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야 한다는 부담을 버려라. 어떤 책이든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주제는 한두 개로 모아 진다. 책의 메시지를 파악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보물 찾기 하는 기분으로 읽기 시작하라. 일단 과녁을 정한 후 활을 쏘면 , 어디로 쏴야 할지 모르고 무작정 덤빌 때보다 훨씬 덜 지루하다. 주제와 직접 관련이 없다고 판단되는 부분은 과감히 넘겼다가, 책의 핵심주제를 찾아낸 다음 다시 돌아와 읽으며 이해하라.

 

 

2. 저자와 대담하는 기분으로 읽어라. “왜 여기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를 묻고 그에 대한 저자의 답을 책 안에서 찾아가는 방식이다. 책을 읽을 때 한 손에 펜을 들고 책의 빈 공간에 내 생각을 적어 넣는다. ‘핵심 주장’, ‘좋은 사례’, ‘근거 부족’, ‘무엇무엇과 비교할 것’ 등, 저자가 건넨 이야기에 읽는 이 나름의 평가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책읽기를 저자와의 대담으로 여기는 순간, 독서는 지겨운 안구운동에서 흥미진진한 대뇌운동으로 전환한다.

 

 

3. 북 토크를 하듯 자신이 읽은 책에 대해 남들에게 들려주라. <코스모스>를 읽어 보니 이런 이야기더라, <통섭>은 어떤 함의를 가진 책이더라는 식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소감이나 책 속의 인상적 구절이 아닌 ‘자신만의 용어와 문장’으로 저자의 핵심논지와 적절한 사례를 요약할 것. 그 후에 더 생각할 거리를 발굴해 덧붙일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책읽기의 끝은 적극적 독서를 통해 얻은 지식을 다른 이에게 비판적으로 전수하는 것이다.

 

 

* 출처: 중앙일보 2014.5.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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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관계를 지치게 하는 것들
라파엘 보넬리 지음, 송소민 옮김 / 시공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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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몹시 굶주린 여우가 먹을 것을 찾아 숲을 이리저리 헤매고 다녔다. 그때 나무에 높이 달린 포도송이가 보였다. 여우는 포도송이를 따려고 몸을 세우고 앞발을 위로 뻗은 채 펄쩍 뛰어올랐다. 하지만 포도송이에 발이 닿지 않았다. 여우는 젖 먹던 힘까지 내어 위로 솟아올랐다. 닿을락 말락 하긴 했지만 역시 포도송이를 따진 못했다. “내가 솔직히 재주가 없어서 저 포도송이를 따지 못하는 건 아냐. 가만 생각해 보니 저 포도는 덜 익어서 먹지 못할 것 같아.” 여우는 혼자 이렇게 중얼거리며 그 자리를 떠났다.

 

우리는 이솝 우화의 여우처럼 현실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보다, 현실을 왜곡함으로써 심리적인 위로와 안정을 찾는다. 즉 인간은 ‘자기합리화’의 달인이며, 때로는 자신이 왜곡한 현실을 정말로 믿어버리는 ‘자기기만’의 능력까지 발휘한다.

 

짝사랑하던 사람을 떨구고 “성격이 안 맞는 것 같아”, 휴대전화를 잃고는 “어차피 바꾸려 했던 고물인데...” 등등 하며 쓰린 속을 애써 달랜 기억이 누구나 한번쯤은 있을 것이다. 이러한 행동을 두고 심리학에서는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자기합리화라는 방어기제가 발동했다고 분석한다. 일반적으로 스트레스는 바라는 욕구가 있으나 원만히 해결되지 않는 상황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자기합리화 및 자기기만은 일종의 심리적 진통제일 뿐, 실제적인 성장과 발전은 기대하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근본적인 문제들이 해결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아가면 나쁜 행동을 저지르게 되면 그 죄를 마음속에서 밀어내느라 애쓴다. 사람은 심한 자책에 빠지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잘못에 등을 돌린다. 타인을 탓하기도 하고, 사회를 비난하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의 죄책감은 조금씩 자취를 감춘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의 실수는 인정하지 않고 ‘공격이 최상의 방어’라는 모토 아래 잘못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행위는 결국 인간관계의 파국을 부른다.

