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주 시전집 - 1953-1992
이연주 지음 / 최측의농간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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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났군요.” 올해 들어 기형도의 시집을 자주 꺼내 든다. 김현의 해설을 잠깐 펼친다.

 

기형도의 리얼리즘의 요체는 현실적인 것(-개인적인 것-역사적인 것)에서 시적인 것을 이끌어내, 추함으로 아름다움을 만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시적인 것이 현실적인 것이며, 현실적인 것이 시적인 것이라는 것을, 아니 차라리 시적인 것이란 없고, 있는 것은 현실적인 것뿐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 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진흙탕에서 황금을 빚어내는 연금술사가 아니라, 진흙탕을 진흙탕이라고 고통스럽게 말하는 현실주의자이다.

 

(김현, 《입 속의 검은 잎》 해설 152~153쪽)

 

이어 검은색 표지의 《이연주 시전집》을 꺼내 든다. 김현의 정의를 받아들인다면,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의 1990년대적 변용을 이 시집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연주의 세계는 한층 극단적으로 조정된 이미지의 대비, ‘구역질’이라고 일컬을만한 비틀림과 부조화의 잔인성을 드러낸다. 이연주는 어둠을 '어둠'이라고 고통스럽게 말하는 현실주의자이다.

 

 

바람난 에미가 도망치고 애비가 땅을 치고 울고

 

애비가 섰다판에서 날을 세고
그 애비의 아이가
애비를 찾아 섰다판 방문을 두드리고

 

본드 마신 누이가 찢어진 속옷을 뒤집어 입고
지하상가 쓰레기장 옆에서
면도날로 팔목을 긋고

 

세 살 난 막내가 절룩, 절룩 자라가고
에미 애비와 누이의 일들을 거침없이 이해하고

 

오늘,
밤마다 도시가 하나씩 함몰되고, 나는
등불에서
등심지를 싹둑, 싹둑 잘라내고

 

 

(이연주 「가족사진」, 26쪽)

 

 

그녀의 시 세계를 관통하는 한 마디의 주제라 할 수 있을 '죽음'은 이렇게 자신도 잘 기억하지 못했던 유년시절부터 공기처럼 주위에 있었던 셈이다. 왜 죽음일까. 그것은 수수께끼 같은 삶의 의미를 해독하려는 시인의 몸짓일 것이다. 죽음을 통해 거꾸로 삶을 보는 방법이다. 우리는 흔히 90년대를 지금보다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그때도 그랬었다. 절망의 구석도 많았고 그것을 헤집고 나서지 못한 젊은이들도 많았다. 자꾸만 물질로 기우는 의식들. 그래서일까. 당시의 부조리한 현실은 그 자체가 일종의 테러리즘이었다. 이연주는 이를 박차고 나가기가 힘들었을까. 그의 시는 내내 이런 구석들을 철저하게 파헤쳐 있다.

 

 

이제, 용기 있는 이별 앞에
석유는 준비되었느냐?
성냥이 찬이슬에 젖어버리진 않았겠지?
노숙하는 이의 쓰라린 밤잠을 불러오너라
우리 함께,
다 같이 나도 말이지
 
살아 남아 슬프지 않은 나라,
옳거니, 기쁜 일이다, 가자.

 

 

(이연주 「방화범」 중에서, 50쪽)

 

 

마치 자기 죽음을 예고라도 하는 듯한 구절들이 엄숙하다. 그러면서도 아무런 망설임 없이 자신의 몸을 파괴하는 완숙함. 읽을수록 시인의 단호한 어조가 사납게 느껴진다. 시인은 어둠의 저편에서 내뿜는 죽음의 습기를 지켜보는 자이다. 「매음녀 6」은 어머니를 매개로 두터운 망각의 지층 속으로 사라질 뻔한 자아와 죽음을 응시한다.

