽인다. 예상하지 못한 불의의 사건은 오로지 숙부에게만 겨눈 햄릿의 칼날을 어지럽게 만든다. 햄릿의 칼날은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나타난 레어티즈를 지나치지 못한다. 한편 오필리아는 모멸에 찬 햄릿의 날카로운 말에 찔려 커다란 상처를 입는다. 햄릿의 칼날이 초래한 아버지의 죽음은 오필리아의 마음속에 깊이 팬 상처를 더 벌어지게 만든다. 오필리아는 실의에 빠져 미쳐버리고 비참하게 죽는다.







햄릿, 나는 죽이지 않았다는 어떤 삶을 살아갈지 고민하는 햄릿이 떠안은 세 가지 선택을 보여준다. 첫 번째 선택은 어머니를 위해 오필리아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것. 두 번째 선택은 이승을 떠도는 아버지의 망령을 위로하기 위해 최대한 빨리 복수하는 것. 마지막 세 번째 선택은 원작 속 햄릿의 선택을 반영한 것이다. 첫 번째 햄릿의 선택은 모든 인물이 행복해지는 희극에 가깝다면, 두 번째와 세 번째 선택은 비극이다. 두 가지 비극이 진행될수록 평탄하게 진행된 희극은 희미해지고, 비극의 농도는 짙어진다. 등장인물의 삶이 크고 작은 갈등에 휘말려 부서지는 소리가 나는 비극이 웃음소리만 나는 희극보다 재미있는 이유다.

















* 데이비드 볼, 김석만 옮김 통쾌한 희곡의 분석: 희곡을 제대로 읽는 방법(연극과인간, 2020)




연극적(theatrical)’이란 무엇인가? 미국의 연출가 데이비드 볼(David Ball)관객의 열렬한 반응을 유도해내는 모든 것연극적이라고 말한다. ‘연극적 매력은 관객의 시선을 집중하게 만드는 요소다. 솜씨 있는 극작가와 연출가는 작품을 만들 때 연극적인 요소들을 적절하게 배치해야 한다. 그래야 관객이 연극적 매력에 푹 빠지면서 감정적 반응(즐거움, 슬픔, 분노, 공포 등)을 드러낸다. 연극적 매력의 반대말은 지루함이다. 지루한 연극은 실패작이다.

 

햄릿, 나는 죽이지 않았다는 관객을 휘어잡는 연극적 매력이 가득한 수작(秀作)이다. 원작 햄릿의 원제는 덴마크 왕자 햄릿의 비극(The Tragedy of Hamlet, Prince of Denmark)’이다. 햄릿, 나는 죽이지 않았다는 비극인 기존 원작에 두 가지 새로운 이야기가 추가된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두 가지 이야기는 햄릿(예병대 분)에게 주어진 또 다른 선택 상황이다.


햄릿의 첫 번째 선택. 1막은 등장인물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덴마크 왕자 햄릿의 희극이다. 이 희극에서 햄릿은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운 묵직한 고민의 짐을 내려놓는다. 결국 그는 어머니 거트루드(김소현 분)의 행복을 위해 선왕을 죽인 숙부 클로디어스(이동학 분)를 양부로 받아들인다. 햄릿과 오필리아(박은솔 분)는 결혼해서 두 사람 사이에 자식이 태어난다. 귀여운 손자를 안아 보고 싶은 클로디어스가 관객에게 직접 아기 안은 방법을 묻는 장면은 햄릿의 희극에서 원작에서 볼 수 없는, 가장 재미있는 장면이다. 1막의 연극적 매력은 무대 밖의 현실 세계와 무대 위 극 중 세계 사이에 놓인 투명한 4의 벽’이 깨지면서 클로디어스가 체면을 내려놓은 손자 바보로 나오는 장면이다.


1막의 유쾌한 분위기는 웃으면서 즐긴 관객을 방심하게 만든다. 본격적으로 비극이 시작된다. 햄릿의 두 번째 선택. 2막의 햄릿은 원작에 드러난 우유부단한 면모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선왕 아버지의 혼을 달래주기 위해 최대한 빨리 복수를 실행한다.


