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이유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제인 구달 지음, 박순영 옮김 / 궁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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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침팬지 연구로 유명한 제인 구달은 아름답다. 그녀의 평온하면서도 기품 있는 표정을 보노라면 진정한 미모는 선명한 이목구비나 날씬한 목이 아니라 얼굴 뒤에 숨은 열정과 단단한 내면, 세상을 바라보는 애정과 연민에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자서전 『희망의 이유』에서 본 그녀의 어린 시절의 한 토막에서 이 여성의 ‘오늘’이 어떻게 있게 됐는지를 볼 수 있다. 그녀가 만 두 살도 채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이 어린 소녀는 가족들과 바닷가에 갔다가 달팽이들을 물통에 담아 가지고 왔다. 그러나 어머니가 달팽이는 바다를 떠나면 죽는다고 얘기했을 때 제인은 발작할 지경이 되었고 그 때문에 온 집안 사람들은 하던 일을 즉시 멈추고 제인을 도와 달팽이들을 바다로 바삐 돌려보내야 했던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동물과의 교감이 뛰어났던 구달은 대학 교육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아프리카로 건너갔다. 그는 인류학자인 루이스 리키를 따라 세렝게티 초원으로 가서 초기 인류의 화석 발굴에 참가했고 인간의 과거 모습을 추적하다가 침팬지 연구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녀는 연구를 위해 탄자니아 곰베 지역에 자리 잡았다. 그는 침팬지를 관찰하면서 인간과의 유사성에 놀라워한다. 도구를 사용하여 흰개미를 잡아먹는 침팬지는 ‘도구적 존재’라는 인간 고유의 특성을 위협하는 보고였다. 또한 침팬지도 의사소통을 하고, 원한과 배려의 감정을 나누며 복잡한 사회 조직을 갖는다는 점은 기존의 상식을 뒤흔들었다.

 

구달의 보고는 인간의 본성에 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동종 집단의 갓 태어난 새끼를 잡아먹는 암컷 침팬지, 무리에서 떨어져 나간 배신자 집단과 잔인하게 전투를 벌이는 침팬지들의 모습은 인간의 유전자 안에 이기적 폭력성이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구달은 인간의 문명을 걱정한다. 개별적 경험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면 집합 문화를 이루고 우리와 남을 구분한다. 바로 ‘문화종분화’이다. 문화종분화가 극단화되면 민족, 종교, 이념, 성별 등에 따른 배타적 패거리주의가 발생한다. 타인의 고통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잔인하게 괴롭힌다는 점에서 구달은 인간만이 악마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이기성은 극복이 불가능한 것일까. 구달에 의하면 사랑도 동물적 본성이다. 그녀는 40년간의 영장류인 침팬지 연구와 보호활동을 통해 인간을 보다 풍부하게 알게 됐고 인간에 대한 희망을 발견하게 됐다. 네덜란드의 한 동물원에 살고 있는 암컷 침팬지는 두 마리의 수컷 침팬지가 싸운 뒤 등을 돌리고 앉아 있을 때마다, 둘 사이에 끼어들어 ‘털 고르기’라는 놀라운 솜씨로 화해를 주선한다. 침팬지는 부모 자식뿐 아니라 형제자매 간, 그리고 같은 처지의 고아들끼리 극진한 동정심을 보인다. 어려움을 무릅쓰고 남을 구조하는 이타적 행위도 마찬가지였다.

 

또 어른 수컷 침팬지가 물에 빠진 동료의 새끼를 구하려다 익사했다는 사례도 보고됐다. 인간이 침팬지보다 못할까. 침팬지는 동료 침팬지를 구하기 위해 죽을 수 있을지언정,친구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버릴 것을 의식적으로 결정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인간이 자신의 목숨을 버려 정의를 지키고, 이웃을 구한 사례는 수없이 많다.

 

구달은 인간이 ‘절반은 죄인이고 절반은 성자’라고 말한다. 침팬지도 친구를 돕다가 죽을 수 있지만 의식적으로 결심하는 것은 아니다. 반면 인간은 고문을 알면서도 저항운동을 하고, 죽을 줄 알면서도 낯선 타인을 위해 철도에 뛰어든다. 악과 사랑의 두 가지 방향을 의식적으로 조절할 줄 아는 능력, 이것이 인간만의 독특한 본성이라는 주장이다.

 

그녀는 과학자이면서도 ‘영혼의 힘’을 강조한다. 선한 영혼을 따라 과학의 이름으로 헤쳐 놓은 지구를 생명 가득한 공간으로 되돌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지적 능력, 자연의 회복력, 젊은이들의 열정, 그리고 불굴의 인간정신, 즉 ‘희망의 이유’가 있기 때문에 인간이 동물과 공존할 수 있고, 우리를 품은 환경을 되살릴 수 있다고 강조한다.

