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뉴스를 접한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경북대학교에 재직 중인 교수가 대학원생에게 성추행을 저지른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 [“경북대 성추행 사실 알리자 ‘자율징계’, 2차 가해 저질러”]

오마이뉴스, 2018년 4월 19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47&aid=0002186483

 

 

* [경북대서 ‘미투’...“K교수 10년 전 제자 성추행, 재조사 · 징계”]

평화뉴스, 2018년 4월 19일

http://www.pn.or.kr/news/articleView.html?idxno=16196

 

 

 

※ 이 두 개의 기사는 어제 경북대 기자회견에 대한 내용이 상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제가 직접 찾은 건 아니고요, 레드스타킹 멤버들이 알려줬습니다.

 

 

 

이 사건은 10년 전에 발생했고, 피해 대학원생은 ‘미투 운동(#Me_Too)’에 힘입어 성추행 사실을 폭로했습니다. 놀랍게도 성추행 가해자 교수는 성폭력상담소 소장으로 활동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학교 측은 가해자를 처벌하기는커녕 오히려 피해자를 회유하려고 했습니다.

 

대구경북여성단체연합은 어제 경북대에서 기자회견을 열었고, 학교 측에 가해자 징계와 재발 방지 대책 마련을 요구했습니다. 이날 기자회견에 레드스타킹 멤버들도 동참했습니다.

 

‘경북대 미투’ 관련 기사들을 보면 아시겠지만, 학교 내 성추행 사건을 미온적으로 대처한 경북대 측의 태도는 잘못됐습니다. 학교는 어떻게든 성추행 사건을 은폐하려고 했으며 이 과정에서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했습니다. 어제 대구경북여성단체연합과 면담을 한 교학부총장은 사건의 심각성을 못 느끼고 있었습니다.

 

 

“기본 남녀 간 문제로 무조건 매도해선 안 된다.”

(경북대 교학부총장의 발언)

 

 

경북대 성추행 사건은 ‘권력형 성폭력’입니다. 권력형 성폭력은 힘 혹은 지위를 악용하여 약자에 가하는 학대 행위이며 엄연한 범죄 행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사건을 ‘남녀 간 애정 문제’로 볼 수 있을까요?

 

 

 

 

 

 

 

 

 

 

 

 

 

 

 

* 수잔 브라운밀러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오월의봄, 2018)

* 조디 래피얼 《강간은 강간이다》 (글항아리, 2016)

 

 

 

교학부총장의 발언은 성범죄 가해자가 자신이 불리할 때 쓰는 화법과 비슷합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는 성폭행 의혹에 휩싸였을 때 “남녀 간의 애정 행위였다”고 말 같지 않은 해명을 했습니다. 강간과 협박에 가까운 성폭행이나 성추행을 ‘사랑’으로 포장하는 화법은 공정하게 수사해야 할 경찰마저도 믿게 만듭니다.

 

기자회견에 참석한 레드스타킹 멤버들의 말에 따르면 가해자 교수가 대구경북여성단체연합에 명예훼손죄로 고발한다고 합니다. 성폭력 가해자가 피해자 측을 명예훼손 혐의로 ‘역고소’하는 일은 자신의 혐의를 부정하는 것은 물론 피해자 측의 사건 공론화 노력을 무력화시키는 수법입니다. 가해자 교수는 자신을 ‘성범죄 가해자’가 아닌 ‘명예훼손의 피해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건 ‘정당방위’가 아니라 ‘적반하장’입니다. 가해자는 역고소하면 피해자가 움츠러들 줄 아나 봅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이 만천하에 공개된 이상 가해자를 비난하는 여론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경북대 미투’를 계기로 대구뿐만 아니라 전국 대학교에도 ‘미투 운동’이 확산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레드스타킹 공식 인스타그램에 공개된 글 일부를 인용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경북대는 용기 있는 피해자의 목소리에 ‘위드유’로 응답하라!

시간이 지나면 잠잠해지거나 곧 끝날 거라는 기대는 버려라!

우리는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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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0 16: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4-21 10:44   좋아요 0 | URL
성범죄가 ‘가난하고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사람’이 일으키는 범죄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러한 착각이 성범죄의 심각성을 둔감하게 만들어요.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고 지지하는 연예인, 정치인, 전문가 등이 성범죄를 저지르면 사람들은 그들을 비난하기는커녕 연민과 동정을 느껴요.

페크pek0501 2018-04-22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투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1인입니다. 그들이 어렵게 낸 용기에 대해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후속 처치가 잘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cyrus 2018-04-22 11:40   좋아요 0 | URL
미투 운동 이후 조치를 다룬 기사들이 많았으면 좋겠어요. 솔직히 미투 운동을 보도하는 일부 언론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기자들이 선호하는 기사거리는 대중의 반응이 높은 특정 현상이에요. 미투 운동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니까 기자들이 ‘미투 운동’을 보도하기 시작했어요. 미투 운동 분위기가 가라앉으면 기자들은 기사거리를 찾기 위해 다른 관심사에 눈을 돌릴 것입니다.
 
