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귄클래식 6
프란츠 카프카 지음, 홍성광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1001-302] 성

 

 

 

 

‘내가 아무런 목적도 없이 그냥 어쩌다 이곳에 서 있는 거라면 약간 절망적인 경우가 되겠지.’ 문득 이런 생각이 K에게 떠올랐다. (프란츠 카프카 『성』, 26쪽)

 

 

 

카프카가 구축한 ‘성’의 세계는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 근거를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무력한 인간들을 지배하고 고립과 단절, 절망이 퍼져 있다. 주인공인 K는 정부의 측량기사로 일하게 되어 성 아랫마을에 도착했다. 그러나 성에 들어가는 것도, 마을에 머무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 곤경에 빠진다. 이 수수께끼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던 K는 결국 어떤 단서도 찾지 못한다. 환상적인 성의 풍경 이면에는 이 같은 악몽이 숨어 있었던 것일까?

 

이처럼 상징으로 가득한 작품을 한 가지 주제로 이해하는 것은 위험스럽지만, K의 상황이 당시 사회의 심각한 관료주의와 그 폐해를 풍자하고 있다는 해석도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다. 요행히 성에 들어간 K가 우연히 민원서류들이 무너질 정도로 높이 쌓인 채 방치되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그야말로 한 인간의 생사가 달린 절실한 문제들조차 서류철 속에 사장되고 있는 끔찍한 광경은 우리를 놀라게 하고 좌절시킨다.

 

작품에서 주인공이 단지 K라고만 불린다. 그것은 K가 맞서는 관료조직 속에서 그가 어떤 의미 있는 존재가 아닌 하나의 의미 없는 단순한 기호 K로서 존재할 뿐이다. K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성에서는 절박한 개인의 사정은 행정 처리에 있어 고려의 요소가 되지 않았다.

 

이것이 비단 작가가 경험한 현실만은 아니라는 것이 '성'의 핵심 주제일 것이다. 근대국가에서 공무를 수행하는 관료는 존재할 수밖에 없고, 법과 절차의 이름으로 진행되는 모든 일에 서류가 필요한 것도 어쩔 수 없다. 관료제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K의 운명은 모든 시민의 운명이 될 수 있다는 데 그 끔찍함이 있다.

 

관료제는 대단히 합리적이고 체계적이지만, 그 조직 속의 각 개인은 거대조직 내에서 급격히 무의미해지고, 단순히 비인격적인 기계의 톱니바퀴로 전락하게 된다. 막스 베버는 개인의 삶이 규제와 관리적 억압이라는 철창 속에서 이루어지게 된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그러한 관료조직 속에서 인간 삶의 무의미함을 잘 보여주는 가장 위대한 작가가 바로 카프카다. 베버가 당시 관료제의 모습을 이론적으로 고찰했다면 카프카는 관료제의 모습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했다.

 

카프카의 작품은 그 시대 점증하는 관료화에 대한 불안을 극적으로 표현했다고 평가받고 있지만, 이것으로 다 해석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은 압축적이고 따라서 폭넓게 해석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미로와 같다. 카프카 작품의 주인공들은 미로와 같은 세계를 헤맨다. 『소송』의 주인공 요제프 K는 자신의 서른 살 생일 아침 돌연 죄명도 모른 채 낯모르는 사나이들에게 체포되어 무언지도 모르는 소송 때문에 1년 동안 동분서주 고민하다가 서른한 번째 생일 전날 밤에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느닷없는 사건 속에 던져져 당황하고, 자신의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상황 속을 맴돌다가 영문도 모르고 사라져 간다. 그들에게는 탈출구가 없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카프카의 소설 자체도 뭐가 뭔지 제대로 모르겠고, 이해를 돕기 위해 읽어본 해설서도 알듯 모를 듯하다. 카프카의 장편소설, 특히 ‘고독 3부작’(『소송』, 『성』, 『소송』)을 도전하려면 따분함을 참고 끝까지 읽어야 한다. 그러나 한 가지 얻은 것은 있다.카프카는 ‘절망과 불안의 기운이 감도는 미로를 만든 고독의 작가’ 라는 점이다.

 

독자도 K처럼 카프카가 만든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무의미한 미로의 세계에 길을 잃어버리기 쉽다. 심지어 ‘고독의 미로’를 만든 카프카는 테세우스가 크레타의 미궁을 탈출할 수 있도록 몸에다 실을 매준 아리아드네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미로의 설계자 다이달로스와 같은 상황이 되고 만다. 카프카는 자신이 설치한 'Kafkaeask'(카프카적인) 미로에 갇혀 버린 채 세기말의 문명으로부터 고립된 현대인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절망적인 세계를 벗어나기 위해서 탈출을 시도해보지만, 구원의 날개가 상실된 이카루스의 비극적 운명처럼 카프카는 쓸쓸히 최후를 맞이한다. 날개가 위축된 한 마리의 까마귀(Kafka)에 불과했다. (카프카는 자신과의 대화를 책으로 펴낸 구스타브 야누흐에게 날개가 잘린 까마귀라고 말했다)

 

