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고 있는 오늘은 선선해서 좋네요. 이틀 전인 월요일은 산들대는 바람에 조금은 서늘했습니다. 그날은 공부하기 딱 좋은 날이었어요. 페미니즘 북클럽 레드스타킹이 주최한 ‘페미니즘 스쿨’ 첫 번째 강연이 시작된 날이었거든요.

 

 

 

 

 

 

 

 

 

 

 

 

 

 

 

 

 

 

* [페미 스쿨 첫 번째 교재] 오드리 로드 《시스터 아웃사이더》 (후마니타스, 2018)

 

 

 

사실 지난주 월요일(7월 1일)에 열린 세미나가 ‘페미니즘 스쿨’의 시작을 연 첫 번째 일정이었습니다. 그날 세미나에서는 오랜만에 얼굴을 보인 레드스타킹 멤버들과 페미니즘 스쿨에 등록한 새로운 분들이 참석했습니다. 페미니즘 스쿨을 등록한 세 명을 포함해서 총 열다섯 명이 세미나에 참석했습니다. 3주 동안 읽게 될 오드리 로드(Audre Lorde)《시스터 아웃사이더》 (후마니타스)에 대해서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눠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틀 전 월요일에 진행된 첫 번째 강연의 주제는 ‘교차성 페미니즘(intersectional feminism)입니다. 이 날 강연은 교차성 페미니즘이 탄생하게 된 배경과 교차성 이론을 둘러싼 다양한 정의와 방법론들에 대해서 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교차성’이라는 용어는 1989년에 미국의 페미니스트 법학자 킴벌리 크랜쇼(Kimberlé Crenshaw)가 처음으로 사용했습니다. 정확히 30년 전에 나온 학술 용어인데, 이 사실만 보고 교차성 페미니즘의 역사가 생각보다 짧다고 느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몇몇 학자들은 크랜쇼가 교차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하기 전에도 이미 페미니즘 안에서 교차성 담론이 형성되었다고 주장합니다.

 

 

 

 

 

 

 

 

 

 

 

 

 

 

 

 

 

 

 

* [2018년 레드스타킹 일곱 번째 선정 도서] 패트리샤 콜린스 《흑인 페미니즘 사상》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09)

 

 

 

교차성 페미니즘을 논할 때 가장 먼저 언급해야 하고, 잊어선 안 될 인물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소저너 트루스(Sojourner Truth, 1797~1883)입니다. 그녀는 네덜란드인 지주가 운영하는 미국 농장의 노예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이사벨라 바움프리(Isabella Baumfree)였습니다. 그녀는 노예 출신 흑인 남성과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습니다. 1826년에 딸을 데리고 탈출을 감행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노예제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남부에서 북부로 이주하는 노예들이 많았어요.

 

노예제가 적용되지 않은 뉴욕에 정착한 바움프리는 1843년에 ‘소저너 트루스’라는 새로운 이름을 만들어 노예제 폐지 운동과 여성 인권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트루스는 1851년 미국 오하이오주에 열린 여성 권리 대회에 참가했는데요, 그녀는 이 대회에서 노예 해방 운동 역사와 페미니즘 역사에 길이 남을 명연설을 합니다.

 

 

 저기 있는 저 남자 분은 여성은 마차에 탈 때 도움을 받아야 하며 구덩이에서 나올 때도 남자가 들어 올려 주어야 하고 모든 곳에서 가장 좋은 곳을 차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내가 마차를 타거나 진창을 지나야 할 때 도와주지 않으며 아무도 내게 가장 좋은 곳을 내어주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여성이 아니란 말입니까?(Ain’t I a Woman?) 나를 보십시오! 이 팔을 보십시오! 나는 어느 남자보다도 더 많이 쟁기를 끌었고 씨를 뿌렸으며 곡물을 거두어 곳간에 넣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여성이 아니란 말입니까? 나는 남성과 똑같이 일할 수 있고, 충분한 음식이 있다면 남자만큼이나 많이 먹고, 채찍질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여성이 아니란 말입니까? 나는 열세 명의 아이를 낳았으며 이 아이들 모두가 노예로 팔려가는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내가 어머니로서 슬픔에 겨워 울 때 주님 말고는 아무도 제 슬픈 울음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여성이 아니란 말입니까?

 

 

(박미선 옮김, 《흑인 페미니즘 사상》, 44쪽, 밑줄은 cyrus가 내용을 강조하기 위해 표시한 것임)

 

 

 

사회적 약자로서의 정체성을 여러 겹 지닌 트루스는 ‘흑인’과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하는 백인들을 향해 “나는 여성이 아닙니까?”라고 되물었습니다. 흑인 여성 인권 운동은 19세기 초 백인 여성 인권 운동과 동시에 진행되었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것과 투쟁 노선 방식이 서로 달랐습니다. 흑인 여성들은 인종 차별과 성차별의 이중 억압 아래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노예제 사회에서 흑인의 젠더는 주목받지 못한 명제였고, 먼 훗날 흑인 인권이 부각되었을 때도 ‘인종’이란 대명제에 밀려 더 음습한 곳으로 밀려났습니다. 교차성 페미니즘은 여성을 둘러싼 차별과 불평등 문제를 인종, 계급, 섹슈얼리티와 관련된 억압 문제와 따로 분리해서 보지 않습니다. 서로 ‘상호 연관’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죠. 교차성 페미니즘 담론이 형성되면서 흑인 페미니스트들은 흑인 남성과 백인 여성에 가려져 아주 오랫동안 밀려나있던 흑인 여성들의 삶과 목소리에 주목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교차성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페미니즘 스쿨’ 전담 교사인 전혜은 선생님은 교차성을 ‘차이를 사유하는 방식’과 밀접하게 관련된 개념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자, 이제 교차성이 학문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좀 더 깊이 있게 접근해볼까요?

