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짓으로 그림을 읽다
미야시타 기쿠로 지음, 이연식 옮김 / 재승출판 / 2018년 6월
평점 :
절판


 

 

사람들은 보통 언어의 교환만 대화라고 생각한다. 한 사람의 사소한 몸짓이나 미세한 표정 변화 하나하나 역시 언어가 될 수 있다. 누군가를 애절하게 사랑해본 사람이라면 이미 알고 있으리라. 사랑하는 이의 표정 하나, 행동 하나가 얼마나 무겁고 커다란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를. 의미의 교환이 일어나지 않을 때 싸움이 벌어진다. 사람들이 무심코 사용하는 몸짓은 그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해주는 마음의 유리창과 같다. 우리는 말 이외에 몸짓으로 자기 의사를 표현한다. 말보다 몸짓과 같은 비언어적 표현이 인간의 속내를 더 잘 나타낸다. 왜냐하면 말은 의식적인 통제 아래 표현되지만, 몸짓은 무의식 상태에서 표현되기 때문이다. 알고 보면 몸짓 안에는 수많은 감정이 숨어 있다. 그런데 스마트폰과 1인 가구 생활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이웃이나 가족이나 연인이나 친구의 몸짓을 응시하지 않는다. 스마트폰이나 텔레비전 화면에 나오는 연예인의 몸짓만 응시할 뿐이다.

 

서양인들은 동양인보다 몸짓으로 감정을 더 많이 표현한다. 하나의 영토에 여러 민족과 어울려 살아온 역사가 긴 탓이다. 우리나라나 일본은 ‘단일 민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몸짓 언어를 잘 쓰지 않는다. 말보다 ‘몸’이 위주가 되는 공연은 서양에서 시작되었다. 몸 중심 공연 형식으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것이 마임(mime)이다. 마임은 ‘흉내’를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됐다. 고대 그리스 · 로마 시대의 마임은 사람이나 사물을 몸짓으로 흉내를 내는 희극배우를 지칭했다. 이 마임이 중세에 이르러 언어를 배제한 채 몸짓으로만 이뤄지는 공연 양식을 지칭하게 된다. 교회가 연극의 현실 비판 기능을 누그러뜨리려 언어 사용을 금지한 데 대한 대응으로, 대사를 하지 않고 몸짓으로만 표현하는 마임의 양식화가 이뤄졌다. 마이머(mimer, 마임 배우)의 몸짓 자체가 언어이다. 연극의 대사만으로도 전달할 수 없는 감정의 모호함을 언어 없이 몸짓으로 표현해낼 수 있는 행위예술의 기본이다. 결국 마임은 몸에서 시작하지만, 환영(幻影)으로 끝나는 예술인 셈이다. 마이머가 침묵과 몸짓으로 건네는 말을, 관객들이 마음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이다.

 

대사 없이 인물의 몸짓으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그림은 마임과 무척 닮았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몸짓 하나하나에 주목해야 하는 마임과 달리 그림으로 표현된 몸짓은 영구 보존된다. 감상자는 그림 속 등장인물의 몸짓을 천천히 살펴볼 수 있다. 따라서 그림 속 등장인물은 몸짓을 통해 의미를 전하고, 그림 밖 감상자는 인물들의 몸짓을 따라가면서 그림 속에 있는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다. ‘대사 없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는 그림이 인간들의 몸짓으로 표현되는 문화와 정서 속에 녹아들 때, 그 그림은 여전히 미술을 어려워하는 사람들에게 훨씬 가까이 다가서 있지 않을까 싶다.

 

《몸짓으로 그림을 읽다》는 서양미술과 일본 미술에 표현된 다양한 몸짓에 주목하여 그림 속 이야기를 풀어낸다. 저자에 따르면 미술에 등장하는 몸짓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감정을 표현하는 몸짓(표정도 포함된다), 둘째는 의례적이고 관습적인 몸짓(정적인 몸짓), 셋째는 어떠한 특정 행동을 하기 위한 구체적인 몸짓이 있다. 그림은 전문가가 아니면 정확하게 화가의 의도를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저자가 알려준 40가지의 몸짓과 동작의 의미를 그대로 그림에 얹어 감상하기만 해도 온전히 그림 속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는 이 책은 미술 안내서로서 손색이 없다.

