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수집광사건 동서 미스터리 북스 60
존 딕슨 카 지음, 김우종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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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수집광사건』(원제: The Mad Hatter Mystery)은 존 딕슨 카가 두 번째로 창조한 아마추어 탐정 기드온 펠 박사가 등장하는 작품 중 하나이다. 사실 펠 박사가 처음으로 등장한 작품은 『마녀가 사는 집』(해문출판사, 2003년)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된 『Hag's Nook』이다. 이 작품과 『모자수집광사건』은 1933년 같은 해에 발표되었다.

 

펠 박사도 카가 맨 처음 창조한 탐정 앙리 방코랭처럼 사건 현장에 조수를 대동한다. 미국 출신의 랜폴이라는 인물이다. 『모자수집광사건』이 펠 박사가 나오는 두 번째 소설이라서 그의 특징을 소개하는 내용이 언급되지 않는다. 기드온 펠 박사는 사전 편집자로 활동했으며 콧수염을 가진 뚱뚱한 인물이다. 움직임이 둔한 편이라서 두 개의 지팡이를 짚고 이동한다. 복장은 주로 낡은 망토와 중절를 착용한다. 『모자수집광사건』이 시작되는 이야기 초반부에 해드리 경감 '스태버스 사건'을 잠깐 언급하면서 과거를 회상하는 대화가 나온다. 여기서 '스태버스 사건'이란 바로 『마녀가 사는 집』에서 펠 박사가 처음 맡은 사건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시간적 과정을 고려하면서 읽으려면 『마녀가 사는 집』, 『모자수집광사건』 순으로 읽어야 한다.

 

『모자수집광사건』은 이전에 발표한 카의 작품(『밤에 걷다』『해골성』)보다 사건이 복잡하면서도 기괴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원제의 'The Mad Hatter'는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나오는 특이한 '미친 모자 장수'를 말하는데 이 소설에서는 실크 모자를 훔치는 정체불명의 사나이를 가리킨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도난 사건을 펠 박사가 맡게 되는데 이것은 사건의 전초전에 불과하다. 이어서 끔찍한 사건이 발생한다. 슬프고 잔인한 역사가 남아있는 런던탑에서 필립 드리스콜이라는 젊은 기자가 중세 때 사용했던 무쇠 화살에 찔린 채 발견된 것이다. 여기서 더 특이한 것은 죽은 드리스콜이 미친 모자 장수가 훔쳐서 사라진 실크 모자를 쓰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드리스콜을 죽인 범인은 모자를 훔치고 다닌 미친 모자 장수란 말인가. 사건 현장을 조사한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미친 모자 장수를 범인으로 지목하게 된다. 그러나 범인이 너무 뻔뻔하게 자신이 범인이라고 증명할 수 있는 단서를 살해 현장에 그대로 남겨둔 이유는 무엇일까? 펠 박사는 처음에 시큰둥하게 반응했던 모자 도난 사건이 드리스콜의 죽음과 연관성이 있다는 전제하에 일단 미친 모자 장수의 정체를 알아내려고 한다. 그런데 펠 박사는 모자 도난 사건, 드리스콜 살해 사건에 관한 수사를 해드리 경감에게 맡긴 채 또 다른 사건에도 신경 쓰고 있다. 그것은 누군가에 의해 사라져버린 에드거 앨런 포의 미발표 원고를 찾는 것.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 희귀한 원고는 죽은 드리스콜의 삼촌 윌리엄 경이 소유하고 있었다. 결국, 펠 박사는 세 가지 사건을 동시에 맡은 셈이다.

 

미친 모자 장수의 모자 절도사건, 런던탑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그리고 포의 미발표 원고 도난사건. 카는 전혀 상관성이 없어 보이는 이 세 가지 사건을 절묘하게 얽혀 복잡한 트릭을 선보인다. 소설을 읽는 독자라면 범인이 누구이며 어떻게 이런 사건들이 발생하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의 트릭은 독자의 흥미를 유발하는 신선한 소재이지만, 이야기가 중반부로 진행할수록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이 흠이다. 아무래도 세 가지 사건의 연관성을 독자에게 잘 설명하기 위해서 카는 이 소설을 쓰는 내내 새도록 커피를 마시고, 줄담배를 피우면서 크게 고심했을 것이다. 이렇다 보니 해드리 경감이 여러 인물을 직접 만나면서 수사하는 과정이 지나치게 길어져 버렸다. 책의 300쪽 정도 돼서야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혀버린 사건의 내막이 점점 밝혀지게 된다. 결말이 궁금하다면 꾹 참고 읽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자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리고 독자는 펠 박사만의 수사 방식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펠 박사는 해드리 경감이 수사하는 모습을 옆에서 쭉 지켜보고 나서야 경감의 추리에 귀를 기울인다. 어떤 사건이 완벽한 해결에 도달할 때까지 펠 박사는 자신의 추리를 공개하지 않는다. 일단 상대방의 추리를 듣고 나서 자신이 지금까지 머릿속으로만 정리했던 추리를 덧붙여 설명하고 논리적으로 반박한다. 이러한 펠 박사의 수사 방식은 겸손한 그의 성품을 엿볼 수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야기를 질질 끌어 결말이 궁금한 독자의 마음을 애타게 한다. 사건 현장에 들어서마자 간단한 단서만 가지고 사건의 진상을 단번에 알아내고, 자신의 추리를 왓슨과 형사들에게 잘난 척하면서 설명하는 셜록 홈즈와 무척 비교된다.

