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단장하는 여자와 훔쳐보는 남자 - 서양미술사의 비밀을 누설하다
파스칼 보나푸 지음, 심영아 옮김 / 이봄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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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Scene #1  누드는 왜 불편한가  

 

인간의 벗은 몸은 논란거리다. 하지만 목욕탕의 전라와 수영장의 반라가 문제되지 않듯, 문제는 “알몸이 드러나는 방식”이다.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또 얼마나 드러내고 감출 것인가. 영국의 미술사가 케네스 클라크는 ‘누드’(Nude)와 ‘네이키드’(Nakded)의 차이는 옷을 벗었다는 것에 대한 자의식의 유무라고 말했다. 네이키드는 ‘벗은’ 몸이고 누드는 몸 자체다. 그의 기준에 따른다면 말끔하게 차려 입은 두 남자 사이에서 침착하고 정숙한 자태로 벌거벗은 채 앉아 있는 여인이 등장하는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 「풀밭 위의 점식 식사」는 누드화고, 벌거벗은 모습을 들키고 부끄러워하는 여인이 등장하는 「수산나와 두 원로들」은 네이키드화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섹슈얼리티를 담아낸 수많은 미술 작품들이 당당하고 자연스러운 관능미뿐만 아니라 에로틱한 상상, 신체의 변형이나 왜곡을 통한 변태적 성애를 대담하고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어 사실상 예술에 있어서 누드와 네이키드의 구별은 상당히 모호할 수밖에 없다.

 

여자 연예인들이 누드집을 낸다고 하면 사람들은 노골적인 성의 상품화를 기대하는 심리가 있다. 전통적인 윤리가 몸의 드러냄을 억압해 왔다. 따라서 이와 같은 기대심리를 합리화시킬 포장술이 필요하다. 바로 ‘예술’이다. 그렇다고 신체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누드집이나 벌거벗은 여체를 그린 예술작품을 성의 상품화와 결부시키는 것은 곤란하다. 금기를 의식하지 않는다면 누드는 자유로운 자기표현이 될 수 있다.

 

예술 작품으로서의 누드가 관음증의 일종으로 비난을 받는 이유가 근본적으로 우리 인간은 이성의 알몸을 좋아하는 엉큼한 본능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벌거벗은 몸을 보면 성적으로 흥분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누드를 무척 좋아한다. 특히 남자라면 벌거벗은 여자의 알몸을 그냥 안 보고 지나칠 수 있을까. 지금도 회자되는 호기심 가득한 영국의 양복점 직원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창문으로 엿보는 행동 하나로 양복점 직원은 한순간에 관음증 환자가 되고 말았다.

 

 

 

 

 

 

존 콜리어  「고다이버 부인」  1898년

 

 

11세기 영국 코벤트리라는 도시를 다스리는 영주는 농민 수탈에 혈안이 돼있었다. 그러나 농민들의 곤궁한 생활을 본 영주의 부인 고다이버는 남편에게 과중한 세금을 줄여줄 것을 요구한다. 그러자 영주는 특별한 제안을 한다. 알몸으로 말에 올라 성 안을 한 바퀴 돌면 세금을 거두는 정책을 철회하는 것이다.

 

고다이버는 농민들을 구하기 위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남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 사건은 곧 농민들 사이에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코벤트리 주민들은 자신들을 위해 희생하는 영주 부인의 알몸을 볼 수 없다며 창문을 걸어 잠그고 커튼을 친 다음 그 누구도 내다보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이 와중에도 알몸으로 말을 타고 가는 부인의 모습을 커튼 사이로 몰래 엿본 사람이 있었으니 톰이라는 양복점 직원이었다. 하늘도 노했는지 그는 나중에 장님이 되고 말았다는데 여기서 남몰래 엿보는 사람, 즉 관음증이 있는 사람을 피핑 톰(Peeping Tom)이라고 한다.

 

 


 Scene #2  욕망, 그림의 또 다른 이름    

 

사실 고금을 막론하고 명화는 온통 여체의 이미지다. 하지만 그림 속에 유달리 여자가 많다는 사실을 이상히 여기는 사람은 없다. 예전에도, 지금도 유명한 화가는 대부분 남자였으니까. 그림은 인간의 욕망과 닿아 있다. 욕망이야말로 그림의 또 다른 이름이다.

 

수많은 누드화를 봤을 미술사학자 파스칼 보나푸는 자신을 그동안 어두컴컴한 벽장 속에서 누드를 몰래 본 관음증 환자라고 커밍아웃(Coming out)했다.

 

"당신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 따지고 보면 그림을 보는 행위는 관음증 환자의 행동과 다를 바가 없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그림은 언제나 욕망과 맞물려 있었다." (8쪽)

 

그리스, 로마시대와 중세의 벗은 몸은 남녀를 불문하고 신화나 성서의 이야기를 차용해 교훈을 남기기 위한 표현의 수단이었다. 그림 속 누드는 인간이 아니라 성서나 신화속의 주인공, 즉 신의 모습인 것이다. 나체의 모델은 비너스, 아담, 이브, 제우스신, 아폴론 등이 자주 등장했다. 물론 당시도 성서나 신화의 이름으로 귀족들의 취향을 만족시켜 주기 위한 에로틱한 주제의 그림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림을 보면서 음란한 생각을 해도 모두 용서받을 수 있었다. 성경 속 다윗과 밧세바의 불륜을 그린 한스 멤링의 「목욕하는 밧세바」를 주문한 사람이나 관람자는 한번쯤은 다윗처럼 음란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한스 멤링  「목욕하는 밧세바」  1485년경

 

 

이렇듯 화가는 매혹적인 여성의 모습을 통해 남자 관람객을 만족시켜주는 그림을 제작했다. 보는 이의 마음속에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인 역시 보는 이가 혹할 정도의 자태를 뽐내고 싶어 해 이해가 맞아떨어졌다. 몸단장하는 여인의 모습은 오랜 시간 그림의 주제가 됐다.

