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코올 열린책들 세계문학 120
기욤 아폴리네르 지음, 황현산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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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여기 또 한 명의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가 있소.”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이상은 소설 『날개』가 시작되는 구절을 통해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사회 분위기에 ‘살아있지만 죽은 것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말했다. 박제란 낱말은 인간으로 하여금 거부감을 갖게 하고 다가가기보다 한걸음 물러서게 하는 외면의 상징물이다. 삶이 박제되었다는 것은 생명력을 상실한, 그래서 사고력과 행위를 상실한 무기력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상징한다.

 

여기 박제가 된 천재가 또 한 명이 있다. 기욤 알베르 둘치니. 이름이 무척 낯설다. 그렇다면 기욤 아폴리네르는 아시는가? ‘세계의 명시’ 모음집을 읽어 본 독자라면 알 것이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이 흐른다 / 우리 사랑을 나는 다시 / 되새겨야만 하는가”로 시작되는 「미라보 다리」를 쓴 시인이다. 기욤 알베르 둘치니와 아폴리네르는 이름만 다른 동일 인물이다. 첫 번째 이름은 시인의 본명이며 ‘아폴리네르’는 세례명이다. 그런데 「미라보 다리」는 익숙해도 정작 시를 쓴 시인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아폴리네르는 시뿐만 아니라 소설, 희곡 그리고 미술평론가로도 꽤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20세기 문학사와 미술사에서 큰 무게를 감당하고 있는 ‘초현실주의’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이 아폴리네르였다. 그는 21세기를 주도할 새로운 미술의 등장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 흐름을 주도하게 될 몇몇 예술가들을 눈여겨봤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파블로 피카소다. 아폴리네르는 사람들로부터 점점 인정을 받기 시작하는 가난한 예술가들을 지원했고 친분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아폴리네르의 실제 삶은 뛰어난 업적에 비하면 기구하고 불운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살아있지만 죽은 것 같은 삶’이 시작되었다. 그는 프랑스에서 살면서 시인으로 활동했지만, 사실은 무국적자에 가까웠다. 또 출생 과정도 좋지 않았다. 미지의 이탈리아인 아버지와 폴란드인 어머니 사이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아폴리네르는 평생 자신의 아버지가 누군지 몰랐다. 아폴리네르의 어머니는 한 곳에 가만히 안주하지 못하는 성격에 허영심이 상당히 강한 도박꾼이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자란 소년 아폴리네르는 평번한 또래 아이들처럼 부모로부터 사랑을 제대로 받으면서 자라지 못했다. 아마도 이때부터 아폴리네르는 너무 오랫동안 허기진 상태가 계속된 마음을 충족시켜 줄 사랑이 필요했음을 느꼈을 것이다.

 

 

 

 Scene #2  운명은 천재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청년이 된 아폴리네르는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줄 사랑의 동반자를 찾기 시작했다. 그는 21살에 독일의 한 부잣집 딸의 프랑스어 가정교사가 되었는데 영어를 가르치는 애니 플레이든을 만나게 된다. 만남의 시작은 좋았으나 두 사람의 연애 진도는 좀처럼 나아가지 않았다. 결국 애니가 미국으로 떠나버림으로써 시인의 첫 번째 사랑은 불행하게 끝나고 말았다. 실연 이후로 아폴리네르는 자신의 시에 아름답지만 고통스러운 사랑의 기억들을 곳곳에 숨겨놓았고, 간간이 심장에서 솟구쳐 오르는 슬픔과 분노를 시로 표출했다.

 

두 번째 사랑은 입체파 화가들에 영감을 준 ‘몽마르트르의 뮤즈’ 마리 로랑생이었다. 둘은 서로 공통점이 많았다. 사생아 출신이었으며 서로의 예술에 대해 공감했다. 함께 손을 맞잡고 미라보 다리를 건널 정도로 두 사람의 사랑은 당장 결혼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이 가까웠으나 청천벽력 같은 사건이 그들의 사랑을 방해했다.

 

1911년 아폴리네르가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 도난 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그가 명화 도난 사건에 휘말리게 되는 과정은 정말 불운했다. 아폴리네르의 비서 제리 피에르가 루브르 박물관에서 고대 흉상을 빼돌려 아폴리네르의 집에 숨겨둔 것이 화근이 되었다. 아폴리네르의 집에 숨겨둔 흉상이 발견되면서 아무 죄도 없는 아폴리네르는 ‘모나리자’ 절도 혐의로 상떼 감옥에 구속 수감된다. 아폴리네르가 억울한 누명을 씌우게 만든 비서는 국외로 탈출한 상태였다.

 

이 사건은 프랑스 사회를 발칵 뒤집을 정도로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다행히 아폴리네르는 기소 각하로 구속된 지 일주일 만에 석방된다. 그러나 석방 이후의 아폴리네르 곁에는 그를 지지해준 사람들이 하나둘 떠난 상태였다. 로랑생과의 사랑은 끝났고, 설상가상으로 프랑스 사회는 무국적자이자 명화 도난 사건 혐의를 받은 시인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다. 일부 언론은 그의 출생 이력과 무명 시절에 쓴 외설적인 포르노 소설을 트집 잡아 비난했다. 젊은 천재는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펼치지 못한 채 박제가 되었다. 프랑스 사회는 야박했다. 프랑스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가 자유롭게 숨 쉬는 것마저 허용하지 않았다.