 

이 소설에서 해드리 경감은 항상 사건 현장에서 침묵하는 펠 박사의 수사 방식에 불만을 표출한다. 펠 박사가 소설에 나오는 탐정처럼 모든 걸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신비스럽게 보이는 행동을 흉내 낸다고 비꼬는 것이다. 그러자 펠 박사는 자신은 소설 속에 나오는 탐정과 전혀 다르다고 반박한다. 오히려 소설 속 탐정은 현실적이지 못해 부정하고 나선다. 그는 자신이 추리에 뜸 들이는 이유를 신비스러운 이미지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사건을 신중하게 해결하는 자세라고 말한다.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조차 알지 못하면서 다 알고 있다는 듯 남들에게 뽐내고 싶은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것이다. 펠 박사는 단서 하나하나 꼼꼼하게 검증하는 추리야말로 오류를 피할 수 있는 신중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펠 박사의 모습은 독자에게 색다른 매력으로 다가온다. 사실 그는 프랑스 요리를 좋아하는 대식가인데 음식과 술이 뱃속으로 들어가는 시간이 되면 범죄 이야기를 절대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의 성품은 놀 땐 잘 놀고, 공부할 땐 완벽하게 암기하면서 공부할 줄 아는 똑똑한 모범생 같다. 이런 친구들이 성적 잘 나오는 비결은 항상 똑같다.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어요. 교과서만 쭉 봤는지 알 수 없지만, 공부 잘하는 모범생들은 뚝심 있게 공부한다. 자신만의 공부 방식을 고수한다. 문제에 한 번 파고들면 풀 때까지 매달린다. 펠 박사는 인내심이 많고 뚝심이 센 탐정계의 모범생이다. 문제의 답을 완전히 찾을 때까지 오랫동안 고민을 하고 신중하게 문제를 푸는, 공부와 문제 풀이에 대한 의지가 확고한 모범생. 이들은 완벽함을 추구하는 탓에 문제 하나라도 틀리는 실수를 두려워한다. 펠 박사 또한 섣부른 추리를 아예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는다. 잘못된 추리가 사건을 더욱 미궁에 빠뜨리는 치명적인 오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끔 우리는 이런 모범생을 은근히 싫어하고 질투했다. 문제를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그런 모범생 친구 하나쯤은 있지 않은가. 이런 친구들을 보면 무언가 꽉 막히면서도 답답한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아직도 펠 박사의 추리가 익숙하지 않다. 국내에 그가 등장한 작품은 많이 소개되지 않은 편인데 앞으로 이 신중한 탐정과 친해지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릴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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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4-12-28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추리소설과는 아직 친해지지가 않아. 읽어볼 생각도 안 들고. 이유가 뭘까 곰곰_

cyrus 2014-12-28 14:04   좋아요 0 | URL
추리소설을 잘 읽지 않은 이유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아무래도 이야기를 읽으면서 느끼게 되는 문화적 차이감이 독서 몰입을 방해하는 요인이 되는 것 같아요.

qualia 2014-12-28 17: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좀 뚱딴지 같은 질문인데요. 원제 『The Mad Hatter Mystery』를 『모자수집광사건』으로 번역한 까닭이 궁금합니다. cyrus 님 글을 읽어보면 “Mad Hatter”는 “미친 모자 장수” 혹은 괴짜 모자 장수를 가리키는 것 같은데요. 그런데 이 미친 모자 장수가 실제로도 모자 수집에 미친 “모자수집광”인가요? 원작 소설에 그렇게 그려지고 있는지 걍 궁금해서요.

구한말 혹은 개화기 초기에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어느 외국인 탐험가(?)가 그랬다고 합니다. 한국(조선)처럼 모자가 다양하고 수많은 나라는 첨 봤다고요. 만약 어떤 모자수집광이 당시 한국에 들어왔다면 대박을 쳤을 거란 생각이...^^ 가만 돌이켜보면 정말 우리 민족은 수많은 갖가지 모양의 모자를 만들어냈고, 또 일상에서도 많은 시간을 모자를 쓴 채 생활했던 것 같습니다. 조금만 살펴봐도 아이부터 노인까지, 남녀노소, 지위고하, 사농공상을 가리지 않고 아주 다양한 모자들을 만들어 썼음을 알 수 있죠. 그중에서 ‘갓’의 실용성/예술성/독창성/문화적 상징성은 정말 압권이죠.

cyrus 2014-12-28 17:57   좋아요 0 | URL
제가 글을 쓰다가 ‘미친 모자 장수’라는 말을 빠뜨리고 말았군요. 지적 감사합니다. 수정하겠습니다. 출판사가 이 작품을 ‘모자수집광사건’이라고 정했는데 사실 저도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제목이 잘못 지은 듯한 느낌이 났어요. 왜냐하면 이 소설에 나오는 모자 도둑이 모자를 수집하기 위한 목적으로 모자를 훔치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냥 모자만 훔치는 절도범이라고 보면 됩니다.