 

누드화에서 여성은 피관찰자이며 관찰자는 남성이다. 여성은 그림 속의 여성을 통해 피 관찰자로서 판단되는 관습을 발견하며 보이지 않는 제3의 시선을 의식한 채 거울 앞에 앉아 몸단장을 한다. 한편 남자는 예술가로 관찰자로, 그리고 주체로 존재한다.

 

 

 

 

 

 

르누아르  「여인의 나신」  1876년

 

 

르누아르는 여성의 몸이 뿜어내는 매혹을 찬미하고 칭송하는 것에 자신의 예술혼을 쏟아 부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젊은 여인의 장밋빛 피부와 원활한 혈액순환을 짐작케 하는 피부’였다. 여성 누드는 그에게 단순히 예술의 기본이자 실험의 대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장미를 그리면서도 여성의 누드를 위한 피부색을 연습하고 있다고 말할 만큼 이 주제에 대한 화가의 몰두는 대단했다. 노년의 르누아르는 류머티즘으로 붓을 쥐어야 할 손이 점점 굳어가고, 진통이 오는 고생을 겪었지만 핏줄처럼 펄떡대는 욕망을 멈출 수 없었다. 실제 그는 “여인을 그린 경우에는 그 가슴이나 등을 쓸어 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드는 그림을 좋아한다”고 할 정도로 누드를 사랑했다.

 

 

 

 Scene #3  욕망이라는 이름의 샘

 

누드를 본다는 것의 즐거움은 오랫동안 남성성의 대표적인 표징이었다. 남성들에게 보편적으로 내재된 성적 특성인 ‘관음증’이라는 명분으로 길가는 여성의 신체 부위를 훑어보며 즐거워했고, 에로틱한 시선으로 감상해왔다. 근대 서양회화의 누드화에서도 여성은 오브제로서 보이는 광경이 되고 화가인 남성은 감상자가 된다. 예술 작품에 있어서도 이렇듯 본다는 것의 즐거움은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선정적인, 관음증 환자의 시선으로 보는 그림 이야기가 아니다. 예술에 있어 최고의 질료이자 탐미의 대상이 인간의 육체라는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다. 여체의 그림을 보면서 야릇한 꿈을 꾼다. ‘관음증 환자’로 자처한 파스칼 보나푸는 이미 서문에서 우리도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그래서 위선적인 독자가 될 필요가 없다. 그림을 통해 그동안 우리가 묵인하고 있었던 욕망을 끄집어 내 예술을 새롭게 보는 것이다.

 

 

 

 

 

 

조반니 벨리니  「몸단장하는 젊은 여인」  1515년

 

특히 한걸음 더 나아가 ‘보는 남성, 보여주는 여성’의 구도 속에 숨겨진, 남성의 눈을 통해 여성성을 획득하고 싶은 여성의 내밀한 욕망을 읽어낸다. 시대에 따른 소품의 등장과 달라진 화장법을 상상하는 일은 즐겁다. 더불어 그림을 통해 아름다움을 원하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과 마주한다. 여인을 바라보는 은밀한 시선뿐 아니라 자신의 몸을 단장하는 여인의 욕망 말이다. 누군가를 유혹하기 위한 과감한 포즈나 화장을 하지 않은 맨얼굴 등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여인의 마음을 읽는 일도 즐겁다. 여성의 시선으로 남성성이 보완되듯 남성성에 의해 여성이 만개할 수 있다. 그리고 남성 화가에 의해 창조된 아름다운 여성 이미지 속에 숨겨진 미적 에너지도 긍정적으로 보듬어 안는다.

 

‘외설’과 ‘음란’이라는 낙인이 찍히기 쉬울 정도로 대중과의 소통이 용이하지 않은 누드는 계속 그려질 것이다. 욕망은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화가들은 여인의 곡선이 아름다워서 누드를 그리지 않을 것이다. 옷이라는 가면을 없앤 후 가장 본래적인 육체를 통한 감정을 그려내고자 한 것은 아닐까. 욕망이라는 이름의 감정의 샘을 표현하는 것이다. 누드모델을 두고 그림을 그리는 것 역시 감정표현을 위한 정지동작을 인간만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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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논어 - 시대를 초월한 삶의 교과서를 한글로 만나다 한글 사서 시리즈
신창호 지음 / 판미동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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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논어』를 읽고 있다. 『논어』를 읽으면 겸손과 베풂을, 나쁠 때는 용기와 위안을 얻는다. 하지만 가끔 『논어』의 본의를 왜곡하면서 읽을까봐 조심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다. 『논어』는 동양에서 가장 많이 읽히고 사랑받는 고전 중의 하나다. 그런 만큼 각종 해설서, 주석서, 입문서 등도 다양하게 나와 있는 편이다. 사람들은 『논어』 원전의 목차에 맞추어 일부를 조금씩 맛보거나 원전 전체의 해석서를 읽는 수밖에 없었다. 또는 아예 경제적인 입장에서, 경영자의 입장에서  등등 한쪽의 시각에 맞추어 잘리고 편집된 『논어』를 보았다. 전공자가 아닌 이상, 『논어』가 말하려고 하는 전체의 모습은 그리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논어』는 공자가 생전에 쓴 것이 아니라 그가 죽은 뒤 제자들이 모여 편찬한 어록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공자에 담긴 이야기 20편은 어찌 보면 ‘수수께끼 모음집’ 같은 모호한 성격을 띠고 있다.  『논어』 전체를 관통하는 체계적인 구성 원리나 앞뒤 문장 간의 연관성도 부족하다. 심지어 앞쪽에서 말한 내용과 어긋나는 문장이 등장해 읽는 이를 당황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논어』는 일반인이 쉽게 도전하기엔 너무 어려운 점이 없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어』는 지금도 널리 읽혀지는 고전이다. 인터넷 서점 웹사이트에 ‘논어’를 키워드로 입력하면 관련 내용물이 엄청나게 많이 나온다. 시판되고 있는 『논어』 해석본만 해도 100여종 정도는 넘을 것이다. 그만큼 한국 사회가 『논어』를 재생산하고 소비하고, 수용한다는 방증이다.

