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명쯤 안보고 살아도 괜찮습니다 - 티 내지 않고 현명하게 멀어지는 법
젠 예거 지음, 이영래 옮김 / 더퀘스트 / 2019년 1월
평점 :
절판


 

 

 

 

 

 

 

아~아~아~ 사는 날까지

같이 가세 보약 같은 친구야

같이 가세 보약 같은 친구야~♬

 

 

 

 

5년 전까지만 해도 페이스북을 많이 이용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SNS 중독에 빠져서 책을 가까이하지 않는 나 자신을 확인한 이후부터 로그인하지 않게 되었다. SNS 활동이 의미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도 여전히 페이스북 계정은 가지고 있지만, 휴면 계정으로 방치된 상태이다. 로그인을 자주 안 하게 되니까 비밀번호가 생각나지 않는다. 내 페이스북 계정에 있는 ‘친구’ 중에 서너 명을 제외하면 요즘에는 연락을 주고받지 않는다.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거나 연락을 주고받지 않은 페이스북 친구가 많다. 쓸데없이 인맥만 늘렸다.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친구’라는 이름으로 인맥을 늘리는 일에 집착하는 것 또한 중독이다. ‘친구 중독’이 있는 사람은 특별한 이유 없이 친구 수를 늘린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심정으로 ‘친구를 만드는 것’이다. 친구 중독자에게는 친구 관계에 균열이 생기면 안 된다는 두려움이 있다. 친구 중독자는 친구들 앞에서 말 한마디 해놓고 실수한 게 있나 눈치를 본다. 친구들에게 늘 좋은 평가를 받으려 애쓰다 보니 자신의 감정을 관찰하고 솔직하게 표현하는 일이 서툴러진다. 친구 중독으로 가장 많이 혹사를 당하는 것은 친구 중독자 본인이다. 이들에게 친구는 ‘보약 같은 친구’가 아니라 ‘독약 같은 친구’이다.

 

인간관계 전문가 젠 예거(Jan Yager)는 친구와 우정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미덕을 ‘신화’로 본다. 친구 중독자는 ‘한 번 친구는 영원한 친구’라는 신화를 믿는다. 그리고 친구관계가 깨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렇다 보니 ‘친구’라고 보기 힘든 사람들(친밀감이라고 눈곱만큼 느껴지지 않는 사람, 자신에게 늘 못된 짓을 하는 성질 고약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쉽게 끊지 못한다. 진 예거의 책 《몇 명쯤 안보고 살아도 괜찮습니다》친구 중독 때문에 혼자 끙끙 앓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이 책을 인간관계를 현명하게 만드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알려준다. 일단 기본적으로 친하게 지낼 필요 없는 친구, 관계를 망가뜨리는 친구가 있는지 알아야 한다. 그들은 친구관계를 부정적으로 만드는 원인이다.

 

저자는 우리가 멀리해야 할 친구를 21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

 

 

1.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

 

2. 다 가지려는 사람

 

3. 배신자

 

4. 위험한 사람: 불법적이거나 위태로운 행동으로 나를 위험에 빠지게 한다.

 

5. 자아도취가 심한 사람: 내게 귀를 기울일 시간이 없다.

 

6. 속임수를 쓰는 사람

 

7. 폭로자: 내 신뢰를 배반한다.

 

8. 경쟁자: 나를 상대로 지나친 경쟁심을 느끼고 당신이 가진 것(인간관계, 일, 소유물)을 원한다.

 

9. 군림하는 사람

 

10. 라이벌: 내가 가진 것이라면 무엇이든 탐내고 당신에게서 앗아가려고 한다.

 

11. 흠 잡는 사람: 지나치게 비판적이다.

 

12. 축 처진 사람: 언제나 부정적이고, 비판적이고, 우울하며 나까지도 그렇게 느끼게 만든다.

 

13. 거부하는 사람: 나를 싫어하는 사실을 내게 알린다.

 

14. 학대자

 

15. 외톨이

 

16. 착취자: 지나치게 의존적이다.

 

17. 치료자: 모든 일을 분석하고 충고한다.

 

18. 침입자: 내 삶에 지나치게 간섭한다.

 

19. 모방자: 당신을 모방한다.

 

20. 통제자: 나를 포함한 인간관계를 지배한다.

 

21. 보호자: 친구와 동등한 입장이라기보다는 친구의 보호자, 부모, 보모가 된다. 

 

 

21가지 유형은 친구관계를 탐색하는 데 도움 되는 기준이 될 뿐만 아니라 상대방에게 ‘좋은 친구’로 남고 싶은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는 ‘거울’로도 사용할 수 있다. 좋은 친구를 만나려고 하는 것보다 내가 좋은 친구가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더 현명한 방법이다. 내가 정말 좋은 친구로 살아가고 있는지 아닌지 점검해봐야 한다.

 

친구를 대하는 내 성격은 ‘치료자’ 유형에 가깝다. ‘좋은 친구’는 상대방이 표출하는 감정을 묵묵히 지켜보면서 이해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치료자’는 상대방을 힘들게 하는 원인이 무엇인지 분석하면서, 상대방이 직면한 문제점을 해결하는 방안을 제시한다. ‘치료자’ 입장에서는 상대방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상대방에게 정신적인 부담감을 짊어준다. 상대방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는 치료자는 언젠가는 ‘침입자’로 변할 수 있다. ‘치료자’와 ‘침입자’ 유형의 사람을 요즘 말로 하면 ‘오지라퍼’ 또는 ‘꼰대’다.

 

 

 

 

 

 

 

 

그렇다면 ‘독약 같은 친구’를 피하거나 헤어지는 방법은 무엇일까? 어려운 일은 아니다. 상대방과 더 이상 친구관계를 이어나가고 싶지 않으면 깔끔하게 포기하면 된다. 상대방 얼굴 앞에서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절교 선언’을 하라는 건 아니다. 아무리 상대방이 미워도 묵혀 두었던 감정을 화산 폭발하듯이 분출하거나 악담을 퍼붓는 방식은 본인의 정신적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다. 친구와의 갈등 없이 헤어지는 방법 중 하나는 ‘침묵’이다. 어차피 싫어하는 친구와 연락을 주고받지 않거나 만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그 관계는 사라진다. 온라인 공간의 친구관계도 마찬가지다. SMS 계정의 ‘친구 목록’을 정리하거나 익명의 상대방에게 아는 척하지 않으면 친밀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침묵으로 일관하면 상대방으로서는 기분이 언짢을 수 있다. 그러나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있다. 상대방이 왜 나를 싫어하는지 생각해볼 수는 있어도 굳이 그 원인에 대해 자세하게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알아봤자 상대방에 대한 악감정만 깊어질 뿐이다.

