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군이 이미 교과서를 통해서 알고 있는 것이지만, 이것 역시 입학 시험과는 상관 없는 이야기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 주기 바란다.  면에는 안과 겉이 있다.  예를 들자.  종이는 앞뒤 양면을 갖고 지구는 내부와 외부를 갖는다.  평면인 종이를 길쭉한 직사각형으로 오려서 그 양끝을 맞불이면 역시 안과 겉 양면이 있게 된다.   그런데 이것을 한 번 꼬아 양끝을 붙이면 안과 겉을 구별할 수 없는, 즉 한쪽 면만 갖는 곡면이 된다.   이것이 제군이 교과서를 통해서 잘 알고 있는 뫼비우스의 띠이다.  여기서 안과 겉을 구별할 수 없는 곡면을 생각해 보자.  

- [뫼비우스의 띠] 중에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수록, 조세희 -

   

 

  두 명의 나폴레옹  

 

 

 

 

 

  

    

 

 

1804년 7월 국민 투표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프랑스의 황제가 된 나폴레옹(1769~1821)은 같은 해 12월 2일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성대한 대관식을 거행했다.  나폴레옹은 이 역사적인 행사를 기록하여 후대에 남기고 싶었는지 자신의 밑에서 전속 화가로 활동하고 있었던 자크 루이 다비드(1748~1825)에게 맡겼다.  

자크 루이 다비드는 프랑스 혁명이 발발할 때 자코뱅 당원 소속으로서 혁명에 가담하였으나 당시 자코뱅당의 지도자인 로베스피에르(1758~1794)가 처형당하여 권력이 몰락당하자 투옥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급직적인 혁명파들이 하나씩 숙청당하는 피바람 속에서도 다비드는 기사회생하였다.  제1통령 시절이었던 나폴레옹에게 종용되어 전속 미술 감독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다비드의 인생은  커다란 반전을 겪게 되었다.   언제 죽음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르는 자코뱅파의 화가였다가 이제는 프랑스 전 지역을 다스리는 절대왕권의 권력자에게 총애를 받는 '왕의 화가' 가 되었던 것이다.   나폴레옹이 황제로서 절대권력을 누렸듯이 다비드 역시 미술계 최대의 권력자가 되어 프랑스 화단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자크 루이 다비드 <나폴레옹의 대관식>  1807년 

  

나폴레옹은 다시 다비드에게 그의 승리의 행진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1804년 12월의 노트르담 대관식을 그려달라고 요청했다.   이것은 화려함이 극치에 이른 행사였다.  프랑스의 내로라하는 인물은 모두 이 성당에 모였다.   교황 피우스 7세도 참석했고,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 대표를 보냈으며, 장-프랑수아 르쥐외르는 특별히 음악을 작곡했다.  교황은 나폴레옹을 축복하여 고요한 성당 안에서 "황제 만세" 를 외쳤다.   다비드는 이 장면을 <조세핀의 성사 1807>라는 제목으로 1807년 11월에 완성했으며, 이것을 "나의 탁월한 주군에게" 바쳤다.  나폴레옹은 환호작약하여 '예술에 기여한 공로로' 다비드에게 레지옹 도뇌르 훈위를 수여했다.  그는 다비드의 가슴에서 훈장을 꽂아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 당신 덕분에 프랑스에 고상한 취향이 되살아 났소. "  

- 알랭 드 보통 <불안> 중에서 -  

  

그러나 다비드는 이 대관식 장면을 한 장의 스냅 사진을 촬영한 것처럼 즉석에서 바로 그려낸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그 당시 승리의 도취감이 하늘에 찌를 정도로 위풍당당하였지만 주변 유럽 국가들과 교황은 나폴레옹의 등장에 썩 달갑게 여지기 않았다.    다비드가 그린 나폴레옹의 대관식 장면은 막강한 권력을 가진 영웅, 단 한 사람을 위한 성대한 잔치에 불과했다.  

 

 <나폴레옹의 대관식> 일부  

   
 

중앙에 특별히 마련된 좌석에 앉아 있는 귀부인이 나폴레옹의 어머니이다. 

그러나 그녀는 실제로는 대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왕관을 씌우려고 하는 나폴레옹의 뒤에 앉아 있는 사람은  

당시 로마 교황 피우스 7세(1742~1823)이다.   

 
   

 

프랑스의 '영웅' 이자 '절대권력자' 는 장엄한 대관식을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해서 다비드에게 특별한 요구를 하게 되는데 실제로 대관식에 참석하지 않는 자신의 어머니를 중앙에 그려넣으라고 하였고 자신보다 연상인 황후 조세핀을 우아하고 젋은 '영웅' 의 아내로 미화하여 묘사할 것을 주문하였다.  

그리고 다비드가 그린 대관식 장면 속에 압권은 나폴레옹의 모습이다.  황제를 상징하는 왕관을 쓴 나폴레옹이 부인 조세핀에게 직접 왕관을 씌워주고 있다.  양손에 왕관을 쥔 나폴레옹의 모습에는 황제로서의 위엄이 묻어나 있다.   

나폴레옹 뒤에 앉아 있는 사람은 당시 로마 교황이었던 피우스 7세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기존의 대관식 장면을 그린 그림들은 교황이 직접 황제가 될 사람에게 왕권을 수여하는 장면이 그려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다비드의 그림에는 교황은 그저 황제 뒤에 앉아 있을 뿐이다.  

피우스 7세는 프랑스 혁명 이후로 프랑스와 적대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나폴레옹과의 종교협약을 맺음으로써 프랑스에 로마 가톨릭교를 부활시키는 동시에 화해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종교협약은 유럽 왕권에 대한 교황의 지위가 한 단계 격하되는 계기가 되었다.  나폴레옹의 등장은 곧 왕권이 교황의 지배권으로부터 독립되었다는 것을 증명해준 사건이었다.   그림 속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교황은 나폴레옹의 원맨쇼를 앉아서 지켜볼 수 밖에 없는 대관식을 참관만 하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대관식이 치뤄진 뒤 2년 뒤에 나폴레옹은 교황의 교회령에 대한 세속적 지배권을 제한하는 정책을 취하여 교회령의 병합을 선언, 교황 피우스 7세를 체포함으로써 오랫동안 유럽 왕권을 군림하였던 교황권의 지위를 굴복시키는데 성공하고 만다.  

 

<프랑스 초대 황제 나폴레옹의 대관식 행렬> 제임스 길레이, 1805년  

  

실세를 잡은 나폴레옹 황제는 자신의 권력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반동적이거나 풍자 신문을 폐간할 것을 명하고 심지어 자신의 외모에 풍자하는 것까지도 허용하지 않았다.  나폴레옹이 왕권을 잡고 있었던 시기에 다비드를 비롯한 화가들은 그를 신격화하는 그림들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힘이 미치지 않는 유럽에서는 프랑스의 젋은 영웅을 마음껏 조롱하고 풍자할 수 있었다.   영국의 풍자화가 제임스 길레이(1756~1815)는 다비드가 대관식 장면을 제작하고 있었던 무렵에 마찬가지로 똑같은 주제의 장면을 그렸는데 다비드의 그림과는 다르게 대관식 장면을 희화화하였다.   길레이는 단순히 영웅인마냥 자아도취에 빠진 황제만 비난한 것이 아니라 속으로는 불만에 가득차 있으면서도 나폴레옹의 등장에 환호를 하는 당시 유럽 국가와 교황의 이중적인 태도까지도 조롱하였다.   

 

제임스 길레이는 추종자, 아첨꾼, 죄수를 이끌고 점잔빼며 걸어가는 황제의 모습을 그렸다.  황제는 잔뜩 부풀어 올라 우쭐거리고 있다.  교황 피우스 7세도 등장하지만 다비드의 그림에서와는 달리 길레이의 교황은 가운 밑에 성가대의 소년을 감추고 있는데, 이 소년은 가면을 벗고 악마의 얼굴을 드러낸다.    (중략)   행렬을 나폴레옹이 정복한 프로이센, 스페인, 네덜란드의 대표들이 이끌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자발적으로 그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들 뒤에는 족쇄를 찬 병사들의 행렬이 따라온다.   따라서 나폴레옹은 백성이 자발적으로 권력을 내준 황제가 아닌 것이다.    

- 알랭 드 보통 <불안> 중에서 -  

 

길레이의 풍자화가 유럽 곳곳에 유행하기 시작하자 나폴레옹은 자신의 희화화한 그림을 프랑스로 반입하는 자를 재판없이 수감하도록 강력한 지시를 내렸다.   영국 출신의 풍자화가가 그린 단 한 점의 그림 때문에 나폴레옹은 얼마나 심기가 불편했던 것일까?    그는 또 영국을 침공하여 정복하게 된다면 반드시 제임스 길레이를 찾아내겠다고 엄포를 할 정도였다.  

 

 

  거짓말같이 오고 만 해방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이 1943년 들어 연합국의 우세가 확실해짐에 따라 연합국측은 전후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1943년 카이로 회담을 열었으며, 한국에 대해서는 적당한 시기에 독립시킬 것을 결의하였다.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는 신탁 통치가 거론되었으며, 1945년 7월 포츠담 선언에서는 카이로 선언이 재확인되었다. 1945년 8월 6일 일본의 나가사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8월 9일 얄타 협정에 따라 러시아가 대일선전포고를 한데 이어 38선 전역을 점령하였다. 러시아의 남하를 우려한 미국이 38선 분할안을 제기하였으며, 8월 15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하였다.   

