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에 온종일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과 놀았다. 즐거우면서도 괴로운 시간이었. 지젝이 쓴 책 잉여향유가 지난주 토요일 오전에 진행되었던 서울 독서 모임 <수레바퀴와 불꽃> 지정 도서라서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읽었다.








 











[독서 모임 <수레바퀴와 불꽃> 열여덟 번째 모임(12) 지정 도서]

* 슬라보예 지젝, 강우성 옮김 잉여향유: 당황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길잡이(북스힐, 2024)




어영부영 이 책, 저 책 읽는 못된 독서 습관 때문에 독서 모임 지정 도서에 열심히 눈길을 주지 못했다결국 잉여향유》 를 끝까지 다 읽지 못했다지젝이 많이 인용하고 언급하는 헤겔(Hegel), 마르크스(Karl Marx), 자크 라캉(Jacques Lacan)의 사상을 깊게 이해하지 못해서 읽는 속도가 더디었다.

















































* 이찬용, 배세진 감수 마르크스주의 입문: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바꾸기 위해(오월의봄, 2025)


* 피터 싱어, 노승영 옮김 마르크스》 (교유서가, 2019)

 

* 한형식 마르크스 철학 연습: 세상을 직시하게 하는 한 권의 철학》 (오월의봄, 2018)

 

* 미카엘 뢰비 · 엠마뉘엘 르노 · 제라르 뒤메닐 함께 씀, 배세진 옮김 마르크스주의 100단어(두번째테제, 2018)


* 양자오, 김태성 옮김 《자본론을 읽다: 마르크스와 자본을 공부하는 이유》 (유유, 2014)


* 김수행 자본론 공부: 김수행 교수가 들려주는 자본 이야기(돌베개, 2014)


* 존 몰리뉴, 천형석 옮김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철학 입문(책갈피, 2013)




잉여향유는 라캉이 고안한 정신분석학 용어다. 잉여는 마르크스의 경제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인 잉여가치(Mehrwert, surplus value)와 관련이 있다.








노동자가 일을 해서 상품을 만드는 시간은 상품의 가치와 동일하다. 상품이 팔리면서 나온 이익은 노동자가 받는 임금이다. 그런데 노동자가 일하는 시간은 고정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노동자를 고용한 자본가는 노동자의 노동력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데 이윤을 더 많이 얻기 위해 노동 시간을 늘린다. 노동자의 일이 늘어날수록 상품의 가치가 증식된다. 이것이 바로 자본가가 획득하는 잉여가치. 자본가는 노동력을 착취하면서 생기는 잉여가치로 이익을 얻는다.






























* 칼럼 닐, 이미라 옮김 라캉을 읽기 위한 기본(yeondoo, 2025)

 

* 숀 호머, 김서영 옮김 라캉 읽기(은행나무, 2014)


* 브루스 핑크, 이성민 옮김 라캉의 주체: 언어와 향유 사이에서(도서출판b, 2010)

 

* 김석 에크리: 라캉으로 이끄는 마법의 문자들(살림, 2007)

 

* 딜런 에반스, 김종주 옮김 라깡 정신분석 사전(인간사랑, 1998)




향유(jouissance, 주이상스)쾌감을 뜻하는 용어다. ‘향락으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주이상스는 우리말로 번역하기 애매한 개념이다소크라테스(Socrates)가 시민들과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철학을 했듯이 라캉은 자신의 사상을 말로 설명하는 강의와 세미나를 중시했다. 그의 이름이 저자로 표기된 저작물은 강연과 세미나 내용을 편집해서 만든 것이다.









주이상스를 간단하게 설명하면 고통스러운 과도한 쾌락이다지나치게 쾌락에 빠지면 자기를 파괴하는 상황에 이른다. 극단적인 욕망의 끝은 죽음 충동과 맞닿아 있다따라서 주이상스는 죽음으로 향하는 통로이면서도 동시에 죽도록 즐기고 싶은매혹적인 쾌락이다


지젝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잉여향유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분석한다그가 자본주의를 분석하기 위해 사용된 사상의 도구 틀이 너무 많다. 앞서 언급했듯이 헤겔, 마르크스, 라캉을 자주 사용하며 이 세 사상가를 다르게 해석한 동시대 학자들의 견해까지 가지고 온다.

