 

‘보약 같은 친구’는 금전적으로 도움을 주는 친구만을 뜻하지 않는다. 내 말에 귀 기울여주고 진심으로 공감해주는 친구야말로 나와 잘 맞는 ‘보약 같은 친구’다. 이런 친구들을 만나면 기분이 저절로 좋아진다. 우리는 친구관계가 주는 정신적 만족감과 행복을 찾기 위해서 잘못 비틀어진 관계를 다시 풀기보다는 과감하게 끊어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친구 중독’을 해독할 수 있다. 나를 스쳐 지나가는 모든 관계를 내 곁에 꽁꽁 묶어두어야 한다는 강박, 누군가에게 잘 보여야만 한다는 완벽주의에서 벗어난다면, 나 자신에게도 집중할 수 있는 인간관계를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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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8 17: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3-19 12:06   좋아요 0 | URL
네, 저는 온라인상에 만난 분들을 ‘이웃’이라는 말을 쓰는데요, ‘친구’라는 개념과 다른 의미로 쓰고 있어요. 제가 쓰는 ‘이웃’은 친해지다가 갑자기 사이가 나빠질 수 있는 사람, 친한 건지 아닌지 애매모호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을 의미해요. ‘한 번 친구는 영원한 친구’와 ‘이웃’을 같은 의미로 보지 않는 거죠.

요즘 페이스북에 들어가면 타인에 대한 무시, 혐오를 대놓고 표출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해요... 그런 사람들이 내뱉는 글을 보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생겨요... ^^;;

2019-03-18 21: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3-19 12:08   좋아요 0 | URL
책을 더 많이 읽고 싶어서 SNS를 멀리한 것도 있지만, SNS을 피하게 된 이유는 많아요. 별로 관심이 없는, 알고 싶지 않는 타인의 글을 계속 보는 게 고역이었어요. ^^;;

sams5483 2021-02-01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금한이야기y 에서도 나왔지요. 본인이 괴롭히던 친구가
본인 페이스북 즉 SNS계정을 찻아서 연락처를 알아낸후
괴롭힘을 당하던 친구가 결혼해서 잘사는것이 못마땅해서
전화로 그 친구주소로 배달 수건 많게는 수십건에 달하는
배달시켜서 그 본인을 괴롭게 했던사건
절때로 페이스북 같은 SNS계정 하시면 안됩니다.
 

 

 

난 행복해지거나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야.” 낮은 자존감 때문에 괴로운 사람들이 흔히 하는 생각이다. 상대방의 말 한마디에 쉽게 상처받거나 다른 사람의 시선이 신경 쓰여 눈치 보일 때, 스스로 초라하게 느껴진다. 자존감이 바닥까지 내려가면 숨이 막힌다.

    

 

 

 

 

 

 

 

 

 

 

 

 

 

* 너새니얼 브랜든 자존감의 첫 번째 계단(교양인, 2018)

* 너새니얼 브랜든 자존감의 여섯 기둥(교양인, 2015)

    

 

     

2014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40여 년 동안 자존감(self-esteem)을 연구한 캐나다 출신의 심리학자 너새니얼 브랜든(Nathaniel Branden)은 자존감의 정의를 자신에게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는 믿음이라고 말했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상대방에게 휘둘리지 않는다. 상대방보다 못하다고 주눅 들지도 않으며 상대방보다 많이 잘났다고 자만하지도 않는다. 어제보다 성장한 오늘의 자신을 자랑스러워하고, 오늘보다 나아질 내일이 오길 기대한다. 브랜든은 건강한 자존감이 유지하도록 받쳐주는 두 가지 요소로 자기 효능감(self-efficacy)자기 존중(self-respect)을 꼽는다. 자기 효능감이 능력에 대한 믿음이라면, 자기 존중은 자신의 가치에 대한 확신이다.

 

브랜든은 자존감을 결정짓는 여섯 가지 실천 방식여섯 기둥(또는 계단)으로 비유한다. 그중 첫 번째 실천 방식은 의식하기(consciousness). 의식하며 산다는 것은 자신이 어떤 능력을 갖췄든 간에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목표를 이루기 위한 삶을 말한다. 이런 사람들은 내면을 관찰하고 들여다본다. 자신의 가치관과 목표에 부합하지 않는 행동을 하면 스스로 개선한다.

    

 

 

 

 

 

 

 

 

 

 

 

 

 

 

* 김태형 가짜 자존감 권하는 사회(갈매나무, 2018)

 

    

 

반면 경계해야 할 자존감이 있다. 그게 바로 가짜 자존감(pseudo self-esteem)이다. ‘가짜 자존감은 겉으로는 자기 효능감과 자기 존중을 꾸며내지만 정작 그 실체는 없다. 그렇다면 자기를 속이는 가짜 자존감은 개인의 행동에서 비롯된 일탈인가? 오로지 개인의 내면을 의식하는 데 초점에 맞춘 자존감 높이는 연습을 한다고 해서 낮아진 자존감이 회복될 수 있을까? 가짜 자존감 권하는 사회는 자존감 문제로 고통받는 이유를 개인이 아닌 사회에서 찾는다. 가짜 자존감 권하는 사회는 낮아진 자존감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있으며 이 문제를 반드시 고쳐야 할 인 것처럼 떠들어댄다. 아무래도 자존감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하는 세상의 조언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강박마저 느낀다. 날마다 거울 앞에 우두커니 서서 혼잣말로 나는 행복해, 나는 정말 좋은 사람이야라고 중얼거린들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실제로는 자신의 사회적 가치가 높지 않은데도 그것을 높게 평가하는 것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 권력, 건강 등의 가치가 행복한 삶을 위한 객관적인 기준으로 강조하는 지금 이 사회에서 개인 스스로 자존감을 지켜내기란 쉽지 않다. 따라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본적인 사회적 가치관이 변하지 않는 한 자존감을 높이려는 개인적인 노력은 헛된 수고에 불과하다.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건강한 자존감을 가질 수 없다.