 

고전은 잘 숙성된 음식처럼 음미할수록 깊은 맛이 난다. 논어를 읽은 중국의 정자(程子)라는 학자는 “17, 18세부터 논어를 읽었으니 당시에 이미 글뜻은 알았으나, 더욱 오래 읽고서야 의미심장한 줄을 깨달았다”고 한다. 공자와 그 제자와의 문답을 주로 하면서 공자의 발언과 행적을 통해 삶의 지혜가 되는 말들을 간결하고 함축성있게 싣고 있다.

 

『논어』를 쉽고 바르게 읽는 것이 중요하다. 번역과 해석을 둘러싼 논란이 없을 수 없다. 시대에 따라 해석과 평가가 달라지곤 한다. 책 속 공자의 사상이 정치적으로 이용되면서 그가 권력자의 입장에서 민중을 억압했다는 오해를 사기도 했지만, 최근 들어서는 인간관계의 회복을 강조한 그의 가르침이 사회적 요구와 맞아떨어지면서 재평가되고 있다.

 

『논어』를 읽으면 다양한 역자가 해석한 내용을 같이 보는 편이다. 처음에 한 권만 쭉 읽다가 가끔 이해가 안 되는 문장을 나오면 또 다른 역자의 『논어』를 읽어본다. A라는 학자는 『논어』의 어느 문장을 이렇게 해석했는데, 과연 B라는 학자는 이 문장을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했는지 서로 비교를 하는 것이다. 『논어』를 바라보는 역자의 해석은 일반적으로 동일하면서도 약간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논어』의 핵심사상을 한마디로 정의되는 ‘인’(仁)은 그 뜻이 무척 다양하다. ‘어질다’, ‘사랑’, ‘사람 구실’, ‘사람다움’ 등으로 규정된다. ‘인’은 천 가지의 얼굴을 가진 한자라고 보면 된다. 지금까지 수많은『논어』 연구가들은 동양 사유와 일상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인’의 개념을 둘러싸고 의미와 기원을 검토하고 해석했다.

 

다산 정약용의 『논어고금주』를 바탕으로 해석한 故 이을호 선생은 ‘인’을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친애, 형과 아우 사이의 우애처럼 ‘두 사람 사이에서 생기는 사람의 길’이라고 소개했다. 반면 성백효 교수는 다산의 해석을 반박하는 입장이다. 인과 효제(孝弟)를 동일시한 다산을 비판하고 이를 각각 내면의 본성과 외면의 실천으로 구별한 주자의 『집주』를 높이 평가한다. 관점에 따라 『논어』를 바라보는 방식과 해석에 차이점이 있다. 그래서 『논어』를 한 번 완독했다고 해서 100% 이해했다고는 볼 수 없다. 그 많은 번역서들 사이에서 딱 한 권만 읽고 독파하는 방식은 오독할 위험성이 있다.

 

『논어』를 이제 막 열심히 읽기 시작했을 뿐이고, 동양사상의 전반적인 내용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초보자 수준이라서 괜히 공자 앞에서 『논어』라는 문자를 입에 담기가 조심스럽다. 시간을 내서라도 원문과 해석서를 같이 읽어 봐야 한다.

 

故 이을호 선생, 성백효 교수, 김원중 교수의 『논어』까지 세 권을 읽고 있다가 최근에 출간된 신창호 교수의 『한글논어』도 덤으로 읽기 시작했다. 한자 원문 위주로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자를 모르는 독자나 청소년들에게는 어렵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사실 고등학생 때 한창 한자를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을 때 겁 없이 독학으로『논어』한자 원문 중심으로 읽어보려는 시도를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참고한 책이 바로 성백효 교수의 『논어집주』였는데 작심삼일이 되고 말았다. 고등학생이라면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입시 준비와 왕성한 호기심 때문에 한 우물을 깊게 파지 못하는 성격 탓에 무모한 도전으로 남게 되었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논어』 읽기를 주저하게 만든 가장 큰 원인이 바로 ‘한자’였다. 그 당시 교과목에도 ‘한문’이 있었고, 학교에서 실시하는 정기고사에서 만점을 놓치지 않을 정도였다. 한문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좀 더 다양한 한자를 익히고, 한문으로 된 문장을 풀이하는 법을 공부할 때 적당한 텍스트로 『논어』를 추천하셨기에 나름 심화학습을 시도해본 것이다. 한문 원전을 그대로 직역하고, 풍부한 분량의 역주까지 국한문 혼용체를 된 성백효 교수의 『논어』를 동양사상에 대한 지식이 없는 일개 고등학생이 읽는다는 것은 맨 땅에 헤딩하는 격이다. 한자를 안다고 해서 한자로 된 『논어』를 읽을 수 있다는 생각은 큰 오산이었다. 읽다가 모르는 한자는 옥편을 찾아가면서 풀이했지만, 책을 읽어나가는데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 당시 그렇게 여유롭게 한자 풀이를 하면서 『논어』를 읽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논어』가 번역이 잘 되었고, 공자 전문가가 공자 사상의 핵심을 제대로 짚어서 정리했더라도 일단 가독성이 떨어지면 독자는 부담이 생기고, 『논어』에 대한 흥미가 떨어질 수 있다. 동양사상에 입문하는 초보 독자라면 『논어』의 핵심 사상이 최대한 훼손되지 않으면서 우리말로 쉽게 풀이된 것을 읽으면 좋다.

