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은 어떻게 살아남을까
우에노 지즈코 지음, 박미옥 옮김 / 챕터하우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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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경제는 생산자와 소비자의 자유에 있다. 원하는 직업을 자유로이 선택하고, 사용자와의 교섭에 의해 노동조건을 협정하는 권리가 인정된다. 시장경제는 간혹 오류가 없는, 합리적인 시스템으로 치장되곤 한다. 정부의 정책 실패 이후에는 시장의 논리를 무시한 탓이라는 진단이 내려진다. 이러한 진단은 ‘신자유주의’라는 경제이론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원래 신자유주의는 복지병과 생산성 저하로 몸살을 앓던 영국과 미국에서 1980년대에 대처리즘(Thatcherism),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 등의 이름으로 등장했다. 신자유주의 정책의 주요 내용은 규제 완화, 공기업의 민영화, 노동시장의 유연화, 정부지출 축소, 감세를 통한 기업경쟁력 제고, 산업구조조정 등이다.

 

경제적 및 정치적 자유가 신장된다 하더라도 먹고사는 것이 힘겹다면 인간다운 삶이라고 볼 수 없다. 일을 하면서도 언제나 가난에 허덕이는 이른바 ‘노동하는 빈곤층’, 비정규직 문제는 오랫동안 계속 미뤄진 난제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전체 정규직 노동자의 절반을 훌쩍 뛰어넘은 지 오래다. 정규직들은 살아남기 위해 신자유주의의 허구적 차별을 순순히 받아들이지만, 비정규직을 무시하는 만큼 자신의 존엄성도 파괴된다. 자기가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상황은 공포 그 자체이다. 신자유주의의 논리를 따르지 않고서는 숨 쉬는 자유조차 허락받지 못할 것처럼 지친 일상의 문화가 계속되고 있다.

 

노동시장으로 진입하는 여성들이 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양적 증가는 질적 저하를 대가로 이루어진다는 것에 그 심각성이 있다. 신자유주의 노동시장은 바로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의 양산을 통해 그 경쟁력을 확대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여성 노동의 대다수는 비정규직의 얼굴을 하고 있다. ‘노동의 유연화’가 여성 노동자들을 점점 더 조직적으로 주변부 노동예비군으로 이용한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국가는 재생산노동(가사, 양육)의 책임을 여성에게 일차적으로 부여하면서 여성 노동력을 비정규직의 형태로 노동시장에 흡수하려는 정책을 추진한다. 국가는 여성을 한낱 아이 낳는 기계로 본다.

 

그렇다면 이렇게 고통스러운 여성의 현실을 바꿔낼 희망적인 전략은 있는가? 여성의 사회참여 확대를 위한 ‘젠더 평등 정책’이 답인가? 여성 노동이 존중되고 고용환경이 개선되는 노동정책. 참 좋은 정책이다.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여성 평등’으로 포장된 신자유주의 정치는 여성을 기만한다. 마치 붕어빵 속에 붕어가 없듯, ‘여성 평등’ 속에 ‘여성’이 없는 격이다. 여성 노동자들조차 신자유주의 전략에 포섭되는 이유는 젠더 평등 정책, 여성 할당제 등을 절호의 ‘기회’라고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페미니스트 사회학자 우에노 지즈코(上野 千鶴子)는 여성의 고용 참여를 환영하고, 페미니스트 못지않게 ‘여성 평등’을 내세우는 신자유주의 정권의 전략을 의심한다.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 일본은 1985년에 ‘남녀고용기회균등법(균등법)을 제정했다. 1991년에 육아휴직법, 2001년에 가정폭력방지법이 만들어졌다. 우에노 지즈코는 신자유주의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일본 여성의 삶이 좋아졌는지 팍팍해졌는지 되돌아본다. 그녀가 내린 결론은 ‘Yes or No’다. 좋은 점이 있고, 나쁜 점도 있다.

 

신자유주의는 개인의 선택을 강조한다. 여성은 자신의 의지와 선택에 따라 하고 싶은 대로 살 수 있게 됐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삶의 선택지'는 다양해졌다. 그렇지만 정부가 이야기하는 여성의 의제는 신자유주의 정책과 맞물려 이뤄지고 있다. 신자유주의 지배세력은 여성을 가족 내 보살핌의 일차적 책임자로 규정한다. 가족 중에서도 여성이 돌봄 노동 영역을 부담하고 있다. 여성의 재생산 노동에 대한 고려 없이 진행되는 젠더 평등 정책은 가부장적 성차별 구조를 더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신자유주의는 여성의 생산, 재생산 노동의 이중 부담과 희생을 강요하고 성적 불평등을 확대하고 있다. 그리고 정규직 여성 노동자와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 간의 양극화(여여 격차)가 고착하고 있다.