 

사실 침팬지 연구가로서 동물보호와 환경보호에 나섰다는 그녀의 프로필만을 봤을 때, 소박한 자연보호 의식을 가진 서양의 여성과학자였다. 세상에 대해 ‘희망’을 갖자고 말하는 그녀의 이야기가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그러나 제인 구달은 세상과 유리되어 연구실에서 연구만 했던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환경파괴로 인해 그녀의 친구들인 침팬지가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봤으며, 곰베 지역 주변의 분쟁으로 인해 연구생들이 납치되는 사건을 겪기도 했다. 그녀는 1977년 제인 구달 연구소(JGI)를 설립했다. 여기에서 아프리카 침팬지와 야생동물의 현장 연구 및 보호사업을 펼쳤다. 침팬지 등 포획된 동물의 보호에도 나섰다.

 

그녀에게서 ‘영혼을 담은 과학’은 곧 실천임을 배운다. 우리가 어머니 지구 안에서 어린아이의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 가능할까. 너와 나의 구체적 행동에 그 결과가 달려 있다.

 

과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제인 구달의 이야기는 세상에 대한 희망의 철학과 평화의 메시지를 간결하게 전하는 종교인과 같은 느낌을 준다. 그녀는 침팬지를 제3자의 시선에서 관찰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하지 않으며 직접 감정을 이입해서 이해하고 대화할 존재로 바라본다. 젊은 나이에 위험을 무릅쓰고 침팬지 연구에 뛰어들어 놀라운 발견을 해냈다는 주목할 만한 에피소드 이상으로 그녀에게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가지는 것은 ‘희망’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그녀의 사상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침팬지 탐구는 결국 인간탐구였다. 침팬지도 우리 인간처럼 사랑하고 질투하고 분노를 느끼는데도 그저 이용과 도구의 대상으로만 생각한다. 침팬지는 지금도 여전히 인간식탁의 별미로 마구잡이로 사냥되고 인간 병의 백신을 위한 실험재료로 사용된다. 인류의 환경파괴와 전쟁, 이기와 탐욕을 우려한다.

 

“인간이 품성을 지닌 유일한 동물이 아니라는 것, 합리적 사고와 문제 해결을 할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이 아니라는 것, 기쁨과 슬픔과 절망을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육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고통을 아는 유일한 동물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덜 오만해질 수 있다.” (278쪽)

 

하지만 이러한 잘못을 극복해낼 힘 또한 인간에게 있음을 확신한다. 위기를 극복하려면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 조금씩이라도 노력하는 길 밖에 없으며, 인간은 분명히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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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은 신성한 공간이다. 거기엔 가장 강력한 정화의 기능을 가진 물과 불이 공존한다. 그리고 그것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가장 깨끗한 것, 즉 음식을 만들어 낸다. 그 음식은 식구들을 먹여 살리고, 또한 그 아궁이의 열기는 집을 덥혀 살린다. 식구들과 집을 살리는 공간, 그래서 부엌은 어머니의 자궁처럼 생명을 키우고 낳는 공간이다. 자고로 부엌의 신이자 불과 물의 신인 조왕신을 떠받드는 풍습이 생겨난 것도 부엌이 가지는 그런 현상학적 의미와 무관하지 않다.

 

김소진의 <부엌>에서 주인공 '나'는 부엌에서 태어난다. 새로 이사 간 집에서는 아이를 방에서 낳으면 안 된다는, 동네 할머니들의 굳은 믿음 때문이었다. 이러한 소설적 설정은 절묘한 데가 있다. 물과 불로 정화되고 생명력으로 충만한 부엌이란 공간에서 아이가 태어난다는 것은 예사롭지 않은 상징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 경우 부엌은 통과제의적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하나의 생명이 우리가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부터 이 세상으로 건너오는 공간이 되는 것이다. 그런 제의적 성격은 부엌의 신성성과 잘 어울린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부엌은 단순하게 주인공이 태어나는 공간으로만 역할하지 않는다. 그것은 중학생이 된 '나'에게 전혀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다. 부엌에 딸린 다락방의 옹이 구멍을 통해 나는 부엌에서 일어나는 은밀한 어른들의 세계를 엿본다. 거기에는 목욕하는 누나의 부끄러운 나신이 내려다보이고, 늘상 마누라를 세끼 밥 먹듯 두들겨 패는 털보와 언제나 허벅지에 시퍼런 멍이 들어있는 마누라 필례 사이의, 그 원수 사이처럼 보이는 부부의, 이해할 수 없는 격정적이고도 질펀한 정사가 펼쳐진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식칼로 오리의 목을 쳐서 피를 받는 장면이 의식처럼 행해지기도 한다.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접하는 그러한 광경은 아릿하고 숨 막히고 사위스럽다. 어른들이 보여주는 그 비릿한 어둠의 냄새, 비밀한 아름다움, 불가사의한 열정, 일상적인 폭력성을 접하면서 '나'는 혼란스럽고 불쾌하다. 그래서 '나'는 어둑어둑한 부엌방에서 모든 식욕을 잃은 채 더 오래 신열을 앓는다. '나'는 차라리 온몸에 피어나는 열꽃 속에서 성장을 멈추고 싶어 한다. '언제까지나 다락방의 아이이자 부엌의 아이로 남고 싶어'한다.

 

그러나 깨달음은 첫눈처럼 다가온다. 어느 첫눈이 오는 날 '나'는 그 신열을 털고 다락방을 내려가기로 결심한다. 그것은 '여태껏 숨죽이고 있던 감각들이 일거에 되살아나는 느낌' 때문이다. '나'는 맹렬한 식욕을 느끼며 다락방을 내려와 안방으로 향한다. 통과제의의 고통을 이기고 마침내 어른의 세계로 입성한 것이다.

