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와 소음 - 미래는 어떻게 당신 손에 잡히는가
네이트 실버 지음, 이경식 옮김 / 더퀘스트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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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수많은 표본 속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가지고 특정 집단의 특징을 뽑아 낼 수가 있다. 이같이 여러 정보를 한데 모아서 분류한 뒤 특정을 찾아내는 것을 통계라고 한다. 통계는 수량적 비교를 통해 사실을 관찰하고 처리하는 것이다. 수치상의 성질, 규칙성 또는 불규칙성을 찾아낸다. 실험 계획, 데이터의 요약이나 해석을 실시하는데 있어서의 근거를 제공하며, 폭넓은 분야에서 응용되어 실생활에 적용되고 있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빅 데이터도 기존 기업들이 활용하던 통계를 좀 더 적극적이고, 광범위하게 확대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빅 데이터는 데이터를 수집, 저장, 관리, 분석할 수 있는 역량을 넘어서는 대량의 정형 또는 비정형 데이터 집합 및 이러한 데이터로부터 가치를 추출하고 결과를 분석하는 기술이다.

 

그동안 통계는 기존에 있던 특정 정보를 대부분 사람들이 직접 취합하는데 그쳤지만, 최근 빅 데이터에 활용되는 정보는 접속기록, 위치정보, 센서 등의 다양하면서도 대량의 정보를 취합할 수 있다. 이렇게 많은 정보를 취합하게 되면 각 변수들의 상관관계를 조사할 수 있고, 이전까지는 전혀 연관성을 가진다고 생각하지 못한 부분까지 확인할 수 있다. 기업들의 경영환경은 최근 빠르게 변화하고 있기 때문에, 기존 사업부문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에 대해서 빅 데이터로 예측한다. 또 새로운 전략을 만들어야 할 때, 빅 데이터를 통해 얻어진 정보는 성공의 가능성을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빅 데이터의 단점도 있다. 일단 빅 데이터 활용이 쉽지 않다. 기존에 잘해왔던 정형 데이터는 전체 데이터의 20%에 불과하며 나머지 80%는 기존에 잘 다루지 않았던 비정형 데이터이다. 각기 다른 비정형 데이터를 표준화 시킬 수 있는 활용법이 필요하다. 게다가 폭증하는 데이터를 처리하기 위한 기술적인 한계를 극복하는 것도 문제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런 빅 데이터가 정말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확신을 할 수 없다.

 

이러한 빅 데이터 시대를 맞아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의 ‘미래 쇼크’가 새삼 떠올린다. 토플러는 미래에 예상되는 기술적, 사회적 변화가 그 속도를 점차 가속화함으로써 개인이나 집단의 적응이 한층 어려워질 것임을 예견하고 있다. 미래의 변화는 상상할 수 없이 너무 빠른 가속도로 전개되기 때문에 이런 변화의 가속화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또 인간은 이러한 미래에 어떻게 적응(또는 적응에 실패)할 것인가를 미리 내다봐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과중한 정보의 부담(정보 과부하)이 인간 행동을 와해시킴으로써 정신 병리 현상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보고 있다. 현대 사회는 과거에 비해 훨씬 많은 양의 정보를 이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처리하도록 강요받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 자고 일어날 때마다 2.5퀸틸리언(Quintillion, 조의 1만 배, 100경) 바이트나 되는 빅 데이터 속에 우리는 올바른 정보를 선택하고 수집할 수 있을까?

 

매일 빅 데이터가 쏟아져 나오는 상황에서 과거 데이터에만 집착한다면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그것은 나무 그루터기에 토끼가 부딪히기만을 기다리는 어리석은 농부(수주대토, 守株待兎)와 같다.

 

 

 

 

옛날 송나라에 어느 농부가 밭에서 일을 하다 잠시 쉬고 있었다. 농부가 보는 앞에서 토끼가 지나가다가 그만 근처 나무 그루터기에 부딪혀 목이 부러져 죽었다. 뜻밖의 횡재를 한 농부는 죽은 토끼를 집어 들고 이렇게 생각했다.

 

“토끼가 이렇게 저절로 뛰어나와 나무에 부딪혀 죽는 줄 진작 알았다면 힘든 농사를 짓지 않았을 텐데.”

 

농부는 그 날부터 쟁기를 집어던지고 그루터기만 지켜보기 시작했다. 또 다른 토끼가 뛰어오다 죽으려니 하고, 허구한 날 나무 그루터기를 지키며 근처에서 기다린다. 그 결과 토끼는 한 마리도 얻지 못하고 일 년 농사만 망치고 말았다. 이런 식으로 토끼를 잡으려 하다니 어리석지 않은가?

 

농부의 모습은 자신이 아는 정보를 믿고 미래를 예측했다. 토끼가 나무 그루터기에 부딪힌 것을 목격했으니 다음번에도 똑같은 상황이 재현될 거라고 믿었다. 가만히 있으면 빅 데이터 속 진짜배기 정보를 절대로 찾을 수 없다. 내가 원하는 정보가 저절로 내 손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특히 과거의 직관적 판단으로 무수히 많은 양의 빅 데이터를 다루기가 쉽지 않다. 어제 나온 빅 데이터는 며칠만 지나면 더 이상 쓸모없는 과거 정보로 전락한다. 끊임없이 새로운 객관적 분석 기법과 예측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빅 데이터는 말 그대로 대용량 정보다. 데이터는 지금 이 순간에도 무수히 만들어지고 있다. 여기서 데이터는 채팅을 한다든가, 게시판에 글을 올리는 형태로만 생산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의 웹사이트 방문, 온라인 검색통계, 서버에 남겨지는 로그정보 등 각종 ‘흔적’ 역시 데이터가 된다. 과거엔 이렇게 생산되는 데이터들은 방치됐다. 쉽게 말해 의미 있는 ‘신호(signal)’가 아니라 단순히 ‘소음(noise)’에 불과했다. 소음을 제거하고, 자신이 듣고 싶은 신호를 찾을 때다. 그 신호를 통해 미래를 예측해야 한다.

 

최근 주목받는 미국의 통계학자 네이트 실버의 『신호와 소음』은 빅 데이터 과부하 시대에 읽어야 할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이 올바른 정보를 찾고, 미래를 예측하는 방법을 소개하는 일종 미래학 서적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이 책에 소개된 신호와 소음을 구별 못한 통계 오류 사례들은 단순히 통계학자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기보다는 미래 예측의 어려움을 강조하고 있다.

