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방에 가면 책방 주인이 소중히 여기는 책들을 만날 수 있다. 그 책들은 살 수가 없다. 오직 책방에서만 읽을 수 있다. 책방을 찾는 손님이 보기에는 그냥 언제든지 팔 수 있는 책이지만, 책을 가진 주인 입장에서는 아무에게나 주고 싶지 않은 보물이다. 그 마음, 나도 충분히 이해한다. 읽다 익다책방 주인은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의 글을 좋아한다. 그 분은 헤세가 쓴 작품뿐만 아니라 헤세 읽기에 도움이 되는 책도 모으고 있다. 물론 책 모으는 일에만 열중한 분은 아니다. 책방 주인이 수집한 헤세의 책은 독서모임을 하면서 읽은 것들이다. 내가 보기에 읽다 익다책방 주인은 건강한 애서가이지, 심각한 책 중독자는 아닌 것 같다.

    

 

 

 

 

 

 

 

 

 

 

 

 

 

 

 

* 톰 라비 어느 책중독자의 고백(돌베개, 2011)

* 니콜라스 A. 바스베인스 젠틀 매드니스(뜨인돌, 2006)

* 구스타브 플로베르 애서광 이야기(범우사, 2004)

    

 

 

자신을 책 중독자라고 밝힌 작가 톰 라비(Tom Raabe)는 책 중독을 깊은 수렁에 비유한다. 그가 말하는 책 중독자에는 세 가지 부류가 있다. 장서광, 애서가, 수집가이다. 장서광은 책을 사고 또 사는 사람이다. 애서가는 책을 읽고 또 읽는 사람이다. 책의 겉모습에 열광하는 사람은 장서 광이고, 책의 내용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애서가이다. 수집가는 책의 사소한 차이에 열광한다. 그들은 저자 친필 사인이 있는 초판본을 엄청나게 좋아한다. 수집가와 애서광의 경계는 모호하지만, 책을 수집하는 것을 좋아하는 애서광은 남이 갖고 있지 않는 책을 본인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자긍심을 갖고 있다[1]. 19세기 초 미국 정치가 프랭클린 토머스(Franklin Thomas)는 도서수집가인 할아버지를 가장 고귀한 질병, 애서광에 푹 빠진 분이라고 표현했다. 애서광은 고귀한 광기(gentle madness)이다.

 

톰 라비는 옷보다 책을 사는 것을 좋아했다. 톰 라비가 친구에게 서점에 같이 가자고 말했을 때, 친구는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옷을 샀던 날이 언제인지 기억나나?” 책 중독자는 기본적인 소비생활을 잊어버리거나 포기한다. 나 같은 경우에는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일이 잘 없다. 영화를 보는 것도 재미있다. 그러나 언제든지 빌려 볼 수 있고, 사서 볼 수 있는 책이 더 재미있게 느껴진다. 책을 사거나 읽는 행위를 삶의 유일한 목적으로 삼는 책 중독자는 심책(審冊)주의자이다. 프랑스의 영화감독 프랑수아 트뤼포(Francois Truffaut)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딘가 아픈 사람들이다라고 말했다[주2]. 책을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 책 중독자들은 어딘가 모자란 사람들이다.

 

    

 

 

 

 

 

 

 

 

 

 

 

 

 

 

* 정희진 혼자서 본 영화(교양인, 2018)

    

 

 

 

 

 

 

 

 

 

 

 

 

 

 

 

 

 

 

* 보들레르 파리의 우울(문학동네, 2015)

* 보들레르 파리의 우울(민음사, 2008)

 

    

 

정희진폭식을 해도 괜찮고, ‘숙취도 없는 것이 바로 영화라고 했다[주3]. 책도 마찬가지다. 보들레르(Baudelaire)의 시구(詩句)처럼 술이든, 시든, 덕이든, 그 어느 것이든 취할 수 있다. 취하라! 그대가 원하는 책에. 책에 취해도 취한 것 같지 않다. 책을 많이 읽어도 지루하지 않다. 자고 일어나면 책 중독자를 유혹하는 새 책들이 나오는데 지루할 틈이 어디 있겠는가.

    

 

 

 

 

 

 

 

 

 

 

 

 

 

 

 

* 알베르토 망겔 서재를 떠나보내며(더난출판사, 2018)

 

 

책 중독자의 정체를 알고 싶으면, 그가 소중히 여기는 애독서를 살펴보면 된다. 그러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알베르토 망겔(Alberto Manguel)서재를 일종의 자서전이라고 했다[4]. 서재에 있는 모든 책은 책 중독자의 살덩어리요, 피다. , 책 중독자는 예수가 아니다. 모든 책 중독자가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책을 애지중지하게 여기는 심책주의자는 책을 빌려주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니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 책 중독자 말고 책을 잘 빌려주는 마음씨 좋은 애서가를 만나길. 나처럼 어딘가 모자라고, 책밖에 모르고, 책을 빌려주지 않는 책 중독자, 심책주의자는 되도록 멀리하는 것이 상책이다.

