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부터 독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장르문학 작가의 작품을 읽으면서 생각해왔던 것이 있다. 그게 뭐냐면 작가의 작품, 작가와 관련된 각종 문헌 등을 한 번에 모아 확인할 수 있는 아카이브(archive)를 만드는 일이다. 아카이브는 ‘기록 보관소’라는 뜻을 가진 단어이다. 아카이브라는 단어가 생소했던 이십 년 전에 이미 소수의 장르문학 마니아들은 절판된 번역본들을 찾아내 그것에 대한 기록을 개인 홈페이지나 블로그에 남겼다. 하지만 이 귀중한 기록의 일부는 삭제되거나 비공개 상태로 남아 있다. 그리고 예전 기록의 정보가 갱신되는 피드백(feedback)이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정보가 기록되어야 한다는 것을 더욱 절실히 느꼈다. ‘알아도 되고 몰라도 되는 작가’의 작품이지만, 언젠가는 주목받는 날이 있을 거라 믿기에 열심히 아카이브를 만들어보려고 한다. 이번에 내가 새로 지은 아카이브의 이름인 ‘Good Bad Literature Archive(줄여서 GBLA)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글에서 따온 것이다.

 

 

 

 

 

 

 

 

 

지난 주 금요일에 프랑스의 사진작가 클로드 카엥(Claude Cahun)에 대한 글을 남겼다. 그 글을 유심히 본 독자들(생소한 사진작가에 대한 글을 진지하게 읽은 분이 많지 않았을 것 같다)카엥의 삼촌이 ‘작가’였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카엥의 본명은 루시 슈보브(Lucy Schwob)다.

 

 

 

 

 

 

 

 

 

 

 

 

 

 

 

 

 

 

* 줄리엣 해킹 《위대한 사진가들》 (시공아트, 2016)

 

 

 

슈보브 가는 작가를 배출한 집안이다. 그녀의 할아버지 조지 슈보브(George Schwob, 1822~1892)는 일간지를 직접 만들어 운영한 작가였고, 이 일을 물려받은 사람이 카엥의 아버지 모리스 슈보브(Maurice Schwob, 1859~1928)다. 이 집안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사람은 모리스의 동생이자 카엥의 삼촌인 마르셀 슈보브(Marcel Schwob)다. 네이버 백과사전에 마르셀 슈보브를 소개한 항목이 있다.

 

작가 아카이브를 만들면서 외국 작가 이름을 표기하는 것이 제일 난감하다. 이 글에서는 ‘마르셀 슈보브’라고 썼지만, 이름의 표기 방식이 제각각이다. ‘마르셀 슈웝’, ‘마르셀 슈워브’라고 쓰기도 한다.

 

 

 

 

 

 

 

 

 

 

 

 

 

 

 

 

 

 

 

* [품절] 프랑수아 레이몽, 다니엘 콩페르 《환상문학의 거장들》 (자음과 모음, 2001)

 

 

 

 

마르셀 슈보브에 대한 설명이 있는 유일한 책이 《환상문학의 거장들》 (자음과 모음)이다. 근대부터 현대까지 이어져온 장르문학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이 책만 한 요긴한 자료가 없을 것이다. 이 책의 설명에 따르면, 슈보브는 ‘복잡하고 호기심에 가득 찬 인물’이다. 그는 학자에 가까운 삶을 살았을 정도로 고전 문학 작품에 해박했다.

 

 

 

 

 

 

 

 

 

 

 

 

 

 

 

 

 

 

* 프랑수아 비용 《유언의 노래》 (민음사, 2016)

 

 

 

 

 

 

 

 

 

 

 

 

 

 

 

 

 

 

* 오스카 와일드 《오스카 와일드 작품선》 (민음사, 2009)

* [품절] 오스카 와일드 《살로메》 (기린원, 2008)

 

 

 

슈보브는 거의 잊혀 있던 중세 프랑스의 시인 프랑수아 비용(Francois Villon)의 작품을 연구했다. 1896년에 슈보브는 자신과 친한 문인들과 함께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의 희곡 《살로메》를 프랑스어로 번역해 무대 위로 올렸다. 1893년에 영국에서 발표된 《살로메》는 성서를 모독했다는 이유로 공연이 금지되었다. 비록 원작을 수정한 것이지만, 슈보브와 그의 동료들 덕분에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공연이 열릴 수 있었다. 그들이 없었으면 《살로메》는 꽤 오랫동안 공연 금지작으로 남았을 것이다.

 

 

 

 

 

 

 

 

 

 

 

 

 

 

 

 

 

* 김경란 《프랑스 상징주의》 (연세대학교출판부, 2005)

* [품절] 김기봉 《프랑스 상징주의와 시인들》 (소나무, 2000)

 

 

 

 

슈보브의 소설은 ‘상징주의 문학’으로 분류된다. 상징주의 문학은 이성을 동원한 논리적인 분석으로 포착할 수 없는 초월적인 세계를 지향한다. 논리와 이성에 반발한 상징주의 작가들은 주관적인 정서를 중시했으며 현실 도피에 가까운 꿈과 이상, 환상과 이지적인 것에 관심을 가졌다. 재미있게도 슈보브는 프랑스어와 고전 문학 작품을 분석하는 논리적인 작업을 하면서도 환상과 기이한 것을 좋아했다. 그는 11살에 보들레르(Baudelaire)가 번역한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의 소설을 처음 읽고 난 이후부터 환상 문학의 세계에 발을 내딛었다. 보들레르는 프랑스 상징주의 문학을 대표하는 시인이다. 그는 포의 작품을 보면서 “내가 쓰고 싶었던 모든 것이 포의 글 속에 있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포의 시를 상징주의 시의 원조로 보기도 한다.