 

환경보호 강경론자인 어느 아버지. 그는 스포츠카를 산 뒤 자주 타는 일이 없을 테니 환경을 지킨다고 말하며 가족을 어이없게 만든다. 10대 청소년은 늦은 밤 골목에 있는 자동차의 사이드미러 20개를 발로 차서 깨놓은 뒤 "내 발이 다쳤다"며 고발하겠다고 우긴다. 어떤 남성은 여성 정신과 의사의 실력이 형편없어서 자신의 자살 시도를 막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라파엘 보넬리의 『우리의 관계를 지치게 하는 것들』은 잘못을 저질러놓고도 이를 부인하고 왜곡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책 속에 소개된 9명의 문학작품 주인공(파우스트, 스크루지, 미하엘 콜하스, 라스콜리니코프, 장발장 등)의 이야기와 45개의 실제 상담 사례는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마주하는 이야기다.

 

책에 나오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비슷한 기질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완벽주의다. 우리는 누구나 ‘완벽한 나’를 바란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도 안다. 완벽주의가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다. 성숙한 수준의 즐거움과 자신의 만족을 위한 완벽주의라면 오히려 그 사람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문제는 허점을 보이는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다. 이들은 자기가 살아 있다는 느낌,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위해 완벽함을 추구한다. 미숙한 나르시즘적 요소도 있다. 강박적인 완벽주의는 노이로제로 이어진다. 자기 자신에 대한 기준이 너무 높다. 따라서 그들은 모든 죄를 자신에게 가하는 위협으로 느껴 매우 사소한 허점에도 격렬한 거부반응을 보인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공감적 반응을 경험하지 못해 대인관계에 문제가 생기게 되고 자신의 정신 건강은 물론 신체적 건강까지 망칠 수 있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척 간단하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면 된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소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나코프의 고해처럼 말이다. 심리학자 융은 고해가 인간의 정상적인 욕구라고 말한다. 잘못을 타인에게 전가하는 것은 잠시 심리적 부담을 더는 일에 불과하며 관계 회복을 위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해야만 새로운 행동의 여지가 생긴다. 심리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은 죄를 고백할 수 있고, 고백을 통해 죄를 갚고자 하는 동경을 갖고 있다. 용서는 이미 일어난 일을 하찮은 일로 치부하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이 당한 부당함으로부터 해방되는 최적의 상태를 말한다. 용서할 줄 아는 사람만이 타인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완벽할 수 없듯이 다른 사람도 완벽할 수 없다.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서 완벽함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사람을 완전한 자로서가 아니라 불완전한 자로 인식할 때 이해와 용서가 가능하다. 용서의 밑바탕에는 서로에 대한 신뢰나 관계가 간절히 유지되기를 원하는 게 깔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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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심리학자의 말에 의하면 기온, 습도 등의 날씨 변화는 사람들의 정서에 민감한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봄이 되면 들뜨고, 여름에는 짜증나고 공격적이 되며, 가을과 겨울에 감각과 사고가 또렷해지고 집중력이 높아지는 등의 현상은 바로 햇빛의 강도와 호르몬 분비 및 뇌 구조 기관들의 작용과 상관관계를 갖는 과학성을 근거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원리가 날씨로 인한 우발적 범죄 예방과 소비자 심리 연구에 크게 기여할 정도라고 한다. 한줄기 햇살, 바람 한 점에 마음이 흔들리는 여린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다른 날, 같은 장소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들에서 느껴지는 묘한 기분처럼 각기 다른 계절의 같은 풍경을 담아낸 그림도 많은 느낌의 차이를 전달한다. 날씨와 계절, 시간 등에 의해 변하는 대상에 대한 느낌을 가장 열성적으로 관찰하고 표현했던 화가로 클로드 모네를 떠올릴 수 있다.