 

 

 

 

 

[1] 플로베르, 이민정 옮김, 애서광 이야기, 범우사, 2004, pp. 62.

[2] 정희진, 혼자서 본 영화, 교양인, 2018, pp. 8.

[3] 같은 책, pp. 11.

[4] 알베르토 망겔, 이종인 옮김, 서재를 떠나보내며, 더난출판, 2018, pp.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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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9-06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기억이 맞다면 cyrus님의 예전 서재 사진보다 많이 정돈된 느낌입니다^^:)

cyrus 2018-09-07 19:33   좋아요 1 | URL
제가 사진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네요. 제 서재는 아니구요, ‘읽다 익다‘ 책방에 있는 책장이에요. 책방지기님이 헤세의 글을 좋아해서 사서 모은 책들을 책방에 꽂아둔거예요.. ^^

2018-09-07 0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9-07 19:38   좋아요 0 | URL
애서광은 책의 노예라고 하던데, 이 말 그대로 굿즈광도 굿즈의 노예네요.. ㅎㅎㅎ

대부분 외국의 술 도수는 소주보다 높던데 술 잘 마시는 외국인들은 소주를 물처럼 마실거예요. 특히 러시아인들은요. ^^

sslmo 2018-09-07 09: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겨울호랑이 말씀처럼 왜 이렇게 단출해졌죠?^^
님도 미니멀라이프들 격하게 실천하고 계신건 아니겠죠?

이제 아침, 저녁으로 찬바람도 살랑~ 불고 책읽기 좋은 계절입니다~^^

cyrus 2018-09-07 19:41   좋아요 0 | URL
‘읽다 익다‘ 책방지기님의 책이에요. 책방에 있는 책장을 제가 사진으로 찍은거예요. ㅎㅎㅎ

요즘은 지출이 많아서 책 구입 횟수가 줄어들었어요. 그래도 원하는 책을 만나면 반드시 구매합니다. ^^

2018-09-07 2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9-08 16: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9-10 14: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9-10 14: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루쉰P 2018-09-08 23: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멈춤없이 흐르고 계시는군요. ㅎ 멋져요

cyrus 2018-09-09 20:45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시죠? 저를 기억해주시고, 반가운 인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나쁜 사마리아인들 (10주년 특별판) - 신자유주의는 왜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가?
장하준 지음, 이순희 옮김 / 부키 / 2018년 7월
평점 :
절판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하나이다.

 

(누가복음 23:44)

 

 

 

세월이 지나면 경제를 이끌어가는 사상도 변한다. 경제학이 학문의 틀을 갖추기 시작하던 300년 전의 중심 사상은 시장 자유주의였다. 수요와 공급에 의해 시장에서 결정된 가격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으로 믿었다. 시장이 제대로 기능만 한다면 필요 이상으로 생산이 늘어나는 일도 없어지고, 당연히 심각한 불황도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1929년 미국에 대공황이 일어나면서 시장 지상주의를 믿던 경제학이 치명적인 일격을 맞았다. 엄청나게 많은 물건이 쏟아져 나와 가격이 내려갔지만 기대와 달리 소비가 늘어나지 않았다. 공황의 여파로 이미 소비자의 구매력이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타격을 입었고, 시장도 전혀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유례없는 경제 공황 앞에 모든 국가는 저마다의 해결책을 찾아 나섰다. 사람들은 시장의 기능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때 시장을 통제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던 것이 정부의 역할이었다. 정부가 경제 각 부분을 적절히 통제하면 심각한 경기 침체가 나타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정부의 힘도 한계를 드러냈다. 정부에 대한 믿음이 깨지면서 등장한 것이 신자유주의. 신자유주의는 시장 지상주의를 그 바탕으로 한다. 정부는 완전 방임 상태를 추구한다. 소득 재분배는 물론, 복지 정책도 정부의 역할에서 배제된다. 다시 시장에 대한 믿음이 부활한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주목받으면서 시장이 부활했지만, 어두운 그림자도 남겼다. 대표적인 문제가 빈곤불평등이다. 자본이 소수에게 집중되자, 이것을 가지지 못한 집단은 절대적인 가난에 시달렸다.