햄릿의 세 번째 선택. 3막은 원작을 반영한 이야기다. 극 중 배우들의 연기가 정점에 이르면서 비극적인 효과는 배가 된다. 햄릿은 선왕을 죽인 숙부의 진의를 확인하기 위해 곤자고의 암살이라는 궁중 연극을 자신이 직접 연출한다. 햄릿 역의 예병대 배우는 공연작의 연출자다. 배우 겸 연출자가 햄릿이 되어 극 속의 극을 연출하는 장면은 비극 속의 소소한 희극적인 요소다


곤자고의 암살공연이 진행되자 클로디어스와 거트루드, 햄릿과 오필리아가 함께 공연을 본다. 여기서 곤자고의 암살을 보는 네 사람의 표정 연기와 무언의 행동은 3막의 연극적 매력이 발산하는 장면이다. 클로디어스는 곤자고의 암살의 하이라이트인 독살하는 장면을 보는 순간 수상히 여긴다. 그러면서 거트루드와 귓속말한다. 이 장면은 거트루드가 선왕 암살의 공모자임을 암시한다. 햄릿에게 외면받은 오필리아는 슬픈 표정으로 공연을 본다. 햄릿은 자신이 연출한 공연을 유유히 바라본다. 하지만 공연은 안중에 없다. 그는 그토록 기다리던 복수의 순간을 기다릴 뿐이다. 복수는 햄릿이 진정으로 원하고, 반드시 진행해야 할 희극’의 결말이다. 이 희극이 진행되면 클로디어스와 거트루드는 자신들이 예상하지 못한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햄릿에게 버림받은 오필리아 역시 비극의 주인공이다. 3막에 비극과 희극이 공존한다. 네 사람 모두가 비극과 희극의 주인공이다.







극 중 음악 또한 관객을 사로잡는 연극적 매력이 될 수 있다. 햄릿이 선택의 기로 앞에 멈춰서서 고민할 때 90년대 초에 큰 인기를 끌었던 콩트 <이휘재의 인생극장>의 배경음악이 나온다. <이휘재의 인생극장>에서 이휘재가 연기한 주인공은 두 가지 삶을 선택한다. 콩트는 두 가지 삶이 어떻게 진행되며 어떤 결말에 이르는지 보여준다. 이 음악은 역재생된 상태로 나오는데 시간을 되돌리는 순간임을 강조한다.


곤자고의 암살장면에서 나온 음악은 차이콥스키(Tchaikovsky)의 발레 모음곡 <호두까기 인형> 4악장 꽃의 왈츠. 원작의 시대적 배경이 12세기라서 19세기 말에 만든 러시아 음악이 나왔다는 이유로 따지고 싶지 않다. 12세기 덴마크 궁정 내부에 어울릴만한 곡을 찾기 힘들다. 원작의 오필리아는 실성해서 미쳐버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꽃을 주면서 노래를 부른다. 그녀는 쓸쓸히 물에 빠져 죽고, 거트루드는 오필리아의 무덤에 꽃을 뿌린다. 즐거운 분위기의 춤곡 꽃의 왈츠는 오필리아의 죽음을 암시한 귀로 듣는 복선이다. 원작의 주제인 인생의 덧없음을 일깨우는 죽음의 무도(Danse Macabre)’로 해석할 수 있다.




















* 디트리히 슈바니츠 슈바니츠의 햄릿: 그리고 이 작품을 문화적 기념비로 만든 모든 것(들녘, 2008)

 




원작을 어느 정도 반영하면서 햄릿를 재해석한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군다나 예병대 배우님은 햄릿70분으로 압축해서 만들었다종이로 된 햄릿과 무대 위의 햄릿은 다르다. 종이 햄릿은 얇고 가볍다. 마음만 먹으면 하루 만에 충분히 다 읽을 수 있다. 하지만 무대 위의 햄릿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중에 제일 길다. 햄릿을 독자적으로 분석한 디트리히 슈바니츠(Dietrich Schwanitz)햄릿공연이 보통 2~3시간 걸리기 때문에 저녁 공연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했다. 따라서 무대 위의 햄릿은 종이 햄릿의 완전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 게다가 햄릿의 대사는 전체 분량의 40%에 이를 정도로 상당히 많다. 실제로 무삭제판 햄릿공연극이 1899년에 선보였을 때 중간에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종이 햄릿를 무대 위에 올리려면 각본가와 연출자는 과감하게 원작을 해체해야 한다. 햄릿, 나는 죽이지 않았다에 잘린 유명한 장면은 햄릿이 궁정 광대 요릭의 해골을 쳐다보면서 탄식하듯이 독백하는 모습이다. 이 장면은 원작 51장에 나온다. 포스터와 입장권에 요릭의 해골이 그려져 있다.