 

우에노는 ‘기이한 관계’라는 표현을 통해 신자유주의의 여성 혐오 현상이 내셔널리즘과 뒤엉킨다고 지적한다. 신자유주의 흐름 속에 비기득권층으로 전락한 사람들(남성)이 내셔널리즘에 기대려 한다. 일본의 내셔널리즘은 내부에 적을 만드는 전략으로 ‘여성 혐오’, ‘혐한’을 조성한다. 정치권에 향해야 할 일본인의 분노가 여성, 한국인에게 쏟아지고 있다. 우에노는 혐오를 부추기고 방관해온 고이즈미, 아베 정권을 비판한다. 신자유주의는 ‘성공한 여성’을 앞세워 성차별 해방 분위기 조성과 여성을 경제적 주변부로 몰아내는 ‘여성 빈곤화’를 동시에 달성한다. 그런데 내셔널리즘은 결혼하지 않는 ‘성공한 여성’과 페미니스트를 저출산 문제의 주범으로 몰아세워 공격한다.

 

우에노는 페미니즘이 대응하기 어려운 상대가 신자유주의라고 말한다. 신자유주의 장벽은 그렇게 견고할까? 신자유주의 사회의 여성 문제는 복합적인 원인이 중첩된 골치 아픈 문제이다. 그녀는 여성 친화적인 정책 추진에 속도를 내는 사회적 분위기가 페미니즘의 비약적 발전이라고 이야기하는 반응에 냉정한 시선을 던진다. 페미니즘이 대중화되는 과정이 신자유주의의 흐름과 겹치기 때문이다. 《여성은 어떻게 살아남을까》는 페미니즘의 대중화와 신자유주의 시대에 마주하는 일본 여성 문제의 현주소를 조명한다. 우에노는 이 책에서 ‘여여 격차’와 여성 분열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페미니즘의 투쟁 방식을 지적하면서, 그 원인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진지하게 성찰한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페미니스트의 질문은 의미심장하다. 페미니스트들은 지금 바닥을 향한 경쟁을 강요하는 비정규직화에 맞서 자신을 저항주체로 형성하지 않으면 안 될, 힘겹지만 중요한 과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려운 도전에 직면한 가운데 페미니스트가 먼저 풀어야 할 문제가 있다. 신자유주의의 벽을 무너뜨리게 될 작은 구멍을 뚫으려면 ‘연대하는 힘’을 키워야 한다. 인간은 연대를 통해 발전하고 인간다워진다. 연대는 거대한 장벽을 깨는 힘인 ‘집단성’과 ‘상호신뢰’를 회복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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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03 15: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9-03 18:24   좋아요 1 | URL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는 현상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 분석해야 하는데, 일부 남성들은 저출산과 비혼 문제의 원인을 무조건 여성 탓으로 돌립니다. 이런 적대적인 반응으로는 저출산 문제를 절대로 해결할 수 없어요. 여성이 아니라 사회에 분노해야 합니다.
 

 

 

사드 후작(Marquis de Sade)은 역사상 가장 논쟁적 인물 중 하나이다. 그는 사후 100년이 넘도록 금기와 저주의 대상이었다. 100년 뒤엔 초현실주의자들로부터 ‘역사상 최고의 반항아’란 찬사를 받으며 부활했다.

 

 

 

 

 

 

 

 

 

 

 

 

 

 

 

 

 

* 사드 《사드 전집 1 : 사제와 죽어가는 자의 대화》(워크룸프레스, 2014)

* 사드 《악덕의 번영》(동서문화사, 2011)

 

 

 

 

 

 

 

 

 

 

 

 

 

 

 

 

* [품절] 존 필립스 《HOW TO READ 사드》(웅진지식하우스, 2015)

* [절판] 에스텔라 V. 웰든 《사도마조히즘》(이제이북스, 2006)

* [절판] 스튜어드 후드 《사드》(김영사, 2005)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는 1909년에 사드의 주요 작품을 선집으로 묶어 출간했다. 이 선집에 아폴리네르의 해설이 있는데, 사드 사후 200주기에 맞춰 나온 《사드 전집 1 : 사제와 죽어가는 자의 대화》(워크룸프레스, 2014)에 수록되어 있다. 1955년, 프랑스 파리 법원이 사드의 작품 네 권을 압수하여 파기하라고 판결하기 직전에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사드를 화형시켜야 하는가(Faut-il brûler Sade?)[주1]라는 에세이를 발표했다. 그녀는 사드를 ‘정신분석학의 선구자’로 칭송했고, 사드의 잔혹한 에로티시즘이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은 살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문학적 상상력이라고 옹호했다. 보부아르의 글은 《악덕의 번영》(동서문화사, 2011)에 수록되어 있는데 번역이 썩 만족스럽지 않다. 영국의 페미니스트 작가 안젤라 카터(Angela Carter)는 자신의 책 <사드적인 여자(The Sadian Woman)>에서 사드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 ― 《악덕의 번영》의 주인공 쥘리에트(Juliette)[주2] ―을 새로운 시선으로 접근했다.