1945년 8월 15일,  미국의 뉴욕 타임즈의 1면 헤드라인에는 '일본 항복, 전쟁 끝!' 이라고 간결하게 알림으로써 연합군의 승리를 선포하였다.  그리고 기사에는 '1943년 12월 카이로 선언에서 "위험과 욕심으로부터 지배당했던" 영토들도 해방될 것이다. 한국의 독립 또한 약속되었다. ' 라고 게재함으로써 한국의 독립 가능성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재미교포단체들이 발간하는 항일 민족 기관지 신한민보에는 미국의 대통령 트루먼,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 중국의 주석 장제스 그리고 소련의 서기장 스탈린이 보낸 한국의 독립에 대한 축전까지 게재되었다.   

  " 한국은 당신들의 승리를 얻었고 한국의 자유가 속히 올 것을 위하여 축하합니다. " 

 

하지만 광복의 기쁨을 먼저 만끽해야할 한반도에서는 외세 언론 속의 반응과는 다르게 분위기가 달랐다.   그리고 그 날의 1면 역시 상반되는 내용이었다.  

조선총독수 소속 기관지인 매일신보경성일보는 일본의 항복에 대한 소식을 전파하기보다는 여전히 천황제를 존속할 것을 알리는 내용들을 게재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공식적으로 한반도에 알리게 된 것은 경성중앙방송국의 라디오 중계를 통해 히로히토 천황의 항복 선언 방송을 통해 뒤늦게 알 수 있었다.  

히로히토는 "항복" 이란 말은 쓰지 않았지만, "짐은 제국 정부로 하여금 미. 영. 소. 중 4국에 대하여 그 공동선언을 수락할 뜻을 통고케 하였다. " 는 말이 곧 항복 선언이었다.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 중에서 - 

 

엄명하게 말하자면 일본의 항복 선언은 곧 조선의 독립을 알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라디오 방송을 청취한 조선인들은 해방의 감격을 길거리에 나와 만끽하였지만 라디오를 소유하지 못했다거나 '항복' 이라는 단어를 표현하지 못한 천황의 항복 선언에 시민들은 여전히 광복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매일신보와 경성일보와 같은 친일 언론들은 실제로 벌여진 일제의 몰락 사실을 전 국민들에게  알리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2~3일 후에야 해방을 알게 된 지역이 많았다.  (강준만, <한국 근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 pp 30)  

원로 여류 시인 홍윤숙의 표현대로 8월 15일의 해방은 '참으로 거짓말같이 그날은 오고 만 것' 이었다.  (강준만, pp 25)   36년 간 일제의 억압에 시달려야했던 조선인들은 갑자기 찾아온 해방에 반신반의하였다.   그리고 거짓말같이 찾아온 조선의 해방은 또다른 강대국들의 등장으로 인해 광복의 기쁨은 단 하루, 잠시뿐이었다.   이북 38선 전역을 점령한 소련의 남하를 우려한 미국은 38선 분할을 제기하였고 남한에 미 군정이, 북한에는 소련이 점령하였다.  광복을 맞이하였으나  조선인들로 이루어진 자주적 정부 수립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미국은 조선의 자주성 존재마저도 인정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광복을 맞은지 66년이 지난 지금도 일본의 극우파들은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뫼비우스의 띠로 이루어진 세상을 살기 위해서는   

 

 

'안과 겉' 구분이 없는 뫼비우스의 띠 

 

조세희의 연작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수록된 첫번째 단편 '뫼비우스의 띠' 에서 수학 교사는 뫼비우스의 띠라는 수학적 개념을 학생들에게 알림으로써 안쪽과 바깥쪽이 구별되지 않은 이 요상한 형체와 같이 우리가 진실이라 여기는 뜻이 그렇지 않을 때가 있음을 학생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앞에서 소개한 역사적 사실뿐만 아니라 지금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흑백 논리,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채 왜곡된 사고와 사회적 시선들이 존재하고 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과 겉으로 구분을 할 수 없듯이 하나의 사건만을 가지고 무조건 옳다,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은 도리어 왜곡되고 고집된 생각을 형성할 수 있는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잘못된 방식이다.  

다양한 이면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물과 현상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려야 하며 올바른 판단력과 비판적 태도를 통해 현상을 바로 인식할 줄 알아야 한다.    

영국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아는 것이 힘이다' 라는 유명한 명언을 남겼다. 그러나 인간이 '이성' 을 가짐으로써 다양한 학문을 안다고 해서 그 경험만으로도 세상을 완벽하게 이해한다고 볼 수 있을까?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사물과 현상 속에서 숨겨진 그 내면의 진실을 왜곡하지 않은채 뚜렷하게 볼 수 있다는 것.   이제는 '아는 것' 이 힘이 아니라 '진실을 왜곡하지 않은채 제대로 볼 수 있는 것' 이야말로 복잡다단한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살아가면서 가장 요구되는 진정한 힘인 것이다.   

'뫼비우스의 띠' 에서 교사가 수업을 마무리하는 장면을 끝으로 이 글 역시 마무리하고자 한다.

 

" 끝으로 내부와 외부가 따로 없는 입체는 없는지 생각해 보자. 내부와 외부를 경계지을 수 없는 입체, 즉 뫼비우스의 입체를 상상해 보라.  우주는 무한하고 끝이 없이 내부와 외부를 구분할 수 없을 것 같다.   간단한 뫼비우스의 띠에 많은 진리가 숨어 있는 것이다.   (중략)   차차 알게 되겠지만 인간의 지식은 터무니없이 간사한 역할을 맡을 때가 많다.   제군은 이제 대학에 가 더 많은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제군은 결코 제군의 지식이 제군이 입을 이익에 맞추어 쓰이는 일이 없도록 하라. " 

 

  

 

* 관련 동영상  

EBS e지식채널 <두 개의 시선> (다비드와 길레이의 그림) 

                    <그날의 기록> (8.15 광복)
 

 


댓글(6)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맥거핀 2011-09-10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아주 유익합니다. 아무튼 우리는 지금 뫼비우스의 띠 어딘가에의 바깥, 혹은 안쪽에서 반대편을 못 보고 있겠지요? 그래도 희망적인 것은 그 띠를 걷다보면 지금 반대쪽에 있는 것을 언젠가는 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되는 거겠지요.^^

cyrus님 그간 여러 좋은 글 읽게 해줘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추석맞아 전합니다. 추석 잘 보내세요.^^

cyrus 2011-09-10 18:19   좋아요 0 | URL
<한국정부론>이라는 수업 첫 시간에 보여준 동영상에 대해서 그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봤습니다. 그 수업은 매주 수업내용을 피드백해서 정리해서
교수님 홈페이지에 올려야하거든요. 동영상을 보면서 하나의 현상을
한쪽면만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추석 인사 댓글을 읽으면서 맥퍼님의 서재를 들리지 않은게 오히려
맥거핀님께 송구스러운 마음이 드네요, 영화는 제가 관심 있는거만 보는
편이라 맥거핀님 서재에 댓글을 남지지 못한 것도 있었습니다. ^^:;

맥거핀님도 추석 잘 보내세요 ^^

노이에자이트 2011-09-10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차세계대전은 1939년 9월에 독일이 폴란드를 공격한 날을 시작으로 잡습니다.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한 전쟁은 태평양전쟁이라고 하지요.단,통칭 2차세계대전은 태평양전쟁을 포함하여 말합니다.독일이 1945년 5월 항복하지만 일본은 8월에 항복하기 때문에 이 날을 2차대전이 끝났다고 하지요.물론 그날을 태평양 전쟁이 끝났다고도 합니다.

cyrus 2011-09-10 18:21   좋아요 0 | URL
사실 저는 2차세계대전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발발하고 진행되었는지 몰랐어요.
그저 영화에서 소개된 유명한 전쟁 이외에는 모르는게 많아요.
댓글이나마 노자님께서 이와 관련된 내용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노자님도 추석 잘 보내세요 ^^

2011-09-10 13: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10 18: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Scene #1  버스 통학의 어려움

이번 주는 개강 수업이 많다.  수업 첫 날에는 수업 소개를 하는 OT를 하는 편이라 학교 갈 때 가방이나 책을 준비할 필요가 없다.  교수님들마다 성향이 다르겠지만 의외로 첫날부터 수업 진도를 나가시는 교수님은 꼭 한 명씩 있다.   지금까지 몇 몇 첫 수업을 들으면서 다행히 첫 수업에도 열정적인(?) 교수님은 없었다.    

개강한지도 얼마 안 되었고 수강변경 기간도 아직 남아 있는 상황이라 요즘에는 거의 빈 손인 채 즐기는 마음으로(?) 학교를 간다.   추석 연휴가 끝나자마자 열공 모드에 돌입해도 충분하니까. 