 

 

 

 

 

 

 

 

 

 

 

 

 

 

 

 

 

* 정진영 옮김 《세계 호러 단편 100선》 (책세상, 2005)

* [절판, No Image] 정태원 편역 《공포특급 5: 세계편》 (한뜻, 1996)

 

 

 

 

슈보브가 쓴 작품의 수는 그렇게 많지 않다. 우리나라에 번역된 그의 작품은 총 세 편이다. 작품을 소개하면서 평하는 방식은 지난주에 쓴 글 「잊힌 작가: M. P. 실」에 썼던 것과 동일하다. (H: 작품의 역사적 중요성, Q: 작품의 우수성, R: 작품 번역본의 희소가치)

 

 

 

 

 

1. 미라 만드는 여인

Les embaumeuses (1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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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사막에 여행하는 것을 좋아하는 형제는 리비아의 사막을 건너다가 자매로 보이는 두 여인을 만난다. 두 여인의 환대에 받은 형제는 그녀들이 사는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다. 이 소설의 화자인 형은 여인들이 있는 방으로 연결된 구멍을 발견한다. 그는 구멍으로 방의 내부를 들여다보는데, 여인들이 미라를 만드는 모습을 목격한다. 끔찍한 장면을 본 형은 날이 밝으면 이 집을 떠나기로 한다. 형이 목격한 ‘무서운 사실’을 모르는 건지 동생은 두 여인 중 한 명과 동침한다. 다음 날이 되자 동생은 나병에 걸려 고열에 시달리다가 죽는다. 형은 동생의 죽음에 새벽 2시까지 계속 울다가 혼절한다. 나중에 깨어난 형은 동생의 시신과 두 여인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안다. 형은 미친 듯이 집안을 돌아다니다가 자신이 발견한 구멍을 들여다본다. 그는 두 여인의 손에 의해 미라로 만들어지는 죽은 동생을 목격한다. 공포에 질린 형은 동생을 죽인 여인들을 저주하면서 도망친다.

 

 

 

 

 

 

 

 

 

 

 

 

 

 

 

 

* 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 (교보문고, 2015)

* 김중현 《프랑스 문학과 오리엔탈리즘》 (아모르문디, 2012)

 

 

 

이 단편소설에서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가 비판한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남성 중심의 서구 문명에서 동양 여성은 ‘타자’이며 멸시와 동경의 대상으로서 판타지가 덧입혀진다. 서구의 상징주의 작가들은 현실을 초월하는 세계를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들의 시선이 쏠린 곳은 동양과 아프리카 대륙이었다. 서구 작가들은 동양과 아프리카 대륙을 ‘미지의 세계’이자 ‘환상의 세계’로 그렸다. 그들은 『미라 만드는 여인』에 나오는 형제처럼 동양과 아프리카를 직접 여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라 만드는 여인』처럼, 동양과 아프리카 대륙을 바라보는 긍정적 시각이 부정적으로 변하는 작품들도 있다. 이런 작품들에는 공통적인 서사 있다. 비(非)서구에 속한 나라를 ‘문명 이전의 세계(『미라 만드는 여인』에 묘사된 리비아는 고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미라 제조법이 성행하며, 마술을 부리는 마녀들이 존재하는 나라)’로 설정함으로써 서구를 유일한 문명으로 만드는 ‘서구 우월적인 사고’를 전제한 서사이다.

 

 

 

 

 

2. 열차

Le train 081 (1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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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특급 5: 세계편》에 수록

 

 

 

장르문학에서 작가들이 많이 쓰고, 독자들이 좋아하는 소재 중 하나는 ‘분신(doppelgänger)이다. 『열차』는 공포 문학 또는 환상 문학에서 자주 묘사되는 ‘불길한 제2의 자아’를 소재로 한 단편소설이다. 원제는 ‘081호 기차’다. 소설의 화자는 파리, 리용, 마르세유를 경유하는 ‘180호 기차’를 운행하는 기관사이다. 화자의 형은 배에서 일하는 운송선의 기관부이다. 마르세유에 콜레라가 유행하면서 화자는 죽을 각오로 기차를 운행한다. 자신이 운행하는 기차에 탄 손님 중에 콜레라 보균자가 있을 것이고, 마르세유에서 출발한 기차가 파리에 도착하면 콜레라가 더 확산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평소대로 파리로 향하는 기차를 운행하는데, 맞은편 철로에 ‘081호 기차’가 180호 기차와 같은 방향으로 가는 것을 목격한다. 화자는 081호 기차에 타고 있는 기관사가 자신과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그리고 081호 기차 객실 안에 있는 형의 시체를 보게 된다.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충격에 빠진 화자는 180호 기차 객실로 달려간다. 그곳에 콜레라에 걸려 죽어 있는 형을 발견한다.

 

081호 기차는 180호 기차의 분신이다. 예로부터 유럽에서는 분신을 ‘죽음을 불러오는 불길한 존재’로 여겼다. 『열차』에서는 분신이 예고한 대로 임종을 맞이한 사람은 분신을 직접 목격한 화자가 아니라 동생이 운행하고 있는 기차에 타고 있던 형이다. ‘반전’까지는 아니지만, 기존의 분신 서사를 살짝 비튼 전개가 좋다.

 

그런데 이 소설의 ‘옥에 티’라면 죽은 형의 형수를 언급하는 장면이다.

 

 

 내 형수는 인도차이나 여인이다. 그녀는 아몬드 씨처럼 위로 올라간 눈과 황색 피부의 소유자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종이 다르다는 것은 왠지 묘한 느낌을 준다.