K가 머무는 마을은 미로로 이루어진 거대한 감옥이다. 마을에서 성으로 통하는 길은 없다. 성으로 통하는 것 같은 마을을 이리저리 돌아서 언제나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올 뿐이다. 성 안에서 헤매는 K를 도와주는 자도 없다. 그가 가까이 오면 마을 사람들은 두려워하거나 철저하게 외면하거나 회피한다. 그의 측량 작업을 도와주기 위해서 찾아온 조수 또한 K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게다가 조수 예레미아스는 K의 유일한 믿음이자 한때 성의 권력자 클람의 애인이었던 프리다를 호시탐탐 노린다. 그는 K와 프리다 사이를 이간질시키는 행동도 한다. 그렇지만, 프리다 역시 아리아드네 같은 존재가 되지 못했다. K와 프리다를 연결해준 사랑이라는 이름의 실은 마을을 탈출하고 성으로 향할 수 있는 희망의 실이 될 수 없었다. 프리다는 점점 성으로 가기 위한 욕망이 강해지는 K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고, 정작 이곳을 떠나고 싶어 한다. 성의 실체를 알고 싶은 K의 외로운 투쟁이 처량하다. K는 자신이 거대한 감옥에 갇힌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을 묶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슬을 끊지 못한다.

 

“예컨대 나는 지금 집에 가죠. 그렇지만 단지 그렇게 보일 뿐이에요. 실제로는 특별히 나를 위해 설치된 감옥으로 올라가는 거예요. 이 감옥은 정말 보통 시민의 집과 유사하고 나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감옥으로 인식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견고하죠. 그 때문에 탈출 시도는 차츰 줄어들죠. 눈에 보이는 사슬이 없다면, 사슬이 끊어질 수 없는 법이에요. 따라서 감금은 아주 평범한 일상의 존재, 지나치게 안락하지는 않은 일상의 존재로 체계화되어 있어요. 모든 것이 튼튼한 재료로 만들어지고 견고한 것처럼 보이죠. 그런데 그것은 지옥으로 추락하는 승강기예요. 사람들은 승강기를 보지 못하죠. 그러나 눈을 감으면, 사람들은 승강기가 자신들 앞에 굉음을 내고 솨솨 소리를 내는 것을 듣게 되죠.” (구스타브 야누흐 『카프카와의 대화』, 문학과지성사 / 129~130쪽)

 

마을 사람들은 성을 알고 싶은 K의 욕망을 알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성은 함부로 범접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권력의 세계다. 마을과 전혀 다른 미지의 세계다. 성의 관리가 내린 명령을 거부하는 것은 권력자를 모독하는 것과 같다. 권력자를 복종하지 않는 자는 살아 있어도 공동체에서 완전히 배제되고 단절된 망자가 된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이런 생활이 평범하게 보일지 몰라도, 보이지 않는 권력자가 만든 사슬로 영원히 자유를 속박한다. 그러나 견고하게 만들어진 사슬이 끊어지더라도, 마을 사람들 그리고 K도 이곳에서 절대로 자유를 쟁취할 수 없다. 그곳은 ‘지옥으로 향하는 승강기’와 같다. 권력의 사슬을 풀고 자유를 갈망하는 자를 기다리는 것은 죽음이나 다름없는 무서운 고독과 절망이다. 지금쯤 성으로 향하는 마을 입구에 가면 이런 글귀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여기 들어오는 너희들은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단테 『신곡: 지옥 편』제3곡,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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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 포콩  「첫번째 사랑의 방」

 

 

 

그것은 일생에 세 번 또는 네 번 이상 오지 않으리라. 눈을 뜨면, 행복이 지나간 통로인양 완강히 남아 있는 한 꿈의 추억. 행위는 모두 사라지고, 남은 것은 사랑하는 이에 대한, 빛살처럼 느껴지는 인상뿐이다. 그의 곁에 있었고, 그의 존재가 줄 수 있는 모든 은혜를 다 받았다는 무한한 향수가 이어지는 아침나절을 술렁이게 한다. 천사의 그림자, 전부(全部)의 옆을 지나가는 느낌.

 

(베르나르 포콩  『사랑의 방』에서, 32쪽)

 

 

 

 

 

 

 

 

 

 

 

 

 

 

 

 

 

 

 

내 언젠가 히스나무 이 가녀린 가지를 꺾어 두었지
가을도 가버렸으나 잊지는 말아라
우리는 이 땅에서 다시 보지 못할 거야
시간의 이 향기 히스나무의 이 가녀린 가지
그래 내 너를 기다리니 잊지는 말아라

 

(아폴리네르, '고별')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만질 수도, 볼 수도, 소유할 수도 없고, 다시 오지 않는다. 그러나 잊히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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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주는 맛, 색, 향이 중요하다. 이 세 가지 조건이 좋아야 최고급 포도주로 인정받는다. 포도주를 맛보기 전에 가장 먼저 색깔을 확인한 후 코로 향을 느껴본다. 그다음에 포도주 한 모금을 입안 전체와 혀 주위를 약간 적셔 맛을 본다. 포도주가 상해 식초가 되었는지, 아니면 내가 원하는 맛인지를 확인한다. 레스토랑에서 가서 포도주를 마시다가 입맛에 맞지 않을 경우에 다른 것으로 바꾸어 달라고 요청한다.