 

사람마다 제각각의 '부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부엌의 풍경 중에는 우리를 어른의 세계로 훌쩍 데려갔던, 몹시도 강렬하여 낙인처럼 평생 잊혀지지 않는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는 매일 부엌방을 내려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살아간다는 것은 매일매일 다락방을 내려와 어제와는 조금 더 어른스런 세계로 편입해 들어가는 과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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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유전자 - 2010년 전면개정판
리처드 도킨스 지음, 홍영남.이상임 옮김 / 을유문화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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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과학으로 인간의 본성을 설명하다

 

천도(天道), 즉 하늘의 이치가 옳은지 그른지 헷갈린다는 뜻으로 얄궂은 세상의 이치를 한탄하는 말이다. 삶의 정도를 지키고 살아가는 사람이 오히려 벌을 받고 그렇지 못한 자들이 별 탈 없이 살 수도 있다는 불공정한 세태를 비판한 것이다. 사마천은 이런 세상을 안타까워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하늘의 이치는 사사로움이 없어 항상 착한 사람과 함께한다.’ 백이와 숙제는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들은 어진 덕망을 쌓고 행실을 깨끗하게 하였건만 굶어 죽었다. 하는 일이 올바르지 않고 법령이 금지하는 일만을 일삼으면서도 한평생을 호강하고 즐겁게 살며 대대로 부귀가 이어지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실은 나를 매우 당혹스럽게 한다. 만약에 이러한 것이 하늘의 도라면,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사기열전 1』 ‘백이열전’에서 임의 발췌, 64~65쪽)

 

사마천의 푸념이 오늘의 이 나라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것처럼 들리는 것은 유독 나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사악하고 부도덕한 사람이 착한 사람보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보면 “세상 정말 ×같아”라는 욕이 나온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뱉는 이런 자조 섞인 한탄에는 인간 본성에 대한 부인할 수 없는 한 단면이 압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과연 인간은 선량한 존재인가?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하지만 학창시절에 분명히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을 배운 적이 있다. 이제 새삼 인간 본성이 선한지 악한지를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답할 것인가?

 

마키아벨리는 ‘인간은 사악하고 믿을 수 없는 존재’라고 하면서 인간을 다스리려면 군주는 사자의 용맹과 여우의 머리를 가져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에 반해 칸트는 인간에게는 선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이성적 존재라고 함으로써 합리적 도덕적 인간들이 모여 사는 완전히 개화한 문화의 왕국을 꿈꾸었다. 서양식 성악설과 성선설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러한 주장들은 아직 과학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에 있었던 형이상학적 신념의 표현에 불과하다고 여겨진다.

 

게놈 프로젝트니 유전자 복제니 하는 것들은 모두 분자 생물학의 성과들이다. 분자 생물학을 태동시켜 인간을 물질적인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단서는 DNA 발견이었다. 바로 이 DNA가 생명 단위는 유전자라는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생물학의 한 분야인 진화론을 유전자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리고 덕분에 우리는 인간 본성에 대한 보다 과학적인 설명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다윈의 진화론에 따르면 진화의 단위가 종인지 종 내의 특정한 집단인지가 분명하지 않았다. 그런데 유전자의 발견은 이제 이러한 불투명한 논의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요구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현재 많은 진화론 학자들은 대체로 진화의 단위를 유전자라고 보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이를 종래 다윈식 용어를 빌려 말하면 아종 내의 특정한 집단이 선택의 단위라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이러한 주장을 유전자 선택설, 혹은 집단 선택설이라고 부른다.

 


 Scene #2  계산된 이기심

 

리처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에서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은 유전자를 보호하고 전승시키기 위해 유전자 자신이 만들어 낸 갑옷과 같은 보호 장구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전개한다.

 

이제 유전자 선택설에 따르면 심지어 인간 신체마저도 유전자를 보호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며, 인간의 각종 행위 역시도 같은 방식으로 이해된다. 그리하여 설사 이타적인 행위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과적으로 신체가 보유하고 있는 유전자의 보존에 득이 되기 때문에 그러한 행위가 가능하다고 주장된다. 타인을 위한 봉사와 희생이 이기적 유전자의 자기 보존이라는 메커니즘으로 설명됨으로써 우리는 인간성에 대한 신뢰의 한 축이 무너짐을 느낀다.