 

(정태원 옮김, 192쪽)

 

 

인도차이나는 과거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를 모두 이르는 말이다. 화자는 뜬금없이 형수의 외모를 언급한다. 여기서도 ‘동양 여성’의 매력을 상상하게 만드는 오리엔탈리즘을 엿볼 수 있다.

 

 

 

 

 

 

3. 잔인한 블랑슈

Blanche la sanglante (18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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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편소설에 나오는 기욤 드 프라비는 폭군이다. 그는 귀족의 열 살짜리 딸 블랑슈를 강제로 데려가 아내로 맞이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기욤 드 프라이가 최악의 인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소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은 블랑슈다. 이 소설에서 블랑슈는 ‘순진무구한 악녀’로 묘사된다. 세상 물정 모르는 열 살짜리 소녀가 왜 잔인한 악녀가 되었는지 소설을 직접 보시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 소설을 본 독자로서 진심을 담아서 말하는 데 진짜 재미가 없다! 이 지루한 소설이 왜 ‘세계 호러 단편 100선’에 들어가 있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 마르셀 슈보브 《The King in the Golden Mask》 (Wakefield Press, 2017)

 

 

 

마르셀 슈보브의 소설이 몇 편 더 번역되어 나올 가능성은 있다. 2016년에 대산문화재단이 지정한 ‘2016년 외국문학 번역지원’ 리스트에 슈보브의 단편집 《황금 가면을 쓴 왕(Le Roi au masque d’or)(1893)이 포함되었기 때문이다.[주] 『미라 만드는 여인』이 수록된 단편집이기도 하다. 이 단편집의 번역이 완료되면, 문학과 지성사의 ‘대산세계문학총서’ 시리즈로 나온다. 번역본이 나올 때까지 몇 년 더 기다려야 하나? 나온다고 해도 잘 팔리지 않겠지만, 이왕이면 번역본이 나왔으면 좋겠다. 번역본이 영영 나오지 않게 되면 대산문화재단이 준 지원금을 허무하게 낭비해 버린다. 번역가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출간일이 늦어도 좋으니 번역지원금을 헛되게 쓰지 않도록 슈보브의 단편집을 번역해주길 바란다.

 

 

 

 

[주] 울리츠카야 ‘통역사 다니엘 슈타인’ 등 번역지원」 (연합뉴스, 2016년 1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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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7-16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사진 공부를 해서 여러 사진 작가들
을 안다고 자부해 왔는데, 역시나 세상은
넓더라는.

다시 한 번 싸이러스 브로의 뛰어난 정보력
에 감탄해 마지 않습니다.

대산문화 재단 번역 지원 프로그램에까지
마수를 ㅋㅋㅋ

cyrus 2019-07-17 11:36   좋아요 0 | URL
인터넷에 검색하면 나와요. 작가의 삶을 설명한 글은 위키백과 영어판을 참조했어요. 영어 독해 능력이 딸려서 위키백과에 있는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어요. 즉,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거죠. ^^;;

stella.K 2019-07-16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개인으로 일간지를 발행하디니 대단하다.
내용이 어땠을지 궁금하다.
울나라는 품절 절판된 책들이 넘 많아.
나도 궁금하긴 하다.

cyrus 2019-07-17 11:40   좋아요 0 | URL
절판된 책 중에 출판연도가 오래된 것은 헌책방뿐만 아니라 도서관에서도 만날 수 없는 희귀 템이에요. 그런 책들은 창고나 다름없는 도서관 자료실에 따로 보관되는데요, 종종 관리가 안 되어 있으면 책 상태가 좋지 않거나 찾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요. 예전에 syo님이 도서관 서고에 있는 오래된 책을 빌리려고 했는데, 사서가 그 책을 못 찾았다고 하네요. 검색하면 서고에 그 책이 있다고 나오는데, 정작 사서가 확인해 보니 책이 없었던 거죠. ^^;;
 
BL진화론 - 보이즈 러브가 사회를 움직인다
미조구치 아키코 지음, 나카무라 아스미코 그림, 김효진 옮김 / 길찾기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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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에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공부하는 레드스타킹 멤버 한 분이 요즘 관심 있는 책이라면서 ‘이 책’을 소개했다. ‘이 책’은 제목과 앞표지부터 범상치 않다. 책 제목은 ‘BL 진화론’이다.

 

 

 

 

 

 

참고로 앞표지 그림은 지금도 연재 중인 BL 만화 《동급생》의 작가 나카루마 야스히코(中村 明日美子)가 그렸다.

 

BL은 ‘소년들의 사랑(Boy’s Love)의 약칭이다. 보이즈 러브는 남성과 남성 간의 연애를 소재로 다루는 장르이다. 기본적으로는 여성을 위한 장르이지만, 일부 남성들도 즐긴다. ‘BL’이라는 명칭은 1990년대 중반부터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한때 남성 커플의 섹스 묘사가 많이 나오는 보이즈 러브를 ‘야오이(やおい)라고 부르던 시절도 있었다.

 

‘보이즈 러브가 사회를 움직인다.’ 《BL 진화론》의 부제다. 이 책을 쓴 저자 미조구치 아키코(溝口 彰子)레즈비언(lesbian)이다. 그녀는 퀴어 이론(queer theory)을 공부하던 중 레즈비언 정체성의 뿌리가 보이즈 러브의 조상인 ‘미소년 만화’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후로 그녀는 퀴어 이론의 관점에서 보이즈 러브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분석하는 연구에 매진하게 된다.