 

그러나 몸짓과 동작에도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동서양의 몸짓 언어 가운데 특히 수신호는 상반되는 것이 많다. 동양에서는 손가락을 굽히면서 수를 세지만, 서양에서는 손가락을 펴면서 셈을 한다. 우리가 승낙이나 돈의 사인으로 엄지와 중지로 동그라미를 만드는 것은 대부분 국가에선 비슷하나 브라질 등 일부 남미국가에선 여성의 은밀한 부위를 뜻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총리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은 ‘승리’를 뜻하는 V자 손가락 동작을 하면서 국민에게 희망과 용기를 줬다. 그러나 V자 손가락 동작을 할 때 손바닥을 바깥쪽으로 향해야 한다. 손등을 보이는 V자 손가락 동작은 욕설이다. 이 책은 같은 몸짓과 동작이 지역이나 시대에 따라 어떤 의미로 해석되는지 풍부한 도판을 소개하면서 비교한다. 일본인 출신 저자의 집필 특성상 책에 실린 도판 중에 국내 독자들이 자주 접하기 힘든 일본 전통 미술 작품과 일본 근현대 미술 작품도 포함되어 있다. 다만 저자가 동양 문화의 특징을 일본 문화로 한정하여 설명했기 때문에 한국, 중국 미술에 대한 언급이 적은 편이다. 이 책에 유일하게 (아주 잠깐) 언급된 한국 미술 작품은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다.

 

저자가 쓴 후기는 책을 보는 이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이 책은 2012년부터 2015년까지 3년에 걸쳐서 잡지에 연재한 글을 묶은 것이다. 글이 연재되는 기간에 저자의 외동딸이 암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생전 딸이 병원에서 지냈을 때, 가장 흥미롭게 본 글은 이 책에 실린 『기도하다』 편이었다. 기도는 ‘침묵의 언어’이다. 고백과 참회의 기도든, 희망과 염원의 기도든 극도의 진지함을 담은 침묵으로 기도를 한다. 기도하거나, 기도하는 사람(orans, 오란스)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보면 마음이 안정된다. 딸은 아버지가 쓴 글과 그 속에 있는 그림을 보면서 용기를 얻었고 마음의 안정을 찾았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그림은 그 자체가 치유이다. 미술을 감상하며 보내는 시간이 치유의 시간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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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 목요일에 있을 독서 모임을 위해 오랜만에 오르한 파묵(Orhan Pamuk)의 소설을 읽었다. 독서 모임 선정도서는 파묵의 아홉 번째 장편 소설 《내 마음의 낯섦》(민음사)이다. 그런데 내가 읽은 건 파묵의 첫 번째 장편 소설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민음사)이다. 엉뚱한 선택으로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파묵의 문학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그의 첫 번째 작품부터 봐야 한다. 파묵 본인이 자신의 모든 소설은 이전에 발표한 소설 속에서 태어난다고 언급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 오르한 파묵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민음사, 2012)

* [읽을 예정인 책] 오르한 파묵 《내 마음의 낯섦》(민음사, 2017)

 

 

 

파묵은 1979년에 발표한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이 문학상에 수상하면서 본격적으로 터키 문단에 데뷔했다. 내년은 파묵이 터키 문단에 등단한 지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런데 노벨 문학상을 받으면서 세계적인 작가로 알려지게 된 그에게도 무명 시절이 있었다. 파묵이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을 발표했을 당시 터키 문단은 농촌 문제를 다룬 소설을 선호했다.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의 공간적 배경은 농촌이 아니라 터키의 대도시 이스탄불(Istanbul)이었고, 작가의 자전적인 색채가 짙은 일종의 ‘교양소설(Bildungsroman)이었다.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은 문학상을 받은 지 3년이나 지나서야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파묵은 이스탄불에서 펼쳐지는 동 · 서양 문명 간의 충돌, 이슬람과 세속화된 민족주의 간의 관계 등을 주제로 작품들을 써왔다.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은 세계화라는 서양 중심의 거대한 흐름과, 그 속에서 점점 주변부화해 가는 터키의 사회적 분위기를 사실적으로 묘사된 작품이다. 파묵은 첫 소설에서 시간적 배경을 아주 넓게 설정하는 대범한 시도를 하는데, 오스만 제국이 점점 몰락해가는 시기인 1905년부터 시작해서 터키 공화국으로 들어서는 과도기의 1930년대를 거쳐, 고속 성장기에 접어든 1970년대 터키의 모습을 보여준다. 파묵은 3대째 이어지는 제브데트 가족과 그 주변 인물들의 삶과 감정 변화를 세밀하게 묘사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에 얽힌 격동기 터키 사회의 모순과 갈등까지 고스란히 그려낸다.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은 한 가족의 삼대에 걸친 이야기를 통해 터키의 굴곡진 역사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대하소설’ 또는 ‘역사소설’로 볼 수 있다. 이 작품이 19세기 유럽의 교양 소설 형식의 틀로 쓰였기 때문에 ‘교양소설’로도 볼 수 있다.