    

 

 

 

 

 

 

 

 

 

 

 

 

 

 

* 김진영 아침의 피아노(한겨레출판, 2018)

 

    

 

자존감 문제를 환자장애인에게 적용하면 자존감 연습은 그들을 위한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픈 환자의 몸은 장기 근무를 피하는 게으른 몸으로 낙인찍히고, 늘 노동시장에서 배제된다. 암 투병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몸과 정신을 관통하는 크고 작은 외부의 시선들을 단상 형식으로 기록한 김진영 철학아카데미 대표암 환자로서 살아가는 자신의 무기력한 정체성을 의식하는 듯한 글을 남겼다.

 

 

이런 무기력 상태는 어리석다.

무엇이든 노동이 필요하다.

 

(아침의 피아노, 19)

       

자꾸 사람들을 피하게 된다. 위안을 주려는 마음을 알면서도 외면하게 된다. 병을 앓는 일이 죄를 짓는 일처럼, 사람들 앞에 서면 어느 사이 마음이 을의 자세를 취하게 된다. 환자의 당당함을 지켜야 하건만…‥

 

(같은 책, 30)

 

 

아프고 장애가 있는 몸은 정상/비정상을 구분하는 사회 체계안에서 타자로 살아간다. 국가와 사회는 온전한 몸을 가진 건강한 비장애인을 (노동력과 재생산 능력을 모두 갖춘) 국민에 부합하는 정상의 표준으로 만든다. 이로 인해 환자와 장애인은 이등 국민’, ‘비정상적인 타자’, ‘문제 있는 타자가 된다. ‘정상의 표준에 맞지 않는 그들은 경제적 자립 생활이 불가능하고, 재생산 능력이 없는 무기력한 존재로 차별받는다.

 

 

 

 

 

 

 

 

 

 

 

 

 

 

 

 

 

 

 

 

 

* 비사이드 콜렉티브 퀴어 페미니스트, 교차성을 사유하다(여성문화이론연구, 2018) / 전혜은 아픈 사람정체성수록

 

* 장애여성공감 어쩌면 이상한 몸(오월의봄, 2018)

 

    

 

거대한 의료 시스템은 질병이나 장애 유무 여부에 상관없이 개인에게 건강이라는 이름으로 몸의 정상화를 요구한다. 비장애인은 의료기술에 의존하면서 자신의 몸이 정상임을 인정받고 싶어 한다. 의료 시스템을 주도하는 의사와 의학 전문가들은 환자와 장애인에게 조금 더 나아질 수 있을 거라는 기약 없는 희망, 조금 더 노력하면 정상인(건강한 비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기대감을 심어준다. 그들의 위안은 장애를 고유한 삶의 방식으로 인정하지 않고, ‘정상인의 범주로 편입시키려는 위장 수사에 가깝다. ‘의 위치에 있는 의료 전문가는 장애 문제를 소외하고, 환자와 장애인은 의 위치가 되어 결핍된 존재’, ‘거부되어야 할 존재로 남는다. 장애를 극복하는 장애인 서사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장애인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 같지만, 이 역시 장애를 개인의 문제로 규정하는 인식을 불러일으킨다. ‘장애 극복인 장애인의 몸이 의 비장애인의 몸과 비슷하게 만드는 과정이다. 인간의 한계를 극복한 장애인서사의 이면에는 장애인의 몸을 비정상적인 을로 바라보는 의 시선이 전제되어 있다.

 

퀴어 이론과 페미니즘 장애학을 연구한 전혜은환자장애인이라는 호칭이 아프거나 몸이 불구인 사람들의 정체성을 온전히 설명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그녀는 자신의 글 아픈 사람정체성에서 퀴어 이론과 장애학 이론을 접목시켜 아픈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탐색하는 시도를 선보인다. 그녀가 제안한 아픈 사람정체성은 장애인과 환자들이 받는 차별 및 부정적 낙인 이미지를 덜어내고, ‘정상이라는 표준에 가려져야했던 그들의 질병 · 장애 경험을 한층 더 부각시켜준다. 따라서 아픈 사람정체성은 자신의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 악셀 호네트 인정 투쟁(사월의책, 2011)

* 이현재 악셀 호네트(커뮤니케이션북스, 2019)

* 철학아카데미 처음 읽는 독일 현대철학(동녘, 2013) / 문성훈 악셀 호네트의 인정 이론과 병리적 사회비판수록

    

 

 

아픈 사람정체성을 가진 사람들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으려면 아픈 몸장애의 몸을 그대로 인정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한 사회로 발전하게 되면 아픈 사람정체성을 가진 사람은 질병 · 장애 경험을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으며 타인과 관계를 맺는 주체가 된다. 독일의 철학자 악셀 호네트(Axel Honnet)가 주장한 대로 내 경험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삶은 개인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서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때 건강한 자아가 형성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긍정적 자기의식과 정체성, 그리고 건강한 자존감을 가지기 위해 인정 투쟁(recognition struggle)을 한다. 장애인들이 몸을 차별하는 권력과 크고 작은 편견들에 도전하여 자신들의 경험 서사를 알리는 것 또한 인정 투쟁의 한 방식이다. 장애인을 소외시키는 차별과 배제의 권력은 그들의 삶과 목소리를 은폐하고 침묵시킬 뿐만 아니라 그들의 정체성과 자존감마저 박탈시킨다. 장애가 자존감이 될 수 있는 가치가 되려면 장애인들에게 어떻게 나를 사랑한 것인가[]를 묻는 자기의식을 강요해선 안 된다. 바꿔야 할 사람은 장애인이 아니라 비장애인이다. 비장애인은 다양하고 복잡한 장애인의 정체성과 경험 서사가 어떤 것인지 의식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 너새니얼 브랜든의 책 자존감의 여섯 기둥의 부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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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3-18 13: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3-18 16:12   좋아요 0 | URL
돈의 힘 앞에 장사 없습니다... ^^;;
 
우리는 처녀성이 불편합니다 - 젠더불평등을 만든 처녀막의 무의미성
조너선 앨런.크리스티나 산토스.아드리아나 슈파르 지음, 이혜경 옮김 / 책세상 / 2019년 1월
평점 :
절판


 

 

 

주로 프로이트(Freud)의 정신분석학을 이야기하면 ‘리비도(Libido)’라든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와 같은 것을 많이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에 못지않게 알아두어야 할 개념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남근 선망(penis envy)이다. 프로이트는 리비도, 즉 성적 충동이 유아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의 중요한 본능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했다. 그는 유아기와 유년기에 일어난 사건이 평생을 좌우하며 남자아이는 어머니에게 성욕을, 여자아이는 남근 선망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러나 ‘남근 선망’은 다음 세대 정신분석학자들에 의해 비판받았다.