* [절판] 자크 라캉, 홍준기 · 이종영 · 조형준 · 김대진 함께 옮김 에크리(새물결, 2019)




잉여향유1장에서 유심히 읽은 내용은 <과학 없이도 자본주의도, 자본주의에서의 탈피도 없다>라는 소제목의 글이다. 이 글에서 지젝은 라캉의 에크리의 제일 마지막에 있는 <과학과 진리>라는 강연 글의 한 대목을 인용한다.







 과학에는 기억이 없다. 일단 구성되면, 과학은 자신이 존재하게 된 순환 경로를 조작한다. 달리 말하면, 과학은 정신분석이 진지하게 작동시키는 진실의 차원을 망각한다


(잉여향유, 88)


 과학을 기억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과학은 구성되었을 때는 태어날 때의 우여곡절을 망각한다. 즉 정신분석이 거기서 명백히 작용시키는 진리 차원을 말이다


(라캉, 에크리, <과학과 진리> 중에서, 1029)



라캉이 바라본 과학은 합리적인 지식을 추구하는 학문이다. 반면에 정신분석학은 진리를 탐구하는 주체를 연구 대상으로 삼으며 주체의 무의식에도 주목한다. 따라서 정신분석학은 무의식적 주체를 규명하는 과학이다


지젝은 라캉이 표현한, ‘기억 없는 과학을 여러 번 강조하면서 과학을 비판한다. 그의 비판 지점들을 열거하자면, 주체의 차원을 폐제하는(폐지해 없애 버린다) 과학진실로 둔갑한 인종차별과 성차별을 외면하는 과학의 태도, 연구 결과가 오용되는 상황에 신경 쓰지 않는 과학자들의 문제, 그리고 자본주의에 복무하는 과학이다.


과학이 잘못된 길로 나아가는 것에 우려하는 심정으로 과학을 강도 높게 비판한 지젝의 견해에 동의한다. 하지만 기억하지 않는 과학은 사실이라고 규정한 라캉의 견해에 반대한다.


라캉의 의도와 다를 수 있지만(오독할 가능성이 높지만), 나는 기억하지 않는 과학을 이렇게 읽었다. 미신과 종교를 비판하면서 합리적이고 실증적인 학문으로 자리매김한 과학은 시간이 지날수록 한계와 문제점들을 드러냈다. 목록을 작성할 수 있을 정도로 아주 많다. 우생학, 성차별, 실험 조작, 비윤리적 실험, 원자 폭탄이나 무기 개발에 협조한 과학자들, 담배 회사와 손잡고 흡연의 해로움을 의도적으로 은폐한 과학자들. 그런데도 여전히 과학은 과거의 문제점들을 답습한다. 따라서 라캉이 말한 기억하지 않는 과학은 성찰하는 주체가 없는 학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결국 지식을 성찰하는 주체가 없는 상태의 과학은 자본주의와 인종주의와 같은 이데올로기에 휩쓸린다.


하지만 오늘날의 과학은 연구실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어서 생각이 완전히 멈춰진 학문이 아니다연구실 안에서든 밖에서든 과학을 성찰하는 과학자들이 있다이들은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으며 과학의 치명적인 한계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다른 과학자들이 잊고 싶은 과학의 어두운 면을 누누이 언급하고, 대중에게 알린다. 그러면서 예비 과학자들에게 과학적으로 성찰하는 태도를 가지라고 당부한다.

