 

그런데 도킨스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 본성이 ‘계산된 이기심’임을 분명히 한다. 그가 그렇게 말하는 이유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렇다.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이 무엇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5개 정도 조건 전략자를 가정하여 진화 시뮬레이션을 전개한다. 5개 정도 조건 전략자에는 비둘기파, 매파, 보복파, 허풍파, 시험보복파이다. 비둘기파는 싸움을 피하는 조건 전략자다. 반면에 매파는 싸움을 걸고 완전히 패배하기 전까지는 물러설 줄 모른다. 보복파는 매파에 대해서는 매파처럼 비둘기파에 대해서는 비둘기파처럼 행동한다. 허풍파는 매파처럼 행동하지만 반격을 해오면 꼬리를 말고 도망친다. 시험 보복파는 매파처럼 싸움을 걸되 상대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계속 매파로 행동하고 상대가 강한 모습을 보이면 비둘기파로 변신한다.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지금까지 말한 다섯 개 전략자 모두를 서로 자유롭게 행동하도록 하면 보복파와 시험 보복파만이 진화적으로 안정됨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결론은 야생 동물 세계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인간 역시도 동물의 한 종이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을 꾀하는 종족이라는 측면에서 상기한 이론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설사 인간들이 일견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어떠한 종류의 사안에 대해 합의를 하거나 협정을 맺는 사례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개인이 전원 의식적으로 장래를 예견하고, 그 협정의 규약에 따르는 것이 자기의 장기적 이익에 좋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생존을 위해 카멜레온처럼 변하는 인간들을 보면서 그들은 하늘이 주신 저 능력, 즉 이성을 저렇게 간교하게 사용하는구나 하고 탄식하였겠지만, 도킨스에 따른다면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곧 인간이란 기본적으로 반사회적인 적대감을 낳는 성급한 탐욕뿐 아니라 사회화를 가능하게 하는 계산된 이기심 또한 갖고 있는 존재임을 이 책은 과학의 성과에 근거하여 아주 솔직하고 담백하게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Scene #3  인간은 유전자의 ‘생존기계’


인간의 의지를 철저히 무시하고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식의 주장에 당혹감을 느낄 독자들도 적지 않을 터이다. 특별한 그 누군가를 사랑하고, 인류에 봉사하는 의로운 행동을 하는 것조차 모두 ‘유전자의 명령’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생물 세계에서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동들은 모두 유전자 존속과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는 기계인 생물의 생존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모든 행동은 '이기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해석 때문에 일부 생물학자들은 도킨스는 유전자 결정론을 선동하는 초(超)다윈주의자라고 몰아붙이며 자연선택 과정을 유전자 수준에서 설명할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렇게 비판하는 사람들도 이기적 유전자론이 진화론을 좀 더 효율적으로, 그리고 그럴듯하게 설명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 책을 처음 접한 독자들이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도 이 같은 유전자 진화론 때문이다. 인간의 주인이 인간이 아닌 불멸의 복제자인 유전자라니, 인간의 자율성과 존엄성을 무시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인간의 자율성 논란은 뒤로 하더라도 실제로 유전자 불멸성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인간의 예상 수명은 기껏해야 100년 이내지만 유전자 생존 단위는 100만년 이상이기 때문이다.도킨스가 이 책을 쓴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진화론의 효과적인 옹호를 위해서일 뿐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그는 진화를 설명하는 데 있어 개체와 유전자는 관점만 다른 것일 뿐 차이가 나는 주장이라고 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두 가지 견해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둘 다 옳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책의 제목 그대로 사람의 이기적 특성을 결정짓는 유전자가 있다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유전자 자체가 이기적이라는 뜻이다. 이기적인 것은 유전자이고, 인간 개개인은 유전자의 목적을 수행하는 ‘생존기계’일 뿐이다. 인간 개체가 생존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이런 저런 유전자를 진화시키고 이어받은 것뿐만 아니라 유전자가 자기 복제자를 대대로 유지하기 위해 개체를 이러저러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Scene #4  유전자의 지배를 받지만, 극복할 수 있다 


사실 도킨스의 이론은 다분히 결정론적인 측면이 강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인간이란 존재는 다른 생명체와 비교해 특별할 것 없는,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생존기계’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결론에 이르면 사실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고민도 크게 의미를 갖지 못한다.


하지만 이 책이 주는 교훈이 단순히 인간도 그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살아가는 수많은 생명체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다른 생명체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 인간 진화의 역사 역시 생존을 위한 이기적인 역사였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시점부터가 이 책이 주는 진정한 의미다.

 

여전히 인간이 유전자에 휘둘리는 생존기계라는 사실에 찝찝한 독자가 몇 분 있을 것이다. 그래도 걱정하지 마시라. 도킨스는 이타성을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한 개념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에 대한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밈(Meme) 이론이 그것이다. 유전자(Gene)에 대응시켜 도킨스가 만들어낸 용어인 밈은 ‘문화적 진화’의 단위다. 생명체가 유전자의 자기복제를 통해 형질을 후세에 전달하는 것처럼, 밈도 자기복제를 통해 사회와 인류의 문화를 만들어나가는 원동력이 된다.


비록 생존을 위해서 이기적인 행동을 선택하더라도 우리는 유전자의 의지에 대항할 수 있다. 인간은 유전자를 보존하기 위한 생존기계일 뿐이겠지만 그 기계를 제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하고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유전자 때문이 아닌 인간의 자율의지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그저 인간도 이기적인 유전자에 의해 지배받는 존재란 결론을 내린다면 오해다. 인간이 수많은 생명체와 별반 다르지 않은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어떻게 하면 인간이 이성이라는 선물로 이를 극복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게 책에서 찾아야 할 교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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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사는 사람들이 있다. 마치 신파극에 나오는 전형적인 대사처럼 ‘우리들의 마음 속에 영원히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신파극의 대사는 억지 눈물을 강요하지만, 이들이 살고 간 삶의 흔적과 후대에 남긴 유산은 우리에게 종종 살아갈 힘과 희망을 준다. 그래서 그들은 영원히 잊혀지지 않고 우리 안에서 반추되고 끊임없이 다시 태어난다.