 

오늘날 신자유주의는 가장 바람직한 경제사상으로 행세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앞잡이들은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경제 강대국들이 자유무역 중심의 시장경제 체제를 채택해서 경제성장을 달성했다고 주장한다. 이제는 개발도상국들이 이 원리를 따라야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과연 옳은 것인가. 장하준 케임브리지 대학 경제학과 교수의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바로 이런 상식과 통념이 얼마나 위선적인지를 밝히고 있다. 저자는 신자유주의의 허구적 위상을 폭로함으로써 우리 사회에서 상처받은 자본주의를 치유하고자 한다. 그는 이 책에서 시장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를 둘러싼 다양한 담론들을 치밀하게 해부하면서 신자유주의 찬양론의 문제점을 드러내 보여준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자유무역 중심의 시장경제 원리를 채택해서 경제가 좋아진 선진국은 사실상 하나도 없다. 신자유주의의 앞잡이들이 그토록 찬양하는 경제 강대국 중 하나인 미국은 건국 초기 시절에 자국 기업을 보호했고, 외국인 투자를 규제했다. 미국의 초대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은 산업육성을 위해서는 보호무역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유치산업을 보호하고자 관세장벽을 쌓아 올리고, 각종 산업 보조금 제도를 도입했다. 장차 성장 잠재력은 있지만, 지금 당장은 국제경쟁력을 갖추고 있지 않으니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 보호해줄 필요가 있는 산업이 유치산업이다. 경쟁력이 갖추어진 다음에 자유무역으로 전환하자는 것이 해밀턴의 유치산업 보호론의 핵심이다. 이 이론은 18세기 당시 유럽보다 산업 분야의 국제경쟁력이 뒤처지고, 자본을 수입해야 했던 미국의 입장을 철저히 반영한 것이다.

 

보호무역주의를 통해 성공한 나라는 미국뿐이 아니다. ‘시장경제의 창시자애덤 스미스(Adam Smith)가 태어나고 자란 영국을 포함한 여타 선진국들도 지금은 후진국들에 자유무역과 외국인 투자 개방을 설교하고 있지만, 그들이 후진국이었을 때는 보호무역을 하고 외국인 투자를 규제했다. 그런데 보호무역주의를 이끌었던 미국이 20세기 중반 이후 패권을 잡자 자유무역주의의 전도사가 됐다. 미국은 세계무역기구(WTO)의 산파역을 했다. 세계 여러 나라와 자유무역협정(FTA)을 잇달아 맺었다. 장 교수는 개발도상국들에 다가가서 신자유주의 체제의 장점을 설파하는 선진국을 나쁜 사마리아인들에 비유한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노상강도에게 약탈당한 남자를 도와주는 착한 사마리아인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 세계무역기구는 신자유주의라는 강력한 무기를 내세워 개발도상국의 경제 자유화를 요구한 사악한 삼총사이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나온 지 벌써 십 년이나 지났지만, 우리나라는 경제위기 극복을 이유로 미국식 신자유주의 정책을 비판 없이 도입했다. 국유화와 복지정책은 무조건 나쁘고, 민영화와 무한 경쟁사회는 무조건 좋다는 인식이 언제부터인가 우리 뇌리에 박혀있었다. 그것은 우리 사회에 경제 강대국(미국)을 주축으로 한 자유 시장 교리가 오랫동안 지배해 온 탓이다. 장 교수는 나쁜 사마리아인들10주년 특별판 서문에서 신자유주의는 아직도 세계를 지배하고 있으며, 한국 역시 신자유주의의 앞잡이이자 희생자로서 위기를 자초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한편에서는 이 책을 비판하는 자유 지상주의자들의 견해가 있었고, 놀랍게도 반미, 반자본주의를 주장하는 불온 도서로 지정된 적도 있다. 이 책에 찬사를 보내든 비난을 하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 사회는 이미 신자유주의의 흐름 한가운데에 있으며, 쉽게 빠져나올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가 이 거침없는 흐름에 너무 무감각한 것이 문제이다. 신자유주의 시장 논리에 철저히 순응한 개인에게 돌아오는 대가는 빈곤의 늪에서 허덕이면서 타인으로부터 고립되는 비참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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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8-09-06 20: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 정부에서 새롭게 다시 나왔네요. ^^
예전 정부에서 대표적 불온서로 낙인 찍힌 책....^^ 그나마 세상이 약간 좋아진 듯 합니다. ^^

cyrus 2018-09-07 19:43   좋아요 1 | URL
80년대에는 금서를 숨어서 몰래 읽었다면 요즘은 ‘금서목록=베스트셀러‘입니다. 장 교수의 책은 금서로 지정된 이후에 더 많이 팔렸죠. ^^
 
천 개의 태양보다 밝은 - 우리가 몰랐던 원자과학자들의 개인적 역사
로베르트 융크 지음, 이충호 옮김 / 다산북스 / 201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1945년 7월 16일 새벽 4시, 미국 뉴멕시코 주 앨라모고도 부근 사막. ‘카운트다운 제로’와 함께 불덩어리가 치솟으면서 거대한 인공 햇빛이 떠올랐다.