 

크랜쇼는 인종과 젠더가 교차하는 다양한 방식을 나타내기 위해 ‘교차성’을 제시했습니다. 그녀는 이 개념을 가지고 ‘단일 축 사유’의 한계를 지적합니다. 단일 축 사유란 어떠한 대상이나 존재 또는 문제를 단일하게 바라보거나 규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테면 과거에 백인 여성 페미니스트들은 “모든 여성이 겪는 억압은 비슷해. 따라서 가부장제를 공격하려면 여성들을 연대하게 만드는 자매애(sisterhood)가 있어야 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하여 그 유명한 “자매애는 강하다”라는 구호가 나오게 됐죠. 그런데 여성이 겪는 억압을 단일하게 볼 수 있을까요? 또 이 세상의 모든 여성을 ‘자매’라는 이름으로 단일한 집단으로 묘사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질문이 크랜쇼가 교차성 개념을 제시한 목적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크랜쇼는 ‘자매애’를 강조하는 것만으로는 백인 여성들이 겪어보지 못한 흑인 여성의 인종차별 문제를 포괄하기 어렵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크랜쇼가 말한 교차성은 유색인 여성들이 겪는 젠더와 인종 문제를 설명할 수 있도록 틀을 짜는 개념입니다. 결국 교차성은 ‘차이에 대한 민감성(전혜은)이 있어야 이해할 수 있는 개념입니다. 교차성의 의미를 이해했으면 ‘침묵 당해온 소수자들에게 목소리를 들려줄 수 있는(전혜은) 방식이 무엇인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지금도 교차성을 주제로 여러 가지 논의들이 나오고 있습니다만, 한편으로는 교차성을 비판하는 의견들도 나오고 있습니다. 장점이 많은 이론이라고 해서 그 이론에 단점이나 한계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에요. 일부 학자는 교차성을 ‘연구 방법론’으로 보기에 빈약하다고 지적합니다. 사실 교차성 이론은 다양한 분과학문의 틀에 맞춰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는데요, 이에 대해 학자들은 교차성 이론에 과연 명확하게 규정할 수 있는 정의와 방법론이 있는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오히려 교차성이 지나치게 분과 학문에 의존하고, 거기에 틀에 맞춰 설명하게 되면 정작 중요한 이슈를 지워버릴 수 있다고 비판합니다.

 

여기에 대해 크랜쇼는 반박합니다. “‘교차성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이 뭐가 중요한데?”라고 말이죠. 크랜쇼는 애초에 교차성을 ‘거대 이론’으로 만들 생각이 없었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교차성 이론을 논할 때 ‘교차성이 무엇인지’ 정의를 따지기보다는 ‘교차성이 무엇을 하는지’에 초점을 맞추자고 제안합니다. 즉 우리가 ‘교차성’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해보자는 거죠.

 

지금도 학자와 페미니스트(이제 막 페미니즘을 공부하기 시작한 사람들)들은 궁금해 합니다. “교차성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요?” 아마도 사람마다 생각하는 교차성의 정의는 제각각 다를 것입니다. 그렇다면 개념 정의조차 명확하지 않은 교차성 이론은 너무 난해해서 공부할 필요가 없고, 페미니즘을 연구하는데 쓸모없는 이론일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실번 톰킨스(Silvan Tomkins, 1911~1991)라는 심리학자는 인간이 만든 모든 이론을 ‘강한 이론(strong theory)’과 ‘약한 이론(weak theory)이라는 두 가지 개념으로 설명했습니다. ‘강한 이론’은 문제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방법론을 가지고 있는 이론이라면, ‘약한 이론’은 변동하는 문제 상황의 맥락에 따라서 다양한 방식으로 접근하는 이론을 의미합니다. 교차성은 ‘약한 이론’에 속합니다. 왜냐하면 교차성 이론은 문제를 명확하게 분석할 수 있는 보편적인 방법론이라기보다는 ‘문제의 복잡성을 이해하면서 사유하는 해석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차성 페미니즘을 이해하게 되면 ‘어떤 (여성을 둘러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한 가지 정답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혜은 선생님은 페미니즘이라는 학문도 ‘약한 이론’에 속한다고 말씀했습니다. 페미니즘이 ‘약한 이론’이라고 해서 그것을 학문이라고 볼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페미니즘을 체계적인 학문으로 취급하지 않으려는 사람일 것입니다.

 

 

 

 

 

 

 

 

 

 

 

 

 

 

 

 

 

 

 

* 정경직, 최성용, 이아름, 정연 《페미니즘 쉼표, 이분법 앞에서》 (들녘, 2019)

 

 

 

《페미니즘 쉼표, 이분법 앞에서》 (들녘)라는 책에 수록된 『속도와 페미니즘을 사유하다』에 나온 문장을 인용해보겠습니다.

 

 

 일각에서는 페미니즘의 비일관성 · 미완결성 · 다양성을 이유로 페미니즘을 비과학적이고 체계적이지 못한 사상으로 평가절하하거나, 심지어는 철학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참으로 재미있는 주장이다. 과연 철학이나 과학은 체계적이고 일관되며, 완결된 학문일까? 답은 명백하다. 소위 ‘과학적인’ 학문의 대표로 여겨지는 물리학이나 경제학 등의 분야에서도 여전히 수많은 이들이 새 논문을 발표하고, 이질적인 가설을 제시하며, 기존의 이론을 반박하는 등 치열한 논쟁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즉, 완결되지 않고 왕성한 토론이 이루어지는 분야는 오히려 가장 생명력 있는 학문인 것이다. 논쟁이 끝나고, 더 이상 연구할 내용이 없는 학문, 문제 제기할 것이 없는 운동, 새로운 해석 없이는 원전만을 읊어대는 교조주의는 체계적이고 일관되며 완결된 것이 아니라, 죽은 것이다.

 

(장경직, 16~17쪽, 밑줄은 cyrus가 내용을 강조하기 위해 표시한 것임)

 

 

 

급진 페미니즘이든 교차성 이론이든 간에 페미니즘의 모든 이론은 ‘약한 이론’입니다. 페미니즘을 부정하는 사람들 눈에는 페미니즘이 무언가 부족해 보이고, 학문 같지 않다고 느껴지겠죠.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들이 체계적인 학문을 그렇게도 좋아한다면 왜 다양한 이론으로 설명되는 다른 학문에 대해선 아무 말도 안 하십니까? 유독 페미니즘에만 열을 내면서 학문이 아니라고 폄하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네요. 당신들 논리라면 일관적이지 않는 진화론(자연선택을 믿는 다윈주의자와 성 선택을 믿는 다윈주의자들 간의 논쟁은 지금도 진행 중입니다)도 학생들이 배우면 안 되겠네요.

