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속 여행 쥘 베른 걸작선 (쥘 베른 컬렉션) 1
쥘 베른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07년 2월
평점 :
품절


 

 

 

“가자, 지구의 중심으로!”

(『지구 속 여행』 중에서, 157쪽)

 

 

 

 

호기심이 많은 열한 살의 소년 쥘은 동갑내기 사촌누이를 무척 좋아했다. 고운 빛깔이 나는 산호 목걸이를 누이에게 선물로 준다면 누이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산호 목걸이는 무척 귀하고 값비싼 물건이었다. 쥘은 산호 목걸이를 얻을 수 있는 인도에 가기로 했다. 마침 마을 주변에 있는 항구에 가면 인도로 가는 원양선을 볼 수 있었다. 쥘은 그 배를 타서 인도로 갈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동양의 세계로 향하는 쥘의 모험은 실패하고 말았다. 아버지에게 발각되고 만 것이다. 아버지로부터 호되게 꾸지람을 들은 쥘은 깊은 좌절감에 빠졌다. 이때부터 쥘은 아버지에게 “앞으로는 상상 속에서만 여행하겠다”고 약속한다. 어른이 된 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률을 공부하게 되고, 평범한 법률가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쥘은 어린 시절에 활짝 펴지 못한 모험의 동경을 잊지 않았다. 무한한 상상 속에서 미지의 세계를 마음껏 탐험했다. 상상의 여행 속에서 그려지는 신비로운 장면 그리고 여행의 생생한 감동을 잊지 않으려고 쥘은 펜을 잡았다. 그가 처음으로 여행을 한 곳은 아프리카. 당시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을 얻고 있던 열기구를 탔다. 쥘 베른의 ‘경이의 여행’(Voyages extraordinaires) 시리즈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만약에 쥘 베른이 인도로 떠날 수 있었다면, 그의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전 세계를 떠돌아다니는 항해사(Navigator)가 되었을 것이다. 베른은 상상의 여행을 하는 항해사가 되었고, 그가 쓴 ‘경이의 여행’ 시리즈는 독자들에게 ‘꿈속에서 여행하는 법’을 알려주는 훌륭한 내비게이션(Navigation)이 되었다. 베른이 없었다면, 모험심이 가득한 소년 쥘과 같은 어린아이들이 쉽고 재미있게 꿈속에서 여행하는 기회를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쥘 베른의 ‘경이의 여행’ 시리즈는 그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를 실감 나게 소개하고 있다.

 

『지구 속 여행』(Voyage au centre de la Terre)은 ‘경이의 여행’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이다. 이 작품은 TV 드라마, 영화를 통해 약 10회 정도 영상으로 재탄생되었다. 2008년에 개봉된 ‘잃어버린 세계를 찾아서’의 원작도 『지구 속 여행』이다. 아이슬란드의 사화산 분화구를 통해 지구 중심을 여행하며 지질시대의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흥미진진한 모험담이다.

 

 

 

 

 

 

원작과 영화는 지구 속으로 여행을 한다는 점에서 줄거리는 같지만, 내용상 약간의 차이가 있다. 영화에서는 지질학자인 주인공 트레버와 그의 조카 션이 모험의 주인공이다. 오래전에 실종된 트레버의 형이 남긴 상자 속에 <지구 속 여행>이라는 고서를 발견하게 된다. 트레버는 조카인 션과 함께 암호를 해독하는데 그것은 지구 속 세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였다. 암호에 적힌 대로 트레버와 션은 사화산 분화구가 있는 아이슬란드로 향한다. 아이슬란드에 도착한 트레버와 션은 지구 속 여행에 합류하게 되는 산악가이드 한나를 만나게 된다.