제가 알기로는 우리나라에서 만든 모자만 수집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런 사람이 있다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모자를 보유한 수집가의 반열에 올랐을 겁니다. ^^
 
이주헌의 서양미술 특강 - 우리 시각으로 다시 보는 서양미술
이주헌 지음 / 아트북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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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서 예술 분야 가운데 으뜸으로 치는 것은 미술이다. 음악, 무용 같은 공연예술이 절대로 미술보다 못해서가 아니다. 미술품의 탁월한 보존성 때문이다. 수천 년 전에 제작된 고대 그리스의 조각, 중세의 벽화는 아직도 남아 있지만, 당시 음악이나 무용은 재현할 수 없다. 소리나 몸동작은 후대에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림 한 점에서 역사와 시대 문화를 해석하고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그림에 대한 분석과 해설은 딱딱하고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다. 특히 배경 지식 없이 그림을 보면 그것은 '페인팅'에 그칠 것이다. 예술이나 미술전시장이 어색한 사람들의 많은 고충은 도무지 미술품 앞에 서 있으면 무슨 생각부터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양손을 절레절레 흔든다. 서양미술사를 완파하지 못한 이는 자신의 지적 교양 수준을 반성하며 작품설명 기기를 목에 걸고 귀 기울여 듣기 바쁘다.

 

대부분 서양미술 관련 서적은 입문자에게 불친절하다. 진지하고 어려운 말만 골라서 하는 강의실의 교수님처럼 좀처럼 친해지기가 쉽지 않다. 한쪽을 읽고 넘기면 앞의 내용이 벌써 가물거린다. 몇십 쪽을 넘기고 나면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한다. 개념어와 역사적 배경 사이에서 널뛰기하다 보면 어느새 길을 잃어버릴 수 있다. 사실 서양미술작품은 화가 개인의 생각만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다. 그 시대 서양 사람들의 집단적인 사고방식을 표현하는 ‘창’ 역할을 하기도 한다. 서양미술을 만든 서양인들의 사고방식을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불친절한 서양미술의 세계에 들어가려면 이주헌이라는 친절한 안내자를 동원해야 한다. 『이주헌의 서양미술 특강』은 미술작품을 통해 지루함을 넘어 흥미 있는 미적 여행의 세계로 안내한다.

 

 

 

 

틴토레토  「은하수의 기원」 1570년대

 
 
저자는 서양미술의 본질에 좀 더 쉽게 다가서기 위한 세 가지 특징을 제시한다. 인간 중심적, 사실적, 감각적 특징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 특징이 잘 살린 대표적인 그림이 바로 16세기 이탈리아 화가 틴토레토의 「은하수의 기원」이다. 어린 헤라클레스가 잠자는 헤라에게 몰래 다가와 젖을 먹고 있는 장면이다. 헤라가 잠에서 깨는 바람에 화들짝 놀란 제우스는 얼른 어린 헤라클레스를 떼어놓지만, 헤라의 가슴에 나오는 젖방울은 하늘과 땅으로 향한다. 하늘로 간 젖은 은하수(Milky way)가 되었고, 땅에 흘린 젖은 순결한 꽃의 상징으로 알려진 백합이 되었다. 

 

틴토레토의 그림에 나오는 신은 인간의 모습과 같다. 이뿐만 아니라 종교화에 등장하는 예수나 천사 또한 인간의 형상을 띤다. 이러한 인간 중심적 특징은 역사화의 탄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서양미술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많은 인기를 얻은 장르가 역사화다. 화가는 역사화를 통해서 단순히 역사적 사건을 재현하는 데만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역사 한가운데 있는 인간 그 자체를 그리고자 했다. 이것이 바로 인간에 관한 이야기며 그 속에서 역사적 상황에 마주친 인간의 희로애락을 표현했다.

 

서양미술에서는 시각적 재현 또는 모방을 중시했다. 그러므로 인간의 형체 그대로 묘사하는 것을 넘어서서 자연마저도 똑같이 그리려고 했다. 원근법의 등장으로 눈으로 보는 듯한 풍경이 그림으로 재현할 수 있어졌고, 여기에 더 나아가 빛과 그림자를 묘사함으로써 완벽한 환영적 재현에 도달하기에 이른다. 다시 틴토레토의 그림을 살펴보면 벌거벗은 헤라의 몸에 그림자에 의한 음영 효과를 확인할 수 있다. 그밖에도 화사한 색채를 통해 시각이 촉각으로 환기하는 공감각적 표현을 구사하여 관객은 사실적인 느낌을 받는다.

 

 

 

 

 

김홍도  「씨름도」  1745년

 

 

저자는 서양미술의 세 가지 특징을 입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동양미술과 직접 비교한다. 서양미술과 동양미술의 차이점은 우리가 서양미술을 이해하는 데 어렵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동서양의 다양한 시대와 작가의 미술작품에서 발견한 차이점을 통해 서양미술에 접근하는 길을 터주고 있다.

