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은 오랫동안 남성이 만들어 놓은 여러 허상 속에 갇혀 지내왔다. “여자는 사회적으로 열등할 수밖에 없다는 통념은 여성에게 억압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여성의 사회활동을 제약하는 것은 여성의 신체구조보다 사회 제도적 문제와 사회제도를 정당화시키는 이데올로기다. 굳이 페미니즘의 논의를 빌리지 않아도, 고착화되고 이데올로기화 된 성의 정체성이 인간에게 하나의 억압이고 굴레라는 것은 이제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상식이다.

 

 

 

 

 

 

 

 

 

 

 

 

 

 

 

 

 

 

읽고 쓸 줄 아는 남성들은 남성을 위한 이데올로기를 만든다. 남자들은 지식을 향유할 수 권리를 독점했다. 글쓰기의 역사는 남근중심주의와 함께해왔다. 여자가 독서를 하면서 글을 쓴다는 것은 권위주의(남성 우월주의)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었다. 책을 읽은 여자는 자의식을 스스로 가지게 된다. 그리고 똑똑해진다. 여자는 책을 만남으로써 남성의 울타리 밖으로 나와 자신의 것을 구축할 수 있게 된다.

    

 

 

 

 

 

 

 

 

 

 

 

 

 

 

 

    

 

동문선의 메두사의 웃음/출구에 수록된 출구는 원래 카트린 클레망 공저의 새로 태어난 여성에 있는 글이다.

    

 

 

엘렌 식수(Hélène Cixous)여성적 글쓰기를 이렇게 정의했다. “여성은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써야 한다.” 여성은 스스로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야 하고 역사 속에 부각시켜야 한다. 이와 동시에 자신을, 자연 발생적으로 흘러넘치는 자신의 이야기를 텍스트로 표현해야 한다. 여성적 글쓰기가 본격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한 곳은 프랑스다. 1968년 프랑스에서는 가부장제 담론을 해체하는 포스트페미니즘의 영향으로 에디시옹 데 팜(Édition des Femmes)’이라는 출판사가 설립되었다. 출판사 이름을 우리말로 옮기면 여성출판사. 에디시옹 데 팜은 여성 해방 운동의 선구적인 역할을 하는 출판사로 프랑스 페미니즘의 중심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사실 1970년을 기점으로 프랑스 페미니즘은 두 개의 분파로 나뉘어 형성되었는데, 글의 주제와 벗어난 내용이라 이에 대한 설명은 생략한다. 소피아 포카의 포스트페미니즘을 참고하면 된다) 엘렌 식수는 에디시옹 데 팜의 설립을 환영했으나 자신은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거부했다. 왜냐하면, 가부장제 규범을 거부하여 자신의 사회적 위치의 정당성을 얻으려는 페미니스트들이 여성과 남성의 차이라는 이분법적 체계에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다고 봤기 때문이다.

 

식수가 말한 여성적 글쓰기는 남성을 적으로 간주하지도 않고, 평등권 쟁취를 위하여 투쟁해야 할 대상으로 삼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우선 여성 자신의 내적인 성찰을 통해 여성적 특성을 찾아내 종이 위에 표현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선 여성은 남성 중심의 엘리트주의, 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허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즉 여성 고유의 정신적·신체적 영역을 부각하는 것이다. 식수는 20세기 프랑스 작가 중에 여성적 글쓰기를 실천한 작가가 많지 않다고 봤다.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마르그리트 뒤라스, 그리고 장 주네, 이 세 사람만이 여성적 글쓰기를 실천한 프랑스 작가로 언급했다.

    

 

    

 

 

 

 

 

 

 

 

 

 

 

 

 

 

철학자의 서재에 수록된 <‘알파걸은 결코 모르는 여성의 비밀>을 쓴 연효숙 연세대 인문학연구원 전문연구원은 남성적 글쓰기를 하지 않은 작가로 버지니아 울프, 제인 오스틴, 에밀리 브론테를 거론한다. 그런데 여기에 콜레트가 빠지면 여성적 글쓰기라는 단어를 처음 만든 식수는 불만을 표출했을 것이다. 국내 작가 또는 비평가들은 여성적 글쓰기 사례로 영미 작가들만 편중되어 소개하고 있다. 그것도 여성적 글쓰기가 프랑스에서 시작된 포스트페미니즘 운동의 한 방식이라는 사실을 쏙 뺀 채 말이다.

    

 

 

 

 

 

 

 

 

 

 

 

 

 

 

    

 

표지가 없는 책은 꼴레트-바가봉드(예전사, 1993),

'바가봉드'는 방랑하는 여인》의 원제.

