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안개 낀 바다 위의 나그네」  1818년경

 

 

격랑의 파도를 눈앞에 두고 가파르게 솟은 바위 위에 한 남자가 뒷모습을 보이며 서있다. 가없는 공간 속에서 절대 고독과 대면하고 있는 듯하다. 나그네는 자신의 발 아래 펼쳐진 멋진 광경을 즐기고 있지 않다. 자연은 그동안 사람들이 두려워했던 존재였다. 그러나 이제는 개발하여 이용하는 대상이 되었다. 안개가 자욱하고 파도가 심하게 치고 있지만 나그네의 자세는 마치 발 아래 펼쳐진 세상을 점령이라도 한 듯이 당당하다. 시선을 아래로 향하여 자연을 응시하는 장면은 자연을 바라보는 동양적 관점을 엿볼 수 있는 「고사관수도(古士觀水圖)」와 묘한 대조를 이룬다.

 

 

 

 

 

 

강희안(추정)  「고사관수도」 

 

조선시대 초기에 살았던 강희안이 그린 것으로 알려진 「고사관수도」는 늙은 선비가 숲 속 작은 개울가에 웅크리고 앉아 물끄러미 물속을 바라보며 상념에 젖은 듯한 장면을 묘사 한 것이다. 앞서 「안개 낀 바다 위의 나그네」에서 그림의 전면 중앙에 자리 잡고 당당히 서서 자연을 관찰하는 것에 비하면 한쪽에 웅크린 선비는 참 보잘것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늙은 선비는 바위에 자신의 몸을 기대어 턱을 괴고는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이 그림을 가만히 들려다보고 있으면 마음이 고요해진다. 이마가 벗겨진 선비는 뭐가 그리 좋은지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다. 표정이 바위 밑으로 흘러가는 물처럼 해맑다. 고요한 분위기의 그림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든다. 故 오주석 선생은 고요하지만 작품 속의 모든 것이 살아있는 그림이라고 말한다. 노자가 말한 바 최고의 선이라는 물과,내면에 사납고 크나큰 의욕을 숨겨놓은 돌의 심오함을 아우르면서 '둔하고 어리석은 듯 물러나 고요하게 지내는 웅숭깊은 하루'를 웅변하고 있다.

 

모든 것이 정지된 듯한 풍경 속에, 선비의 미소만이 은은하게 퍼진다. 세속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자연과 벗하며 내면의 평화를 찾은 듯하다. 물은 거듭남을 상징한다. 물로 세수를 하고 탁족을 하듯이 잔잔한 물을 보며 마음의 때를 씻는다. 물은 관조의 수단이다

 

방안의 불빛이 차고 넘치듯, 내면의 충일감이 미소로 번진다. 물아일체의 경지다. 자연과 나는 하나가 된다. 서양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물아일체'라는 말이다. 서양의 자연관은 인간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과거에 자연을 두려워하고 숭배했지만 세월이 흘러 과학과 산업이 발전했을 때 자연을 정복하려 했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자연을 두려움의 대상이거나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것이 사람이기에 결국 사람도 자연이라고 여겼다.

 

자연은 살아있다. 우리가 살아있는 것처럼. 그동안 자연을 수단으로 생각했던 우리는 후회하기 시작했다. 콘크리트 숲을 떠나 자연으로 돌아가기를 원한다. 자연과의 교감을 통한 여유와 정취가 그리워진 탓일까. 오주석 선생의 마음은 지금의 심정을 잘 말해주고 있다. 아마도 선생은 지금 저 그림 속에 살고 계시겠지.

 

“<고사관수도>를 보고 있노라면 그저 나도 저곳에 들어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선비가 자아내는 잔잔한 삼매경과 여유와 고요함이 너무 좋아서 그림 속의 인물이 되고만 싶은 것이다.”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 중에서, 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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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애니멀 - 인간은 왜 그토록 이야기에 빠져드는가
조너선 갓셜 지음, 노승영 옮김 / 민음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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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이야기를 좋아하는 동물

 

우리는 ‘이야기’에 묻혀 산다. 그래서 가끔 현실이 소설보다 더 기이하게 보일 때가 있다. 그럴 수 있다. 소설 같은 일이 현실에서 벌어지는 세상이다. 그래도 소설은 거의 예외 없이 현실보다 더 기이하고 재미있다. 현실이 소설의 근본인 상상력을 뛰어넘기는 지극히 어렵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은 이야기를 좋아했다. 이야기를 즐겨 듣고 만드는 능력 덕분에 문학이 발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즘에는 소설 같은 이야기 때문에 진실을 외면하거나 의혹과 불신을 낳기도 한다.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킨 사건의 원인이 명확하지 못할 때 배후에 거대한 권력조직이나 비밀스런 단체가 있다고 해석하는 것을 음모론이다. 이번 선거전도 별의별 네거티브 선전, 루머, 음모론이 다 등장했다. 특정 정당의 후보가 특정 종교와 연관됐다느니, 선거후보의 아내에 트집을 잡기도 하는 등 하루가 멀게 근거 없는 음모론이 SNS와 인터넷에 쏟아졌다. 이러한 음모론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하지만, 한편으론 그리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더 나아가 일부 소수의 사람들은 아예 사실로 믿고 있다.

