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함께한 마지막 날들
필립 톨레다노 지음, 최세희 옮김 / 저공비행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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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사람들도 / 굳센 사람들도 /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 어린 것들을 위하여 / 난로에 불을 피우고 /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중략)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김현승의 <아버지의 마음> 중에서)

2006년 9월 4일. 사진작가 필립 톨레다노는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었다. 설상가상으로 아흔이 넘은 아버지가 치매에 걸린 상태였다. ‘네 엄마는 어딨냐’고 끝도 없이 묻는 아버지를 모시는 것은 힘든 시간이었다. 1년여가 지난 후 저자는 아버지의 사진을 찍고 아버지와의 일상을 글로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웹사이트를 만들어 아버지와의 일상을 사진 에세이 형식으로 올렸다.


과거 영화에 출연할 정도로 멋진 외모의 소유자에다 건장한 체격의 아버지는 엄마를 애타게 찾는 아이가 되었다. 아이가 된 아버지는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찾고 있었다. 아들은 어머니가 파리에 갔다는 식으로 둘러대지만 아버지는 잊을 때만 되면 계속 묻는다. 아들 입장에서는 짜증날 법한데 똑같은 말로 대답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집요하게 똑같은 질문을 하게 되면 묵묵히 답변해주는 아버지처럼.

《집안 곳곳에서 이런 글귀들이 적힌 메모를 볼 수 있다. / 당신의 마음속을 설핏 보여주는 증거이자, 내게 숨기려 하는 불안의 흔적들. / 다들 어디 간 걸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 얼마나 혼돈스러우셨으면...》

하지만 아버지는 치매에 의한 망각 때문에 물어보는 건 아닐 것이다. 아버지도 사랑하는 존재의 상실을 느끼기 시작했다. 상실 뒤에 밀려오는 불안과 외로움의 파도는 연역하고 늙은 아버지가 감당하기에는 힘들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아들 앞에서 강인한 모습을 남기고 싶어했다. 불안한 마음을 가족 앞에서 표현하지 않으려는 아버지 특유의 고집은 여전하다. 아버지는 눈물도 말라 가슴으로 혼자 속으로 울고 있었다.


몸과 마음이 위태위태한 아버지가 얼마 남지 않은 하루하루를 연명할 수 있었던 것은 아직 사그라지지 않은 의욕과 유머 넘치는 기질 그리고 항상 자신 곁에 있는 아들이다. 한창 젊었을 때 아버지는 오페라를 듣고 그림과 조각에 능한 예술가였다. 늙은 아버지는 여전히 예술을 한다. 스케치를 하지 못하지만 풍경 감상 뒤에 그림을 구상하는 시간은 아버지에게는 안락한 시간이다. 구상하기 전에 아버지는 멋진 노을 풍경을 감상한다. 아버지는 노을 풍경으로 연작을 그리고 싶다고 밝혔다. 정정한 시절이었다면 풍경화 그리는 것쯤은 아버지에게는 식은 죽 먹기일 텐데. 세월의 노화가 야속하기만 하다.


세상에는 다양한 아버지상이 존재한다지만,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늘 자식들을 마음속에 품고, 정말 열심히 살아왔고, 지금도 살고 계신다. 돈이 많든 적든, 몸이 건강하든 역하든 온전히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사는 아버지는 흔치 않다. 어깨를 짓누르는 삶의 수고를 기꺼이 견뎌내는 세상의 아버지들은 그래서 누구나 존경받기에 충분하다. 아내, 아이들 위해 척추처럼 서야 하는 삶, 때론 강인한 나무처럼 때론 들풀처럼 사셨던 서럽고 강하고 두려운 이름이 아버지다.

아버지는 강하다. 다 큰 자식 앞에서도 강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아침마다 맨손체조를 하고 속옷 바람으로 윗몸 일으키기도 한다. 자신만의 건강 보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날계란 넣은 오렌지주스를 마신다.


《우리 아버지는 정말 재미있는 분이다. / 저 작은 쿠키들을 아버지 가슴에 올려놓았더니 이러시는 거다. / “내 찌찌 봐라!” / 누군들 웃지 않고 배길까?》

아버지는 젊었을 때보다 더 웃음이 많아졌다. 어쩌면 당신 얼굴에 비쳤을 죽음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을 보여주기 싫어서 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난기 발동하면서 활짝 웃는 아버지가 좋다. 웃음은 건강의 보약이라던데 아버지에게는 정력제다. 많이 웃으면 웃을수록 생명의 힘이 다시 샘솟는다.