 

 

  

 

 

클로드 모네  「양산을 쓴 여인」  1886년

 

 

주로 자연 풍경을 묘사하는데 적극적이었던 모네에게 「양산을 쓴 여인」 3점의 인물화는 드문 주제였지만 ‘빛을 사랑했던 화가’라는 별칭만큼 빛을 좇는 그의 붓놀림이 경쾌하게 살아있는 작품이다.

 

인상주의 화법은 마치 부서지는 햇살을 받아 반사하는 사물의 색채감을 묘사한다. 혼합하지 않은 여러 색채를 그대로 캔버스에 옮겨 놓고 착시현상을 일으키듯 인간의 시선 속에서 용해되어 빛이 터지는 듯한 효과를 낳는 것이다. 자연의 변화에 흔들리는 인간의 마음이 화사한 빛이 맑게 퍼지는 모네의 캔버스 위에서 또 다시 여리게 흔들리고 있다.

 

 

 

 

 

 

 

 

 

 

 

 

 

짧은 붓 터치가 만들어 낸 새털구름과 풋풋한 풀 무더기들이 여인을 받쳐 안는다. 이내 여인의 치마폭을 감싸고도는 바람이 빛과 어둠, 구름과 풀무더기에 자연의 역동성을 불어넣어 준다. 화가는 하늘빛과 잡초의 일렁임을 바람에 맡김으로서 조화의 극치를 추구한다. 바람이 하늘과 대지로 나타나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지배하도록 함으로써 여인이 안고 있는 불확실성을 극대화하지만, 멀찍이서 여인을 바라보는 어린 신사의 시선, 바로 모네의 사랑에 찬 눈빛을 등장시킴으로써 그림 전체의 안정감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 그림에 가난한 예술가의 작품에의 열정과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클로드 모네  「양산을 들고 있는 카미유와 아들 장」 1875년

 

 

두 점의「양산을 쓴 여인」을 그리기 전에 모네는 양산을 쓴 여인을 모델로 한 그림을 그린 적이 있었다. 아들인 장 모네와 나오는 그의 아내 카미유다. 모네만큼 자신이 사랑한 여인을 화폭에 자주 담은 화가도 드물다. 그는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 해도 무려 56점의 작품에서 카미유를 화폭에 담았다. 모네는 다른 모델은 마다하고 오직 카미유만을 불러들였고 카미유도 청년의 순수함에 이끌려 즐거운 마음으로 아틀리에를 방문하곤 했다. 둘은 낮에는 화가와 모델로 만났고 밤에는 연인으로 만나 떨어질 줄 몰랐다.

 

꿈같은 행복의 연속이었지만 그들을 둘러싼 세상은 젊은 커플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카미유와의 동거 이후로 큰아들 장을 임신했지만 모네의 식구들은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했다. 모네가 동거를 시작할 때만 해도 그의 집에서 약간의 보조금을 보내줬는데 1870년 카미유와 혼례를 올린 다음부터 아예 송금을 끊어버렸다. 견디기 힘든 고통의 세월이 그의 사랑을 시샘이라도 하듯 앞길을 가로막았다. 며칠 동안 맹물만 마시며 넘기는 때도 있었다.

 

 

 

 

클로드 모네  「정원의 여인들」  1866~1867년경

 

“저는 어느 때보다 행복합니다. 지금 작업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클로드 모네, 이주헌 『화가와 모델』 중에서, 175쪽)

 

그러나 가난의 세월 속에서도 모네의 창작욕은 더욱 뜨거워졌다. 카미유를 향한 사랑의 열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1866~1867년에 제작된 「정원의 여인들」에 나오는 네 명의 여인은 모두 같은 사람이다. 바로 카미유이다.

 

1871년부터 모네의 그림이 인기를 얻게 되면서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는 듯했다. 그러나 여느 예술가들이 그렇듯 모네 역시 셈이 흐렸다. 그는 이런 꿈 같은 현실이 마냥 계속될 줄 알고 돈을 물 쓰듯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듬해 그를 후원한 화랑이 재정난을 겪게 되면서 수입은 순식간에 3분의 1 이하로 줄었다. 카미유는 가난한 시절의 낙태 후유증을 앓고 있었지만 병원비를 마련할 방도가 없었다. 여기저기서 빚을 끌어들였지만 생활비와 치료비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의사의 수술 권유도 비용 때문에 포기해야 했다.