 

 

 

 

 

 

 

 

 

 

 

 

 

 

 

 

 

 

 

 

 

 

 

 

 

 

 

 

 

 

 

 

 

 

* [아직 안 읽은 책] 괴테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민음사, 1999)

* [아직 안 읽은 책] 헤르만 헤세 《데미안》(민음사, 2000)

* [아직 안 읽은 책] 토마스 만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민음사, 2001)

 

 

 

 

교양소설은 한 인간의 전인적인 ‘교양’이 어떻게 완성돼 가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여기서 말하는 ‘교양’이란 소설 속 주인공이 스스로 자아 정체성을 발견하면서 성장하는 과정을 뜻한다. 그래서 독일에서 시작된 교양소설은 ‘성장소설’이라고도 불린다. 괴테(Goethe)《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 토마스 만(Thomas Mann)《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데미안》등은 독일의 대표적인 교양소설이다.

 

교양소설 속 주인공들은 자기 자신과 세계를 분명히 인식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에 도전적으로 대응하는 젊은이로 묘사된다. 그래서 이 교양소설의 주인공들은 격변하는 현실 간의 대결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내 · 외적 갈등에 고민하는 모습을 보인다. 파묵은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을 모델로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을 썼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 2부에 제브데트의 둘째 아들 레피크와 그의 친구인 외메르무히틴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생활환경, 직업, 사회적 지위는 달라도 모두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서 내면적 혼란을 겪는 인물들이다. 레피크는 자신만의 뚜렷한 삶의 목표를 찾지 못한 채 살고 있다. 무히틴은 시인이지만 제대로 된 시집 한 권조차 펴내지 못한다. 불투명한 앞날과, 자신의 재능에 대한 회의, 경제적 궁핍함 등에 둘러싸여 발버둥치면서 생활한다. 파묵은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에서 서구화와 경제 성장에 가려진 터키 청년들의 고뇌를 생생히 재현한다.

 

 

 

 

 

 

 

 

 

 

 

 

 

 

 

 

 

 

 

 

* 오노레 드 발자크 《고리오 영감》(을유문화사, 2010)

* 오노레 드 발자크 《고리오 영감》(열린책들, 2009)

* 오노레 드 발자크 《고리오 영감》(민음사, 1999)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을 읽어 보면, 파묵이 유럽 교양소설을 오마주(hommage)한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부와 명예를 원하는 외메르를 발자크(Balzac)의 소설 《고리오 영감》에 나오는 라스티냐크와 닮았다고 언급하는 대사가 있다. 《고리오 영감》은 시골 청년 라스티냐크가 파리에 살면서 내면적으로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그린 점에서 교양소설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아직 《내 마음의 낯섦》 읽기를 시작하지 않았지만, 이 작품에서도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에서 보여준 파묵 문학 세계의 특징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이 이스탄불 중산층 가족의 삶을 다룬 이야기라면, 《내 마음의 낯섦》은 이스탄불 하층민 가족의 삶을 보여준다. 재미있게도 두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하나로 이어진다.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은 1900년대, 1930년대, 1970년대 이야기고, 《내 마음의 낯섦》은 1960년대에서 2012년까지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다. 두 작품에 나오는 모든 등장인물들은 터키 근현대사를 관통해 살아간다. 그리고 첫 소설에서 이미 보여주었듯이 《내 마음의 낯섦》에서도 ‘전통-전근대-동양’과 ‘현대-근대-서양’의 사회적 · 문화적 충돌에서 빚어진 갈등과 그에 따른 인물들의 감정 변화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 Trivia

 

 이 작품이 구체적 사실로 구성된 역사소설적인 면이 다분히 있지만 이에 허구적 요소를 가미한 점에 대해, 파묵은 “역사는 순수하고 순결한 상상력을 부여해 준다.” 라고 밝히면서 이후의 작품에서도(예를 들면 《내 이름은 빨강》, 《하얀 성》등) 실제 역자와 허구를 버무리는 작업을 계속하게 된다.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 2권에 ‘작품 해설’이 실려 있다. 543쪽에 ‘실제 역자와 허구를 버무리는 작업’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역사’의 오자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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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11-21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에서도 노벨문학상 작가가 나올만한데 안타깝네요...

cyrus 2018-11-22 17:00   좋아요 1 | URL
국제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작가가 없다는 게 아쉽죠. 그런 작가가 되려면 ‘한국적인 색채가 있으면서도 서양적인 색채도 띄고 있는 문학 작품’을 써야 할 것입니다(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쉽게 말하면, 한국 작가가 쓴 소설인데도 직접 읽어보면 서양문학 작품을 읽는 느낌이 나는 작품인 거죠. 파묵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가 왜 노벨 문학상을 받은 건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어요. 그가 쓴 대표작들은 터키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서양문학에 영향을 받은 작품들입니다. 아마도 노벨 문학상 심사위원들은 터키 출신 작가의 소설을 읽었을 때 이질감을 느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