학교를 가기 위해서는 버스를 타고 다니는데 집에서 출발하교 학교에 도착하는데만 1시간 20분 정도 걸린다.   위치상 학교가 거리가 먼 편이다.   그래서 버스 타고 타니는 것만 해도 고역이다.   운이 없으면 만원버스를 탈 수도 있고 그렇다고 손님이 없다고해서 좋은 점도 없다.  혼자서 버스를 타는데 1시간 내내 앉아 있으면 너무나 지루하고 졸립다.   전날에 일찍 잠을 잔다고해도 버스에 앉기만하면 서서히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버스를 타다보면 꾸벅꾸뻑 졸 때도 있지만 선잠에 불과하다.    

더구나 버스 안에서 잠을 안 잘려고하는 가장 큰 이유는 꾸벅꾸벌 졸다가 머리가 창문에 부딪히거나 자신도 모르게 벌어진 입술 사이에 침이 흘릴 수 있는... 아주 난감한 상황이 연출하게 된다.   버스에 타고 있는 주위 사람들이 제대로 보지 않는다면 괜찮겠지만...

그나마 잠을 깰 수 있는 방법으로는 스마트폰이다.  음악을 듣는다거나 게임을 한다.  하지만 버스 타는 내내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기에는 시간 낭비이며 건강상으로는 좋지 못하다.  스마트폰을 자주 이용하다보면 시력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나중에 사용하다보면 목이 뻐근하기 때문이다.      

  

 

 Scene #2  나, 이런 사람이야...

그래서 항상 버스 통학을 하면 가방 안에 읽을 책 한 권은 꼭 가지고 다닌다.  통학 이외에도 수업 마치고 집으로 귀가할 때도 스쿨버스를 타게 되는데 주로 이 시간 때 읽는 편이다.   

요즘에는 무거운 전공교과서를 들고 다닐 필요가 없어서 학교를 가게 되면 읽을 책 한 권을 들고 다닌다.  달랑 책 한 권만 들고 학교를 다려보니깐 편하고 좋다.     하지만 버스 안에서 책을 읽는다고 해도 잠이 안 오는 것이 아니다.   정말로 흥미롭고 집중 몰입을 할 수 있는 내용의 책이라면 괜찮은데 대부분 몇 페이지 정도 읽고나면 졸리기 시작하는 편이다.    아무래도 흔들림이 잦은 버스나 지하철, 기차 내에서 책을 읽게 되면 시야 초점이 맞춰질 수 없기 때문에 눈이 피로해진다.  그러니 책을 읽어도 당연히 졸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시력을 떨어지게 만드는 습관이기도 하다.

그래도 버스 타는 내내 멍때리거나 온종일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것보다는 독서가 낫다고 본다.  적은 시간을 통해서도 책 한 권을 통해서 새로운 지식과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비어 있는 시간을 유용하게 쓸 수 있는 의미로운 행위이기도 하다.    

 

 

 

 

 

 

 

 

그래서 요즘 버스에서 읽고 있는 책이 조세희의 <난쏘공>이다.   이 책을 중학교 3학년 때 구입해서 처음 읽어봤는데 그 이후로는 읽지 않은채 책장에 꽃혀 있다가 8년 만에 드디어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이 책을 오랜만에 펼치게 된 이유는 이번 주 월요일에 '한국정부론' 이라는 수업에 조세희의 <난쏘공>을 소개하는 EBS 'e 지식채널' 동영상을 본 이후로 오랜만에 읽어보고 싶었다.  (조세희의 <난쏘공>에 대한 지식채널 동영상에 대한 감상은 내일 안으로 페이퍼로 작성하겠다)  

그래서 그 수업을 듣고 다음 날인 화요일, 그러니까 어제 <난쏘공>을 한 손에 쥔 채 학교에 갔다.   아무래도 월요일에 있었던 수업에도 소개된 책이라 주위 친구들의 반응을 기대한 의도도 있었다.    

대학에서 만나는 친구들은 만난지 올해만 포함하면 2년이다.  군대 2년을 제외하면 오랫동안 사귄 편은 아닌 것이다.  그렇다보니 내가 독서를 좋아하는 것을 잘 모른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 만난 꽤 친구들은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다보니 내가 독서를 좋아하는 것까지 취미, 습관을 다 꿰뚫고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 대학교 친구들은 오히려 나라는 사람을 말 많고 먹는데 엄청 밟히며 특히나 술 좋아하는 과탑이라는 존재로 알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대학교 친구들 앞에서 나의 지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나 스스로 과장한 것도 있지만 우리나라 사회문제를 다룬 소설을 읽는 사회의식이 뚜렷하게 가지고 있는 대학생으로 보이고 싶었다.   

하지만 평소 독서와는 거리가 먼 대학생 친구들에게 괜한 큰 기대감을 가졌다. 정말로 책에 대해서 무관심한건지 아니면 일부러 안 보는 척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하루동안 만난 친구 10명 중에 아무도 내가 들고 있는 책 한 권에 단 한 명도 관심을 쏟지 않았던 것이다. 

그날따라 오히려 한 손에 달랑 쥐고 있는 <난쏘공>이 더욱 허전하게 느껴졌다. 

 

 

 Scene #3  책을 알리는 나만의 방법   

친구들이 나의 새롭고도 지적인 면을 보지 못한게 아쉽다기 보다는 이런 좋은 책이, 그것도 곧 사회라는 거대한 세상을 알아야 할 대학생들이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더욱 아쉽게 느껴졌다.  200쇄를 돌파한 우리나라 최대의 문제작이며서도 한 때 대학생들의 필독서로 추천될 정도로 우리나라 사람들이아면 꼭 기억해야할 책인데도 말이다.   대학생들이 그저 힘으로만 밀어붙이는 권력으로 인해 삶의 터전을 빼앗기는 철거민들의 생활에 대해서 안중에 없듯이 <난쏘공>의 내용도 대학생들에게는 자신의 삶과과 거리가 먼 그저 '남 이야기' 에 불과한 것이다.  

나는 어떻게든 <난쏘공>이라는 이 좋은 책의 가치를 딱 한 사람이로도 알려주고 싶었다.  물론 그런 좋은 의도 뒤에는 지적인 면모를 어떻게든 알리고픈 졸속한 마음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  

 

그래서 이런 방법을 써봤다.     

 

 1) 평소에 성격이 어른처럼 성숙하고 진지한 면이 있는 마음씨 착한 친구 한 명을 지목한다.  

    꼭 진지한 성격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이런 사람이 의외로 책을 읽을 줄 알기 때문이다. 

 

 2) 그 친구가 가방을 들고 다니는지 확인한다.  

 

 3) 가방을 들고 다닌 것을 확인한 후, 내가 지금 책 한 권 들고 다니니가 불편하니 잠시만  

     가방에 넣어줄 것을 부탁해본다.  마음씨 착한 친구는 이런 작은 부탁에도 잘 들어준다.

 

 4) 그러고는 친구에게 책을 건네주면서 살짝 책에 대한 정보를 알려준다.  <난쏘공>이  

     어제 수업에 소개된 책인데,,  교수님이 소개하길래 다시 한 번 읽어보려고  

     한다는 식으로..  그리고 이 책의 내용이 정말 좋다고 찬사의 미사여구를 늘어놓는다.  

 

 5) 책이 친구의 가방에 들어간 것을 확인하고 난 후에는 

    일부러 책을 받으러 가지 않는다. 즉,  모르는 척 하는 것이다.

     그 친구는 나중에 집에 도착하고 난 뒤에서야 가방 안에 맡기고 있었던  

     책을 확인하게 되는데 90%는 이런 경우에도 다음 날에 책을 안 돌려주는 편이다.  

     왜냐하면 책을 돌려주고 싶어도 굳이 학교까지 가는데  

    가방 안에 들고다니기가 은근히 귀찮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자주 만나니깐 나중에 돌려줘도 된다는 식으로 미루게 되는  

    일종의 귀차니즘적 생각을 하게 된다.

 

대충 이런 시나리오(?)를 예상하면서 실행을 하게 되었는데 딱 맞아떨어졌다.  오늘 그 친구가 나에게 책을 가져가지 않은 사실을 알려주었는데 본의 아니게 책을 자기 집에 놔두고 왔다고 하였다.

나는 겉으로 까맣게 잊어버린 척하면서 괜찮다고 대인배 모드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내가 맡긴 그 책, 좋은 책이라고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시간이 나면 집에서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한다.  그리고 다 읽고나면 천천히 돌려줘도 된다고 말한다.    

그 친구는 <난쏘공>을 읽어보겠다고 대답은 했긴 했는데 그 친구가 정말로 읽었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대답만 하고 책을 방치해두고 있다가 기간이 좀 지난 뒤에 돌려줄 수도 있기 때뭉이다. 

그래서 농담삼아 그 친구에게 이런 말을 했다.   

 

  

" 천천히 돌려주는 대신에 원고지 200자 이내로 <난쏘공> 독후감 써 와라.  

  독후감 안 써오면 책을 안 읽는걸로 간주할께" 

 

그 친구에게 농담삼아 책 읽어보라고 권했지만 내 마음의 진심이 그 녀석이 통하기를 그저 바랄 뿐이다.   이렇게 해도 안 읽는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만약에 이런 경우에는 절대로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한 페이지조차도 읽어보지도 않으면서 책을 돌려주지 않는 것.   이런 행위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다.   정말로 읽어보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독서 행위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을 함께 공유할 수 있다는 좋은 의미로 그냥 넘어갈 수는 있다.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지 쭉 지켜봐야할 듯하다.  <난쏘공>이 영영 못 받게 되는 최악의 상황이 안 일어나기를 바랄 뿐이다.