 

 

 사드 자신은 여성의 성교할 수 있는 권리를 명백히 선언한다. 그는 여성들에게 할 수 있는 한 적극적으로 성교하라고 권장한다. 그리하여 여성들은 지금까지 사용되지 않았던 거대한 성적 에너지로 무장하여 자신들의 방식을 역사와 성교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역사를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주3]

 

 

카터의 주장에 따르면 사드는 여성의 개인적인 성적 경험을 여성의 삶뿐만 아니라 세상을 완전히 뒤바꿀 수 있는 힘을 가진 가장 중요한 ‘정치적 영역’으로 본 것이다. <사드적인 여자>는 국내에 번역되지 않았고, 생각보다 많이 알려지지 않은 카터의 책이다. 비록 일부분이지만, 사드를 옹호하는 카터의 입장을 확인할 수 있는 2차 문헌은 《사드》(김영사, 2005),《사도마조히즘》(이제이북스, 2006), 《HOW TO READ 사드》(웅진지식하우스, 2008)다.

 

 

 

 

 

 

 

 

 

 

 

 

 

 

 

 

 

 

* 게일 루빈 《일탈 : 게일 루빈 선집》(현실문화, 2015)

* [절판] 안드레아 드워킨 《포르노그래피 : 여자를 소유하는 남자들》(동문선, 1996)

 

 

 

그러나 사드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소수에 불과하다. 일반인에겐 사드는 그저 가까이 해선 안 될 ‘위험인물’일 뿐이다. 보부아르와 안젤라 카터 같은 페미니스트들이 사드를 호의적으로 본다고 해서 여성의 신체를 성적 대상화한 온갖 직설적인 사드의 표현들이 가려지는 건 아니다. ‘반포르노 운동’에 앞장 선 안드레아 드워킨(Andrea Dworkin)은 사드가 남성(지식인)들이 만들어 낸 ‘강간 신화’에 의해서 과장된 평가를 받았다고 비판했다. 반포르노 운동을 이끈 페미니스트들은 포르노 영화 속에 묘사된 사도마조히즘을 근거로 사도마조히스트들을 공격했다. 레즈비언 사도마조히즘 그룹을 만든 게일 루빈(Gayle Rubin)은 포르노그래피와 사도마조히즘이 정치적 검열의 표적으로 삼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을 드러냈다. 《일탈 : 게일 루빈 선집》(현실문화, 2015)에 포르노그래피를 옹호하는 루빈의 글(『오도된, 위험한, 그리고 잘못된 : 반포르노그래피 정치에 대한 분석』)이 수록되어 있다. 과거 1970년대 여성운동을 회상한 글인 『과거가 된 혈전』에서 루빈은 포르노그래피와 사도마조히즘을 옹호한다는 이유로 반포르노 페미니스트들에게 공격당했던 살벌한 경험을 털어놓는다.

 

 

 

 

 

 

 

 

 

 

 

 

 

 

 

 

 

 

 

 

 

 

 

 

 

 

 

 

 

 

 

 

 

 

 

* 에드거 앨런 포 《검은 고양이》 (민음사, 2017)

* 에드거 앨런 포 《에드거 앨런 포 소설 전집 2 : 공포 편》 (코너스톤, 2015)

* 에드거 앨런 포 《에드거 앨런 포 단편선》 (민음사, 2013)

* 에드거 앨런 포, 마이클 코넬리 엮음 《더 레이븐 : 에드거 앨런 포의 그림자》 (RHK, 2012)

 

 

 

《악덕의 번영》 번역본의 문제점에 대해서 몇 마디 지적하겠다. 첫 번째 각주에 후술하겠지만, ‘사드를 화형시켜야 하는가’는 번역 투 문장이다. 《악덕의 번영》 47쪽에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의 단편소설의 제목 ‘The Pit and the Pendulum’이 나온다. 이 작품은 ‘구덩이와 추(《에드거 앨런 포 단편선》)’, ‘함정과 진자(《에드거 앨런 포 소설 전집 2 : 공포 편》, 《더 레이븐 : 에드거 앨런 포의 그림자》)라는 제목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악덕의 번영》에서는 ‘우물과 진자시계’로 엉뚱하게 번역했다. 소설을 보면 알겠지만, ‘진자’는 시계추가 아니다.