 

김홍도나 신윤복의 그림에서 그림자 한 점이라도 나타나지 않은 사실을 알고 나면 의아하게 느낄 것이다. 동양미술은 그림자를 묘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실적인 외양보다는 본질의 진실한 내면(정신)을 표현하는 것을 더 중시했기 때문이다. 외국인이 김홍도의 그림이나 정선의 풍경화를 처음 본다면 낯설게 느꼈을 것이다. 원근법이나 그림자 표현이 없어서 사실감이 떨어지는 어설픈 그림으로 오해하기 쉽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우리 시각으로 다시 서양미술을 바라보는 접근방식을 제시한다. 그러나 저자의 주장은 참신한 내용이라고 볼 수 없다. 17년 전부터 시작된 미술 특강에서 가르친 내용을 토대로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대학교에서 교양 미술 강의를 수강한 적이 있는 독자라면 진부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게다가 서양미술을 보는 이 세 가지 시각은 고전미술(현대미술로 규정하는 20세기 이전 미술사조, 즉 르네상스, 바로크, 고전주의, 인상주의까지)에서만 한정되어 있다. 서양미술을 독학하는 독자라면 유의해야 할 점이다. 이 책을 이해하고 난 뒤에 중상급 정도의 서양미술을 더 알고 싶으면 역시 동일 저자가 펴낸 『지식의 미술관』(아트북스, 2009년)과 『역사의 미술관』(문학동네, 2011년)을 읽어보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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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네 집 창비시선 173
김용택 지음 / 창비 / 199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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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구꽃 떨어지는 살구나무 아래로
물을 길어오는 그 여자 물동이 속에
꽃잎이 떨어지면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 닿고 싶은 집

 

(‘그 여자네 집’ 중에서, 12쪽)

 

 

꽃잎이 일으킨 물결처럼 가 닿고 싶은 그 여자네 집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알싸하게 아파온다. 김용택 시인의 ‘그 여자네 집’을 읽으면 박완서의 동명 소설도 보인다. 박완서 선생이 이 시를 읽고는 반해서 길이가 만만찮은 시 전체를 소설의 앞머리에 인용했다. 일제의 강제 징병과 정신대 징발 때문에 결국 헤어져야만 했던 만득이와 곱단이의 그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그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가 아슴아슴 피어난다.

 

 

아침 눈이 하얗게 처마끝을 지나
마당에 내리고
그 여자가 몸을 웅숭그리고
아직 쓸지 않은 마당을 지나
뒤안으로 김치를 내러 가다가 "하따, 눈이 참말로 이쁘게도 온다이이"하며
눈이 가득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싱그러운 이마와 검은 속눈썹에 걸린 눈을 털며
김칫독을 열 때
하얀 눈송이들이 김칫독 안으로
하얗게 내리는 집

 

(「그 여자네 집’ 중에서」, 14쪽)

 

 

시에 등장하는 그 여자네 집은 밀착된 풍경이 아니라 적어도 열 걸음 이상 거리를 두고 떨어져 바라본 풍경이다. 그 거리로 인해 그 여자와 화자의 관계는 계속 짝사랑 특유의 떨림을 유지한다. 지금은 가까이 없기에 더욱 그리운 떨림. 사랑이란 그 지독한 열병은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열 번을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는 그 무엇이다. 그런 지독한 열병 같은 사랑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사랑을 모르는 사람은 생명에 대한 따스한 사랑, 대자연에 대한 더없이 큰 사랑을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사랑을 모르므로 어떤 대상을 사랑할 수도 없다.

 

 

나도 아버지처럼
풀과 나무와 흙과 바람과 물과 햇빛으로
시를 쓰고
그 시 속에서 살고 싶다.

 

(「농부와 시인」 중에서, 79쪽)

 

 

김용택 시인은 섬진강을 사랑한다. 그의 삶에서 섬진강을 빼어놓고 말할 수 없듯이 그의 가족, 짝사랑했던 여자 그리고 ‘풀과 나무와 흙과 바람과 물과 햇빛’은 그의 시이자 삶이다.

 

 

강물에 가네
나는 강물에 가네
저문 강물 저물어 나도 가네
강가에 서서
강물을 보네
강물을 보네
아, 이 고요로움을 한움큼 길어
사랑하는 님에게 드리고 싶네
서편에 뜬 붉은 구름이랑 같이 드리고 싶다네
내 깊은 데서 아직도 타는 이 그리움, 이 사랑을
아, 산봉우리 젖네
저 푸르른 솔잎
가을에는 흔들리지 않는 것이 좋다네
물에는 물에만 있네

 

(‘나는 집으로 간다’ 중에서, 34~35쪽)

 

 

시인의 마음에서도 섬진강은 흐르고 흐른다. 그 섬진강은 그저 흘러가는 물결을 바라보는 강이 아니리라 느끼고 겪어야 하는 강이다. 그 강가에서 나고 자란 시인은 섬진강이란 풍경을 두고 느끼고 겪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강가에서 그저 물을 볼 일이요
가만가만 다가가서 물 깊이 산을 볼 일이다
무엇이 바쁜가
이만큼 살아서 마주할 산이 거기 늘 앉아 있고
이만큼 걸어 항상 물이 거기 흐른다
인자는 강가에 가지 않아도
산은 내 머리맡에 와 앉아 쉬었다가 저 혼자 가고
강물도 저 혼자 돌아간다

 

강에 가고 싶다
물이 산을 두고 가지 않고
산 또한 물을 두고 가지 않는다
그 산에 그 강
그 강에 가고 싶다

 

(‘그 강에 가고 싶다’ 중에서, 66~67쪽)

 

 

사는 일이 팍팍할 때 저무는 강물을 바라보며 마음 한끝을 흐르는 강물에 적셔보고 싶다. 강이라면 저리 천천히 흐르며 때때로 고이기도 해야 수면 위에 비진 세상을 볼 수 있다. 기슭에 부딪히는 물결 소리와 뒤섞인 제 울음소리도 들을 수도 있어야 한다. 강물처럼 우리도 천천히 지나가며 때로 멈추어 서서 자신을 가늠해본다.