 

영화와 마찬가지로 원작에서도 지질학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광물학 교수 오토 리덴브로크와 그의 조카 악셀이 등장한다. 리덴브로크 교수는 희귀본 수집광이다. 아이슬란드의 고대 학자 스노리 스투를루손이 쓴 책을 읽다가 암호가 적힌 양피지를 발견한다. 양피지를 쓴 사람은 아이슬란드의 연금술사이자 학자인 아르네 사크누셈. 아이슬란드의 연금술사는 자신이 지구 속으로 여행한 사실을 기묘한 암호 형태로 남긴 것이다. 리덴브로크 일행과 함께 지구 속 여행을 함께하는 안내인은 한스 비엘케라는 남성이다. 과묵한 성격이지만, 무모하고도 위험한 여행에 끝까지 동행한다.

 

 

 

 

 

 

 

리덴브로크는 지구 속 세상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무척 궁금해 한다. 그 곳을 진짜로 발견하면 과학의 역사에 새롭게 한 획을 긋는 동시에 기존의 학설을 한 번에 뒤집을 수 있는 획기적인 발견이 된다. 하지만, 그 당시나 지금이나 지구 속을 여행한다는 것은 현실에서 불가능한 일이다. 지구 속으로 들어갈수록 마그마로 인해 지열의 온도가 높아진다. 지열은 인간과 기계도 견디기 힘들 정도로 뜨겁다. 그렇지만, 베른은 지구 속에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상상력을 펼친다. 베른이 활동했던 당시 유럽은 ‘지구공동설’(地球空洞說)이 학자들의 관심 대상이었다. 지구 속은 텅 비어 있는 공간이며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입구가 남극과 북극에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가설이 되었지만, ‘지구공동설’도 한 때 주류 과학의 화제였다. ‘핼리 혜성’의 등장을 예측했던 영국의 천문학자 에드먼드 헬리가 지구 속 구조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고, 수학자 오일러는 지구 중심에 1000km 직경의 별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지구공동설은 과학이 발달한 지금까지도 여전히 새롭게 변형되어 대중 앞에 나타난다. 20세기 들어 지구공동설 학자 레이먼드 버나드 박사는 1969년에 쓴 『The Hollow Earth』를 통해 UFO가 지구 안에서 나오며, 고리 성운이 지구 속이 비어있을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아직 정확한 근거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작년에 전 중앙정보국(CIA) 직원 에드워드 스노든을 사칭한 트위터  UFO에 대한 극비 문서를 폭로하며 지구공동설을 주장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만약에 베른의 소설 속 내용처럼 지구 속에 또 다른 지구가 있다면 과학적으로 가능할까. 리덴브로크 일행은 지중해와 비슷한 넓은 바다와 구름이 떠 있는 대기 그리고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고대 동식물을 보게 된다. 그렇지만, ‘지구 속의 또 다른 지구’는 과학적으로 분석해보면 사람도, 동물도 살 수 없는 불가능한 상상의 세계에 불과하다. 또, 리덴브로크 일행은 절대로 지구의 중심으로 향하는 길을 걸을 수 없다. 뉴턴의 구각정리에 의하면 지구 속 공간에 작용되는 중력의 합이 0이기 때문에 그 곳에 들어간 인간은 무중력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중력이 없는 세계는 곧 인간과 동식물마저 살 수 없는 죽음의 세계다. 

 

그렇다고 베른이 과학적 이론에 문외한 통속소설 작가 수준은 아니다. 지금도 베른의 작품이 널리 읽혀지고, 영화나 드라마도 재탄생되는 이유는 근대 과학적 지식에 모험과 판타지를 결합한 소설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베른의 ‘경이의 여행’ 시리즈는 독자의 이목을 끌 수 있는 흥미로운 관심사에 자신만의 상상력을 첨가하는 스토리텔링이 만난 환상적인 작품이다. 독자는 베른이 창조한 세계가 허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진짜 같은 허구’의 세계에 매료된다. 소설 속 세상을 마치 실존의 세상으로 믿는 ‘베르니안’(그의 넘치는 상상력에 심취되어 소설 속 세상을 마치 실존의 세상으로 믿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단어)이라 불리는 독자들까지 생겨날 정도이다.