 

72쪽 다섯 번째 주석에 연도 오류가 있다.

 

 

 1972년 6월 25일, 사드는 라투르라는 하인을 데리고 마르세유로 돈을 받으러 갔다가 (…)

 

 

주석의 글자 크기가 깨알과 같이 작아서 오자를 그냥 지나치기 쉽다. 1972년을 ‘1772년’으로 고쳐야 한다.

 

85~86쪽 33번째 주석에 잘못된 인명 표기가 있다.

 

 

 《소돔 120일》은 바스티유에서 분실되어 20세기가 되어 베를린의 정신과 의사 이반 프로흐 박사가 오이겐 뒤랭(Eugène Dühren)이라는 필명으로 과학적 주석을 달아 원문과 함께 편집한 것이 1904년에 베를린에서 처음으로 180부 한정으로 출판되었다.

 

 

‘이반 프로흐’가 아니라 ‘이반 블로흐(Iwan Bloch)라고 써야 한다. ‘Bloch’를 ‘프로흐’로 발음하는 것이 맞으면, 영화 《싸이코》의 원작자(Robert Bloch)는 ‘로버트 플록’으로, 《희망의 원리》를 쓴 독일의 철학자(Ernst Bloch)는 ‘에른스트 프로흐’로 읽어야 한다.

 

 

 

 

 

[주1] ‘화형시키다’는 번역 투 문장이다. ‘사드를 화형에 처해야 하는가?’라고 쓰는 게 맞다. 《악덕의 번영》에는 ‘사드를 화형시켜야 하는가’라고 되어 있다. 유일하게 보부아르의 글이 수록된 《악덕의 번영》의 출판사는 번역 문제로 악명 높은 ‘동서문화사’다.

 

[주2] ‘악덕의 번영’은 국역본 제목이며, 원제는 ‘Histoire de Juliette ou les prosperites du vice(쥘리에트 이야기 또는 악덕의 번영)’이다. 다른 책에서는 이 작품을 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한 ‘쥘리에트’로 언급된다.

 

[주3] 안젤라 카터, <The Sadian Woman>, 1979. (에스텔라 V. 웰든 저, 최정우 옮김, 《사도마조히즘》, 이제이북스, 2006, pp.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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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수기의 전문가들
김한민 지음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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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신화는 곰과 호랑이로부터 시작한다. 환웅(桓雄)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곰과 호랑이에게 마늘과 쑥을 준다. 곰과 호랑이는 동굴에 들어가 쑥과 마늘을 먹으면서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고 지낸다. 호랑이는 환웅의 약속을 지키지 못해 실패하였고, 곰은 그 약속을 잘 지켜 여자가 되었다. 곰에서 인간으로 변신한 웅녀(熊女)는 환웅과 혼인하여 단군(檀君)을 낳는다. 단군신화에서부터 전설, 민화에 이르기까지 호랑이는 우리 민족에게 친숙한 동물이다. 호랑이들은 1920년대까지만 해도 한반도 곳곳에서 살았다. 그러나 일제의 무분별한 남획과 벌목이 자행되면서 그 후 남한에서는 호랑이가 멸종되다시피 했다. 세월이 지나 호랑이는 동물원에 가야만 볼 수 있는 동물이 됐다.

 

신화가 사회상의 반영이라면 그것은 사람의 행태가 보여준 보편적 현상이다. 단군신화만큼 ‘우리’라는 한민족의 마음을 상징하는 이야기도 없다.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곰과 호랑이가 지향하는 점은 같다. 그것은 ‘사람’이다. 우리 조상들이 지녔던 사람 생각이 이 신화 속에 그려져 있다. 곰이 겪은 고난의 과정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극복해야 할 과제다. 조상들은 햇빛이 들지 않는 동굴, 먹기 역겨운 쑥과 마늘, 그리고 100일이라는 삼중고를 겪는 곰의 인내심을 ‘성공한 사람’의 자세로 생각했을 것이다. 호랑이의 충동적인 야성이 아니다. 우리는 호랑이의 투쟁성보다 곰의 인내를 더 선호하는 교훈에 익숙하다. 그래서 주어진 현실을 불평하는 ‘호랑이 같은 인간’을 싫어한다.

 

김한민 작가의 그래픽 노블 《비수기의 전문가들》은 이 땅에서 사라져버린 ‘호랑이 같은 인간’에 대한 기록이다. 작가는 이 책에서 호랑이 유형의 인간을 연구하는 ‘김 아무개’로 등장한다. 그는 호랑이 유형의 인간을 ‘호모 티게르’ 또는 ‘퀭’이라고 명명하고, 20년의 추적 끝에 호모 티게르를 발견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호모 티게르는 홀연히 종적을 감춘다. 김 아무개는 호모 티게르가 직접 남긴 글들을 취합하여 독자에게 들려준다.