 

왜 통계학자들은 미래를 예측하지 못하는 오류를 범할까? 그 이유는 여러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자료에 접근하는 분석 기법이 적절치 못할 것일 수도 있지만 가장 치명적인 원인은 합리적 분석과 예측을 방해하는 지나친 자신감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익숙하고 유리한 정보만 귀 기울이고 알려고 한다. 그것을 맹신하게 되면 정작 중요한 신호를 외면해버리고 잘못된 예측을 하고 만다. 그리고 기존의 예측 기법을 고수하는 경향이 강하며 예측의 불확실성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네이트 실버는 신호와 소음을 구분하기 위한 분석 방법으로 ‘베이츠 정리’를 소개한다. 베이츠 정리는 사전 확률을 도출한 뒤 새 정보가 나오면 가장 가능성 있는 것을 골라 적용해 사후 확률을 개선해 나가는 방법이다. 즉 끊임없이 나오는 새로운 정보가 나오면 기존 예측을 잠시 제쳐두고 새로운 예측을 업데이트해야 한다. 통계학자는 정확한 예측을 도출하고 최소한의 오류를 피하기 위해서 시행착오를 거쳐야 한다.

 

빅 데이터 시대로 진입할수록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그 변화 속도가 빠르다. 이 변화의 시대에 생존하기 위해서는 변화 속도를 스스로 조절하거나 변화에 적응하는 길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변화에 어떻게 적응하느냐가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게 된다. 미래 사회를 이끌어 갈 전문가라면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이 문제에 대해 무관심할 수가 없다.

 

급속한 변화에 성공적으로 대응해 나가려면 미래에 대한 새로운 자세, 즉 미래가 현재에서 수행하는 역할에 대한 새롭고도 민감한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비록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는 완전무결한 능력을 가질 수 없지만 정보 소음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부단히 공부해야 한다. 내가 원하는 신호는 본인이 직접 찾아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신호는 저절로 당신의 손에 오지 않는다. ‘수주대토’의 농부처럼 자신의 직관만 믿었다간 엉뚱한 예측으로 인해 낭패 본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분석 기법에 능통한다고 해서 뛰어난 통계학자가 될 수 없다. 예측할 수 없는 것을 인정하는 '겸손함', 예측할 수 있는 것을 예측하는 '용기' 그리고 그 차이를 아는 '지혜'를 잊으면 안 된다. 지나친 자신감과 방심은 1%의 소음도 외면한다. 통계학자가 보지 못하는 1%의 소음이 세상을 변화하는데 결정적 영향을 주는 중요한 신호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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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석의 문장 한국어 글쓰기 강좌 1
고종석 지음 / 알마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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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가끔 노력도 우리를 배신할 때가 있다

 

“타고난 재능이라는 게 있을까?” 요즘 이런 질문을 하면 대다수는 “그렇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최근에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한 ‘1만 시간의 법칙’을 부정하는 연구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1만 시간’은 진정한 전문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매직 넘버이다. 대략 하루 세 시간, 일주일에 스무 시간씩 10년간 연습한 것과 같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다. 1만 시간의 법칙은 2009년에 말콤 글래드웰이 쓴 『아웃라이어』라는 책에서 소개되어 널리 알려졌다. 김연아 선수, 비틀스, 빌 게이츠 등 세계적인 유명 인사들의 진정한 성공 요인도 재능보다는 수많은 시간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스포츠 기자 데이비드 엡스타인이 ‘1만 시간의 법칙’을 뒤집는 내용을 주장했다. 선천적 재능에 손을 들어줬다. 리오넬 메시와 크리스티아노 호날두가 세기를 열광하게 만드는 축구 천재이자 라이벌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꾸준한 노력보다는 특출한 ‘스포츠 유전자’(Sports Gene)를 가졌기 때문이다. 1만 시간 훈련을 해도 제2의 메시, 호날두가 나오는 것이 쉽지 않다. 비단 스포츠뿐만 아니라 교육 분야에서도 노력과 실력의 상관관계를 부정하는 실험 결과가 나왔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스포츠, 예술 분야보다 공부 분야에서 재능이 더 중요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1만 시간, 아니 그 정도 시간을 공부하는데 투자를 하면 성적이 향상될 거라는 기대는 한낱 희망에 불과했던 것인가.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노력이 가끔 배신하는 슬픈 진리는 틀리지 않다. 십년 전에 EBS에서 밥 로스의 ‘그림을 그립시다’라는 방송 프로그램을 챙겨본 적이 있었다. 밥 아저씨라고 소개된 로스는 시종일관 인자한 눈빛과 미소, 그리고 단아한 말투, 가벼운 붓놀림만으로, 신기하게 30여분 넘는 짧은 시간에 눈이 휙 돌아갈 만한 멋들어진 풍경화를 그렸다. 그 때 밥 아저씨는 “간단하죠?”, “참 쉽죠?”를 연발하면서 그림 그리는 순서와 방법을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그런데 생각보다 쉽지 않다. 밥 아저씨처럼 따라하면 그와 같이 멋진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밥 아저씨의 손에 탄생된 멋진 그림보다는 붓과 나이프의 손놀림이 더 예술적이었다. TV로 보면 쉽게 보이는 테크닉 같지만, 이제 막 붓을 쥐기 시작한 초보자들에게는 그저 신기한 장면일 뿐이다. 나름 밥 아저씨가 나오는 TV 브라운관에 집중하면서 따라해보지만, 아름다운 그림은커녕 괴상한 낙서를 그릴 뿐이다. 뱁새가 황새 따라하다 가랑이 찢어지는 법이다. 이처럼 우리가 밥 아저씨의 덥수룩한 수염을 때릴 정도 수준에 이르는 가능성은 희박하다. 공 좀 잘 찬다고 해서 상대방을 제치고 공을 패스할 수 있는 뛰어난 발재간을 가진 '월드 클래스' 수준의 메시가 누구나 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성공을 위해서는 약간의 재능과 특별한 기회, 주변 환경, 사회적 체제 등도 필요요건이 될 수 있다. 세계적인 유명 인사들의 진정한 성공 요인이 재능보다는 수많은 시간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여기에 성공할 수 있는 가장 큰 요인 하나를 더한다면 연습을 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와 환경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Scene #2  글쓰기는 훈련만 하면 누구나 가능하다  

 

비록 스포츠, 공부에서 노력이 우리를 배신하더라도 좌절하지 마라. 노력해도 안 된다는 사실, 즉 자신의 실력 수준을 이해하고 있다면 다른 분야로 도전할 수 있지 않은가. 해도 해도 안 되는 것을 본인이 잘 알고 있으면서 고집 부린다면 거기에 투자한 시간이 아깝다. 그리고 우리가 시도할 수 있는 모든 분야가 노력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재능이 2% 부족하더라도 누구나 노력하면 충분히 성취 가능한 최고의 분야가 있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도전하고 노력하면 충분히 소기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분야를 글쓰기로 꼽고 싶다.

