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서 활동하는 여성운동 단체들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단체는 ‘대구경북여성단체연합’입니다. ‘레드스타킹’처럼 독서와 여성운동을 병행하는 중소 규모 단체도 있습니다. 대구에 ‘레드스타킹’과 비슷한 단체가 또 있는데요, 작년 5월부터 활동하기 시작한 ‘나쁜 페미니스트’입니다. 집회, 독서모임, 페미니즘 강연 등을 기획 · 진행하고 있습니다.

 

 

 

 

 

 

7월 30일에 ‘나쁜 페미니스트’와 ‘대구경북여성단체연합’이 공동 주최한 페미니즘 강연이 열렸습니다. 강연 제목은 ‘다문화주의, 페미니즘, 그리고 교차성’입니다. 강연자는 김보명 서울대 여성연구소 객원연구원입니다. 김보명 선생님은 요즘 제가 주목하고 있는 여성학자입니다. 레드스타킹 멤버들을 만나게 되면서 이 분이 쓴 논문과 활동에 관심을 가지게 됐습니다.

 

제주도 예맨 난민 문제가 불거진 이후로 ‘일부’ 페미니스트는 난민 보호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그들이 난민 수용을 반대하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무슬림 남성 난민’이 성폭력을 저지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우스갯소리로 한국에 오고 싶어 하는 난민을 ‘남민(男民)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 여성 차별과 (성)폭력을 정당화하는 이슬람 문화가 우리나라 사회에 들어올까 봐 걱정합니다. 이방인에 대한 낯선 감정, 그리고 낯선 존재에 대한 두려움.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본능적인 감정입니다.

 

 

 

 

 

 

 

 

 

 

 

 

 

 

 

 

 

 

 

* 마사 누스바움 《혐오와 수치심》 (민음사, 2015)

* 마사 누스바움 《혐오에서 인류애로》 (뿌리와이파리, 2016)

* 카롤린 엠케 《혐오사회》 (다산초당, 2017)

 

 

 

그런데 이 ‘공포’ 감정이 무슬림 남성 난민과 이슬람에 투사되면 어떻게 될까요? 무슬림 남성 난민은 여성을 잔인하게 억압하는 ‘악마’가 되고, 이슬람은 여성 억압을 일삼는 반인륜적 종교로 인식합니다. ‘무슬림 남성 난민=이슬람=악마’로 연상되는 공포 감정이 확산될수록 실제로 검증되지 않은 공포도 더해지고, ‘가짜 뉴스’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난민 수용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난민을 ‘여성을 위협하는 존재’ 또는 ‘사회에 해로운 존재’로 규정합니다. 미국의 법철학자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은 자신과 주변 사람들, 그리고 사회 전체를 보호한다는 핑계로 타자를 거부하고 혐오하는 반응을 ‘투사적 혐오(projective disgust)라고 말합니다. 투사적 혐오는 자신과 다른 사회 구성원 또는 타자를 ‘오염원’으로 규정하도록 가르칩니다. 난민 수용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무슬림 남성 난민이 한국 여성을 위협할까봐 두려워합니다. 워마드 회원들은 무슬림 남성과 이슬람을 조롱하는 발언을 합니다. 그러나 무슬림 남성 난민과 이슬람에 향한 투사적 혐오는 상상적 차원에서 일어날 뿐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무슬림 남성 난민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난민을 두려워하는 반응은 ‘실재보다 강력한 상상적 차원’에서 일어난 감정입니다. 실제로 자신에게 위협을 가하지 않은 무슬림 난민 남성에게 분노와 혐오를 투사하는 상상은 타자를 배제하고 혐오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데 기여합니다. 독일의 언론인 카롤린 엠케(Caroline Emcke)는 혐오는 “느닷없이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훈련되고 양성”된다고 말합니다[주1]. 따라서 우리 사회에 제주도 예맨 난민 수용을 반대하고, 혐오하는 목소리가 늘어난 것은 갑자기 나타난 새로운 현상이 아닙니다.

 

김보명 선생님은 난민 수용에 반대하는 페미니스트들의 언어를 분석하여 여성들이 왜 ‘난민 혐오’에 몰두하는지 배경에 주목했습니다. 무슬림 난민 남성을 비난하는 여성들은 무슬림 남성의 폭력성을 강조하기 위해 무슬림 남성에게 학대받은 무슬림 여성의 피해 경험 사례를 ‘전시’합니다. 김보명 선생님은 한국 여성의 안전을 확보하는 명목으로 무슬림 여성의 피해 사례를 동원하고 전시하는 언어를 ‘페미니즘의 언어’라고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서사는 무슬림 여성을 ‘피해자’라는 고정된 틀 안에 가둡니다. 즉 남성 중심 무슬림 문화에 저항하는 무슬림 여성의 힘과 목소리를 보지 못하게 됩니다.

 

 

 

 

 

 

 

 

 

 

 

 

 

 

 

 

 

 

* 권김현영 엮음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교양인, 2018)

 

 

 

아마도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한국 여성이 무슬림 여성의 피해 경험을 공론화하는 일은 피해자 여성을 지지하는 동시에 무슬림 남성의 폭력성을 고발하는 반(反) 성폭력 활동이 될 수 있다고요.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슬림 여성의 피해 경험 사례만 지나치게 부각하는 것은 ‘피해자 중심주의’ 담론에 벗어나지 못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권김현영 선생님은 피해자 경험을 공론화하면서 무조건 피해자 편에 들어주는 언어는 페미니즘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주2]. 한국 여성(페미니스트)이 무슬림 남성 난민이 일으키는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슬림 여성에게 ‘피해자로서의 역할’만 부여한다면, 그것은 ‘피해자 존중’이 아닙니다. 권김현영 선생님은 피해자를 무조건 지지하거나 오직 피해 사실만 호소하는 일을 ‘권리의 형식을 띤 타자화’라고 했습니다[주3].