 

호모 티게르의 시선은 어느 것 하나 놓치려 하지 않는다. 그는 쇠창살에 갇힌 장애 콘도르(condor), 싸늘한 주검이 된 동물, 그리고 항상 혼자 다니는 자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호모 타게르는 길에서 만난 존재들을 관찰하면서,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호모 티게르의 글쓰기 방식은 마치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 『수집가이자 역사가 에두아르트 푹스』에서 묘사한 프랑스의 역사학자 푹스(Eduard Fuchs)처럼 일상의 세속적인 것들을 모으는 수집가의 자세와 비슷하다. 호모 티게르는 자신의 눈으로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한 존재들을 눈으로 수집하고 기록한다. 그는 자신이 기록한 존재들에 대해 어떠한 가치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자신과 다른 타자들에 대해 가치 판단을 내린다는 것은, 그것들의 존재 가치에 따라 서열을 매기거나 배제와 차별의 원리를 작용한다는 이야기다. 호모 티게르의 시선은 이러한 태도에서 벗어나 있다. 그의 시선은 존재들 그 자체를 고스란히 보여주려고 한다.

 

독자가 이 그래픽 노블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호모 티게르의 말 걸기’를 직면해야 한다. 호모 티게르는 너무나도 익숙한 질문 하나를 툭 꺼내면서 독자에게 말 걸기를 시도한다.

 

 

뭐 하나만 물어보자

넌 알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비수기의 전문가들》 19쪽)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면? 혹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한다면? 이런 간단한 질문은 멀쩡하게 잘 지내던 우리를 갑자기 곤란하게 만든다. 가벼운 마음으로 그림과 글을 빨리 훑어보는 성질 급한 독자들은 이 질문에서 잠시 멈추게 된다. 그냥 지나칠 수 없을걸.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꽂히는 순간,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뭐라도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것 같고, 그럭저럭 대충 살고 있는 자신이 하찮게 느껴진다. ‘삶의 의미’라는 프레임은 때때로 우리 마음을 괴롭힌다. “그래, 이왕이면 ‘호모 티게르’처럼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자유를 누리면서 살아보자”라고 생각하면서 그럴듯한 삶의 계획을 만든다. 그렇지만 어설픈 꿈은 가장 어려운 질문을 일시적으로 피하기 위한 변명이다. 우리 사회는 호랑이가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학교는 단군신화의 곰을 인간으로 변하는 데 성공한 ‘승자’로 규정하면서 가르친다. 동굴을 뛰쳐나와 인간이 되지 못한 호랑이는 ‘패자’의 위치로 남는다. 단순 이분법적 논리에 의해 다수의 지지를 얻은 곰(‘성공한 사람’)은 권력을 얻으면서 ‘주류’가 된다.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채 이리저리 떠도는 호랑이/호모 티게르는 ‘비주류’ 또는 ‘약자’로 전락한다. 이러한 일상화된 분류로 존재를 서열화하는 우리 사회에서 ‘호모 티게르’에 대한 어떠한 배려를 찾아볼 수 없다.

 

‘곰 같은 인간’이 살기에 아주 편안한 ‘동굴’ 같은 사회를 유지하는 데 큰 몫을 하는 것이 바로 ‘어쩔 수 없다’는 태도이다. ‘각자도생’이 우선인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정말 없다. ‘헬조선’을 탈출하고 싶다는 절망 섞인 목소리만 높아지고 있을 뿐이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주류는 비주류를 짓밟아서라도 자기 살길을 마련한다. 비주류는 주류에 속하기 위해 경쟁하고, 죽지 않기 위해 불편한 현실에 순응한다. ‘호모 티게르의 말 걸기’, 즉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계속된 질문들은 독자들의 자아 성찰을 유도한다. 독자는 호모 티게르를 미행하면서 자신의 불행(주류 사회 밖에 겉도는 삶), 세상의 불행(호모 티케르가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닌 점) 모두가 어디에서 오는지 생각하게 된다. 독서는 그 책 속에 간접적으로 묘사된 우리의 모습을 보기 위해 저자와 텍스트의 길을 동행하는 일이다. 《비수기의 전문가들》을 읽는다는 것은 ‘불편한 동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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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8-09-01 13: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이~ 오랜만!
한동안 안 보인 걸 보면 분명 늦은 휴가를 다녀왔으렷다!
어디를 다녀왔는공...?
암튼 다시 보니 반갑네.
어디를 가도 책은 안 빠트렸겠구만.ㅋ

cyrus 2018-09-01 13:56   좋아요 1 | URL
이번 휴가는 집에서 책을 읽으면서 지냈어요. 이번 주는 책방 독서모임이 있어서 낮에 책방에서 시간을 보냈어요. 책 읽고, 아시안게임 중계 보면서 휴일을 즐겼어요. 시간 금방 지나가네요.. ^^;;