 

 

강 끝
하동에 가서
모래 위를 흐르는 물가에 홀로 앉아
그대 발밑에서 허물어지는 모래를 보라
바람에 나부끼는 강 건너 갈대들이
왜 드디어 그대를 부르는
눈부신 손짓이 되어
그대를 일으켜 세우는지

 

왜 사랑은 부르지 않고 내가 가야 하는지
섬진강 끝 하동
무너지는 모래밭에 서서
겨울 하동을 보라 

 

 

(‘강 끝의 노래’ 중에서, 68~69쪽)

 

 

김용택 시인의 시에 있는 섬진강은 당신을 못잊어 기다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품과 같이 편안하다. 후미진 하동 포구의 갈대들은 지나가고 지나가는 시간을 온몸으로 견디고 있다. 만나며 헤어지며 흘러가는 강물의 몸짓으로 섬진강의 갈대숲은 기다리며 잊혀가는 세월의 빛으로 그렇게 강인하게 흔들린다. 그런 갈대를 만날 수 있다면 겨울 하동은 춥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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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북 2014-12-27 08: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나 시가 주는 운율적 서정적 이끌림은 언제나 좋네요 김용택 시인님을 처음 알게되었지만 하동 갈대숲이 부르는 그손짓 느껴보고 싶네요^^

cyrus 2014-12-27 10:13   좋아요 0 | URL
저는 아직 섬진강에 가보지 않았어요. 비록 시에 나오는 섬진강 풍경이 세월이 많이 지나버려 달라졌지만요. 하동에 한 번 가보고 싶어요.
 

 

 

 

 

 

사람들은 누구나 만남과 헤어짐의 시간을 마주한다. 그 기간이 길든 짧든, 누구나 한 번쯤은 환희와 고통을 경험하곤 한다. 우리는 누구나 남에게는 평범하지만, 나에게는 특별한 연애이야기 하나씩을 간직한다. 어떠한 경험이었든 간에, 시간이 지난 후에 바라보는 자신의 연애담은 액자 속 빛바랜 사진처럼 아름답게 남는다.

 

이별을 대하는 방식은 각자가 다 다르다. 어떤 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옛 연인을 자신의 삶에서 삭제하기도 하고, 또 다른 이는 끝끝내 버리지 못하고 붙잡으려 한다. 하나의 연애가 끝나면, 실연의 상처는 깊어지고 상처와 새로운 사랑의 갈림길에서 잠들지 못하는 날이 늘어난다. 그뿐만 아니다. 이별의 고통은 헤어진 연인으로부터 받은 선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게 되는 현실적인 문제로까지 번지게 된다.

 

옛 연인이 준 선물을 간직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아직 애인을 사귀어 보지 못해서 이런 경험을 겪어보지 않았지만, 아마도 수집벽 있는 나라면 옛 연인이 준 선물을 쉽게 버리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그 선물에 잠깐 눈길만 줘도 옛 연인과의 소중한 추억이 살며시 떠오른다면 절대로 버리지 않을 것이다. 

 

물건 집착은 상대방이 주는 사소한 선물마저도 버리지 못한다. 특히 책은 그렇다. 비록 내가 관심 없는 분야라거나 한 번 정도 읽었던 책이라도 반드시 책장에 꽂아둔다. 이미 사들인 책을 선물로 받으면 책을 좋아하는 지인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선물로 준다. 받을 사람이 없으면 책방이나 중고서점에 판다.

 

유명 저자의 친필 사인이 있는 책은 애서가에게는 아주 특별한 선물이다. 책이 처음 나올 때 출판사에서 여러 번 찍어 낸 인공 사인본은 제외다. 저자의 강연회나 사인회에 직접 가서 저자를 만나 사인을 받은 것이야말로 진짜 친필 사인본이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알라딘 중고서점에 책을 고르다가 김용택 시인의 친필 사인이 있는 시집 『그 여자네 집』(창비, 1998년)을 샀다. 이런 책을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매입되다니. 이보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특별한 친필 사인본을 중고서점에 파는 책 주인의 심정이다. 중고서점에 가보면 판매자 실명을 공개해서 그가 판 책들을 따로 진열된 것을 볼 수 있다. 대구에 사는 서 아무개 씨가 판 책들 사이에서 김용택 시인의 시집이 있었다. 그냥 지나쳤으면 못 봤을 뻔했다.

 

시인의 사인 밑에 서 아무개 씨가 쓴 듯한 조그만 글씨가 적혀 있다. ‘김용택 사랑하기’ 아마도 서 아무개 씨는 십년 전에 시집을 꽤 읽은 평범한 독자였을 것이다. 서 아무개 씨는 시인의 친필 사인을 받았을 때만 해도 무척 행복했을 것이다. 시인을 향한 서 아무개 씨의 열렬한 애정이 느껴진다. 그런데 어쩌다 이런 특별한 선물을 팔았을까? 서 아무개 씨는 책을 팔면서 시인의 친필 사인과 메시지가 적힌 시집이 있다는 사실을 잊었던 걸까? 십 년이라는 세월의 흐름이라면 이런 사소한 추억도 자연스럽게 잊힐 만하다.