    

  

 

콜레트의 방랑하는 여인은 여성적 글쓰기의 전범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소설 제목인 방랑하는 여인은 주인공 르네 네레를 의미한다. 르네의 직업은 경력 3년 차인 뮤지컬 겸 연극배우다. 특히 팬터마임 공연에 능숙한 솜씨가 있다. 사실 콜레트도 팬터마임, 무언극 배우로 활동했다. 콜레트는 자신의 삶을 종이 위에 그대로 옮겼다. 르네는 그야말로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방황하는 여인이다. 그녀는 전남편과 이혼하여 자유로운 독신 생활을 누리고 있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남성을 만나고 싶은 갈망이 자리 잡고 있다. 르네는 자신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하는 막스의 청혼을 거절한다. 르네는 예전과 같은 결혼 생활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면 르네는 남편의 권위에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야 한다. 그녀는 자유로운 삶의 행복과 가정의 행복 사이에서 갈등한다.

 

집에 홀로 남아있는 르네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진짜 정체성을 무엇인지 고뇌한다. 이 장면이 차지하는 분량은 그리 짧지 않다. 여기서 콜레트는 여성적 글쓰기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 “... 이 단어를 되뇌며 마음에도 없이 거울을 들여다본다. 그러나 거기, 검붉게 칠하고, 눈 주위에 번들번들한 푸른색 띠를 두르고 있는 것은 분명 나 자신이다. 눈가의 테가 녹기 시작한다... 얼굴 나머지 부분까지 녹아내리도록 두어 버릴까? 그러면 내 모습에는 긴 눈물자국 같은 꽁꽁 얼고 찐득찐득한 얼룩만이 남을까?” (5~6)

 

* “오늘 밤 난 이 긴 거울과 마주 대하고 그토록 열심히 피했다가 받아들이고 도망쳤다 다시 붙들리던 독백과 마주칠 수밖에 없는 운명인가 보다. 아무리 기분을 돌리려 해도 쓸데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느낀다.” (12)

 

* “난 신비스럽게 반사되는 방 안의 거울 속에서 길을 잘못 든 여류작가의 모습을 본다. 사람들은 내가 연기를 한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결코 배우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왜지? 그건 관객들이나 내 친구들이 내가 선택한 일에 대하여 등급을 부여하기를 예의상 거절하려는 미묘한 뉘앙스 때문이다. 그러나 이 생활은 바로 내가 선택한 것이다... 길을 잘못 든 여류작가 더 이상 글을 쓰지 않는 나, 글을 쓰는 사치, 쾌락을 스스로 거부하는 나... 그런데도 모두에게 그렇게만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이다...” (14~15)

 

 

 

집에서 쓸쓸히 거울을 바라보는 르네의 모습은 남성들을 위한 가장 무도회가 끝난 뒤 휴게실에서 홀로 남은 여장 배우의 쓸쓸한 상황과 비슷하다. 르네는 남자들의 분위기에 맞추면서 연기하는 삶에 점점 염증을 느낀다. 그러면서 진짜 여자를 발견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이미 자신을 향한 남성의 시선에 익숙해진 르네는 자신의 참 모습을 바라보는 일을 두려워한다. 르네는 자신의 독백을 쓸데없는 일로 치부해도 자기 자신을 글로 쓰는작가가 되고 싶다. 그렇지만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는 르네를 길을 잘못 든 여류작가로 본다. 르네가 잠시 글쓰기를 중단하고, 배우 일에 전념하게 된 이유가 여성적 글쓰기를 인정하지 않는 남성들의 따가운 시선에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콜레트는 <클로딘 시리즈>라는 작품을 발표하여 엄청난 인기를 얻었지만, 남성 비평가들은 그녀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작가였던 그녀의 전남편 앙리 고티에 빌라르는 자신의 필명으로 콜레트의 작품을 발표했다. 콜레트는 남편의 강요에 못 이겨 <클로딘 시리즈>를 연달아 써야만 했다. 빌라르의 아내였던 콜레트가 이 시절 썼던 작품들은 그녀가 원하는 진짜 글이 아니었다. 빌라르와의 이혼은 콜레트가 여성적 글쓰기를 실행하기 위한 결정적인 출구였다.

 

식수는 남성들이 진정 두려워하는 것은 여성의 자유로운 생명력이라고 말한다. 남성은 여성의 신체와 마음 모두 자신의 기준에 따라 검열했다. 오래된 억압 속에 살아간 여성은 자신 고유의 신체와 마음 심지어 언어까지 빼앗기고 말았다. 생명력이 상실된 여성은 목이 잘려나간 메두사다. 그녀의 눈을 보는 사람은 돌로 변한다. 남성들은 자신을 당당하게 바라보는 메두사를 두려워했다. 메두사는 원래 괴물이기 전에 아름다운 미인이었다. 그런데 남성 같은아테네 여신의 저주를 받아 흉측한 괴물로 변했다.