 

글을 잘 쓰고 싶다면 시간 날 때마다 글을 쓰면 된다. 글쓰기 능력도 타고난 재능으로 가진 문필가도 있지만, 글 쓴 사람들 중에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천재는 많지 않다. 4살 때 벌써 바이올린을 능숙하게 켜기 시작했다는 음악 천재 모차르트나 1부터 50까지 숫자를 단번에 계산할 정도로 어렸을 때 암산에 능숙한 수학 천재 가우스는 있어도 이제 막 글을 떼기 시작한 어린 시절에 문단을 놀라게 할 정도로 글 잘 쓴 문필 천재는 그렇게 많지 않다. 단, 예외가 있다면 고종석이 글쓰기 특강 중에 직접 언급한 프랑스 시인 아르튀르 랭보가 있다. 그는 10살 때부터 시를 쓴, 재능이 많은 문필가에 속한다.

 

그러나 고종석은 글쓰기에 훈련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충분한 연습으로 글쓰기 실력이 향상될 수 있다. 글을 쓰고, 또 여러 번 써서 언어를 다를 줄 아는 감각을 익혀나간다. 사실 글쓰기 연습을 강조하는 고종석의 말은 평범하면서도 전혀 새롭지가 않다. 글 좀 잘 쓴다는 명사들이나 글쓰기 테크닉을 알려주는 수많은 책에서도 글을 많이 쓸 것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중국 송나라 문인 구양수는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 즉 삼다(三多)를 강조했다. 삼다는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방법론이다. 많이 책을 읽고, 많이 글을 쓰고, 많이 생각하는 것. 글을 잘 쓰기 위한 기본 중의 기본이다. 아니, 가장 중요하다.

 

 

 

 Scene #3  배보다 배꼽이 커져버린 글쓰기 특강 

 

고종석의 글쓰기 특강은 여타 글쓰기 책처럼 글 쓰는 테크닉만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관련된 교양과 지식도 소개한다. 특히 아름다운 모국어 즉, 한국어로 글을 써야하는 이유를 언어학의 기초 지식(시니피앙, 시니피에, 랑그, 파롤)을 언급하면서까지 장황하게 설명한다. 그리고 우리가 글 쓰면서 흔히 잘못 쓰거나 혼동하기 쉬운 세밀한 문법을 지적한다. 접속부사를 빼면 문장에 힘이 생긴다. ‘적(的)’과 ‘의’는 뺄 수 있으면 빼는 게 좋다. 복수 표현 ‘들’을 사용하지 않는다.

 

결국 고종석의 글쓰기 특강은 자신이 권하는 ‘물고기 잡는 법’이 생겨난 이유와 그와 관련된 곁다리 지식까지 설명한다. 이렇다보니 그의 특강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방식이다. 가끔 특강과 전혀 상관없는 내용으로 옆길로 샌다. 알짜배기 테크닉을 원한 독자라면 지식이 버무린 글쓰기 특강이 자칫 지루하게 여길 수 있다. 작년 석 달 동안 숭실대학교에서 진행된 특강 내용을 채록했기 때문에 고종석의 목소리가 울리는 특강 장소에 온 듯한 생동감이 느껴지지만, 읽다보면 다듬어지지 않은 문장이 발견된다. (고종석이 가르쳐준 테크닉을 어느 정도 숙지한 독자라면, 책 내용 속에 어색한 문장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고종석의 글쓰기 특강은 배보다 배꼽이 큰 책이다. 특강 때 나온 내용을 전달하는데 책 한 권의 분량만으로도 부족했다. 결국 분권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금 1권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너무 많은 내용을 담으려는 출판사의 의도가 엿보인다. 아마도 이전에 나온 글쓰기 테크닉을 다룬 서적들과 차별성을 두기 위한 전략일 것이다.

 

 

 

 Scene #4  테크닉 습득보다 중요한 건 글을 고치려는 의지

 

그러나 테크닉을 눈으로 읽고, 안다고 해서 글쓰기 실력이 향상되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구양수의 삼다를 독자가 직접 실천해야 한다. 이 책을 글 잘 쓰는 방법을 상당히 지적이면서도 세련되게 알려주는 교양서적 정도로 읽었다면 그건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한 오독이다. 시간 낭비에 가까운 오독을 피하려면 실전에 뛰어들어야 한다. 실전이 가장 중요하다.

 

고종석은 2002년에 자신이 쓴 『자유의 무늬』에 나온 문장을 인용해서 첨삭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저자 본인이 자신이 쓴 문장에 대해 잘못 썼음을 시인하고 직접 고치는 것이다. ‘셀프 첨삭’ 사례는 다른 글쓰기 테크닉을 소개하는 책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방식이다.

 

첨삭은 말 그대로 문장 일부를 고쳐 쓰거나 새롭게 첨가하는 과정이다. 첨삭과 비슷한 의미로 흔하게 사용하는 것이 ‘퇴고’이다. 우리 사회는 글쓰기를 요구한다. 학부생 시절에 교수님은 리포트로 우리를 괴롭혔고, 졸업하면서도 대학생활의 ‘끝판왕’이라고 할 수 있는 논문을 써야 한다. 취업하기 위해서 자기소개서를 써야 하며, 직장 생활에 적응될 무렵에 업무에 관한 보고서의 압박감을 겪는다. 글을 많이 써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고통스러운 경험일 것이다. 그래서 리포트, 논문, 자기소개서 등 첨삭해주는 전문가가 등장하고 있다. 전문가가 알려준 첨삭을 통해서 고친다면 이전보다 더 읽기 좋은 글로 변신한다. 그런데 지나치게 첨삭 전문가에게 의존하는 글쓰기는 뛰어난 실력 향상으로 기대하기 어렵다.

