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에 미국 정부는 스탠딩 록 수(Standing Rock Sioux) 부족 등 원주민들이 반대해온 다코타 액세스 송유관(Dakota Access Pipeline) 건설 사업을 중단하는 결정을 내렸다. 다코타 액세스 송유관 사업은 노스다코타, 사우스다코타, 아이오와, 일리노이 등 4개 주를 잇는 대형 송유관 건설 사업으로 총 38억 달러(약 4조 2000억 원)의 자금이 투입됐다. 그러나 이 사업은 각 주의 인디언 보호구역을 관통해야 했는데, 식수원과 주요 성지(聖地)를 잃게 되는 수족 등 원주민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2016년 3월부터 수족은 아예 공사장 안에 천막을 치고 농성을 벌였다. 100여 개의 원주민 부족들도 동참했다. 여러 환경운동가와 인권운동가들까지 시위에 가세해 점차 전국적 원주민 저항 운동으로까지 번졌다. 결국 미국 정부와 미 육군은 송유관 건설 사업 시공사인 에너지 트랜스퍼 파트너스(ETP)에 원주민 보호구역 주변에서의 공사를 중지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과거 에너지 트랜스퍼 파트너스에 투자했고, 해당 회사 CEO에게 기부금도 받은 트럼프는 송유관 건설을 허용하는 행정 명령에 서명했다. 이어 육군은 불과 2개월 만에 입장을 바꿨다. 송유관 건설을 다시 허가했다.

 

 

 

 

 

 

 

 

 

 

 

 

 

 

 

 

 

 

* 리베카 솔닛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 (창비, 2018)

 

 

 

리베카 솔닛(Rebecca Solnit)『스탠딩 록에서 온 빛』이라는 글에서 ‘스탠딩 록 집회’가 전 세계에 보여준 연대의 힘을 상기시키면서 분노와 저항을 근간으로 하는 축적의 시간이 더 나은 세상으로 바꿀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 글은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 (창비)에 수록되어 있다. 변화를 꿈꾸는 연대는 국경과 국민의 테두리를 비웃으며 넘나들고,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확신이며, 관료적 위계에 묶인 형식이 아닌 희망의 에너지가 생산되고 넘쳐나는 체험이다. 연대는 지금 무언가를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의 공통 언어이며 행동 양식이다.

 

『스탠딩 록에서 온 빛』에 이런 문장이 있다.

 

 

 우파와 백인 우월주의가 승리를 뽐내는 지금, 우리는 많은 증오범죄 이야기를 듣는다. 구타, 모욕, 스와스티카, 협박 등등.

 

 

(『스탠딩 록에서 온 빛』 중에서, 280쪽)

 

 

‘스와스티카(swasticka)가 뭔지 궁금해서 사전을 찾아봤다. 내가 참고한 사전은 《그림으로 보는 세계문화상징사전》 (까치)이다. 스와스티카는 불교의 상징인 ‘卍(만)’ 자를 부를 때 쓰는 이름이다. 산스크리트어에서 ‘행운’을 뜻하는 ‘스바스티카(svastika)’에서 유래했다. 스와스티카는 수천 년 전부터 사용됐으며 특히 힌두교 경전에서는 행운과 힌두교 최고의 신 브라마(Brahma), 또는 부활 등의 상징으로 등장한다. 스와스티카는 힌두교 구조물과 인도 수공예품 등에서 볼 수 있으며 모양은 조금 다르지만 불교와 자이나교, 아시아와 유럽, 미국 원주민 문화 등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그만큼 스와스티카는 고대 그리스 · 로마 · 중국 등 고대 문명이 찬란하였던 곳에서 흔히 발견된다. 스와스티카가 무엇을 상징하는가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학설이 있다. 태양이나 번개의 신, 불의 신을 상징 한다는 설도 있으며 회전하는 북두칠성의 형상이라는 주장도 있다.

 

 

 

 

 

 

 

 

 

 

 

 

 

 

 

 

 

 

* 진 쿠퍼 《그림으로 보는 세계문화상징사전》 (까치, 1994)

* 허균 《사찰 장식, 그 빛나는 상징의 세계》 (돌베개, 2000)

 

 

 

다양한 사찰 조형물과 장식 문양의 상징적 의미를 알기 쉽게 설명한 《사찰 장식, 그 빛나는 상징의 세계》 (돌베개)라는 책은 우리나라 미술에 나타난 스와스티카 문양을 소개한다. ‘卍’ 자를 좌우로 뒤집은 ‘卐’ 자도 스와스티카다. 우리나라 무속 신앙에서 스와스티카는 우주와 인간의 삶과 죽음, 환생을 주관하는 신의 영역이란 뜻으로, 불교에선 부처의 마음 또는 중생의 마음속에 잠재해 있는 불성을 뜻한다. 그런데 이 상서로운 상징이 어째서 ‘증오 범죄’의 상징이 되었을까?

 

좋은 뜻이 있는 스와스티카가 최악의 상징으로 돌변한 것은 독일의 히틀러(Hitler)가 자신의 소속 정당인 나치(Nazis)의 상징으로 채택하면서부터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뒤, 스와스티카는 ‘갈고리 십자가’를 뜻하는 하켄크로이츠(Hakenkreuz)로 알려지게 됐고, 수많은 홀로코스트(Holocaust)의 현장에서 나부꼈다. 히틀러는 독일인의 조상인 아리안(Aryan) 민족의 우수성을 세계에 과시하기 위해 스와스티카를 나치 문양으로 정했다. 요즘 네오 나치나 백인 우월주의 집단, 일본 극우 집단이 써먹고 있다. 전후 독일과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대부분 국가에서 스와스티카의 사용을 법으로 금지한 것도 이 때문이다.