 

 

메두사를 보기 위해서는 정면에서 그녀를 바라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메두사, 그녀는 치명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녀는 아름답다. 그리고 그녀는 웃고 있다. (엘렌 식수, 메두사의 웃음/출구메두사의 웃음’ 29) 

 

 

예나 지금이나 남성은 생명력 있는 여성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그런 여성을 아무 이유 없이 성격이 못난 벌레또는 괴물로 만들어서 질투하고 혐오한다. 그러므로 여성은 자기 자신을 글로 써야 한다. 반이성적으로 여성을 왜곡하고 비하하는 기이한 사회 속에서 여성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내기 위해 당당하게 글을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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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07 2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6-08 18:33   좋아요 0 | URL
좋은 말씀이다. 인생을 한 권의 책으로 비유하면 풍성한 경험과 사유의 기록들을 채워가면서 사는 것이 하나뿐인 인생 잘 사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

:Dora 2016-06-07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콜레트♥

cyrus 2016-06-08 18:34   좋아요 0 | URL
정말 콜레트는 멋진 언냐입니다. ㅎㅎㅎ

수이 2016-06-09 22: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퇴근 전인데 집에 가서 다시 읽어봐야지.
 
카운터스 - 인종 혐오에 맞서 싸우는 행동주의자의 시원한 한 방!
이일하 지음 / 21세기북스 / 2016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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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들은 누굴까? 그들의 몸에 문신이 가득하다. 문신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엄연한 몸의 자유이지만, 이 사회에서 문신은 강렬한 폭력적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영화를 보면 조직폭력배는 항상 문신하고 있다. 이들은 자기 과시나 결속력, 충성심의 표현으로 문신을 새긴다. 사진 속 남자들 모두 일본인이다. 큰 덩치로 봐서는 야쿠자 조직원들 같다. 이들이 문신을 보여주면서 한자리에 모인 이유는 무엇일까?

 

 

 

 

다음 사진은 길거리 시위에 나선 일본인들의 모습을 담은 것이다. 서양식 양복을 곱게 차려입고 나온 시위대원에 눈길이 간다. 시위 현장에 어울리지 않는 복장이지만, 평범한 시민처럼 보인다. 사실 문신에 새긴 남자들은 야쿠자가 아니라 시위대원이다. 그들의 모습은 마치 온몸 가득 문신한 네오나치 시위대를 연상한다. 두 번째 사진에 나온 푸근한 모습의 시위대원과 대조된다. 첫 번째 사진 속 남자들이 과격한 몸싸움을 벌이는 시위대로 보일 수 있다.

 

언제부터인가 일본에서 격한 반한(反韓) 감정을 드러내면서 가두시위를 벌이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을 비롯한 외국인들에 대한 노골적인 반감을 품은 극우주의 세력이다. 대부분이 재특회(재일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의 모임)와 관련되어 있다. 이 단체 조직원들은 웹사이트를 통해 시위 시간과 장소 등 정보를 공유하고 있고, 시위 관련 비디오 등을 사이트에 올리고 있다. 일명 넷우익이라 불리는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일본과 일본인뿐이다. 넷우익 활동을 하는 이들은 가히 조직적이며 공격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인터넷에서 한국인인 척 가장하며 중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 대해 공격적인 말을 해대는가 하면, 역사를 왜곡한다. 일본뿐 아니라 여타의 다른 나라에서도 반한 감정을 갖게 하는 것이다.

 

 

 

 

두 장의 사진 중 하나는 재특회 시위와 관련되었다. 일본의 반한 시위 풍경을 본 적이 없는 한국인들은 문신을 새긴 남자들이 재특회 회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진짜 재특회 시위대원은 두 번째 사진 속 남자다.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해선 안 된다. 양복 입은 남자가 바로 재특회 설립자이자 회장으로 활동했던 사쿠라이 마코토다. 사쿠라이는 고등학교 졸업 후 아르바이트와 비정규직으로 생활하던 소심한 성격의 사람이었지만 ‘혐한류’로 장사하는 출판사와 일부 방송국으로 인해 한순간에 떠오른 ‘관심종자’다. 그는 위안부에 대해 “매춘부였던 사람들이 70년 지난 뒤에서야 피해를 봤다고 주장하며 떼를 쓰고 있다”고 망언을 했다. 강제 징용된 이들에 대해서도 “돈을 벌기 위해 지원했다”는 근거 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일본 내에서도 재특회의 과격한 행동에 대해 좋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많지만 그들 자신은 폭력과 폭언으로 점철된 자신들의 행동에 자부심을 느낀다.

 

 

 

 

 

 

반한 극우 시위에 맞서는 반대 시위도 이어지고 있다. 첫 번째 사진 속 남자들의 정체는 혐한 시위에 반대하는 ‘오토코구미(男組)’라는 단체 소속 시위대원이다. 이들은 누구이고 왜 반대 시위에 나선 것일까. 재특회와 마찬가지로 이들도 인터넷상에서 만나 혐한반대 맞불 시위를 준비한다. 혐한 감정을 부추기는 혐오 발언을 반대하는 이들을 가리켜 ‘카운터스(counters)’라고 한다. 카운터스의 활동은 혐한 반대 시위에 그치지 않고 아베 정권의 안보법안 개정과 평화헌법 개정 시도에 맞서는 시민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15년 전 유학을 떠난 후 줄곧 일본에서 지내온 이일하 씨는 오토코구미의 활동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고, 영상에 담지 못한 기록들을 책으로 정리했다.