 

 

 

 

 

 

 

 

 

 

 

 

 

 

 

 

 

아무튼, 운 좋게도 책방보다 손님이 많이 오는 알라딘 중고서점에 친필 사인 시집을 만났다. 그것도 크리스마스이브에. 서 아무개 씨, 고맙습니다. 제가 이 시집을 소중하게 간직하겠습니다. 시인을 향한 사랑은 제가 이어갈께요. ‘내가 가진 것은 영원히 남의 것이요, 남에게 주어버린 것은 영원히 내 것이다.’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부처님의 말씀은 틀리지 않았다.

 

 

 

 

 

 

 


※ 사진과 경험담의 진위를 의심하는 서재 이웃들에게 밝히자면, 내 성은 최(崔) 씨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 내 이름 석 자가 궁금하다면 이번에 나온 플로렌스 윌리엄스의 『가슴 이야기』(MID, 2014년)를 구매하거나 읽으면 된다. 책 뒤편에 보면 이 책의 프리뷰어로 활동한 분들의 실명이 있다. 거기에 내 이름이 있다. 따.. 딱히 이 책을 홍보하고 싶어서 추신을 덧붙인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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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14-12-26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 사인본을 중고서점에 파는거 저도 잘 이해 안돼요.
저도 사인본 책이 몇권 있는데 그 책들은 특별하거든요.
그리고 손으로 쓴 글과 함께 선물받은 책도....
그래서 아마도 저분은 여러권의 책을 싸다가 잘못 팔아버린 책이 아닐까 그래서 지금 너무나도 안타까워하고 있진 않을까하고 저 맘대로 상상해봅니다. ㅎㅎ

cyrus 2014-12-26 13:34   좋아요 0 | URL
그랬을거예요. 시집이 얇아서 친필 사인이 있는 줄 생각 못 했을겁니다. 저도 이 책 간수 잘 해야겠어요. ^^

책을사랑하는현맘 2014-12-26 0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좋은 크리스마스 선물이었겠네요!! ^^
서두에 누구나 가지고 있는 연애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길래 cyrus님의 연애 이야기가 나올까 기대했는데요~ㅎㅎ 담엔 그런 이야기도 기대할께요^^;;

cyrus 2014-12-26 13:36   좋아요 0 | URL
저도 이런 달콤씁쓸한 연애담을 풀고 싶은데 사랑의 달콤한 맛보다 쓴 맛만 여러 번 맛보네요. ^^;;

해피북 2014-12-26 0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대구 알라딘에서 ㅎ 저자의 친필 사인본 은 아니지만, 누군가 생일선물로 받고 메세지 까지 담긴 책을 내놓았더라구요 저야 덕분에 좋은 책 구입해서 좋았지만 왠지 씁슬한 기분이 ㅎ 그런데 그게 중고서적을 구입하는 재미도 되는거 같아요 ㅎ

cyrus 2014-12-26 13:39   좋아요 0 | URL
해피님도 대구에 거주하시는가보군요. 알라딘 대구점을 애용하는 서재 이웃 한 분을 드디어 만났네요. 저는 많으면 한 주에 한 번 꼴로 매장에 가요.

라파엘 2014-12-26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특별한 선물을 받으셨네요 ~ ㅎㅎ
그런데 알라딘 중고서점 중에서 판매자의 실명이 공개되는 곳도 있나보군요. 저는 신촌점만 다니는데, 판매자의 실명과 함께 책이 진열되어 있는 것은 보지 못한 것 같아서요 ^^;;

cyrus 2014-12-26 14:12   좋아요 0 | URL
대구점은 `○○동에 사는 ~님이 판 책입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책장이 따로 있습니다. 저는 서울에 갈 때 자주 가는 매장이 종로점이예요. 가끔 신촌점, 건대점에 들리기도 하고요. 제가 기억하기에는 서울 매장에는 판매자 실명을 공개한 책장이 없던 것 같아요. 서울은 동네 매장이 많잖아요. ^^

stella.K 2014-12-26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그래서 저 책을 사 가지고 온 건가?
김용택 시인 글씨 참 멋지다. 저 책을 어찌 팔았을꼬.

그런데 내가 너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보다.
이름은 아는데 성은 모르고.
학교 졸업했던가? 얼마 전 졸업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건 왜 또 안 알렸니? 아, 정말 못 산다. 뒤죽박죽이야. ㅠㅋ

cyrus 2014-12-26 13:46   좋아요 0 | URL
제가 신상 정보는 공개를 안 하는 편이라 잘 모르실꺼예요. 샐린저처럼 살고 싶어요. ㅎㅎㅎ

stella.K 2014-12-26 13:57   좋아요 0 | URL
ㅎㅎㅎ 샐린저...!!!
뭐 내가 그러는 것도 심각한 건 아니군.^^

2014-12-26 14: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12-26 14: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은빛 2014-12-26 14: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판매자의 이름을 공개하나요?