 

지금도 스와스티카를 보면 하켄크로이츠를 연상하는 유럽인이 많다고 한다. 히틀러가 스와스티카를 왜곡해서 사용한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불교나 힌두교의 스와스티카 사용을 금지할 필요가 없다. 히틀러가 반유대인주의를 선전하기 위해 문양을 오용했다는 점이 스와스티카의 평화적 사용까지 금지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에는 스와스티카의 의미를 알려주는 주석이 달려 있지 않다. 독자들이 ‘좋은 만(卍, 스와스티카)’ 자와 ‘나쁜 만(卍, 하켄크로이츠)’ 자를 혼동하지 않도록 상세한 주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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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8-12-03 0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저는 불교에서 쓰이는 卍(만)자와 나찌 독일의 문양인 卐(하켄크로이츠)가 서로 비슷해 보이지만 그 계통이 완전히 다른줄 알았는데 cyrus님 글을 읽은 덕분에 모두 브라만교(혹은 힌두교)에 근원을 둔 문양이란것을 알았네요.좋은글 감사합니다^^

cyrus 2018-12-03 12:37   좋아요 0 | URL
생각보다 만 자 문양을 쓴 고대 문명이 많았어요. 고대 그리스인, 켈트인들도 만 자 문양을 썼어요. 의미는 다르지만, 동서양 공통 문양으로 보면 됩니다. ^^

transient-guest 2018-12-04 0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방향이 다르니까 조금만 양식이 있으면 혼동하지는 않겠죠? 어쨌든 트럼프와 함께 다시 분리/인종주의가 나온 건지, 이들이 다시 준동하는 것이 트럼프라는 괴물로 결과가 나온 거지 이론이 분분합니다만, 좋지 못한 시대로 들어선 것 같습니다. 이게 일종의 헤프닝으로 끝날지, 아니면 전후 대략 70년 이상 이어진 서방세계의 평화시기가 끝나고 다른 시대가 시작되는 건지 알 수가 없네요.

cyrus 2018-12-04 14:09   좋아요 0 | URL
내년은 어떤 일이 일어날지 기대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됩니다.. ^^;;

소요 2018-12-04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해 주셔서 책 사서 열심히 보겠습니다

cyrus 2018-12-04 14:13   좋아요 0 | URL
어떤 책을 사시는지 모르겠지만, 소요님이 만족하셨으면 좋겠네요. ^^

레삭매냐 2018-12-04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려서 스와스티카하고 만자를 헷갈려
했던 것 같습니다.

트럼프는 정말 답이 없네요. 어렵게 이뤄낸
공사 중지 명령을 무효화하고 깽판을 쳐대
니...

글 내용과 좀 거리가 있지만,
헤르메스님이 추천해 주신 리베카 솔닛의
<폐허>를 읽어 보고 싶은데 아무래도 올해
는 어렵지 않나 싶네요.

내년에 읽어 볼까 합니다 ~

cyrus 2018-12-04 15:52   좋아요 0 | URL
오바마 정부 말기에 송유권 건설 중지 결정이 내렸으니 시기적으로 좋지 않았어요. 민주당의 힐러리가 대통령이었으면 중지 결정이 번복되는 일은 없었을 거예요. 저는 솔닛의 <걷기의 인문학>을 읽어보고 싶어요. ^^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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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장은 아닐지언정 언제라도 죽음은 찾아올 것입니다.

내가 해야 할 말을 했든 못했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내 침묵은 나를 지켜 준 적이 없습니다.

당신의 침묵도 당신을 지켜 주지 않을 것입니다.

 

- 오드리 로드, 『침묵을 언어와 행동으로 바꾼다는 것』 중에서[주] -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이기적 유전자》에서 유전자로 문화와 사회적 현상을 해석하려는 새로운 시도를 했다. 그는 ‘밈(Meme)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내 언어나 문화와 같은 부문도 유전자처럼 진화한다고 설명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문화 유전자가 생물학적 유전자 진화 속도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르다는 것이다. 밈은 ‘모방’이라는 형태로 복제하기 때문에 유전자에 비해 정확한 복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각자마다 다른 변형을 가지게 된다. 힘을 얻은 밈은 복제되면서 널리 퍼지고 세대를 초월해 영향을 미친다.

 

영화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Harvey Weinstein)의 성폭력 스캔들이 알려진 후 미국에서는 트위터를 중심으로 ‘미투(#MeToo)’ 운동이 확산하였다. 유명 배우들과 각계각층의 여성들이 ‘나도(Me too)’ 성폭력을 경험한 적이 있음을 말하면서 와인스타인의 행태뿐 아니라 사회에 만연한 젠더 불평등과 폭력을 고발했다. 미투 운동은 미국 밖으로도 번져나갔다. 할리우드에서 시작된 이 캠페인은 여성들의 일상 속에 들어와 있는 성범죄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남성들 사이에 성폭력 사실을 자백하는 ‘내가 그랬다(#IDidThat) 캠페인과 남성들의 의식 변화를 촉구하는 ‘어떻게 바꿀 것인가(HowIWillChange) 캠페인이 등장했다. 한 사람의 용기 있는 행동이 여러 사람의 동참과 반성을 이끌어내고 사회 분위기로 자리 잡게 하는 것은 ‘올바른 밈’이다.