 

이때부터 모네는 새로운 거처를 마련, 부유한 미술품 수집가의 부인이자 그를 재정적으로 후원한 적이 있었던 알리스 오슈데의 식구들과 한 지붕 아래 생활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오슈데는 예전에 모네를 흠모했던 여인이다. 모네와 카미유의 연애 사실을 알게 되자 자신과 결혼하기 위해서라면 카미유의 사진과 편지를 모두 불에 태워야 한다고 협박할 정도로 질투심을 느끼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슈데는 허약해진 카미유를 정성을 다해 간호해주었고 그녀가 임종할 때까지 끝까지 지켜주기도 했다.

 

카미유는 그렇게 가난 속에서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서서히 무너져갔다. 카미유는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1879년 32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곁을 지키고 있던 모네는 카미유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모습을 화폭에 담는다.

 

 

 

 

클로드 모네  「카미유의 죽음」 1879년

 

“내게는 너무도 소중했던 여인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고, 이제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그 순간 나는 너무나 놀라고 말았습니다. 시시각각 짙어지는 색채의 변화를 본능적으로 추적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친구 클레망소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이주헌 『화가와 모델』 181쪽)

 

「카미유의 죽음」을 살펴보면 임종 순간에 느껴진 감정의 표현이라고 말했던 모네의 말과는 달리, 그가 후에 여러 차례 터치를 하여 세심하게 매만진 흔적이 보인다. 푸른색에서 흰색으로 점차 창백하게 변하는 그녀의 얼굴은 곳곳에 분홍색이 가미된 긴 붓 터치로 그려진 베일에 싸여있다. 어찌 보면 영원히 자신 곁을 떠나려 하는 연인의 마지막 이미지를 보존하고 싶은 마음은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양산을 쓴 여인」그림 두 점은 카미유가 죽은 지 7년 후에 그려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카미유가 죽은 후 재혼한 알리슈의 딸 쉬잔이 카미유의 빈 자리에 서 있었다. 먼저 떠나간 그녀를 그리워한 것일까. 얼굴이 묘하게 흐릿한 것을 보면 카미유를 모델로 삼았을 때의 연작을 재현하면서 그녀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이 담긴 듯하다. 카미유가 살아있을 때 양산을 들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그린 1875년의 작품과 비교하면 밝은 색의 자연 풍경은 여전하지만 카미유의 이목구비는 흐릿하기만 하다. 이제 이 세상에 없는 영혼의 모습처럼. 어쩌면 카미유가 사무치게 그립지만 세월에 씻기어 생김새가 흐릿해진 것일지도.

 

카미유는 모네에게 사랑과 창작의 원천이며 힘들고 어렵던 시간마다 힘과 용기를 주는 존재의 근원이었다. 카미유만이 그의 영원한 모델이자 그의 작품에 표현된 빛 그 자체였다. 하나의 작품이 한 사람의 인생이라는 말의 의미를 알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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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만의 여섯가지 물리 이야기 - 보급판
리처드 파인만 강의, 폴 데이비스 서문, 박병철 옮김 / 승산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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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에 대한 관심이 있어 대중을 위한 과학교양 서적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본격적으로 과학 지식을 공략해 보겠다는 생각이 솟을 때가 있다. 하지만 이 때 용감무쌍하게 전공 서적을 들춰보았다간 내 인생과는 아무 관련 없는 수식과 용어들에 다시 기가 죽고 목표를 수정하게 된다.

 

자연과학과 공학의 기초가 되는 물리학이 과학기술 발전에 결정적으로 공헌했음에도 학생들에게 기피대상이 되고 있다. 아마도 어렵고 재미없다는 편견 때문일 것이다. 반면에 물리학자들에게 왜 물리를 선택했느냐고 물어 보면 거의 모든 사람이 물리가 재미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이것은 무얼 의미하는가? 물리학은 분명히 재미있는 학문인데 우리가 그것을 재미없게 혹은 어렵게만 대해 온 때문이지는 않는가?