헤어진 옛 애인의 선물을 간직하는 남자,
제 부모님 댁에 아주 오래전 애인에게 받은 초콜릿 상자가 있어요.
직접 만들어서 예쁘게 포장한 상자죠.
아까워서 안 먹고 놔뒀던 게, 어느 구석에 박혀 있었던 모양인데,
결혼하고 몇 년 지난 후에 아내가 찾아내 추궁한 적이 있었어요.
시루스님 글 덕분에 그 때 생각이 나네요. ^^

cyrus 2014-12-26 21:37   좋아요 0 | URL
모든 판매자 이름을 공개하는 건 아니고요, 책을 수십 권 이상 파는 판매자 이름만 공개해서 책장에 따로 진열해요. 그 책장에 가면 ‘oo동에 사는 ~님이 판 책입니다’라는 카드가 붙여 있어요.

은빛님, 그 초콜릿을 오래 보관해놓고 안 먹었다면 상하지 않았나요? ㅎㅎㅎ 저는 초콜릿 상자만 보관한 줄 알았어요.

해피북 2014-12-26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과 교보문고 동시에 갈수있어 좋아하는곳 이예요ㅎㅎ 소문 기대할께요 감사합니다~~^^
 
나의 조선미술 순례
서경식 지음, 최재혁 옮김 / 반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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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아름답니?”

 

마법 거울은 참 신기하게도 세상에서 가장 예쁜 사람의 얼굴을 자신의 몸으로 보여준다. 거울로 인하여 백설공주는 계모 왕비에게 살해될 위험에 처한다. 계모 왕비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라기보다 어쩌면 세상에서 자신보다 더 아름다운 여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참지 못하는 시기심이 많은 여자인지 모른다. 그래서 왕비는 매일 같이 거울에다 대고 누가 예쁘냐고 연신 묻는다. 거울이 자신을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자라고 대답하길 원한다. 알고 보면 계모 왕비는 ‘답정녀’(답을 정해놓은 여자)의 원조이다. 그러니까 왕비 본인은 자신이 예쁘다는 착각에 빠졌다. 거울로부터 듣고 싶은 말을 미리 정해 두고 그 말을 듣기 위해 질문을 한다.

 

거울은 원본을 모방한다. 누구나 거울을 보면서 앨리스처럼 거울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야릇한 충동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눈으로 본 거울상은 진짜도 아니고 영원하지도 않다. 우리는 현란하게 치장한 자신을 비춘 거울상에 일종의 도취를 느낀다. 계모 왕비처럼 거울을 통해 주관적인 '아름다움'을 스스로 판결하려고 한다. 이런 태도는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미화시키는 것과 같다. 그래서 거울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타자를 배제할 뿐 아니라 자기 속에 있는 부정적인 사실을 은폐하고 '나쁜 것'으로 몰아세운다.

 

 


 Scene #2  서경식이 들여다본 ‘미술’ 거울들

 

서경식 선생은 『나의 조선미술 순례』를 펴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미술을 ‘거울’로 비유한다. ‘나는 무엇인가? 지금 어디에 서 있으며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미술이라는 거울을 들여다보는 순례를 시작한다. 과연 선생은 ‘미술’ 거울에서 무엇을 봤을까? 우리나라 미술의 아름다움을 발견했을까? 일단 선생이 본 ‘미술’ 거울은 다음과 같다. 신경호, 정연두, 윤석남, 미희(나탈리 르무안), 홍성담, 송현숙은 지금도 전시회에서 볼 수 있는 ‘미술’ 거울이다. 그렇다면 세상을 살다간 화가 두 명, 조선 후기의 화가 신윤복과 월북 화가 이쾌대는 만든 지 오래된 ‘미술’ 거울이다.

 

그런데 선생이 보는 ‘미술’ 거울 중에 신윤복을 제외하면 나머진 우리에게 낯선 이름들이다. 심지어 우리는 이 ‘미술’ 거울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 미술’과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벨기에에 입양되어 지금도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진 한국계 화가 미희, 파독 간호사 출신의 재독 화가 송현숙 그리고 한국전쟁 때 북한으로 넘어가서 남한 땅에서 잊힌 이쾌대. 이들은 우리와 같은 한국인이면서도 한국적이지 못한 미술로 배제되었다. 거울인데도 디자인이 조금 튄다는 이유만으로 거울들만 모아놓은 진열장에 놓이지 못한 채 하자품으로 분류되어 차가운 창고로 향하는 운명과 같다. 하자품 신세가 된 ‘미술’ 거울은 우리가 생각하는 아름다움 즉 한국적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다.

 

그러나 선생은 자신이 직접 보고, 만져본 이 ‘미술’ 거울들을 ‘우리 미술’로 포함하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이들에 대한 대중의 괴리감을 없애기 위해 애초부터 이 책 제목을 ‘나의 우리 미술 순례’라고 하지 않았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더 넓은 차원의 의미가 내포된 ‘조선미술’이라고 사용한다. 원래 선생은 ‘우리’와 ‘미술’ 사이에 빗금을 넣어 ‘우리/미술’이라고 정하고 싶었다. 배타적인 자의식이 강화되는 ‘우리 미술’이라는 언어의 권위성을 경계하기 위한 것이다.