카알벨루치 2018-11-22 17:06   좋아요 0 | URL
그렇게도 볼수있겠군요 사이러스님 글을 읽으면서 터키출신작가도 노벨문학상을 받는데 왜 우리나라 출신작가는 못 받았을까 이 생각이 스치고 지나가더랬어요! ...역쉬 Sㅣ루스 박사님이십니다! 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8-11-21 15:4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날마다 이 정도 퀄리티를 뽑아내는 정보를 제공한다면, 알라딘에서 사이러스 님 월급을 줘야 하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boooo 2018-11-21 17:19   좋아요 1 | URL
공감합니다. ㅎㅎ

카스피 2018-11-22 11:08   좋아요 0 | URL
ㅎㅎ 저도 공감합니다2 ^^

cyrus 2018-11-22 17:11   좋아요 0 | URL
별 말씀을요.. ㅎㅎㅎㅎ 요즘 알라딘/북플에 깊이 있는 글을 쓰는 분들이 많아졌어요. 그런 분들이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어요. ^^
 
모든 몸은 평등하다 - 장애여성들의 몸으로 말하기
김효진 외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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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갈수록 슬슬 추워진다. 올해 겨울도 춥다고 한다. 추위에 약한 사람이 다 달라 실제 체감 온도는 온도계 온도만으로 짐작할 수 없다. 또 체감 온도는 사람이 서 있는 위치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무엇을 체감한다는 것은 누군가가 그 세계에 위치한 자리를 확인하는 것이며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이 어떠한지를 깨닫는 일이다. 그것은 머리만 생각해서는 불가능하며, 몸만 움직여서도 불가능한 일이다. 장애인에 대한 체감도 자신이 처한 위치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많은 비장애인은 장애인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독립적인 존재’라는 것을 쉽게 간과한다. 장애인을 ‘불쌍한 존재’ 정도로 치부하는 사회 속에서 장애인들은 늘 비장애인들의 동정을 마주해야 한다. 대중매체에서 장애인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의존적 존재로 그려진다. 의존성은 장애인의 독립적 인격을 부정하는 근거로도 이어진다. 장애인을 타자화하는 시선은 근본적으로 당연히 보장돼야 할 장애인의 권리에 접근하지 못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Deleuze)가타리(Guattari)에 따르면 다수성과 소수성은 양적 문제가 아니다. ‘다수’는 수적으로 많아서가 아니라 사회의 가치 척도를 가진 채 지배하는 상태를 말한다. 한편 그 척도에서 벗어나 있는 자들은 비주류, 즉 소수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그 척도에 의해 억압받고 차별을 받는다. 여성, 장애인, 성 소수자, 소수민족은 이들이 스스로 원해서가 아니라 힘 있는 다수에 의해 ‘2등 시민’으로 강등되는 사람들이다. 이들을 배제하고 남은 사람들이 자신들만을 ‘정상인’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 ‘장애 여성’의 목소리는 기삿거리가 되지 못한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장애 여성’, ‘비장애인 여성’은 생소한 용어였다. 이 세상(이성애 중심 사회)에 여성과 남성이 있고, 마치 장애인이라는 무성(無性)적 존재라도 있는 것처럼 장애인 안에 여성이 있다는 것을 무시해오고 있었기에 장애 여성들의 경험과 차별은 드러나지도 않았다. ‘장애여성네트워크’는 장애 여성들이 주체가 되어 장애를 가진 여성들의 정체성을 찾고, 사회적으로 형성된 장애 여성에 대한 왜곡된 의식을 바꾸기 위한 운동을 하는 인권 단체이다. 2009년에 ‘장애 여성 이야기가 있는 사진전-몸으로 말하기’를 개최하여 일상 속에서 포착한 장애 여성들의 모습이 있는 작품들을 선보였다. 2010년과 2011년에는 페미니즘 저널 <일다>에 장애여성네트쿼크에서 활동한 다섯 명의 장애 여성들이 쓴 스무 편의 글이 연재되었다. 이 글들을 모은 책이 바로 2012년에 나온 《모든 몸은 평등하다》이다.