 

아인슈타인은 “쉽게 설명할 수 없다면 당신은 그것을 충분히 잘 안다고 할 수 없다”고 했을 만큼 지식을 전달하는 일은 쉽지 않다. 세계적인 과학 천재들이 모여 공부하는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의 물리학과 교수들도 1960년대 초에 이와 비슷한 고민을 했다. 이곳 학부생들이라면 수학, 과학 분야에서 미국 최고의 영재들임에 틀림없는데 왜 물리공부를 힘들어 하는가,고민하다가 그들은 새로운 시도를 했다. 양자전자기학을 완성한 뛰어난 이론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에게 일반물리학 강의를 맡겨보기로 한 것이다.

 

파인만의 강의는 명강의로 소문이 나 있었는데 가장 큰 특징은 남들과 "다르다"는 것이었다. 잘 알려진 주제라도 완전히 자신의 언어로 소화한 후에 전달하기에 항상 새로운 영감과 깨달음의 감동을 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자신의 강의철학을 이렇게 얘기한다.

 

“우선 당신이 강의하는 내용을 학생들이 왜 배워야하는지, 그 점을 명확하게 파악하라. 일단 이것이 분명해지면 강의 방법은 자연스럽게 떠오를 것이다.” (머리말에서, 23쪽)

 

1961년부터 2년간 행해진 파인만의 일반물리 강의는 대히트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강의를 특히 즐긴 사람들은 정식으로 수강신청을 한 학부 신입생들이 아니라 대학원생과 교수들이었다는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라도 새로운 영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파인만 강의의 특징이 아주 잘 나타난 결과일 것이다.

 

파인만 자신이 대학 학부 1학년들을 대상으로 강의한 내용의 일부라 그다지 어렵지 않고, 일상생활에서 체험하는 현상으로 물리 법칙을 설명하는 파인만 특유의 접근법이 녹아 들어있다. 자질구레한 설명을 통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느끼고 경험하는 일상에서 심오한 물리학 이론을 유추해낸다. 원자에서 시작해서 기초 물리학, 물리학과 다른 과학과의 관계, 그리고 에너지, 중력, 양자적 행동 등 여섯 가지 물리 이야기를 소개한다.

 

예를 들면 소금이 물에 녹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파인만을 따라 분자의 시야에서 이를 들여다보면 우리는 주변의 다양한 현상을 ‘진짜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느낄 수 있다. 나트륨과 염소가 전기력으로 단단히 결합되어 있던 소금의 결정은 물에 들어가면 붕괴하기 시작한다. 물에서 산소의 음이온과 수소의 양이온들이 나트륨과 염소이온을 각각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서로 반대 극성을 가진 이온들이 서로 끌어당기면서 소금 결정이 붕괴돼 물에 녹는다. 하지만 소금의 일부 원자가 결정으로부터 붕괴되는 동시에 다른 원자들은 물속에서 결정으로 되돌아온다. 소금이 물에 녹을 지, 결정이 생길 지는 물과 소금의 양에 달려있다.

 

양자역학은 현실에서 직관적으로 체험하기 어려운 지식이다. 파인만은 전자를 입자 또는 파동으로 볼 수 있는 실험을 통해 양자적 행동의 미스터리를 설명한다. 틈새를 통과하는 전자는 총알과 같은 입자처럼 덩어리로 벽에 도달하지만, 특정 위치에 도달할 확률은 파동처럼 간섭무늬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전자는 입자이면서 파동이라는 결론이 그래서 나온다. 이러한 모순투성이 이론은 ‘불확정성의 원리’를 기둥 삼아 유지되고 있다. 우리의 상식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불확정성 원리’를, 전자의 운동방식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는 여기서 사수의 의지와 상관없는 방향으로 발사되는 총알을 쏜다. 2개의 철판구멍을 두고 난사되는 총알의 탄착점과 역시 2개의 구멍으로 생겨나는 물결의 간섭, 우리가 ‘입자’라고 알고 있는 전자는 어떤 운동 모델을 따를 것인가. 오늘날 수많은 물리 입문서가 모방해 낯설지 않은 얘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재기 넘친 말투로 생생하게 전하는 설명은 듣는 이에게 분명 다른 감흥으로 다가온다.