포스트잇 2018-09-01 15: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호랑이같은 인간은 ADHD를, 곰같은 인간은 신경쇠약을 앓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분열인가....... ㅜ

cyrus 2018-09-01 17:00   좋아요 1 | URL
곰, 호랑이 유형의 인간을 정신의학 관점으로 볼 수 있겠군요. 포스트잇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곰 유형의 인간은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고 계속 쌓기만 할 것 같습니다. 마음속의 분노를 배출하지 못해서 혼자 끙끙 앓는 성격인거죠. 사실 제가 곰 유형의 인간에 가깝습니다. ^^;;

페크pek0501 2018-09-01 16: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으며 불편한 진실을 알게 되는 경우가 있지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 지금 떠오른 생각으로... 개인적으로 행복하고 사회적으로 유익한 사람으로 살기, 라고 답하겠습니다.

cyrus 2018-09-01 17:01   좋아요 2 | URL
저도 페크님과 같은 생각을 했는데, 《비수기의 전문가들》을 읽고, 멘붕에 빠졌습니다.. ㅎㅎㅎ
 
서재를 떠나보내며 - 상자에 갇힌 책들에게 바치는 비가
알베르토 망겔 지음, 이종인 옮김 / 더난출판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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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애서가들은 서재 얘기든 책에 대한 책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 그들이 좋아하는 책에 특별한 특징이 있다. 애서가가 쓴 책은 또 다른 어떤 책에 대한 입맛을 돋운다. 《서재를 떠나보내며》는 이 두 가지 모두를 만족시킨다. 고구마 줄기처럼 꼬리를 물고 나오는 ‘책 속의 책들’은 《신곡》, 《돈키호테》 같은 서양 문학의 알토란들이다.

 

책방 점원에서 시작해서 아르헨티나 국립 도서관장 자리까지 오른 알베르토 망겔(Alberto Manguel)은 자신만의 도서관을 만든 애서가이다. 학창 시절부터 망겔의 꿈은 도서관 사서였다. 작가가 되고 책을 모으다 보니 어느 사이에 책장들이 하나둘씩 늘어났고, 결국 프랑스 루아르강 계곡에 3만 5천여 권의 책이 소장된 개인 도서관을 만들었다. 그러나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이 있듯이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다. 망겔도 예외가 아니었다. 미국 맨해튼에 있는 아파트로 이사하게 되면서 개인 도서관에 있던 책들을 떠나보냈다. 《서재를 떠나보내며》는 해체를 맞이하는 개인 도서관에 보내는 일종의 송별사(送別辭)다.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는 ‘서재 속에 죽은 사람들이 있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죽은 사람들’이란 책을 남긴 저자들의 정신이다. 결국 서재는 책들의 공동묘지이고, 서재를 애지중지 관리하는 애서가는 묘지기다. 그러나 프랑스에 있는 서재를 떠나보낸 망겔 입장에서는 사르트르의 비유가 우울하게 느껴질 것이다. 서재의 해체는 곧 ‘서재의 죽음’, ‘기약 없는 이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나는 책을 싸는 행위를 받아들일 수 없다. 책을 한 권 한 권 서가에서 빼내고, 그 책을 종이 수의 속에 집어넣는 것은 우울하고 사색적인 행위로 마치 오래도록 지속되는 작별 인사 같은 것이다. (60쪽)

 

 

서재에 잠든 ‘죽은 사람들’을 지켜본 묘지기가 공동묘지 하나가 사라져가는(죽어가는) 모습까지 봐야 한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에게 서재는 온전히 나에 대한 ‘자서전’이며, ‘나’라는 존재의 일부이다. 서재는 오로지 나를 위한 공간이기 때문에 자기 맘대로 책을 꽂을 수 있다. 도서관에 있는 책은 공공 소유물이다. 도서관 책에 밑줄을 긋거나 필기를 하면서 읽을 수 없다. 그러나 개인 서재에 꽂힌 책은 개인 소유물이다. 망겔은 책을 빌려주는 행위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 그는 개인 서재를 잃은 것에 대한 아쉬운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나는 책은 나의 소유물이고 또 나라는 사람의 일부라고 느낀다. 나는 책을 빌려주는 것을 귀찮아한다. 나는 책을 빌려준다는 것은 절도를 유혹하는 행위라 믿는다. 나의 서재는 나라는 사람을 에워싸고 또 반영하는 온전히 사적인 공간인 것이다. (17~18쪽)

 