 

어떤 사람은 ‘페미니스트는 남성을 혐오하는 워마드다’라고 말합니다. 또 어떤 이는 ‘페미니스트 탈출은 지능 순’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말은 ‘남성을 혐오하고 여성만을 챙기려는 페미니스트들은 지능이 부족하다’는 편견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페미니스트들은 어디선가 공부를 하고 있고, 페미니즘 책을 읽으면서 토론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제가 페미니즘 공부를 좋아하는 이유는 페미니즘은 ‘완결되지 않는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완결되지 않는 학문’은 공부하기가 쉽지 않아요. 공부해야 할 페미니즘 이론이 많고요, 서로 대립하고 있는 페미니스트들(트랜스 여성을 여성으로 보지 않는 ‘일부’ 급진 페미니스트들과 트랜스 여성을 옹호하는 퀴어 페미니스트)을 만나면 혼란스러워요. 그러나 저는 페미니즘을 계속 공부할 것입니다. 계속 공부하다 보면 나를 깜짝 놀라게 해줄(아니면 더 혼란스럽게 만드는) 새로운 페미니즘 이론이나 담론이 나오겠죠. 그럴 때 저는 페미니즘 이론의 유용성을 배우면서, 이론의 한계나 단점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논쟁은 피할 수 없습니다. 언젠가는 마주해야 할 상황이죠. 논쟁이 없고, 문제 제기나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페미니즘 공부는 재미가 없어요. 그런 일관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페미니즘은 서서히 힘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페미니즘이 계속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마저 사라지게 되는 거죠.

 

‘약한 이론’의 페미니즘은 가장 생명력 있는 학문입니다. 이 학문에 정답은 없습니다. 입장이 다르다는 이유로 외면하거나 배척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반응은 ‘학문’으로서의 페미니즘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을 닳게 만듭니다. 레드스타킹의 페미니즘 스쿨은 페미니즘을 살아 숨 쉴 수 있게 만드는 ‘영양분’과 같은 이론들을 배울 수 있는 곳입니다. 이 ‘영양분(페미니즘 장애학, 주디스 버틀러의 이론 등)’이 엄청 어려워 보이지만, 내 삶과 페미니즘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면 기꺼이 시간을 내서 공부하고 싶습니다.

 

 

 

 

 

 

 

 

※ 레드스타킹이 네이버 카페를 만들었습니다. 페미니즘 스쿨에 등록된 분이 아니어도 카페에 가입할 수 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https://cafe.naver.com/redstoc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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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1 09: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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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1 1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13 02: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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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1 12: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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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여행 - 여성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신비한 여정, 2019 세종도서 교양부문 선정도서
말린 쉬위 지음, 김창호 옮김 / 산지니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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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과 우울을 경험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부정적인 감정을 극복하는 방법은 저마다 다르다. 어떤 이는 마음이 아플수록 더욱더 환하게 미소를 짓는다. 때로는 음식을 먹거나 술을 마시기도 하고, 머릿속을 꽉 채운 잡다한 상념을 비우기 위해 잠을 청하기도 한다. 이렇듯 나만의 방법을 사용해 슬픔을 잊어보려 한다고 가정해 보자. “내 마음의 상처는 과연 모두 사라진 걸까?” 자아 성찰적인 질문을 나에게 던질 때 ‘그렇다’고 확신하면서 말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힘든 상황에 반복적으로 처하게 마련이다. 그때마다 도움이 되는 방법을 위급하게 찾아 헤맨다. 하지만 문제가 해결되면 다짐과는 다르게 고통과 두려움을 곧 잊어버리고 만다. 그렇게 위태로운 상황은 반복된다.

 

치유(healing). 우리는 이 단어를 많이 쓰지만, 얼마나 구체적으로 이해하고 실천하고 있을까? 일단 치유의 정의를 내리기부터 쉽지 않다. 그냥 내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마음이 아픈 나 자신을 만나러 가는 내면 여행’이랄까.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상처받은 내면의 나를 만날 수 있을까? 《일기 여행》은 자아 성찰에서 치유로 이어지는 내면 여행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안내서다. 여성을 위한 글쓰기 프로그램을 운영해온 저자는 ‘일기 쓰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일기는 글쓰기를 이용해 심신의 병을 고치는 일종의 치료법(therapy)이다. 마음속이 복잡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 종이에 뭘 쓰거나 낙서를 하면 마음이 진정되던 경험을 누구나 한두 번쯤 겪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일기 쓰기 숙제를 하느라 끙끙대던 추억에 고개를 젓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자신을 성찰하고 새로운 내 모습을 발견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을 찾기란 쉽지 않다.

 

일기는 누구나 혼자서 쓸 수 있다. 남을 의식하지 말고, 날짜를 기록하며 쓰는 것은 아주 기본적인 규칙이다. 하지만 일기조차 남을 의식하고 써온 사람들에게는 이조차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이런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도 현실이다. 이때 《일기 여행》이 그런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 일기 쓰기가 얼마나 훌륭한 ‘치유’의 도구인지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저자가 생각하는 ‘여성의 일기 쓰기’란 무엇일까. 저자는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 삶을 기록하려는 여성의 정신적 여행”이라고 말한다. 일기라는 글을 쓰는 물리적 행위, 즉 종이 위에 단어가 되어 나타난 내 모든 감정은 ‘나’라는 존재에서 나오는 진솔한 목소리에 대한 확인이다. 여성이 글을 쓰는 것은 내 목소리를 가지는 것과 같다.

 

이런 멋진 행위를 여성이 마음껏 누릴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적어도 글을 쓰기 위해서는 문자와 문법을 이해해야 하고, 책에 접근할 기회가 충분히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고 보면, 여성들이 공개적으로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남성 중심적 사회는 대부분 여성을 교육에서 배제했을 뿐만 아니라, 글 쓰는 여성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또 읽을거리도 제한했다. 이렇다 보니 글을 쓰고 싶은 여성들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남성으로 보일 수 있는 필명을 만들어 작가 활동을 했다. 전업 작가로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되는 여성들은 자신만의 비밀 노트에 글을 쓰거나 일기 쓰기에 몰두했다. 수많은 여성이 남긴 일기장은 지옥 같은 현실에서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대화 상대였고, 마음껏 자유를 꿈꿀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이었다.

 

‘일기를 읽는 행위’도 장점이 있다. 일기는 그것을 쓴 사람을 말해주는 지표가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인의 일기를 보면서 타인의 삶이 되어 그 사람의 의식을 이해할 수 있다. 일기를 읽는 행위에 매료되는 건 그 때문이다. 일기는 타자의 삶을 살도록 해주고, 타자의 의식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일기의 주인공은 자신에 관해서 말하고 있지만, 그 일기를 보는 독자는 일기의 주인공 속에서 나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일기를 읽으면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돌아봄으로써 큰 도움과 위안, 나아갈 방향을 얻을 수 있다. 일기는 글쓴이의 사적 성찰에 대한 단순한 기록물로 축소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경험과 깨달음을 들려준다.