* 스티븐 제이 굴드, 홍욱희 · 홍동선 함께 옮김 다윈 이후(사이언스북스, 2009)

 

* 스티븐 제이 굴드, 김동광 옮김 인간에 대한 오해(사회평론, 2003)




미국의 고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는 과거에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잘못 포장된 사이비 학문, 양심을 저버린 과학자들, 우생학을 지지한 과학자, 성차별을 옹호한 과학을 비판한 글을 주로 썼다. 굴드처럼 과학의 약점을 기억하는 과학자는 그것을 교훈으로 삼아 인간다운 삶과 자연과 공생하는 관계를 모색하는 과학을 지향한다. 그리고 과학이 성숙해지려면 과학을 비판하는 시민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지젝은 오늘날 과학은 어느 때보다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말하면서도 과학 그 자체가 이 일을 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한다(잉여향유》, 92쪽). 그는 여기서 또다시 라캉을 인용한다. 기억이 없고, 진실의 차원을 무시하는 오늘날의 과학은 자본주의에 저항하지 못한다. 지젝은 과학이 개선할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과학과 진리>1965년부터 1966년까지 진행된 라캉의 세미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에 라캉이 생각한 과학은 너무 오래됐고 낡았다. 그때의 과학은 오늘날의 과학은 다르다. 그런데도 지젝은 과학에서 비롯된 문제점들을 허심탄회하게 인정해 왔고, 개선하기 위해 자성의 목소리를 낸 과학의 노력마저도 불신한다. 과학을 오해하고 있는 듯한 지젝의 냉소적 태도가 불만스럽다.







<끔찍한 오역에 관한 cyrus의 주석>









잉여향유의 번역자는 지젝이 인용한 라캉의 에크리문장을 직접 번역했다. 캔터는 무한을 연구한 독일의 수학자 게오르그 칸토어(Georg Cantor)를 영어식으로 표기한 것이다.


독일인의 이름을 영어식으로 어설프게 표기한 것은 가볍게 봐줄 수 있어도 끔찍한 오역은 지나칠 수 없다.






* 잉여향유89

 

 그는 무한이라는 개념의 혁명으로 인해 내적 혼란을 겪어 광기의 극한으로 치닫고 심지어 식인 행위를 하게 된 캔터를 언급한다.



[원문]

 He mention Cantor whose revolutionizing of the notion of infinity triggered an inner turmoil which pushed him to the limit of madness and even led him to practice coprophagia.

 


 

89쪽의 ‘식인 행위를 하게 된 캔터는 오역이다. 칸토어는 혼자서 무한집합론을 연구했는데, 당시 동료 수학자들은 칸토어의 무한 연구를 평가절하했다. 동료들에게 따돌림을 당한 칸토어는 말년에 우울증과 조현병에 시달렸고, 이상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coprophagia는 대변을 먹는 식분증을 뜻한다



















* D. 배로, 전대호 옮김 무한으로 가는 안내서: 가없고 끝없고 영원한 것들에 관한 짧은 기록(해나무, 2011)

 

* [절판] 아포스톨로스 독시아디스 · 크리스토스 H. 파파디미트리우 함께 씀, 알레코스 파파다토스 · 애니 디 도나 함께 그림, 전대호 옮김 로지코믹스: 버트런드 러셀의 삶을 통해 보는 수학의 원리(RHK, 2011)

 

* 아미르 D. 악젤, 승영조 · 신현용 함께 옮김 무한의 신비: 수학, 철학, 종교의 만남(승산, 2002)




무한으로 가는 안내서무한의 신비칸토어의 삶과 업적을 상세하게 다룬 책으로, 무한을 주제로 한 연구가 정신 나간 연구로 취급받게 된 시대적 배경을 알 수 있다







로지코믹스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을 수학자로 유명하게 만든 저서 <수학의 원리>의 탄생 배경을 그래픽노블로 구성한 책이. 이 책에 러셀이 태어나기 전에 활동한 수학자들이 나오는데정신 질환에 걸린 칸토어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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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마시는 위스키가 창의력을 높여준다는 이야기가 있다

술을 마시면서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나는 이 이야기를 무척 좋아한다.