 

이런 사례만 들어도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도,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즐긴다. 조너선 갓셜의 표현처럼 인간은 ‘호모 픽투스(Homo fictus)', ’스토리텔링 애니멀(Storytelling animal)', 즉 이야기를 좋아하는 동물이다.

 

인간이 왜 이야기하는 동물인지 증명해주는 재미있는 실험이 책의 서문에 소개된다. 밀폐된 방에 원숭이와 컴퓨터, 단 둘이 있게 했다. 원숭이는 컴퓨터 자판기를 두드린다. 화면에 나오는 글자는 별 의미 없는 단어만 나열된 것이다. 단 한 페이지도 문장을 쓰지 못하고 철자 ‘S’만 수없이 쳤을 뿐이다. 어찌 보면 쓸모없는 실험으로 보일 수 있지만, 결국 이야기를 가장 좋아하고, 쓸 줄 아는 동물이 인간이 유일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Scene #2  인간의 감정을 지배하는 이야기의 힘

 

우리는 이미 어렸을 때부터 이야기를 좋아했다. '옛날 옛적에~'라고 시작되는 전래동화가 시작되면 두 귀를 쫑긋 기울이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동화를 통해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친다. 아이들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조금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하나를 주면 둘을 달라고 하고, 한 번 이야기해주면 또 다시 해달라고 조른다. 이렇듯 어린이 교육의 매체로서 이야기만큼 좋은 소재는 없다. 어린이 정서 발달에 동화가 끼친 영향이 크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보고 듣는 이야기가 오랜 기간 자아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야기는 우리 마음뿐만 아니라 역사를 뒤바꿀 정도로 그 영향력은 엄청나다. 스토 부인의 『엉클 톰스 캐빈』은 출간된 당시에 베스트셀러가 되어 노예제 폐지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과장되게 받아들이면 역효과가 나온다. 히틀러가 바그너의 오페라 공연을 보지 않았더라면 그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무명 혹은 위대한 화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젊은 시절 히틀러는 게르만 민족 신화를 주제로 한 바그너의 오페라 '리엔치'를 보고나서 정치가의 길을 걷기로 결정했다.

 

히틀러의 사례를 통해 우리가 이야기에 단순히 공감하는 것만이 아니라 감정을 지배당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이야기가 우리의 감정에 미치는 효과를 언급했다. 그것이 바로 '카타르시스(katharsis)'다. 카타르시스는 ‘정화’라는 종교적 의미로 사용되는 한편, 몸 안의 불순물을 배설한다는 의학적 용어로도 쓰인다. 요컨대 관객이 비극의 주인공과 자신이 비슷하거나 같다고 생각하는 동일화가 먼저 이루어진다. 마치 비극의 주인공이 처한 상황이 자신이 실제로 경험한 것처럼 느낀다. 자신도 모르게 주인공의 감정에 동화된다. 비극이 그리는 주인공의 비참한 운명에 의해서 관객의 마음에 ‘두려움’과 ‘연민’의 감정이 격렬하게 유발된다. 그 과정에서 이들 인간적 정념이 어떠한 형태로 순화되는 일종의 정신적 승화작용이다.

 

이야기는 정서적 정화 또는 쾌감을 맛보는데 있어서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다. 실제로 배설 욕구를 참으며 견디다가 볼 일을 보고나면 차마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의 시원함을 느끼듯이 인간은 참아왔던 눈물을 흘리는 순간에도 그와 비슷한 시원함을 느끼게 된다. 답답하고 우울하고 슬플 때 억지로 웃으려는 노력보다 시원하게 한 번 울고 나면 개운해지는 그런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순간의 감정이나 정서, 혹은 그러한 현상을 간접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이야기는 가상현실(시뮬레이션)과 같은 작용을 한다.

 

이와 관련해서 저자는 이야기를 즐겨 읽는 사람이 논픽션을 즐겨 읽는 사람보다 사회성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실험 사례를 소개한다. 이야기를 읽음으로써 공감 능력이 향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실험 하나만으로도 이야기의 긍정적 효과를 뒷받침하기에는 부족하다. 허구적인 요소가 가미된 픽션만 읽는다고 해서 공감 능력이 키 크듯이 쑥쑥 향상되는 것은 아니다. 이야기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려는 반응의 자세가 중요하다. 19세기 미국인들이 스토 부인의 소설을 읽고 비참한 노예제도의 참상을 알게 되어 노예제를 반대하는 것은 이야기를 통한 좋은 공감의 사례이지만, 반면 히틀러 같은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 나쁜 공감도 있기 마련이다.


 
 Scene #3  이야기의 홍수에서 살아남기

 

상상력이 넘치는 이야기는 종종 돈키호테나 히틀러 같은 망상에 사로잡히는 인간으로 만들기도 한다. 그만큼 우리의 뇌는 이야기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매력을 느끼는 것이다. 사실이 불명확한 내용의 이야기라도 우리가 그것을 믿게 만들 정도로 이야기의 효과는 단순하면서도 쉽게 무시할 수 없다.

 

이야기는 가끔 우리를 생각의 함정으로 유도해서 그 곳으로 빠뜨리게 한다. 우리가 음모론에 쉽게 유혹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음모론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사실로 믿고 싶어 한다. 불확실하고 애매모호한 내용에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해서 그럴듯한 진짜 이야기로 만든다. 그것이 하나의 가설에 불과하고, 사실로 증명되지 않았는데도 가짜 이야기를 진짜 이야기라고 단정을 짓는 것이다. 스토리텔링 애니멀 인간은 음모론이나 루머에게는 아주 좋은 먹잇감이 되기 쉽다.