 


댓글(13)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이리시스 2011-09-08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돌려받기란 돈 돌려받기만큼 힘든 것 같아요. 어쩌다 띄엄띄엄 읽다가 본인 눈에 우연히 띄어 좀 빌려줘, 해서 빌려준 책은 더더욱.ㅋㅋㅋ 사람들이 책은 돌려줘야 한다는 전제를 까먹고 빌려가는 것 같더라구요. 안 빌려주면 괜히 치사한 사람 되고, 빌려주고 나면 못 받고 그래요. 히히. <난쏘공>은 꼭 돌아오길 빌어줄게요.^^

cyrus 2011-09-09 22:09   좋아요 0 | URL
몇 년전에 여자애한테 책 빌려줬는데 못 받은 적이 있었거든요,
그 책이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향수>였어요. 그 때 못 받은 책이
요즘에 나온 표지랑 다른 흰 색 바탕의 구판이였거든요.
그래서 헌책방에서 흰 색 구판을 다시 구했어요 ^^;;

그 친구는 이번 학기동안까지 계속 마주쳐야하기 때문에 학기가 끝날 땎자ㅣ
책을 받을 수 있을거 같습니다. ^^;;

셜록 2011-09-08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오. 저랑 비슷하시네요. 외출할 때는 꼭 어떤 책이든 갖고 나갑니다. 멍때리고 있는걸 싫어하기도 하고, 엉덩이 붙이면 무조건 책!이에요. ^^심지어는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의 책읽기가 집이나 여타 다른 장소에 비해 더욱 집중이 잘 되는듯도 합니다.

저는 얼마전 친구를 만날 때마다 한두권씩 빌려줬던 책들을, 몰아서 택배로 한꺼번에 반납받았습니다. ^^(마치 도서관의 택배대출서비스를 연상케 하는...)

cyrus 2011-09-09 22:11   좋아요 0 | URL
아 근데 저 오늘 학교 가는 버스 타면서 책 읽다가 졸았어요. 웃긴건
너무 졸다가 읽고 있던 책을 바닥에 떨어뜨렸어요, 그 때 얼마나 부끄럽던지,,
^^;; 택배로 받아내시다니,, 그런 방법으로 반납도 가능하는군요 ㅎㅎ

조선인 2011-09-08 0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전 '난쏘공' 못 돌려받길 기대할게요. =3=3=3

cyrus 2011-09-09 22:11   좋아요 0 | URL
좋은 책을 그 친구가 읽는다면 못 받아도 상관 없어요. ^^

잘잘라 2011-09-08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요 난쏘공 못돌려받으시길~ 흐흐흐

잘잘라 2011-09-08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고요 저는 '의외로' 수업 첫날 진도 빼시는 교수님이 의외로 기억나고 대체로 좋은 분이었다는 기억이 나요 의외로^^;;

cyrus 2011-09-09 22:12   좋아요 0 | URL
의외로 못 받기를 바라는 분들이 계시네요 ^^

맞아요, 포핀스님 말씀대로 그런 분이야말로 정말로 학생들을 위해서
열정적으로 수업을 하고자하는 좋은 교수님이에요.

stella.K 2011-09-09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사귀고 싶은 이성친구 있으면 슬쩍 그 방법 써도 좋을 것 같아요.
이래서 CC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니까요.
그래서 연애도 젊을 때 하는 거구요.ㅋㅋ
근데 독후감 쓰라는 거에서 쫌 깨는데요? 갑자기 교수님 모드.ㅎ
저는 초등학교 때 좋아하는 남자애 눈길 끌려고 책을 일부러 코높이까지 올려서
읽어 본적 있는데.
그래도 나름 성공했어요. 빌려 달라고 했으니까.ㅋㅋ

cyrus 2011-09-09 22:13   좋아요 0 | URL
저도 이 글을 쓰고나면서 문득 떠올렸어요. 정말로 이 방법, 써보려고 해요.
그런데 상대방 이성이 책을 안 좋아하면, 어쩔 수가 없고요.. ^^;;


yamoo 2011-09-08 2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야~~~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그런데, 그런 방법이 성공하려면 어느정도 친구가 책이라는 매체에 가까워야 하는데...대학 친구들이건 고교 동창들이건 시루스니믜 방법이 먹힐만한 친구는 제게 없네요..ㅎㅎ

스텔라님 말마따나 사귀고 싶은 이성친구에게 이 방법은 서로 가까워 질 수 있는 좋은 수단 같습니다만..ㅎ

시루스님, 참 멋지신데요^^ 그런 의미에서 추천 쾅~

cyrus 2011-09-09 22:13   좋아요 0 | URL
저도 제 주위에 책이랑 가까이하는 친구 한 명도 없어요. 아무래도
나이가 먹고 바쁜 세상을 살다보니 책이랑 멀어지는거 같아요 ^^;;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고전예술 편 (반양장) - 미학의 눈으로 보는 고전예술의 세계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미학' 의 관점으로 보는 서양미술사

몇 달전부터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읽고 있다.  사실 읽는다라기보다는 그저 훑어보고 있다는게 옳다.   베개로 삼을 만한 엄청난 분량에다가 깨알 같은 작은 글씨는 아무리 미술 전공자라고 하더라도 책을 펴기 전부터 압박감을 준다.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는 오늘날까지도 미술사의 고전으로 자리잡을 정도로 미술사 스테디셀러이지만 단지 미술사를 알기 위해서 이 책 한 권을 통째로 읽는다는 것은 괜한 오기일지도 모르겠다.     

곰브리치 외에도 B.W. 잰슨의 저서 역시 유명한데 기존의 많은 미술사들은 다양한 사조를 시간순에 따라 서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광범위한 미술이 변모해나가는 흐름은 한 눈으로 볼 수 있지만 양식의 변화만큼은 파악할 수 없다.  더구나 미술 지식이 전무한 미술 비전공자들은  '양식의 변화' 라는 중용한 알맹이를 지나쳐버리고 수박 겉핥기로 읽게된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서양미술사들의 저자는 대체로 외국인이다보니 서구의 시선과 관점이 다분히 반영되어 있을수 밖에 없다.  서양과 동양의 그림을 보고 이해하는 방식이 서로 차이가 있가 마련인데 미술에 대한 서구인들의 미적 취향과 관점을 인식하지 못하는 점도 미술사를 이해하는데 더욱 어렵게 만들게하는 원인 중의 하나다.    국내 출신의 미술 전공자들이 기록한 우리나라 독자들을 위한 서양미술사가 소개되고 있지만 여전히 기존의 서술방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감이 있다.

하지만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서술 방식은 독특하다.  미학자답게 '미학' 의 관점으로 미술사를 접근하고 있다.  미술사학에서 널리 알려진 논문이나 저서를 선택, 그것들을 선형적으로 배치하는 방식으로 미술사를 구성한 것이다. 서양미술의 원리를 문제영역별로 제시하면서 역사를 통시적으로 함께 서술하는 방식이다.  

 

 

  '예술 의지' 에 따라 달라지는 미술의 양식 

  

마티아스 그뤼네발트 <십자가 책형> (이젠하임 제단화 중 일부)  1509~1511년  

(진중권 <서양미술사 1> pp 175 수록)

  

 

파블로 피카소 <십자가 책형>  1930년

 

그뤼네발트피카소의 그림이 있다.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의 모습을 그린 그림인데 둘은 너무나도 다르다.   그뤼네발트의 그림에서는 그리스도의 고통스러운 표정과 몸에 곳곳이 난 성흔을 생생하게 볼 수 있지만 피카소의 그림 같은 경우에는 처음부터 제목을 모른 상태로 보게 된다면 그저 정체를 알 수 없는 형상으로만 볼 수 있다.  그뤼네발트의 표현방식처럼 온전한 형태의 사람과 사물이 그려지 그림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피카소의 추상기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같은 주제를 다룬 그림인데도 표현방식면에서 확연한 차이가 나는 것일까? 

그것은 두 화가가 표현방식에서 지향하는 바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시대 때 활동한 독일 출신의 그뤼네발트는 인물을 가능한 한 눈에 보이는 것과 똑같이 그릴려고 하였고, 20세기 화가 피카소는 눈에 보이는 것과 다르게 그리는 것이 목표였다.  

예술 의지가 다른 것이다.  저자는 미술사학자 파노프스키가 제시한 두 가지 비례론을 끌어들이는데 그뤼네발트의 그림처럼 실물을 그대료 묘사하려는 ‘객관적 비례’, 실제 인체 비례에서 현저하게 벗어난 피카소의 묘사는 ‘제작적 비례’ 로 부를 수 있다.   