 

『지구 속 여행』에 당대의 과학자 이름이 실명 그대로 나온다. 그리고 아이슬란드의 지리적 환경과 화산 분화구 주변의 풍경을 장황하게 느껴질 정도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야기에 사실성을 부여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기상천외한 지구 속 모험이 얼른 시작되기를 바라는 독자라면 이 내용이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베른의 뛰어난 상상력을 확인할 수 있는 인상적인 장면이기 때문에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으로 읽을 수 없을 것이다.

 

 

 

 

 

베른의 『지구 속 여행』을 읽었으면,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제3인류』(전 4권 / 열린책들, 2013~2014년)를 읽어보기를 권한다. 『제3인류』를 먼저 읽은 독자라면 이 작품이 베른의 『지구 속 여행』에게 큰 빚을 지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SF 소설과 과학소설의 창시자로 인정받고, 지금도 새롭게 변용되는 쥘 베른의 영향력은 경이적이다.

 

 


P.S. 다음 ‘경이의 여행’ 목적지는 달이다. 거대한 포탄을 타고 달에 가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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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특정 작가의 전작을 읽기 시작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있다. 그것은 작품이 나온 연도를 무조건 확인한다. 그리고 작품 출판 연도순으로 독서를 한다. 좀 특이한 방식이다. 책 많이 있는 분들 중에서도 이런 식으로 독서법을 한 번이라도 해본 적이 있는지 궁금하다. 아마도 많이 없을 것 같다. 사실 작품 하나하나 출판 연도순을 확인하는 것이 무척 까다롭고, 번거로운 작업이다. 책 뒤에 있는 작품 연보와 간단하면서도 의외로 가내수공업에 가까운 구글링으로 정리한다. 그런데 책에 나온 작품 연보만 믿어서는 안 된다. 가끔 인터넷에서 나오는 작품 연보와 살짝 다르기 때문이다. 귀찮지만, 둘 다 꼼꼼하게 확인한다. 굳이 이런 작업을 하는 이유는 작가의 작품들을 발표 연도별로 정리하면 작품세계의 변천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기별로 작품세계를 구분할 수 있고, 전작을 다 읽게 되면 한 번 전체 작품에 대해 간략하게 조망할 수 있을 것이다.

 

몇 달 전부터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소설들을 읽고 있는데 시간 날 때마다 조금씩 발표 연도순으로 정리해봤다. 참고한 도서는 국내에서 유일한 포의 단편 전집으로 알려진 『우울과 몽상』(하늘연못, 2002년)이다. 영문 인터넷 웹사이트에서 확인한 내용이라서 연도가 잘못 표기될 수도 있다. 앞으로도 수정하거나 추가해야 될 내용이 있으면 댓글을 통해 알려도 좋다. 포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나름 도움이 되는 참고자료가 되었으면 좋겠다.

 

 

(※ 글 쓰는 공간이 초과되어 나머지 작품 목록은 '에드거 앨런 포 (단편 #2)'라는 제목의 페이퍼로 따로 작성했다)

 

 

 

 

 

작품명

 

원어명 (발표 연도)

메첸거슈타인

Metzengerstein (1832년)

봉봉

Bon-Bon

(1832년, Originally "The Bargain Lost")

병 속에서 발견된 수기

MS. Found in a Bottle (1833년)

밀회의 약속

The Assignation (1834년)

베레니스

Berenice (1835년)

모렐라

Morella (1835년)

남 추어올리기

Lionizing (1835년)

한스 팔의 환상 여행

The Unparalleled Adventure of One Hans Pfaall (1835년)

페스트 대왕

King Pest (1835년)

그림자 : 한 편의 동화

Shadow - A Parable (1835년)

침묵 : 한 편의 우화

Silence - A Fable (1838년)

리지아

Ligeia (1838년)