 

프로이트의 ‘남근 선망’은 여자의 성적 만족이 남자에 의존한다는 의미인데, 오늘날 연구 결과에 따르면 오히려 여자는 클리토리스에서 오르가슴을 느낀다. 프로이트와 그의 추종자들은 클리토리스의 중요성을 축소했다. 클리토리스를 무시한 프로이트에서 볼 수 있듯이 남성들은 클리토리스로 오르가슴을 느끼는 여성, 즉 자위하는 여성은 ‘남근을 가진’ 남성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불감증 환자로 간주해 왔다. 클리토리스가 여성 쾌락의 중심으로 우뚝 서면 성적 파트너로서의 남성은 필요가 없어진다. 그리하여 클리토리스는 남근 중심의 남성성을 위협하는 ‘이빨 달린 질(vagina dentata)신화와 결부되어 드러난다.

 

남성들은 지난 수천 년간 여성성을 둘러싼 각종 금기를 설파하느라 무수한 말을 쏟아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 월경에 대해 말하는 것에 대한 금기와 터부 문화가 남아 있다. 여성이 생리를 하면서 나오는 피는 불결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처녀와 처녀 아닌 여성을 구분하게 만드는 처녀성(처녀막, 처녀 혈)은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처녀성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우리는 처녀성이 불편합니다》는 처녀성에 둘러싼 ‘문화적 환상’들을 분석한 8편의 논문을 모은 책이다. 이 책의 원제는 ‘처녀 선망(Virgin Envy)이다. 대부분 남성은 순결한 처녀를 애정의 대상으로 원한다. 또 어떤 여성은 좋은 남성과의 첫날밤을 위해서 처녀성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은 처녀성, 처녀막 없이 살면 안 되는가? 그게 꼭 있어야 할까? 이 말에 처녀 선망에 사로잡힌 남성과 여성들은 놀라움과 의심이 반반 섞인 반응을 보일 것이다. 처녀막이 없는 여자는 ‘섹스를 밝히는 여자’, ‘헤픈 여자’라는 말을 듣게 된다. 처녀막 존재 여부는 ‘처녀 감별법’ 또는 ‘헤픈 여자 감별법’의 기준이 된다. 처녀성과 처녀막에 대한 편견을 믿는 사람들은 이성과의 첫 성 경험, 신혼여행의 첫날밤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여성에게 남성이 페니스를 집어넣으면 질 입구에 있는 처녀막이 찢어지게 되는데 그때 나오는 피가 여성이 처녀임을 증명해준다. 그래서 보수적인 성 문화에 영향을 받으면서 자란 사람들은 여성이 결혼 전까지 반드시 처녀성을 지켜야 한다는 의식이 강하다. 만약 처녀성을 상실하면 결혼의 결격 사유가 되기도 한다. 이렇듯 처녀 선망은 남근 선망 못지않게 어디서든 발견할 수 있는 ‘문화적 환상’이다.

 

이 책의 1부에 속한 첫 번째 논문과 두 번째 논문은 문학작품 속에 묘사된 ‘처녀성 검사’를 비판적으로 분석한 것이다. 처녀성이 귀한 대접을 받은 시기는 중세 유럽이다. 이 시기에 나온 로맨스 문학 작품들에서 처녀성은 여성의 으뜸 덕목으로 언급된다. 남성 작가들이 묘사한 처녀성 검사는 남성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해온 주제로만 그치는 게 아니다.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통제하게 만드는 편견으로 재생산된다. 문학에서만 표현 가능한 처녀 선망과 그에 따른 문화적 환상은 오늘날 서구 로맨스 문학의 한 장르인 ‘오리엔탈 셰이크 로맨스 소설(Orientalist Sheikh romance novel)로 이어진다. ‘셰이크’는 이슬람 사회에서 지위나 명망이 높은 남성을 일컫는 호칭이다. 오리엔탈 셰이크 로맨스 소설에 중동의 귀족이나 왕족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서양의 여주인공이 꼭 등장한다. 여주인공은 중동의 처녀성 검사를 받게 되는 일종의 시련을 경험하며, 자신이 사랑하는 중동 남자를 위해 스스로 처녀성을 바친다. 처녀성을 상실한 여주인공은 ‘아내’, ‘어머니’라는 정체성을 부여받게 된다. 첫 번째 논문은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의 틀 안으로 구겨 넣은 현대 로맨스 문학작품의 처녀성이 ‘문화적 환상’이라는 점을 밝힌다.

 

두 번째 논문은 중세 로맨스 문학이 유행하던 시기에 만들어진 ‘처녀막 환상’과 처음으로 성 경험을 한 여성이 직접 기록한 ‘처녀성 상실 고백 장르’의 처녀성을 비교하여 분석한다. 문학작품 속 여주인공은 처녀성을 상실하는 순간, 처음으로 쾌락에 눈을 뜬다. 그러나 현실의 여성은 그렇지 않다. 첫 경험을 한 여성들은 평생 잊지 못할 고통을 느낀다. 문학작품 속 처녀성은 ‘쾌락의 세계로 초대하는 문’으로 묘사되지만, 그것은 실제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설명하는 데 전혀 관련 없는 남성 중심적 사고가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하다.

 

 

 

 

 

 

 

 

 

세 번째 논문은 영화로도 유명한 뱀파이어 로맨스 소설 《트와일라잇(Twilight)에서 구현된 처녀성과 그것에 관해 가치를 부여해온 미국 특유의 금욕주의적 성 문화를 분석한 글이다. 이 논문을 쓴 글쓴이는 《트와일라잇》에 ‘처녀성 상실’을 ‘혼외 성관계의 위험성’으로 보는 보수적인 성 문화가 반영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네 번째 논문은 텔레비전 시리즈 <트루 블러드(True Blood)>에 등장하는 뱀파이어 제시카 햄비(Jessica Hamby)의 ‘재생하는 처녀성’을 비판적으로 분석한 글이다. 글쓴이는 ‘뱀파이어 여성’의 재생하는 처녀성 역시 남성을 위해 종속되는 ‘생물학적 여성’의 처녀성의 운명과 비슷하다고 주장한다.