 

 

 

 

 

 

 

김보명 선생님은 “페미니즘은 난민 혐오의 주체 세력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일부’ 페미니스트는 ‘페미니즘’을 내세워 난민 수용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워마드 회원들은 남성 난민과 이슬람을 혐오하는 발언을 합니다. 선생님은 우리나라 페미니즘이 지금보다 더 용감해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용감했습니다. 그분은 ‘혐오와 공포’를 넘어선 페미니즘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 ‘경계 없는 페미니즘’이라는 페이스북 페이지를 열었습니다. 선생님은 “페미니즘은 나의 세계를 넓히는 사상”이라고 말했습니다. 공감합니다. ‘나의 세계’에 갇힌 페미니즘은 다양한 여성의 경험, 언어, 정체성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의 세계’를 넓히려면 사유의 범위를 좁히게 하는 ‘경계들’을 없애야 합니다. 그 ‘경계들’이란 인종주의, 종교, 문화, 섹슈얼리티 등입니다. 복잡한 ‘경계들’에 연루된 특정 여성 집단의 경험과 목소리를 재현하고 분석하는 페미니즘이 바로 ‘상호교차성 페미니즘’입니다.

 

 

 

 

[주1] 카롤린 엠케, 정지인 옮김, 《혐오사회》, 다산초당, 2017, pp. 22~23.

 

[주2] 권김현영, 『성폭력 2차 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의 문제』,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교양인, 2018, pp. 50~51.

 

[주3] 같은 책, pp.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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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말에 왼쪽 손가락이 아팠습니다. 처음에는 중지 손가락에 통증이 생겼는데, 이틀 지나고 나니까 집게손가락에도 통증이 느껴졌어요. 폭염과 통증이 관통하는 책 읽기는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고통스러운 기간에 읽었던 책이 사르트르《말》(민음사, 2008)이었습니다. 아픈 와중에 재미없는 책을 읽느라 힘겨웠습니다.

 

 

 

 

 

 

 

 

 

 

 

 

 

 

 

 

 

 

 

* 장 폴 사르트르 《말》(민음사, 2008)

 

 

 

《말》은 사르트르가 59세 때 쓴 자서전입니다. 이 책에 어린 시절의 사르트르를 볼 수 있습니다. 사르트르가 한 살이었을 때, 아버지는 세상을 떠납니다. 사르트르는 아버지의 죽음이 본인 생애의 큰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어린 사르트르는 아버지의 상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외가에서 살게 되고, 외할아버지는 손자 사르트르를 애지중지하게 키웁니다. 키가 작고,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사르트르는 또래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습니다. 그의 유일한 놀이터는 외할아버지의 서재였습니다. 사르트르는 서재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했고, 다양한 작가의 문학 작품들을 섭렵했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현실과의 접촉을 통해 세상을 알아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책을 통해 얻은 상상과 관념이 현실이라고 믿었습니다.

 

 정신 상태로 보아 플라톤주의자가 된 나는 지식에서 출발해서 사물로 향했다. 나로서는 사물보다도 관념이 한결 현실적이었다. 왜냐하면 내게는 관념이 먼저 주어졌고, 더구나 사물로서 주어졌기 때문이다. 내가 세계를 만난 것은 책을 통해서였다. 그것은 동화(同化)되고 분류되고 규정되고 사색된 세계, 그러면서도 아직도 무서운 세계였다. 나는 책에서 얻은 무질서한 경험과 현실적인 일들의 부조리한 흐름을 혼동했다. 나의 관념론은 바로 여기에 유래한 것이며 나는 그것을 청산하는 데 30년이 걸렸다. [주1]

 

 

《말》을 번역하고, 이 작품에 대한 해설을 쓴 정명환 교수는 사르트르가 30년 동안 청산하는 데 걸린 관념론을 ‘문학병’이라고 불렀습니다. 어린 사르트르의 문학병은 점점 심해졌습니다. 그는 ‘조숙한 천재’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예를 들면 가족들 앞에서 책을 읽는 척하고, 할아버지의 도움을 받으면서 작가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기도 합니다. 이때 사르트르는 열 살도 되지 않은 꼬마였어요. 가족들은 그의 조숙한 행동을 보면서 대견하다고 느꼈고, 사르트르는 주위 어른들의 반응을 감지합니다. 어른들의 시선과 반응은 사르트르를 위한 ‘거울’이었습니다. 사르트르는 그 거울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보게 되고, 자신의 명석한 모습을 확인합니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거울’의 실체를 의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존재가 무엇인지 고민합니다. 사르트르는 글을 쓰면서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찾게 됩니다.

 

 

 나는 글을 씀으로써 존재했고 어른들의 세계에서 벗어났다. 나는 오직 글쓰기를 위해서만 존재했으며, ‘나’라는 말은 ‘글을 쓰는 나’를 의미할 따름이었다. 그런들 어떠랴, 나는 기쁨을 알았다. [주2]

 

 

사르트르는 자서전에서 독서와 글쓰기가 어떻게 자신의 삶을 변화시켰는지 담담하게 보여줍니다. 자서전이라고 해서 책을 얕보면 안 됩니다. 사실 《말》은 사르트르의 첫 장편소설 《구토》 다음으로 한 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책입니다. 저녁 독서모임에 참석했던 분의 말씀에 따르면, 《구토》를 읽다가 너무 어려워서 구토를 했다는군요.