 

이것을 '셜록 홈즈 증후군'이라고 한다. 코난 도일이 창조한 명탐정 셜록 홈즈는 범죄 수사의 천재이다. 그는 여러 가지 단서들을 통해 수많은 해석을 생각해낸다. 그 중에 한 두 개의 단서는 홈즈가 의문을 품고 있는 사건의 과정에 딱 들어맞게 된다. 여기서 홈즈는 그 해석만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낸다. 이러한 홈즈의 추리력은 지금도 많은 독자들을 감탄하게 만드는 실력이지만, '문학적 허구'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또 홈즈는 사건의 인과 관계에 적중되도록 초점을 맞추다보니 단서에 대해 자의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셜록 홈즈 시리즈를 읽어 보면 홈즈가 완벽한 인물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가끔 자의적인 해석의 추리 방식 때문에 사건과 전혀 관계없는 인물을 범인으로 판단할 때도 있고, 잘못된 판단의 오류로 의해서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사건이 전개되기도 한다)

 

이야기가 만든 생각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가 이야기에 쉽게 반응하고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스토리텔링 애니멀'이다. 그렇다고 이야기를 쓰는 능력을 가진 유일한 동물이라고 자만에 빠져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런 특성을 경계해야 한다. 이야기가 우리의 감정 그리고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며 그 힘의 효과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흘러넘치는 이야기의 홍수 속에서 헤쳐 나올 줄 알아야 한다. 그 중에 절반은 사실을 왜곡하는 영양가 없는 추측과 오류  투성이에 가깝다. 이야기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람은 의식주만으로 살 수 없다. 이야기가 필요하다. 아니 필수적이라 해도 좋다. 실제로 이야기 없는 삶을 상상해 보라. 소설이든 영화든 드라마든 컴퓨터 게임이든. 거칠게 말하면 이제 허구의 이야기는 인간의 삶을 지배한다.

 

스토리텔링은 최근에 화두가 됐다지만 실은 어린 시절 잠자리에서 어머니가 들려주던 동화책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굳이 거창한 미사여구 없이도 나의 이웃이나 동료와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소소한 이야기와 행복, 그런 것이 바로 우리의 삶을 따뜻하게 만드는 스토리텔링의 힘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제는 그런 착한 이야기를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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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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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434] 만약 이것이 인간이라면?

 

 

 

 

 

  Scene #1  자유의 이름을 불러 주기 위해서 레비는 태어났다

 

 


소망 없는 부재(不在) 위에
벌거벗은 고독 위에
죽음의 계단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회복된 건강 위에
사라진 위험 위에
추억하기 싫은 희망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이 한마디 말의 힘으로
나는 내 삶을 다시 시작하고,
너를 알기 위해서
너의 이름을 불러 주기 위해서 나는 태어났다.

오, 자유여.

 

 

(폴 엘뤼아르, ‘자유’ 중에서)

 

 


1947년 1월 27일. 프리모 레비는 ‘자유’라는 이름을 불러 주기 위해서 다시 태어났다. 수용소에서 탈출한 지 9년 뒤, 회복된 삶의 건강 위에 그리고 추억하기 싫은 희망 위에 ‘자유’라는 이름을 쓴다. 수용소 생활을 하면서 2년 동안 잊힌 자유의 빈자리를 회상한다. 그 책이 바로 『이것이 인간인가』였다. 레비의 글은 자유 그 자체만 소개하지 않는다. 자유를 억압받는 대상의 감정뿐만 아니라 이들을 억압하는 대상들까지 묘사함으로써 ‘자유’의 의미가 잃어버린 ‘소망 없는 부재’의 시대를 보여준다.
 
‘자유’라는 단어 자체가 없는 삶을 산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상상만 해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나마 자유가 제한된 삶이 어떤 것인지 안다. 2008년부터 2010년까지 집단 수용 생활을 해본 적이 있다. 바로 남자라면 가게 되는 군대라는 곳이다. 그러나 자유가 아예 없는 삶과 자유가 제한된 삶은 확연히 큰 차이가 있다. 아우슈비츠 제3수용소에서의 생활은 ‘내 책상 위에, 나무 위에, 모래 위에, 눈 위에, 흰 종이 위에’(엘뤼아르의 ‘자유’) 등 그 아무 곳에나 자유의 이름을 쓸 수가 없다. 안식처라고 할 수 없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희망이 자취를 감출 때 자유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언제나 자유의 이름을 마음껏 부를 수 있고 쓸 수 있다. 그래서인지 나는 수용소 생활을 실감나게 다룬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같은 책을 볼 때면 왠지 기분이 묘해진다. 수용소의 생활은 ‘쇼생크 탈출’에서처럼 간수 몰래 아리아를 틀어놓는 낭만적 객기를 부릴 수 있는 곳도 아니고, ‘프리즌 브레이크’에서처럼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곳도 아니다. 