 

 

 

 

 

 

한편 반대의 예도 있다. ‘잘못된 밈’이다. 최근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연예인들의 친척이 자신의 돈을 빌린 뒤 갚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글들이 속속 올라오고 있다. 이런 움직임에 대해 언론들은 미투 운동과 ‘빚’을 합성해 ‘빚투 운동’이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했다. 심지어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는 해시태그 ‘#빚too’도 등장했다. 채무로 인해 피해자들이 겪었던 고통을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연예인 가족의 채무 불이행을 보도하는 언론의 행태는 빚을 갚지 않은 연예인 가족들, 즉 가해자의 목록을 늘리고 있을 뿐이다. 언론의 지나친 보도는 ‘폭로전’으로 번진다. 미투 운동은 가해자 처벌을 원하는 ‘폭로전’이 아니다. 아무 생각 없이 ‘미투’라는 단어만 가져와서 막연하게 사용하는 것은 미투 운동의 진정한 취지를 왜곡하는 일이다. 미투 운동은 여성들이 겪은 부당한 차별과 억압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 미투 운동은 단순히 소리치고 분노하는 여성들 무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들은 ‘침묵을 거부하고 말하기 시작한 피해 여성들’이 아니라 침묵을 거부하고 외치기 시작한 ‘사람들’이다. 그녀들의 언어와 목소리는 ‘침묵’을 먹고 커져버린 불합리한 관행에 맞서는 강력한 ‘무기’이다.

 

리베카 솔닛(Rebecca Solnit)은 자신의 책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 서문에서 멕시코 반란군 부사령관 마르코스(Marcos)의 말을 인용한다. ‘우리의 말은 우리들의 무기입니다.’ 그녀는 이 말을 인용하면서 침묵의 성채에 향해 던지는 ‘언어’의 힘에 주목한다. 무언가를 정확한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는 건 그것의 숨겨진 부정적인 진실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이다. 부정적인 진실에 의해 형성된 ‘비정상적인 상식’을 폐기하거나 바꾸려면 새로운 이름으로 명명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성폭력’은 1970년대에 만들어진 단어이다. 대중적으로 쓰인 건 1990년대 들어서다. 그때도 여전히 여성은 침묵, 금기, 왜곡에 포위됐다. 비정상적인 현상은 존재했지만 ‘무기로서의 언어’가 부재했던 여성들의 목소리는 제한되거나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솔닛은 ‘언어의 위기’를 우려한다. 특정 세력은 자신들의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 ‘그럴듯한 언어’를 내세운다. 이러한 언어들은 진실과 거리가 멀다. 그리고 갈등과 혼란을 만들어 낸다.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페미니즘의 ‘역차별’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면서 ‘양성평등’을 강조하기 위해 ‘젠더 이퀄리즘(Gender Equalism)이라는 말을 소환한다. 이 말은 페미니즘을 비난하고 대체하는 근거로 사용됐다. 심지어 진보주의자들도 이퀄리즘을 옹호했다. 그런데 이퀄리즘은 학계에 존재하는 말이 아니다. 페미니즘에 반대하는 인터넷 누리꾼들이 만든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이퀄리즘을 ‘서구에서 페미니즘을 대체한 개념’인 것처럼 사용했다. 자신이 만든 말에 학문적 권위를 스스로 부여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보편적 언어’가 되는 건 아니다.

 

우리는 ‘가짜 정보’가 너무나 손쉽게 만들어지고, 그것이 ‘사실’로 간주하여 공유되는 ‘언어의 위기’를 겪고 있다. 언어를 정확하고 조심스럽게 쓰지 않으면 ‘빚투’와 같은 ‘끔직한 혼종’이 나온다. 모든 것을 정확한 말과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세상뿐만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이다. 그것이야말로 무기보다 더 막강한 말의 힘이다. 우리가 ‘정확한 이름’을 부르기 위해 부당한 현실에 대항해야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침묵하는 다수는 위험하기 때문이다. 오드리 로드(Audre Lorde)가 말했듯이 침묵은 나 자신을 지켜주지 않는다.

 

 

 

 

[주] 《시스터 아웃사이더》, 후마니타스, 47~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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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12-02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사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발 빠르십니다.

cyrus 2018-12-02 12:35   좋아요 0 | URL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해서 읽었어요. 책 속에 좋은 구절이 많았어요. ^^

북프리쿠키 2018-12-02 1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포스팅 제목이 맘에 쏙 듭니다^^

cyrus 2018-12-02 12:36   좋아요 1 | URL
오드리 로드의 글 제목을 인용해서 살짝 바꿔봤습니다. ^^

2018-12-03 09: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12-03 12:38   좋아요 0 | URL
돈 빌려놓고 잠수 타는 사람들이 있죠.. ^^;;
 
관계를 읽는 시간 - 나의 관계를 재구성하는 바운더리 심리학
문요한 지음 / 더퀘스트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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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사람은 친숙한 것을 좋아하고 낯선 것을 불편해한다. 심리학에 ‘단순노출 효과(Mere Exposure Effect)라는 용어가 있다. ‘단술노출 효과’란 자주 보는 것만으로 호감이 증가하는 현상을 말한다. ‘이미 알고 있는 악마가 아직 알지 못하는 악마보다 낫다’라는 서양 속담처럼 새로운 것은 호기심과 동경을 불러일으키지만, 불확실성에서 비롯되는 불안감과 경계심도 동반한다. 따라서 친숙함은 익숙한 것에 길들게 함으로써 낯선 상대방에 다가서거나, 새로운 관계를 맺으려는 동기를 저해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낯선 사람, 낯선 경험에 대한 새로운 접촉과 관계 맺기를 가로막는 것이다. 따라서 풍성하고 성숙한 인간관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친숙한 것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가 있다.