블랙우드식 기사 작성법

How to Write a Blackwood Article (1838년)

곤경

A Predicament (1838년)

종루 속의 악마

The Devil in the Belfry (1839년)

어셔 가의 몰락

The Fall of the House of Usher

(1839년)

윌리엄 윌슨

William Wilson (1839년)

에이러스와 차미언의 대화

The Conversation of Eiros and Charmion (1839년)

비즈니스맨

The Business Man (1840년)

군중 속의 남자

The Man of the Crowd (1840년)

모르그 가의 살인

The Murders in the Rue Morgue (1841년)

소용돌이 속으로 떨어지다

A Descent into the Maelström (1841년)

요정의 섬

The Island of the Fay (1841년)

모노스와 우나의 대화

The Colloquy of Monos and Una

(1841년)

악마에게 머리를 걸지 마라

Never Bet the Devil Your Head

(1841년)

엘레오노라

Eleonora (1841년)

일주일에 세 번 있는 일요일

Three Sundays in a Week (1841년)

타원형 초상화

The Oval Portrait (1842년)

적사병 가면

The Masque of the Red Death (1842년)

마리 로제 미스터리

The Mystery of Marie Rogêt (1842년)

저승과 진자

The Pit and the Pendulum

(1842~1843년)

고자질하는 심장

The Tell-Tale Heart (1843년)

황금 곤충

The Gold-Bug (184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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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링크:  '에드거 앨런 포 작품목록 (단편 #1)'

 

 

 

 

검은 고양이

The Black Cat (1843년)

사기술

Diddling (1843년)

안경

The Spectacles (1844년)

누더기 산 이야기

A Tale of the Ragged Mountains

(1844년)

열기구 보고서

The ballon Hoax (1844년)

때 이른 매장

The Premature Burial (1844년)

최면의 계시

Mesmeric Revelation (1844년)

직사각형 상자

The Oblong Box (1844년)

범인은 너다

Thou Art the Man (1844년)

싱검 밥 귀하의 문학 인생

The Literary Life of Thingum Bob, Esq. (1844년)

도둑맞은 편지

The Purloined Letter (1844~1845년)

천일야화의 천두 번째 이야기

The Thousand-and-Second Tale of Scheherazade (1845년)

미라와의 대담

Some Words with a Mummy (1845년)

말의 힘

The Power of Words (1845년)

심술궂은 어린 악마

The Imp of the Perverse (1845년)

타르 박사와 페더 교수의 광인 치료법

The System of Doctor Tarr and Professor Fether (1845년)

M. 발드마르 사건의 진실

The Facts in the Case of M. Valdemar (1845년)

죽음의 머리 : 스핑크스

The Sphinx (1846년)

아몬틸라도 술통

The Cask of Amontillado (1846년)

아른하임의 영토

The Domain of Arnheim (1847년)

열기구 종달새 호에 탑승하여

2848년 4월 1일

Mellonta Tauta (1849년)

절름발이 개구리

Hop-Frog (1849년)

폰 켐펠렌과 그의 발견

Von Kempelen and His Discovery (1849년)

X투성이의 글

X-ing a Paragrab (1849년)

랜더의 별장

The Landor's Cottage (1849년,

‘아른하임의 영토’ 후속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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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이 예술품도 세월의 무계를 견뎌내지 못한다. 사실 우리가 지금까지 수천 년 전에 나온 예술품을 볼 수 있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던 이유는 복원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복원은 낡고 상처 입은 예술품에 새 숨결을 불어넣는 작업이다. 그리고 시간을 거슬러 역사를 되살리는 일이기도 하다.