 

《카운터스》는 시위라는 어두운 주제만 다루지 않는다. 시위 현장 밖에 있는 오토코구미 대원들의 진솔한 모습까지 보여준다. 오토코구미의 혐한 반대 시위 선봉장에 나서는 다카하시는 전직 야쿠자 출신이다. 무력으로 시위를 저지하는 집단인 오토코구미가 특이할뿐더러, 대장인 다카하시도 범상치 않다. 나쁜 놈이 더 나쁜 놈을 잡는 상황이 이채롭다. 혐한 시위가 공권력 보호를 받고 카운터스 움직임이 오히려 경찰로부터 제지받는 일이 벌어졌다. 이때부터 오토코구미는 ‘조용한 운동’이었던 일본 시민운동의 역사를 바꿨다. 오토코구미는 혐한 시위 목소리가 거리를 뒤덮지 않게 하려고 확성기를 사용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다. 또 혐한 데모 행진을 저지하고자 온몸으로 도로를 점거한다. 재특회가 먼저 오토코구미 시위대에 폭력을 가하는 부득이한 상황이 발생하면, 다카하시 같은 덩치 큰 조직원들이 나서야 한다. 이들이 있어야 조직원들을 보호하고, 재특회의 과격한 진압을 막을 수 있다. 폭력을 미화할 수 없지만, 혐오 발언을 일삼는 자들을 응징하는 오토코구미 조직원들은 정의의 카운터펀치(counterpunch)다.

 

 

 

 

재특회의 도를 넘어선 과격한 혐오 발언과 행동은 외려 자기네 주장에 근거도 확신도 없다는 점만을 부각할 뿐이다. 폭력은 거짓을 감추려는 행동일 뿐 자신들의 주장이 확실하다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카하시도 우익이다. 그는 극우세력의 반한 시위가 인간으로서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었다고 지적한다. 오토코구미는 일본 사회가 보편적 이성과 인간성으로부터 일탈하려는 상황을 막고 있는 셈이다. 만약 그들이 행동으로 나서지 않았으면 일본 시민들은 반한 시위를 방조했을 것이다.

 

재특회는 민족주의도 우익도 아니다. 오토코구미는 좌익도 우익도 아니다. 서로 다른 두 단체에 속한 사람들은 평범한 보통사람들이다. 재특회는 일본의 오랜 경기 침체와 국제사회에서의 영향력 퇴조가 초래한 산물이다. 회사 여직원이거나 호감이 가는 청년, 집 안에서는 좋은 아빠인 이들이 시위 현장에선 과격한 말을 쏟아낸다. 반면 일상화된 혐오 발언과 폭력 시위가 방치되는 최악의 상황을 견디지 못하는 시민들은 오토코구미 시위에 자발적으로 동참한다. 이들은 이념의 차이를 떠나 반한 시위의 부당함에 공감하고, 행동으로 연대한다. 평화와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는 오토코구미의 모습은 혐오 발언에 무감각해진 우리 사회가 본받아야 할 점이다. 흔히 사람들은 혐오 발언 및 사회적 약자 차별 문제를 ‘놔두면 해결될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도 일본처럼 간과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혐오 발언은 자유의 선을 넘은 비인간적인 표현이다. 이를 알면서도 우리는 조금쯤 옆으로 비켜선 채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며 옹졸하게 반항한다.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글쓴이 주)  결단력이 없으면 행동주의자가 되는 일이 어렵다. 이 책 마지막에 나오는 오토코구미 일원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처음 재특회가 이상한 짓을 하고 다닐 때 나섰어야 했어. 코리아타운에 오기 5년 전부터 알았는데 말이야. 그러니까 한국도 미리미리 막아야 할걸?” (231쪽)

 

 


※ 글쓴이 주 : 김수영의 시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구절 일부를 인용했습니다.

 

※ 흑백 사진은 21세기북스 출판사 공식 홈페이지에서 가져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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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as 2016-06-07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이상한 짓을 할때 나섰어야 했다는 말이 참 와닿네요. :0

cyrus 2016-06-07 19:29   좋아요 1 | URL
일베 회원들이 세월호 유가족 단식 시위를 하고 있을 때 방해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들도 언젠가는 어버이연합처럼 단체 시위로 나설 수도 있습니다. 솔직히 좀 걱정됩니다. 일베 회원들의 몰상식한 행동과 혐오 발언을 심각하게 바라보기만 할뿐 확실히 대처하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ㅠㅠ

2016-06-07 2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6-07 20:10   좋아요 0 | URL
아마도 정신 못 차리는 일베 회원들이 나이가 들어서 어버이연합 비슷한 단체를 만들 것 같습니다.