지난주 토요일은 비가 많이 내렸다. 그날 연극을 본 내 선택은 옳았다. 비극이 희극보다 재미있다는 견해에 동의하지만, 비극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나길 원하지 않는다. 당연히 희극 같은 일이 좋을 수밖에 없다. 연극이 끝난 후에 내 갈 길을 막아서던 비가 드디어 그쳤다. 연극으로 연기를 시작한 찰리 채플린(Charles Chaplin)삶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요,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채플린 씨, 그날만 당신의 말이 틀렸어요. 종종 우리 삶의 희극은 가까이에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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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man 2023-09-22 09: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말리서 보면 희극이다라는 말은 채플린이 한 말은 아니에요. 원래는 ˝비극은 클로즈업으로 찍고 희극은 롱쇼트로 찍는다˝라는 영화 촬영과 관련된 말이었습니다.

cyrus 2023-09-23 07:04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많이 인용된 말이라서 채플린이 진짜로 한 말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요. 글을 쓰면서 유명인의 말을 인용하고 싶을 때 실제로 유명인이 한 말이 맞는지 의구심이 생겨요. 이럴 때 좀 더 검증했어야 했는데 제가 그걸 무시하고 안일하게 생각했어요. 제가 몰랐던 사실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Redman님. ^^

그레이스 2023-10-01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고전독서 동아리를 하고 있습니다.
반갑네요^^
저도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은 이 책으로 읽었습니다.

cyrus 2023-10-02 09:11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님은 희극 어땠어요? 읽어볼 만했어요? 희극에 대한 모임 회원들의 반응이 너무 안 좋아서 2권 읽기는 미루었어요... ㅎㅎㅎ 그래서 이번 달은 희극 2권이 아니라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읽는 것으로 결정되었어요. ^^

그레이스 2023-10-02 09:24   좋아요 0 | URL
저는 좋았습니다.
5, 6년 전인가 읽었는데, 다들 반응이 좋았었습니다.
배경을 더 잘 알고 읽으면 좋았을거란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요, 역사나 문화사를 먼저 읽는것도 좋지요.
지금 다시 읽으면 그때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겠죠.

cyrus 2023-10-02 09:30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역사적 배경과 대사에 언급된 인명이 낯설어서 재미를 못 느낀 분들이 많았어요. 2권 첫 번째 희극 <리시스트라테>는 유명한 작품이고, 예전에 읽었을 때 재미있어서 이것만큼은 같이 읽자고 건의했는데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그래서 희극 2권은 저 혼자 읽으려고 해요.. ^^;;
 
그림 속으로 들어간 화가들 - 위대한 화가들의 은밀한 숨바꼭질
파스칼 보나푸 지음, 이세진 옮김 / 미술문화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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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협찬받고 쓴 서평이 아닙니다.




평점


4점  ★★★★  A-







어두워져 가는 골목에 서면

어린 시절 술래잡기 생각이 날 거야.

모두가 숨어버려 서성거리다 무서운 생각에 나는 그만 울어버렸지.


- 조용필 못 찾겠다 꾀꼬리(1982) 노랫말 -

 






그대 먼 곳만 보네요. 내가 바로 여기 있는데

조금만 고개를 돌려도 날 볼 수 있을 텐데.


- 일기예보 인형의 꿈(1996) 노랫말 -





저기요, 나 여기 있어요!” 


조용히 있던 그림이 갑자기 입을 연다


, 여기 있다니까. 잘 좀 찾아봐요.” 


소곤소곤 말하는 그림에 눈을 마주친 관객

하지만 그림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지나가 버린다


잠깐만, 어디 가?” 


그림은 무심코 지나가는 관객의 발길을 잡아보려고 

한참 동안 그를 뚫어지게 쳐다본다


애타게 불러봐도 소용없다


그림은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당신은 다른 곳만 보고 가버리네요. 내가 바로 여기 있는데.” 


또 홀로 덩그러니 있는 그림. 또 기다리는 그림.

 


적막을 깨고 관객에게 말을 거는 그림은 살아 있다. 이 그림 속에 작은 그림이 숨어 있다. 그림의 목소리는 작은 그림에서 나온다. ‘작은 그림의 정체는 자화상, 즉 화가 자신이다. 그런데 화가의 얼굴이 너무 작게 그려져 있어서 그를 찾기가 쉽지 않다. 자화상의 희미한 목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다. 큰 그림 속 작은 자화상을 마주치는 관객은 술래가 된다. 하지만 작은 자화상은 언제나 술래다. 자기를 알아보는 관객을 찾으러 미술관을 헤매는 술래다. 그림속으로 들어간 화가들: 위대한 화가들의 은밀한 숨바꼭질은 조그만 술래들의 도우미다. 이 책은 카메오처럼 그림에 슬쩍 나타난 화가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준다.