 

당장 먹고살기도 힘든 마당에 아무도 보지 않는 일기를 쓰는 행위는 부질없는 짓일 수 있다. 어차피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고, 대개의 기록이 사회적 권위가 있는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춰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도 우리는 뭐라도 써야 한다. 힘 있는 자들의 기록이 쌓여갈수록, 사회 전체의 표준은 그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휜다. 그래서 특출한 경력이 없는 사람, 즉 전업 작가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글을 써야 한다. ‘글쓰기는 많이 배운 사람이나 할 수 있는 고상한 행위’라는 통념은 거짓이다. 이런 거짓말로 이익을 누리는 이들은 글쓰기로 밥을 버는 이들뿐이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육체적 노동을 직접 해보지 않으면서도, 남들보다 더 많은 돈을 받으면서 밥을 챙겨 먹는 자신들의 모습을 정당화하기 위해 글쓰기가 마치 대단히 신비한 재능이 필요한 일인 양 꾸미곤 했다.

 

글쓰기는 ‘수준 높은 정신적 노동’이 아니다. ‘정신적 노동’임에는 분명하지만, 높은 수준의 지식과 사고력이 꼭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글을 쓴다고 해서 대단한 교양인으로 취급할 필요는 없다. 반대로 교양인이 아니어도 글을 쓸 수 있다. 글은 어떤 지식을 전달하고 공유하기 위해 쓰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글의 본질적인 용도는 과거의 ‘나’를 다시 만나게 하고, 미처 발견하지 못한 ‘나’의 진짜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이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을 과감히 들춰보자. 그런 다음에 마음을 편히 하고 종이 위에 생각나는 대로 적는다. 사무치게 미웠던 사람에 대한 감정, 나 자신에게 실망했던 사건, 하려고 했으나 잘되지 되었던 일, 내년엔 꼭 하고 싶은 계획 등 주제를 잡아도 좋다. 고통은 부정적인 감정을 억누르는 데서 나온다. 일기 쓰기를 통해 여러 개의 나를 돌아보면 진짜 옹골찬 내면의 힘을 가진 새로운 내 모습이 정체를 드러낸다. 여러 개의 감정이 있던 내가 하나의 ‘나’로 합체된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힘겹게 살아온 나 자신을 치유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이 생긴다.

 

글쓰기는 결코 거창한 것이 아니다. 일기를 쓰면서 시작할 수 있다. 일기는 새로운 글을 낳게 만드는 모태가 될 수 있다. 일기를 쓰면서 글쓴이 스스로 자신 안의 잠재력을 발견하게 된다면, 또 다른 이야기들이 나올 것이다. 일기 쓰기는 완성된 결과물보다는 그 ‘기록하는 과정’에 가치가 있다. 일기는 진정한 ‘나’를 만나러 가는 여행을 위한 지름길이다.

 

 

 

 

 

※ Trivia

 

역자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외국인 이름을 영어로 발음하는 방식대로 썼다. 그리고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의 소설 《빌러비드》를 직역하는 세심함(?)을 발휘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는 표기에 맞게 쓰면 다음과 같다.

 

 

* 31쪽: 크리스타 울프(Christa Wolf) → 크리스타 볼프

 

* 71쪽: 리처드 바그너(Richard Wagner) → 리하르트 바그너

 

* 171쪽: 오더 로드(Audre Lorde) → 오드리 로드 (‘오드르 로드’라고 쓰는 사람도 있음)

 

* 295쪽: 로버트 슈만(Robert Schumann) → 로베르트 슈만

 

* 310쪽: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사랑하는(beloved) → 《빌러비드》

 

* 317쪽: 조지아 오케이프(Georgia O’Keeffe) → 조지아 오키프

 

* 320쪽: 마리 배쉬커트세프(Marie Bashkirtseff) → 마리 바시키르트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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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0 14: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7-10 18:43   좋아요 1 | URL
저는 초등학생 때까지 일기와 독후감을 많이 썼어요.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글쓰기에 흥미를 잃었어요. 사실 공부만 하느라 글을 쓸 기회가 없었죠. 이상하게도 군인이 되니까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대하고 난 뒤에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알라딘 블로그에 글을 남겼어요. 오랜만에 글을 썼던 시기라서 저도 글을 어떻게 쓸지 막막했었습니다. ^^

2019-07-10 16: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7-10 18:44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일기와 리뷰의 공통점에 대한 생각을 글로 정리할 예정입니다. ^^

2019-08-15 12: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8-17 08:30   좋아요 0 | URL
원래 그 분 강연이 그렇게 진행됩니다. 그 분의 강연을 처음 분들은 당혹스러울 수 있어요.. ^^;;
 
동물 농장 세계문학 마음바다 2
조지 오웰 지음, 안경환 옮김 / 홍익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홍익출판사에서 나온 조지 오웰(George Orwell)《동물농장》 의 번역은 서울대학교 법학과 교수를 지낸 안경환 씨가 했다. 그는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을 때 초대 법무부 장관 후보자로 내정되었으나 각종 논란이 알려지게 되면서 장관 후보 자격을 스스로 내려놓았다. 《동물농장》 번역본은 안 씨가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시기에 나왔다.

 

이 번역본의 특징은 소설의 장(章, 《동물농장》은 총 1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이 끝난 다음에 해설이 나온다는 점이다. 기존에 나온 번역본들의 ‘작품 해설’은 책의 뒷부분에 있다. 소설 텍스트와 텍스트 해설을 교차 배치한 방식이 신선하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각 장에 전개된 이야기들 속에 숨은 의미를 단번에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장과 장 사이에 끼인 역자의 해설은 독자의 독해를 방해하는 요소가 될 수 있다.

 

이 번역본에 실린 부록은 오웰이 직접 쓴 서문, 특별히 우크라이나 판 《동물농장》 출간을 위해 오웰이 특별히 쓴 서문, 그리고 오웰이 생각하는 정치적 글쓰기의 의미와 그 중요성을 알 수 있는 에세이 두 편(『나는 왜 쓰는가』 『작가와 리바이어던』 )으로 채워져 있다. 문학평론가 정여울 씨와 역자와의 인터뷰 대담도 있는데, 딱히 특별한 내용은 없다. 이 인터뷰 대담은 안 씨가 오웰의 글을 어떤 이유로 좋아하게 되었고, 왜 《동물농장》을 번역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내용으로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렇다 보니 인터뷰에 안 씨의 개인사도 나오는데, 안 씨는 출간 당시 논란이 되었던 《조영래 평전》(강, 2006)을 번역한 일까지 언급했다.