 

나온 지 꽤 됐지만 이대로 잊히기엔 아쉬운 책이다. 저널지에 발표한 글을 모아서 낸 무성의한 책이 아니다. 자신들을 ‘장애인’이라고 여기는 사회에서 ‘정상인’이란 무엇인가, ‘아름다운 몸’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물음을 던지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은 ‘장애 여성을 위한 책’이 아니라 장애인, 비장애인을 아우르는 ‘모두를 위한 책’이다. 다섯 명의 글쓴이들은 장애와 마주한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얘기하면서, 잘 알려지지 않은 장애여성들의 삶을 상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세상으로 바꾸고자 (장애 남성, 비장애인) 독자들을 설득한다. 인권의 사각지대에 내몰린 장애 여성들의 삶과 인권을 배려하고 존중하기를 설득하는 글쓴이들의 어조는 부드럽고, 유쾌하다.

 

비장애인들은 누구나 친숙한 것 앞에서는 편하고 낯선 것 앞에서는 불편하다. 그래서 장애 여성의 몸을 뒤틀리고 결함 있는 몸이라고 생각한다.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낯선 것들 앞의 그 불편함을, 우리는 존재의 조건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배제의 감정을 통해서 해소하려고 한다. 그 때문에 장애인 문제의 심각한 이유 중의 하나가 장애인에 대한 비장애인들의 무관심과 편견이다. 특히 장애 여성들은 자신들이 겪은 차별에 관해 이야기하고, 권리를 주장해도 무관심과 편견이 대부분의 비장애인과 장애 남성들의 잠재의식에 도사리고 있어 막막함에 직면할 때가 많았다. 여성이라면 축복받아야 할 초경이 장애 여성에게는 본인은 물론 부모에게도 골칫덩이가 된다. 연애, 결혼, 출산도 비장애인 여성이 갖는 고민보다 훨씬 복잡하다. 건강 상태는 물론 아이를 기를 수 있는 사회적 여건도 충족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몇몇 비장애인 독자들은 “자기 몸 하나 가누기 어려운데 무슨 다른 장애 여성들을 도울 수 있겠느냐”고 걱정할 것이다. 한때 나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엔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것 같은 장애 여성이지만 이 책을 통해 더 가까이 살펴보면 얼마나 많은 것을 할 수 있는지 알게 된다. 이 책의 글쓴이들은 발랄하게 웃으면서 글을 썼을 것이다. 그녀들은 비장애인, 혹은 다른 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장애 여성의 몸’을 이야기한다.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몸에 대해 말하는(글 쓰는) 행위 그 자체를 즐긴다. 그녀들에게 몸은 ‘결핍’이 아니라 ‘충만’이다. 타자(남성)의 시선에 맞춘 몸이 아니라 자유롭게 살아가는 몸이다. 장애 여성의 몸은 비극과 불행의 몸이 아니다. 그래서 아름답지 않아도 존재하는 몸들의 자기 확인은 유쾌하면서도 당당하다.

 

실제로 비장애인들은 평범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장애인을 만날 기회가 제한되어 있다. 그래서 대중매체에서 그려지는 장애인의 이미지들에 익숙해서 장애인은 자신의 판단과 실천을 할 수 없는 존재,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된다. 장애인은 이렇게 상상적 타자로 그려지고 ‘타자화’된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관계망을 형성할 수 없거나 관계망은 특정한 방식으로만 구성되게 된다. 도와주는 비장애인과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장애인이라는 방식의 관계로 재현된다. 하지만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한 존재이기 위해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그런 이유로 살아가는 것도 아니다. 누구나 자기 행복을 위해 저마다의 이유로 살고 있다. 장애인에게 느끼는 비장애인의 불편함은 ‘정상’, ‘표준’으로 정형화된 신체적으로 건강하면서 아름다운 몸과 비장애인의 몸에 대한 괴리감에서 생긴다. 타자에 대한 관심, 서로 다른 몸과 사회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 간의 만남과 교류가 정말 중요하다. 타자의 삶과 만나지 못하고 자기 안에서만 느끼고 해석하면 타자의 삶을 절대로 체감할 수 없다. 자기 것일 뿐이다. 장애인에 대한 체감이 쉽지 않기에 우리는 장애인의 다름을 받아들이면서 만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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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9 23: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11-20 19:54   좋아요 0 | URL
맞아요. 눈에 보이지 않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아요.

2018-11-20 09: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11-20 19:56   좋아요 0 | URL
여전히 장애인과 함께 수업하는 방식을 기피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자꾸 피하면 비장애인들은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가진 채 살아가게 되고, 장애인 복지 정책 도입이나 장애인 권리 문제에 시큰둥하거나 냉소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괴물은 부자연스러운 체형을 가진 존재이다. 보통 굉장한 힘과 잔인성을 가진 공포의 대상을 가리킬 때 쓰는 단어이다. 예를 들면 살아 있는 뱀이 뒤엉켜 있는 머리를 가진 메두사(Medusa)는 괴물이다. 스핑크스(Sphinx)는 사자의 몸뚱이에 상반신은 여자였다. 이 괴물은 어려운 질문을 인간에게 던진다.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인간을 죽여 버린다. 고대 인도에서 신체적 기형은 신성한 존재로 이해했다. 아스테카(Azteca) 신화에 나오는 케찰코아틀(Quetzalcoatl)은 날개 달린 뱀의 모습을 한 창조주이다. 그는 우주의 생성에 관여한 신으로 숭배를 받았다.