 

그림을 그리려면 유명한 화가가 운영하는 공방에 가야 하던 시절이 있었다. 공방에서 그림 그리는 법을 배우고, 손님이 주문한 그림을 제작한다. 그들의 신분은 화가라기보다는 기술자 또는 장인이었다. 공방에서 만들어진 그림에 제작자의 서명이 없다.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는 이름 없이 알려질 뻔한 화가들을 본격적으로 소개한 사람이다. 바사리의 본업은 화가 겸 건축가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은 잊혔고, 당대 화가들의 일대기를 정리한 그의 책 르네상스 미술가 평전(6, 한길사)이 더 유명해졌다. 바사리는 이 책에서 처음으로 큰 그림 속 자화상을 언급했다. 붓을 내려놓고 술래가 된 것이다. 바사리의 술래잡기 놀이 덕분에 공방의 익명 기술자는 화가라는 개인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Renaissance).

 

가장 유명한 큰 그림 속 자화상미켈란젤로(Michelangelo)의 벽화 최후의 심판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시녀들이다. 두 작품 속에 화가가 숨어 있으며 지금도 여전히 말을 걸고 있다. 나는 여기 있다고. 그리고 내 그림 속에서 영원히 사는 중이라고.

 

관객과 화가 둘 다 계속 술래가 될 수밖에 없는 그림들도 있. 화가는 자신을 알리고 싶어 한다. 하지만 손님은 화가에게 자화상을 넣어도 된다고 요구하지 않는다. 이럴 때 화가는 가면을 쓴 자화상을 손님 몰래 그린다. 숨바꼭질을 제대로 즐기고 싶은 화가는 가면을 쓴 채 숨는다. 가면을 쓴 자화상은 자꾸만 말을 걸어오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그가 진짜 화가라고 단정할 수 없다. 술래가 된 관객과 미술사학자는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숨바꼭질을 얼른 끊고 싶어 한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화가의 모습과 어느 정도 비슷하게 생긴 사람을 잡아서 저 사람이 화가일 거야라고 주장하는 것뿐이다. 엉뚱한 사람을 화가라고 지목한 관객을 지그시 바라보는 그림 속 화가는 어떤 심정일까? 자신의 정체가 들통나지 않아서 안도하고 있을까, 아니면 자기를 찾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무서운 생각에 슬피 울고 있을까? 끝없는 기다림에 지친 자화상은 나지막이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조금만 눈길을 돌려도 날 볼 수 있을 텐데.”

 

익명이라서 영원히 술래로 남은 그림 속 작은 자화상이 미술관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미술관에서 하는 숨바꼭질은 끝나지 않는다


못 찾겠다 꾀꼬리. 나는야 언제나 술래.






숨어 있는 에 티를 찾으러 술래가 된 cyrus의 주석



* 118





 1505년에 율리우스 2세의 부름을 받아 로마로 건너온 미켈란젤로는 1564218일에 사망할 때까지 레오 10, 하드리아누스 6, 클레멘스 7, 바오로 3, 율리우스 3, 마르첼로 2, 바오로 4, 비오 5[1]까지 여덟 명의 교황을 모셨다.

 

[1] 역대 교황 재위 순을 따르면 바오로 4세 다음 교황은 비오 4. 그다음으로 선임된 교황이 비오 5세다. (참고 문헌: 호르스트 푸어만, 차용구 옮김, 교황의 역사: 베드로부터 베네딕토 16세까지, 도서 출판 길, 2013)





* 138





 특히 593~594년경 사망하고 30여 년이 지난 후 황제[2] 그레고리우스 1가 그의 경건한 삶을 전했기 때문에, 성 베네딕투스의 첫 번째 기적을 그림에서 보여 주지 않는다는 것은 안 될 말이었다.

 

[2] 그레고리우스 1세는 황제가 아니라 교황이다. 그와 레오 1세만이 ()교황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 126: 아폴론


* 243: 비너스, 에로스 [3]


[3] 이 책은 올림포스 신들의 이름을 그리스식이 아닌 로마식(라틴어)으로 표기되어 있다. 아폴론을 아폴로, 비너스는 베누스, 에로스는 쿠피도로 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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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나무라는 우주
더글라스 탈라미 지음, 김숲 옮김 / 도서출판 가지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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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협찬받고 쓴 서평이 아닙니다.