 

신창호 교수의 『논어』는 일단 가독성이 좋다. 오래전부터 『논어』를 해석할 때 많이 사용된 텍스트인 주자의 『논어집주』를 한글로 풀이했으며 각각 문장에 대한 해설을 붙였다. 저자의 목표는 한글로 풀이된 『논어』를 통해 한국적으로 사유하려는 자세를 취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논어』의 주요 개념도 한자가 아닌 한글로 풀이했다. 성인군자(聖人君子)를 문장의 상황에 따라 ‘지도자’, ‘착한 사람’ 등으로 표현을 다르게 했고, ‘사’(士)를 기존의 ‘선비’라는 번역 대신에 ‘하급 관리’로 풀이했다. ‘인’은 ‘열린 마음’, ‘포용력’, ‘사랑’ 등으로 풀이했다. 한자 원문은 부록으로 따로 묶어 책 뒤편에 수록했다. 

 

故 이을호 선생도 경전의 한글화를 시도했는데 한국을 대표하는 사상가 다산의 『논어』해석을 따랐다. 주자의 해석을 따른 ‘한글로 된 『논어』’와 비교하면서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이을호 선생의 『한글논어』의 특징은 공자가 제자에게 직접 얘기하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생동감 있게 문장을 풀이했다는 점이다. 또한 문장이 대체적으로 간결하다. 이을호 선생도 일반적인 『논어』역서처럼 각각 구절마다 ‘한자로 된 원문-풀이-해설’ 방식을 취하고 있는 반면 신창호 교수의 『한글논어』는 ‘풀이-해설’ 방식이다. 원문의 묘미를 느끼면서 읽고 싶은 독자라면 ‘선(先) 원문 후(後) 풀이’의 『논어』가 적합하지만, 한자를 잘 모르거나, 공자의 사상을 좀 더 가까이 알고 싶은 독자는 신창호 교수의『한글논어』를 읽는 것이 좋다.

 

특히 신창호 교수의『한글논어』는 책의 1부로 공자의 일생과 역사적 배경을 먼저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논어』를 좀 더 수월하게 읽고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기본적인 틀을 제공하고 있다. 옥편을 찾아가면서 『논어』를 번거롭게 읽는 수고로움을 덜 수 있다. 신창호 교수의『한글논어』도 가독성이 좋은데 이전까지 풀이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논어』해석의 차별성을 두면서도 일상적인 언어로 쓰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논어』의 첫 문장 ‘학이’(學而)의 유명한 문장을 풀이한 것을 비교해본다.

 

선생 “배우는 족족 내 것을 만들면 기쁘지 않을까! 벗들이 먼 데서 찾아와 주면 반갑지 않을까! 남들이 몰라주더라도 부루퉁하지 않는다면 참된 인간이 아닐까!” (이을호 역)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그것을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않겠는가. 동지(同志)가 먼 지방으로부터 찾아온다면 즐겁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서운해 하지 않는다면 군자(君子)가 아니겠는가. (성백효 역)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면 이 또한 기쁘지 않은가? 벗이 있어 먼 곳에서 찾아오면 이 또한 즐겁지 않은가?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원망하지 않으면 또한 군자답지 않은가?” (김원중 역)

 

공자는 배움을 통해 성취하려는 삶의 전모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삶에 필요한 기예를 배우고 익혀라. 그것만큼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자신을 알아주고 함께 의견을 나눌 수 있는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올 때, 이보다 반가운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남들이 알아주건 알아주지 않건, 자신의 자리에서 역할과 기능을 충실히 해 나갈 때, 참된 사람은 그 진면목이 드러나리라!” (신창호 역)

 

『논어』는 시대에 따라 얼마든지 계속 재해석되고 번역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제 아무리 동양철학이나 관련 경전을 오랫동안 연구하고, 읽은 사람이 여러 명이 모이면 『논어』를 읽고 난 뒤의 소견과 해석에 제각각 차이가 있을 것이다.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듯이 역자의 해석이 지나치면 공자의 사상이 왜곡될 수도 있다.

 

하지만 『논어』의 문장 해석에 옳고 그름을 따지는데 집착한다면 배움의 단계가 무너지고, 다른 사람과 연대하는 신뢰가 사라진다.

 

“공자가 말하였다. 함께 배울 수는 있어도 똑같이 길을 갈 수는 없다. 함께 길을 갈 수는 있어도 똑같이 설 수는 없다. 함께 설 수는 있을지라도 똑같이 법도에 맞게 실천할 수는 없다.” (자한(子罕)편 중에서, 252쪽)

 