신이 된 인간들 - 한국의 산신 그 신화와 역사를 담다 문화와 역사를 담다 5
박정원 지음 / 민속원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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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인간에게 길흉화복을 내린다고 믿어지는 초자연적인 존재이다. 조상들은 산에 신이 살고 있다고 믿어 산신제를 올렸다. 산신은 산 혹은 그 산의 영역에 속한 모든 자연물을 관장하는 신령이다. 서양인에게 산은 신을 만나는 다리 역할을 했다. 그리스인들은 높다란 언덕에 신전을 지었고, 기독교인들은 높은 산에 올라 하느님을 만났다. 그와 달리 동양인에게는 산 자체가 숭배 대상이었다. 특히 우리 민족에게 산은 아름다움의 대상만이 아닌 살아 숨 쉬는 신성한 존재였다. 조상들은 위대한 장수나 임금은 죽어 산신이 되어 마을을 지키고 나라를 지킨다고 믿었다. 지금도 사찰에 가면 산신을 모시는 장소가 있다. 그 앞에서 저마다 소망을 담아 간절한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이 있다. 단군 역시 산신이 되었다는 기록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산신은 인격신이 아닌 민중의 정신적 지주였다.

 

그러나 산신은 토속신과의 혼용, 융합과정 등 여러 세월을 거치는 동안 미신의 산물로 퇴색된다. 급격하게 불어 닥친 도시화 물결 속에서 산신과 관련된 상징물들은 미신을 타파한다는 이유로 쓸쓸히 방치되거나 폐기됐다. 이제 남은 것이라곤 별로 없다. 예전에 있었던 산신 문화를 전해줄 수 있는 고령의 마을 사람들마저 사라지고 나면 기나긴 역사와 조상의 얼이 담긴 산신 문화의 명맥이 잊힐 것이다.

 

「월간 산」의 박정원 기자가 펴낸 《신이 된 인간들》(민속원, 2018)은 이처럼 사라져 가는 산신 문화의 흔적을 찾아내는 한편 조상들의 마음속에 담겼던 기원을 엿볼 수 있는 책이다. 저자는 신화 자체는 물론 전설과 민담에서 화석으로 남은 산신의 조각을 모아 잃어버린 산신 문화의 원형을 추적한다. 문헌상으로 산신의 시원은 단군 신화에서 찾을 수 있다. 단군은 우리나라 초대 산신이다. 조상들은 자연에 대해 외경심을 갖고 있었다. 특히 자기가 사는 마을 근처의 산과 강, 언덕에는 마을을 지켜주는 자연신이 있다고 믿었다. 애초에 자연신은 여성 산신이었으나 농경 중심 정착 사회와 유교 문화가 결합한 이후로 남성 산신이 숭배의 대상이 됐다.

 

민중으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은 죽어서도 산신으로 추앙받았다. 전설에 따르면 단종의 영혼이 백마를 타고 태백산으로 와서 산신이 되었다고 한다. 단종은 문종의 뒤를 이어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즉위했다. 그러나 3년 뒤 숙부인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청령포로 유배되어 비운의 죽음을 맞이했다. 영월에 유배됐던 단종에게 자주 머루와 달래를 진상했던 신하 추익한은 단종이 죽던 날 곤룡포를 입고 태백산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이 지역 사람들은 단종을 태백 산신으로 모시고 해마다 음력 9월에 제를 올리게 됐다.

 

우리나라 신의 종류는 한둘이 아니다. 산신과 용신, 천신에 속하는 옥황상제와 관우, 최영 같은 장군신 등이 있다. 특히 최영은 우리나라 최고의 장군신이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에게 밀려 비극적 최후를 맞은 최영은 무속에서는 중요한 신격으로 추앙된다. 최영은 역사 속에 자신의 자취를 분명히 남긴 현실의 인물이다. 그런데 그는 무당들의 수호신이 되어 신격화되었을까. 최영의 억울한 죽음에 답이 있다. 무속 신앙은 억울하게 죽은 영혼은 저승에 안착하지 못하고 떠돈다고 생각한다. 그중에서 억울하게 죽은 왕(앞서 소개한 단종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장군 등은 신격으로 추대된다. 최영은 사후 100년도 안 되어 장군신으로 숭상된 특별한 인물이다. 조상들이 굿을 한 까닭은 자신과 가족의 고통을 덜기 위해서였다. 이때 좌절한 영웅들의 영혼을 위로해주고 자신들의 어려움을 호소하면 그들이 들어준다고 생각했다. 장군신에 대한 조상들의 생각은 단순히 미신의 형태라기보다는 ‘민심’에 가깝다. “민심은 천심이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천심’은 ‘신의 마음’인 셈이다. ‘현실적인 신’이나 다름없는 왕이 무능하면 민심을 읽지 못한다. 민중은 무능한 왕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신이 된 인간’, 즉 산신에게 기도를 드린다. 따라서 산신 문화에는 조상들의 소박하고도 간절한 마음이 깃들어 있다.