 

흔히 인생을 항해에 비유한다. 항해에는 반드시 여러 개의 목적지가 있다. 그곳에는 가족, 친구 등이 모여 살고 있다. 인생이란 항해에서 어떤 목적지를 향해 나아갈 것인지 명확히 결정해야 한다. 한 번뿐인 인생에서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싶은지, 어떤 사람들과 함께 항해하고 싶은지 고민해야 한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려면 ‘건강한 인간관계’로 나아가는 길목을 알려주는 ‘나만의 항해 지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해마다 달라지는 지리 정보를 재빨리 감지하고 이를 지도에 반영해 업데이트를 해야 하듯이 ‘인간관계 지도’도 상황에 맞게 바로바로 업데이트할 수 있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모든 인간관계의 틀을 가정 안에서 배우게 된다. 사회에서 맺는 동료나 친구와의 관계는 이미 형제자매와의 관계에서 그 틀이 만들어진 것이며 결혼 후의 부부관계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를 보고 배운다. 어머니의 애정은 아이에게 안도감을 주었고 어머니가 곁에 있을 때 아이는 낯선 주변을 더 많이 탐색했다. 심리학자 존 보울비(John Bowlby)의 연구에서 볼 수 있듯이 어려서 어머니와 올바른 애정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 아동은 성장한 이후 대인관계를 잘 갖지 못한다. 그러나 무조건 자녀를 사랑하기만 한다고 해서 자녀가 올바르게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부모의 과보호 속에서 자란 아이들은 부모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성향이 강하고, 부모와 떨어져 지내는 것을 두려워한다. 애착 대상, 즉 부모로부터 분리될 때 또는 분리될 것을 예상했을 때 느끼는 불안을 그대로 방치하면 대인관계를 피하거나 관계 형성에 어려움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어린 시절 몸에 밴 이러한 애착의 패턴들을 지닌 채로 가정을 떠나 사회로, 결혼 관계로 나아간다. 우리가 흔히 관계 맺기 어려워하거나 빈번히 실패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정확히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정신과 의사 문요한은 인간관계 속에서 나도 모르게 저지르게 되는 실수와 갈등의 원인이 나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깨우쳐주고, 동시에 인생의 발목을 잡는 과거의 관계방식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조언한다. 《관계를 읽는 시간》을 관통하는 열쇳말은 ‘바운더리(boundary)다. 바운더리는 인간관계에서 ‘나’와 ‘내가 아닌 것’을 명확히 구분하는 자아의 경계인 동시에 관계의 교류가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통로이다. 건강한 바운더리를 유지하기 위해 인간은 두 가지 기능을 필요로 한다. 하나는 ‘보호’이고, 또 다른 하나는 ‘교류’이다. 전자는 자신을 돌보는 것이며, 후자는 상대방과 친밀하게 지내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는 인간관계가 생긴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인간은 부정적인 자아상을 갖게 되는데, 이 책에서는 순응형, 돌봄형, 지배형, 방어형이라는 4가지 틀로 나타난다.

 

《관계를 읽는 시간》은 인간관계 변화의 출발점으로 ‘바운더리’에 주목한다. 누구나 무의식적으로 되풀이하고 있는 관계 방식, 이것을 이해하고 바꾸지 않는 한 관계에서 겪는 괴로움도 반복된다. 그 관계 틀을 알아보고 바꾸는 여정은 ‘바운더리 심리학’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한다. 바운더리 심리학은 ‘지금 모습으로 충분하다’는 위로의 심리학이 아니라 관계를 재구성하는 ‘변화의 심리학’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관계 맺음이 유난히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은 성장 과정을 뒤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런 성찰을 바탕으로 지금 여기에서 내가 또 어떠한 형태의 애착 관계를 반복하고 있는지를 먼저 깨달아야 한다. 이 책이 그럴싸하게 심리학을 이용한 자기계발서와 구별되는 점은 단기적으로 처방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스스로 문제 원인을 알아볼 수 있게끔 하는 데 있다. ‘족집게’ 자기계발서가 당장의 문제 상황을 잘 해결해 주는지 몰라도 삶에 대한 태도를 바꾸지는 못한다. 우리가 관계를 새롭게 재구성하는 방향을 설정하지 않으면 복잡하게 꼬여버린 인간관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또 관계가 회복한다고 해서 그다음부터는 아무 문제없이 잘살게 되는 건 아니다. 살아가면서 문제는 계속 생길 수밖에 없다. 저자는 사람을 만나면서 반드시 겪게 될 사회적 고통(이별 또는 상대방 간의 갈등에 직면하면서 느끼는 고통)은 관계를 잘 돌보라는 신호라고 말한다. 어떤 난감한 상황을 만나든 그 상황을 풀어가는 과정이야말로 자신의 관계를 돌아볼 기회이다.