죽음을 가슴에 새긴 여생을 산다는 건 너무나 우울하고 힘들다. 그러나 오히려 카메라 렌즈로 바라본 아버지의 모습은 너무나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밤새 안녕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깊이 감사한 마음이 느껴진다. 가족과의 일상적인 시간도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아들은 아버지의 모습을 작가는 사진에 담았다.


아버지란 단어를 들으면 미안함이 생긴다. 어릴 적, 부족함이 없이 자란 것은 아버지의 피와 땀이 있는 노력이고, 그 노력은 자식을 위한 마음이고, 그 누구에게도 말 못할 사연들이 모여 있었다. 세상을 살다보니 느껴지는 아버지의 마음이다. 어머니의 모성애는 그리움이 있지만, 아버지의 부성애는 미안함이 있다. 어린 나이에 보이지 못한 아버지의 삶이 나이가 들어서 알게 된다.

저자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눈물을 훔칠 때도 있었지만 평소에는 그냥 지나칠 삶의 소소한 순간들이 너무나 소중했고 그 순간들마다 가슴 깊이 감사했다. 마지막을 생각하니 비로소 그 삶의 소중한 빛나는 순간들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죽음은 모든 삶의 순간과 가치를 재정렬하고 바로 서게 했다. 가장 큰 가르침은 말과 행동을 넘어 삶과 죽음으로 가르친다고 했던가. 아버지의 삶과 죽음으로 전하신 가르침은 작가뿐만 아니라 이 책을 읽은 나 역시 남은 삶의 가장 큰 지표가 됐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내일 세상을 떠난다면, 오늘을 어떻게 살 것인가….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아버지를 꼭 안아주었던 그때 그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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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
미겔 데 세르반테스 지음, 박철 옮김 / 시공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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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001-16] 돈키호테

 

 

 

 

 

 

 

 

 

“운명이 우리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길로 인도하는구나. 저기를 보아라. 산초 판사야. 서른 명이 넘는 거인들이 있지 않느냐. 나는 저놈들과 싸워 모두 없앨 생각이다. 전리품으로 슬슬 재물도 얻을 것 같구나. 이것은 선한 싸움이다. 이 땅에서 악의 씰르 뽑아버리는 것은 하나님을 극진히 섬기는 일이기도 하다.” (99쪽)

 

 

이 말을 마친 돈키호테는 창을 곧추들고 애마 로시난테와 함께 적진을 향하다 거대한 풍차에 부딪혀 나가떨어진다.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의 대표적 장면이다.

 

때로 요란한 장광사설부터 행간 곳곳에 숨어 접전을 벌이는 유머와 냉소에 이르기까지, 기사 무용담을 변주하며 예술과 사회, 꿈 혹은 광기에 대한 속설과 날선 통찰을 쏟아내는 세르반테스의 입담이 워낙 풍부하고 맛깔스럽다. 특히 그 걸출한 입담을, 크고 작은 대결과 선택의 경험이 좀 쌓인 이후에 다시 만나는 감회는 더욱 남다르다. 어려서 처음 접했던 돈키호테, 다수는 이해 못할 꿈을 노자 삼아 좌충우돌하며 심지어 풍차와도 대결하던 중년 사내는 아무래도 좀 우스꽝스럽지 않았던가 말이다.

 