아침에 마시는 위스키의 효능에 대한 출처는 뉴로크리에이티브 연구소(Neurocreative Institute)라는 기관이 발표한 연구 논문이다뇌에 약간의 알코올이 들어가면 긴장이 풀려서 아이디어가 잘 떠오른다고 한다


















* 스켑틱 협회 편집부 엮음(마이클 셔머제임스 랜디 외 여러 명의 필자 참여), 김보은 · 류운 · 하인해 외 옮김 나는 의심한다, 고로 존재한다: 스켑틱 10주년 베스트 에세이(바다출판사, 2025)




논문이 과학자들에게 알려지려면 학술지에 실려야 한다.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은 과학자들의 검토 대상이 된다뉴로크리에이티브 연구소가 발표한 위스키 관련 논문 제목과 이 논문의 게재를 허락한 학술지 제목이 있는지 구글에서 검색을 해봤는데,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연구소의 위치와 연구소 공식 홈페이지도 나오지 않는다나는 실험 과정이 상세하게 언급되지 않았거나 출처가 확실하지 않은 연구 결과를 믿지 않는다


애주가는 아침에 술을 마실 때면 어디인지도 모르는 연구소가 주장한 연구 결과를 언급한다어디에서 본 건데‥…”, “누구에게 들은 이야긴데‥…견해를 뒷받침하는 증거를 길게 설명하지 않고, 연구소와 과학자 이름을 같이 언급하면 상대방은 그 견해를 과학적으로 증명된 내용이라고 믿는다사람들은 지적 능력이 높다고 생각하는 권위 있는 과학자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과학에 취한 애주가는 회의주의자(skeptic)다. 낮술을 즐기면서도 아침에 마시는 술이 정말로 창의력 향상에 도움이 되는지 의심한다잠정 가설로 받아들이고, 과학이라고 주장하는 견해에 애매모호한 점(실험 방식, 통계 자료나 견해를 뒷받침하는 증거에 대한 설명이 빈약할 때)이 있으면 의심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내 경험상 늦은 밤에 술을 마시면 글이 잘 써진다. 하지만 술이 나의 머리끄덩이를 잡을 때가 많다이럴 때 정말 피곤해진다직장 일에 지친 상태에서 술을 마시면 문장 한 줄을 쓰는 데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다. 글이 안 써지는 어둠의 시간은 술맛이 사라지는 지루한 안주다.


쉬는 날이나 주말에 마시는 술은 마음이 편해지고, 두뇌 회전 속도가 평일보다 빨라진다. 지난주 토요일 아침, <과학책방 갈다>에 가서 맥주를 마셨다. <갈다>는 커피, , 맥주를 판다. 음료를 주문하면 책방 2층에서 마실 수 있다. 나는 책 한 권을 안주 삼아 맥주를 주문한다









<갈다>에 판매하는 맥주는 총 다섯 종류다. 올해 여름에 반딧불이라는 맥주가 새로 들어왔다. ‘반딧불을 마시고 싶어서 지난주 토요일에 <갈다>에 갔다<갈다>에서 고른 책 안주는 다른 과학은 가능하다, ‘느린 과학선언이다.

















* 이자벨 스탱게르스, 김연화 · 장화원 함께 옮김 다른 과학은 가능하다, ‘느린 과학선언: 상호의존의 관계를 다시 엮는 과학으로(에디토리얼, 2025)




느린 과학은 과학 문제에 올바른 해답을 최대한 빨리 찾는 것을 거부한다. 느린 과학은 대중과 소통한다. ‘느린 과학에 익숙한 대중은 과학자들이 발견한 연구 결과에 열광하는 마니아가 아니다. 그들은 신중하다우리 삶에 필요한 과학 지식이 무엇인지 논의하며 가꾸어야 할 가치가 있는 과학 지식인지 판단한다.


책방 바로 맞은편에 나무 한 그루가 있다. 2층에 넓은 창문이 있어서 나무를 제대로 볼 수 있다이파리는 다 떨어졌고, 나뭇가지 끝에 겨울눈(winter bud)이 붙어 있었다맥주를 마시면서 창밖의 나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겨울눈을 알고 싶어졌다. 술에 살짝 취한 뇌에 호기심이 돋아났다겨울눈이 자란 나무의 이름을 알고 싶어졌고, 겨울눈이 왜 생기는지 궁금했다다음날인 일요일에 대구로 돌아와서 겨울눈을 언급한 책들을 찾으러 도서관에 갔다.



