 

최근에 바티칸이 미켈란젤로가 그린 시스티나 성당 벽화와 천장화의 복원을 위해 관람객 수를 제한하기로 결정했다. 시스티나 성당은 다른 유명 성당들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천장과 벽 전체를 덮은 그림으로 인해 매년 600만 명 이상의 관람객이 줄을 잇고 있다. 그러나 수많은 관람객들이 한꺼번에 내뿜는 이산화탄소와 열기가 그림을 훼손시킬 우려가 있다. 그림의 복원 작업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80년부터 이미 복원 작업을 시작했으며 제작 당시의 화려한 색채와 원형을 어느 정도 되찾았다. 그렇지만 복원 작업을 한다는 것은 쉬운 결정은 아니다. 복원 작업을 시작한 지 19년 만에 새롭게 단장한 벽화와 천장화가 대중에 공개되었을 때 당시 일부 전문가들은 냉담한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복원 작업을 하는데 필요한 약품을 과도하게 사용하는 바람에 명암이 희미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복원 약품이 묻은 벽화 표면이 관람객들의 열기와 습기에 더 취약하다는 문제점이 드러났다. 바티칸과 복원 전문가들은 원작의 보존 상태가 최대한 유지될수록 대대적인 복원 작업을 실시했다. 어제 개선 작업이 끝낸 벽화가 공개되었는데 새로운 온도조절기와 LED 조명장치까지 설치하여 한층 선명해진 그림의 색감을 볼 수 있다. 

 

 

 

 

 

미켈란젤로  「천지 창조」 (1508~1512년) 

 

 

예전에 미술 교과서나 그림책에 나오는 「천지 창조」(또는 ‘아담의 창조’) 사진을 보면 항상 갈라진 균열 자국이 신경 쓰였다. 눈에 확연하게 보이는 선명한 균열 자국은 하나님이 팔을 펼쳐 손가락 끝을 대며 아담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이 극적인 장면의 감동마저도 깨뜨린다. 성당이 지어진 지 오래된 탓에 곳곳에 금이 가 있다. 그림은 오래 보존될 수 있지만, 그림의 캔버스나 다름없는 집(성당)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이다. 성당 벽화와 천장화는 프레스코(Fresco) 기법으로 그려졌다. 회반죽을 벽에 바르고 미처 마르지 않아 축축하고 ‘신선(Fresco)'할 때, 물에 녹인 안료로 그림을 그린다. 유화가 나타나기 전까지 프레스코화는 수천 년 동안 화가들에게 애용되었다. 보존성이 좋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작의 형태가 그대로 유지될 수 있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바티칸이 화약 약품에 의지하는 복원 작업보다는 거대한 벽화와 천장화의 캔버스 역할을 하고 있는 성당 건물에 좀 더 신경 썼으면 하는 바람이다. 벽이나 천장에 갈라진 작은 균열도 무시할 수 없다. 건물이 견고하지 못하면 벽화와 천장화가 훼손될 수 있고, 관람객들의 안전을 위협한다.

 

한편으로는 벽화와 천장화에 생긴 갈라진 균열 자국이 500년이라는 시간을 버텨온 위대한 걸작에 어울릴 수도 있다. 사실 복원 작업 이후로 예전에 비해 눈에 보이던 균열 자국이 많이 사라졌음을 볼 수 있는데 옛 느낌도 같이 사라졌다.

 

 

 

 

 

사진출처: 전자신문

 

 

최근에 개장한 지 얼마 안 된 제2롯데월드 건물 바닥에 생긴 균열이 SNS에 공개됨으로써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건물이 들어서기 전부터 지반 침하와 누수 논란이 있었기에 또다시 안전성 문제가 불거졌다. 그러자 롯데건설 측은 금이 간 것은 서울의 옛 느낌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금이 간 것처럼 연출한 디자인이라고 해명했다. 그리고 절대로 안전에 문제가 없다고 강조했다. 일부러 균열을 만들어서 멋지게 보이려는 롯데건설의 디자인 방식. 나는 디자인에 문외한이지만, 누가 봐도 절대로 조각조각 갈라지고 깨진 틈을 자연스럽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 웃기고 놀라운 사실은 서울시의 반응이다. 롯데건설 측의 주장에 수긍한 것이다. 회사 측의 해명대로 바닥에 투명 코팅을 했다면 균열에 명함 1장이 꽂힐 수가 없다.