 

책 3부에 속한 두 편의 논문은 ‘퀴어 이론(queer theory)’의 관점으로 분석한 처녀성을 주제로 한 글이다. 처녀성은 ‘생물학적 여성’의 섹슈얼리티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시스젠더(cisgender) 남성, 동성애자, ftm(female-to-male) 트랜스 남성도 처녀일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의 3부 제목은 ‘남자도 처녀다, 퀴어 남성의 처녀성’이다. 이 책의 집필진들은 퀴어 이론적 관점으로 젠더퀴어(genderqueer, LGBT)의 처녀성 경험을 분석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레즈비언이나 mtf(male to female) 트랜스 여성의 처녀성에 대한 연구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국내 퀴어 연구가, 퀴어 페미니스트들이 관심을 가져볼 만한 주제이다.

 

《우리는 처녀성이 불편합니다》는 처녀성 신화에 대한 편견을 단숨에 날려버리는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 그동안 미디어에 의해 생산 · 유통되어 온 처녀성 신화가 문학이나 예술이 만들어 낸 허상임을 확인할 수 있다. 처녀성은 ‘처녀막’과 전혀 관련이 없다. 그리고 처녀성과 처녀막은 처녀를 감별하는 기준이나 근거가 아니다. ‘처녀막’은 여성의 몸을 설명하는 남성 중심주의적 관점이 반영된 이름이다. 처녀막 대신에 ‘질 막’, 또는 ‘질 둘레 막’으로 써야 한다. 사실 바뀌어야 할 것은 여성의 몸 또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 사회의 규정이다. 처녀성 신화는 여성의 몸, 섹슈얼리티 경험을 설명하는 서사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이 사회, 특히 일부 남성들은 ‘처녀성 없는 여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처녀막이 상실되지 않은 여성이 ‘처녀의 정체성’을 유지해주는 정상적인 섹슈얼리티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처녀성 신화 자체가 남녀 모두를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 애인이나 배우자의 처녀성 상실을 의심하는 남자들, 그런 남자들의 의심이 두려워서 ‘이쁜이 수술(처녀막 재생 수술)’을 하는 여자들. ‘실체가 없는 것’ 하나 때문에 서로서로 눈치 보는 관계가 계속되는 한, 남녀는 파국의 종착점을 향해 달린다. 이 파국을 피하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 현실과 동떨어진 처녀성 신화를 폐기하는 일이다.

 

 

 

 

 

※ Trivia

 

 

* 책 19쪽에 글쓴이의 이름인 크리스티나 산토스(Christina Santos)의 영어 철자가 잘못 인쇄되었다. ‘h’가 빠진 ‘Cristina’로 적혀 있다.

 

 

* 역사 속 성인를 연상시키는 시각적 언어를 참조하여, 저먼은 세바스티안의 이야기를 재창조한 후 그를 종교적 금욕에 몰두한 인물로 변형시킨다. (22쪽)

 

‘성인을’로 고쳐야 한다.

 

 

* 제시카의 영원한 뱀파이어 처녀성은 ‘바람직한’ 여성이란 주로 외적으로 규제되는 존재라는 생각을 강화면서, 여성의 성적 정체성, 경험 혹은 욕망을 자유분방하고 솔직하게 표출하지 못하도록 억제한다. (123쪽)

 

‘강화하면서’의 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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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방에게 ‘재미있는 책’을 추천하는 일은 정말 어렵다. 상대방이 생각하는 ‘재미’의 조건이 무엇인지 잘 몰라서 책을 추천하지 못한다. 나는 책을 추천하는 것보다 책을 ‘추천받는’ 것을 좋아한다. 물론 상대방으로부터 추천받은 책들 전부 다 읽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 책의 제목과 저자, 출판사는 꼭 기억해둔다. 꼭 한 번은 그 책을 읽어야 할 순간이 온다. 상대방이 계속 재미있는 책을 추천해달라고 조르면, 나는 진담 반 농담 반으로 이렇게 대답한다.

 

 

 “평소에 본인이 읽고 싶다고 생각한 책이 있어요? 정말로 그 책이 있다면 그게 당신이 원하는 ‘재미있는 책’이에요.”

 

 

‘재미있는 책’을 만난다는 건 ‘모 아니면 도(all or nothing)’다. 한 번 보고 책이 재미있으면 다행이고, 반대로 그렇지 않으면 주저 없이 책을 덮으면 된다. 간혹 상대방에게 책을 추천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나는 상대방에게 ‘서점이나 도서관에 직접 가서 책을 한 번 살펴보라’고 당부를 한다. 그러니까 내가 추천한 책을 온라인 서점의 ‘장바구니’에 담되, 바로 주문하지 말라는 것이다. 책 주문은 그 책이 어떤지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난 뒤에 해도 늦지 않다.

 

 

 

 

 

 

 

 

 

 

 

 

 

 

 

 

 

* 하나다 나나코, 기타다 히로미쓰, 아야메 요시노부

《책방지기가 안내하는 꿈의 서점》 (앨리스, 2018)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인데, 상대방에게 책을 추천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있다. 그게 바로 ‘죽은 자’를 위해 책을 추천하는 일이다. 말도 안 되는 일로 보이겠지만, 실제로 이런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서점이 있다. 일본에 있는 ‘겟쇼쿠 서점(月蝕書店)’이다. 특색 있고 개성 있는 22개의 일본의 중소 서점을 소개한 《책방지기가 안내하는 꿈의 서점》이라는 책에 첫 번째로 나온다. ‘겟쇼쿠’는 ‘월식을 뜻한다. 이 서점 주인의 주 고객은 고인이다.

 

 

단도직입적으로 여쭤보겠습니다. 대체 ‘죽은 자를 위한 추천 도서’라는 게 무엇입니까?

간단히 말씀드리면, 돌아가신 분을 위한 책을 준비해서 제안하는 일입니다. 묘소나 불단에 꽃이나 고인이 좋아했던 음식을 올리잖아요. 그것을 책으로 대신하는 것이지요.

 

고인이 자주 읽던 책을 공양하는 건가요?

아니요. 그것과는 조금 달라요. 고인의 장서나 생전에 좋아했던 물건 등을 보고 그분이 살아계셨으면 분명 샀을법한 신간이나 장서와 관련 있는 책을 추천하는 겁니다.