 

화학, 생물학, 천문학, 지질학, 심리학 등과 같이 물리학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다른 과학들을 설명하는 제3강은 특히 흥미롭다. 아니, 이 책에서 제3강의 내용이 제일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물리학과 다른 과학에 대한 개념을 매우 간명하게 설명하고 있어서 이 책을 읽을 때 제3강부터 먼저 읽어도 좋다. 여기에서 파인만은 천문학과 물리학의 관계를 밝히면서 시인들의 게으름과 무관심을 질타한다.

 

“오늘날의 시인들은 목성을 쉽게 의인화하면서도 목성이 메탄과 암모니아로 이루어진 구형의 회전체라는 뻔한 사실 앞에서는 왜 침묵하고 있는가? 이렇게 한정된 소재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시인들은 대체 뭘 하는 사람들인가?" (123쪽)

 

과학적인 발견의 축적 때문에 별의 아름다움이 상실되고 있다는 시인들의 불평불만에 대해 파인만은 그것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이라고 일축한다. 새로이 알려진 사실이 오히려 지적이고 서정적인 풍요로움을 선사할 수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물리학은 간단한 중력 법칙에 의해 깨끗하게 설명되며 중력 이론이 풀지 못한 수수께끼도 ‘상대성 이론’이 속 시원하게 해결한 듯이 보였다. 그러나 어쩌랴. 오늘의 물리학은 ‘맹목의 우연’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세계의 현상을 설명해주는 양자역학이 확률과 우연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이 ‘신은 주사위놀음을 하지 않는다’며 역정을 낸 것도 당연하다.

 

‘최첨단의 물리학은 한마디로 무식의 전당이다.’ 동료 교수들마저 어려운 과학을 쉽게 이해하는데 성공한 파인만마저도 과학의 한계를 이렇게 고백한다. 우리가 자연에 대해 알면 알수록 풀어야 할 수수께끼 또한 점점 많아진다는 것이다.

 

그가 강의를 한 지도 40년이 흘렀다. 소립자의 계열에 질서를 세운 ‘쿼크’ 이론이나 ‘궁극의 이론’에 한발 다가섰다는 초끈 이론, M이론 등의 최신 내용은 이 책에서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파인만이 소개한 물리 이야기는 우리 주위의 자연 현상이나 새로운 기기에 다양하게 적용되거나 세상을 작동하는 과정이다. 과학을 공부하기에 앞서 무엇이 핵심이 되는지를 아는 능력이 전체를 보는 눈이며, 간단하고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자세한 내용을 배우는 자세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세계가 숨겨둔 비밀을 하나씩 벗겨나가는 지적 떨림과 즐거움은 언제까지나 가장 ‘Fine(멋진)’이다. 그리고 우리는 파인만이 남긴 'Fine'(좋은)강의록 덕분에 과학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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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메이징 그래비티 - 만화로 읽는 중력의 원리와 역사 어메이징 코믹스
조진호 글 그림 / 궁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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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의 존재를 느끼지 못한 사람은 영혼이 없는 사람이다.”

(리처드 파인만)

 

 

 


 Scene #1 95%의 중력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우리는 우주를 얼마나 아는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포함해 자연은 신비 그 자체다. 이 신비함이 글과 숫자를 사용할 줄 아는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예술과 문학과 과학이 탄생했다. 신비함 속에 있는 오묘한 자연의 질서를 찾아 나선 인간의 호기심은 결국은 우주탄생의 비밀을 찾아 과거로 미래로 우주로 계속 나아갈 것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알고 있다는 것은 거대한 우주 물질의 겨우 4%에 해당할 뿐이다. 결국 인간은 우주의 아주 작은 부분만을 안다는 것으로, 우주의 신비를 밝히기까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우주에 작용하는 중력의 95%는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중력을 논하지 않고는 우주를 논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는 중력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빅뱅 이후 계속 팽창하던 우주에 별과 행성을 탄생시키는데 주요 역할을 한 중력은 여전히 우주에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지구에서 생명체가 살 수 있는 것도 적당한 지구의 중력이 대기권을 형성해주기 때문이다. 화성은 중력이 약해 대기권을 붙잡아 둘 수가 없어 삭막한 불모지가 되어버렸다.