 

지금 우리는 괴물을 어떻게 볼까? 물어보나 마나 인정하지 않는다. 괴물은 추하고 무섭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괴물을 정의하는 우리는 누구인가? 뭐라고 불러야 하지? 우리는 괴물이 아니라서 ‘정상’인가?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은 무엇인가? ‘괴물’과 ‘기형’을 주제로 한 책을 지금 소개하는 건 최근의 고민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 고민은 ‘기형’이라는 말을 대신할 단어를 찾는 것이다. 기형이란 무엇인가? 누군가를 ‘기형’이라고 부르는 것은 바람직한가? 이번에 소개할 책들은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게 만든다.

 

 

 

 

 

 

 

 

 

 

 

 

 

 

 

 

 

 

 

 

 

 

 

 

 

 

 

 

 

 

 

 

 

 

 

* [품절] 게르트 호르스트 슈마허 《신화와 예술로 본 기형의 역사》 (도서출판 자작, 2001)

* 필리프 코마르 《인체 : 에로티시즘과 해부학》 (시공사, 2001)

* 아먼드 마리 르로이 《돌연변이》 (해나무, 2006)

* [절판] 마크 S. 브룸버그 《자연의 농담》 (알마, 2012)

* 스테판 오드기 《괴물 : 가깝고도 먼 존재》 (시공사, 2012)

* 토드 로즈 《평균의 종말》 (21세기북스, 2018)

 

 

 

《신화와 예술로 본 기형의 역사》 (도서출판 자작)《돌연변이》 (해나무), 《괴물 : 가깝고도 먼 존재》 (시공사)는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온갖 기형 증상을 보여준다. 결합쌍생아(샴쌍둥이), 거인증, 단안증(외눈증) 등 다양한 기형 증상에 대한 역사적 기록, 그리고 사람들의 인식 변화를 살핀 뒤 현재 ‘기형학(Teratology)으로 밝혀낸 그 원인의 의미를 설명한다. 기형학이 등장하면서부터 기형은 ‘혐오의 대상’에서 ‘과학적 연구의 대상’이 된다. 물론, 이러한 변환점이 있다고 해서 기형에 대한 대중의 왜곡된 시선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선천적으로 기형을 갖고 태어난 사람들을 우리에 가두고 전시하는 프릭 쇼(freak show)는 20세기에 들어서까지 끈질기게 남아 있었다. 프릭 쇼의 무대 위에 오른 사람들은 대부분 현대의 기준에서 보면 장애인이다. 프릭 쇼를 홍보하는 매체는 그들을 ‘이국적인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방인’으로 소개했다. 그러나 프릭 쇼의 장애인들은 실제로 미국이나 유럽에서 태어난 서구인이었다.

 