 

 

 《조영래 평전》은 ‘특징 없는 모범생’이었던 저 자신의 엘리트로서의 죄책감과 책임감이 투영된 책이지요.  (228~229쪽)

 

 

이런 것까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있나? 나는 안 씨가 《동물농장》이 아닌 다른 책을 쓰게 된 배경이 무엇인지 궁금하지도 않으며 알고 싶지 않다. 안 씨가 말하는 사족만 빼면 내용이 전체적으로 괜찮은 인터뷰다.

 

 

책을 읽다가 오자 두 개를 발견했다.

 

 

 ‘영국의 짐승들’ 노래가 예견하는 ‘황금빛 미래’에는 동물들은 인간의 잔인한 지배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노동의 대가로 행복한 공동체의 삶을 누린게 된다는 것이다. (32쪽)

 

 

‘누린게’를 ‘누리게’로 고쳐야 한다.

 

 

부록 「작가와 리바이어던」 216쪽에 제임 조이스(James Joyce)라는 오자가 있다. 《율리시스》를 쓴 아일랜드 출신의 작가 제임스 조이스의 오자다.

 

 

《동물농장》 5장 해설에 오류가 있다. 잘못된 내용이 있는 문장을 인용해 본다.

 

 

 역사에서도 레닌이 죽자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추방하고 권력을 장악한다. 오웰 자신이 스페인내전(1936~1939)에서 트로츠키파에 가담한 경험이 있기에 스노볼을 비교적 우호적으로 그렸다는 해석도 있다. 레닌은 멕시코에까지 암살단을 보내어 트로츠키를 살해한다. 트로츠키 사후에도 레닌은 계속하여 그를 ‘위험한’ 유령으로 규정하고 그를 핑계 삼아 1930년대 피의 대숙청작업을 단행했다. (84쪽)

 

 

레닌이 죽은 뒤에 스탈린이 트로츠키를 추방하고 권력을 장악했다고 언급된 문장이 있다. 그런데 ‘죽은’ 레닌이 트로츠키를 암살하라고 지시를 내렸다는 문장이 이어서 나온다. 앞뒤가 맞지 않는 내용이다. 생전에 레닌은 스탈린과 그를 따르는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했다. 그러나 레닌의 걱정은 현실이 되었다. 트로츠키와의 권력 투쟁에서 승리하면서 당내 유일한 지도자로 자리 잡은 스탈린은 ‘피의 대숙청’을 단행했다. 이 시기에 레닌은 죽고 없다. 레닌은 1924년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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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9 1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7-10 12:18   좋아요 0 | URL
오웰이 <동물농장>을 쓰기 시작한 시기에 이미 소련은 ‘스탈린 제국’이었어요. 그런데 영국의 일부 좌파들은 소련 내 분위기와 심각한 상황들에 대해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어요. 사실 오웰이 ‘독재로 변질된 사회주의’만큼이나 걱정했던 것은 ‘냉전’ 체제 분위기가 올 수 있는 암울한 미래였어요. 오웰이 예상한대로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 냉전이 시작되었어요.
 

 

 

 

조지 오웰(George Orwell)은 이튼스쿨에 다니던 시절에 프랑스어를 배웠다. 그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쳐준 교사는 오웰의 문학에 큰 영향을 준 올더스 헉슬리(Aldous Huxley)다. 이때 헉슬리의 나이는 스물네 살이었다. 그러나 헉슬리는 눈이 너무 좋지 않았다. 10대 때부터 걸린 각막염으로 인해 시력이 반쯤 상실된 상태였다. 그의 시력 장애는 이튼스쿨 학생들의 놀림감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오웰은 헉슬리 선생을 잘 따랐다. 그는 헉슬리 선생에게서 프랑스 문학 작품들을 접했고, 가끔 그와 진지한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오웰은 헉슬리에게 프랑스어를 잘 배운 덕분에 파리에서 생활할 수 있었다.

 

 

 

 

 

 

 

 

 

 

 

 

 

 

 

 

 

* 스테판 말테르 《조지 오웰, 시대의 작가로 산다는 것》 (제3의공간, 2017)

 

 

 

 

오웰은 인도 제국 경찰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작가가 되기 위해 영국으로 돌아와 일 년간 지내다가 파리로 건너갔다. 1928년 초에 그는 가난한 노동자와 노숙자들이 모여 사는 동네에 자리를 잡았고, 그곳에서 살아온 경험을 소재로 한 첫 번째 작품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을 쓰게 됐다. 오웰이 파리에 정착하는 데 경제적으로 도움을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모 넬리 리무진(Nellie Limouzin)이다. 넬리는 페이비언 사회주의(Fabian socialism: 영국에서 만들어진 점진적 사회주의) 협회에 소속된 회원이었고, 유명 인사들이 모이는 살롱의 주인이기도 했다. 오웰 평전인 《조지 오웰, 시대의 작가로 산다는 것》 (제3의공간)은 오웰의 주변 인물에 대해서도 아주 상사하게 설명되어 있는데, 그 책에 넬리의 살롱에 드나든 유명 인사들이 누군지 언급된 내용도 있다.

 

 

 

 페미니스트이자 페이비언협회 회원인 넬리는 자신의 집을 작가들의 살롱으로 제공했다. [중략] 그러나 불행히도, 에릭은 역시 이 살롱에 드나드는 신랄한 논조로 유명한 G. K. 체스터턴(G. K. Chesterton)이나, 공포 이야기와 공상과학 소설가 P. M. 실, 그리고 심지어는 자기의 우상인 웰스와는 마주친 적이 없었다.  (67~68쪽)

 

 

 

그런데 내가 인용한 문장에 오류가 있다. 이 문장의 오류는 ‘공상과학 소설가 P. M. 실이다. 작가 이름이 잘못 적혀 있는데, 오류라기보다는 ‘오식’에 가깝다. 퍼스트 네임과 미들 네임의 순서가 잘못 적혀 있다. ‘P. M. 실’이 아니라 ‘M. P. 실’이다. 사족이지만 P와 M, 그리고 실(Shiel)의 첫 글자인 S가 합쳐지면 ‘PMS’가 된다. PMS는 월경 전 증후군(premenstrual syndrome)의 약자이다.

 

넬리의 살롱에 드나든 G. K. 체스터턴허버트 조지 웰스(Herbert George Wells)는 각각 추리소설가(대표작: 브라운 신부 시리즈), 《타임머신》과 《투명 인간》을 쓴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M. P. 실은 어떤 사람인가? 실은 체스터턴과 웰스의 인지도에 비해 한참 못 미치지만, 장르문학의 역사를 논할 때 한 번쯤은 언급되는(언급되어야 할) 작가다.