 

 

 

 

아인슈타인은 중력의 정체를 ‘시간과 공간이 일체가 되어 이루는 물리적 실체인 시공간의 뒤틀림’으로 파악하는 관점에서 일반상대성이론을 만들었다. 이에 따르면 질량을 가진 물체가 주변 공간에 형성하는 '중력장'은 이 물체 주변의 시공간에 변형이 가해지는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질량을 가진 물체가 움직이거나 새로 생겨나거나 파괴되면 이에 따른 파동이 시공간의 일그러짐이라는 형태로 표현되고, 이 물체의 질량이 매우 크다면 이를 관측하는 것도 가능해야 한다. 이런 중력장의 파동을 가리키는 말이 ‘중력파’다.

 

중력파의 존재는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 따라 예측되는 것이어서 이론적으로는 잘 알려져 있으나 직접 실험을 통한 검출은 성공한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올해 미국 연구진이 우주 빅뱅 직후 있었던 급격 팽창의 결정적인 증거로 중력파를 확인하는 데 성공했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이 세상에 처음으로 발표된 지 98년 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력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있다. 중력의 비밀을 규명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오랜 시간 계속돼 왔다. 이후 천문학과 물리학, 관측 기술 등 우주의 역사와 미래를 다루는 학문은 비약적인 발전을 해왔고 중력의 비밀을 규명하려는 노력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Scene #2  무엇이 태양과 지구를 움직이게 하는가?

 

모든 물질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뉴턴의 만유인력은 당시까지 서구 사상을 지배해 온 관념에서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발상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근본원소들은 자기 자리로 돌아가려는 본성이 낙하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주장했고, 이는 중세 천년 동안 서구 사상가의 의식 속에 틀어박혀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창했던 자연관은 16세기 후반 길버트란 영국 내과 의사가 타파하게 된다. 그가 주창한 내용은 지구가 하나의 자석이라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주장한 배경 중 하나는 자석과 철광석이 본질적으로 동일한데 철광석은 땅 밑에서 캐내기 때문이다. 그 당시 사람들은 오늘날 중력과 자기력을 서로 같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동설 옹호론자들도 태양이 지구를 당기는 힘이 자기력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러기 위해선 태양과 지구는 모두 자석이어야만 했던 것이다. 둘 사이에 아무것도 없으면 운동이 일어날 수 없는데 자력이나 중력이 실제로 있다는 것은 당시 과학자들에게는 곤혹스러운 해결 과제였다.

 

이런 길버트의 관점을 가장 깊게 받은 과학자 중엔 케플러가 있었는데 그 또한 태양이 지구를 묶어놓는 힘은 자력이라고 여겼다. 그럼 지구가 이렇게 움직이게 하려면 자석인 태양은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제자리에서 빙글 빙글 돌아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태양의 자전이란 아이디어가 튀어 나온 것이다.

 

물론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명백히 틀린 내용이지만 이런 내용을 접할 때마다 몹시 반성이 앞서게 된다. 아무리 틀린 내용이라지만 앞 뒤 맥락을 보면 말이 아주 안 되는 것도 아닌데, 선조보다 더 고도의 문명 속에 사는 우리는 왜 이런 의문점을 생각해본 적 자체가 없던가.

 

뉴턴의 시기에도 사람들은 자기력과 중력을 구별하지 못했다. 아니 동일한 것으로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을 보고 한심하게 생각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오늘날 벌어지는 많은 사항들 중에 과거 및 후세 사람들이 보기엔 동일한 것들을 우리는 다른 것으로 여기는 실수도 범하기 때문이다.