김태영 · 윤연순 · 이웅 함께 씀 겨울나무: 우리 땅에 사는 나무들의 겨울나기(돌베개, 2022)

 

* [개정판] 소경자 · 이광만 함께 씀 겨울눈 도감: 4단계 분류법에 따라 겨울눈을 구별한다(나무와문화, 2020)



겨울눈은 겨울에 난 싹이다. 이 싹은 비늘이나 털로 덮인 상태, 추운 겨울바람을 버티면서 봄을 기다린다겨울눈의 크기는 작은 편인데, 이 속에 겨울을 지내기 위한 양분과 봄에 발아하는 데 필요한 영양분이 저장되어 있다.







책방에서 본 겨울눈은 타원형이고, 털로 덮여 있다. 두 권의 겨울눈 도감을 같이 보면서 내가 내린 잠정 결론은 백목련 혹은 목련과 식물의 겨울눈이다.

















트리스탄 굴리이충 옮김 나무를 읽는 법나무껍질과 나뭇잎이 알려주는 자연의 신호》 (바다출판사, 2024)




탐험가 트리스탄 굴리(Tristan Gooley)식물을 관찰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그래서 자연의 셜록 홈스(Sherlock Holmes)’라는 별명이 있다그는 나무가 인간과 동물, 주변의 다른 식물에 알리는 수백 가지 자연 신호(natural sign)를 알면 나무를 읽을 수있다고 말한다자연 신호는 너무나 많고, 여전히 우리가 알지 못한 것들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무를 누구보다 잘 아는 굴리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나무를 한눈에 알아볼 수 없다면서 겸손하게 말한다. 나무 한 그루를 제대로 식별하는 방식을 배우려면 평생을 바쳐야 한다









책을 참고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모르는 것이 많다. 책방에서 만난 나무가 백목련이라고 주장하고 싶지 않다. 봄에 변신하는 나무의 모습을 보면 백목련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과학에 (심)취하려면 성급하게 해답을 찾거나 결론을 도출하지 않는 것이 좋다. 해답과 결론을 찾는 과정을 즐겨야 한다그리고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정직하면서도 차분한 여유도 있어야 한다내가 좋아하는 과학은 결론을 쫓아가는 빠른 과학이 아니다. 호기심을 유지하면서 꾸준히 관찰하는 느린 과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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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5-12-25 0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무를 읽는 법, 이 도서 찜합니다.

cyrus 2025-12-29 00:08   좋아요 0 | URL
나무를 관찰하는 다양한 방식을 정리한 책입니다. 호시우행님의 독서 취향에 어울리는 책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

stella.K 2025-12-25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봤더니 술꾼이었구만! 책을 안주 삼는다고 썰이나 풀고. 말이나 못하면...칫!
한 잔이 두 잔되고, 석 잔된다. 건강 생각해서 지나친 과음은 삼가하고. ㅋ 암튼 올해 사느라 고생 많았다. 토닥토닥~ 한 해 마무리 잘하고 희망찬 새해 맞아라. ^^

cyrus 2025-12-29 00:11   좋아요 1 | URL
책과 술 중 딱 하나만 고른다면 저는 책을 고르겠어요. 그런 만큼 책을 먼저 읽으면 술 한 모금이라도 입에 안 대려고 해요. 술 마시는 횟수를 줄이도록 노력해 볼게요. ^^

감은빛 2025-12-26 0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 흡연자들이라면 공감할텐데, 담배를 피우면 잠시 집중력이 올라가고 각성효과가 생겨요. 그래서 저는 아주 오래 전 대학 시절에 도서관에서 시험공부를 하지 않고 혼자 학교 뒷산 산책로 넓다란 바위에 앉아 가끔 담배를 피워가며 공부했던 기억이 있어요. 글을 쓰다가 막히거나, 일을 하다가 뭔가 풀리지 않을 때 담배를 피우고 돌아오면 갑자기 풀리지 않았던 문제의 답이 떠오르기도 하죠. 물론 당연히 매번 그런 것은 아니지만.