 

 

 

 

 

 

 

풀 네임은 매튜 핍스 실(Matthew Phipps Shiel)이다. 카리브 해에 있는 영국령 몬세라트(Montserrat) 섬에 태어났고, 주로 미스터리물이나 공상과학소설을 썼다. 생전에 실의 작품은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고, 실은 가난하게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실이 죽고 난 후에 극소수의 미스터리 마니아와 장르문학 작가들이 그의 작품을 재평가했다.

 

 

 

 

 

 

 

 

 

 

 

 

 

 

 

 

 

 

 

* M. P. 실 《The Purple Cloud》 (Penguin Group USA, 2012)

* H. P. 러브크래프트 《공포 문학의 매혹》 (북스피어, 2012)

 

 

 

실의 대표작은 1901년에 발표된 <The Purple Cloud>이다. ‘자줏빛 구름’ 또는 ‘보랏빛 구름’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이 작품에 지구가 파괴되어 혼자 살아남은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래서 <The Purple Cloud>는 포스트 아포칼립스(post-apocalypse: 세계 종말 이후의 상황을 그리는 SF문학의 한 하위 장르)의 서막을 알린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Howard Phillips Lovecraft)는 공포 문학 작품들을 비평한 자신의 글《공포 문학의 매혹》(북스피어)에서 <The Purple Cloud>의 작품성을 호평했으나 이 작품의 종반부가 아쉽다는 비판적인 견해도 곁들었다.

 

 

 

 

 

 

 

 

 

 

 

 

 

 

 

 

 

 

 

 

 

 

 

 

 

 

 

 

 

 

 

 

 

* 안길환 엮음 《영국의 괴담》 (명문당, 2000)

* 정진영 엮음 《세계 호러 걸작선 2》 (책세상, 2004)

* 한국추리작가협회 엮음 《세계 추리소설 걸작선 2》 (한스미디어, 2013)

* [e-Book] 매튜 핍스 실 《오번 가문의 비극》 (한스미디어, 2014)

 

 

 

 

실은 스무 편 이상의 단편소설을 남겼지만, 국내에 소개된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총 세 편인데, 나는 이 작품들을 엘러리 퀸(Ellery Queen)이 썼던 평가 방식처럼 소개하겠다.

 

 

 

 

 

 

 

 

 

 

 

 

 

 

 

 

 

 

* 엘러리 퀸 《탐정, 범죄, 미스터리의 간략한 역사》 (북스피어, 2016)

 

 

 

 

‘엘러리 퀸이 썼던 방식’이 무엇이냐면 그가 탐정소설을 평가할 때 사용했던 세 가지 기준을 말한다. 첫 번째 기준은 ‘역사적 중요성(Historical Significance)이다. 작품이 역사적으로 어느 정도 중요한지 평가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작품이 문학적으로 우수한지(Quality) 평가하는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는 초판본의 희소가치(Rarity)다. 내 글에서 사용된 ‘R’은 초판본이 아닌 ‘번역본’의 희소가치를 뜻한다. 퀸은 탐정소설을 평가할 때 이 세 가지 기준을 뜻하는 단어의 첫 글자를 따온 ‘HQR’로 표시했다. 나는 여기에 네 번째 기준을 추가했다. ‘번역되지 않은(Untranslated) 작품’일 경우 ‘U’를 표시했다.

 

 

 

 

 

1. 지상에서 못 이룬 사랑

The Tale of Henry and Rowena (1928)

 

R

 

 

 

 

 

 

《영국의 괴담》 (명문당)에 수록된 작품이다. 자신이 사랑한 귀부인에 집착하는 한센병 환자 귀족에 대한 이야기다. 귀부인은 저주의 병(20세기 전까지만 해도 한센병은 치료법이 없는 불치병이었다)에 걸린 귀족에 연민을 느껴 어쩔 수 없이 그의 구애를 받아들이지만, 귀부인에 향한 귀족의 사랑은 간절하다기보다는 무시무시하게 느껴지는 발악에 가깝다. 번역이 영 좋지 않다. 이 작품만 번역에 문제가 아니라 《영국의 괴담》에 수록된 전 작품 모두 번역이 좋지 않다. 2000년에 나온 책인데, 국한문혼용체로 되어 있다. 문장 한 개에 들어 있는 한자어가 한글보다 더 많은 것 같다. 역자가 한자어를 너무 많이 썼다. 거기에 편집자는 아주 친절하게 한자어 옆에 한문까지 같이 써주셨다…‥. 동양고전을 전문적으로 펴낸 출판사라서 한자를 많이 썼던 것일까? 한자어가 너무 많은 문장은 독자가 이야기에 몰입하는 데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줄거리를 파악하는 데 어렵게 만든다. 그리고 한센병 환자 귀족의 이름은 ‘헨리(Henry)’인데 번역본에는 ‘덴리’로 되어 있다.

 

 

 

 

 

 

2. 제루샤

Xélucha (1896)

 

HR

 

 

 

 

 

 

러브크래프트는 이 작품을 ‘독기 어리고 소름 끼치는 단편’이라고 평가했다. 소설 제목인 ‘제루샤’는 ‘악마 같은 여성’으로 묘사된 인물의 이름이다. 『제루샤』는 세기말에 유행했던 병적이고, 반도덕적이고, 퇴폐적인 문화 양식, 즉 데카당스(décadence)풍 감수성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 ‘메리메’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비제(Georges Bizet)의 오페라 《카르멘》의 원작자로 유명한 프로스페르 메리메(Prosper Merimee)와 관련이 있는 것일까?