고대부터 르네상스 시대까지 예술가들은 신체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이상적인 인체 비례를 찾아내는 것이 관건이라고 생각했다. (객관적 비례)   그러나 시대가 변할수록 창작의 방법으로서의 비례의 의미는 서서히 종말을 맞기 시작한다.  그리고 예술가들은 창작의 근원을 자신이 표현하려는 의지에서 찾게 됨으로써 현대의 추상미술이 등장할 수 있었다. (제작적 비례)  

  

    

  형태냐 색채냐, 미적 관점의 충돌  

 

 

<푸른 옷을 입은 성모> 프랑스 샤르트르 노트르담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12세기경 

 

색과 빛을 바라보는 관점 역시 시기마다 다르다.  감각적 세계보다 초월적 세계를 중시한 중세에는 예술로 감각적 세계를 재현하기 보다 그 너머 초월적 세계를 표현하고자 했다. 그러기위해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다.  중세의 장인들은 값비싼 재료의 화려한 색채를 초월적 빛의 상징으로 사용했다. 중세 고딕의 스테인드글라스는 빛의 미학인 명료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나 인간 중심의 르네상스 시대에 접어들게 되면서 예술가들의 미감은 다시 형태 중심으로 바뀌게 된다.  그 이후로부터 시대에 따라 미술에서 강조되는 표현방식으로서 '형태' 와 '색채' , 이 두 가지 요소를 중심으로 미술의 역사는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바로크 시대에는 회화의 고유성을 강조했다. 즉 자연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형태보다는 색채의 효과에 중점을 두었다.   바로크 시대에 탄생된 예술작품들은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들에 비하면 더욱 화려하다.   색채를 강조하는 표현양식은 프랑스의 로코코 시대에 이를수록 한층 더 화려한 색감을 더하게 되었다.   바로크와 로코코 시대 때 유행한 화려한 색채의 그림들은 화려한 생활을 누리는 귀족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던 미술양식이었다.

 

 

니콜라 푸생 <세례 요한과 성녀 엘리자베스, 기도하는 성 요셉이 있는 성 가족>  17세기경  

 

 

페테르 파울 루벤스 <세례 요한과 성 엘리자베스와 함께 있는 성 가족>  1634년경  

형태를 강조하는 고전주의적 그림들은 고대 조각상을 연상할 정도로 고정적이다. (니콜라 푸생)  하지만 색채를 강조하는 바로크 및 로코코풍의 그림들은 오히려 고전주의적 그림들보다 화려한데다가 색체의 효과 덕분에 생동감이 느껴진다. (루벤스)  이러한 서로 상반된 미적 관점의 충돌은 한 세기동안 예술가들 사이에서 커다란 논쟁의 화두였다.

    

그러나 비평가들 사이에서 화려한 미술양식의 유행에 반발함으로써 예전처럼 형태가 강조되는 미술로 회귀할 것을 주장하기도 한다.   이들은 예술가들이 색채의 화려한 효과에만 치중하다보니 정작 중요한 형태의 기본이 사라졌다고 하였다.  형태와 윤곽을 강조하는 예술가 및 비평가들로 구성된 '고전주의자' 또는 '푸생주의자' 와 반대로 색체를 강조하는 입장의 예술가들은 '현대주의자' 또는 '루벤스주의자' 로 대립 구도가 형성이 되어 예술적 논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예술적 논쟁이 불붙던 17세기는 절대왕정의 시기였기에 결국에는 귀족과 왕정들의 인기를 힘입은 바로크, 로코코 양식이 승리하게 되지만 유행의 흐름은 오래가지 못하게 된다. 18세기에 터진 프랑스 혁명 이후로 왕정이 붕괴되면서 다시 고전주의적 미적 취향이 유행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솜씨' 가 아니라 '의지' 

  

클로드 모네 <인상-해돋이>  1873년

  

클로드 모네가 <인상-해돋이>라는 제목의 그림으로 살롱에 출품하였을 때 관객들은 정확한 형태로 이루어지지 않은 안개로 가득한 어둠침침한 풍경에 무척 낯설어하였다.  심지어 비평가들은 '정확한 묘사' 를 강조하는 전통적 회화 표현 수단을 저버린 모네와 같은 예술가들을 향해 경멸감에 가까운 악평을 하기도 했는데 여기서 유래된 단어가 바로 '인상주의' 인 것이다.   

인상주의자들은 바로크 시대의 화가들처럼 빛의 미세하고 섬세한 효과를 표현하는데 주력하였는데 정확한 형체로 표현되는 고전주의적 예술를 선호하는 관객과 비평가들 입장에서는 인상주의자들의 표현에 반감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20세기로 접어들게 되면서 누그러뜨린 형체들만 그려진 기괴하기 짝이 없는 추상미술이 등장하였을 때 관객과 비평가들은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표현양식에 아연실색하였다.  여전히 정확한 사물과 인간이 그려진 고전적 표현이 시각적으로 익숙해져있다보니 추상미술의 등장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보수적 비평가들은 추상미술의 등장에 '예술의 종말' 까지 운운할 정도였다.

오스트리아의 미술사가 알로이스 리글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솜씨' 가 아니라 '의지' 라고 하였다. (진중권 <서양미술사 1> pp 17)    

예술의 역사를 살펴보게 되면 특정한 미술양식이 유행하는데는 예술적 인식, 사고 등 예술가들이 표현하고자하는 의지에 의해서 이루어져 있고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미술 본연의 예술적 감각 그리고 예술 의지를 알지 못한 채 그림을 보게 된다면 중세의 예술양식을 화려한 로코코 양식과 비교하여 어린아이가 그림을 그리는 정도의 수준으로 평하거나 생각하게 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즉, 예술을 접할 때는 실물과 정확하게 묘사할 줄 아는 화가의 역량만이 무조건 우수한다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기준으로 평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진중권의 <서양미술사>는 기존의 미술사보다는 내용면에서는 깊이가 떨어지지만 미술의 양식이라면 이해가 깊은 독자라도 흔히 접근하기 꺼려해온 형식적 체계까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쓴 미술사가 유용하다.   

이 책을 통해서 고대 미술, 르네상스, 마니에리스모, 바로크, 로코코, 신고전주의 등 미술 교과서에 자주 등장하지만 어렵게만 느껴졌던 미술사조들의 예술적 특징들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그리고 전문적인 미술사에서 볼 수 없었던 미시적인 예술양식과 유행 역시 알 수 있는 흥미로운 내용도 소개하고 있다.   각각의 미술사조에 강조되었던 예술적, 미학적 감각들을 숙지하고 있다면 두꺼운 분량의 곰브리치 미술사와 같은 전문서적도 부담없이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막 미술사를 입문하는 초보 독자들이라면 진중권표 서양미술사는 미술사의 기본적인 미적 흐름과 미술사조의 특징들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11-09-06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전예술편이었군요. 저는 모더니즘편 읽고 있는데
읽기야 읽겠지만 리뷰를 어떻게 쓰나 한숨이 나오고 있습니다.ㅠ
근데 이책을 그렇게 빨리 읽었어요?
그것도 모자라 곰브리치도 읽고 있다닛!
저는 내친김에 오래 전에 사놓고 안 읽은 미학오디세이2를
일단 책상 위에 올려놨는데 읽을 시간이 있을까 모르겠어요.흐~

cyrus 2011-09-08 00:32   좋아요 0 | URL
모더니즘 같은 경우에는 철학 지식을 요구하고 있어서
어려운건 사실이에요.. 저도 잠깐 모더니즘편을 훑어봤는데
확실한건지 모르겠지만,, 훑다보니 '벤야민'이라는 단어가
보이더군요. 읽기 전부터 어떤 내용이지 짐작이 가더군요 ^^;;

그래서 오랜만에 고전예술편을 읽어봤어요. 제가 작년에
처음 읽었는데,, 그 때는 미술에 대해 무지했던 때라
읽다가 중간에 포기했는데 다시 읽어보니 재미있었습니다.
고전예술편 같은 경우에는 내용이 어렵지 않을거에요. ^^

맥거핀 2011-09-06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며칠 전에 모더니즘 편 사서 지하철타고 왔다갔다하면서 보고 있습니다. 붐비는 지하철에서 미술작품 들여다보고 있는 것도 꽤 재밌더군요. 1편 예전에 보고 괜찮은 것 같아서 2편을 샀는데, 2편은 1편보다는 재미가 살짝 덜한듯한..(구성도 그렇구요.)

이 고전예술 편 보고 생각이 든 것은 미술사라는 것도 일종의 필연성이 엿보인다고 할까요. 잘 모를때는 이 미술양식들의 출현이 그저 별 연관없이 나온줄 알았는데, 어떤 사조가 지나간 후 다시 새로운 사조가 나오는 것은 필연적인 연관이 있더군요. 재미있었습니다.

cyrus 2011-09-08 00:33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모더니즘은 현대미술에 대해서 다루다보니 현대미술에
생소한 독자들에게는 재미가 덜 할 수도 있다고 봐요.
저 같은 경우에도 현대보다는 모더니즘 이전의 미술양식을
선호하는 편이거든요.

아이리시스 2011-09-06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맨 윗 그림 진짜 좋아해요. 제가 성경을, 그러니까 성서를 많이 좋아하거든요. 모든 이야기는 성서 속에 있다고 배워서 꼭 읽어내고 싶어 핑크 성경책을 샀는데도 그건 제가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예요. 종교가 없는데 것과 상관없이 성경공부는 꼭 하고 싶어요. 곰브리치는 아는 분께 들었는데 아무데나 관심있는 부분 펼쳐읽으래요. 그림읽기에 관한 책을 많이 내신 분인데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려면 오히려 경기 난다고.