 

 

어머니, 날 낳으시고 젖이 없어 울으셨다.
어머니 숨 거두시며
마음 착한 남자, 등짝 맞대 살으라 이르셨다.
나는 부둣가에서
선술집 문짝에 내걸린 초라한 등불 곁에서
매발톱 손톱을 키워 도회지로 흘러왔다.
눈 붙이면 꿈속에서 어머니
이 버러지 같은 년아,
아침까지 흑흑 느껴 우신다.
내 심장 차가운 핏톨, 썩은 물 흐르는 소리.
나는 살 속 깊은 데서 손톱을 꺼내
무덤을 더 깊이 판다.
하나의 몫을 치르기 위해 삶이 있다면
맨몸으로 던지는 돌 앞에 서서 사는
이 몫의 삶은......
희미한 전등불 꺼질 듯 끄물거린다.

 

 

(이연주 「매음녀 6」, 46쪽)

 

 

시인은 죽음으로 끝난 어머니의 삶을 대신 이어가려는 어느 딸의 삶을 그리고 있다. 시인이 말하는 한 인간의 죽음이 무엇을 말하는지 불확실하지만, ‘희미한 전등불 꺼질 듯 끄물거린다’에서 볼 수 있듯이 벼랑 끝에서 시인의 몸을 던져버리는 상징적인 의미로 이해하고 싶다. 그러나 이연주 시인이 말하는 죽음은 이런 개인적 죽음의 응시만은 아니다. 90년대는 도시의 빌딩이나 인간, 어느 쪽도 순수함을 간직하지 못하고, 더럽혀진 욕망에 노출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새로운 세상을 앞둔 세기말이 다가오는 이 시대에 적어도 시를 쓰는 사람이라면 죽음이라는 주제에 자유로울 수 없다. 시인은 상실감에 주저앉거나 탈속과 초월의 세계로 숨어들기보다 혼곤한 정신을 깨우는 절규를 노래 방식으로 선택하고 있다. 그녀는 가슴에 끓어오르는 격정을 머뭇거리지 않고 단숨에 토해내고 있다. 그런 현실 속에서 상처받고 찢기면서 마음의 쓸쓸함을 견디려는 시인의 모습이 아로새겨져 있다.

 

시인은 쓸쓸한 삶의 풍경 속에서 희망을 찾아 헤맨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희망이란 가정일 뿐이며 이 세상 바깥은 온통 어둠 속에 잠겨 있다. 세상에 없는 그녀를 사람들이 더욱 잊지 못하는 것은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뒤흔드는 허무와 절망에서 솟음치는 진실한 회한 때문일 것이다. 그녀가 시를 쓰는 행위는 불가능에 이르는 도정(道程)이고 따라서 그 자체가 지긋지긋한 죽음의 과정이다. 이연주의 시는 그 죽음의 도정의 기록이다. 지상에서의 삶의 헛됨과 추악함을 우의적으로 보여주는 그녀의 시가 밝은 면을 선호하는 독자들에게는 불편한 구석이 분명 있다. 그렇지만 이미 시커먼 욕망으로 지배되어 시궁창이나 다름없는 이 세상을 생각한다면 그녀의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을 이해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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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11-08 18: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이전에 < 속죄양, 유다 > 에 대해서 평점 별 4를 부과했는데.. 지금은 땅을 치고 후회하고 있습니다. 이연주의 고통과 남성 시인이 자기 연민에 빠져서 징징거리는 것을 혼동한 까닭입니다.
비교가 안 되죠.. 사실은. 이 시집 저도 곧 조만간 살 계획입니다만.... 좋은 시집을 농간 측에서 출간해 주시니 고맙습니다..

cyrus 2016-11-09 14:00   좋아요 0 | URL
시인의 남동생 분과 생전에 시인이 활동했던 문학 동인지 소속 회원들이 아니었으면 시전집이 나오지 못했습니다. 시인의 재능이 제대로 활짝 펴지 못한 게 아쉽습니다.

yureka01 2016-11-08 2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시집,,장바구니 넣도록 하겠습니다...아픔의 언어가 곳곳에 베어져 있어요..면도날처럼...