 

 

 

 

 

3. 오번 가문의 비극

The Race of Orven (1895)

 

HRU (엘러리 퀸의 평점은 HQR)

 

 

 

 

 

실은 아마추어 탐정이 등장하는 탐정소설 네 편을 썼다. ‘잘레스키 왕자(Prince Zaleski)가 미궁의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다. 『오번 가문의 비극』, 『에드먼즈버러 승려의 돌(The Stone of the Edmundsbury Monks)』, 『The S.S』는 실이 살아있을 때 발표한 ‘잘레스키 왕자’ 시리즈다. 그러나 이 작품도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

 

 

 

 

 

 

 

 

 

 

 

 

 

 

 

 

 

 

 

 

* [절판] 김봉석, 장경현, 윤영천 《탐정 사전》 (프로파간다, 2014)

 

 

 

 

잘레스키 왕자는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가 창조한 아마추어 탐정 오귀스트 뒤팽(Auguste Dupin)과 흡사하다. 두 사람 모두 앞날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재력이 있으나 신분이 몰락한 상태가 되었고, 세상과 단절되다시피 하면서 살고 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또 다른 공통점은 도락가로서 살고 있다는 점이다. 잘레스키는 골동품을, 뒤팽은 책을 수집한다. 실과 포의 탐정소설에 나오는 화자의 역할도 비슷하다. 작품 속 화자는 탐정에게 미궁의 사건을 들려준다. 이야기를 들은 탐정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동원하여 논리적인 방식으로 사건을 해결한다. 그렇다 보니 뒤팽과 잘레스키는 종종 자신의 학식을 자랑하는 듯한 발언을 한다. 그들은 너무 진지하게 현학적인 발언을 하는데 대부분은 사건과 전혀 관련 없는 철학적인 내용이다.

 

『오번 가문의 비극』은 ‘잘레스키 왕자 시리즈’에 속한 작품 중에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번역된 작품이다. 그래서 1895년에 『오번 가문의 비극』과 함께 발표된 나머지 두 작품은 번역되지 않았기 때문에 ‘U’를 표시했다. 실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 알려진 『The Return of Prince Zaleski』도 번역되지 않은 작품이다. 이 소설은 1945년에 쓰였으나 실이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한동안 잊히고 말았다. 다행히 실과 공동으로 집필 작업을 했던 존 고스워스(John Gawsworth)가 이 작품의 원고를 엘러리 퀸에게 보내게 되면서, 잊힐 뻔했던 ‘잘레스키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이 세상의 빛을 볼 수 있게 됐다.

 

 

『오번 가문의 비극』이 수록된 《세계 추리소설 걸작선 2》 (한스미디어)의 작품 해설에 오류가 있다.

 

 

『Prince Zaleski: three detective stories』(1895)에는 잘레스키가 활약하는 「오번 가문의 비극」과 「에드먼즈버리 승려의 돌」 「The SS」「The Return of Prince Zaleski」로 네 편의 단편이 실렸다

 

 (해설, 658족)

 

 

 

『Prince Zaleski: three detective stories』의 부제를 보면 알겠지만, 이 책에는 세 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되었다. 그런데 어째서 해설을 쓴 글쓴이는 이 단편집에 「The Return of Prince Zaleski」이 실려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 단편집에 네 편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면 ‘three detective stories’라는 부제가 삭제되어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The Return of Prince Zaleski」는 실 사후에 나온 단편 선집을 통해 처음으로 공개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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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9-07-08 21: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조지 오웰 평전에 등장하는 이름 오류에서 출발해,
그 작가가 쓴 작품들까지 평가하는 이 글, 너무 너무 멋지군요!
국내에 번역된 작품이 3편 밖에 없다니, 아쉽네요.

시루스님의 이 글을 잘 기억해두었다가 나중에 찾아 읽어야겠어요.

cyrus 2019-07-09 11:11   좋아요 0 | URL
<The Purple Cloud>가 우리말로 번역되었으면 좋겠어요. 왠지 이 소설은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
 
아름다움의 진화 - 연애의 주도권을 둘러싼 성 갈등의 자연사
리처드 프럼 지음, 양병찬 옮김 / 동아시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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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다윈(Darwin)《종의 기원》이 출간된 지 160주년이 되는 해이다. 다윈은 이 책에서 인간은 신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영장류 조상으로부터 진화되었다는 이론을 주장했다. 기존의 세계관을 뒤흔들어 엎은 이 ‘자연 선택(natural selection)’은 지금도 중학생 정도면 다 아는 과학 이론이 되었다. 《종의 기원》이 나오고 12년이 지난 후에 다윈은 《인간의 유래와 성 선택(The Descent of Man, and Selection in Relation to Sex)이라는 책을 펴냈다. 그는 ‘성 선택(sexual selection)이라는 새로운 이론을 제시했고, 성 선택이 자연 선택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간의 유래와 성 선택》은 철저히 외면당했고, 다윈을 지지하던 진화론자들도 이 책을 비난했다. 하지만 다윈이 더욱더 뼈아팠던 것은 따로 있다. 다윈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진화론을 증명하여 그와 공동으로 논문을 발표한 앨프레드 월리스(Alfred Wallis)가 성 선택을 공격하는 선봉장으로 나선 것이다.

 

조류학자인 다윈주의자 리처드 프럼(Richard O. Prum)이 쓴 《아름다움의 진화》는 백여 년 동안 진화론의 핵심 개념으로 자리 잡은 자연 선택에 밀려 제대로 주목받지 못한 성 선택에 관한 책이다. 저자는 조류의 짝짓기와 수컷 조류의 구애 행동을 연구하면서 새로운 연구 주제에 도전하게 된다. ‘조류의 성 선택이 진화의 다양한 측면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아내는 것이다. 성 선택은 간단히 말하면 수컷은 배우자가 될 암컷과 짝짓기를 하기 위해 자신의 모습을 과시하고, 암컷은 배우자 수컷을 고른다는 주장을 발전시킨 이론이다. 수컷은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줄 자식을 늘리기 위해 섹스(교미)에 집착하고, 성적 욕구가 있는 암컷은 (자신이 보기에 섹시하고 멋진) 수컷을 고르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수컷에 대한 암컷의 성적 선호와 이런 선호를 충족시켜 암컷을 유혹하기 위한 수컷의 깃털 장식들이 진화를 이끈 원동력이 되었다. 암컷의 성적 선호는 다음에 태어날 암컷에게 대물림되고, 수컷의 깃털 장식들은 점점 더 세련되고 화려해진다. 프럼은 이 과정을 오랫동안 진행되어 온 ‘성 선택에 의한 미적 진화(aesthetic evolution)라고 부르면서 배우자가 될 수컷을 ‘성적 욕구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암컷의 미적 감각과 짝짓기 행위가 이루어지면 자기 결정권을 갖는 암컷의 태도에 주목한다. 암컷을 반하게 만드는 수컷의 몸에 난 장식들, 즉 크고 화려한 깃털은 ‘성적 상징물(sexual ornament)이다.

 

성 선택을 설명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성적 상징물은 수컷 공작의 화려한 깃털이다. 공작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수컷 조류들도 각자 암컷을 유혹하는 성적 상징물을 하나씩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이용해 다양한 방식으로 암컷 앞에서 교태를 부린다. 따라서 수많은 조류에서 나타난 암컷의 배우자 선택과 수컷의 성적 상징물의 공진화는 다양한 ‘성적 아름다움’을 증가시켰다.