 

개별적인 인간은, 그리고 그런 두 인간 사이의 관계는 언제나, 당연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다. 그래서 오랜 시간 동안 형성된 내 관계에 대한 바운더리는 몸과 마음에 익은 습관과 같아 변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 쉽지 않다. 자신의 삶에서 상대방과의 관계가 늘 불편했다면, 자신의 삶을 관통하는 중요한 문제라면, 이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나 자신과 정직하게 만나는 일에서 시작해야 한다. 자기 자신과 대면하고 대화하는 일은 다른 사람이 대신해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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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12-02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자신과의 대화는, 저의 경우엔 일기 쓸 때와 혼자 산책할 때 가능한 것 같습니다.

cyrus 2018-12-02 12:39   좋아요 1 | URL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 일정에 맞추면서 살아가게 되면 내 자신을 제대로 돌아보는 여유마저 줄어드는 같아요. 그래서 혼자서 나만의 시간을 보내기가 힘들어요.
 

 

 

1492년은 아메리카 대륙을 놓고 희비가 엇갈리는 해였다. 콜럼버스(Columbus)를 보내 이 대륙의 실체를 확인한 스페인에게는 강대국으로 도약하는 역사적인 해로 여겼다. 하지만 그곳에서 잘살고 있었던 원주민(Native Americans)들에게는 고난을 예고하는 불행의 해였다. 이른바 ‘신대륙 발견’ 이후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삶을 철저히 파괴되었다. 문명이라는 허울 속에 원주민들의 삶과 역사는 모조리 짓밟혔고, 지금은 일부 후손들만 살아남아 보호 구역에서 살아가고 있다.

 

 

 

 

 

 

 

 

 

 

 

 

 

 

 

 

 

* 마르코 폴로 《동방견문록》 (사계절, 2000)

* 마르코 폴로 《동방견문록》 (서해문집, 2004)

 

 

 

콜럼버스는 대서양 횡단이 세계 역사를 바꾸는 항해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그는 새로운 땅보다 황금에 더 관심이 많았다. 콜럼버스는 마르코 폴로(Marco Polo)가 언급한 ‘지팡구(Jipangu, Zipangu)를 찾고 싶어 했다. 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일본을 ‘황금의 나라’로 소개했다. 그가 ‘일본은 막대한 금을 생산하고, 그곳의 궁전이나 민가는 황금으로 만들어져 있다’라는 식으로 기록한 덕에 지팡구는 한때 유럽인들에게 미지의 세계로 인식된 바 있다. 콜럼버스는 죽기 전까지 자신이 본 아메리카를 인도의 일부(Indias, 인디아스)라고 여겼고, 바하마 제도에 속한 여러 섬과 쿠바를 지팡구나 중국 정도로 생각했다.

 

 

 

 

 

 

 

 

 

 

 

 

 

 

 

 

 

 

 

 

 

 

 

 

 

 

 

 

 

 

 

* 콜럼버스, 라스 카사스 엮음 《콜럼버스 항해록》 (범우사, 2000)

* 콜럼버스, 라스 카사스 엮음 《콜럼버스 항해록》 (서해문집, 2004)

* [절판] 라스 카사스 《인디아스 파괴에 관한 간략한 보고서》 (북스페인, 2007)

* 김선욱, 박병규 엮음 《항해와 정복》 (동명사, 2017)

 

 

 

 

콜럼버스는 지팡구로 가는 거창한 항해 계획을 실현하는 데 10년의 긴 세월을 허비하였다. 재정적 후원자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가 태어나서 자란 15세기 이탈리아는 수많은 작은 도시국가로 쪼개져 있었기 때문에 어느 한 나라도 막대한 비용이 드는 그의 항해 사업을 도울만한 국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결국 콜럼버스는 스페인의 후원에 의존하게 됐다. 스페인은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한 이슬람 세력에 의해 여러 왕국으로 분열되었지만,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여왕(Isabel I)과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Fernando II)의 연합군이 주도한 영토 회복 운동(Reconquista)이 성공하면서 통일을 이룩했다. 콜럼버스는 이 스페인 공동 왕(가톨릭 양왕)에게 자신의 항해 사업을 제안했고, 공동 왕은 그에게 항해를 후원하기로 약속했다. 그리하여 1492년에 콜럼버스는 세 척의 배를 이끌고 첫 번째 항해에 나서게 되었다. 《콜럼버스 항해록》은 1492년 8월 3일부터 1493년 3월 15일까지 220여 일의 1차 항해의 경위를 기록한 책이다. 현재 이 책의 원본은 분실되었고,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Bartoleme de las Casas) 신부가 이 원본의 내용을 요약한 필사본만 남아 있다. 그래서 현재 전해지고 있는 콜럼버스의 항해 일지는 라스 카사스 신부가 편집한 것이다. 라스 카사스 신부는 ‘인디언의 보호자’란 별명을 얻을 만큼 원주민의 인권을 위해 애쓴 성직자다.