 

 


 Scene #2  고통과 욕구만 남은 텅 빈 인간

 

아우슈비츠에 수용된 레비는 운이 좋았다. 화학 전공자였기에 죽음의 가스실 대신 실험실에 배정받을 수 있었다. 다른 유대인들이 그를 부러워했고, 살아남기에 유리한 조건을 지녔던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기록했다. 악몽 같은 수용소를 기억하기 위해서. 평정심을 유지하려 했고, 유머를 잃지 않았으며, 객관적 시선을 견지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끝내 살아남았고 그 끔찍한 기억의 조각들을 기록 문학으로 남겼다.

 

레비의 증언은 단순한 체험수기가 아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폭력적인 현대 역사를 가슴에 새겨 두길 바랐으며, 그래서 다시는 그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기를 소망했다. 그는 인간 내부의 집단적 광기를 온몸으로 체험했으며 그것이 악한 본능임을 알고 있었다. 그런 악한 본능은 단순히 인간의 하나뿐인 삶을 짓밟는 것이 아니라 삶의 기본적인 존재 이유라고 할 수 있는 자유마저 강탈한다.

 

 

우리는 처음으로 우리의 언어로는 이런 모욕, 이와 같은 인간의 몰락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순식간에, 거의 예언적인 직관과 함께 현실이 우리 앞에 고스란히 정체를 드러냈다. 우리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밑으로는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었다. 이보다 더 비참한 인간의 조건은 존재하지 않았고 상상할 수도 없었다. 우리 것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은 옷, 신발, 심지어 머리카락까지 빼앗아갔다. 우리가 말을 해도 그들은 우리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설사 들어준다 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우리의 이름마저 빼앗아갈 것이다. (34쪽)

 

 

자유는 산소와 같다. 산소 없이 인간은 살 수 없다. 마찬가지로 자유 없는 삶은 인간다운 삶이 아니다.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우리의 숨통을 죄여 오는 것과 비슷하다. 간수와 군인들은 이미 자유의 호흡이 가쁜 수용소 유대인들의 이름마저 빼앗으려고 한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짐승이나 다름없다. 아니, 살아 있으나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무기력한 존재일 뿐이다. 이것이 인간인가. 과연 그들은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제는 자유라는 이름을 쓸 수 없고, 부를 수도 없다. 레비의 표현대로 ‘고통과 욕구만 남은, 존엄성이나 판단력을 잃어버린 텅 빈 인간’(35쪽)이다.

 

자유가 없는 감정의 빈자리에는 끝이 없는 절망과 공포감이 채워진다. ‘이해하려 애쓰지 마라, 미래를 상상하지 마라, 모든 게 어떻게 언제 끝나게 될지 생각하며 괴로워하지 마라’, ‘다른 사람에게 질문하지도, 스스로 자문하지도 말라’ 수용소 밖으로 나올 수 있다는 희망의 불씨는 점점 사그라진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희망과 긍정의 힘은 무용지물이다. 오히려 좌절감만 깊어져 몸과 마음을 더욱 무겁게 만든다. 자유가 박탈된 숨이 턱턱 막히는 수용소를 탈출을 하려면 담대한 용기와 운이 따라줘야 한다. 소중한 자유의 공기가 너무 그리운 나머지 탈출을 감행하다간 영원히 공기의 맛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 살아남으려면 숨이 가쁘고 답답하더라도 참고 견딜 수밖에 없다.

 

자유 그리고 삶의 희망이 자취를 감춰버린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레비는 자유를 생각하며 마음을 가다듬어 본다. 그리고 고민한다. 자유가 박탈된 현실을 그대로 수긍해야 될까 아니면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구원에 대한 기대감과 희망을 잊지 말아야 할까. 결국 레비는 전자의 삶을 선택했다. 배고픔과 추위 그리고 수용소 간수와 군인들의 폭력을 참고 견뎌내고, 그 고통을 잠시라도 피할 수 없는 방법을 모색한다. 자신을 괴롭히는 지옥의 형벌에 적응해나간다.

 

그러나 ‘고통과 욕구만 남은, 존엄성이나 판단력을 잃어버린 텅 빈 인간’일수록 동등한 약자에 대한 배려나 연대감 또한 잃어버리고 만다. 레비는 생애 마지막 책의 제목이기도 한 ‘익사한 자와 구조된 자’의 모습을 목격한다. 수용소에 갇힌 유대인과 정치범들은 자유가 상실된 약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집단 내에서도 강자와 약자가 존재한다. 수용소 생활은 하루하루가 생존을 위한 치열한 결투이기도 하다. 내 몸 온전히 지키는 것도 힘든 상황에 나보다 약하거나 병든 동료까지 지켜주는 것이 귀찮고 버거운 일이다. 내 옆에 있는 동료가 병이 들어 죽어간다거나 간부의 군화에 죽도록 구타를 당하는 모습을 보더라도 눈을 감고 만다. 나보다 약한 동료는 지옥의 형벌을 견디지 못하고, 아무런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 못한 채 익사하고 만다. 간신히 구조된 자는 익사의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묵묵히 하루를 버티면서 살아가면서 자신만의 생존법을 터득해야 한다.

 

 


 Scene #3  자유라는 이름을 써도 채울 수 없는 수용소의 기억 

 

끔찍했던 죽음의 수용소가 붕괴되어 역사의 기억 속으로 사라진 1956년, 레비는 노트 위에 마음껏 ‘자유’라는 이름을 쓰고, 부를 수 있었을까. 그에게는 자유란 그토록 간절했던 소중한 삶의 반이였기에 이런 날을 무척 고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레비는 ‘자유’를 10번, 100번을 쓰더라도 수용소 10개월 생활에 잃어버린 그리운 자유를 발견하지 못했다. 살아도 허전함은 여전했다. 그 때 그 기억의 고통은 멈추지 않았다. 자유가 박탈되어 절단된 그의 삶에 환상사지 같은 고통이 그를 괴롭힌다. 무엇이 레비를 끊임없이 괴롭혔던 것일까?