 

 

천 개의 태양의 빛이 하늘에서 일시에 폭발한다면,

그것은 전능한 자의 광채와 같으리라.

나는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현장에서 세계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의 전 과정을 지켜보던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의 책임자 오펜하이머(Oppenheimer)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가 읽었던 고대 인도의 경전 《바가바드 기타(Bhagavad Gītā)》에 나오는 구절이었다. 이제 이것과 똑같은 폭탄이 24일 후 일본의 한 도시 상공에서 투하될 것이었다. 미국 정부는 투항하지 않는 일본을 쓰러뜨리기 위해 이 ‘세계의 파괴자’를 내던질 계획이었다. 나가사키 주민들은 ‘팻맨(fat man)’라는 이름이 붙여진 원자폭탄이 터지면서 쏟아낼 비극의 태양을 맞게 될 운명이었다. 눈부신 섬광, 무시무시한 버섯구름과 함께 이날 이후 인류는 자신을 파멸시킬 수 있는 수단을 갖게 되었다. ‘천 개의 태양보다 밝은’ 원자력이 이렇듯 막대한 인류의 재앙을 초래할지 그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과거의 명저가 다시 태어났다. 《천 개의 태양보다 밝은》은 원자핵의 실체를 밝히려는 과학자들의 지난한 여정과 원자폭탄이 만들어진 과정을 그린 논픽션이다. 이 책의 국역본은 1961년에 출간됐지만 절판되었다. 저자 로베르트 융크(Robert Jungk)는 과학사에 뚜렷한 발자국을 남긴 물리학자들의 ‘아름다운 시절’과 ‘고통스러운 시절’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그들의 삶과 업적을 흥미롭게 풀어냈다. 러더퍼드(Rutherford), 아인슈타인(Einstein), 하이젠베르크(Heisenberg), 닐스 보어(Niels Bohr) 등 여러 과학자가 원자력 연구에 나섰지만, 누구도 원자핵의 힘이 엄청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었다.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한 과학자들은 미지의 에너지를 발견한 기쁨을 느낌과 동시에 원자폭탄이 가져올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두려워했다.

 

하이젠베르크는 우라늄을 핵무기의 수준으로 농축하는 일이 당시 독일의 상황에서는 매우 무리라는 것을 알고서는 안심했다. 그는 원자력 연구의 방향이 ‘전쟁터’가 아닌 ‘연구소’로 향해지길 바랐다. 하지만 독일에서 히틀러(Hitler)가 권력을 잡으면서 물리학자 사이에 두려움은 더 커졌다. 하이젠베르크도 원자폭탄을 이용한 독일의 승리를 바라지 않았다. 한편 미국의 물리학자들은 히틀러가 틀림없이 원자폭탄을 개발해서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갈 것으로 생각했다. 심지어 보어는 자신의 절친한 제자이자 동료인 하이젠베르크가 나치(Nazis) 정부의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에 개입했다고 의심했다.

 

1941년 하이젠베르크는 보어가 있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강연하게 되었고, 자신의 내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보어를 만나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책은 이렇게 설명했다.

 

 

불행하게도 코펜하겐에서 하이젠베르크와 보어 사이에 중요한 면담은 처음부터 꼬이고 말았다. 보어는 하이젠베르크가 자신을 위해 열린 리셉션에서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옹호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사실, 하이젠베르크는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기 위해 사교계에서는, 특히 외국에서는, 개인적으로 말할 때와 다르게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하지만 보어는 전체주의 정권하의 강압적 환경에서 터득한 이중적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중략]

 

하이젠베르크는 독일 물리학자들이 느끼는 강압적인 압력을 이해해달라고 호소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서서히 조심스럽게 대화의 방향을 원자폭탄 문제로 돌렸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상대방이 같은 행동을 하기로 동의한다면 그런 무기의 제조를 막기 위해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할 것이라고 솔직하게 선언하는 단계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두 사람이 과도하게 신중한 태도로 이 문제에 접근하는 바람에 결국 대화는 목표했던 것에서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천 개의 태양보다 밝은》 pp. 175)

 

 

보어는 하이젠베르크의 발언을 통해 독일이 원자폭탄 제조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독일 물리학자들에 대한 보어의 불신은 미국 정부에 원자폭탄을 설계해야 한다는 확실한 명분을 주었다. 진주만을 공격당한 미국의 입장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에 관여하지 않을 수 없었고, 종전을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원자폭탄을 선택했다.