 

내가 쓴 글을 상대방에게 읽히도록 함으로써 글을 고치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본인이 직접 읽고, 고칠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의 눈에는 완성된 글이 무척 잘 쓰고, 멋져 보일 터. 하지만 글쓰기 고수의 날카로운 눈은 작은 것이라도 지나가지 않는다. 그들은 어색한 문장을 골라낸다. 또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 예전에 쓴 글을 읽게 된다면 그때 보지 못했던 어색한 문장과 논리성이 결여된 내용을 발견하게 된다. 즉, 글을 고치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상태일수록 옥에 티를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퇴고 방식이다. 삼다 중의 다상량. 글쓴이는 퇴고하는데 많은 생각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퇴고는 말이야 쉽지, 의외로 실천하기 어려운 글쓰기 과정 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퇴고는 글쓴이 입장에선 부족한 글쓰기 실력을 스스로 인정하는 방식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상대방이 자신이 쓴 글을 지적하면 대다수 글쓴이는 불쾌한 감정을 드러낸다. 본인은 잘 쓴 글이라 생각했는데 상대방이 “이 문장이 어색하다, 고쳐라”라는 식으로 일일이 지적받는다면, 글 쓴 사람 입장에서 기가 한풀 꺾이는 일이다. 퇴고를 하기 위해서 여러 상대방에게 읽히도록 하는 것은 좋지만, 자신의 능력을 의심치 않는 자존심 센 사람에게는 불편하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혼자서라도 퇴고하는데 많은 시간을 들일 수밖에 없다. 귀찮더라도 글을 많이 쓰고, 많이 고치는 것도 중요하다. 몇 번 고치느냐 횟수가 중요하지 않다. 퇴고도 글쓰기 훈련의 일환이면 노력의 자세다. 퇴고를 외면하거나 포기한다는 것은 부족한 글쓰기 실력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아마추어나 다름없다.

 

 

 

 

글쓰기에 왕도는 없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글쓰기 훈련을 외면한다면

절대로 좋은 글이 나올 수 없다. 글쓰기도 후천적 노력으로 통해

재능을 향상시킬 수 있다.

 

과연 글쓰기 특강 2권에 어떤 내용이 있을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그렇지만 2권에 있을 테크닉을 기대하는 것보다 1권에 있는 테크닉을 실전하는 것이 우선이다. 일단 평소에 쓰고 싶은 글을 써보고, 또 고쳐 보라. 1만 시간이 아니어도 좋다. 거기에 들인 시간이 중요하지 않다. 글 한 편 쓰는데 소모된 시간이 많거나 퇴고를 수십 번 이상, 아니 수백 번 했다고 해서 글쓰기에 재능이 붙었다고 자만하면 금물이다. 제아무리 열심히 운동해서 복근에 스펙을 완성됐더라도 운동을 멈춘다면 다시 원래 똥배로 돌아간다. 과거에 명성을 날리던 운동선수도 체력 관리를 소홀히 하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쓸쓸히 은퇴를 하게 된다. 글쓰기도 일종의 운동과 비슷하다. 많이 쓰고, 많이 읽고, 많이 고치고, 많이 생각하기. 글쓰기는 손과 머리로 하는 지적 운동이다. 몸꽝이 운동 열심히 하면 몸짱이 되는 것처럼 글꽝도 열심히 쓰면 글짱이 된다. 당신의 노력이 간절한 꿈으로 이루어지는 날이 있을 것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글쓰기에 자신 없다고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말고, 직접 손에 펜을 들고 원고지에 부딪혀 봐야 한다. 그리고 못 쓰고 퇴고를 감수해야 한다. 그만큼 자존심을 버려야 한다. 글쓰기 분야에서만큼은 노력이 당신을 배신하는 일은 절대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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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4 0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7-24 2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4-07-24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요즘 조금씩 읽고 있는 책인데
나는 고종석의 책을 많이 안 읽어서일까? 아니면 그냥 좋아해서일까
아직은 좋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든다.
특히 그가 드는 여러 예들을 읽는 재미가 쏠쏠해.
근데 다 읽고나면 나도 별 세 개 줄 수 있으려나?ㅎ
셀프 첨삭 좋은 말이긴 한데 내 글 고쳐 쓴다는 게 또 보통 고역이 아냐.
귀찮기도 하고. 그런데 또 눈에 띄면 창피한 마음에 얼른 고쳐 쓰긴 하지.
그런데 이 '적'이나 '의'를 뺀다는 게 의외로 쉽지 않더라.
암튼 이 책을 읽고 있어설까? 요즘엔
문장 공부도 좀 해야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

넌 이 더운 날에도 좋은 책 많이 읽네.
부럽다. 건강 잘 챙겨.^^

cyrus 2014-07-24 22:48   좋아요 0 | URL
맞아요. 이런 더운 날에 컴퓨터 앞에서 글 쓰다 고치고 반복하는 일이 고역이죠 ㅋㅋㅋ 사실 서평 대회나 이벤트에 응모하는 글을 쓸 때 첨삭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예전에 모 일간지에 칼럼이 운 좋게 실린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퇴고를 엄청 많이 했어요. 글 한 편 완성시키고 그 다음날 읽어보면, 어색한 문장이 눈에 보이더라고요. ㅋㅋㅋ 누님도 건강 조심하세요. 날씨가 장난 아니네요. ^^
 

 

 

안녕하세요. 판미동 입니다 :)

 

우리 사회가 강요하는 '행복의 공식'을 뒤엎는 사색

17명의 대표 인문학자가 꾸려낸 새로운 삶의 프레임!

 

『인문학에 묻다. 행복은 어디에』서평단을 모집합니다.


 



 

▶ 도서 소개

 

헤르만 헤세의 시 「행복해진다는 것」에 이런 구절이 있다. 

“인생에 주어진 의무는 다른 아무것도 없다네 / 그저 행복이라는 한 가지 의무뿐.”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헤세에게는 인간의 구원과 행복만큼 중요한 문학적 화두가 없었다. 그가 보기에 우리의 존재의미는 아주 간명하다. 바로 ‘행복’이다. 

“행복은 어디에 있나. 어떻게 행복을 만드나.”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이 한 권에 모았다. 한 그루의 나무를 알아야 숲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만난 18인의 고수들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철학, 문학, 음악, 건축, 종교, 신화, 심리학, 의학, 과학 등의 분야에서 자기 나무 한 그루를 그들은 꿰뚫고 있었다. 이를 통해 자기 전공 분야를 넘어 더 큰 세상을 조망하고 있었다. 

 

이 책은 그들이 바라본 풍경을 이어 붙인 삶의 지도다. 18장의 지도를 모자이크해 놓은 일종의 길라잡이랄까. 지금 이 지도를 당신의 손에 건네려 한다. 어쩌면 당신은 이 안에서 스스로 행복을 만드는 법, 그 비밀스런 오솔길을 찾을지도 모른다. 그 길은 드러나 있을 수도, 감추어진 길일 수도 있다. 어떤 고수라도 방향만 가리킬 뿐 당신의 길을 알려주진 않는다. 목적지를 향하는 나침반은 온전히 당신에게서 꺼내야 한다. 그것이 또한 길을 찾는 묘미가 되지 않겠는가.