 

프랑스의 사상가 몽테뉴를 포도주로 비교하자면, 프랑스 보르도 와인이다. 몽테뉴는 보르도 출신이다. 그가 쓴 『수상록』(Les essais)은 몽테뉴가 남긴 철저한 자기탐구의 결과물이다.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대한 몽테뉴의 사색은 그가 살았던 성 안에서 오랫동안 숙성되었다. 『수상록』은 몽테뉴가 살면서 깨닫게 된 인생의 진리들이 함축되어 있다. 우린 오래된 포도주 같은 『수상록』을 읽으면서 몽테뉴의 철학을 음미한다.

 

 

 

 

 

 

 

 

 

 

 

 

 

 

 

 

 

 

앙투안 콩파뇽의 『인생의 맛』(책세상, 2014년)은 우리가 『수상록』을 어떻게 음미해야 하는지 살짝 간을 볼 수 있는 샘플이다. 내용을 읽기 전에 먼저 겉표지를 본다. 포도주를 마시기 전에 색깔을 확인하는 것처럼. 『인생의 맛』은 어른 손바닥만 한 크기다. 무게가 가벼워서 휴대하기가 편하다. 겉표지를 확인했으면 프롤로그를 읽는다. 『수상록』에서 발췌한 문장을 중심으로 몽테뉴의 생각을 소개하는 저자의 시도가 좋다. 프롤로그는 포도주의 맛을 돋우는 향과 같다. 이제 본격적으로 책 내용을 읽기 시작한다. 입안에 포도주 한 모금을 머금으면서 천천히 맛을 보듯이 4~5쪽 정도 분량에 채워진 짧은 글을 천천히 읽어나간다. 그런데 계속 읽을수록 맛이 별로다. 톡 쏘는 식초 맛처럼 어설픈 문장과 오타가 몽테뉴 철학의 깊은 맛을 내는 데 방해한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서거한 왕 앙리 2세의 왕비이자 발루아 왕조의 마지막 왕인 앙리 3세의 어머니로서 아들을 대신해 섭정한 이 카트린 드 메디치에게 헌정된 것이다. (‘참여’, 13쪽)

 

13쪽에서 인용한 문장은 몽테뉴의 정직성과 마키아벨리의 기만과 위선을 비교하는 내용이다. 책에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앙리 3세의 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치에게 헌정되었다고 적혀 있다. 문장만 놓고 보면, 독자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카트린 드 메디치는 우르비노의 공작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1492~1519, ‘소(小) 로렌초’ 또는 ‘로렌초 2세’라고 부름)의 딸이다. ‘위대한 로렌초’(Lorenzo Il Magnifico, 로렌초 일 마니피코)로 알려진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1449~1492)의 증손녀이기도 하다.

 

 

 

 

 

 

 

 

 

 

 

 

 

 

 

 

 

 

메디치 가와 마키아벨리와의 관계는 복잡하다. 마키아벨리는 반(反) 메디치 모의 사건에 연루되어 고문을 겪고, 투옥되었다. 메디치 가의 세력이 급부상하면서 마키아벨리는 모든 공직에서 쫓겨나고 만다. 특사로 풀려 난 그는 공직에 복귀하기 위해서 자신이 집필한 『군주론』을 느무르의 공작 줄리아노 디 로렌초 데 메디치(1479~1516)에게 헌정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느무르의 공작이 사망하는 바람에 『군주론』은 우르비노의 공작에게 바치게 되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으로 메디치 가가 분열된 이탈리아를 통일할 수 있는 조건을 알려줬고, 이를 통해 잃어버린 자신의 명예를 회복될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우르비노의 공작은 『군주론』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물론 마키아벨리의 공직 복귀도 실패했다.

 

그렇다고 『군주론』의 운명이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잊힌 채 메디치 가의 도서관에서 잠들어 있던 『군주론』은 우르비노 공작의 딸 카트린에 의해 빛을 보게 된다. 정적의 칼바람이 부는 정치적 격변기에 성장했던 카트린은 『군주론』을 탐독하면서 냉혹한 현실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터득한다.

 

카트린은 『군주론』의 진면목을 발견했고, 마키아벨리즘을 실천했다. 그렇지만, 마키아벨리가 애초에 카트린에게 헌정된 것은 아니다. 역사적 사실로 보면 그녀의 아버지에게 헌정되었다.

 

 

 

 

 

 

 

 

수상록』 제1권 30장을 인용한 문장에 오타가 있다. “파멸을 맞게 되리라는 것은 까많게 모른 채...” (25쪽) ‘까많게’가 아니라 ‘까맣게’로 고쳐야 한다.

 

‘낙마’ 편은 『수상록』 제2권 6장을 인용하고 있다. 여기서도 어색한 문장이 있다.