평점


4.5점  ★★★★☆  A





하늘 천(), /땅 지(), 검은 현(), 누를 황(), 집 우(), 집 주(), 넓을 홍(), 거칠 황().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 우주는 넓고 거칠다







한문 교본 천자문 첫 구절은 우리가 사는 곳이 우주 속 누런 티끌임을 알려준다. 칼 세이건(Carl Sagan)1990년 우주 탐사선 보이저 1호가 촬영한 지구 사진을 공개하면서 창백하게 빛나는 푸른 점(Pale Blue Dot)’으로 보이는 지구를 소중히 여기자고 말했다. 거대한 세상을 압축해서 만든 1,000자의 한문을 몰라도 된다. 우주가 어떤 곳인지 알면 된다. 우주는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넓다. 우주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무수히 많은 천체만 있는 건 아니다. 인간이 버린 쓰레기(수명이 다해 작동하지 않은 인공위성과 거기서 떨어져 나온 파편)’가 널려 있다. 이 넓고 거친 우주 한가운데에 소행성을 용케 피하면서 조용히 도는 누런 티끌은 정말 소중하다.


천자문에 묘사된 우주는 실은 우리가 아는 그 우주가 아니다. 우리가 아는 우주는 지구 밖 무한 세상이다. 한문으로 된 우주는 우리의 눈, , , 손과 발이 충분히 닿을 수 있는, 하늘과 땅으로 이루어진 세상을 뜻한다. 하늘은 뜨거운 태양 빛을 막아주는 두툼한 이불이라면, 땅은 살아있는 모든 것이 태어나고 자라는 아늑한 침대다천자문첫 구절에 나온 것처럼 지구와 우주는 이다. 하지만 집주인은 없다그런데 진화상으로 볼 때 동식물보다 늦게 나온 인간이 집주인처럼 행세한다지구와 우주는 인간이 독점하는 집이 아니다. 우주는 살아있는 모든 것의 보금자리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지금까지 지구를 여러 번 못살게 굴었던 행적을 후회한다면서도 지구를 소중하게 지켜주지 못할망정 제2의 지구를 찾고 있다. 우주를 바라보는 시선을 과감하게 좁혀 보자. 그러면 우주는 지구 밖 무한 세계가 아닌, ‘지구 속 유한한 세계라는 걸 알 수 있다. 우주에 인간만 살고 있는 건 아니다. 지구를 푸르게 하는 숲과 바다도 동물들의 집이자 우주다.


참나무라는 우주가까이 있으면서도 소중히 여기지 않은 지구 속 우주를 소개한 책이다. 참나무 한 그루는 새와 곤충들의 보금자리이자 튼튼하고 오래 가는 지구 속 우주. 이 책의 저자는 드루이드(druid)’. 드루이드는 참나무를 아는 사람(druwides, 드루이드의 어원으로 추정되는 고대 켈트 어)’이다. 드루이드가 모든 동물을 불러들이면서 소통할 수 있는 영적인 힘을 가진 마법사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제 드루이드는 자연에 관심이 많고, 자연과 어울려 사는 법을 전파한 사제. 현대의 드루이드가 된 저자는 자신의 정원에 심은 참나무가 일 년 동안 자라는 내내 일어나는 또 다른 생명들의 탄생 과정을 독자들에게 알려준다.


푸르른 이파리와 누런 줄기로 이루어진 참나무 우주에 작은 곤충이 살고 있다. 참나무 이파리는 애벌레의 먹을 수 있는 집이다. 그러나 정원 가꾸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꽃과 나무에 모여든 곤충을 달갑지 않은 손님으로 여긴다. 거대한 정원 주인은 작은 손님들을 향해 해충제를 뿌려서 쫓아낸다. 정원은 인공 자연이다. 하지만 인간의 손길을 거치지 않아도 그 안에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 정원도 곤충이 사는 우주인 셈이다. 식물을 좋아하는 반응과 식물을 소중히 여기는 반응은 항상 일치하지 않는다. 참나무 심기를 거부하는 정원 주인이 있다. 그들은 땅속에 단단히 박혀 쭉쭉 뻗은 참나무 뿌리가 다른 식물이 자라는 데 방해된다고 생각한다. 푸르른 빛을 잃고 누렇게 변한 참나무 낙엽은 정원 외관을 망치는 쓰레기로 취급받는다.