 나는 늘 공공 도서관을 사랑했지만 한 가지 모순은 고백해두어야겠다. 나는 도서관에서 글을 쓰거나 일을 하면 마음이 편안하지 않다. 조급한 나는 원하는 책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빌려 온 책의 여백에 필기를 하지 못한다는 것도 너무 싫다. 책에서 어떤 놀랍고 진귀한 것을 발견했는데 그 책을 도서관에 다시 반납해야 하는 것도 싫다. 나는 탐욕스러운 약탈자처럼 내가 다 읽은 책이 나의 것이 되기를 바란다. (28~29쪽)

 

 

서재를 떠나보내고 난 뒤에 망겔은 국립 도서관장이 된다. 그는 자신의 임무를 염두해서 그런지 책의 후반부에 국립 도서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가 운영하고 싶은 국립 도서관은 누구나 마음 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는 보금자리 같은 곳이다. 망겔에게 서재와 도서관은 개인과 사회 전체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특별한 장소이다. 글의 영감과 간접경험을 얻는 곳이기도 하고, 때론 번잡한 삶에 지친 영혼을 위로하는 안식의 장소였다. 책 속에 담긴 방대한 인류 정신의 원형을 기억하게 만들고, 활자와 세상을 향해 더 열린 상상력을 갖게 하는 곳이기도 했다. 서재는 삶의 기록이며, 독서편력의 역사이다. 다소곳하게 책이 놓인 서재를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따스해진다. 서재는 우리의 마음에 활력을 불어주는 오아시스 같은 천국이다. 책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는 서재야말로 보르헤스(Borges)가 원했던 ‘천국의 도서관’이 아니었을까.

 

 

 

 

※ Trivia

 

2쇄를 찍을 때 다음과 같은 오자들을 교정해야 한다.

 

28쪽에 안나 슈웰(Anna Sewell)의 사망 연도가 ‘1978년’으로 되어 있다. 그녀는 1878년에 세상을 떠났다. 52쪽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작가 이름을 ‘마르셀 푸르스트’라고 표기되어 있다. 176쪽 옮긴이 주에 ‘프루스트’로 적혀 있는 걸로 봐선 52쪽의 ‘푸르스트’는 인쇄 오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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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08-22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8~29쪽)의 글에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cyrus 2018-08-23 16:54   좋아요 1 | URL
망겔의 책을 다 읽고 도서관에 반납했을 때 기분이 이상했어요.. ㅎㅎㅎ
 

 

 

안토니우스(St. Anthony)사막의 성인이라는 별명을 가진 수도승이다. 젊은 안토니우스는 마태복음에 기록된 부자 청년에 대한 설교를 들은 뒤 처음으로 성령의 뜨거운 기운을 받았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사막에 들어가 기도와 묵상에 전념했다.

 

 

 

 

 

 

 

 

 

 

 

 

 

 

 

 

 

 

* [품절]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 사막의 안토니우스(분도출판사, 2015)

* 아타나시우스 성 안토니의 생애(은성, 2009)

 

 

 

온갖 종류의 유혹과 환영이 안토니우스에게 나타나 그를 무너뜨리려 하였다. 그는 이런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아예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사막으로 옮겨갔다. 10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안토니우스는 사막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 그는 단 두 번 은둔처를 벗어났다. 첫 번째는 311년 알렉산드리아에서 일어난 박해로 유죄 판결을 받은 죄수들을 돕기 위해서였다. 두 번째는 아리우스 파(Arianism)와 논쟁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예수의 신성(神聖)을 부인한 아리우스 파에 맞서 싸우던 알렉산드리아의 교부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of Alexandria)를 도와 교회의 정통 교리를 수호했다. 아타나시우스는 안토니우스의 생애를 기록했고, 그가 쓴 성인 전에 영향을 받은 젊은 성도들이 사막에 찾아왔다. 안토니우스와 그를 따르는 성도들은 사막에 모여든 제자들에게 금식과 기도와 자선에 관해 가르쳤다. 최초의 수도원은 사막에서 시작되었다.