박람강기 2016-06-07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극적으로 자신의 신념을 드러내는 모습이 멋지네요..

cyrus 2016-06-08 18:37   좋아요 0 | URL
혐한 시위 반대하는 사람들이 처음에 자발적으로 모여서 시위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동참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조직적으로 시위를 하는 단체가 생겼습니다. 정말 대단한 시민들입니다.

transient-guest 2016-06-08 0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마지막에 인용하신 부분이 맘이 닿습니다. 이곳에서는 힐러리 vs 트럼프의 구도로 갈 것 같습니다. 트럼프 같은 놈이 나오기 시작할 때 잡았어야 하는데 무능하고 무력한 공화당 지도부는 초반에 주도권을 빼앗긴 후 다시 찾지 못했지요. 지금이라도 적극적으로 저지하지 않으면 그런 놈은 계속 나올 것 같습니다. 일베나 어버이연합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지금이라도 더 적극적이고 조직적으로 대항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cyrus 2016-06-08 18:46   좋아요 0 | URL
극우세력 시위, 일베의 혐오발언 문제 등의 심각성을 누구나 알고 있는데, 이를 구체적으로 제재하는 방법을 강구하는 담론이 형성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심각성을 깨달으면 자발적으로 대항할 겁니다. 그러지 못하고 `시위 대 시위` 양상으로 가면 물리적 충돌만 일어날 뿐입니다.

transient-guest 2016-06-08 23:09   좋아요 1 | URL
개인적으로 일베나 어버이연합 사람들은 좀 맞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만.. 폭력 vs 폭력의 구도로 물타기 되는 건 막아야겠죠..ㅎ
 

 

 

 

 

서울경기지역 출판지부는 6월 11일부터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마다 오후 1시~7시 동안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앞에서 자음과모음 규탄 시위를 하려 합니다. 여러분, 함께 해주시길 요청드립니다. 이 싸움으로 윤정기 조합원의 정상적인 업무 복귀와 원청의 직접고용이라는 목표가 이루어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유일한 목표는 아닙니다. 독자와 시민들에게,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자신에게 자음과모음의 탄압과 부당함에 맞서는 출판노동자와 윤정기의 싸움이 정당하다는 것을 알리고 확인하는 것 역시 우리가 이 싸움을 시작한 목적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다짐하려 합니다. 여러분, 우리 함께합시다.

 

피케팅은 6월 11일 토요일부터 매주 토, 일요일에 진행합니다. 아래에 성함과 연락 가능한 전화번호, 피케팅에 참여할 날짜를 알려주시면 스케줄 조정 후 개별 연락드리겠습니다.

 

문의: happybooknodong@gmail.com / 010-2618-9561

 

 

 

* 피케팅 참가 신청서(링크)

 

https://docs.google.com/forms/d/1KBsEEz1jzoQFij0T29ZwEq5QnEHizDNu6XT0KUWUlso/viewform?c=0&w=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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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6-06-08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케팅을 같이 못 해드려 죄송합니다. 저 역시 자음과 모음 책은 사지 않겠습니다. 힘 내세요! 윤정기 조합원의 복귀를 기원하겠습니다. 투쟁!

cyrus 2016-06-08 18:48   좋아요 0 | URL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대구에 거주하고 있어서 피케팅에 참여하지 못합니다. 평범한 독자들이 할 수 있는 건 출판사의 부당 행위와 부당한 대우를 받은 직원들을 기억하는 것이고, 해당 출판사의 책을 사지 말아야 합니다.
 
저자 하지현분 삭제

 

 

 

“여성단체는 모두 페미니스트다” 여성단체와 페미니스트 모두에 대해 일반인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이다. 그 외에도 몇 가지 오해가 더 있다. 여성단체와 페미니스트는 여성의 권리가 불리한 문제가 발생하면 길거리 시위를 한다. 그들은 여성의 이익만을 주장한다. 심지어는 자기주장이 강한 드센 여자들이 모인 곳이라고 생각한다. 페미니스트는 여성과 남성이 상생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사람들이다. 크게는 여성의 인권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이다.

 

 

 

 

 

 

<리얼뉴스>의 헤드라인, 그리고 문제가 많은 헤드라인을 자신의 트위터에 리트윗한 하지현 씨는 페미니스트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을뿐더러 오히려 그 편견을 강화하고 있다. 페미니즘 반대론자, 여성 혐오자, 일베 회원들이 페미니스트를 비난할 때 쓰는 흔한 레토릭(rhetoric)이다. 그리고 어설프게 페미니스트를 흉내 내는 남자들이 가끔 저지르는 논리적 오류이기도 하다.

 

<리얼뉴스> 헤드라인을 삼단 논법으로 재구성하면 이렇다.