 

보이즈 러브 애호가인 저자는 ‘미소년 만화’가 유행하던 1961년을 일본 보이즈 러브 역사의 시작점으로 본다. 저자는 미소년 만화에 나오는 남성 인물들에 감정이입을 하면서 사춘기를 보냈다고 술회한다. 1990년대 이후부터 상업 출판사들은 보이즈 러브 출판시장에 뛰어들기 시작한다. 저자는 1990년대 이후부터 2000년대 이전까지 나온 보이즈 러브 텍스트들을 분석하여, 그 텍스트에 드러난 네 가지의 정형화된 특징을 발견한다.

 

 

1. 동성애를 하는 남성 캐릭터들은 자신을 ‘논케(ノンケ: 이성애자, 헤테로)’라고 주장(생각)한다.

 

2. 보이즈 러브 작품에 나오는 남성 캐릭터들은 고정화된 남녀의 젠더 역할로 살아가고, 각각 ‘남성’, ‘여성’으로 행동하면서 섹스를 한다.

 

3. 보이즈 러브 작품에 나오는 남성 캐릭터들은 난교를 선호한다.

 

4. 보이즈 러브 작품에 동성 강간 묘사가 나온다.

 

 

저자는 이 네 가지 특징 모두 ‘판타지 포르노’에 가깝다고 비판한다. 판타지 포르노가 반영된 클리셰로 가득한 보이즈 러브는 동성애를 긍정적으로 묘사하기보다는 호모포비아(homophobia)와 이성애 중심주의를 재생산한다. 일본의 일부 게이들은 보이즈 러브를 ‘실제 게이의 삶을 왜곡하는 게이 차별적인 장르’라고 비판하면서 등을 돌렸다. 1992년에 ‘야오이 논쟁’이 일어나면서 보이즈 러브를 대대적으로 비판하는 여론이 형성되기도 했다. (이 논쟁에 야오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이유는 앞에서 언급한 ‘야오이’의 의미를 보면 알 수 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보이즈 러브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된다. 일본 사회 내에서 호모포비아, 이성애 규범, 여성 혐오를 비판하는 여론이 형성되면서 보이즈 러브도 그런 분위기를 많이 반영하여 나오게 된다. 저자는 2000년대에 일어나기 시작한 보이즈 러브 출판 시장의 변화를 일본 사회가 ‘호모포비아, 이성애 규범, 여성 혐오를 극복’하여 ‘다양한 성 정체성을 보여주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신호로 본다. 그러니까 저자가 보기에 2000년대에 나온 보이즈 러브가 실제 게이들의 삶을 최대한 반영한 서사를 보여주고 있으며 실제 게이들이 살아가면서 고민하는 호모포비아 문제에 진지하게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보이즈 러브가 계속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한다면, 그 속에 이성애 중심주의와 여성 혐오를 극복하기 위한 힌트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가 보이즈 러브를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으로 분석하는 방식이 신선하다. 필자는 보이즈 러브를 안 봐서 저자의 입장에 대한 내 나름의 의견을 어떻게 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일단 이 책에 대한 의견을 밝히는 것을 보류하기로 한다. 저자가 보이즈 러브를 분석하기 위해 사용하는 페미니즘 및 퀴어 이론들은 내겐 너무 어렵고, 혼자 공부하기에는 벅차다. 대학원에서 여성학을 공부하는 멤버가 이 책을 소개한 이유를 알겠다. 페미니스트들은 《BL 진화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이 책은 페미니스트들이 모여서 토론하기에 딱 좋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내년에 ‘레드스타킹’ 멤버들과 다 같이 읽어보고 싶은 책으로 추천해볼까 생각 중이다.

 

 

 

 

[주] 원문은 “비혼에 대해 이야기하기가 쉽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로, 우에노 지즈코와 미나시타 기류의 대담집인 《비혼입니다만, 그게 어쨌다구요?!》(동녘)에 나오는 첫 문장(미나시타 기류가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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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7-12 1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cyrus님 덕분에 BL의 의미를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ㅋ

cyrus 2019-07-15 16:37   좋아요 1 | URL
우리나라에서는 BL보다 야오이를 더 많이 쓰는 사람이 많을 거예요. 저는 야요이를 고2 때 처음 알았어요. 같은 반에 야오이를 즐겨 보는 여사친들이 있었거든요. ^^;;
 

 

 

도서관에 책을 많이 빌려 보게 되면, 완독하지 못하고 반납하는 경우가 많다. 도서관에서 만난 《초현실주의, 어떻게 이해할까?》(미술문화)도 처음에는 잠깐 보고 마는 책이었다. 내가 관심 있는 주제는 ‘초현실주의 운동과 초현실주의 회화’였다. 《초현실주의, 어떻게 이해할까?》는 초현실주의 회화뿐만 아니라 초현실주의 운동에 영향받은 조형미술, 사진, 영화 등도 살피고 있다.

 

 

 

 

 

 

 

 

 

 

 

 

 

 

 

 

 

* 요아힘 나겔 《초현실주의, 어떻게 이해할까?》 (미술문화, 2008)

 

 

 

책의 분량이 많지 않아서 가벼운 마음으로 끝까지 다 읽었다. 책을 끝까지 읽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 소개된 초현실주의 사진 작품들이 아주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특히 프랑스의 사진작가 클로드 카엥(Claude Cahun)의 자화상은 내 눈길을 사로잡는 사진 작품이었다.

 

 

 

 

 

사진 속 카엥의 모습은 마치 신성한 아우라(Aura)를 발산하는 신과 같다. 아마도 이 사진을 보는 관객들은 한번쯤 이런 생각을 했지 싶다. “사진에 나온 작가는 남자인가, 여자인가?” 관객이 사진 속 작가의 성별을 궁금해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이름과 짧은 머리를 보고 카엥을 남자라고 추측하는 관객들이 있을 것이다.