 

상떼 감옥에서 보낸 일주일은 아폴리네르에게 정말 잊고 싶은 사건 중의 하나였다. 그곳에서의 시간은 자유가 억압되었고, 왕성한 창작의 기력이 한 풀 꺾이고 말았다. 수감 당시에 느꼈던 괴로운 감정은 시 「상떼 감옥에서」에서 구구절절 표현하고 있다.

 

 

감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나는 알몸이 되어야 했으니
어느 불길한 밤새 소리 울부짖는다
기욤 너 이게 무슨 꼴이냐고

 

(중략)

 

태양이 창살을 비집고
      걸러 들어와
빛살이 내 시구 위에서
      광대놀음을 벌이네

종이 위에서 춤을 추네
      귀 기울여 들어 봐야
누군가가 발로 둥근 천장을
      구르는 소리

 

한 마리 곰처럼 땅굴 속에서
아침마다 나는 어슬렁거리네
돌자 돌자 마냥 돌자
하늘은 수갑처럼 시퍼렇구나
한 마리 곰처럼 땅굴 속에서
아침마다 나는 어슬렁거리네

 

 

(「상떼 감옥에서」중에서, 175~179쪽)

 

 

그가 프랑스 국적을 얻게 된 것은 세상을 떠나기 3년 전인 1915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대가로 아폴리네르는 드디어 무국적자의 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세계 대전은 문학 천재가 다시 비상(飛上)하기에는 너무나도 위험하고 힘든 시기였다. 1916년 3월, 아폴리네르는 전선에 참전하다가 두뇌에 관통상을 입었다. 그는 몹시 위험한 수술을 받고서도 용케 살아남았지만, 그 총상에서 회복되던 중에 독감에 걸려 종전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Scene #3  사랑받지 못한 사내의 노래

 

아폴리네르의 시집 『알코올』은 시들을 모은 작품이 아니다. 여기 한 권에 그의 삶 자체가 농축되어 있다. 그는 이 시집만큼은 자신보다 더 많이 사랑받기를 원했다. 성(性)과 국적, 신분이 제각각 다른 일곱 사람만 읽어도 스스로 만족했다.

 

사실 「미라보 다리」와 몇몇 작품을 제외하면 아폴리네르의 시는 어렵다. 시 속에 시인의 삶 자체가 그대로 녹아들어있기 때문에 아폴리네르라는 시인을 모른다면 시를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시 중간에 나오는 고대 종교 및 중세 신화 속에 나오는 장면들은 독자들에게 상당한 배경지식을 요구한다. 즉, 한 문장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는 시가 아니다. 『알코올』을 읽기 전에 역자 해설과 작가 연보를 먼저 읽을 것을 권한다. 아폴리네르를 전공한 불문학자 황현산 교수가 아폴리네르의 시를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해설했다.

 

「미라보 다리」 다음으로 아폴리네르의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사랑받지 못한 사내의 노래」는 시집에서 수록된 시 중 가장 긴 내용이다. 애니 플레이든과의 결별 이후에 쓴 작품으로 제목만 봐도 그 때 그 심정을 읊은 것으로 짐작할 수 있지만, 정작 시 내용을 읽게 되면 감정을 문장으로 표출하는, 가슴 아픈 서정시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시인은 고대 및 종교 신화에 나오는 장면을 인용하여 최대한 감정을 절제한다. 아니, 일부러 그 가슴 아픈 기억을 감추는 듯하다. 시는 런던과 파리의 모습뿐만 아니라 행복한 왕들의 장면, 저주 받은 운명 그리고 익사한 왕의 장면 등 어지럽게 섞인 채 나타난다. 독자는 이 시에서 사랑받지 못한 사내, 즉 시인의 감정을 제대로 포착해내기 어렵다.

 

「사랑받지 못한 사내의 노래」의 구성 방식은 입체파 화가들이 즐겨 제작하던 양식인 파피에 꼴레(Papier colle)가 연상된다. 화면에 현실감을 주기 위해 색지나 신문지, 악보, 상표, 벽지 등을 풀로 붙여 새로운 효과를 낸다. 아폴리네르는 과거와 현재뿐만 아니라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이야기들을 끌어 모아 생경한 이미지를 만들어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과 기억 전체를 환기시킨다.

 

이루지 못한 사랑의 기억이 추억이 되어 슬프고도 시인 자신을 괴롭게 만들지만, 아폴리네르는 점점 세월의 흐름에 떠내려가는 그 추억의 한줄기마저 잡기 위해 힘겹게 시를 써내려간다. 그것이 돌아오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시인을 알면서도.  

 

 


나날이 지나가고 주일이 지나가고
    지나간 시간도
  사랑도 돌아오지 않는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이 흐른다

    밤이 와도 종이 울려도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미라보 다리」중에서, 53쪽)

 

 


「사랑받지 못한 사내의 노래」는 사랑의 변심과 좌절에 비롯된 회의감을 드러냈다면, 「미라보 다리」와 「고별」에서 시인은 이별의 고통을 묵묵히 견디면서 지나간 추억이라도 잊지 않으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내 언젠가 히스나무 이 가녀린 가지를 꺾어 두었지
가을도 가버렸으나 잊지는 말아라
우리는 이 땅에서 다시 보지 못할 거야
시간의 이 향기 히스나무의 이 가녀린 가지
그래 내 너를 기다리니 잊지는 말아라

 

(「고별」, 105쪽)

 

 

 


 Scene #4  시를 쓴다는 것은 외롭고도 황홀한 심사이어니.   