 

 

 

 

 

 

 

 

 

 

 

 

 

 

 

 

 

 

* 변광배 《장 폴 사르트르 : 시선과 타자》 (살림, 2004)

 

 

 

《구토》와 《말》은 ‘실존주의 철학’으로 빚어낸 작품입니다. 그래서 저는 《말》이 품고 있는 실존주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해 사르트르의 ‘타자론’을 공부했습니다. 《말》에서 어린 사르트르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대해 고민합니다. ‘나와 타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자신과 타자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인간입니다. 사르트르는 ‘의식 존재 여부’를 기준으로 이 세계에 존재하는 것을 두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의식을 가진 존재는 인간이고, 의식을 가지지 않는 존재는 사물입니다. 사르트르는 전자의 개념을 ‘대자존재’, 후자의 개념을 ‘즉자존재’라고 명명했습니다. 대자존재인 인간은 의식을 통해 타자와의 관계를 형성합니다. 인간은 고통, 고뇌, 고난, 질병과 죽음에 마주한 실존적 존재입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자신을 의식하고, 무언인가를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하는 모습은 실존적 불안에 대처하는 노력의 여정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사르트르는 이를 ‘무용한 정열’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삶이든 죽음에 이르면 생전의 흔적들은 잊히게 되니까요. 그래서 사르트르는 자신의 이름과 존재 가치를 불멸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즉자존재, 즉 책과 자신을 결합하는 시도를 합니다.

 

 

 오랫동안 나는 내가 태어난 것처럼 어디서든지 아무렇게나 죽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 그런데 나의 천직이 문제를 깨끗이 해결해주었다. 칼싸움은 사라져 없어지지만 글은 남는다. 문학에 있어서는 증여자 스스로가 증여물로, 순수한 사물로 변신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우연은 나를 사람으로 만들었지만 너그러움은 나를 책으로 만들 것이다. 나는 수다를 떠는 나의 의식을 활자화하고 삶의 소음 대신 불멸의 기록을 남기리라. 그리고 육체 대신 문체를, 시간이라는 연약한 나선 대신 영원을 얻으리라. [주3]

 

 

사르트르도 대자존재 인간입니다. 그도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래도 그는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의 의식을 즉자존재인 책과 결합하여 변신합니다. 이게 말이 안 되는 논리로 보이지만, 사르트르는 대자존재와 즉자존재의 결합 상태가 인간이 죽을 때까지 추구해야 하는 이상적 상태라고 주장합니다[주4]. 대자존재와 즉자존재의 결합 상태를 추구하는 인간은 ‘신이 되고 싶은 욕구’를 품고 있습니다. 신은 불멸의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죽음으로 인해 육체가 소멸하더라도 의식하면서 살아온 자신의 존재, 더 나아가 자신이 쓴 모든 글이 ‘불멸의 상태’로 남길 원합니다. 저는 사르트르의 노력이 실패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뛰어난 프랑스의 지성 사르트르도 대자존재, ‘인간’입니다. ‘신이 되고 싶은 욕구’는 ‘무용한 정열’이며 절대로 충족될 수 없습니다.

 

‘읽다 익다’ 책방지기 은아 쌤은 《말》이 ‘계속 생각하게 만드는 책’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이 책을 언제 다시 읽을지는 모르겠지만, 보면 볼수록 생각거리를 주는 책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주1] 장 폴 사르트르, 정명환 옮김, 《말》, 민음사, 2008, pp. 56.

 

[주2] 같은 책, pp. 166.

 

[주3] 같은 책, pp. 207~208.

 

[주4] 변광배, 《장 폴 사르트르: 시선과 타자》, 살림, 2004, pp. 16~17.

 

 

 

 

 

 

※ 우주지감 65번째 책모임

 

 

 

* 김한민 《비수기의 전문가들》 (워크룸프레스, 2016)

 

 

 

 

  일정 : 2018년 8월 28일 화요일 오전 11시 /

8월 30일 목요일 저녁 7시 30분

 

 

            장소 : 책방 ‘서재를 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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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08-02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가락이 아프다 게다가 어려운 책을 읽는다 날씨는 너무 덥다...그래도 역시 Cyrus님입니다~

cyrus 2018-08-03 14:08   좋아요 1 | URL
손가락이 아팠던 시기가 독서모임 주간이라서 책은 안 읽을 수가 없었어요. ^^;;

stella.K 2018-08-02 18: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말은 옛날부터 있어왔던 말인데...
구토가 너무 어려워 구토할 것 같다는 말.
대자, 즉자 오랜만에 들어 본다.
어디서 들었지 했더니 <말>이었구나.