 

 

 

 

 

 

 

 

 

 

 

 

 

 

 

 

 

 

* 조현준 《쉽게 읽는 젠더 이야기》 (행성B, 2018)

 

 

 

사실 카엥은 여성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루시 슈보브(Lucy Schwob)다. 작가인 마르셀 슈보브(Marcel Schwob)의 조카딸이기도 하다. 그녀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숨기기 위해 ‘클로드 카엥’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했다. 자화상 속 그녀의 모습은 에이젠더(agender)에 가깝다. 에이젠더란 성 정체성이 없다고 믿는 사람, 즉 자신이 어느 성별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여기거나 혹은 ‘젠더에 대한 개념’이 없는 사람을 일컫는 용어이다. ‘젠더가(성별이) 없는 사람’이라니. 인간을 ‘남성’, ‘여성’, 딱 두 개의 성별로 나누려는 젠더 이분법(gender binary)에 익숙한 사람들은 젠더 없는 삶이 정말로 가능한지 의문을 드러낸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전통적인 이분법적 성 구분은 이미 구시대의 유물이 된 지 오래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선 여전히 문화 · 종교 · 정치권력 등의 영향으로 생물학적 성별과 성 정체성(남성성, 여성성)이 일치하는 시스젠더(cisgender)가 ‘정상’으로 인식되고 있다. 시스젠더에서 벗어나는 다양한 성 정체성은 ‘비정상’이라는 낙인이 찍히고, 격리와 치료의 대상이 된다. 카엥이 살았던 시대의 사람들은 ‘남자로 태어나면 남자로 살아가고, 여자로 태어나면 여자로 살아간다’라는 고정된 젠더 이분법적인 삶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래서 그 당시 사람들은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게 만드는 모습으로 사진을 찍는 카엥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녀의 가족은 카엥의 동성애를 반대했다. 카엥은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알게 된 수잔네 말레르브(Susanne Malherbe)와 함께 작업을 했다. 카엥은 여러 편의 글도 썼는데, 그녀가 글을 쓰면 말레르브가 글을 위한 삽화를 그렸다.

 

 

 

 

 

 

 

 

 

 

 

 

 

 

 

 

 

* 줄리엣 해킹 《위대한 사진가들》 (시공아트, 2016)

 

 

 

그런데 1917년에 카엥의 아버지는 미망인이었던 말레르브의 어머니와 결혼했다. 졸지에 카엥과 말레르브는 연인에서 의자매가 되었다. 그러나 카엥은 말레르브와의 동성애 관계를 분명히 드러나도록 행동했다. 그 후로 카엥은 ‘전통적 여성성’을 거부한 자신의 삶을 보여주는 사진들을 남기기 시작했다.

 

 

 

 

 

 

 

 

 

 

 

1920년에는 삭발한 모습으로 자화상을 촬영했으며, 남자들처럼 짧은 머리를 하고 다녔다. 그리고 파리에서 본격적으로 작가 겸 사진작가로 활동하면서 이름을 ‘클로드 카엥’으로 바꾸었다. 그녀는 초현실주의자들과 파리의 유명한 서점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Shakespeare & Company)의 주인 실비아 비치(Sylvia Beach) 등과 어울렸다.

 

 

 

 

 

 

 

 

 

 

 

 

 

 

 

 

 

 

 

 

* [2018년 레드스타킹 네 번째 선정도서] 케이트 본스타인 《젠더 무법자》 (바다출판사, 2015)

 

 

 

 

카엥의 자화상을 보면서 그녀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추측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사람들은 상대방의 외모나 품행만 보고 남자인지 여자인지 판단한다. 이러한 심리적 반응을 ‘젠더 귀인(gender attribution)이라고 한다. 그러나 카엥의 자화상을 보는 관객들은 젠더 귀인으로 자화상 속 카엥이 누구인지 판단하지 못한다. 카엥은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남자인지 여자인지 심문하는 듯한 관객들의 따가운 시선을 거부한다. 사진 속 카엥은 관객들에게 무언의 경고를 보낸다. “내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함부로 판단하지 마!”

 

 

 

 

 

 

 

 

 

 

 

 

 

 

 

 

 

 

 

* 수전 손택 《해석에 반대한다》 (이후, 2002)

 

 

 

관객들은 ‘젠더가 없는 사람(카엥)’의 등장에 당혹스러워 한다. 카엥은 자신을 비웃는 젠더 이분법 세계를 위반하면서 거기에 갇힌 사람들을 사진으로 조롱한다. 카엥의 자화상은 수전 손택(Susan Sontag)이 설명했던 ‘캠프(camp)의 미학을 보여준다. 손택은 『‘캠프’에 관한 단상』이라는 글에서 ‘캠프’를 진지함을 거부하는 과장의 미학 양식으로 설명한다. 캠프는 고급과 저급을 가르는 기존의 가치 판단에 따르지 않으며 과장성과 연극성에 초점을 맞춘 미학 양식이다. 그래서 캠프는 탈권위적인 특성을 띤다.