 

 

 

 

 

 

 

 

 

 

 

 

 

 

 

 

 

* 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 악의 쾌락 변태에 대하여(에코의서재, 2008)

* 로이 포터, 미쿨라시 테이흐 엮음 섹슈얼리티와 과학의 대화(한울아카데미, 2001)

 

 

 

안토니우스는 금욕과 고행, 그리고 청빈한 생활을 중시했다. 그는 하루 한 끼만 먹었고, 배가 고플 때는 맹물을 잔뜩 퍼마셨으며, 빈 동굴 무덤에서 거지처럼 웅크리고 잠을 청했다. 일정 기간 간격으로 친구들이 마른 빵을 가져다준 덕분에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다. 오늘 우리의 기준으로 안토니우스의 생활을 보면 극단적인 금욕에 가까운 고행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시 중세 시대의 기준으로 보면 마음속의 욕념을 깨끗이 비워 버리는 방법이다. 안토니우스뿐만 아니라 여러 종파의 수도승, 신비주의자들은 마음속에 층층이 남아 있는 잡다한 악덕의 모습을 기도 속에서 훌훌 털어버림으로 마음을 정화하고자 했다. 이들은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십자가 고통을 받아들여 자신의 삶을 믿음에 일치시키기 위해 예수를 따르고자 노력했다. 그리하여 육신의 고통을 받아들이는 고행을 실천했다. 고행자들은 자발적으로 십자가의 고통에 참여하려고 때로는 자신의 몸에 채찍질을 가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육신에 직접 고통을 가하기도 했다. 소박한 종교적 반성에서 시작한 채찍질 고행은 마조히즘(masochism)의 이상 현상에 휘말려 미친 듯 인기를 끌게 된다. 중세 말기에 와서 자기 파괴적 고행 방식은 이단으로 규정 받기 시작했고, 채찍질 고행은 악마의 행위와 동일시되었다.

 

정신분석학자 엘리자베트 루디네스코(Elisabeth Roudinesco)는 자신의 책 악의 쾌락 변태에 대하여 (에코의서재, 2008)에 중세의 극단적인 고행 문화를 소개하면서 인류의 도착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섹슈얼리티와 과학의 대화 (한울아카데미, 2001) 2(사디즘, 마조히즘의 역사, 언제 어떤 행동이 사도마조히즘이 되는가)은 사디즘(sadism)과 마조히즘의 용어 성립에 대한 통념을 깨는 글이다. 여기서 말하는 통념이란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19세기 근대 성과학의 등장과 함께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사도마조히즘은 병리적인 형태가 아니라 인류의 내면에 잠자고 있는 원초적 본능이다. 섹슈얼리티와 과학의 대화도 중세 고행자들의 마조히즘을 근거로 내세워 고통으로부터 느끼는 쾌락을 누리는 문화가 오래전부터 만연해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중세 고행자들은 사드 후작(Marquis de Sade)이 태어나기 전에 마조히스트로 살고 있었던 셈이다.

 

 

 

 

 

Trivia

 

섹슈얼리티와 과학의 대화서론 15쪽에 괴테(Goethe)의 작품명이 언급되어 있다. ‘괴테의 사고력 실험소설 선택적인 유사성(Elective Affinities)이라고 적혀 있는데, 처음에는 이게 무슨 소린가 했다. 우리말로 옮긴 작품명에 영문명이 안 적혀 있었다면 작품의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Elective Affinities’18세기에 나온 화학 용어인데 물질의 결합을 일으키는 힘을 뜻한다. 과학에 조예가 깊은 괴테는 이 과학적 개념을 빌려 인간의 관계를 묘사한 친화력이라는 소설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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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8-22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 안토니우스의 금욕과 고행 그리고 극단적 청빈
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부합할 터인데
오늘날 한국 대형교회의 모습과는 정말 동떨어진 것 같
아 씁스릅하기만 합니다.

cyrus 2018-08-22 17:34   좋아요 0 | URL
종교인들도 사람이라서 쾌락을 누릴 수 있어요. 그런데 성행위를 부도덕한 행위로 보면서도 자신들은 남 몰래 즐기는 위선적인 행동은 마음에 들지 않아요. 특히 ‘신의 이름’을 내세워서 여신도들에게 접근하는 사이비들은 싫어요.

페크pek0501 2018-08-22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통으로부터 느끼는 쾌락을 제가 경험한 게 있어요. 발레 시간에 앉아서 동작을 하다가
누워서 동작을 하는데 꽤 힘들어서 끙끙대게 되는데 묘한 쾌감이 있습니다. 윗몸 일으키기도 하는데 꽤 많이 시켜서 땀을 흘리며 고통을 느끼게 되는데 그 시간이 싫지 않은 거예요.
왜 그럴까, 생각을 하곤 해요.
저는 인간들의 공통점이 많을 거라고 봐요. 다만 느낄 기회가 없거나 무지해서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봅니다.
인간은 이상한 존재입니다. ㅋ

cyrus 2018-08-23 17:00   좋아요 1 | URL
페크 님의 경험은 고통의 쾌감이라기보다는 성공에 대한 기대감이 주는 쾌감인 것 같아요. 발레 동작을 하려면 고통을 참아야 하잖아요. 그 고통을 견디면 몸이 유연해지고, 발레 동작이 가능해져요. 발레 동작을 할 수 있다는 성공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면 고통을 못 느낄 수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