책에 맛 들이면 좀 그런 지적 교만같은 마음이 들긴하지.
책을 너무 많이 읽어서 미처버린 사람도 있다더군.
난 그러지 않으려고 적당히 놀면서 읽고 있어.ㅋㅋ

cyrus 2018-08-03 14:13   좋아요 2 | URL
저는 책 속에 갇히지 않으려고 독서모임에 참석해요. 요즘 독서모임 활동을 하면서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았어요.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은 경험이 많은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점이요. ^^

syo 2018-08-02 1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덥고 괴로울 땐 좀 적당히도 하고 그러는 건데, 과연 독서기계 사이러스님.....

cyrus 2018-08-03 14:15   좋아요 0 | URL
syo님도 열심히 책을 읽었잖아요.. ㅎㅎㅎ 손가락이 아팠던 기간에 그냥 책만 읽었어요. ^^

syo 2018-08-03 14:25   좋아요 1 | URL
그나저나 좋은 소식이 들리더군요 ㅎㅎㅎ
축하합니다. 역시 사이러스님. 1등이 아니라는 사실이 놀라운 거지 수상 자체는 너무 당연하여 오히려 감동이 적은 상황입니다...

cyrus 2018-08-03 23:58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오랜만에 리뷰 대회에 응모한 거라서 정말 열심히 썼어요. 솔직히 3등만 돼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했어요. 눈에 띄지 않지만, 글을 잘 쓰는 분들이 많아요. ^^

목나무 2018-08-02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통해 불멸을 꾀하다니..
사르트르의 글을 읽기가 두려워집니다. ^^;

그나저나 손가락 통증은 좀 나아진 건가요? 아플땐 독서도 쉬엄쉬엄하셔요.

cyrus 2018-08-03 14:17   좋아요 0 | URL
지금은 다 나았어요. 아마도 에어컨 바람을 많이 맞아서 손가락 관절에 통증이 생긴 것 같아요. ^^;;
 
페미니즘을 퀴어링! -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페미니즘 이론, 실천, 행동
미미 마리누치 지음, 권유경.김은주 옮김 / 봄알람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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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애 중심 가부장적 사회에서 남성의 삶은 정치학과 철학의 주제가 되지만, 여성의 삶은 의학과 생물학의 주제로 간주한다. 특히, 근대 이후 공 · 사 영역 분리의 성별화가 가속화되면서, 남성의 삶은 더욱 공적인 것이 되었고 여성의 삶은 더욱 사적인 것이 되었다. 이로 인해 ‘당신은 여성인가, 남성인가’라는 질문은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줄곧 부딪히게 되는 문제가 되었다. 다른 사람이, 즉 의사가 당신의 성별이 무엇이라고 정해준다면 어떻게 될까? 단 두 가지의 선택 중 하나로 ‘당신은 남성입니다’ 또는 ‘당신은 여성입니다’라고 말이다. 당신이 스스로 남성으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남성’이라고 정해준다면 일상생활이 가능하다. 그러나 당신은 스스로 여성이라고 생각하는데 ‘남성’이라고 정해준다면 난감하기 이를 데가 없을 것이다. 자신이 여성인데도 남성으로 호명하는 순간, 주체는 ‘성 정체성(gender identity)의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의사가 판정한 성별 결과에 따라 분홍색 혹은 파란색 옷으로 구분되어 입혀지며, 손에는 인형 또는 장난감 로봇이 쥐어진다. 성별에 따라 다른 대접을 받는 것은 차별적이지만, 근원적으로 단 두 가지의 성별을 지정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매우 폭력적인 일이다.

 

페미니즘의 출발은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성인 섹스(sex)와 문화적으로 구성된 젠더(gender)를 구분하는 데서 비롯됐다. 이를 토대로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을 정치적 주체로 집단화하고, 권리 향상을 위한 연대를 강조해 왔다. 그러나 의료적 트랜지션(medical transition)으로 여성이 남성이 되고, 남성이 여성이 되는 세상에서 페미니즘이 ‘여성’이라는 성적 범주만 강조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후천적으로 형성된 젠더 영역으로 들어가면 페미니즘은 혼란에 빠진다. 그래서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은 성적 본질주의, 즉 본질적으로 결정된 성 정체성은 없다고 말한다. 즉 선천적으로 타고난 섹스도 젠더의 넓은 의미에 포함된다.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젠더를 ‘원본 없는 모방’[주1]이라고 말했다. 젠더는 고정되는 것이 아니고, 수행되는 오직 그 순간만큼만 가변적인 정체성을 만들어낸다. 여성을 여성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것은 여성으로 지칭된 존재가 여성 정체성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버틀러는 젠더든 섹스든 완성된 채로 존재하는 원본은 없다고 말한다. 버틀러는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페미니즘을 여성의 권리향상 차원을 넘어 레즈비언, 게이, 트랜스젠더, 드래그 퀸(drag queen, 남성이 공연이나 오락을 목적으로 여장을 하는 것)까지 포함한 성소수자의 섹슈얼리티 문제로 확장한다. 이러한 급진적인 인식론은 퀴어 이론(queer theory)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퀴어는 본래 동성애자들을 멸시하는 호칭이지만, 버틀러에 이르러서는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의 의미를 고정하는 모든 담론 권력에 저항하는 전복적 단어로 자리 잡는다.

 

《페미니즘을 퀴어링!》(봄알람, 2018)은 페미니즘 운동과 퀴어 운동에 관한 문제의식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책이다. 이 책을 쓴 미미 마리누치(Mimi Marinucci)는 페미니즘 시각에서 퀴어 이론을, 또 퀴어 이론 시각에서 페미니즘을 새롭게 해석할 뿐 아니라 페미니즘 자체를 다시 쓰고 있다.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는 규제와 규범이 만든 사회적 산물이다. 저자는 페미니즘이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포괄하는 급진적 이론이 되려면 섹스 안에 전제된 문화적, 제도적 통제를 꿰뚫어봐야 하며 어떤 특정한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만 강조하는 다양한 형태의 억압 체계에도 비판적 시각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에서 마리누치가 시도하는 것은 페미니즘 운동과 성소수자 운동의 연대, 즉 ‘퀴어 페미니즘’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다. 저자는 퀴어 이론가들로부터 이론적 수혈을 받는데, 이 책에서도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와 버틀러, 그리고 게일 루빈(Gayle Rubin)의 사상에 대한 인용을 만날 수 있다. 마리누치는 푸코, 버틀러, 루빈의 사상을 분석과 비판의 방법론으로 삼아 페미니즘 담론을 해체적으로 읽어냄으로써 ‘퀴어 페미니즘’을 제시한다. 그러므로 책의 제목 ‘페미니즘을 퀴어링!’은 페미니즘 운동과 퀴어 운동은 연대할 수 있다는 선언적 진단이며, 좀 더 급진적인 젠더-섹슈얼리티 이론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는 표현이다.