 

캠프는 더 나아가 퀴어(queer)의 정신을 대변한다. 미국의 페미니스트 케이트 본스타인(Kate Bornstein)은 젠더 이분법의 위계 방식을 흔드는 주제 의식을 담은 연극 작품을 직접 만들어 본인이 직접 무대에 오른다. 본스타인은 남자의 성기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의료적 트랜지션(transition)을 통해 여자의 몸이 되었다. 그/그녀를 트랜스젠더라 부르면 되겠지만, 그/그녀의 섹슈얼리티는 남성이 아닌 여성이다. 본스타인은 생물학적 특성만으로 성별을 분류하고, 성별로 누군가의 정체성을 멋대로 판단하는 젠더 이분법적 사고를 깨뜨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그녀는 자신을 젠더의 경계를 무시하면서 자유롭게 다양한 성별 또는 젠더로 살아가는 ‘젠더 무법자(gender outlaw)라고 소개한다. 사실 본스타인보다 훨씬 전에 ‘젠더 무법자’로서 살아가면서 캠프 미학을 사진으로 구현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 사람이 바로 클로드 카엥이다. 퀴어 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클로드 카엥의 작품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카엥의 작품이 국내에 많이 알려지길 바란다.

 

 

 

 

 

※ Trivia

 

 

 

 

 

 

 

 

 

 

 

 

 

 

 

 

* 엘리슨 나스타지 《예술가와 고양이》 (디자인하우스, 2015)

 

 

 

‘Claude Cahun’의 표기명은 통일되어 있지 않다. ‘클로드 카훈’, ‘클로드 카운’으로 부르기도 한다. 클로드 카엥의 약력을 볼 수 있는 책은 두 권뿐인데, 《위대한 사진가들》《예술가와 고양이》(디자인하우스)가 있다. 필자가 카엥의 삶을 요약했을 때 참고한 책은 전자의 책이다. 《예술가와 고양이》는 고양이를 좋아하는 예술가들의 삶을 ‘아주 짧게’ 쓴 책이라서 카엥의 사진 예술을 이해하는 데 참고할 만한 책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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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2 16: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7-12 17:43   좋아요 0 | URL
삶의 시작을 본인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 문제는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죠. 그래서 자신을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을 피하기 위해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갑니다.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 어느 페미니스트의 질병 관통기
조한진희(반다) 지음 / 동녘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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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몸이 정상적으로 돌아왔구나. 많이 건강해져서 다행이다”

 

 

작년에 통풍을 겪고 난 후에 지인이 건넨 인사였다. 한동안 연락이 뜸해진 사이에 건강해진 내 모습을 보고 축하한 마음에 하는 인사였지만, 나는 그 말이 듣기 거북했다. 지인은 간헐적으로 통증에 시달리는 내 모습이 ‘비정상적’으로 느꼈던가 보다. 물론 몸이 비정상적으로 작동하거나 변하는 상태는 있을 수 있다. 우리는 몸의 비정상적 상태를 질병이나 증상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몸이 그런 상태라고 해서 아픈 사람 자체를 비정상인으로 볼 수 없다.

 

어떤 사람이 ‘정상적인 몸’을 가졌고, ‘정상적인 사람’일까? 또 어떤 몸/사람이 ‘비정상적’인가?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기준은 어떻게 생기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일단 비정상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결핍’이고, 또 하나는 ‘과잉’이다. 의사들은 이를 모두 ‘건강하지 않은 상태’로 진단한다. 과거에 장애인은 ‘뭔가 결핍되고 온전치 못한 사람’으로 간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요즘은 호르몬과 행동의 과잉 상태로 인한 장애가 현대의 정신 의학에서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다. 학교에서 아이가 지나치게 활발하면 대개 부모들은 자식이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ADHD)’가 있는지 의심한다. 대부분 사람은 아픈 사람과 장애인을 불쌍하게 여긴다. 이 불쌍한 사람과 함께 사는 가족의 삶에 ‘불행한’, ‘딱한’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불치병이나 장애가 있는 가족 구성원이 있는 가정은 ‘비정상 가족’으로 낙인찍힌다. 이렇다 보니 아픈 사람과 장애인은 주변 사람들에게 늘 미안해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주변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반다’라는 필명으로 활동한 조한진희도 암 진단을 받은 이후로 ‘아픈 사람’으로서의 자괴감과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을 느끼면서 살아왔다. 그녀는 몇 년 동안 자신을 아프게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병상 일지’ 비슷한 글을 썼다. 드디어 그녀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는다. 내가 아파서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 세상이 나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만들어서 아팠던 것이라고. 그녀는 자신을 부정적 존재로 만드는 세상 앞에서 쿨하게 한 마디 던진다.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는 오로지 건강한 몸을 선호하며 이를 ‘정상적인 몸’의 표준으로 본다. 이런 사회 속에 대중 매체는 ‘건강한 몸’을 가진 사람들의 언어를 주목하고, 열심히 그것을 실어 나른다. 다이어트에 성공한 사람들은 “저처럼 운동하면 살을 뺄 수 있어요”라고 말하고,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은 장애인은 “여러분(장애인)도 장애를 극복할 수 있다”면서 확신한다. 그들은 질병과 장애를 극복하면 ‘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준다. 그들이 말하는 ‘좋은 일’이란 아프거나 결핍된 ‘비정상인 몸’을 일상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건강해진 ‘정상적인 몸’으로 만드는 데 성공하는 것이다. 건강한 사람 또는 건강한 장애인을 선호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 건강을 유지하면서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는 ‘정상적인 사람’ 서사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이렇게 되면 아픈 사람과 장애인을 설명할 언어는 사라지게 되고, 그들의 삶은 크게 주목받지 못하게 된다. ‘정상적인 사람’ 서사에 부합되지 않은, 아픈 사람과 장애인은 ‘불행한 비정상적인 존재’로 남는다.