 

롯데건설과 서울시는 제2롯데월드를 서울을 상징하는 랜드마크로 만들고 싶어 한다. 그렇지만, 건물에 생긴 균열이 안전과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철저한 현장 정밀 조사도 없이 일단 대중의 논란을 잠재우려는 태도는 안전 문제에 민감한 시류를 거스르는 것과 같다. 바닥 균열도 하나의 연출 방식으로 생각하는 롯데건설의 ‘디자인 창조’가 건물 전체를 무너뜨리는 치명적 원인이 될 수 있다. 밖으로 드러나는 겉모습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겉모습을 오랫동안 유지되게 하는 내부의 힘이 더 중요하다. 「천지 창조」도 마찬가지다. 「천지 창조」가 더 오랫동안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하려면 대성당 건물이 튼튼해야 한다. 작은 균열로 공든 ‘창조’가 무너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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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여자는 위험하다 - 그리고 강하다
슈테판 볼만 지음, 김세나 옮김 / 이봄 / 2014년 8월
평점 :
절판


 

 

2001년에 하버드대학의 경제잡지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가 ‘Mommy track’이란 이론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이것은 여성 직원을 채용할 경우 비용이 많이 들어 회사로서는 손해이므로 여성 직장인은 남성과 비교하면 이류에 속한다는 내용이다. 여성 직원은 임신 분만의 기간뿐 아니라 아기가 두 살쯤 되기까지는 양육의 일차적인 역할을 맡기 때문에 일에 능률이 나지 않아 결국 회사로서는 월급을 주는 만큼 생산력을 거둘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엄마로서의 역할’ 때문에 직장인으로서는 이류를 면치 못한다는 이론이다.

 

잡지에 이 이론이 발표되자 미국 여성들은 크게 반발하고 나섰다. 워킹 맘들은 일과 가정의 양립을 위해서는 어느 한쪽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이 현실을 헤쳐 나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쉽고 하찮은 일만 맡는다. Mommy track은 직장에서 오직 일과 성공만을 위해 남성이 추구하는 ‘Fast track’과 비교돼 생겨난 말이다. 하지만 이런 결정은 선택이 아닌 강요라는 것이 이들 워킹 맘들의 주장이다.

 

우리나라 여성인력 활용의 문제점을 논의할 때 가장 근본적이면서도 중요한 것이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다. 즉 ‘여성은 약하다’, ‘여성은 보조적인 일에 어울린다’, ‘여성은 치열하지 못하다’ 등 성별 역할에 대한 편견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고 그만큼 고치기도 힘들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사회적 역할이 크게 확대되고 있지만, 남성 중심적인 문화가 견고한 분야에선 여전히 여성의 사회 참여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슈테판 볼만의 『생각하는 여자는 위험하다 그리고 강하다』에 나오는 22명의 여성은 딸로, 아내로, 어머니로만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인간’이 되기를 거부했다. 한 인간으로서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또 그것이 결국 우리 의식 전반을 지배하는 가부장적 문화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한마디로 남성 지배사회 속에서 그 시대의 인습과 통념에 거침없이 맞섰던 ‘생각하는 여자들’의 당당한 행적을 담았다.

 

 

 

 

 

“인터뷰란 싸움이다. 남녀의 육체적 관계와 같은 것이다. 상대를 발가벗기고 자신도 발가벗은 채 서로가 숨기는 것 없이 인격 전부를 걸고 맞서는 싸움이어야 한다.” (오리아나 팔라치, 27쪽 / 사진출처: 이봄 출판사 공식 블로그) 

 

 

오리아나 팔라치는 세계적인 권력자들과의 도전적인 인터뷰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여기자다. 그녀는 인터뷰 도중 상대방에게 대들기도 하고 난폭한 행위를 유발하기도 한다. 아라파트, 호메이니, 헨리 키신저, 덩샤오핑 등 20세기 권력자들의 속내를 공격적인 인터뷰를 통해 끄집어냈던 그녀는 베트남전쟁과 중동전쟁에서도 활약한 종군기자였다.