 

페미니즘 운동과 퀴어 운동을 연대하는 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퀴어 이론은 젠더 이분법과 섹슈얼리티 이분법(이성애/동성애)뿐만 아니라 여성학과 게이 및 레즈비언 연구도 해체하고 있기 때문이다[주2]. 그렇다고 해서 페미니즘 운동과 퀴어 운동의 연대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페미니즘 운동과 퀴어 운동은 공통으로 ‘주변인들의 목소리’로 시작됐다. 이 두 가지 운동에 뛰어든 모든 사람들, 즉 프롤레타리아 여성(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흑인 여성(흑인 페미니즘), 그리고 성소수자 등은 기존의 공고한 이성애 중심 가부장적 사회에서 배제된 ‘주변인’의 존재인 동시에 권력을 교란할 수 있는 목소리와 언어를 가졌다. 그들의 목소리는 ‘이상한(queer)’ 것으로 치부되었지만, 개인적 목소리가 점점 모여서 더 커질수록 페미니즘 운동과 퀴어 운동은 ‘정치적인 것’으로 발전한다. 따라서 페미니즘 운동은 자매애를 넘어서 더욱 강력한 ‘주변인들의 목소리’가 되어야 한다. 퀴어 페미니즘 운동에 뛰어든 모든 사람은 ‘퀴어’하다. 퀴어한 주변인들이 자기 삶을 정당화할 수 있는 언어를 가지고 정체화하는 것이 퀴어 페미니즘의 실천 방식이다.

 

 

 

 

[주1] 미미 마리누치 지음, 권유경 · 김은주 옮김, 《페미니즘을 퀴어링!》, 봄알람, 2018, pp. 136.

 

[주2] 같은 책, pp.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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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종교인들은 종교를 믿음과 구원이라는 추상적 개념보다는 기독교, 불교, 이슬람 등 구체적 종교 형태를 통해 이해한다. 이들은 각 종교 신도의 생활과 경전 내용을 통해 종교의 의미를 유추하기도 한다. 대부분 종교는 보수적이다. 왜냐하면 종교는 과거의 전통을 지키려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수의 종교인은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는 데 요청되는 비판의식을 거부하고, 이전 것을 비판 없이 받아들인다. 결과적으로 현재의 종교는 비판적 사유가 작동되는 것을 근원적으로 차단하고, 더 이상 변화하기를 거부하는 행보를 보이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종교 내 성차별문제는 오랫동안 비가시화되어 왔다.

 

워마드에 천주교의 성체(聖體)를 훼손한 사진이 올라와 큰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밀떡에 주황색 글씨로 낙서가 되어있고, 일부가 불타 검게 그을려 있는 사진이 문제였다. 천주교에서 성체는 현존하는 예수의 몸을 가리킨다. 성체를 훼손하는 행위는 예수를 직접 모욕한 것으로 해석된다. 일부 워마드 회원들은 여성을 억압하는 종교는 사라져야 한다면서 천주교뿐만 아니라 기독교, 이슬람를 조롱하는 게시물을 올리기도 했다.

 

 

 

 

 

이슬람교 경전 코란을 불태우는 사진이 게시되면서 또 다른 논란이 일었던 바 있다. 해당 사진은 실제 경전을 소각하는 장면을 찍은 것이 아니다. 워마드 회원이 직접 코란을 불태워 찍은 사진도 아니다[1]. 그러나 이 게시물을 올린 회원은 이슬람 바퀴벌레라는 표현으로 이슬람과 남성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지금도 워마드에는 종교를 비하한 게시물이 남아 있다.

 

워마드의 성체 훼손 논란에 대해서 혹자는 천주교가 워마드의 자극적 행동에만 지적할 것이 아니라 종교 내 성차별 문제를 본격적으로 들여다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런 의미에서 각 종교계도 성차별 문제에 대한 자성이 필요하다. 하지만 종교 내 성차별 문제를 들여다 볼 때 반드시 피해야 할 오류가 있다. 종교가 여성을 차별하고, 혐오한다는 주장이다.

 

기독교와 이슬람은 공통으로 가부장제적 전통을 지니고 있다. 성경이나 코란에 보면 여성은 남성보다 수동적이고 열등한 존재이며 동시에 파괴적인 성적 에너지의 소유자로 간주하여 남성에 의해 철저하게 관리 통제돼야 한다는 구절이 있다.

 

 

 “신이 부여한 특권에 따라, 남성은 여성에 대한 권위를 지닌다. 여자의 부정행위가 의심될 때는 훈계하라. 여자를 가두고 매질하라.”

 

(코란 443[2])

 

 “정숙한 옷차림을 한다.” (디도데 전서 29)

 

 “바지나 청바지가 아니라 원피스나 치마를 입는다.”

  (신명기 225[3])

 

 

기독교와 이슬람에는 여성 억압을 정당화하는 교리나 규율이 있다. 그렇다면 시대에 뒤떨어진 교리를 전파하고, 여성을 무시하는 종교는 사라져야 하는가? 그리고 예수와 무함마드는 성차별주의자인가? 그들은 남자라서 조롱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워마드는 종교를 모욕하는 행위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과연 이게 극단적이어도 충분히 의미 있는 여성 운동이라고 볼 수 있을까?