 

 

대전제 : 여성 단체와 페미니스트는 강남역 살인사건에 분노했다.


소전제 : 흑산도 여교사 성폭행 사건은 강남역 살인사건처럼 여성을 상대로 남성이 저지른 범죄다.


결론 : 그러므로 여성 단체와 페미니스트는 흑산도 여교사 성폭행 사건에 분노해야 한다(관심을 가져야 한다).

 

 

<리얼뉴스> 헤드라인을 뽑은 기자는 페미니스트의 이중성을 지적한다. “페미니스트들은 흑산도 성폭행 사건을 알고 있느냐?”, “강남역 피해자를 추모한 사람들이 왜 흑산도 성폭행 사건 피해자에게는 위로하지 않는가?” 해당 헤드라인을 읽은 사람들, 그리고 페미니즘 반대론자, 일베 회원들은 강남역 살인사건에 분노했던 페미니스트들의 반응을 부정적으로 본다. 금방 쉽게 식어버린 페미니스트들의 ‘냄비 근성’이라고 비판한다. 하지현 씨는 페미니스트가 흑산도 성폭행 사건에 대해서 일말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는 이유를 가지고 페미니스트를 ‘쓰레기’로 비유하면서 ‘정의롭지 않은 사람’으로 매도한다.

 

반 페미니즘 정서를 부추기는 잘못된 생각이다. 강남역 살인사건과 흑산도 성폭행 사건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천인공노할 일이다. 성별, 이념의 차이를 떠나서 인간이라면 가해자들의 만행에 용납을 못 하며 분노를 느끼고, 피해자에게 연민을 느낀다. 이건 보편적인 반응이다. 이러한 감정적 반응을 ‘포스트잇 시위’ 같은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았다고 해서 페미니스트와 여성 단체를 겨냥해서 지적하는 것은 부당한 논증이다. 애초에 흑산도 성폭행 사건에 침묵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문제로 삼으려면 ‘포스트잇 시위’를 하지 않는 대중의 태도를 지적해야 한다. 그런데 ‘포스트잇 시위’를 하지 않는 수많은 사람 중에 유독 페미니스트만 거론하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리얼뉴스> 헤드라인은 ‘쓰레기’라고 생각하며 하지현 씨의 입장에 절대로 동의하지 않는다.

 

만약에 페미니스트와 여성 단체가 흑산도 성폭행 사건을 자주 언급하면서 남성이 저지른 성 범죄 사건의 심각성을 부각시켰다면, 과연 남자들이 어떠한 반응을 보일지 자못 궁금하다. 여러 가지 반응을 예상할 수 있다.

 

 

“요즘 여성들은 성 범죄 사건 일어나면 심각하게 과민 반응을 보인다.”

 

“페미충들이 또 다시 미쳐 날뛰기 시작합니다.” (일베 회원의 반응, 페미충은 페미니스트를 비하하는 일베식 표현)

 

 

여성이 피해를 보는 성 범죄 사건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싶은 여자를 만나면, 남자는 불편한 심경을 드러내면서 물어본다. “너도 페미니스트였어?” 페미니스트를 잘 모르는 남자는 페미니즘에서 느끼는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페미니즘에 대한 편견 혹은 공포에서 비롯된 오해이다. 선입견이 사라지지 않으면 여성 차별 문제에 대해서 함께 고민하고 연대하는 기회가 사라진다. 하지현 씨가 페미니스트인지 아닌지 논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페미니즘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스스로 물어볼 필요는 있다. 어설픈 논리로 페미니스트를 비판하는 사람은 여성의 내면과 요구를 이해하지 못하는 여성차별주의자만 못하다. 여성(페미니스트)에 대한 편견을 인정하는 사람은 대화와 설득이 가능하지만, 여성을 잘 안다고 착각하거나 페미니스트를 무시하는 사람은 손 쓸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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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빵 2016-06-07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베는 논외로 하고 메갈리온은 싫습니다. 주장은 일면 옳지만 의도가 의심스럽기 때문입니다. 극단적 페미니스트들에게 반감도 들었지만 그들의 심정은 이해합니다. 한겨레에 칼럼쓰시는 분은 평화학주의자 비슷한 말씀을 하시는데 저는 의도를 은근히 가리는 것 같아서 싫습니다. 여성학학자가 좋지 않나 생각됩니다. 남과 여는 떼어놓고 살수 없는게 아닐까요? 서로 도와가며 싸워가며 아웅다웅 살아가는게 좋은 것 같습니다.

cyrus 2016-06-07 16:19   좋아요 0 | URL
저도 여성 혐오에 똑같이 대응하는 메갈리아의 태도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혐오를 혐오로 맞선다? 오히려 부질없는 갈등만 이어질 겁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한쪽 성별의 단점을 부각시키면서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것도 싫어합니다. 이건 총성 없이 남자와 여자가 서로 싸우는 기이한 전쟁입니다. 이 전쟁이 종결되기가 쉽지 않아 보입니다. ㅠㅠ

마립간 2016-06-07 0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조금 전 글을 올린 것과 관련있기에.