 

「미라보 다리」가 너무 많이 알려지는 바람에 아폴리네르는 서정시인으로 둔갑되어 알려졌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사랑을 추억하다가 행복한 결실을 맺지 못하는 불행한 시인은 아니다. 비록 함께하는 기간은 짧았으나 빨강머리 자클린 콜브와 약혼하여 잠시나마 행복한 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아폴리네르에게 사랑은 상대방을 향한 지고지순한 감정이 아니다. 고독한 삶의 여정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환기시켜주는 특별한 경험이다. 그에게 시를 쓴다는 것은 ‘외롭고도 황홀한 심사’(정지용 「유리창 1」중에서)이다. 사랑받지 못한 사내의 외로움은 황홀한 시적 감정에 의해 절제된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아폴리네르. 그는 오늘도 세월의 박제가 되어 미라보 다리 밑에서 가슴 아픈 사랑의 추억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팔 밑에 낡은 책을 끼고 센 강변을 걷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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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4-09-18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특히 외국작품을 읽을 때는 역자해설을 자세히 읽으면 얻을 것이 많은데 의외로 많은 이들이 소홀히 여기더라고요.아폴리네르의 생애는 얼마나 비극적입니까.저는 역자해설을 정독하라고 늘 권합니다.

cyrus 2014-09-20 23:40   좋아요 0 | URL
최근에 헌책방에서 황현산 교수가 번역한 파스칼 피아의 <아폴리네르>도 구해서 같이 읽고 있습니다. 이 책 덕분에 아폴리네르의 문학을 한결 더 이해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4-09-21 22:49   좋아요 0 | URL
광범위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독서를 하시는군요.
 
우발과 패턴 - 복잡한 세상을 읽는 단순한 규칙의 발견
마크 뷰캐넌 지음, 김희봉 옮김 / 시공사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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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작은 불씨가 온 광야를 불태운다" (마오쩌둥)

 

 

 

도산 직전의 닛산 자동차를 1년 만에 흑자기업으로 만든 경영자 카를로스 곤의 경영철학은 명쾌하다. ‘아마추어는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지만 프로는 단순 명쾌하게 만든다’. 1978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허버트 사이먼도 과학의 목적이 무질서한 세상에서 의미 있는 단순성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의 말처럼 혼란하고 복잡한 세상 모습을 단순하게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살기 편해질까. 이에 대한 답으로 마크 뷰캐넌은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은 실은 단순한 패턴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전쟁, 지진, 산불 등 관련성이 없어 보이는 대형 재난들 사이에 ‘보편적 패턴’이 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지진의 경우 주기적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지금도 전 세계 지진학자들은 지각이 진동하기 전에 발생하는 사전 경고를 주시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지진을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맨틀 위의 지각을 이루는 단층이 임계상태(Critical state)에 이르면 지진이 일어난다.

 

하지만 아무런 규칙성도 없을 것 같은 이런 지진현상에도 보편적 패턴이 존재한다. 지질학자 구텐베르크와 리히터는 미국 남부 캘리포니아 지진의 강도와 빈도를 그래프로 그려보았다. 그러자 모든 지진이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패턴을 보였다. 지진의 에너지 방출이 두 배가 되면 발생 빈도는 4분의 1로 줄어드는 등 지진의 강도가 크면 클수록 지진은 더 드물게 일어났다. 전 세계의 지진 목록을 살펴봐도 마찬가지다.

 

흔히 우리는 어떤 큰 사건에는 그에 상응하는 큰 원인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아주 사소한 일이 격렬한 변화를 불러올 수도 있다. 즉 임계상태는 별것 아닌 사소한 원인에 과도하게 민감한 반응을 보임으로써 격변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나 복잡한 시스템을 말한다. 이런 단순한 패턴은 규모와 빈도를 예측하기 어려운 산불이나 주가의 오르내림, 상품의 가격 변동 등 광범위한 영역에서 발견된다.

 

1988년 일어난 미국 옐로스톤 국립공원의 산불 사례를 들어보자. 작은 불씨에서 시작된 산불은 잡히는 듯싶더니 점점 번져서 150만 에이커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주가 변동도 예외는 아니다. 1987년 상승세를 유지하던 미국의 주식시장이 어느 순간 하락하더니 대폭락으로 이어졌다.

 

자연 세계와 인류 역사는 그 본질적인 임계상태로 인간을 괴롭혀 왔다. 세상사는 앞으로도 예측 불가능한 영역에 속할 것이고, 많은 부분에서 인간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크 뷰캐넌은 언젠가는 폭발해버리고 마는 임계상태 현상을 역사에 대입하기도 한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부부가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한다. 이날 한 청년이 나타나 황태자 부부를 저격해 살해한다. 이를 문제 삼아 오스트리아는 보스니아와 같은 슬라브 민족 국가인 세르비아에 선전 포고를 한다. 이후 러시아가 세르비아 편에, 독일이 오스트리아 편에 선 것을 시작으로 유럽 각국이 이해관계에 따라 서로 맞서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진 것이다. 19살의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크가 쏜 총탄은 군사력을 과시하려는 유럽 제국의 뇌관을 건드렸다.

 

오늘의 역사는 이 끔찍한 전쟁을 터지게 만든 도화선에 불을 붙인 가브릴로 프린치프를 잊지 못한다. 그러나 마크 뷰캐넌은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을 더욱 사소한 것에서 찾았다. 황태자 부부가 암살당하기 직전, 그들이 탄 자동차는 운전자의 실수로 인해 길을 잘못 들어섰다. 운전자의 실수가 황태자 부부의 운명뿐만 아니라 화약고가 터지기 직전 상태에 이른 유럽의 운명마저 바꿔놓았다. 저자의 관점이 약간은 허무하게 느껴질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인간 세상을 휩쓰는 불가해한 일을 단순하게 보는 결론에 지각의 세세한 부분에 매달려온 지진학자나 사료를 통해 역사적 사전의 원인을 규명하려는 역사가들은 크게 반발했다.