cyrus 2016-11-09 14:00   좋아요 0 | URL
기형도 시집만 계속 팠던 제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이연주 시인이 재평가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지난주 금요일에 올린 게시물과 관련해서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그 날 서재지기님의 답변을 듣기도 전에 과민하게 반응했습니다. 제가 감정에 치우친 상태에서 검열 운운하는 글을 쓰는 바람에 몇몇 이웃님들에게 혼란을 주고 말았습니다. 제 글을 보고, 알라딘을 오해한 분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근거 없는 오해가 확장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서재지기님의 답변을 공개합니다.

 

내용이 길더라도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그래도 바쁘신 분들을 위해 서재지기님의 답변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114[북플 하이퍼링크 기능 설정 오류]라는 글이 원래 서재지기 게시판에 작성되었습니다. 저는 이 글을 등록하기 전에 동시에 내 페이퍼로 등록설정을 체크했습니다. 동시에 내 페이퍼로 등록설정은 서재지기 게시판에서만 볼 수 있는 기능입니다. 동시에 내 페이퍼로 등록설정하면 서재지기 게시판의 글이 원본이고, 제 서재에 등록된 글은 복사본이 됩니다.

 

비슷한 내용의 글이 화제의 서재글에 동시에 노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복사본화제의 서재글에 노출되지 않습니다.

 

 

 

 

 

 

동시에 내 페이퍼로 등록설정된 글 위에 전 출처표시가 뜹니다. 북플에서 다른 회원의 글을 공유한 게시물도 마찬가집니다. 북플에 공유한 글을 알라딘 서재에 확인해보면 전 출처표시를 볼 수 있습니다. 북플에 공유한 글 역시 좋아요수를 받아도 화제의 서재글에 노출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내 페이퍼로 등록설정된 글과 북플에 공유한 글은 마이페이퍼개수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안녕하세요.

cyrus, 알라딘마을 지기입니다.

 

금요일 오후에 문의주셨는데, 저희도 개발팀에 로직을 점검하고 답변드리느라 늦게 답변드리게 되었습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말씀하신 글(http://blog.aladin.co.kr/haesung/8880233)

원글(http://blog.aladin.co.kr/zigi/8880232)의 복사본 글로 보고 서재메인에 노출이 되지 않습니다. 알라딘 마을지기의 서재처럼 쓰기 권한을 타인에게도 허용한 서재에서 글을 쓰면서 동시에 내 페이퍼로 등록옵션을 체크한 경우한 경우 그렇습니다. 또는 북플에서 글을 보다가 공유 > 북플로 한 경우도 서재메인에 노출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정책은 알라딘서재 초창기부터 적용되어오고 있습니다. 서재 초창기에는 자신 서재의 일부 카테고리를 타인에게 쓰기 권한을 주어 게시판처럼 활용하는 게 많았는데, 이 때 원본글과 사본글이 서재메인에 떠서 혼동을 주는 문제가 있어서 원본글만 서재메인에 노출이 되도록 제한을 했던 것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이의 적용은 운영자가 모니터링해서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서버에서 자동으로 처리하고 있습니다. 저희 알라딘 서재 운영자는 정보통신법에 따라 게시판을 운영하는 업체로서 관리의 의무가 있는 성인/스팸/광고글, 저작권 및 출판사/저자에 대한 명예훼손의 소지가 있는 글을 위주로 모니터링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이러한 법적인 제약사항의 적용을 최소화하고 글쓰기의 자유를 더 우선에 놓고 운영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저희가 조치를 취하는 경우 일일이 메일로 통지를 해드리며, 반론권을 보장하고 있습니다. 출판사나 저자가 문제제기를 하더라도 알라딘 이용약관 및 정보통신법에 근거하여 문제가 없는 글의 경우에는 처리하지 않고 있습니다.(이런 경우는 끝까지 출판사/저자가 글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면 출판사/저자에게 정식공문을 받고, 글 작성자에게 공문을 전달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알라딘에 대한 비판적인 글, 알라딘 서재/북플의 버그 등에 신고글에 대해서는 일체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은 반성해야할 일, 부끄러운 일로 보고, 서비스를 개선하고, 버그 잡는 중요한 제보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기술개발적인 버그 때문에 서재 메인에 노출되지 않아 검열로 오해를 받는 것 자체도 있어서는 안 될 일임에 분명합니다. 저희도 좀 더 경각심을 가지고 좀 더 많은 사전 테스트를 하도록 하겠습니다.(아울러 서재 메인에 노출되는 글은 짐작하시는 대로 추천수(좋아요 받은 수)와 댓글수를 기본으로 하여, 스팸/광고성 글들이 올라오지 않도록 하는 것과 한 서재에서 너무 많은 글이 한번에 노출되지 않도록 하는 처리를 적용하여 5분마다 자동으로 업데이트되고 있습니다.)