 

지역마다 다양한 산신 문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는 만큼 여성 산신이 차지하는 비중도 무시할 수 없다. 남성 중심의 가치관이 지배하면서 많은 여성 산신들이 사라지거나 남성 산신으로 대체되는 바람에 여성 산신을 숭배하는 문화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여성 산신은 정견모주(正見母主)이다. 정견모주는 가야산 자락에 사는 민중들이 가장 우러러보는 신이었다. 천신(天神) 이비가지의 아내가 된 여신은 대가야의 시조 이진아시왕금관가야국의 수로왕을 낳았다. 제주도 탄생 설화에 반드시 언급되는 설문대 할망도 꼭 기억해야 할 여성 산신이다. 제주도를 만든 설문대 할망이 있었기에 제주도는 예로부터 ‘여성이 많은 섬’으로 알려져 왔다.

 

대대로 내려오는 신화나 설화 그리고 산신 등에서 볼 수 있듯 우리나라에는 다양한 문화들이 현존한다. 우리 조상들은 삶을 살아왔다. 기쁨은 나누고 슬프고 힘든 일은 함께 극복하려 했다. 산신 문화는 이웃과 희로애락을 같이 할 수 있었던 하나의 놀이문화였다.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산신 문화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산신은 우리나라의 민속 신앙임에도 비현실적 존재로 치부되고 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류를 번성시킨 곳에는 풍부한 상상력을 재료로 삼은 튼실한 구조의 신화가 있었다. 신화는 인류의 삶의 시작과 함께 존재해 왔다. 신화의 주인공 신은 내밀한 인간 정신의 기원을 파악할 수 있는 ‘뿌리’와 같다. 그 뿌리를 따라가다 보면 가정과 국가의 평안을 바라는 우리의 산신 문화가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산신 문화에 근원을 둔 역사적 가치가 잊히는 것은 우리의 뿌리를 스스로 외면하는 일이다.

 

 

 

 

※ Trivia

 

* 근대 철학자 칸트‘신은 죽었다’고 과감하게 주장했다. (28쪽)

→ 저자는 글을 쓰면서 과감하게 실수를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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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0 12: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4-20 15:46   좋아요 1 | URL
산에 자주 가면 신기를 느낄 수 있는 건가요? ^^
저는 산 차제가 신이라고 생각해요. 산꼭대기에 오르려면 산신의 심기를 건드리면 안 돼요.. ㅎㅎㅎ

sprenown 2018-04-20 15: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터키를 형제의 나라라고 하지요.
왜냐 하면 같은 신을 모셨거거든요.단군이 터키어 탕그리와 같답니다.
하늘 신이란 뜻이예요!
마침 좋은 날씨에 제주에 내려왔어요!
너무 좋네요. 한라산도 올라서 백록담도 봤구요
한라산 등반할땐 등산 스틱 꼭 챙겨오세요!

cyrus 2018-04-20 15:52   좋아요 0 | URL
와우! 정말 부럽습니다. 날씨가 한창 좋을 때 제주에 가셨군요. 지금 대구 날씨도 엄청 좋은데 미세먼지 때문에 나들이를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요. ㅠㅠ

제주도에 딱 한 번 가본 적이 있어요. 그때 겨울이었어요. 무슨 산인지 기억이 나지 않은데 등정 코스가 유명한 산이었어요. 친구와 그 산에 갔는데 날씨가 최악이었어요. 산에 오르기 전에는 비가 내렸어요. 산 중반까지 올라갔을 때 비가 눈이 되는 마법을 목격했어요.. ㅎㅎㅎ 시간이 지날수록 눈바람이 거세졌어요. 정말 그때 등산하다가 죽을 수 있겠다는 두려움을 느꼈어요.. ㅎㅎㅎㅎㅎ 그래서 빠른 포기를 하고 하산했습니다. 하산하니까 눈바람이 잠잠해졌어요. 역시 산은 아무나 오르는 게 아니었습니다.. ^^;; 제주도에서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sprenown 2018-04-20 15: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3박4일간의 좋은 여행이었어요!
한라생태숲은 꼭 와보세요.
정말 종습니다.노루도 뛰어다닙니다!
이제 비행기 탑니다.담주부터 열심히 일 해야죠!