『논어』는 언어에 갇힌 낡은 지식 모음집이 아니다. 일상적인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윤리적 지침서이다. 신창호 교수는 서문에서 『논어』를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일상의 미학, 삶의 예술’이라고 밝혔다. 『한글논어』가 필요한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누구나 읽는 고전, 죽기 전에 한 번쯤은 꼭 읽어봐야 할 책이 단지 ‘어렵다’는 인식 때문에 책 속에 있는 그 훌륭한 지식이 모든 사람에게 공유되지 못한다면 일상과 동떨어진 학문을 집대성한 책이 되고 만다. 『논어』에 관한 오해 중 하나가 바로 ‘유교 경전’에서 느껴지는 근엄한 분위기다. 『논어』를 읽기 전에 왠지 증조할아버지 앞에서 무릎을 꿇어 공손하게 앉아 있는 것처럼 읽어야하는 느낌이 든다. 이러한 선입견 때문에 요즘 같은 시대에 『논어』읽기의 중요성을 간과하게 된다. 어른들 말씀이 잔소리처럼 여겨지고 귀담아 듣지 않으려는 젊은 세대처럼 말이다 . 하지만 어른들 말씀에 틀린 말이 없는 것처럼  『논어』는 우리의 일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기본적 인간관계를 가르쳐주고 있다. 오래 읽다 보면 일상생활 속에서 뜻밖에도 자주  『논어』속의 구절들을 만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우연한 만안남을 통해 읽었던 구절을 상시키시는 것. 이것이 바로 ‘일상의 미학, 삶의 예술’에서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이 아닐까.

 

그때나 지금이나 삶의 본질이 바뀐 건 아니다. 따라서 공자의 일상적 삶의 생각을 전하고 있는 『논어』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그것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증조할아버지의 꾸지람과 잔소리에 지레 겁먹을 필요가 없다. 우리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덕담을 전하는 것이다. 『논어』도 그렇다. 그 안에는 꼭 알아야 할 삶의 윤리와 일상의 지혜가 있다. 자꾸 생각하려는 두뇌에 힘을 빼고 읽는다면 『논어』가 재미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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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궐 2015-02-02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논어 서평을 찾아보다가 cyrus님 서재에 또 왔네요.
저도 성백효 <논어집주> 읽다가 멘붕 왔었기 때문에 공감하며 읽었습니다.ㅋㅋㅋ
참 좋은 서평입니다.

cyrus 2015-02-02 21:17   좋아요 0 | URL
제가 논어를 읽은 지 얼마 안 됐고, 꾸준히 열독하지 않아서 깊이 알지 못합니다. 뭣도 모르고 자비로 <논어집주>를 사서 읽었는데 한자가 너무나 많아서 결국 중고서점에 팔았습니다. 아예 보지도 않는 책을 계속 책장에 방치해둘 수가 없더라고요. ^^;;
 

 

 

 

 

 

 

 

 

 

 

 

 

 

 

 

 

 

복어의 지느러미는 작다. 그래서 적이 다가오면 빨리 헤엄쳐서 도망칠 수 없다. 그 대신 적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몸을 서너 배로 부풀린다. 그래도 적이 자신을 잡아먹으려고 하면 몸에 테트로도톡신이라는 맹독 성분의 물질을 낸다. 복어의 독은 자기방어를 위한 생존방식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복어의 독이 강할수록 맛이 좋다. 그런 위험천만한 맛이 얼마나 좋았으면 중국의 시인 소동파는 “사람이 한 번 죽는 것과 맞먹는 맛”이라고 극찬했을 정도이다.

 

고독도 마찬가지다. 이제 고독은 외로움과 쓸쓸함의 대명사가 아니다. 자기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수동적 자기방어의 한 형태가 될 수 있다. 또는 자신, 더 나아가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고독함을 느끼지 않는다. 아니, 고독함을 느낄 수가 없는 세상이 되었다. 스마트폰에 집중하면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이 들고, 혼자 고독할 기회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표현처럼 우리는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적당한 양의 독은 약이 되지만 그 양이 지나치면 ‘중독’이 된다. 이것은 아름다운 고독이 아니다. 세상을 두려워해서 자신의 전부를 독에 던지게 되면 병적인 집착이 되어 옴짝달싹 못 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결국, 독 안에 든 쥐, 아니 고독 안에 든 은둔자인 것이다. 고독에 잘못 중독되면 자신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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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4-06-27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청난 글쓰기를 하시네요 ㅎ
잘 지내시죠? 고독에 대한 것 왠지 저에게도 참 맞는 말이라 고개를 끄덕끄덕 거리며 갑니다 ㅠ

cyrus 2014-06-27 12:41   좋아요 0 | URL
오랜만입니다. 루쉰님. 저는 평소대로 생각날 때마다 글을 쓰는데요. 엄청난 일은 아닙니다. ㅎㅎㅎ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인생 최후에 남긴 유서
프리모 레비 지음, 이소영 옮김 / 돌베개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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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796] 물에 빠져 죽은 자와 구조 받은 자

 

 

 

 

 

무심한 강물은 하염없이 돌지만 결국은 바다로 흘러가고
거대한 빙하는 표류하면서도 끊임없이 정착을 하려다가
한순간에 미끄러져 어린 생명의 숲들을 지우기도 한다.
바다는 풍요로울수록 더욱 탐욕을 내며 싸우고
태양과 별과 행성들은 언제나처럼 자기궤도를 유지하며
지구별 역시 정교한 우주의 이치대로 돌고 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아니다.
반란의 씨앗에다 지능까지 높다는 그 멍청한 인간들은
항상 불안하고 탐욕스런 나머지 마구 짓밟고 파괴해왔다.
조만간 울창한 아마존 숲과 삶이 꿈틀거리는 이 세상
그리고 마지막엔 따뜻한 인간들의 가슴까지
모조리 황폐한 사막으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프리모 레비, ‘인생연감’, 『살아남은 자의 아픔』중에서, 123쪽)

 

 

프리모 레비는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인간임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아우슈비츠로 가기 전 레비는 소설을 단 한 줄도 써 본 적 없는 화학자였다. 증언을 하기 위해 문학을 택했다.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와 보통 사람이라면 흔적 없이 몽땅 지워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레비는 수용소에서으l 고통을 하나하나 되살려낸다. 그토록 힘겨운 증언을 자진한 이유는 오직 하나다. 인간의 역사에서 그런 끔찍한 일은 자신의 경험으로 끝나야 한다는, 다시는 되풀이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모두에게 알리려는 치열한 사명감에서였다.