 

길버트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굳어진 정적인 지구상을 특이하고 탁월한 힘을 가진 고귀하고 생명적인 존재로 바꾸어 놓았다. 현대 과학의 눈으로 보면 받아들일 수 없는 논리지만, 당시 사고방식을 돌아가 보면 이처럼 황당한 논리가 사실은 서양의 근대 과학을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결국 지구는 자성 때문에 스스로의 운동 원리를 가질 뿐 아니라, 활성적이고 능동적이며 고귀한 존재로 간주된다. 따라서 이런 관점을 고수한 후로는 지동설을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가 있게 된 것이다.

 

프톨레마이오스 이후 1400년 동안 우주의 중심은 지구였다. 하지만 이 이론대로라면 금성과 수성이 가끔씩 태양으로부터 멀어질 때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현상은 전혀 관측할 수 없었다.

 

1500년대 초 코페르니쿠스는 이 점을 지적하며 고대 그리스 천문학자 아리스타르코스가 주창했던 지동설을 지지했다. 그는 각각의 천체들은 제각기 고유한 무게를 갖고 있는데 그 무게는 중심으로 향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코페르니쿠스의 이런 생각은 200년 후 뉴턴의 만유인력으로 계승된다.

 

 

 

 

뉴턴은 지구가 사과를 끌어당겼다고 생각했다. 질량이 있는 물체 사이에는 서로 끌어당기는 만유인력이 작용한다. 혹자는 묻는다. 만유인력과 중력이 어떻게 다르냐고. 중력은 만유인력에 지구 자전에 따른 원심력을 더한 힘이다. 만유인력과 원심력이 일치하는 공간이기에 사과는 지구가 자전하는 속도로 지구 주위를 돌게 된다. 그의 중력이론은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만약에 지구가 한 순간이라도 공전을 멈춰버리면 어떻게 될까? 지구는 태양의 인력에 의해 순식간에 태양 속으로 빨려 들어가 녹아버릴 것이다. 반대로 지구가 지금의 속도보다 빠른 속도로 공전한다면 지구는 원심력에 의해 공전궤도가 더 커지게 되든지, 태양의 영향권을 벗어나 영원히 멀어지게 될 것이다. 아무튼 지구가 지금의 속도로 태양주위를 공전하는 동시에 자전하는 덕분에 우리는 4계절과 밤낮이 있는 세상에서 살 수 있는 것이다.

 


 Scene #3  “중력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전부입니다.”

 

 

 

 

결국 모든 존재는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 중력이라는 미처 알지 못했던 힘에 의해서. 중력은 가장 기본적인 우주의 질서 체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물체의 추락함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가지만 중력이 가지는 절대적인 힘을 확인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중력이 무엇이라고 누군가가 물어본다면 우리는 이렇게 답하는 것이 그럴 듯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정답이 될 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전부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바로 그곳에는 중력이 존재한다. 하늘의 구름, 그리고 구름과 빌딩 사이의 공기 속에도 중력이 있으며, 우리가 흔히 무중력 공간이라고 이야기하는 우주 공간에도 그 크기가 작을 뿐 어김없이 중력은 존재하고 있다.

 

이처럼 모든 곳에 존재하는 중력은 태양과 달의 위치에 따라 매 순간 그 크기를 달리 한다.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함께 있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당연한 중력의 존재를 쉽게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뉴턴의 중력 발견 이후 과학은 급격한 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고, 인간은 마침내 지구의 중력에서 최대한 멀리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을 얻게 됐다. 지구 탈출의 꿈을 실현시켜준 거대한 비행체인 로켓. 지구 중력의 구속력을 이겨내고 지구 밖의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고 싶던 인간에게 로켓은 우주에 도달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통로가 되었다.

 

수많은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꾸어왔던 인류의 노력은 과학을 거듭 발전시켜왔다. 중력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거부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정하고 이해할수록 과학은 더욱 발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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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4-05-15 0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태양의 자전'이라니, 왜 지금까지 한번도 그 생각을 못했을까요.

cyrus 2014-05-15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 hnine님. 이 책이 만화라서 기본적으로 알아두면 좋은 과학상식이 쉽게 소개되고 있어요. 만화책으로 오랜만에 고등학생 때 배운 과학 수업 내용을 복습하는 기분이 들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