 

 

 

 

말은 정신이 나간 채 고꾸라졌고, 나는 거기서 열두어 발짝 떨어진 곳에 나자빠졌다. 얼굴은 온통 멍이 들고 벗어졌고, 손에 쥐고 있던 검은 열 발짝쯤 앞에 떨어지고 허리띠는 조각조각이 났다. (『수상록』 제2권 6장에서, 31쪽)

 

 

나는 이 문장만 여러 번 읽었다. 특히 ‘멍이 들고 벗어졌고’라는 부분이 자꾸 눈에 걸렸다. 왜냐하면 얼굴의 피부(살갗)가 다쳤으면, ‘멍이 들고 (피부가/살갗이) 벗겨졌고’라고 쓰는 것이 맞다. ‘벗어지다’와 ‘벗겨지다’를 서로 의미가 다르기 때문에 혼동돼 쓰인다.

 

‘덮이거나 씌워진 물건이 저절로 흘러내리거나 떨어져 나가다.'의 뜻을 나타내는 경우에는 '벗어지다'를, ‘덮이거나 씌워진 물건이 외부의 힘에 의하여 떼어지거나 떨어지다.’라는 뜻을 나타내는 경우에는 ‘벗겨지다’를 쓴다. 따라서 신발은 힘을 주면 ‘벗겨지고’, 발 크기가 맞지 않아 헐렁하면 신발이 ‘벗어진다’. 머리는 벗겨지지 않고 벗어진다. 몽테뉴는 발정 난 말의 힘을 이기지 못해 땅바닥으로 넘어지다가 그만 얼굴에 멍이 들고, 피부가 상처가 났다. 아니면, 옷이 벗겨질 수도 있다.

 

『수상록』과 『인생의 맛』을 읽어 보면 대체적으로 문장이 긴 편이다. 아마도 종속절과 반점으로 길게 이어진 프랑스 특유의 문장을 번역자가 그대로 옮겼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문장은 짧고 간결할수록 읽기가 쉽다. 또 지나치게 반점이 많은 문장은 어색하게 보일 수도 있다.

 

 

 

 

맡은 역을 의식하며 행동해야 하고, 의무를 수행해야 하고, 우리의 행위와 존재를 혼동하지 말아야 하고, 내면의 양심과... (99쪽)

 

 

 

 

그러다가 우리는 깨닫게 된다. 권력자라면 스스로를 과도하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자신의 직위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는 것이, 어느 정도 유머 감각을 갖추고 비아냥거림을 수용할 줄 아는 것이 낫다는 것을. (100쪽)

 

 

 

 

갈레노스으로부터 (120쪽) → 갈레노스로부터

 

그들은 정자의 생식 기능에 가장 중요한 능력을 연결시킨 이들이었다. (120쪽)
→ 그들은 정자의 생식 기능에 가장 중요한 능력을 연결한 장본인이다.

 

'~시키다'는 '남에게 어떤 일을 하게 하다'의 뜻이다. 정자의 생식 기능에 가장 중요한 능력을 그들이 직접 한 것이지, 남에게 시킨 것은 아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우리는 죽음을 맞을 준비를 준비하는 것이다. (140쪽)
→ 사실을 말하자면 우리는 죽음을 맞을 준비한다.

 

삶은 삶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140쪽)
→ 삶 자체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

 

 

 

그밖에 교정해야 할 문장으로는 22쪽에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했든 모든 것은 흐른다.’50쪽의 ‘그는 이를 인간은 우주의 축도라는 원리에 입각해 신체에 비유해 세계는 한쪽 다리는 튼튼하고 다른 쪽은 불구인 기형이 될 것이며, 한쪽 다리가 흰 비뚜름한 몸으로 절룩거릴 것이라고 말한다’가 있다.

 

이 부분은 다락방님이 먼저 지적했다. 『인생의 맛』 책임 편집자께서 50쪽의 문장을 다음 쇄에 수정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책에 교정할 내용이 너무 많다. 아무리 책이 좋은 내용이라도 2% 부족한 편집은 독서의 몰입을 방해한다. 또 책의 평판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된다.

 

 

 

 

 

 

 

 

 

 

 

 

 

 

 

 

에밀 파게의 『단단한 독서』(유유출판사, 2014년)가 아니었으면, 잘못된 문장을 발견하지 못했다. 천천히 읽고, 거듭하여 읽기. 원래 몽테뉴의 글은 천천히 읽고 음미해야 한다. 그렇지만, 파게는 느리게 읽어야 할 또 다른 이유를 주장한다. 천천히 책을 읽으면, 비로소 불명확한 문장과 단어가 보인다.

 

조금 유별나기는 해도 문헌학자들은 이 세계에서 가능한 최상의 감정을 느끼려는 일종의 집착을 보인다. 우리도 이러한 집착을 우리의 원칙과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텍스트가 정확할까?' 천천히 책을 읽고, 대상을 봤을 때 처음으로 파악한 의미를 경계하며, 무턱대고 책에 빠져들지 않으면서도 책을 읽을 때 나태함에 젖지 않게 해 준다. (『단단한 독서』에서, 18쪽)

 

책을 읽다가 어색한 문장이나 오자를 발견하고 지적하는 일을 유별나게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읽으면서 그냥 지나치게 되면 오독할 위험이 있다. 문장을 여러 번 읽었는데 이해가 되지 않으면 맞는지 틀렸는지 점검해야 한다. 독해 능력이 달린 우리를 자책할 필요가 없다. 독자를 읽기 어렵게 만드는 문장이 있다면 저자나 번역자의 능력을 의심해야 한다.