 

그러나 자연 선택을 지지하는 다윈주의자들은 여전히 다윈이 생각해낸 성 선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진화론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자연 선택과 성 선택으로 갈라진 다윈주의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를 ‘진화론의 허구’를 뒷받침해주는 근거로 본다. 진화론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생각보다 복잡한 진화론 논쟁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진화론자들끼리 서로 대립하는 모습이 의아하게 느껴질 것이다. 《아름다움의 진화》는 자연 선택의 한계를 밝혀내 성 선택에 더 많이 주목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연 선택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모든 생물의 진화를 자연 선택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고 역설한다. 이러한 저자의 입장은 다윈이 《인간의 유래와 성 선택》을 쓰게 된 의도와 관련이 있다. 다윈은 자연 선택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생물들의 특성에 주목했고, 진화론의 빈틈이 되는 부분을 메우기 위해 성 선택을 제시했다. 따라서 《아름다움의 진화》에 나오는 ‘자연 선택 지지자와 성 선택 지지자 간의 논쟁’을 ‘진화론을 틀린 이론으로 만드는 프레임’으로 삼는 것은 난센스다.

 

성 선택을 비판하는 자연 선택 지지자들은 암컷이 성적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기 힘들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성 선택이 짝짓기에 너무 초점을 맞춰서 설명한다고 말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성 선택으로 모든 생물의 진화를 설명하게 되면 인간도, 생물도 모두 본능적으로 섹스를 선호하는 존재로 부각된다. 이러한 자연 선택 지지자들의 반응은 백여 년 전 다윈이 《인간의 유래와 성 선택》을 발표했을 때 나온 대중들의 반응과 거의 비슷하다. 다윈과 동시대에 살았던 사람들, 즉 유독 성에 대해 보수적인 반응을 보인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era) 사람들은 암컷이 섹스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는 성 선택에 분노를 드러냈다. 성 선택은 암컷에게 짝짓기를 주도적으로 임하는 ‘성적 자기 결정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이론이다.

 

과학적으로 성 선택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왜 수컷은 자신의 생존에 불리한 거추장스러운 성적 상징물을 가진 채 살아가게 되었냐고 따진다. 그들의 주장도 일리가 있다. 이를테면 수컷 공작의 깃털은 적에게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 깃털이 지나치게 커서 적의 눈에 띄기 쉬운 수컷 공작은 생존할 확률이 낮을 뿐만 아니라 짝짓기를 할 확률도 낮아진다. 사실 성 선택을 주장한 다윈도 이 문제에 직면했다. 그는 ‘실용성 없는 성적 상징물’의 기원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그러나 저자는 성적 상징물의 무용성을 근거로 성 선택을 비판하는 입장을 다시 반박한다. 그는 성 선택이 종의 쇠퇴와 멸망을 초래할 수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짝짓기를 하는 데 유리한 이점이 분명히 있다고 주장한다. 적에게 잡혀 죽을 위험이 있더라도 수컷은 암컷의 선택을 받기 위해 점점 더 아름다워지도록 노력할 것이다. 유성생식을 하는 동물들에 짝짓기는 생존만큼이나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수컷일수록 짝짓기에 유리하다는 성 선택을 재미있게 비유해서 설명한 저자의 말이 인상적이다.

 

 

 ‘잘생긴 용모를 가졌지만 무모함 때문에 요절한’ 제임스 딘(James Dean) 스타일의 수컷이 ‘책만 파면서 여든 살까지 생존한’ 범생이 스타일의 수컷보다 더 많은 자손을 남길 수 있다.  (201쪽)

 

 

‘아름다움이 무기’라는 말이 있다. 요즘 이 말은 여성에게 아름다움을 강요하게 만드는 강압적인 말이 될 수 있다.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미디어가 만들어 낸 틀에 박힌 ‘강요된 아름다움’을 탈피하고, 다양한 형태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만들어진다면 아름다움도 개인을 돋보이게 만드는 훌륭한 이점이자 무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름다움의 진화》가 강조하는 미적 진화론은 모든 존재가 아름다움을 즐기며, 아름다움을 선호하는 욕구를 가진 성적 주체라는 사실을 증명해준다. 인간은 사회적으로 진화하는(social evolution) 존재이다. 진화 속도가 더디지만, 과거에 최고로 여겨지던 아름다움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아름다움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다. 우리 사회가 화장이나 성형을 하지 않아도 되고, 조금은 부족해도 호감을 불러일으키는 아름다움을 선호하는 사회로 진화되길 바란다.

 

 

 

 

 

※ Trivia

 

* 482쪽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두더지와 여우(The Hedgehog and the Fox)>라는 에세이에서 이러한 지적 분열을 탐구했다.

 

→ 두더지가 아니라 ‘고슴도치(hedgehog)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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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6 0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7-08 17:46   좋아요 0 | URL
네, 간혹 진화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형태의 생물들이 발견되곤 하죠... ^^;;

AgalmA 2019-07-07 19: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커크 월리스 존슨 『깃털 도둑』을 읽으며 극락조 생태에 대해 좀 찾아보니 1년이 거의 짝짓기 준비더군요ㅎㄷㄷ 공작의 화려함만큼이나 극락조도 성 선택 이론의 표본 아닌가 싶습니다.
미의 추구를 인간의 예술적 감각으로 생각하는 인본주의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데, 모든 존재가 미적 욕구로 가득한 성적 주체라는 폭넓은 시각이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아름다움의 진화』사놓고 아직 안 읽고 있었는데 곧 읽어봐야겠어요^^


cyrus 2019-07-08 17:48   좋아요 1 | URL
<아름다움의 진화>에도 극락조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수컷 극락조가 구애하는 모습을 찍은 컬러 사진도 있는데, 스마일 표시가 있는 커다란 깃털을 펼친 모습이에요. <깃털 도둑>이라는 책도 읽어봐야겠어요. ^^

AgalmA 2019-07-12 15:42   좋아요 0 | URL
극락조 중 그 새 사진 신기하다고 인커넷 커뮤니티에서 종종 보여요ㅎ 정말 신기하죠. 우리 인간이 유사를 보려는 특성이 있긴 하지만 극락조 구애 무늬가 웃는 모습이라니ㅎㅎ!

테레사 2020-08-11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재밌죠? 저도 참 재밌고 즐겁게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