스페인 시골 마을 라 만차에 살고 있는 알론소 키하노라는 노신사. 그는 밤낮 기사도 이야기에 몰두하다가 정신이상을 일으켜 스스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다. 그는 자기 이름을 ‘돈키호테’라고 고친 뒤 이 세상의 부정을 바로잡고 학대받는 자들을 돕기 위한 편력에 나선다. 중세 기사도에 매료된 돈키호테는 세상의 부정과 맞서 싸우기 위해 모험에 나선다. 그는 풍차를 거인으로 생각하고, 양떼를 교전 중인 군대로 생각하며, 포도주가 든 가죽 주머니를 상대로 격투를 벌이기도 한다. 가는 곳마다 미치광이 취급을 당하지만 그의 용기와 고귀한 꿈은 꺾이지 않는다. 산초 판사라는 농민을 종자로 거느린 돈키호테는 모든 것을 기사도 이야기로 해석하고 그 이상에 따라 살아가려 한다. 그러나 산초는 주인과는 반대로 어떤 경우에도 현실과의 타협을 잊지 않으며, 게으르지만 주인에게 충실한 종자다. 돈키호테는 가는 곳마다 현실세계와 충돌하며 비통한 실패와 패배를 맛본다. 이러한 가혹한 패배를 겪어도 그의 용기와 고귀한 뜻은 조금도 꺾이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좌충우돌식 인간형을 두고 ‘돈키호테‘라고 한다. 물불을 못 가리고 나서지 않아야 할 자리에 나서는 사람을 일컫는다. 그러나 ‘모험적인 방랑 기사’를 다룬 이전의 ‘기사 소설’과는 달리 ‘돈키호테’는 우선 귀족이 아니라 힘없는 자들을 위한 기사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상주의자 돈키호테와 현실주의자 산초에 의해 그려지는 평행선은 바로 우리 인간이 삶 속에서 겪는 끊임없는 투쟁을 상징하고 있다. 돈키호테는 ‘내일’을 신뢰하는 인물이다. 독자들에게는 우리가 패배하면서도 끝내 좌절하지 않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를 몸소 보여주고 있다. 그 동안 돈키호테는 억울하게 ‘현실감각이 없는 정신 나간 기사’로 잘못 알려졌던 것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돈키호테가 너무 희화화되어 왔다. 정직한 사람들이 ‘돈키호테적 몽상가’로 취급되는가 하면, 아집과 독선, 한탕주의가 ‘돈키호테적 용기’로 정당화되기 일쑤다.

 

그의 모험 길에 동행할수록 호감보다 연민이 앞설 만큼 엉뚱하다 여겼던 그 모습이, 갈수록 마음 깊이 파고든다. 그 자신의 시대에도 시효 지난 가치 취급을 받는 기사도로 대변되는 정의와 자유, 사랑을 외치는 방랑기사. 무엇이 옳다 그르다 제 기준에 따라 돌진하고, 미친 괴짜 취급을 받아도 자신만의 꿈을 좇는 돈키호테의 여정은, 눈앞의 현실과 다른 이상으로 앓아본 적이 있는 한 그만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돈키호테는 이상에 따른 의무를 다한다. 성패는 중요치 않다. 최선을 다해 앞으로 갈 뿐이다. 그에게 가장 슬픈 것은 실패가 아니라 꿈을 잃고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다. 돈과 사회적 성공 등 소위 보편적인 행복이라 설파되는 삶의 궤도나 정치적, 문화적 대세와 다른 선택으로 소심해질 때, 돈키호테는 살가운 동지적 위안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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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3-05-17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키아벨리와 돈키호테는 가장 많은 오해를 받은 인물이죠.그만큼 <군주론>과 <돈키호테>를 실제로 읽은 사람이 없다는 거구요.

cyrus 2013-05-17 22:04   좋아요 0 | URL
제가 읽는 책은 1부였어요. 돈키호테가 1, 2부로 구성되어 있다고 아는 사람도 많지 않을거에요.
 

 

 

               

 

로베르트 슈만  「시인의 사랑」제 13곡

'나는 꿈 속에서 울고 있었네' (Ich hab' im Traum geweinet)

 

 

 

 

 

시인의 사랑

 

                                                               진은영

 

 

만일 네가 나의 애인이라면

너는 참 좋을 텐데

 

네가 나의 애인이라면

너를 위해 시를 써줄 텐데

 

너는 집에 도착할 텐데

그리하여 네가 발을 씻고

머리와 발가락으로 차가운 두 벽에 닿은 채 잠이 든다면

젖은 담요를 뒤집어쓰고 잠이 든다면

너의 꿈속으로 사랑에 불타는 중인 드넓은 성채를 보낼 텐데

 

오월의 사과나무꽃 핀 숲, 그 가지들의 겨드랑이를 흔드는 연한 바람을

초콜릿과 박하의 부드러운 망치와 우체통 기차와

처음 본 시골길을 줄 텐데

갓 뜯은 술병과 팔랑거리는 흰 날개와

몸의 영원한 피크닉을

그 모든 순간을, 모든 사물이 담긴 한 줄의 시를 써줄 텐데

 

차 한 잔 마시는 기분으로 일생이 흘러가는 시를 줄 텐데

 

네가 나의 애인이라면 얼마나!