cyrus 2018-04-20 15:58   좋아요 0 | URL
일상으로 돌아오셔서 책도 읽어야죠..^^

sprenown 2018-04-20 17: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방금 서울에 도착했어요.
주말에 마저 읽고 올릴게요!
독서에 대해 강박관념을 갖을 필요는 없는데.. 나름대로 규칙이 있어야 할것 같더군요^^.1주일정도에 한권읽고 독후감 써보려고요

cyrus 2018-04-21 10:45   좋아요 0 | URL
제주도 여행하면서 찍은 사진도 보여주세요. ^^

sprenown 2018-04-21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북풀이나 서재기능에 익숙치 못해 사진올리는 법을 모릅니다. 그냥 책읽고 간신히 독후감써서 올릴줄 밖에 몰라요. 별로 필요성도 못느끼구요^^. 어젠 낮술에 제주 떠나는게 아쉬어서 자랑이 심했네요. 주위에서도 그러던데 저도 한 1년정도 휴직하고 살고 싶더군요^^.

cyrus 2018-04-22 11:41   좋아요 0 | URL
놀러 간 거 자랑할 수도 있죠. sprenown님과 댓글을 주고받았을 때 제주도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어서 좋았어요. ^^
 
성장의 문화 - 현대 경제의 지적 기원, 2025 노벨경제학상 수상작가
조엘 모키르 지음, 김민주.이엽 옮김 / 에코리브르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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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진보한다’는 명제를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역사의 진보나 발전의 방식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 입장이 갈린다. 《역사란 무엇인가》(까치, 2015)로 유명한 카(E. H. Carr)는 역사의 진보를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시간을 하나로 통합하는 총체적인 진보로 해석한다. 프랑스 아날학파를 대표하는 페르낭 브로델은 전통적 역사학이 단기적 시간 속에 매몰된다는 점을 비판하며 장기지속, 중기지속, 단기지속이라는 시간의 세 층위에 따라 역사를 바라봤다. 물론, 역사의 흐름은 단선적이지 않다. 역사를 살펴보면 우연한 사건이 역사의 큰 물결을 변화시킨 경우를 발견할 수 있다. 역사는 너무나도 변화무쌍하고, 복잡하다. 루이 알튀세르의 말을 빌리자면 역사는 ‘예견할 수 없는 길’이다.

 

‘사후 확증 편향(Hindsight Bias)’라는 용어가 있다. 어떤 사건이 발생한 다음에는 그 일이 사실로 인상에 강하게 남고 그 결과, 사전에 예측한 일의 가치를 과대평가하는 현상을 말한다. 처음에는 그런 결과가 나올 줄 전혀 몰랐으면서도 사건이 지난 뒤에 우리는 자신이 처음부터 그런 결과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한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역사는 어느 문명보다도 번성한 유럽 문명을 중심으로 기록된 역사다. 그래서 서양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유럽 문명의 경제적 번영이 처음부터 예견된 일인 것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유럽을 ‘세계 경제의 중심’으로 우뚝 서게 만든 원동력, 즉 진보의 힘에 부러워한다. 또 진보적인 세상을 만들려고 했던 유럽 지식인들이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가 하고 감탄할 수도 있다.

 

하지만 관점에 따라 역사는 다르게 보인다. 유럽을 바라보는 관점과 시각도 마찬가지다. ‘유럽은 이렇다’라는 해석이 어떤 이에게는 서구중심주의로 비칠 수 있고, 또 어떤 이에게는 서구중심주의 비판론으로 비칠 수도 있다. 경제사학자 조엘 모키르《성장의 문화》(에코리브르, 2018)는 ‘세계의 패권’을 차지한 유럽의 역사적 배경에 주목한다. 저자는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유럽은 언제 세계의 패권을 차지했을까? 어째서 중국은 유럽처럼 세계의 패자로 군림하지 못했을까?” 저자는 유럽 패권의 역사, 그중에서도 유럽 문명이 가장 자랑스러운 전성기로 믿어 의심치 않는 근대 초기(1500~1700년) 경제 성장의 역사‘문화’라는 새로운 관점으로 파헤친다.

 