 

그러나 이와 관련된 연구 성과를 무시하기는 힘들다. 임계상태의 틀에서 현상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은 미세한 변화가 후에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다는 카오스 이론과 유사하다. 브라질에 있는 나비가 날갯짓을 하면 미국 텍사스에 토네이도를 일으킬 수 있다는 나비 효과 역시 임계상태 패턴과 같은 맥락에 있다.

 

저자의 표현대로 카오스는 단순한 것이 아주 복잡한 현상으로 만드는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라면, 임계상태는 복잡한 현상을 단순하게 본다. 그렇다면, 세상의 경로를 한순간에 바꾸게 만드는 임계상태를 예측할 수 없는 걸까?

 

결국 거대한 복잡계로 이루어진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비평형 물리학(복잡계 물리학)이 필요하다. 임계상태의 독특하고 불안정한 짜임새는 세계의 모든 국면에서 나타난다. 세계는 비평형 상태에 있기 때문에 복잡한 현상이 일으키는 임계상태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다만, 비평형 물리학으로 자연현상과 역사의 예측 불가능한 임계상태 패턴을 읽을 수 있어도, 격변이 언제 일어날지 예측하기는 불가능하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잔잔한 물결이 흐르는 강물에 안전하게 움직이는 배가 아니다. 강물 속에 있는 암초를 만나 배가 부딪혀 잠겨버릴 수 있는 것처럼 당혹스럽고 제어하기 힘든 임계상태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비평형 세계는 인간의 예측가능성을 크게 흔들어 놓았다. 그러나 복잡성과 불안정성이 늘 혼돈에 갇혀있는 것은 아니다. 그 속에서도 예측 가능한 패턴이 있다. 그것을 찾아내는 일이 비평형 물리학의 백미다. 미래가 끊임없이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더라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미세한 부분까지 다 상호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비의 날개짓이 먼 곳에 일어날 태풍의 진로를 바꿀 수 있듯이 세상은 하나로 연결된 보이지 않는 그물망이다. 우리는 그 그물망의 아주 작은 ‘코’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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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셀로 장서목록을 작성하기 시작한 지 어느덧 2주가 지났다. 생각보다 작업이 오래간다. 하루 절반은 공무원 시험 준비로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 외에 사람을 만나거나 독서를 하다 보니 장서목록 작성이 점점 뒷전으로 밀린다. 장서목록 작업이 아직 마무리 된 것도 아닌데도 이놈의 책 사재기 버릇은 여전하다. 선(先) 목록 추가, 후(後) 독서. 일단 구입한 책은 바로 목록에 추가하면 읽기 시작한다.

 

 

장서목록을 작성하면 꼭 그 책의 품절, 절판 상태도 기록한다. 지금 가지고 있는 책들 중에 품절, 절판된 것도 있다. 절판된 책을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지만 죽은 책은 그것을 기억하는 독자들의 간절한 염원을 통해서 다시 살아날 수 있다. 출간된 지 오래 되었고, 지금도 독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스테디셀러는 천수를 누린다.

 

 

결국 책이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비결은 독자들의 관심이다. 독자들이 좋은 책을 알고, 입소문이나 독자(혹은 전문가)서평 덕분에 알려진다면 판매부수가 높아진다. 그러나 잘 나가던 책도 예상치 못한 불운으로 인해 판매가 멈춰질 수 있다. 출판사가 재정난을 극복하지 못해 문을 닫게 되어 일찍 생을 마감하는 책도 있다. 책 중에 가장 수명이 짧은 것은 장르문학이다. 장르문학을 좋아하고 즐겨 읽는 독자들이 예전에 비해 많이 늘어났지만, 미국과 일본에 비하면 아직까지 출판시장에서 크게 기세를 펴지 못한다. 올해 과학소설 전문출판사 불새가 나온 지 1년도 채 못 되어 문을 닫은 소식은 국내 장르문학의 냉혹한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보다 더욱 슬픈 사실은 소리 소문 없이 출판이 중단되는 책이다. 독자들의 관심 밖에서 밀려난 책은 조용히 절판 운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한 때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던 책도 절판 운명을 피할 수 없다. 과거에 베스트셀러였던 책이 최근에 절판된 사실을 알고 나면 기분이 묘하다. 책도 세월의 흐름을 피할 수 없나 보다.

 

 

 

 

 

 

 

 

 

 

 

 

 

 

 

 

류시화 시인의 첫 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푸른숲, 초판 1991년)은 2000년에 집계한, 10년 간(1989~1998년) 베스트셀러 순위에 가장 많이 올랐던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2002년에 문을 닫은 종로서적과 교보문고의 주간 베스트셀러에 무려 21회나 등장했다. 2001년에 100쇄 발간 기념으로 시낭송 CD도 나올 정도로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시집이었다. 2008년에 재출간되었으나 현재 이 책마저도 절판되었다.