 

기독교와 이슬람을 여성 혐오 종교로 규정하고, 더 나아가 예수와 무함마드를 조롱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워마드의 행동은 논증적으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이다. 그리고 여성 권리 신장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다양한 전략을 선택할 수 있는 여성운동의 특성상 워마드의 종교 비하는 전략적으로 문제가 있다.

 

 

 

 

 

 

 

 

 

 

 

 

 

 

 

* 에마 골드만 외 그곳에 가면 다른 페미니즘이 있다(르몽드코리아, 2018)

* 레이첼 헬드 에반스 성경적 여성으로 살아 본 1(비야토르, 2018)

 

 

 

기독교와 이슬람은 여성 혐오 종교라는 주장은 누구나 동의한다. 여성을 차별하는 내용이 있는 경전의 구절 몇 개만 찾아내면 종교의 문제점을 언급할 수 있다. 그러나 종교의 문제점만 지나치게 부각하면 여성을 동등하게 바라본 경전의 해석이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게 된다. 성경, 코란 등 종교 복음서는 여성 차별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어왔지만, 그 속에 훌륭한 업적을 남긴 여자 성인(聖人), 여성 신도를 찬양하는 구절도 있다. 경전이나 복음서는 시대적 요구에 따라 전승되고 공유되어 왔다. 이 과정에서 가부장적 권력을 쥐고 있는 남성 종교인들은 여성을 높이 평가한 구절들이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삭제했다. 그리하여 기독교, 이슬람 내 여성 신도들은 경전의 구절을 새롭게 재해석하는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 엄익란 금기, 무슬림 여성을 엿보다(한울아카데미, 2015)

* [절판] 하이다 모기시 이슬람과 페미니즘(프로네시스, 2010)

 

 

 

이슬람 페미니스트 아스마 바를라스(Asma Barlas)는 이슬람 문화권에 있는 여성 차별의 원인을 코란에서 찾지 않는다. 그녀는 무슬림 여성을 동등하게 대하라고 강조한 무함마드의 계시를 왜곡하고, 차단한 남성 종교인 및 학자들의 가부장적 권력이 무슬림 여성 차별을 강화한 주된 원인이라고 주장한다[4].

 

비무슬림 또는 비무슬림 학자들은 경전의 편파적인 해석을 무시한 채 이슬람과 코란 자체가 여성 혐오를 조장하는 원인이라고 비난한다. 이러한 편견은 반이슬람주의라는 탈을 쓴 극우 세력을 결집하게 만드는 서사로 작용한다. 이슬람을 비하하고, 코란을 불태우려는 생각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몇몇 워마드 회원의 주장은 반이슬람 · 반난민 정서와 맞닿아 있다. 따라서 종교와 난민을 배척하는 워마드의 발언은 페미니즘 방식의 언어라고 보기 어렵다.

 

종교 내에 쉬쉬하고 있는 여성 차별 및 성폭력 문제는 종교적 차원의 문제를 넘어선 사회적 문제이다. 남성 중심, 가부장적으로 해석되고 전달된 경전은 평등의 관점으로 읽고 해석해야 한다. 그러면서 경전이 성차별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변질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종교 내 성차별 문제는 남성 종교인의 절대적 권위와 위계 구조를 문제 삼아야 근절할 수 있다. 종교 자체를 여성 혐오의 온상으로 생각하는 워마드의 극단적인 입장은 종교 내 페미니즘 운동의 노력을 축소하는 부작용을 불러일으킨다. 워마드는 번지수를 잘못 찾아도 한참은 잘못 찾았다.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종교 내 성차별 문제를 어떻게 근절해야 하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다.

 

 

 

 

 

[1] 워마드 회원이 코란을 직접 불태운 것이 아니라 과거 외국에서 일어났던 사건의 사진을 가져다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구글이나 유튜브를 검색하면 동일한 사진과 영상을 확인할 수 있다. (출처: [워마드 회원 코란 불태웠다게시물에 발칵외국 사진 재탕 확인 휴우~”], 동아일보, 2018711)

 

[2] 앙리 텡크, 신은 여성 혐오자인가?, 그곳에 가면 다른 페미니즘이 있다, 151, 르몽드코리아, 2018. 

 

[3] 레이첼 헬드 에반스, 성경적 여성으로 살아 본 1, 179, 비아토르, 2018.

 

[4] 엄익란, 금기, 무슬림 여성을 엿보다, 60~62, 한울아카데미,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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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8-01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교인의 입장에서 볼 때 개신교 특히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전래된 장로교 교단의 보수
성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개신교 내에서 여성 신자들의 수가 압도적
이지만 실질적인 교회를 운영하는 결정권을
가진 목사 장로들의 수는 남성자들이 독차지
하고 있거든요.