 

국내에 2종의 《콜럼버스 항해록》 번역본이 있다. 범우사 판은 라스 카사스 신부가 항해 일지에 직접 단 주석들까지도 옮겼다. 서해문집 판도 라스 카사스의 주석이 나오긴 하지만, 주석이 빠진 내용(1493년 1월 15일 자)도 있다. 신부는 3인칭 시점으로 (콜럼버스) 제독은 ~을 했다”는 식으로 항해 일지를 기록했는데, 범우사 판은 이 서술 방식을 그대로 옮겼다. 반면 서해문집 판은 콜럼버스가 화자인 1인칭 시점의 일기체 형식(“나는 ~을 했다”)으로 편집되어 있다. 서해문집 판의 장점은 고대 문명과 신대륙 항해에 관련된 풍부한 도판이다. 그래서 읽으면 지루하지 않다. 콜럼버스가 항해에 나서게 된 역사적 배경과 고대 원주민의 문화에 대해서 충실히 설명돼 있다. 아메리카 대륙의 문화뿐만 아니라 덤으로 아스테카 문명과 마야 문명의 문화도 소개하고 있다. 항해 일지 속에 콜럼버스가 스페인 공동 왕에게 보낸 서한이 삽입되어 있는데, 이 서한 역시 콜럼버스 항해(총 네 차례)의 과정을 가늠할 수 있는 문헌이다. 《항해와 정복》(동명사)에 콜럼버스가 쓴 서한들이 수록되어 있다.

 

 

 

 

 

 

 

 

 

 

 

 

 

 

 

 

 

 

 

 

 

 

 

 

 

 

 

 

 

 

 

 

 

 

* [절판] 앤서니 그래프턴 《신대륙과 케케묵은 텍스트들》 (일빛, 2000)

* [절판] 가일스 밀턴 《수수께끼의 기사》 (생각의나무, 2003)

* 존 맨더빌 《맨더빌 여행기》 (오롯, 2014)

* 움베르토 에코 《전설의 땅 이야기》 (열린책들, 2015)

 

 

 

“책 속에 세상이 있다”라는 말이 있듯이 책은 여행과 탐험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옛사람들이 남긴 여행기와 항해 일지는 여행과 모험의 취향을 자극했다. 절판된 《신대륙과 케케묵은 텍스트들》 (일빛)은 고대의 옛 문헌들이 대항해 시대에 끼친 영향을 조명한 책이다. 이 책의 제목에 들어있는 ‘케케묵은 텍스트’란 고대에 만들어진 지도, 지리서, 여행기 등을 뜻한다. 콜럼버스는 ‘탐험가’ 이전에 《동방견문록》과 고대인들의 지리서를 탐독했던 ‘독서가’였다. 콜럼버스 같은 항해가들은 처음에 옛 문헌들을 탐독하면서 미지의 세계를 동경했지만, 그곳을 직접 관찰하고 확인하면서부터 지리에 대한 옛사람들의 생각이 허구임을 깨달았다.

 

《동방견문록》 다음으로 널리 읽힌 《맨더빌 여행기》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서술의 차원을 넘어 세계 일주가 가능하다는 확신을 심어준 책이었다. 존 맨더빌(John Mandeville)은 1322년 예루살렘 성지 순례에 나섰고 무려 34년이 지나서야 영국으로 다시 돌아온 인물(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이다. 그는 성지뿐만 아니라 인도와 중국, 자바와 수마트라까지 다녀온 여정을 기록으로 남겼고, 그가 쓴 여행기는 수백 개의 사본이 나올 정도로 큰 인기를 얻었다. 《수수께끼의 기사》 (생각의나무)는 ‘여행기의 저자’이자 ‘기사’로 알려진 존 맨더빌의 정체를 추적한 책이다.

 

‘케케묵은 텍스트’는 사실과 거짓, 과장이 뒤섞여 있지만, 유럽 너머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데는 충분했다. 콜럼버스도 이 책을 읽고 항해를 위한 영감을 얻었다. 탐험가들은 여행을 통해 확실한 지식을 얻고 나서부터 세계를 설명하는 ‘권위 있는 문헌’이었던 과거 지리서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게 된다. 한 사람이 ‘독서가’(또는 ‘몽상가’)에서 ‘탐험가’로 변모하는 과정은 책에만 의존하지 않고, 경험과 관찰을 중시하는 근대적 지식인이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콜럼버스를 ‘근대적 지식인’으로 보기 어렵다는 평가도 있다.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전설의 땅 이야기》 (열린책들)에 콜럼버스를 지상 낙원을 찾고 싶었던 ‘중세의 마지막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콜럼버스의 한계를 지적한 그의 주장이 틀린 말은 아니다. 콜럼버스는 스페인 공동 왕에게 3차 항해의 결과를 보고한 서한에 지상 낙원이 있다고 언급했다(《항해와 정복》, 『콜럼버스가 3차 항해에서 가톨릭 양왕에게 보낸 편지』). 하지만 그는 1차 항해 결과를 보고한 편지에서 자신이 참고한 고대 문헌에 나온 내용은 ‘눈으로 확인하지 않은 추측’이라고 밝혔다. 그는 분명히 자신에게 영감을 준 고대 문헌들의 부정확함을 비판했다. 콜럼버스는 자신의 업적을 스페인 왕에게 인정받아 아메리카 대륙을 다스리는 총독의 권한을 손에 쥐고 싶었으며 다음 항해를 위한 후원을 받고 싶었다. 그래서 스페인 왕에게 보낸 서한에 아메리카 대륙을 ‘지팡구’인 것처럼 과장되게 묘사했다. 그렇다면 항해 일지와 서한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콜럼버스의 모순된 모습은 이익을 챙기려는 사업가다운 면모로 볼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케케묵은 텍스트들’의 환상에 빠져나오지 않은 중세인의 구시대적 면모로 봐야 하나. 콜럼버스도 알고 보면 ‘수수께끼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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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부인 이야기
제프리 초서 지음, 김재환 옮김 / 나남출판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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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리 초서(Geoffrey Chaucer)는 우리나라에선 다소 낯선 작가이다. 그러나 그를 언급하지 않은 영문학사는 존재할 수조차 없다. 초서가 살던 중세 영국의 공용어는 영어가 아니라 프랑스어였다. 프랑스어가 더 고상한 언어로 간주해 대부분의 영국 작가들은 프랑스어로 글을 썼다. 초서는 영어로만 작품을 쓴 선구적인 존재 중 한 사람이다. 이 점에서 그는 ‘영문학의 창시자’로 불린다. 셰익스피어(Shakespeare)가 영문학의 시조로 알려져 있는데, 오랫동안 상식으로 굳어진 이 평가를 재고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셰익스피어는 초서의 문학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초서는 인간 행동의 천태만상을 묘사한 글을 썼으며 그의 대표작 《캔터베리 이야기》는 귀족, 성직자, 노동자 등 모든 계층을 망라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중세판 인간 희극’이다.