너는 좋을 텐데

그녀 때문에 세상에서 제일 큰 빈집이 된 가슴을

혀 위로 검은 촛농이 떨어지는 밤을

밤의 민들레 홀씨처럼 알 수 없는 곳으로만 날아가는 시들을

네가 쓰지 않아도 좋을 텐데

 

 

 

 

가정법의 세계는 슬프다. 특히 사랑에 대한 가정법은 가장 슬프다. 가정법은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에 대한 상상이며 위로이며 서글픈 자위다. 어떤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 실패의 흔적을 상상으로 메우려는 슬픔에 찬 몸부림들. 가정법은 그래서 슬프다. 이루어지지 않은 현재를 계속 노래하고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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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3-05-16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이 식어서 상대가 웬수처럼 보일 때의 가정법도 있죠.차라리 당신을 만나지 않았다면...

cyrus 2013-05-16 21:56   좋아요 0 | URL
ㅎㅎㅎ 제가 진정한 사랑을 해보지 않아서 사랑 후의 가정법을 생각하지 못했네요.
 

 

 

♣ "생각해보겠습니다"와 '해보겠습니다"의 차이

 

나는 전공이 행정학과다. 그러나 이번 학기에 듣는 수업은 전공 강의만 듣지 않는다. 올해가 졸업반이라서 마지막 대학생활을 정말로 공부하고 싶은 타과 전공과목 강의를 듣기로 결심했다. 그 중 듣는 타과 전공 중에 회화과 3학년 전공필수인 현대미술론을 공부하고 있다. 강의를 듣는 학생은 총 40여명. 그 중에 나를 포함한 남학생은 3명이다. 나머지 2명의 남학생은 회화과 소속이다. 나머지 여학생들 중에도 타과 전공이 있다. 실내디자인학과 소속 1, 생명공학과 소속 1명이다. 과 특성상 여초 현상이 있는데다 타과 학생이 듣는 경우가 드물어서 그 수업에서 유독 눈에 띈다. ‘현대미술론을 가르치는 교수님 또한 여자인데 그렇다고 내가 외모가 출중해서 교수님 눈에 띈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 학교 내에서 행정대학 소속 학생이 예체능 계열, 그것도 회화과 전공 강의를 듣는 학생은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이다. 교수님 입장에서도 나 같은 학생을 처음 봤을 것이다. ‘행정대학이라는 소속의 분류가 이방인이나 다름없는 내가 교수님의 눈에 확 들어올 수 있는 일종의 차별화된 이미지로 굳어져서 좋은 점은 있지만 단점도 있다.

 

가끔 교수님은 내가 행정대학 소속 학생이라서 그런지 미술적 기본지식 수준이 회화과 학생들보다 낮게 볼 때가 있다. 이래봬도 작년 학기에도 같은 회화과 전공과목이며 동일 교수님이 가르치던 서양미술사를 들은 적이 있었으며 그 수업을 듣기 전부터 나름 미술사의 기본적인 흐름을 꿰뚫은 편이다. 잘난 사족 하나 덧붙이지자면 서양미술사수업은 많은 시간 투자하지 않고 공부해서 A+학점을 받기도 했다. 내 성격은 상대방에게 드러내지 못한 또 다른 나의 재능을 은연중에 숨기면서 점층적으로 드러내는 편이다. 내 손으로 직접 양파껍질 하나하나 벗기듯이 말이다. 그럴 때 상대방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는 걸 느끼는 순간, 기분이 좋다. 하지만 너무 드러나지 않게 되면 이런 오해를 꾹 참고 감수해야 한다. 그래도 기본부터 내실을 다진다는 마음으로 임하여 공부를 하게 되면 미술에 대한 생각과 시야를 확장할 수 있어서 좋다. 예전에 책으로만 읽던 공부와는 학문을 습득하는 과정과 그 기분이 차이가 있다. 회화과 수업을 가르치는 교수님이 화가로 활동하시는 분이라서 최신 현대미술의 트렌드(Trend)를 귀동냥으로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교수님의 학습법이 좋은 또 다른 이유는 과제를 많이 내면서도 현대회화의 흐름에 맞는 주제를 낸다. ‘고전주의 양식을 A4 용지 5장 이상 쓰시오.’라든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회화에 대해서 논하시오,’와 같은 무리하게 미술론을 작성하라는 식의 고리타분한 과제를 제출하지 않는다. 특정 영화나 미술 관련 다큐 영상을 보여주고 감상문을 쓰라거나 사물을 바라보는 나만의 관점 등을 쓰는 과제를 주로 낸다. ‘현대회화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붓과 팔레트를 쥐는데 익숙한 회화과 학생들은 글쓰기를 어려워하는 편이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현대미술론담당 교수님이 과제 어렵기로 유명하다. 갑작스럽게 교수님이 과제 하나를 제출할 때마다 회화과 학생들이 울상과 탄식을 연발할 때 나는 마음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최근에 또 교수님이 과제를 공시했는데 예전에 낸 것보다 한층 더 창의적인 형식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현대미술의 방식에 근거해서 자신만의 작품을 구상해서 간단하게 포트폴리오 형식으로 소개하는 것이다. 교수님은 또 이번 과제에 학생들의 발표까지 요구하셨다. 회화과 학생들은 졸업하기 전에 자신만의 작품을 제작, 완성해야 한다. 제작하면서 자신이 작업하고 있는 작품을 전공교수에게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작업 과정을 담은 포트폴리오를 만들어야 한다. 쉽게 말하면 일종의 작품 노트라고 보면 될 것이다.