술도 정말 소량이라면 조금은 그럴 수 있겠다 싶어요. 한 십여년 전에 저도 맥주 마시며 책을 읽는 버릇이 있었던 기억이 나네요. 서재에 음주 독서라고 글을 썼던 기억도 나구요. 언젠가부터 맥주를 거의 안 마시게 되며 그 버릇은 사라졌어요. 소주를 마시며 책을 읽기엔 도수가 너무 쎄서 책에 집중을 못하게 되죠. 술을 조금 마시고 책을 읽는 건 가능하겠지만, 술을 계속 마시며 읽는 것은 쉽지 않아요.

cyrus 2025-12-29 00:19   좋아요 0 | URL
제가 담배까지 피웠으면 벌써 건강이 나빠졌을 거예요. 그런데 밤에 잠을 늦게 자는 일이 잦아서 비흡연이라고 해도 건강 상태가 좋다고 말을 못 하겠어요. 다행히 올해는 크게 아픈 적이 없지만, 이럴 때 조심해야죠. 시간 날 때 건강 검진을 받아야겠어요. ^^
 




잘 낫지 않는 질병에 걸리면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 건강이 나빠진 상태를 보여 주기 싫어서 병에 걸린 사실을 말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이런 사람에게 충언할 때 쓸 수 있는 속담이 있다.







병 자랑은 하여라.’ 병에 걸린 사실에 혼자 불안해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겪는 증상을 알려서 치료법을 찾으라는 뜻이다.


몸과 정신이 아픈 경험은 누구나 겪는 일이다. 그러나 질병을 터놓고 말하기가 쉽지 않다. 모든 아픔이 동등하게 관심받는 것은 아니다누군가의 아픔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동정심을 일지만, 다른 누군가의 아픔은 외면받거나 의도적으로 지워진다어떤 아픔은 마땅히 치료받아야 할 대상이 되지만, 또 어떤 아픔은 질병에 대한 부정적 시선에 찔린다아픈 사람의 목소리는 소거된다. 결국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한다침묵당한 아픔은 불평등과 차별을 유발한다. 정확하게 진단하는 의료 기기가 갖춰진 병원이 많이 생겨도 아픔을 말할 수 없게 만드는 사회는 건강하지 않다.

















[<읽어서 세계 문학 속으로> 2025년 12월의 세계 문학]

* 비키 바움, 박광자 옮김 크리스마스 잉어(휴머니스트, 2023)




오스트리아에 태어나 독일과 미국에 활동한 비키 바움(Vicki Baum)의 단편 소설 <>아픔을 말하지 못한 여성이 느끼는 소외감이 잘 묘사되어 있다1924년에 발표된 <>토마스 만(Thomas Mann)이 극찬한 작품으로, 국내에 유일하게 출간된 바움의 단편 선집 크리스마스 잉어에 실려 있다.


<> 가정을 지키기 위해 아픔을 참는 주부의 이야기다주인공은 새 옷장을 사고 싶어 한다. 그러나 집안일하는 주부는 경제적 자유가 없다. 그녀는 옷장을 사는 데 필요한 돈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 돈을 쓰려면 남편에게 허락을 받아야 한다답답한 일상은 주부의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한다. 결국 그녀는 알 수 없는 몸의 통증에 시달린다몸에 이상을 느낀 주부는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아파서 쉬게 되면 해야 할 집안일이 산더미처럼 쌓인다. 자기 대신에 식사를 차려 줄 사람이 없다참다못한 주부는 남편에게 자신의 증상을 밝힌다. 그러나 남편은 아내가 감기에 걸렸다고 생각한다. 주부는 자신의 아픔을 가볍게 여기는 남편에 실망한다도통 낫지 않아서 병원에 가보지만, 의사는 그녀의 병을 감기로 진단을 내린다. 주부는 의사의 진단을 믿는다.