 

참고로, 최근에 서재에서 발생한 버그 중 중괄호({})가 있는 경우 본문 펼침이 안 되는 버그, URL 맨 뒤가 ˝/˝로 끝나는 경우 안드로이드 앱에서 링크처리가 안되는 버그 등은 저희가 사전에 미리 잡아내기가 어려운 발생 빈도가 매우 낮았던 버그였습니다. 이런 버그는 신고를 해주시면 개발팀에서 가장 빨리 처리할 수 있도록 최우선 순위를 선정하여 처리를 하고 있습니다.(, 안드로이드 앱에서 URL 맨 뒤에 ˝/˝가 있는 경우의 문제는 저희가 사용하는 안드로이드 앱 라이브러리 자체가 갖고 있는 기본 사항이기 때문에 따로 예외처리를 하려면 다소 시간이 걸린다고 합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또한 마이페이퍼/마이리뷰 개수 통계에는 비공개 글과 퍼온 글(위에서 말씀드린, 글쓰기 권한이 개방되어있는 서재에서 쓴 글)은 작성 글 통계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A라는 서재에 공개 글이 1, 비공개 글이 1, 퍼온 글이 1편인 경우, 3편으로 통계 표기가 되지 않고 1편으로 표기가 됩니다.

 

다시 한 번 기술적인 문제, 정책적인 문제로 인해 알라딘이 서재에서 알라딘에 비판적인 글을 서재메인에 노출하지 않도록 하고 있다는 오해를 받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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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11-08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글이라도 유저가 쓴 글은 유저의 책임이니까요. 사전 검열로 글 삭제는 없다고 믿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cyrus 2016-11-08 17:32   좋아요 1 | URL
새로운 정보를 알게 되면, 다른 유저들에게 알리는 일 또한 중요한 역할인 것 같습니다. ^^

오거서 2016-11-08 17: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 님의 노력 덕분에 상황이 보다 명백해졌습니다. 긍정적인 측면도 있으니 감사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cyrus 2016-11-09 15:17   좋아요 0 | URL
좋게 봐주시는 분들이 있어서 마음이 편합니다. 알라딘에 문제 제기하는 글을 올리면 감정이 예민해집니다. 따지고 싶은 마음이 커집니다. 당분간은 조용히 서재 활동을 해야겠습니다. ^^;;
 
글로벌시대에 읽는 한국여성사
정현백 외 지음 / 사람의무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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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한다. 불과 30여 년 전만 돌아보아도 금방 알 수 있다. 하지만 아직도 미흡한 구석이 남아 있다.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은 아직도 상당 부분 개선해야 한다. 남성뿐만 아니라 대부분 사회 구성원이 육아와 가사는 여성이 담당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 가장 쉽게 떠오르는 문제다. 잘못된 사회 구조와 의식이 성 불평등을 일으킨다. 여성은 생명의 뿌리이자 역사의 대지였다. 이름 없는 꽃이자 면면히 흐르는 생명의 물결이었다. 아쉽게도 역사 속에서 그 목소리, 그 모습을 쉽게 보고 듣지 못했다. 역사의 언어 바깥에서 흘러왔기 때문에 제대로 기록되고 평가되지 못한 채 여성들의 삶은 잊혀졌다.