 

처음에 교수님이 그 과제를 언급했을 때는 비 회화과 학생인 내가 불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취업하기 위해 만든다는 취업 포트폴리오 하나라도 만들어 본 적이 없는 내가 어떻게 작품 포트폴리오를 만들 수 있는가? 이번에는 붓을 한 번도 쥐어 본 적이 없는 내가 불리하게 된 셈이다. 잠깐 생각에 빠진 사이에 갑자기 교수님이 나를 향해 말을 건다.

 

“cyrus은 비 회화과 학생이라서 이번 과제가 생소하겠지만 너한테도 미술을 보는 시야를 넓히는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는데... 혹시 발표해 볼 생각은 있니?”

 

교수님이 말을 걸기 전까지 발표할 생각이 전혀 없어서 짧게 생각해보겠습니다.”라고 유보적인 대답을 했다. 그러자 교수님의 말. 그래, cyrus가 해보겠단다. 난 네가 발표할 줄 알았어.”

 

생각해보겠습니다.”라는 말을 교수님은 발표를 하겠다는 의미의 해보겠습니다.”라고 잘못 듣고 만 것이다. 본의 아니게 과제에 대한 부담을 떠안고 말았다. 과제 공지한 날 이틀 뒤에 수업이 있어서 작품을 구상하고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데 주어진 시간은 거의 하루뿐이었다. 다행히 그 하루가 강의 한 개도 없는 공강 요일이라서 강의 시간에 구애받지 않게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었다. , 아쉬운 점이 있다면 편안하게 집에서 휴식을 취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고민은 쉽게 풀렸다. 내가 미술 지식이 정말 문외한이었다면 하루 이상 구상하고 만드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특별히 좋아하고 관심이 있는 화가 한 명을 염두하고 있다는 것도 과제를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 마그리트를 위한 오마주(Hommage)

 

 

 

 

cyrus  「마그리트의 달걀」 2013년, 포토샵으로 제작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회화 기법에 빌려서 '마그리트의 달걀'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만들었다. 이 하나의 그림을 만드는 데 구상에 공들인 시간이 많았을 뿐 제작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10분 정도 밖에 안 들었다. 마그리트는 일상적인 관계의 사물을 추방하여 이상한 관계에 두는 일탈의 사고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이 그 특징이다. 이러한 기법을 '데페이즈망' (dépaysement)이라고 한다.

 

 

 

 

 

 

 

 

 

 

 

 

 

 

 

 

 

 

 

 

 

 

마그리트의 회화에서 사물은 일반의 상식과 기대를 저버리는 방식으로 관객에게 등장한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대상이 결합되어 나타나거나, 사물이 그 고유의 성질을 상실한 채 묘사된다. 흔히 보는 일상적 사물의 크기를 변형하여 특유의 초현실주의적 효과가 나타난다. 본질적인 사물의 의미가 상실되어도 그의 그림은 아름다우면서도 매혹적이다. 낯설게 느껴지는 아름다움이다. 

 

 

 

 

 

르네 마그리트  「피레네의 성」 1959년

 

 

내가 만든 그림을 보면 벌써 눈치 챘겠지만 그림의 배경은 마그리트의 유명한 그림 「피레네의 성」에서 인용했다. 혹자는 이러한 방식을 패러디(parody), 짖궃게 말하면 표절이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패러디가 아니라 오마주(hommage)에 가깝다고 보면 된다. 패러디는 원전을 모방하면서도 그것이 안고 있는 의미의 문제점을 폭로하고 희화화하는 데 중점을 둔다면 오마주는 원작의 존경과 경의에 대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hommage는 프랑스 어로 '존경' '감사', '경의'라는 뜻이다)

 

 

 

♣ 깨지지 일부 직전 달걀의 의미는?