 

건강하게 사는 것은 분명 행복한 일이다. 하지만 ‘건강을 강요하는’ 건강 중심 사회 앞에서 아픈 사람과 장애인의 말과 경험은 언제나 침묵 당할 수밖에 없다. 아픈 사람들은 질병을 부정적으로 보는 주변의 시선에 계속 상처받으며 사는 게 싫어서 장기적인 치료가 동반되는 입원 생활을 선택한다. 그러나 병이 호전되지 않으면 더 나아지지 않은 상황에 무력감을 느낀다. 이런 무력감은 그들을 작아지게 만들고, 또 한 번 아프게 만든다. 위축된 그들은 이 아픔의 원인을 오로지 ‘개인 탓’이라고 여긴다.

 

개인의 잘못된 식습관이나 생활환경으로 인해 몸이 나빠질 수 있고, 질병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건강하지 못한 삶을 무조건 ‘개인의 문제’로만 규정할 수 없다. 질병을 우리 삶을 망가뜨리는 위험 요소로 인식하고, 아픈 사람을 인생의 패배자로 단정하는 건강 중심 사회는 ‘질병의 개인화’를 고착시킨다. 저자는 ‘질병의 개인화’가 아픈 사람에게 건강관리를 소홀히 한 문제의 책임을 묻는다고 지적한다. 건강 중심 사회 속에 사는 아픈 사람은 ‘내가 잘못 살아서’ 아픈 거라는 생각에 자기혐오에 빠지기 쉽다.

 

저자는 ‘잘 아플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평생 아프면서 살아가자는 의미가 아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아플 수 있고, 장애인이 될 수 있고, 죽을 수 있다. 이러한 운명을 너무 비관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면, 질병과 장애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꿔야 한다. 즉 질병과 장애를 우리 삶의 일부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아파도, 몸이 좀 불편해도 죄책감을 느낄 이유가 없다.

 

‘건강한 삶’이라는 말에 너무 믿지 말자. 건강을 강요하는 사회적 분위기의 배경에는 대중이 불안한 심리 상태에 빠지도록 만드는 교묘한 술수가 숨어 있다. 건강하지 못한 삶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은 심각하지 않은 상태인데도 병원에 자주 들락날락하고, 약을 과다 복용한다. 인간적인 삶에 필요한 최소한의 불안마저 병으로 진단하게 하고, 살면서 자연스럽게 경험하게 되는 몸의 통증이나 내면의 아픔을 죄다 치료 대상으로 몰아넣으면 일상을 더 불안하게 만들 수 있다. 내 몸과 정신이 ‘과연 정상일까“라는 회의감이 들기 시작하면, 그것이 내 감정을 지배하는 어두운 구름이 되지 않도록 말끔히 걷어내자.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기준은 정확하지 않다. 그리고 누구도 내 몸과 정신을 정상인지 아닌지 함부로 구분할 자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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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9-07-12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강 중심 사회, 라는 말을 처음 생각해 봅니다. 돈에 지나치게 큰 가치를 두고 남에게 ˝부자 되세요.˝하고 말하는 것처럼, 건강한 삶만이 좋은 것인 양 ˝건강하세요.˝라고 하는 건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되네요.
저는 개인적으로 건강은 (생활 습관이라는 변수도 중요하겠지만) 타고난다고 봐요. 유전자의 힘이 세다는 것이죠. 누군가는 폐가 약하고 누군가는 간이 약하고 누군가는 우울증에 잘 걸리고... 이런 경향이 있다는 거죠. 그러니 병에 걸렸다고 해서 사람 자체를 탓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cyrus 2019-07-12 15:28   좋아요 0 | URL
유전이 건강에 영향을 준 건 사실이지만, 대부분 사람은 이를 근거로 아픈 사람뿐만 아니라 아픈 사람과 함께 사는 가족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는 말을 합니다. 예를 들어 아기가 몸이 약한 상태로 태어나면, 사람들은 아기가 건강하지 못한 원인을 부모의 건강 상태에서 찾습니다. 이러면 부모는 죄책감을 느끼게 되죠. 아픈 사람들은 결혼과 육아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아요. 왜냐하면 자신이 앓고 있는 병이 자식에게 유전되지 않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겨울호랑이 2019-07-12 1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강한 삶의 기준을 수치화하고 이를 수치화하여 기준에 미치지 못할 경우 여기에 무조건 맞추기를 강요하는 것이 과연 건강을 위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cyrus 2019-07-15 16:44   좋아요 1 | URL
건강함을 증명하기 위해 많이 사용되는 수치가 몸무게입니다. 몸무게 수를 줄여서 날씬해진 몸은 건강미 넘치는 몸으로 주목받죠. 겉모습만으로 건강한지 아닌지 판단하기 어려워요. 건강해 보이던 사람이 속병을 미처 발견하지 못해서 단명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2019-08-15 1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8-17 08:28   좋아요 0 | URL
네. 출산은 여성이 거쳐야 할 ‘정상적인 행위‘가 아니죠. ^^
 

 

 

1977년 학술대회에 참석한 미국의 시인 오드르 로드(Audre Lorde)는 청중들 앞에 자신이 유방암 진단을 받을 수 있다고 고백한다. 그녀의 슬픈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이듬해 그녀는 한쪽 가슴을 절제하는 수술을 받았으나 암세포는 이미 다른 장기에 퍼진 상태였다. 1982년에 로드는 간암 진단을 받았지만, 1992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글쓰기와 사회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 오드르 로드 《The Cancer Journals》 (Aunt Lute Books, 2016)

 

 

 

1980년에 발표된 《The Cancer Journals》(암 일지)는 로드가 유방암 투병 생활을 하면서 쓴 책이다. <암 일지>는 유방암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제고하게 만든 책으로 알려졌지만, 질병을 개인적 문제로 여기는 인식을 비판적으로 고찰한 ‘페미니즘 고전’이다.