 

제2의 전운이 감돌기 전에 유럽의 물리학자들은 지적인 모험을 연구의 가장 큰 목적으로 삼았다. 그때야말로 학자들의 뜨거운 열정을 느낄 수 있었던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하지만 ‘고통스러운 시절’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정치 세력 간에 대량파괴 무기를 만들기 위한 경쟁이 불붙으면서 이들이 쌓아 올린 연구 성과는 원자폭탄이라는 무시무시한 괴물을 탄생시키는 데 활용됐다. 책은 역사의 거대한 물결에 휩쓸려 자신의 연구가 무기로 현실화하는 악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물리학자들의 고뇌와 시대적 아픔을 전달한다. 당시 과학자들이 지녔던 순수한 학문적 호기심, 과학기술의 새로운 도약을 향한 열정, 원자력의 힘에 대한 두려움 등은 가치의 우열을 가릴 틈 없이 하나의 용광로에 던져졌다. 원자폭탄은 어느 한 사람의 독창적 발명품이 아니라 혼돈의 시대가 만들어낸 현대과학의 총체였다. 이 책에 나오는 과학자들은 역사의 주인공이자 피해자였다. 혼돈의 시대는 과학자들을 연구실에서 불러냈고, 그들을 괴롭게 만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역사는 냉정하다.

 

 

 

 

 

※ Trivia

 

하이젠베르크는 독일이 점령한 코펜하겐에서 강연을 해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그는 이 일을 기화로 자연스럽게 옛 스승이자 친구인 닐스 보어를 찾아갔다. (pp. 173)

 

→ ‘기화로’를 ‘기회로’로 고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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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종 2018-09-05 0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어와 하이젠베르크의 면담이 성공했다면 역사가 바뀔 수 있었을까요? 조금씩 어긋나면서 묵직하게 흐르는 역사를 보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필연적인 사건이었는가 싶다가도, 그래도 인간의 의지에 의해서 바뀔 여지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도 들고 그렇습니다.
뭐든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선택의 변곡점에서 보다 나은 방향으로 진행될 수 있게 적절한 개입이 이루어질 절묘한 타이밍이요.
과학의 양면성은, 부작용이 두려워 멈추기에는 지적인 호기심이 못지 않게 강한 이들이 늘 안고 가야하는 딜레마인가 봅니다.

cyrus 2018-09-05 11:47   좋아요 0 | URL
서로 간의 오해를 불식시키면서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었다면 핵무기 개발 시기가 미루어졌을 거예요. 그렇게 된다면 냉전 시기에 핵무기가 만들어졌을 수도 있어요. 하이젠베르크와 보어와의 대화가 성공한다고 해도 분명 어느 시기부터 핵무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

나비종 2018-09-05 11:57   좋아요 0 | URL
핵무기에 대해서는 제 생각도 cyrus님과 같습니다. 조금 늦어졌더라도 만들어졌겠죠?ㅡㅡ;
또, 일본이 아니었더라도 그 무기를 사용할 명분을 누군가는 만들어서 어딘가에서 한 번은 터졌을 거라는 것도. .
 

 

 

1853년 7월, 미국의 매튜 페리(Matthew Perry) 제독이 이끄는 네 척의 군함이 에도 만(현재의 도쿄 만)에 들어왔다. 페리는 해안을 봉쇄하며 통상 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이듬해 일본과 미국은 화친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서양 따라잡기에 나선 일본은 개항 50년 뒤 열강의 일원으로, 메이지(明治) 유신 이후에는 강대국으로 인정받았다.

 

 

 

 

 

 

 

 

 

 

 

 

 

 

 

 

 

 

 

* 스기타 겐파쿠, 마에노 료타쿠, 나카가와 준안 《해체신서》 (한길사, 2014)

* 이종각 《일본 난학의 개척자 스기타 겐파쿠》 (서해문집, 2013)

 

 

 

 

 

 

 

 

 

 

 

 

 

 

 

 

* [품절] 이종찬 《난학의 세계사》 (알마, 2014)

* 타이먼 스크리치 《에도의 몸을 열다》 (그린비, 2008)

 

 

 

과연 무엇이 일본의 근대화를 만들었을까? 페리 제독의 강압적인 요구를 시작으로 일본이 근대 국가가 되었을까? 그렇지 않다. 일본의 근대화는 오랫동안 누적된 도약이다.