 

레비는 수용소를 휘감던 검은 연기처럼, 떨치기 힘든 공포와 절망 속에서 악과 인간의 본질에 대해 쉼 없이 성찰한다. 지옥에서 돌아온 생존자가 기억을 더듬으며 읊조리는 사유의 결이 큰 공감을 불러온다. 그의 글은 의외로 담담하다. 야만적인 학살의 현장을 폭로하고 고발하려는 나치 증언문학과 달리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간명하다. 그래서 울림이 더 크다.

 

극한의 시기에도 인간에 대한 희망의 단서를 찾으려 노력했던 그는 결국 68세에 투신자살로 삶을 마감했다. 자신의 처절한 경험과 사유를 시와 소설 등 다양한 형식의 기록으로 남겼던 그가 따로 남긴 유서는 없었다. 시 ‘인생연감’은 결국 그의 유서가 되고 말았다. 레비의 삶과 사상을 조명한 서경식은 ‘한없이 거듭되어 증식하는 어리석은 행위’ 때문에 그토록 집요하게 탐구하고 알리고자 했던 ‘인간’에 대한 희망을 잃었다고 봤다.

 

전쟁을 경험한 국가들은 ‘종전’을 기념한다. 그러나 레비는 예외였다. 유대 민족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단어가 디아스포라와 홀로코스트다. 한 곳에 편히 정착하지 못한 채 늘 이방인으로, 떠돌이로 살다가 극우 인종주의에 의해 민족이 말살될 뻔했던 그들의 고달픈 역사를 살펴보면 이 두 단어가 왜 유대 민족의 아픔을 집약하는지 알 수 있다.

 

살인적인 인플레와 경제위기에 직면한 독일은 나치가 정권을 잡자마자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나치는 인종우월주의를 조장하며 유대인 소유 기업을 망하게 하고 유대인을 공공기관과 대학 등에서 쫓아내더니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그들을 모두 없애기로 한다. 유대인은 수용소로 보내져 집단적으로 학살된다. 그 때 죽은 유대인이 600만 명 정도 가까이 된다고 하니 세상에 다시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유대 민족이 겪은 이런 가슴 아픈 일을 지금 유대 국가 이스라엘이 자행하고 있다. 하마스를 궤멸하겠다며 전투기와 탱크로 가자 지구를 생지옥으로 만들었다. 전쟁에 나섰을 때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겠지만, 어린이를 포함한 민간인이 희생된 것을 보면 그 어떤 이유도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무지막지한 공격을 퍼붓는 이스라엘을 보면, 이들이 가슴 아픈 과거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1982년 이스라엘이 레바논을 침공했을 때 레비는 이를 비판하는 성명을 내고 이스라엘의 ‘공격적 내셔널리즘’을 비판한 적이 있었다. 레비는 40년에 걸친 자신의 증언에 대해 절망적으로 회의하게 되었다. 그렇게 역사적 증인의 의무를 갖고 지옥에서 탈출했지만 인간 존재의 위기는 여전했다. 전 세계에서 지탄을 하고 고발을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뻔뻔스럽게 민간인들을 대낮에 학살하는 이스라엘의 야만적 전쟁 범죄를 가만히 앉아서 지켜보기란 너무 괴로웠을 것이다. 그가 없는 이 세상은 멍청한 인간들이 세상을 마구 짓밟고 파괴하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해방의 순간은 기쁘지도 홀가분하지도 않았다. 보통은 파괴와 대량학살의 비극적 배경 위로 고통의 종이 울렸다. 다시 인간이 되었음을 느낀 순간, 다시 말해 책임감을 느낀 그 순간에 인간적 고통이 되살아났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중에서, 81~82쪽)

 

‘살아남은 자의 아픔’을 겪었던 무렵, 레비는 다시 한 번 나치 학살의 현장과 희생자들의 기록을 처연하게 되짚어간다. 자살하기 1년 전에 집필된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이다. 레비는 아우슈비츠 해방 이후 세상은 아우슈비츠를 망각해왔다고 말한다. 과거의 죄를 망각해가는 세상의 어두운 미래를 고발한다. 원래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라는 제목은 처녀작 『이것이 인간인가』에 붙이려고 했다. 그러나 편집자의 제안에 의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제목으로 바뀌었다. 대신 책에 포함된 장의 제목이 되었고 다시 한 번 레비의 공식적인 유작의 이름이 되었다.

 

강제수용소 안에서 벌어졌던 현상들을 가해자와 피해자, 가라앉은 자(죽은 자)와 구조된 자(살아남은 자)로 명명했다. 레비는 나치의 폭력성과 죽음의 수용소를 체험한 피해자이지만, 철저한 자기성찰과 비판정신을 통해 자신을 포함한 생존자에게도 비판의 칼날을 들이댄다.

 

수용소는 사라졌지만, 그 안에 있던 세계는 지금도 작동된다. 끔찍한 제도적 폭력에 노출될 때 피해 집단 속 사람들은 한 술 더 떠 동료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폭력에 노출된 수용소 포로는 자신보다 더 취약한 사람을 자신의 권력 아래에 둔다. 룸코프스키의 사례는 인간을 서열화시키는 폭력의 위험성을 보여준다. 룸코프스키는 비열한 방법으로 유대인 포로를 관리하는 게토 위원장에 오른다. 그곳에서 게토의 히틀러가 된다. 룸코프스키는 권력과 위신에 쉽게 현혹되는 인간이다. 레비는 그들을 ‘회색인간’이라고 부른다.