 

 

개별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많은 사람들이 다소 의식적으로 ‘이방인은 모두 적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확신은 대개 잠복성 전염병처럼 영혼의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우연적이고 단편적인 행동으로만 나타날 뿐이며 사고체계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이 발생하면, 그 암묵적인 도그마가 삼단논법의 대전제가 되면, 그 논리적 결말로 수용소가 도출된다. 수용소는 엄밀한 사유를 거쳐 논리적 결론에 도달하게 된, 이 세상에 대한 인식의 산물이다. 이 인식이 존재하는 한 그 결과들은 우리를 위협한다. 죽음의 수용소에 관한 이야기는 모든 이들에게 불길한 경종으로 이해되어야만 할 것이다. (‘작가의 말’ 중에서)

 

 

비록 수용소가 완전히 사라졌더라도 그 곳에서 탄생된 잘못된 인식의 흔적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의 기억이 되어 유령처럼 세계를 배회하고 있다. 수용소의 유령은 자신과 다른 인종을 차별하고 배척하는 오늘날의 극우파로 옮겨 붙었다. 과거 수용소와 독일 나치를 떠올리게 만드는 인종차별적인 도그마는 지금도 평화와 화합의 건강을 위협하는 잠복성 전염병과 같다. 그러한 인식의 산물은 수용소에 살아남은 레비를 끝까지 괴롭혔을 것이다. 자유의 빈자리에 생긴 상처를 쿡쿡 찔러대면서 고통을 안겨 줬다. 수용소를 극적으로 탈출하여 유대인 포로 174517이 아닌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로 다시 태어났지만 수용소 생활에 의한 끔찍한 기억의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했다. 1987년에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만든 결정적인 주범이 바로 수용소의 도그마였다.

 

비록 레비는 완전한 자유로운 삶을 갈망하다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비록 갑작스러운 선택이었지만, 이미 사멸한 것이나 다름없는 수용소의 기억을 상기시켜 그 위에 ‘자유’라는 건강하고 신성한 이름으로 지우려고 노력했다. 레비의 기록문학은 화생방 건물과 같다. 우리는 그가 남긴 기록을 읽음으로써 자유가 없는 숨 막히는 세상을 이해하고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이런 독서를 통해 우리는 지금 우리 입과 코에 드나드는 산소처럼 자유의 소중한 의미를 깨닫게 된다.  

 

우리는 참으로 안락하게 살면서도 우리 삶 가까이에 있는 이 기본적인 자유의 소중함을 느끼지 못한다. 자유. 단어의 의미에 대해서 그렇게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언어로 말하고, 눈으로 세상을 보고, 푹 쉴 수 있는 안식처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 또한 자유라고 볼 수 있다. 자유의 대상을 너무 광범위하게 잡은 것도 있지만, 확실한 것은 우리는 지금 레비가 살았던 시대, 아니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마저 박탈된 일제 강점기보다 훨씬 더 보편적인 자유를 누리면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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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비웃었지 돌아온 사람 없었다고
이미 끝났다고 무모한 짓일 뿐이라고
하지만 난 알아 달빛 위에 날 그리는 너

 

(조규찬, ‘마지막 돈키호테’ 중에서)

 

 

 

 

 Scene #1  라만차의 늙은 기사, 돈키호테

 

 

 

 

 

 

 

 

 

 

 

 

 

 

 

 

 

 

 

 

 

 

 

 

 

 

 

 

흔히 우리는 돈키호테를 미치광이라고 부른다. 혹은 현실을 망각한 이상주의자라고 한다. 생각은 하지 않고 행동만 앞서는 사람을 가리켜 ‘돈키호테형 인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황당하고 어이없는 일을 저질러 남들의 웃음거리가 되기도 하고 일반적으로 무모하다고 생각해서 아무도 시도하지 않는 일에 매달려 스스로 대견해하고 행복해한다.

 

그는 편력기사가 되어 세상 곳곳을 모험하고, 불의에 맞서 용감히 싸우는 삶을 꿈꾼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의 모습은 우스꽝스러울 뿐이다. 둘시네아 공주도, 거대한 거인 풍차와의 대결도 사실은 망상에 불과한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비웃는다. 키득키득 웃음을 참으며 정신이 돈 남자의 행동을 재미있는 구경거리인양 즐기기까지 한다.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의 행동을 ‘광기’와 연결시킨다. 사실 그 때문에 돈키호테가 희화화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 광기는 다른 면에서 보면 이상과 신념을 지키기 위한 고독한 노력이다. 남들과 똑같이 일생에 매여, 일상의 무료한 삶을 살던 돈키호테는 어느 날 문득 이렇게 중얼거렸을지 모른다. “이대로 살다가 죽는 것만이 인생은 결코 아닐 것이야!” 그 각성은 그로 하여금 불멸의 명예, 아무리 빼앗으려 해도 도저히 빼앗길 수 없는 영원한 것을 위한 위대한 모험을 떠나게 만든다. 세상의 중력을 뛰어넘어 출정을 감행한 것이다.