 

일본 전국시대의 다이묘(大名: 대영주)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1549년 규슈(九州)에 상륙한 스페인의 예수회 신부 프란시스코 사비에르(Francis Xavier)의 전도를 받고 기독교를 허용했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도 선교사들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출신의 선교사들은 비단 종교 활동만 한 것이 아니었다. 서양문물을 일본에 전해주는 역할도 했다. 일본은 선교 활동과 무역 활동을 하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람들을 ‘남만인(南蠻人)’이라고 불렀다.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임진왜란은 끝났고, 일본은 그의 사후 권좌를 둘러싼 심한 권력 투쟁으로 들어갔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130년이나 계속된 전국 시대는 막을 내린다. 도쿠가와 가문의 막부(幕府)가 통치하는 에도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그 후 일본은 약 2백 년 동안 평화를 누린다. 도쿠가와 막부는 예수회가 교황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세력으로 판단했고 1612년부터 기독교 선교 금지령을 내렸다.

 

도쿠가와 막부는 스페인과 포르투갈과의 교류를 끊으며 쇄국 정책을 취했고, 기독교 포교를 하지 않는 조건으로 네덜란드인들에게 나가사키의 인공 섬 데지마(出島) 거주를 허가했다. 네덜란드는 기독교 선교를 포기하는 대신, 무역을 허락받았다. 도쿠가와 막부는 데지마에 관리를 상주시켜 이곳을 통해 입수되는 정보를 바탕으로 군사기술, 의학, 과학 등 선진기술과 학문을 받아들이고, 국제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일본은 이미 13세기부터 동남아시아에 진출하여 무역 시장에 뛰어들었고, 히데요시는 ‘주인선(朱印船)’ 정책을 실시하여 일정한 조건 하에 허가를 받은 대외 무역을 허용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일본은 네덜란드의 발전된 문명을 ‘난학(蘭學)으로 체계화하고, 이를 통해 근대화를 추진할 수 있었다.

 

난학의 형성에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에도 시대의 의사 스기타 겐파쿠(杉田玄白)다. 스기타는 직접 해부 현장을 참관하고, 나가사키의 역관(譯官)을 통해 네덜란드어 해부 서적을 입수한다. 스기타가 참고한 해부 서적은 독일의 의학자 요한 아담 쿨무스(Johann Adam Kulmus)가 1772년에 펴낸 <Anatomische Tabellen>를 네덜란드어로 번역한 ‘타팔렌 아나토미아(Tabulae Anatomicae)였다. 스기타는 네덜란드어를 배운 난학자 마에노 료타쿠(前野良澤)와 네덜란드 의학에 관심이 많은 의사 나카가와 준안(中川淳庵)과 함께 그 해부서를 일본어로 번역할 것을 결심한다. 그들은 변변한 네덜란드어 사전도 없이 3년 만에 타팔렌 아나토미아를 《해체신서(解體新書)라는 이름으로 번역하는 데 성공한다.

 

 

 

 

 

 

 

 

 

 

 

 

 

 

 

 

 

* 가토 슈이치, 마루야마 마사오 《번역과 일본의 근대》 (이산, 2000)

 

 

스기타는 만년에 난학의 발전과 《해체신서》의 탄생 과정을 적은 《난학사시(蘭學事始)를 발표한다. 《해체신서》의 번역을 본격적인 ‘난학의 탄생’으로 본다면, 《난학사시》는 ‘일본 근대화의 초석’이 된 책이라 할 수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난학사시》의 가치를 재발견하여 ‘탈아론(脫亞論)을 내세운다. 과거 일본의 번역은 중국 한자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체신서》는 일본식 한자로 번역한 책이었고, 《해체신서》 번역은 단순히 서양 문물의 수용 행위가 아닌, 중화주의에 대한 도전이자 부국강병을 위한 중대한 과제였다.

 

《난학사시》의 한국어 번역문은 《일본 난학의 개척자 스기타 겐파쿠》(서해문집, 2013)《난학의 세계사》 알마, 2014)에 수록되어 있다. 두 권의 책속에 있는 《난학사시》 번역문을 같이 읽으면 사소한 차이점 하나 발견할 수 있다.