프릭 쇼는 ‘비정상적인 신체’를 전시하여 관객들의 흥미를 유발하는 동시에 무엇이 ‘정상적인 신체’인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프릭 쇼를 즐기는 관객들은 ‘비정상’과 ‘정상’의 이분법 속에 강력하게 빨려 들어간다. 그리고 누가 괴물이며, 정상인지 알 수 있게 된다. 관객들은 충격과 호기심을 느낌과 동시에 무대 밖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자신의 위치가 ‘정상’임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예술가들이 기형과 괴물을 작품의 소재로 즐긴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인체 : 에로티시즘과 해부학》 (시공사)은 예술에서의 ‘기형’을 ‘가시적인 위험’을 경고하기 위한 신호로 본다. 괴물은 ‘인간의 추악한 모습’을 상징하는 대상이었고, 예술가는 그것을 ‘혐오’의 대상으로 설정하여 ‘아름다움’을 한층 더 부각한다. 괴물의 모습과 대비되는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관객은 이성적이고 정상적인 존재가 된다. 그들이 좋아하는 ‘아름다움’이란 ‘균형 잡힌 완벽한 신체’에서 나오는 것이다. 《평균의 종말》 (21세기북스)에서는 ‘평균’ 개념으로 인간의 특징을 설명하려고 했던 통계학자 아돌프 케틀레(Adolphe Quetelet)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그는 ‘평균에 가까운 인간’을 ‘정상’으로 분류하여 이에 미치지 못한 사람은 ‘기형’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누군가 ‘비정상’으로 지목될 때, 그와 대척점의 구도에선 사람은 정상적인 존재가 되는 효과가 발생한다. 이는 사회에서 ‘혐오’가 작동하는 방식과 같다. 혐오는 신체적 차이뿐만 아니라 성 정체성(gender identity), 섹슈얼리티(sexuality)를 ‘정상과 비정상’의 문제로 전환하며 이를 통해 차별과 배제를 구성한다. 《신화와 예술로 본 기형의 역사》는 한때 기형으로 분류된 간성(intersex), 동성애, 성도착 등도 언급한다. 지금은 동성애자를 ‘기형’의 한 범주로 보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성애 중심 사회에서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는 ‘비정상’으로 지목된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여성과 남성의 특징을 모두 가졌다는 이유로 양성인을 ‘완벽한 인간’으로 칭송했다. 그러나 그것은 고대 그리스의 상황일 뿐, 시간이 지나면서 양성인은 기형적인 질환으로 간주하였다. 《자연의 농담》 (알마)은 기형을 ‘진화적 관점’으로 설명하면서, 기형적인 모든 인간과 동물이 어떻게 이 세계에서 살아남았는지 보여준다. 《돌연변이》의 저자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변이를 일으킬 수 있는 유전자를 300개씩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결국 유전적 변이로 인해 생긴 기형은 생물학적으로 인간 모두에게 발생 과정에서 해당하는 현상이다. 그러나 기형의 원인을 무조건 유전적 요인에서만 찾을 필요는 없다. 기형을 일으키는 유전질환은 유전자 이상과 환경적 요인이 작용하는 복합적인 사례가 대부분이다.

 

기형인 생명체들은 라틴어로 ‘자연의 농담(Iusus natura)이라 불렸다고 한다. 이 말은 기형을 ‘자연의 실수’로 인식하는 오늘날의 관점과 대비된다. 실수는 ‘잘못함’ 또는 ‘잘못됨’이라는 전제가 들어가 있다. 기형을 ‘자연의 실수’로 보는 사고방식은 그들을 이 세상에 태어나면 안 될 ‘잘못된’ 존재로 보는 시선이 반영되어 있다. 《자연의 농담》에서는 기형 이외에 ‘이형(異形)이라는 단어도 나온다. ‘정상’을 뜻하는 ‘전형(全形)’과 반대되는 표현이다. 이 책의 저자는 이형도 ‘자연의 일부’이며 오랜 진화의 결과인 ‘다양성’의 산물이라고 강조한다. 따라서 타자의 생김새가 나와 조금 다르다는 이유로 그것을 ‘전형’의 틀에 맞춰 ‘비정상’으로 규정할 필요가 없다. 나는 기형 대신에 ‘이형’이라는 말을 쓰기로 했다. 물론, 단어를 바꿔서 사용한다고 해서 기형에 대한 차별적인 뉘앙스가 퇴색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기형’이라는 단어를 써가면서 이형과 전형을 비교하려는 인식을 경계해야 한다. 차이가 차별로 변질하고 다름이 비정상으로 치부되는 혐오는 일상적이고 은밀한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확인하기 어렵다. 그래서 더 무섭다. 잘도 숨어버리는 이 혐오야말로 우리 현실에 잠복하여 시시때때로 섬뜩한 손톱을 내미는 현재형의 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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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8-11-19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어놓은 책중에서 유일하게 읽은 책은 기형의 역사 하나뿐이네요^^;;;

cyrus 2018-11-20 19:58   좋아요 0 | URL
기형학을 처음 소개한 책일 겁니다. 이런 책이 다시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
 
여성의 우정에 관하여 - 자매애에서 동성애까지, 그 친밀한 관계의 역사
메릴린 옐롬.테리사 도너번 브라운 지음, 정지인 옮김 / 책과함께 / 2016년 7월
평점 :
절판


 

 

고대 그리스인들은 사랑의 형태를 세 가지로 구분했다. 첫 번째는 에로스(Eros)이다. 감각적이고 본능적인 사랑이다. 두 번째는 필리아(philia). 친구 간의 정신적인 사랑이다. 마지막 세 번째는 아가페(agape)이다. 성스럽고 은총에 가득 찬 사랑을 가리키는 말이다. 필리아는 ‘우정’, ‘동료애’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동등한 인격체들 간의 배려와 인정을 기초로 한 사랑이다. 따라서 필리아는 사회적 관계들을 떠받치는 유대감이다. 필리아는 오직 인간의 인격 안에서만 생길 수 있는 사랑이라고 한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우정을 인간의 고귀한 감정이라고 예찬하면서도 ‘여성의 우정’을 애초에 있지 않은 것으로 생각했다. 고대 그리스 남성들은 여성을 열등하고 불완전한 존재로 간주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여성이 존재론적으로 그리고 생물학적으로 미성숙하고 열등한 존재라고 규정했다. 그는 새로운 생명의 잉태 과정에서 완벽한 생명체를 만드는 것은 남성이며 여성은 단지 그 생명체를 담아주는 그릇 역할만 할 뿐이라고 했다. 그리스 여성의 지위는 초라했다. 그들에게는 시민권이 부여되지 않았고, 정치적 결정권을 갖지 못했다. 이렇다 보니 여성은 집안에만 지내야 했고, 사람을 만나면서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는 경험을 하지 못했다.