 

“룸코프스키처럼, 우리 역시 권력과 위신에 현혹되어 우리의 본질적인 나약함을 잊어버린다. 우리 모두 게토 안에 있다는 것을, 게토 주위엔 담벼락이 둘려 있고 그 밖에는 죽음의 주인들이 있으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기차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그렇게 우리는 자발적이든 아니든 간에 권력과 타협하게 되는 것이다.” (80쪽)

 

레비가 인용한 셰익스피어의 희극에 나오는 대사처럼 우리는 ‘일시적인 권력의 옷’을 걸치는 순간, ‘바보 같은 광대짓’을 일삼는 ‘회색인간’이 될 수 있다. 권력을 얻거나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어리석은 짓을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니까. 독일의 패망이 다가오는 시점에서도 전쟁을 일으킨 권력자들은 죽어가는 사악한 한 줌의 권력을 나눠가지려고 서로 총을 겨누웠다. 그들은 이미 권력에 눈이 멀어 유대인을 말살시키는 최악의 범죄를 일으켰다.

 

여기서 불편한 진실은 아우슈비츠의 생존자들 중에 다수가 ‘바보 같은 광대짓’을 한 비열한 권력자가 있었다는 점이다. 힘없는 약자는 수용소 안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고, 대신 비겁한 이기주의자들은 살아남은 것이다. 수용소로부터의 해방은 자유의 기쁨뿐 아니라 치욕과 죄책감까지 안겼다. 이것이 ‘구조된 자’가 겪는 아픔이자 그들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리는 고통으로 형성된다.

 

가해자들의 변명과 합리화. ‘나는 몰랐다’,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기억의 표류 속에 잔인한 역사는 점점 희미해진다. 역사에 눈이 먼 세상에 대한 열패감이 레비가  자살을 선택하게 만들도록 한 것이다. 마지막이 될 유작 그리고 인간의 어리석음을 경고한 ‘인생연감’을 쓰는 내내 레비는 자신을 포함한 생존자의 목소리를 외면하는 생각에 괴로웠을 것이다. "우리가 이야기한다 하더라도 우리를 믿어주지 않을 거야."(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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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아니면 언제? - 투신자살한 아우슈비츠 생존작가 프리모 레비의 자전적 장편소설
프리모 레비 지음, 김종돈 옮김 / 노마드북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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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751] 지금이 아니면 언제?

 

 

 

“좋든 싫든 오늘 이 세계는 히틀러의 작품이다.” 독일의 언론인 제바스티안 하프너의 『히틀러에 붙이는 주석』에서 나오는 구절이다. 나치스, 하켄 크로이츠, 제2차 세계대전, 아우슈비츠 수용소, 반유대주의. 화가가 되고 싶었던 히틀러는 그림이 아니라 독일의 총통이 되어 ‘제3제국’이라는 거대한 작품을 만들었다. 히틀러는 죽고 없지만, 그가 만들었던 작품은 폐기처분이 되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히틀러의 작품 속에서 살고 있고, 그것을 두 눈으로 보고 있다.

 

히틀러의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은 스킨헤드다. 그들은 머리를 짧게 깎은 극우 인종주의자 집단이다. 그들은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 거의 모든 나라에 조직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통일된 강령은 없지만 연대를 유지하고 있다. 외국인의 자국 이민 반대와 인종 차별, 나치 찬양 및 반유대주의, 홀로코스트 부정 등을 주장하고 있다. 독일에서는 나치와 관련된 활동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나치 추종에 따른 법적 문제를 피하기 위해 민족주의와 같은 구호를 내세우고 있다. 스킨헤드는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활동하는 가운데 극우범죄는 급증하고 있다. 나치즘을 신봉하는 스킨헤드는 러시아에서도 볼 수 있다. 소비에트 연방 붕괴와 경제상황 악화 이후로 유색인종들을 대상으로 테러를 감행하고 있다.

 

히틀러를 모방하는 집단적 반유대주의, 인종차별주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게토(Ghetto)를 형성한다. 그 곳에서 유대인과 유색인종은 격리당하고, 차별을 받는다. 아우슈비츠에서 극적으로 생존한 프리모 레비가 살아 있었다면 전쟁의 향수와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시키는 폭력이 사라지지 않은 세상과 맞서 싸웠을 것이다. 그리고 미국의 문학비평가 어빙 하우의 말처럼 ‘인간이 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위해 치열하게 자신과 싸움’도 멈추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 소설 『지금이 아니면 언제?』의 주인공 러시아계 유대인 멘델처럼 그도 ‘유대인’이 아닌 ‘인간’이 되기 위한 과정을 탐색했고, ‘인간’의 의미가 총알과 포탄에 의해 학살되는 시대를 증언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는 그 전에 발표된 레비의 작품들, 『이것이 인간인가』 『휴전』『주기율표』『멍키스패너』와 다르게 꽤 많은 입체적 인물들이 등장하고, 빨치산 부대의 여정을 재구성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는 생존을 위해 하루하루 전쟁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빨치산 부대의 이야기다. ‘빨치산’은 유격대원을 뜻하는 프랑스어 파르티잔(Partisan)에서 유래했다. 레비는 반파시즘 빨치산 부대에 활동하다가 파시스트 민병대에 잡혀 다른 이탈리아 유대인과 함께 악명 높은 폴란드의 모노비츠 수용소로 넘겨졌다.

 

유대인 빨치산은 싸우는 디아스포라(Diaspora)다. 그들은 나치스와 파시스트로부터 강제로 내쫓겼으며 학살과 가스실을 피하기 위해서 저항을 선택한다. 살기 위해서 총을 들기로 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탈무드에 살인을 금지하는 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의 복수에 동참하기로 한다.