 

 

 

 

 

 

 

 

 

 

 

 

 

 

 

 

 

 

 

 

 

 

그렇다면 하늘 위에 둥둥 떠다니는 커다란 달걀은 무슨 의미일까? 자세히 보면 달걀에 깨진 흔적이 있다. 이제 막 부화할 조짐이 보이는 상태다. 깨지기 직전 상태의 달걀을 보자마자 '아프락사스'(Abraxas)가 연상되었다면 정말 대단한 미적 감성의 소유자라고 칭찬하고 싶다. 그림 속 달걀은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아프락사스를 의미한다.

 

 

 

 

 

 

르네 마그리트  「천리안(투시)」 (1936년)

 

“새는 알에서 빠져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

 

 

사실 알의 상징은 마그리트의 또 다른 작품들에도 무수히 등장한다. 그 중 아프락사스의 의미를 가장 잘 나타낸 그림이「천리안」이다. 새가 태어나 위해 알을 깨고 나오는 것처럼 낡은 구세계(알)를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아프락사스)로 향해야 한다. 우리는 알의 상태, 즉 자고 있다. 가능성으로서의 존재이며 자고 있는 상태인 알(인간)에게 깨어 있는 결과로서의 새(자유, 생명, 목표)가 되어야 한다. 새가 알을 깨는 고통을 느끼지 않고서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없듯, 사람 역시 어떠한 일을 성취하기 위해 그만큼의 고통을 느끼고 인내해야 한다. 새는 아프라삭스라는 신을 향해 날아가듯 사람 역시 저마다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비상하고 있다. 저 커다란 알은 결국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의 모습이기도 하다.

 

 

 

♣ 그림을 그린다고 해서 미술이 되는 건 아니다

 

 

 

 

 

 

 

 

 

 

 

 

 

 

 

 

 

 

"뭐야, 이것도 그림이야?"라고 반문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과제로 한 번 만들어 본 장난스러운 합성사진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그림'이라고 생각하지 않다고 좋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오늘의 현대미술은 붓을 잡고 대상을 똑같이 재현해서 그린 그림을 환영하지 않는다. 고전적인 재현의 그림은 피카소가 괴상한 형태의 인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마르셀 뒤샹이 전시회에 소변기를 출품한 그 순간부터 종말을 고했다고 볼 수 있다.

 

 

 

 

 

 

마르셀 뒤샹  「샘」 1917년

 

 

1917년 어느날 한 하드웨어 상점에서 구입한 변기에 리처드 머트(R.Mutt)라는 이름을 서명한 뒤 뉴욕 앙데팡당전에 출품한 후 심사위원들로부터 배척당한 이 작품은 현대미술의 향방을 결정한 미술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작품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의 변기 작품 ‘샘’은 여전히 현대미술이 얼마나 기괴하며 현학적인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물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반 고흐나 피카소의 작품을 귀히 여기는 것은 천재적 예술가의 손을 거쳐서 완성된 유일무일한 것이기 때문인데 이 변기작품 ‘샘’처럼 기계로 만들어진 대량 생산품인 변기를 선택한 후 예술가가 ‘이것도 예술이다’라고 선언한다면 과연 그것을 예술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러나 작품의 오리지널리티에 반기를 든 뒤샹에게 있어서 직접 자신의 손으로 만들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평범한 생활용품을 선택하여 전시함으로써 물건의 실용성은 사라지고 그저 ‘사물’로 돌아가는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예술가의 선택행위 즉, 아이디어인 것이다. 눈에 보이는 사물이나 풍경을 그림으로 그리는 수공적 기술의 재현행위가 아닌 선택한다는 정신적 행위가 예술가의 본질이라는 그의 이론은 기존미술에 도전하는 개념미술의 기초를 이루었다.