 

 

 

 

 

 

 

 

 

 

 

 

 

 

한 때 우리나라 도서시장에 ‘교양’ 키워드가 큰 인기를 끈 적이 있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 ‘지의 거인’ 다치바나 다카시의 책들이 국내에 소개되면서 독서를 통한 교양 함양의 중요성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디트리히 슈바니츠의 『교양: 사람들이 알아야 할 모든 것』(들녘, 2001년)은 교양서적 붐을 타고 35만 부 이상의 판매부수를 기록했다. 7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이라는 부제가 교양에 목마른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서양적 개념의 교양으로 치우친 내용 구성이 아쉽지만, 유럽의 역사, 문학, 예술, 철학과 성 담론에 이르기까지, 고대 그리스부터 현대까지 문명과 교양의 핵심을 압축해 서양지식에 입문하는 독자가 읽기에 가장 좋은 책이다. 디트리히 슈바니츠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교양』이 품절된 사실을 최근에 알았다. 2004년에 사진을 추가한 컬러판이 출간되었지만 이 책 또한 품절이다. 현재 유일하게 판매되는 디트리히 슈바니츠의 책은 『슈바니츠의 햄릿: 그리고 이 작품을 문화적 기념비로 만든 모든 것』(들녘, 2008년)뿐이다. 한 때 도서시장을 주름 잡았던 또 한 권의 책 그리고 저자가 이렇게 잊혀 간다. (저자 디트리히 슈바니츠는 2004년에 타계했다. 그의 타계 소식을 인터넷 뉴스 기사로 접한 것이 엊그제 된 것 같은데 벌써 10년이나 지났다.)

 

 

 

 

 

 

 

 

 

 

 

 

 

 

 

 

예전에 알라딘 신간평가단 활동을 하면서 읽었던 책들도 서점에서 사라졌다. 『역사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역사가 에드워드 H. 카의 『도스또예프스끼 평전』(열린책들, 2011년)과 박정희 정권 시절 ‘자유언론실천운동’을 이끌었던 원로 언론인 김종철의 『폭력의 자유』(시사인북, 2013년)이다. 나온 지 5년도 채 넘기지 못한 채 품절되었다. 『도스또예프스끼 평전』은 8기 신간 평가단, 『폭력의 자유』는 13기 신간 평가단 활동 첫 도서였다. 개인적으로 『폭력의 자유』 품절이 너무나도 아쉽다. 언론인을 희망하는 젊은 친구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기도 하다. 지금도 권력 앞에서 쩔쩔 매고, 진실에 눈 가리고 외면하는 언론의 모습은 여전한데 한국 언론의 어두운 역사도 어찌 외면할 수 있으랴.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김영사, 2010년)은 너무나도 유명한 책이기 때문에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지난달에 출판사 계약 기간이 만료되어 마지막으로 반값도 아닌 53% 할인으로 판매되다가 11일에 절판되었다. 올해 안으로 다른 출판사에서 재출간된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는데 아직 구체적인 내용이 결정되지 않은 상태다.

 

 

오늘도 알라딘에 읽고 싶은 책을 검색하다가 절판 사실을 알고 ‘품절도서 의뢰센터’ 버튼을 눌러 본다. 이번에만 열여섯 번째. 야속하게도 왜 내가 읽고 싶거나 사고 싶은 책이 절판이란 말인가. 아무리 기다려도 수급 통보 메일이 오지 않는다. 이래서 책은 사고 봐야 한다. 살 생각만 해놓다가 절판되고 난 뒤에서야 사지 못하면 후회된다. 우리가 쉽게 사고 볼 수 있는 책도 세월 앞에 스테디셀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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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D출판사에서 출간될 예정인 『젖가슴 생태학』 가제본을 어제 다 읽었다. 평소 같으면 책 한 권 읽고 나면 서평을 써야하지만, 프리뷰어 활동은 가제본을 읽었으면 편집 방향에 대한 의견이나 오, 탈자를 해당 출판사에 알려줘야 한다. 그래서 평소에 책 읽는 속도보다 천천히 읽었고, 중요한 내용이나 오자가 있으면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었다.

 

 

 

 

 

 

원래 책에 밑줄을 그어가면서 읽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독서를 많이 하는 명사들은 밑줄 긋기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책이 깨끗한 상태로 유지되길 원하는 독특한 성격 탓에 아직까지 독서 고수의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독서의 달인이나 고수가 되기보다는 그냥 책 읽기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책을 성스럽게 보관하는 괴팍한 책성애자(冊聖愛子)로 남고 싶다. 그렇다고 해서 밑줄 긋기의 중요성을 절대로 간과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눈으로 읽는 것보다 밑줄을 그어가면서 읽으면 책에 대한 집중력이 생겨 책의 주제나 핵심 내용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나중에 가제본이 정식으로 출판되어 나오면 다시 읽어볼 필요 없이 바로 서평을 작성할 수 있을 것 같다.

 

솔직히 가제본을 읽는 동안 밑줄을 긋지 않았다면 책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못했을 것이다. 편집자의 심정이 되어 오, 탈자 하나라도 찾기 위해서 읽었으니까. 책 속에 있는 여성 가슴 사진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니, 생각보다 내가 흡족할만한(?) 사진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시무룩)

 

그래도 프리뷰어로 선정되어 이 책을 읽게 돼서 정말 운이 좋다. 만약에 이 책이 정식으로 출간되었다면 당장 구입하고 싶은 마음이 나지 않았을 것이다. 일단 ‘젖가슴’이라는 제목 때문에 선뜻 책을 고르기가 쉽지 않다. 그렇지만, 나중에 최종 제목을 선정하게 되면 ‘젖가슴’이라는 단어를 제외해선 안 된다. 이 책을 읽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 특히 여성 독자들이 많아야 한다. 여성 독자들이 이 책을 더 부끄러워하겠지만, 자신의 건강뿐만 아니라 나중에 태어날 아기를 위해서라면 꼭 필독해야 한다.