 

“살상은 나쁘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독일군을 죽이는 게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어버렸지.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어야하는 운명이니까 말이야. 난 반드시 유태인 빨치산이 존재해야 하고, 또 러시아 군대에 가담해야 한다고 생각하네. 내가 나치 하나를 죽임으로써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다른 독일인들에게 납득시킬 수 있으니까 말야.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인가? 인간이 인간을 죽여야만 비로소 인간의 가치와 존재가 증명되는 현실! (146쪽)

 

『지금이 아니면 언제?』는 ‘추방’과 ‘고통’을 삶의 동반자로 감내해 온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에 대한 애정과 안타까움이 한줄 한줄 배어나온다. 유대인의 적은 나치만 있는 것이 아니다. 빨치산 부대 안에서도 유대인을 향한 깊은 앙금과 오해가 존재한다. 유대인을 부대원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빨치산도 있을 정도로 유대인은 어디에 소속되지 못하는 전쟁의 약자였다. 원래 디아스포라는 고대 그리스인들에게서 비롯되어 뭔가 진취적이고 능동적인 의미를 가졌지만 유대인들의 한없는 유랑과 겹치게 되면서 부정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유대인의 애환을 가장 잘 표현한 장면이 바로 유대인 출신 가수 마틴 폰타쉬가 쓴 노랫말이다. 그는 빨치산에 가담했다가 포로가 되어 유대인 게토에서 사망한다. 게달레 대장이 들려주는 마틴의 최후는 ‘유대인’이라는 낙인 때문에 치욕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비극적인 장면이다.

 

나치 친위대 장교는 유대인은 총살형, 빨치산은 교수형이라는 게토의 규정대로 마틴을 총살형과 교수형을 내린다. 그러자 마틴은 죽기 직전에 장교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한다. 마지막으로 노래가사를 하나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음악을 좋아하고 그의 실력을 알고 있었던 장교는 마틴이 노랫말을 쓸 수 있도록 30분의 시간을 준다. 정확하게 30분 내에 노랫말은 완성되고 교수형을 받고 사망한 그를 향해 권총이 발사되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게달레 대장은 마틴의 복수를 다짐했다. 게달레도 음악을 좋아하는 유대인 빨치산이다. 그의 양쪽 어깨에는 총과 바이올린이 함께했다. 틈만 나면 바이올린을 즉석으로 연주했고, 실력도 좋다. 비참하게 최후를 맞이한 동지를 위해서 게달레는 나치친위대 장교를 처단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던 마틴의 노랫말이 적힌 종이도 찾게 된다. 게달레는 마틴의 노랫말에 자신의 구슬픈 바이올린 선율을 입혀 위대한 가수이자 용감했던 빨치산 유대인을 추모했다.

 

내가 나를 위해 살지 않는다면
과연 누가 나를 위해 대신 살아줄 것인가?
내가 또한 나 자신만을 위해 산다면
과연 나의 존재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 길이 아니면 어쩌란 말인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란 말인가?

 

 

(229쪽)

 

안식처가 보이지 않는 추방과 학살의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멘델처럼 저항으로 맞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유대인을 향해 사람들은 그들의 이중성을 비난한다. 하지만 유대인의 생존의지는 안식 없는 삶, 뭐라 말할 수 없는 불안감을 극복하는 동시에 ‘인간’이라는 고유한 의미를 지키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다. 총구가 그들의 목숨을 노리고, 인간이 아닌 짐승으로 살아야하는 수용소 생활은 자유를 박탈하는 인류의 범죄이다. 유대인을 짓밟은 나치의 만행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는 살아남아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총을 쥘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거주국과 조국 사이의 불안한 ‘균형’의 선 위에 있는 유대인 디아스포라는 대개 세 가지 대응방식을 보인다. 조국으로 귀환해 그 재건을 지향하거나, 귀환을 포기하고 거주국으로의 동화를 추진하거나, 아니면 거주국에서 독자적 정체성을 유지하며 기본적 인권과 민족적 권리를 추구하는 것이다. 오늘날 디아스포라가 주목받는 것은 마지막 지향성과 연관된다. 이제는 불가능하기에 귀환도 동화도 모두 거부하며 국민국가의 자명성과 폭력성에 대해 의문과 이의를 제기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실향과 생존 투쟁은 단순한 폭력적 저항이 아니라 삶의 미래를 지키려는 선택으로써 적극적 저항이다.

 

나치스의 유대인 학살뿐만 아니라 스탈린의 소비에트 부대가 무고한 폴란드 인을 학살하고 매장한 카틴 숲 사건도 언급하고 있다. 스탈린은 서유럽 침략을 끝내면 독일군이 자신들을 향해 진격해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점령 중이던 동부 폴란드 지역에서 공무원, 지식인, 의사, 예술가 등 2만여 명 이상의 폴란드인을 카틴 숲으로 끌고 와 학살했다. 희생자들은 소비에트 부대에 의해 사회 지도층 인사로 분류된 사람들로 훗날 러시아에 대적할 빨치산 세력을 규합할 수 있다는 이유로 처형된 것이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는 단순히 유대인 빨치산 부대의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라 레비 자신을 포함시킨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집단 자화상이다. 그리고 전쟁의 광기가 인간을 학살을 감행하는 잔인한 짐승과 그들에게 핍박받는 비참한 짐승으로 만드는 과정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 보편적 인간의 가치, 폭력과 평화, 역사에 대한 망각과 책임 등의 문제로 우리를 인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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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6-07-19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까지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 <휴전> 그리고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세 권을 읽었네요. <지금 아니면 언제?>를 레비의 다음 책으로 읽어야할 것 같습니다. 빨치산 게릴라를 다룬 책을 좋아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