 

사람들은 현대미술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전시장의 작품들을 보며 이것도 작품인가 의아해한다. 그러나 우리 주위의 일상적 사물을 상식의 눈으로 바라보면 그저 의자, 병, 조그만 달걀 등등일 뿐이지만 소변기조차도 일상적 사물로서의 인식을 단절하고 순수한 형태적 의미만으로 바라본다면 대칭적이며, 부드러운 곡선을 가졌고, 우아한 기하학적 오브제로 새로운 모습으로 발견하게 된다. 비루한 내 합성사진 작품도 그렇다. 고정관념의 의미로 구분하려는 사고를 조금만 벗어난다면 또 하나의 미술로 볼 수 있다. 이렇게 이해한다면 현대미술은 어렵지만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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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 개정판
피천득 지음 / 샘터사 / 200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 때 묻지 않은 순수의 파문을 남긴 거문고 소년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 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여 있는 비취 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34쪽)

 

오월이 되면 ‘영원한 거문고 소년’ 금아(琴兒) 피천득 선생의 수필이 생각난다. ‘밝고 맑고 순결’해야 할 오월의 세상은 찌뿌듯하지만 선생의 수필은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밝고 맑고 순결’한 빛은 여전하다. 마음이 시끄러울 때가 있다. 세상의 아찔한 속도에 질려 중심을 잃고 흔들릴 때도 있고, 목소리 큰 사람들 속에 섞여 교만과 오만으로 가득 찬 또 다른 내가 튀어나올 때도 있고, 그날이 그날 같은 건조한 일상에 지쳐 마음이 버석거릴 때도 있다. 그렇게 세상살이에 숨이 찰 때 찾게 되는 책이 바로 <인연>이었다. 이 책을 처음 만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4년 전, 한창 군 복무를 하고 있을 때였다. 책을 읽고 나면 으르렁거리던 전쟁터 같은 마음이 깊은 호흡을 한 것처럼 편안해지곤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적만 여섯 번, 책을 꺼내 든 것은 셀 수가 없다. 그때마다 선생의 글은 내게 휴식과 위안을 줬다.

 

선생의 수필은 맑은 시냇물 위로 퐁당퐁당 물수제비를 뜨는 조약돌이다. 거문고 소년은 시냇물 근처를 지나가다가 그 곳 근처에 휴식을 취한다. 반질반질하면서도 납작한 조약돌 하나를 집어 던져본다. 물에 잠기는 듯싶다가 허공으로 튕겨 오르고, 다시 수면을 스쳐 거듭 솟구친다. 사라지는 자취 사이로 은은하게 향기가 뿌려지듯 인생의 깊은 지혜와 성찰이 깔린다. 건너편 기슭에 닿듯 가슴 깊숙이 선명한 흔적을 남긴다. 그리고 때 묻지 않은 순수로 이루어진 파문(波紋)의 흔적은 세월이 지난 지금도 마음의 수면 위에 잔잔하게 남아 있다.

 

 

 

♣ 우리 인연의 끈이 다하니 어찌할 수 없나 보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137쪽)

 

사랑 감정에 무딘 시절엔 이 글이 그저 만남의 안타까움을 표현했거니 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보니, 우리네 인연에 대해서 이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한 글이 또 있을까 싶다. 첫사랑은 이렇듯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인연이다. 우리는 흐르는 시간만큼이나 무한한 인연과의 숙명적 관계 속에서 산다. 그 속에서 느끼는 아쉬움과 기쁨의 무게는 삶의 일부가 되고 인생이 된다. 사람을 대상으로 한 이별 중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때다. 그 충격은 삶을 송두리째 부정할 만큼 크다. 불가의 가르침에 따르면 세상사의 괴로움도 인연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집착을 버리라고 가르치지만 범인(凡人)들은 족탈불급이다. 좋든 싫든 어차피 인연에서 벗어나지 못할 처지라면 좋은 인연은 간직하는 체념의 전환이 필요하지만 쉽지만 않다.

 

 

 

 

이승환의 노래 ‘당부’에 이런 가사가 있다. “우리 인연의 끈이 다하니 / 어찌할 수 없나 보오.” 딱 그 노랫말과 같은 심정이다. 나는 만남보다는 이별에 익숙하지 않다. 아는 사람이 잠시라도 내 곁을 떠날라 손 치면 가슴앓이를 시작하고 한 번 앓으면 오래 가는 편이다. 사별이 아닌 이별은 공간적인 헤어짐을 뜻한다. 그래서 더욱 가슴을 옥죈다. 살아 있으나 한 장소에 머물지 못하는 답답함. 함께할 수 있음에도 아니, 같은 하늘 아래에서 숨을 쉬고 있음에도 대면할 수 없다는 안타까움은 상대적으로 클 수밖에 없다.

 

 

 

♣ 누추하고 작은 일상 속에서 발견하는 추억과 성찰

 

‘나의 사랑하는 생활’을 읽었을 때, 딸을 바라보는 선생의 따뜻한 시선과 그녀를 아끼는 마음, 그리고 딸과 함께 하는 흐뭇한 시간과 공간이 무척 부러웠다.