서구 역사가들은 유럽이 특유의 합리성과 과학 기술을 바탕으로 근대 자본주의를 ‘발명’했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모키르는 1500년부터 1700년까지 2백 년의 유럽사를 분석해 새로운 결론을 제시한다. 그는 근대 초기 유럽의 경제 발전에 기여한 문화적 토대는 ‘계몽주의’라고 말한다. 계몽주의 지식인들은 소수의 엘리트 계층이었다. 그들은 과학과 기술 등 ‘유용한 지식’에 관심을 가졌으며 인류의 무한한 진보를 꿈꿔왔다. ‘국경을 초월한 사랑’이 있듯이 지식애(知識愛)도 국경은 무의미하다. 유럽의 지식인들은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새로운 지식을 공유했고, 유용한 지식이 활용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저자는 아이디어가 공유되는 초국가적 네트워크를 ‘편지 공화국’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진보가 가져다주는 혜택을 누리려면 현상 유지를 선호하는 기득권 세력과의 충돌이 불가피하다. 오늘날 계몽주의 지식인들은 인간의 이성과 과학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이상적 세상을 만들려는 개혁자로 인정받는다. 하지만 혁신을 거부하는 그 시대 사람들이 바라본 계몽주의 지식인들은 ‘별종’에 가까웠다. 모키르는 이 ‘소수의 별종’을 가리켜 ‘문화적 사업가(Cultural Entrepreneurs)’라고 말한다. ‘문화적 사업가’는 현 체제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도전 정신이 강하다. 이 책에서 모키르는 유럽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대표적인 문화적 사업가로 프랜시스 베이컨아이작 뉴턴을 꼽는다.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형성된 ‘유럽 특유의 문화’는 문화적 사업가들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만들어냈다. 모키르는 경제 번영이라는 성공적인 결과를 필연이 아닌 ‘우연’이라고 말한다. 근대 유럽이 번영하게 된 데에는 여러 시기적 요건들이 맞아떨어졌다. 종교개혁 이후 각각의 종교들은 자신들의 교리의 우월성을 보여주기 위해 교육 홍보에 열을 올렸다. 예수회 같은 일부 종파는 유용한 지식에 관심을 가졌고, 그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기도 했다. 이렇게 경쟁적으로 교육을 가르치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대중이 유용한 지식에 접근하는 기회가 늘어난다. 그러므로 ‘성장의 문화’를 단순히 우연적인 현상으로 보면 안 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역사는 단순하지 않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연이든 필연이든 문화가 유럽의 운명 자체를 바뀌게 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문화가 만든 번영’을 이해하려면 복합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성장의 문화》는 경제학 방법론과 문화진화론 방법론 등을 이용하여 근대 유럽의 번영기를 다채롭게 접근하여 분석한다.

 

그렇다면 다시 저자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왜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 되지 못했을까? 중국은 유용한 지식에 대한 믿음, 지식을 자유롭게 공유하는 인적 네트워크 등과 같은 개방적인 문화적 풍토가 생기지 않았다. 중국도 유럽에 뒤처지지 않을 정도로 교육 수준이 높았고 발전 가능성이 높은 나라였다. 중국은 번영의 열매가 자라나는 지식의 씨앗을 가지고 있음에도 제대로 발아할 수 있는 환경적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중국과 유럽과의 수준 격차는 벌어졌다.

 

경제가 성장하려면 지식은 긴밀하게 연관돼 있고 끊임없이 변화해야 한다. 문화적 사업가는 신선도 좋은 지식을 갈구했고, 그것을 경제적 이익을 증진하는 데 사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변화가 두려운 사회는 문화적 사업가의 활동을 막는 규제를 강화한다. 중국이 우위를 유지하지 못하고 정체되고 만 것은 바로 현 체제에 순응하려는 편향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도 그런 편향을 고치지 못하고 있다. 《성장의 문화》가 보여준 역사의 교훈은 ‘예견할 수 없는 길’을 걷고 있는 우리에게 미래사회의 희망적 모델이 될 수도 있고, 닮지 말아야 할 반면교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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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8-04-19 23: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역사가 진보한다는 명제를 부정합니다. ㅎㅎ
심지어 진보나 발전을 거부합니다. ^^
아마 저만 아닐걸요. ^^

cyrus 2018-04-20 11:42   좋아요 1 | URL
저도 북다이제스터님의 생각과 같습니다. 진보를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믿는 것에 거부감을 느낍니다. ^^
 

 

 

‘꽃보다 페미니즘’ 첫 번째 강연은 나에게 무거운 숙제를 던져주었다. 나 스스로 풀어가야 할 숙제이다. 다음 주 토요일(4월 28일)에 있는 두 번째 강연을 위한 ‘예습’도 해야 한다. 집중적으로 읽어야 할 책이 많아져서 다음 주가 고비가 될 것으로 보인다.

 

 

 

 

 

 

어젯밤에 월요일 강연 때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들을 정리했다. 나중에 급진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다시 보려고 사진을 많이 찍었다. 그런데 사진 화질이 구리다. 휴대폰에 저장된 사진 중에는 《성의 변증법》 원서 책표지가 있는 강연 화면을 찍은 것도 있다.