보수정당인 개신교계를 강력한 우군으로
삼아 여성과 성소수자들에 대한 차별정책을
고수하려는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교계의 자정 능력은 1도 믿지 않습니다.

cyrus 2018-08-02 14:28   좋아요 0 | URL
저도 종교가 스스로 개혁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사실 종교 내 성차별 문제는 십 년 전에도 거론된 적이 있었어요. 그땐 종교계 인사들은 문제의 심각성을 느꼈을 뿐 행동으로 보여주지 않았어요.

stella.K 2018-08-01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워마드가 무섭긴 무섭더군.
근데 놀라거나 흥분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해.
그만큼 여성으로서 억눌려 온 세월이 얼마냐?
거기에 대한 반작용인데 저 정도 가지고 되겠어?
그런데 사람은 갈 때까지 가봐야 안다고
저러다가도 아, 이건 옳은 방법이 아니겠구나
깨닫고 다시 이성적인 방법을 찾아가지 않을까?
어디나 극단주의는 있어왔어.
하지만 그건 오래 가지 못하지.
물론 또 다른 형태로 바뀔 수도 있지만.
그냥 사탄 마귀의 작용이야. 어쩌겠니?ㅋㅋㅠ

cyrus 2018-08-02 14:36   좋아요 0 | URL
글쎄요. 워마드는 계속 극단적인 노선만 고집할 거 같아요. 그들은 온건적인 방식을 좋아하지 않아요. 워마드가 온건적인 여성운동 방식을 좋아하지 않는 건 이해할 수 있어요. 하지만 자신들과 다른 여성운동, 특히 교차성 페미니즘을 ‘쓰까‘라고 조롱하고 무시하는 태도가 별로예요. 자신들의 행동이 무조건 옳다고 믿는 우월적인 성향이 있는데, 이걸 페미니스트의 전형적인 태도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추사 김정희 -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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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우도(충청도 서부 지역) 비인현감  김우명은 막강한 권세를 자랑하던 안동 김씨 사람이다. 이 지역에 파견된 암행어사는 김우명의 실정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보고서를 작성하여 조정에 올렸다. 이로 인해 김우명은 파직당했다. 그 이후로 암행어사의 벼슬길은 순풍에 돛단 듯이 술술 풀려나갔다. 벼슬은 더욱 높아지니 암행어사를 시기하는 반대파들이 많아졌다. 그에게 앙심을 품었던 김우명은 암행어사의 아버지 김노경을 모함하는 상소를 올렸다.

 

 

  아! 전 감사 김노경의 죄를 어찌 이루 다 주벌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남이 손댈 수 없는 위치에서 실제로는 남보다 한 치의 장점도 없는데 화직(華職)과 요직에 두루 올라 가세가 엄청났습니다. (…)

  또 그의 요사스러운 자식은 항상 반론(反論)을 가지고서 교활하게 세상을 살아가면서 인륜이 허물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주1]

 

 

왕은 김우명의 상소문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그에게 벌을 내렸다. 김우명이 암행어사를 얼마나 미워했으면 ‘요사스러운 자식’이라고 표현했을까. 암행어사의 정체는 바로 추사 김정희다. 그는 조선 최고의 서예가로 ‘추사체’를 완성했다. 고증학과 금석학에도 밝아 북한산에 있던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하기도 했다. 추사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난 신동이었다. 그가 일곱 살 때 남인(南人)의 재상 체제공은 추사의 글씨를 보면서 장차 명필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러나 체제공은 ‘섬뜩한 예언’도 했다. 추사가 명필가로 알려지게 되면 그의 운명이 기구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체제공의 예언은 정확했다. 추사는 시(詩) · 서(書) · 화(畵)에 통달함으로써 근세명필의 제일로 꼽혔다. 또 ‘당대 청조학(淸朝學: 청나라 시 · 서 · 화를 연구하는 학문)의 제일인자’[주2]로 평가받을 만큼 국제적 명성이 자자했다. 그러나 10년 가는 권세 없고 열흘 붉은 꽃 없다는 말이 있듯이 부귀영화는 오래 가지 못한다. 추사는 두 번에 걸쳐 11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는 등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다.

 

어떤 인물을 제대로 알려면 그 사람의 행적을 살펴보는 노력도 필요하다. 인물의 인생을 보면 살아온 환경이 그대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살아온 환경에 대처하는 자세가 그 사람의 운명을 만든다. 산숭해심(山崇海心).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라는 뜻을 가진 구절이다. 추사는 중국의 학자 옹방강을 만나 교류하면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문체계를 구축했다. 추사의 학문 정신은 네 글자로 요약한 ‘산숭해심’에 숨어 있다. 실사구시는 ‘사실에 따라 사물의 진리를 찾는’ 정신이다. 유홍준 명지대 한국미술사연구소장이 다시 펴낸 《추사 김정희》(창비, 2018)는 실사구시의 정신이 오롯이 담겨 있는 책이다.

 

많은 사람이 추사를 칭송했지만, 누구도 그의 전체 모습을 알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니, 그의 삶 자체를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완당 평전》(학고재, 2002)을 통해 추사의 온전한 모습을 그려내려 했던 유 소장도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라는 말로 끝을 맺어야 했다. 최근에 《추사 김정희》를 읽으면서 유 소장이 16년 전에 펴낸 《완당 평전》을 쓰기 어려워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추사는 시, 서, 화, 금석학, 고증학에 두루 능한 인물이다. 그의 평전을 쓰려면 추사의 ‘높고 깊은 학문 세계’를 한 권의 책으로 아울러야 하고, 파란만장한 추사의 삶 속에 있는 ‘인간적인 내면세계’를 독자에게 전달해야 하는데 이런 일은 쉽지 않다. 유 소장은 《완당 평전》의 오류를 고쳤고, 새로 발견된 추사의 작품이나 추사 관련 문헌을 추가했다. 그리고 한문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문장과 한시 번역문은 쉬운 말로 다듬었다.