 

앞서 간 이의 발자국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도 괜찮다. 처음 가보는 길을 새로 내는 것도 좋다. 어차피 그 길은 세상 어느 누구의 길과도 같지 않다. 그럼 이제 걸음을 떼 보자. 

헤세의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서.



 

▶ 『인문학에 묻다. 행복은 어디에』서평단 모집 상세내용

 

하나, 해당 페이지를 자신의 블로그에 스크랩 한 뒤 읽고 싶은 이유를

간단하고 성실하게 댓글로 작성하여 스크랩 링크와 함께 남겨주면 응모가 완료됩니다.

 

둘, 응모 기간은 2014년 07월 23일(수)~2014년 07월 30일(수) 7일간 입니다.

셋, 총 추첨 인원은 10명입니다.

 

넷, 당첨자 발표일은 2014년 07월 31일 (목) 오후 입니다.

다섯, 서평기간은 2014.08.04(목)~08.13(일) 10일간입니다. 

        

마지막, 당첨자 분들은 서평을 작성 한 후 『인문학에 묻다. 행복은 어디에』 서평단 발표 페이지에 온라인 서점 블로그와 개인 블로그에 남기신 서평 링크를 댓글로 달아주시면 됩니다.

 

 

- 서평단 지원자가 모집 인원에 미달할 시,

출판사의 의도에 따라 일부 인원만 선정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해당 기간 안에 작성하지 않을 시에 다음 서평 모집 시 불이익이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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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먹고 마시고 섹스하는 거인들 이야기

 

 

 

 

 

 

 

 

 

 

 

 

 

 

 

 

프랑수아 라블레의 소설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은 먹고 마시고 섹스하고 화장실 가는 것 외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 거인의 이야기다. 주인공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은 자신이 얼마나 많이 먹을 수 있는지 자랑하고, 배변 후 뒤를 닦는 수십 가지 과정을 설명하기도 한다. 팡타그뤼엘에게 젖을 먹이기 위해 암소 1만7913마리가 징발됐다. 거인 가르강튀아와 그의 아들 팡타그뤼엘의 모험 이야기는 원래 프랑스의 민담에서 유래한다. 두 거인은 낯선 나라들을 여행하면서 가는 곳 마다 비축된 식량들을 모조리 먹어치우면서 환상적인 모험을 펼친다.

 

라블레의 작품은 지금도 고전도서 목록에 포함될 정도로 서양문학사에 절대로 빠지지 않는다. 라블레에 생소한 독자는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을 한 권의 책을 일컫는 제목이라고 오해하기 쉽다. 사실은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두 작품을 한 권으로 묶은 것이다. 통상적으로 라블레를 언급할 때 이 두 작품을 한 권의 제목처럼 부른다. 『팡타그뤼엘』 이 1532년에 발표되었고, 1534년(혹은 1535년이라는 설도 있음)에 속편격으로 『가르강튀아』가 나왔다. 라블레가 『가르강튀아』『팡타그뤼엘』을 집필했을 당시에 작가 미상의 대중소설 『가르강튀아 연대기』가 큰 인기를 끌었다. 프랑스 각지에 떠돌면서 유행하던 일종의 구전소설을 라블레는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로 새롭게 재구성했다. 거인족 이야기 덕분에 라블레는 무명 의사에서 일약 인기 작가로 급부상했다. 

 

국내에 유일한 완역본은 대산세계문학총서 35번으로 나온 ‘문학과 지성사’ 판이다. 사실 이 책이 번역되기 전까지만 해도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은 서양문학사 한 페이지에 적힌 작품명에 불과했다. 유럽에서는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소개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1970년대 을유문화사에서 세계문학전집에 출간된 적이 있었으나 절판되었고, 2004년에 문학과 지성사 세계문학전집 작품으로 나오기 전까지 재번역이 되지 않았다.

 

 

 

 Scene #2  신에서 인간으로    

 

사실 라블레의 작품을 편안한 마음(?)으로 읽기가 쉽지 않다. 역사적 배경 없이 읽으면 작품의 매력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서울대학교가 선정한 필독고전이라고 해서 무턱대고 읽었다간 낭패를 볼 수 있다. 라블레를 읽기 위해서는 먼저 프랑스 르네상스 문학과 작가의 생애를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여기서 ‘르네상스’라 하면 우리는 가장 먼저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떠오른다. 일반적으로 르네상스는 인간이 가진 능력을 잘 발휘할 수 있는 시기였다. 그래서 신이 아닌 인간이 문화의 중심이 될 수 있었다. 가톨릭 세력이 지배하던 중세에는 감히 표현할 수 없었던 인간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다시 살아난 인간 중심의 르네상스 문화는 진원지인 이탈리아에서 시작해서 독일, 프랑스, 북유럽 등지에서도 전파되었다.

 

그러나 르네상스라고 해서 다 똑같은 건 아니다. 지역마다 유행하는 르네상스에도 추구하는 정신이나 표현 양식에서도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현실에 대한 자각이 고대의 재인식에서 시작하였다면, 북유럽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처럼 고대 문화에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자기 주변의 생활에 대한 관찰로 출발한다. 르네상스가 가톨릭 중심의 중세를 한 단계 뛰어넘은 시기였고, 경제 성장에 힘입어 성장한 메디치 가 덕분에 예술가들이 든든한 후원을 받을 수 있었지만 여전히 교황의 힘은 막강했다. 이때까지도 종교화는 르네상스 화가들이 즐겨 그렸으며 화가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는 교회의 후원도 무시할 수 없었다. 반면 북유럽은 구교로 대표되는 가톨릭과 신교인 칼뱅파 사이에서 종교적 갈등으로 심화되고 있었고, 거기에 독일의 마르틴 루터도 가톨릭을 정면으로 비난하고 나서기 시작했다. 칼뱅과 루터로 대표되는 신교는 인간에 대한 새로운 확신 속에 교황의 권위와 성직의 위계를 무너뜨리는 새로운 신앙을 추구했다.

 

이러한 종교 갈등은 종교 개혁으로 이어지게 된다. 종교 개혁은 유럽에 피바람이 불 정도로 격렬했고 유럽 지도를 달라지게 만들 정도로 르네상스 다음으로 이어진 큰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리고 예술가들의 마음 또한 달라지게 할 정도로 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제는 신을 바라보고 추앙했던 종교화가 아닌 새롭게 자신의 세력을 넓혀나가는 신흥 상인 또는 민중의 취향을 반영한 예술로 변화를 맞는다.