참나무 우주는 욕심이 없다. 참나무 주변에 어린나무 몇 그루를 심으면 땅속에 뿌리가 엉킨다. 서로 다른 종의 나무뿌리가 엉켜도 나무는 잘 자란다. 오히려 나무들의 뿌리가 엉키면 튼튼해진다. 태풍이 밀쳐도 뿌리째 뽑히면서 쓰러지지 않는다. ‘참나무 우주는 한결같다. 겨울이 되면 생명력이 다한 이파리는 더 이상 푸르른 빛을 내지 않는다. 참나무는 거추장스러울 수 있는 죽은 이파리를 땅에 버리지 않는다참나무 우주는 아름다움을 잃게 되는 변화, 즉 노화를 순순히 받아들인다.


2의 지구를 간절히 찾고 싶은 사람은 다중 우주설을 믿는다. 우주가 무한 세상이라면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또 다른 n개의 우주가 있을 수 있다는 학설이다. 하지만 다중 우주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실증적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지구 밖 다중 우주의 존재 여부에 관심을 쏟는 것보다 지구 속 다중 우주를 만들면 어떨까? 저자는 참나무를 많이 심으면 생태계가 회복될 수 있으며 지구온난화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강조한다. 나무를 많이 심는다고 해서 대기의 탄소가 줄어들지 않는다. 나무가 죽으면 탄소가 나온다. 참나무는 수명이 길고, 탄소를 적게 배출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참나무는 다른 종의 나무와 어울릴 줄 안다. ‘참나무 다중 우주에 참나무 우주만 있는 게 아니다. 새와 곤충의 보금자리가 되어주는 ○○나무 우주도 있다. 숲 우주는 또 다른 숲 우주를 만든다. 못된 인간 때문에 골골대는 현재 지구의 얼굴은 창백하다. ‘창백한 푸른 점’의 푸르른 생기를 되찾아주려면 참나무 우주를 심어야 한다.






<cyrus의 주석>

 

 

* 235

 

 대부분 초식 곤충은 이파리를 갉아 먹기 보다 진액을 빨아 먹는 방식을 택했다. 이들, 빨대 구조의 입을 지닌 곤충[]은 애벌레일 때는 아래턱이 발달해 단단한 식물 조직을 씹을 수 있다가 어른벌레로 탈바꿈하는 과정에서 빨대 같은 역할[]을 하는 가느다란 철사 모양으로 변한다.

 

[] 나비의 종류는 다양하다. 그래서 꽃에서 나오는 꿀과 나무 수액을 먹으면서 사는 초식성 나비만 있는 게 아니라 배설물, 동물의 피, 심지어 다른 곤충을 잡아먹는 잡식성 나비도 있다. 나비는 연약함아름다움을 상징하는 곤충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의외로 나비는 오랫동안 비행할 수 있을 정도로 강인하며 척박한 곳에서도 산다


나비의 주둥이는 빨대 구조의 입이 아니다. 나비의 주둥이에 아주 작은 구멍들이 있다. 따라서 나비는 꿀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흡수하듯이섭취한다. 나비의 주둥이는 스펀지와 같다고 보면 된다. ‘참나무 우주의 단골 거주 곤충인 나비와 나방의 다양한 삶을 알려주는 웬디 윌리엄스(Wendy Williams)나비의 언어(이세진 옮김, 그러나, 2022)참나무라는 우주와 같이 읽어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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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 2의 마지막 작품은 레소스(Rhesus). 대다수 학자는 레소스가 에우리피데스(Euripides)의 작품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 [개정판] 에우리피데스, 천병희 옮김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 2(도서 출판 숲, 2021)

 

* 호메로스, 천병희 옮김 일리아스(도서 출판 숲, 2015)

 



레소스는 트라케(트라키아)의 왕이다. 호메로스(Homeros)의 서사시 일리아스10에 잠깐 언급되는 인물이다. 에우리피데스, 혹은 이름을 알 수 없는 또 다른 비극 작가는 엑스트라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야기를 썼다. 레소스는 트로이아(트로이) 군을 지원하기 위해 직접 병력을 이끌고 오지만, 트로이아의 총사령관 헥토르(Hektor)는 레소스의 도움을 거절한다. 트라케 군은 무방비 상태로 휴식을 취한다. 그러나 그리스 군의 오디세우스(Odysseus)디오메데스(Diomedes)의 기습을 받아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레소스는 불귀객이 된다. 한순간의 방심은 재앙을 부른다. 레소스는 트로이 전쟁에 참전하여 명예를 얻으려고 했으나 불명예스러운 죽음(레소스753,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 2582)’을 맞이한다.