`일베`, `페미니스트`, `하지현`, 모두 논외로 하고, (이글에도 언급된) `대중의 태도`에는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cyrus 2016-06-07 16:26   좋아요 0 | URL
어제 제가 밝힌 의견을 오늘 스스로 반박하는 입장이 우습지만, 지금 생각해보니까 언론의 태도에도 문제 있습니다. 지금 언론은 흑산도 성폭행 사건에 조용한 대중의 반응을 비판하기 전에, 자신들이 사건을 알리는 보도 방식을 반성해야 합니다. 사실 언론이 먼저 보도하기 전에 이미 많은 사람들은 흑산도 성폭행 사건에 대해서 알고 있었습니다. 인터넷으로 알려진 것이죠. 그리고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언론은 특종 감을 잡았다는 심정으로 흑산도 성폭행 사건을 마치 자신들이 직접 취재한 것처럼 보도했습니다. 저는 그런 언론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듭니다. 자신들도 여태까지 사건이 일어난 사실을 몰랐으면서 일이 크게 알려지니까 대중이 사건에 관심 없다고 지적하고 있으니 어이가 없습니다.

포스트잇 시위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흑산도 성폭행 사건 피해자를 안타깝게 생각하고, 뻔뻔한 가해자들의 태도에 분노를 표출하고 있습니다. 흑산도 사건 관련 뉴스 댓글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증오하는 입 - 혐오발언이란 무엇인가 질문의 책 2
모로오카 야스코 지음, 조승미.이혜진 옮김 / 오월의봄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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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오사카의 거리에 “조선인들을 떠나라” “조선인은 기생충이다”라고 무시무시한 구호를 외치는 일본 우익단체의 시위가 부쩍 늘어났다. ‘재일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모임(이하 재특회)’ 회원들은 도쿄 신오쿠보(新大久保) 역 주변 한인 타운에 모여 매주 혐한 시위를 벌인다. 파리채로 태극기를 치는 퍼포먼스를 벌이는 이도 있다. 재특회는 2007년 설립돼 인터넷을 중심으로 반한 시위를 주도하는 단체다. 이 단체는 등록 회원이 1만여 명에 이르고 연 1,000만 엔에 이르는 기부금으로 운영된다. 전통적인 우익단체와 달리 소셜네트워크서비스로 시위 현장 동영상을 전파하고 온라인에서 지지를 호소하는 방법으로 세력을 급속하게 확장했다. 그래서 ‘넷우익(Net 우익)’으로 불리기도 한다. 5.18 민주항쟁을 폭동으로 폄훼한 ‘일베’와 흡사하다.

 

재특회가 반한 시위를 하는 일차적 명분은 ‘재일 한국인이 일본 내에서 특권을 누리고 있어서 그 특권을 폐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특별 영주 자격을 철폐하라고 외친다. 재일 한국인은 특별 영주 자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중범죄를 저질러도 모국으로 추방당하지 않는다. 재특회는 이 법이 다른 불법 체류 외국인과 비교할 때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한국인을 비롯해 재일조선인, 외국인 등 특정 민족에게 증오 섞인 표현을 쏟아낸다. ‘혐오 발언(hate speech)’은 인종, 민족, 종교, 국적, 직업 등으로 나뉘는 특정한 집단에 대해 사회적 편견과 폭력을 부추긴다. 단순히 구호만 외치는 것도 아니다. 조총련계 학교에 난입해 난동을 부리기도 했다.
 
1923년 관동대지진 직후 조선인 학살은 혐오 발언이 부른 참극이었다. 흉흉해진 민심을 잡기 위해 일본은 조선인을 희생양으로 지목했다. 일본 언론은 한술 더 떠 조선인에 대한 적개심을 부추겼다. 그 결과 수천 명의 조선인이 학살당했다. 혐오 발언 수위가 점점 높아지는 재특회의 혐한 시위가 국제적인 관심사가 되고 있다. 오히려 한국 언론보다 미국, 유럽 언론이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나치가 자행한 인종차별 경험 때문인지, 혐한시위를 심각하게 보고 있다. 혐오 발언이 횡행함에 따라 우려스러운 것은 재일조선인들의 처지다.

 

국제사회의 비판에 대응한 조치로 해석되지만, 일본 내에서는 혐오 발언 규제 법률을 제정하라는 요구도 높아지고 있다. UN 사회권위원회는 일본 정부가 혐오 발언 규제에 나설 것을 권고한 바 있다. 일본은 차별금지를 법률로 제정할 것을 촉구하는 인종차별철폐협약(제4조)에 가입했지만, 헌법상 ‘표현의 자유’(제21조)를 이유로 법률을 제정하지 않고 있다. 반면 독일과 영국, 프랑스 등은 법률로 규제하고 있다. 남의 일인 것처럼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기에는 우리 사정도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다. 일본이나 외신 언론을 받아 쓴 기사는 간혹 찾아볼 수 있지만, 직접 시위 현장이나 재일조선인 피해를 심층 취재한 기사는 보기 어렵다. 해외 현장이라는 어려움이 있긴 하지만, 이슈의 당사국 언론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미국이나 유럽 언론, 특히 중국 언론에 비해서도 혐오 발언에 대한 관심이 이례적으로 적다.