 

이 책은 그러한 여성의 삶과 정신을 역사의 수면 위로 올려놓는 작업이다. 한국사를 관통하며 강인하고 폭넓은 정신으로 자기 세계를 일구어낸 여성의 역사를 정리해 공식적 역사로서 정당한 자리매김을 시도한다. 한국 여성사를 쓰는 것은 일반적인 역사 쓰기와 구별된다. 역사를 여성주의 관점으로 보는 작업이다. 유명한 여성인물 중심도, 사건 중심도 아닌, 일반적인 역사에서 보지 못했던 여성들의 삶을 고대부터 시작해서 현대까지 총체적으로 되살리는 것이다.

 

고대 모계사회에서 다산(多産)은 가장 중요한 생산력이었다. 여자가 많은 아이를 생산해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수렵보다 채집이 안정된 생산을 보장했던 선사시대에서 생리적으로 채집에 유리한 조건을 가진 여성이 중심이 되는 모계사회는 당연했다. 하지만 노동력이 요구되는 농경사회에 진입하면서부터 남성들이 주도권을 잡기 시작했고, 그 결과 가부장 사회로 진입했다. 고구려, 고려 시대에는 시집살이가 일반적인 풍습이었다. 흔히 쓰는 ‘장가간다’는 표현은 ‘사위가 장인의 집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고려 시대에는 형제, 자매들이 유산을 골고루 상속받아 해마다 돌아가며 제사를 지냈다. 아들이 없으면 딸과 사위 혹은 외손이 모계 쪽 제사를 지냈다.

 

하지만 처가살이와 모계사회의 흔적은 조선 시대 중기 이후 유교식 가부장제가 뿌리내리면서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남존여비와 남아선호 사상이 굳어지면서 딸의 상속권도 인정받지 못했다. 조선 시대의 여성들은 집안을 벗어난 사회 활동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었을 뿐만 아니라, 집에서도 가부장제라는 남성 중심의 규율에 따라 생활에 많은 제약을 받았다. 그러나 가부장제의 희생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두운 상황 속에서도 당당히 자신의 삶을 살아간 여성들도 있었다. 특히 여성들이 배운 한글은 자신의 존재를 부각해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었다.

 

 

 

근대사회로 넘어오면서 봉건적 모순이 결집한 결혼제도에 비판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여성평등문제가 구체적으로 제기된 것은 동학 농민전쟁 때 동학군이 과부의 재가허용을 요구한 것이 처음이다. 이후 재가허용, 조혼, 이혼의 자유 요구는 남녀평등문제의 핵심으로 제기됐다. 이와 함께 전통사회에서 교육의 혜택을 전혀 누리지 못했던 여성들에 대한 제도교육의 필요성도 지적됐다. 이후 여학교 교육을 받은 이른바 신여성들이 1920년대 들어 늘어났다. 신여성들은 여성의 직업 활동과 함께 자유분방한 연애, 이혼의 자유를 주장하고 몸소 실천함으로써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한국 근대 여성사를 논할 때 국권 회복을 위한 항일여성운동을 빠져선 안 된다. 최근 의병장으로 활동한 윤희순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기도 하다. 뒤늦은 감이 있지만 반가운 일이다. 윤희순은 항일 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의병가를 직접 지어 부르고, 군사훈련에 참여했다.