 

이들이 하나의 신화처럼 우리에게 되새김당하는 것은 그네들의 보통 사람들과 다른 극적인 삶에서 비롯한다. 청천벽력 같은 불운의 연속에도 꿋꿋이 운명에 맞서며 오히려 ‘희망 바이러스’를 전파하는 어떤 이는 그 존재만으로도 힘든 시기를 살고 있는 동시대 사람에게 큰 힘이 된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놓지 않고 치열하게 살다 허망하게 세상을 떠난 이는 남은 이들을 안타깝게 한다.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20대에 모든 것을 보여주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렇기 때문에 영원히 20대에 머물며 살고 있는 제임스 딘, 리버 피닉스 같은 요절한 천재도 하나의 텍스트가 되어 회자된다.

 

오늘이 ‘영원한 문학소녀’ 장영희 교수가 사랑하는 아버지 곁으로 떠난 지 5년째 되는 날이다. 오랜 독자들만 그녀를 기억할까. 잇따른 암 선고와 투병생활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오히려 그 자신의 밝은 에너지를 글과 강의로 전파해왔던 그녀였기에, 생각날 때마다 그녀의 글을 읽어도 존재의 허전함을 잊을 수가 없다.

 

 

 

 

 

 

 

 

 

 

 

 

 

 

처음에 그녀를 만난 것은 시간을 거슬러 한창 군대에서 복무하고 있었을 때다. 우연히 생활관의 책장에 꽂혀 있는 장영희 교수의 책이 『문학의 숲을 거닐다』였다. 나는 그 때까지 그녀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책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문학 에세이였다. 나는 그 책에서 <로미오와 줄리엣>, <위대한 개츠비>, <까라마조프 가의 형제들>과 같은 명작들을 새롭게 만났다. 나는 문학에 대해 무지했지만, ‘문학은 우리가 진정 사람답게 살아가도록 우리를 지킨다’는 말이 좋았다. 문득 나는 그녀의 문학보다 그녀의 삶이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녀의 에세이집인 『내 생애 단 한 번』을 읽게 되었다.

 

에피소드마다 그녀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성당 옆 자리에 앉은 할머니가 건네는 ‘구심’환을 받고 나눔을 모르는 자신의 이기성을 탓하고, 차마 미안하다고 말을 건네지 못한 이들에게 글을 통해 미안하다는 말을 전한다. 치부를 드러내는 솔직함, 그리고 반성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는 그녀가 너무나 순수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글을 읽으면 찌들고 일그러진 마음을 맑은 물에 헹군 듯, 마음이 맑아지는 것을 느낀다. 장애인으로서 취학과 진학 때 마다 괴로움과 설움을 겪어야 했고, 하루하루의 생활이 고통이며 투쟁인 그가 그 고통과 수모를 모두 삭여서 그토록 맑고 밝은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면서 위안이 되기도 한다.

 

국내 어느 대학 박사과정에 응시했다가 면접고사장에 들어서자마자 “우리는 학부 학생도 장애인은 받지 않아요. 박사과정은 더 말할 것도 없지요”라는 냉혹한 선언을 듣고, 차분하게 “그런 규정을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인사하고 나와서는 영화 ‘킹콩’을 보러가, 그 거대한 고릴라가 포획되기 전 사랑하는 여자를 바라보는 말할 수 없이 슬픈 눈 때문에 한없이 울었다고 한다.

 

단지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자신과 가족들이 겪었던 여러 곡절들을 담담한 어조로 말한다. 마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음기까지 머금으면서. 그래서일까? ‘어렸을 때 꿈은 무엇이 되고 싶다가 아니라 어디에 가고 싶었다’라는 문장을 읽자니, 늙은 아버지의 숱 없는 머리를 보는 것 마냥 까닭 없이 서러워진다.

 

다소 비현실적이라고 할 만큼 불운했던 일들을 자신의 몸 안에 담고 살아왔지만, 그녀는 절망에 빠지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파하는 ‘희망 메신저’로서의 삶을 살아왔다. 암 투병’을 하는 ‘장애인’이라는, 범인(凡人)으로서는 절망적 상황에서도 늘 소녀처럼 웃으며 강단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문화계 인사들과 교류하며 활발한 삶의 에너지를 뿜어냈다. 그녀의 삶 자체가 힘든 시기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의 모범이 되었던 셈이다.

 

 

 

 

 

 

 

 

 

 

 

 

 

 

나의 독자들과 삶의 기적을 나누고 싶다.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기적이고, 나는 지금 내 생활에서 그것이 진정 기적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난 이 책이 오롯이 기적의 책이 되었으면 한다.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프롤로그 중에서, 11쪽)

 

 

그녀가 죽음에 맞서 보여줬던 강력한 희망의 힘은 그대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고, 또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수필집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에도 오롯이 담겼다.