 

 

 

 

 

귀스타브 도레의 삽화

 

 

그러나 돈키호테는 연민이 느껴질 정도로 안쓰럽다. 돈키호테는 길을 지나가는 상인들을 공격하기 위해 달려들다가 로시난테가 넘어지는 바람에 땅으로 굴러 떨어지고 만다. 불행한 사고로 무방비상태가 된 그는 상인들에게 죽도록 두들겨 맞는다. 만신창이가 된 기사는 골병이 든 몸을 일으켜보려고 하지만, 노쇠한 체력은 기사의 몸을 둘러싼 갑옷을 이겨내지 못한다. 땅에 드러누운 돈키호테는 상처 입어 죽어가는 기사의 모습을 흉내를 내면서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달래본다.

 

 

 

 Scene #2  거울 나라의 하얀 기사

 

 

 

 

 

 

 

 

 

 

 

 

 

 

 

 

 

말하는 토끼를 쫓아 땅속으로 뛰어들어 이상한 나라를 모험하고 돌아온 지 6개월이 지난 어느 초겨울 날, 앨리스는 방 안에 걸린 거울 속으로 뛰어든다. 그리고 거울 나라를 모험하게 된다. 그곳은 거울 나라답게 모든 것이 반대다. 글자도 거꾸로 보이고 가고 싶은 방향으로 가려면 반대로 달려야 한다. 벌을 받은 뒤에 잘못을 저지르는 식이다.

 

이상한 곤충들, 트위들덤과 트위들디, 험프티 덤프티 등 우스꽝스럽지만 매력적인 등장인물들을 만나 기상천외한 소동을 겪는다. 결국, 목적지에 도달한 앨리스는 여왕의 자리에 오른다. 붉은 여왕, 하얀 여왕과 함께 즐기던 파티가 엉망이 되면서 앨리스는 잠에서 깨어난다.

 

 

 

 

 

존 테니얼의 삽화 #1

 

 

『거울 나라의 앨리스』(줄여서 '거울 나라')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후속이다. 전작이 따뜻한 봄날 땅속 이상한 나라로 뛰어들어 트럼프 카드들을 상대한 내용이었다면, 『거울 나라』는 추운 겨울날 거울 나라에서 체스 말이 돼 경기를 벌이는 이야기다.

 

 

 

 

 

존 테니얼의 삽화 #2

 

 

여기서도 돈키호테 못지않은 늙은 기사가 등장한다. 체스 판의 하얀 기사는 여왕이 되기 위해 길을 나서는 앨리스를 붉은 기사로부터 구출하고 보호해준다. 이 작품에서 하얀 기사도 특이한 인물이다. 우스꽝스러운 결투를 통해 붉은 기사를 무찌르지만, 행동은 어설프게 짝이 없다. 말이 출발할 때마다 땅으로 굴러 떨어진다. 앨리스는 기사에게 말 타는 연습을 많이 하지 않았다고 돌직구를 던져본다. 기사는 기분이 조금 상했지만, 충분히 연습했다고 변명을 늘어놓는다.

 

기사는 자신이 발명에도 소질 있다고 말한다. 자신의 발명품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겨 앨리스 앞에서 자랑하지만, 쓸모없는 것들뿐이다. 물건을 보관하기 위한 상자에 비가 들어가지 않도록 거꾸로 메고 다니지만, 안에 있는 물건들이 땅으로 떨어지고 만다. 그러자 기사는 자신이 만든 상자는 더 이상 쓸모없다고 생각한다. 그 다음 기사의 발명품은 쥐덫. 이것 또한 쓸모없는 물건일 뿐이다. 말등 위에 쥐가 있을 리가 없다. 앨리스는 그런 기사의 발명품을 이상하게 쳐다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는 발명품이 지금 당장은 쓸모없더라도 모든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말한다.

 

앨리스는 정말 인내심이 강하고 예의가 바른 소녀인 것 같다. 정상적이지 않은 하얀 기사의 말을 고분고분 들어주고, 이해해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하얀 기사와 앨리스의 만남은 오래가지 못한다. 체스 게임 규칙상 하얀 기사는 다음 칸으로 이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얀 기사는 다음 칸으로 이동하는 앨리스를 떠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기사는 오랜만에 자신의 발명품에 대한 설명을 들어준 앨리스와의 작별이 아쉽게 느껴진다.

 

앨리스 연구가들은 하얀 기사와 앨리스의 관계를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둘시네아 공주를 암시하기도 하며, 작가 루이스 캐럴과 그가 마음속으로 좋아했고 작품 속 앨리스의 모델이기도 한 앨리스 리델이라고 해석한다. 돈키호테, 하얀 기사 그리고 루이스 캐럴. 세 명 다 공통적으로 현실 감각이 부족한 고독한 이상주의자에 가깝다. 돈키호테는 가상의 인물 둘시네아를 사랑하고, (비록 사랑의 감정이라고 하기에는 비약이 있지만) 하얀 기사는 앨리스를 떠나보내는 모습을 씁쓸하게 생각한다. 체스 게임 규칙만 아니었다면 하얀 기사는 여왕이 되는 앨리스를 끝까지 보호하고, 여왕의 든든한 친위 기사로 인정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얀 기사는 앨리스를 위대한 기사로서 명예를 드높여주고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켜주는 인물이다. 그러나 체스 판의 현실을 극복하지 못한다.