 

여성이 시대의 주역이 될 것이라고 예견되는 지금까지도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여성의 삶은 여전히 감추어져 있다. 역사의 갈피마다 배어 있을 여성의 활동을 조명하기에는 기록이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다. 남자의 글과 책 속에 묻혀버린 여성의 목소리와 삶을 재조명하는 작업이 절실하다. 여성의 활동을 보존한 기록을 발굴하는 과정 중에 과거의 못된 남자들의 생각도 함께 발견하게 된다. 놀라운 점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자들을 가볍게 보는 남자들의 시선이다. 1920년 처음으로 여성 전화 교환수가 등장했다. 이들의 고충은 성희롱이었다. 조선의 남성 고객, 일본 남성들은 여성 전화 교환수들에게 성희롱을 일삼았다. 꼭 기억되어야 할 역사 속에는 이처럼 남자들이 부끄럽게 여기는 이야기가 있다. 뭐 부끄러워도 좋다. 역사 속에서 더 많은 여성의 삶을 불러내야 한다.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삶의 현장에 도전하고 승리했던 여성들에 대한 기록을 모으고 정리하여 우리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일이 바로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다. 국정교과서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런 건 불쏘시개로 쓰고, 역사 속의 여성을 발굴하고 보존한 국사 교과서를 보고 싶다. 미래의 아이들이 이순신, 세종대왕 같은 남자 위인보다 여자 위인을 많이 찾는 날이 올 수 있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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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6-11-08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성 의병장 이야기는 정말 처음 들어 보는 것 같습니다. 역시 책 세계 이야기는 그 깊이를 가늠 할 수 없네요.

cyrus 2016-11-08 15:47   좋아요 0 | URL
특정 분야를 깊이 파고든 사람이 아닌 이상 많이 알려지지 않은 지식이나 정보를 알아내는 것은 드문 일입니다. ^^
 

 

 

 

서재 글의 ‘비공개(블라인드)’ 상태 기준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려고 알라딘 웹 사이트 이곳저곳 헤매다가 찾아낸 것입니다. 이 글은 ‘알라딘 고객센터’ 게시판에 있고요, 작성된 지 얼마 안 됐습니다. 작성일이 2010년 3월이면, 제가 서재 활동을 시작하기 두 달 전입니다. ‘전체 공개’로 작성된 서재 글이 ‘비공개’ 상태로 처리되는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 되는 자료라 판단하여 공유합니다.

 

 

※ 출처 링크 : http://blog.aladin.co.kr/cscenter/35057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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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욕설이나 비속어 포함, 명예훼손, 인신공격성 글인 경우

저자나 출판사, 그리고 3자에 대해서 비난/비판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욕설과 비속어를 써서 하는 것을 금지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욕설/비속어인지의 여부를 판단하는 것도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알라딘 100자평/리뷰/서재를 운영하는 팀에서 관리하고 있는 욕설/비속어 사전에 해당되는 문자가 포함된 글에는 모두 일률적으로 적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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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6-11-06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고 어렵네요.일일이 다 챙겨서 글 쓸려면 유념할게 많네요.ㄷㄷㄷ

cyrus 2016-11-06 05:03   좋아요 2 | URL
1, 2번 경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알라딘 책 소개를 `마이페이퍼`에 퍼와서 옮기는 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쓰는 분이 `알라딘 인기서재`에 고정되고, `인기 서재글`에 많이 나옵니다.

그것 때문인지 알라딘 운영진들이
`후하게` 봐주는 것 같습니다. 지적하고 싶어도 참을려고요. 그분에 대한 이웃님들의 `애정`이 많으셔서 괜히 이웃님들 입장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지적해봤자 결국 돌아오는 건 비난입니다.
 
이세 모노가타리
작자 미상 지음, 민병훈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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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 모노가타리》(伊勢物語)는 우리말로 풀이하면 ‘이세 이야기’이다. 모노가타리는 일본 고대 및 중세시대 때 정형화된 문학 장르이다. 이 이야기 속에 ‘와카(和歌)’라는 노래도 실려 있다. 《이세 모노가타리》는 일본 헤이안 시대(平安, 794~1185년)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문헌인데, 이 시기에 와카나 하이쿠(俳句) 같은 시가문학이 한창 꽃을 피웠다. 헤이안 시대는 우아하고 섬세한 일본적 정서가 주를 이룬 귀족사회이다. 헤이안 시대의 귀족들은 와카로 연애편지를 보내 관계를 맺고, 능력만 있다면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정식으로 정부를 여러 명 둘 수 있었다. 그 시대에 와카 한 줄 제대로 쓰지 못하면, 연애를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세 모노가타리》는 남녀 간의 사랑을 소재로 한 와카가 실린 이야기 모음집이다.