 

《추사 김정희》는 추사의 삶을 탄생부터 만년까지 10개의 장으로 나누어 정리되어 있다. 아버지를 따라가 접한 중국 연경(燕京: 베이징) 지역 학자들과의 교류, 출세와 가화(家禍), 유배 시절, 그리고 추사 사후 평가까지 다루어 추사에 대한 모든 것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앞서 언급했듯이 추사가 학문과 예술에 끼친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그를 중국 청나라 학문 및 문화를 맹목적으로 찬양하는 사대주의자로 보는 관점이 제기되었다. 유 소장은 비판적 관점에 가려진 추사의 식견, 즉 ‘근대적 감각’을 주목한다. 물론, 추사도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는데,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기운이 짙어가던 분위기를 감지하지 못했다.

 

유 소장은 추사와 관련된 문헌들을 토대로 추사의 한계와 결점이 무엇인지 분석한다. 김우명이 추사를 ‘요사스러운 자식’이라고 말한 이유가 있다. 추사는 너무나 거침없는 성격이었다. 어려서부터 가문이 좋고 재능과 학문이 뛰어나다 보니 학문에 대한 자부심이 넘쳤다. 학문적인 논쟁이 일어나면 자기 생각과 다른 학자들의 기를 팍팍 죽일 정도로 신랄하게 비판했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졌어도 오만하고 잘난 사람은 미움 받는 대상이 된다. 깐깐하고 단호한 성격은 반대파들에게는 눈엣가시처럼 여겨졌을 것이 분명하다.

 

가족이나 절친한 친구 등에게 보낸 추사의 편지에는 평생 유배의 고역이 따라다닌 신산한 삶이 있고, 다른 한편에 학자들과 나눈 우정의 흔적들이 어려 있다. 거부할 수 없는 유배 생활, 그 고통의 시간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힘은 독서와 글씨 쓰기였다. 그를 후려치던 분노와 고독감은 고스란히 서체에 녹아들었다. 추사체는 시대와 유리된 천재성의 산물이 아니라 추사 개인의 내밀한 감정의 산물이다. 유 소장이 주목한 것은 ‘천재’라는 화려한 평가에 가려진 추사의 인간적인 모습이다. 철저히 완벽을 추구했던 추사도 나약한 모습을 보여줄 때가 있었다. 그러나 유배의 절망을 견뎌내고 유배지에서 후대에 길이 남을 걸작을 남긴 추사는 결코 나약한 존재가 아니다. 추사가 위대한 이유는 절망의 시기 속에 자기완성이라는 창조적인 순간을 만들면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자신만의 삶을 완성하는 비범한 능력이다. 시대와 불화하면서까지 자기만의 학문과 예술에 생명을 걸었던 추사의 분투는 지금도 박수 받을 만한 일이다.

 

 

 

 

[주1] 『조선왕조실록』 순조 30년(1830년) 8월 27일자, 유홍준, 《추사 김정희》, 창비, 2018, pp. 173.

 

[주2] 청조학과 추사 연구에 몰두했던 일본 학자 후지쓰카 지카시(藤塚隣, 1879~1948)는 추사를 ‘청조학 연구의 제일인자’라고 평가했다. (유홍준, 《추사 김정희》, 창비, 2018, pp.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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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8-01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예전에 나온 <완당평전>하고 어떤 점에서
다른지 문득 궁금해 집니다.

지금은 절판되었지만 세 권인가로 해서 나왔던 것
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말이죠.

가혹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시대 사대부가 서세
동점이라는 서구 해양세력의 동아시아 진출이라는
세계사적 흐름을 파악하기란, 역부족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cyrus 2018-08-01 16:59   좋아요 1 | URL
구판에는 한자어가 많았어요. 고등학생 때 <완당 평전>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뜻 모르는 한자어가 많아서 다 읽지 못하고 포기했어요. 한시는 읽기 쉽도록 의역했고요, 가독성이 좋아졌습니다.

책에 나온 내용인데요, 이양선이 자주 출몰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조선 시대 사람들이 패닉 상태에 빠진 시기가 있었어요. 그런데 추사는 서양의 배라면서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했어요. 추사는 청나라에 다녀오면서 서양 문물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서양인들이 청나라를 지배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레삭매냐 2018-08-01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842년 아편전쟁이 동서양 역사의 분기점이
되지 않나 싶습니다.

그전까지만 해도 동양의 생산력이 서양을
압도했지만 에릭 홉스봄이 이중혁명으로 규정한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을 통해 각성한 서양이
동양을 침탈의 대상으로 삼게 되면서 역사의 추
가 바뀌게 되었죠.

쇄국을 국시로 삼았던 조선이 시대의 흐름을 깨
닫고 문호를 열었더라면 일본 식민지가 되는 치욕
은 면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네요.

cyrus 2018-08-02 14:10   좋아요 1 | URL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레삭매냐님 말씀대로 조선이 문호를 개방했다면 근대 역사가 달라질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최악의 가정도 생각해볼 수 있어요. 열강이 조선에 진출하면 간섭을 할 거고, 거기에 빝붙는 세력이 나올 것입니다. 문호가 개방되었어도 식민 국가로 전락했을 가능성이 있어요.

조그만 메모수첩 2018-08-02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사가 전직(?) 암행어사셨군요. 그냥 금석문•서예•문인화의 대가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덕분에 실학자였음도 알게 되었어요. 이상적이 중인임에도 불구, 신분에 관계없이 자신의 제자로 선뜻 받아준 풍모가 남다르다고는 생각했어요. 책 꼭 읽어보고 싶어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cyrus 2018-08-02 14:11   좋아요 1 | URL
추사도 다산 정약용만큼이나 제자를 잘 가르쳤어요. 추사가 유배 생활을 하고 있었을 때 제자들이 많이 찾아오곤 했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