 

 

(《책방지기가 안내하는 꿈의 서점》 9, 11쪽)

 

 

서점 주인은 고인의 장서나 유품을 확인한 뒤에 고인이 좋아할 만한 책을 고른다. 책은 고인을 위한 공양품(供養品)이다. 이 일이 쉬워 보일지 모르지만, 직접 해보면 전혀 다를 것이다. 자기 일을 충실히 하려는 서점 주인 입장에선 나름대로 생각을 많이 할 것이다. 서점 주인은 고인이 가지고 있던 장서나 유품을 통해서만 고인이 샀을 법한 책을 추정하는데, 고인의 장서가 아닌 책을 생전에 고인이 읽지 않은 책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책을 사지 않고도 서점 혹은 도서관에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고바야시 서점(小林書店)을 운영하는 고바야시는 자신이 직접 쓴 서평으로 손님에게 판매할 책을 추천한다. 그가 쓴 서평도 상품이다. 서평 한 편당 300엔이다.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약 3,000원이다. 서평만 따로 살 수 있다. 그가 남긴 서평만 해도 수천 편이 넘는다. 나도 제법 서평을 많이 썼지만, 고바야시처럼 내가 읽은 책을 상대방에게 추천하기 위해서(내가 읽은 책을 구매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서평을 쓰는 건 아니다. 나는 ‘이런 책이 있다’는 식으로 불특정 다수에게 알리고 싶어서 서평을 쓴다. 내 서평이 상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상품 가치가 어느 정도 있는 서평을 쓰려면 책 구매자들이 선호하는 책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구매자의 관심을 끌도록 맛깔나게 잘 써야 한다. 나는 그런 글을 쓸 능력이 없고, 그렇게 쓸 생각은 없다.

 

나는 널리 알려지지 못한 채 독자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책, 죽은 거나 마찬가지인 절판본을 알리는 서평을 쓰는 것을 좋아한다. 즉 내 서평은 ‘죽은 책을 위한 글’이다. 서평을 쓰는 나 자신을 직업으로 비유하면 ‘묘비를 만드는 사람’이다. 죽은 책을 기억하기 위해 묘비명과 같은 글을 쓴다.

 

 

 

 

 

 

 

 

 

 

 

 

 

 

 

 

 

 

* 천상병 《천상병 전집: 시》 (평민사, 2018)

 

 

 

 

 

 

 

 

 

 

 

 

 

 

 

 

 

* 크리스티나 로세티 《로세티 시선》 (지만지, 2013)

* [절판] 김천봉 옮김 《빅토리아 여왕 시대 2》 (이담북스, 2011)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픽션들》 (민음사, 2011)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픽션들》 (민음사, 1994)

 

 

 

 

만약에 내가 죽으면 공양품이 될 책은 어떤 것일까, 상상해본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젖는 종이책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주1] 하늘에 지내면서 읽을 만한 책이 뭐 있을까? 과연 이승 너머에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가 단편 『바벨의 도서관』에 언급한 ‘천국’과 같은 도서관이 있을까? 어차피 사람은 죽으면 어떤 것을 ‘가질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리니 책 공양은 안 받는 걸로…‥.

 

 

 내가 죽거든, 사랑하는 이여,

 나를 위해 슬픈 노래 부르지 말아요.

 내 머리맡에 장미도 심지 말고,

 그늘 드리우는 책도 놓지 말아요.

 내 무덤 위에 있는 푸른 풀이

 소나기와 이슬방울에 젖도록 내버려 두세요.

 그리고 당신이 기억하고 싶으면, 기억해 주세요.

 또 당신이 잊고 싶으면, 잊어 주세요. [주2]

 

 

 

 

 

[주1] 천상병의 시 『귀천』 1연 구절을 변형했음. 원문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주2] 크리스티나 로세티(Christina Rossetti)의 시 「내가 죽거든, 사랑하는 이여」 1연 구절을 변형했음. 원문은 ‘내가 죽거든, 사랑하는 이여, / 나를 위해 슬픈 노래 부르지 말아요. / 내 머리맡에 장미도 심지 말고, / 그늘 드리우는 사이프러스도 심지 말아요. / 내 무덤 위에 있는 푸른 풀이 / 소나기와 이슬방울에 젖도록 내버려 두세요. / 그리고 당신이 기억하고 싶으면, 기억해 주세요. / 또 당신이 잊고 싶으면, 잊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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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9-03-15 23: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되도록 두껍지 않고 재밌게 술술 읽히는 책을 선호하고 이런 책을 추천하려고 합니다.
한 가지 조건이 더 있는데 깨달음을 주는 것. 게다가 문장까지 좋으면 금상첨화.
요즘 단편소설에 빠졌어요. 주로 장편을 많이 읽었는데 찾아보니 빼어난 단편이 많더군요.
단편 독서의 장점은 좋은 작품은 한 번 더 읽을 수 있다는 거예요.

고인이 좋아할 법한 책을 찾는 것, 쉽지 않겠습니다. 고인이 좋아하던 작가의 신간이면 되려나요?

죽은 책을 위한 님의 서평 쓰기. 의미있네요. 응원합니다!!!

cyrus 2019-03-18 11:58   좋아요 0 | URL
짧은 글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분량이 많은 책을 끈덕지게 읽지 못하겠어요. 책에 몰입이 되지 않아요. 그렇다 보니 저도 단편소설이나 짧은 분량의 책을 찾게 됩니다. ^^;;

고인을 위한 책을 고를 수 있는 쉬운 방법이 있었네요. 맞아요. 고인이 생전에 좋아했던 작가의 신작 도서를 공양품으로 바치면 되겠어요. ^^

카르페디엠 2019-03-17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책 아주 재미있게 보았어요. 일본의 서점문화가 이렇게 발전했나싶기도 하고..

cyrus 2019-03-18 12:00   좋아요 0 | URL
지난 달 모임에 도현 쌤이 <꿈의 서점>이 재미있다고 말씀하셔서 읽게 되었어요. 그 때 성은 쌤은 <아침의 피아노>를 추천하셨고요. 두 권 모두 좋았어요.