 

《중세부인 이야기》는 초서의 초 · 중기 작품을 모은 책이다. 이 책에 동명 제목의 장시(長詩) 『중세부인 이야기』, 『명성의 집』, 『새들의 회의』, 『열녀전』, 초서가 쓴 것으로 알려진 단시(短詩)이 수록되어 있다. 이미 언급했듯이 초서는 영어로 글을 썼지만, 영국에서 유행한 중세 프랑스 문학의 형식을 따랐다. 중세 프랑스 작가들은 ‘사랑’을 주제로 한 알레고리 형식의 글을 썼는데, 초서는 프랑스 작가들의 글쓰기 방식을 참고했다. 프랑스와 영국 작가들이 선호한 형식을 ‘사랑의 환상(love-vision)이라고 한다. ‘사랑의 환상’ 이야기는 항상 정해진 방향대로 흘러간다. 처음에 남자 주인공은 자신의 연애에 불만을 드러낸다. 그는 불면증을 해소하기 위해 책을 읽다가 잠이 든다. 그리고 꿈을 꾼다. 여기서부터 진행되는 이야기는 ‘환상’이다. 꿈속의 장소는 아름다운 정원이다. 이 정원에서 주인공은 ‘말하는 동물’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로부터 사랑과 인생에 대한 조언과 충고를 듣는다. 의인화된 동물들은 수많은 상징과 알레고리다.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 주인공이 잠에서 깨어나면서(주인공이 현실로 돌아오는 상황) 이야기는 끝난다.

 

『중세부인 이야기』는 초서가 자신의 문학적 후원자였던 블랜치(Blanche) 공작부인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쓴 작품이다. 초서는 이 작품에서 공작부인을 ‘살아있는 아름다운 여성’으로 묘사하면서 그녀의 성품을 칭송한다. 『명성의 집』은 미완성으로 남았지만, 인생의 무상함을 알레고리 기법으로 풍자한 작품이다. 『새들의 회의』는 ‘사랑의 환상’ 형식을 철저히 따른 작품이다. 이 작품에 나오는 다양한 종류의 새들은 인간의 사랑에 대해서 진지하게 토론을 한다. 의인화된 새들은 귀족과 평민을 상징한다. 『열녀전』은 한 남자를 뜨겁게 사랑하다가 배신당해 불행해진 옛 여인들에 대한 이야기 모음집이다. 이 작품은 사랑하는 남자를 배신하는 여성이 등장하는 《트로일러스와 크리세이드》와 대조적이다. 초서는 《트로일러스와 크리세이드》 제5권 후반부에 악녀에 대한 글을 쓴 자신의 행동에 대한 반성의 의미로 정숙한 여인을 주인공으로 한 글을 쓰겠다고 밝혔다. 『열녀전』의 ‘프롤로그’에 작가 본인이 등장하는데, 여기에 ‘사랑의 신’에게 핀잔 듣는 초서의 모습이 나온다.

 

 

[초서-cyrus 주]는 크리세이드가 트로일루스를

저버린 이야기를 영시로 써서

여성들이 타락하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있지?

이제 나[사랑의 신-cyrus 주]에게 한번 대답해 봐.

어째서 너는 여자들을 놓고서 험담만 하고

좋은 소리는 도통 하지 않는 거야?

네 마음속에는 선의라는 것이 없는 거야?

네가 가지고 있는 책 속에는

착하고 정숙한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는 없는 거야?

네가 새 것 옛 것 망라해서 60여 권의 서적을

소장하고 있다는 것은 하느님도 아시지.

거기에는 로마인들과 희랍인들이

여러 여자들의 삶을 다룬 긴 이야기들이 실려 있는데,

백이면 아흔아홉은 좋은 이야기들이야.

이것은 하느님도 아시는 일이고,

그런 문제를 연구하는 학자들도 아는 일이야.