 

일본의 우익 정치가는 재특회와 손잡아 혐오 발언 선전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들은 재일조선인과 좌익은 일본의 명예를 해친다고 보고 있다. 물론, 혐오 발언을 반대하는 우익도 있다. 과거사에 대한 사죄를 일본의 불명예로 왜곡하는 것은 애국이 아니라 광적인 배타주의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1970년대부터 유신정권은 반한과 친북을 양산했다. 1980년대 말 민주화 이후에도 색깔론이 반복되고 있다. 진보 진영에 대해 마구잡이로 종북이라는 낙인을 찍는 어버이연합, 동성애와 다문화제도에 반대하는 일베의 모습은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는 반일과 좌익 낙인찍기와 비슷하다. 또 미래를 위해 과거의 국가 폭력과 인권침해의 역사를 비판하는 것조차도 종북으로 매도하는 것은 일본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반일, 좌익 낙인찍기와 유사하다. 일본은 혐오 발언을 심각하게 보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전혀 그렇지 않다. 소수자 및 개인에게 정신적 피해를 주는 혐오 발언을 그저 가벼운 농담으로만 인식한다. 김치녀, 홍어(광주를 비하하는 은어), 통구이(대구를 비하하는 은어) 그리고 세월호 사고 희생자와 그 가족들을 조롱하는 혐오 발언이 인터넷상에서 쉽게 남발되고 있다.

 

우리나라 시민사회가 그나마 조금은 이성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긴 하나 아직도 많이 미흡하다. 혐오 발언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바라보고, 적극적으로 비판하는 공감 여론이 깊게 형성되지 못한 상태다. 2012~2013년 일베 논란이 숱한 화제를 뿌렸을 때, MBC <100분 토론>에서 일베를 유해매체물로 지정되지 않은 것에 대한 주제로 토론이 진행된 적이 있었다. 이때 토론 패널로 참여한 변희재는 일베를 유해매체물로 지정하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므로 접속차단 등의 조치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일베 회원들을 극우주의자로 보는 시각에 동의하지 않는 입장을 보였다. 일본 정부는 표현의 자유라는 이유로 혐오 발언 규제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다. ‘표현의 자유’는 혐오 발언 규제에 반대하는 우익들이 불리할 때 사용하는 유일한 보루다.

 

‘표현의 자유’와 ‘인권 침해’. 누구라도 부정할 수 없는 두 가지 자유 중에서 무엇을 우선시해야 하는가. 혐오 발언 문제의 현황을 고발한 《증오하는 입》의 저자이자 변호사인 모로오카 야스코는 혐오 발언을 법적으로 규제하는 입장에 찬성한다. 다만, 표현의 자유가 침해되지 않는 선에서 혐오 발언의 용례를 정리한 가이드라인이 먼저 마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베 회원 일부는 표현의 자유를 이용해 불특정 다수에게 피해를 준다. 표현의 자유는 누구나 누릴 수 있는 민주적인 보편 가치다. 그런데 일베와 재특회, 일부 극우주의자들은 이런 보편 가치를 자신들만의 특권처럼 사용한다. 그것도 소수의 사회적 약자를 괴롭히는 언어 폭행의 무기로 사용한다. 표현의 자유는 사회적 약자의 자유를 억압하는 무기가 될 수 없다. 이러한 분위기 아래서 표현의 자유 의미가 왜곡되는 상황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건강한 시민사회 구성원이라면 시비를 가리고, 정도를 구분하며,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과 억압에도 예민하게 반응해야 한다. 그리고 거기에 맞서 대항하는 이성적인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소심한 독자 입장에서는 이념 진영을 떠나서 혐오 발언에 관한 더욱 근본적인 고민이 시작되길 바랄 뿐이지만 그것마저 쉽지는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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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06 0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6-07 07:11   좋아요 0 | URL
일본의 시민운동이 어느 수준 단계에 올라섰으며 역사가 어떤지는 잘 모릅니다. 님 말씀처럼 일본의 시민운동 역사가 비교적 짧은 편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혐한 시위를 반대하는 자발적 시민단체가 등장하니까 일본 언론들은 ‘돌연변이’라는 반응을 보이더군요. 혐한 시위를 반대하고, 거기에 행동으로 맞서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이 있었습니다. <혐오하는 입>을 읽은 뒤에 이일하 씨의 <카운터스>를 읽었는데, 제가 일본을 선입견으로 바라봤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