 

 

 

야마가타 번 의사인 야스토미 기세키란 사람이 에도 고지마치에 살고 있었다. 그는 나가사키에 유학을 가 ‘오란다[주] 25문자’를 배운 뒤, 그 문자와 ‘이로하 47문자(いろは, 일본어 가나 문자를 배열하는 순서)’를 비교한 표 같은 것을 가지고 돌아와 사람들에게 자랑하며 오란다어 책도 읽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종각 옮김, 《일본 난학의 개척자 스기타 겐파쿠》, pp. 211)

 

 

야마가타 번 의사였던 야스토미 기세키라는 사람이 고지마치에 살고 있었다. 그는 나가사키에서 유학하면서 알파벳 25자를 익히고 그 문자로 쓰인 《48문자 첫걸음》을 가지고 돌아와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자신은 책도 읽을 수 있다고 떠벌리고 다녔기에 신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종찬 옮김, 《난학의 세계사》, pp. 40)

 

 

 

이로하(いろは)는 일본의 고유 음절문자 ‘가나’의 첫 세 글자를 뜻한다. 가나를 하나씩 배열하여 ‘ABC송’처럼 만든 노래가 있다. 그러므로 가나의 ‘이로하’는 영어의 ‘ABC’에 해당한다. 이로하 노래의 탄생 과정에 대해선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794~1185/1192)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그 시기에 나온 이로하 노래는 ‘가나 47글자’로 이루어져 있었다. ‘ん’을 포함한 가나 48자로 채워진 이로하 노래는 메이지 시대 때 나왔다. 따라서 기타가 살았던 에도 시대에 널리 애송된 이로하 노래는 ‘가나 47글자’로 된 것이다. 《난학의 세계사》의 ‘48문자 첫걸음’은 오역이다.

 

 

[주] オランダ, 네덜란드의 일본어식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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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09-04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이 네델란드에 대해 우호적이라고 하더라구요 그 대표적인 게 17세기 네덜란드 거리를 재현한 테마파크인 후쿠오카에 있는 하우스텐보스죠! 졸업여행을 거기갔었는데 글을 보니 기억이 나네요 ㅎㅎ

cyrus 2018-09-04 13:08   좋아요 0 | URL
네덜란드를 잘 아는 나라는 일본 밖에 없을 거예요. ^^

2018-09-04 1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9-04 13:20   좋아요 0 | URL
고등학생 시절에 세계사를 공부한 적이 있어요. 제가 배운 세계사 교재에는 근대화의 시작점을 페리 제독의 등장으로 보고 있었어요. 난학에 대해서는 비중있게 설명하진 않았어요. 일본은 임진왜란을 일으키기 전에 이미 동아시아 일대에서 무역을 시작했어요. 그 과정에서 동아시아에 진출한 서양의 무역 상인들을 만나면서 서양식 무기를 들여올 수 있었어요. 일본은 그 무기를 가지고 조선을 침략했죠.
 

 

 

 

 

 

 

 

이번 주부터 시작해서 3주 동안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성의 역사 1 : 지식의 의지(나남, 2010)를 읽는다.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2004년에 나온 2판이다. 2판의 부제목은 '앎의 의지'이다. 푸코는 성의 역사6권으로 펴낼 계획을 세웠다. 1976년에 1앎의 의지가 나왔고, 2쾌락의 활용(나남, 2018)3자기 배려(나남, 2004)[1]는 푸코 사후(1984)에 출간됐다. 푸코는 자신이 쓴 원고가 사후에 출판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고 한다. 푸코의 친필 원고는 그의 연인이었던 사회학자 다니엘 데페르(Daniel Defert)가 가지고 있었다. 그는 2012년에 푸코의 친필 원고를 프랑스국립도서관에 기증했다. 학자들은 유족들의 동의를 얻어 친필 원고를 정리할 수 있었고, 올해 초에 4육체의 고백이 공개됐다.

    

 

 

 

 

 

 

 

 

 

 

 

 

 

* 미셸 푸코 성의 역사 1 : 지식의 의지(나남출판, 2010)

     

 

성의 역사푸코의 말년을 대표하는 역작이다. ‘이성권력의 관계에 천착해 온 푸코의 작업을 이해하지 않은 채 성의 역사독서에 도전하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앎의 의지성의 역사시리즈의 서문에 해당한다. 2백 쪽이 되지 않은 서문(2판 번역본은 177쪽이다)이라고 해서 얕보다간 큰코다친다.

    

 

 

 

 

 

 

 

 

 

 

 

 

 

 

 

 

 

 

 

 

 

 

 

 

 

 

 

* 하상복 푸코 & 하버마스 : 광기의 시대, 소통의 이성(김영사, 2009)

* [절판] 요하나 옥살라 HOW TO READ 푸코(웅진지식하우스, 2008)

* 양운덕 미셸 푸코(살림, 2003)

* 피에르 빌루에 푸코 읽기(동문선, 2002)

    

  

푸코는 1981년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Libération)>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연구 작업을 자서전의 한 일부라고 말했다. 그는 동성애자였다. 푸코는 동성애가 정신병으로 분류되어, 병리학적 증상으로 제조되는 과정과 그 원인을 알려고 했다. 그에게 연구 작업은 자신의 온전한 삶을 찾아내 자기 역사로 새롭게 기록하는 일이었다. 푸코는 정신병을 바라보는 학계의 다양한 시각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광기라는 개념을 규정하는 권력의 실체를 추적한다.