 

 

 

 

 

 

 

 

 

 

 

 

 

 

 

 

 

 

 

*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성의 변증법》 (꾸리에, 2016)

* 한우리 역 《페미니즘 선언》 (현실문화, 2016)

* 앨리스 에콜스 《나쁜 여자 전성시대》 (이매진, 2017)

 

 

 

 

《성의 변증법》은 내가 이미 여러 차례 언급했을 정도로 뛰어난 책이다. 이 책은 ‘급진 페미니즘을 대표하는 고전’이다.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은 이 책에서 사랑과 결혼, 그리고 출산의 과정에서 억압받는 여성의 문제를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그녀는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제 자본주의 사회 구조의 뿌리까지 파고들어가 남성 중심의 판을 근본적으로 뒤흔들기 위해 행동했다. 그녀가 1969년에 결성한 ‘레드스타킹(Redstockings)’은 당시 주류 여성단체였던 전미여성기구(NOW)에 반기를 들며 급진적 여성운동을 주도한 단체였다.

 

 

 

 

 

 

강연 자료에 있는 《성의 변증법》 원서는 1970년에 출간된 초판이다. 그런데 나는 초판 표지를 보자마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표지 디자인이 단순하고 촌스러워서 이상한 게 아니다. 표지 디자인 그림과 급진 페미니즘을 표방한 책이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서 이상하다.

 

여자의 초상화를 그린 화가는 에드가 드가이다. 발레리나, 세탁부, 매춘부 등 여성들을 소재로 이들의 일상을 포착한 작품들을 남겼다. 흔히 드가를 가리켜 ‘무희의 화가’라 부른다. 드가가 평생 그린 그림의 절반 이상이 춤추는 발레리나를 그린 작품이기 때문이다. 말년에 드가는 눈병으로 시력이 심하게 나빠져서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다. 그는 조각 제작에 관심을 보였고, 발레리나의 역동적인 자세를 점토로 빚어냈다. 드가는 여성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많이 남겼지만, 평생 독신으로 살다간 ‘여성 혐오자’였다.

 

 

 

 

 

 

 

 

 

 

 

 

 

 

 

 

 

 

* 베른트 그로베 《에드가 드가》 (마로니에북스, 2005)

* 앙리 루아레트 《드가 : 무희의 화가》 (시공사, 1998)

* 제임스 H. 루빈 《그림이 들려주는 이야기》 (마로니에북스, 2017)

 

 

 

 

대부분 학자는 드가의 여성 혐오 원인을 그의 유년 시절에서 찾는다. 드가는 어릴 적 어머니의 외도를 목격하면서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이런 어머니를 보고 자란 드가는 여성을 혐오하게 됐고, 공개적인 자리에서도 여성 혐오 발언을 서슴없이 꺼냈다.

 

 

 “혹시 여자 손님이 온다면 향수냄새를 너무 피우지 말았으면 좋겠군. 토스트같이 정말 냄새가 좋은 음식이 나올 때는 그런 강한 향기가 얼마나 거슬리는지 말이야.” (앙리 루아레트 《드가 : 무희의 화가》 158쪽)

 

 

  드가는 모델들에게 악의 없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당신은 아주 특별한 종족이군.” 어느 모델에게 그가 말했다. “엉덩이가 꼭 서양 배같이 생겼어. 꼭 모나리자처럼.” (앙리 루아레트 《드가 : 무희의 화가》 159쪽)

 

 

 드가는 발레리나를 그린 작품들을 장난조로 “내 상품”이라고 일컬었다. (베른트 그로베 《에드가 드가》 47쪽)

 

 

그러나 드가의 여성 혐오를 ‘괴팍한 화가의 특이 행동’으로 간주해선 안 된다. 여성 혐오는 ‘개인의 문제’로만 볼 수 없다. 여성 혐오는 ‘사회구조의 문제’로 접근해서 인식해야 한다. 여성을 혐오하는 드가의 의식에는 여성을 차별하는 사회적 통념이 반영되어 있다.

 

 

 

 

 

 

 

 

 

 

 

 

 

 

 

 

 

 

 

* 에른스트 헤켈 《자연의 예술적 형상》 (그림씨, 2018)

* 조너선 마크스 《인종주의에 물든 과학》 (이음, 2017)

* 스티븐 제이 굴드 《다윈 이후》 (사이언스북스, 2009)

 

 

 

 

드가가 살았던 19세기에는 인종주의에 가까운 진화론이 유행하고 있었다. 독일의 생물학자 에른스트 헤켈은 다윈의 진화론을 옹호했고, 1천여 종의 생물에 학명을 붙이는 등 계통학, 생태학 연구 등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헤켈이 주장한 진화론은 다윈 진화론의 진짜 의미를 왜곡하는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헤켈은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반복한다”는 명제를 내세운 ‘발생반복설’을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조상들이 겪었던 진화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태어난다. 헤켈의 진화론은 ‘단선적 진화론’이다. 단선적 진화론이란 인간은 처음에는 열등한 상태로 태어나지만, 일정한 진화 과정을 거쳐 우수한 상태로 발전한다고 보는 이론이다. 그래서 헤켈의 진화론은 ‘열등한 종족(문화)’와 ‘우수한 종족’을 판단하는 척도가 된다. 헤켈은 진화론이 ‘역사 발전의 방향성’을 설명할 수 있으며 진화 자체를 ‘진보’라고 생각했다. 또 그는 인종을 계통학적 방식으로 분류하여 흑인을 ‘야만적 인종’으로 규정했다. 헤켈의 진화론은 우생학과 골상학의 이론적 근거로 활용될 뿐만 아니라 ‘여성 차별’을 정당화하는 과학적 근거로도 악용되었다.