 

“나는 젊은 웃음소리를 좋아한다. 다른 사람 없는 방안에서 내 귀에다 귓속말을 하는 서영이 말소리를 좋아한다. (중략) 내가 늙고 서영이가 크면 눈 내리는 서울 거리를 같이 걷고 싶다.” (191~192쪽)

 

금아 선생의 글은 지나간 사람들과 사건들에 대한 추억과 성찰에 기초하고 있다. 길지 않은 문장과 많지 않은 내용을 가지고 우리의 누추한 일상을 돌아보게 한다. 선생의 글쓰기에는 ‘수필’에서 몸소 밝힌 내용들이 그대로 체화되어 있으며, 바로 그런 이유로 글 하나 하나가 잔잔하지만 깊은 맛을 마음속으로 다가온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있는 것이다. (중략) 수필은 한가하면서도 나태하지 아니하고, 속박을 벗어나고서도 산만하지 않으며, 찬란하지 않고 우아하며, 날카롭지 않으나 산뜻한 문학이다.” (18~19쪽)

 

<인연>에서 내가 가장 눈 여겨 바라보는 대목은 두 여성에 대한 선생의 각별한 마음이다. 선생의 어머니와 딸이다. <인연>은 크게 ‘종달새’, ‘서영이’, ‘피가지변’의 세 부분으로 편집되어 있는데, 어머니와 딸에 대한 이야기는 두 번째 '서영이' 편에 들어있다. 선생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매우 낯익은 느낌이 났다. 주요섭의 단편소설 <사랑 손님과 어머니>의 이야기와 흡사하다. 특히 어린 시절의 선생이 유치원에서 몰래 빠져 나와 벽장에 숨었다가 깜빡 잠들어 늦은 시각에 엄마 품에 안겨 한없이 우는 장면은 어제 본 것처럼 기억에 삼삼하다.

 

선생은 나이 들어 어머니를 회상할 때에도 반드시 ‘엄마’로 표기한다. 너무 일찍 선생을 버리고 아버지 곁으로 영영 떠나버린 어머니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과 사무치는 마음 때문일 것이다. 그런 엄마의 모습이 선생의 경우에는 아내와 겹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딸의 모습과 겹친다는 점이 특히 인상적이다. 수필 ‘엄마’에서 선생은 말한다.

 

“나는 엄마 같은 애인이 갖고 싶었다. 엄마 같은 아내를 얻고 싶었다. 이제 와서는 서영이가 엄마 같은 여성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또 하나, 나의 간절한 희망은 엄마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99-100쪽)

 

선생의 엄마와 같은 여성으로 자라기를 바랐던 그 딸이 어린 시절부터 유치원을 거쳐 대학생이 된 이후 유학생이 될 때까지의 기록이 ‘서영이’ 편에 고스란히 들어있다. 선생의 글모음을 바라보면서 현대의 건조하고 삭막한 가족관계를 새삼 반추한다.

 

 

 

♣ ‘괜찮다, 괜찮다’라고 위로해주는 고마운 수필

 

 

<인연>에서 선생은 독자들에게 그 어느 것 하나도 강제하지 않으며, 강력한 어조로 주장하거나 훈계하지 않는다. 그냥 잔잔하고 부드러운 말투로 선생의 지나온 날들과 사념과 경험을 진솔하게 말하고 있을 따름이다. 소박함과 진실함, 부드러움과 넉넉함, 단점보다는 장점을 보려는 노력, 바로 이런 덕목이 <인연>을 오늘날에도 늙지 않고 살아있는 수필의 반열에 오르도록 하는 미덕이라 생각된다. 어쩌면 이것이 수필의 힘이 그런 게 아닐까? 속도에 지친 우리들을 뒤돌아보게 하고, 삶에 지쳐 주저앉고 싶을 때 ‘괜찮다, 괜찮다’라고 위로해 주고, 어딘가 숨어 있을 삶의 보석을 찾아주는 게 바로 수필이다. 생각날 때 읽게 되는 수필집 ‘인연’은 빛이 바랬다. 하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수많은 문장들은 세월이 갈수록 더 빛이 난다. 그래서 더욱 고마운 마음에 ‘영원한 거문고 소년’이 생각난다. 선생이 이 세상과 처음으로 ‘인연’을 맺었고, 끝으로 ‘인연’을 조용히 접은 그 날(5월 25일은 금아 선생의 생일이자 영면일) 이 열흘 남짓 정도 남았는데도 불현듯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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