   











* 베티 프리단, 김현우 옮김 여성성의 신화: 새로운 길 위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용기를(갈라파고스, 2018)

 

* 김선희 페미니즘의 방아쇠를 당기다: 베티 프리단과 <여성의 신비>의 사회사 (푸른역사, 2018)




<> 집안일을 열심히 하는 삶에 만족하는 가정주부이미지가 허상임을 보여준다. 이 소설이 나온 지 40여 년 후에 가정주부의 아픔을 본격적으로 주목한 책이 나온다이 책이 바로 미국의 페미니스트 베티 프리단(Betty Friedan)여성성의 신화(The Feminine Mistique). 바움이 미국 할리우드에서 세상을 떠난 지 3년 후에 출간되었다주부에게 집은 일터다. 집안일은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여성으로 태어나면 자연스럽게 해야 하는 일로 여긴다. 주부들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스스로 묻지 못한 채 살아왔다. 가정에 헌신하는 여성은 의사도 명확히 진단 내리기 어려운 신체적 증상을 반복적으로 경험하거나 정신적인 공허감을 느낀다프리단은 주부들의 속앓이를 이름 붙일 수 없는 문제(problem that has no name)로 명명한다.


















* 아서 프랭크, 최은경 · 윤자형 함께 옮김 아픈 몸을 이야기하기: 육체, 질병, 윤리(갈무리, 2024)

 

* 아서 프랭크, 메이 옮김 아픈 몸을 살다(봄날의책, 2017)




한 사람의 아픔에도 이야기(narrative)가 있다. 아픈 이야기는 한 사람의 삶 속에 깊숙이 뿌리박혀 있다. 말하지 못한 아픈 이야기는 약을 먹거나 치료해서 금방 사라지는 가벼운 증상이 아니다병을 자랑하는 이야기는 병을 치료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반면에 아픈 이야기는 질병을 극복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부푼 이야기가 아니라 질병이 삶의 일부가 된 이야기. 아픔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픈 몸의 취약함을 온전히 받아들이면서도 자기 비하로 빠지지 않는다질병, 장애 등이 포개진 아픈 이야기를 듣는 일은 지금 아프기 시작했거나 과거에 아팠던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을 읽는 방식이다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우리도 언젠가는 아플 수 있다아픈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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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에 반하여 수전 손택 더 텍스트
수전 손택 지음, 홍한별 옮김 / 윌북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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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탁의 탁월한 문장을 볼 때마다 감탄해서
손으로 머리를
‘탁’ 칠 때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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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25-12-22 13: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거 혹시 아재 개그인가요? ㅎㅎㅎㅎ

cyrus 2025-12-25 06:30   좋아요 0 | URL
아재개그가 결합된 이행시입니다.. ㅎㅎㅎ
 
인생에 가장 가까운 것 - 삶과 문학, 읽고 쓰기에 관한 네 번의 강의
제임스 우드 지음, 노지양 옮김, 신형철 해제 / 아를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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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아탑에 박힌 문학은 고루한 학문이다. 잘난 체하는 문학은 지루하다. 독자는 거꾸로 학문이 된 문학에 다가서지 못한다. 뻣뻣하게 경직된 문학과 친해질 수 없다. 


문학의 정석(定石) 비평가와 문학 교수들이 정교하게 깎아 만든 비석이다. 학생들은 거대한 비석에 새겨진 이론과 비평 방식을 받아 적으면서 수련(修鍊)한다



문학을 학문으로 받아들인 학생들은 비석을 윤이 나게 열심히 닦는다(). 


학생들의 오랜 반복 훈련으로 단련된() 문학의 정석은 

절대로 깨질 리 없다


학생들은 문학의 정석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정답을 찾는다. 




상아탑이 편한 문학은 잘 움직이지 않는다. 펑퍼짐한 문학은 상아탑에서 빠져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뚱한 문학은 독자들과 어울리지 못한다독자의 눈빛을 받지 못한 문학은 쓸쓸하다. 아무리 잘 썼다고 해도 쓸모가 없다문학이 있어야 할 곳은 상아탑이 아니다문학은 반드시 독자를 만나야 한다. 독자의 곁에 있어야 한다.








영국의 비평가 제임스 우드(James Wood)는 유년 시절에 문학의 숲(wood)을 심기 시작했다한 권의 책이 문학 숲의 씨앗이다. 이 책은 시, 소설, 수필, 희곡도 아니다. 독자들에게 소설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기 위해 만든 것 같은 소설과 소설가들이라는 입문서다. 어린 우드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을 좋아했고, 그 부분만 열심히 읽었다. 전 세계 작가들의 이름을 알파벳순으로 나열하여 그들의 작품 세계를 요약한 장이었다그는 작가들의 이름과 소설 제목을 기억했고 틈틈이 그들의 작품을 읽었다. 이때부터 문학 소년의 마음속에 문학 새싹들이 모도록 돋아났다문학 소년과 함께 자란 문학의 숲은 비평가로 성장하기 위한 영양분이 되었다책을 읽고 글을 쓰는 비평가가 심어 가꾼 문학의 숲은 싱그럽다.