쌤 댓글을 보자마자 ‘우주지감’ 카페에 접속했는데, 이번 달 모임 신청 끝났더군요... ㅠㅠ

Angela 2019-06-18 1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억하고 싶으면 기억하고, 잊고 싶으면 잊으라는 말은 기억해달라고 매달리는것보다 더 강열하네요~^^
 

 

 

 

‘인간 같은 기계’ 혹은 ‘기계 같은 인간’이 등장하는 시대가 올까. 명확한 답변을 내리기 어렵지만, ‘가능하다’는 낙관론이 확산하고 있다. 확실한 것은 인공지능(AI)을 넘어선 초인공지능(Artificial Super Intelligence, 이하 ‘ASI’)의 등장은 시간문제라는 점이다. 초인공지능은 인간의 지적 수준을 넘어선 초월적인 지능이다. 그것은 생물공학과 결합해 생물 또는 기계의 형태가 될 수도 있고, 컴퓨터처럼 스스로 업그레이드가 가능한 인공두뇌로 구현될 수 있다. 미래의 인류는 우리 자신보다 더 영리한 존재와 마주치게 될 것이다.

 

 

 

 

 

 

 

 

 

 

 

 

 

 

 

 

 

 

* 닉 보스트롬 《슈퍼 인텔리전스》 (까치, 2017)

* 레이 커즈와일 《특이점이 온다》 (김영사, 2007)

 

 

 

자연선택의 틀 안에서 이뤄지던 진화를 인간이 직접 결정하는 날이 멀지 않았을지 모른다. 인류가 과학기술을 이용해 스스로 진화한다는 주장은 이미 20년 전에 등장했다. 영국 옥스퍼드대학 철학과 교수 닉 보스트롬(Nick Bostrom)이 주도해 주창한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이다. 《특이점이 온다》의 저자인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은 사이보그화된 트랜스휴먼(transhuman)의 등장을 예고하면서 급격한 기술 변화로 인류의 삶이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바뀌는 시점(singularity, 특이점)이 올 거라고 말한다.

 

 

 

 

 

 

 

 

 

 

 

 

 

 

 

 

 

 

 

 

 

 

 

 

 

 

 

 

 

 

 

* 유발 하라리, 재레드 다이아몬드, 닉 보스트롬 외 《초예측》 (웅진지식하우스, 2019)

* 유발 하라리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김영사, 2018)

* 유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 (김영사, 2017)

*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김영사, 2015)

 

 

 

다른 한편에선 인간이 초인공지능에 밀려 무력한 존재로 전락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유발 하라리(Yuval Harari)는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의 시대는 끝나고, ‘호모 데우스(Homo Deus)의 시대가 될 것으로 예측한다. 진화 끝에 살아남은 호모 사피엔스가 스스로 그 역사의 막을 내리고 ‘신이 된 인간(호모 데우스)’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빛의 속도로 진보하는 기술은 인간을 더 이상 한계를 갖지 않는 신으로 만들어 버리고, 호모 데우스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 낸다. 엄청난 양의 데이터가 인간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데이터 교(Dataism)다. 하라리는 데이터를 신처럼 받드는 한편 인간 스스로 자유의지를 부정하고, 빅 데이터와 알고리즘의 분석 결과에 의존하는 미래 사회를 묘사하기 위해 이런 용어를 만들어냈다.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서는 모든 권위가 인간으로부터 빅 데이터와 알고리즘으로 넘어가는 ‘디지털 독재’를 우려한다. 최근에 나온 학자들의 대담집 《초예측》에서도 하라리는 인간과 기술의 진화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높인다. 인공지능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잃고 ‘쓸모없는 계층(useless class)으로 전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류 3부작(《사피엔스》, 《호모 데우스》,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서 누누이 밝힌 기존 입장을 재차 강조했다. 《초예측》의 대담자로 참여한 닉 보스트롬은 트랜스휴먼의 시대는 필연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인공지능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로랑 알렉상드르, 장 미셸 베스니에 《로봇도 사랑을 할까》 (갈라파고스, 2018)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생물학적인 인간은 기계에게 패배할 운명이라며 인간이 기계에게 추월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기술과 결합해 ‘증강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급진적인 시나리오 때문에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특이점’에 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로봇도 사랑을 할까》는 트랜스휴머니스트와 트랜스휴머니즘을 비판하는 철학자가 열두 가지 주제를 놓고 벌인 (토론을 방불케 하는) 대화록이다. 트랜스휴머니스트 로랑 알렉상드르(Laurent Alexandre)는 트랜스휴머니즘의 흐름을 빨리 적응하는 나라일수록 세계 질서를 선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트랜스휴머니즘이 우리 삶을 편리하게 해줄 것으로 믿는다. 이렇다 보니 그는 트랜스휴머니즘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안이한 인식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의 장밋빛 전망은 트랜스휴머니즘의 등장으로 서서히 부활하기 시작하는 우생학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인간은 인간의 역량을 뛰어넘은 인공지능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철학자 장 미셸 베스니에(Jean-Michel Besnier)는 이 트랜스휴머니스트의 낙관론에 적절히 제동을 걸어 트랜스휴머니즘으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윤리적 문제를 환기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나온 트랜스휴머니즘 찬반 입장들을 살펴보면 늘 반복되는 한계가 있다. 트랜스휴머니즘에 대해 고민하고 토론하는 장에 ‘여성’과 ‘장애인’, ‘노년층’, ‘성소수자’는 배제되어 있거나 ‘주변화된 존재’인 것처럼 언급된다. 대부분 트랜스휴머니스트와 그들을 비판하는 학자는 ‘남성’, ‘시스젠(cisgender)’이며, 그들이 트랜스휴머니즘 담론을 독점하고 있다. 트랜스휴머니즘을 비판적으로 보는 유발 하라리는 동성애자이지만, 그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공개했을 뿐, 트랜스휴먼의 시대가 성소수자의 삶에 미칠 영향에 대해 진지하게 언급한 적이 없다.