 

라블레가 활동했던 프랑스도 새로운 문화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그 당시 프랑스는 프랑수아 1세가 신교도를 탄압하고 있었다. 이런 혼란한 시기 속에 엄격하고 보수적인 교도의 수도사였던 라블레는 위마니슴(humanisme, 인간중심주의)에 심취하고 있었다.

 

중세적 금욕과 규율에 맞추는 삶에 진저리를 치고 있던 민중들은 신이 나오는 성스러운 이야기보다 인간의 정신을 지향하는 이야기를 선호했다. 그래서 『가르강튀아 연대기』와 같은 대중소설이 유행했고, 현란한 탐닉과 방종, 그리고 이단에 가까운 그로테스크한 문화에 열광했다. 라블레의 『가르강튀아, 팡타그뤼엘』은 그런 민중의 취향을 정확히 반영한 소설이다.

 

 

 

 Scene #3  팡타그뤼엘리슴으로 충만한 책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거인들은 먹고, 마시고, 섹스하는 데 열중하는 쾌락주의자에 가깝다. 금욕을 강조하는 가톨릭 사상에 위배되는 행동이다. 그뿐만 아니다. 도덕적이면서도 종교적 교화가 있어야 할 내용에 음담패설이 가득하다. 거인들은 일상적 현실이 전혀 불가능해 보이는 환상 속에 놓여 있고 거칠고 천한 우스개 농담을 인문정신에 입각한 교양을 드러내는 행동처럼 생각한다. 이런 소설을 민중들이 킥킥 웃으면서 읽고 있으니 가톨릭 입장에서는 당황스럽고 분노가 치밀 수밖에 없다. 일단 소설 내용이 가톨릭 사상에 맞지 않고, 외설스럽다. 게다가 가톨릭을 해학적으로 비판하고 풍자한다. 그것도 수도원 출신이라는 사람이 상당히 이단적인 내용의 글을 썼다. 신교와의 갈등이 커져만 가는 상황 속에 민중들이 이런 소설을 즐겨 읽는다면 구교 가톨릭 입장에서는 절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는 형국이었다. 결국, 라블레의 작품은 금서로 지정되었다.

 

훗날 라블레는 교황으로부터 사면을 받았지만 위대한 작품은 여전히 금서의 감옥에 갇혀야 했다. 그래도 그는 운이 좋은 편이다. 이단죄에 몰려 종교 재판을 받은 적이 없다. 출판업자이자 위마니스트였던 라블레의 친구가 이단죄로 화형당할 정도였으니 교회로부터 미움을 받았을 법한데 용케 살아남았다. 그리고 재취업도 성공했다. 사면 이후에 수도원에 복귀해 의사로 다시 일하게 되었다.

 

라블레는 먹고 즐기고, 음란한 거인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중세적 질서와 사고에 정면으로 도전하고자 하였다. 라블레의 ‘그로테스크한 리얼리즘’은 중세적 지배에 대한 휴머니즘적 반역을 주도하는 것이었다. 『가르강튀아』의 시작을 알리는 첫 페이지에 보면 이 작품을 ‘팡타그뤼엘리슴으로 충만한 책’이라고 가리키고 있다. ‘팡타그뤼엘리슴’이란 작중 인물 팡타그뤼엘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말 그대로 팡타그뤼엘의 성격과 가치관을 반영한 사상으로 라블레가 직접 만든 조어다. 좀 더 쉽게 말하면 ‘팡타그뤼엘리슴’은 좋은 음식을 잘 먹고, 육체적 만족을 추구하는 건강한 삶이다. 일반 사람보다 아주 더 많은 양의 음식과 술을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거인들의 모습을 보면 지나친 폭식과 탐식에 가깝지만, 그래도 이들의 행동은 종교적 규율에 구애받지 않을 정도로 자유롭다. 그동안 너무 틀에만 박힌 엄격한 종교에 갇혀있던 민중들은 이런 거인들의 삶을 갈망했을 것이다. 그러한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정신적 탈출구로 라블레의 소설을 읽기 시작한 것이다. 

 

 

 

 Scene #4  라블레와 브뢰헬  

 

 

 

 

 

 

 

 

 

 

종교를 풍자하고, 해학이 넘치는 라블레의 작품은 피터르 브뢰헬의 그림과 비교하면 상당한 유사점이 발견된다. 라블레와 브뢰헐. 이 두 사람은 공통적으로 종교 갈등이 극심했던 시기에 태어났고, 각자 작가와 화가로 활동했다. 브뢰헬도 신교를 옹호했는데 엄격한 분위기의 기독교 종교화 대신 민중의 삶을 담은 해학적인 그림을 그렸다. 라블레는 소설에서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전해 내려오는 속담이나 그리스 비극 작가의 작품 속에 나오는 문장들을 인용한다. 그리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비틀어 표현함으로써 기독교를 우스꽝스럽게 비판한다. 작품 속 인물들은 말 한 마디를 속담으로 인용해서 표현하는데 당시 유행하던 인문주의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동시에 현실과 동떨어진 채 학문에 집착하는 현학적인 당대 지식인들을 풍자하고 있다.

 

 

 

 

 

피터르 브뢰헬  「플랑드르 속담」  1559년

 

 

라블레가 속담을 세상을 풍자하는 언어적 도구였다면, 브뢰헬은 회화적 도구였다. 브뢰헬도 속담을 인용한 그림을 그렸는데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플랑드르 속담」이다. 인간의 어리석음과 기만을 꼬집는 총 85가지 이상의 속담들이 하나의 시골마을에서 벌어지는 일상 풍경처럼 표현했다.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속담을 표현하는 군상의 모습이 정상적인 행동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우스꽝스럽다.

 

라블레의 소설과 브뢰헬의 그림에 관한 또 다른 공통점은 바로 ‘놀이’다. 『가르강튀아』 제22장은 가르강튀아가 즐겨하는 놀이가 목록 형태로 열거되는 내용이다. 가르강튀아에게 ‘놀이’는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유희적 행위이다. 책에서 언급되는 놀이 종류만 해도 무려 217개나 된다. 페이지만 해도 10장에 이른다. 지금도 일부 놀이는 어떤 형식으로 진행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온 민속놀이로 알려져 있다. 놀이 종류 목록의 일부를 소개해본다.