우드의 인생에 가장 가까운 것은 자신만의 문학의 숲을 가꾸고 싶은 독자, 작가들이 꾸민 문학의 숲을 거닐고 싶은 독자를 위한 안내서다. 책 제목은 영국의 소설가 조지 엘리엇(George Eliot)이 말한 예술은 인생에 가장 가까운 것에서 따왔다. 우드는 상아탑에 박힌 문학만 보는 비평을 선호하지 않는다. 상아탑에 박힌 문학은 보면 볼수록 따분하다. 상아탑을 지키는 일에 몰두한 비평가와 문학 교수는 문학을 학문으로 취급한다학구적 문학 비평은 독자와 문학의 사이를 멀어지게 한다독자는 재미없는 상아탑을 보러 가지 않는다문학을 즐기기 위해 문학의 숲을 산책한다









문학의 숲에 문학만 있는 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널려 있다문학의 숲을 모험하는 우리는 사용할 수 있는 것을 찾아서 이름을 붙일 수 있다사용할 수 있는 것’의 이름과 형태는 무수하다. 그것은 우리가 쓰고 있는 평범한 물건이 될 수 있고, 과거에 만났던 사람일 수도 있다.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우리의 인생 가까이에 있다. 그래서 금방 찾을 수 있다.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문학과 밀접하다. 우리는 이론에 의존하지 않고도 문학을 마음껏 감상하고,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다. 상아탑에 달라붙은 비평가는 독자의 비평에 관심 없다. 오히려 자신이 배운 비평 방식을 가르치려고 한다. 이와 반대로 우드가 강조한 문학 비평 방식은 비평가가 아닌 독자들도 따라 할 수 있다. 독자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독자적으로 사용하면 된다그리하여 독자는 소설의 여백에 자신만의 이야기를 쓰는 작가가 되거나 문학 작품의 매력을 볼 줄 아는 비평가가 된다. 우드는 문학에 편하게 말을 걸 수 있는 독자가 되라고 권한다. 문학과 친분이 두터운 독자 문학 작품을 읽다가 발견한 것을 이야기하고(retelling), 목소리를 낸다(re-voicing). 우드는 자신의 비평 방식을 비평적 다시 이야기하기또는 책을 통과하는 글쓰기라고 표현한다.


독자가 책을 통과하려면 우선 진지한 관찰자가 되어야 한다. 진지한 관찰자는 다른 독자들이 거들떠보지 않는, 아주 사소한 세부 사항(detail)’을 좋아한다. 진지한 관찰자 유형에 속한 독자는 세부 사항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소설 속 등장인물이 말로 표현하지 못한 숨은 감정까지 포착한다.


문학의 정석은 무겁다. 우리가 만나야 할 문학은 가벼워야 한다. 우리가 가져야 할 문학은 평생 간직할 수 있는 소박한 조각으로 되어 있다



우리는 소중한 문학 조각을 쓰다듬는다

문학 조각 위에 글을 쓰(고) 다듬는다







우리가 정답게 어루만지는 문학 조각은 문학의 정석(貞石)이다.









<세부 사항을 관찰하면서 읽는 cyrus가 만든 주석>




[1] 정석(貞石): 단단하고 아름다운 돌





* 43, 역자의 각주





라스콜리니코프: 톨스토이죄와 벌의 주인공 [주2]


 


[주2죄와 벌》을 쓴 작가는 도스토옙스키(Dostoevskii).






* 117


 



리디아 데이비스의 단편소설 <문법 질문>(Grammar Questions) [주3]

 



[주3리디아 데이비스(Lydia Davis)의 작품집 불안의 변이(강경이 옮김, 봄날의책, 2023)에 수록되어 있다. 번역된 제목은 문법 질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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