오래 전에 <미학 오디세이>는 신세계를 열어준 인문서였는데, 새로 출간되고 관심이 덜해졌어요. 그치만 저도 꼭 읽어볼래요!

cyrus 2011-09-08 00:35   좋아요 0 | URL
종교에 상관없이 성경을 읽고 공부하고자하는 아이리시스님의
모습이 보기 좋아요. 제 생각이지만 시중에 성경 이야기를 그린
그림을 설명하는 책이 있을거에요. 제목은 기억은 안 나지만,,
언젠가는 따로 페이퍼로 소개해드릴께요. (꼭 기억하고 계세요 ^^)
그 책을 보면서 성경 속 주요 내용을 이해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해요.

곰브리치 같은 경우에는 정말로 관심 있는 부분에만 읽고 있는 편이랍니다.
요즘 인상파에 관심이 많아서 그 부분만 열독하고 있습니다. ^^;;

yamoo 2011-09-07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중권의 서양미술사...괜찮은 책이죠. 시루스님 지적대로 어여 우리 미술사가들의 독특한 시각이 느껴지는 미술 평론책들이 많이 출간됐음 합니다~

그나저나, 올리신 그림들은 도대체 어디서 구하시나요? 리뷰 쓸 때에는 그림이 2개이상 들어가지 않아 이상했는데...그림들을 어찌 많이 넣으셨는지 궁금하네요^^

cyrus 2011-09-08 00:38   좋아요 0 | URL
맞아요, 이와 같은 대중적인 서양미술사의 출간은 보기 드물텐데 말이죠.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저는 <서양미술사 1>이 2008년인가,, 처음
출간되었을 때 이미 알려져 있던 <미학 오디세이>에 버금가는
인기를 얻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대중들의 반응이 뜨겁지 않아서
아쉽기만 합니다. 아무래도 그 당시 진중권 씨가 한창 독설을
날리는 논객으로서의 이미지가 강했던 탓도 있다고 봐요.

야무님은 작성하실 때 그림을 두 개 이상 넣는게 안 되는가보군요.
저는 아무런 불편없이 잘 되요. 혹시 지금도 안 된다면
알라딘 서재지기에 한 번 문의해보셔야 할 거 같아요.
시스템상 문제일 수도 있으니까요.
 

 

 

 

 

 

 

 

 

  바틀비, 그는 왜 그랬던 것일까?   

미국의 소설가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은 독특한 인물이 등장하고 일반 소설과 다른 독특한 전개가 있는 흥미로운 단편소설이다.  짧은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수많은 독자들뿐만 아니라 들뢰즈, 지젝 등의 철학자들까지 멜빌이 쓴 단편소설의 매력에 꽂혔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비유처럼 <필경사 바틀비>는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연상시킨다.  <변신>의 첫 장부터 주인공 그레고리 잠자가 느닷없이 바퀴벌레로 둔갑하여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듯이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는 필경사라는 직업을 가진 바틀비라는 사내는 "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 라는 말만 늘어놓는다.  도대체 바틀비라는 인물에게 무슨 사연이 있는걸까?

<필경사 바틀비>는 월가의 변호사인 화자가 바틀비란 인물을 회고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자신을 나이가 꽤 지긋하며 직업의 성격상 흥미롭고 다소 특이한 집단의 사람들을 제법 깊이 접한 사람이라고 소개한 화자는 바틀비에 대해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이상한 필경사’ 라고 말한다. 화자인 ‘나’ 는 부자들의 채권, 저당증서, 부동산 권리증서 등을 쌓아놓고 수지맞는 일을 하는 야심 없는 변호사인데 업무가 증가하자 바틀비란 필경사를 새로 고용한다.  

하지만 이 필경사는 평범하지가 않다. 필사에 굶주린 사람처럼 밤낮으로 필사를 하다가 사흘째 되던 날 이상한 기미를 보이기 시작한다. 필경사의 업무는 필사를 하고 그것을 원본과 대조하는 것인데 바틀비는 서류를 대조해보자는 ‘나’ 의 요청에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라고 대답한다.

소설 속에서 바틀비는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원문으로는 I prefer not to). 이 말을 반복함으로써 오늘날까지도 바틀비의 기이한 행동에 대해서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고 있다. 

바틀비의 존재를 죽음의 잠재성과 싱명의 잠재성을 동시에 접해 있다고 보고 있거나(조르조 아감벤) '하지 않겠다' 는 행위는 단순히 어떤 행위를 거부한다기보다는 '하지 않음' 의 가능성과 이에 대하여 선택할 수 있는 권리까지 동시에 강조하기 위한 의미로도 보고 있다. (역자, pp 101)   그 밖에도 월 스트리트가 번성함으로써 도시화가 되어가는 19세기 말 미국 사회에 팽배해온 고립과 소외, 계급투쟁, 허무주의, 기독교적 알레고리가 담긴 메시아론까지 다양한 해석이 있다.   

역자는 이 작품을 '프로테우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변신 능력이 뛰어난 신)처럼 다양한 모습을 가진 소설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만큼 읽는 독자들마다 받아들여지게 되는 소설의 주제 및 바틀비의 행위에 대한 의미가 다양하다는 것이다.  

  

 

  관료주의적 시각에서 바라본 바틀비 

가르치는 주제와 범위마다 차이가 있지만 행정학 과목 중에는 '관료제' 에 대해서도 다루게 된다.   관료제의 '관'(官, 벼슬) 자 에서도 알 수 있듯이 관료 즉 행정가가 국민에게 행하는 통치제도를 일컫는 말이다.   

관료제의 전형적인 특징으로는 관료기구 내부의 상급자와 하급자 사이에도 엄중한 신분상의 차이가 존재한다. 그래서 상사에 대한 복종의 체계로 이루어진 위계질서가 존재한다.  이와 같은 관료제의 특권적 지배로 인해 수많은 폐단이 존재하게 되는데 이런 병리적 문제를 '관료주의' 라고 부른다.   오늘날에도 관료주의는 관료제의 폐단을 가리키는 부정적인 용어로 간주되고 있다.    

<필경사 바틀비>도 관료주의적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다.  관료주의는 정치적 직무를 담당하는 집단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무직, 노동직과 같은 경영 집단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멜빌은 도시화와 산업화가 이루어지고 있던 19세기 말 미국인의 모습을 '평일에는 상점이나 공장, 사무실 등 외얽고 회반죽 친 벽 안에 갇혀 계산대나 작업대, 책상에 꼼짝없이 붙들려 있는 사람들' 이라고 비유하였다.   멜빌이 비유한 '사람들' 에는 <바틀비>에 등장하는 화자 그리고 화자 밑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모습과 유사하다.  

'필경사' 의 원어는 Scrivener 이다.  1828년 판 웹스터 영어사전에서는 '계약서나 기타 문서를 작성하는 일이 직업인 사람' 으로 정의되어 있다.   말 그대로 필경사는 책상에 앉아서 문서를 작성해야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관료제' 의 원어는 Bureaucracy 이다.  Bureaucracy는 '책상과 사무실' 을 뜻하는 Bureau와 '통치' 를 뜻하는 cracy가 합쳐진 단어이다.  그래서 관료주의가 '사무실에 틀어박혀 책상에만 앉아서 탁상공론에만 매달리는 관료' 의 단점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필경사 바틀비> 속에 등장하는 인물 역시 관료주의의 문제점을 안고 있다.  

  

 

 1) 형식주의, 관료의 방해행위    

관료제는 형식적인 규칙과 절차에 집착하게 된다.  그 결과 조직 내의 목표 달성보다는 규칙을 더 중요시되는 형식주의에 빠지게 된다.   형식주의가 심화되면 '문서주의'(레드 테이프 현상)로 발전됨으로써 조직목표의 달성은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되는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화자의 사무실에 일하는 인물 중에는 '진저 너트' 라는 별명의 소년이 있다.  자신의 아들이 판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했던 아버지로 인해서 소년은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소원과는 반대로 진저 너트는 판사가 되기 위한 업무와는 다른 엉뚱한 임무만 하고 있을 뿐이다.

사무실 직원 중에서 담당하는 임무의 비중이 적지만 그의 별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직원들은 소년에게 '진저 너트' 라는 이름의 생강 과자를 자주 사오도록 하고 있다.   이 소년이 특이한 점은 자신이 일하는 사무실에 개인 책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별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만 그의 책상 서랍 안에는 온갖 종류의 견과 껍데기가 가득하게 있을 뿐이다.    

진저 너트는 정작 자신이 하고 있는 임무의 목표 및 당위성을 알지 못한 채 그저 시키는대로 과자를 사오고 사무실을 청소하는 잔심부름꾼이다.  과자를 사오고 사무실 청소만 하는 임무가 어린 진저 너트에게는 자신에게 주어진 '규칙' 이다.     그런 규칙적 임무에 매달리다보니 자연스럽게 '진저 너트' 라는 별명이 생기게 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진저 너트는 사무실 안에서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잉여 노동력일뿐이다.  감독자가 시키는 일만 기술적으로 처리하고 그 밖의 임무에는 일체 행동하지 않는다거나 또는 임무에 투여할 수 없는 비생산적인 결과를 낳게 된다.   이는 결국 조직 목표의 달성에 방해가 되는 장애를 초래한다.