 

유작에서도 그녀는 세상은 살만하다고 ‘희망’을 담아 전한다. 그렇기에 고인은 절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희망이 있다’고 담담하게 이야기의 보따리를 풀었다.

 

그러므로 그녀의 책은 지금도 독자에게 진짜 보물이나 다름없다. 이 때문이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저자가 직접 교정을 본 이 책은 물론이거니와 『내 생애 단 한 번』이나 『문학의 숲을 거닐다』라는 제목을 단 고인의 책들이 지금 덩달아서 또다시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인지도...

 

 

 

 

 

 

 

 

 

 

 

 

 

 

“간혹 아침에 눈을 뜨면 불현듯 의문 하나가 불쑥 고개를 쳐듭니다. 어제와 똑같은 오늘, 아등바등 무언가를 좇고 있지만 결국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딱히 돈인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명예도 아닙니다. 나로 인해 누군가 고통 하나를 가라앉힐 수 있다면, 장영희가 왔다 간 흔적으로 이 세상이 손톱만큼이라도 더 좋아진다면, I shall not live in vain...” (97쪽)

 

 

그녀는 어느 계절도 아름답지 않은 계절이 없고, 매일 소중한 하루라고 말한다. 또 우리 삶의 계절 또한 지금 이 순간의 계절이 가장 아름다우니 지나간 시간에 연연할 것 없다고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왔다 간 흔적의 시간은 너무나도 아름다웠기에 잊기 힘들고 그립다. 그래서 ‘절친’ 김점선 화백과 함께 돌아온 긍정과 희망의 메시지가 무척 반갑다. 아마도 두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흐뭇하게 미소 지면서 시화집 전시회를 보고 있을 것이다.

 

 

 

 

 

김점선  「장영희에게」

 

김점선씨가 이 초록빛 풀밭의 행복한 말을 장영희의 말로 지정한 이유는 뭘까? 황우석의 줄기세포 꿈은 멀어져 가버렸지만 금방이라도 뒷다리를 쭉 펴고 벌떡 일어날 듯한 저 빨간 말의 힘을 소망했을까. 아니면 세 평짜리 복잡한 연구실에 갇혀 이런저런 집착의 끈을 놓지 못하고 사는 내게 저 넓은 초원의 자유를 선사하고 싶었을까. 아니, 그보다 난 아무리 생각해도 바로 저 표정, 금방이라도 웃음이 터질 듯한 표정 때문에 이 예쁜 빨간 말이 내 말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김점선씨 옆에 있으면 늘 그렇게 웃기 때문이다. (205~207쪽)

 

이해인 수녀는 “장영희와 김점선이 하늘나라에서 우리에게 함께 보내는 봄 편지, 희망과 위로의 러브레터”라고 말했다. 희망을 갖고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있는 시화집과 전시회는 분명히 그녀의 바람대로 누군가 고통 하나를 가라앉히고, 이 세상이 손톱만큼이라도 더 좋아질 수 있을 것이다. 생전 그녀가 좋아했던 에밀리 디킨슨의 시 구절처럼 말이다.

 

 

 

 

 

 

 

 

 

 

 

 

 

 

아픈 마음 하나 달랠 수 있다면
나 헛되이 사는 것 아니리
한 생명의 아픔 덜어줄 수 있거나
괴로움 하나 달래 줄 수 있다면
기진맥진 지친 울새 한 마리
둥지에 다시 넣어 줄 수 있다면
나 헛되이 사는 것 아니리

 

 

(에밀리 디킨슨, ‘만약 내가’)

 

 

그녀는 이 시를 좋아하는 이유를 정말 마음의 문을 열고 누군가가 자신으로 인해 고통 하나라도 가라앉힐 수 있다면 그게 더 의미 있는 삶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 내지는 호기심이 생긴다고 말했다. 디킨슨의 시를 좋아했던 그녀는 시인의 고독하지만 정결한 삶, 절대자를 사랑하고 삶과 죽음의 본질을 관통하던 시인을 닮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디킨슨은 세상과 고립되어 시를 썼지만, 그녀는 문학이 무언지도 모르는 세상의 작은 사람들, 그저 일상조차 버거운 보통 사람들을 위해 문학의 숲으로 이끌어주었다. 더욱이 문학을 위한 문학을 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위로가 되는 문학, 희망이 되고 힘이 되는 문학이 무엇인지 보여줬다. ‘살아갈 기적’에 감사하는 삶을 사는 것이 우리가 그녀의 삶과 글을 기억하는 일이다.

 

 

P.s 당신이 사랑했던 에밀리 디킨슨, 엘리자베스 브라우닝, 윌리엄 예이츠와 함께, 그리고 문학과 함께, 그렇게 그리워했던 아버지와 함께, 그 곳에서는 아프지 말고 항상 평안하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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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을 위한 변명 - 혁명가 정도전, 새로운 나라 조선을 설계하다
조유식 지음 / 휴머니스트 / 2014년 2월
평점 :
품절


 

 

 Scene #1  문제적 인간, 정도전

 

물 1g의 온도를 섭씨 1도 올리려면 1㎈의 열량이 필요하다. 그러나 0도의 얼음을 같은 온도의 물로 변화시키기 위한 융해열은 80㎈에 달한다. 즉 1g의 얼음을 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열량은 같은 양의 물의 온도를 무려 80도나 올릴 수 있는 열량과 같다.