 

드가는 골상학에 심취하여 골상학적 이론이 반영된 습작들을 남겼다. 그는 하층계급 출신의 발레리나를 ‘진화가 덜 된 열등한 존재’로 인식했다. 드가의 여성관을 생각한다면 드가의 그림 속 여성들은 ‘인간’이라고 보기 어렵다. 드가는 동물을 관찰하듯이 여성을 그렸다. 여성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지 않은 그의 그림이 ‘여성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그려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한마디로 말해서 《성의 변증법》 원서 표지는 물과 기름 같은 ‘여성해방론자’와 ‘여성 혐오자’의 잘못된 조합이다. 대체 누가 이런 끔찍한 표지를 생각했을까? 파이어스톤은 본인 책의 ‘얼굴’이 ‘여성 혐오자’의 그림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원서 초판의 ‘이상한 표지’를 생각하면 파이어스톤의 생전 모습이 있는 《성의 변증법》 번역본 표지가 더 마음에 든다. 이 표지야말로 《성의 변증법》의 진짜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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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8-04-19 14: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970년. 이때만해도 여성학에 관한 책들이 얼마나 나왔을까?
그래서 저렇게 평범하게 나왔겠지.
또 저때만해도 여자 얼굴만 그린 그림이 또는 그런 그림을 표지로 삼는 게
흔한 일이었을까 싶기도 하다.
그에 비하면 정말 지금은 격세지감이지.
그 시절엔 너 같이 문제 삼지도 못했을 거야.

cyrus 2018-04-19 15:10   좋아요 1 | URL
맞아요. <성의 변증법>을 만든 출판사는 ‘여성주의’ 책 표지에 반드시 ‘여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만약 초판 표지가 우리나라에 공개됐으면 난리 났어요... ㅎㅎㅎ 페미니즘 책 표지에 ‘분홍색’이 들어간 것도 별로예요. 빨간색, 보라색이 좋아요. 보라색이 페미니즘을 상징하는 색이에요. ^^

stella.K 2018-04-19 15:28   좋아요 1 | URL
나도 동감이긴 한데 난 솔직히 페미니즘 책이라고 해서
꼭 그렇게 특정색이 들어가야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솔직히 그 책을 고르는덴 표지가 반인데
요즘 나오는 페미니즘 책 표지는 마음에 안 들어.
그런데 오늘 발견한 책이 있는데
<세계 곳곳의 너무 멋진 여자들>이란 책이 있는데
그건 좀 마음에 들더군. 무슨 잡지모냥 세로 이단으로 되어있더라구.
그림도 맘에 들고. 단 얇은 게 흠이긴 해.ㅋ

2018-04-19 16: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4-19 18:03   좋아요 1 | URL
시대에 앞서간 행동을 하셨군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페미니즘 책을 읽어도 모르는 게 많고, 혼란을 겪을 때가 많아요. ^^
 
중세의 아름다움 - 김율의 서양중세미학사강의 My Little Library 2
김율 지음 / 한길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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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4월 중순이 지났다. 지금부터 다음 달 독서모임 ‘우주지감’ 선정도서를 읽기 시작해야 한다. 왜냐하면, 다음 달 선정도서는 ‘두 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달 독서모임 선정도서를 아직 안 읽었다. 이 와중에 나는 엉뚱하게도 다른 책들에 눈길을 준다. 벌써 다음 달 독서모임 선정도서를 어떻게 읽어야 할지 생각하고 있다. 이렇게 망중한을 즐기다가는 망한다. 생각이 많아지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을 안 읽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책을 읽고 있다. 그중에 고른 책이 《중세의 아름다움》(한길사, 2017)이다. 책의 주제에 이끌려서 고른 게 아니다. 이 책을 고른 것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중세의 아름다움》은 다음 달 ‘우주지감’ 선정도서와 관련이 있다. 내가 이 책을 읽는 건 다음 달 독서의 추진력을 얻기 위한 것이다.

 

아름다움의 의미에 대한 통찰은 미학의 오랜 주제이다. 미학을 공부하면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정 상태나 경험을 스스로 살펴보게 된다. 이 과정은 미적 조화를 통해 완성된 예술작품들을 다시 삶 속으로 환류하게 하는 융통의 장을 열어준다. 따라서 미학은 엄연한 지성사의 일환이다. 중세철학을 전공한 김율 교수가 쓴 《중세의 아름다움》은 중세미학의 존재를 추적한 사유의 기록이다. 저자는 중세미학이 갖는 역사적 · 상징적 의미는 무엇인지, 중세를 대표하는 신학자들의 시선에 따라 중세의 아름다움이 어떻게 변모해왔는지를 살핀다.