 

가제본을 읽으면서 발견한 오자, 어색한 문장을 정리해본다. 계속 반복해서 읽어봐도 확신이 들지 않은 내용이 있으면 구글링을 동원해서 확인했다. 혹시 내가 지적한 내용에 잘못된 점이나 더 추가해야 할 내용이 있다면 얼마든지 댓글에 달아줘도 좋다. 공부하는 마음으로 다른 분들의 의견을 받아들이겠다.

 

 


1. 인간의 젖가슴은 지방과 기질(Stroma)이라는 연결조직으로 이뤄진 살덩어리다. 

 

→ 이 책을 읽다보면 처음에 가슴을 구성하는 조직으로 ‘기질(Stroma)’라고 언급되는데 다음 장에 읽어보면 Stroma를 ‘지질’이라고 표현한 곳도 있었다. Stroma는 세포로 이루어진 결합조직을 말한다. 우리말로 풀어내면 ‘기질’, ‘지질’ 둘 다 사용된다. 여기서 말하는 ‘기질’은 기력과 체질을 뜻하는 ‘氣質’이 아니라 ‘基質’이다. ‘지질’은 한자어로 ‘支質’이다. ‘기질’과 ‘지질’ 둘 중 하나로 통일시켜 사용해야 하며, 독자가 단어의 의미를 혼동하지 않도록 한자어가 추가되어야 한다.

 


2. 진화생물학자들은 젖의 분비에 관여하는 6000여 개의 유전자는 가장 보존도가 높은 것들로, 이는 털이나 발가락, 체리가르시아 아이스크림을 소화하는 능력 등에 관여하는 유전자들처럼 최근에 진화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 이 문장의 주어는 ‘젖의 분비에 관여하는 6000여 개의 유전자’다. 이 6000여 개의 유전자는 털이나 발가락을 소화하는 능력 등에 관여하는 유전자들처럼 최근에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는 내용인데, 주어 앞에 ‘진화생물학자들은’이 왜 있는지 궁금하다. 이 문장을 반복해서 읽으면 문장이 어색하게 읽혀진다. ‘진화생물학자들은’을 빼도 된다.

 


3. 상자 모양의 베이지색 기계는 질량분석기로 ‘트리플 쿼드’라는 멋진 최신식 장치였다. (중략) 서로 다른 분자를 구분하고 확인하기 위해 이 기계는 색상과 분자량, ‘비행시간’을 이용한다. 즉 분자를 지그재그 모양의 통으로 보내 연통 크기의 작은 실리더로 날아가게 한다.

 

→ 질량분석기는 분석하려는 시료를 기체 상태의 이온으로 바꾼 후 질량을 측정해 분자의 종류와 성질을 분석할 수 있는 장치다. 질량분석기의 원리까지 상세하게 설명하면 글이 길어지고 내용이 옆으로 샐 수 있기 때문에 생략한다. 일단 내가 생각하는 오타가 ‘실리더’다. 피스톤이 왕복 운동되는 장치인 ‘실린더’(Cylinder)의 오타로 추정된다.

 


4. 질병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폐경 덕분에 자유로와진 나이든 여성들은 손주들을 먹이고 키우는데 힘을 보탰다.

 

→ 자유로와진(X) / 자유로워진(O)
   나이든 (X) / 나이 든 (O)
   키우는데 (X) / 키우는 데 (O, ‘데’가 ‘곳’이나 ‘장소’, ‘일’이나 ‘것’, ‘경우’의 뜻을 나타낼 때 의존명사로 띄어 써야 한다)

 


5. 재향군인이 병원을 찾아와 ‘벤젠에 노출된 적이 있다’고 말할 때 어리둥절해하는 의사를 보지 않았으면 하는 게 제 바램입니다.

 

‘바라다’와 ‘바래다’. 이 두 개의 동사를 사람들이 많이 틀리기 쉽고, 혼동해서 사용한다. 몇 년 전에 ‘무한도전’에 의해서 유행했던 ‘~을 하길 바래’도 알고 보면 어법상 잘못된 말이다. ‘바라다’는 생각하는 대로 어떤 일이나 상태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생각하는 것을 뜻하며, ‘바래다’는 햇볕이나 습기에 의해 색이 변하는 것을 의미한다. 명사로 쓰면 ‘바라다’는 ‘바람’, ‘바래다’는 ‘바램’으로 쓰는 것이 맞다. 그래서 5번 문장에 '바램입니다'를 '바람입니다'로 고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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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4-09-13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는 밑줄 긋고 읽었는데 저도 책을 너무 아끼는 마음에 밑줄을 긋지 않고 읽고 있습니다. 가끔 눈에 띄는 오타는 휴대폰으로 찍어 두었다가 리뷰 작성할 때 같이 쓰곤 했지요. 요즘은 그것도 귀찮아서 잘 안하고 있습니다.

cyrus 2014-09-13 21:00   좋아요 0 | URL
최근에 알라딘 전자북 어플을 설치해서 스마트폰으로 전자북을 읽어봤는데요, 밑줄긋기와 메모 기능이 있어서 좋았어요. 원래 전자북을 선호하는 성격이 아니었는데 요즘 전자북의 장점에 눈을 뜨고 있어요.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 금요일에 알라딘 중고서점에 갔다. 그냥 책이 사고 싶은 마음에 간 것이 아니었다. 정말 사고 싶은 책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돼서 가게 되었다. 그 책이 바로 레이먼드 카버의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문학동네, 2005년, 줄여서 ‘사우것’)이었다. 카버의 또 다른 작품집 『제발 조용히 좀 해요』(문학동네, 2004년)와 최근 개정판이 나온 『대성당』(문학동네, 2014년)은 예전에 구입했다. 이제 『사우것』만 사면 국내에 번역된 카버의 모든 작품집을 소장하게 된다. 운이 좋았다. 서점에 도착했을 때 아무도 이 책을 사지 않았다.