 

루이스 캐럴은 11살의 앨리스 리델와 특별한 우정을 쌓지만, '사랑'으로 발전시키지 못한다. 캐럴은 앨리스 리델을 위해 불멸의 작품 『이상한 나라』를 완성시키지만, 두 사람의 관계를 점점 삐걱거렸다. 앨리스에 대한 그의 집착에 불안감을 느낀 리델 부인은 그를 학교에서 내쫓았고 그가 앨리스에게 보낸 편지도 모두 파기했다. 앨리스를 잊지 못한 그는 속편인 『거울 나라』에서도 소녀를 등장시키면서 마음속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하얀 기사와 앨리스의 작별은 나이 차의 현실을 극복하지 못한 채 끝나버린 캐럴과 앨리스 리델과의 우정의 슬픈 결말인 셈이다. 

 

 

 

 Scene #3  이 시대의 마지막 발명가

 

 

 

 

 

 

 

 

 

 

 

 

 

 

 

 

 

 

페터 빅셀의 단편집 『책상은 책상이다』에 수록된 '발명가'의 주인공은 이 시대의 마지막 발명가로 나온다. 1890년에 태어난 발명가는 평생 발명에 몰두하면서 생활한다. 그의 삶은 오직 도면을 그리는 일뿐이다. 남들이 자신의 발명 아이디어를 도용하고, 무시할까봐 두려워한다. 그렇게 세상과 단절된 채 100년이라는 세월을 보냈다.

 

드디어 발명에 성공한 발명가는 오랜만에 집 밖으로 외출한다. 그러나 세상은 너무나도 많이 달라졌다. 발명가는 21세기의 신식 발명품이 가득 찬 도시의 모습에 감탄한다. 그는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자신의 발명품을 소개하고 자랑한다. 그러나 그의 발명품은 이미 다 만들어진 것이다. 발명가 스스로 대단한 작품이라고 생각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발명가의 모습을 비웃을 뿐이다. 이미 오래전에 만들어지고 상용화된 발명품은 자기가 만들었다고 우겨대니 사람들은 그의 말이 헛소리로 들린다.

 

자신의 발명 능력을 알아주지 못한 세상에 실망한 발명가는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다시 고독한 발명은 이어진다. 이미 세상에 나온 발명품이라도 그 어려운 일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자신, 발명가라고 생각한다. 발명에 대한 깊은 좌절감을 자신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발명으로 달래보려는 발명가의 모습이 처량하다.

 

고독한 발명가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이상주의자를 상징한다.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현실에 적용시키지 못한다면 외면을 받는다. 발명가는 발명에 몰두한 고독한 삶 때문에 현실과의 괴리감을 극복하지 못했다. 이런 좌절감이 만들어 낸 허무함을 채우기 위해 또다시 '발명'이라는 이상을 선택하지만, 백년의 고독은 더욱 깊어져만 가고 그가 죽을 때까지 이어질 것이다. 세상이 외면한 이상주의자의 운명은 항상 고독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발명에 미쳐버린 마지막 발명가를 비난할 수 없다. '발명'이라는 신념만으로 우직하게 사는 그의 모습을 박수쳐줄 만하다. 그가 현실주의자였더라면 그동안 수없이 시도했던 발명을 포기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알아주지 못한 현실을 감당하지 못해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어쩌면 발명가로서의 명예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발명을 통해 명예와 부를 얻는다는 것은 현실적인 발명가의 모습이다. 비록 자신을 외롭게 만들고 아무도 자신의 능력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도 발명가 본인에게는 발명하는 창작의 과정 자체를 즐길 수도 있다.

 

 

 

 Scene #4  현실이 그들을 무시할지라도 

 

어릴 적에는 이상의 힘이 컸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녹녹치 않은 삶의 울타리 안에서 우리는 현실주의자가 되어간다. 하지만 마음에 품었던 이상, 어릴 적 꾸었던 꿈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이 외면한 이상주의자가 현실주의자보다 위대한 인물로 평가받을 때도 있다. 이상에 대한 무모한 도전과 포기하지 않는 노력이 있었기에 세상은 그들을 기억한다.

 

돈키호테는 망상에 사로잡힌 이상주의자에서 도전을 두렵지 않는 현실주의자로 평가받고 있다. 하얀 기사가 없었다면 앨리스는 여왕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루이스 캐럴의 '앨리스 앓이'는 위대한 문학작품을 탄생시켰고, 평범한 소녀 앨리스는 세상에서 가장 어린 문학의 뮤즈가 되었다. 고독한 발명가는 돈키호테처럼 무모하면서도 적극적인 용기가 없었을 뿐이지 '발명'에 살고 '발명'에 죽으려는 제대로 된 발명가의 모습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전히 자신만의 꿈을 버리지 않고 그것을 하나씩 자신만의 현실로 실천해나가는 이상주의자들은 돈키호테의 후예들이다.