 

중세미학은 비례와 조화를 강조했던 고대미학(고대 그리스, 로마)을 뿌리로 삼아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에 접근한다. 아름다움의 본질에 대한 탐구 방식은 고대미학이 물려준 자산이었다. 즉 중세에도 ‘아름다움’은 배척당하지 않았다. 중세에 스테인드글라스, 고딕 양식 등이 유행됐다는 사실은 아름다움이 중요하게 여겨졌음을 보여준다. 중세미학은 그리스도교 문화 자체의 성격에서 유래한다. 그리스도교는 신의 존재 자체를 통해 아름다움(‘신적 아름다움’)을 보여주려고 했다. 그리스도교가 지향하는 아름다움은 초월적 존재인 신을 시각적으로 재현할 수 있는 최상의 속성이다. 고대미학의 개념적 유산인 비례와 조화 같은 범주는 신의 속성에 포함된다. 따라서 그리스도교는 감각적 아름다움에 대한 지성적 아름다움의 우위를 유지하면서 신을 눈에 ‘보이는’ 존재로 격상시켰다. 중세 신학자들은 신 자체의 아름다움에 주목한다.

 

이 책에 소개된 아우구스티누스, 위(僞) 디오니시우스, 토마스 아퀴나스, 요한네스 둔스 스코투스는 신학자(또는 철학자)로 알려졌지만, 자신의 시대에 ‘미학’을 입힌 중세미학의 완성자라 할 수 있다. 물론, ‘중세의 아름다움’에 대한 네 사람의 인식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저자는 중세시대에 지속적으로 주장됐던 ‘아름다움’의 본질을 상세히 정리하고 이를 고대미학과 비교 고찰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름다움을 감각이 아닌 ‘이성’으로 파악한다. 이성적인 사랑, 즉 그리스도교가 강조하는 인격적 사랑은 최고의 아름다움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이 창조한 이 세상 전체가 아름답다고 생각했고 세상에 은밀하게 숨겨진 신의 섭리, 즉 아름다움을 읽어내려고 했다. 디오니시우스는 전설에 등장한 성자의 이름이다. 위 디오니시우스는 익명의 신학자이다. 지금도 그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는 ‘선(善)’과 빛, 그리고 아름다움을 조화시키려고 했다. 위 디오니시우스 미학에 따르면 아름다움은 선과 같다. 이 아름다움이 존재할 수 있는 원인은 신이다. 그리하여 아름다움은 신의 이름으로 드러내는 ‘사랑’이 된다. 아퀴나스는 아름다움을 ‘보이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말하는 ‘보인다’는 것은 시각적 행위를 의미하지 않는다. 시각과 지각을 포함한다. 아퀴나스는 아름다움의 의미를 눈으로 느끼는 감각적 상태가 아닌 정신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앎의 대상’으로 확장했다. 그리고 비례와 조화가 잘 이루어진 사물에서 볼 수 있는 ‘완전성’을 아름다움의 조건이라고 했다. 스코투스는 ‘색채’의 아름다움에 주목한다. 그에게 아름다움이란 ‘색채를 포함하는 조화’이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조화로 설명되는 아름다움에 주목했으나 색채를 아름다움(조화)을 구성하는 개별적인 요소로 봤다.

 

중세는 ‘암흑’으로 봉인된 구시대가 아니다. 근대 이후 이성을 중심으로 한 계몽주의의 독주가 지속하면서 중세는 ‘암흑의 시대’로 폄하된 채 학자들조차 거들떠보지 않았다. 고대 문화의 가치를 재발견한 신고전주의자들은 고대미학, 르네상스 미학에 주목했을 뿐 중세미학을 평가 절하했다. 그래서 중세미학에 대한 해명을 기본과제로 해 중세 지성사를 재조명한 《중세의 아름다움》은 큰 의미가 있다. 저자는 중세는 암흑의 시대가 아니라 ‘다채로운 빛의 시대’였다고 말한다. 묻혀버린 중세를 재발굴하는 것이 단순히 과거를 돌아보는 차원에 그치는 게 아니다. 주류 시각으로 기술된 미학 또는 미술사는 '아름다움'의 의미와 작품 해석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를 새롭게 재편하는 담론을 생각할 때 중세미학의 재발견은 매우 중요한 작업이다. ‘암흑의 시대’라고 가르치던 학교 속 역사 교과서의 유통기한은 끝난 지 오래다. 이제 ‘암흑’에 가려진 중세의 다채로운 면모를 찾으려는 연구에 주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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