 

고대 로마의 문필가 키케로(Cicero)『우정에 대하여』라는 글에 우정을 신들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라고 썼다. 그는 이 글에서 우정의 가치, 우정이 지켜야 할 원칙 등 우정과 관련된 삶의 지혜를 들려준다. 이렇듯 고대 그리스 · 로마 남성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우정을 논하고, 우정의 미덕을 공유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인식했다. 그동안 ‘남성 중심의 우정’에 가려져 알려지지 않았고, 외면되어 온 다양한 형태의 ‘여성의 우정’을 시대별로 소개한 《여성의 우정에 관하여》남성이 만든 우정의 정의에 대한 안티테제(Antithese)이다. 나는 이 번역본 제목을 아주 잘 정했다고 생각한다. ‘여성의 우정에 관하여’는 남성 중심의 우정만을 다룬 『우정에 대하여』와 배치되는 반어법적 표현이다. 이 책은 여성과 여성, 나아가 여성과 남성의 우정까지 온전히 그려낸다. 각 시대의 사회적 환경과 대중의 인식에 따라 우정의 성격은 달라졌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 속에 여성의 우정도 점점 주목받게 되었다.

 

여성들은 15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유대감을 느낄 수 있는 경험이 소중하다는 걸 인식하기 시작했다. 물론 15세기 이전에 살았던 여성들이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는 경험을 하지 않았거나 그러한 기회조차 누리지 못했던 건 아니다. 비록 제한적이긴 했지만, 중세의 수녀원은 여성에게 허락된 유일한 배움의 공간일 뿐만 아니라 ‘여성 공동체’로서의 유대감이 형성되는 여성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수녀들의 우정 이외에 다른 계층 여성들의 우정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15세기 무렵에 유럽 상류층 여성들은 공적인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른 여성들과 공개적으로 유대 관계를 맺는 일상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18세기 프랑스에서는 귀족 여성들을 중심으로 살롱 문화가 유행처럼 번져 나갔다. 당시 ‘사교 공간’이자 ‘문화 공간’의 역할을 했던 살롱에서는 귀족들이 모여 독서와 토론, 공연 등 여가 생활을 즐겼고, 예술이나 정치, 사회, 종교 등 각 분야의 문제를 논하며 새로운 문화 경향이나 사상을 꽃피우기도 했다. 이 시기에 여성은 ‘우정’을 기반으로 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문화의 주체가 될 수 있었고, 사회적 · 문화적 활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기 시작했다. 여성 중심 사교 모임과 살롱 문화의 등장은 여성들의 배움 자체가 금기시됐던 풍토에서 일어난 중대한 변화였다. 그러나 지식인 여성들이 일으키는 ‘여풍’을 달갑지 않게 여기던 남성들은 여성 사교 모임을 경멸하는 뜻으로 ‘블루스타킹’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때부터 ‘블루스타킹’은 똑똑한 여자들을 비하하는 말이 됐고,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는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을 비하하는 말로도 쓰였다. 그러나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은 남성들의 편견 섞인 차별과 비난에 굴복하지 않았고, 그들의 생각을 이어받은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우정’에 연대 의식을 불어넣음으로써 ‘자매애(sisterhood)로 확장했다.

 

오늘날의 우정은 SNS를 통해 유지된다. 현대인들 대다수는 1인 가구이며 관계 맺는 일을 어려워한다. 이제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지 않고, 집에 머무르면서 친구의 근황을 알 수 있다. 다만 과거와 달리 끈끈한 유대감을 몸소 느끼지 못한다. 또 온라인상에서 만난 친구와의 관계를 ‘친구 취소’나 ‘차단’ 기능만으로 끝낼 수 있다. 아마도 미래에는 또 다른 형태의 우정이 유행하면서 세상을 바꿀 것이다. 우정의 형태가 다양하게 변하는 건 좋다. 그렇지만 이 우정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점점 변할수록 같은 예전의 끈끈한 유대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나이가 들어서 그렇게 예민하게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내가 시대의 변화에 따라가지 못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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