 

한 사회에서 벌어지는 각종 변화들은 얼음이 물로 변화하는 과정과 많이 닮아 있다. 갑작스러운 변화처럼 보여도 밑바닥을 살펴보면 이미 오래 전부터 그 변화를 위해 뿌려진 밑밥이 적지 않게 깔려 있는 경우가 많다.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의 배경만 들여다보아도 소수가 권력과 부를 독점하는 구체제의 오랜 모순, 과도한 군사비 지출에 따른 국가재정 파탄, 계몽사상의 확산 등 수도 없이 깔린 밑밥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혁명은 대개 아름답고 숭고한 이상을 명분으로 삼지만, ‘혁명은 혁명가와 독재자, 그리고 시민의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처럼 결과는 참혹하기 마련. 국가와 체제가 흔들리는 ‘개와 늑대의 시간’은 피아의 구분을 무너뜨리고 긴 시간 믿어온 절대적인 신뢰와 가치마저도 잊게 만든다.

 

정도전은 국사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 꽤 혼란스러운 존재다. 조선을 건국할 때 정도전은 거의 모든 분야에 관여한다. 한양 천도, 조세 개혁, 사병 혁파, 병법서와 법전 편찬 등 빠지는 곳이 없었다. 그런데 정작 조선을 건국한 주인공은 이성계로 나온다. 그뿐만 아니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정몽주는 끝까지 고려를 지킨 충신으로 등장한다. 이에 비해 정도전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 채 역적 누명을 쓰고 역사 무대 밖으로 강제로 퇴장 당했다.

 

백성들을 위한 민본정치를 꿈꾸며 가슴에 품고 있던 웅지를 다 펼쳐보지 못하고 죽은 정도전의 시신은 오늘 현재까지 찾을 길이 없고 묘소도 없다.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여지고 더더욱 조선실록은 패자(覇者)의 그늘에서 써져서 일까?

 

2인자는 양날의 검과도 같은 자리다. 2인자는 1인자를 보필하는 책사(策士)이자 실권자이며 후계자로 여겨지지만 1인자의 자리를 넘보는 순간 제거대상에 오른다. 또 2인자는 상황에 따라서 가차 없이 버림받기 일쑤다.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万人之上)’ 정도전. 그는 뛰어났기에 불우했던 2인자였다.

 

왕조시대를 살았던 곡절 많은 정치인들의 생애는 그가 펼쳐보였던 삶의 궤적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유배지에서 한양으로, 멸망 왕조에서 새 왕조의 개국 공신으로, 재상에서 간신으로, 최고 실권자에서 반역자로. 그를 설명해 낼 주제어들은 여럿이다. 그만큼 정도전은 여러 무늬와 결로 해석된다. 역사를 바라보는 입장에 따라 그 폭과 깊이는 더해질 수 있다.

 


 Scene #2  혁명을 위해 스스로 ‘장량’이 되다 

 

그런 정도전을 다시 평가를 위한 무대로 호출했다. ‘변명’이라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역사 속에서 그려진 정도전의 모습은 나라를 망친 인물이었다. 조선 왕조 500년 기간 동안 나라에 해악을 끼친 역적으로, 말기인 대원군대에 이르러서야 겨우 복권됐던 인물이다.

 

“정도전은 술에 취하면 자신과 이성계의 관계를 중국 한(漢)나라 고조 유방과 참모 장량의 관계에 비유하며 ‘한 고조가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 고조를 이용한 것이다’고 했다.” (42쪽)

 

이는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했지만, 그는 형식적인 시조였을 뿐 실질적인 시조는 정도전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정도전은 요동정벌을 꿈꾸며 나라를 명나라와의 전쟁이라는 위기 속으로 몰아넣은 인물이었으며, 개혁이라는 명분 앞에서 스승과 친구에게도 가차 없는 비판을 가했던 냉혈한이었다. 고려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흑색선전도 마다하지 않았던 점에서 철저한 정치인이었기도 했다.
 
21세 때 당시 개혁군주로 인기가 높던 공민왕의 일탈행위를 폭군의 비행에 비겨 신랄하게 꼬집었던 대단한 배포를 가졌지만 한편으로는 정도전 스스로 자신을 치켜세우기 위해 ‘유방과 장량’을 인용했던 모습에서 겸손하지 못한 그의 성격을 알 수 있다. 냉정하고 자존심이 높았던 성격이 주변으로부터 질시와 시기를 야기하였고 이성계와의 관계를 군신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혁명동지로 인식했다는 것이 최대의 부덕이기도 하다.

 

조선의 헌법 초안인 <조선경국전>, 역사책 <고려사>, 불교비판서 <불씨잡변> 등이 그의 손에서 나왔다. 특히 <조선경국전>과 <경제문감>은 이후 조선의 헌법전인 '경국대전'의 기초가 된 것으로, 조선왕조가 그의 손에 의해 기획됐음을 알 수 있다. 경복궁 건축과 수도 한양도 바로 그의 작품이다.