 

즐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와 서점에서 산 책들을 책장에 꽂았다. 참으로 못된 버릇이다. 책을 사자마자 바로 읽는 성격은 내 서재에 나간 지 오래됐다. 내가 그동안 사서 읽은 책들이 책장에 꽂혀 있는 모습만 봐도 기분이 좋은 건 사실이다. 내 방은 그렇게 넓은 편은 아니지만 사방에 책상, 서 너 개의 책장을 세울 수 정도로 적당하다. 내가 두 다리를 뻗어 수면을 취할 수 있는 공간도 있다. 방 내부의 공기를 환기시킬 수 있는 창문 바로 앞에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는 1인용 소파가 있다. 이 정도면 책장을 둘러싸인 좁은 방도 꽤 만족스러운 서재가 된다. 책상에서 한 발짝만 움직여도 내가 원하는 책들이 한 눈에 발견할 수 있다.

 

실제로 내 방을 보는 외부 사람이라면 넓지 않은 공간이라고 생각하지만, 지금까지 이런 서재를 갖춘 방이 딸린 집을 12년째 살고 있으면서 단 한 번도 내 방이 좁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요 근래 내 방에 책이 점점 많아지면서 넓은 서재의 중요성을 느끼고 시작했다.

 

앞으로 사야 할 책이 더 많아지게 될 것은 안 봐도 뻔하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책을 꽂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어린 시절에 읽었던 아동도서나 동화 전집, 대학생 때 산 전공도서 그리고 다시 읽을 기회가 없는, 신선도가 떨어지는 책을 종이박스에 담아 옷장 겸 잡동사니를 보관한 창고가 된 내 동생의 방에 보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리가 없는 건 마찬가지. 이젠 책을 꽂는다기보다는 책을 쌓는다는 표현을 해야 한다. 책이 다 꽂혀 있는 책장 받침에 책을 누워 보관할 수 있는 공간을 활용하고 있다. 그런데 튼튼한 목재 책장이라면 상관은 없지만, 만든 지 연도가 오래된 목재 책장이라면 책의 무게에 감당하지 못한다.

 

 

 

 

 

 

 

사진 속 여닫이가 있는 책장은 부모님이 신혼 시절에 구입한 것이다. 27년째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요즘에 나오는 목재 책장에 비교하면 튼튼함이 떨어진다. 책장 받침을 지탱하고 있는 나사 역시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라서 오랜 세월로 인해 썩게 되고, 책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다. 두 달 전에 책장을 정리하는 도중에 책장 받침이 거의 무너지기 직전인 상태를 발견했다. 책 한 권을 꽂으면 ‘삐걱’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책장 받침이 한 쪽으로 기울어진다. 책장 제일 윗칸은 받침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험이 있다. 그래서 책 꽂을 공간이 저렇게 충분한데도 어쩔 수 없이 책을 꽂지 못한 채 그냥 저 상태로 놔두고 있다.

 

 

 

 

 

 

 

 

 

 

 

 

 

 

 

 

 

오카자키 다케시『장서의 괴로움』(정은문고, 2014년)에 자신의 책으로 가득한 목조건물이 무너질까봐 괴로워한다. 일부 독자는 오카자키의 괴로움에 쉽게 공감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나라가 일본보다 목조건물이 많은 것도 아닌데다 지진의 위험성이 아직은 덜한 편이다. 오카자키 같은 장서가의 괴로움은 일본이라면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오래된 목재 책장을 가지고 있는 나는 오자카지의 괴로움을 어느 정도 공감이 되었다. 다음에 책장을 새로 사게 되면 나사가 없는 것을 살 생각이다. 

 

사실 이것보다 더 괴로운 것은 따로 있다. 그것은 바로 ‘책 건망증’이다. 레이먼드 카버의 『사우것』을 구입하던 날이었다. 추석 연휴동안 집에서 쉬게 될 동생이 읽을 책이 있는지 내 방을 찬찬히 둘러봤다. 그러자 책장에 꽂힌 『사우것』을 발견했다. 동생은 그 책을 보자마자 손을 내밀었다. 나는 동생이 그 책을 읽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동생은 책장에서『사우것』을 빼더니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오빠, 왜 이 책이 책장에 꽂혀 있어? 이거 예전에 내가 읽는다고 빌려갔잖아? 같은 책을 또 산거야?”

 

아뿔싸, 내가 같은 책을 두 권이나 사고 말았다. 그러니까 나는 이미 『사우것』을 산 적이 있는데 그 사실을 깜빡 잊고 같은 책을 사고 만 것이다. 심지어 동생이 『사우것』을 빌려 간 일도 같이 잊고 있었다. 처음에 동생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천천히 그 때의 기억을 되살려보니 한 달 전에 교보문고에서 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거짓말을 해도 얼렁뚱땅 넘어갈 수 없었다. 나의 실수를 완벽하게 증명하는 결정적인 증거도 있었다. 동생은 자신의 가방 속에 있는 또 다른 『사우것』을 꺼내 보여줬다. 두 권의 『사우것』은 책 표지만 같은 것도 아니었다. 2013년 12월 2일에 찍은 1판 10쇄였고, 교보문고에 구입한 것으로 보이는 도장자국도 남아 있다. 살면서 이런 우습고도 바보 같은 실수를 저지를 줄이야.