 

다만, 초판에 잘못된 사항이 너무 많아 형편이 없더라도 그것을 출판사과 번역자가 받아들이고 다음 책을 펴낼 때 바로 잡는다면 잃어버린 독자의 신뢰는 다시 형성될 수 있다. 초판의 문제점을 고치지 않고 버젓이 출판되어 유통된다면 독자에게 좋은 책을 알린다는 출판사의 취지에 어긋나는 행동이다. 지금도 책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독자의 의견이 빗발치는데도 모르쇠 하는 출판사가 몇 군데 있다. 이제 곧 다가오는 도서정가제 도입 이후로 출판사를 향한 독자의 원망도 날로 높아져만 가는데 가격이 싸지 않은 책이 내용마저도 엉망이라면 책을 찾는 독자의 발길이 끊어진다.

 

파게는 첫 독서는 연사의 즉흥 연설을 읽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즉흥 연설은 불완전한 형태의 문장이 많다. 그렇지만, 조금만 다듬으면 훌륭한 연설문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독자는 이런 책을 거듭 읽음으로써 잘못된 문체와 언어를 바로 잡는다. 책은 저자와 편집자 그리고 출판사가 만드는 것이지만, 초판의 실수와 허점을 발견하고 고치려는 독자의 역할도 중요하다. 그런 독자의 목소리를 출판사와 저자는 따끔하게 느껴지는 비판 정도로 여기거나 아예 무시하면 안 된다. 독자의 검토 요청은 지금보다 더 좋은 책이 나오기를 바라는 애정 어린 관심이다.

 

 


P.s 지난주에 에밀 파게의 『단단한 독서』 초판을 읽다가, 잘못 적힌 내용을 발견했다. 『법의 정신』의 저자는 몽테스키외인데, 책은 ‘몽테뉴’라고 적혀 있었다. 그래서 이 부분을 유유출판사 페이스북에 알렸다. 페이스북 담당자는 다음 쇄에 바로 잡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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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cteur 2014-11-11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인생의 맛》 담당 편집자입니다. 우선 책 본문의 오자와 부정확한 사실로 독서에 불편을 드려 죄송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독자님이 지적하신 부분들을 바탕으로 본문을 다시 한번 전면적으로 살펴 2쇄에 반영하겠습니다.
《군주론》이 카트린 드 메디치가 아닌 로렌초 2세에게 헌정된 사실은 간단한 검색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원문을 잘못 보아 오역이 발생했습니다. 지적해주시지 않았다면 큰 오류가 계속 남아 있을 뻔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다만, 지적해주신 문장들 중 몇 가지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리는 죽음을 맞을 준비를 준비하는 것이다”는 원문대로 번역된 것이 맞습니다. 앞선 문장을 보면 몽테뉴는 “아무런 해악도 끼치지 못하는 15분간의 고통(죽음의 고통)에는 특별한 교육이 필요치 않다”고 했습니다. 지적하신 문장은 바로 그 다음에 이어지는데, 그러니까 몽테뉴가 말하려는 바는 “우리 어리석은 인간들은 그 15분의 고통을 맞이할 준비를 근심 속에 준비하고 있는 격이다”라는 의미가 아닐까 합니다.
반점으로 연결된 긴 문장들의 경우는, 의미 전달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원문의 호흡을 그대로 살리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저자인 앙투안 콩파뇽이 몽테뉴의 어조를 의식하며 쓴 글이기에 그 점을 살리고, 우리말로 기계적으로 번역한 글이 되지 않도록 한 문장 한 문장 고심했습니다. 그렇지만 섬세하게 살피지 못해 아직 부족한 부분들이 있습니다. 좀 더 다듬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벗어지다’의 의미에는 ‘피부, 거죽 따위가 깎이거나 일어나다’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허물이 벗어지다’처럼 저절로 탈락하는 경우도 있으나, ‘넘어져서 무릎이 벗어지다’처럼 외부의 힘에 의해 탈락하는 경우도 이에 포함됩니다.
지적해주신 부분들 중 명백한 오류들을 바로잡고, 더 부드럽게 읽힐 수 있도록 다듬어 2쇄를 찍을 때는 더 나아진 책을 내놓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성웅 2014-11-12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꼼꼼하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원문에는 사실 저자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데 한국어 독자를 위한다며 자연스럽게 몽테뉴라고 착각해 버렸네요. 재쇄가 생각보다 빨리 될 거 같아 저도 다시 읽고는 있는데, 혹여나 위에서 말씀해주신 부분 외에도 어색한 문장이나 의구심이 드는 부분을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고마운 마음 전하며,

최성웅 드림.

czarny.tistory.com

cyrus 2014-11-12 23:5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성웅님. 며칠 전에 유유출판사 관계자분에게 오자를 발견한 사실을 알렸습니다. 글을 옮기다보면 실수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제가 이 책을 평소처럼 속독했다면, 세세한 실수를 그냥 지나쳐버렸을 겁니다. 고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 원문을 새로운 번역으로 책을 펴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에밀 파게가 강조한 것처럼 천천히, 거듭하여 읽을수록 정말 좋은 책입니다. 앞으로도 독자를 위한 좋은 책을 번역하고 알려주세요.
 