 

 


 Scene #3  역사의 흉터를 비추는 ‘미술’ 거울들

 

 

 

 

 

신경호 「넋이라도 있고 없고 : 초혼 1980」, 1980년 (왼쪽)

윤석남 「어머니 I : 열아홉 살」, 1993년 (오른쪽)

 

 

 

선생은 8개의 ‘미술’ 거울을 통해 질문한다. “우리는 누구인가?” 이것은 곧 정체성을 되묻는 성찰의 과정이기도 하다. “나는 누구인가?” ‘우리’ 속에 포함된 진짜 ‘나’를 찾는 질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8개의 ‘미술’ 거울에서 우리가 보고 싶은 진짜 ‘나’의 정체성을 보지 않는다. 거울에 비친 얼굴의 흉터가 보기 싫어 일부러 거울을 피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나라는 슬픈 역사의 생채기로 인한 흉터가 많다. 일제 강점기, 골육상잔의 비극으로 인한 남북 분열, 5월 18일 광주의 역사. 깊게 팬 역사의 흉터를 보는 것은 차마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렇다고 절대로 외면하거나 잊어선 안 된다. 몸에 남은 흉터도 ‘우리’ 몸의 일부인 것처럼 우리에게 분열과 고통, 공포를 줬던 아픈 과거도 ‘우리’ 역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역사의 흉터를 외면한다. 반면 아름다운 역사만 보려고 하며 자랑하고 싶어 한다. 아름다운 자신의 모습만 비춰주는 왜곡된 ‘미술’ 거울만 들여다보면서 자아도취에 빠진다. 이런 ‘미술’ 거울들은 대상의 단점을 은근슬쩍 감추고, 장점만 부각해주는 계모 왕비의 마법 거울과 같다.

 

신경호, 윤석남, 미희, 송현숙은 역사의 흉터를 간직한 채 살아가는 화가들이다. 그들은 역사의 흉터를 제대로 볼 줄 아는 진짜 ‘미술’ 거울이다. 신경호는 광주 사람으로서 5.18 민주화 운동의 역사적 진실을 예술적으로 증언하고자 노력한다. 지금도 극우로부터 공격받고, 왜곡되는 가슴 아픈 역사를 예술을 통해 구출함으로써 잊고 여전히 역사 하나로 인해 분열된 ‘우리’의 본모습을 과감하게 보여준다. 윤석남은 위안부 문제에 ‘어머니’와 관련된 아련한 기억을 접목해 공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미희와 송현숙은 디아스포라(Diaspora)의 관점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한다. 6261번째 해외 입양인인 미희는 자신의 처지를 ‘한국 경제성장의 산업폐기물’이라고 과격하게 표현하기도 한다. 그 말 속에 고국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세계의 투명 인간들, 디아스포라의 아픔이 서려 있다.

 

 


 Scene #4  우리가 ‘우리/미술’을 ‘우리 미술’로 부를 수 있는 날은 언제 올까? 

 

선생은 8개의 ‘미술’ 거울을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우리는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을 찾기보다는 끊임없는 타자와 대화하는 시도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일단 계모 왕비처럼 ‘미술’ 거울들 앞에서 질문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우리가 보고 싶고 익숙한 것들은 보지 않으려고 한다. 그 대신 거울에 비친 우리 모습을 향해 물어본다. ‘거울아, 거울아! 우리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선생의 미술 순례는 타자와 자신을 구분하기 위해 우리 스스로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의 빗금을 쳐놓은 ‘우리 미술’의 환상을 의심한다.

 

과연 우리가 ‘우리/미술’을 ‘우리 미술’로 부를 수 있는 날은 언제 올까? 일단 현실에 눈을 감아버리는 ‘우리’라는 단어에서 비롯된 자아도취에서 벗어나야 한다. 환상의 거울만 자꾸 들여다본다면 어떤 대상의 진실을 숨기는 데 급급하고 삐딱하게 반응한다. 사람들은 살면서 끊임없이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무엇을 보게 될까. 진실한 내면이 오롯이 남아있는 정체성일까 아니면 타자의 눈에 맞춘 거짓된 아름다움만 뽐내는 가짜 정체성일까. 진짜 나를 보았을 때, 한 점 부끄럼이 느껴져서 괴롭더라도 전자의 거울이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하다. 거울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마주 볼 수 있는 진실한 물건이다. 이것은 곧 우리나라 미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기도 하다. 진실을 외면하고 환영에 가까운 아름다움만 보여주려는 미술은 계모 왕비처럼 착각에 빠진 대중만 늘어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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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14-12-25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금 이 책 보고 있는 중인데 리뷰 잘 읽었습니다.
어렴풋하게 잡히던 것들이 cyrus님의 리뷰덕분에 더 명확해지네요.

cyrus 2014-12-26 00:14   좋아요 0 | URL
긴 글을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독서중인데 제 글이 의도치 않게 바람님에게 스포를 한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바람돌이 2014-12-26 00:42   좋아요 0 | URL
지금 3분의 2쯤 읽었으니까 스포는 아니구요. ㅎㅎ

stella.K 2014-12-26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이 책 벌써 읽었네.
그렇지 않아도 서평단 신청 왜 안하지 했는데.
난 그저께 도착해서 아직 시작 안하고 있어.
서경식이야 워낙...!

cyrus 2014-12-26 14:01   좋아요 0 | URL
신청하고 싶었는데 그 책에 신청자가 너무 많았어요. ㅎㅎㅎ 운 좋게도 지난주에 도서관 신간코너에 서경식 선생의 책이 있어서 읽게 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