 

 

“요사이 찾는 책을 발견할 확률이 점차 낮아져 분명 집에 있는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오거나 서점에서 다시 사오는 일이 심심찮게 있다. 위험한 것은 다시 사오거나 빌려온 책마저 장서의 파도에 떠밀려 ‘해저 깊은 곳’에 잠겨버리는 일이다.” (오카자키 다케시, 『장서의 괴로움』중에서, 18쪽)

 

 

아직 내 서재는 오카자키만큼 2만 권이나 되는 ‘장서의 파도’에 떠밀릴 정도는 아니다. 그래도 서재에 있는 책이 그렇게 적은 권수는 아니다. 『장서의 괴로움』을 읽고 난 후부터 서재에 몇 권의 책이 있으며, 어떤 책이 있는지 엑셀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당시 대한출판문화협회에서 모범장서가 공모를 진행하고 있어서 다음에 지원하기 위해 필요한 소장 도서 목록을 미리 만들고 싶었다. 책이 꽂힌 책장 한 칸 한 칸씩 사진을 찍어 일일이 확인해가면서 엑셀에 기록했다. 도서 목록을 만들기 전까지만 해도 많아야 400권 정도로 예상했다.

 

 

 

 

 

 

그런데 예상한 것보다 권수가 많았다. 오카자키가 말했던 최상의 보유 권수인 500권을 넘었다. 지금도 목록을 작성하고 있는 중인데 800권을 넘은 상태다. 6년 전에 구입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00권 세트를 포함한다면 1000권은 거뜬히 넘었다. 엑셀에 기록된 800권의 도서는 아동용 도서를 제외한 것이다.

 

독서를 전문적으로 하는 서평가들이 소장한 책의 권수에 비하면 1000권은 아직 장서가로 명함을 내밀 정도는 아니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성인이 읽는 책을 읽기 시작한 중학생 때부터 작년에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이렇게 많이 책을 샀을 줄 꿈에도 몰랐다.

 

사실 도서 목록을 작성하면서 1000권을 샀다는 사실에 만족스럽지 않았다. 작성중인 도서 목록은 그 많은 책들 중에 제대로 읽은 책이 많지 않다는, 이 불편한 진실을 기록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13년 독서 인생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잠시 잊고 있었던 책들도 눈에 띄었다. “아, 나로 예전에 이런 책을 샀구나!” 갑자기 몇 년 전에 다 읽었거나, 혹은 읽다 말거나 그리고 아예 종이 한 장도 펼치지 않았을 책들이 읽고 싶어졌다. 나는 그동안 세월의 파도에 떠밀려 망각의 심해 깊은 곳에 잠겨버리고 있는 책들을 방치하고 있었다. 오늘도 도서 목록을 작성하면서 잠겨 버린 채 내 기억 속에 사라질 뻔한 책들을 한 권씩 한 권씩 건져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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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4-09-11 0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꼼꼼한 글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뿌리칠 수 없는 삶의 동반자, 책이겠지요? 고은 시인께서는 책이 자신을 못 살게 군다는 표현을 쓰시더군요...

cyrus 2014-09-12 14:59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흔적님. 책에 대한 표현에 동의합니다. 책은 우리의 삶을 이롭게 하면서 한편으로 괴롭게 만드는, 두 얼굴의 아내 같기도 합니다.

blanca 2014-09-11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 같은 책 읽으셨군요, 반가워요 ! 저도 제가 가지고 있는 책을 언젠가는 엑셀 작업해야 한다고 생각만 하고 있답니다.^^;; 저는 개방형 책장이라 책에 먼지가 너무 많이 쌓이더라고요. 햇빛으로 변색도 되고요. 다음에는 님처럼 덮개가 있는 책장을 사야 하나 이러고 있어요. 아, 저도 책욕심 요새 줄이느라 의도적으로 있는 책 다시 읽자, 이러고 있는데 솔직히 읽었던 책을 또다시 읽는 게 썩 유쾌하지는 않아요.

cyrus 2014-09-12 15:05   좋아요 0 | URL
이 책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이 상당히 좋고 저 이외에도 공감하는 분들이 있다는 사실에 개인적으로 흡족하게 생각해요. 덮개형 책장을 오랫동안 사용해본 저로선 느겼던 것이지만, 약간의 단점도 있답니다. 일단 덮개를 열면 소리가 나는데다가 유리라서 아이들이 직접 덮개를 열고 닫는다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냥 책등이 다 보이는 개방형 책장이 나은 것 같아요. 저도 예전에 읽은 책을 다시 읽으라면 절대로 그렇게 못할 것 같아요. 하루 자고 나면 읽고 싶은 신간도서들이 많이 나오는데 전에 산 책들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죠... ^^;;

korin 2014-09-18 0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수집광 혹은 애서광으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책을 통해 자신만의 만족하는 독서가로 남을 것인지 늘 고민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매년 책을 읽고 이를 정리하기 위해 꺼내놓은 책들에 책상이 점령될 때마다 책속에 길을 잃다는 말을 실감합니다. 이른 아침에 좋은 글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