 

 

 

 

 

 

한 달 전에 신형철의 『정확한 사랑의 실험』(마음산책, 2014년)이 나왔을 때 책 표지가 낯익었다. 음산한 기운이 감도는 텅 빈 방.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지만, 방바닥에는 시든 채 흩어진 꽃다발이나 각종 잡동사니가 널브러져 있다. 사진의 제목은 ‘열아홉 번째 사랑의 방’. 프랑스의 사진작가 베르나르 포콩의 ‘사랑의 방’ 연작 시리즈 중 하나이다.

 

 

 

 

 

 

 

 

 

 

 

 

 

 

 

 

 

 

 

 

 

베르나르 포콩은 지나간 시간을 주제로 지적이고 회화적인 사진작품으로 명성을 얻었다. 작가가 자신의 의도대로 장면을 구성해 찍는 ‘메이킹 포토’ 기법을 활용한다. 그의 사진 작품은 10년 전에 이미 우리나라에 전시회를 연 적이 있었고, 전시회를 계기로 사진집 『사랑의 방』(마음산책, 2003년-품절)도 출간되었다. 2001년에 여행작가 앙토넹 포토스키가 쓴 문장을 함께 엮은 사진집 『청춘. 길』도 마음산책 출판사에서 나왔다.

 

 

 

 

 

몇 달 전부터, 거의 매일 밤, 사랑 꿈을 꾼다. 잠에서 깨어나며 나는 내가 늙었다고, 청춘을 둘러싼 마술 영사(映寫)의 원 밖으로 내던져지고, 시간의 온갖 협박에 사로잡혀 있다고 느낀다. (64쪽)

 

 

『사랑의 방』의 발문을 맡은 사진평론가 진동선은 베르나르 포콩을 ‘가장 프랑스적인 사진가’라고 평가한다. 그의 사진에 등장하는 사물들은 우리 삶에 상실되는 대상이다. 한편으로 그들의 부재는 추억을 쫓는 그리움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사랑이라는 감정은 한순간 우리 삶에 가까이 빛나다가 언젠가는 추억의 재가 되어 사라진다. 아폴리네르의 ‘미라보 다리’에 나오는 시구처럼 사랑은 너무나 쉽게 우리 곁을 떠나가 버린다. 흐르는 물처럼. 그것을 다시 잡을 수도, 그때 그 시절로 되돌릴 수 없다. 세월은 가고 오직 지나간 사랑을 그리워하는 내가 남을 뿐이다.

 

 

 

 

 

가장 찍고 싶은 것이 가장 찍을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의 얼굴. (44쪽)

 

 

베르나르 포콩은 ‘사랑의 방’ 연작을 통해서 우리가 갈망하는 사랑의 실체를 카메라에 담았다. 그래서 그의 사진과 단상은 다소 관념적이다. 일부 독자는 그의 사진을 보면서 ‘아름답다’라는 느낌을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단상은 여러 번 곱씹으면서 읽어야 이해할 수 있다. 역시 이미 지나가 버린 ‘사랑의 실체’를 확인하기는 쉽지만 않다. 특히 나처럼 사랑을 하고 실연을 겪어보지 않은 ‘연애 고자’에게는. 전혀 사랑하는 않는 것보다는 사랑을 하고 실연을 당하는 것이 낫다고 말한 알프레드 테니슨의 명언을 되새겨 본다. 아마도 이 책은 몇 십 년 지난 뒤에 다시 읽어봐야겠다. 그때쯤이면 사랑의 단맛, 쓴맛 다 맛봤을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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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4-11-10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무언가가 지나가고 남은 자리의 사진 같군요. 베르나르 포콩은 미처 몰랐는데 님 덕분에 좋은 사진 또 감상할 기회를 가지네요.

cyrus 2014-11-10 21:12   좋아요 0 | URL
생각날 때마다 다시 읽어보면 좋은 사진집입니다. 제목도 좋고요. 품절이 되어서 아쉽게 생각하는 책입니다.
 
나는 왜 이렇게 산만해졌을까 - 복잡한 세상, 넘쳐나는 기기 속에서 나를 잃지 않는 법
알렉스 수정 김 방 지음, 이경남 옮김 / 시공사 / 2014년 10월
평점 :
절판


 

 

 Scene #1 스마트폰에 푹 빠진 산만한 원숭이

 

우리 생활은 ‘스마트폰 라이프’라 해도 좋을 만큼 스마트폰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잊다. 아침에 눈을 떠서 화장실에 갈 때에도 이제는 신문 대신 스마트폰을 집어 들고 간다. 먼저 이메일을 확인하고, 주요 일간지 헤드라인을 간단하게 읽는다. 집이나 밖에서나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친구들의 사진에 ‘좋아요’를 누르고, 답글을 올린다.