 

 

(『열녀전』 프롤로그, 264~279행, 243쪽)

 

 

 

『열녀전』 프롤로그 264~272행은 자신의 글쓰기에 대한 초서의 자책과 반성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이다. 그러면서 초서는 다음 구절에 자신이 60권의 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자랑)한다. 과거에는 지금과 비교하면 책이 매우 귀했다. 중세 시대에는 보통 크기의 책 한 권을 만드는 데 수십 마리의 동물 가죽이 필요했고 인쇄술이 없었기 때문에 필경사가 한 글자, 한 글자 공들여 써야 했다. 그야말로 중세 시대의 책은 귀족의 전유물이었다.

 

초서의 문학 세계, 즉 중세 영문학을 이해하려면 《중세부인 이야기》, 《트로일러스와 크리세이드》, 《캔터베리 이야기》 순으로 읽는 것이 좋다. 특히 《트로일러스와 크리세이드》와 그 다음에 나온 『열녀전』은 ‘중세 여성’을 바라보는 남성들의 관점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들이다. ‘중세 문학에서 바라본 여성’을 주제로 책을 읽을 때 이 두 작품을 절대로 빠트려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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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11-23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문 원작인 초서의 <캔터버리 이야기>를
스페인어 전문가인 송병선 교수가 번역한
책을 샀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좀 이해가
되지 않더라는.

어떤 우여곡절이 숨어 있는 걸까요.

cyrus 2018-11-23 17:13   좋아요 1 | URL
몇 년 전에 서울 알라딘 종로점에서 이동일 교수가 번역한 <캔터베리 이야기> 합본판을 만난 적이 있었어요. 그 때 그 책을 사지 못한 게 아쉬워요. 결국엔 송병선 교수 번역본을 중고로 샀는데, 이동일 교수 번역본을 읽어볼 생각입니다. ^^;;

북프리쿠키 2018-11-24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켄터베리 이야기 책을 사두고 몇달을 삭히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읽으니 급 읽고 싶어지네요.^^

cyrus 2018-11-26 16:52   좋아요 1 | URL
저도 그 책을 2, 3년 전에 샀는데 아직 읽지 않았습니다. ^^;;

oren 2018-11-24 16: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작부인 이야기』에 나오는 블랜치 공작부인은 랭커스터 공작인 ‘존 오브 곤트‘의 부인으로도 유명한 인물이었더군요. 헨리 4세의 어머니였기도 하고요. 셰익스피어의 사극 가운데 가장 재미있는 작품이면서, 동시에 랭커스터 공작(존 오브 곤트)와 헨리 4세가 둘 다 등장하는 작품으로 <리처드 2세>와 <헨리 4세>가 있는데, 저도 최근에 『캔터베리 이야기』를 읽으면서 초서가 ‘존 오브 곤트‘의 아내인 공작 부인과 매우 깊은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앍고 깜짝 놀랬더랬습니다.^^

또한, 랭커스터 공작에게 ‘랭커스터‘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도 자세히 알고 보니 그의 부인이었던 블랜치 공작 부인의 아버지 이름에서 따 온 것이더군요. 블랜치(프랑스어로는 ‘블랑쉬‘)의 아버지(글로스몬트의 헨리)는 당시 잉글랜드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이자 국왕의 친구였고, 시인과 예술가들의 후원자이기도 했는데, 그가 다른 후계자 없이 죽고 나자 방대한 영지인 랭커스터 령을 블랜치가 상속받게 되었고, 결국 국왕(에드워드 3세)은 자신의 셋째 아들이자 블랜치의 남편이었던 ‘존 오브 곤트‘에게 랭커스터 공작 칭호를 부여하게 되었더군요. 당시 블랜치는 the Duchess라고도 불렸는데, 당시 블랜치가 잉글랜드에서 유일한 공작부인이기 때문이었다고도 하네요.

고귀한 품성과 뛰어난 용모의 공작 부인은 랭커스터 공작과 함께 9년 동안 행복하게 살지만, 20대에 병으로 급사하고, 남편은 큰 상심에 빠져 국왕조차 ‘슬픔 때문에 아들이 죽을까봐 걱정할 정도‘였다고도 합니다. 이들 부부 사이에는 세 명의 자녀가 어른으로 성장하는데, 유일한 아들인 헨리 볼링브로크가 훗날 동갑내기 사촌이자 무능한 국왕이었던 리처드 2세를 폐위시키고 헨리 4세에 즉위하고요.(에드워드 3세의 장남은 일명 ‘검은 갑주의 왕자‘로 백년 전쟁에서 맹활약하지만 갑자기 요절하는 바람에, 결국 그의 아들 리처드 2세가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고, 숙부인 존 오브 곤트가 섭정을 맡기도 하고요.)

그런데 초서의 ‘저자 연보‘를 살펴보니 아내인 필리파가 ‘곤트의 존(랭커스터 공작)의 부인 밑에서 일했다‘고 나오더군요. 그게 1372년 초서가 29세 때의 일인데, 흥미로운 건 그때는 이미 블랜치 공작부인(1347∼1368)이 사망한 뒤라는 점입니다. 랭커스터 공작은 아내가 죽은 2년 후에 ‘카스티야의 콘스탄체‘와 정식으로 결혼했는데, ‘저자 연보‘에 나타난 초서의 아내는 아마도 그녀 밑에서 일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어쨌거나 나중에 기회가 되면 『공작 부인 이야기』도 한 번 읽어보고 싶군요.^^

cyrus 2018-11-26 17:04   좋아요 1 | URL
oren님은 이미 다른 초서의 작품을 섭렵했으니 <공작부인 이야기>도 무난하게 읽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