  

 2) 책임 회피  

업무에 대한 규정과 절차가 정해지면 이에 따른 책임 역시 결정된다.  그러나 관료적 책임은 업무의 능률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만들어진 제도인만큼 쉽게 책임을 회피하는 경향이 발생하게 된다.  

터키는 업무중에도 진저 너트가 사온 과자를 먹고 하다보니 업무상 실수를 자주 발생하게 되는데 그들은 이에 대해서 어떠한 책임을 지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능글스럽게 자신이 행한 실수를 무마시키려고 한다.  

그리고 사무실 업무를 총체적으로 담당하고 이끌어나가는 화자의 태도에서도 집단 내 문제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는 모습이 있다.   

 

정말 이상한 일이야. 나는 생각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하지만 업무가 나를 재촉했다. 나는 이 문제를 다음에 한가할 때 처리하기로 하고 일단은 잊기로 했다.  

- pp 30 -

 

화자는 바틀비의 알 수 없는 거절 행동에 이내 화가 치밀어 올라 흥분한다. 그러나 서류 대조를 안하겠다는 바틀비의 의지를 꺾지 못하는데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바틀비의 거부가 계속되면서 화자는 단순히 화가 나는 게 아니라 일종의 무력감을 느끼면서 바틀비의 행동을 개선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런 행동의 원인을 살펴보게 된다는 점이다.  한가할 때 바틀비의 문제점을 해결하겠다는 화자의 안일한 생각은 정작 해결해야할 문제점을 회피하려는 주관적 변명으로 포장되고 있다.

소설의 전개는 바틀비가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라면서 거부하는 일의 범위는 점점 넓어진다. 우체국에 들러서 우편물이 와 있는지 봐달라는 부탁도, 옆방의 직원을 불러달라는 부탁도 거부한다. 

   

  '방황하는 기계' 로 남은 사내, 바틀비

관료제는 형식적인 규칙과 절차를 중요시하고 조직 구성 운영 능력이 경직화되어 있어서 변화에 대한 저항성이 떨어진다.  그러므로 제도의 변화를 유도하거나 촉진하기가 대단히 힘들다. 

바틀비의 알 수 없는 거부 행동 속에는 '현상유지적' 관료주의를 주체적으로 거부하려는 의지가 담겨져 있다.    월 스트리브의 회반죽 벽 그리고 사무실 안의 칸막이 벽으로 상징되는 폐쇄적이면서도 수동적인 관료제'국' 앞에서 홀로 외롭게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바틀비의 조용한 거부는 무엇보다도 ‘안정’을 가장 중시하며 월 스트리트를 움직이고 있었던 관료적 체제에 순응하고 살아왔던 화자와 그 밖의 인물들에게는 큰 혼돈과 충격일 수 밖어 없었을 것이다.  돈으로 꼬드기기도 하고, 으름장도 놓아보면서 화자는 바틀비가 자신의 자선을 거부하는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온갖 궁리를 다하지만 그때마다 듣는 대답은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일 뿐이었다.  

왜 업무를 거부하는 행위를 택할 수 밖에 없었는지 바틀비의 사연을 알 수 없다.  그만큼 이 작품을 읽는 독자들은 바틀비의 행위에 대해서 독자적미면서도 다양한 해석을 낳고 있다.   다만 사무실에 입사하기 전에 워싱턴의 사서 우편물을 담당하는 하급 직원으로 일하다가 갑작스럽게 해고된 적이 있는 그의 짤막한 경력을 추정하면 이미 관료제의 수동적인 폐해의 실체를 몸소 경험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지금 우리는 똑같이 숭고한 인간을 이윤을 위해 마음대로 모욕하고, 마음대로 해고하면서 기계부품처럼 취급하는 비인간적인 고용체제에 둘러싸여 있다. 그리고 그 벽 안에 들어가기 위해 그저 시키는 대로 따라 하라고 세뇌시키는 사회적 체제 속에 살고 있다.  특히나 제도의 안정성과 수동성에 익숙해지게 되면 자연히 변화와 개선 의지가 줄어들게 된다.   관료주의로 이루어진 사회적 집단 내에서 관료주의로 인한 사회적 문제만 늘어날 뿐 체제의 문제점을 인식하면서도 정작 개선하려는 의지를 가진 관료나 행정가를 찾기란 하늘에 별 따기다.

바틀비의 1인 거부 시위(?)는 관료제라는 접착제로 만들어진 월 스트리트의 벽을 무너뜨릴 만큼 너무나 미약했다.   한 때 관료제가 만들어낸 '기계'였던 바틀비는 견고한 제도를 거부할 줄 아는 자유로운 '인간' 이 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불행한 죽음을 맞이하면서 관료제도 앞에 '방황하는 기계' 로만 남고 말았다.  

 

 

* '관료제' 내용 참고 도서  


 

 


댓글(12)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11-09-05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대단해요. 이렇게 연결시키다닛!
이 책이 카프카의 변신과 비견이 되는군요.
정말 비교해서 읽어보면 좋겠어요.^^

cyrus 2011-09-05 23:55   좋아요 0 | URL
네, 꼭 한 번 읽어보셔요. <바틀비>는 창비에서 나온 세계단편소설집 시리즈
에도 수록되어 있는데 제가 읽은 건 일러스트가 있는 문학동네판이에요.

yamoo 2011-09-05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틀비를 봐야 겠군요~ 멜빌의 <백경>토론회할 때 누군가 바틀비 얘기를 하면서 관료제 문제를 꺼낸 기억이 있습니다. 그 때 생각이 나네요^^

cyrus 2011-09-05 23:56   좋아요 0 | URL
정말이요? 갑자기 소름이 확 돋네요. ㅎㅎ 나의 생각이 그전에 누군가가
먼저 했다는 사실이 신기해요 ^^;;


아이리시스 2011-09-05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쨌거나,
댓글은,

안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cyrus 2011-09-05 23:57   좋아요 0 | URL
언젠가는 댓글로 바틀비의 대사를 넣어주면 되겠어요 ^^

비로그인 2011-09-05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올리신 글이 넘 재밌습니다. 나중에 누군가를 가르치실 일이 있다면 이렇게 섞어서 얘기해준다면 쏙쏙 머리에 들어올 것 같네요 ㅎㅎ

올리신 글이 꼭 재닜고 웃기기만 한건 아니지만, 그래도 웃음이 먼저 나는건 어쩔 수 없네요 ㅎ

cyrus 2011-09-05 23:59   좋아요 0 | URL
가끔은 행정학을 공부하면서 행정학 내용을 관점으로 문학을 접한다면
재미도 있겠고 공부하는데 더 수월하지 않을까 종종 생각했을 때가 있었어요.

<바틀비>가 내용이 독특하면서 재미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많은 생각을
제공해주는 정말로 훌륭한 소설인거 같습니다. ^^

잘잘라 2011-09-06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과 알고 지내다보면 '하늘의 별'을 딸 날이 오겠지요? 그렇지요?
제발 부탁이예요. 우리 하늘의 별이 되어주세요. cyrus님 화이팅!!!

cyrus 2011-09-06 11:25   좋아요 0 | URL
하늘의 별이 되기를 너무 과분한데요. ^^;;
그래도 포핀스님과 같은 분들을 위해서 좋은 사람이 되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

blanca 2011-09-06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직장에서 보니 바틀비 같은 사람은 왕따나 고문관인 것처럼 소외시켜 버리더라고요. 그만큼 체제라는 게 사람의 자율성을 침범하고 겁쟁이로 만들어 버리는 것 같아요. 현실 안에서 안주하느냐, 고독한 행동가가 되느냐, 이 두 개 사이 어느 지점에서 항상 방황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좋은 책,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cyrus 2011-09-08 00:41   좋아요 0 | URL
군대에도 그런게 있죠. 제가 근무한 부대에서도 바틀비처럼
아예 명령을 거부하는 관심병사가 있었거든요.
그 병사가 그런 행동을 보인 이유가 개인적인 문제도 원인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사회 집단 체제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고 봐요.
모든 사람이 다 특정 사회 집단 체체에 적응하는게 아니니까요. ^^
 
한여름 밤의 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72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여름 밤, 마법의 숲에서 펼쳐지는 사랑의 판타지

<한여름 밤의 꿈>은 그동안 영화, 연극, 음악, 무용 등으로 너무나 많이 만들어져 조금 식상하다는 느낌마저 드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이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오래전에 쓰여진 이야기에 매료되는 것은 그 속에 들어 있는 사랑이 만들어낸 유쾌한 '판타지' 때문일 것이다. 

허미아와 라이샌더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지만 허미아의 아버지 이지우스의 반대로 결혼을 하지 못하고 있다. 결국 두 사람은 밤중에 몰래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이기로 하는데, 바로 이 계획을 헬레나가 알게 된다. 헬레나는 허미아를 짝사랑하는 드미트리어스를 남몰래 짝사랑하고 있었다. 하지의 전날 밤, 라이샌더와 함께 도망가는 허미아를 찾기 위해 드미트리어스가 숲으로 들어오고, 이 드미트리어스를 찾아 헬레나도 숲으로 들어온다.  3쌍의 연인이 숲으로 모이게 되면서 사랑의 백일몽이 시작된다.