 

최근 중독에 대한 개념은 약물중독 혹은 물질중독의 개념을 넘어 인터넷, 게임, 스마트폰에 이르는 '디지털 중독' 개념으로 확산하고 있다.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화장실에 갈 때도 스마트폰이 없으면 불안하거나 밥을 먹다가도 알람이 울리면 달려가는 등의 중독 증상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인터넷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스마트폰 사용 빈도가 높다고 생각하면 한국과학기술개발원에서 만든 ‘스마트폰 중독 자가진단법’으로 중독의 심각성을 확인해보면 좋다. 이 중 ‘그렇다’가 8개 이상이면 중독, 5~7개는 의심, 3~4개는 위험군이다.

 

 

 

 

 

 

 

옛사람들은 마음을 원숭이 같다 했다. 원숭이를 보면 온종일 꺅꺅거리고 고함치고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뛰어 돌아다니며 종일 설쳐대지만, 하루해가 지고 나면 아무것도 한 것 없이 그저 시간만 보낼 따름이다. 지금의 우리도 그렇다. 스마트폰을 24시간 손에 쥐고 있는 우리는 원숭이처럼 무언가에 불안해하고 가만히 있지 못한다. 스마트폰이 없으면 불안하고, 카톡이나 문자 메시지 알람을 기다리는 우리들의 모습. ‘호모 디지털쿠스’가 아니라 ‘스마트폰에 푹 빠진 산만한 원숭이’에 가깝다. 나도 모르게 아무 생각 없이 스마트폰을 한다. 우스갯소리지만, 우리는 정말 아무 생각 없기 때문에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린다.

 

 

 

 Scene #2  멀티태스킹에 대한 오해  

 

 

 

 

 

혹자는 스마트폰 중독의 심각성에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른다.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듣고, 트윗을 날리고, 문자 메시지를 보내면서 한꺼번에 여러 작업을 하면 능률이 높아지는데 그에 비해 언론과 전문가들은 너무 문제점만 부각한다고. 이를 우리는 ‘멀티태스킹’이라고 부른다. 즉, 두 가지 이상의 일을 동시에 진행한다.

 

그런데 인간과 기술의 관계에 관해서 오랫동안 연구를 한 퓨처리스트 알렉스 수정 김 방은 우리가 멀티태스킹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멀티태스킹의 의미를 착각하고, 과대평가하는 면이 있다고 지적한다.

 

만약에 당신이 작업 시간이 꽤 오래 걸릴 듯한 중요한 보고서를 작성한다고 상상해보자. 막상 보고서를 시작하려니까 벌써 싫증이 난다. 이 지루하고 끔찍한 작업을 얼른 끝낼 방법이 없을까? 당신은 스마트폰에 저장된 음악을 들으면서 보고서를 쓰려고 한다. 음악이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 당신의 마음을 즐겁게 만들 것이다. 이제 보고서를 반 정도 작성하는 와중에 마침 친구의 카톡이 왔다. 내일 만나는 장소에 대해서 친구와 카톡으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괜찮은 약속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서 보고서를 쓰다 말고, 인터넷으로 지도 검색을 한다. 이런 산만한 상황 속에 보고서는 하루 안에 다 완성할 수 있을까.

 

이런 상황을 우리는 분명 멀티태스킹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이다. 사실 멀티태스킹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두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능률적으로 작업을 진행한다. 또 다른 의미는 이것과 반대되는 상황이다. 작업 진행 속도가 느릴 정도로 비생산적인 작업 과정이다. 우리는 전자의 멀티태스킹을 원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얼른 끝내고 싶은 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 상황에 이것저것 신경을 써야 하고, 중간에 딴 일로 빠진다면 보고서 작업 진행이 더딜 수밖에 없다. 결국, 보고서 작성에 집중을 하지 못한다.

 

이런 상황을 멀티태스킹이 아닌 ‘스위치태스킹’(Switchtasking)이라고 해야 맞다. 두 가지 이상을 한꺼번에 동시에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번갈아 하는 것뿐이다. 특정 작업에 대한 집중력과 주의력을 떨어뜨리고, 작업의 생산성이 떨어진다. 우리는 지금까지 두 가지 이상의 작업 진행 방식을 과대평가했다는 것인데, 사실 스위치태스킹에 익숙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작업 진행 방식이 능률성을 보장해주는 멀리태스킹이라고 착각하는 자기 합리화에 빠진다.

 

스위치태스킹은 집중력을 분산시키고 몰입을 방해한다. 특히 스마트폰은 우리가 흔하게 스위치태스킹으로 사용되는 물건이다. 길을 지나가면 두 눈은 스마트폰에 향한 채 걷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아주 위험한 행동이다. 스마트폰에 집중하는 나머지, 앞으로 다가오는 보행자나 통행차량을 보지 못한다. 집중력이 스마트폰으로만 향해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자동차 운전 중에 스마트폰이나 DMB를 보는 것도 위험하다.