 

그들은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자신만의 신념과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도전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현실과 타협하지 않으려는 모습은 그 어떤 현실주의자들보다 대단하며 박수를 받을만하다. 현실과 불화하며 스스로 아웃사이더가 되려는 자세가 늘 문제가 되지만, 적어도 그들의 삶은 진실하고, 진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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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찬드란 박사의 두뇌 실험실 - 우리의 두뇌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가?
빌라야누르 라마찬드란 외 지음, 신상규 옮김 / 바다출판사 / 200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뇌는 바다보다 깊어라

깊이 담그면 아주 푸르게

그 속에 바다가 다

물통 속 스펀지처럼 담긴다

 


여류시인 디킨슨은 직감으로 뇌 자체를 미지의 세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뇌의 깊이는 디킨슨이 생각했던 그 이상으로 무한히 깊다. 바다처럼 깊은 것이 아니라 깊이를 전혀 알 수 없는 심해와 같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 머릿속에 있는 뇌를 본다면 생각만큼 특별하게 생기지 않았다. 무게로는 커봤자 2kg 안팎에 불과하며 한 움큼 크기의 회백질 고기처럼 보인다. 이곳에서 모든 생각과 감정이 태어나고 명멸한다.


뇌는 인간을 생각하고 움직이게 하는 사령탑이다. 뇌 없이는 생존은 물론, 관계를 맺고 창작하는 인간다움도 없다. 단순하게 보면 뇌는 정보를 들여온 뒤 그에 맞는 반응을 내보내는 일을 한다. 당연하고 간단한 행동처럼 보이지만 그동안 뇌에서는 엄청난 일이 일어난다. 뇌의 신경세포는 무려 1000억 개나 된다. 뇌는 이 세포 간 연결 통로인 시냅스의 작동으로 기능한다. 시냅스는 사용빈도에 따라 생성, 강화, 소멸을 반복하며 뇌 구조를 변화시킨다. 알고 보면 디킨슨의 시구처럼 뇌의 구조는 수많은 시냅스가 구성되어 작동되는 광활한 세계인 것이다. 지금도 뇌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뇌 지도를 제작함으로써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고 있다.


두뇌가 특정 부위에 손상을 입게 되면 사람은 기이한 행동의 변화를 보인다. 사라진 신체가 여전히 존재한다고 착각하고, 신을 보고, 상상임신을 한다. 그러나 이들은 정신에 이상이 생겨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단순히 두뇌가 사고하는 메커니즘에 변화가 생겼을 뿐이다. 이 책의 원제처럼 뇌 속에 살고 있는 '유령'이 지독한 장난쳤을 뿐이다.


저자가 든 임상사례들은 그야말로 기이하다. 사고로 팔을 절단하고도 환상손가락이 환상손바닥을 후벼파는 고통에 시달리는 '환상사지', 시각에 생긴 맹점 때문에 의사 선생님의 무릎에서 원숭이 환각을 보는 '찰스 보넷 증후군', 자신의 부모님이 가짜라고 주장하는 '카프그라 증후군' 환자 등이 나온다.


환상사지는 수술이나 사고로 갑작스럽게 손발이 절단됐을 경우, 없어진 손발이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지는 현상을 일컫는다. 환자들은 환상 팔 혹은 환상 다리에서 일어나는 극심한 고통을 호소한다. 뇌 속 유령이 일으키는 장난 중 가장 고통이 심한 증상이 아닐까 싶다. 존재하지 않는 부위에서 존재하는 통증을 어떻게 치유할까? 처음에 의사들은 절단 부위의 밑동을 계속 잘라나가거나, 감각 신경을 잘라버리는 치료를 행했다. 그러나 대부분 별 효과가 없었다. 대뇌피질의 표면에는 신체의 여러 부위가 매핑(mapping)되어 있는데 팔 다리를 잘라내면 이에 따른 신체상(body image)이 빠르게 재구성된 결과 환상사지가 나타난다.


저자는 환상사지 치료를 위해 가상현실 상자를 고안했다. 상자 가운데 거울을 넣은 가상현실 장치를 만들어 정상적인 팔의 움직임을 환상사지가 느껴지는 팔 방향에 비춘다. 기형이 되거나 마비된 환상사지의 통증을 없애고 나아가 환상사지를 사라지는 데 성공한다. 이는 일종의 트릭이다. 팔이 사라져도 신체감각을 느끼는 대뇌 두정엽은 활동을 계속한다. 절단되고 없는 팔의 감각을 인지하려니 환상사지로 나타났던 것이다. 뇌가 거울에 비친 팔을 진짜라고 믿으면서 고통도 사라졌다.


이처럼 대뇌 두정엽 표면은 신체감각을 느끼는 곳이다. 성기, 발, 몸통, 손, 엄지, 얼굴, 입술, 목구멍 순으로 표면마다 느끼는 신체부위가 다르다. 또 각 부위는 민감도가 다 다른데 얼굴과 손, 입술이 민감하고 몸통과 다리는 상대적으로 둔감하다. 손, 입술의 움직임과 감각이 예민한 이유다.

 

뇌 속의 유령은 뇌 신경조직 활동의 산물이다. 그것은 팔과 다리가 내 몸에 붙어있다는 신체상이나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느낀다고 생각하는 지각으로 절대로 볼 수 없다. 뇌를 이해해야 한다. 인간의 모든 측면에서 뇌가 가지는 중요성에 대한 자각이나 변화가 아직은 미흡하다. 한 움큼밖에 안 되는 두뇌 세포질의 활동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종의 환상이라는 책의 결론은 때로 허무하지만 이상하게도 우리를 위로하고 겸허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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