 

 

 

 

 

피터르 브뢰헬  「아이들의 놀이」  1560년

 

 

네 장 플러시, 다른 무늬 카드 모으기, 패 따오기, 뺏어먹기, 패 버리기, 1백 점 내기, 피아노, 불쌍한 년 만들기, 불평분자, 용병 도박, 오쟁이를 진 서방, 몰아주기, 타로, 고문하기, 팽이 돌리기, 주사위 놀이, 체스, 목말 타기, 제비뽑기, 패가망신, 구슬치기, 공놀이, 올빼미 소리 내기, 술래잡기, 바보에게 똥가루 던지기, 불에서 쇠 꺼내기, 귀 꼬집기, 잔디 볼링, 똥 던지기, 수도사 놀이, 다시 벌리고 거꾸로 서기, 아홉 개의 손 놀이, 여왕 놀이. (110~119쪽)

 

 

 

브뢰헬은 「아이들의 놀이」라는 그림에서 80여 가지의 놀이 종류를 그렸다. 「아이들의 놀이」에 나오는 아이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영혼이 없는 듯한 모습이다. 놀이를 즐기는 기쁜 표정이라기보다는 놀이 행위에 익숙해져 전혀 기쁘지 않는, 한편으로 지루하게 여기는 것 같다. 브뢰헬의 그림은 지금도 다양한 해석이 나오는데 놀이 행위로도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묘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 라블레가 가르강튀아의 놀이 목록을 작성한 이유가 지나치게 놀이에 열중하는 자세를 경계하는 교훈적 의미를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문학적 장치일 수도 있다. 즐겁게 노는 것도 좋지만, 학문 수양을 외면한 채 노는데 정신에 빠지는 태도는 ‘건강한 쾌락’을 위한 삶이라고 볼 수 없다. 그것은 ‘중독’에 가깝다.

 

라블레의 작품은 과도한 속담 인용, 과장된 묘사 그리고 프랑스어를 모르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말장난이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국내 독자들이 읽어나가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작품 중간에 나오는 암호 같은 시와 난해한 문장 등과 같이 여전히 의미가 불분명한 내용이 수두룩하다. 그리고 국내 독자들을 더욱 불편하게 만드는 단어도 등장하는데 그것이 바로 ‘똥’이다. 거인들은 잘 먹고 잘 마시는 인물이라 배변도 좋은 편이다. 그래서 대화 도중에 똥과 관련된 표현도 능청스럽게 해댄다. 다음 인용한 문장은 똥 누는 사람을 주제로 가르강튀아가 만든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똥 누는 자,
설사하는 자,
방귀 뀌는 자,
똥 묻은 자,
빠져나온
똥덩어리를
우리에게
뒤덮는다.
더럽고,
냄새나고,
뚝뚝 떨어지는,
만일 너의
벌어진
모든 구멍을
떠나기 전에 닦지 않으면
성 앙투안의 불길이 너를 태워버리리라!

 

 

(79~80쪽)

 

 

라블레는 작품 속에 비판하고 싶은 대상을 ‘똥’과 연관시키는 문장으로 비꼬아 표현한다. 『팡타그뤼엘』 서문에 ‘똥싸개 비서관’(270쪽)이라는 재미있는 표현이 나오는데 교황 밑에 일하는 비서관을 가리킨다. 그들은 무척 방탕한 생활로 악명 놓았다고 한다. ‘똥싸개 비서관’은 불어로 ‘crotenotair’인데 ‘똥’(crotte)과 ‘와작와작 씹어먹다’(croquer)를 결합시킨 말장난이다. 이처럼 라블레는 똥을 누는 행위를 인물의 무능한 성격을 희화화하는데 사용했다. 이런 상스러운 표현은 허세 넘치고 지위 높으신 가톨릭 교인들의 혈압 올리는데 성공했고, 그들로부터 억압받던 신교도나 민중들은 무척 통쾌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우리가 사회지배층에게 “엿 먹어라!”하고 욕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도 엿은 달콤해서 먹을 수 있지, 똥은...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겠다. 

 

 

 

 

 

 

 

 

 

 

 

 

 

 

 

 

거인들이 ‘똥’을 부끄럼 없이 언급하는 장면에 대해서 분변증에 속하는 증세로 해석될 수도 있겠다. 분변증은 똥과 배설에 집착하는 정신병이다. 그러나 라블레가 분변증에 속하는 증세가 있을 것이라고 추측, 해석하는 것은 금물이다. 진중권의 표현을 빌리자면 라블레 작품 속에 언급되는 ‘똥’에 관한 표현은 ‘병리적 현상’이 아니라 ‘문학적 현상’에 가깝다고 본다. 엄격하고 부정부패가 심한 가톨릭이 지배했던 사회에 대한 분노와 피로감을 배설하는 카타르시스를 상징할 수도 있다.

 

 

 

 

 

피터르 브뢰헬  「교수대 위의 까치」  1568년

 

 

브뢰헬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교수대 위의 까치」 는 흉흉한 세상 속에서도 저항 정신을 잃지 않는 민중의 건강한 의지가 드러나고 있다. 교수대는 신교도나 지배 세력에 저항하는 민중을 처형하는데 사용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교수대 앞에 있는 마을 사람들은 서로 손 잡고 춤추는데 정신이 없다. 죽음 따위야 두렵지 않다는 의연한 자세를 의미한다. 그들에게 춤은 자신들을 억압하는 세력에 대한 두려움마저도 잊게 만든다.

 

 

 

 

 

춤추는 군중을 기준으로 왼쪽 구석에 살펴보면 음습한 그늘에 한 남자가 웅크린 채 앉아 있다. 남자의 자세만 보더라도 우리는 그가 똥을 누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똥을 누는 남자도 교수대가 두렵지 않다. 오히려 지배세력의 강압적인 태도(교수대)를 우습게 여기고, 우스꽝스러운 방식으로 저항한다. 그것은 바로 교수대 앞에 당당하게 똥을 눈다. “에라이, 똥이나 먹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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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바꾼 만남 -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1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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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 멘토(Mentor)라는 말이 한창 유행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도 기업에서는 선후배끼리 멘토와 멘티(Mentee)를 맺고 지식을 전수하고 상담까지 하는 것으로 경쟁력을 높이고 있다.

 

원래 멘토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주인공의 이름이다. 트로이 전쟁으로 유명한 오디세우스가 출전에 앞서 절친한 친구인 멘토에게 아들 텔레마코스의 양육을 부탁하고 떠났다. 멘토의 훌륭한 교육 덕분에 텔레마코스는 걸출한 인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후 멘토는 선생을 넘어 조언자이자 친구이고 때론 아버지의 역할까지 하는 사람을 일컫게 됐다.