천병희 교수가 번역한 레소스 오역이 있다. 코로스(coros, 트로이아의 파수병)의 합창 대사인 531행의 독수리자리. 쪽수는 572이다.



레소스』 528~536


누가 다음 보초 근무지? 누가 나를 교대해 주지?

초저녁 별자리들은 지고, 플레이아데스의

일곱 별들이 하늘에 떴구나.

독수리자리가 중천을 날고 있구나.

일어들 나게. 지체하지 말고.

침상을 떠나 초소로 가야지!

자네들은 달빛도 보이지 않나?

새벽일세. 새벽이 가까웠네.

저 별을 보면 새벽이 다가옴을 알 수 있네.



인용문에 해당되는 그리스어 원문은 찾아보지 않았다. 천 교수가 참고한 그리스어 텍스트를 찾기 힘들며 나는 그리스어를 모른다. 의역일 수 있지만, 영역본을 참고했다. 구글을 이용하면 레소스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 비극 작품들의 영역본 전문을 확인할 수 있다내가 참고한 영역본은 George Theodoridis레소스』 (2010년).



Ey! Who’s on guard now? Who’s relieving me?

It’s time. The early constellations are diving and the Pleiades are high!

Look there! The Eagle is flying mid-sky!

Come on, get up! Get yourselves out of your beds!

It’s time for your guard duty!

Look at that Moon! See how it shines?

It’s almost Dawn! Morning almost! Come on!

Look! There’s one of those stars that appear before Dawn!



플레이아데스성단(Pleiades star cluster)은 맨눈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밝은 빛을 내는 일곱 개의 별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성단 주변에 황소자리, 오리온자리, 마차부자리가 있다. 이 세 별자리는 겨울에 볼 수 있다. 그러나 독수리자리는 여름 밤하늘이 되면 은하수 위를 날아다닌다. 플레이아데스성단과 독수리자리가 밤하늘에 같이 있을 수 없다. 독수리자리는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Zeus)를 상징하는 독수리에서 유래되었다. 제우스는 독수리로 변신해 곱상한 소년 가니메데스(Ganymede)를 납치하기도 한다.
















* 플로리안 프라이슈테터 100개의 별, 우주를 말하다: 불가해한 우주의 실체, 인류의 열망에 대하여(갈매나무, 2021)




독수리자리가 여름 별자리라는 사실을 기억하기 쉬운 방법이 하나 있다. 독수리자리에서 가장 밝은 별 알타이르(Altair)’는 우리말로 견우성이라고 부른다. 일 년에 단 한 번, 77일 칠석에 만난다는 견우와 직녀의 그 견우다.


독수리자리가 아니라 독수리로 번역해야 한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자주 나오는 장면 중 하나가 새 점()을 치는 일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새의 움직이는 모습을 보면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측했다고 한다. 레소스의 트로이아 파수꾼은 새를 보면서 시간을 확인하고, 관객들에게 시간적 배경이 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레소스546~555에서 파수꾼은 밤꾀꼬리가 우는 모습을 언급한다

 

들어 봐. 제 자식을 죽인 밤꾀꼬리

시모에이스 강변의 피투성이 둥우리에

앉아 다양한 음색의 목소리로

비탄의 노래를 부르고 있어.

어느새 양떼가 이데산에서 풀을

뜯고 있구나. 목적(피리) 소리가

밤을 뚫고 들려오는군.

잠이 내 눈에 마법을 거는구나.

눈에는 새벽녘 잠이 가장 달콤한 법이니까.



따라서 앞서 언급한 531행과 546~555행은 파수꾼이 밤하늘에 나는 새를 바라보는 모습을 묘사한 대사다. 
















* 에우리피데스, 김종환 옮김 레소스(지만지드라마, 2022)