 

《이세 모노가타리》에서 주로 등장하는 주제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이다. 이야기의 주인공 대부분은 이별이나 계급의 한계에 부딪혀 이룰 수 없는 사랑에 괴로워한다. 그들의 애틋하고도 서글픈 감정이 와카에 압축되어 있다. 《이세 모노가타리》 제23단 ‘우물 벽(筒井筒)’은 한 남자만 끝까지 사랑하여 홀로 기다리면서 사는 불행한 여자들의 이야기다.

 

‘우물 벽’ 이야기의 남녀 주인공은 어렸을 때부터 서로 알고 지낸 사이다. 두 사람은 서로 부부가 될 운명이라고 확신했다. 이들은 부모가 정해준 배우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남자는 어린 시절부터 이어져 온 자신의 감정을 와카로 써서 여자에게 보낸다.

 

 

우물의 벽에 키를 맞추며 놀던 나의 신장도
우물보다 컸겠죠 보지 않은 사이에

 

 

여자는 남자의 와카에 답한다. 자신도 여전히 남자를 사랑하고 있음을 전달한다.

 

 

같이 대 보던 가르마 탄 머리도 어깰 넘었소
그대 아니고 누가 올려 묶어 주리오

 

 

이렇게 연애편지를 주고받던 남녀는 드디어 결혼하게 됐다. 딱 여기까지만 이야기가 끝냈더라면, 가장 낭만적인 와카가 실린 이야기로 남았을 것이다. 《이세 모노가타리》는 아름다운 사랑을 낭만적으로 미화해서 보여주지 않는다. 잔인하게도 우리가 사랑하면서 꼭 마주하게 될 현실의 장벽까지 언급한다. 부부는 가난에 허덕이면서 살게 되고, 이를 견디지 못한 남편은 무기력한 현실을 잊기 위해 바람을 피웠다. 남편은 두 명의 아내를 두었다. 그런데 아내는 남편의 바람을 알면서도 미워하는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남편은 아내가 딴 남자 만나러 다닌다고 의심했다. 누가 누구를 의심하는 건지, 참. 남편은 몰래 숨어서 아내를 지켜봤다. 남편의 의심은 틀렸다. 아내는 여전히 남편을 사랑했다. 그녀는 남편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 화장한 뒤, 집을 지키고 있었다. 아내의 지고지순한 사랑에 감동한 남편은 두 번째 여자를 만나지 않기로 했다.

 

남편은 자신의 두 번째 아내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서, 그녀가 사는 집으로 찾아갔다. 두 번째 아내는 화장기 없는 얼굴로 혼자 밥을 푸고 있었다. 남편은 두 번째 아내의 모습에 실망하여 그 집을 다신 찾지 않았다. 남편은 화려하게 꾸미지 않은 두 번째 아내의 모습을 보자마자 사랑의 감정이 식어버렸다. 사실 두 번째 아내도 남편을 기다리면서 혼자 살고 있었다. 이 어리석은 남편은 아내로 맞이한 두 여자의 속마음을 읽지 못했다. 이미 결혼한 남자를 만난 두 번째 아내의 결정이 잘 한 거로 볼 수 없지만, 그녀가 만든 와카는 ‘해바라기 사랑’의 면모를 보여준다.

 

 

당신이 사시는 쪽을 바라보면서 살겠습니다
구름아 가리지 마 비가 내린다 해도

 

 

남편은 두 번째 아내에게 재회를 원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남편은 두 번째 아내를 만나러 오지 않았다. 남편을 기다린 두 번째 아내는 다시 한 번 와카를 읊어 보낸다.