 

‘페미니즘 스쿨’ 교육 일정이 최종적으로 확정되기 전에는 로드의 <암 일지>에 대한 강연을 진행할 계획이 있었다. 전혜은 선생님이 ‘암 일지’에 대한 강연을 해야 한다고 레드스타킹에게 먼저 제안을 했다. 그분은 <암 일지>를 ‘교차성을 사유하는 데 있어서, 아픈 사람의 위치에서 어떤 중요한 통찰과 정치를 발굴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지 놀랍도록 멋지게 보여주는 페미니즘 고전’이라고 소개했다. 필자는 이 책의 내용이 너무 궁금해서 <암 일지> 강연을 교육 일정에 포함하는 것에 찬성했다. 나 말고도 <암 일지>에 호기심을 느낀 레드스타킹 멤버들이 많았다. 그러나 공부해야 할 주제가 너무 많은 데다가 <암 일지> 강연을 하기에 시간상 어려울 것 같아서 결정을 유보했다. 하지만 교육 일정이 진행되는 상황이나 분위기에 따라 <암 일지> 강연을 하는 것으로 변경될 수 있다.

 

 

 

 

 

 

 

 

 

 

 

 

 

 

 

 

 

 

* 말린 쉬위 《일기 여행》 (산지니, 2019)

 

 

 

최근에 일기 쓰기가 여성에게 주는 긍정적 효과를 설파한 《일기 여행》(산지니)을 읽다가 로드의 <암 일지>를 언급한 내용을 보게 됐다. 어찌나 반갑던지. <암 일지>에서 인용한 문장도 있다. 《일기 여행》의 저자는 로드가 유방암 투병 중에 일기를 쓰는 행위를 ‘카타르시스(catharsis)에 가까운 글쓰기’로 본다. 로드가 암을 받아들이면서 투병 경험을 공개하는 글쓰기는 안정과 치유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카타르시스’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카타르시스는 “예술로 감정을 순화하거나 정화하는 것”이었다. 정신분석적으로 카타르시스는 “과거의 사건들, 특히 억제된 것을 정서적으로 해소하여 장애의 원인과 정직하게 마주함으로써 긴장과 불안을 해소하는 것”을 지칭한다.

 

  가끔 카타르시스적 글쓰기를 통하여 치유된 상처들은 편견과 차별에서 나온 것이다. 일기에서 글쓰기는 역시 카타르시스적인데, 그것은 내가 견디면서, 삶에 존재하는 많은 상처를 치유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오더 로드(Audre Lorde)는 “흑인 여성 동성애자 투사 시인”으로 자신의 유방암 경험을 일기로 쓰면서, 자신의 말이 “자기 치유의 가능성과 모든 여성을 위한 생활의 풍요로움을 강조하는 것”이기를 원했다. 그 일기는 로드의 분노와 절망, 그리고 자신의 질병은 “침묵을 언어와 행동으로 전환하는” 힘으로 만드는 결심을 증언한다. 1979년 11월 19일에 그녀는 적었다. “분노를 쓰고 싶지만 결국 남는 것은 슬픔이다…. 죽음을 삶으로, 죽음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그것에 굴복하지 않는 어떤 길을 찾아야 한다.”

 

 로드는 회고한다. 『암 일기(The Cancer Journals)』의 출판 준비는 “그 시점의 나와 그 시간을 지나면서 변화하는 나 자신을 정돈하고, 추후의 검토뿐만 아니라 해소를 위해서, 가공의 나를 내려놓기 위한” 글쓰기 과정이었다. 이것 또한 카타르시스다.

 

 

(《일기 여행》 169, 171~172쪽, cyrus가 임의로 발췌 편집했으며 밑줄 친 문장은 cyrus가 내용을 강조하기 위해 표시한 것임)

 

 

 

<암 일지>의 서문 일부도 인용되어 있다. 《일기 여행》의 저자도 <암 일지>를 극찬한다.

 

 

 암에 대한 나의 분노와 고통과 공포가 여전히 다른 침묵 속으로 화석화하거나, 공공연히 인정되고 검진된, 이 경험의 중심부에 놓인 어떤 정신력도 나에게서 강탈하기를 원치 않는다. 삶의 어떤 영역에서건 강요된 침묵은 분리와 탈권력을 위한 도구라는 것을 인식하고, 모든 연령, 피부색, 성적 정체성에서 다른 여성과 나 자신을 위하여, 내 감정과 생각들을 표명하려고 노력했다…. 이것은 모든 여성들에게 자연 치유의 가능성과 삶의 풍요를 강조하는 표현이 되기 바란다. (<암 일지>의 서문 중에서)

 

 유방암이 자신의 개인적 삶에 미치는 영향의 양상에 대한 혹독한 서술로, 오더 로드는 우리 자신의 높은 위치를 다시 생각하게 유인한다. 이 일기는 모든 여성들에게 정말 좋은 선물이다.

 

 

(380쪽, 밑줄 친 문장은 cyrus가 내용을 강조하기 위해 표시한 것임)

 

 

 

이 ‘좋은 선물’ 안에 무엇이 있을까? 로드가 세상의 모든 여성을 위해 남긴 ‘선물’을 확인해볼 수 있는 날이 확정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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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9-07-12 12: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일기를 쓰고 나면 머릿속이 정돈되고 근심이 줄어드는 효과를 봅니다.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저 자신을 위해서 일기를 쓰는 거라고 말할 수 있어요. 글쓰기의 놀라운 효과를 잘 압니다.

cyrus 2019-07-12 15:29   좋아요 0 | URL
맞아요. 지금 글쓰기의 긍정적 효과를 제대로 누리고 있는 분이 페크님이시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