레소스의 다른 번역본(그리스어 원전이 아닌 George Theodoridis의 번역본을 포함한 세 권의 영역본을 참고해서 번역했다)에는 독수리로 되어 있다. 그런데 플레이아데스성단에 대한 주석(68쪽)을 보면 ‘일곱 명의 딸인 플레이아데스가 오리온에 쫓기다가 모두 별자리가 되어 플레이아데스성단을 이루었다라고 적혀 있다. 성단과 별자리는 다르다. 성단은 별들이 모여서 생긴 것이라면, 별자리(constellation)는 여러 개의 별을 이어서 생긴 형태에 이름을 붙인 것이다. 국제천문연맹이 공인한 별자리 목록에 플레이아데스 자리는 없다천병희 교수의 고대 그리스 문학 작품 번역본에도 플레이아데스성단을 별자리로 잘못 소개한 주석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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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 책방, 헌책방. 명칭은 달라도 책과 독자가 가까이 만나서 만질 수 있는 그곳은 우주. 책은 종이(로 된) 별이다. 독자는 마음에 드는 종이 별을 모으고 싶어 한다. 그들은 다양한 형태의 종이 별을 눈으로 만지면서 떠돌아다니는 여행자다. <일글책>은 책의 우주치고는 매우 작다. 우주 여행자들을 기다리는 종이 별의 수가 적은 편이다. 하지만 우주가 조금씩 조금씩 커지듯이, <일글책>도 점점 커지고 있다. 종이 별이 많다고 해서 책의 우주가 커지는 것은 아니다. 책의 우주를 사랑하는 여행자들이 많아야 한다. 우주 여행자들이 모여서 책의 우주 안에서 복닥복닥하면 작아 보이던 그곳은 거대해진다.
















* 임주혜 읽기의 의미: 의미를 찾다가 써 내려간 것들(행복우물, 2023)


 


어제 토요일은 <일글책>이 엄청 커진 날이었다. 읽기의 의미저자 임주혜 작가와 귀여운 반려종(견) 고동이가 들어오면서 <일글책>이 커지기 시작했다. 저자를 사랑하는 우주 여행자들이 한두 명씩 올수록 <일글책>은 쑥쑥 자랐다. 작가와 우주 여행자들의 만남은 차분한 책의 우주를 들썩이게 한다.







저자에게 우주는 종이 별을 만지면서 보는 것뿐만 아니라 종이 별에 있는 단어를 수집하고 문장을 만드는 행위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곳이다. 글 쓰는 책의 우주 여행자는 눈으로 열심히 만지면서 종이 별을 폭발시킨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 에너지가 생겨서 종이 별이 폭발한다(초신성, Supernova). 그것이 폭발하면서 생긴 수많은 단어와 문장들의 잔해가 뭉치면 새로운 종이 별이 태어난다. 독서 에세이집 읽기의 의미는 저자가 여러 권의 종이 별을 만나고, 읽고, 폭발시킨 흔적들을 모아서 만든 종이 별이다. 7월에 태어난 아기’ 종이 별이다.







저자의 본업은 방송 작가다. 저자는 방송 작가의 글쓰기를 보이지 않는 곳에 쓰는 행위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보이지 않는 글쓰기가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서평 쓰는 일 또한 보이지 않는 글쓰기서평은 종이 별을 보려는 여행자들을 위한 지도다서평은 여행자들에게 종이 별을 눈으로 제대로 만지는 방법을 알려준다. 그리고 여행자들이 피해야 하는, 오물이 넘치는 종이 별도 알려준다.
















* 파스칼 키냐르 세 글자로 불리는 사람(문학과지성사, 2023)




파스칼 키냐르(Pascal Quignard)는 세 글자로 불리는 사람이라는 종이 별에서 독서를 소리 없는 도둑질이라고 썼다. 종이 별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책의 우주 여행자가 타인이 만든 종이 별들을 훔치고, 눈으로 열심히 만지고, 글을 써야 한다독서와 글쓰기는 타인의 눈에 띄지 않고, 타인의 귀에 들리지 않는 투명한 일이다.







지금도 종이 별이 만들어지고 있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종이 별들이 태어난다. 책의 우주에 머무른 종이 별들은 여행자들의 손길과 눈길을 기다리면서 반짝거린다. 나는 종이 별을 만들 생각은 없다. 내가 만들고 싶은 것은 어디선가 책의 우주 여러 곳을 전전하고 있을 여행자들을 위한 다정한 지도


나는 저자에게 서평의 의미’가 무엇인지 질문했다. 저자는 다정한 서평이 좋은 서평이라고 답했다. ‘다정한 서평은 책의 우주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초보 여행자들에게 친절해야 한다. 다정한 서평은 말한다. 오물이 넘치는 종이 별로 가지 마세요. 거긴 위험해요. 제가 괜찮은 종이 별을 소개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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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09-06 10: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하, 여기를 가느라 공연을 포기한거였군. 그러니까 공연 보다는 책 모임이구만. 역시 나하곤 달라. ㅎㅎ

cyrus 2023-09-07 06:49   좋아요 0 | URL
이날 공연이 오후 3시, 7시 두 번 있는데 북 토크 때문에 7시 공연 표를 예매했어요. 그런데 예상하지 못한 일이 생겨서 공연을 보지 못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