 


 Scene #3  “인심을 얻지 못하면 백성은 인군을 버린다”

 

정도전이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하는 데 앞장섰던 것은 절대왕권의 시대를 끝내고 입헌군주제의 시대로 가야 한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길만이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살리고 나라를 구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정도전의 민본위주의 정치사상은 단순히 유교적 정치사상을 도입한 것이 아니라 고려 말 부패한 지배계급 아래에서 신음하던 백성들과 함께 생활하는 과정에서 얻어진 정신이었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의 서문에 이렇게 썼다.

 

“인군의 ‘위’는 높기로 말하면 높고, 귀하기로 말하면 귀하다. 그러나 천하는 지극히 넓고 만민은 지극히 많다. 만일 인군이 천하 인민의 인심을 얻지 못하면 크게 염려할 일이 생긴다. 인심을 얻으면 백성이 복종하지만 인심을 얻지 못하면 백성은 인군을 버린다.” (『조선경국전』 한영우 역, 올재클래식스, 36쪽)

 

정도전은 <맹자>의 민본주의를 자기 사상의 근본으로 삼았다. 유교적 민본주의에서는 군주의 정통성을 천명에 두고 있으며 그 천명은 궁극적으로 백성에 의해 확보되고 유지된다. 맹자에게 정치적 행위의 현실적 근거가 민심이라면, 이념적 근거는 하늘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유교적 민본주의의 두드러진 특징이며, 정도전도 이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정도전은 왕권의 세습을 인정하면서도 권력을 감시·통제하고 분산시키는 장치를 마련하는 데 많은 힘을 쏟았다. 왕권은 어디까지나 상징적이고 관념적인 것으로 실제로 절대 권력을 마구 휘두르는 독재자로 군림해서는 안 된다는 게 정도전의 믿음이었다.

 

여기서 재미있는 일화를 소개하자면 정도전의 역성혁명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 <맹자>를 그에게 소개한 사람이 같이 공부하면서 지낸 지음(知音) 정몽주라는 것이다. 귀양을 가게 된 정도전에게 소일거리삼아 읽으라며 보내준 책 한 권이 고려의 역사를 마무리 하게 된 단초가 되었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Scene #4  “민본주의를 이뤘는가?”  

 

정도전 그리고 조선 건국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자문해본다. 만약 정도전이 살아 돌아온다면 백성, 즉 국민을 위한 정치를 일으켜 세울 수 있을까? 과연 한국 사회는 정도전에게서 어떤 현실적 가능성을 만날 수 있을까?

 

정도전은 재상 정치론 때문에 왕권 정치를 추구하는 이방원의 역습을 받아 목숨을 잃었다. 정도전이 추구한 민본주의는 자신이 직접 왕이 되거나 백성을 주권자로 내세울 때 실현 가능성이 훨씬 높은 이념이었다.

 

그러나 정도전의 힘과 역사 인식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는 왕권의 원천이 백성에게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백성의 주권이 왕이라는 매개체 없이 작동하는 체제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실천적 한계를 인식하고, 이성계의 아들 가운데 왕의 자질이 가장 뛰어났던 이방원을 후계자로 밀고 그를 통해 민본주의를 구현했더라면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과 전혀 다른 방향 혹은 더 화려하게 발전하는 방향으로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정도전을 위한 변명』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정치하는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정치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이벤트 정치, 가장 친했던 친구와 스승조차에게도 칼을 겨누는 냉혹함, 인신비방이 난무하는 추악한 모습 등.

 

특히 정도전의 입을 빌려 나라가 안팎으로 위기에 몰려 있을 때 은거하면서 그저 자기 몸 하나 보전할 생각만 하는 이름만 ‘선비’인 관료들의 위선을 꼬집기도 한다. 지금 이 시대에도 자칭 관료라는 사람들이 이러한 정도전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삶을 살고 있다면 국민과 나라를 위해서 한번 생각해 볼만한 가르침이다.

 

완벽한 성공은 철저한 실패만큼 길하지 않다. 조용한 가운데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초심을 잃지 않고 미리 계획한 대로 한 국가를 부수고 한 국가를 세운 혁명가 정도전이다. 뼈를 깎는 자기혁신과 민본주의, 부국강병의 의지는 21세기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특별한 울림을 준다.

 

지금 대한민국에 필요한 정치인이나 관료에게 필요한 덕목은 태평성대를 불러올 마법의 능력이 아니라 바른 가치와 비전, 그리고 이를 끌어낼 통합의 리더십일지도 모른다. 갈등을 조정하고 사회적 합의를 끌어낼 소통의 시스템을 복원하는 과정이 더욱 중요하다. 그게 민주주의의 작동원리다.

 

700여 년 전, 이 땅에서 벌어진 혁명은 오늘날 많은 것을 시사한다. 언제나 그렇듯 역사는 과거를 논하지만, 결국 그 생각의 끝이 닿는 곳은 현재이다. 2014년의  ‘정도전’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누구를 위한 국가인가, 그리고 그 누구를 위한 국가의 모습이 아니라면 혁명조차 기꺼이 감내해야 한다는 가장 불온한 서사이다. 의도했건 의도치 않았건, 부활한 정도전은 우리에게 묻는다. “민본주의를 이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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