그들의 꿈이 단지 백일몽이었던 건 요정들의 장난스러운 마법으로 인해 연인들의 사랑싸움을 한층 소란스럽고 복잡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헨리 퓨젤리 <요정들에게 둘러싸인 티타니아가 깨어나다> 1793년  

 

티타니아:  주무세요. 내 팔로 감아 안아 드릴께요.  요정들은 물러가라.  사방으로 멀어져라. 

               (요정들 함께 퇴장)  

               담쟁이도 아름다운 인동 덩굴 이렇게 부드럽게 감으며, 암송악도 껍질 덮인  

               느티나무 가지를 이렇게 둘러싸요.  오. 정말 그대 사랑해요!  

               난 정말 혹했어요! 

- 4막 1장 중에서, pp 79~80 -

                 

이 야단법석은 숲을 지배하는 요정의 왕 오베론과 왕비 티타니아의 부부싸움에서 시작된다. 잠깐의 다툼에 약이 오른 오베론은 티타니아를 골탕 먹이려고 요정 에게 마법의 꽃을 구해 오라고 명했다.  마법의 꽃으로 만든 즙을 눈에 바르면 눈을 뜨고 나서 맨 처음으로 보는 대상을 사랑하게 된다.  꽃의 즙이 눈에 닿은 요정의 여왕은 하필 못생긴 얼굴의 당나귀 인간 바틈을 처음 바라보게 되고, 순식간에 사랑의 마법에 빠져들고 만다.

퍽의 깨알같은 실수 연발은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재미가 더욱 배가된다.  드미트리어스를 향해 열렬하게 구애하는 헬레나를 보고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 오베론은 퍽에게 마법의 꽃즙을 드미트리어스의 눈에 뿌려주라고 한다. 하지만 퍽은 드미트리어스의 눈에 뿌려야 할 꽃즙을 라이샌더의 눈에 뿌리는 바람에 모든 것이 뒤죽박죽되고 만다.

어긋난 큐피드의 화살처럼 연인들의 마음은 갑자기 행로를 바꾸어 꽂히게 되고, 결혼 준비로 흥겹게 달아오른 숲은 세 커플들로 대혼란에 휩싸인다.  퍽은 자신 때문에 꼬여버린 연인들의 운명을 되돌리기 위해 모두를 잠재우고 꿈 같은 하룻밤을 정리한다. 마법이 풀린 여왕은 잠에서 깨어나고나서야 여태까지 당나귀 인간에 사랑에 빠져 있었던 사실에 황당해한다.   

그리고 문제의 3쌍의 연인들이 잠든 사이에 오베론은 다시 마법을 부려 라이샌더는 허미아를, 드미트리어스는 헬레나를 사랑하도록 다시 원래대로 만들어 놓는다. 이렇게 해서 뒤죽박죽이 되었던 연인관계가 정상으로 돌아오게 됨으로써 서로의 짝을 찾은 두 쌍의 남녀가 아테네의 공작 테세우스 집에서 공작 부부와 함께 결혼식을 올리는 것으로 끝난다. 이렇게 우스꽝스럽고 기괴한 하룻밤은 그렇게 막을 내린다.   

 

 

  사랑의 감정에 사로잡히다

<한여름 밤의 꿈>을 원작으로 읽어본다거나 또는 연극, 영화를 보게 되면 희곡에 등장하연 연인들이 겪게 되는 상황과 장면들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 속에서는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수록된 고대 신화 속 이야기들이 곳곳에 숨겨져 있다고나 인용되고 있다.

사랑에 빠진 3쌍의 연인들 그리고 요정들 이외에도 <한여름 밤의 꿈>에는 마을에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인 목수 퀸스, 풀무장이 플루트, 땜장이 스타우트, 가구장이 스넉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 일행과 어울리는 바틈은 원래 직업이 베틀장이다.    그들은 나흘 앞으로 다가온 테세우스 공작의 결혼식에서 선보일 연극을 연습하기 위해 숲으로 들어온다.  일행 중 한 명인 바틈이 오베론의 마법에 걸려든 것이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티스베>   1909년 

   
 

퓌라모스와 티스베는 집안의 반대로 인해서 이웃지간임에도 서로 만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역시 이들 사랑의 장애물이 될 수가 없았다.   

갈라진 벽의 작은 구멍을 통해서나마 대화를 나눔으로써  

두 남녀는 불 타오는 사랑의 감정을 더욱 지펴나갔다.

 
   

 

그런데 마을 일행들이 선보이는 연극의 제목은 '피라무스와 디스비의 가장 구슬픈 코미디와 가장 비참한 죽음' 이다.     그리스 신화 속 이야기를 알고 있는 독자라면 벌써 눈치를 챘을 것이다.   '피라무스와 디스비' 는 신화 속 비극적인 사랑의 연인인 퓌라모스와 티스베를 패러디한 것이다.   

여전히 이들의 이름이 생소하게 느껴진다면 너무나도 잘 알려진 고대판 '로미오와 줄리엣' 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퓌라모스와 티스베 역시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양쪽 가문에서 서로 반대하는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사랑의 도피를 결심하게 되지만 불행한 사고로 인해 두 사람 다 서로 목숨을 끊게 된다.  바로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나올 수 있었던 것도 퓌라모스와 티스베 신화가 이야기의 원형이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를 토대로 한 연극을 마을 일행들이 연습하게 되는데 공교롭게도 바틈은 연극 속 비극적인 남자 주인공 퓌라모스 역을 맡게 된다.    무식한 바틈은 자신이 맡게 된 퓌라모스 역이 어떤 역할인지 모르고 있지만 비록 오베론의 마법에 의한 것이지만 바틈 역시 퓌라모스처럼 티타니아를 사랑하게 된다.   결국에는 당나귀 머리를 사랑하는 티타니아는 티스베인 것이다.   

두 사람의 가슴을 태운 사랑의 불꽃은 그 뜨겁기가 같았을까, 달랐을까?  아마 같았겠지. (중략)  감추면 감출수록 깊어가는 게 사랑이잖아?   속으로 속으로 타들어가는 섶 속의 불씨 같은 게 사랑이잖아? 

-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 1> '퓌라모스와 티스베' 편, 민음사 pp 156~157 -  

   

퓌라모스와 티스베 이야기는 단지 바틈과 티타니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사랑의 마법에 걸린 허미아와 라이샌더 역시 집안의 반대로 인해 사랑의 결실을 맺지 못할뻔한 연인이기 때문이다.  

마냥 희곡 속의 코믹한 아이러니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인간은 사랑에 빠지면 3쌍의 연인들 그리고 티타니아와 바틈처럼 맹목적으로 상대방만 보게 된다.   이와 관련된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재미난 실험을 소개하자면 이미 연인이 있는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이성의 사진을 보여준 후 주의력을 테스트한 결과, 대부분 주의력에 흐트러짐이 없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한참 사랑에 빠져 온통 상대방의 생각뿐인 사람들은 멋진 이성을 보고도 대부분 한눈을 팔지 않는다는 것을 실험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오비디우스의 표현대로 한 번 지핀 불씨가 겊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활활 타오르듯이 사랑 역시 심장 속에서 타오르기 시작하면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는 힘을 가진 감정이다.





  '사랑' 판타지의 마력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해프닝이었지만, 희곡 속에서는 모두가 결국 자신의 짝을 바로 찾는 것으로 결론지어진다. 마법을 사용한 유혹은 결국 일탈이자 공상으로 끝난다는 교훈도 덧붙여서 말이다. 작품 말미에서 소동의 장본인인 퍽은 익살스럽게 관객들의 양해를 구하고 있다.  

 

저희 그림자들이 언짢으셨다면 / 이러한 영상들이 보였을 때 / 잠들어 있었을 뿐이라고 /  

생각만 고치시면 다 괜찮죠. / 그리고 가볍고 시시하며 꿈처럼 헛것 같은 이 주제를  

나무라지 마십시오.  여러분.  / 용서해 주시면 잘해보겠습니다.   

- 5막 1장 중에서, pp 110 -

 

셰익스피어만의 유머가 묻어나 있는 희곡답게 결말 역시 유머스럽고 재치가 있다.  희곡 속 인물들만 마법의 장난에 농락당한 것이 아니라 텍스트 또는 연극을 보고 있는 독자/관객들 역시 지금까지 지켜본 사건들이 그저 작품 속의 한여름 밤의 꿈인지 아니면 셰익스피어의 만들어낸 판타지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혼동하게 만들어버렸다.   어쩌면 지금까지도 <한여름 밤의 꿈>이 널리 읽혀지고 자주 무대에 오르는 이유가 셰익스피어가 만들어낸 사랑 판타지의 마력이 현대인들의 감성을 지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여름 밤의 꿈>에서 펼쳐치는 사랑의 판타지들은 어떤 이들에게는 여름날 밤에 이루어졌던 꿈 같은 사랑의 추억을 상기시켜주기도 한다.  비록 한낱 꿈으로 남게 되지만 허미아와 라이샌더처럼 더욱 해피엔드로 끝날 사랑의 결실이 맺어질 것이라 기대하면서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셰익스피어가 만들어낸 판타지의 마력인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11-09-04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올핸 시루스님 세익스피어를 올킬하실 모양이시군요!
좋습니다.^^

cyrus 2011-09-05 16:22   좋아요 0 | URL
이 계획이 과연 언제 끝날까요? ㅎㅎ
아마도 내년까지 갈거 같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