    

 

 

 

 

 

 

 

 

 

 

 

 

    

* 미셸 푸코 광기의 역사(나남출판, 2003)

    

 

 

1961년에 발표된 푸코의 박사 학위 논문 광기의 역사(나남출판, 2003)광기가 정신병으로 분류되는 역사를 다룬 책이다. 근대는 미치광이를 이성이 상실된 자로 규정했다. 근대 이전에 살던 미치광이는 정신병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합리적 이성과 과학이 버무려진 계몽의 시대’, 즉 근대 사회에 접어들기 시작하면서 광기를 본격적으로 차별하고 탄압하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푸코에 따르면 광기가 결정적으로 정신병으로 판정되기 시작한 것은 1656년에 세워진 대감호였다. 한센병(나병, 문둥병)이 사라진 후 환자 수용소는 정신병자들을 가둬놓는 대감호로 탈바꿈한다. ‘이성이 상실된 자는 인간이라 할 수 없다. 광기는 동물성을 상징하게 되고, 미치광이는 동물 또는 괴물로 취급받는다. 그리하여 미치광이는 정신병자라는 이름으로 추방되고, 축출되며, 격리되어, 감시되며 처벌을 받는다. 푸코는 광기를 탄압하는 주동자로 서구 사회의 이성을 지목한다. 인간의 이성을 중시해 온 인류는 관찰과 실험에 기초한 과학적 사고를 발전시키며 사회를 종교로부터 독립시켜나갔다. 그러나 자유사상, 평등 이념과 맥을 같이한 근대의 이성은 이성과 반대되는 존재를 배척했다. 푸코는 자유‘해방의 편에 섰던 이성 중심주의의 폭력성을 비판한다.

    

 

 

 

 

 

 

 

 

 

 

 

 

  

*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나남출판, 2016)

    

 

 

권력에 맛을 들인 근대인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힘을 휘두른다. 푸코가 감시와 처벌(나남출판, 2016)에서 상세하게 보여준 것처럼 근대의 권력은 효율적으로 죄수를 통제해왔다. 개인은 공간적으로 구획돼 감시되고, 시간상으로 일과표에 의해 통제되면서 권력에 예속된다. 감옥, 군대, 병원, 학교는 만인을 감시하는 근대적 공간이다.

 

푸코가 성 담론을 통해 권력의 속성을 파헤치고자 펴낸 책이 바로 성의 역사. 섹스(sex)에 대해 말하도록(고백하도록) 부추기는 권력은 성 담론을 확산시킨다. 종교의 영향력이 막강했던 근대 이전에 가톨릭 신자들은 자기 성찰의 목적으로 성욕에 대해서 고백했다. 17세기 이후에 부르주아 사회가 되면서 섹스에 대해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성의 장치가 작동되었다. 이 과정에서 생식을 위해서 필요한 섹스와 그렇지 않은 섹스(동성애, 사도마조히즘)를 분류하는 성 지식이 등장한다. 생식과 무관한 일탈적 성욕 또는 성행위는 교정 대상이 된다. 푸코는 성 담론이 형성된 근대를 증가의 시대로 보았으며 이때부터 성적 도착이 확립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근대사회가 섹스를 억압한 시대였다고 주장하는 입장을 가설로 설정하여 비판한다. 푸코가 생각하는 근대사회의 섹슈얼리티는 성을 검열하고 억압하는 분위기에 대항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 아니다. 권력이 만든 성의 장치는 성을 알고 싶고, 말하고 싶은 근대인의 욕망을 촉진했다. 감옥, 병원, 그리고 국가는 거대한 성의 장치이다. 성 담론 형성에 관여하는 의사, 정신의학자는 이성애혼인등의 기준에 어긋난 섹슈얼리티를 분류하는 지식-권력(pouvoir-savoir)을 가지고 있다. ‘지식-권력은 관찰과 감시가 은연중에 작동되는 사회를 만들어 개인의 생활과 섹슈얼리티를 극도로 제한한다. ‘지식-권력은 세상을 움직이는 은밀하고도 거대한 힘이다.

    

 

 

 

[] 알라딘에 성의 역사’ 3권을 검색하면 부제목이 자기에의 배려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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