 

그녀는 인터뷰를 섹스에 비유했다. “내가 벗지 않는 한 상대방도 벗길 수 없다”는 것이다. 뜨겁고 치열한(?) 용어인 섹스를 인터뷰에 비유했다는 것은 단지 듣기 좋은 수사가 아니다. 그만큼 팔라치가 인터뷰 상대에 몰입했다는 뜻이다. 만나는 상대마다 섹스를 하듯, 상대를 완전하게 이해하려고 하는 집착에 가까운 열망, 상대를 알려면 나부터 벗어던져야 한다는 전략적인, 그러나 전적으로 타당한 생각을 드러낸 말이다.

 

이처럼 특정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생각하는 여자들’은 위험을 감수한다. 아웅 산 수 치는 15년 간 가택연금을 당했고 사건을 취재하는 기자 본연의 임무에 최선을 다했던 안나 폴릿콥스카야는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여성 최초로 인도 총리에 오른 인디라 간디는 4번째 총리직 연임에 성공할 정도로 승승장구했지만, 1988년 자신의 경호원에게 암살됐다.

 

 

 

 

 

“나는 언제나 내 생각에 충실히 따를 뿐이다. 나는 절대로 사람들이 원하는 내가 되지 않을 것이다.” (루 살로메, 164쪽)

 

 

루 살로메는 니체, 릴케, 프로이트 같은 지성인을 잠 못 이루게 할 정도로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여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호사가들로부터 유럽 제일의 팜 파탈로 알려졌고, 자유분방한 성격에 자의식이 강한 탓에 남성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 책은 위대한 여성들을 드높이는 찬양으로 그치지 않는다. 특히 여성 정치인들과 관련해서는 약자들의 고통에 침묵하거나 자신과 가족의 안위만을 우위에 두는 행동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고 갈파한 보부아르의 말처럼 외부에서 비롯된 편견을 깨고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킨 생각하는 여자들은 일찍이 자신만의 사상과 행동을 만들었다. 사막과 다름없는 환경에서 앞선 시대의식, 고귀한 인간 정신만큼은 조금도 시들지 않고 황무지에 끊임없이 길을 만들어 여성의 정당한 권리 확립이라는 고귀한 꽃을 피웠다. 그것은 차별을 극복하고 동등한 인간으로 살고자 했던 강인한 정신력을 지닌 용감한 여성들이 길 밖에서 흘린 피와 땀의 결과였다.

 

여성도 인간임을 자각하고 평등과 자유와 정의가 넘치는 사회에 살기 위해 끊임없이 길 밖에서 길 안으로의 투쟁을 이어왔던 그녀들에 의해 조금씩 길이 열렸다. 아직도 여성과 남성이 나란히 달리기엔 터무니없이 어긋나 있거나 한쪽이 너무 낮은 길, 하지만 가둘 수 없는 바람처럼 자유를 위해 안온함을 버린 그녀들의 투쟁으로 길은 비로소 열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Woman thinking track’이다.

 

22명의 생각하는 여자들을 만나는 동안, 아직도 깨뜨리지 못한 인습의 벽에 갇혀 자신의 삶을 포기한 여성 독자가 있다면 내면의 열정으로 새롭게 자기 앞의 생을 개척하려는 의지를 불태우기를 바란다. 생각하는 여자는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다.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여성들이여, 바람처럼 자유로운 영혼의 항해를 꿈꾸는가? 책 속의 여성들이 만든 길 위에 서 보라. ‘Woman thinking track’을 따라가라. 영화 <닥터 지바고>에 나오는 대사처럼 ‘생각하는 여자가 되는 것은 위대한 모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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