 

 

 

 

 

 

 

 

 

 

 

 

 

 

 

 

 

 

 

* 도미니크 바뱅 《포스트휴먼과의 만남》 (궁리, 2007)

 

 

 

《포스트휴먼과의 만남》은 트랜스휴먼, 더 나아가 순수한 생물학적 인간이 완전히 사라진 ‘포스트휴먼(posthuman)의 미래 사회 모습을 보여주는 책이다. 이 책의 부제는 ‘포스트휴먼 1세대로 살아갈 바로 지금 살아있는 세대를 위한 안내서’인데, 단점이라면 이 책은 ‘포스트휴먼 1세대로 살아갈 여성’에게 전혀 유익하지 않다는 점이다. 여성의 건강권에 대해서 단 한 줄도 언급 없이 ‘시험관 아기’ 시술을 낙관적으로 전망하고 있다. 그리고 유전공학 기술로 만들어진 여성의 가슴을 ‘멋진 발명품’, ‘사춘기 남학생들을 위한 차세대 수음 보조기’라고 언급한다.

 

 

 

 

 

 

 

 

 

 

 

 

 

 

 

 

 

 

 

* [품절] 척 팔라닉 《질식》 (랜덤하우스코리아, 2009)

 

 

 

척 팔라닉(Chuck Palahniuk)의 소설 《질식》의 일부 장면을 인용하면서 포스트휴먼을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존재로 상상한 내용은 불쾌감을 유발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삶으로부터 최대한의 흥분감을 맛보고 싶어한다”고 척 팔라닉은 자신의 소설 『질식』에서 단언하다. 그는 작품 속에 퇴폐적이면서 약간 정신이 돈 듯한 인물들을 등장시킨다. [중략] 『질식』에서는 비행기와 공항에서 자기들 시간의 대부분을 보내는 쿨하스적인(건축가 렘 쿨하스를 가리키는 말로 출장이 잦음을 빗대어 하는 말―역주) 국제적 사업가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러시안 룰렛에 비견할 수 있는 섹스놀이를 고안해낸다. 비행기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잠그지 않고 기다리다가 제일 처음 화장실 문을 밀고 들어온 승객에게 자신을 제공하는 것이 이들이 생각해낸 놀이다. 이들은 “아무 곳도 아닌 허공을 날아 히드로 공항에서 요하네스버그 공항에 도착하기까지 14시간 동안 적어도 10번 정도의 모험을 즐기며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낀다.” 이는 마치 낚시를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당신이 남자라면 가장 좋은 방법은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 당신 거시기를 공중에 내놓은 다음 당신 거시기가 정오를 가리키게 될 때까지 열심히 혼자서 작업을 하라. 그런 다음 가만히 기다리면 된다. 더 이상 해야 할 일은 없다. 플라스틱 변기에 앉아 그럴 듯한 모험이 시작되기를 기대하면서 기다린다면 훨씬 기분이 나을 것이다.” “아예 문을 열고서 당신 마음에 드는 사람이 들어오면 그때 볼일을 보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이 놀이에서 가장 흥미를 돋우는 대목은 도전과 위험 감수로 인하여 아드레날린의 분비가 왕성해진다는 점이다. [중략]

  척 팔라닉 소설의 주인공들은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버린 사람들이며, 자신들의 실존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보겠다는 생각을 단념한 지 오래다. [중략] ‘답이 없다는 게 정답’임을 알기 때문에 이들은 스스로의 삶을 가지고 끊임없이 채널 돌리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들은 삶을 최대한 밀도 있는 순간들의 연속으로 만들 수 있는 놀이를 고안한다. 그러므로 이들의 삶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를 모델로 삼아 구축한 것이나 다름없다.

 

(《포스트휴먼과의 만남》, 194~196쪽)

 

 

 

《포스트휴먼과의 만남》을 쓴 저자는 소설에 묘사된 ‘범죄 행위’에 가까운 섹스 놀이를 포스트휴먼의 시대에 일어날 법한 상황으로 제시한다. 심지어 포스트휴먼 시대의 ‘게이’를 ‘섹스에 혈안이 된 인간과 동물의 잡종’이라고 묘사한다. 동성애자를 ‘변태성욕자’로 보고 있다.

 

 

 신종 게이는 예전처럼 남자와 여자의 잡종이 아니라 인간과 동물의 잡종으로 섹스에 혈안이 된 자들이었다. 예를 들면 성인 남자(여자도 가능하다)와 카멜레온이 반반씩 섞여 긴 혀의 움직임이 매우 유연한 자들이 여기 속한다. ‘모피로 된 비너스’, 다시 말해서 온 몸이 모피로 덮인 여자들도 있다.

 

(《포스트휴먼과의 만남》, 228쪽)

 

 

동성애자는 도덕적으로 타락하여 쾌락만을 좇는 변태성욕자가 아니다. 유발 하라리가 이 대목을 본다면 무슨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성의 변증법》 (꾸리에, 2016)

 

 

 

《로봇도 사랑을 할까》의 장 미셸 베스니에는 인공 자궁을 여성 해방에 기여하는 발명품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던 철학자 앙리 아틀랑(Henri Atlan)을 언급한다. 그러나 1970년대에 이미 여성 해방을 위한 획기적인 수단으로 인공 자궁의 실현 가능성을 언급한 여성이 있으니 그녀가 바로 슐라미스 파이어스톤(Shulamith Firestone)이다. 1970년에 그녀는 자신의 책 《성의 변증법》에 인공 자궁에서 태아를 잉태해 남성도 임신과 출산을 할 수 있게 한다고 주장했다. 로랑 알렉상드르는 인공 자궁 기술을 예찬하면서도(그는 미래지향적인 모든 과학 기술을 찬양한다) ‘남자도 임신과 출산을 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임신과 출산 경험이 없는 ‘남성’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인공 생식’ 기술의 등장에 지나치게 열광한다. 그들은 인공 생식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는 ‘여성의 몸’을 등한시한다. 그리고 ‘인공 생식’ 기술이 등장하면 ‘불임’을 ‘치료해야 할 문제’로 보게 만든다. 모든 인간에게 생식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불임은 무조건 치료해야 할 문제인가? ‘불임은 무조건 고쳐야 한다’는 식의 발상은 불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여성의 몸을 ‘열등한 몸’으로 규정하면서 배제한다.

 

트랜스휴먼 시대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하려면 우리 삶을 관통하는 젠더, 연령, 계층, 장애 유무 등의 여러 가지 사회적 · 문화적 배경들을 고려하는 포괄적인 합의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미래를 향한 기술 발전의 최우선 목표는 모든 인간에게 삶의 성취를 제공하는 일을 만들어내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다. 특정한 인간을 주변화하고 소외하는 트랜스휴머니즘이 장악한 미래는 인간 존재의 존엄성 자체가 쓸모없어진 디스토피아(dystopia)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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