 

그러나 오늘날에 멘토는 조언자 혹은 상담자라는 의미로 축소되는 경향이 짙다. 직장 선배로서 상사의 지시에 마지못해 맞은 멘토가 아버지나 속을 터놓고 이야기하는 친구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 멘토라는 단어가 스승과 혼용되는 것도 마뜩찮다.

 

하지만 스승은 다르다. 멘토가 머리에서 머리로 이어지는 경험과 지식의 전수라면 스승은 가슴을 열고 영혼을 잇는 무게가 실린다. 다산 정약용은 20년의 유배생활 중 많은 젊은이와 사제의 인연을 맺었는데, 특히 황상이라는 애제자가 있었다.

 

나이 70이 넘어서도 황상은 책을 놓지 않았다. 책을 읽고 베껴 쓰는 것이 주된 일과였다. 신분이 미천했던 까닭에 그의 이런 모습은 주위의 비웃음을 샀다. “책만 읽고 있으면 떡이 나오나, 밥이 나오나?”며 그에게 따가운 눈총을 보냈다. 그러나 이에 개의치 않았다. 일찍이 스승이 내려준 고귀한 선물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다산이 황상에게 처음 문사(文史)를 닦도록 권했을 때 황상은 머뭇머뭇 부끄러운 표정을 짓더니, “저는 세 가지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첫째로 둔하고, 둘째 막혀있고, 셋째 미욱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다산은 “공부하는 자는 세 가지 큰 병통이 있는데 너에게는 해당하는 것이 하나도 없구나. 첫째 외우기를 빨리하면 소홀히 하는 폐단이 있고, 둘째 글짓기를 빨리하는 사람은 부실하게 되는 폐단이 있으며, 셋째 이해가 빠른 사람은 대충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황상은 스승의 말씀을 삼근계(三勤戒)로 마음에 새겨 평생 간직했다고 한다. 스승은 그러면서 부족한 것들은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면’ 풀린다고 했다. 스승이 내린 이 삼근계(三勤戒)는 제자의 인생을 바꿔놓는 선물 꾸러미였다.

 

다산은 이제 막 공부를 시작한 시골의 어린 청년에게, 남에게 뒤처지는 재주를 근면과 열성과 끈기로 극복하는 것이 참된 공부법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 말이 황상에게 얼마나 큰 감동과 자극으로 다가왔겠는가.

 

황상은 다산을 스승으로 유배 생활 내내 극진히 모신다. 매사에 자신이 부족하고 소극적이었던 소년을 다산은 달래기도 하고 꾸지람도 하면서 잘 보살펴 준다. 황상도 스승의 참모습을 깊이 이해하고 그의 가르침을 철두철미하게 지켜나간다. 이렇게 하면서 18년이 흘러 제자 황상은 30세에 이르고, 다산은 56세의 중년이 된다. 18년 만의 유배에서 풀린 스승은 전남 강진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와 고단한 몸과 마음을 쉰다. 황상은 다산이 좋아하는 차를 정성껏 준비해 매년 다산이 사는 고향으로 보내곤 한다.

 

황상은 스승을 마냥 그리워하다가 마침내 스승을 뵙고자 찾아 나선다. 스승이 돌아가시기 전에 꼭 한 번 뵈어야 한다는 조바심이 열흘을 걷는 긴 여행에 오르게 한 것이었다. 18년 만의 스승과 제자의 꿈같은 해후를 만끽하고 황상은 다시 강진으로 떠난다. 그러나 귀향 도중에 스승의 부음을 듣고, 직접 상을 치른 후 강진으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10년 지난 후 58세가 된 황상은 스승이 그리워 열흘길을 걸어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와 스승의 무덤 앞에 술잔을 올린다.

 

스승의 말씀을 들은 황상은 60년 세월이 지나도록 그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노력하는 삶을 살아왔다고 회고한다. 자상하게 이끌어주는 스승의 말씀이 삶을 바꾸어준 것이다. ‘삼근계’는 스승과 제자를 이어주는 확고한 신뢰의 끈이 되었다. 믿음이란 그토록 단단하고 강인한 것이다.

 

교육이 불신 받고 학교가 위기인 오늘, 과연 선생님들은 자신의 말 한마디가 아이들의 삶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을까? 세상이 변하다 보니, 스승과 제자의 관계 또한 예전과 같기는 어렵다고 한다. 하지만 요즘처럼 지나치게 도구화되고 형식화된 만남만 지속하면 인격적 감화와 도덕적 감응을 주고받는 본질로서의 교육은 실종될 수밖에 없다.

 

“세상에 그저 이루어지는 관계는 없다. 가는 정 오는 정이 켜켜이 쌓여 관계를 만들어간다. 진심과 성의라야지, 다른 꿍꿍이가 들어앉으면 중간에 틀어지고 만다.” (17쪽)

 

도타운 정과 깊은 관심을 가진 스승만이 훌륭한 제자를 키워 낼 수 있다. 더 많은 사랑을 베풀고 학문의 지혜를 주는 스승일수록 제자들의 감동이 크기 때문이다.

 

아무렇게나 가르쳐도 되고, 고생될 것이 없는 쉬운 일이 교육이었다면 아무도 선생님을 존경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가 조금 서툴면 깨칠 때까지 기다려 주고, 빗나가면 바로잡아 주고, 중도에 포기하지 않도록 마음을 다독여주면서 잘하라 채찍질해 주는 사람이 진정한 스승이다. 비가 내려야 초목이 쑥쑥 자라듯, 제자가 잘되도록 제때에 바로 잡아주는 스승이 많아야 한다.

 

인생의 암흑기에 스승이 없다면 삶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치닫고 말 것이다. 그렇기에 스승의 존재는 어둠 속에서 만나는 불빛과도 같다. 어느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부지런한 게 좋은 거라는 건 세상이 다 아는 시대가 되었다. 사람이든 정보든 내게 부지런하라고 말할 스승은 곳곳에 넘친다. 다만 내게 황상 같은 우직함이 없다는 게 문제이다. 둔하고, 막히고, 어근버근한 그 우직함을 황상에게서 빌려오고 싶다. 스승 사랑 담뿍 받고 그 사랑 실천한 황상의 어진 마음을 본받고 싶다. 스승과 제자 간의 멋스러운 관계를, 그들이 속내에 품었던 따뜻한 생각과 마음을, 그들이 연출해 냈던 삶의 진정성을 따라하고 싶다. 이런 스승과 제자가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하고 자랑스러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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