 

 

그대 오신다 전해 주신 밤들이 지나쳐 가니
기대하지 않지만 그리며 지냅니다

 

 

상대방이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지만 받아들이지 않아 외롭고 슬픈 사랑을 가리켜 외사랑이라고 한다. ‘너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매몰차게 돌아서면 아픈 마음을 보듬으면서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나겠지만, 그렇지도 않으면서도 받아들일 듯 말 듯 해 외사랑의 애틋함을 더한다. 외사랑이 심화하면서 누구 먼저 거부할 수 없는 삼각관계가 연출됐다. 그러나 두 아내의 모습 경우 여성은 남성에게 보이는 수동적 존재로 취급되고 있다. 아내는 오로지 남편만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 여성이 아름다워지려면 화장을 해야 한다는 등 여성에 대한 남성 중심적 고정관념이 드러나 있다.

 

제6단, 제12단 이야기는 ‘스톡홀름 증후군’을 떠올리게 한다. 제6단의 남자 주인공은 황족의 여인을 사랑한 나머지 야밤에 그녀를 납치하여 함께 도망친다. 제12단 이야기의 제목은 ‘도둑(盜人)’이다. 이 이야기에 등장한 남자는 어떤 집안의 딸을 훔친 도둑이다. 여자들은 ‘사랑의 인질’이 되어 자신을 납치한 남자들을 순순히 따른다. 제12단의 도둑은 훔친 여자를 풀숲에 두고, 도망쳤다. 그런데도 여자는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자신을 버리고 도망친 남자를 잊지 못한다.

 

 

남자는 여자를 훔친 도둑이었기 때문에 풀숲에 두고 도망친 것이다. 뒤를 밟아 온 자들이 “이 들에 도둑이 숨어 있다고 한다”고 말하며 들에 불을 놓으려고 했다. 그때 여자가 슬퍼하며,

 

 

무사시노는 오늘만은 태우지 말아 주세요
낭군도 숨어 있고 나도 숨어 있으니

 

※ 무사시노 : 평야로 이루어진 지역 이름 (리뷰 작성자 주)

 

 

아주 극한 상황에서 약자가 강자의 논리나 주장에 동화돼 상식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이런 이상심리가 나타난다. 도둑이 붙잡혔어도 여자는 도둑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납치범과 납치 피해자 사이의 특이한 교감이 낭만적인 사랑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니까’라면서 뒤에 조건이 붙기 마련이다. 하지만 때론 이런 사랑이 듣는 사람, 혹은 제3자에게는 순수한 사랑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사랑이 ‘아름다운 구속’이라고 말하지만, 이게 지나치면 남녀 모두 불편하게 만드는 ‘족쇄’가 될 수 있다. 화려한 낭만으로 사랑을 아름답게 포장되는 시대가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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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6-11-04 19: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서로에게 족쇄가 되는 사랑은
남보다 못한 거 같아요.

열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없다.
이 말도 한편으론
일방적 구속을 대변하는
폭력적인 언어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구속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단지 자기 욕심 채우는 거지요~

cyrus 2016-11-05 07:22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공감하는 부분이 `열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라는 말의 함정입니다. 이성을 `정복`하고 `지배`하는 의미가 느껴져서 좋아하지 않는 말입니다.

yureka01 2016-11-04 19: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하기사 100년도 못사는데 한사람만 사랑해야하는 것도 구속이긴해요.ㅎㅎㅎ

cyrus 2016-11-05 07:23   좋아요 1 | URL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과감히 포기하고, 더 좋은 인연을 만나야 합니다. ^^

stella.K 2016-11-05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난 일본의 저작물이 좋아지고 있는데
이건 별론가 보네.^^



cyrus 2016-11-05 16:16   좋아요 1 | URL
옛날 일본 사람들의 감수성이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어요. 그래도 읽다 보면 좋은 구절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겐지 모노가타리> 완독을 위해서 일본 고대 문학에 관심 가지기 시작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