 

 

 

 Scene #3 스마트폰과의 얽힌 관계를 풀어나가야 할 때 

 

그동안 '무어의 법칙'(Moore's Law)은 기술 시대의 진화를 안정적인 견인해 왔다. 메모리의 용량이나 CPU의 속도는 약 1.5년에 2배씩 증가했다. 그러나 이제 그 시대의 의미가 서서히 무색해진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 속도는 날이 갈수록 점점 향상되고 있고, 그 속도가 예전보다 빨라졌다. 저장 용량이 더욱 커지고, 인터넷 속도가 빨라질수록 우리의 삶은 더욱 편리할 것이라고 믿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컴퓨팅 환경은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기반환경임이 틀림없다.

 

그렇지만, 우리와 IT 기기의 관계는 친밀한 연대성을 넘어서 이제는 구속에 가까운 ‘얽힘’(Entanglement)으로 형성되었다. 인간의 두뇌에서 탄생한 IT 기술이 역으로 인간의 두뇌역할을 대신하는 능력으로 발전되었다. 인간은 많은 양의 정보를 오랫동안 기억할 수 없고, 망각하기 쉬운 동물이다. 반면, 컴퓨터와 스마트폰은 기계 부품이 망가지지 않는 이상, 정보를 오랫동안 보관하고 기억한다. 우리는 사소한 정보마저도 외울 필요도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친한 친구의 전화번호는 스마트폰에 입력만 하면 저장되고, 전화를 걸기 위해서 숫자 버튼을 누를 필요가 없어졌다. 스마트폰을 분실하면 자주 연락하는 친구의 전화번호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니,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스마트폰 등장 이후로 우리는 전화번호를 기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친구의 전화번호를 외우는 일을 스마트폰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속도와 효율성이 중시되는 시대로 변할수록 생각하는 능력이 퇴화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디지털 중독의 심각성을 인지하면서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있는 당신을 목격하게 된다.

 

우리는 인터넷에 질 수밖에 없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해 우리는 집중 상태를 지속시키는 데 실패한다. 매 순간 정신 팔기 딱 좋은 놀이공원 규모의 가상 세계가 있는 것을 아는데 어쩌겠는가. (81쪽)

 

스마트폰을 잠시 꺼두거나 아예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산만하고 집중력이 저하된 우리 마음을 원 상태로 회복될 수 있을까. 익숙한 물건을 잠시 멀어지게 하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스마트폰이 마음을 산만하고 불안하게 만들고 있는지 또는 집중력을 떨어뜨리지 않는지 스스로 자문해야 한다. 즉, 나와 스마트폰과의 관계에 대해 재설정하는 것이다. 이것을 ‘관조적 컴퓨팅’(Conterplative computing)이라고 한다. 마음을 안정시킬 수 있도록 인터넷과 스마트폰 사용 횟수를 줄이고, 정말 필요한 상황이거나 목적이 있을 때만 사용한다. 집중력이 흐트러지거나 혼란한 마음을 잡기 위해서라면 명상과 산책도 좋은 방법이다. 이런 활동이 익숙해지면 인터넷과 스마트폰 사용 시간을 조금씩 줄여나가는 데 도움이 된다. 이제 우리 삶에 가족만큼 너무나 친숙해진 스마트폰과의 얽힌 관계를 풀어나가야 할 때다. 그 속에 갇힌 진짜 ‘나’를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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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4-11-09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많은데,
저 테스트에서는 3개 해당되네요.
확실히 요샌 폰으로 SNS 들여다보느라 책 읽는 시간도 많이 줄었어요.

cyrus 2014-11-10 00:05   좋아요 0 | URL
오랜만입니다. 은빛님. 요즘 저도 페이스북에 로그인하는 시간을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페이스북에 글을 남기는 일을 자제하고, 아무 생각없이 페이스북에 접속하지 않으려고 아예 스마트폰 전원을 끄거나 매너모드로 쓰고 있답니다. 완전히 스마트폰 노예 생활을 청산하지 못했지만, 예전에 비해 책 읽고 혼자 있는 시간을 더 많이 늘렸습니다. 스마트폰을 멀리하는 일상도 썩 나쁘지 않고, 좋은 것 같습니다.

책을사랑하는현맘 2014-11-10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3개에 해당되네요ㅎㅎ 스스로도 스마트폰 중독이라고 여겨지는데, 과도하게 인터넷에 자주 접속할 때 그런 느낌이 들어요. 위기의식이 느껴지기도 해서 어떻게 하면 좀 멀어질까 고민중이예요.
스위치태스킹도 상당히 공감되는 얘기구요. 언제부터인가 (아마도 스마트폰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부터겠죠?) 한가지에 집중하는게 상당히 어려워요. 이러니...우리 아이들은 정말이지 어떻게 해야 할까요?

cyrus 2014-11-10 21:25   좋아요 0 | URL
전 아직 미혼인데 스마트폰에 너무 익숙해진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걱정됩니다. 오늘 밖에서 우연히 유치원 차에서 내리는 여자아이를 봤어요. 아이를 맞이해주는 엄마가 앞에 서 있는데도 아이는 차에 내리면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더군요. 제가 어느 인터넷 기사에 본건데 스마트폰은 중학생 때 쓰기 시작하는 것이 낫다고 하더군요. 유치원, 초등학생들이 스마트폰을 사용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이르고, 거기에 너무 익숙해져서 학년이 올라갈수록 중독 증상을 고치기 힘들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